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봉(嵐峀山, 459.4m)-응봉산(鷹峰山, 313.4m)

 

산행일 : ‘15. 3. 30()

소재지 : 부산시 강서구 가덕도(눌차동, 동선동, 대항동)

산행코스 : 웅동농협 천가지점 앞눌차도방조제강금봉(199.9m)전망대응봉산매봉(356.6m)연대봉대항선착장(산행시간 : 4시간25)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가덕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섬이었다. 때문에 육지 사람들, 특히 나같이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가고 싶어도 쉽게 갈 수 없는 오지(奧地) 중의 오지였다. 연대봉이 명품의 반열에 올려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산세(山勢)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육지 사람들에게 덜 알려졌던 이유이다. 그러던 것이 2010년 가덕대교와 거가대교가 연이어 개통되면서 일순간에 바뀌었다. 부산항 신항(新港)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육지로 편입되는 과정을 겪었다. 접근성이 해결된 데 이어, 부산시에서 이곳에다 둘레길까지 만들어 놓자 연대봉을 찾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부산사람들에게는 짐짓 근교산행지로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진 것이다. 하여간 연대봉은 전형적인 육산(陸産)이라서 편안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정상어림의 일부가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또 다른 산행의 묘미도 선물해 준다. 특히 응봉산 일원은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바위산으로 그 형세가 자못 옹골차다. 때문에 눈이 호사(豪奢)를 누릴 정도로 뛰어난 조망(眺望)을 자랑한다.

 

산행들머리는 웅동농협 천가지점 앞(강서구 성북동)

남해고속도로의 가락 I.C에서 내려와 우회전하여 가락대로를 타고 들어가다 가덕대교를 건너면 지금은 육지로 변해버린 섬 가덕도가 나온다. 섬에 들어서서 첫 번째로 빠져나가는 지점인 성북 I.C()에서 내려와 좌회전하면 금방 바닷가에 이르게 되고, 바닷가 삼거리에서 또 다시 좌회전하여 천가길로 들어서면 조금 후 산행들머리인 웅동농협 천가지점앞에 이르게 된다. 건물 위로 지나가는 눌차대교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농협의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가덕도관광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잠시 후에 바다가 나타나고, 건너편의 눌차도까지는 천가교라는 다리로 연결된다.

 

 

 

여명(黎明)의 바다를 구경하며 다리를 건너다보면 10분 후에는 외눌마을’,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는 부산 강서구판 둘레길인 갈맷길의 방향표시를 따르면 된다. 이는 곧 오른편으로 진행하라는 얘기이다. 여기서부터는 당분간 해안선(海岸線)을 따라 난 갈맷길을 걷는다.

 

 

오른편 바다에 양식시설이 보인다. 그리고 길가에는 쇠꼬챙이와 가리비를 엮어놓은 것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아마 양식을 할 때 소용되는 자재(資材)들인 모양이다. 그러나 이 바다는 얼마 후에는 볼 수 없게 된다. 내가 알기론 이 바다는 매립예정지이기 때문이다.

 

 

외눌마을에서 5분쯤 걸으며 내눌마을, 외눌이나 내눌 할 것 없이 여느 시골마을이나 다름없이 한가로운 풍경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섬이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덕분인지 가는 길에는 수백 년은 족히 넘겼음직한 팽나무도 보인다. 만일 개발이 되었더라면 도로 때문에라도 없어졌을 게 뻔하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왼편으로 난 길이 보인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할 경우 국수봉에 오를 수 있으나,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내 사전지식으로는 그다지 볼만한 풍경이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내눌마을에서 15분쯤 더 걸으면 동선방조제이다. 오른편 바다를 메우려는 사전작업인지 눌차도와 가덕도를 아예 방조제로 연결시켜버렸다. 만일 바다를 그대로 놓아둔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일 것이다. 바닷물의 흐름을 방해함으로 인해 양식시설에 많은 피해를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방조제에 이르니 마침 해가 솟아오른다. 그것도 한 점의 티도 없이 온전하다. 오늘 산행은 즐겁고 행복한 산행이 될게 틀림없다. 저렇게 고운 해를 본다는 게 그리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방조제를 따라 10분 남짓 걸으면 가덕도 본섬의 동선새바지에 이르게 된다. 새바지란 샛바람을 많이 받는 곳이라는 뜻으로, ‘동선새바지는 샛바람을 많이 받은 동선마을이라는 뜻이다. 산의 반대편에 있는 대항새바지와는 앞에 붙어있는 마을 이름으로 구분된다. 길은 이곳에서 두 갈래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얼핏 보면 해안선을 따라 난 길이 옳을 것 같지만 제대로 가려면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왼편 길은 끄트머리에 있는 선착장에서부터 길이 끊겨버리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둘레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하긴 열어 놓았다고 해도 우리의 다음 행선지인 강금봉은 올라갈 수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10분 정도를 헛걸음 한 뒤에야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 나오니 아까 무심코 지나쳤던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갈맷길 코스는 오른편이라는 안내판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안내판을 보았다고 해도 왼편으로 진행했을 게 뻔하다. 우린 이 부근에서부터 갈맷길이 아닌 등산로를 타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른편 길로 들어서며 잠시 후에 왼편으로 열린 산길이 나타난다. 들머리에 이정표(어음포 산불초소 3.5Km/ 천가동 주민센터 1.5Km)등산로 종합안내도’, 거기다 산불감시초소까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다닌 것 같지는 않다. 이 코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다른 코스보다 훨씬 더 볼거리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중의 첫 째 볼거리는 진달래이다. 흐드러지게 핀 연분홍빛 진달래가 온통 능선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오르는 길이 상당히 가파르지만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느라 힘든 줄도 모른다. 꽃피는 봄 산행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일 것이다.

 

 

들머리에서 15분 정도를 오르면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선다. 봉우리 한 가운데에 말뚝 모양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지만 아무런 글도 적혀있지는 않다. 그러나 봉우리의 생김새나 그 위치 등으로 보아 강금봉(198m) 정상이지 싶다. 아니면 5~6분쯤 더 진달래 꽃 잔치를 즐긴 후에 만나게 되는 두 번째 봉우리가 강금봉일 것이고 말이다.

 

 

 

두 번째 봉우리에서 10분쯤 더 진행하면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트이면서 바다가 나타난다. 나뭇가지에 가려진 탓에 완벽하지도 않고, 특히 조금 후에는 일망무제의 전망대가 나타나니 신경 쓸 것 없이 그냥 지나치고 볼 일이다.

 

 

강금봉에서 2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작은 바위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지도(地圖)252.6m봉으로 표기된 지점이다. 봉우리 위에 서면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이 터진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뛰어난 전망대(展望臺)일 것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응봉산이다.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우러진 거대한 암봉이 한 폭의 잘 그린 수묵화(水墨畵)를 연상시킬 정도로 멋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방금 전에 지나온 강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기다랗게 늘어섰고, 그 왼편에는 부산의 서쪽 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남쪽의 망망대해는 보너스 쯤으로 여기면 될 일이다.

 

 

 

전망대에서 응봉산으로 가는 길은 고도(高度)를 크게 떨어뜨리지 않고 비교적 완만하게 연결된다. 거기다 길가에는 진달래까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행복한 산행이란 바로 이런 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가는 길에 만나는 선바위(立石)에 눈길도 맞추어가며 10분 조금 못되게 걷다보면 삼거리(이정표 : 어음포 산불초소 2.1Km/ 어음포 산불초소 2.1Km/ 동선새비지 1.4Km)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나타나는 오르막길을 5분 정도만 더 치고 오르면 응봉산 정상이다.

 

 

 

응봉산 정상은 통바위로 구성된 아찔한 천애(天涯)의 절벽이다. 집사람이 냉큼 바위에 들어붙고 본다. 요즘 들어 부쩍 바위타기를 좋아 하는 것이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그녀의 눈에 저 정도의 위험쯤이야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바위에 올라서면 도심(都心)에 찌든 중생들의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들어 준다. 사면(四面)이 산과 바다, 그리고 기암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덕도의 최고봉인 연대봉보다 훨씬 낮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이 아닌 ()’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만큼 응봉산의 빼어난 자태가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돋보인다는 얘기이다.

 

 

 

바위 위에 올라서면 사통팔달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북쪽에는 진해 천자봉 산줄기와 더불어 불모산에서 화산을 거쳐 굴암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나타나고, 진행방향에는 조금 후에 오르게 될, 매봉과 연대봉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지나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까 전망대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거기에 비해 남쪽 방향의 바다는 텅 비어있다. 대마도가 지척이라고 하는데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오늘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연대봉 방향으로 내려서면 기이한 형상의 굴을 통과하게 된다. 굴이 비좁다고 해서 산부인과굴또는 해산굴(解産窟)’이라는 사람들도 있으나, 통과하기가 애를 낳을 때처럼 어렵지는 않으니 너무 과한 표현이 아닐까? 그보다는 차라리 통천문(通天門)’이라 부르고 싶다. 아래에서 위로 통과할 경우 하늘이 열리는 듯한 기분이 들 테니까 말이다.

 

 

굴을 빠져나오면 제법 너른 공터가 나온다. 이정표(어음포 초소 2.5Km/ 동선새바지 1.0Km)를 겸한 정상표지판은 이곳에 세워져 있다. 정상이 바위로 되어있어 있는 탓에 이곳에다 세워 놓은 모양이다. 하긴 바위 위에다 정상석을 세워 놓았을 경우 십중팔구는 구경도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릴 것이 불을 보듯이 뻔하다. 그만큼 정상의 바위는 웬만한 산꾼들조차 선뜻 오르기가 두려워질 정도로 위험했기 때문이다.

 

 

 

정상표지판을 지나면 또 다시 거대한 암봉이 앞을 가로막는다. 산길은 암봉을 왼편으로 우회(迂廻)시킨 후 아래로 향한다. 그리고는 뭐가 그리 급한지 서둘러서 고도(高度)를 떨어뜨린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가파른 구간이지 않을까 싶다. 내려오는 길, 등산로를 약간 비켜난 지점에 바위 하나가 눈에 띌 것이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일단 올라서고 보자. 조금 후에 오르게 될 매봉이 한눈에 들어오고, 연대봉은 그 왼편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응봉산에서 20분 남짓 내려서면 응봉산과 매봉의 안부격인 누릉령이다. 이정표 두 개(#1 : 어음포 산불초소 1.4Km/ 동선새바지(해안길) 3.0Km/ 동선새바지 2.1Km, #2 갈맷길 : 누릉능 0.6Km/ 천가교 8.0Km)와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이곳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내려서면 누릉능을 거쳐 어음포에 이르게 되고, 오른편은 동선새바지로 내려가는 길이다.

 

 

누릉령에서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것도 경사가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리고 17분 후에는 332m봉 위에 올라서게 된다. 이 구간에서는 기억해 두어야할 것이 하나 있다. 오르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그냥 앞만 보고 가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고개를 돌려보면 응봉산이 그 빼어난 자태를 한껏 자랑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332m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완만하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잠시 후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왼편은 연대봉으로 곧장 가는 길이고 오른편으로 향하면 매봉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서는 곧장 왼편으로 향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매봉을 올라볼 것을 권하고 싶다. 모처럼 찾아온 곳에서 일부러 산봉우리 하나를 빼먹을 필요는 없을 것이고, 거기다 매봉에서의 조망이 자못 뛰어나기 때문이다.

 

 

332m봉에서 매봉 정상은 금방이다. 8분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열 평도 넘는 널찍한 매봉 정상은 산불감시초소와 벤치 몇 개가 지키고 있다. 물론 정상표지석은 없다. 다만 산그리움이라는 산꾼이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이 이를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정상에서는 북서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가덕도 동선과 신항, 부산-거제 연결도로가 내려다보인다. 을숙도대교를 지나 다대포까지 눈앞에 있는 듯 가깝다. 시선을 오른편으로 조금만 옮기면 방금 전에 지나온 응봉산의 암릉이 그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연대봉으로 가려고 아까 헤어졌던 삼거리까지 다시 되돌아갈 필요는 없다. 아까 정상으로 올라왔던 길의 바로 오른편에 보이는 오솔길을 따르면 곧장 연대봉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다. 길가에는 온통 소사나무 천지, 그 굵기가 장난이 아니다.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나무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잠시 걸으면 아까 삼거리에서 헤어졌던 길과 다시 만나게 되고, 이어서 나타나는 굵은 소나무 숲길을 지나면 능선안부 사거리인 어음포고개에 내려서게 된다. 매봉에서 13분 정도의 거리이다.

 

 

 

어음포 고개에는 이정표(지양곡산불초소 2.7Km/ 동선새바지 3.5Km)'등산로 안내도‘, 산불감시초소 외에도 정자와 벤치, 체육시설, 그리고 화장실까지 고루 갖추고 있다. 아예 쉼터로 조성해 좋은 것이다. 이곳에서부터 연대봉 등산로와 갈맷길이 하나로 합쳐진다. 이를 증명이라고 하려는 듯 연대봉까지 850m입니다. 파이팅!‘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길손을 맞고 있다. 참고로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어음포로 내려가게 되고, 오른편의 임도를 따르면 천성동이나 대항리 또는 천가동으로 연결된다.

 

 

어음포고개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러나 통나무계단과 난간 등 등산로를 잘 정비해 놓은 탓에 오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은 편이다. 올라가는 길에 예쁜 내용의 글들이 적혀있는 이정표들에 눈길을 주다보면 28분 후에는 정상 못미처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서게 된다. 전망대에 서면 지나온 능선을 물론이고 진우도와 신자도, 장자도, 백합등이 조망된다. ‘조망안내판을 보면 그 뒤에 백양산과 승학산이 나타난다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전망대에서 15분만 더 오르면 드디어 연대봉 정상이다.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연대봉 정상에는 봉수대(烽燧臺)가 있고, 정상표지석 주변은 나무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연대봉은 조선시대 연안 방비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봉수대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서쪽방향, 거대한 남해 바다 해저(海底)로 스며들어 거가대교와 연결되는 침매터널이 발아래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로는 거가대교와 거제도 일원이 아스라하다.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국수봉 너머로 남해바다가 펼쳐진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선박들이 망망대해와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낙동강하구 방향도 눈에 들어온다. 진우도와 장자도 등 모래섬이 흐릿하게나마 나타난다.

 

 

연대의 한 층 아래에는 마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것처럼 생긴 거대한 암봉이 하나 솟아있다. ‘낙타등바위이다. 지역 사람들은 연대봉을 연대산, 낙타등바위를 연대봉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과거에는 이 암봉 위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밧줄을 이용할 경우에는 바위 위에까지 올라갈 수가 있고, 봉수대 잔해(殘骸)도 불 수 있다고 하나 지금은 금()줄을 쳐놓아 바위로 가는 것 자체를 막아 놓았다. 아쉽지만 오르는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하산 길은 크게 두 군데, 곧장 남쪽능선을 타면 새바지선착장을 거쳐 대항리로 이어지고, 우측 능선으로 난 또렷한 길을 탈 경우에는 천성만과 천성리로 연결된다. 오늘의 하산 지점은 대항, 당연히 왼편 능선을 타야함에도 불구하고 우린 오른편으로 향한다. ‘갈맷길이정표(대항새바지 3.8Km/ 천가교 5.2Km)만 믿고 따른 탓이다. 그 덕분에 우린 꽤나 많은 거리를 더 걸어야만 했다. 그것도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말이다.

 

 

내려오는 길에 만나게 되는 기암(奇巖), 언젠가 가은산 둥지봉을 올랐을 때 보았던 새바위를 닮았다. 그러나 반대편으로 돌아가면 바위는 또 다른 형상으로 나타난다. 얼핏 개의 머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날짐승이 갑자기 들짐승으로 바뀌어버린 꼴이다. 그런데 그 바위의 서있는 모습이 자못 위태롭다. 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기우뚱한 것이다. 하여 곁에 나무기둥을 받쳐보았다. 비록 사진일 따름이지만 말이다. 산행 후에 검색해보니 물개바위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 눈에 새처럼 보였던 형상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물개로 나타났던 모양이다.

 

 

천성리 방향(서쪽)으로 난 길은 한마디로 곱다. 바닥이 보드라운 흙길인데다 경사(傾斜)까지도 거의 없어 노약자(老弱者)들에게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수준인 것이다. 거기다 길까지 넓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맞은편에서 오는 다른 사람이 비켜나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은데, 그것도 부족했던지 정자와 벤치를 배치하고, 길가의 나무를 예쁘게 다듬는 등 흡사 도심(都心)의 공원처럼 꾸며 놓았다. 시쳇말로 산길이 아니라 고속도로인 것이다. 그야말로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구간이다. 길가에 보이는 쑥을 뜯으며 걷는 집사람의 속도에 발을 맞추며 4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산불감시초소가 나오고 이어서 옛 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둘래길인 갈맷길은 이곳에서 옛 도로를 따른다. 천성-대항마을간에 새로운 도로가 개설되면서 용도가 폐기된 옛 도로(가덕해안로)를 둘레길로 조성한 모양이다. 그러나 우린 주차장으로 내려가 새로 개설한 차도(車道)를 따른다. 물론 왼편 방향이다. 뭘 바라고 한 결정은 아니다. 그저 주차장이 하도 넓기에 거기서 대항으로 난 길이 있으려니 했는데, 길이 없기에 별수 없이 차도를 따른 것뿐이다. 당연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삼가야할 일이다. 보행자용 공간이 없는데다가, 빠른 속도로 지나다니는 차량들까지 심심찮게 눈에 띠였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새로 난 도로를 따라 15분 정도를 내려오면 망원경까지 갖춘 반듯한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데크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이곳의 낙조(落照)가 일품이라고 적혀있다. 전망대에 서면 항아리를 닮은 만() 안에 웅크리고 있는 대항이 잘 내려다보이고 바다 건너편에는 대죽도와 범여섬이 흐릿하게나마 내다보인다. 물론 그 뒤에는 거제도가 버티고 있을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대항선착장

전망대에서 10분쯤 더 내려오면 대항선착장에 이른다. 짭조름한 바다냄새가 그윽한 바닷바람이 시원하다. 저 언덕 너머에 있는 새바지라는 지명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새바지가 곧 샛바람을 많이 받는 곳이라는 뜻일지니 말이다. 길가 담벼락에 핀 홍매화에 눈을 맞추다가 선착장 근처의 한 식당에 자리를 잡는다. 이곳의 제철 음식인 도다리쑥국을 먹어보기 위해서이다. 물론 근처 식당들 모두가 도다리 쑥국을 메인 메뉴로 내걸고 있으니 마음에 드는 음식점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1인분에 15천원, 제법 짭짤한 가격이다. 그러나 일단 먹어본 후에는 그런 생각은 싹 가셔버린다. 구수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너무너무 뛰어나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은 4시간45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25분을 걸은 셈이다.

 

 

쌀뜨물에 무를 넣어 끓이다가 도다리를 넣고 익으면 쑥, 실파, 다진 마늘을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여 더 끓인 국이다. 봄이 제철인 도다리에 봄의 햇쑥을 넣어 만든 담백한 맛의 생선국으로 경남 통영 지역 봄철 생선국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향긋한 쑥향이 생선의 비린 맛을 없애 주면서 국물이 아주 시원하고 개운하여 통영 지역에서는 숙취해소에 좋은 국으로 알려져 있다.

속금산(束錦山, 357m)-대방산(臺方山, 468m)

 

산행일 : ‘15. 3. 21()

소재지 : 경남 남해군 창선면(昌善島)

산행코스 : 율도고개속금산303산두곡재국사당대방산봉수대은대암창선초등학교 앞(산행시간: 3시간40)

같이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색 : 남해군하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본섬에 있는 4대 명산(망운산, 금산, 설흘산, 호구산)만 떠올리게 된다. 4개의 산들이 워낙 뛰어난 산세(山勢)를 자랑하다 보니 다른 산들은 아예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산들이 피해를 보는 셈이다. ‘섬 속의 섬'인 창선도(昌善島)에 소재한 대방산과 속금산도 그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조망(眺望)이 끝내주는 멋진 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이이지는 황톳길은 포근하면서도 아늑하고, 심심찮게 터지는 다도해(多島海)의 조망은 시원시원하기만 하다. 위험한 곳이 한군데도 없을뿐더러, 가끔 가파른 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서서히 걸을 경우 힘들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서울에서 너무 멀다는 게 흠이지만 가족 산행지로 추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산행들머리는 율도고개(창선면 당항리)

남해고속도로 사천 I.C에서 내려와 3번 국도를 타고 삼천포까지 간 후 창선삼천포대교 방향으로 이어간다. 대교(大橋)를 건넌 후 3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창선참숯가마(창선면 당항리) 앞에서 우회전하여 1024번 지방도(율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잠시 후에 산행들머리인 율도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들머리인 율도고개는 창선면 단항리 웃마을과 율도리를 잇는 도로 중간에 있는 표고가 100m도 채 되지 않는 자그마한 고갯마루다. 당연히 고개라는 느낌이 들 리가 없다. 차라리 고갯마루에 세워진 정자(亭子)를 기점으로 삼는 것이 찾기에 쉬울 것이다.

 

 

 

정자 뒤로 난 임도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널따란 임도는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는 임도를 버리고 오솔길로 접어든다. 오솔길도 역시 느슨한 오르막길이기는 매한가지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쯤 되면 임도에 올라서게 된다. 속금산으로 오르는 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100m쯤 가다가 왼편으로 크게 휘는 지점에서 열린다. 능선이라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긴 들머리 나뭇가지에 덕지덕지 매달린 산악회의 시그널들만 보고도 찾을 수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참 아까 임도와 만났던 지점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도 속금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만날 수 있다. 다만 이 길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게 다를 뿐이다.

 

 

임도를 벗어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가뜩이나 숨이 차오는데 덥기까지 하니 오르는 것 자체가 버겁게 느껴진다. 낮 기온이 20를 넘길 것이라는 기상청의 일기예보가 있었는데 맞는 모양이다. 숨이 턱에 차게 15분쯤 오르면 왼편에서 올라오는 길 하나가 보인다. 아까 임도에서 나뉘었던 계곡길이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임도에서 20분 정도를 힘겹게 치고 오르면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터지는 멋진 전망대이다. 멀리 삼천포항과 한국남동발전 화력발전소는 물론이고, 사천의 와룡산과 한려해상국립공원을 이루는 수많은 섬들이 훤하다. 율도고개 건너편에 있는 대사산과 연태산으로 이어지는 창선도 북쪽 끝 산자락이 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전망대에서 2분도 안 되는 거리에 321m봉이 있다. 정상어림에 사량도가 잘 보이는 전망대가 있다지만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집사람과 얘기를 주고받다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이는 전망대가 주등산로에서 빗겨나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살피지 않을 경우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라는 얘기이다.

