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암산(宗岩山, 547m)-함박산(501m)

 

산행일 : ‘15. 12. 8()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영산면·도천면·부곡면과 밀양시 무안면의 경계

산행코스 : 영산석빙고칠성암함박산약수작은동굴함박산512종암산활공장삼거리정자쉼터레이크힐스 호텔부곡(산행시간 : 3시간 50)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함박산과 종암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종암산 정상에 있는 몇 개의 바위를 제외하면 바위다운 바위하나 구경하기 힘들 정도이다. 산세(山勢)가 보잘 것이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거기다 512m봉과 종암산 정상에서 약간 시야(視野)가 터지는 것을 제외하면 조망까지도 보잘 것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많은 편이다. 이는 산 말고도 또 다른 뭔가가 있다는 증거이다. 그게 바로 함박산 약수부곡온천이 아닐까 싶다. 산행을 나서기 전에 물맛 좋기로 소문난 약수로 목을 축이고, 보드라운 흙길에서 산책 같은 산행을 마치고 난 후에는 따뜻한 온천수로 피로를 싹 씻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홍예교(虹霓橋)와 석빙고(石氷庫) 등의 유적지까지 둘러볼 수 있으니 이만한 산행지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영산석빙교(창녕군 영산면 교리 산10-2)

중부내륙고속도로(옛 구마고속도로) 영산 I.C에서 내려와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좌회전 영산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다가 영산면사무소 앞에서 우회전, 면사무소 뒤 연지못가에서 다시 우회전, 이어서 남산호국공원 앞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잠시 후 영산석빙고에 이르게 된다. 산행들머리이다. 석빙고 뒤에 보이는 바위산은 영취산일 것이다.

 

 

 

보물 제1739호인 영산 석빙고(靈山 石氷庫)는 추운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더운 여름철까지 보관하던 얼음 창고(길이 10m, 높이 3.35m)’로서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 수 없고 그 규모로 보아 18세기 후반으로 추정할 뿐이다. 조선 후기의 읍지인 여지도서에 따르면 현감(縣監)이었던 윤이일(尹彛逸 : 영조 때의 문신)이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문쪽이 높고 그 반대쪽이 낮은 봉분형으로 지어졌는데, 봉토 주변에는 자연석을 쌓아 둘레돌(護石)을 돌렸고 봉토 정상에는 두 곳에 구멍이 있는데 배기공(排氣孔)인 듯하다. 문은 지표(地表)에서 한 단 낮은 곳으로 내려가게 된 석계(石階) 끝에 있으며 옹벽(擁壁)은 큼직한 돌 세 벌을 쌓아 주변을 정리하였다. 거칠게 다듬은 거대한 돌로 벽을 쌓고 세 틀의 홍예를 바깥쪽으로 내어 판석을 덮어 공간을 차단하였고 앞뒤 벽은 그에 따라 축조되었다. 참고로 이 시설은 앞으로는 영취산을 마주보고 뒤로는 개울을 등지고 있는 지형에 위치한다. 지금은 상류에 제방을 쌓아 개울의 물이 말랐지만 옛날에는 이곳에 물이 많아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기에 용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석빙고로 가는 길에 영산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하나가 보인다. 조선 정조 때인 1780년에 석수(石手) 백진기가 축조(築造)한 만년교(萬年橋)라는 돌다리이다. 친절하기 짝이 없는 산행대장이 차를 멈추더니 둘러보고 오란다. 뭔가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어 하는 그녀였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 그녀가 보물(564)로까지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홍교(虹橋 : 양끝은 처지고 가운데는 둥글고 높이 솟아서 무지개처럼 보이는 다리)인 이 다리는 홍예(虹霓)의 넓이 110에 높이 500, 넓이가 450인데. 남천에 가설된 다리라고 해서 남천교라고도 한다. 마을을 끼고 흐르는 하천 양쪽의 자연암반 위에 화강석으로 반원형의 홍예를 구축하고, 그 위에 둥근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다음 맨 위에 흙을 깔아 길을 만들었다. 다리의 상승각도가 원만하며 다리의 앞뒤를 연장하여 양안에 자연석을 쌓아 만든 석축 통로와 연결했다. 지금도 주민들이 통행로로 사용하고 있다. 이 다리는 선암사 승선교·벌교홍교와 함께 희귀한 유구인 동시에 조선 후기 남부지방의 홍예다리 축조기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석빙고의 오른편으로 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왼편에 나타나는 영취산의 멋진 자태에 감탄하면서 15분가량 오르면 함박산약수(향토문화경승지 제19)’가 나타난다. 물맛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약수(藥水)이다.

 

 

영산약수또는 작약산약수로도 불리는 이 약수는 한국관광공사가 꼽은 전국 청정약수 7선 중에서도 첫손에 꼽힌 곳이다. 경북 청송 달기약수와 강원 인제 개인약수 등 전국적으로 유명한 약수터들을 앞질렀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의 물맛이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또한 이 약수는 8세기 중반 신라 경덕왕 때 발견된 것으로 전해져 전국 약수터 가운데 역사가 가장 오랜 곳이기도 하다. 함박산 약수에는 홀어머니와 아들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경덕왕 때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효심 깊은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이 함박산에 와서 나무를 한 짐 해두고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불렀다. 꿈에서 깨어 노인이 부르던 곳으로 가보니 바위틈에 함박꽃이 피어 있고 그 밑에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이 물을 담아가 어머니에게 드려 마시게 했더니 오랜 속병이 사라졌다고 한다. 약수로 목을 축여본다. 다른 유명 약수터에서 맛보던 탁 쏘는 맛을 기대하면서이다. 하지만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시원하고 달게 느껴진다는 점 외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셔온 물맛과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물도 철분을 함유하고 있기는 하단다. 비록 여느 약수처럼 톡 쏘는 맛은 없지만 말이다. 하여간 옛 군지(郡誌)에는 물이 향기롭고 맛이 달다. 마시면 체증을 내리는 데 효험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제대로 마신 셈이 된다. 주말 내내 마셔댔던 술로 인해 그동안 속이 거북했었기 때문이다.

 

 

약수터 옆에 약수사라는 작은 사찰(寺刹)이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과 산영각(2), 그리고 요사채가 전부인 이 사찰은 불교조계종 삼화불교(또는 율종조계종)’ 소속으로 누가 언제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속 종단(宗團)1989년에 설립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역사가 오래될 것 같지는 않았다. 참고로 불교조계종(佛敎曹溪宗) 삼화불교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소속되지 않은 교단으로 국내에서 가장 큰 불교 교단인 대한불교조계종과는 완전히 다른 종단이다. 또한 두 종단은 대한불교조계종명칭과 표장 등을 놓고 법정 분쟁이 있었으며, 그 결과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승소하여 명칭 및 표장 사용금지 강제조정판결을 얻어낸 바 있다.

 

 

등산로는 약수사의 산영각 뒤로 열린다. 산영각 옆에 세워진 '종해당대종사행적비'와 체육시설 사이에 담장이 처져있는데, 산길은 담장 옆으로 나있다. 잠시 후 이정표(함박산 정상0,8Km/ 영산호국공원1.4Km)가 있는 삼거리, 왼편으로 향한다. 오른편 영산호국공원 방향으로 진행할 수도 있으나 돌아서 가는 길이니 참조할 일이다.

 

 

산행은 처음부터 가파르게 시작된다. 통나무계단이라도 놓여있기에 망정이지 그것도 아니었더라면 오르기가 만만찮았을 정도로 가파르기 짝이 없다. 길은 외길, 좁디좁은 오솔길이다. 이런 길에서는 앞 사람의 발뒤꿈치만 쫓을 수밖에 없다. 길이 하도 좁아서 추월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침 앞서가는 일행의 속도가 엄청나게 느리다. 그런데도 앞질러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를 않는다. 이런 때는 여자가 남자보다 용감한가 보다. 버티지 못한 집사람이 앞사람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숨이 턱에 차게 30분 가까이 치고 오르면 주능선 삼거리(이정표 : 함박산정상0.25Km, 종암산 3.4Km/ 영산호국공원1.5Km/ 약수터0.6Km)이다. 오른쪽은 호국공원 방향이고 답사로는 왼쪽으로 꺾어 능선을 따라 오른다.

 

 

능선에 올라서고 나서도 산길의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가파른 산길이 그 기세를 누그러뜨릴 줄 모른다는 얘기이다. 길의 폭이 아까보다 조금 더 넓어진 게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일 것이다.

 

 

10분 후 무덤에 이른다. 명당(明堂)으로 알고 묘()를 쓴 조상들이야 어떨지 몰라도 때맞춰 이곳까지 올라와야만 하는 후손들로 봐서는 달갑지만은 않겠다. 후손들에게만은 산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덜어주려고 가족납골당(家族納骨堂)을 조성했었던 나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나저나 무덤 옆에 네모반듯한 바위 하나가 보인다. 무덤을 지키는 수문장(守門將)이라도 되는 양 늠름하기 짝이 없다. ‘당신이 썰던 깍두기 같이 생겼네?’ 곱게 썰지 못하는 솜씨를 빗대어 놀리는데도 집사람은 그저 웃기만 한다. 하긴 저런 모습에 반해 인생의 반려자(伴侶者)로 맞았는데 그 성격이 어디로 가겠는가.

 

 

무덤에 이어 나오는 폐 헬기장을 지나면 함박산 정상이다. 두세 평 남짓의 좁은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직육면체(直六面體)의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을 뿐 다른 특별한 게 하나도 없다는 얘기이다. 물론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함박산은 이 산에 작약이라 하는 함박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본래 작약의 꽃을 함박꽃이라 부른다. 목본식물인 함박꽃나무라는 산목련의 꽃과 초본식물인 작약꽃이 모두 함지박을 닮았기 때문에 통틀어 함박꽃이라 부르는 것이다.

 

 

 

종암산으로 향한다. 안부까지 잠깐 아래로 내려섰다가 다시 한 번 치고 오르면 5분쯤 후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하지만 이곳에서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바로 위에 있는 또 다른 전망바위에서 시야가 더 넓어지기 때문이다. 건너편에 높고 낮은 산들이 줄줄이 겹쳐서 나타난다. 짙게 낀 연무(煙霧) 때문에 어느 산이 어느 산인지 알 수 없으나 화악산이나 도덕봉, 석천산 등 창녕군에 위치한 산들이 아닐까 싶다.

 

 

 

전망바위의 바로 위에서 낯익은 뭔가가 눈에 띈다. 심심찮게 산행을 함께 이어오고 있는 서래야 박건석선생께서 붙여 놓은 정상표시 코팅(coating)이다. ‘뾰족봉(512m)’이라고 적어 놓았지만 글쎄다. 난 함박산과 관련된 자료들에서 그런 지명을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2009년 이후 그런 지명을 쓰는 사람들이 가끔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512m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사납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길인데도 안전시설은 눈에 띄지 않는다. 눈이 쌓인 겨울철에는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거기다 흙산의 특징대로 볼거리까지 없다. 내려가는 길에 만나는 바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바위손까지 볼거리로 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15분쯤 가파르게 떨어지면 안부에 내려서게 된다. 뜻밖에도 이곳에서 함박산을 거치지 않고 온 다른 일행들을 만난다. 비록 이정표(종암산 2.15Km/ 함박산 1Km)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약수터 근처에서 이곳으로 연결되는 산길이 나있었던 모양이다. 길을 잘못 들어 함박산을 놓쳤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갈라지는 지점에 이정표가 없었을 게 뻔하다.

 

 

안부를 지나면서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오르막길이지만 아까 함박산에 오를 때와 비교한다면 이건 가파르다고 얘기할 수도 없다. 거기다 꺼리까지 짧다보니 15분이면 송전탑(送電塔)이 있는 봉우리(475m)에 올라서게 된다.

 

 

산을 오르다보면 가끔 왼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나뭇가지 사이로 영취산과 병봉(650m)을 잇는 산릉이 또렷하고, 그 앞 산기슭에는 병풍(屛風)처럼 둘러쳐진 산등성이를 울타리 삼아 올망졸망한 인가(人家)들이 터를 잡고 있다. 산골마을이 구계리이다. 시원스럽지는 않지만 뒤편도 열리기는 한다. 조금 전에 지나온 512m봉이 나뭇가지 사이에서 슬그머니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져버린다. 뾰쪽하게 생긴 것이 한국의 마터호른(Matterhorn)’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그래서 호사가들이 뾰족봉이란 이름을 붙였나 보다.

