금오산(金烏山, 730m) - 천태산(天台山, 630.9m)

 

산행일 : ‘14. 5. 31()

소재지 :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과 양산시 원동면의 경계

산행코스 : 안촌마을565금오산숭촌고개천불사천태공원 갈림길천태산웅연폭호천태사용당교(산행시간 : 4시간10)

같이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색 : 양산의 명산(名山) 하면 대부분 만어산과 구천산, 그리고 천태산을 꼽는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높은 금오산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편이다. 어쩌면 산꾼들의 접근이 어려웠던 탓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금오산에 들게 되면 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괜찮은 산이다. 육산(肉山)과 골산(骨山)이 알맞게 섞여있고, 특히 정상에서 송촌고개로 향하는 능선의 암릉은 자못 빼어나기까지 하다. 그리고 천태산은 양산의 3대 명산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이니 여기서 세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그 자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안촌마을 조금 못미처 파란물탱크가 있는 지점

대구-부산고속도로 삼랑진 I.C에서 내려와 삼랑진읍사무소 앞에서 좌회전하여 1022번 지방도를 타면 읍소재지(邑所在地)를 빠져나오자마자 오른편에 인태가든(삼랑진읍 인태리 738-10)이 보인다. 가든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지그재그로 고도(高度)를 한참 높인 후에 안촌마을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들머리는 안촌마을로 들어가지 조금 전에 왼편에 보이는 파란물탱크 근처이다.

 

 

 

파란물탱크에서 버스가 올라왔단 방향으로 100m쯤 내려간 지점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임도(林道)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삼랑진 매봉산악회에서 코팅coating)지에다 금오산의 방향표시를 해 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의 경사(傾斜)는 그다지 가파르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더위다.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니, 밀양의 오늘 기온이 35나 될 것이라고 했다. 오늘 산행은 산을 오르내리는 것 외에도 무더위와의 한판 싸움이 될 것이 뻔하다. 들머리에 들어서서 4분쯤 지나면 임도가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오른편으로 들어서서 얼마간 진행하면 또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길은 가파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걷기가 수월한 편은 아니다. 산길을 비집고 들어선 잡목(雜木)들이 자꾸만 훼방을 놓기 때문이다.

 

 

산길의 경사(傾斜)가 서서히 가팔라져 가나 싶더니 언제부턴가 제법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오르막길로 변해 있다. 거기다 산길도 임도에서 오솔길로 변해버린지 이미 오래이다. 산길의 주변은 온통 참나무 숲, 간혹 소나무가 보이기도 하지만 그저 양념의 수준일 따름이다. 그러다가 산행을 시작한지 20분 남짓 되면 능선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8분 후에는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 상에 조금 솟아올랐다 싶을 정도의 봉우리답지 않은 삼각점봉은 잡목(雜木)에 둘러싸여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이 삼각점봉이 지도상의 565m봉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565m' 표지판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각점봉에서부터는 거의 산책로 수준이다. 산길의 흔적도 또렷할뿐더러 경사(傾斜)까지 완만(緩慢)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망(眺望) 등 볼거리가 일절 없기 때문에 그저 앞만 보고 걸어야 하는 단조로운 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산길 주변에 심심찮게 산딸기가 보인다는 것이다. 새콤하고 달콤한 산딸기를 따먹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그것도 집사람이 따서 먹여주니 그 맛은 떠 뛰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 집의 기둥은 집사람이랍니다.’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일행들에게 건네는 너스레만은 아니다. 사실 집사람이 없는 우리 집이란 생각조차도 할 수가 없다. 전구 하나도 제대로 갈아 끼울 수 없는 나에게 집사람은 맥가이버(MacGyver)보다도 더 위대하게 보일 정도이니 말이다.

 

 

 

삼각점봉에서 10분 정도 더 걸으면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차량이 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넓은 임도의 가에 비닐하우스 모양의 가건물(假建物) 하나가 보인다. 주인아저씨께 물어보니 누에를 기르는 중이란다. 그러나 주위에는 뽕나무밭이 보이지 않는다. 산뽕나무 잎을 먹이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가 기른다는 누에는 고치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누에 그 자체를 약용(藥用)으로 쓰려고 기르는 중일 것이다. 아무튼 이곳에서부터 산길은 임도를 따라 이어진다. 그리고 10분쯤 후에는 고갯마루(이정표 : 금호산 0.59Km, 약수암 500m)에 올라서게 되면서 다시 임도와 헤어진다.

 

 

 

 

임도를 벗어나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서자마자 길이 두 갈래(이정표 : 금오산 0.54Km/ 약수암 0.43Km)로 나뉜다. 이 부근은 온통 푸르름을 잔뜩 머금고 있는 잣나무들 천지이다. 잣은 풍부한 영양을 자랑하는 열매 외에 나무 자체만으로도 높은 가치가 있다. 잣나무의 피톤치드(phytoncide)가 다른 나무에 비해 월등한 치유(治癒)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각종 감염 질환이나 아토피 질환 등은 물론 면역력(免疫力)을 좋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산행은 힐링(Healing)산행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잣나무 숲에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치유(治癒)하고 나면 길은 다시 짙은 참나무 숲속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바위들이 하나둘 보이는가 싶더니 15분 정도 후에는 멋진 전망바위에 서게 된다. 영남알프스의 산군(山群)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전망대(展望臺)이다. 전망대에서 정상은 금방, 5분이면 충분한 거리이다. 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10분이 걸렸다.

 

 

 

금오산 정상의 조망(眺望)은 한마디로 빼어나다. 사위(四圍)가 일망무제(一望無題)로 산의 물결이 일렁인다. 눈을 들면 영남알프스의 지붕격인 억산, 운문산, 가지산 등이 눈앞에서 물결치고, 뒤를 돌아보면 신어산과 불모산이 아른거린다. 물론 발아래에는 삼랑진양수발전소의 하부댐(dam)인 안태호가 내려다보인다. 그 뒤에는 삼랑진읍을 감싸고 흐르는 낙동강이 길게 누워있겠지만 시야(視野)가 흐린 탓인지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정상에 세워진 이정표(숭촌고개 1.6Km/ 매봉 0.87Km)가 가리키고 있는 숭촌고개를 방향으로 내려서면서 천태산으로 향한다. 정상 바로 아래에서 약수암갈림길(이정표 : 숭촌고개 1.58Km/ 약수암 0.95Km/ 금오산 0.02Km)을 만나게 되는데,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이곳에서 암릉을 타고 갈 수도 있고, 안전하게 우회(迂廻)를 하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고민을 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바닥에 깔려있는 방향표시지에 집중하다가 그만 맞은편의 암릉길을 보지 못한 탓이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요즘 한참 바위로부터 전해오는 손맛에 재미를 들이기 시작하는 집사람이 우회로를 선택할 리가 만무했을 것이다. 참고로 어느 분은 후기(後記)에서 암릉길을 통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적었다. 그러나 암릉이 끝나는 지점에 암릉으로 난 길의 흔적이 제법 또렷한 것을 보면 분명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우회(迂廻)하는 길도 만만치는 않다. 협곡(峽谷)으로 난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서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로프에 의지해 바위의 사면(斜面)을 통과해야 하는 곳도 있다. 그러나 이 암릉구간이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깎아지른 절벽(絶壁)에 낙락장송(落落長松)이 서있는 암릉을 걷는 재미가 쏠쏠할 뿐만 아니라 안태호가 눈에 쏙 들어오는 뛰어난 전망대(展望臺)들까지 곳곳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길에 바라본 금오산 정상,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이 제법 우람하다.

 

 

 

 

암릉이 끝나면 다시 완만(緩慢)한 길이 이어지고, 이어서 왼편으로 길 하나가 나뉜다(이정표 : 숭촌고개 0.65Km/ 어영동/ 금오산 0.95Km). 어영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정상에서 30분 정도가 걸리는 지점이다. 그리고 잠시(4) 후에는 임도(林道)와 만나게 된다. 왼편에 보이는 농원(農園)의 진입로로 사용되는 임도이다. 오른편에 반질반질하게 길이 난 본래의 임도가 보이고, 이정표(이정표 : 숭촌고개 0.45Km/ 금오산 1.12Km)의 방향표시도 임도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이정표를 무시하고 맞은편 능선으로 오른다. 어차피 얼마 후에는 두 길이 다시 만날 것이고, 임도를 따를 경우 그 거리가 꽤나 늘어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임도에서 7분쯤 더 걸으면 아까 헤어졌던 임도와 다시 만나게 되면서 산골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반듯한 집들이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보면 원래부터 있었던 마을은 아닌 것 같고, 새로 조성된 전원주택단지(田園住宅團地)가 아닐까 싶다. 이어서 마을 안길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임도를 따라 내려서면 잠시(2) 후에 숭촌고개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가면 삼랑진읍 숭촌마을(행곡리), 그리고 오른편은 안태로 내려가게 된다. 삼거리인 숭촌고개에서는 이정표(천태산/ 금오산등산로)가 가리키는 오른편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고갯마루에서 오른편으로 100m쯤 내려오면 또 하나의 이정표(천태산 1.49Km)가 나오는데,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이정표의 방향표시를 따를 경우 엉뚱한 곳으로 가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아무리 나아가도 천태산의 진입로가 보이지 않는다. 새로이 집을 짓거나 집터를 조성하느라 천태산으로 올라가는 길 자체를 아예 없애버린 탓이다. 나중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이정표의 방향표시를 무시하는 게 옳았다. 곧장 산자락으로 접어들면 잠시 후에는 본래의 등산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오늘의 산행이 고난(苦難)으로 변한다. 천태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지 못한 선두대장이 일단 천불사까지 진행하겠단다. 그곳에서 천태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얘기이다. 임도를 따라 20분 조금 못되게 걸으니 천불사가 나온다. 인적이 끊긴 천불사는 수목장(樹木葬)’ 사업이 주업인 모양, 여염집을 닮은 절간 뒤편에 널따랗게 수목원(樹木園)을 조성해 놓았다. 수목원 옆을 통과해 위로 올라가면서 개척 산행이 시작된다. 도대체 길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너덜겅과 잡목(雜木)들 사이를 헤치고 오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찔리거나 긁히고, 거기에다 심심찮게 따귀까지 얻어맞다보면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무더위에 지친 몸에 짜증까지 더해지니 컨디션(condition)은 최악으로 치닫고 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잡목 사이를 통과하려고 주변을 살피다보면 가끔 더덕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더덕 몇 뿌리로 위안을 삼으니 그나마 기분이 나아진다.

 

 

 

 

길 아닌 길과의 악전고투(惡戰苦鬪)를 치르다보면 25분 후에는 능선 위로 올라서게 된다. 이어서 평탄한 길을 따라 5분이 조금 못되게 더 걸으면 갈림길(이정표 : 천태산 0.24Km/ 천태공원 1.29Km/ 숭촌고개 1.2Km, 금오산 3.03Km)을 만나게 된다. 오른편은 천태공원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원래대로라면 천태산 정상을 올랐다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천태공원으로 내려가야 하겠지만, 하산지점을 천태사로 변경했기 때문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필요는 없다. 천태공원 갈림길에서 천태산 정상까지는 대략 10분 남짓한 거리, 중간에 만나게 되는 전망대에서 눈요기라도 할 경우에는 13분 정도 걸린다. 전망바위에 서면 조금 전에 지나온 천불사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인다.

 

 

 

 

둥그렇고 거대한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은 커다란 자연석(自然石)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천태공원 1.54Km/ 천태사), 삼각점, 그리고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이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난 편이다. 이곳으로 올라왔던 방향인 북서쪽을 제외한 나머지 방향은 시원스럽게 시야(視野)가 열리는 것이다. 북동쪽으로 신불산과 영축산 등 영남알프스의 준봉(峻峰)들이 펼쳐지고, 남쪽에는 삼랑진양수발전소의 상부댐(dam)인 천태호가 내려다보인다. 호수의 뒤에 보이는 산은 어쩌면 무척산일 것이다.

 

 

 

정상에서 천태사 방향으로 내려서면서 하산을 시작한다. 초반에 급하게 떨어지던 산길은 얼마 후에는 걷기에 딱 좋을 정도로 완만(緩慢)하게 변한다. 정상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내포마을 갈림길’(이정표 : 천태사 2.6Km/ 내포마을 3.1Km/ 천태공원 1.8Km/ 천태산 0.4Km)이 나오고, 곧이어 천태공원 갈림길’(이정표 : 천태사 2.5Km/ 천태공원 1.9Km/ 천태산 0.5Km), 그리고 15분 후에는 당곡 갈림길’(이정표 : 천태사 1.9Km/ 당곡/ 천태산 1.1Km)을 지나게 된다.

 

 

 

 

당곡 갈림길에서 10분 남짓 내려오면 오른편에 널따란 호수(湖水) 하나가 나타난다. ‘삼랑진양수발전소의 상부댐(dam)인 천태호(天台湖)이다. 삼랑진양수발전소는 지난 1986년 청평에 이어 국내에선 두 번째로 건설된 양수식(揚水式) 발전소(發電所)이다. 즉 상부와 하부에 각각 댐을 만들고, 전력수요(電力需要)가 적은 저녁에 하부댐에 있는 물을 상부댐으로 끌어올린 뒤 전력수요가 많은 낮 시간에 낙차(落差)를 이용하여 전기(電氣)를 생산하는 방식이다. 그 상부댐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천태호이고, 하부댐은 아까 금오산에서 내려다보이던 안태호이다.

 

 

 

천태호의 둑 옆에서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둑의 경사(傾斜)와 같은 수준으로 고도(高度)를 낮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가파른 바윗길을 내려가는 길에 옛날이라면 호랑이굴이라는 이름쯤은 충분히 얻었을법한 동굴도 지난다. 바위지대를 지나면 곧이어 물기 한 점 없는 계곡을 만나게 된다. 이어지는 산길은 계곡의 옆을 따라다가 어느 곳에서는 외나무다리를 통해 가로지르기도 한다.

 

 

 

물기 하나 보이지 않던 계곡에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땀을 씻어도 될 정도로 수량(水量)이 많아졌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바위벼랑 위로 난 길을 걸어야 한다. 왼편 발아래의 바위벼랑이 아찔하나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난간을 겸한 로프에 의지할 경우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태호에서 내려선지 25분쯤 지나면 웅연폭포(瀑布)가 나온다.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폭포 상부에서 천태사계곡을 조망(眺望)한 뒤,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오면 웅연폭포의 전경(全景)이 눈앞에 펼쳐진다. 찾아온 시기가 갈수기(渴水期)인지라 수량(水量)은 비록 보잘 것이 없지만 높이 20m가 넘는 웅연폭포는 웅장하기 비할 데 없다. 만일 수량이 많은 여름철에 찾았더라면 빼어난 자태를 구경했을 텐데 아쉽기 그지없다.

 

 

 

 

산행날머리는 천태사 앞 용당교()

폭포(瀑布)를 지나서도 산길은 계속해서 벼랑 위로 난 사면(斜面)길을 따라 이어진다. 그러다가 너덜길이 나오고 10분쯤 후에는 천태사에 이르게 된다. 위압감을 느낄 정도로 큰 암벽(巖壁)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천태사는 신라시대 원효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건물들에서는 오래된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특이한 볼거리로는 절의 뒤편 암벽 아래에 위치한 나한석굴에 놓여있는 보시용 죽염수(竹鹽水)’와 개울 건너에 있는 바위절벽에 새겨진 마애불(磨崖佛)이었다. 석굴이나 마애불 모두 조성한지 얼마 되지는 않았으니, 그것들이 지닌 고운 뜻이 가슴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천태사를 둘러보고 하늘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라는 일주문(천태산통천제일문 : 千台山通天第一門)을 나서면 용당교()를 만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전체 산행시간은 4시간10분 정도가 걸렸다. 물론 쉬지 않고 걸은 시간이다.

 

 

 

 

                                                         

 

남산(南山, 870m)

 

산행일 : ‘14. 5. 17()

소재지 : 경상남도 청도군 청도읍과 화양읍, 그리고 각남면의 경계

산행코스 : 청도읍성석빙고향교남산 13신불사 삼거리신불사 왕복헬기장남산삼면봉(840m)봉수대D사거리낙대폭포청도군청(산행시간 : 4시간20)

같이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색 : 한 마을 또는 한 지역을 지켜주는 산을 진산(鎭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의외로 남산이 이곳 청도고을을 지켜주는 진산이란다. 가지산 등 청도지역에는 이곳 남산보다 더 높고 웅장한 산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청도사람들이 그만큼 이곳 남산에 애착을 갖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남산은 신둔사라는 고찰(古刹)과 낙대폭포, 그리고 남산 13곡 등 이름난 명소(名所)들이 즐비하다. 거기다 위험하다는 생각을 조금도 할 필요가 없는 암릉 곳곳에서의 눈터지는 조망(眺望) 등 전국의 다른 괜찮은 산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이다.  

  

산행들머리는 청도읍성 터 앞 주차장(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251-2)

대구-부산고속도로 청도 I.C에서 내려와 25번 국도 밀양·청도 방면으로 우회전하자마자 나타나는 모강교차로(청도읍 원정리)에서 20번 국도로 옮겨 창녕방면으로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화양삼거리(화양읍 합천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조금만 더 들어가면 청도읍성 터가 나오고, 그 곁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산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남산계곡 주차장은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더 올라가야 되지만 이곳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하기로 한다. 모처럼 찾아온 청도에서 선현(先賢)들의 발자취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차에서 내리면 바로 앞이 청도읍성(淸道邑城 :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이다. 읍성(邑城)이라고 해서 한 바퀴 둘러볼 것까지는 없다. 성 안에 들어가 볼 것이 아니라면 눈앞에 보이는 100m도 채 안 되는 복원(復原)된 성벽(城壁)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청도읍성은의 성벽은 길이 1,570(1.9), 높이 55(1.65m)인데, 축조(築造) 년대는 1590(선조 23)에 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에 완공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동··북문이 소실(燒失)되는 등 크게 파손되었다. 그 뒤 소실된 문루(門樓)를 다시 새우고 성벽을 보수하여 조선조 말까지 유지되어 왔으나 일제강점기에 모두 헐어버려 지금과 같이 그 흔적마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성곽(城郭) 안에는 동헌(東軒), 객사(客舍), 근민당(勤民堂),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官廳), 기고청(旗鼓廳), 군사(郡司), 인리청(人吏廳), 군기고(軍器庫), 대동고(大同庫), 고마청(雇馬廳), 사창(司倉)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객사(客舍)로 사용되던 도주관(道州館)과 정면 7, 측면 4칸의 팔작지붕건물인 동헌(東軒)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성곽을 둘러본 후 남산계곡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잠시 후 왼편에 석빙고(石氷庫 : 보물 제323)가 나타난다. 숙종 39(1713)에 지어졌다는 석빙고는 앞에 세워진 비문(碑文)의 기록(석공 13명과 목수, 야공 등 연인원 674명이 공사에 투입됐고 1438근의 철을 사용)으로 미루어볼 때 규모가 엄청났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막상 눈앞에 보이는 것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천장을 덮고 있는 네 개의 홍예(虹霓)와 장대석 한 개만 남아 앙상한 몰골인 것이다. 참고로 석빙고는 빙실(氷室)의 길이가 14.75m에 너비는 5m, 그리고 홍예(虹霓)의 높이가 4.4m인 돌로 만든 창고로서, 겨울에 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이 창고에 저장했다가 여름에 사용했다. 그리고 현존하는 한국의 석빙고 가운데 축조 연대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규모는 경주 석빙고(보물 제66) 다음으로 크다.

 

 

 

 

석빙고에서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우뚝 솟아오른 느티나무가 반긴다. 향교를 지키고 있는 수문장(守門將)이다. 당연히 청도향교(淸道鄕校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7)는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된 이 느티나무 옆에 있다. 향교란 문묘(文廟)와 그 부속기관인 학교(學校)로 구성되며, 고려 때부터 나타난 지방교육기관이다. 청도향교는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조선 선조 1(1568)에 고평동(古坪洞)에 창건하였다. 인조 4(1626) 합천리로 옮겼다가 영조 10(1734)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4칸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7칸의 명륜당, 5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5칸의 사락루(思樂樓), 삼문(三門), 동문(東門)과 서문(西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五聖), 송조2(宋朝二賢), 우리 나라 18(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참고로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고, 지금은 석전(釋奠 : 봄과 가을 2)과 분향(초하루와 보름)만 하고 있다.