 

 

321m봉에서 4~5분 정도 살짝 내려섰다가 다시 7~8분 정도를 치고 오르면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활짝 열리는 전망대를 만난다. 아까 321m봉을 오르면서 보았던 풍경이 또 다시 펼쳐지는데 아까보다 한층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누군가 전망대의 나뭇가지에다 정상표지판을 매달아 놓았다. 그런데 속금산을 숙금산이라고 잘못 적어놓았다. 물론 속금산의 정상도 이곳이 아니다.

 

 

 

전망대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속금산 정상이다. '비단을 매달았다'는 속금산(束錦山) 정상은 이름과는 달리 평범하기 짝이 없다. 그저 능선의 한 지점에 불과할 정도로 아무런 특징이 없는 것이다. 거기다 조망까지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전의 전망대에다 정상표지판을 매달아 놓았던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정상에는 정상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대구의 산악인 김문암씨의 작품으로 보이는 정상표지판마저 없었더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렸을 것이다.

 

 

 

정상에서 5~6분쯤 내려가면 시야(視野)가 탁 트이는 전망바위에 올라서게 된다. 진행방향의 왼편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어 거칠 것 없는 조망이 펼쳐진다. 멀리로 호구산과 망운산 등 남해 본섬의 산들이 보이고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틀면 수려(秀麗)한 남해바다에는 이름 모를 수많은 섬들이 떠다니고 있다. 그런데 그 모양이 흡사 거북이가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렇다. 이 부근 바다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호령한 곳이었다.

 

 

 

전망대에서 제법 가파르게 떨어졌다가 다시 맞은편 능선을 치고 오르면 18분 후에는 303m봉에 올라서게 된다.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303m봉은 그냥 지나친다. 이어지는 산길은 또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그러나 이 구간은 나름대로의 눈요깃거리도 보여준다. 기괴(奇怪)하게 생긴 바위들이 있는가 하면 길가에 가득한 송악(Hedera rhombea)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나와 똑 같은 코스를 탔던 어느 산꾼이 얕잡아 보다가 큰코다쳤다고 표현한 걸 본적이 있다. 봉우리들이 하나 같이 500m도 채 되지 않은 나지막한 것들이라서 얕보다가 낭패를 당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나도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다. 나지막한 산들을 연결시키는 산행이 늘 그러하듯이 오늘 오른 산들도 역시 산과 산 사이의 골이 깊은 탓에 능선을 탄다기보다는 별개의 산들을 오르내린다는 느낌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303m봉에서 6분쯤 내려서면 임도에 이르게 되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2~3분 정도를 더 걸으면 경모재(敬慕齋)란 현판을 달고 있는 전주 이()씨 문중(門中)의 재실(齋室)이 나온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곳 재실 앞 사거리(이정표 : 대방산 3.8Km/ 곤유마을 1.76Km)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산행을 시작했던 율도고개가 나오고, 왼편으로 갈 경우에는 동대리나 서대리에 이르게 된다.

 

 

 

재실 앞에서는 임도를 버리고 맞은편 오솔길을 따른다. 잠깐이지만 편백나무 숲을 지나게 되는 산길은 상쾌하기 그지없다. 코끝을 스쳐가는 진한 향기 탓이리라. 이런 편백나무 숲은 국사봉 아래까지 계속해서 나타난다. 비록 짧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번복하지만 말이다. 재실 앞을 나선지 2~3분이 지나면 또 다시 임도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3~4분 후에는 깔끔하게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를 횡단하게 된다. 산두곡재(이정표 : 대방산 3.3Km/ 동대마을 1.53Km/ 서대마을 1.14Km/ 속금산 1.87Km)로서 동대마을과 서대마을 잇는 고갯마루이다.

 

 

 

산두곡재를 나선 산길은 임도를 따르기도 하고, 때로는 가로지르면서 이어진다. 길 찾기가 헷갈리지 않을까 걱정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을 참조하면 어렵지 않게 산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간에서 산길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특징을 보인다. 산봉우리를 고집하지 않고 사면(斜面)으로 우회(迂廻)를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경사(傾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제법 가파른데다가 어떤 곳에서는 너덜길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20분 쯤 후에는 이정표(국사봉/ 운대암/ 서대마을/ 수산)가 있는 사거리에 이르게 된다.

 

 

 

임도사거리에서 직진 맞은편 능선으로 향한다. 널따란 산길은 제법 가파르게 변한다. 6분쯤 올라갔을까 왼편에 평상이 놓여있다. 힘들면 잠시 쉬었다가라는 모양이다. 평상에서 다시 6분쯤 더 오르면 드디어 국사봉(363m)으로도 불리는 국사당 정상(이정표 : 대방산 정상 1.4Km/ 운대암 1.42Km)에 올라서게 된다.

 

 

국사당 정상은 평범한 하나의 봉우리, 꼭대기에 어른의 허리정도 높이로 둥그렇게 담이 쌓여있다. 이 담을 어떤 사람은 제단(祭壇)으로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이 부근에서 말을 키우던 군인들이 사용하던 막사(幕舍) 터라고도 한다. 그러나 난 전자(前者)를 따르고 싶다. 국사봉(國師峰)이란 국사(國師)와 봉()으로 나뉜다. 국사는 보통 국사당(國師堂), 곧 서낭당으로서 서낭(민속종교에서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에게 제사(祭祀)를 드리기 위한 제단을 말하는데, 지방에 따라 그 명칭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성황당(城隍堂)으로 불리거나, 전라남도에서는 할미당, 경상북도에서는 천황당(天隍堂), 평안도에서는 국사당 등으로 불린다. 따라서 국사봉은 국사당이 있는 산봉우리를 뜻하게 되는 것이다. 막사보다는 제단으로 보고 싶은 이유이다.

 

 

 

정상에서 대방산으로 향한다. 거의 직각에 가깝게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대방산이 나타난다.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가깝다. 제법 가파르게 떨어지는 널따란 산길을 잠시 내려서면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 옆으로 임도가 나있다. 이곳에서부터 산길은 잠시 임도 옆 능선을 따르다가 8(국사당에서부터) 후에는 삼거리(이정표 : 대방산 정상 1Km/ 광천마을/ 국사봉 0.5Km)에 이르게 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광천마을은 이곳에서 임도로 연결되는 모양이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상당히 가파르게 변한다. 그 가파름이 못내 버거웠던지 오름길에다 통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계단을 피내 난 길을 이용하지만 말이다. 최대한 속도를 떨어뜨리며 오른다. 힘들다는 느낌이 덜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게 16분 정도를 오르면 산길은 그 기세를 현저하게 누그러뜨리고, 이어서 6~7분 후에는 대방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대방산 정상은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만들어 놓기라도 한 듯이 한가운데가 동글납작하게 솟아오른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자연석으로 만든 커다란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정상에는 정상석과 삼각점(남해 23), 이정표(봉수대(절골) 0.4Km/ 지족마을 2.3Km/ 국사봉 1.5Km) 외에도 평상을 만들어 쉼터로 조성해 놓았다.

 

 

 

정상은 산상공원(山上公園)으로 꾸며져 있다. 그것도 보통의 공원들보다 한수 위인 조각공원이다. 솟대를 비롯해서 배나 비행기, 그리고 갖가지 동물들을 조각한 작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산불감시초소에서 근무하고 계시는 분이 일일이 만든 작품들이란다. 마침 근무를 하고 계시기에 여쭈어봤더니 무료함을 달래려고 만든 것들이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하여간 그분의 정성으로 대방산 정상은 또 하나의 눈요깃거리가 생겼다. 그것도 뛰어난 볼거리가 말이다.

 

 

정상에 오르면 시야(視野)는 그야말로 거침없이 터진다. 가히 천혜의 다도해(多島海) 전망대라고 할 수 있다. 조망 포인트(point)인 정상석 근처에 서면 남쪽으로는 본섬의 망운산과 호구산, 금산 등이 보이고, 동쪽 바다에는 사량도와 욕지도 연화도 등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북쪽 끝으로 나아가면 와룡산 등 사천의 산들이 나타난다. 날씨가 쾌청한 날에는 광양의 백운산은 물론이고 저 멀리 지리산의 주능선까지도 보인다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연무(煙霧)가 제법 짙게 끼어있는 탓이다. 아무튼 조망만 놓고 볼 때에는 본섬의 금산보다도 차라리 한수 위라는 누군가의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대방산 정상에서 길은 2갈래로 나뉜다. 남쪽, 그러니까 올라왔던 길의 반대방향으로 직진하면 지족해협(海峽)으로 내려가게 된다. 일명 창선일주등산로로 불리는 길이다. 만일 산행날머리를 창선면소재지 쪽으로 잡았다면 왼편(동쪽)의 봉수대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정상에서 8분 정도 더 걸으면 경상남도 기념물 제248호로 지정된 봉수대(이정표 : 운대암(절골 1.5Km/ 대방산 정상 0.4Km)이다. 고려 명종 때인 12세기 축조된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다섯 곳의 봉수로(烽燧路) 가운데 동래에서 한양으로 연결되던 제2봉수로에 속했다고 한다. 남해 금산봉수대에서 연결 받은 봉수를 사천 각산 봉수대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것은 복원(復原)된 것이라는데, 원형을 충실하게 따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안에 불을 지폈을 장소로 생각되는 원형의 구덩이까지 만들어 놓은 것이 다른 곳에서 보아오던 시늉만 낸 봉수(烽燧)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봉수대를 지나면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경사(傾斜)가 그다지 가파르지 않기 때문에 내려서는데 조금도 무리가 없다. 당연히 주위로 시선을 돌릴 여유까지 생긴다. 바위가 돌출된 곳에서는 조망(眺望)을 즐기기도 하고, 또 길가에 핀 봄꽃에다 눈길을 맞추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봄은 진작부터 우리 곁에 와 있었나보다. 이름 모를 갖가지 들꽃들이 피어나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봉수대에서 내려선지 20분 남짓 지나면 옥천수원지의 둑 아래에 이르게 되고,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보이는 시멘트포장 임도는 무시한다. 운대암으로 가는 길은 맞은편 산자락으로 나있기 때문이다. 오솔길을 따라 3~4분 정도를 더 오르면 임도삼거리(이정표 : 대방산(운대암) 2.8Km/ 대방산(절골) 1.9Km/ 상신마을 2.1Km)가 나온다. 대방산등산안내도가 세워진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운대암으로 가게 된다.

 

 

 

삼거리에서 4~5분 정도 들어가면 파란 물빛이 아름다운 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가에 오롯이 앉아 있는 사찰이 바로 운대암(雲臺庵)이다. 면 규모의 섬에 있는 사찰치고는 제법 규모를 갖춘 운대암 구경은 복층 구조로 지어진 천왕문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화사한 단청의 천왕문보다.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쓰레기소각장이 더 눈길을 끄는 이유는 왜일까? 투박한 모습이 왠지 친근하게 생각되어서이지 않을까 싶다. 그다지 크지 않은 운대암은 경사진 산자락에 계단식으로 절터를 닦은 후 한가운데에 주법당인 무량수전을 앉히고 옆에는 영산전, 그리고 그 위의 계단에다 산신각을 배치했다. 그리고 맨 아랫단에는 요사채가 자리 잡았다.

 

 

대한불교조계종 쌍계사의 말사인 운대암은 고려 말에 창건하여 망경암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지금의 터에다 새로 절집을 지으면서 이름 또한 운대암으로 바꿨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순신장군과의 인연도 얘기된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고, 그저 인근 해역에서 장군이 활약했던 인연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현존 절집들은 모두 최근에 지어진 것들로 특별한 의미는 없고, 옛것이라곤 그저 연대를 알 수 없는 부도 하나가 전부일 정도이다. 보유 문화재(文化財)로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16와 제417418호로 지정된 제석신중탱(帝釋神衆幀)’과 지장시왕탱(地藏十王幀),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이 있다.

 

 

절집을 빠져나오는데 주차장의 축대에 만들어진 샘터가 눈에 띈다. 용왕님까지 모셔놓은 경내(境內)의 약수터에서 물을 구하지 못했기에 냉큼 한 모금 들이키고 본다. 그러나 물맛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감로수(甘露水)을 예상했던 내 기대치가 너무 컸었나 보다.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임도를 따른다. 길가에 심어진 동백나무들이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다. 산행 내내 동백나무가 보이지 않아 남해안의 섬치고는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나 같은 여행객들을 위해 사찰에서 일부러 심어놓은 모양이다. 아쉬운 대로 위로를 삼으라면서 말이다.

 

 

운대암에서 빠져나오는 길에 오른편에 보이는 옥천저수지의 고즈넉한 풍경이 참 아름답다. 아까 옥천수원지의 둑 아래에서 오른편으로 나있던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랐을 경우에 이르게 되는 저수지이다.

 

 

산행날머리는 창선초등학교 앞(창선면 소재지인 상죽리)

평평하던 임도는 고개를 넘으면서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리도 산자락을 따라 구불대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임도를 따르다보면 길가 나뭇가지에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이 얼기설기 매달려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오솔길이 나있다. 쉽게 말해 지름길이다. 이런 곳에서는 어디로 갈지를 갖고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어디로 가나 거리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심지어는 임가도 더 짧은 구간도 있다. 운대암을 출발한지 40분쯤 되면 산자락 아래에 있는 개울가에 내려서게 되면서 사실상의 산행은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정상에서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40분이 걸린 셈이다. 13.7Km(국제신문 참조)의 거리를 걷는데 4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 얼마만큼 산행이 편했을지 예상이 갈 것이다. 개울가에서 산행에서 흘렸던 땀을 닦고 다시 길을 나서면 5분 후에는 창선면 소재지인 상죽리에 있는 창선초등학교 앞에 이르게 된다.

감악산(紺岳山, 952m)

 

산행일 : ‘15. 3. 17()

소재지 : 경남 거창군 남상면과 신원면의 경계

산행코스 : 가재골주차장선녀폭포명산 갈림길감악산해맞이공원 갈림길연수사물맞는 약수탕사거리가재골주차장(산행시간 : 2시간30)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산을 찾아다니다 보면 가끔 이름과 동떨어진 산들을 볼 수 있다. 감악산도 역시 그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감악산은 야청빛 감()’자에 큰 산 악()’을 쓰는 산일지니 야청빛(감색)으로 빛나는 큰 산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막상 찾아온 감악산(紺岳山)은 산행시간이 2시간이면 충분할 정도로 이름에 걸맞지 않게 왜소한 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의외인 것은 이름에 악()자가 들어있기에 어련히 바위산일 것으로 여겼는데 실제로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특별히 보여줄 만한 산세(山勢)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상에서의 조망(眺望)과 헌강왕(헌안왕이라는 얘기도 있다)이 마시고 병()을 나았다는 영험한 물을 지닌 연수사가 전부일 정도이다. 거기다 하나를 덧붙인다면 선녀폭포일 것이고 말이다. 감악산 하나만 오르는 것보다는 주변의 다른 산들과 연계산행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가재골주차장(거창군 남상면 무촌리)

88고속도로 거창 I.C에서 내려와 우회전, 곧이어 국농소 삼거리에서 다시 우회전하여 1089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 거창농공단지를 지난 후, 월평사거리에서 월평리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2Km정도를 들어간다. 이어서 1084번 지방도를 만나면 이번에는 좌회전해서 들어가다가 무촌리(남상면)을 지나자마자 신원방면 이정표를 보고 또 다시 좌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가재골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화장실과 팔각정까지 갖춘 반듯한 주차장이다.

 

 

 

주차장에 내리면 감악산 물맞이길 안내도(사진은 정상의 것을 사용)’가 등산객들을 반긴다. 이 안내도는 이곳 외에도 정상이나 해맞이 데크등 여러 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감악산 물맞이길은 행정안전부 주관의 친환경 생활공간 조성사업이 만들어낸 거창 판의 둘레길이다. 남상면 매산 마을을 시작으로 매산저수지를 지나 연수사로 가는 옛길을 복원했고, 해맞이 행사장을 연결시키면서 역사와 전설, 그리고 스토리가 있는 녹색길로 조성했다. 참고로 물맞이길은 연수사 옆에 있는, 그 유명한 '물맞는 약수탕'을 모티브(motive)로 했으며 연수사를 중심으로 물 맞으러 가는 길’ ‘고행의 둘레길’ ‘전망대 가는길’ ‘삼신도량 하는 길등의 구간으로 나누었다.

 

 

산행들머리는 팔각정(이정표 : 등산로 300m, 선녀폭포 350m/ 연수사 1.3Km) 뒤에서 열린다. ‘! 오래 살다보니 내려가면서 산행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네?’ 어느 일행의 말마따나 희귀하게도 산행은 내려가면서 시작된다. 2~3분쯤 내려가면 임도를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구름다리가 나타난다.

 

 

 

길가에 만들어진 쉼터, 산행을 하다보면 정자(亭子) 등의 쉼터를 자주 만나게 된다. ‘물맞이 길을 조성하면서 만든 것일 것이다. 

 

 

두 번째 다리(이정표 : 물맞는 약수탕 1.6Km, 감악산 2.3Km/ 매산 방문자센터 3.5Km)를 건너 70~80m쯤 더 들어가면 높이가 10m쯤 되는 멋진 폭포를 만나게 된다. 감악산의 명물인 선녀폭포(仙女瀑布)이다. 감악산 북쪽의 연수사 약수바위에서 발원된 물이 모여 이뤄진 폭포로서, 전설(傳說)에 의하면 매년 칠석날이면 선녀가 내려와 선녀탕과 계곡에서 놀다가 폭포수로 몸단장을 한 후,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여 승천(昇天)하였다 한다. 참고로 거창의 안산(案山 : 풍수지리에서,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인 감악산에는 2개의 폭포(瀑布)가 있다. 선녀폭포와 신선폭포인데 두 폭포는 나름대로 특징을 갖고 있다. 3단으로 이루어진 선녀폭포는 여성스럽고, 그에 반해 수직형인 신선폭포는 남성형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폭포는 그중 선녀폭포’, 가슴 설레는 이름에 비해 그 자태는 평범하기 짝이 없다.

 

 

 

다시 입구로 되돌아와 임도를 따라 30m쯤 더 걸으면 왼편 산자락으로 놓인 높다란 계단이 보인다. 선녀폭포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展望臺)로 오르는 계단이니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선녀폭포의 전체적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하나의 폭포로 보이던 아까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폭포가 3개로 나뉘어서 나타난다. 선녀를 만난 듯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높이 14~15m 정도로 그다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자태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한마디로 아담하면서도 신비스럽다. 그렇다 이 정도는 되어야 감악산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까 아래 전망대에서 폭포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던 소리가 떠올라 실소(失笑)를 짓게 만든다. ‘이 정도의 폭포에서 노닐었을 정도라면 못난이 선녀였던 모양이다라는 생각 말이다.

 

 

 

다시 임도로 내려와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산자락 아래로 난 길을 따르면 가재골주차장 갈림길’(이정표 : 감악산 2.6Km/ 가재골주차장 500m/ 매산 방문자센터 3.8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감악산 2.6Km’ 방향으로 8분 정도 더 걸으면 산길은 임도를 벗어나 오른편 산자락(이정표 : 감악산 2.1Km/ 선녀폭포 800m, 가재골주차장 1.0Km)으로 들어선다.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도 산길은 경사(傾斜)가 거의 없이 이어진다. 마치 급할 것이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것이다. 주변은 참나무들 세상, 간혹 소나무도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참나무들이다. 어쩌면 지질(地質)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길가가 온통 습지(濕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로 난 길은 질퍽거림을 배겨내지 못하고, 끝내는 통나무를 엮어서 바닥에 깔아 놓았다. 어떻게 보면 흙 위에 놓인 나무다리를 건너는 꼴이다. 소나무들이 뒷전으로 밀려난 이유일 것이다.

 

 

습지가 끝날 즈음이면 정자(亭子)가 나타나고, 이 정자를 왼편에 끼고 능선으로 올라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경사(傾斜)가 심하지 않은 능선도 역시 질퍽이기는 매한가지이다. 다만 습지였던 아까와는 달리 땅이 얼었다가 풀리는 과정에서 질퍽이는 것이 다를 뿐이다. 감악산이 원래부터 물과 인연이 깊다고 했는데, 그 물기가 온 산을 뒤덮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요즘 같은 가뭄철에 이렇게 질퍽일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45, 그러니까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20분 정도가 지나면 연수사 갈림길’(이정표 : 감악산 1.0Km, 청연삼거리 4.4Km/ 물맞는 약수탕 1.0Km, 연수사 1.3Km/ 가재골주차장 2.1Km)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연수사, 물론 연수사를 경유해서 정상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다. 그 코스는 이따가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지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연수사갈림길을 지나면서 산길은 제법 가팔라진다. 그러나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오르는 길가에 별로 필요할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데 로프를 길게 매어놓았다. 하지만 로프는 의외의 용도로 그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질퍽이는 길이 너무 미끄러워서 로프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그냥 올라설 수가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7분 후에는 왼편으로 갈림길(이정표 : 감악산 0.6Km/ 명산 4.7Km/ 가재골주차장 2.5Km) 하나를 만들어 낸다. 명산으로 가는 능선 길이다. 감악산 하나만으로는 산행거리가 너무 짧은데 명산까지 한꺼번에 묶는다면 괜찮은 산행코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명산갈림길에서 10분 남짓 더 오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감악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꼭대기에 올라앉은 정자와 방송사 송신탑이 어서 오라며 손짓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명산갈림길에서 15분 남짓,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20분 정도가 걸렸다.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 오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방의 경치를 조망(眺望)할 수 있는 곳에 지어진 팔각정이다. ‘감악산 해맞이 전망대라는 의젓한 이름까지 갖고 있다. 정자 옆에는 널따란 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난간에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해맞이 행사를 이곳에서 개최했던 모양이다.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외에도 많은 시설들이 보인다. 팔각정과 이정표(연수사 1.4Km/ 명산 5.3Km) 외에도 무인산불감시망루와 장승들, 그리고 물맞이길 안내도감악산전망대 안내판등 번잡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많이 세워져있다. 거기다 ‘KBS중계소의 송신탑까지 머리를 내밀고 있어 어지럽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참고로 감악산의 본디 이름은 대덕산(大德山)이다. 우리나라 산들 중에 덕()이라는 한자가 들어가는 산들은 대부분 포근한 느낌의 육산(肉山)들이다. 그렇다면 험한 산들에 어울리는 감악산(紺岳山)보다는 옛 이름인 대덕산으로 불리는 게 옳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상에는 각종 시설물들 외에도 아림장군아름미인이라는 한 쌍의 장승을 세워 놓았다. 거창의 캐릭터(character)인 모양인데, 아무튼 잘 생겼다. ‘아림이나 아름이라는 이름은 어쩌면 아름답다에서 따온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정상에서 ‘KBS중계소방향으로 보면 널따란 반석(盤石)들이 여러 개 보인다.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간식을 먹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주변의 조망까지 함께 즐길 수 있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의 명당자리이다.