 

 

산길은 475m봉의 봉우리를 피해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시킨다. 불시에 일어날 수 있는 감전(感電)사고 등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송전탑에서는 철탑의 아래를 통과하고 있다. 내 짧은 앎이 들통이 나는 순간이다.

 

 

 

송전탑의 아래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위로 향한다. 오르는 길에 이정표(종암산 1.65Km/ 함박산 1.5Km)에서 오른편으로 희미한 오솔길 하나를 나뉘어 보내고, 왼편으로 크게 방향을 틀면 잠시 후 490m봉에 올라선다.

 

 

490m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많이 유연해진다. 봉우리 사이의 골이 그다지 깊지 않다는 얘기이다. 능선을 따라 조금 더 진행하면 불조심입간판이 보인다. 좀 생뚱맞기는 하지만 산에서 불조심은 필수이겠기에 고개를 끄떡이며 지나친다.

 

 

 

불조심 입간판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472m봉이다. 정상에는 삼거리봉(490m)’이라고 적힌 정상표시코팅지가 매달려 있다. 박건석 선생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번의 작명(作名)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나뉘는 길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길이 나뉘는 삼거리이다 할지라도 삼거리봉이라는 공식적인 이름까지 붙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그럴 경우 오늘 산행을 하고 있는 코스만 해도 수많은 삼거리봉들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높이 또한 맞지가 않다. ‘부산일보의 지도는 이곳을 472m봉으로 표기하고 있는데도, 그는 490m로 적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방금 전에 지나왔던 이정표가 있던 봉우리에 붙이려다 위치를 잘 못 찾았지 않았나 싶다.

 

 

 

472m봉에서는 제법 가파르게 아래로 떨어진다. 진행방향의 나뭇가지 사이로 종암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어서 6~7분 동안 작은 오르내림을 두어 번 하고 난 뒤에 다시 오름길이 시작된다. 종암산을 향한 오름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번의 오름길은 제법 가파르다. 거기다 낙엽까지 두텁게 깔려있어 미끄럽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오르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이다. 그런 오름길은 20분 이상을 계속된다. 체력이 고갈되어가는 산행 막바지이기에 부쩍 힘이 드는 구간이다.

 

 

힘든 오르막길이 끝나면 저만큼에 이정표(화왕산15.2Km, 전망좋은 곳 0.1Km/ 부곡온천2.4Km/ 함박산3.1Km)가 보인다. 왼편 화왕산 방향으로 간다. 그쪽 방향의 전망 좋다는 곳이 바로 종암산 정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상을 둘러본 뒤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또 다른 이정표(전망좋은 곳/ 화왕산15.1Km/ 부곡온천2.5Km)를 만난다. 이곳에서 왼편에 보이는 커다란 바위 무리가 바로 종암산 정상이다.

 

 

 

정상은 커다란 바위들로 병풍(屛風)을 쳐놓은 것 같은 형상이다. 그 바위들 사이에다 데크로 놓아 전망대를 겸하게 했다. 정상석은 귀엽기 짝이 없다. 데크를 둘러싸고 있는 바위 중 하나에다 얼굴 정도 크기의 둥그런 돌판(石板)을 붙여 놓았다. 뭔가 예술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건 꼭 문화예술센터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참고로 창녕군지에는 덕암산의 서쪽 줄기로, 이 산에 종지(작은그릇)처럼 생긴 종지바위가 있어 종암산이라 했다고 기록돼 있다. 정상의 바위들이 종지처럼 생겼다는 얘기이다.

 

 

 

비록 한쪽 방향으로만 시야가 열릴 뿐이지만 정상에서의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볼만한 산들은 다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짙은 연무(煙霧)에 둘러싸인 산하(山河)는 그 자태를 드러낼 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다른 이들의 눈에 들어왔다는 풍경들을 옮겨본다. ‘산정에 자리한 바위에 올라서면 화왕산을 비롯한 열왕지맥의 산봉우리들은 물론이고, 주변에 올망졸망 솟은 산과 산록에 터를 잡은 마을들의 조망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삼거리로 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이번에는 부곡온천 방향이다. 그런데 앞서가던 집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종암산이 아니고 전망좋은 곳이냐는 것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엉뚱한 발상이다. 자기들이 만든 지도에도 종암산으로 표기했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만났던 이정표들도 하나같이 종암산으로 표기했었다. 그런데도 갑자기 종암산이라는 이름을 내버리고 전망좋은 곳이라는 엉뚱한 지명을 표기해 놓은 것이다. 행정(行政)에는 일관성(一貫性)’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는 집행의 상대방이 다음에 펼쳐질 행정의 내용을 미리 예측 가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등산로 정비 또한 행정의 하나이겠기에 하는 말이다.

 

 

하산 길, 앞서가던 집사람이 엉덩방아를 찧는다. 참나무 잎들이 깔린 바닥이 생각보다 미끄러웠던 모양이다. 아까 정상에서 추락주의라는 안내판을 보며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이곳 종암산이 전형적인 흙산인데다 경사까지도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집사람이 엉덩방아를 찧는 것을 보니 조심하기는 해야 하는 모양이다.

 

 

능선을 걷다보면 가끔 벤치들이 놓여 있곤 한다. 벤치의 앞이 트여 있음은 물론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다 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건너편에 있는 도덕봉이 눈에 들어오지만 생김새는 아까 오는 길에 보아왔던 영취산에 비하면 그 격이 한참 떨어진다.

 

 

덕암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을 따라 난 하산 길은 한마디로 곱다. 나이 먹은 소나무들이 줄줄이 늘어선 숲 아래로 난 산길은 호젓하면서도 운치가 있다. 짙은 솔향이 코끝을 간질이는 건 당연하다. 거기다 경사까지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반반하니 걷는 것 또한 산책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이런 길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 쉼터마다 쉬고, 시야가 터지는 곳마다 멈춰 서서 조망을 즐긴다. 마침 주어진 시간마저도 한없이 여유롭다.

 

 

하산을 시작한지 25분쯤 되면 오른편 사면(斜面)이 활짝 열려있는 지점에 이른다. 한때 행글라이더 활공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곳이다. 하지만 기상관측시설 등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곳에는 이정표(부곡온천1.5Km/ 덕암산1.7Km/ 화왕산16.3Km, 종암산 1.2Km) 외에도 부곡온천 일대의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이 일대 산들의 위치에 대한 구도를 잡을 수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갈 일이다. 이곳에서는 오른편 부곡온천 방향으로 내려선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큰고개가 나온다. 큰고개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도 부곡온천단지로 갈 수 있다. 더 가면 덕암산까지도 산행이 가능하다.

 

 

오른편 지능선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급할 것 없이 고도(高度)를 낮추어오던 주능선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산길이 넓기 때문에 내려서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활공장에서 내려선지 10분 남짓 지나면 삼거리에 이른다. 정자(亭子)와 체육시설을 갖춰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큰고개를 경유해서 내려오는 길이다.

 

 

산행날머리는 레이크힐스 호텔부곡(부곡온천단지)

정자에서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얼마쯤 내려갔을까 왼편으로 오솔길이 나뉜다. 조금 더 빨리 부곡온천단지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왼편으로 가는 것이 좋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임도를 따른다. 구태여 서두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청룡암 입구를 지나면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에 자리 잡은 정자(亭子)가 나온다. 버스를 세워놓은 호텔주차장까지는 이곳에서도 10분 가까이 더 걸어야하지만 오늘 산행은 이곳에서 끝났다고 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쉰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50분이 걸린 셈이다.

 

에필로그(epilogue), 날씨가 추우면 추울수록 온천욕이 주는 만족감은 더욱 커진다. 요즘의 날씨가 겨울철치고 따뜻하다고는 하지만 그런 만족감이 사라지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산지점이 마침 온천으로 유명한 부곡이니 온천욕에 대한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접고 식당으로 들어서고 만다. 산악회 버스의 출발시간에 맞추려면 밥부터 먹어놔야 했기 때문이다. 한때 한국에서 온천이라고 하면 부곡 온천을 일컫던 때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전국에서 수온이 가장 높은 온천수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지만 옛날에 비해 그 명성은 많이 퇴락되었다. 지금은 도심에서조차 쉽게 온천욕을 할 수 있을 지경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부산·경남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온천욕 장소로 떠올리는 곳이 바로 부곡온천일 것이다. 참고로 조선시대 이전부터 영산온정(靈山溫井)이라고 불렀다는 이 온천의 탕온(湯溫)5579, 천질(泉質)81.7%의 황()을 함유하여 관절염, 피부병, 신경통을 비롯한 여러 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1977년 주변 일대가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집현산(集賢山, 577m)-부봉(진주 집현산, 548m)-장군봉(549m)

 

여행일 : ‘15. 11.28()

소재지 : 경남 산청군 생비량면·신안면과 경남 진주시 미천면·집현면·명석면의 경계

산행코스 : 생계량유래비집현산(영봉)삼면봉무너미고개오봉부봉월명암삼거리장군봉(동봉)까치봉→도리천 쉼터(산행시간 : 3시간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집현산은 말발굽 모양의 일곱 개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비록 600m에도 못 미치는 작은 봉우리들이지만 각각의 이름까지 갖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산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먹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정상인 상봉이나 까치봉 중 어디부터 시작하더라도 일단 첫 번째 봉우리까지만 오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산행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무너미고개에서 삼봉으로 올라가는 곳 말고는 일곱 개의 봉우리들이 모두 부드러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얘기이다. 이름에 얽힌 스토리텔링이라도 해가면서 일곱 개의 봉우리를 넘다보면 산행은 이미 종착역에 이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대로 산세는 그다지 내세울 것이 없어 보인다. 거기다 부봉을 제외하고는 조망(眺望) 또한 내세울만한 게 없다. 한번쯤은 몰라도 자주 찾을 매력은 주지 못한다는 얘기이다.

 

산행들머리는 대둔마을(산청군 생비량면 도리)

통영-대전고속도로 단성 I.C에서 내려와 20번 국도를 타고 합천방면으로 잠시 달리면 장란마을(생비량면 도전리)이 나온다. 이곳 버스정류장(주유소)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장란교()를 이용해 양천을 건너자마자 생비량유리배가 나온다. 산행 들머리이다.

 

 

생비량유래비(生比良由來碑)’는 마을이 생긴 유래를 새겨 놓은 빗돌(碑石)이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비량(比良)이라는 도승(道僧)이 집현산에 절을 짓고 포교를 하며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 도승이 입적(入寂)한 뒤 마을 사람들이 '그의 덕()이 살아 있는 곳'이라고 해서 그의 이름 앞에 '()' 자를 붙여 마을 이름을 '생비량'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을 적은 빗돌이 바로 '생비량유래비'이다.

 

 

생계량유래비 건너편에 집현산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오늘 산행은 부산일보산행팀에서 걸었던 코스를 그대로 따라볼 예정이다. 그들이 작성한 지도를 참조할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현지 사정은 현지인들이 더 잘 아는 법이니 산청군에서 세워 놓은 등산안내도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일이다. 그리고 현지에서 매겨 놓은 봉우리의 순서를 따르기로 한다. 집현봉을 7으로 삼아 역순(逆順)으로 돌아보겠다는 얘기이다. 그래야만 지도에 나타나 있는 오봉삼거리가 맞는 표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생비량유래비맞은편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등산안내도에서 왼편으로 약 20m쯤 떨어진 곳에서 시작되는데,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農路)이다.

 

 

농로를 따라 150m쯤 들어가면 길이 나뉘지만 개의치 않고 직진한다. 사용하지 않는 벌통들이 몇 개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는 빈집(廢家) 방향이다. 들머리에 국제신문의 근교산 취재팀에서 매달아 놓은 시그널(signal)의 보이니 참조한다.