 

 

 

 

석빙고에서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우뚝 솟아오른 느티나무가 반긴다. 향교를 지키고 있는 수문장(守門將)이다. 당연히 청도향교(淸道鄕校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7)는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된 이 느티나무 옆에 있다. 향교란 문묘(文廟)와 그 부속기관인 학교(學校)로 구성되며, 고려 때부터 나타난 지방교육기관이다. 청도향교는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조선 선조 1(1568)에 고평동(古坪洞)에 창건하였다. 인조 4(1626) 합천리로 옮겼다가 영조 10(1734)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4칸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7칸의 명륜당, 5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5칸의 사락루(思樂樓), 삼문(三門), 동문(東門)과 서문(西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五聖), 송조2(宋朝二賢), 우리 나라 18(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참고로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고, 지금은 석전(釋奠 : 봄과 가을 2)과 분향(초하루와 보름)만 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지 10분 가까이 되면 왼편 계곡으로 내려가는 나무데크 계단이 보인다. 남산계곡의 개울가로 난 길과 연결시키는 계단이다.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서 개울을 따라 상류로 올라갈 수도 있으나 계속해서 임도를 따른다. 개울에 물이 많지 않기 때문에 구태여 개울트레킹(trekking)을 고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무계단 두 곳을 지나면 임도는 끝을 맺고 그 뒤를 오솔길이 잇는다. 오솔길로 들어서는 가 했더니 금방 나무데크 조망대가 나타난다. 안내판에 음용지(飮龍池)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니 드디어 남산골에 들어섰는가 보다. 음용지는 남산 13중의 제3곡이기 때문이다.

 

 

 

 

 

남산 13은 남산계곡의 또 다른 이름인데, 옛 선현(先賢)들이 2.5정도 되는 남산계곡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서 명소마다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바위에다 새겨놓은 데서 유래됐다. 지금으로부터 약500년 전 무오사화(戊午士禍: 연산군 4) 당시 이 고장 선비들은 남산계곡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고 자연 속에서 풍류를 읊었다고 한다. 그 즈음에 지형(地形) 또는 암(), ()마다 그에 걸 맞는 이름을 붙였고, 그 중 13곳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13곡을 둘러보고 나면 실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안내판이 붙어있는 명소들이 이름에 비해 너무 왜소(矮小)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저렇게 작은 절벽이나 바위, 그리고 저렇게 얕은 소()나 담()을 보고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시구(詩句)들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자연 속에서 우정과 사랑을 노래했던 옛 선조들의 멋을 느끼며 산행을 이어간다.

 

 

 

 

 

 

 

산수정에 이어 두 번째로 나타나는 쉼터에 이르면 검은 오석(烏石)을 반듯하게 다듬어 놓고 그 위에다 남산 13을 설명해 놓은 것이 보인다. 그 내용을 모두 머리에 넣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던 탓에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기록을 뒤져 여기에 옮겨본다.

1곡 여기추(女妓湫) 원래는 청수대(靑水台)였는데 반가(班家)의 여자들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자, 이를 막기 위해 기생들이 목욕하는 곳이라는 뜻의 여기추(女妓湫)라는 이름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들의 말장난이 성공하여 반가 부녀자들의 목욕이 끊겼다니 흥미로운 일이다.

2곡 록수문(鹿脩門)은 녹피(鹿皮)를 상납할 때 포수들이 이곳에서 수렵제(獸靈祭)를 지내고 사냥하던 곳이다.

3곡 용음지(龍飮池)는 한발 때 군수가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일명 기우단(祈雨壇)이라고도 한다. 아까 올라올 때 보았듯이 이름표만 붙어있지 않으면 그저 자그만 바위에 불과할 정도로 초라하기 그지없다.

4곡 백석뢰(白石瀨)는 물 밑에 흰색 돌이 많아 보석처럼 반짝이는 여울이라는 뜻이다.

5곡 질양석(叱羊石)은 바위가 우뚝 서 있어 소나 양을 치면서 감시하기에 알맞은 바위라는 뜻이다.

6곡 운금천(雲錦川)은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비단을 깔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7곡 취암(醉 岩)은 무오사화(戊午史禍) 후 많은 선비들이 한을 달래던 곳이다.

8곡 철주단(撤珠湍)은 여울에 솟구치는 모래알이 구슬을 뿌리는 것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9곡 산수정(山水亭)은 자연과 더불어 작시(作詩)하였던 곳으로 정자가 있다.

10곡 만옥대(萬玉臺)는 나지막한 폭포로 물방울이 튀어 날리는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11곡 유하담(流霞潭)은 노을빛이 계곡에 가득하기가 큰못에 물이 가득한 것과 같다는 뜻이다.

12곡 낙석대(落石臺)는 선녀들이 옥련대에서 목욕할 때 옷을 벗어 놓았던 곳으로 일명 낙안봉(落岸峯)이라고도 한다.

13곡 금사계(金沙界)는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신둔사(薪屯寺, 鳳林寺)로 올라갔다는 곳이다.

참고로 오늘 산행 중에는 여기추와 록수문가 눈에 띄지 않았고, 대신 석문(石門), 일감당(一鑑塘), 용항(龍亢), 자시유인불상래(自是遊人不上來) 등의 안내판을 볼 수 있었다. 이름은 남산 13이지만 16개의 명소로 관리되고 있는 모양이다.

 

 

 

 

마지막 13곡인 금사계(金沙界)를 끝으로 남산 13은 끝을 맺는다. 그렇다고 해서 남산계곡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옛 선현들이 풍류를 즐기며 노닐던 명소들만 끝을 맺을 뿐 계곡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그러나 계곡이 보여주는 풍광(風光)은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분명한 모양이다. 산길이 금사계를 지나면서 신둔사로 올라가는 자동차길과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지 30, 그러니까 남산골에서 25분 남짓 머문 셈이다. 신둔사로 올라가는 자동차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금 후에 남산기도원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신둔사 방면으로 약 100m쯤 더 올라가면 ‘119구조위치 안내판과 스테인리스(stainless)로 만들어진 등산로 안내판이 있는 작은 공터에 닿는다. 공터 바로 위에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남산 1.85Km/ 신둔사 400m/ 화양읍)로 나뉜다.

 

 

 

 

 

갈림길에서 신둔사까지는 400m, 잠깐 다녀오기에는 결코 짧지 않은 거리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옛 사찰(寺刹)을 둘러보지 않는 것은 내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가지마라는 집사람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신둔사로 향한다. 당연히 뛰다시피 다녀올 수밖에 없다. 7~8분쯤 올라갔을까 울창한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신둔사가 눈에 들어온다. 1천년 가까이 되는 오랜 역사에 비해 의외로 자그마한 규모이다. 신둔사(薪芚寺)는 고려(高麗) 명종 3(1173)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창건한 사찰(寺刹)로서 당시에는 봉림사(鳳林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조선 현종 8(1667) 상견(尙堅)에 의한 중창(重創), 중건(重建 : 고종 15)을 거치면서 절 이름이 지금의 신둔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칠성각, 독성전, 산령각, 요사채 등이 있으나 특별한 문화재는 보유하고 있지 않다.

 

 

 

신둔사를 둘러본 뒤 다시 공터 위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오른쪽 계곡으로 난 길로 들어선다. 신둔사를 다녀오는데 15분이 채 안되었으니 거의 달려서 다녀온 셈이다. 계곡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까 등산로 안내판에서 보았던 ‘A코스이다. 100m쯤 들어가니 물기 한 점 없이 메말라버린 건천(乾川)이 나오고 그 건너편에 집사람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장난이 아니다. 가지마라는 곳을 다녀온데 대한 불만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몸을 낮추어야 한다. 가능하면 말을 줄이고 그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계곡을 건넌 산길은 초반에는 사면(斜面)을 따라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점점 가파르게 변하더니 장군샘을 지나면서부터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가팔라져 버린다. ‘산이 불끈 일어섰다거나 산이 허리를 곧추세웠다.’는 표현이 있다. 바로 지금 오르고 있는 산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런 가파름이 힘에 겨웠던지 산길은 곧장 위로 향하지를 못하고 지그재그로 갈지()자를 그리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신둔사 갈림길에서 35분 조금 못되게 올라서면 오른편에 너럭바위가 나타나면서 오늘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청도산악회에서 아랫·윗 전망대(展望臺)’라는 이름을 붙인 바위이다. 바위 위에 올라서면 조금 전에 지나온 남산골과 화양읍 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전망대를 뒤로하고 조금 더 오르면 갈림길(이정표 : 정상 570m, 헬기장 390m/ 전망대 90m)을 만나게 된다. 이정표의 방향표시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이 보인다. 이 방향표시가 지시하고 있었을 방향이 바로 죽림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죽림사 갈림길을 지나면서부터는 심심치 않는 산행이 계속된다. 암릉이 나타나면서 곳곳에서 멋진 조망(眺望)처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 위로 올라가면 남산골과 신둔사가 조망되고 남산골 건너로는 은왕봉이 마주 보인다. 이런 코스에서는 구태여 서두를 이유가 없다. 마침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밧줄까지 매어 놓았으니, 그저 눈요기를 즐기며 여유롭게 걷기만 하면 된다.

 

 

 

눈요기를 즐기면서 오르다보면 어느덧 헬기장에 올라서게 된다. 전망대를 출발한지 28분쯤 되는 지점이다. 헬기장에서 죽림사 갈림길(이정표 : 남산 0.18Km/ 각남, 죽림사/ 기도원 1.67Km)과 헤어지고 나면 금방 남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화양읍성을 출발한지 2시간10분이 지났다.

 

 

 

10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 올라서면 자연석으로 만든 커다란 정상석과 남산 종주거리 및 등산로가 그려진 스테인리스(stainless) 안내판이 길손을 맞는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의외로 시원치 않다. 꽤 많은 부분을 잡목(雜木)들이 시야(視野)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다. 조금 후 하산 길에 만나게 되는 전망대에서 조망에 대한 목마름은 일거에 날아가 버릴 테니까 말이다. 참고로 남산이란 지명(地名)은 전국에 많은 편이다. 그러나 그중에 공식적인 것은 서울의 남산과 경주의 남산, 그리고 이곳 청도의 남산뿐이라는 것이 아까 올라오는 길에 만났던 청도에 사신다는 아주머니의 주장이었다. ‘남산이란 남쪽에 면한 산 이라는 뜻으로 보통 한나라의 도읍지(都邑地)가 있는 지역의 앞산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경주의 남산이나 서울의 남산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남산의 북쪽 어디엔가 이서국(伊西國)의 도읍지가 있었다는 것이 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곳 청도에는 한때 신라를 공격해 위기에 빠뜨릴 정도로 강성했던 이서국(伊西國)이라는 부족국가가 있었다니까 말이다.

 

 

 

하산은 올라왔던 길과 반대방향으로 내려선다. 정상석을 마주 바라볼 때 왼편 방향이다. 잠시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을 통과하면 남산 최고의 전망대가 나타난다. 아까 정상에서 목말라 했던 조망(眺望)에 대한 갈증은 이곳에서 풀면 된다. 꼭 조망뿐만이 아니다. 암릉을 이루고 있는 바위들 사이에 뿌리를 박고 있는 멋진 낙락장송(落落長松)들도 한 폭의 그림이니 구태여 발걸음을 서두르지 말고 즐기다가 내려갈 일이다. 저 멀리에 첩첩이 쌓여있는 영남알프스의 산군(山群)들은 물론 이서국(伊西國)의 왕이 은신(隱身)했었다는 은왕봉과 그 아래 신둔사가, 그리고 정면에는 삼면봉이 손에 잡힌다.

 

 

 

 

쇠사슬을 잡고 내려서면 삼면봉이다. 정상에 15분 조금 못되는 지점이다. 삼면봉 정상은 봉우리의 한가운데에 쌓여있는 큰 돌무더기 외에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다. 또한 위로 올라왔다는 느낌도 없기 때문에 봉우리에 세워진 이정표(낙대폭포 4.3Km/ 밤티재 1.5Km/ 남산정상 0.6Km)를 겸한 등산안내도만 아니라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일 정도이다. 참고로 삼면봉(三面峰)은 청도군내(淸道郡內) 삼개 면(각남면, 화양읍, 청도읍)의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삼면봉에서는 낙대폭포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서면 또 다시 쇠사슬이 길게 늘어진 암벽(巖壁)이 길손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걱정할 것까지는 없다. 옆으로 돌아 내려갈 경우에는 허리를 세우고도 아래로 내려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암벽을 내려서서 조금 더 걸으면 한재(이정표 : 봉수대 1.6Km/ 신둔사 1.75Km/ 남산 정상 0.8Km)에 닿는다. 한재에서는 봉수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또 다른 이정표(원리방면/ 신둔사 1.7Km/ 삼면봉 0.1Km)에는 원리방면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한재를 지나면서 암릉산행이 시작된다. 오늘 산행에서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구간이다. 반반한 바위구간이 있는가 하면 일부러 쌓아 놓은 듯이 바위들이 첩첩이 쌓여 있는 등 수시로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거기다 바위틈에 비집고 들어선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주변 바위들과 상큼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絶壁)을 잇는 암릉은 주변 조망(眺望)도 뛰어나다. 곳곳의 전망바위에 올라서면 청도 시가지는 물론 주변의 산군(山群)들이 거의 다 조망된다.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곳은 미나리로 유명한 한재 미나리재배단지이다. 참고로 한재 미나리 재배단지(비닐하우스)는 행정구역 상 청도군 청도읍 초현리, 음지리, 평양리, 상리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지리적으로 남산과 화악산 사이의 계곡을 따라 형성된 이 마을들을 한꺼번에 한재라고 부르다. 이 한재마을에서는 8~9월 무렵에 미나리 줄기를 무논에 뿌려 11월쯤 베어낸 뒤 12월에 비닐을 씌워 다시 키워서 50쯤 자란 1월부터 수확에 들어가는데 3~4월에 제철을 맞이한다고 한다.

 

 

 

암릉이라고 해서 온통 바위들만 널려있는 것은 아니다. 바위구간과 흙구간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걷는 이들을 심심찮게 만들어 준다. 능선의 주변은 온통 소나무들 천지,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는 애국가(愛國歌)가 절로 튀어나올 만하다. 애국가가 가리키는 남산은 서울의 앞산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이곳 청도의 남산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소나무가 가득한 것이다. 사실 소나무들이 울창한 산은 전국에도 많다. 그러나 바위와 함께 어우러지는 소나무 숲은 그리 많지 않다. 거기다 남산이라는 지명까지 합쳐지니 자신도 모르게 애국가의 구절이 떠오르고 만 것이다.

 

 

 

암릉길에서 눈에 호사(豪奢)를 누리며 걷다보면 봉수대(烽燧臺)에 이르게 된다. 한재에서 35분쯤 되는 지점이다. 봉수대란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를 올려 외적(外敵)이 침입하거나 난리(亂離)가 일어났을 때에 위급한 소식을 중앙(中央)에 전하던 시설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봉수대의 시설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3~4평쯤 되는 공터에 돌맹이 몇 개가 바닥에 동그랗게 깔려있을 뿐이다. 곁에 세워진 등산로안내판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봉수대인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봉수대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낙대폭포 3.5Km/ 대포산 1Km/ 남산정상 2.4Km)로 나뉜다. 이곳에서 하산지점인 청도군청까지는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대포산 방향의 능선을 타는 방법도 있지만, 낙대폭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 남산의 명물인 낙대폭포를 빼먹지 않기 위해서이다. 낙대폭포 방향으로 내려가면 얼마 뒤에 어른 키로 두 길 정도 되는 거북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바위를 오른쪽으로 돌아 아래로 내려가면 갈림길(이정표 : 은왕봉 1Km/ 신둔사 1.4Km/ 봉수대 0.6Km/ 남산정상 2.8Km)를 만나게 된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신둔사에서 올라오는 ‘C코스이다. 갈림길에서는 은왕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울창한 참나무 숲 아래로 난 산길을 따라 얼마간 내려오면 'D사거리(이정표 : 낙대폭포 1.8Km/ 신둔사 0.5Km/ 남산 3.8Km)‘가 나온다. 봉수대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맞은편 능선을 따라 오르면 옛날 이서국(伊西國)의 왕이 은신했었다는 은왕봉이 나오는 것이다.

 

 

 

 

‘D사거리에서 오른편 낙대폭포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약간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러나 그다지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이다. 부드러운 흙길인데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D사거리에서 800m쯤 내려가면 폭포삼거리(이정표 : 낙대폭포 1Km/ 남산정상 4.6Km)가 나온다. 비록 이정표에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할 경우에는 ’D사거리를 거치지 않고 곧장 ’C사거리로 올라가게 된다. ‘D사거리를 출발한지 18분쯤 되면 소류지(沼溜地)에 닿게 되고, 이어서 무덤이 있는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 후 가파르게 내려서면 낙대폭포(落臺瀑布)이다. 참고로 위에서 말한 소류지는 낙대폭포로 흘려보내기 위한 물을 가두어 두는 저수지이다. 그리고 무덤이 있는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진행할 경우에는 낙대폭포를 거치지 않고 곧장 낙대폭포 안내소앞으로 떨어지게 되니, 낙대폭포를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은 길 찾기에 주의할 일이다.

 

 

 

 

낙대폭포(落臺瀑布) 앞에 내려서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우람하다는 것이다. 높이 30m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찾아온 때가 마침 갈수기(渴水期)임에도 불구하고 장관이다. 흘러내리는 물은 비록 많지 않지만 그 물줄기가 만들어내는 물보라가 일품인 것이다. ‘청도 8의 하나로 꼽힌 이유일 것이다. 이 폭포는 예부터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약수폭포로 불리기도 한단다. 그래서 여름철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웃통을 벗은 채로 폭포수를 맞는데, 그 풍경이 또한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폭포 앞에 탈의실(脫衣室)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그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다. 여름철이 되려면 아직은 이르지만 벌써부터 물을 맞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안돼욧!’ 날카로운 집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폭포 아래로 들어가려던 내 꿈은 가녀린 소망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폭포에서 내려가는 길은 산길이라기보다는 도로에 가깝다. 바닥을 돌로 심어 놓은 멋진 길을 따라 6분쯤 걸어 내려오면 주차장을 겸한 폭포 안내소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7분쯤 더 내려오면 왼편에 일주문(一柱門) 하나가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는 정자(亭子)가 둘, 그 곁에는 전각(殿閣)을 새로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지도에 나와 있는 대응사(大應寺)이려니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대응사는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야 나오고, 이 곳은 전통 한옥의 맥을 잇기 위해 설립했다는 목수(木手) 양성 사관학교청도한옥학교이다. 그렇다면 지금 공사 중인 건물은 전각이 아니라 한옥(韓屋)인 모양이다.

 

 

 

 

산행날머리는 청도군청 뒤 주차장

한옥학교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조계종 사찰인 대응사그리고 이어서 천태종 사찰인 청화사를 지나면 낚시하기 딱 좋은 대동지가 나온다. 대동지를 벗어나면 청도 시가지로 접어들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저만치에 청도군청 건물이 나타난다. 한옥학교에서 20분쯤 걸리는 지점이다. 한옥학교 앞에서 도로를 따르지 않고 과수원을 무단(無斷)으로 통과하여 내려가면 5분 정도 단축되지만, 엄연히 주인이 있는 과수원이고, 거기다가 복숭아 열매라도 매달려 있는 시기라면 결코 그리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오늘 산행에 소요된 시간은 총 4시간30, 막걸리를 마시느라 멈춘 시간을 제외하면 순수 산행시간은 4시간20분쯤 걸렸다.

 

 

 

보담산(寶潭山=步斗山, 562m)-낙화산(落花山, 597m)-중산(中山, 643m)

 

산행일 : ‘14. 5. 10()

소재지 : 경남 밀양시 산외면과 상동면의 경계

산행코스 : 다촌마을보두산 전망대비학산갈림길보두산낙화산노산고개중산석이바위봉다촌마을(산행시간 : 3시간40)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아늑한 육산(肉山=흙산)과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골산(골산=바위산)을 함께 맛볼 수 있어서 사귄지 얼마 안 된 연인(戀人)들에게 권하고 싶은 산이다. 갖가지 야생화(野生花)들이 무리지어 피어있는 폭신폭신한 흙길을 걸으며 오순도순 사랑얘기를 나눌 수도 있고, 아기자기한 암릉에서는 바위를 오르내리는 연인을 돕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몸을 더듬어 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양대 산맥인 립 서비스(lip-service)스킨십(skinship)‘을 한꺼번에 실행할 수 있으니 사귄지 얼마 안 된 연인들일지라도 산행이 끝날 즈음에는 이미 상대방에게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다촌마을(산외면 엄광리 714) 입구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 언양·울산방면으로 우회전하여 달리면 조금 후에 방금 빠져나온 고속도로의 아래를 지나게 된다. 이 지점을 지나자마자 국도에서 빠져나와 방금 지나온 국도의 아래로 뚫린 굴다리를 통과하여 조금만 더 들어가면 엄광천()을 만나게 되고, 엄광천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다촌마을에 이르게 된다.