 

 

정상에서는 시야(視野)가 사통팔달로 열린다. 이는 조망(眺望)이 일품이라는 얘기이다. 북쪽으로 거창읍 시가지가 아스라이 보이고, 반대편에는 거대한 산군들이 조망된다. 비록 연무(煙霧)로 인해 흐릿하게 형태만 나타날 따름이지만 제왕 같은 지리산과 덕유산 등일 것이다. 조금 더 시야를 옮기면 가야산 일대 겹겹이 쌓여 있는 산군(山群)들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누군가 그랬다. 감악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백화점식으로 펼쳐지노라고. 시원함과 뻥 뚫림, 명산으로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정상에서 통신기지 방향으로 몇 걸음만 더 옮기면 활공장(滑空場)이 나온다. 그러나 말이 활공장이지 그저 바닥에다 플라스틱 망()을 깔아 놓고, 한쪽 귀퉁이에다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기 위한 기구를 매달을 수 있도록 쇠막대기를 세워놓은 것이 전부이다. 요즘 산에 다니다보면 시설 좋은 활공장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구태여 누가 이런 곳까지 찾아올지가 의심스럽다. 그러나 조망(眺望) 하나는 끝내준다. 지리산과 덕유산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뻥 뚫리는 것이다. 아쉽게도 오늘은 연무(煙霧)로 인해 어디가 어디인지 도통 분간이 안 되지만 말이다.

 

 

활공장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KBS중계소의 담장인 철조망 근처에서 오른편으로 갈림길(이정표 : 감악재 800m/ 연수사 1.1Km, 선녀폭포 2.0Km/ 전망대 0.3Km) 하나가 나뉜다. 연수사나 선녀폭포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나 개의치 말고 진행하면 된다. 조금 후에 연수사로 내려가는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수사갈림길을 지나면 ‘KBS중계소의 앞마당이다. 이곳도 역시 마당 한켠에다 널따란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데크 앞에 감악산 해맞이빗돌이 세워져 있고, 중계소의 건물 외벽에 해맞이축제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새해 첫날 해맞이 축제행사가 열리는 모양이다. 참고로 전망대 근처에서 또 하나의 갈림길(이정표 : 신선폭포 2.4Km, 감악사지부도 1.1Km/ 감악재 770m, 청연마을 삼거리 3.1Km/ 감악산 330m)이 나뉜다. 왼편으로 가면 감악산 2대 폭포 중의 하나인 신선폭포를 구경할 수 있으나 그쪽을 하산코스로 잡지 않았다면 고민하지 말고 그냥 감악재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KBS중계소앞에서 임도를 따라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오솔길 하나가 오른편으로 가지(이정표 : 연수사 1.1Km/ 감악재 680m/ 전망대 0.4Km)를 친다. 연수사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야만 한다. 연수사로 내려가는 길, 아직까지도 하얀 눈이 쌓여 있는 것이 보인다. 오늘 기온이 ‘23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날씨는 한여름에 가까울 만치 더운데도 땅바닥은 한겨울이라니 참으로 이색적인 풍경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의 손에 언제부턴가 비닐봉지 하나가 들려있다. 주변에 잣나무들이 보이는 것을 보니 그녀의 살림꾼 기질이 또 다시 발동했나 보다. 언제 어디서나 먹거리를 찾는 그녀의 눈에 맛있는 간식거리를 놓쳤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꽤나 많은 양의 잣을 주을 수 있었다.

 

 

잣나무 숲을 빠져나오면 비탈진 산자락에 비집고 들어앉은 절간이 나타난다. 물과 인연이 깊다는 연수사(演水寺)이다. 연수사(演水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신라 애장왕(哀莊王) 3(802)에 감악조사(紺岳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연수사 이전의 절 이름이 감악사였다고 하니. ()과 절(), 그리고 절을 지은 스님의 이름이 모두 감악(紺岳)이란 이름으로 같다. 그건 그렇고 원래의 절은 지금 보다 남쪽에 지으려고 했으나, 서까래용으로 다듬어 놓은 재목(材木)이 없어졌기에 다음 날 찾아보니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놓여있더란다. 그래서 서까래가 발견된 장소에다 옮겨 지은 것이 오늘의 연수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만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연수사의 창건과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이름 모를 병에 시달렸던 헌안왕이 이 절 부근의 약수를 마시고 병을 고친 뒤에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는 것이다(naver지식 참조). 한편 사찰에서 세운 안내판에는 병을 고친 이가 헌강왕이라고 적고 있어 다소 헷갈린다. 다만 신라의 제47대 왕인 헌안왕(재위 : 857~861)은 재위 5년이 되던 해에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49대 헌강왕(재위 : 875~886)도 말년에 병으로 쓰러졌다는 기록이 있다. 허나 헌강왕 때 신라의 최전성기(最全盛期)를 구가했고, 또한 불력(佛力)에 의해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추구하던 시기였던 것으로 보아 헌안왕보다는 헌강왕에 더 무게가 실어야 하지 않나 싶다.

 

 

현존 건물로는 대웅전과 세석산방, 종각, 칠성각, 요사채 등이 있으나,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아서, 염두에 두어야할 문화재는 보유하고 있지 않다. 참고로 신라 때 지은 감악사는 빈대 때문에 망하고 고려 공민왕 때 벽암선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그 이름을 연수사로 고쳤다고 한다. 물론 현재 눈앞에 보이는 건물들은 당시의 건물들이 아니다.

 

 

대웅전 앞마당 한켠에 조롱박 하나가 놓여있다. 물론 진짜는 아니고 돌로 만든 조형물(造形物)이다. 바가지의 주둥이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저 물이 혹시 헌강왕이 마셨다는 약수(藥水)가 아닐까? 이곳 연수사를 짓게 해준 빌미를 제공했다는 그 약수 말이다. 연수사의 약수는 푸른빛이 감도는 바위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그 물은 맛이 좋고, 극심한 가뭄에도 결코 마르는 법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단 한 모금 마시고 볼 일이다. 물은 달고 시원했다. 내가 알기론 헌강왕이 마셨던 약수는 물의 온도가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약수는 여름철에 제격이겠다. 그만큼 시원하단 의미이다.

 

 

연수사 일주문 곁에는 수령(樹齡)600년이나 되는 은행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124)가 있다. 높이 38m에 둘레 7m, 나뭇가지만 20m에 이르는 나무로 성인 45명이 팔을 벌려 감싸 안아야 될 정도로 거대하다. 이 은행나무에는 어느 모자(母子)의 애틋한 그리움과 정이 담긴 설화(說話)가 전해져 내려온다. 고려 때 한 여인이 왕손(王孫)에게 시집을 갔으나 그 남편은 유복자(遺腹子) 하나만 남기고는 일찍이 저세상으로 가버렸던 모양이다. 그 여인이 연수사에서 출가하여 승려의 몸으로 남편의 명복을 빌고 있었는데, 10년이 지난 어느 날 한 노승이 아들을 데려가 공부를 시키겠다고 하였단다. 이에 아들이 절 뒤뜰에 젓()나무를 심고 이 나무가 사철 푸르게 자랄 것이니 저를 보듯 길러 주세요.’라고 말하니, 어미도 나는 앞뜰에 은행나무를 심고 기다릴 테니 만약 훗날 내가 없더라도 어미를 보듯 대하라고 화답(和答)을 하였더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젓나무는 강풍에 부러졌고 은행나무만 홀로 남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일주문 앞(이정표 : 물맞는 곳 180m, 감악산 1.4Km)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후,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라 잠시 걸으면 마치 성벽(城壁)처럼 반듯하게 쌓아올린 돌담이 나타난다. ‘물 맞는 약수탕이란다. 중풍에 걸린 헌강왕이 이 물을 마시고 목욕한 후에 병을 나았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이름난 약수란다. 그러나 아쉽게도 물은 나오지 않고 있다. 안내판을 보면 대웅전 뒤에 있는 약수바위에서 솟아나는 물을 원수(原水)로 쓴다는데, 겨울철이라서 연결파이프가 얼어붙기라도 한 모양이다. 덕분에 올여름 땀띠도 예방할 겸해서 노천목욕을 해보려던 내 바램은 한낱 꿈으로 사라져버렸다.

 

 

약수탕은 남탕과 여탕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런데 그 구분에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아림욕장이라는 이름표를 단 장승들을 이용해 남녀를 구분해 놓았는데, 우리네야 금방 알아챌 수 있겠지만 낯선 이방인들에게는 어려움이 따를 수도 있을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오래 전에 해외출장을 나갔다가 이와 비슷한 경우로 봉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의 일이다. 호텔에서 여장을 풀자마자 같이 간 모 일간지 기자와 함께 지하에 있는 사우나로 내려갔다. ‘북유럽의 명물인 사우나를 꼭 들러보아야 할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막상 내려간 사우나에서 우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남녀구분의 표기가 스웨덴어로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글자 부근에 그려진 문양으로 대충 감을 잡고 들어간 사우나, 결과적으로 우린 여탕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다행이 낮이었기에 약간의 소동만 피우고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약수탕(이정표 : 참나무평원 삼거리 1.1Km, 감악산 1.1Km/ 선년폭포 1.6Km, 매산 방문자센터 5.1Km)에서는 참나무평원 방향으로 향한다. 산길은 다시 온전한 오르막길로 변한다. 감악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과 겹치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6~7분 후에는 사거리(이정표 : 가재골주차장 1.0Km, 선녀폭포 1.4Km/ 참나무평원삼거리 0.8Km/ 감악산 0.9Km/ 물맞는 약수탕 280m, 연수사 0.5Km)를 만나게 된다.

 

 

사거리에서 왼편 가재골주차장 방향으로 내려선다. 곧바로 직진해도 가재골주차장으로 갈 수는 있으나 그럴 경우에는 참나무평원삼거리에서부터 올라올 때 지나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내려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가재골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한마디로 가파르다. 오늘 걸었던 코스 중에서 가장 심하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능선이 온통 소나무들 천지라는 것이다. 소나무가 귀한 산에서 만난 귀하신 몸들이다. 코끝을 스치는 진한 솔향기에 취하다보면 가파른 산길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산행날머리는 가재골 주차장(원점회귀)

솔향기에 취해 걷다보면 17분 후에는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내려서는 지점이 마침 개울가, 산행을 하면서 흘렸던 땀을 씻고 가기에 충분할 만큼의 물이 흐르고 있다, 특히 오늘 같이 질퍽거리는 산길을 걸은 날에는 스틱이나 신발을 닦기에 딱 좋다. 이어서 임도를 따라 3~4분 정도를 더 걸으면 도로(이정표 : 가재골주차장 200m/ 물맞는 약수탕 1.0Km/ 감악산 2.9Km)를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몇 걸음 걷지 않아 가재골 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2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정상에서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2시간30분이 걸린 셈이다. 그것도 서서히 걸은 시간이니 이곳 거창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에 비할 경우 산행코스가 너무 짧다고 볼 수 있다.

북병산(北屛山, 465.4m)

 

산행일 : ‘15. 1. 31()

소재지 : 경남 거제시 동부면과 일운면, 그리고 삼거동의 경계

산행코스 : 망양마을맷돌소원바위거제지맥북병산전망바위망치고개펜션지구망치마을(산행시간 : 2시간4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북쪽을 병풍(屛風)처럼 둘러치고 있는 형상이라는 북병산은 한마디로 조망(眺望)이 뛰어난 산이다. 거제도에 있는 산들이 모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 초승달 같은 해변과 한없이 푸른 바다가 성큼 눈앞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인 탓에 등산로가 부드러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거기에 비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육산의 단점은 없다. 망치고개로 내려가는 능선이 약간은 어설프지만 나름대로 바윗길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명품 반열에 올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한번쯤은 꼭 올라봐야 할 멋진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망양마을(거제시 일운면 망치리)

대전-통영고속도로 통영 I.C에서 내려와 14번 국도를 타고 거제도로 들어가면 거제시가지와 지세포. 구조라를 거쳐 망치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삼거리에서 오른편 북병산로를 따라 들어가면 잠시 후에 산행들머리인 망양마을에 이르게 된다. 14번 국도를 타고 오다 상동교차로(거제시 문동동)에서 우회전하여 1018번 지방도와 구병산로를 번갈아 타고 들어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산행들머리인 망양마을은 행정단위인 망치리에 소속된 하나의 단위부락이다. 마을 이름인 망치는 망을 보는 언덕이란 뜻의 한자어인 망치(望峙)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마을을 돌아보다 보면 작업도구인 망치를 형상화한 마을 간판을 볼 수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아울러 기억에 오래 남게 하려는 기발한 아이디어(idea)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펜션 휴의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망양마을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길가에 잘 지어진 펜션(pension)들을 구경하면서 2~3분 정도 걷다보면 벤치 등을 갖춘 맷돌바위 쉼터가 나온다. 원래 망양(望洋)마을은 넓은 바다를 바라본다.’는 이름 그대로 전망(展望)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대마도까지도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장구섬(형제섬)과 갈매기알섬(홍도)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다. 망양마을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다 쉼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쉼터에 이르면 소원맷돌바위 가는 길이라고 쓰인 이정표 하나가 보인다. 2~3분이면 둘러보고 나올 수 있으니 시간에 쫒기지만 않는다면 잠깐 들어가 보자. 거제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해 놓은 옛날이야기 하나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속에 감춰오던 간절한 소원(所望) 하나 빌어보면 어떨까? 예로부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傳說)이 담겨 있는 바위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왜 맷돌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궁금하다면 바위의 뒤편으로 가볼 일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맷돌의 형상이 어렴풋이나마 나타나기 때문이다.

 

 

 

쉼터로 되돌아 나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쉼터에서는 머무르지 않은 채이다. 이유는 조금 후에 오를 북병산에서 눈터지는 조망(眺望)을 실컷 즐길 수 있으므로 구태여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쉼터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왼편으로 오솔길(이정표 : 북병산 3.0Km) 하나가 나타난다. 임도를 벗어나 오솔길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찾는 사람들의 기()부터 죽여 놓고 본다. 시작부터 가파른 것이다. 거기다 갈수록 그 경사(傾斜)는 더 심해지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끝내는 이리저리 갈지()자를 그리면서야 겨우 위로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까지 변해버린다. 거기다 볼거리도 일절 없다. 그저 땅에다 코를 박고서 묵묵히 올라설 따름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30,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지 20분 남짓 되면 능선안부(이정표 : 북병산 2.2Km, 망치고개 3.6Km/ 망양 0.8Km)에 올라서게 된다. 안부에 이르니 이대장이 깔아 놓은 방향표시지가 좌우(左右) 두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아마 오른편에 있는 봉우리를 다녀오라는 모양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는데 김진수선배께서 손사래까지 쳐가며 가지마라고 말리신다. 볼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 고집스레 발걸음을 재촉한다. 행여나 구조라마을의 전경이라고 한 컷 (cut)담아볼 수 있을까 해서이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바램 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조금 후에 올라선 무명봉은 실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아무런 특징이 없는 봉우리는 조망(眺望)까지도 일절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다시 능선안부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북병산으로 향하는 능선을 탄다. 무명봉까지 다녀오는 데는 대략 8분 정도가 걸렸다. 능선으로 난 길은 한마디로 곱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거기다 길바닥이 보드라운 흙으로 이루어져 있어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능선안부를 출발한지 5분쯤 지나면 올라서게 되는 나지막한 봉우리 위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363m봉으로 오른편에 보이는 산길은 거제지맥(巨濟枝脈)으로서 번송치(소동고개)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북병산의 정상을 거쳐 망치고개까지는 거제지맥의 마룻금을 따르게 된다.

 

 

거제지맥(巨濟枝脈), 지리산이 남으로 달려오다가 고성 벽방산(碧芳山)과 통영의 제석봉(帝釋峰)을 솟구치고, 견내량에서 바다로 빠졌다가 다시 솟아오르면서 통영과 거제를 갈라놓았다. 견내량(見乃梁)에서 잠시 물속으로 가라앉은 지맥이 오량 앞에서 힘차게 솟아올라 시래봉(始來峰)을 만들었다. 육지로부터 처음 이어진 산이란 뜻이다. 여기서부터 다시 산줄기가 시작된다. ‘대우조선산악회에서 거제지맥이란 이름으로 등산로를 정비할 때만해도 대금산에서 망산에 이르는 도상거리 43km의 산줄기를 지칭하였다. 그러나 요즘은 거제지맥과 북거제지맥으로 정리하고 있다. 거제대교에서 남쪽 끝단으로 이어진 산줄기를 거제지맥이라 하고, 거제지맥에서 북동으로 분기한 산줄기를 북거제지맥이라 정리하는 것이다(박성태님의 신산경표참조)

 

 

363m봉을 지나면서 길은 반질반질해진다. 거제지맥을 종주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어서 큰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밋밋한 능선을 따라 6~7분쯤 더 걸으면 사거리가 나타난다. 왼편은 양지마을이나 망양마을로 연결되는 것 같으나 오른편은 어디로 연결되는지 모르겠다.

 

 

사거리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벌목(伐木)을 끝낸 산의 사면(斜面)에는 어린 편백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건너편 산자락의 곳곳에 녹음이 짙다. 아마 편백나무 숲인 모양이다.

 

 

벌목을 한 덕분에 잠깐 동안이나마 북병산 정상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정상어림이 자못 웅장하기까지 하다.

 

 

 

이어지는 산길은 부드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볼거리는 아무것도 없다.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구간이다. 363m봉에서 내려선지 20분쯤 지나면 이정표(북병산 1.3Km, 망치고개 2.7Km/ 망양 1.7Km)를 지나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거제지맥 종주꾼들을 위한 안내판 앞에 선다. ‘대우조선해양산악회에서 세워 놓은 것인데 이곳을 북병산삼거리라고 표기하고 있다. 조금 전에 오른편에 보였던 임도와 연결된다는 의미인 모양이다.

 

 

 

북병산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서서히 오름짓을 시작한다. 정상을 쉽게 내주지 않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치는 모양이다. 그리고 20분을 조금 더 넘긴 후에는 정자(亭子)가 있는 능선 위 삼거리에 올라서게 된다. 삼거리에는 이정표(북병산 0.2Km, 망치고개 1.6Km/ 심원사 0.9Km/ 망양 2.8Km)와 정자, 그리고 벤치(bench)까지 갖춘 작은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난 길은 심원사로 내려가는 길이며, 정상은 물론 왼편 능선을 따르면 된다.

 

 

 

 

삼거리에서 조금만 더 가면 왼편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북병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30분이 지났다. 커다란 바위들이 널려있는 서너 평 남짓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커다란 정상표지석과 이정표(망치고개 1.4Km/ 망양마을 3.0Km), 그리고 삼각점(거제 311, 1986 재설)과 이곳 북병산이 ‘10대 명산임을 알리는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뜬금없는 ‘10대 명산에 놀랄 필요까지는 없다. 그 범위(範圍)를 거제도에 한정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참고로 ‘10 명산은 가라산과 노자산, 북병산, 옥녀봉, 국사봉, 대금산, 산방산, 계룡산, 선자산, 앵산 등 10개의 산을 이르는 말이다.

 

 

 

 

 

커다란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진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막힘이 없다. 우선 발아래에는 구조라와 망치마을의 아름다운 해안(海岸)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연출된다. 그리고 나머지 세 방향에서는 거제의 높고 낮은 산들이 파노라마 (panorama)를 그려낸다. 북동쪽으로는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지능선과 지세포만이 내다보이고, 그 뒤에는 옥포만의 풍경과 국사봉과 와야봉이 나타난다. 또한 북서 방향에는 구천저수지와 선자산에서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지능선이 또렷하다. 선자산 뒤로 희미하게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통영의 벽방산일 것이다. 그 외에도 노자산과 가라산 등 거제도에 있는 거의 모든 산들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이 좁다고 불평할 필요는 없다. 정상 바로 아래에 수십 명이 쉬어도 될 만큼 널따란 암반(巖盤)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시야(視野)까지 뻥 뚫리니 실컷 눈요기를 즐기다 가면 될 일이다. 마침 주어진 시간까지 여유롭기에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모처럼의 망중한(忙中閑)을 즐겨본다. 발아래 저만치에 한없이 푸르른 바다가 펼쳐진다. 그 바다에는 윤돌섬이라는 작은 섬 하나가 두둥실 떠있다. 저 섬에는 예로부터 재미난 설화(說話)가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이 곳에 한 과부가 성이 윤씨인 아들 삼형제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맞은편 양지마을에 사는 홀아비 어부와 마음을 달래 주는 사이가 되었단다. 그러나 겨울만 되면 여간 고생이 심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추운 겨울에 버선을 벋고 바닷길을 건너느라 얼마나 발이 시렸겠는가. 남이 알까 두려워 말도 못하고 애만 태우는 과부의 심정은 세 아들들이 알아주었다. 이들은 어머니가 신발을 벗지 않고도 바닷길을 건널 수 있도록 몰래 징검다리를 놓았고, 그 후부터 과부는 버선을 벗지 않고도 어부를 만나러 다닐 수 있게 되었단다. 그런 연유로 윤씨 아들들이 놓은 돌다리라고 해서 윤돌섬또는 효자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망치고개 방향으로 내려서면서 하산이 시작된다. 이 코스가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암릉구간이 많아서 스릴(thrill)과 조망(眺望)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바윗길로 이루어진 이 구간은 철계단을 오르거나 안전로프에 매달려서 내려와만 한다. 안전에 주의가 필요하나 그렇다고 위험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것까지는 없다. 그저 스릴을 즐기면서 눈이 호사(豪奢)만 실컷 누리면 될 일이다.

 

 

 

 

 

바위 위에 올라서면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바다는 한없이 넓다(같은 풍경이 너무 많아서 사진은 생략했다). 물이 빠지면 해변으로 연결되는 윤돌섬, 그 뒤에 보이는 산은 아마 수정봉일 것이다. 그리고 수정봉 뒤에서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는 섬들은 물론 올망졸망한 내도와 외도이다.

 

 

 

 

정상에서 15분쯤 내려오면 전망이 좋은 바위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 이르기 전에도 여러 번에 걸쳐 전망이 좋은 바위에 올랐었음은 물론이다. 바위에 서면 또 다시 쪽빛으로 물든 남해바다가 열린다. 구조라해수욕장과 망치몽돌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고, 거제 해금강까지 손에 잡힐 듯하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멀리 일본의 쓰시마까지 속속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하더니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외에도 거제의 높고 낮은 수많은 산들이 한눈에 들어옴은 물론이다.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북병산 정상, 큰 바위가 흡사 귀여운 강아지를 닮았다. 누군가는 사자나 양을 닮았다고도 한다. 이는 보는 사람들의 관점이 각기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전망바위에서 20분 남짓 더 걸으면 망치고개에 내려서게 된다. 왕복 2차선 포장도로인 망치고개에 내려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길가에 세워진 거대한 비석이다. 비석에는 '황제의 길'이라고 씌어 있다. 이 길이 거제도에서도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있는 황제의 길인 모양이다. 황제의 길은 1968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이디오피아 황제 '셀라시에(Haile Selassie)'가 거제를 찾았다가 이 곳을 지나던 중 해금강쪽 바다를 바라본 경치에 매료돼 당초 일정을 연기해 하루를 더 머물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만큼 이곳이 아름답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파병으로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은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셀라시에를 스토리텔링(storytelling)해서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려는 기발한 발상이다.