 

 

폐가 옆을 지나면 밤나무 밭이 나타난다. 길은 밤나무들 사이로 나있다. 작업용 농기계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든 탓인지 길은 생각보다 너른 편이다. 길은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면서 위로 향한다. 산자락의 한 면()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는 밤나무 밭이 그냥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쯤 후면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왼편으로 또 다른 길이 보이는 것을 보면 다른 지점에서 올라오는 길이 별도로 있는 모양이다.

 

 

능선에 올라서면 길은 순해진다. 아니 고와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보드라운 황톳길만 해도 언감생심(焉敢生心)인데, 그 위에 솔가리(소나무 落葉)들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거기다 경사까지 거의 없다. 이런 길을 보고 어찌 곱다고 하자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일단 능선에 올라섰다하면 다음부터는 거의 외길 수준이다. 이후 무덤 몇 기를 지나고 나면 염소중탕이라는 간판이 걸린 철조망을 만난다. 약국에서 걸어 놓았는데 아마 그들이 제조하는 약을 보약(補藥)이라며 홍보하고 있는 모양이다. 산길이 하도 편하다보니 산행이 거의 산책 수준이 된다. 그래서 집현산(集賢山)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나 싶다. '어진 이들이 모여(集賢)' 산을 만들었다면 당연히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시매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쳐지는 삼거리(이정표 : 정상1.97Km/ 시매1.05Km/ 오리골1.23Km)를 만난다. 이정표를 살펴보다가 뭔가 놓쳤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렇다. 살마재를 지나쳐버린 것이다. 하지만 오는 길에는 분명 고갯마루 같은 곳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지도에는 이곳 살마재에 이르기 전에 살마재가 있다고 표기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이상한 일이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두 번째 이정표(현동/ 대둔)를 지나면서부터는 버겁다 싶을 정도로 가팔라져 버린다.

 

 

가파른 오르막길과의 힘겨운 싸움을 10분 남짓 하다보면 송전탑(送電塔)이 나온다. 이 부근에서 능선은 그 기세(氣勢)를 잠깐이나마 누그러뜨린다. 하지만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잠시 후 다시 가팔라지기 때문이다.

 

 

한숨을 채 내쉬기도 전에 능선은 다시 원상으로 돌아가 버린다. 아니 오히려 더 가팔라졌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거기다 비록 잠깐이지만 바윗길도 나타난다. 제대로 된 바위 하나 구경하기 힘든 산에서 만난 귀한 손님이다. 언제부턴가 주변의 나무들이 소나무에서 오리나무로 바뀌어있다. 그러고 보니 두 종류 외에는 다른 나무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는 집현산이 오리나무와 소나무가 주종인 단순한 식생(植生)으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가파른 오르막길과의 싸움은 제법 오래 계속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간 중간에 잠깐씩이나마 완만한 구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25분 정도를 오르면 세 번째 이정표(정상 0.34Km/ 대둔 3.25Km)를 만난다. 신안면과 생비량면의 경계이다.

 

 

갑자기 기세를 죽인 능선을 따라 7분쯤 더 가면 능선이 약간 튀어나온 지점에 세워진 삼각점(삼가24)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실제의 집현산이라고도 한다. 삼각점이 세워진 것을 증거로 들면서 말이다. 볼품이 없다는 이유로 정상을 옮겨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산청군에서 정상석을 세워 놓은 지점을 정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눈짐작으로도 정상석이 세워진 곳이 이곳보다 더 높은 것 같고, 실제로도 정상석에 적혀있는 높이(577m)가 삼각점(572.2m) 보다 더 높기 때문이다.

 

 

삼각점에서 정상은 지척이다. 정상은 특이하게도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멀리서 볼 때 상여를 닮았다고 해서 상여바위라는 이름을 갖고 있단다. 하여튼 다른 산들에서는 바위의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왜소하지만 바위가 하도 귀한 집현산이기에 듬직하면서도 생김새 또한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누울 자리를 보고 누워라고 했나보다. 정상에는 커다란 정상표지석과 이정표(현동 2.3Km/ 대둔 3.59Km) 외에도 나무데크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물론 바위의 위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이 지났다. 참고로 집현산은 칠평산(七坪山)이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산신령이 거처하는 산이라 해도 7평이면 족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집현산은 역사적으로는 동학혁명과 임진왜란의 아픔을 간직한 산이기도 하다.

 

 

 

전망데크까지 만들어 놓았음에도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보잘 것이 없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탓에 동쪽으로만 시야가 약간 열린다. 건너편의 장군봉과 구시봉 까치봉이 소나무들 사이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 뒤에 보이는 산들은 산성산과 자굴산, 한우산일 것이다.

 

 

정상(상여바위)의 뒤편, 그러니까 정상을 왼편에 끼고 돌아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면서 산행을 이어간다. 깊지 않은 안부로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서면 10분이 조금 못 걸리는 지점에서 제6봉인 삼면봉(三面峰, 562m)을 만난다. 산천군 생비량면과 신안면, 그리고 진주시 명석면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해서 삼면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밋밋하게 생긴 것이 산봉우리라기보다는 구릉(丘陵)으로 보는 게 더 옳을 것 같은 삼면봉에는 두서없이 쌓아올린 돌탑과 이정표(동전마을4Km/ 광제봉수대6Km/ 집현산 정상0.5Km)만 보일을 뿐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능선은 진양기맥(晋陽岐脈)과 만난다. 진양기맥이란 남덕유산에서 남동쪽으로 가지를 쳐 월봉산, 금원산, 기백산, 황매산, 산성산, 한우산, 자굴산, 광제봉 등을 일으키고 남강 유역인 진양호의 남강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159.1km의 산줄기를 말한다. 그 산줄기 중 일부(삼면봉에서 장군봉까지)를 오늘 걷게 되는 것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동전마을 방향으로 내려선다. 삼면봉을 지나면서 능선은 가파르게 고도(高度)를 낮춘다. 그리고 10분 후에는 안부 오거리인 무너미재(현동3.5Km/ 집현산)에 내려서게 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현동마을을 거쳐 산행을 시작했던 대둔마을에 이르게 되고.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른편으로 진행할 경우 솔기마을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삼봉으로 가는 능선과 솔기마을로 가는 길의 중간에 명석면으로 연결되는 길이 하나 더 있다.

 

 

 

무너미고개에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하나 있다. 또 다른 이정표에 적혀있는 지명(地名)에 대해서이다. 이정표를 보면 진행방향에 장군봉과 까치봉 그리고 반대방향, 그러니까 우리가 내려왔던 방향에다 부봉을 표기해 놓았다. 삼면봉을 부봉으로 표기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원래의 부봉은 제4봉 그러니까 진주시에서 집현산 정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봉우리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초행자들이 헷갈려할 것 같아 거론해 봤다.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서면서 산행을 이어간다. 무너미재를 지나면서 능선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그리고 10분 후에는 오봉(五峰, 526m)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제법 너른 언덕 모양으로 생긴 정상에는 정자(亭子)와 이정표(부봉0.3Km/ 명석각3.0Km, 홍지주차장 3.5Km/ 정상1.5Km, 광제산봉수대 7.0Km) 뿐이고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 코팅지가 이곳이 오봉의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곳을 삼봉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곳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곳의 지명에 관해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을 세 번째 봉우리, 삼봉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봉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아까 산행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산청군의 등산안내도는 물론이고 이곳 정상에 세워진 이정표에도 오봉삼거리로 표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봉과 제4봉인 부봉까지는 골이 깊지 않은 능선으로 연결된다.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넘어가는데도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거기다 능선에는 굵은 노송(老松)들이 들어차 아름다움까지 더해준다.

 

 

소나무 군락(群落)을 걷는다. 어른의 허리통보다 더 굵은 소나무들도 즐비하다. 숲 사이로 나있는 길 위에는 솔가리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보드라운 흙길 위에 솔가리까지 쌓이다보니 폭신폭신한 게 여간 아니다. 거기다 코끝을 간질이는 솔향은 짙기만 하다. 이런 걸 두고 웰빙(well-being)산행 또는 힐링(Healing)산행이라 할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발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 그저 휘적휘적 걷기만 하면 된다. 마음이 내킨다면 휘파람이라도 불면서 말이다.

 

 

오봉에서 10분 남짓 느긋하게 걸으면 드디어 제4, 즉 부봉(진주시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밋밋한 언덕 모양으로 생긴 정상은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시설물들이 세워져 있다. 커다란 정상표지석 외에도 제단(祭壇)과 산불감시초소, 거기다 산림욕에 대한 설명판은 물론이고 등산안내도는 두 개나 만들어 놓았다. 부봉에는 용()의 승천에 얽힌 전설이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오랜 옛날 도()를 닦기 위해 지상에 내려온 하늘의 용이 다시 승천하려 할 때 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승천하지 못하고 이승에서 고생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을 원망한 용은 가뭄과 질병으로 보복했다. 노인으로 변한 용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한 마을 청년이 100일 동안 기도하며 잘못을 빈 끝에 용의 저주를 풀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부봉에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집현산정상표지석이다. 아까 올랐던 상봉이 집현산의 정상인데도 불구하고 집현산을 자기네들 산이라고 여기고 있는 진주시에서 관내(管內)에 있는 부봉에다 또 다른 정상석을 세워 놓은 것이다. 그것도 부봉의 높이(548m)가 아닌 상봉의 높이(572m)를 표기해 놓았다. 하지만 이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행위이다. 진주의 읍지(邑誌)진양지(晉陽誌)’에도 진주의 산으로 소개되어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으니 우기는 것 자체를 나무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봉우리의 높이를 속이면서까지 우기는 것을 이해할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국제신문의 사람의 편협한 구획 관리와 달리, 산은 자연 그대로 의연하고 넉넉하다. 산에서 차별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물에서 낙락장송에 이르기까지 뭇 생명은 하나하나가 의미를 지닌다. 각기 다른 음색의 생명들이 대자연의 교향악을 연주하는 곳이 산이다.’이란 글을 떠올리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부봉에서의 조망(眺望)은 일품이다.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시원스럽게 트인다. 남쪽으로 남강의 물줄기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자굴산과 한우산이 그리고 남서쪽으로 진주시의 모습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을 경우에는 지리산과 황매산, 그리고 하동의 금오산까지도 보인다지만 연무(煙霧)로 인해 그저 거기에 있으려니 해볼 따름이다.

 

 

부봉 정상의 바로 아래에 정자(亭子)가 세워져 있다. 정자의 앞(이정표 : 집현산 동봉1.4Km/ 응석저수지(주차장)3Km/ 집현산50m)을 지나면 잠시 후 헬기장이 나온다.

 

 

 

길이 편하다보니 마음까지 여유로워지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색의 나래를 펴본다. 지금 난 산길을 걷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길을 등산로라 부른다. 등산로가 세상에 태어나기까진 여러 절차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마을과 마을, 고개와 고개를 잇기 위해 자연스레 열린 옛길들이 지금에 이르는 경우가 제일 흔할 것이다. 짐승에게는 그들만의 은밀한 길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좁고 낮은 길들이 산과 산을 이으며 실핏줄처럼 퍼져있다. 하지만 짐승의 길을 사람이 걷고, 사람의 길에 짐승이 나타나기도 한다. 당혹스럽지만 어쩌겠는가. 사람과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람과 짐승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 또한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늘 내가 걷는 이 길에는 짐승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전인수(我田引水)라고 비웃을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부봉에서 이어지는 완만한 내리막길을 따라 12분 정도를 내려오면 아홉재(이정표 : 응석사/ 장군봉)에 내려서게 되고,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다시 10분 정도 더 걸으면 월명암삼거리(응석사)에 이르게 된다. 이곳 삼거리에서 진양기맥과 이별을 고하게 된다. 이정표에는 응석사 방향을 나타내고 있으나 지도에는 길이 월명암으로 연결되고 있기에 월명암삼거리라고 표기했다.

 

 

 

월명암삼거리에서 장군봉은 금방이다. 세 번째 봉우리, 즉 삼봉인 장군봉 정상도 역시 널찍한 것이 봉우리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멋지게 생긴 노송(老松) 몇 그루가 버티고 있는 정상은 어른의 허리 높이 정도로 둥그렇게 돌담을 쌓고 그 안에다 장군봉집현산 동봉이라고 쓰인 정상석 두 개를 세워 놓았다. 두 정상석 사이에 돌로 제단(祭壇)을 쌓고 향로 등의 제기(祭器)들을 올려놓은 것을 보니 영험(靈驗)한 뭔가가 있는가 보다.