 

 

산행은 다촌마을로 들어가기 전, 안당골로 가는 길이 나뉘는 갈림길 조금 못미처에서 시작된다. 도로공사로 인해 버스가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올라가세요!’ 두 마을의 진입로가 나뉘는 갈림길에서 왼편 산자락으로 치고 오르려는 우리 일행을 보고 공사관계자들이 외친다. ‘보두산 등산로는 이곳에서 250m를 더 가야한다는 이정표를 보지 못한 우리가 딱했던 모양이다. 그들의 말대로 안당골 방향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왼편으로 임도(林道)하나가 갈려나가는 것이 보인다. 들머리에 이정표(보두산 전망대 900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도는 제법 넓을뿐더러 그다지 가파르지도 않다. 당연히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오를 수가 있다. ‘오늘 산행시간은 여유가 좀 있나요?’ 부담 없는 산길이 조금은 여유로웠던지 집사람이 넌지시 물어온다.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산나물을 좀 뜯어보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여유롭다는 말을 들은 집사람의 손길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막상 산나물은 많지가 않았다. 그 흔한 참취도 눈에 잘 띄지 않았고, 기껏해야 고사리와 비비추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다음 주 밥상을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산에서 내려와 쑥과 뽕잎을 뜯다보니 집사람의 나물주머니가 더 이상은 들어오지 말라고 몸부림을 칠 정도였으니 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2, 그러니까 임도로 들어선지 7분쯤 지나면 능선 위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에 올라서면 오른편에 집채만 한 바위들이 뒤엉켜 있는 것이 보인다. 아까 이정표에 적혀있던 전망대(展望臺)가 바로 이곳이다. 바위 위로 오르면 엄광리 등 산외면 일원이 발아래에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오늘 오르게 될 보두산과 낙화산 중산을 잇는 능선이 펼쳐진다.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바뀌어가는 산하(山河)가 참으로 곱다. 사람들이 산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전망대를 지나면 산길은 다시 흙길로 변한다. 그러나 그 거리는 길지 않다. 처음부터 크지 않은 바위들이 널려있던 바위들은 점차 그 숫자와 크기를 늘려가더니 20분쯤 후에는 바윗길로 변해 버린다. 참 바윗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전망대에서 7~8분 거리)에 왼편으로 산길이 하나 나뉘는 것이 보인다. 이정표를 보니 비학산으로 가는 길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내가 알기로는 정상 조금 못미처에서 비학산으로 가는 능선이 나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에 또 하나의 갈림길이 있는 것을 보면, 이 곳은 능선이 아니라 산자락의 사면(斜面)으로 연결시키는 오솔길인 모양이다. 그러나 이후에는 비학산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는 만날 수가 없었다.

 

 

바윗길이 열리면 짜릿한 꽤감도 함께 시작된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계속해서 줄을 잇는 암릉은 전문 산꾼들보다는 초보 산꾼들에게 더 어울릴 것 같다. 스릴(thrill)을 만끽할 수 있는 암벽(巖壁)을 오르는 코스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위들이 능선을 가득 매우고 있지만 산길은 용케도 그 사이로 잘 나있기 때문에 바위를 잡고 오를 일이 없는 것이다. 거기다 조금만 위험하다 싶은 곳에는 어김없이 안전로프를 메달아 놓았다.

 

 

 

 

 

바윗길은 암릉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올라서는 바위마다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멋진 풍광(風光)을 보여주는 것이다. 건너편에는 중산에서 석이바위봉을 거쳐 꾀꼬리봉으로 흐르는 능선이 힘차게 요동을 치고, 그 아래에는 안당골의 전원주택들이 다소곳이 웅크리고 있다. 잡티 하나 없는 쾌청한 날씨, 결코 흔치 않은 이런 날에 산을 찾은 것은 행운(幸運)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한 곳이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거대한 바위를 피해 돌아가는 길은 겨우 한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테라스(terrace)모양으로 나 있지만 난간(欄杆)이 없고, 바위 틈새로 난 길은 너덜이라서 자칫 돌이라도 구를 경우에는 부상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조심하면 되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바윗길을 한 굽이 치고 오르면 양지바른 곳에 써놓은 무덤이 나오는데, 그 뒤에는 반반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마치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다. 척박한 바위틈에서 억척스런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소나무도 구경할 겸 바위 위로 오르면 이번에는 크고 작은 비학산의 봉우리들이 발아래에 펼쳐진다. 그 뒤에 보이는 산들은 종남산과 옥교산, 그리고 화악산일 것이다.

 

 

 

조망(眺望)과 스릴을 함께 즐기며 17분 정도를 진행하면 중산과 석이바위봉이 잘 조망되는 또 다른 전망대가 나오고, 모처럼 안전로프에 의지해서 바위를 내려오면 갈림길 하나가 나타난다. 어디로 가는 길인지는 모르겠으나 보두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 못지않게 왼편으로 갈리는 길도 또렷하게 나있다. 그런데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보두산 정상 350m)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만다. 이정표에 적힌 보두산의 가운데 글씨, <>자를 누군가가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잘 쓰지도 못한 글씨로 <>자를 써 놓은 것이다. 이 산은 보두산과 보담산이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있는데도 구태여 이정표를 훼손시킬 필요까지야 있었을까 싶다. 이 몰상식한 분은 보두산 정상에 있는 이정표까지도 훼손해 버렸다.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다신 한 번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15분 후에는 보두산 정상이다. 정상은 의외로 보잘 것이 없다. 정상을 둘러싼 잡목(雜木)들 때문에 조망(眺望)도 트이지 않을뿐더러, 그 흔한 정상표지석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머리에 보두산 정상(해발 561m)'라고 쓰인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낙화산 680m)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정상에서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왼편에 보이는 길은 금산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일 것이다. 참고로 보두산(步斗山)은 보담산(寶潭山)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보두산으로 부르는 것이 더 나을 듯 싶다. 이곳으로 귀양을 온 중국의 높은 벼슬아치 이름을 따다가 붙였다는 보담산보다는 차라리 근처의 석축암석 등이 이 지역에서 농민군(農民軍)을 일으켰던 효심장군의 전적지(戰迹地)였던 보두산성터(山城地)로 밝혀진데서 유래되었다는 보두산이 더 나을 것 같기 때문이다.

 

 

 

 

보두산에서 낙화산까지는 금방이다. 정상에서 짧게 내려섰다가 맞은편 능선으로 오르기만 하면 된다. 오르는 길에 오른편에 날카롭게 선 바위벼랑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 때문에 카메라에 잡을 수는 없지만 저게 혹시 전설(傳說)속의 낙화암(落花巖)이 아닌지 모르겠다. 낙화산에는 이름과 관련된 슬픈 옛이야기가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군을 피해 산으로 피신한 한 여인(밀양사람 박희량의 부인 민씨)이 결국은 발각되자 절벽(絶壁)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 여인의 정절(貞節)을 기리기 위해 그녀가 몸을 던졌던 바위에 낙화암(落花巖)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산의 이름도 자연스레 낙화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두산을 출발한지 정확히 20분이 지나면 낙화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낙화산도 조금 전에 지나온 보두산과 마찬가지로 정상은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부스러진 바위들 몇 개가 널려있다는 것이 약간 다를 뿐이다.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노산고개 570m)외에도 익숙한 정상표지판 하나가 더 보인다. 만든 이는 .’, 오지(奧地)의 산에서 자주 눈에 띄었던 낯익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분의 표지판에 적힌 낙화산의 높이(626m)가 이정표나 정상석에 적힌 숫자(597m)와 다르다. 과연 어떤 게 맞는 것일까? 이 지역의 대표신문인 부산일보와 국제신문도 두 산의 높이를 각기 다르게 표기(標記)하고 있고, 그 외 다른 지도(地圖)들이 표기하고 있는 낙화산의 높이도 중구난방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관할관청인 밀양시에서 표기한 597m가 옳지 않을까 싶다.

 

 

낙화산 정상에서 중산으로 가는 능선은 전형적인 흙길, 포근포근한 흙길을 밟으며 10분 남짓 내려서면 능선안부인 노산고개(이정표 :석이바위 200m, 중산 1,200m/ 구름동네)에 이르게 된다. 노산고개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엄광리 안당골, 그러나 이정표에는 구름동네로 표기되어 있다. 아마 안당골을 구름동네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물론 중산으로 가려면 능선을 따라 직진해야 한다.

 

 

 

다시 보드라운 흙길을 밟으며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바위들이 나타나면서 거대한 바위 하나가 앞을 막는다. 옛날 석이버섯이 많이 나왔다는 석이바위이다. 석이바위 위는 시야(視野)가 확 트이는 뛰어난 전망대(展望臺)이다. 전망대에 서면 안당골을 둘러싼 산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지나온 보두산과 낙화산, 그리고 조금 후에 오르게 될 중산과 석이바위봉, 꾀꼬리봉에 빙 둘러싸인 안당골은 풍수(風水)에 문외한(門外漢)인 내가 보기에도 명당(明堂)으로 보일 정도로 포근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저 골짜기에 그렇게도 멋진 전원주택들이 몰려있는 모양이다.

 

 

 

 

 

석이바위를 지나면서 암릉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해서 능선 전체가 바윗길은 아니다. 중간 중간에 바윗길과 흙길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것이다. 이 구간은 결코 아까 보담산을 올라올 때 지나왔던 암릉보다 험하다거나 거대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릴(thrill)은 훨씬 더 만끽할 수 있는 구간이다. 밧줄을 붙잡고 오르내리는 것은 물론 어떤 때에는 바위를 붙잡고 오르내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산행기의 서두(序頭)에서 오늘 오른 산들의 특징을 들면서 연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산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구간에 대한 표현이라고 봐도 좋다. 이 구간은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그러나 여자 혼자의 힘만으로는 오르내리 게 다소 부담스러울 것이다. 당연히 남자들의 도움이 절실해지는 순간이다. 위에서 끌어 올리거나 아래에서 받쳐주는 스킨십(skinship)을 반복하다보면 아무리 서먹서먹했던 연인(戀人)들일지라도 산행이 끝날 즈음에는 찐한 사이로 바뀌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암릉길에서 조망(眺望)과 스릴을 함께 즐기며 걷다보면 마지막 전망대이다. 석이바위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지점이다. 지나온 보담산과 낙화산의 능선을 다시 한 번 돌아본 뒤 전망대를 내려온다. 이어서 가파른 오르막길에 놓인 통나무계단을 밟고 10분 정도를 치고 오르면 중산 정상이다. 10평 남짓한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애기들 장난감처럼 작고 귀여운 정상석이 혼자서 지키고 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볼거리도 없을뿐더러 잡목(雜木)으로 둘러싸여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 탓에 그냥 지나쳐버린다. 참고로 중산은 골안마을과 화로봉 사이의 중간 산등성이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중산에서부터는 순수한 흙길이 이어진다. 중산에서 석이바위봉 방향으로 조금만 진행하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중산2 800m/ 희곡리)로 나뉜다. 왼편(희곡리방향)**)운문지맥으로 이곳으로 진행할 경우 용암봉을 거쳐 구만산, 운문산으로 가게 된다. 석이바위봉은 당연히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이정표에 앞으로 가야할 석이바위봉이나 꾀꼬리봉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정표가 중산2’를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그 이유는 조금 후에 석이바위봉에서 알게 된다.

(**)운문지맥 : 낙동정맥의 가지산(영남알프스의 최고봉)에서 분기(分岐)하여 서쪽으로 운문산, 억산, 구만산, 중산, 낙화산, 비학산을 만들어낸 뒤 밀양의 긴 늪인 정문마을에서 그 숨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36.8Km의 산줄기이다.

 

 

운문지맥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산행을 이어간다. 녹음이 짙은 산길을 따라 5~6분 정도 걸으면 용암산 갈림길(이정표 : 꾀꼬리봉 2.6Km/ 용암산 2.8Km/ 중산 0.53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13분 정도를 더 걸으면 석이바위봉(이정표 : 다촌마을 1100m)에 이르게 된다. 잡목(雜木)에 둘러싸인 정상은 구릉(丘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능선 상의 한 지점에 불과하다. 만일 정상표지석이 아니었더라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렸을 것이다. 석이바위봉에 이르면 아까 이정표의 방향표시가 왜 중산2’로 되어있었는지 이해가 간다. 정상석에 석이바위봉이 아니라 중산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석이바위봉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는 비록 다촌마을 방향만 가리키고 있지만 다른 길 하나가 더 왼편으로 나 있는 것이 보인다. 바로 꾀꼬리봉으로 가는 길이다. 꾀꼬리봉을 오른 다음 다촌마을로 되돌아와도 되겠지만 그냥 이곳에서 하산하기로 한다. 산나물이나 뜯으며 여유를 부려보자는 집사람의 주장을 꺾을 만큼 꾀꼬리봉의 산세(山勢)가 내 구미를 당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촌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이 또렷한데다가 가파른 구간에는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기 때문이다. 20분 남짓 내려오면 능선이 완만(緩慢)해지면서 울창한 소나무 숲 아래 공들여 쌓은 흔적이 역력한 돌탑(石塔) 한 기()를 만나게 된다. 이어지는 산길은 여유를 부리기에 딱 좋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경사(傾斜)까지 거의 없다. 거기다 길가에는 비비추가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다. 집사람의 얼굴 표정이 어느새 밝아져 있다. 식구들에게 먹일 산나물을 뜯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는 집사람이라면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다촌마을 입구(원점회귀)

산나물을 뜯으며 20분 정도 여유를 부리다보면 안당골에 내려서게 되고, 이곳에서부터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이어진다. 아침에 산행을 시작했던 다촌마을 입구까지는 20분 남짓, 결코 짧지 않은 거리이다. 그러나 부지런한 집사람에게는 지루하다는 느낌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는 모양이다. 심심찮게 나타나는 뽕나무의 잎도 따고, 쑥을 뜯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난 길가에 곱게 지어진 전원주택(田園住宅)들을 구경하는데 정신을 집중한다. 풀독()에 걸릴 것을 염려한 집사람이 나물채취를 못하게 하는 데도 이유가 있지만, 홍천에 새로 들어앉힐 별장(別莊)을 벤치마킹(bench-marking)하기 위해서이다. 오늘 산행에 걸린 시간은 총 4시간, 중간에 막걸리를 마시느라 쉰 시간을 뺀다면 3시간40분 정도가 걸렸다.

 

                                              

 

대운산(大雲山, 742)-시명산(675m)-불광산(佛光山. 660m)

 

산행일 : ‘14. 4. 26()

소재지 : 울산시 울주군 온양읍, 부산시 기장군 장산읍, 경남 밀양시 웅산읍의 경계

산행코스 : 장안사 주차장장안사척판암불광산시명산삼도봉(660m)대운산도통골3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10)

같이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색 : 산으로 들어서자마자 과연 내가 산에 들어온 게 맞나?’하는 의구심부터 든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다. 부산과 울산이라는 광역시(廣域市)와 양산시 등 도심권(都心圈)에서 멀지 않다는 접근성 때문에 지역 산꾼들이 즐겨 찾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산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산상공원(山上公園)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무데크 계단이나 안전로프, 그리고 이정표 등 안전시설은 물론, 곳곳에 의자 등 공원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다양한 시설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런 시설은 딱 여기까지만 이었으면 좋겠다. 산을 찾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도 좋지만 지나칠 경우에는 자연미(自然美)를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장안사주차장(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 591번지)

부산-울산고속도로 온양 I.C에서 내려와 14번 국도 기장·부산 방면으로 달리다가 명례휴게소(기장군 장안읍 명례리)를 지나면 얼마 안 있어 나오는 장안삼거리(기장군 장안읍 용소리)에서 지방도를 타고 장안사로 들어가면 된다.

 

 

 

주차장 뒤로 난 산길로 접어든다. 자동차가 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널찍한 것이 아마 백련사로 연결되는 길인 모양이다. 100m쯤 올라갔을까 오솔길 하나가 왼편 산자락으로 나있는 것이 보인다. 바로 척판암으로 올라가는 산길(이정표 : 척판암 0.6Km, 불광산 5.374Km/ 0.65Km)이다. 오솔길로 접어들려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니 오른쪽에 사찰(寺刹) 하나가 내려가 보인다. 바로 장안사란다. 하마터면 유서 깊은 고찰(古刹)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할 뻔 했다. 부랴부랴 다시 되돌아가 사찰구경에 나선다.

 

 

 

장안사(長安寺)673(신라 문무왕 13)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에는 쌍계사라 불렀는데, 애장왕이 다녀간(809) 후에 장안사로 개칭하였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탄 것을 중창과 중건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종각(鐘閣)을 겸하고 있는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절 마당에 있는 세 그루의 단풍나무가 눈길을 끈다. 높이가 2~3m 정도 되는데 가지가 뒤엉켜 올라가고 있는 모습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그리고 뒤이어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대웅전이 나타나고, 대웅전 앞에는 형형색색의 연등(燃燈) 줄을 맞추어 늘어서 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초파일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음일 것이다. 참고로 경내에는 대웅전(보물 제1771), 명부전(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06). 웅진전, 산신각, 종각 그리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 7과를 모시고 있다는 ‘3층석탑이 있다.

 

 

 

 

척판암으로 향하는 길은 한마디로 순하다. 부드러운 흙길은 산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오솔길에 가깝다. 거기다 완만(緩慢)하기까지 해서 애를 쓰지 않고도 오를 수 있을 정도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8분쯤 지나면 척판암(이정표 : 불광산 4.3Km, 대운산 6.2Km/ 백련암 0.5Km/ 장안사 0.6Km)에 이르게 된다. 장안사를 둘러본 시간을 뺄 경우 15분 남짓 걸렸을 것이다.

 

 

 

척판암(擲盤庵)은 산허리의 사면(斜面)을 깎아 만든 자리에 지은 암자(庵子)이다. 경내에는 법당(척판암)과 요사채가 있고, 그 앞에 삼층석탑이 있다. 법당 좌측 편 방 안에 원효대사 진영(眞影)이 모셔져 있으며, 그 건물 벽에 척판과 관련된 벽화(壁畵)가 있다. 척판암도 아까 지나왔던 장안사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원효대사와 인연이 깊은 암자이다. 척판암(擲盤庵)에는 창건 당시의 이름인 담운사(淡雲寺)가 척판암으로 바뀌게 된 설화(說話)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곳에 머물면서 수도를 하던 원효대사가 어느 하루 소판(小版)에다 해동원효척판구중(해동에 있는 원효는 소판을 던져 많은 사람을 구한다)’이라는 글귀를 쓴 후에 중국을 향해 던졌다고 한다. 그 소판은 중국 종남산에 있는 태화사로 날아가 절 앞 허공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이것을 보려고 수도 중이던 천여 명의 스님들은 모두 절 밖으로 나왔는데, 그때 절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때 목숨을 건진 스님들이 원효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고 모두 깨달음을 얻어 성인이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러한 척판에 관련된 설화는 북한 묘향의 척판대와 경북 경주시 서쪽 월생산(단석산)의 척판암(擲板岩) 전설 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척판암의 요사채 앞으로 난 나무데크 통로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오늘 처음으로 시야가 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조망(眺望)까지 기대하는 것은 금물(禁物), 그저 상대마을에서 불광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나타날 따름이다. 통로를 지나면 척판암으로 올라오는 도로가 나온다. 산길은 도로(이정표 : 불광산 4.3Km, 대운산 6.1Km/ 백련암 0.7Km)를 가로질러 맞은편 산자락으로 나있다. 참 빼먹고 지나칠 뻔 했다. 척진암 법당(法堂) 앞에서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말이다. 사실 법당 앞에 서면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에는 법당 앞을 지나쳐 보자. 그러면 법당 건물의 코너를 돌아 요사채로 연결되는 길이 나타날 것이고, 불광산으로 가는 등산로는 요사채의 앞으로 나있다.

 

 

 

척판암을 지나서도 산길은 계속해서 산책로 수준이다. 길은 두 사람이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걸어도 충분할 정도로 넓고 경사까지도 완만하기 때문에 걷기에 딱 좋은 산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척판암에서 10분쯤 오르면 첫 번째 갈림길(이정표 : 불광산 1.78.Km/ 불광산 4.05Km/ 장안사 0.7Km)이 나타난다. 두 방향 모두 불광산으로 가는 길이라는데 오른편(1.78Km)은 능선, 그리고 왼편(4.05Km)은 산자락을 따라 아래로 향하고 있다. 망설이지 않고 능선으로 난 길을 따른다. 구태여 먼 거리를 돌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갈림길을 지나서도 산길은 여러 개의 갈림길(이정표 #1 : 불광산 3.3Km, 대운산 5.2Km/ 장안사 1.77Km/ 척판암 0.9Km, 이정표 #2 : 불광산 1.38Km/ 박치골 0.6Km/ 장안사 3.38Km, 이정표 #3 : 불광산 1.37Km, 대운산 3.2Km/ 박치골 0.5Km/ 장안사 3.39Km)과 여러 개의 산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이어진다. 그러나 산길의 풍경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마치 공원(公園)을 연상시킬 정도로 산길은 잘 가꾸어져 있고, 흙으로 된 산길은 포근포근 한 것이 여간 걷기에 좋은 것이 아니다. 거기다가 곳곳에 쉼터까지 마련해 놓았으니 조금이라도 힘이 부칠라치면 잠깐 쉬었다 가면 된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산책코스인 것이다.