 

 

 

망치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황재의 길을 가로지르며 이어진다. 도로를 횡단하면 길이 두 갈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무턱대고 들머리에 세워진 이정표(학동고개 5.5Km, 애바위암장 700m)만 보고 진행할 경우 낭패를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이정표를 무시하고 무조건 왼편 길을 따라야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학동고개 방향은 거제지맥종주꾼들이나 다니는 코스이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망치마을의 몽돌해수욕장

하산 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은 경사(傾斜)까지도 거의 없다. 그 자체만으로도 폭신폭신할 게 분명한데, 거기다 그 위에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있다. 이건 숫제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참나무 숲으로 이어지던 숲이 언제부턴가 다래넝쿨 군락으로 바뀌어있다. ‘봄에 오면 좋겠네요.’ 가을에 오면 다래 몇 알 따먹을 수 있겠다는 내말에 대한 집사람의 대꾸이다. 같은 다래넝쿨이건만 집사람의 눈에는 향긋한 봄나물로 보이는 모양이다. 망치고개에서 20분 정도 내려서면 펜션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14번 국도와 만나게 된다. 이어서 국도를 따라 왼편으로 5분 남짓 더 걸으면 망치마을 앞 몽돌해수욕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7.5)은 총 3시간이 걸렸다. 정상에서 20분 남짓 쉬었으니 2시간40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용골산(591m)-토곡산(土谷山, 855.5m)

 

산행일 : ‘15. 1. 17()

소재지 : 경남 양산시 원동면

산행코스 : 수청마을전망대용골산석이바위토곡산너럭바위596물맞이폭포함포마을(산행시간: 5시간)

같이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색 : 용골산이나 토곡산은 웬만큼 이력이 붙었다는 산꾼들조차도 익숙하지 않은 산들이다. 부산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어쩌면 가지산이나 신불산, 영축산 등 영남알프스의 유명세에 가린 탓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산의 기세(氣勢)만은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명산들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토곡산을 기장에 있는 달음산 및 이웃해 있는 천태산과 더불어 부산근교의 3대 악산(惡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런 만큼 산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가 바윗길로 이어진다. 때문에 바위를 부여잡고 오르내리는 재미가 쏠쏠하고, 시야(視野)는 시도 때도 없이 사통팔달로 열린다. 한마디로 결코 숨어있어서는 안될 산이라는 얘기이다.

 

산행들머리는 수청마을 버스정류장(양산시 원동면 서룡리)

남해고속도로 물금 I.C에서 내려와 좌회전 양산신도시의 시가지(市街地)를 통과하면 1022번 지방도와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삼랑진방면으로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수청마을(원동면 서룡리)에 닿는다. 도로변에 홍선정이라는 음식점이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수청마을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법랑사의 커다란 입간판이 보인다. ‘산신공명 기도도량이라고 적혀 있는 걸로 보아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寺刹)이라기보다는 무속신앙(巫俗信仰)을 본업(本業)으로 삼고 있지 않나 싶다. 법랑사로 들어가는 길과 기존의 1022번 지방도 사이에 시멘트포장 임도(林道)가 나있다. 산행들머리는 임도로 들어서자마자 열린다. 들머리에 토곡산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은 등산안내도의 뒤로 열린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게 시작된다. 안내도 바로 뒤에 있는 무덤을 지나자마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용골산의 높이는 600m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들머리의 해발고도(海拔高度)20m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상까지는 상당한 높이를 치고 올라가야만 한다. 거기다 정상까지의 거리까지도 짧다보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힘이 들지만 산길의 주변이 온통 소나무들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네들이 보내오는 향긋한 솔향 덕분에 거친 숨을 몰아쉬기가 한결 수월한 것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쯤 지나면 송전탑(送電塔)을 만나게 되면서 산길은 잠시나마 사나운 기세(氣勢)를 누그러뜨린다.

 

 

 

송전탑 근처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산길은 잠시라도 못 참겠다는 듯이 또 다시 가파르게 변한다. 거기다 이번에는 거친 암릉까지 덤으로 끼어 있다. 초반부터 골산(骨山)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힘들고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에 대한 보상은 제법 알차다. 암릉의 특징대로 시야(視野)가 뻥 뚫리면서 시원스런 조망(眺望)이 펼쳐지는 것이다. 산행을 시작했던 수청마을 너머로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일단 바윗길을 선보인 능선은 그 여세(餘勢)를 몰기라도 하려는 듯이 계속해서 바윗길로 연결된다. 아니 그 험상한 기세는 더욱 거세졌다고 봐야 한다. 가끔가다 흙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잠깐일 따름이고, 대부분은 거친 바윗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바윗길로 들어선 지 40분쯤 후에 그 기세가 극에 달한다. 높이가 20m 정도 되는 수직(垂直)에 가까운 바위벼랑이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집사람이 우회로(迂廻路)로 가려는 것을 꼬드겨 벼랑으로 향한다. 안전로프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정은 금방 후회로 변해버렸다. 벼랑에 매달려 끙끙거리고 있는 집사람의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던 것이다. 아무래도 집사람의 암벽등반 수준으로는 벅찼던 모양이다. 벼랑은 너무 가파른데다가 바위 면()까지 고르지 못해서 발을 내디딜 공간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나도 허둥댔을 정도이니 하물며 집사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렵게 바위벼랑을 올라서자 문득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떠오른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멋진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왼편에는 화제리 들판 너머로 오봉산이 우뚝하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는 낙동강이 시야(視野)를 가득 채우고 있다. 강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산들은 어쩌면 금동산과 동신어산 그리고 무척산일 것이다. 바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바라보는 산줄기 치고는 너무나도 광활하다.

 

 

바위벼랑을 지나서도 바윗길이 계속된다. 그리고 잠시 후에 나타나는 날이 선 바윗길을 치고 오르면 멋진 소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는 또 다른 전망대(展望臺). 조망이 한결 더 시원해졌다. 진행방향에 용골산 정상 직전의 전위봉인 바위봉우리가 예쁜 모습으로 나타난다. 수직(垂直)의 바위기둥들이 둘러서 있는 모양이다. 그 오른편에는 산의 사면(斜面)을 이루고 있는 바위벼랑들이 멋진 모습으로 선을 보인다. 그리고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700리길을 달려온 낙동강이 마지막 용트림이라도 하려는 듯이 구불대고, 강 건너 무척산과 동신어산, 신어산 등 올망졸망한 산들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전위봉까지는 잠시 소나무가 울창한 흙길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서서히 가팔라지면서 또 다시 바윗길로 변한다. 아까 전망대에서 바라볼 때 서슬이 시퍼렇던 바위벼랑이다. 그러나 위로 올라가는 길은 생각보다는 쉽다. 아까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것과는 달리 위로 올라가는 길이 바위 사이를 헤집으며 또렷하게 잘 나있기 때문이다. 벼랑 위로 오르면 또 다시 시야(視野)가 뻥 뚫린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만났던 전망대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 아닐까 싶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눈에 들어오던 낙동강은 더 길어졌고, 주변의 산군(山群)들 또한 한 겹 더 쌓여져서 나타난다.

 

 

전위봉에서 정상은 금방이다. 거기다 경사(傾斜)까지도 느긋한 흙길이다. 그동안 지나온 바윗길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분위기를 싹 바꾸어버린 것이다. 참나무 숲속에 자리 잡은 용골산 정상은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정상표지석도 없는데다가 이곳이 정상이라 할 만한 별다른 특징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음은 물론이다. 다만 길가에 세워진 이정표(토곡산 정상 2.6Km/ 서릉리 1.7Km)가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이정표의 기둥에 누군가가 매직펜(magic pen)로 용굴산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다. 고마운 일이나 이름을 제대로 적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로 용골산은 원래 토곡산의 줄기에 속한 이름 없는 봉우리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을 부산의 유력 일간지(日刊紙)인 국제신문의 근교산행 팀이 수청마을을 출발해서 토곡산으로 올라가는 코스를 개척하고 '인근 사찰(寺刹)에서 부르는 이름을 따서 용골산이라 명명(命名)했는데, 지금은 그 이름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다. 참고로 용골산은 함박산이나 굴밧산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산행들머리에서 용골산 정상까지는 1시간10분이 걸렸다.

 

 

용골산에서 토곡산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 내리막은 금방이면 끝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작은 바위봉우리가 나타나다. 짧은 바위구간이 지나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능선길이 시작된다. 그다지 높지 않은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는 산행이 이어지는 것이다. 가끔 빈 나뭇가지 사이로 토곡산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능선길이다.

 

 

 

용골산을 출발한지 25분쯤 지나면 사용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된 듯한 헬기장이 나온다. 그런데 그 위치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헬기장들은 대부분 봉우리 위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비해, 이 헬기장은 능선의 안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헬기장을 만든 목적이 물건을 싣거나 내리는 것임을 감안할 때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이 아닐까 싶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그것도 여간 가파른 게 아니다. 거기다 길기까지 하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두텁게 쌓인 참나무 낙엽에 시달리면서 10분 정도를 힘겹게 오르면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일단 봉우리 위에 올라서면 산길은 그 기세를 일단 누그러뜨린다. 좀 수월해졌다 싶었던 산길은 10분을 채 못 버티고 또 다시 바윗길로 변해버린다. 거대한 바위벼랑이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왼편으로 우회하여 오르면 낙동강이 눈에 들어오는 전망바위 위이다. 그러나 그 모양은 아까 용골산에 비하면 그 격이 한참이나 떨어진다. 그에 비해 용골산에서 물결치듯 이어져오는 능선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전망바위를 지나면 산길은 흙길로 변한다. 그러나 그 흙길은 짧게 끝나고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윗길이 뒤를 잇는다. 바윗길은 폭이 좁은 대다 양쪽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어 마음을 졸이게 만든다. 당연히 바위를 붙잡을 수밖에 없는 구간이 많은 게 특징인 구간이다. 이 부근에 석이바위가 있다고 한다. 옛날에 이 부근에서 석이버섯이 많이 났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어떤 게 석이바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바위를 붙잡고 넘거나 아니면 좌우로 피해가면서 바윗길을 통과하고 나면 길은 다시 완만해지면서 흙길로 변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원동초등학교 갈림길’(이정표 : 토곡산 정상 0.4Km, 옥천정사 1.4Km/ 원동초등학교 2.9Km/ 서룡리 4Km)이 있는 삼거리에 서게 된다. 이곳에서 조금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봉우리는 복천암 갈림길이다. 그러나 이 봉우리는 우회로를 따른 덕분에 이정표를 만나지는 못했다. 참고로 아까 원동초등학교 갈림길에서 왼편, 그러니까 원동초등학교 방향으로 내려갈 경우에는 대부산을 거치는 능선을 타게 된다. 오늘 산행을 같이한 일행의 절반 이상이 토곡산 정상을 다녀온 후, 이곳에서 대부산 코스를 탔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토곡산에서 596m봉 방향으로 진행할 것을 권하고 싶다. 중간에 지나게 되는 너럭바위 구간이 토곡산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景觀)을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복천암갈림길에서 조금만 더 진행하면 토곡산 정상이다. 용골산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20, 산행을 시작한지는 2시간30분이 지났다. 그다지 넓지 않은 바위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은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정상표지과 이정표(함포마을 3.8Km/ 서룡리 4.3Km, 원동역 3.5Km), 그리고 삼각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참고로 이정표에 나와 있는 원동(院洞)은 낙동강으로부터 생겨난 지명이다. 낙동강은 옛날 가야와 신라의 국경(國境)이었다. 이곳에 수로(水路)를 감시하는 관원문이 있었는데 그 관원문의 원() 자를 따서 원동이란 지명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바위분지로 이루어진 정상은 그 특징대로 툭 터진 조망(眺望)을 자랑한다. 사방팔방(四方八方)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김해, 양산, 밀양의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북쪽과 동쪽으로는 영남 알프스의 남쪽 줄기들이 확연하게 조망된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천태산, 금오산이 또한 남쪽의 낙동강 건너편에는 낙남정맥이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거기다 삼랑진읍내와 양산시내까지 한눈에 들어오니 가히 환상적인 조망이라 할만하다.

 

 

함포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정상석 뒤에서 열린다. 능선 위로 난 길은 바윗길이지만 그다지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어렵지 않게 내려설 수 있다. 그러나 왼편이 서슬 시퍼런 바윗길이기 때문에 마음을 놓아서는 결코 안 된다.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가면 통나무 벤치(bench) 두 개가 놓여있는 안부삼거리(이정표 : 함포마을 3.4Km/ 토곡산 0.2Km)이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곧바로 함포마을로 내려갈 수가 있다. 길의 흔적 또한 또렷하다. 이는 국제신문에서 소개한 이 코스를 따라 하산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난 이곳에서 탈출하지 말고 계속해서 능선을 탈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만큼 내가 본 너럭바위가 인상에 남았기 때문이다.

 

 

 

함포마을 갈림길을 지나면 당분간은 평범한 산길이 이어진다. 중간에 비록 바윗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아까 지나왔던 구간들에 비해 격이 한참 떨어지고, 또한 심심찮게 열리는 조망까지도 보잘 것이 없다. 그저 뒤를 돌아볼 때 나타나는 토곡산의 전경(全景)을 제외하면 말이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작은 바윗길들을 오르내리며 걷다보면 문득 저 멀리에 우람한 바위봉이 하나가 나타난다. 바로 너럭바위인데 얼핏 설악산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그 자태가 빼어나다.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가 아닐까 싶다. 너럭바위의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며 걷다보면 본격적인 바윗길이 시작된다. 토곡산에서 50분 정도 걸리는 지점이다.

 

 

 

너럭바위 근처에서 토곡산은 마지막 몸부림을 친다. 왜 토곡산을 악산으로 분류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려는 듯이 말이다. 왜 토곡산을 악산(惡山)으로 분류할까? 악산의 악()자가 악하다는 뜻임을 감안한다면 능선의 암릉이 거친 탓에 산행을 마칠 때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런 산들을 일부러 찾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그중의 한 명이 아닐까 싶다. 까칠한 암릉을 탈 때 손끝으로 전해오는 촉감이 마냥 좋고, 아슬아슬한 바위 끝에서 즐기는 환상적인 스릴(thrill) 때문에 난 바위산을 즐겨 찾는다. 거기다 암릉의 특징대로 조망(眺望)까지 툭 터지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잠시 너럭바위에 올라본다. 한두 평쯤 되는 펑퍼짐한 바위 위에 서면 낙동강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너럭바위 근처에서는 안전에 주의가 필요하다. 바위를 에돌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안전로프가 매달려 있기는 하지만 중심을 잡기가 여의치 않다. 거기다 발아래에는 수십 길의 낭떠러지이니 간이 오그라들 수밖에 없다. 난 산행의 묘미(妙味)를 바위를 타는 것에서 찾는 편이다. 그러나 아직도 난 암릉에 올라서면 와락 겁부터 난다. 아직도 나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하고 있음이 그 원인일 것이다. 오늘도 난 가슴을 졸이며 바위에 매달린다. 그러다가 문득 두려움보다는 희열에 들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짜릿한 쾌감이 어느새 두려움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거기다 덤이 하나 더 생겼다. 잔뜩 긴장한 채 바위를 오르내리느라 힘이 든다는 것까지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너럭바위에서 내려오는 길에 경고판(警告板)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 구간은 로프를 이용한 급경사와 위험지역이 많으니 가급적 우회노선을 이용하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위험하기에 저런 경고판까지 세워 놓았을까 궁금해서 바윗길로 들어서려는데 집사람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온다. 안전한 길을 놓아두고 왜 하필이면 위험하다는 구간으로 들어가려고 하느냐는 꾸중이다. 깜짝 놀라 돌아서고 만다. 세월이 갈수록 왜소해지다보니 집사람이 톤(tone)을 조금만 높여도 꼼짝 못하고 따르게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였던 것이다.

 

 

 

너럭바위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함포마을 지장암 2.1Km/ 함포마을 회관 2.1Km/ 토곡산 1.5Km)이 나타난다. 이곳에선 어느 방향으로 가던지 산행날머리인 함포마을로 연결된다. 그리고 거리 또한 같다. 다만 왼편으로 갈 경우 계곡을 따르게 되고, 오른편은 능선을 따라 596m까지 갔다가 다시 지능선을 이용해 내려가는 것이 다를 뿐이다. 때문에 마음 내키는 대로 방향을 잡으면 될 일이다. 이곳에서 우리부부는 능선을 따르는 코스를 택했다. 집사람의 불만을 무시하면서까지 이 코스를 고집한 것은 이 코스가 더 안전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나타나는 낙동강과 토곡산을 눈에 담으며 능선을 오르다보면 15분 후에는 596m봉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정표 : 함포마을 1.6Km/ 토곡산 2.0Km)에서 산길은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지능선을 따른다.

 

 

 

하산길은 완만하게 시작된다. 그러나 10분 후에는 상황이 크게 바뀌어 버린다. 산길이 지능선을 벗어나(이정표 : 함포마을 1.2Km/ 토곡산 2.4Km)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갑자기 가파르게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갈지()자를 만들면서야 겨우 고도(高度)를 떨어뜨리고 있는 내리막길을 따라 20분 가까이 내려서면 계곡(이정표 : 함포마을 1.0Km/ 토곡산 2.6Km)에 이르게 된다. 이정표로 보아 겨우 200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거의 20분이나 걸렸다 함은 그만큼 조심스럽게 내려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계곡에 이르면 왼편으로 난 길이 하나 보인다.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이곳에서는 무조건 오른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짙은 잿빛의 암벽을 오른편에 끼고 잠시 내려서면 거대한 바위벼랑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벼랑에는 가는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다. 여름철에 비라도 올라치면 제법 멋진 폭포(瀑布)로 변신하지 않을까 싶다. 폭포로 들어가는 입구에 금()줄이 쳐져있고 부적(符籍) 비슷한 깃발들이 너절하게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뭔가 영험(靈驗)한 기운이 있는 기도터인 모양이다.

 

 

 

폭포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지장암이다. 민간의 여염집, 그것도 허름한 민초(民草)들의 집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지장암의 마당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불교(佛敎)에 관한 글을 읽다보면 호국신앙(護國信仰)’이라는 문장을 심심찮게 접하게 되는데, 지장암도 혹시 호국신앙을 내세우는 절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본 지장암은 무속신앙(巫俗信仰)을 주업으로 하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을 정도로 사찰(寺刹)의 색채가 옅었다.

 

 

산행날머리는 함포마을(원동읍 원리)

지장암을 벗어나면 곧이어 69번 지방도(이정표 : 지장암 0.3Km, 물맞이폭포 0.5Km, 토곡산 3.6Km)에 내려서게 된다. 산행 날머리인 함포마을은 이곳에서도 원동면소재지 방향으로 500m 정도를 더 걸어야만 한다. 도로에 보행자를 위한 공간이 따로 나있지 않으니 오가는 차량들을 주의하면서 걸어야 할 것이다. 왼편에 보이는 토곡산의 위용을 구경하면서 10분 정도를 걷다보면 함포마을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잠깐 쉬기도 했지만 그 시간은 10분이 채 안되었으므로 온전히 4시간이 걸린 셈이다.

 

 

에필로그(epilogue). 지장암에서 내려와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내내 고민했던 것이 하나 있다. 과연 물맞이 폭포가 어디에 있는가 하느냐다. 많은 등산객들이 물맞이폭포라고 올린 사진들을 본 일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폭포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왜소하면서도 거기다 초라하기까지 했다. 다른 한편으론 아까 내가 보았던 금줄이 쳐져있던 폭포를 물맞이 폭포라고 한 이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난 어디를 물맞이폭포로 봐야할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후자(後者)에다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줄까지 쳐져있던 그 폭포에 이름이 없다는 것이 더 이상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포라는 이름까지 붙이려면 최소한 그 정도의 위용은 지녀야할 것 아니겠는가.

이구산(尼丘山, 378m)-홍무산(興霧山, 454.7m)

 

산행일 : ‘14. 12. 21()

소재지 : 경남 사천시 정동면과 사남면의 경계

산행코스 : 예수리마을선황사선황당산이구산369임도홍무산:소산마을(산행시간 : 3시간4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사천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산이 와룡산(臥龍山)이다. 그만큼 유명한 산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천이라는 지역 이름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으니, 사천은 와룡산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와룡산의 유명세(有名稅)에 가려 피해를 입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구산과 흥무산도 그중의 하나이다. 오지(奧地)를 찾아다니는 산꾼들 조차도 낯설어할 정도로 철저하게 외면 받아왔기 때문이다. 사천시내 사람들이나 운동 삼아 다니던 산이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근래에는 이곳을 찾는 외지(外地) 산악회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이는 사천시청에서 등산로를 깔끔하게 정비한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그보다는 의외로 산세(山勢)가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내세울 만큼 커다란 바위들은 없지만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고, 흙으로 이루어진 길은 곱고 편하다. 거기다 능선을 울울창창한 소나무들이 가득 채우고 있으니 힐링(healing) 산행지로 안성맞춤이다. 특히 산행 중에 우리네 조상을 모신 단군성전(檀君聖殿)까지 들러볼 수 있으니 역사공부 삼아 가족들이 함께 찾아볼만한 산으로 추천하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예수리마을(사천시 정동면 예수리 702-3)

남해고속도로 사천 I.C에서 내려와 ‘3번 국도를 타고 사천, 남해방면으로 달리다가 지주교차로(交叉路 : 사천시 사천읍 사주리)에서 빠져 나온다. 국도의 아래를 통과하면 곧바로 나오는 사천시 농업인전용회관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다 사천교()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 우회전하여 2~3분 정도 들어가면(사천강2) 오른편에 선황사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선황사까지 도로가 나 있지만 대형버스는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빈 들녘 가운데로 난 오른편 소로(小路)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소로라고 하지만승용차가 다니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고 거기다 들머리에 산행 중에 들르게 될 선황사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커다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들머리에서 선황사입구까지는 10분 이상이나 걸린다.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포장된 길을 걷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길 주변에 볼거리까지 없다면 더욱 싫어할 것은 뻔한 일일 것이다. 선황사로 들어가는 길이 바로 이런 길이다. 거기다 가끔 오가는 승용차까지 피하면서 걷다보면 짜증이 날 정도이다. 이런 길에서는 억지로라도 콧노래를 흥얼거려보는 것이 좋다. 아직 산행을 시작도 안했는데 기분을 다운(down)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옛말에 시작이 절반이다.’라는 말이 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다면 틀림없이 즐겁게 산행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침곡저수지는 물속에 나무들이 잠겨 있는 것이 주왕산 근처에 있는 주산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비록 왜소하기는 하지만 여름철에 찾으면 제법 볼만한 풍경을 만날 수도 있겠다.