 

 

장군봉을 지나서도 능선의 형편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중간에 큰 봉우리나 깊은 골이 없이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는 얘기이다. 그 덕분에 난 중간에 있는 이봉(二峰)’ 즉 두 번째 봉우리인 구시봉(530m)을 놓치고 말았다. 봉우리가 나타날 때마다 세심하게 살피면서 진행했는데도 정상표지판을 보지 못한 것을 보면 구시봉이 주능선에서 어느 정도 비켜나 있었던 모양이다. 아쉽다. 하지만 미리 예습(豫習)을 해오지 못한 내 불찰이니 어쩌겠는가. 누군가 그랬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 다음부터는 산행을 나서기 전에 공부를 더 해야 할 것 같다.

 

장군봉을 내려선지 20분 정도가 지나면 돌무더기가 쌓여있는 일봉(一峰), 즉 까치봉에 올라서게 된다. 오는 길에 오른쪽 능선이 철망으로 막혀있던 걸로 보아 전에 목장이라도 있었나 보다. 까치봉은 봉우리라는 느낌보다는 능선 상에 약간 튀어나온 한 지점으로 보일 따름이다. ’까치봉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이정표(장군봉1.2Km)만 아니라면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일 것이다.

 

 

 

까치봉에서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내려서면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능선을 따라 또렷하게 산길이 나있으므로 길을 찾는데 어려움은 없다. 가팔라졌다가 완만해지기를 반복하는 능선을 따라 20분 가까이 걸으면 제법 너른 임도가 나온다. 그러나 임도는 철망(鐵網)으로 굳게 막혀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계속해서 능선을 탄다. 곧이어 집현산 등산로라고 쓰인 팻말이 나타나면서 산길은 능선을 벗어나 왼편 산비탈을 탄다. 이어서 산의 사면(斜面)을 따르더니 잠시 후 지능선에 이르러서는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해버린다. 오리나무 낙엽이 수북이 깔려있어 미끄럽기까지 하니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조심조심 15분 정도를 내려오면 산길은 다시 부드러워지고 이어서 밤나무 밭이 나타난다. 그리고 잠시 후 집현산 등산로라고 쓰인 이정표가 세워진 대나무 숲이 나타나면서 산길은 임도로 변한다.

 

 

산행날머리는 대둔마을 앞 도리천 쉼터

대나무 밭을 지나면 다음은 시멘트포장 농로가 도리천변에 있는 쉼터까지 마무리를 지어준다. 천변으로 나가는 길 왼편에 대둔마을이 보인다. 오늘 오른 집현산의 일곱 봉우리가 마치 말발굽 모양으로 벼를 베어버린 빈 들녘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풍수(風水)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참 좋은 곳에 마을이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그래서 이곳을 명당(明堂)으로 분류하고 있나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50분이 걸린 셈이다. 물론 서서히 걸은 결과이다.

 

천마산(天馬山, 527.8m)-능걸산(783m)-뒷삐알산(827m)

 

산행일 : ‘15. 10. 17()

소재지 : 경상남도 양산시 어곡동과 상북면 그리고 원동면의 경계

산행코스 : 감결마을성불암용고개천마산기차바위능걸산에덴밸리골프장채바우골만당(뒷삐알산)숯가마터내석마을(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세 산은 높이에 비해 긴 능선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거의 오르막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하게 이어진다. 또한 울창한 소나무와 떡갈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호젓한 산길은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육산(肉山)임에도 불구하고 기차바위라는 울퉁불퉁한 암릉을 품고 있다. 그것도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즐비한 아름다운 바윗길이다. 덕분에 사방으로 터지는 조망이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편안함과 호젓함, 거기다 짜릿한 긴장감까지 고루 즐길 수 있는 산이라는 얘기이다. 다만 뒷삐알산에서 내석마을로 내려가는 하산 길만은 예외이다. 낭떠러지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른 경사에다 중간에는 험상궂은 너덜겅까지 만난다. 특히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임도는 최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뒷삐알산을 꼭 찾아봐야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뒷삐알산까지 연계산행을 하는 것 보다는 능걸산에서 좌삼리 방향으로 하산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산행들머리는 감결마을(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경부고속도로 양산 I.C에서 내려와 언양방면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첫 번째 삼거리(상북농협 소토지점 앞)에서 좌회전 효충교()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GS칼텍스 새양산IC주유소앞에서 우회전하여 1Km 남짓 올라가면 산행들머리인 감결마을 뒤편의 사거리가 나온다. 길가에 산촌이라는 오리전문점의 커다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통도사를 정면으로 두고 왼편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산촌이라는 오리전문점의 입간판이 세워진 방향이다. 들머리에 있는 감결마을의 보호수(保護樹)를 참조하여도 될 일이다.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나무라며 무속(巫俗)행위를 금할 정도로 마을 사람들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고 있는 나무이다.

 

 

들머리에서 4분쯤 걸으면 산기슭에 아담한 암자(庵子)가 하나 나타난다. 성블암이다. 법당인 극락전(極樂殿)과 요사채로 이루어진 단출한 사찰이다. 사찰에 대한 안내판이 없어 어느 종단(宗團)에 소속된 사찰인지, 또 언제 누가 무슨 인연으로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물론 귀가해서 인터넷을 뒤져보아도 사찰에 대한 정보는 검색이 불가능 했다. 다만 암자 입구에 안치된 자그만 돌부처 주위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속신앙(巫俗信仰)의 성향이 강한 절간이 아닌가 싶다.

 

 

 

 

등산로는 암자의 외편 담 옆으로 나있다. 제법 너른 임도(林道)이다. 소나무 숲 아래를 6~7분쯤 걸으면 임도는 오른편으로 오솔길 하나를 나뉘어 보낸다. 천마산으로 가려면 이 오솔길을 따라야함은 물론이다.

 

 

 

오솔길로 들어서도 길의 형편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울창한 숲길은 여전하고 바닥 또한 보드라운 흙길이다. 다만 경사(傾斜)가 아까보다 약간 가팔라졌을 뿐이다. 그러나 이 또한 버거울 정도는 아닌데다가, 10분이 채 안되어 또 다시 완만한 능선으로 돌아서버리기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표현을 썼다.

 

 

그렇게 편안하게 고도(高度)를 높여가다보면 체육시설을 갖춘 쉼터에 올라서게 된다. ‘용고개라는 곳으로 산행을 시작해서 30분이 걸리는 지점이다. 오른편은 당산골이나 양산 C.C에서 올라오는 길이고, 천마산으로 가려면 곧장 능선을 따르면 된다.

 

 

용고개를 지나서도 산길은 편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상당히 가팔라졌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더 오르면 바위지대가 나오면서 시원스럽게 시야(視野)가 열린다.

 

 

발아래에는 '양산 C.C'가 내려다보이고, 그 뒤에 길게 누워있는 산들은 아마 천성산과 대운산일 것이다. 그리고 시선을 오른편으로 돌릴 때 나타나는 산봉우리는 금정산의 고당봉과 장군봉이 분명하다. 그 옆에 희미하게 나타나는 부분은 남해바다일 것이고 말이다.

 

 

 

전망대를 지나면 산길은 또 다시 평범해진다.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대로 색다른 볼거리가 없다는 얘기이다. 조망 또한 일절 없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걸으면 이정표(능걸산3.1Km/ 어곡동 삼성아파트3.3Km/ 소토리 감결마을2.6Km)가 있는 삼거리이다. 계속해서 능선을 따른다. 능걸산 방향이다. 호젓한 숲길을 15분 정도 더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능걸산/ 소석마을, 대연농장/ 대우마리나APT)가 나온다. 천마산은 이곳에서 오른편 소석마을 방향으로 가야 만날 수 있다. 천마산을 답사하고 난 다음에는 이곳으로 다시 되돌아와야 함은 물론이다.

 

 

삼거리에서 천마산으로 향한다. 초반에 잠깐 오름세를 유지하던 산길은 6분쯤 후에는 밋밋한 봉우리 위에다 올려놓는다. 527.8m봉이다. 서너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삼각점 하나만이 외로울 뿐 정상석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음은 물론이다. 다만 어느 산꾼이 삼각점 안내판에다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천마산 527)이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천마산 정상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런 특징이 없는 정상은 약간 솟아오른 능선 상의 한 부분으로 보일 뿐 정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조망(眺望)도 트이지 않음은 물론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10분 정도가 걸렸다.

 

 

천마산의 정상표지석은 이곳에서 조금 더 진행해야 만날 수 있다. 2~3분쯤 더 걸으면 그럴듯한 바위무리를 만나게 되고, 오른편에 바위를 낀 채로 몇 걸음 더 걸으면 양산시에서 세운 커다란 정상표지석이 보인다. 하지만 이곳은 천마산 정상이 아니라 520m봉이다. 양산시에서 엉뚱한 곳에다 정상석을 세워놓은 것이다. 527.8m봉이 천마산이라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국제신문이 어이없어 했던 것이 이해가 간다.

 

 

 

520m봉에서의 조망(眺望)은 한마디로 빼어나다. 고개를 들면 천성산과 정족산 등 양산의 명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저 멀리 금정산과 남해바다까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시선에 잡히는 것마다 아름답기 짝이 없다. 양산시청에서 이곳에다 정상석을 세워놓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풍경도 눈에 띈다. 왼편 산자락에 공사 중인 골프장이 바로 그것이다. 하필이면 산의 8부 능선까지 올라와서 저런 시설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울창한 소나무와 떡갈나무 숲으로 난 산길은 오르막을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완만하다. 거기다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호젓하기까지 하다. 담소를 즐기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여유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산악회에서 주어진 하산시간을 맞추려면 부지런히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거의 달리는 수준으로 말이다.

 

 

달리다시피 걷다보면 어느덧 이정표(능걸산 1.0Km/ 소토리 감결마을 4.7Km)가 있는 안부에 이르게 된다. 희미하기는 하지만 좌우로 길의 흔적이 보이나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모르겠다. 천마산이 나뉘는 삼거리에서 이곳까지는 25분이 걸렸다. 달리다시피 걸은 결과이니 꽤나 먼 거리로 봐야할 것이다.

 

 

안부갈림길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파르게 변한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가파르지 않나 싶다. 그렇게 17분 정도를 힘겹게 치고 오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 길은 바윗길을 지나지 않고 우회(迂廻)해서 정상 바로 아래까지 연결된다. 왼편은 물론 바윗길 능선이다. 그런데 이곳 갈림길에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바윗길 능선이 급경사(急傾斜)라서 위험하니 우회로를 이용하라는 경고판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우회로를 이용하지는 않는다. 생각보다는 수월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거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더욱 가팔라진다. 거기다 바윗길까지 섞여 있어 거칠기까지 하다. 하지만 오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힘이 조금 더 들 따름이다. 그렇게 10분쯤 오르면 거대한 암릉이 앞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조금만 조심하면 어렵지 않게 위로 오를 수 있다.

 

 

 

바위 위로 오르면 좌우로 시야(視野)가 뻥 뚫리면서 거칠 것 없는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서쪽 방향으로 매봉, 어곡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조망되고, 약간 남쪽으로는 멀리 금정산 봉우리들도 시야에 들어온다. 동쪽 방향으로의 조망도 시원스럽다. 아까부터 보아오던 천성산과 정족산 등 양산 소재의 명산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기차바위에서 내려다본 마당바위, 수십 명이 둘러앉아도 충분할 정도로 널따랗다. 능걸산에서 손꼽히는 명소 중의 하나이다.

 

능걸산 정상 방향으로 풍력발전기들이 보인다.

 

 

암릉으로 올라서면서 울퉁불퉁한 바윗길이 시작된다. ‘기차바위라는 이름의 암릉으로 정상 바로 아래까지 연결되는데,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사방으로 터지는 조망은 시원스럽기 그지없고 주변에 늘어선 기암괴석들은 등산객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한마디로 눈이 호사를 누리는 구간이란 얘기이다. 다만 그 길이가 짧은 것이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이런 바윗길은 손과 발을 한꺼번에 써가며 걸어야 한다. 다시 말해 `온몸 산행'인 셈이다. 암릉산행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짜릿한 긴장감이다. 거기다 일망무제(一望無題)로 펼쳐지는 조망은 부수적인 재미일 것이다. 이런 재미가 있어 사람들은 즐겨 바위산을 찾을 것이다.