 

 

 

척판암을 출발해서 40분 정도가 지나면 이르게 되는 세 번째 갈림길(불광산에서 1.37Km 떨어진 지점)에서부터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다지 심한 편은 아니다. 여느 산에서나 흔히 만나게 되는 수준이다. 그러나 오름길이 시작된 지 7분쯤 지나면서 그 가파름은 보통 수준의 이상으로 변해버린다. 그러나 그 가파름이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주어진 산행에 여유가 있다 보니 걸음을 재촉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심찮게 나타나는 철쭉들에 눈을 맞추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힘들다는 것을 잊어버린 탓이리라.

 

 

가파른 오르막길을 10분 남짓 치고 오르면 드디어 불광산 정상이다. 10평 남짓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불광산 정상은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시명산 정상 0.6Km/ 장안사 5.1Km) 외에 입산객 준수사항을 적어놓은 안내판이 하나 더 자리를 잡고 있다. '부처의 광명처럼 아침 해가 비치는 산'이라는 불광산 정상은 흙봉우리의 전형적인 특징대로 볼거리는 없다. 주위가 잡목(雜木)들로 둘러싸인 탓에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20분 정도가 지났다.

 

 

 

 

 

불광산에서 대운산으로 향하면 불과 100m도 되지 않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이 시명산 갈림길로서 만일 시명산에 다녀오고 싶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비록 이정표(대운산 정상 1.9Km/ 장안사 4.0Km/ 시명산)의 시명산 방향 표지판을 매직펜(magic pen)으로 두서없이 써 놓았다고 해서 의심하지는 말자. 이정표의 나무기둥에 방향표시까지 그려 놓은 성의를 생각해서 말이다. 시명산으로 방향을 잡으면 금방 장안사 갈림길’(이정표 : 시명산 0.1Km/ 장안사 4.82Km/ 대운산 2.0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그다지 급하지 않은 오르막길을 얼마간 오르면 드디어 시명산 정상이다.

 

 

 

 

시명산으로 정상은 흙으로 이루어진 10평 남짓한 분지(盆地), 정상은 자그마한 정상표지석과 삼각점 안내판이 지키고 있을 뿐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색다른 볼거리는 없다. 또한 주변을 잡목들이 둘러싸고 있는 탓에 조망까지도 터지지 않는다. 흙산(肉山)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어 그냥 대운산으로 발길을 향한다.

 

 

대운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명산을 둘러본 뒤, 불광산에서 대운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상으로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한다. 되돌아 나오는 길, 아까 지나올 때 비켜지나왔던 봉우리 위를 올라가보기로 한다. 봉우리 위에는 이정표(불광산 0.3Km, 8/ 시명산 0.13Km, 4)와 하얀 낙서판이 함께 서있다. 그런데 봉우리 위의 상황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렇다 부산일보의 &코너에서 본적이 있는 하얀 낙서판과 함께 '불광산 8, 시명산 4'이라는 이정표가 세워진 곳이 삼도봉(三道峰 : 660m)이라는 상황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행운이다. 전국에서 몇 개 되지 않는다는 삼도봉을 올라보았으니 말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4개의 삼도봉이 있다. 그중 전북, 충북, 경북이 만나는 민주지산의 삼도봉(1,248m), 전북, 전남, 경남이 만나는 지리산의 삼도봉(1,499m)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전북, 경북, 경남이 만나는 초점산(1,248m)과 강원, 충북, 경북이 만나는 어래산의 삼도봉(1,064m)은 아직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부산일보는 그 4곳에다 이곳(경남, 부산, 울산의 경계봉) 하나를 더 추가시켜 놓았다. 그러나 부산일보의 주장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왠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우선 경남과 울산, 부산이라는 지역이 지금은 별개의 광역지자체(廣域地方自治團體, regional local government(authority)로 구분되지만 원래는 경남이라는 하나의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혹자(或者)들은 민주지산을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삼도봉으로 치기도 한다. 충청과 전라, 경상이 만나는 유일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아까 지나왔던 시명산 갈림길로 되돌아 나오는데 왼편으로 난 오솔길 하나가 보인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눈어림으로 볼 때에 대운산으로 가는 길이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후에는 아까의 삼거리에서 대운산으로 가는 주능선과 만나게 된다. 주능선을 타고 10분쯤 걸으면 바위전망대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眺望)도 뛰어나지만 이곳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멋지게 자란 반송(盤松)이 아닐까 싶다. 소나무 아래에 서면 양산시가 내려다보이고,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산은 어쩌면 오봉산일 것이다.

 

 

 

 

전망대를 지나서 조금 더 걸으면 자그마한 바위봉우리 하나가 앞을 가로막고, 산길은 바위를 왼편으로 우회(迂廻)하고 있다. 바위 위에 인기척이 들리기에 무작정 오르고 본다. 뻥 뚫린 조망(眺望)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운산 방향으로만 시야(視野)가 열릴 따름이다. 이어서 조금 더 걸으면(전망대에서 15) ‘서창운동장 갈림길’(이정표 : 대운산 정상/ 서창운동장/ 장안사·명동)이 나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대운산으로 오르는 마지막구간이 오늘 산행 중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그동안 여유롭게 즐기며 이어오던 산행이 여기서부터 고행의 길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오르막길은 끝도 없이 길게 이어진다. 그만큼 고도차(高度差)를 많이 극복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힘든 오르막길은 16분 정도면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이 나타나면서 끝을 맺는다. 여기서 다시 평탄해진 산길을 따라 7분 정도 더 걸으면 드디어 대운산 정상이다.

 

 

 

 

오늘 걷고 있는 시명산에서 불광산을 거쳐 대운산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용천북지맥(湧天北支脈)의 일부구간이다. 용천북지맥은 용천(湧天)지맥 또는 장산(萇山)지맥의 용천산 아래 진태고개(정관고개)갈림길에서 분기되는 지맥으로 울산의 젓줄인 회야강(回夜江)을 에워싸는 산줄기다. 용천산(湧天山, 544m), 시명산(675m), 불광산(佛光山, 660m), 대운산(大雲山, 742.7m), 배읍봉(湃揖峰, 362m), 화장산(華莊山, 362m), 안봉산(安峰山, 122m)을 지나 회야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산줄기로 그 길이는 28.7km이다.

 

 

대운산 정상은 한마디로 잘 가꾸어진 쉼터이다. 정상의 어림 전체를 나무데크를 깔아놓고 주변에 의자들을 배치해 놓았다. 전형적인 쉼터 풍경인 것이다. 한가운데에 있는 어른의 키 높이의 정상표지석도 데크가 감싸고 있어, 흡사 데크 위에 살짝 올려놓은 것 같은 모양새이다. 대운산 정상에는 정상석 외에도 산행안내도와 이정표(상대리 4Km/ 21.2Km/ 장안사 5.4Km)가 세워져 있다. 정상은 동쪽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저 멀리 동해바다가 희미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다.

 

 

 

 

대운산 정상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대운산 제2은 왼쪽, 도통골로 내려가려면 이정표의 상대리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고민 끝에 도통골로 내려가기로 한다. 집사람과 함께 산행을 할 때에는 총 산행시간이 5시간을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만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도통골로 내려가는 길은 나무계단으로 시작된다. 나무계단의 양쪽 가장자리에는 밧줄로 난간을 만들고, 계단을 설치할 수도 없는 곳에는 어김없이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는 등 안전(安全)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날카로운 돌부리가 많으면서도 가파른 경사(傾斜)의 능선이 그만큼 부담스럽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상에서 20분쯤 내려오면 커다란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큰바위전망대’(이정표 : 상대마을 3.6Km/ 대운산 정상 0.4Km)이다. 한쪽이 벼랑으로 이루어진 바위 위로 오르면 시야(視野)가 활짝 열리면서 저 멀리 동해바다가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나무데크로 꾸며진 전망대는 건너편의 바위벼랑 위에 만들어져 있다. 전망대 옆의 바위벼랑에 로프 하나가 길게 늘어진 것이 보인다. ‘한국군 출신만 가능합니다.’ 로프를 잡고 내려가 볼까 하는데 함께 산행을 하고 있던 산악회의 리더가 하는 말이다. 물론 그 상대는 나, 카투사(KATUSA :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출신인 나는 사이비 군인(似而非 軍人) 출신이니 위험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난 미군(美軍)들과 함께 암벽훈련(巖壁訓練)을 제법 길게 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비록 휴양과 겸해서 한 것이지만...

 

 

 

 

 

 

대운산은 그 산세(山勢)가 부드럽고 그윽한 것이 전형적인 육산(肉山=흙산)이다. 그러나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제법 암팡진 구석도 없지 않다. 그 암팡진 곳이 바로 대운산 정상에서 큰바위를 거쳐 도통골로 내려가는 능선이다. 대운산이 흙산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은 대부분의 능선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심심찮게 터지는 조망(眺望) 외에도 짜릿한 스릴(thrill)을 즐기면서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곳곳에 난간과 데크계단 등 안전시설들을 만들어 놓았지만 나머지는 거친 바윗길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무릎이 약한 사람들이 이 코스를 하산코스로 잡았을 경우에는 자칫 죽음의 구간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다.

 

 

 

정상을 출발해서 55분쯤 지나면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도통골에 내려선 것이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3 공영주차장 2.6Km/ 대운산 제22.2Km/ 대운산 정상 1.6Km)로 나뉜다. 도통골을 따라 공영주차장 방향으로 내려가면서 산행을 이어간다. 도통골은 계곡이 깊고 수량이 풍부한 편이다. 또한 숲이 울창한 데다 너른 암반(巖盤) 위로 흐르는 계류가 폭포와 소()를 만들어 놓아 여느 이름난 계곡에 못지않은 풍경(風景)을 연출하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심심찮게 수영금지경고판이 눈에 띄는 것을 보면 소()의 깊이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당연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만하다. 이는 해마다 여름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 증거는 내려가는 길에 곳곳에서 눈에 띄는 대피소와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참고로 도통(道通)은 원효가 이 계곡에서 도를 닦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도통골에 내려서서 10분쯤 걸으면 첫 번째 대피소(이정표 : 3공영주차장 1.8Km/ 대운산 정상 2.4Km)가 나오고, 조금 후에는 폭포(瀑布)에 이르게 된다. 폭포는 높이가 3m정도로 결코 낮지 않은데다 물줄기 또한 꽤나 우렁차다. 거기다가 폭포 아래의 소()까지 깊으니 폭포의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도통골의 백미(白眉)로 알려진 구룡폭포(九龍瀑布)이다. 폭포 아래의 소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다가 여덟 마리는 모두 승천(昇天) 했는데 나머지 한 마리는 결국 승천을 하지 못했다는 슬픈 전설(傳說)을 간직하고 있는 폭포이다.

 

 

 

첫 번째 대피소에서 다시 12분쯤 내려오면 두 번째 대피소가 나온다. 산길은 계곡 옆을 따르다가 불가피할 경우에는 계곡을 가로지르기도 하면서 이어진다. 그러다가 산길이 갑자기 도로 수준으로 넓어지면서 길가에 쉼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중 하나가 대운산 편한 쉼터입구에 그냥 마음편히 쉬어가라고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 거기에다 커피와 차는 직접 타서 마시라는 글귀까지 적혀있는 것을 보면 무료로 제공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나그네들에게 보시(布施)를 베푸는 마음, 이게 바로 부처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나는 오늘 원효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도통골에서 또 한 명의 부처를 보았다.

 

 

 

산행날머리는 제3공영주차장

편한 쉼터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박치골에서 내려오는 길과 합류(이정표 : 박치골 1.94Km/ 구룡폭포 0.99Km)하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내원암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게(이정표 : 내원암 1.78Km/ 대운산 정상 4.93Km) 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제3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두 번째 대피소에서 주차장까지는 25분 정도가 걸린다. 주차장의 오른편에 커다란 탑() 하나가 보인다. ‘한국전쟁 대운산 전적기념탑이란다. 6.25동란 때 이곳 도통골은 파르티잔(partisan)들의 소굴이었다고 한다. 북한 패잔병과 토착 파르티잔 등 100여명이 이곳에 머물며 아군들을 괴롭혔던 모양이다. 결국 산불을 질러 이들을 소탕했는데, 그 영향으로 도통골을 비롯한 대운산에는 아직도 아름드리 나무가 드물다는 것이다.

 

 

                                                    

 

가지산((加智山, 1,240m)

 

산행일 : ‘14. 4. 12()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과 청도군 운문면, 그리고 밀양시 산내면의 경계

산행코스 : 운문령귀바위상운산(1,118.4m)쌀바위가지산중봉(1,160m)석남사주차장 삼거리석남사 앞 주차장(산행시간 : 4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송암산악회

 

특징 : 1979년 도립공원(道立公園)으로 지정된 가지산은 해발 1,000m가 넘는 산군(山群)들로 이루어진 영남알프스의 산중 최고봉이다. 가지산은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흙산이지만 곳곳에 암릉과 거대한 바위들이 도사리고 있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베틀같은 베틀바위, 딴청을 부리고 있는 딴바위, 끼니마다 한 사람이 먹을 만큼 나오던 쌀이 욕심쟁이의 욕심 때문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의 쌀바위 등이 산행 길을 심심찮게 하는 것이다. 이정표 등 등산로 정비는 깔끔하게 잘 되어 있는 편, 경고판(警告板)이나 안내판이 하도 많이 세워져 있어서 차라리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가지산의 또 하나의 볼거리는 철쭉이 아닐까 싶다. 이곳의 철쭉군락지는 천연기념물(462)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운문령(雲門嶺 :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 울산방면으로 달리다가 덕현교차로(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서 69번 지방도로 옮겨 운문면방면으로 들어가면 버스는 구불구불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도로를 힘겹게 달려 운문령 고갯마루에 올려놓는다. 가지산과 문복산 사이에 위치한 운문령은 울산 언양과 경북 청도군을 잇는 해발 640m의 높은 고갯마루이다. 운문령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구름()과 인연이 깊다. 교통이 지금같이 편해지기 전에는 울산의 소금, 해산물과 청도의 농산물이 이 고개를 통해 오갔는데, 이때 상인(商人)들이 한 치 앞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짙게 낀 구름 때문에 길을 헷갈리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고 해서 구름재(운문령)’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운문령에서 서쪽 방향으로 난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 부근에 영남알프스 개관도와 이정표(귀바위 2.5Km, 쌀바위 3.5Km, 가지산 4.8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들머리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환경감시초소를 지나자마자 왼편에 산길이 얼핏 보인다. 그러나 굳이 산길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주변 경관(景觀)이 곱지도, 그렇다고 거리를 단축시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쌀바위로 연결되는 임도는 차량(車輛)이 지나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넓다. 아니나 다를까 길바닥에 자동차 바퀴자국이 얼핏 나타나는 것을 보면 누군가는 이 길을 자동차로 지나갔다는 증거일 것이다. 임도를 따라 15분 정도 걷다보면 길이 왼편으로 크게 휘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오솔길 하나가 나타난다. 갈지()자를 그리면서 위로 올라가는 임도가 싫은 사람들이, 이를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다니면서 시나브로 생겨버린 지름길이다.

 

 

 

지름길로 들어서서 가파르게 잠깐 치고 오르면 조금 전에 헤어졌던 임도와 만나게 되고, 이 임도를 따라 조금 더 진행하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석남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그리고 진행방향의 임도 왼편에 다시 지름길이 열린다(이정표 : 가지산 4.4Km/ 운문령 0.9Km, 석남산 3.6Km). 또 다시 지름길로 들어선다. 널따란 임도보다는 지름길이 더 자연친화적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지름길은 가파른 오르막길이 제법 길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얼마 후(첫 번째 지름길에서 10)에 다시 만나게 되는 임도(이정표 : 가지산 4.1Km/ 석남사 3.9Km)를 가로질러 세 번째 지름길로 접어들면 산길은 다시 가파르게 위로 향하다가 5분 후에는 또 다시 임도(이정표 : 쌀바위 2.3Km, 가지산 3.8Km/ 석남사 4.2Km)와 만난다. 이곳이 오늘 산행에서 가장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귀바위와 상운산으로 가는 길이 이곳에서 나뉘는데도 이정표에는 그 두 곳이 나타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상운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임도를 벗어나 무조건 산길로 들어서야 한다.

 

 

 

 

 

 

상운산을 향해 산길로 접어들면 주변풍경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라진다. 지금까지는 줄곧 흙길이었지만 이곳에서부터는 가끔가다 바윗길도 나타나는 것이다. 덕분에 조망(眺望)이 열리면서 진행방향에 귀바위가 언뜻언뜻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여긴 아직도 겨울이네요.’ 집사람의 말마따나 앙상한 나뭇가지만 허공에 걸려있는 능선은 아직도 완연한 겨울풍경이다. 1000m가 넘는 이곳까지 봄이 찾아오기에는 아직은 벅찼나보다.

 

 

 

가파르게 고도(高度)를 높였던 산길은 1m를 넘기더니 언제 그렇게 가팔랐냐는 듯이 완만하게 변해버린다. 그러다가 별 의미 없는 이정표(가지산/ 국립운문산자연휴양림/ 운문령/ 국립운문산자연휴양림)를 지나면 왼편이 깎아지른 천 길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소의 귀’, 또는 부처의 귀를 닮았다는 귀바위이다. ‘상운산 갈림길로 접어든지 20분 정도가 지난 지점이다.

 

 

 

귀바위 위는 천혜의 전망대(展望臺)이다. 사방이 툭 터져있어서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眺望)이 터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시계(視界)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아마 가늘게 떨어지는 빗방울 탓일 것이다. 아쉽게도 첩첩이 쌓인 영남알프스의 산군(山群)들은 그저 마음속으로만 담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귀바위에서 능선을 따라 다시 10분 정도 더 걸으면 상운산 정상이다. 상운산 정상은 아래서 올려다 볼 때에는 제법 날카롭게 선 바위봉우리로 보이지만, 막상 올라와보면 의외로 바위 몇 개가 바닥에 깔려있는 밋밋한 흙봉우리이다.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없이 정상표지석이 홀로 지키고 있는 정상에서 다시 한 번 조망(眺望)이 열린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상운산 정상에서 내려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이정표(쌀바위 1.4Km,가지산 2.9Km/ 운문령 1.3Km, 석남사 5.1Km)에서 산길은 왼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바꾸면서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비록 이정표에는 없지만 이곳에서 직진하면 운문산으로 가게 된다. 정상에서 7분쯤 내려오면 헬기장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임도삼거리(이정표 : 쌀바위 0.6Km, 가지산 2.1Km/ 석남사 5.9Km)와 만나게 된다. 임도의 한쪽 귀퉁이에 만들어진 전망데크 옆으로 희미한 오솔길이 보이지만 무시하고 임도를 따라 쌀바위 방향으로 진행한다. 앞서가는 낙동정맥 종주꾼들 조차도 임도를 따르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임도를 따라 5~6분쯤 걸으면 임도가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전면에 거대한 바위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 방향을 트는 지점에 세워진 휴대전화 통화 불량지역경고판(警告板)의 하단(下段)이곳 학심이골은 급경사의 험준한 산세로 인해 조난사고가 빈번한 지역이라는 문구(文句)가 적혀있는 것을 보면, 오른편에 보이는 오솔길이 학심이골로 내려가는 등산로인 모양이다.