 

 

침곡저수지를 지나면 도로는 두 갈래로 나뉜다. 선황사로 가는 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며 임도(林道)로 연결된다. 들머리에 이구산 입구임을 알리는 이정표(이구산 2.3, 성황당산 0.9) 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이구산입구 삼거리에서 선황사까지는 15분 남짓, 시멘트포장 임도로 연결된다. 제법 가파른 임도는 아까보다는 볼거리가 많은 편이다. 가는 길에 가끔 보이는 잘 지어진 민가(民家)들은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고, 길가에 세워진 효행비(孝行碑)선황사도로포장공덕비에 적힌 비문(碑文)을 읽는 재미 또한 나름대로 쏠쏠하다.

 

 

선황사 앞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정표(이구산 1.5Km, 성황당산 0.5Km)를 보면 성황당산은 왼편으로 진행하도록 되어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사찰을 통과해서 올라가는 길이 잘 닦여있기 때문이다. 선황사에 들어서면 반듯하게 지어진 3칸짜리 대웅전 제법 우람하다. 한국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寺刹)이란 것 말고는 아무 기록도 찾아볼 수 없는(조계종 홈페이지의 소속사찰 검색에도 나오지 않는다) 사찰치고는 의외의 규모인 것이다. 그 외에도 종각과 요사(寮舍) 등의 부속 건물들을 거느리고 있다.

 

 

 

성황당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선황사의 종각의 오른편에서 열린다. 잘 닦아 놓은 돌계단을 오르면 체육시설이 보이는 오른편이 성황당산이다. 사천시(泗川市)와 사천만(泗川灣)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날씨가 맑은 날에는 지리산의 천왕봉과 웅석봉까지 눈에 들어오는 등 조망(眺望)이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난 조망보다는 왼편에 보이는 단군성전에 마음이 끌려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결과적으로는 성황당산을 들르지 않고 곧장 이구산으로 가버리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돌담에 둘러싸인 단군성전(檀君聖殿)이 나온다. 정사각형으로 쌓아올린 돌담 안에 있는 성전은 전각(殿閣)이 없이, 가장 안쪽 한가운데에 단을 만들고 그 위에 단군상(檀君像)을 모셨다. 그 앞에 제사(祭祀)를 모실 수 있도록 단()이 만들어져 있음은 물론이다.

 

 

 

단군성전 옆에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또 하나의 정사각형 공간이 있다. 그러나 이번 것은 성전과는 달리 장식이 없는 직사각형의 제단(祭壇) 외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다. 제단의 뒤편 담에 19회 산성제 봉행이라고 쓰인 현수막(懸垂幕)이 걸려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혹시 성황당이 있었던 터가 아닐까 싶다.

 

 

성황당터 옆에 서면 사천 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성황당터를 지나면 넓고 움푹하게 꺼진 곳이 나타난다. 아마 옛날 성안에 있었다는 연못 터인 모양이다. 한가운데에 있는 우물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또한 그 우물의 뒤에 세워져 있는 촛불까지 켜진 제단(祭壇)은 이를 보완(補完)하는 것일 테고 말이다. 신성함도 없는 곳에 제단을 세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물 안의 물은 너무 흐린 탓에 마실 수는 없었다.

 

 

우물 터를 벗어나면 곧이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이구산 1.2Km, 흥무산 6.6Km/ 선황사 0.3Km/ 성황당산 0.4Km)로 나뉜다. 왼편은 아까 선황사 앞에서 헤어졌던 곳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이구산을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성황당산을 올라올 때부터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던 성황당산성(泗川城隍堂山城 : 경남기념물 제132)을 끝내 찾지 못했다는 서운함 때문일 것이다. 고문헌(古文獻)에도 나와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유적지였기에 그 서운함은 더할 수밖에 없다. 고읍성이라고도 부르던 성황당산선은 축조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둘레 1,109m, 높이 3.5m의 토성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특히 남쪽에는 길이 4m, 높이 3m 정도의 석축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단다. 그러나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이는 내가 미리 파악해 온 지식(知識)의 한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만 성안(城內)에 있었다는 성황당(城隍堂) 터와 연못의 흔적을 찾아 본 것에 그나마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성황당산성은 사천읍 남쪽에 위치한 성황산(城隍山) 정상부에 토성과 석성으로 연결된 테뫼식(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것으로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하다고 발권식(鉢圈式)산성’, 시루에 흰 번을 두른 것 같다고 해서 시루성’,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 같다고 해서 머리띠식 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산성(山城)이다. 성벽은 9부 능선을 따라 내탁(內托 : 外壁은 큰 돌과 벽돌로 內壁은 자갈과 흙을 이용해 두텁게 쌓아 올리는 구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성안에는 연못과 건물지 등이 남아 있고 주변에는 와편(瓦片 : 기와조각)이나 도자편(陶瓷片)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사천읍성(邑城)이 현재의 위치로 옮기기 전인 조선 전기에 이곳이 사천치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에 대한 기록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사천읍지의 성곽조(城郭條)’ 사천읍성편(둘레는 1,530m, 높이는 4.6m)고적조(古蹟條)’ 성황당 산성편(둘레는 592m)이 남아 있다.

 

 

성황당산을 둘러보고 나서 이구산으로 향한다. 성황당산을 내려서는 길은 한마디로 곱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경사(傾斜)까지 완만(緩慢)하기 때문이다. 이번 산행후기의 부제(副題)삼대(三代)가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산이란 문구를 미리 만들어 두었을 정도라고 하면 미루어 짐작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성황당산은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래서인지 사천시에서는 성황당산을 체육시설을 갖춘 공원(公園) 겸 쉼터로 조성해 놓았다. 성황당산을 내려선지 5분 남짓 지나면 안부삼거리(이정표 : 이구산 0.9Km/ 수청마을 0.7Km)/ 선황사·성황당산 0.6Km)에 이르게 된다.

 

 

 

산행을 이어가다보면 초록색 포장비닐에 둘러싸인 무더기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소나무 재선충(Pine wilt disease)’에 감염되어 고사(枯死)한 소나무들을 약제처리 해놓은 소나무 무덤들이다. 갑자기 눈물이 난다. 토종 소나무들이 죽어가는 것이 애달파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난 감성적이지 못하다. 그럼 이유가 뭘까? 누군가 소나무 무덤을 헤집어 놓았고, 그 무덤에서 흘러나온 엄청나게 독한 약물냄새가 코를 자극하면서 눈물샘까지 건들었기 때문이다.

 

 

삼거리를 지나서도 산길은 잠깐 동안은 여전히 곱다. 그러나 조금 후에 소나무 재선충 무덤을 만나게 되는데 산길이 곱다는 말을 딱 여기까지이다. 이후부터 산길은 무척 가팔라지고, 거기다 길바닥 또한 어설픈 바윗길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가에 안전로프까지 매달려 있는 등 오르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심할 정도의 노약자(老弱者)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쉽게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미리 정해둔 후기의 부제(副題)는 삼대에서 이대(二代)로 고쳐야할까 보다.

 

 

 

안부삼거리를 출발하지 30분 가까이 지나면 드디어 이구산 정상이다. 이구산 정상도 역시 정자와 체육시설을 갖춘 공원 겸 쉼처로 조성해 놓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상표지석은 없다. 다만 기둥에다 이구산이라는 이곳의 지명을 적어 놓은 이정표(흥무산 5.7Km/ 선황사 1.5Km)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구산 정상에서의 시야(視野)는 절반만 터진다. 그러나 그 조망(眺望)은 자못 광활하다. 동쪽에 있다는 동쪽과 서쪽으로 조망된다는 지리산과 와룡산은 나무들에 가린 탓에 썩 좋지 않은 편이다.

 

 

 

 

정상에 올라온 사람들이 평상(平床)에다 짊어지고 온 짐들을 푼다. 모처럼 시간이 여유롭다보니 첫 번째 봉우리부터 쉬어가려는 모양이다. 견과류(堅果類)와 과일 안주에 술은 막걸리가 주종이다. 당연한 일이다. 내로라하는 산꾼들에게는 산에서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것은 금물(禁物)이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을 같이하고 있는 일행들 역시 웬만한 산들은 이미 답사를 끝냈고, 이제는 남들이 찾지 않는 오지(奧地)의 산들이나 찾고 있는 사람들이니 어찌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Mr. 홍주김사장께서 건네주는 독주(毒酒) 한 잔을 들이키는데 옆에서 보고 있던 김진수선배께서 넌지시 물어온다. ‘무슨 술인지 아나?’, 술병의 외형(外形)부터가 특이하게 생겨서 누가 봐도 진도(珍島)의 특산품인 홍주(紅酒)인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웬 뚱딴지같은 질문이란 말인가. 그러나 어디를 봐도 김선배는 허투루 농담을 던질 분이 아니다. 하긴 그럴 사람이라면 내가 가까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평소에 사람 사귀기를 즐겨하지 않던 내가 먼저 다가갔을 정도로 그는 매사에 타의 모범을 보이는 분이었던 것이다. 냉큼 답변을 못하고 머리만 갸웃거리는데, 곧바로 이어지는 김선배의 말씀에 커다란 몸짓까지 석어가며 호응을 하고 만다. ‘! 잘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산행(山行) 뒷이야기를 잘 써달라는 의미의 술이었다는 것이다.

 

 

이구산에서 흥무산으로 가는 길은 또 다시 고와진다. 오르내림이 크지 않은 능선에다 바닥 또한 부드러운 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0분쯤 지나면 국관사 갈림길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7~8분쯤 더 걸으면 주변 풍광(風光)이 갑자기 확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제까지는 순수한 흙길이었는데 갑자기 커다란 바위들이 즐비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산길은 바위들을 좌우로 비켜서 나있는데 마지막에는 아예 바위를 타고 넘기도 한다. 나타나는 바위들 중에는 제법 눈요깃거리 역할을 해주는 것도 있으니 오늘 산행에서 가장 뛰어난 구간이 아닐까 싶다.

 

 

 

 

 

바위들을 구경하며 오르다 가장 꼭대기(369m)쯤에 이르면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주능선에서 오른편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숨어 있는 바위 하나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 산행의 백미(白眉)라고 알려진 상사바위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이름만 들어도 오싹한 느낌이 전해지는 상사바위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바위들은 전국에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이 근처에 있는 사천의 명산 와룡산에도 상사바위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바위들은 하나 같이 수많은 목숨들을 빼앗은 것으로 서로를 연결시킨다. 이곳 상사바위도 역시 이런저런 이유로 바위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뛰어내린 사람들의 유서(遺書)일까? 바위에는 무슨 내용인지 알아먹기도 힐들 정도로 수많은 글자들이 빼꼭히 적혀있다.

 

 

 

바위 위에 올라서면 시야(視野)가 뻥 뚫린다. ‘이구산에서 가장 조망(眺望)이 좋은 곳이라는 소문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멀리 민재봉과 향로봉 등 와룡산의 봉우리들이 차례로 조망되고, 가까이로는 바둑판같은 논들과 어울린 구룡저수지가 정점(頂點)을 찍는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어김없이 사천시가지와 사천만이 버티고 있다. 조망을 즐기다가 시선을 바위 아래로 옮겨본다. 10m 정도 되는 바위벼랑이 아찔할 정도로 높아 보인다. 그러나 이곳에서 뛰어내린다고 해서 과연 목숨을 끊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결론은 아니올시다.’였다. 내 생각에는 죽지는 않고 그저 다치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상사바위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조금 모라란다는 얘기이다. 다시 말해서 자칫 잘못하다간 죽지도 못하고 고생만 죽도록 할 염려가 있으니 절대 이곳에서 자살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상사바위에서 흥무산으로 가는 길은 제법 길게 이어진다. 그러나 산길이 곱기 때문에 그 거리가 조금도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흙길을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까지 흘러나올 지경인데 어떻게 지루할 틈이 있겠는가.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며 여유롭게 걷다보면 용도를 알 수 없는 돌담도 만나게 되고, 15분 후에는 이정표(이정표 : 흥무산 3.7Km/ 성황당산 3.6Km)와 등산안내도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송전탑(送電塔)이 나온다. 이어서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30분 정도를 더 걸으면 널찍한 임도(이정표 : 흥무산 1.7Km/ 학촌마을 1.1Km/ 능화마을 1.4Km/ 이구산 4.0Km)에 내려서게 된다.

 

 

 

 

 

 

 

임도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는 안종(安宗)의 능지(陵址)에 들러보고 싶지만 아쉬움만 뒤로 남긴 채 흥무산을 행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곳까지 오는데 너무 늦장을 부린 탓에, 더 이상은 허비할 시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안종은 고려(高麗) 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인 욱(: ? ~996))이다. 그는 조카며느리인 헌정왕후(獻貞王后)와 사통(私通)하여 아들 순()을 낳았으나.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 인해 사수현(泗水縣), 즉 오늘날의 사천으로 유배(流配)를 왔다가 이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死後) 순이 현종(顯宗)으로 등극하자 안종(安宗)으로 추존되어 송도로 이장(건릉)하였고, 이곳에는 능지만 남아있게 된 것이다.

 

 

임도에서 산길은 다시 한 번 오름 짓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몸부림은 제법 심하다. 비록 아까 이구산에 오를 때만은 못해도 말이다. 그러나 그 오르막길은 오래지 않아 끝을 맺고 산길은 다시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밋밋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최대한 느긋하게 걸어본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데로 크게 숨을 들이켜 본다. 코끝을 맴돌던 짙은 소나무 향이 가슴속 깊이 스며든다. 그리고 그 청량한 기운은 혈관과 세포(細胞)들을 따라 온 몸으로 번져간다. 오늘도 역시 난 또 하나의 힐링(healing)산행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호흡과 발걸음을 일치시키며 걷다보면 용소마을 갈림길’(이정표 : 흥무산 0.4Km/ 용소마을 1.2Km, 학생수련원 1.5Km/ 이구산 5.3Km)금곡 갈림길’(이정표 : 흥무산 0.3Km/ 금곡 1.6Km, 금굴 0.5Km/ 이구산 5.4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잠깐 동안 치고 오르면 흥무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임도에서 45분 이구산에서는 1시간50분 정도가 걸렸다.

 

 

 

 

 

 

흥무산 정상은 헬기장으로 이용해도 충분할 만큼 너른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은 탓인지 정상은 온통 어른의 키만큼이나 웃자란 억새들로 가득 차있다. 이곳 흥무산도 역시 아까 지나왔던 이구산과 마찬가지로 이름표를 단 이정표(새마을도로 1.8Km/ 이구산 5.7Km)가 정상표지석을 대신하고 있다. 나무들로 둘러싸인 정상은 조그만 조망(眺望)까지도 허락하지 않는다. 참고로 흥무산은 흥보산(興寶山)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이곳 산자락에 있다는 흥보사지(興寶寺址)와 관련된 이름이 아닐까 싶다. ‘뱃속이 따뜻하지요?’ 잠시 멈춰서서 숨을 고르는데, 김사장이 홍주(紅酒) 한 잔을 건네며 넌지시 물어온다. 그의 별명은 ‘Mr. 홍주’,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 별명을 모른다. 본래 이 별명은 우리 집사람이 지었었고, 그 후 우리 부부만이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까 말이다. 산에 올 때마다 홍주를 챙겨 온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역시 몇 병을 챙겨왔나 보다. 그의 말마따나 겨울 산에서는 독주(毒酒) 한잔이 큰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몸에 열을 올려서 추위를 몰아내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코올(alcohol)40()가 넘는 홍주는 겨울 산행에 제격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많은 양을 마시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제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마침 길도 곱다. 흙길에 경사(傾斜)까지 그다지 가파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앞에 두고 따라야할 모델(model)만 잘 선정하면 오늘 산행은 유종(有終)의 미()’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내 앞에는 'Mr. 홍주김사장, 그리고 그 앞 저만큼에 날씬한 여성분이 보인다. 김사장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앞질러버린다. 좋은 작품을 위한 일이니 이해해 줄 것으로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듯이 어찌 계속해서 좋은 일만 있겠는가. 그녀는 냅다 뛰기 시작했고, 그녀의 뒷모습에 포커스(focus)를 맞춘 나 또한 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엄청난 충격이 동반된 엉덩방아로 마무리를 짓고 말았다. 산행 후에 그녀로부터 원인 제공에 대한 대가로 술 한 잔을 건네받았지만 말이다.

 

 

산행날머리는 새마을도로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도 역시 곱기는 매한가지이다. 흙길에 경사까지 부드럽다보니 걷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니다. 솔가리(소나무 落葉)와 섞인 떡갈나무 잎들 때문에 조금 미끄러운 게 흠()이라면 흠이나 조금만 조심하면 이 또한 문제 될 게 없을 것이다. 나 같이 앞사람을 쫒는데 정신을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흥무산을 출발해서 30분쯤 지나면 새마을도로에 내려서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끝을 맺는다. 앞사람을 쫒느라 조금 바쁘게 내려왔다고 보면 될 것이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40분이 지났다. 막걸리를 마시느라 중간에서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30분이 걸린 셈이다.

 

 

에필로그(epilogue), 사천의 옛날 지명인 사수현(泗水縣)의 사수(泗水 : 사천강)와 오늘 롤랐던 이구산(尼丘山)은 중국 노()나라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중국(中國)의 산동성에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라는 두 갈래의 강()이 흐르는데,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수수나 사수가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설교하였다고 하여 이를 수사지학(洙泗之學) 곧 공맹학(孔孟學)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노나라에 있는 이구산에서 기도를 드린 끝에 공자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공자의 이름이 구()이고 자가 중니(仲尼)라는 것이다. 이곳 사천을 우리나라 유학자(儒學者)들이 존앙(尊仰)의 대상으로 삼아온 중국의 산동성, 즉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곡부현 및 추현과 동일시함으로써 추로지향(鄒魯之鄕 :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을 이르는 말)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선조들이 집념이 만들어 낸 지명(地名)일 것이다.

웅산(熊山, 710m)-시루봉(666m)-천자봉(天子峰, 502m)

 

산행일 : ‘14. 12. 7()

소재지 : 경남 창원시 진해구와 성산구의 경계

산행코스 : 안민고개헬기장웅산출렁다리시루봉수리봉천자봉대발령 만남의광장(산행시간 : 3시간5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진해는 따뜻한 해양도시이다. 진산(鎭山)인 장복산을 위시해서 덕주봉과 웅산 그리고 시루봉과 수리봉, 천자봉 등이 시가지를 병풍(屛風)처럼 빙 둘러싸면서 북서풍(北西風)을 막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진해만()이 들어앉아 있다. 대부분 바위로 이루어진 이 산들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각자 나름대로의 독특한 자태를 자랑한다. 거기다 바위산의 특징대로 산행을 하다가 어디에 멈춰서더라도 시야(視野)가 뻥 뚫린다. 진해와 창원 시가지는 물론, 가덕도와 거제도, 연도, 지심도 등을 품은 다도해(多島海)의 남녘바다가 거침없이 눈 안으로 달려온다. 대죽도와 저도를 징검다리 삼아 두 섬을 잇는 거가대교(大橋)는 차라리 보너스이다. 암봉을 오르며 느끼는 짜릿한 전율, 보드라운 흙으로 이루어진 능선의 포근함, 거기다 눈터지는 조망(眺望)까지 더하니 빼어난 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당연히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할 산이라는 얘기이다.

 

산행들머리는 안민고개(창원시 진해구 석동)

남해 제1고속도로 서마산 I.C에서 내려와 마산시내를 통과한 후, 2번 국도를 이용해 진해방면으로 달리다보면 장복터널이 나온다. 터널을 지나 진해대로를 타고 5분쯤 들어가다 경화고가교를 올라가기 전에 태백동 스포츠파크로 빠져나가면 된다. 들머리에 안민고개라고 쓰인 이정표가 보이니 놓치지 말아야 한다. 스포츠파크에서 일단 안민고개길로 들어서면 길은 외길이다. 구불구불 구곡양장(九曲羊腸)의 길을 따라 한참을 용트림하다 보면 성산구와 진해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인 안민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안민고개 고갯마루의 정 중앙에는 안민생태교(生態橋)’가 놓여있다. 도로가 놓이면서 끊겼던 동물들의 이동 통로를 다시 복원해 놓은 다리이다. 이 다리를 기점(基點)으로 오른편은 장복산, 그리고 왼편으로 진행할 경우에는 웅산으로 가게 된다. 물론 주차장이 있는 성산구 방향에서 바라보았을 경우이다. 산행은 다리 왼편의 능선으로 올라서면서 시작된다. 능선 위로 난 길은 신발을 벗고 다녀도 좋을 정도로 곱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보드라운 흙길은 발끝을 따라 전해오는 촉감까지도 그윽하다. 아무래도 오늘 산행은 부담 없이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웅산으로 향하는 길은 상호배려(相互配慮)의 길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해야만 한다는 얘기이다. 이 구간은 등산객들이 다니는 산길(능선)MTB(mountain bike)가 다니는 임도(林道)가 합쳐졌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길 하나를 갖고 등산객들과 MTB마니아(mania)들이 함께 써야만 하기 때문에 이런 길에서는 서로 간에 양보와 배려가 없을 경우에는 사고가 나기 십상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길가에 세워진 이정표에 공유, 상호배려라는 낱말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능선을 따라 난 산길의 주변은 온통 벚꽃나무들의 천지이다. 창원시에서 조림(造林)을 한 모양인데, 나무가 자라다보니 이제는 아예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봄이라도 되면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터널을 만들어내면서 벚꽃의 도시진해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지 않을까 싶다.

 

 

산행을 시작한지 5분이 조금 못되면 경찰의 통신시설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길가에 만들어 놓은 벤치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부터 시작되는 눈터지는 조망(眺望)을 실컷 즐겨보라는 모양이다. 오른쪽으로는 진해시가가 바다와 함께 어우러지며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내고,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창원의 공업단지가 이색적인 모습으로 달려온다.

 

 

 

 

 

조망을 즐기면서 15분쯤 더 걸으면 헬기장이다. 아마 이곳은 캠핑마니아(camping mania)들의 놀이터인가 보다. 날씨가 제법 추운데도 여러 동의 텐트들이 쳐져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헬기장을 지나서도 눈터지는 조망은 계속된다. 왼편의 창원공단은 그 모습 그대로이지만 오른편 진해만은 아까보다 더 멀리, 그리고 더 그윽하게 다가온다. 송전탑(送電塔)을 지나 능선에 솟아오른 작은 바위봉우리 위에 올라서면 이번에는 진행방향의 왼편에 '부처의 어머니 산'이라 불리는 불모산(佛母山)이 나타난다. 시야(視野)가 한층 더 넓어진 것이다.