 

 

바윗길에서 만난 기암(奇巖), 오른편 바위의 모양새가 족두리를 쓰고 있는 여자의 형상이란다. 그렇다면 반대편의 바위는 남자로 봐야 한다. 무릇 만물(萬物)은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루어야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두 바위가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이 마치 남녀가 입을 맞추고 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바위를 일러 키스바위라고 부른단다. 그리고 이곳을 지나가는 연안들은 이 바위에다 키스를 하고 가야 한단다. 그래야 서로의 사랑이 더욱 돈독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오른편 바위의 생김새가 조개에 더 가까워 보이니 문제다. 마치 조개가 입을 뻐금거리고 있는 형상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조개바위라는 또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웅장한 바위군을 두어 번 오르내리고 나면 아쉽게도 바윗길은 그 끝을 맺는다. 안전로프에 매달려 아래로 내려선 후, 이번에는 암릉을 오른편으로 우회하며 정상으로 향한다.

 

 

 

위로 올라가는 길에 만난 또 하나의 멋진 바위, 거북이가 바위를 기어 올라가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기차바위가 끝났다 싶으면 잠깐 동안 흙길이 선을 뵈고, 곧이어 능걸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대여섯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양산시에서 세운 커다란 정상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참고로 능걸산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진성여왕과 관련이 있다. 정상에서 남쪽 방향을 바라보면 햇살에 부처골의 계류가 반짝거리고 그 오른쪽의 신불산 공원묘지 사이에 큰 묘가 있는데, 아직 고증되지는 않았지만 진성여왕의를()으로 알려진 무덤이 있다. 이 무덤으로 인해 능걸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천마산에서 능걸산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가 걸렸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 서쪽의 영취산에서 재약산까지 영남 알프스의 일부가 하늘금을 이루고 있고. 그 앞의 매봉, 어곡산 줄기가 한 눈에 쏙 들어온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화엄벌을 비롯한 천성산 줄기가, 남쪽으로는 양산시내와 그 넘어 부산의 금정산 봉우리가 선명하다. 사방을 빙 둘러 어느 곳 하나 막힌 곳이 없다.

 

 

정상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에덴벨리 2.7Km/ 좌삼리 4.6Km/ 소토리 감결마을 5.7Km)로 나뉜다. 답사해야할 뒷삐알산으로 가려면 에덴벨리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은 경사가 거의 없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잠시 후 억새지대가 펼쳐진다. 길가에 세워진 안내판이 신불산 고산습지 보호구역임을 알려준다. , 담비 등 멸종위기 야생동물과 두꺼비, 고슴도치와 끈끈이주걱, 이삭귀개, 자주땅귀개 등 희귀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단다.

 

 

흐드러지게 핀 억새꽃밭 사이로 난 길을 따른다. 가을의 풍치가 물씬 풍기는 억새꽃에 눈 맞추며 걷다보면 습지삼거리를 만난다. 능걸산 정상에서 20분 남짓 걸리는 지점이다. 이정표 노릇을 했음직한 말뚝에는 방향표시는 보이지 않고 그저 습지삼거리라는 이곳의 지명만 알려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왼편은 아까 기차바위에서 보았던 풍력발전기가 서있던 능선으로 연결되지 않을까 싶다. 삼거리를 지나면 커다란 바위무더기가 길손을 맞는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위로 올라볼 일이다. 바위 위로 오르면 또 다시 멋진 조망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방금 지나온 능걸산 정상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고, 그 오른편으로 흐르는 능선에는 풍력발전기들이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다. 뛰어난 전망대라 할 수 있다.

 

 

 

바위전망대를 지나면 산길은 습지보호를 위해 쳐놓은 울타리를 따른다. 그러다가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그 아래 안부에 에덴벨리 골프장이 있다. 산길은 골프장의 필드를 피해 나있다. 골프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경사면(傾斜面) 아래의 수로를 따르도록 한 것이다. 어디서 날아올지도 모르는 골프공으로부터 등산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안부를 지나면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생각보다 더 가파르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드는 구간이다. 능걸산보다 지금 오르고 있는 뒷삐알산의 해발고도가 50m정도 더 높기 때문일 것이다. 산길은 그 가파름을 배겨내지 못하고 갈지()자를 그리면서 위로 향한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종내는 길가에다 로프까지 매달아 놓았다. 힘이 들 경우 붙잡고 오르라는 배려일 것이다.

 

 

오르막과의 힘겨운 싸움에 지쳐갈 즈음이면 삼거리를 만난다. ‘벨리삼거리이다. 이곳에 세워진 이정표도 그 수명이 거의 끝나가는 모습이다. 뒷삐알산 정상으로 가는 방향만 겨우 알려줄 뿐 나머지 방향의 표지판들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별 수 없이 떨어진 표지판으로 추론해볼 수밖에 없다. 왼편으로 갈 경우 별장부지가 나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별장부지가 어디를 지칭하는 것인지도 또한 그게 맞는 방향인지도 자신할 수는 없다.

 

 

벨리삼거리를 지나면 뒷삐알산의 정상은 금방이다. 10분이 안 되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경사 또한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완만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뒷삐알산 정상은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 삼각점까지 갖추었다. 거기다 용도(用度) 모를 깃대도 두 개나 보인다. 정상으로서의 품격을 갖추었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국제산악회에서는 이곳을 체바우골만당이라고 하고 있다. 인근 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이란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도 그 어원(語原)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제신문에서 유추했던 내용을 각색해서 옮겨본다. 먼저 체바우는 곡식이나 가루를 곱게 치는 기구인 체와 비슷한 산의 모양새에서 찾는다. 이때 '바우'는 바위의 방언(方言)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만당이라는 말은 산마루를 뜻하는 산몬댕이또는 산봉우리를 일컫는 만뎅이등의 영남지방 사투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이로 미루어보아 체를 닮은 바위가 있는 산봉우리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능걸산에서 이곳 뒷삐알산까지는 1시간 10분이 조금 못 걸렸다.

 

 

정상에는 나무로 대()를 만들어 놓았다. 용도가 궁금하다면 위로 올라보면 된다. 잡목(雜木)이 아랫도리를 잘라먹고 있는 조망을 확실하게 터주기 때문이다. 뒤로 골프장이, 앞으로는 염수봉과 오룡산이 보인다.

 

 

 

하산은 동쪽 방향, 즉 오른편으로 잡는다. 정상에서 왼편으로 난 길로 진행할 경우 영취산으로 가게 되니 주의한다. 완만한 길을 따라 3~4분쯤 걸으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643m봉을 거쳐 내석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국제신문이나 부산일보에서 진행했던 길은 이곳에서 왼편이다. 왼편으로 내려서면서 고난이 시작된다. 낭떠러지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스틱의 사용도 불가능하다. 그저 나뭇가지에 의지해가며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험난한 산길은 끝도 없이 계속된다. 무려 30분이나 계속되는 것이다. 참고로 이 지역 주민들은 643m봉을 뒷삐알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런 특징이 없다는 643m봉 보다는 해발고도가 200m가까이나 더 높고, 거기다 삼각점까지 세워진 체바우골망당뒷삐알산정상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그래선지 지역산악회에서도 그곳에다 정상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가파름에 질려 입에서 욕설이 나올 때가 되어서야 산길은 그 기세를 약간 죽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른 허리 높이로 둥그렇게 쌓아놓은 돌담을 만난다. ‘숯가마터란다. 뒷삐알산 주변이 참나무 일색이더니 이를 이용해서 숯을 구워냈던 모양이다. 숯 중에서는 참나무 숯을 상품으로 쳐주니 주민들의 생계수단이 되었을 테고 말이다.

 

 

가파름은 숯가마터를 지나면서 다소 누그러진다. 하지만 내려가는 게 수월해지지는 않는다. 내려서는 게 더 조심스러운 너덜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런 길을 15분 정도 더 걸어야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30분의 가파른 내리막길에다 15분의 너덜길을 더하면 45, 고난의 행군이 45분이나 이어진 셈이다.

 

 

산행날머리는 내석리 마을회관

임도에 내려서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자동차가 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널따란데다가 경사까지도 거의 없는 길이다. 하지만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 그 거리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거기다 눈요깃거리도 없다. 그저 앞만 보고 무작정 걸을 따름이다. 그렇게 30분 남짓 걸으면 저만큼에 내석마을이 보이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5시간20분 정도가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5시간 정도가 걸린 셈이다. 그리고 오늘 걸은 전체 거리가 14.5이니 시간 당 3Km씩을 걸은 셈이다. 800m급의 산행에서 그 정도를 걸었다면 오늘 산행이 얼마나 수월했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물론 뒷삐알산에서부터 시작되는 하산 길은 제외하고 말이다.

 

에필로그(epilogue), 천마산과 능걸산에 대한 이름은 분분하다. 어떤 이들은 이 둘을 하나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이들을 두 개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난 둘로 나누어보고 싶다. 이곳의 관할 관청이 양산시에서 둘로 나누면서 두 곳에다 각각 커다란 정상석까지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명색이 행정관청인데 허투루 이름을 지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되어서이다.

명필봉(明筆峰, 543m)-수연산(水煙山, 603.8m)-취경산(醉景山, 573m)

 

산행일 : ‘15. 9. 17()

소재지 : 경남 밀양시 단장면

산행코스 : 동화마을308.9명필봉삼거리수연산(603.8m)삼거리취경산남산(南山, 170m)동화마을(산행시간 : 4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강송산악회

 

특징 : 옛말에 발을 뻗을 자리를 보고 누워라고 했다. 수연산과 취경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비록 나지막한 산이지만 짜릿한 스릴(thrill)을 느낄 수 있는 바윗길에다 뛰어난 조망(眺望)까지 갖춘 산임에도 불구하고 버려지듯이 방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리를 잘 못 잡았다는 얘기이다. 인근에 가지산과 천황산, 재약산 등 영남알프스의 산군(山群)들은 물론이고, 정각산이나 억산, 구만산 등 유명산의 계보(系譜)에 이름을 올린바 있는 산들이 하도 많은 탓에 이곳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 흙산의 특징대로 울창한 숲 아래로 난 산길은 폭신폭신할 정도로 곱다. 거기다 비록 짧기는 할망정 앞에서 말한 대로 시야(視野)가 탁 트이는 바윗길까지도 끼고 있다. 아직 세상에 명함을 내밀지 않아 찾는 사람들까지 별로 없으니 한적한 산행을 원하는 산꾼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동화마을(밀양시 단장면 사연리)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 I.C에서 내려와 24번 국도를 타고 울산·언양 방면으로 달리다가 금곡 I.C(산외면 금곡리)’에서 오른편 표충사방향의 1077번 지방도로 옮겨 금곡교()를 건넌다. 단장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이다. 이어서 단장면 소재지인 태룡리를 지나면 잠시 후 산행들머리인 사연리 동화마을에 이르게 된다. 길가에 자기들이 '재약산 미나리‘ 1호점이라고 주장하는 표충농원의 대형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동화교()를 건넌 후 왼편으로 열린 동네 안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시멘트로 포장된 원래의 길 말고도 개울가에 나무데크로 길을 하나 더 만들었으니 이를 이용하는 것이 더 낫겠다.

 

 

첫 번째로 만나는 다리를 건넌다. 건너편에도 개울을 따라 길이 나있지만 개의치 말고 맞은편 골목길로 곧장 진행한다. 그리고 갈림길을 만날 경우 무조건 동화사의 이정표를 따른다. 길을 걷다보면 집집마다 마치 정원수(庭園樹)라도 되는 양 감나무들을 심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밭에는 대추나무가 천지이다. 대추와 감이 이곳 밀양의 대표적인 특산물(特産物) 중의 하나라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8~9분쯤 지나면 하얀 펜스(fence)에 둘러싸인 미색(米色)의 민가(民家)가 나타난다. 주택 옆에 묘()가 하나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산길은 이 묘지에서 왼편으로 꺾인다. 물론 비포장 오솔길이다. 맞은편 저만큼에 동화사의 이정표가 보이나 이때는 무시해야 한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다싶으면 이번에는 길 찾기에 신경을 써야한다. 오른편 산자락으로 올라야하는데 길의 흔적이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산자락에 이르자마자 오른편을 유심히 살피는 수밖에 없으니 참조할 일이다. 하나 더,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밤나무 군락이 나타난다는 것은 팁(tip)이라고 해도 좋다.