 

 

 

▼ '학심이골 갈림길을 지나면서부터는 전면에 보이는 쌀바위를 눈요기 삼아 걷기만 하면 된다. 눈요기를 즐기면서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드디어 영남알프스의 명물이라는 쌀바위(米岩). 쌀바위의 아래에 나무데크로 쉼터를 만들어 놓았고, 그 옆에 쌀바위 대피소(매점)’가 설치되어 있으니 골라서 앉기만 하면 된다. 물론 대피소에 앉으려면 라면 등 간편한 음식이나 동동주 등 음료를 팔아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쌀바위 방향으로 난 나무데크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쌀바위 바로 아래에 샘터가 자리 잡고 있다.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석간수(石間水)이니 한 모금 마셔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옆에 놓인 플라스틱(plastic) 바가지에 가득 담아 벌컥벌컥 들이켜 본다. 감로수(甘露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샘물은 달고 시원했다. 여기서 쌀바위에 대한 전설(傳說) 하나, ‘옛날에 이 바위 아래에서 산 아래 마을로 탁발(시주)을 하러 나가는 시간까지 아까워할 정도로 수도에 정진을 하던 스님이 머물렀단다. 부처님이 이를 가상하게 여겼던지 바위틈에서 쌀이 솟아나도록 해준 모양이다. 어느 해 마을에 흉년이 들자 쌀바위에 대한 얘기를 전해들은 마을 주민들이 보다 많은 쌀을 얻고자 바위를 깨뜨렸고, 이후부터는 바위틈에서 쌀 대신에 물만 흘러나왔다고 한다.’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인간들의 욕심이 불러온 샘물이 이제는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자비를 베풀고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쌀바위의 왼편은 수백 길의 낭떠러지이지만 오른편은 완만한 경사(傾斜)의 흙길이다. 가지산으로 가는 등산로는 바위 뒷덜미 쪽으로 난 나무데크 계단(입구 이정표 : 가지산 1.5Km/ 석남사 6.5Km)을 따라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바위 뒷덜미 쪽으로 올라서면 왼편에 바위봉우리가 나타난다. 그리고 오른편에도 다른 바위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다. 그러고 보니 쌀바위는 하나의 봉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바위봉우리 위로 오르면 진행방향에 있는 가지산 정상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다가온다.

 

 

 

쌀바위를 지나면 산길은 다시 흙길로 변한다. 앙상한 가지만 허공에 걸려있는 산길은 또렷한 볼거리는 없다. 쌀바위와 그 뒤를 지키고 있는 상운산이 조망되는 헬기장(‘휴대전화 통화불량지역경고판이 세워져 있고, 학심이골로 내려가는 길이 험하니 조심하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이곳에서도 학심이골로 내려갈 수가 있는 모양이다)을 지나면 산길은 제법 가파르게 변한다. 거기다 길바닥에는 크고 작은 돌까지 깔려있어 올라가는 게 여간 사납지 않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했던지 길가에 안전로프가 길게 매어져 있다. 그리고 정상 가까이에는 등산객들을 위해 길게 침목(枕木)계단까지 만들어 놓았다.

 

 

 

 

쌀바위를 출발해서 중간에 봉우리 두 개를 넘으면 45분쯤 후에는 드디어 가지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커다란 바위봉우리인 가지산 정상에는 두 개의 정상표지석과 낙동정맥표지석, 삼각점(언양 11, 1998복구) 그리고 태극기가 매달려 있지 않은 빈 국기봉과 이정표(석남터널 3.1Km/ 운문산 5.3Km/ 쌀바위 1.3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정상 바로 뒤편에 대피소(매점)가 있으니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조용한 정상에 서면 그야말로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문복산, 운문산, 재약산,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 등 가지산을 향해 납작 엎드린 영남알프스의 주요 산봉들이 파도처럼 너울거리고 있다. 산행들머리에서 가지산 정상까지는 2시간5분이 걸렸다.

 

 

 

 

가지산(加智山)은 가지산(迦智山·伽智山), 석남산(石南山), 석면산(石眠山), 실혜산, 천화산 등 여러 개의 다른 이름들을 갖고 있다. 영남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맹주봉이며, 동부경남의 최고산이라는 위풍 덕분이 아닐까 싶다. 가지산이라는 이름은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최초문파인 가지산파의 스님이 이 산에 와서 절을 세웠다고 해서 가지산(迦智山 加 또는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외에 가지를 까치의 옛말로 보는 설도 있다. 신라 때 원광(圓光)법사가 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해신(海神)으로부터 운문산에 까치들이 쪼는 최고의 길지가 있을 것이니, 그곳에 절을 지어 달라.’는 말을 듣고 창건한 절이 청도의 운문사라고 한다. 이 운문사를 옛날에는 작갑사(鵲岬寺 까치 절) 또는 갑사(岬寺)라고도 불렀다. 이런 이유로 해서 까치산으로 불려오다가 언젠가부터 가지산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운문산으로 가는 능선에 있는 헬기장

 

 

정상에서 이정표가 가리키는 석남터널 방향으로 내려선다. 두 개의 정상석 중에서 큰 정상석의 정면 방향이다. 내려가는 길은 바윗길로 경사(傾斜)가 제법 가파르다. 거기다가 바닥의 바위가 날카롭게 갈라져 있으므로 내려서는데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능선안부 고갯마루(이정표 : 석남고개 2.6Km/ 제일농원 3.4Km/ 가지산 0.35Km)에 이르게 된다. 밀양고개라 불리는 고갯마루로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할 경우 용수골을 따라 제일농원과 삼양교로 내려갈 수 있다.

 

 

 

밀양고개에서 다시 맞은편 능선을 10분 정도 치고 오르면 중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밋밋한 바위봉우리인 중봉에 올라서면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열린다. 쌀바위에서 가지산을 거쳐 운문산방향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온통 암릉으로 나타난다. 그 형상이 흡사 기다랗게 바위병풍(屛風)을 펼쳐 놓은 것 같다. 중봉 정상에서 산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직진으로 보이는 능선을 탈 경우에는 제일농원으로 내려서게 되므로, 낙동정맥은 왼편에 보이는 비탈길로 내려서야 한다.

 

 

 

중봉에서 석남터널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거칠기 짝이 없다. 경사(傾斜)가 가파르기 짝이 없는 산길은 홈통처럼 깊이 파헤쳐져 있는데다가 바닥에는 크고 작은 돌들까지 박혀있어서 내려서기가 여간 고약한 게 아닌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안전로프가 매어져 있고, 비탈진 왼편에는 목책(木柵)으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조심스럽게 15분 정도를 내려가면 산길은 왼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면서 나무계단으로 연결된다(이정표 : 석남터널 2.7Km/ 가지산 0.7Km). 이곳에서 계속해서 능선을 고집할 경우에는 밀양이나 울산 방면으로 내려가게 된다.

 

 

 

석남터널을 향해 방향을 틀면 기나긴 나무계단이 길손을 맞는다. 산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산행 중에 계단(階段)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보통이다. 내려서다보면 무릎에 체중을 실려 관절(關節)에 지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의 계단은 예외이다. 계단 간의 높이를 낮게 만들어 놓은 덕분에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아서 내려서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니다. 조그마한 것에까지 신경을 써준 도립공원 관계자에게 지면을 통해서나마 감사를 드려본다.

 

 

 

계단을 따라 7분 정도 내려서면 오른편에 가지산 석남재 대피소(매점)’가 보인다(이정표 : 석남터널 1.8Km/ 가지산1.6Km). 앞서 걷던 일행이 매점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되돌아 나온다. 쉬는 날인지 문이 닫혀있고, 매점 앞에 진열되어 있는 막걸리병은 빈병이더란다. 마침 산길이 완만(緩慢)하게 변해있기에 편한 마음으로 막걸리를 사먹으려 했던 자그만 소망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석남재대피소를 지나면 산길은 경사(傾斜)가 완만한 흙길이 계속된다. 이 구간은 철쭉나무 22천 그루가 모여 있는 국내 최대의 철쭉군락지(群落地)라고 한다. 이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아까 지나온 석남재대피소의 앞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막상 산길을 걷다보면 철쭉꽃은 눈에 띄지 않고 연분홍으로 곱게 핀 진달래꽃만이 길손을 맞는다. 철쭉이 꽃망울을 열려면 아직도 많은 날이 흘러야만 하는 모양이다. 다시 찾아오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가지산, 이왕에 온 김에 철쭉꽃들이 펼치는 향연(饗宴)까지 보았으면 하는 내 바람은 이루어지기에는 너무 큰 바람이었던 모양이다. 대피소에서 13분쯤 걸으면 석남사주차장 갈림길(이정표 : 석남사주차장 1.7Km/ 석남터널 1.0Km, 능동산 3.9Km/ 가지산 2.4Km)’이 나온다. 석남고개까지 더 진행하다가 석남사로 내려설 수도 있으나 이곳에서 석남사로 내려가기로 한다. 석남고개에서 내려갈 경우 도로를 따라 내려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석남사주차장으로 내려서는 길은 한마디로 거칠다. 아니 위험하다고 분류해도 과()하지 않을 구간이다. 바윗길의 경사(傾斜)가 제법 까다로운데도 안전로프 하나 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흙이라도 보일라치면 어김없이 마사토(磨沙土), 미끄럽다는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양 미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다행이도 위험구간은 금방 끝난다.

 

 

 

위험구간이 끝나면 이번에는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 계속된다. 길가의 나무들은 어느새 소나무들로 바뀌어있고, 그 아래에는 연분홍 진달래꽃이 여린 바람결에 나풀거리고 있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진한 향, 솔향이 분명하다. 그 솔향 속에는 그렇게도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듬뿍 들어있을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석남사주차장

진달래꽃들 좀 뜸하다 싶으면 이번에는 철쭉꽃들이 마중 나온다. 아까 능선의 철쭉군락지를 지나올 때 그렇게도 고대했던 철쭉잔치를 보게 된 것이다. 비록 철쭉꽃의 밀도(密度)가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아쉬워하던 내 마음을 달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하산길은 조금도 지루하다 생각할 틈이 없이 이어진다. 철쭉꽃들이 무리를 지어 나타나는가 하면 내리막길에 놓인 침목(枕木)계단은 나선형(螺旋形)의 고운 문양(紋樣)을 만들어내고 있다. 주변경관에 취해 1시간 정도를 걷다보면 이내 석남사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귀경 길에 들른 언양 한우불고기촌

가지산 산행의 하산지점은 울산시 울주군이다. 그리고 울주군에는 한우불고기로 유명한 언양읍이 위치하고 있다. 2006년 전국 최초로 먹을거리 특구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이곳의 한우불고기가 유명하다니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1인분(170g)16천원인 불고기는 전남 담양에서 맛본 적이 있는 떡갈비와 유사했다. 그러나 양념이 된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내 입에는 별로여서, 서비스로 나온 육회로 술안주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장복산(長福山 593m)

 

산행일 : ‘14. 4. 2()

소재지 : 경남 진해시 여좌동, 경화동과 창원시 안민동의 경계

산행코스 : 진해구민회관대광사장복산헬기장덕주봉안민고개드림로드진해중앙고(진해남중)경화역(산행시간 : 3시간40분, 안민고개까지는 2시간40분)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진해 사람들은 축복(祝福)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산행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던 생각이다. 한번쯤 더 찾아도 좋을 만큼 장복산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장복산은 전체적으로는 육산(肉山=흙산)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다. 그러나 능선의 상부는 온통 암릉, 우리가 그림책에서 보아오던 공룡의 등줄기를 떠올리면 그 생김새가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때문에 산행 내내 짜릿한 스릴(thrill)을 즐기면서 암릉산행의 특징인 조망(眺望)까지 함께할 수 있다.

 

산행들머리는 진해구민회관(창원시 진해구 진해대로 325, 태백동 98번지)

남해고속도로 남산 I.C에서 내려와 25번 국도를 타고 김해방향으로 ‘3호 광장(창원시 진해구 석동)’에서 우회전하여 2호선(진해대로)을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진해구민회관 앞에 이르게 된다. 구민회관 앞에 제법 너른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으니 주차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구민회관 앞에서 2호선 국도를 따라 오른편 장복터널 방향으로 걸으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장복산 조각공원(彫刻公園)’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요즘같이 벚꽃 축제(祝祭)’가 한창일 때에는 차량의 출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산행시간이 10분 정도 더 늘어났지만 일행들은 다들 염두에 두지 않는 눈초리다. 아마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의 화사한 자태(姿態) 때문이리라. 눈을 들면 사방(四方)이 온통 벚꽃뿐, 왜 이곳 진해를 벚꽃의 고장이라고 부르는지 금방 고개가 끄떡여진다.

 

 

구민회관에서 5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오른편에 대광사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차량을 이용할 경우에는 조금 더 위에 있는 장복로사거리에서 우회전해서 삼밀사로 들어가는 게 옳지만, 도보(徒步)로 갈 경우에는 대광사의 왼편 담장을 끼고 난 오솔길을 따라 가는 것이 더 간편하기 때문이다. 대광사를 지나면 잘 가꾸어진 공원(公園)이 나타나고, 이어서 삼밀사로 올라가는 도로를 만나게 된다. 이 일대가 장복산 조각공원(彫刻公園)’일 것이다. 이 공원에는 사자상이나 인어여인상 등 조각상들 외에도 각종 편의시설과 체력단련시설, 그리고 휴식시설을 갖추고 있다. 거기다 수십 년은 묵었음직한 벚꽃나무들이 늘어선 삼밀사 진입로의 흐드러지게 핀 벚꽃까지 더하니 이보다 더 나은 공원이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다 장복산은 진해시민들에게는 하나의 축복일 것이다. 공원을 지나다보면 양옆이 휑하니 트여있는 네모의 나무박스들이 눈에 띈다. 그 안에서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쉬고 있는데, 마치 여염집의 방을 엿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공원(公園)의 시설들이 끝나갈 즈음에 명상의 숲이라고 쓰인 빗돌 하나를 만나게 된다. 등산로는 돌비석 옆 작은 화단 사이로 나있다. 이때부터 산행 풍경이 많이 변한다. 그동안 주류를 이루던 벚꽃나무들 외에도 굵직한 편백나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순수한 편백나무 숲으로 변해버린다. 장복산의 특징 중 하나인 편백나무 숲속에 들어선 것이다.

 

 

 

편백나무 숲을 통과하면 임도(林道)가 나온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쯤 지난 지점이다. 임도로 올라선 지점에서 왼편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안내도(案內圖)와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나 개의치 말고 맞은편의 가파른 절개지(切開地)를 치고 올라야 한다. ‘숲속 나들이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그쪽으로 들어설 경우 엉뚱한 곳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절개지를 올라서면 잡티라곤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편백나무들이 마치 사열(査閱)이라도 하려는 듯이 늘어서 있다. 왜 사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가 하면 줄을 지어 나란히 서있는 나무들이 마치 군인(軍人)들이 사열이라도 하는 것처럼 반듯반듯 하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림에 공을 들였다는 증거이리라. 아무튼 오늘 산행은 당연히 웰빙(well-being)산행이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걸을 수는 없다. 그만큼 산길이 경사(傾斜)가 가파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칠게 숨을 쉬면 쉴수록 몸에 더 이로우니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발걸음의 속도(速度)를 높이면 높일수록 들이마시는 숨은 가빠지고, 그럴수록 청량한 바람은 폐를 가득 채운다. 그 바람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가득할 것이다. 이런 게 바로 행복 아니겠는가.

 

 

 

임도를 출발한지 35분쯤 지나면 커다란 암벽(巖壁)이 앞을 가로막고, 이를 왼편으로 우회(迂廻)해서 오르면 바로 장복산 정상(이정표 : 덕주봉 1.5Km/ 마진터널 1.2Km/ 삼밀사 0.5Km)이다. 오르는 동안 가끔 길이 가지를 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마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 오르면 어렵지 않게 정상까지 이를 수가 있다.

 

 

거대한 바위봉우리인 장복산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외에도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국기봉이 세워져 있다.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진 탓에 볼거리가 많지만 대신 불편한 점도 있다. 정상이 비좁은 탓에 달리 쉴만한 곳을 못 찾은 사람들이 정상표지석 근처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정상에서의 인증사진 찍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참고로 장복산은 삼한시대에 장복(長福)이라는 장군이 이 산에서 말타기와 무예(武藝)를 익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일품이다. 사방팔방으로 시야(視野)가 탁 트이기 때문이다. 같은 능선 상에 있는 덕주봉과 시루봉은 물론이고 무학산과 대암산, 비음산 등이 또렷하다. 산뿐만이 아니다. 발아래에는 진해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 남해의 푸른 바다 위에는 올망졸망한 섬들이 파도에 떠밀려 두둥실 떠다니고 있다.

 

장복산에서 덕주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장복산 정상을 내려서면 가장 먼저 진달래가 반긴다. 무르익은 봄이 주는 부수적(附隨的)인 선물이다. 장복산은 벚꽃으로 유명한 산이기에 사실 진달래는 생각도 안했는데 활짝 핀 진달래가 길손을 맞고 있는 것이다. 비록 영취산이나 화왕산 등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산들에는 미치지 못하나 능선의 곳곳에 무리지어 피어난 진달래꽃들은 산행 중의 눈요깃감으로는 넘치고도 남을 정도다. 산에서 만나게 되는 봄의 전령사(傳令使)는 뭐니 뭐니 해도 진달래이다. 사람들은 보통 봄의 전령사를 얘기할 때 먼저 매화나 산수유를 꼽지만 산에서 이들을 접할 기회는 사실상 적다. 두 나무 모두 유실수(有實樹)이다보니 마을 어귀 또는 밭의 두렁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봄의 전령사는 진달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덕주봉 가는 길에 뒤돌아본 장복산 정상

 

 

장복산 정상을 내려서서 10분쯤 지나면 쉼터를 겸한 정자(亭子)가 보이고, 이어서 10분쯤 더 걸으면 진흥사 갈림길(이정표 : 덕주봉 1.3Km/ 진흥사 1.2Km/ 장복산 0.8Km)에 이르게 된다. 갈림길 옆에 또 다른 정자(亭子)쉼터가 만들어져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능선은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평안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산길은 전형적인 흙길, 가끔 바위봉우리(언덕 수준)라도 나타날라치면 산길은 어김없이 좌우로 우회(迂廻)를 하면서 잘도 피해 지나간다. 덕분에 모처럼 여유로운 산행을 즐겨볼 수 있는 구간이다. 마침 주위에는 꽃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쉬엄쉬엄 걷기에 딱 좋다고 할 것이다. 능선에 활짝 핀 진달래와 산사면(山斜面)을 하얗게 수놓고 있는 산벚꽃, 거기다 산 아래에는 활짝 핀 벚꽃들이 하얀 띠의 곡선(曲線)까지 만들어내고 있으니 한눈을 팔 새조차 없다.

 

 

 

 

주변 경관(景觀)에 취해 느긋이 걷다보면 25분쯤 후에는 창원 예비군훈련장 갈림길(이정표 : 안민고개 2.7Km/ 예비군훈련장 1.9Km/ 장복산 1.3Km)과 도불산약수터 갈림길(이정표 : 안민고개 2.5Km/ 도불산약수터 1.3Km/ 장복산 1.5Km)을 연속해서 만나게 된다. 이 부근에도 정자(亭子)가 세워져 있으니 잠시 쉬면서 한숨을 돌려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도불산약수터 갈림길에서 덕주봉 정상은 금방이다. 올라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5분 정도면 충분하니 정상의 바로 아래에 갈림길이 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능선에서 내려다본 장복산은 온통 편백나무들이 점령하고 있다. 아까 올라올 때 보았던 임도(林道)의 양 편에 심어진 벚꽃나무를 제외하고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온통 편백나무들뿐인 것이다. 녹색의 제복(制服)을 차려입은 군인들이 사열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그 늘어선 줄이 반듯반듯하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진해시가지, 그곳에 해군본부가 있다고 하니 아마도 저 병사들은 해군(海軍)인가 보다.

 

 

 

 

거대한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진 덕주봉은 앞을 가로막는 바위벼랑을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한 후 나무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길이 나있다. 그러나 집사람은 무작정 바위를 붙잡고 본다. 요즘 부쩍 손맛을 느끼기 시작한 집사람의 눈에는 저 정도의 암벽(巖壁)쯤이야 식은 죽 먹기로 보이는 모양이다. 별 수 없이 나도 그녀의 뒤를 따른다. 집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는 곳이라도 나올 경우에는 암벽등반의 스승격인 내가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위로 이루어진 덕주봉 정상은 나무데크로 전망대(展望臺)를 만들어 놓은 탓에 정상표지석은 난간의 밖에 있는 바위 위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정상석이 작기 때문에 자칫 그냥 지나칠 수도 있으니 주의할 일이다. 덕주봉 정상에서 또 다시 사방으로 시야야 탁 트인다. 진해 방향은 능선을 걸어오며 보아오던 풍경과 별반 다른 것이 없지만 왼편의 창원지역에 있는 산업단지(産業團地)는 한층 더 가까이에 다가와 있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기계소음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덕주봉을 지나면서 능선은 전형적인 바윗길로 변한다. 장복산은 누가 뭐래도 흙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능선의 머리 부분을 거대한 바위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는 것이다. 그 형상이 마치 닭()의 벼슬처럼 보이기도 하고, ()의 등에 난 뿔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당연히 능선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오늘 산행의 백미(白眉)라고 해도 과히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안민고개로 가는 길에 뒤돌아본 덕주봉 정상

 

 

비록 용의 등허리를 연상시키는 바윗길이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초보자들은 엄두도 못 냈을 구간이었겠지만 지금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비를 잘 해놓았다.