 

 

 

 

눈터지는 조망(眺望)을 즐기면서 능선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바위 두 개를 왼편으로 돌아 통과하면 곧이어 석동마을 갈림길(이정표 : 시루봉 2.6Km/ 석동/ 안민고개 3.4Km)이다. 헬기장에서 30분이 걸렸다. 이곳 이정표는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다. 오늘 걷고 있는 능선의 주봉(主峰)이 웅산인데도 이정표에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아니 이곳뿐만이 아니다. 이후부터 만나게 되는 이정표들 중 어느 것 하나 웅산이라는 지명(地名)을 나타내고 있는 이정표는 눈에 띄지 않았다. 거기다 더해 웅산 정상에 정상표지석까지 없다보니 자칫 웅산이라는 지명이 허상(虛像)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갈림길에서 18분 정도를 더 걸으면 능선이 갑자기 가팔라지면서 바윗길로 변한다. 산길은 그 가파름이 못내 부담스러웠던지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덕분에 위로 올라가기는 편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론 서운한 마음도 있다. 이정도의 슬랩(slab)이라면 릿지(ridge)로도 충분히 오를 수가 있을 것이고, 이런 코스에서는 오를 때 느껴오는 짜릿한 긴장감을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겠기에 하는 말이다.

 

 

 

길고 긴 나무계단을 오르면 또 다시 밋밋한 능선이 이어진다. 그리고 10분 조금 못되는 지점에서 갈림길(이정표 : 시루봉 1.5Km/ 불모산 1.6Km/ 안민고개 4Km)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가면 통신시설이 정상을 점령하고 있는 불모산(佛母山)이다. 집사람이 함께 하지 않은 오늘은 모처럼 선두그룹이다. 함께 걷고 있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불모산을 다녀오겠다며 왼편으로 진행하지만 난 망설임 없이 오른편 시루봉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연속해서 이틀 동안 산행을 하고 있는지라 체력에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모산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참나무 숲을 지나면 바로 웅산 정상이다. 그러나 이곳이 웅산 정상인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밋밋한 봉우리에 정상표지석까지 없다보니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예외일 수 없이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니 나 뿐만이 아니다. 오늘 산행을 같이 한 일행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냥 지나쳐 버렸단다.

 

 

웅산은 바위산이다. 특히 시루봉 방향은 제법 날이 선 바윗길이다. 그 경사(傾斜)가 못내 부담스러웠던지 철제(鐵製) 난간을 만들어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도록 해 놓았다. 내려가는 순서를 기다리다가 고개라도 들어보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시원스럽다. 진행방향 건너편에는 두 개의 바위봉우리(巖峰)를 잇고 있는 출렁다리가 선명하고, 그 뒤에는 706m봉과 시루봉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리고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가덕도와 거제도, 그리고 두 섬을 잇는 거가대교(大橋)가 또렷하게 나타난다. 물론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대죽도와 저도는 덤이다.

 

 

정상에서 내려서면 10분이 채 못 되어 출렁다리에 이르게 된다. 출렁다리는 한마디로 앙증맞다. 당연히 높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다. 꼭 다리가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등산객들의 눈요기를 위해서 만들었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그러나 조망만은 뛰어나다. 하긴 오늘 걷는 능선 어디서도 이 정도의 조망은 흔하게 볼 수 있었지만 말이다.

 

 

출렁다리를 지나 건너편 암봉에 오르면 또 다시 시원스런 조망이 터진다. 진행방향에는 날카롭게 허리를 곧추세운 706m봉이 우뚝하고,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아까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쳤던 웅산이 근육질의 암릉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는 통신탑(通信塔)을 머리에 이고 있는 불모산이 나도 있다며 고개를 내밀고 있다.

 

 

 

출렁다리에서 10분 조금 넘게 진행하면 706m봉이다. 산길은 706m봉 앞에서 오른편으로 우회(迂廻)를 한다. 봉우리 위로 올라가는 길이 희미하게나마 나타나고 그곳에 매달려 있는 밧줄이 보이는데도 말이다. 아마 위험하다고 해서 막아 놓은 모양이다.

 

 

오른편으로 우회한 길이 706m봉의 뒤편에 이르면 706m봉 방향으로 난 길이 희미하게나마 나타난다. 무작정 그 길로 들어서고 본다. 지형도에 나오는 그것도 웅산에 비길 정도로 높은 봉우리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봉우리 위로 올라가는 길은 조금 위험하기는 해도 올라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비록 바위벼랑에 매달린 안전로프가 낡아서 언제 끊어질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저 저나 근육질의 암봉인 이 봉우리를 웅산의 추봉(主峰)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눈여겨 볼 일이다. 현재의 주봉인 710m봉이 규모가 작아서 주봉이라고 부르기에 초라하다면서 말이다. 이곳 706m봉도 역시 웅산 정상과 마찬가지로 정상표지석은 물론 이정표나 삼각점 등 그 어떤 시설물도 눈에 띄지 않는다.

 

 

봉우리 위로 오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제법 너른 봉우리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꽃 무덤이다. 자그만 돌들을 둥그렇게 쌓은 뒤에 그 안에다 조화(造花) 한 묶음을 올려놓았다. 아마 누군가가 이곳에서 사고(事故)로 죽은 모양이고, 그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아까 봉우리 위로 오르는 길을 막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고...

 

 

706m봉에서의 조망(眺望)은 막힘이 없다. 북으로는 이 산의 주봉(主峰)인 웅산이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자랑하고 있고, 그 오른편에는 불모산이 나도 있다며 손을 흔들고 있다. 고개를 조금 더 돌려보자. 이번에는 화산과 굴암산이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번에는 서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산행을 시작했던 안민고개 너머로 장복산의 긴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남쪽에는 여자들의 젖꼭지를 닮았다는 시루봉이 기괴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물론 진해시가지와 자그만 섬들이 둥둥 떠다니는 남해바다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706m봉에서 내려와 시루봉을 향해 산행을 이어간다. 시루봉을 내려서자마자 산길은 갑자기 고와진다. 바위투성이였던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돌맹이 하나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순수한 흙산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거기다 경사(傾斜)까지 거의 없다보니 그야말로 룰루랄라 산행이다. 그리고 25분 정도가 지나면 웅산의 명물인 시루봉에 이르게 된다.

 

 

국토지리정보원 발행 25000분의 1 지형도에 '시리바위'로 표기되어 있는 시루봉은 높이 10m에 둘레가 50m인 거대한 바위가 흡사 떡시루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시루봉은 밋밋하게 생긴 흙봉우리 위에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의 형상만으로도 보는 이들에게 신비스런 느낌을 준다. 이 같은 생김새 때문에 시루봉은 '진해의 진산'인 웅산의 한 자락에 불과한 봉우리이면서도 웅산 정상보다도 오히려 더 신성(神聖)시 돼왔다고 한다. 신라 때에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제사를 이곳에서 올렸었고, 조선 시대에도 고을에서 춘추대제(春秋大祭)를 지낼 때 '웅산 신당'을 두어 산신제(山神祭)를 지냈었다. 또 조선 후기 명성황후가 세자 순종을 출산한 후 세자의 무병장수(無病長壽)를 비는 백일기도를 올린 곳이기도 하단다. 참고로 거대한 암봉인 시루봉은 곰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곰메(바위) 또는 웅암(熊巖)으로 불리며, 한편 멀리서 볼 경우 그 생김새가 영락없는 여인네의 젖꼭지를 닮았다 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루봉은 시리바위를 가운데에 두고 나무데크로 빙 둘러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이 통로는 전망대(展望臺)의 역할도 겸한다. 데크의 어느 곳에 서더라도 막힘없는 조망이 터지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가슴에 담았던 풍경들이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다.

 

 

 

 

시루봉에서 천자봉으로 향하는 길은 나무데크로 만들어 놓았다. 내려가는 길을 왜 계단으로 표현하지 않았냐하면 지그재그 형으로 만들어진 데크가 모서리 부분에서만 계단을 만들어내고 다른 부분은 대부분 평평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루봉에서 내려섰다가 맞은 편 봉우리로 오르면 운동기구를 갖춘 쉼터. 뒤돌아보면 시루봉의 시리바위가 더욱 이국적(異國的)으로 다가온다, 쉼터에서 또 다시 나타나는 나무데크 길을 따라 길게 내려서면 이번에는 정자(亭子) 쉼터가 있는 바람재 갈림길(이정표 : 만장대 2.5Km/ 자은초등학교 2.1Km/ 시루봉 0.5Km)이다. 이곳 쉼터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자은동이나 풍호동에 이르게 된다. 시루봉에서 이곳까지 15분이 걸렸으니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린 셈이다. 이는 계단을 내려설 때 자동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구경하느라 걷는 속도를 떨어뜨린 탓이 아닐까 싶다. 진행방향에 수리봉과 천자봉, 그리고 능선의 좌우로 드러나는 진해만의 풍광을 바라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바람재에서 수리봉으로 가는 길도 역시 흙길이다. 당연히 이 구간에서는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길가의 나무들이 시야(視野)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산길은 조망 대신 억새꽃이라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마침 햇빛을 등진 억새꽃들이 하얗게 빛나며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보인다.

 

 

바람재를 출발한지 15분쯤 되면 오른편으로 천자암 가는 길이 나뉘고, 조금 후에는 진행방향에 있는 수리봉이 시야(視野)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른편이 수직(垂直)의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형상으로 말이다. 그리고 다시 15분쯤 더 걸으면 수리봉이다.

 

 

산길은 수리봉를 오른편에 끼고 살짝 우회(迂廻)하도록 나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오른편에 산악회의 시그널(signal) 몇 개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수리봉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그러나 바위로 이루어진 이 길은 여자나 노약자들이 이용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다. 자칫 잘못하면 사고를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바위를 붙잡고 겨우겨우 위로 오르면 정수리부분은 의외로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수리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부부의 양해를 구하고 잠깐 조망을 즐긴다. 유일하게 시야(視野)가 트이는 오른편에 진해시가지가 오롯이 앉아있다. 하산은 천자봉 방향으로 내려선다. 약간 경사(傾斜)가 심한 편이지만 아까 올라왔던 길보다는 훨씬 낫다. 노약자들은 이 코스를 이용하면 될 것 같다.

 

 

 

수리봉에서 내려서서 잘생긴 바위 옆을 지나면 10분 후에는 왼편으로 만장대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고, 이어서 거친 너덜 길을 따라 5분쯤 더 걸으면 천자봉(天子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의 천자봉 정상에는 그 귀한 이름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반듯한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오늘 산행에서 만나게 되는 유일한 정상석이다. 정상은 정상석 하나만으로는 외로웠나보다. 무인산불감시탑과 무덤까지 거느리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무튼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정상에 서면 발아래에는 진해국가산업단지가 내려다보이고, 동쪽으로는 가덕도와 부산 사하구의 일부 지역이, 그리고 남쪽에는 거가대교와 거제도가 나타난다. 고개를 돌려보면 조금 전에 지나온 수리봉과 젓꼭지를 닮았다는 시루봉이 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빼어난 풍광(風光)이다.

 

 

 

 

천자봉에서 대발령으로 내려가는 길은 또 다시 계단으로 시작된다. 그만큼 경사(傾斜)가 가파르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곳의 계단도 평평한 데크가 많은 것이 아까 지나왔던 계단들과 매한가지이다. 당연히 내려서는데 부담이 없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시선(視線)을 들게 된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다도해(多島海)의 풍광을 실컷 즐기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천자봉에서 15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벤치와 평상 등을 갖춘 분지(盆地)를 만나게 된다. 이곳 사람들이 천자봉 삼림욕장으로 부르는 곳으로, 지형도(地形圖) 상의 391봉이다. 분지는 통나무로 난간을 만들어 사람들의 진입을 막고, 그 안에다 왕벚나무와 산철쭉 등을 심어 놓았다. 창원시에서 추진 중인 ‘Green City, 1000만 그루 나무심기운동의 일환으로 조성한 것이란다, 조림지(造林地) 근처에는 팔각정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산신단(山神壇)이 만들어져 있다. 명 태조 주원장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전설이 서려 있는 정상을 향해 제사(祭祀)를 올리기 위한 단()이란다.

 

 

삼림욕장에서 대발령까지는 차량 통행이 가능한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林道)로 연결된다. 그러나 임도를 따를 경우에는 걸어야할 거리는 엄청나게 길어진다. 이 때문에 등산로는 임도를 따르지 않고 능선을 따라 곧장 아래로 향한다. 중간 중간에 임도와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말이다. 임도와 만나고 헤어지는 지점마다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고, 산길도 생각보다 또렷하기 때문에 길이 헷갈릴 염려는 없다.

 

 

산행날머리는 대발령 만남의 광장

삼림욕장에서 15분쯤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임도(이정표 : 대발령 1.0Km/ 만장대 0.8Km/ 사각정자 0.7Km)에서 임도를 마지막으로 벗어난다. 이어서 조금 후에는 울창한 편백나무 숲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숲에는 길과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나무데크 난간이 낡다 못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오랫동안 보수를 안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오늘의 산행을 행복하게 마무리 짓는데 하등의 지장이 없다. 그러기에는 코끝을 스쳐가는 편백나무 향이 너무나 짙기 때문이다.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편백나무라고 했으니, 오늘 산행은 웰빙(well-being)산행, 아니 힐링(healing)산행으로 마무리를 짓는가 보다. 편백나무 숲을 빠져나와 진해시가지를 바라보며 조금 더 내려오면 부산과 진해를 잇는 2번 국도변에 있는 대발령 만남의 광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끝을 맺는다. 오늘 산행은 3시간50분이 걸렸다. 물론 쉬지 않고 걸은 시간이다. 그러나 각 포인트마다 소요된 시간은 좀 들쭉날쭉한 편이다. 웅산까지는 잰 걸음으로 걷다가, 이후부터는 갈수록 속도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망운산(望雲山, 786m)

 

산행일 : ‘14. 9. 27()

소재지 : 경남 남해군 남해읍과 고현면, 서면의 경계

산행코스 : 평고개체육공원전망대관대봉삼거리봉망운산송신탑(연대봉)수리봉학성봉물야산서산마을(산행시간: 4시간30)

같이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색 : 남해군에는 망운산 외에도 금산과 설흘산, 호구산 등이 있다. 그러나 망운산은 남해의 진산(鎭山)임에도 불구하고 외지(外地) 사람들에게는 덜 알려진 편이다. 어쩌면 암릉으로 이루어진 다른 산들에 비해 전형적인 흙산이라서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흙산은 바위산에 비해 눈요깃거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산에 들고 보면 볼거리가 없다는 말은 하나의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화방사 위쪽의 철쭉군락지와 연대봉 근처의 억새능선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장관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능선을 타며 즐기는 눈터지는 조망(眺望)은 결코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남해 사람들은 외지인들에게는 금산을 권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망운산을 오른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망운산이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할 괜찮은 산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평고개(남해군 남해읍 서변리)

남해고속도로 진교 I.C에서 내려와 1009번 지방도를 이용 남해읍까지 들어온다. 남해읍 시가지를 벗어나기 바로 직전의 남변사거리에서 직진, 이어서 남해축협 앞에서 우회전하면 남해실내체육관이다. 체육관과 공설운동장 앞으로 난 도로를 따라 들어가다 남해여중 담벼락의 끝자락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에 산행들머리인 평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평고개 고갯마루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임도(林道)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망운산 산행’, ‘산림욕장(森林浴場)’, 그리고 애국지사 이예모(李禮模)선생 묘()’의 안내도(案內圖)가 한꺼번에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들머리에서 100m쯤 오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반듯하게 닦인 오른편의 임도는 이예모선생 묘로 가는 길, 등산로는 왼편으로 열린다. 초입에 망운산 정상까지의 거리가 4.4Km라는 이정표 외에도 산림욕장에서 만든 또 다른 이정표(전망대 1.40Km, 삼림욕지구 1.48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경사(傾斜)도 완만(緩慢)할뿐더러 폭이 넓은 흙길은 아예 폭신폭신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거기다 길가에는 나무에 대한 안내판까지 심심찮게 세워놓는 등 산림욕장의 진입로로 가꾸느라 쏟아 부은 정성의 흔적들이 역력하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걸을라치면 15분 후에는 약수터가 나온다. 비록 깔끔한 맛은 없지만 물맛은 괜찮은 편이니 잠깐 쉬어가도 좋을 일이다.

 

 

약수터를 지나면 바로 위가 체육공원(體育公園)이다. 수많은 운동기구와 쉼터, 그리고 숲속 공연장까지 갖춘 공원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망운산 정상/ 신기마을/ 서변)로 나뉜다. 이정표에 나와 있는 오른편의 신기마을은 남해여중 근처에서 올라오는 길, 그리고 서변은 우리가 올라왔던 평고개 근처의 마을 이름이다. 이곳에는 산행을 도와주는 이정표 외에도 산림욕장에서 세운 이정표가 하나 더 보인다. 그러나 둘 모두 산행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방향표지만 되어 있을 뿐 가장 중요한 거리표시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을 하는 내내 만났던 이정표들은 대부분 이런 모습들이었다. 이왕에 돈을 들여 만들었다면 이를 활용하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그게 바로 요즘의 화두(話頭)고객만족(CS : Customer Satisfaction)’일 테니까 말이다.

 

 

 

체육공원을 지나서도 산길은 변함없이 곱다. 평지나 다름없는 오름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때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하나. ‘오늘 산행은 그냥 공먹는 것이나 아닐까?’ 그러나 이런 헛된 망상(妄想)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잠깐 스치고 지나간다싶을 정도로 짧게 끝나버리는 편백나무 숲을 통과하고 나면 전망대(展望臺)이다. 시멘트로 지어진 이층의 정자(亭子)에 올라가볼까 하다가 그냥 발걸음을 옮기고 만다. 주변의 숲 때문에 조망(眺望)이 별로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0분 남짓 지났다.

 

 

 

 

정자를 지나면 다시 편백나무 숲으로 들어서게 된다. 안내도에 산림욕지구로 표기되어 있는 지점(이정표 : 망운산 정상 2.6Km/ 망운산 입구 1.8Km)이다. 울창하게 우거진 편백나무 숲에는 각종 안내판과 벤치(bench) 등 주민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편백나무라는 기존의 산림자원(山林資源)을 활용해서 주민들이 마음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아이디어가 참신하게 느껴진다. 편백나무는 치유(healing)의 효능의 뛰어나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공간은 마음먹는다고 해서 나타는 것이 아니니 무의미하게 그냥 지나치지 말고 잠시 쉬었다 가면 어떨까.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삶의 여유를 찾아보고, 또 재충전의 시간으로 활용해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삼림욕장을 지나면서 산길은 서서히 가팔라져간다. 그리고 가끔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남해바다가 나타나나 개의치 말고 진행하는 것이 좋다. 조금 후에 마음 놓고 조망(眺望)을 즐길 수 있는 전망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자에서 2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평현고개 갈림길(이정표 : 망운산/ 평현고개), 그리고 곧이어 아산마을 갈림길(이정표 : 망운산 정상 2.3Km/ 아산마을/ 약수터 0.3Km/ 남산입구 2.2Km)을 만나게 된다.

 

 

 

 

아산마을 갈림길에서 10분 남짓 올랐을까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니 오른쪽으로 60() 정도 기울은 널따란 반석(盤石)이 나타난다. 전망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시야가 활짝 열린다. 고도(高度)가 제법 높아진 탓일 것이다. 사실 이곳이 있었기에 아까 올라오면서 열렸던 조망처를 그냥 지나치라고 권했던 것이다. 전망바위에 서면 발아래에는 남해읍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건너편에는 창선도가 남해도와 손을 맞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다가와 있다.

 

 

전망바위에서 다시 한 번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10분 후에는 거대한 바위(이정표 : 망운산 정상 1.7Km)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왼쪽으로 반 바퀴를 에돌아 철계단을 오르면 관대봉 정상이다. 옛날 벼슬아치들의 관대(벼슬아치들의 공식복장)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가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가마봉'으로 부르기도 하고, 또한 이 봉우리 위가 시루 하나를 앉힐 만한 넓이라고 해서 '시루봉'이라고도 한단다.

 

 

 

관모봉에 올라서면 시야(視野)가 한층 더 넓어진다. 남해시가지 뒤로 펼쳐지는 남해바다가 훨씬 더 넓어졌고, 그 바다 위에는 창선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여수만과 오동도, 돌산도 등 전라도 땅이 새로이 나타난다.

 

 

관대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게 떨어진다. 그러다가 10분 조금 못되면 안부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짬짬이 나오는 바위를 오르내리다가 맞은편 능선을 치고 오르면 30분 후에는 삼거리봉(이정표 : 망운산 정상/ KBS중계소/ 관대봉)에 올라서게 된다. 물론 삼거리봉으로 올라오는 길에도 심심찮게 시야가 열리니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고 조망을 즐기면서 걸어볼 일이다.

 

 

 

정상으로 오르다 고개를 돌려보니, 문득 관대봉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참으로 이채롭다. 영락없는 봉긋한 가슴 모양인 것이다.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惟豕 佛眼見惟佛)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 초기의 명승(名僧)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에게 했다는 말로 돼지 눈으로 보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오직 돼지로만 보이고 부처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오직 부처로만 보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내 정신세계는 오로지 수컷의 본능으로 가득 차 있나 보다.

 

 

망운산 정상과 KBS중계소로 가는 길이 나뉘는 주능선인 삼거리봉은 커다란 바위 몇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이 이 봉우리를 암봉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정상의 풍경은 실망스럽다. KBS중계소로 이어지는 전깃줄과 전봇대, 임도 따위가 어지럽다. 힘들여서 정상에 올랐는데도 이런 도회적(都會的) 풍경이 마중을 나오니 어찌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관대봉 정상에서 또 다시 시야(視野)가 활짝 열린다. 아까 관대봉에서 보았던 풍경과 다름없이 펼쳐지나 그 폭은 한층 더 넓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형상이 아까보다 많이 흐려졌다. 연무(煙霧)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 연무 사이로 흐릿하게 나타나는 곳은 아마 광양항일 것이다.

 

 

 

 

삼거리봉에서는 우선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망운산 정상을 둘러본 뒤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길가에 피어난 들꽃들을 구경하며 4분쯤 걸으면 안부에서 오른편으로 갈림길(이정표 : 망운산 정상/ 망운암/ 관대봉) 하나가 나뉜다. 망운암으로 가는 길이다.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한 산중 암자(庵子)인 망운암(望雲庵)의 현재 이름은 망운사(望雲寺)이다. 고려 때 진각국사가 창건했고, 해방 이후에는 효봉, 경봉, 서암, 월하스님 등이 수행했을 정도로 뛰어난 수행도량이었던 이 암자는 언제부턴가 황량하게 변해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현재의 주지인 성각스님이 다시 일으켜 세웠고, 현재는 부속 암자가 아닌 의젓한 독립된 사찰로 성장했다. 이는 선서화(禪書畵)의 대가(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9)로 알려진 성각스님의 능력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선서화(禪書畵)란 깨달음의 정신을 그림과 글씨에 담아내는 불교 수묵화(水墨畵). 