 

 

산자락에 들어서자마자 거친 산길이 길손을 맞는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드물었던지 길은 온통 잡목(雜木)들로 가득 차있고, 때문에 산길은 그 흔적조차 찾기가 힘들다. 그저 산봉우리의 꼭짓점을 향해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참 가장 중요한 것을 잊을 뻔했다. 명필봉으로 오를 때에는 새 옷을 입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산길을 온통 명감나무 넝쿨들이 점령하고 있는 탓에 보푸라기가 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일 새 옷이라도 입었다면 얼마나 아깝겠는가.

 

 

거기다 사면(斜面)의 경사까지 가파르다보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거리가 짧다는 것이다. 15분 정도 악전고투를 치르다보면 능선에 올라서고, 이어서 5분 후에는 송전탑(送電塔)이 있는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309m봉이 아닐까 싶다. 철탑 옆에 건물이 하나 지어져 있다. 비록 인기척은 느낄 수 없으나 상주(常住)를 위해 지은 건물인 것 같다. 이는 송전탑 건설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지역주민들과의 다툼을 대비한 결과일 것이고 말이다.

 

 

 

철탑봉을 지나면서 산길은 또렷해진다. 그렇다고 행정청에서 등산로를 정비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저 등산객들이 지나다니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결과일 것이다. 철탑을 지나면서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오르면 갑자기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이 앞을 가로막는다.

 

 

안전로프에 매달려 첫 번째 난관을 통과하면 또 다른 벼랑이 나타난다. 이번에는 안전로프가 없기 때문에 위로 오르기 위해서는 바위와의 씨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다. 조금만 조심하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짜릿한 손맛만 즐기면 된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너무 서둘러서 오르지도 말자,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시원스런 조망이 열리기 때문이다.

 

 

 

 

 

스릴 넘치는 바윗길이 끝나면 암봉 위에 올라서게 된다. 국제신문의 지도에 전망대로 표기된 지점이다. 앞서 올라온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나무에다 뭔가를 매달고 있다. 정상표시 코팅(coating)지이다. ‘세천봉이라고 적혀있는데 산행 후에 출처를 찾아봤지만 불가능했다.

 

 

전망대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암봉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우선 지나온 능선을 따라 세워진 송전탑들이 철탑들 사이에 길게 늘어진 전선줄과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가끔은 사진작가들이 저런 풍경을 영상에 담는 모양이다. 주변에 늘어선 산들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나온 능선을 정면에 두고, 왼편에는 가래봉과 만어산이 우뚝하고, 그 오른편에는 단장면 소재지이다.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산들은 어쩌면 용암산과 승학산, 중산 낙화산 등일 것이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커다란 바위들이 듬성듬성 박혀있는 산길을 잠시 오르면 또 다른 송전탑이 나타난다. 이곳 또한 조망이 좋은 곳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철탑 아래에 쌓아올린 돌탑(石塔)이 더 눈길을 끈다. 저 돌탑은 어떤 염원(念願)을 품고 있기에 저리도 공들여 쌓았을까. 어쩌면 아까 얘기 했던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지역주민들과의 길고 지루한 싸움을 평화롭게 끝내고 싶은 바람이지 않을까 싶다.

 

 

 

 

 

철탑을 지나면서 산길은 고와진다. 보드랍기 짝이 없는 황톳길 위에 솔가리(소나무 落葉)까지 수북하게 쌓여 폭신폭신하기 그지없다. 한마디로 행복한 산길이라는 얘기이다. 그렇게 10분을 오르면 명필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명필봉은 아무런 특징이 없는 밋밋한 봉우리이다. 정상표지석은 물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군가가 리본에다 명필봉이라고 적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었더라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게 분명하다. 저 앞에서 성큼성큼 내닫고 있는 일행분이 그 증거일 것이다. 하긴 국도지리원에서 발행하는 지형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봉우리이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명필봉에서의 조망은 보잘 것이 없다. 오른편으로 잠깐 시야(視野)가 열리는데 이따가 오르게 될 취경산이 얼핏 나타날 따름이다. 그 오른쪽 뒤편에도 산들이 보이지만 구름에 갇혀버려 어떤 산인지는 분간이 안 된다.

 

 

명필봉이 보잘 것 없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에 대한 보상을 잠시 후에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의 바로 아래에서 밧줄에 매달려 잠시 내려서면 만나게 되는 작은 전망대가 바로 그곳이다.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는데 눈앞에 이따가 오르게 될 취경산이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는 영남알프스의 산군들로 보이는 수많은 산들이 나도 있다면 키 자랑을 하고 있는데, 어떤 산이 어떤 산인지는 분간할 수가 없다. 내 산행 경력이 아직까지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게 이유일 것이다.

 

 

 

전망대를 지나면 또 다시 길은 고와진다. 순수한 황톳길에 솔가리가 수북하게 쌓여있는 것 또한 같다. 때론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잡목(雜木)들이 발걸음을 붙잡기도 하지만 하등에 문제 될 것이 없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이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있는 산길이 너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 산길은 30분 이상 계속된다.

 

 

명필봉을 내려선지 30분 남짓 되면 가파른 산봉우리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산길은 그 기세(氣勢)를 피해 왼편으로 우회로(迂廻路)를 만든다. 그러나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는 그 산봉우리를 향하고 있다. 또렷하지 않은 길의 흔적을 따라서 말이다. 그러나 수연산이나 벼락덤이봉으로 가려면 우회로를 따라야 한다. 이 길은 수연산을 들르지 않고 곧장 취경산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가파른 산길을 따라 7~8분쯤 올라서면 570m봉이다. 이곳에서 수연산과 취경산으로 가는 길이 나뉜다. 산행들머리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4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수연산으로 가기 위해 왼편으로 내려선다.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4~5분 후에는 아까 헤어졌던 우회로를 다시 만나게 되고, 이어서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오르막길을 10분 남짓 치고 오르면 드디어 수연산 정상이다. 들머리에서 이곳까지는 2시간 10, 570m봉으로 길을 잘못 들어선 덕분에 10분도 훨씬 넘게 더 걸은 셈이 됐다.

 

 

서너 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의외로 볼품이 없다. 흙산의 특징대로 특별하게 내세울만한 볼거리가 없는데다가 조망(眺望)까지도 꽉 막혀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각점(밀양 306, 1993복구) 하나만이 외로울 뿐 정상석이나 이정표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라는 이름으로 만든 최남준씨의 정상표지판만이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 조금 전에 나를 앞질러 갔던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방금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 코팅지를 잊을 뻔했다. 참고로 인터넷 지도(internet map)에서 오늘 오른 산들을 검색하다보면 난감한 상황과 맞닥뜨릴 수도 있다. 명필봉과 취경산이 오늘 산행코스의 핵심임이 분명한데도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수연산이라는 이름 하나가 떡하니 올라와 있다. 국제신문의 산행기에 벼락덤이(600m)로 표기되어 있는 봉우리이다. 그러나 강송산악회에서 나누어준 지도에는 벼락덤이봉을 다른 곳에다 표기해 놓았다.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만나게 되는 562m봉이다. 산깨나 탄다는 사람들이 이골이 나도록 자주 접해왔던 .라는 분이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에도 벼락덤이봉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강송산악회의 표기가 옳을 것이다. ‘.라는 분이 바로 국제신문의 산행대장을 역임했던 최남준씨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상석이 없는 산들을 찾아다니며 이런 조그만 팻말형 안내판들을 걸어오고 있다고 한다. 팻말에 적힌 이름의 다른 한 축인 라는 후배는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지만, 그의 선행(善行)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벼락덤이봉으로 가는 것을 사양하고 아까 지나왔던 삼거리봉(570m)으로 향한다.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없는 벼락덤이봉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16분 만에 삼거리봉을 지나고, 이어서 6분 후에는 안부사거리에 내려서게 된다. 양쪽으로 길의 흔적이 뚜렷하고 들머리에 산악회의 시그널(signal)까지 매달려 있지만 어디로 내려가는 길인지는 모르겠다.

 

 

사거리에서 맞은편 능선을 따라 7~8분쯤 치고 오르면 취경산 정상이다. 취경산(醉景山)이란 경치에 취하는 산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올라보면 실망부터 하게 된다. 이름에 어울릴만한 풍광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대로 특별히 내세울만한 볼거리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 울산의 미봉산악회에서 정상표지석을 세워 놓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인증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정상은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비록 광활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볼만하니 그냥 지나치지 말 일이다. 발아래에는 무릉리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고, 그 왼편에는 산릉(山陵)을 향해 임도가 구불거린다. 국제신문에서는 금오산에 있는 연수암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며 그 뒤 뾰쪽한 봉우리를 금오산이라고 했다. 그리고 구천산과 만어산도 보인다고 했는데 빗속이라 그 형태만 나타나고 있어 안타깝다.

 

 

하산은 반대편 능선을 따른다. 서북(西北)쪽 사연리(동화마을) 방향이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능선은 곧고 굵은 적송(赤松)들로 가득하다.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는 물론 솔향일 것이다. 그 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그득할 것이고 말이다. 이런 걸 보고 힐링(healing)이라 하지 않겠는가.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순간이다.

 

 

급할 것 없는 산행인지라 걷는 속도를 최대한으로 줄여본다. 자연이 주는 심신(心身) 치료제를 아무렇게나 내쳐서는 안 될 것 같아서이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걸으면 바위전망대가 나타난다. 바윗길은 위험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왼편이 수십m의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탓에 조망(眺望)이 시원스럽다. 국제신문에서 취경대라는 이름까지 붙여 놓은 이유일 것이다. 드디어 취경(醉景)’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는 곳을 만난 셈이다. 문득 가져 온 막걸리를 취경산 정상에서 마셔버린 것이 못내 아쉬워진다. 경치에 취해 마시는 술이야말로 신선주(神仙酒)가 분명할 텐데도 술이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발아래에 깔려있는 마을은 물론 무릉리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높고 낮은 수많은 산들이 웅크리고 있다. 국제신문에서는 이곳을 일러 금오산과 구천산 만어산이 조망되는 멋진 곳이라고 했다. 그 표현에 공감이 간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행운까지는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비가 내리는 탓에 그저 무릉리만 내려다보일 뿐,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산들은 그저 희미한 형태만 내보이고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취경대에서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산길은 그게 못내 부담스러웠던가 보다.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능선이 그 가파른 기세(氣勢)를 누그러뜨렸다 싶으면 벌목(伐木)을 마친 개괄지가 나오고, 남겨진 소나무 사이로 나타나는 건너편 풍경을 구경하면서 걷다보면 22분 후에는 경주 최씨 묘에 이른다.

 

 

최씨 묘의 약간 아래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하산지점을 동화마을로 잡았다면 이곳에서 능선을 벗어나 오른편으로 내려서야 한다.

 

 

이제부터는 시쳇말로 널널한 산행이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밋밋한 내리막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는 그저 주변의 풍경을 즐기면서 걷기만 하면 된다. 다행히 낙엽송을 연상시킬 정도로 곧고 높게 자란 소나무들이 볼만하니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능선을 벗어난 지 10분쯤 지나면 숲속의 행복한 요양병원의 앞마당에 내려서게 된다. 한방(韓方)과 양방(洋方)을 겸하고 있는 데다, 내과와 정형외과 등 일반적인 진료과목은 물론 가정의학과나 재활의학과 등 특수 진료과목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 거의 종합병원 수준이다. 거기다 이런 숲속에 위치하고 있으니 가족과 떨어지는 외로움만 배겨낼 수 있다면 최적의 요양처가 아닐까 싶다.