 

 

오늘은 춘사월(春四月), 능선에는 진달래가 가득하고, 그 아래에는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이 온통 산을 포위하고 있다. 물론 그 너머에는 작은 섬들이 마치 돛단배처럼 푸른 바다 위에 두둥실 떠다니고 있다. 전형적인 다도해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 나무데크전망대를 끝으로 암릉은 끝을 맺는다. 이후의 능선은 전형적인 육산(肉山=흙산)으로 되돌아간다. 이어지는 산길이 상당히 가파르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바닥의 흙이 폭신폭신 촉감(觸感)까지 전해줄 정도로 고운 탓에 무릎에 충격을 줄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능선이 흙길로 바뀌면서 벚꽃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덜 자란 탓에 나무도 여리고 꽃망울 또한 튼실하지가 못하다. 조림(造林)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일 것이다. 산길은 수많은 돌탑들을 머리에 이고 있는 바위군락을 지나면서 경사가 한층 완만해지고, 길가의 벚나무들은 서서히 그 굵기를 더해간다. 그에 따라 꽃망울들 또한 화사함이 짙어져간다.

 

 

 

덕주봉 정상을 내려선지 50분쯤 되면 능선 안부에서 오른편으로 갈림길 하나가 갈려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안민고개인데 곧장 진행할 경우에는 웅산을 거쳐 시루봉으로 가게 되니, 만일 벚꽃구경에 미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곳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나무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덕주봉에서부터 보이지 않던 이정표는 이곳에서도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헷갈리 수도 있으나, 갈림길 근처에 장복산 누리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이를 참조하면 될 일이다.

 

 

 

안민고개에서부터 본격적인 벚꽃잔치가 시작된다. 도로의 양편에 벚꽃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지만 난간 쪽이 나무들이 더 크고 우람하다. 그래서인지 도로의 난간 쪽에만 나무데크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며 순백(純白)의 향연 속으로 빠져든다. 어디선가 흘러온 향이 코끝을 짙게 간지른다. 아마 벚꽃향일 것이다. 벚꽃의 향이 이렇게 짙은 줄 예전엔 몰랐었다.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기껏해야 보름 남짓 절정을 이루는 '찰나'가 보내주는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안민고개에서 20분 조금 넘게 내려오면 첫 번째 매점(賣店)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도로를 벗어나 왼편으로 내려선다. 바로 천자봉까지 연결되는 천자봉 해오름 길이다. 해오름길로 들어서면 주변 풍경은 지금까지와는 딴판으로 변한다. 순백(純白)의 향연이 펼쳐지던 드림로드와는 달리 해오름길의 길가에는 붉은 벚꽃들이 물결을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해오름길을 따라 5분 조금 넘게 걷다보면 다시 오른편으로 난 오솔길 하나가 보이고, 이 오솔길을 따라 죽 내려오면 경화동에 이르게 된다.

 

 

 

 

산행날머리는 경화역

산에서 내려와 진해남중에서 큰 도로로 접어든 후 조금만 더 걸으면 경화역이다. 안민고개를 출발한지 1시간 남짓 걸렸다. 생각보가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을 보면 꽃구경에 시간을 많이 쏟았나 보다. 경화역에 들어서면서 다시 한 번 벚꽃잔치가 시작된다. 철로를 사이에 두고 어깨동무한 벚꽃터널이 아련하다. 탐스러운 벚꽃들이 화사한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르며 나도 몰래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만다. 극한의 아름다움은 가슴에 담을 수 있을 뿐 그 어느 미사여구(美辭麗句)로도 결코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눈물이 미사여구를 대신할 따름이다. 벚꽃터널 사이를 지나가던 열차가 역에 서는 것이 보인다. 지난 2000년 철거된 초라한 간이역에 기차가 서는 것은 관광객을 위한 서비스이다. 벚꽃이 만발할 때에만 열차를 잠시 멈추었다 가도록 한 것이다.

 

 

경화역을 뒤덮는 것은 순백(純白)뿐만이 아니다. 역을 뒤덮고 있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다. 그 대부분은 젊은이들, 그들이 내뿜는 싱그런 생명력이 벚꽃과 어우러지며 내 마음까지도 젊음으로 되돌아가게 만들고 있다. 그런 탓일까 오늘 집사람은 영낙없는 10대 소녀이다. 끝없이 깔깔거리며 촐랑대고 있다. 그런 집사람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춘사월(春四月)의 봄볕처럼 한없이 따스해진다. 이런 게 바로 행복일 것이다.

 

 

 

적벽산(赤壁山, 166m)-백마산(白馬山, 286m)-월명산(月明山, 334m)

 

산행일 : ‘14. 2. 8()

소재지 : 경남 산청군 신안면

산행코스 : 단성교적벽정적벽산산성교백마사망춘대백마산질매재월명산상사바위하촌마을(산행시간 : 2시간50)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적벽산과 백마산, 그리고 월명산은 높지 않은 산이다. 그렇다고 해서 넓지도 않다. 때문에 산행만 한다고 생각하고 찾아왔을 때에는 자칫 실망하기 쉬울 것이다. 마치 동네 뒷산을 오르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세(山勢)만은 다른 유명산들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곳곳에 나타나는 바위절벽(絶壁)하며 특히 월명산에서 만나게 되는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은 눈요깃거리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 산들은 옛이야기들을 안고 있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산행을 이어가다보면 나름대로 유익한 산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산행시간이 너무 짧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산행들머리는 단성교(: 산청군 단성면 강누리 1099-1)

대전통영고속도로 단성 I.C에서 내려와 두 번째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20번 국도를 타고 의령방면으로 들어가면 5분이 채 안되어 경호강(鏡湖江)을 가로지르는 단성교에 이르게 된다. 경호강(鏡湖江)은 남강(南江)의 상류를 따로 부르는 이름이다. 단성교()를 건너면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편은 신안면 시가지로 들어가는 길이고, 왼편은 경호강을 끼고 이어진다. 이 삼거리에서 산길이 열린다. 쉽게 말해서 단성교를 건너자마자 만나게 되는 삼거리의 왼편 코너에 산행들머리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들머리에 등산로라고 쓰인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비탈에 놓인 돌계단을 밟고 잠깐 오르면 삼거리(이정표 : 적벽산 정상 0.72Km/ 신안면사무소 0.26Km/ 단성교 0.10Km)가 나타난다. 오른편 길은 신안면사무소에서 올라오는 길이고, 적벽산 정상은 왼편에 보이는 기다란 철()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철계단을 타고 위로 오르면 잠시 후에 작은 전망바위를 만나게 된다. 멋진 조망(眺望)이 펼쳐지는 곳이다. 단성교 아래로 흐르는 경호강의 물줄기는 푸르기만 하고, 단성면 일대에 올망졸망 모여 있는 집들은 귀엽기까지 하다. 신안면 소재지인 원지리 시가지(市街地)가 코앞인 것은 물론이다. 저 멀리 보이는 산릉(山陵)은 아마 웅석봉이 아닐까 싶다.

 

 

 

 

 

바윗길 양편에 늘어선 소나무의 도열을 받고 조금 오르면 작은 정자(亭子)가 세워져있는 적벽정에 이른다. 들머리에서 12분 정도가 지난 지점이다. 정자 옆에는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라고 쓰인 빗돌(碑石)이 하나 놓여 있다. 얼핏 귓가를 스쳐가는 한마디, ‘()이 아니라 요(樂)라고 읽어야 하는 데요누군가가 잘못 읽었었나 보다. 그러나 잘못 읽는 사람들이 어디 그 사람뿐이랴. 저 문구(文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락()자로 읽는 것을. 하여튼 빗돌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와 백마산에서 월명산을 잇는 산줄기가 한 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강 건너 석대산 능선과 그 뒤에 펼쳐지는 웅석봉은 시원하기 그지없는 풍광(風光)을 자랑한다.

 

 

 

 

적벽정을 지나면 산책로처럼 널따란 산길이 완만(緩慢)하게 이어지고, 7~8분 후에는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체육공원을 지나 적벽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완만하다고 해서 무작정 발걸음을 재촉해서는 안 되는 구간이다. 산길 왼편이 절벽(絶壁)으로 이루어져 있는 탓에 곳곳이 멋진 전망대이기 때문이다. 절벽 위에 서면 S자로 흐르는 경호강과 백마산의 능선을 실컷 즐길 수 있다.

 

 

 

적벽산 정상은 제법 너른 공터에 정상표지석과 제단(祭壇), 이정표(백마산정상 1.69Km, 월명산 정상 2.27Km/ 단성교 0.82Km) 외에도 각종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요 아래에 살고 있는 하정리(신안면소재지) 주민들이 체육공원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상에서 백마산으로 가는 길은 꽤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러나 위험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기다 눈요깃거리까지 제공해준다. 가끔 경호강 물줄기와 곧게 뻗어나간 3번 국도가 내려다보이는 것이다.

 

 

 

정상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되고, 왼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2분 후에는 굴다리가 나온다. 바로 3번 국도 아래를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구석다리'라는 토속 지명을 가진 이곳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며 권율장군의 군영에서 머물던 이순신장군이 원균의 패전소식을 듣고 율돌목으로 돌아갈 때 지나갔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갈림길로 나뉘는 구석다리에서는 백마사로 가는 길을 택한다. 들머리에 백마사 표지석과 이정표(백마산 정상 0.98Km/ 적벽산 정상 0.71Km) 그리고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등산 안내도 뒤로 난 콘크리트 임도(林道)5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백마사에 이른다. 등산로는 사찰로 들어가기 직전에서 오른편으로 나있다. ‘절 안을 통과하면 더 쉽게 올라갈 수 있어요조그만 것에서까지 보살펴주고 싶어 하는 나이 든 보살님의 배려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일 것이다. 백마사는 자그마한 절이다. 그러나 대웅전 등 전각(殿閣)들이 반듯하게 지어져 있고, 단청(丹靑)까지 화려하게 채색(彩色)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시골 사찰(寺刹)치고는 제법 잘 나가는 듯하다. 산사에서 내려다보는 경호강의 풍경이 아름답다.

 

 

 

백마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절 마당의 오른편으로 열린다. 절 마당을 나서면 얼마(30m정도) 지나지 않아 산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들머리에 정상 900m’라고 쓰인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백마사를 나서 산죽(山竹)길을 10분 가까이 오르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망춘대 300m/ 정상)로 나뉜다. 이곳에서는 어느 쪽으로 진행하더라도 정상으로 갈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왼편으로 진행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절벽 위에 걸터앉은 바위전망대인 망춘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망춘대에서 바라본 조망(眺望)은 사뭇 뛰어나다. 발아래에 있는 경호강은 S자로 유유히 흐르고, 남쪽에 보이는 **)적벽(赤壁)은 강가에 기대선 형상으로 나타난다.

(**)적벽(赤壁)은 중국 송나라 때 대문장가인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의 배경이 된 양자강 적벽(호북성 황주 소재)의 경치에 못지않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곳 외에도 전남 화순군과 충남 금산군에 적벽(赤壁)’이라 불리는 바위절벽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 내가 가본 곳은 화순에 있는 적벽이다. 옹성산(572m) 자락의 깎아지른 절벽(絶壁)과 그 아래 동복호()가 어우러지는 풍광(風光)은 한 폭의 잘 그린 산수화(山水畵)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못 빼어나다. 이곳 산청의 적벽은 화순 것만은 못하다. 그러나 적벽산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정도이니 한번쯤은 가볼만한 나름대로의 풍취를 지녔지 않나 싶다.

 

 

 

망춘대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어렵지 않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10분쯤 숲길을 가노라면 왼편에 널따란 반석(盤石)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바위 표면에 10~15가량의 구멍들이 여러 개 보인다. 옛날 **)백마산성(山城)의 망루(望樓)를 박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구멍들은 이곳 외에도 여러 곳에서 만날 수가 있다. 한편 홍의장군 곽재우가 타던 말발굽 자국이라는 설()은 말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백마산성은 삼면(三面)이 절벽으로 둘레가 2,795척이고 동남쪽은 100여 척으로 된 자연산성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진주에서 밀려오는 왜적(倭敵)들을 막기 위해서 창의병(倡義兵)들이 이 산성을 지키고 있었다. 한번은 폭염(暴炎)7월인데 왜적이 성을 포위한 채 며칠이고 기다리는 지구전을 펼치는 가운데 성안에는 물이 떨어져서 사람과 말의 기갈이 막심하였다고 한다. 이때 한 지혜로운 장수가 말을 바위 끝에 세워두고 쌀을 말 등에 퍼서 던졌더니 왜병(倭兵)들이 모두 퇴각하였다고 한다. 산 아래에서 성을 포위하고 있던 왜병에게는 그것이 마치 성안에 물이 많아서 말을 미역 감기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이때 성안에 있던 병사와 말이 일시에 내달아 강물을 마셨더니 신안강 물이 세 치나 줄었다는 전설이 있고 그 일로 인하여 원래 이름이던 동산성이 백마산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산청군청 홈페이지에서 발췌)

 

 

 

망루를 박았다는 흔적들을 힐긋거리며 소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길섶에 작은 웅덩이들이 보인다. 물은 보이지 않는다. 하긴 이런 산꼭대기에 물이 있을 리가 없다. 지도(地圖)에는 연못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연유가 무엇일까. 6.25때 백마산에는 인민군(빨치산 : partisan)이 주둔했었고, 산 아래의 신안면소재지에 주둔하고 있던 경찰들과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戰鬪)가 벌어졌다고 한다. 아마 그 당시에 마실 물을 모아두었던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웅덩이를 지나면 금방 백마산 정상이다. 그러니까 망춘대에서 15분 정도가 지난 지점이다. 백마산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월명산 정상 1.01Km/ 적벽산 정상 1.69Km) 외에 제단(祭壇)이 하나 보인다. ‘면민안녕기원제단(面民安寧祈願祭壇)’이라는데 그럼 아까 적벽산 정상에서 보았던 제단은 무슨 용도였을까. 아무튼 백마산 정상에서는 진주시와 산청군이 경계를 이루는 집현산과 멀리 의령군에 위치한 한우산과 자굴산까지 눈에 들어온다.

 

 

 

백마산 정상에서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5~6분쯤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바위전망대에서 맞은편에 우뚝 솟아오른 월명산과 그 뒤에 펼쳐지는 둔철산을 조망(眺望)한 후에 다시 길을 나서면 이번에는 앙증맞은 로프지대가 나타난다. 통나무로 다리형태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다 로프를 늘어뜨려 놓은 것이 귀여울 정도이다.

백마산 정상에서 내려서는 길에 바라본 월명산

지리산 방향, 저멀리 보이는 산이 웅석봉일 것이다.

 

 

 

이어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그러니까 백마산 정상을 출발해서 12분 정도가 지나면 안부사거리(이정표 : 월명산 정상 0.72Km/ 산성마을 1.38Km/ 백마산 정상 0.29Km)에 이르게 된다. 마치 도끼로 찍어 놓은 듯이 움푹 파인 지형(地形)을 하고 있는 이 고갯마루는 일명 '질매재'로 불리는 곳이다. 도로가 뚫리기 오래전 중촌리 일대 주민들이 산청 장터를 오갔던 중요한 길목이라고 한다. 그런데 도끼로 찍은 듯이 움푹하게 파인 이유가 흥미를 끈다. 옛날 큰 인물이 나올 것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이 그 기()를 끊어 놓기 위해 조선의 지도에다 붓으로 먹점을 찍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질마재에서 맞은편 능선을 치고 오르며 산행을 이어간다. 월명산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거기다가 아기자기한 바윗길이 대부분이다. 그 덕분에 곳곳에서 조망(眺望)이 트인다.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나타난 바위마다 올라서고 본다. 백마산 정상이 바로 코앞이고, 그 오른편에는 경호강이 잘 어우러지고 있다. 동쪽 저 멀리로는 의령의 진산(鎭山)인 자굴산까지 보인다.

 

월명산 오르는 길에 바라본 백마산, 경호강과 잘 어울리고 있다.

 

 

조망과 스릴(thrill)을 함께 즐기며 어느 정도 치고 오르면 산길은 완만(緩慢)하게 변한다. 그리고 월명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질마재를 출발한지 30분이 조금 못 걸렸다. 꽤 너른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삼각점, 그리고 이정표(상사바위 0.60Km/ 백마산 정상 1.01Km)가 세워져 있다. 월명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천왕봉을 넘어 웅석봉에 이르는 백두대간이 웅장하게 펼쳐지고, 그 오른편에는 둔철산이 버티고 있다.

 

 

 

 

하산은 상사바위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 길은 평탄하게 이어지는데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의 전시장(展示場)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구간이다. 갈 길을 가로막는 거대한 바위를 왼편으로 우회(迂廻)하면 지도에 나와 있는 두 번째 전망대이다. 전망대에 서면 상사바위가 바로 코앞에 펼쳐진다.

 

길가에 보이는 바위들, 마치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다.

 

 

 

 

상사바위는 이곳 말고도 여러 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상사바위들은 하나 같이 애달픈 사연들을 갖고 있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연인들이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것은 상사바위가 꼭 천애절벽(天涯絶壁)인 탓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한이 서렸다는 선입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상에서 상사바위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렸다.

 

 

 

상사바위를 내려와 7분 정도 소나무 숲길을 헤치고 나오면 남평 문씨 묘()이다. 내려서는 길은 편안하게 내려설 수 있을 정도로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묘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오른편에 보이는 길로 내려서면 된다. 맞은편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320봉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시간이 짧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320봉까지 다녀와도 무방하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망(眺望)이 트인다고는 하지만 월명산 정상에서 본 조망에는 미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사슴농장 비슷한 농가가 나오고, 이어서 임도(林道)로 연결된다. 오른편 길가 계곡에 자그만 제단(祭壇) 하나가 보인다. 이런 곳에까지 제단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면 월명산이 뭔가 신령스러움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산행날머리는 하촌마을(신안면 중촌리)

이어서 방치된 묘() 몇 기()를 지나면 도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임도는 넓어지고, 잘 지어진 전원주택들을 만나게 된다. 날머리 근처에 세워진 빗돌에 의하면 가나머루농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주택들 주변에 심어져 있던 넝쿨들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머루나무였나 보다. 깔끔하게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하촌마을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남평 문씨 묘에서 30분 정도가 걸렸다.

 

 

건흥산(乾興山, 572.1m)-취우령(驟雨嶺=아홉산, 795.2m)

 

산행일 : ‘13. 9. 7()

소재지 : 경남 거창군 거창읍과 마리면, 주상면의 경계

산행코스 : 상율마을 버스정류장745취우령(아홉산)건흥산거열산성건계정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40)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특징 : 건흥산은 거창읍의 진산(鎭山)이다. 그러나 높이로 봐서는 거창의 산답지 않다. 1000m대의 산들이 즐비한 거창에서 500m 대의 산이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오늘 함께 답사한 취우령도 건흥산보다는 200m 정도 더 높다고 하나, 도토리 키 재기라고 봐야 할 것이다. 거기다가 두 산은 전형적인 흙산(肉山), 흙산의 특징대로 산 자체로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볼 필요는 없다는 얘기이다. 다만 거창 군민(郡民)들에게는 예외이다. 건흥산과 거열성을 한데 묶어 군립공원으로 조성해 놓아서 산책삼아 오르기에는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상율마을 앞 버스정류장

88고속도로 거창 I.C를 빠져나와 함양방면 24번 국도를 타고 마리면소재지(面所在地)까지 온다. 마리면소재지에 있는 지동교차로(交叉路 : 마리면 말흘리)에서 37번 국도를 갈아타고 무주방면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이 시작되는 율리마을(마리면) 앞 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 입구에 커다란 상율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도로 건너 맞은편에는 금원산참숯가마가 보이니 참조하면 된다.

 

 

 

버스정류장에서 상율마을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가는 가을 기운이 완연(完然)하다. 가을의 전령사(傳令使)라고 일컬어지는 코스모스가 길가에 만발해 있는가 하면, 들녘에는 잘 익은 벼이삭들이 그 무게를 못 이긴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잘 익은 밤까지 볼 수 있었더라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었을 텐데, 주변에 밤나무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상율마을은 율리(栗里)에 속한 일개 단위부락이다. 율리의 위쪽에 위치한 하나의 부락이라는 이야기 이다. 그렇다면 마을 이름으로 미루어볼 때에 밤나무와 연관이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주변에는 밤나무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도로를 떠난 지 5분 남짓이면 상율마을’, 마을 안 골목길을 다시 5분 남짓 걸으면 산자락 아래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갈림길에서 왼편의 임도(林道)로 접어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편에 오솔길 하나가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섣부르게 이곳으로 들어서면 안 된다. 본래의 들머리는 이곳에서 한참을 더 가야 나오기 때문이다. 선두대장이 들머리를 잘못 잡은 덕분에 우리 일행은 이 오솔길로 들어서게 됐다. 그렇다고 이 오솔길이 우리가 올라야할 첫 번째 봉우리인 745봉으로 오르는 길이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다. 얼마 후에는 본래의 등산로와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등산객들이 자주 이용하지 않기 탓에 길이 거칠어서 진행하기가 무척 힘들 따름이라는 얘기이다.