 

 

 

삼거리에서 다시 10분 정도 가파르게 올라서면 드디어 망운산 정상이다. 커다란 바위 몇 개가 널려있는 정상에는 코고 작은 두 개의 정상표지석이 길손을 맞는다. 망운산의 원래 정상은 KBS중계소가 있는 연대봉이라고 한다. 옛날부터 남해 사람들은 연대봉을 상봉이라 부르며 망운산의 최고봉으로 대우해 왔었으나 통신시설 때문에 출입을 할 수가 없게 된 이후부터 이곳 꼭두봉을 정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망운산의 망운이란 이름 그대로 정상에 서서 먼 구름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사방에 막힘이 없으니 탁 트인 조망(眺望)이 압권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一望無題)로 뚫린다. 산의 기운을 빨아들인 구름 아래로 우람한 내륙의 산봉우리들이 바다를 향해 줄달음치고, 남해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 너머로는 바다에 기댄 도시들의 자태가 두 눈 가득 들어온다. 그렇다고 남해도에 산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마침 정상에 조망도(眺望圖)가 세워져 있으니 금산과 설흘산, 호구산 등 남해의 명산들과 눈이라도 맞춰볼 일이다. 

 

 

 

정상에서 내려서는 길은 두 갈래(이정표 : 화방사/ 중계소)이다. 우리가 하산코스로 잡으려고 하는 KBS중계소로 가려면 아까 지나왔던 삼거리봉으로 되돌아가야 하고, 반대 방향으로 진행할 경우에는 철쭉광장을 거쳐 화방사에 이르게 된다. 1981년 화재로 소실(燒失)이충무공 목판 묘비가 복원(復原)되어 있는 **)화방사(花芳寺)는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순국(殉國)한 장병들의 영혼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호국사찰(護國寺刹)이다.

(**)신라 신문왕 때 원효(元曉)가 연죽사(煙竹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던 것을, 고려 중기에 진각국사(眞覺國師)가 현재의 위치 가까이로 옮겨서 중창하고 영장사(靈藏寺)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근거지로 쓰이다가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636(인조 14) 계원(戒元)과 영철(靈哲)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창하고 화방사라 하였다. 그 뒤 영조와 정조 때의 고승인 가직(嘉直)이 머물면서 갖가지 이적(異蹟)을 남겼고, 절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된 채진루(採眞樓)와 응진전, 명부전, 칠성각, 승당(僧堂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용문사(龍門寺), 보리암(菩提庵)과 함께 남해군의 3대 사찰(寺刹) 중 하나이며, 절 주위에는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152호로 지정된 산닥나무가 자생(自生)하고 있다. 참고로 이 절에는 옥종자(玉宗子)와 금고(金鼓) 그리고 이충무공비문목판(李忠武公碑文木版)라는 특이한 유물로 유명하다. 이 중 옥종자는 절을 짓고 불상을 모실 때 밝혔던 등잔으로 한번 불을 붙이면 꺼트려서도 안 되고, 일단 꺼진 뒤에는 다시 불을 붙일 수 없다고 전한다. 이 등잔은 임진왜란 때 꺼졌기 때문에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금고는 조선 중기 때의 유물로 범자(梵字)가 사방에 양각되어 있으며, 이충무공비문목판에는 모두 2천자가 새겨져 있다.

 

 

다시 삼거리봉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KBS중계소가 있는 연대봉으로 향한다.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온통 억새들 세상이다. 어른의 어깨 어림까지 차오를 정도로 웃자란 억새들 사이로 난 길은 가히 환상적이다. 특히 지금은 오후, 햇빛을 등지고 있는 억새꽃들은 은빛으로 하얗게 물들어있다. 아름다움에 취해 길을 걷다가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한려수도(閑麗水道)가 그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눈을 깔면 흐드러지게 핀 들꽃들은 가득하다. 행여 발길에 차이기라도 할까봐 걷고 있는 발걸음까지도 조심스러워진다.

 

 

 

나무들이 없어 조망이 시원스러운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연죽마을 갈림길’, 조금 후에는 커다라면서도 생김새까지 빼어난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안부에 이르게 된다. 이어서 맞은편에 보이는 능선을 짧게 치고 오르면 헬기장(이정표 : 용두봉 1.2Km/ 중리마을 4.3Km/ 망운사 2.7Km)이 나타나면서 전면에 연대봉이 바라보인다. 삼거리봉에서 15분 조금 못되는 거리이다.

 

 

헬기장에서 산길은 능선을 벗어나 왼편으로 난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르게 된다. 거대한 안테나 두 개가 서있는 정상은 철망(鐵網)으로 둘러싸여 있어 출입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임도를 따라가다 보면 연대봉 정상에 세워진 원뿔형 돌탑이 하나 보인다. 저 돌탑이 있는 자리가 바로 옛날 봉수대(烽燧臺)가 있던 자리이다. 고려 말의 문신(文臣)이었던 정이오(鄭以吾)가 저곳에 올라 호국의지를 불태우면서 봉화를 들먹인걸 보면 그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잠시 진주 금양부곡의 양둔에만 봉화를 보냈던 것이 유일하다. 산세(山勢)가 워낙 높아 군사들의 주둔이 힘들다는 이유로 단종 2(1454)에 폐지(廢止)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봉수대가 있는 정상은 면적이 좁아 돌로 쌓은 연대(煙臺) 하나만 설치하였었다. 망대(望臺)역할도 했던 연대의 둘레는 약 40m이며,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높은 곳은 1.5m 정도였다고 한다.

 

 

헬기장에서 임도를 따라 5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정자(亭子)가 나온다. 전망대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정자의 옆은 너른 공터로 이루어져 있어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의 활공장으로 이용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어느 글에선가 망운산이 최근 항공스포츠의 활공장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했는데 이곳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이곳은 주변이 탁 트여서 조망이 뛰어나다. 바로 아래로는 여수와 남해를 가르는 바다가 흐르고, 건너편 땅 여수가 지척이다. 옛날에는 여수와 남해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육상교통 발달로 남해와 여수는 가깝지만 먼 이웃이 되어버렸다.

 

 

 

 

전망대에서 재미있는 이정표를 만났다. '싱글길'. 혼자서도 어려움 없이 갈 수 있는 길이란다. 하지만 일부러 혼자서 걸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혼자서 걷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하면 더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경사(傾斜)가 심하지 않은 내리막길을 타다가 역시 가파르지 않은 맞은편 능선을 치고 오르면 20분 후에는 바위봉우리인 수리봉에 올라서게 된다. 정상에 있는 표지판에는 용두봉이라고 적혀있다. 아마 수리봉의 또 다른 이름인 모양이다. 이곳에서의 조망(眺望)도 역시 뛰어나다. 아니 이곳뿐만이 아니다. 이곳으로 오는 길이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곳곳에서 눈터지는 조망이 펼쳐진다. 한마디 봉우리 전체가 전망대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연무(煙霧) 때문에 희미하지만 광양만이 널따랗게 펼쳐지고 고개를 돌리면 망운산 정상이 코앞에 서있다.

 

 

 

수리봉에서 다음 봉우리인 학성봉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산길은 그 가파름이 부담스러웠던지 길가에 목책(木柵)을 세우고 안전로프까지 매달아 놓았다. 붙잡고 내려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부담스러운 내리막길을 15분 정도 내려서면 안부에서 직장마을 갈림길(이정표 : 서상마을 2.5Km/ 직장마을 2Km/ 망운산 정상 3.3Km)을 만나게 되나, 갈림길을 무시하고 맞은편 능선을 향해 직진하면 된다.

 

 

 

 

학성봉으로 올라가는 능선에서 또 다시 억새밭을 만나게 된다. 햇빛을 등진 채 은빛으로 빛나는 억새들이 바람에 몸을 누이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가을로 물들어가는 산의 매력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그 억새밭 끄트머리에 학성봉 정상이 있다. 직장마을 갈림길에서 25분 정도 걸리는 지점이다. 학성봉 정상도 역시 뛰어난 전망대이다. 아까 수리봉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다시 나타나지만 연무가 더 짙어졌는지 그 형상은 아까만 못하다. 참고로 학성봉에는 정상을 알려주는 그 어떤 표식도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학성봉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직장마을 갈림길을 지나 처음으로 올라서게 되는 바위봉우리가 학성봉이려니 했는데 저만큼 앞에 이보다 더 높은 봉우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그 봉우리를 학성봉이라고 보고 산행기를 썼다. 그러다보니 해발 610m 안팎의 봉우리인 평치(평고개)’는 어디를 일컫는지도 모르고 산행을 마치는 우()를 범해버리고 말았다.

 

 

 

학성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계속해서 내리막길로 연결된다. 길가에는 가끔 바위들이 나타나기도하지만 전형적인 흙길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흙길이 온통 웃자란 잡초(雜草)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걷기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능선을 따라 길게 내려섰다가 짧게 다시 오르면 물야산(411m) 정상이다. 바위벼랑을 버팀목 삼고 있는 물야산 정상 또한 천혜의 전망대다. 바위벼랑 위에 서면 푸르고 광활한 다도해(多島海)가 펼쳐지고, 발아래에는 오늘 산행의 날머리인 서상마을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물야산에서 가물랑산까지의 내리막길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산길은 가파른 구간도 나타나지만 대부분은 완만(緩慢)하다. 하나 산길은 그마저도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길이 갈지()자를 그리면서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물야산에서 내려선지 20분 정도가 지나면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가물랑산(190m)에 올라서게 된다. 가물랑산은 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언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페인트로 산의 이름을 적어놓은 자연석이 없었더라면 정상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 뻔하다.

 

 

산행날머리는 서면보건지소 앞 정자

가물랑산에서 10분 정도 내려오면 김해 김씨 종중 묘원앞에서 임도(이정표 ; 서면사무소 1.1Km, 남해스포츠파크 1.4Km/ 용두봉 정상 2.1Km)에 내려서게 되고,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더 내려오면 산행안내도와 이정표(서면사무소 0.4Km, 서상스포츠파크 0.7Km/ 용두봉 정상 2.8Km)가 세워진 서상마을에 이르게 된다. 산행이 종료되는 서면보건지소는 이곳에서도 7~8분 정도 더 걸어야 한다. 총 산행시간은 총 4시간40분이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느라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30분이 걸린 셈이다.

정각산(正覺山, 859.7m)-실혜산(828m)-구천산(765m)

 

산행일 : ‘14. 9. 20()

소재지 : 경남 밀양시 단장면과 산내면의 경계

산행코스 : 구천마을버섯재배장정각폭포정각산끝방재미륵봉실혜산암봉정승봉(政丞峰·803m)정승고개구천산(영산)구천마을(산행시간 : 6시간 1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산행은 정각산과 실혜산, 구천산(영산) 등 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만 해도 3, 거기다 미륵봉, 정승봉 등 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까지 합할 경우에는 800m가 넘는 산들을 5개나 오르내리게 된다. 이 다섯 개의 산들은 정승골의 최북단(最北端)에 위치한 실혜산(828m)을 반환점(返還點)으로 말발굽 형태를 띠고 있다. 도상거리는 대략 13.5정도, 하루 동안 모두 걷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거리이다. 따라서 조금 단축하고 싶을 경우에는 실혜산을 생략하고 곧바로 정승봉으로 직행하거나, 아니면 맨 마지막에 있는 구천산을 생략하고 도래재로 하산하는 방법이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실혜산을 생략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 같다. 아무튼 정각산은 오르는 길에 만나는 치마바위의 암릉이 멋지고, 정승봉과 구천산은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이 일품이다. 특히 정승봉에서 바라보는 영남알프스는 가슴이 벅찰 정도로 장쾌하다.

 

산행들머리는 구천마을(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 언양·울산방면으로 7~8분쯤 달리다가 금곡교차로(交叉路 :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에서 우회전하여 표충사로 연결되는 1077지방도를 따른다. 이어서 단장면소재지를 지나면 구천리 삼거마을에서 삼거리를 만난다. 이곳 삼거리에서 왼편 도로로 접어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전원주택 풍의 마을회관 앞 정류소에 닿는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참고로 삼거리에서 오른쪽(직진)으로 가면 표충사가 나온다.

 

 

 

구천리 마을회관(경로당) 앞으로 난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건너편에 정각산이 보인다. 산의 허리를 길다란 바위가 병풍(屛風)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처매듬 또는 치마바위로 불리는 바위로서 정각산의 명물이다. 왜 처음부터 처매듬을 들먹이는지 의아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마을 안길이 변화가 많기 때문에 혹시라도 길이 헷갈리기라도 할 경우에는 이를 기준점(基點)으로 삼아 길을 찾아나가라는 의미에서이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자마자 마주치는 다리를 건너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개울을 따라 40~50m쯤 내려가면 파란색 지붕의 녹색 철대문집을 보게 된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마을을 빠져나간다. 마을을 통과하면 이번에는 구천천()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다리를 만난다. 마을회관에서 5분쯤 되는 지점이다. ‘버섯재배장으로 가는 길은 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편의 경사(傾斜)진 시멘트 포장길로 연결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오른쪽 넓은 길을 따르더라도 나중에 치마바위 아래에서 서로 만난다고 한다.

 

 

 

대추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3분쯤 오르면 곧 비포장 임도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2분쯤 걸으면 왼편에 검은색 덮개를 뒤집어쓰고 있는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버섯재배장이다. 산길은 임도를 벗어나 이 버섯재배장으로 향한다. 들머리에 이정표(정각산 2.39km)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염려는 없을 것이다. 들머리에서 이곳까지는10분이 걸렸다.

 

 

 

2개의 재배장 중 위쪽 재배장의 뒤편에 있는 임도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이 너절하게 매달려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각산으로 향하는 산길의 오른편은 처매듬골이라는 이름을 가진 계곡이다. 그러나 이름만 계곡일 뿐 물기라곤 한 점도 없는 건천(乾川)이다.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 고개라도 들라치면 처매듬(치마바위)이 눈앞에 다가온다. 처매듬은 암벽(巖壁)이 띠(belt)처럼 늘어서 있는 것이 마치 거대한 성곽(城郭)을 연상시킨다.

 

 

 

 

산길은 얼마 후 임도를 벗어나 오솔길로 접어든다. 물론 경사(傾斜) 또한 급해진다. 그러다가 버섯재배장을 출발한지 15분쯤 지나면 처매듬(치마바위)의 왼쪽 아래에 닿는다. 산길은 이곳에서 처매듬의 왼쪽 끄트머리를 에돌아가며 위로 향한다.

 

 

산길이 치마바위를 에돌기 바로 직전에 만나게 되는 폭포(瀑布)가 바로 정각폭포이다. 높이 약 10m에 넓이 또한 비슷하고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오버행(overhang)인 이 폭포는 비가 올 경우 밀양 최고의 경관을 연출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메말라있다. 아무리 장마철이 지났다지만 그다지 물이 귀한 시기가 아닌데도 메마른 것을 보면 폭포라기보다는 차라리 평범한 바위벼랑으로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하도 물이 귀하다보니 졸졸 흐르는 물줄기도 대접을 받나보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을 받고 있는 등산객의 표정이 자못 엄숙하기까지 한 것을 보면 말이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식수(食水)를 준비하지 못했나보다. 만일 그렇다면 그가 지금 받고 있는 물은 단순한 식수가 아니다. 그 자신에게는 생명수(生命水)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폭포를 지나면 거칠면서도 가파른 바윗길과의 힘겨운 싸움이 시작된다. 정각산의 명물인 처매듬(치마바위) 구간을 통과하는 의례쯤으로 보면 된다. 산길은 치마바위의 왼쪽 끝을 에돌아 위로 올라가도록 나있다. 그러다보니 가파를 수밖에 없고, 거기다 위험하기까지 하다. 조심스럽게 바위 위쯤 되는 높이까지 오르면 당분간 길은 편해진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금방 너덜길로 변하더니 또 다시 가파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가파른 산길은 꽤나 길게 이어진다. 힘에 겨운 산길이 버거워질 즈음, 그러니까 정각폭포를 출발한지 30분쯤 지나면 눈앞에 바위벼랑이 다시 나타난다. 바위를 붙잡고 곧장 오를 수도 있고, 옆으로 우회해서 오를 수도 있으나 앞서가는 집사람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위에 매달리고 본다.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위태롭고, 거기다 안전로프도 매어져 있지 않지만 집사람의 요즘 컨디션(condition)으로 봤을 때는 애기들 장난으로 밖에 안보일 것이다. 바위 위로 올라서면 저 멀리 천왕산 사자봉과 수미봉(재약산), 향로봉이 조망되고, 발아래 가까이에는 우리가 산행을 시작했던 구천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마을 뒤에 나타나는 산은 아마 매봉일 것이다.

 

 

 

 

조망바위에서 다시 15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임도(林道)에 올라서게 된다. 임도는 오랫동안 보수(補修)를 하지 않은 탓에 지금은 비록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소형 운반차량이 다녀도 됐을 정도로 제법 넓으면서도 반반하다.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 임도가 넓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정각산의 9부 능선에는 문을 닫아버린 지 오래된 옛 광산(鑛山)터가 있다. 어쩌면 이 임도는 광산을 운영하던 시절 광산에서 필요한 자재(資材)와 광산에서 캐낸 광석(鑛石) 등을 운반하던 도로였을 것이다.

  

임도를 따라 잠깐 걸으면 산길은 다시 왼편 산자락으로 들어서게 되고, 곧 이어 구멍 몇 개가 뻥 뚫린 바위벼랑 아래에 올라서게 된다. 문을 닫은 지 이미 오래된 광산(鑛山)터이다. 어느 누군가는 이 광산터를 보고 흉하다고 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숭고(崇高)한 삶의 현장으로 보일 따름이다. 어쩌면 서로의 인식(認識) 차이일 것이다. 가난하기만 했던 60~70년대, 우린 그 무언가가 절실했었다. 그 절실함이 낳았던 결과가 바로 한강의 기적이다. 그 기적을 만들기 위해 우린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총 동원해야만 했었고, 이 광산도 당시에 동원되었던 물자를 생산하던 현장의 하나였을 것이다. 800m가까이나 되는 이런 높은 곳에서, 특히 작업환경이 열악한 이런 굴속에서 일을 하고 있는 광부(鑛夫)들을 상상해보라. 아마 지금이라면 아무리 높은 임금(賃金)을 준다고 해도 어느 누가 이런 곳까지 일하러 오겠는가. 그래서 내 눈에는 숭고하게 느껴지는 삶의 현장으로 보였던 것이다.

 

 

 

광산터 앞에서 또 다시 조망(眺望)이 활짝 열린다. 향로봉과 백마봉 등 단장면의 산군(山群)들이 저마다의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며 정겹게 다가온다.

 

 

광산터에서 정상은 금방이다. 광산의 왼편 사면(斜面)을 치고 오른 후 지능선을 타고 10분쯤 더 오르면 주능선 삼거리(이정표 : 정각산 0.16Km/ 끝방재 2.2Km/ 구천리회관 3.5Km)에 이르게 된다. 정각산 정상은 이곳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2~3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때문에 다음에 올라야할 실혜산으로 가려면 정상을 둘러보고 나 후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10평 조금 못되는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각산 정상은 정상표지석과 삼각점(동곡 355), 그리고 한쪽 날개가 떨어져 나간 이정표(송백 5Km/ 임고 5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정표의 송백은 끝방재에서 왼편으로 내려서면 이르게 되는 송백리를 말하는 것이고,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임고는 산내면 임고리이다. 산행은 당연히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송백방향(조금 전에 올라왔던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잡목(雜木)으로 둘러싸인 정상은 조망(眺望)이 시원치 않다. 정상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산행들머리에서 정각산 정상까지는 1시간30분이 조금 더 걸렸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끝발재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5분쯤 후에 살짝 바위가 보이는가 싶더니 시야(視野)가 뻥 뚫리는 바위 위에 올라서게 된다. 지도에 조망바위로 표기된 지점이다. 바위 위에 서면 발아래에는 산내면 소재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뒤에는 용암봉과 종자봉, 육화산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 보이는 산들은 어쩌면 구만산과 억산일 것이다.

 

 

조망바위에서 잠깐 가파르게 떨어진 산길은 이후부터는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폭신폭신한 흙길을 한껏 여유를 부리며 걷다보면 15분 후에는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송정자고개이다. 비록 이정표(끝방재 0.74Km/ 정각산 1.9Km)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이곳에서 왼편에 보이는 길로 진행할 경우에는 발례마을로 내려가게 된다.

 

 

 

송정자고개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바윗길이 나타난다. 오른편으로도 길의 흔적이 보이나 왼편 바윗길로 올라서고 본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그저 약간 거친 수준의 돌길로 보였기 때문이다. 역시 내 예상은 들어맞았다. 집채만한 바위의 옆으로 난 길은 그저 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는 틈새 길에 불과했다. 바윗길이 지나면 산길은 다시 보드라운 흙길로 변한다.

 

 

송정자고개를 출발한지 20분 정도가 지나면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안부사거리(이정표 : 실혜봉 3.9km/ 정승동 1.4km/ 송백교회 4.3km/ 정각산 2.4km)에 내려서게 된다. 끝방재인데 널따란 지형(地形)을 살렸는지 여러 기()의 묘()들이 보인다. 등산객 몇이서 웅성거리고 있기에 다가가 보니 우리 일행이 아니 부산서 온 등산객들인데 그들은 이곳에서 정승동으로 하산을 할 계획이란다. 정각산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정승동으로 하산을 한다. 다음에 오르게 될 미륵봉이나 실혜산은 산세(山勢)도 보잘 것이 없을뿐더러 조망(眺望)까지도 일절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산세가 뛰어난 정승봉까지 둘러보기에는 그 거리가 아마추어(amateur)들에게는 만만치 않다.

 

 

 

사거리에서 무덤의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오르면서 다음 봉우리인 미륵봉으로 향한다. 산길은 큰 오르내림이 없는 부드러운 낙엽길이다. 그러나 길의 형편은 그다지 좋지가 않다. 웃자란 잡초(雜草)와 잡목(雜木)들이 갈 길 바쁜 나그네의 발길을 자꾸만 잡아채기 때문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다가 30분 후에는 밋밋한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미륵봉이라고도 불리는 767m봉이다. 일행들 몇 명이 봉우리 위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의 길가에 미륵봉이라고 쓰인 종이 한 장이 놓여있다. 정상석이 보이지 않는다고 산행대장이 종이에다 표시해 놓고 갔다는 것이다. 선답자(先踏者)들의 기록을 보면 이곳에 정상석이 있다고 했는데 누군가가 없애버린 모양이다. 사실 이곳을 미륵봉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당연히 미륵봉이라는 이름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왕에 세워진 정상석을 뽑아내버릴 것까지야 없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입안이 씁쓸해진다. 정각산 정상에서 이곳 미륵봉까지는 1시간10분이 걸렸다.