 

 

요양병원에서부터는 포장임도를 따른다. 병원의 바로 아래에서는 오른편, 그리고 4분 뒤에는 왼편의 비포장 임도를 따른다. 그러나 이곳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남산의 정상을 올라볼 요량이 아니라면 포장임도를 따라 곧장 동화마을로 내려가라는 얘기이다. 자칫 잘못 들어섰다가 낭패를 볼 우려가 있기에 하는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정보 하나, 봉우리 따먹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남산을 오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볼거리나 조망 등 아무런 특징도 없는 봉우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왼편 비포장 임도로 들어서면서 오늘의 수난이 시작된다.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 무덤무리를 만났는데 선두대장의 방향표시지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주변은 온통 감나무과수원, 이리저리 표시지를 찾아 헤매다가 왼편의 임도를 따라 진행해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산 정상을 만난다. 산봉우리라기보다는 차라리 언덕에 가까운 느낌인 정상은 아무런 특징이 없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또한 있을 리가 없다. 참고로 위에서 얘기한 두 번째 무덤무리에서 무덤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동화마을에 이를 수 있다. 국제신문의 지도를 보면 그들도 역시 이 길을 따랐던 모양이다. 억지로 길을 개척하면서 말이다.

 

 

 

정상에서 보면 희미하게나마 길의 흔적이 보인다. 거칠지만 조금만 주의한다면 찾을 수는 있다. 조심조심 내려서면 남의 과수원, 울타리를 넘으니 요양병원의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에서 50m 거리에 요양병원이 위치하고 있단다. 그렇다면 50m의 거리를 무려 30분 동안이나 걸었다는 얘기이다. 이런 걸 두고 시쳇말로 알바라고 하는가 보다.

 

 

산행날머리는 동화마을(원점회귀)

포장임도를 따라 잠시 내려오면 1077번 지방도이다. 그런데 동화마을로 가는 방향을 모르겠다. 별수 없이 길가에 있는 현대 오일뱅크에 들어가 길을 묻는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1Km 정도를 더 걸어야 한단다. 단장천 가로 난 도로를 따라 10분 남짓 걸으면 동화마을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20분이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느라 10분 정도를 쉬었으니 4시간10분을 걸은 셈이다. 거기다 알바시간을 감안한다면 서서히 걸어도 4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구재봉(龜在峰, 767.8m)-분지봉(分枝峰, 620m)

 

산행일 : ‘15. 8. 27()

소재지 : 경남 하동군 하동읍과 악양면, 그리고 적량면의 경계

산행코스 : 미서마을능선활공장구재봉신촌재분지봉옥산재서재마을(산행시간: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강송산악회

 

특징 : 경남 하동 땅에는 악양(岳陽)이란 고을이 있다. ‘평사리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고장, 즉 박경리(朴景利, 1926~2008)선생의 대하소설 토지(土地)’의 무대로 세상에 알려진 고을이다. 구재봉은 악양 땅에 자리 잡은 산 중의 하나로서 평사리 들판을 사이에 두고 형제봉과 서로 대칭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전형적인 육산(肉山)이지만. 구재봉 정상 어림만 거대한 바위지대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비록 스릴을 느끼는 암벽등반은 아니지만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암릉은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거기다 활공장과 구재봉, 그리고 분지봉에서의 조망(眺望)은 비할 데 없이 뛰어나다. 시간을 내서라도 한번쯤은 꼭 찾아봐야 할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미서마을 입구 버스정류장(하동군 압양면 미점리)

순천-완주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하동방면의 19번 국도를 탄다. 국도는 섬진강을 오른편에 끼고 이어지다가 조영남의 노래로 잘 알려진 화개장터를 지나 악양삼거리(악양면 미점리)에 이른다. 이곳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미서마을 입구에 이르게 된다. 악양삼거리 근처에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지어진 악양루(岳陽樓)라는 누각(樓閣)이 볼만하니 잠깐 짬을 내어 둘러봐도 괜찮을 것이다.

산행은 아래 지도에 표시된 화살표시와 반대방향으로 진행됐다.

 

 

미서마을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입구에 마을표지석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악양은 청동기 시대인 BC 5000년경에 이미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섬진강변의 중요한 목이었던 미점도 이 시기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미점의 3개 단위부락 중 하나가 미서마을이다. 미점은 국가가 형성된 변한 시대인 BC 108년엔 대외 연락의 중요한 지점이었고, 신라 때는 범포(帆浦)로 섬진강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군사상 중요한 요지가 되어 관방(關防)으로도 큰 몫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 중요한 역할은 조선후기의 사창(司倉)으로 연결되었다고 보면 된다.

 

 

자그마한 산골마을인 미서마을을 지나 임도(林道)를 따른다.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는 과수원 사이로 나있다. 그런데 과수원의 나무들이 의외로 감나무이다. 이곳 하동은 매실로 유명한 지역인 줄로만 알았는데 감도 많이 생산되는 모양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3~4분쯤 지나면 과수원 단지가 끝나도 전에 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왼편과 직진 어느 곳으로 진행하더라도 20분쯤 후에는 다시 만나게 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 진행하면 된다. 하지만 난 지리산둘레길과 연결된다는 왼편을 권하고 싶다. 오른편으로 갈 경우 형제봉과 미서마을의 들녘 등을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남의 고사리경작지 통과해야하는 민폐를 끼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모르는 우린 직진코스를 택했다. 임도의 주변은 이제 고사리 밭으로 변해있다. 때문에 조망(眺望)이 트인다. 앞서 말한 형제봉과 미서마을 앞 들녘이 아무 거리낌 없이 성큼 다가온다.

 

 

 

거의 산꼭대기나 다름없는 곳에 세워진 움막이 보인다. 농작물을 지키려는 농민들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 지키려는 대상이 산짐승들이기만을 빌어보지만 아쉽게도 그 대상은 인간이었나 보다. 얼마 후에 농작물 채취금지라는 경고판이 철망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기에 하는 말이다.

 

 

고사리 밭을 지나 경계선에 쳐진 철망(鐵網)을 따른다. 그러다가 또 다시 민폐(民弊)를 저지르고 만다. 고사리 밭을 무단 통과한 것만 해도 미안한 일인데 철망을 딛고 넘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아까 만났던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진행할 것을 권했던 이유이다.

 

 

철망을 넘으면 제법 또렷한 오솔길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미동을 넘어오는 고개, 지리산둘레길상의 임도사거리(이정표 : 미동마을/ 대축마을로)에 내려선다. 아까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갈려나갔던 임도와 다시 만나게 되는 지점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8분이 지났다. 참고로 삼화실에서 출발한 지리산둘레길은 신촌재(먹점재)를 넘어 이곳을 지난 다음 대축마을에서 그 소구간(16.4km)이 끝난다. 또 하나, 아까 왼편으로 진행했던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직진코스보다 훨씬 더 편하면서도 거리 또한 가까웠다고 한다.

 

 

산길은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향한다. 이제부터 산길은 고속도로 수준이다. ‘고속도로는 고속도로인데 경부가 아닌 88고속도로 수준입니다.’라던 강송산악회 회장님의 안내말씀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산길이 넓은데다 엊그제 제초(除草)를 한 것처럼 정비까지 잘되어 있는 것이다. 대신 오르막길의 가파름은 상당히 가파르다. 거기다 그 오름세는 거의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거기다 조망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오를 수밖에 없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지 싶다.

 

 

그래도 나름대로 구경거리는 있다. 활공장에 가까워지면서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첫 번째 구경거리는 남근(男根)’처럼 생긴 바위가 아닐까 싶다. 흡사 용틀임이라도 하려는 듯 거대한 귀두(龜頭)를 바짝 세우고 있는 형상이 남근을 빼다 닮았다. 다른 산들에서 보아오던 남근바위들에 뒤지지 않기에 감히 남근바위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다른 또 하나는 둘로 나누어진 바위이다. 반듯하게 둘로 나누어진 게 누가 일부러라도 잘라 놓은 것 같은 모양새이다. 경주에 가면 김유신장군이 칼로 베었다는 둘로 나누어진 바위가 있다. 단석산이라는 산의 이름을 얻게 한 유명한 바위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바위는 단석산에서 보았던 바위보다 더 절단면이 매끄럽다. ‘단석(斷石)바위이라는 이름을 얻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얘기이다. 이곳 구재봉은 고려시대의 유명한 무장(武將)인 정안(鄭晏, ?~1251)장군과 인연이 깊은 산이다. 특히 그의 동생 정희령장군은 그의 백마(白馬)와 화살의 빠르기를 이곳에서 겨루게 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저 바위를 그들 형제 중 누군가가 칼로 베었다고 하면 어떨까? 그 사람이 역사에 까지 나오는 정안장군이라면 더 좋을 것이고 말이다. 여기서 감히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시도해 본다.

 

 

바위들을 구경하면서 오르다보면 금방 활공장(滑空場)이다. 임도를 통과한지 딱 25분 만이다. 곱디고운 잔디가 깔린 활공장에는 젊은이들 몇 명이 케노피(canopy)를 깔아 놓고 있다. 아마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하기에 좋은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이 활공장은 하동군에서 2003년에 만든 시설로 이곳에서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 활공을 할 경우 지리산과 섬진강, 그리고 악양 무듬이 들판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동군에 있는 두 개의 활공장 중 하나로 형제봉 활공장과 마주보고 있는데, 바람이 부는 방향을 보고 어느 곳에서 활공할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활공장에 오르면 꼭 활공을 하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건너편에 있는 형제봉은 물론 섬진강과 넓디 너른 무듬이 들녘이 한 눈에 들어온다. 활공을 할 때 내려다보인다는 풍경이 이곳 활공장에서 거의 비슷한 그림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거기다 섬진강 건너 백운산과, 저 멀리 보이는 하동의 금오산은 보너스로 쳐도 될 일이다.

 

 

 

이정표(구재봉 1,6Km/ 개치)가 가리키는 능선을 따라 산행을 이어간다. 산길은 활공장을 지나면서 그 가파른 기세를 많이 누그러뜨린다. 그리고 두어 번에 걸쳐 작은 오르내림을 하더니 15분 남짓 후에는 전위봉에 올려놓는다.

 

 

 

전위봉을 지나면서 잠시 고도(高度)를 낮추던 산길은 이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갑자기 가파르게 변해버린다. 길가에 매어놓은 로프를 의지해야 할 정도로 그 가파름이 심하다. 하지만 그 거리가 짧아 잠시 후에는 주능선삼거리(이정표 : 구재봉 150m/ 칠성봉 6.2Km/ 활공장 1.6Km, 미동 3.5Km)에 올라서게 된다. 전위봉에서 이곳 삼거리까지는 대략 15분 정도가 걸렸다. 이곳 삼거리에서부터는 삼신지맥(三神枝脈)을 따르게 된다. 삼신지맥은 낙남정맥 상의 지리산 삼신봉(1289m)에서 남쪽으로 분기(分岐)하여 관음봉과 거사봉, 시루봉, 칠성봉, 구재봉, 분지봉 등을 만든 후 하동공설운동장 동남쪽 횡천강(橫川江)을 건너는 대석교() 앞에서 그 숨을 다하는 도상거리 31.9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 산줄기는 거사봉에서 형제봉과 신선봉으로 가는 또 다른 산줄기를 분가(分家)시키니 참조할 일이다.

 

 

주능선을 만나면서 산은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온전한 흙산이던 것이 갑자기 거대한 돌들의 축제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조금만 더 오르면 정상이지만 구태여 서두를 필요는 없다. 벼랑을 타고 조금만 나가보면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약간 위험하기는 해도 멋진 경관을 보려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수백 길 단애(斷崖)는 바라보기만 해도 아찔하고, 벼랑 아래의 산하는 그 반대로 아늑하기만 하다. 그 둘의 조합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로 다시 태어난다.