 

 

 

등산복 다 버리겠네요.’ 집사람의 말마따나 산길이 너무 사납다. 능선이 온통 잡목(雜木)으로 가득한 탓에 산길은 흔적을 찾기조차 쉽지가 않고, 혹여 산길을 찾았다고 해도 진행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명감나무와 산초, 산딸기 등 가시넝쿨들이 계속해서 발목을 휘감는다. 집사람은 모처럼 새로 장만한 등산복이 가시넝쿨로 인해 보푸라기가 일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오솔길로 접어들어 40분 정도를 가시넝쿨과 싸우다보면 지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을 따라 제법 또렷한 산길이 좌우(左右)로 나있다. 본래의 들머리에서 산행을 시작했었더라면 왼편에 보이는 길을 따라 이곳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곳에서부터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동안 우리가 걸어온 코스에 시그널 하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이 코스를 이용하는 산악회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의 등산로를 만나고 나서도 길은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길의 흔적이 조금 또렷한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것들은 거의 비슷하다. 소나무들이 가득한 숲길은 아직도 가시넝쿨들이 심심찮게 발목을 휘감지만, 다행인 것은 그 빈도(頻度)가 아까보다는 현저하게 줄었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오르막길은 경사(傾斜)가 완만(緩慢)하기 때문에 오르는 데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아쉽게도 별다른 볼거리는 제공하지 못한다. 전형적인 흙산인 탓에 산자체가 단조로울뿐더러, 짙게 우거진 소나무 숲은 조망(眺望)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소나무가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라고 한다. 힐링(Healing) 산행으로 위안을 삼으며 산행을 이어간다. 갑자기 솔향이 스며들더니 마음은 한없이 행복해진다. 나도 몰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행을 이어간다.

 

 

본래의 등산로를 만나고나서 15분 정도를 더 진행하면 745봉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10분이 지났다. 주능선 상에 위치한 745봉에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취우령 1.5Km/ 넘터 7.0Km/ 상율 2.8Km, 상계 3.8Km)로 나뉜다. 745봉은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지라 머무르지를 않고 곧바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취우령으로 향한다.

 

 

 

산길이 주능선을 따르면서 한결 더 또렷해진다. 그러나 넓어졌을 따름이지 곱지는 않다. 가시넝쿨이나 잡초(雜草)가 우거진 곳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곳 지자체(地自體)에서 등산로를 정비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몇 번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그러나 골이 깊지 않은 탓에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 편안한 길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능선에서도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나무들이 온통 능선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몸에 좋은 피톤치드를 한껏 제공해주는 소나무들이 한편으론 조망을 막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얼마 뒤에 구산갈림길(이정표 : 구산 2.9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능선은 곳곳에서 억새 군락(群落)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비록 지금은 꽃을 덜 피우고 있지만, 찬바람이 일 시기이면 하얀 억새꽃이 바람결 따라 흐느적거리며 황홀한 아름다움을 자랑할 것 같다. 억새군락을 지나면 능선은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이번에는 들꽃 군락이 나타난 것이다. 널따란 분지(盆地)가 온통 샛노란 마타하리꽃으로 가득하다. 다들 들꽃 사이로 들어가 사진을 찍느라 정신들이 없다.

 

 

 

들꽃 군락지에서 취우령은 금방이다. 취우령은 묘()가 있는 삼거리(이정표 : 건흥산 3.3Km/ 죽림정사 2.3Km, 2.8Km/ 넘터 8.5Km, 구산 2.8Km)에서 왼편으로 약간 비켜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취우령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산불감시초소, 그리고 삼각점 외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유리로 만들어진 구조물이 하나가 더 보인다.

 

 

 

 

취우령 정상에 오르면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인다. 정면에 보이는 금귀봉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보해산 양각산 수도산과 그 뒤로 단지봉 가야산이 확인된다. 정상에서 조망을 즐기는데 문득 의문점 하나가 고개를 든다. 취우령(驟雨嶺)이라는 이름이 어떤 이유로 붙여졌는지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란 길이 나있는 높은 산의 고갯마루를 일컫는 말인데, 아무리 봐도 사람들이 길로 이용하기에는 마땅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능선은 취우령 근처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한 번 만든 후부터는 서서히 고도(高度)를 떨어뜨린다. 취우령과 건흥산의 고도(高度) 차이는 약 220m, 3.3Km의 구간에서 220m의 높이를 낮추다보니 급할 것이 하나도 없었던 탓일 것이다. 그렇다고 올라가는 구간이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취우령의 다른 이름은 아홉산, 건흥산에서 취우령까지 능선이 아홉 개의 올망졸망한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탓에 얻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당연히 건흥산으로 가는 길은 이 아홉 개의 봉우리 들을 오르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그 오르내림은 조금도 힘들지 않다. 짧고 완만(緩慢)하게 올랐다가 길고 완만하게 떨어지는 산행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건흥산을 출발해서 30분이 조금 더 지나면 영승갈림길(이정표 : 건흥산 1.5Km/ 영승 2.7Km/ 취우령 1.8Km), 그리고 이어서 지내갈림길(이정표 : 건흥산 1.4Km/ 지내 1.8Km/ 취우령 1.9Km)을 만나게 된다. ‘여보! 사진 찍으세요.’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사진을 찍을만한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집사람에게 되물으려다가 문득 길가에 보이는 어른의 키를 살짝 넘길 정도의 바위 하나를 발견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바위를 만난 것이다. 그다지 크지도 않을뿐더러 생김새까지도 평범한 바위이지만, 그 희귀성 때문에 새롭게 보인다는 점에서 우리네 인생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취우령을 출발해서 1시간을 조금 넘기면 습지(marshy land , 濕地) 식물이 가득한 분지(盆地)를 만나게 되고, 건흥산 정상은 이곳에서 지척이다. 건흥산 정상은 다른 산과는 조금 다른 점을 보인다. 정상표지석을 가장 높은 지점이 아닌, 봉우리 아래의 반반한 지점에다 세워놓았다. 산봉우리를 정상으로 여기지 않고, 그저 정상석의 배경으로 삼았을 따름인 것이다. 이러한 느낌이 드는 것은 정상석의 왼편 10m쯤 떨어진 곳에 세워진 제단(祭壇)도 한몫을 한 것은 물론이다.(이정표 : 거열성 180m/ 하부약수터 0.5Km/ 취우령 3.3Km) 건흥산 정상도 탁 트인 조망(眺望)을 자랑한다. 먼저 발아래에는 거창읍내가 펼쳐지고, 그 뒤에는 숙성산과 미녀봉, 그리고 감악산과 오도산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왼편에는 금원산과 기백산, 황석산과 남덕유산이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거열성(居烈城 : 경상남도 기념물 제22)이다. 건흥산성(山城)이라고도 부리는데, 원래 가야 세력에 의해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길이 2.1km의 석성(石城)인데, 그동안 터로만 남아오던 것을 최근에 일부구간(300m)을 새로 복원(復原)했다. 이 산성은 백제의 부흥군이 신라에 대항해 싸운 곳이며, 673년에는 신라의 아진함(阿珍含)이 당군과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거열성이 끝나는 지점(이정표 : 하부약수터 0.14Km/ 건흥산 0.36Km)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약수터이다. 약수터는 한마디로 잘 가꾸어진 공원(公園)이다. 정자(亭子)와 갖가지 운동기구를 갖춘 체육단지, 그리고 나머지 너른 공간은 잔디밭으로 깔끔하게 조성해 놓았다  

 

 

 

 

약수터에서 건계정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나무로 만들어진 데크가 마중을 나온다. 습지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일명 출렁다리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름이야 어떻든 데크 위를 걷는 것은 여간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출렁거리는 것이 제법 스릴이 느껴지는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건계정 근처에 있는 주차장

출렁다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본격적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산길은 가파르기도 하지만 돌들의 굵기나 생김새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오늘 산행에서 유일하게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때문에 하산지점인 건계정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린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면 갈림길(이정표 : 건계정 0.7Km/ 하부약수터 1.2Km/ 하부약수터 1.3Km) 하나를 만나게 되고, 이어지는 산길은 경사(傾斜)가 다시 완만(緩慢)해진다. 그러다가 이내 위천(渭川)에 내려서게 되고, 위천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건넌 후, 조금만 더 내려가면 주차장이 나오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참고로 구름다리에서 오른편으로 10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건계정은 이곳 거창의 명문 중 하나인 거창 장()’씨들이 선조를 기리기 위해 1905년에 세운 고풍스러운 정자(亭子)라고 한다. 약수터에서 이곳 주차장까지는 약 30, 건흥산 정상에서는 50분이 조금 못 걸린다.

 

 

 

 

                                                  

 

대성산(大聖山 , 593m) - 둔철산(屯鐵山, 823.2m)

 

산행일 : ‘13. 7. 14(일)

소재지 : 경남 산청군 신안면과 신등면, 그리고 산청읍의 경계

산행코스 : 사계마을→정취암→대성산→와석총→둔철산→금정폭포→심기마을(산행시간 : 4시간10분)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특징 : 경호강(남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 능선의 동쪽 끝인 웅석봉과 마주보고 있는 둔철산은 '산청의 진산(鎭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겐 낯선 이름일 따름이다.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산청군에는 지리산과 황매산, 웅석봉, 왕산, 정수산 등 이름난 산들이 너무나 많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유명세(有名稅)에 밀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력(履歷)이 있는 등산객들에게는 가끔 이름이 회자(膾炙)되는 산이다. 길게 뻗은 능선의 기암괴석(奇巖怪石)과 뛰어난 조망(眺望), 거기에다 깊은 계곡까지 끼고 있는 점이 입소문을 탄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정취암 입구

대전-통영고속도로 산청 I.C에서 내려와 3번 국도를 이용하여 부산방면으로 잠깐 달리면 정곡삼거리(산청읍 정곡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빠져나와 왼편의 60번 지방도를 따라 달리다가 모례리(신등면)에서 오른편 홍화원휴게소(신안면 외송리)방향 군도(郡道 : 둔철산로)로 접어들면 대성산에서 뻗어 나온 정수지맥 산자락을 넘어가기 전에 오른편으로 정취암 들머리가 보인다.

 

 

 

 

정취암으로 들어가는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자동차 1대가 겨우 다닐 정도로 비좁은 도로이지만 들머리에 '대성산 정취암' 표지석(정취암 800m/ 차도 2.5Km)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포장도로를 따라 잠깐 들어가면 길은 비포장도로로 변하고, 곧이어 왼편에 보이는 오솔길로 접어들게 된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은 처음의 잠깐은 완만(緩慢)하게 이어지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갑자기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해버린다. 가파른 돌계단을 밟으며 10분쯤 올라가면 바위벼랑 위에 제비집처럼 들어앉은 암자(庵子)가 나타난다. 천년고찰(千年古刹)로 알려진 정취암(淨趣庵)이다. 추월산의 보리암이나 달마산의 도솔암 등 벼랑위에 걸터앉은 암자들에 비해 위태로운 맛은 덜하지만, 그 대신에 단아한 모습의 전각(殿閣)들이 더 많이 들어서 있다. 터가 너른 이점을 살린 것이다.

 

 

 

정취암(淨趣庵), 신라 신문왕 6년(686)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했다는 암자(庵子)로서, 정취관음보살(淨趣觀音菩薩 : 극락 또는 해탈로 빨리 들어서는 길을 알려주는 보살)을 본존불로 모시는 국내 유일의 사찰(寺刹)이라고 한다. 의상대사는 동해에서 솟아오른 장육금신(丈六金身:아미타불)의 두 줄기 서광을 따라 금강산에 원통암(圓通庵)을, 대성산에는 정취암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1652년 원통보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이 소실(燒失)되었고, 대웅전과 웅진전, 산신각 등 현존 전각(殿閣)들은 198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다. 문화재(文化財)로는 산신탱화(경남 문화재자료 243호 : 해인사 보관), 목조관음보살좌상(경남 문화재자료 제314호)가 있다. 참고로 산청9경 중 제8경이 정취암 전망이다. 이는 곧 정취암 앞에서 바라보는 전망(展望)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취암 뜨락에 서면 녹음으로 물든 산과 들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이왕에 정취암에 왔으면 산신각(山神閣)에 들러보기를 권하고 싶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산신탱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있었던 탱화는 도난방지를 위해 해인사에서 보관하고 있고, 지금의 것은 새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산신각의 뒤편 바위벼랑 위에 조성된 산신상(山神像)도 볼만하고, 산신각 앞에서 바라보는 조망(眺望)도 놓치지 말아야할 구경거리이다. 산신각은 깎아지른 절벽(絶壁)을 병풍(屛風)삼아 산허리에 붙어있다. 뜨락에 서면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적지 않은 평야(平野)와 마을들이 정취암의 품안에 살포시 안겨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정취암의 전망을 산청8경의 하나로 꼽았나 보다. 정취암 뒤편 바위 절벽(絶壁)에는 수백 년 동안 바위틈새에서 모진 풍파를 견뎌낸 노송(老松)들이 운치(韻致) 있게 서 있다. 바위 끝에 서면 마치 하늘 높은 곳에서 하계(下界)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든다. 거기에다 정적(靜寂)으로 그윽해진 산사(山寺)는 가히 속세(俗世)를 벗어난 느낌이 들 정도이다.

 

 

 

 

 

 

등산로는 암자 뒤쪽 산신각(山神閣) 왼쪽으로 이어진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능선으로 올라서서 오른편으로 조금만 더 나아가면 꽤 많은 인원이 둘러앉아도 충분할 정도로 너른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전망대(展望臺)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너럭바위에 올라서면 신등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깎아지른 바위벼랑 아래에는 정취암이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고, 건너편 산자락을 새로 난 도로가 산비탈을 휘감으며 기어 올라가는 것이 바라보인다. 사계마을에서 ‘둔철산 생태체험 숲’을 지나 외송리(신안면)로 연결되는 도로라고 한다.

 

 

 

 

 

 

너럭바위에서 제법 가파른 산길을 다시 10분 쯤 더 오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대성산은 왼편으로 가야하지만, 오른편으로 50m 정도만 더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능선 끝자락을 잠깐 들러볼 것을 권한다. 산불감시초소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능선 끝자락은 뛰어난 조망처이기 때문이다. 계단식 다랑이논의 뒤로 펼쳐지고 있는 산들은 부암산과 감암산, 그리고 베틀봉으로 이어지는 황매산이 분명할 것이다. 거기다가 산성산과 한우산, 자굴산, 방어산, 여항산, 집현산까지 사통팔달(四通八達)로 펼쳐지니 어찌 뛰어난 전망대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산불감시초소에서 대성산 정상까지는 금방이다. 쉬엄쉬엄 걸어도 5분이면 충분한 거리에다 경사까지 완만(緩慢)하니 걷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다. 대성산 정상은 정상표지석 대신에 팔각정(八角亭)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정상표지판은 정자(亭子) 앞의 나무에 매달려 있다. 쉼터와 전망대(展望臺)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정자에 오르면 와석총이 있는 760m봉이 바로 코앞이고, 금오산, 석대산, 웅석봉 능선이 잘 조망(眺望)된다. 대성산 정상에서 보면 왼편에 능선 하나가 보인다. **정수지맥(淨水支脈)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산줄기이다. 이 능선은 마제봉과 적벽산을 만든 후에 경호강과 양천(川)이 만나는 합수지점(신안면 하정리)에서 그 생명을 다한다. 정수지맥은 이곳에서부터 둔철산까지 능선을 따라 이어지다가 둔철산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가재산과 정수산을 만든 후 진양기맥(晉陽岐脈)의 627.6m봉으로 연결된다.

(**) 정수지맥(淨水支脈) : 진양기맥(晉陽岐脈 : 덕유산에서 월봉산. 금원산. 기백산. 황매산. 자굴산 등을 거쳐 남강댐에 이르는 도상거리 163km의 산줄기)이 뻗어가는 밀치 부근 627.6m봉에서 분기(分岐)하여 송의산, 구의산, 정수산, 둔철산, 마제봉 등을 거쳐 적벽산에 이르는 약 38km의 산줄기로서 산청 남강의 동쪽 분수령을 이룬다.

 

 

 

 

 

 

대성산에서 와석총으로 향하는 능선은 신안면(왼편)과 신등면의 경계를 따라 이어진다. 대성산에서 안부로 짧게 내려섰다가 작은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맞은편에 나타나는 봉우리가 와석총이 있는 760봉이다. 아까 대성산에서는 지척으로 보였는데도, 막상 걸어보니 꽤나 먼 거리이다. 아마 능선이 크게 휘어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능선의 오르내림이 가파르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760봉으로 오르는 길에는 심심찮게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황매산 능선을 바라보다 보면 더위에 지쳤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싱싱한 상태로 되돌아와 있다.

 

 

 

 

한껏 조망을 즐기다보면 능선의 꼭대기에서 왼편으로 갈림길 하나가 나타난다. 대성산을 출발해서 50분 쯤 되는 거리이다. 와석총(蝸石塚)이 있는 760봉으로 가는 길이다. 와석총은 ‘달팽이 돌무덤’을 한자로 변환한 다른 이름이다. 이름에 걸맞게 색다른 풍경(風景)을 접할 수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들어가 볼 것을 권한다. 갈림길에서 5분 조금 못되는 거리에 있으므로 다녀오는데 그다지 오래 걸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와석총은 말 그대로 달팽이 돌무덤이다. 참 이름을 잘 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달팽이 껍질 모양의 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와석총은 기이(奇異)하게 생긴 바위들이 20~30m 높이로 비스듬하게 쌓여 있는, 암괴류(岩塊流 : block stream , stone run)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와석총의 상부에 서면 기막힌 조망(眺望)이 열린다.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뻥 뚫리기 때문이다. 북서쪽의 정수산 뒤로는 장안산과 백운산, 황석산, 덕유산이 보이고, 고개를 조금 더 북쪽으로 돌리면 황매산과 허굴산이 나타난다. 동쪽에는 산성산과 한우산, 자굴산, 그리고 남서쪽에는 석대산과 웅석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중에서도 오늘의 하이라이트(highlight) 는 남쪽에 펼쳐진다. 원지마을과 진양호까지 오롯이 나타나고 있다.

 

 

 

 

 

‘와석총 갈림길’로 되돌아 나와 둔철산으로 향한다. 제법 경사(傾斜)가 진 바윗길을 릿지(ridge)로 내려서서 15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억새가 우거진 안부에서 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둔철마을, 오른편은 척지마을이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정표(둔철산 정상 0.56Km/ 척지마을 2.1Km/ 정취암 3.94Km, 대성산 3.2Km)를 만나게 되는데 왼편 둔철마을 방향이 표시되지 않은 것을 보면, 길이 험하다거나 또는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거리에서 오르막길로 들어서면 능선이 온통 철쭉들의 천국으로 변한다. 사람하나가 겨우 빠져나갈만한 틈을 빼놓고는 철쭉들이 빽빽하고 들어차 있는 것이다. 황매산 등 인근의 산들이 봄이면 활짝 핀 철쭉들로 인해 화려한데, 둔철산도 다른 유명산들에 비해 별로 뒤지지 않을 것 같다.

 

 

 

둔철산으로 오르는 길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기 때문에 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거기다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헬기장을 지나면서부터 틈틈이 시야(視野)가 열리는데,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걷다보면 오르막길이라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이다. 황매산과 부암산, 감암산 등이 쉼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광경(光景)이 가히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안부사거리에서 조망을 즐기면서 30분 정도 능선을 오르면 둔철산 정상이다. 둔철산은 서쪽에서 바라볼 경우 암봉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정상에 오르면 의외로 흙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봉우리이다. 둔철산 정상에는 진주교원산악회가 1988년 세워 놓은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산청 24, 1991 재설)이 있다. 그런데 그 높이를 '812m'라고 적어 놓았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地圖)에는 현 위치가 823m로 표기(標記)되어 있으니 높이가 10m가량 차이가 난다. 어느 분의 글을 보면 지도에 표기된 정상의 위치도 정상표지석이 세워진 현재의 위치와 다르다고 한다. 바르게 수정해 주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둔철산(屯鐵山)은 대가야를 존재하게 했던 ‘철의 땅’이 남긴 흔적이다. 철(鐵)이 많은 산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 붙였다고 하지만 이 산 어디에도 철을 생산했다는 흔적이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근거로 쇠와 관련된 기운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유추(類推)해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둔철산은 소설 ‘동의보감’에서 산청 출신 명의(名醫) 유의태가 제자 허준에게 약초를 캐러 보내는 곳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둔철산 정상은 사방으로 막힘이 없는 시원스런 조망(眺望)이 압권(壓卷)이다. 정상에 서면 발아래에는 산자락을 휘감으며 흐르는 경호강(江)과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고, 왕산과 필봉산, 정수산, 황매산, 감암산을 비롯한 산청 일대의 산들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멀리로는 황석산과 거망산, 기백산, 가야산, 자굴산, 한우산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특히 서쪽에서 북쪽을 향하여 하늘금을 그리는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첩첩이 쌓이면서 만들어내는 ‘산 그리메’가 장관(壯觀)이다. 웅장(雄壯)한 웅석봉 뒤에 선 천왕봉이 장중(莊重)하고, 중봉, 하봉, 써래봉, 말봉, 새봉 등이 나도 있다면서 연이어 나타나고 있다.