 

 

 

 

미륵봉을 지나서도 산길은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는다. 큰 오르내림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듯 산봉우리를 피해 우회(迂廻)길을 만들면서까지 완만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13분 정도가 지나면 또 다른 안부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비록 이정표는 없지만 이곳에서 왼편은 미륵골을 거쳐 산내면소재지인 송백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편은 실혜산을 거치지 않고 곧장 정승봉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곳은 어디로 가야할지를 갖고 심각하게 고민을 해봐야 하는 지점이다. 혹시라도 나에게 다시 한 번 그런 기회가 찾아온다면 난 서슴없이 곧장 정승봉으로 직행할 것이다. 그만큼 실혜산이 보잘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산세(山勢)는 물론이려니와 조망(眺望)까지도 일절 트이지 않으니 구태여 올라가볼 가치가 없다는 얘기이다.

 

 

안부사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본격적인 오름짓을 시작한다. 그리고 길은 한층 더 거칠어진다. 아까 끝방재에서 가뜩이나 줄어들었던 사람들이 조금 전의 사거리에서 또 다시 갈려나간 탓일 것이다. 사거리에서 10분이면 이름 없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잠깐 내려섰다가 다시 맞은편 능선으로 치고 오르면 14분 후에는 실혜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미륵봉에서 40분 정도의 거리이다.

 

 

3~4평 남짓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은 정상표지석 대신에 스테인리스(stainless steel)로 만들어진 정상표지판이 지키고 있다. 그런데 정상판에는 정각산 실혜봉이라고 적혀있다. ‘()’이 아니라 독립된 ()’으로 알고 있었기에 헷갈린다. 관할 지자체에서 정리를 해주면 좋지 않을까 싶다. 정상은 잡목(雜木)들로 둘러싸인 탓에 일절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조망이 트이지 않는 실혜산 정상에서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어 곧장 정승봉으로 향한다. 100m 조금 못되게 걸으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원당마을(산내면 원서리)로 내려가는 하산 길, 정승봉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실혜산에서 가파르게 변한 산길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아까 실혜산을 오를 때 헤어졌던 산길과 다시 만나게 되고, 곧이어 산길은 다시 맞은편 산봉우리로 향한다. 안부를 떠난 산길은 초반부터 급경사(急傾斜) 오르막길이다. 거기다가 조금 후에는 날이 제법 시퍼렇게 선 바윗길로 변한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짜릿한 구간일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바윗길에 안전로프 하나 매달려 있지 않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바윗길에서 스릴을 즐기며 5분 정도 오르면 시야(視野)가 트이기 시작하면서 억산과 운문산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위에 있는 암봉 위로 오르면 조망(眺望)은 한층 더 넓고 선명하게 터진다. 구만산과 억산, 운문산, 가지산으로 이어지는 영남알프스의 능선이 헌걸차고, 동남쪽에는 천황산과 재약산, 거기다 얼음골에 놓인 케이블카(cable car)의 승강장까지도 눈에 들어올 정도이다.

 

 

 

암봉에서 조망(眺望)을 즐기다 다시 정승봉으로 향한다. 정승봉으로 가는 길은 완만(緩慢)한 능선으로 연결된다. 검은 오석(烏石)으로 된 정상표지석 혼자서 지키고 있는 정승봉은 정상 주변에 키 큰 나무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시야(視野)가 막힘이 없다. 때문에 방금 지나온 암봉만은 못하지만 조망이 시원스럽다. 바로 옆에 있는 실혜산은 물론이고, 구만산과 억산, 운문산, 지룡산, 가지산 백운산, 능동산 천왕산 등 영남알프스의 산군(山群)들이 파노라마(panorama)처럼 웅장하게 펼쳐진다. 한마디로 장관(壯觀)이라고 할 수 있다. 실혜산에서 정승봉까지는 40분이 조금 못 걸렸다.

 

 

 

 

정승봉에서 산길은 완만(緩慢)하면서도 길게 내려섰다가 이번에는 내려온 것보다도 더 길게 오른 후에 첫 번째 이름 없는 봉우리 위에 올라선다. 어쩌면 정승봉보다도 더 높지 않을까 싶은데 정승봉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지점이다. 그리고 2~3분 더 걸으면 그보다도 약간 더 높은 두 번째 봉우리다.

 

 

정승고개로 가는 길에 보면 오른편으로 정승골이 내려다보인다. 정승골은 신라 때 어느 왕이 병을 고치기 위해 재약산 표충사에 머물고 있을 때 왕을 수행한 정승(政丞)이 이곳에 머물며 대기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정승골은 경남에서 가장 늦게 전기(電氣)가 들어온 곳이다. 지난 2000년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을 때 주민들이 밀양시내로 냉장고를 사러 나간 것이 TV에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던 심심산골의 오지(奧地) 마을이다.

 

 

두 번째 봉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리고 10분 후에는 정승고개(이정표 : 도래재 고개 2.2Km/ 산내 등자반 2.0Km, 정각산 6.3Km)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은 도래재로 내려가는 하산길,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구천산으로 가려면 맞은편 능선으로 직진해야 한다. 정승고개에서 집사람의 눈길이 간절해진다. 그만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모양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벌써 4시간 45,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으니 집사람의 체력(體力)으로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난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고 맞은편 능선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구천산 오르는 것을 포기할 경우에는 다시 이곳을 찾아와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이곳 밀양 땅이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내 결정은 꽤 큰 후유증(後遺症)을 남겼다. ‘다시는 같이 산에 가자고 하지마세요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난 어떻게 하면 이번 주말 산행에 그녀를 모시고 갈 지를 갖고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정승고개를 지나면서 다시 힘겨운 싸움이 시작된다. 산길이 가파른데다가 또 어느 곳에서는 바윗길까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기다 가끔 길이 희미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능선의 마룻금이다 싶은 곳으로만 진행하면 어렵지 않게 구천산의 정상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3~4평쯤 됨직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은 묘하게 생긴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석이 조망안내도(眺望案內圖)까지 겸하고 있는 것이다. ‘밀양 솔뫼산악회에서 세운 것인데 '구천산 888.2m'라고 쓰인 정상석의 상단에다 분도기(分度器, protractor) 모형을 그리고 각 위치마다 조망되는 산의 이름을 표기해 놓았다. 참으로 신선한 아이디어(idea)라 아니할 수 없다. 참고로 이곳 구천산은 영산 또는 꼬깔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정승봉에서 이곳 구천산까지는 1시간10분이 조금 못 걸렸다.

 

 

구천산 정상에서 또 한 번 시야(視野)가 뚫리면서 주변의 산군(山群)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지산에서 시작해 운문산과 억산, 구만산으로 이어지는 `영남알프스의 주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오른편으로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능동산과 간월산이 나타난다.

 

 

하산은 올라왔던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내려선다. 내려가는 길은 경사(傾斜)가 완만한 흙길임에도 불구하고 진행하기가 수월치 않다. 웃자란 잡초(雜草)와 잡목들이 산길을 온통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미해진 산길을 찾아가며 15분쯤 내려서면 삼각점봉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전망바위를 만나게 된다. 여기까지 오면서 보았던 조망(眺望)이 아쉽게 생각된다면 바위 위에라도 올라가 볼 일이다. 재약산 사자봉과 향로산, 백마산이 잘 조망된다. 전망바위를 지나서도 산길의 형편은 쉽게 좋아지지 않는다. 길이 희미할 정도로 잡초가 우거져 있는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구천리 계곡캠핑장

삼각점이 있는 곳에서 10분쯤 내려가면 무덤들이 여러 기() 보이는 능선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20분 정도 더 내려오면 다시 무덤들이 나타면서 산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 후 임도에 내려선다. 정승골로 연결되는 임도일 것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50m쯤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 다시 오른편에 보이는 오솔길로 접어든다. 들머리에 인근 펜션(pension)들의 집단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나 그냥 아까 내려오던 능선을 계속해서 연결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길을 찾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능선으로 난 길을 따라 15분쯤 더 내려오면 구천마을에 이르게 된다. 산행이 종료되는 계곡캠핑장은 마을에서도 10분 가까이 더 걸어 나가야만 한다. 오늘 산행은 6시간10분이 걸렸다. 그것도 쉬지 않고 걸은 시간이니 꽤나 긴 산행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남덕유산(南德裕山, 1507.4m)

 

산행일 : ‘14. 7. 5()

소재지 : 전북 장수군 계북면과 경남 함양군 서상면, 거창군 북상면의 경계

산행코스 : 영각사영각재남덕유산서봉갈림길월성치월성계곡황점마을(산행시간 : 4시간20)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특징 : 사람들은 덕유산을 일컬어 '크고 넉넉하며 사람의 기운을 돋우는 명산(名山)'이라고 추켜세운다. 커다라면서도 두루뭉술한 산세(山勢)를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조선 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이 산을 대표적인 육산(肉山)으로 꼽았다. 하지만 덕유산 전체가 다 두루뭉술한 육산은 아니다. 북덕유산이라고도 불리는 향적봉(1,614m) 일대와는 달리 남쪽으로 20Km쯤 내려오는 곳에서는 또 다른 산세, 즉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남성적(男性的) 매력이 넘치는 골산(骨山)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특한 산세를 존중이라도 해주려는 듯 사람들은 이곳을 남덕유산(1,507.4m)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남덕유산도 북덕유산과 마찬가지로 첩첩이 쌓인 주변의 산그리메가 가장 큰 매력이다. 특히 바윗길에 놓인 긴 계단을 오르내릴 때 시야(視野)에 잡히는 조망(眺望)은 거칠 것이 없다. 마침 골도 깊으니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철에는 정상까지 짧게 올랐다가 계곡으로 하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영각사 앞 버스정류장(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산 9-28)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서상 I.C에서 내려와 곧바로 서상면소재지 쪽으로 좌회전한다. 서상버스터미널 앞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다가 시내를 빠져나가기 전에 마주치는 ‘T’자형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6번 국도를 타고 장계 방면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중남삼거리(함양군 서상면 중남리)에 닿는다. 이곳 중남삼거리에서 오른쪽 37번 지방도를 타고 10분 남짓 들어가면 산행들머리인 영각사 앞 버스정류장에 이르게 된다.

 

 

 

산길은 버스정류장 바로 아래에서 열린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산행을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들머리 근처에 있는 천년고찰인 영각사(靈覺寺)를 들러보지 않을 경우 두고두고 후회를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 만큼 한번쯤은 둘러볼만한 가치가 충분한데다가 특히 영각사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10분이면 충분하니까 하는 말이다. 버스정류장에서 영각사까지는 2~3분 정도 걸으면 충분한 거리이다. 영각사는 남덕유산이라는 큰 산 자락에 있으면서도 절 자체의 명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한 때는 이름에 걸맞는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신라 헌강왕 2(876)에 심광대사(深光大師)가 창건했는데, 초기에는 규모 면에서 해인사에 못지않은 큰 수행도량이었다는 것이다. 창건 뒤의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다. 다만, 1770(영조 46)에 상언(尙彦)화엄경(華嚴經)’ 판목(板木)을 새겨서 이 절에 장경각(藏經閣)을 짓고 봉안하였다. 또한, 상언은 이 절에 머물면서 절을 옮기지 않으면 수재(水災)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리라고 예언하였는데, 얼마 뒤 홍수가 나서 절이 무너졌다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堂宇)인 극락전과 화엄전, 삼성각, 요사채 등은 1959년에 국고보조를 얻어 새로 지은 것이다. 6·25 때 모두 소실(燒失)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참고로 심광대사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인 무염(無染, 801888)의 제자로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에는 心光(심과)’이라고 되어 있다.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 나와 남덕유산으로 향한다. 길이 널따란 탓에 산길이라는 느낌이 덜하지만 다행이도 포장길이 아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된다. 입구에서 탐방지원센터(영각공원지킴터)까지는 400m, 탐방지원센터는 전에 매표소가 있었던 곳이다. 센터 앞을 통과해 산으로 들면 각종 경고판과 안내판이 마치 무당집 처마에서 흩날리는 리본(ribbon)들 만큼이나 번잡하다.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금연(禁煙)’은 눈에 익지만, ‘우측통행은 생뚱맞기 짝이 없다. 서로 비켜나기조차 힘든 좁다란 등산로에서 서로 편하게 비켜나면 되지, 구태여 우측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 , 벌 주의가 눈에 띈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뱀이 많은 산인 모양이다. 산행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간이 잔뜩 움츠러들어버렸다.

 

 

 

산으로 들어서도 산길의 풍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길의 폭이 좁아졌을 따름이지 경사(傾斜)는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완만(緩慢)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릎 아래에는 산죽(山竹) 숲이 깔려있고, 길 양편에는 쪽동백과 당단풍나무, 층층나무 등이 촘촘하다. 나무마다 줄줄이 이름표를 달고 있으니 가는 길을 서둘 것 없이 나무의 생김새와 이름표를 맞추어 가며 걷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비록 경사는 약하지만 걷는 게 쉽지만은 않다. 언제부턴가 바닥이 돌길로 변해있기 때문이다. 아마 첫 번째 이정표(남덕유산 3.0Km/ 영각공원지킴터 0.4Km)를 지나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바닥의 돌들이 크기와 생김새가 제각각이어서 발을 내려딛기가 여간 까다롭지가 않다.

 

 

지원센터에서 첫 번째 나무다리(木橋)까지는 30,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형우군()의 속도에 맞춘 것이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옛 직장동료인 그의 체력이 예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60대 중반을 향해 치닫고 있으니 어찌 예전 같을 수 있겠는가. 첫 번째 다리에서 6분쯤 더 걸으면 나무다리가 하나 더 나타난다. 두 개의 다리 모두 얕은 계곡을 가로지르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다리 아래의 계곡에 물기가 한 점도 없는 걸로 보아 비상용(非常用) 다리가 아닌가 싶다. 폭우(暴雨)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비상용 말이다.

 

 

 

 

두 번째 다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그리고 그 가파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진다. 그것도 거리가 1Km 정도나 되니 제법 먼 거리이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일 것이다. 대낮에도 어두컴컴할 정도로 짙은 숲속 길을 한바탕 땀을 쏟으면서 오르면 45분 쯤 후에는 능선에 이르고 산길은 왼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영각재에 올라선 것이다. 형우군의 속도에 맞추다보니 이 구간도 역시 생각보다 더 걸렸다.

 

 

 

 

이정표(남덕유산 0.9Km/ 영각공원지킴터 2.5Km)가 있는 능선 안부지만 어느새 해발고도(海拔高度)1200고지를 훌쩍 넘고 있다. 영각재에서는 오른쪽으로 난 길이 하나 보인다. 남령과 월봉산, 황석산, 기백산으로 연결되는 **)진양기맥의 일부지만 자연휴식년제(自然休息年制)에 따른 입산통제 구간이니 참조할 일이다. 물론 들머리에 이를 알리는 경고판(警告板)을 큼지막하게 세워두었다.

(**) 진양기맥(晉陽岐脈),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남덕유산에서 갈래를 쳐서 남강유역인 진양호의 남강댐(dam)에서 그 숨을 다하는 도상거리 159.1Km의 산줄기로 남강과 황강을 가르는 분수령(分水嶺)이 된다. 월봉산, 금원산, 기백산, 항매산, 한우산, 자굴산 등 빼어난 산세를 자랑하는 산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영각재를 나서면서 길은 더욱 가팔라진다. 그러나 이 정도는 가파르다고 할 수도 없다. 조금 후에는 그 길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긴 철()계단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길고도 긴 계단은 거의 수직(垂直)에 가까울 정도로 아찔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계단이 바위에 걸쳐진 것이 아니고 숲 사이로 나있다는 것이다. 일부러 뒤로 돌아서지 않은 이상은 무섬증 까지는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고개 뒤로 시야(視野)가 열린다고 해서 무섬증까지 각오하고 고개를 돌릴 필요는 없다. 조금 후에 봉우리 위로 올라가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조망(眺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철계단을 숨이 차게 오르면 거대한 바위벽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바위벽에 그다지 길지 않은 철계단이 놓여있다. 계단 위가 바로 전망이 좋다고 소문이 난 1440봉이다. 1440봉에서의 조망은 소문대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남덕유산의 정상이 위치한 진행방향에는 불끈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봉우리가 우뚝하고. 뒤로 돌아보면 월봉산을 중심으로 왼쪽 저 멀리 거창의 금원산과 기백산이, 오른쪽에는 황석산 거망산이, 남동쪽으로는 민족의 영산 지리산 주능선이 거대한 성처럼 하늘 높이 솟아있다. 영각재에서 1440봉까지는 20분 남짓 걸렸다.

 

 

 

 

전망봉에 올라 남덕유산 정상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면 산봉우리를 향해 길게 놓인 계단(階段)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 모습이 예전에 보던 것 하고는 많이 다르다. 옛날에는 사다리처럼 길면서도 가팔랐는데, 지금은 제법 너른 계단이 좌우로 꿈틀대면서 위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알아본 결과 이 계단은 2011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978년 해발 1450m에 설치된 길이 55m의 이 철()계단은 항상 안전사고의 위험이 뒤따랐었다. 계단의 폭이 협소(狹小)하고 경사(傾斜)가 심했던 까닭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철계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폭을 넓히고 경사를 누그러뜨린 나무()계단을 새로 설치했다는 것이다. 안전을 위해 행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30여 년 동안 등산객의 발이 되었던 철계단을 다시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못내 떨쳐버릴 수 없었다.

 

 

 

1440봉에서부터 남덕유산의 암릉구간이 시작된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살짝 내려섰다가 본격적으로 계단을 오른다. 계단은 끝도 없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계단의 폭이 넓이고, 경사(傾斜)를 죽인 탓에 그다지 힘이 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구태여 위만 보고 오를 필요는 없다. 가끔가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빼어난 자태의 경관(景觀)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먼 곳에 있는 산들이야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코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는 1440봉 하나만으로도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할 테니까 말이다.

 

 

 

눈요기를 즐기며 계단을 오르다보면 10분 후에는 또 다른 암봉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은 일명 남덕유산의 전망대로 일컬어지는 곳. 왼쪽 멀리 남덕유산 정상이 보이고 오른쪽 저 멀리 덕유산 주능선 상의 월성치 삿갓봉 무룡산 향적봉 등이 끝없이 이어진다. 마치 잘 그린 한 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를 눈앞에 펼쳐 놓은 듯하다. 그리고 눈을 아래로 깔기라도 할라치면 암릉을 걷거나 긴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다. 물론 그 뒤로는 월봉산과 거망산, 황석산은 물론이고 저 멀리 지리산까지 눈에 잡힌다.

 

 

 

두 번째 암봉에서 바라본 남덕유산은 의외로 육산(肉山)으로 나타난다. 조금 전의 풍경과는 전혀 딴판인 것이다. 그러나 막상 숲속으로 들어서면 바위로 이루어진 산임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대부분의 산길이 바위나 너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암봉에서 25분 남짓 걸으면 드디어 남덕유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커다란 정상표지석 하나가 외롭게 지키고 있는 남덕유산의 정상은 커다란 돌덩어리이다. 그러나 정상어림을 제외하고는 의외로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덕유산 정상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지나가는 분수령(分水嶺). 이 산줄기는 금강과 낙동강의 수계(水界)를 이루며 서남쪽으로는 육십령, 덕유주능선쪽으로는 백암봉으로 이어진다. 이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정상에 서면 다시 한 번 사위로 조망(眺望)이 탁 터진다. 우선 용틀임하는 듯한 덕유산의 연봉들이 장쾌하게 이어지고, 반대편에는 육십령으로 넘어가는 백두대간의 내리막 능선이 선명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남동쪽 멀리 천왕봉에서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이 아련하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을 풍광(風光)이다.

 

 

 

 

정상에서 하산을 서두른다. 정상에서 잠깐 내려가다 갈림길(이정표 : 삿갓재 대피소 4.2Km/ 남덕유산 0.1Km)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꺾는다. 이어서 오른쪽 삿갓재대피소 방향으로 5분 조금 못되게 더 내려가면 또 하나의 갈림길(이정표 : 삿갓재대피소 4.0Km/ 육십령 8.5Km/ 남덕유산 0.3Km)이 나온다. 이곳에서 왼편은 서봉으로 가는 길, 하산길인 월성치로 가려면 당연히 오른편 삿갓재대피소 방향으로 내려서야 한다.

 

 

 

 

서봉갈림길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30분 정도 내려서면 월성치(이정표 : 삿갓골재대피소 2.9Km/ 황점마을 3.8Km/ 남덕유산 1.4Km)에 이르게 된다. 월성치는 사거리로서 오늘 우리가 하산코스로 삼으려는 황점방향 외에도 왼편으로 길이 하나 더 있다. 전북 장수 계북면 양악리로 이어지는 토옥동 계곡길이다. 토옥동 계곡은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도 다닐 정도로 유순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지만 아쉽게도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비법정 탐방로'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월성치에서 월성계곡으로 내려서면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가파른 경사(傾斜)의 산길을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서면 샘(이정표 : 황점마을 3.5Km/ 월성재 0.3Km, 남덕유산 1.7Km)이 하나 나온다. 연마(鍊磨)된 석판(石板)으로 깔끔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 역시 국립공원답다. 그러나 물맛은 별로, 생각보다는 달지도, 그렇다고 시원하지도 않았다.

 

 

 

샘터를 지나서도 산길은 가파르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길은 길게 이어진다. 내려서는 게 쉽지 않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30, 무릎에 통증이 시작될 즈음이면 저만큼 아래에 나무계단이 보이고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드리어 월성계곡(이정표 : 황점마을 2.2Km/ 월성재 1.6Km, 남덕유산 3.0Km)에 내려서게 된 것이다.

 

 

 

 

월성계곡에 내려서면 일단 수월해진다. 길은 넓어지고 반반하다. 거기에다 바닥까지 흙이다 보니 걷는데 여간 편하지 않다. 이제까지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오느라 고생했던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싶다. 하늘을 찌를 듯이 위를 치솟고 있는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 숲에서는 코끝을 찡긋거려보기도 하고, 수시로 변화를 주고 있는 길가의 계곡풍경을 눈요기 삼으면서 걷다보면 20여분 후에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만나게 된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이 맑으니 이쯤에서 산행에서 흘린 땀을 씻으면 제격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황점마을

옷을 입은 채로 물속에 뛰어들고 본다.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건만 월성계곡의 물은 차갑기 짝이 없다. 산이 크고 깊은 덕분일 것이다. 목욕을 끝내고 길을 나서면 8~9분이면 37번 지방도에 이르게 된다. 아침에 산행을 시작했던 영각사에서 들어오는 도로이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다시 5~6분쯤 더 걸으면 산행이 종료되는 황점마을이다. 황점마을은 옛 이름이 삼천동(三川洞)이다. 조선조 때 쇠가 난 곳이며 지금은 청소년 여름 휴양지와 민박촌으로 개발되어 있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이 걸렸다. 몸을 씻는 등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20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