 

 

 

하산은 정상에서 남쪽으로 난 능선을 따라간다. 정상 근처에서 삼거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정표 : 정상 0.151Km/ 폭포 1.16Km, 주차장 4.66Km)과 헤어지고, 길가에 널린 기암(奇巖)들을 구경하며 10분쯤 더 진행하면 또 하나의 정상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단성중학교산악회가 세워놓은 것인데 아무래도 잘못된 위치에다 정상석을 세워 놓은 것 같다. 아까의 정상에는 삼각점이 있었지만 이곳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곳에서의 조망(眺望)도 뛰어나다. 응석봉과 지리산 능선들이 하늘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곳은 갈림길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이정표(주차장 4.4Km/ 폭포·주차장/ 정상 0.41Km)가 가리키는 주차장 방향으로 진행하면 시루봉을 거쳐 주차장으로 내려가게 된다.

 

 

 

 

 

 

 

 

잘못된 정상석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경사(傾斜)가 심한 곳은 통나무계단이나 그렇지 않으면 로프를 매달아 내려서는데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바닥이 마사토로 이루어져 무척 미끄럽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길에는 가끔 바위들이 보이는데, 한번쯤 올라가보는 것도 괜찮다. 시야(視野)가 시원스럽게 뚫리지는 않지만 경호강 등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마사토구간이 끝나면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이어서 왼편에 물길이 흐르는 바위벼랑이 나타난다. 금정폭포(瀑布)의 상부(上部)이다. 폭포 옆으로 난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폭포의 하단(下端)이다. 비탈길에는 안전로프가 매달려있지만, 그래도 비탈길이 부담스럽다면 우회로(迂廻路)를 이용하면 된다. 금정폭포는 높이가 20m쯤 되는데, 수직(垂直)의 폭포라기보다는 와폭(臥瀑)에 가깝다. 폭포 옆에 세워진 이정표(정상 1.2Km/ 폭포, 정상 1.3Km)를 보면 이곳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둘로 나뉘는 모양이다. 오른편에 희미하게 보이는 산길이 아마 시루봉 방향의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일 것이다. 정상에서 금정폭포까지는 40분이 조금 못 걸렸다.

 

 

 

 

금정폭포에서부터 등산로는 계곡을 왼편에 끼고 이어진다. 길이 대부분 너덜로 이루어져있어 걷기가 사납지만 왼편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폭포들을 구경하다보면 그 정도의 불편쯤은 얘깃거리도 안 된다. 수많은 와폭(臥瀑)들이 경쾌한 물소리와 함께 여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집채보다 더 큰 바위가 비스듬하게 서있다. 자칫 쓰러지기라도 할 것 같이 위태로운 모습이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지나가던 등산객들이 나뭇가지를 꺾어 받쳐 놓았다. 무너지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그 갸륵한 뜻이 나에게까지 전달된 탓인지 앙증스럽게 보인다.

 

 

 

 

금정폭포에서 40분 조금 못되게(1.5Km) 걸으면 산길은 계곡을 가로지르는데, 계곡 양편의 나무에다 로프를 묶어 놓았다. 계곡물이 불어나면 이 로프를 잡고 건널 수 있도록 등산객의 안전을 위한 배려인 듯하다. 계곡을 건너면 왼편으로 갈라지는 길이 하나 보인다. 아까 정상에서 헤어졌던 산길로 진행했을 경우 시루봉을 거쳐 이곳에 이르게 된다.

 

 

 

갈림길이 지나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마중을 나온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뻗어 오른 소나무들에서 풍겨져 나오는 솔향이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늘만큼이나 풍성하다. 길바닥도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바닥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솔가리(소나무 落葉) 덕분일 것이다. 소나무 숲을 지나면 밤나무 밭이 나오고 이어서 심거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밤나무 밭’ 근처의 계곡에 물이 허리쯤까지 차는 소(沼)가 있으니 마을에 내려가기 전에 몸을 씻고 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알맞게 차가운 물속에서 잠깐 쉬다보면 산행 중에 쌓인 피로는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것이 분명하다.

 

 

 

 

마을을 지나다가 보면 관음정사로 가는 어귀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마을사람들이 ‘포구나무’라고 부르며 보호수(保護樹)로 관리하고 있는데, 수령(樹齡)이 수백 년은 족히 돼 보인다.

 

 

산행날머리는 심거마을(신안면 외송리) 앞 심거교

심거마을은 관광농원이나 민박을 주로 하는 전원(田園)마을이다. 마을이 경사(傾斜)진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어 쓸 만한 농경지(農耕地)가 없기 때문에, 별다른 소득원이 없는 주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응당 관광업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심거교(橋)는 마을에서도 10분쯤 더 걸어야 한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 시멘트 포장도로를 걷는 것이 만만치 않지만, 길가에 구경거리가 있어서 마냥 심심치만은 않다. 길가 밧줄에 매달린 산악회 리본들이 무당집처럼 거창하고, 도로변을 외롭게 지키고 있는 소나무는 어느 제약회사 광고모델이었다는 소나무에 비해 뒤지지 않을 정도로 멋진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방어산(防禦山, 530.4m) - 괘방산(457m)

 

산행일 : ‘13. 6. 6()

소재지 : 경남 함안군 군북면과 진주시 지수면사봉면의 경계

산행코스 : 어석재괘방산(삼각점봉)방어산고개관음사사거리마애삼존불상마애불삼거리방어산남강휴게소(산행시간 : 4시간20)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특징 : 방어산과 괘방산은 해발(海拔)500m 안팎에 불과한 산이다. 산세(山勢)도 또한 크게 자랑할 것이 없다. 군데군데 바위벼랑이 잘 발달되어 있고, 그 벼랑들이 소나무들과 잘 어울린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 풍광(風光) 쯤이야 웬만한 산들도 다 지니고 있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산들을 사람들이 갈망하는 복()과 연관시킬 경우에는 그 결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이 산의 정기를 받은 인근 마을들이 발복(發福)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산을 사이에 두고 동쪽의 함안과 서쪽의 진주가 사이좋게 한 가지씩 복을 나눠 가졌다. 먼저 진주는 재복(財福)을 받았다. 그 증거가 바로 진주 땅에 위치한 지수초등학교라고 한다. 1명도 배출하기 어렵다는 국내 굴지의 재벌 창업자를 그것도 4(삼성그룹 이병철, LG그룹 구인회, 효성그룹 조홍제, 삼양통상 허정구)이나 배출하였으니 어느 누구도 이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장수(長壽)라는 복이다. 이 복()은 방어산의 동쪽 산자락에 위치한 영운마을에서 발복(發福)하였다.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의하면 영운마을은 당시 65세 이상 노인 중 80세 이상 노인이 무려 66.7%나 달했다고 한다. 대단한 장수촌(長壽村)인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진주시와 함안군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인 어석재

남해고속도로 지수 I.C에서 내려와 1037번 지방도 이용하여 진주 사봉 농공단지(農工團地 :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 소재)까지 온다. 농공단지 옆에 있는 봉대교차로(交叉路 : 사봉면 봉곡리)에서 좌회전하여 1004번 지방도(함안방향)로 바꿔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부평휴게소(사봉면 부계리)가 나오고, 이어서 어석재에 올라서게 된다. 어석재는 함안군(군북면 원북리)과 진주시(사봉면 부계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이다. 산행들머리는 어석재 고갯마루에서 함안군 방향으로 50m쯤 떨어진 곳(낙석방지 철망이 끝나는 지점)에서 열린다. 도로 오른편 산자락에 산행안내도와 이정표(방어산 5.9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으로 들어서자마자 나타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등산객들의 기를 꺾어버린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무더운데, 이런 가파른 길을 오른다는 것은 죽을 맛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오르막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을 맺는다. 15분 정도가 지나서 만나게 되는 이정표(괘방산 1.0Km, 방어산 5.33Km/ 화광마을 0.34Km/ 어석재 0.47Km)에서부터는 경사(傾斜)가 많이 누그러지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힘들다고 생각될 때에는 옆에 보이는 임도(林道)를 따를 경우 정상 근처에 까지 어렵지 않게 오를 수가 있다. 다만 임도를 이용할 경우에는 걷는 거리가 조금 늘어나는 것을 감수해야할 필요는 있다.

 

 

 

 

 

 

임도와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다보면 지철마을 갈림길(이정표 : 방어산/ 지철/ 어석재)’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괘방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어석재를 출발한지 45분이 지났다. 괘방산 정상에는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등 이곳이 괘방산이라는 아무런 표식도 찾아볼 수 없다. 좁다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은 서툴게 쌓은 돌탑 하나와 삼각점이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누군가가 삼각점 안내판위에 괘방산 457m’라고 써 놓아 이곳이 괘방산의 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별다른 특징도 없고, 거기다 조망(眺望)까지도 꽉 막힌 정상에서 머무르기를 포기하고 발길을 재촉한다.

 

 

 

방어산 정상을 지나자마자 또 다른 지철마을 갈림길(이정표 : 망어산 4.4Km/ 지철 1.22Km/ 어석재 1.5Km)’을 만나게 되고, 외길로 이루어진 능선은 오르내림이 거의 없이 편하게 이어진다. ‘아예 딸기 밭이네요.’ 집사람의 말마따나 산길 주변에는 산딸기가 널려있다. 괘방산을 올라올 때부터 보이기 시작하던 산딸기가 괘방산을 지나면서부터는 아예 산딸기 밭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구태여 숲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이 길을 걸으면서 따먹어도 실컷 따 먹을 수가 있을 정도이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점심으로 싸간 도시락을 먹지 않고도 산행을 마칠 수가 있었다. 산딸기로 양을 채워 버린 것이다.

 

 

 

 

괘방산 정상에서 즐기지 못한 조망은 20분 정도 더 가면 만나게 되는 전망바위에서 실컷 즐길 수가 있다. 발밑 저수지가 보이는 너럭바위에 올라서면, 저 멀리 남강과 진주 월아산과 장군대산 그리고 남해고속도로가 한눈에 보인다. 오른편에 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절벽을 끼고 있는 봉우리가 506봉일 것이다.

 

 

 

 

 

너럭바위를 지나면 능선은 암릉과 바윗길이 전망대 역할을 하며 이어진다. 너럭바위에서 10분 정도를 더 진행하면 산길이 암릉 위로 올라서면서 이번에는 함안방향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높은 산이 거의 없는 함안 땅의 들녘이 널게 펼쳐진다.

 

 

 

집사람의 발걸음이 자꾸만 느려진다. 길가에 널린 산딸기를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는 것이다. 하긴 새콤하고 달콤한 산딸기를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속도를 줄이면서 따먹다보니 배고픔을 잊어버렸고, 우린 산행을 끝내고서야 늦은 점심을 먹을 수가 있었다.

 

 

 

괘방산을 출발한지 45분쯤 지나면 이름 모를 봉우리 위에서 하림마을 갈림길(이정표 : 방어산 2.9Km/ 군북하림 2.17Km/ 괘방산 1.5Km)’을 만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산행기를 보면 이곳을 506m봉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하림마을 갈림길에서 짧게 내려서면 안부가 나온다. 바로 방어산 고개라고 불리는 능선안부이다. 지도(地圖)에는 이곳을 사거리로 표시하고 오른편은 마애사, 그리고 왼편은 성불암으로 내려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데다가 길도 또렷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방어산고개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면 헬기장이 나온다. 오르는 길가에는 가끔 전망 좋은 곳들이 나온다. 의령의 자굴산 등 높고 낮은 산들이 눈에 잘 들어온다. ‘하림마을 갈림길에서 25분 정도를 더 걸으면 헬기장을 만나고, 이어서 15분 후에는 토실마을 갈림길(이정표 : 방어산/ 토실/ 괘방산)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곳 삼거리에는 이정표가 두 개가 서있다. 한 곳에 이정표가 두 개나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중 하나(정상 4Km/ 마애불 5Km)가 얼토당토않게 거리표시를 해 놓은 것이 문제다. 산봉우리를 내려와서 다른 산봉우리를 다시 올라왔는데도, 방어산까지의 거리가 더 늘어나버린 것이다. ‘참 진주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것을 보면, 진주시에서 세운 모양인데, 이런 일은 안하는 것만도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토실마을 갈림길에서 15분 정도를 더 가면 능선안부(이정표 : 방어산 1.3Km/ 마애사 0.79Km/ 관음사 1.67Km/ 괘방산 3.1Km)에 내려서게 된다. ‘관음사 사거리이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면 마애사에 이르게 된다. 오늘 답사(踏査)하려고 하는 국보급 문화재인 마애불을 둘러보려면 마애사를 경유해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애불 때문에 지어진 마애사는 역사도 일천한데다 특별한 볼거리도 없어서 그냥 지나친다. 조금만 더 가면 마애불로 직접 내려가는 지름길이 나오기 때문이다.

 

 

 

관음사 사거리에서 5분 정도만 더 걸으면 오른편에 오솔길이 열려 있는 것이 보인다. 비록 이정표도 세워져 있지 않고, 입구도 좁지만 마애불로 내려가는 지름길이다. 물론 조금 더 올라가면 이정표가 서 있는 마애불 삼거리를 만나지만 이 길은 마애불을 보고 되돌아와야 되는 단점이 있다.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이곳 지름길을 선택할 것이다. 산의 사면(斜面)을 헤집고 난 오솔길은 가파르면서도 거칠다. 그러나 거리가 짧기 때문에 잠깐이면 내려설 수가 있다.

 

 

 

비탈진 오솔길에서 5분 정도만 고생하면 거대한 암벽(巖壁) 앞에 금동불상(金銅佛像)이 안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비로자나불인데 마애사의 주지스님이 조성했다고 한다. 불상의 왼편 절벽 하단에 유리창이 보인다. 뒤로 돌아가 보니 암굴(暗窟)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님들이 공부방으로 사용했던 모양인데, 요즘에는 사용하지 않는지 흉물스럽게 방치되고 있다. 절벽은 파란 넝쿨식물들이 온통 둘러싸고 있다. 어쩌면 송악일 것이다. 드릅나무과의 상록 덩굴식물인 송악은 담장나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보통 해안(海岸)과 도서(島嶼)지방의 숲속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지에서 공기뿌리가 나오기 때문에 암석(巖石)이나 다른 나무에 붙어 자란다. 잎과 줄기는 지혈작용과 경련을 멈추게 하는 작용 등이 있어 한방에서 사용하며, 지지하는 물체에 따라 독특한 모양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관상수로도 이용되고 있다. 참고로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의 송악은 천연기념물 제367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로자나불 앞에는 공들여 쌓은 돌탑이 하나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번듯하게 문까지 단 약수(藥水)터가 보인다. 이 석간수(石間水)는 물맛이 좋기로 인근에 소문이 나있을 정도라고 한다. 당연히 한 모금 들이켜 본다. 소문대로 물맛은 시원하면서도 달았다.

 

 

 

마애약사삼존불은 비로자나불에서 100m도 안 떨어져 있다. 반듯하게 잘라 놓은 듯한 바위 면에 새겨진 부처님들이 짓고 있는 천년의 미소가 참으로 온화하게 보인다. 방어산 마애불(防禦山 磨崖佛 : 보물 제159)은 방어산 자락(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에 있는 마애약사삼존불(磨崖藥師三尊佛)로서 조성 시기는 801(신라 애장왕 2)으로 알려져 있다. 가운데에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을 배치하고, 양 옆으로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인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선각(線刻)기법으로 새겼다. 삼존상의 오른쪽 여백에 불상조성기(佛像造成記)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조각 편년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마애불에서 방어산으로 가려면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야 한다. 철제난간을 잡고 힘겹게 오르면 3~4분 후에는 능선 위(이정표 : 방어산 1.25Km/ 마애사 0.55Km)에 올라서게 되고,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는 함안 들녘을 구경하면서 오르면 금방(10) 주능선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아까 마애불로 내려가면서 헤어졌던 길과 다시 만나는 지점이다.(이정표 : 방어산 0.8Km/ 마애불 0.34Km/ 어석재 5.1Km)

 

 

 

 

 

마애불삼거리에서 방어산 정상까지는 쉬엄쉬엄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하다. 무명봉은 왼편으로 우회(迂廻)하고 헬기장 두 곳을 지나서 밧줄까지 매어 놓은 바윗길을 통과하면 방어산 정상이다.

 

 

 

진주 쪽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정상은 널따란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아담한 정상표지석과 방어산의 유래가 적힌 안내판, 그리고 이정표(지곡 1.7Km, 박곡 2.2Km/ 가덕 1.9Km/ 마애불 1.2Km)와 왜 있는지 모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방어산(防禦山)은 이름 그대로 사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천연요새이다. 정상어림에 옛날 성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해서 둘러본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성터의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날아다니며 300근짜리 활을 쏘는 묵신우(墨神祐)라는 장군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 성을 쌓고 성문을 닫은 채 한 달을 버티다가 비로소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때 장군이 타던 말의 발굽 핏자국이 아직도 바위에 선연하다고 한다.

 

 

 

방어산 정상은 조망이 압권(壓卷)이다. 정상이 바위로 이루어진 탓에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거침없이 트이고 있는 것이다. 북쪽으로 자굴산이 거대한 장벽으로 서 있고 북서쪽에 위치한 지리산은 가물가물하게 보인다. 그리고 동남쪽에는 여항산과 서북산이 어렴풋하다.

 

 

 

 

하산은 남강의 물줄기를 방향삼아 내려서면 된다. 정상석 옆의 바위틈으로 내려서면 나무계단 두 개가 연이어 나타나는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오고, 10분 쯤 후에는 마당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당바위에서도 조망(眺望)은 시원스럽게 터진다. 발아래 굽이치는 남강의 물줄기가 부드러운 곡선(曲線)을 만들면서 유유히 흐르고 있다. 비록 이정표는 없지만 이곳에서 토실마을 가는 길이 나뉜다. 왼편으로 내려가면 지수면(경주시)의 토실마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마당바위에서 내려서는 바윗길은 곳곳이 전망대(展望臺)이다. 그리고 보기 좋은 명품 소나무도 가끔 보이는 등 눈요기가 쏠쏠한 구간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안부까지 내려섰다가 맞은편 능선으로 짧게 오르면, 장승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전망대(이정표 : 관음사 1000m/ 정상 400m)에 이르게 된다. 정상에서 15분이 조금 못 걸린다. 이곳에서도 조망은 뛰어나다. 유유히 흐르는 남강은 평온하고도 여유로운 풍광(風光)을 연출하고,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방어산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장승을 지나 5분쯤 지나면 오른편으로 길이 나뉜다. 곧바로 가면 관음사이고 가덕마을로 가려면 오른편 오솔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오솔길은 잠깐 사면(斜面)을 자르면서 돌아 지능선 위로 올려놓는다. 이어지는 산길은 부드러운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오늘 걸은 방어산이나 괘방산의 산길은 대부분 울창한 소나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때문에 오랫동안 쌓여온 솔가리(소나무 낙엽)들이 수북하게 쌓여 발바닥이 포근할 정도이다. 흙길뿐만이 아니다. 심지어는 바윗길까지도 폭신폭신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능선은 길이 부드러운 것 외에도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 진주의 들녘이 바로 그것이다. 도중에 만나는 바위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남강의 굽이치는 물길은 이번 산행의 백미(白眉)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름답다.

 

 

 

산행의 날머리는 가덕마을

부드러운 소나무 숲길이 언젠가부터 경사(傾斜)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무서울 정도로 가팔라져 버린다. 오랫동안 걸어오느라 지친 무릎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한다. 덕분에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차라리 더 더뎌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장승이 있는 전망대를 출발한지 40분 가까이 되면 능선은 그 가파름을 잃어버리고 완만(緩慢)해진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야릇한 냄새, 무슨 냄새일까 하는 궁금증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밤나무 과수단지가 나타난다. 밤나무 밭을 벗어나면 곧바로 가덕마을에 들어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