 

 

 

 

정상 부근에는 상사바위, 흔들바위가 있고 방바위, 통시바위 등 기암(奇巖)들이 즐비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바위틈의 천년 석굴(石窟)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일이 확인하지는 못했다. 아직도 내 수양이 부족했던지 바위들의 이름과 생김새를 연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석굴은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지 못해 답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바위구경을 즐기다 발길을 돌리면 금방 구재봉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2시간이 지났다. 구릉(丘陵)으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1 : 먹점재 2.0Km, 분지봉 2.5Km/ 칠성봉 5.4Km, 회남재 12.4Km, #2 : 문암정 1.0Km/ 휴양관 2.5Km) 외에도 반듯하게 지어진 정자(亭子)와 무인산불감시탑이 자리 잡고 있다. 정상의 앞과 뒤에 두 기의 무덤까지 있는 것을 보면 풍수도 뛰어난 모양이다. 이곳 구재봉도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傳說)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이 전설의 주요 모티브(motive)백마와 내기를 해서 백마가 졌다고 잘못 알고 백마를 죽인 정희령이다. 고려 시대 정안(鄭晏, ?~1251)장군의 동생으로 명궁(名弓)이었던 정희령장군은 백마(白馬)를 타고 다녔는데 백마가 빠른가, 아니면 화살이 빠른가를 내기 했다가 화살 낙하지점에 도착해도 화살이 보이지 않기에 백마의 목을 쳤는데 그 뒤에 화살이 와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명장 김덕령(金德齡, 1567~1596)장군의 용마 이야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종류의 설화(說話)는 김덕령장군 말고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설화들은 하나같이 잘못된 판단으로 애마(愛馬)의 목을 쳐버린 명장(名將)들의 한계점을 보여준다. 아니 그런 한계점이 오히려 그들을 인간적인 명장으로 만드는 지도 모른다. 교만하고 경솔한 성격을 가지지 않도록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인정하고, 그리하여 인간적 명장으로 거듭나게 됨으로써 민중들의 지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발췌 및 인용)

 

 

정상표지석을 보면 구재봉의 이름이 두 개인 것을 알 수 있다. 정상석의 앞면과 뒷면에 적힌 이름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정상에서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적량면과 악양면 중 어느 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형상(形象)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이름 또한 달라진다는 것이다. 적량면 쪽에서 볼 때는 산등성이의 바위가 거북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거북 구()자를 쓰고, 악양면에서는 산의 모양이 비둘기처럼 생겼다고 해서 비둘기 구()를 쓴다고 한다.

 

 

정상 아래에는 구산(龜山)라는 글자가 음각(陰刻)된 바위가 있다. 전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는 이곳 구재봉을 구자산(龜子山)의 정상이라 적고 있는데,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발아래에는 섬진강과 평사리의 무딤이 들녘이 펼쳐지고, 눈을 들면 호남정맥은 물론이고, 지리주능선과 낙남정맥 능선상의 모든 것들이 조망된다. 한마디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는 순간이다.

 

 

정상의 바로 아래에 있는 헬기장 근처에서 다시 한 번 조망을 즐길 수 있다. 커다랗고 둥그런 바위의 뒤로 돌아가면 이번에는 남쪽과 서쪽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섬진강과 백운산 능선은 아까보다 훨씬 더 또렷해졌고, 이번에는 그 강물의 끝자락 광양만()까지도 조망된다.

 

 

 

분지봉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다 다시 완만해지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오르내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 오르막이 작을 뿐이다. 참고로 구재봉에서는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우계리(적량면) 방향의 능선으로 내려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도 그쪽 방향으로 잘못 내려섰다가 고생한 일행이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산을 내려가다 보면 벌목(伐木)을 마친 개괄지를 만난다. 어린 편백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것이 아마 경제림으로 조성하려는 모양이다. 나무를 베어버린 탓에 조금은 황량한 풍경이지만 그 덕분에 섬진강이 오롯이 나타난다.

 

 

구재봉을 내려선지 40분쯤 지나면 화장실까지 갖춘 고갯마루 신촌재(이정표 : 분지봉 0.5Km/ 구재봉 2.0Km/ 신촌/ 먹점)에 내려서게 된다. ‘지리산둘레길용 이정표에는 신촌재라고 적혀있지만 먹점마을과 신촌마을을 잇는 고갯마루라고 해서 먹점재라고도 불리니 참조할 일이다.

 

 

임도를 가로질러 맞은편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산길은 한마디로 곱다. 황톳길만 해도 부드러운데, 그 위에 솔가리(소나무 落葉)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거기다 경사까지 완만하다보니 걷는 것 자체가 즐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런 산행을 보고 웰빙(well-being)산행이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산길 전체가 완만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해발 460m인 신촌재에서 분지봉(620m)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160m의 고도차(高度差)를 극복해야하기 때문에 가파른 구간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길이 고와서 힘든 줄을 모르고 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신촌재를 출발한지 25분쯤 지나면 무인산불감시탑이 지키고 있는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제법 너른 구릉(丘陵) 형태로 이루어진 정상은 둥근 돌기둥을 비스듬하게 쳐낸 모양으로 생긴 정상표지석이 지키고 있다. 참고로 분지봉은 구재봉에서 나뉘어져 생긴 봉우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론 이곳 분지봉에 못이 있다고 해서 못 지()’자를 써서 분지봉(分池峰)이라고도 불린다니 참조할 일이다. 한편 정상에서 발견된 기와, 축대 등의 흔적들을 들어 아까 지나온 구재봉의 전설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정안장군의 여동생이 이곳에 살았다는 민담(民譚)이 바로 그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론 절터의 흔적이라는 설도 있으니 이 또한 참조할 일이다.

 

 

정상에 오르면 오뚝이처럼 생긴 바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바위 아래에 나무기둥이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으니 위로 올라가보자. 아래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넓게 시야(視野)가 열린다. 진행방향의 능선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그 끝에는 광양만이 또렷하다. 날씨가 화창할 경우 사천과 남해를 잇는 창선연륙교까지 보인다고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화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산을 시작한다. 아까 정상 근처에 세워진 이정표(중앙중학교 6.2Km/ 구재봉 2.5Km)가 가리키고 있는 중앙중학교 방향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면의 섬진강 방향으로도 내려가는 길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는 것이다. 단축코스로 생각하고 내려서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할 일이다. 실제로 오늘 그쪽으로 내려섰다가 고생을 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하산 길은 계속해서 내려가는 것만은 아니다. 가끔 오르막길도 나타난다. 그러다가 조망이 트이기도 한다. 오른쪽 사면(斜面)이 훤하게 비어있는 봉우리 위에서이다. 산불의 흔적인지 기둥만 남은 죽은 나무들이 비탈에 널려있다. 그 덕분에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섬진강과 그 너머 백운산은 물론 저 멀리 광양만()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어느 글에선가 전망대라고 부르는 지점이 있었는데 이곳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흔히 오백리라고 하는 섬진강은 212.3km로 남한에서 아홉 번째로 긴 강이며 이 물줄기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계곡과 산과 들과 마을을 적신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의 봉황산에서 발원하여 지리산 자락을 끼고 돌고 돌아 숱하게 아름다운 강변을 만들어 내는데 그 중에서도 하동군 화개면의 화개나루가 가장 넓고 깊다고 한다. 섬진강은 여느 강보다 정겹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내가 태어난 곳 또한 섬진강 강변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흔들바위를 닮은 바위를 만난 후, 산길은 갑자기 가파르게 변한다. 안전로프까지 매어놓은 것을 보면 그 가파름이 약간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언제부턴가 산길 주변은 온통 소나무로 점령하고 있다. 그것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쑥쑥 뻗어 오른 잘 생긴 놈들이다. 아까부터 코끝을 간질여오던 그 무엇인가의 정체는 솔향이었나 보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저 향기 속에 그득 담겨있을 이 얼마나 행복한 산행인가. 이런 걸 보고 힐링(healing)산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에 겨워 흘러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다보면 어느새 옥산재(이정표 : 중앙중학교 4.2Km/ 서재/ 신촌/ 분지봉 2.0Km)에 내려서게 된다. 분지봉에서 40분 정도가 걸렸다. 옥산재는 지금이야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가 훤하게 뚫려있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오솔길이었다. 그러나 예로부터 옥산재는 하동사람들이 넘나들던 중요한 길 중의 하나였다. 적량면 지역의 사람들이 하동읍이나 화개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옥산재에서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임도는 구절양장(九折羊腸) 모양으로 구불대면서 아래로 향하지만 내려서기 딱 좋을 정도로 경사가 완만하다. 거기다 심심찮게 시야(視野)까지 터진다. 섬진강과 화심리(하동읍) 들녘은 물론이고 강 건너 백운산 자락까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산행날머리는 서재마을

그렇게 눈요기를 즐기면서 15분 정도를 걸어 내려오면 서재마을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그러나 우리를 태우고 갈 버스는 마을회관에서도 5분 정도를 더 내려간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산행에서 흘린 땀을 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산악회의 배려이다. 흡사 폭포처럼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에 앉아있다 보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그러나 어쩌랴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맛있는 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쉬운 마음을 접고 밖으로 나오면서 오늘 산행을 마감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3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4시간이 걸린 셈이다.

신어산(神魚山, 631.1m)-돛대산(298m)

 

산행일 : ‘15. 5. 30()

소재지 : 경남 김해시 대동면과 상동면 그리고 삼방동의 경계

산행코스 : 선암다리돛대산동봉(605m)신어산헬기장서봉(641m)천진암은하사주차장(산행시간 : 3시간40)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전형적인 육산(肉山), 산행 내내 바위를 거의 볼 수 없었던 산이다. 그러나 산행을 마칠 때쯤이면 그게 얼마나 잘못된 판단이었는지를 알아차리게 된다. 은하사 뒤편의 산자락에 빼꼭하게 들어찬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오늘 걸었던 산행코스가 처음에서 끝까지 온통 흙길 일색이었고, 거기다 빗속을 걷다보니 바위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 원래부터 육산으로 보았던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산은 순하다. 코스를 그렇게 잡아서인지는 몰라도 산행 내내 황톳길을 걷는데다가, 오르막길의 경사(傾斜) 또한 완만(緩慢)해서 걷기가 여간 편한 것이 아니다. 거기다 오늘은 비록 비 때문에 시야(視野)가 트이지 않았지만, 능선 곳곳에서 멋진 조망처를 만날 수 있었다. 산행을 더욱 즐겁게 해주는 요인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할 때 가족산행지로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산행들머리는 선암장어마을(김해시 대동면 수안리)

남해고속도 동김해 I.C에서 내려와 동김해I.C 사거리(김해시 삼정동)에서 우회전하여 부산방면으로 달리다가 부산김해경전철 불암역을 지나자마자, 그러니까 부산과 김해을 잇는 김해교(선암다리)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남해고속도로의 아래를 지나는 굴다리를 통과하게 된다. 굴다리 근처가 그 유명한 선암 장어마을이다 

 

 

 

들머리는 굴다리를 통과하자마자 왼편으로 열린다. 축대를 뚫어 만든 길에 나무계단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도 못 믿겠다면 들머리 왼편에 세워진 김해시보건소의 올바른 걷기자세안내판을 참조하면 될 일이다.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우거진 수풀에 절반쯤 가려있는 이정표 하나가 눈에 띈다. 신어산까지의 거리가 6.4란다. 산길은 초입부터 가파르게 시작된다. 오늘 산행이 걱정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에 등산로까지 가파를 경우에는 고생을 각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걱정은 기우(杞憂)에 그쳤다. 잠시 후부터는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갔기 때문이다.

 

 

능선 양쪽으로 그다지 굵지 않은 소나무와 잡목(雜木)들이 듬성듬성 서있다. 덕분에 가끔 조망(眺望)이 트이면서 광활한 김해평야와 그 중심에 있는 김해시가지가 널따랗게 눈앞에 펼쳐진다. 하지만 오뉴월 땡볕이라도 내려쬘 경우에는 걷기가 만만치 않을 구간이 될 것 같다. 다만 다행인 것은 능선의 오르내림이 크기 않기 때문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좌우로 나뉘는 갈림길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는 어느 곳에서 오르더라도 능선을 향해 방향을 잡기만 하면, 산길은 하나같이 신어산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해경사 갈림길’(이정표 : 신어산, 천불사 2.1Km/ 해경사 336m, 지내동 730m/ 선암다리)활천중학교 갈림길’(이정표 : 신어산, 천불사 1.5Km/ 활천중/ 해경사 570m, 선암다리 1.5Km) 외에는 이정표조차 세워놓지 않았다.

 

 

길을 가다보면 곳곳에서 쉼터를 만날 수가 있다. 아래 사진과 같이 운동기구까지 갖춘 쉼터가 있는가 하면 그냥 벤치 몇 개만 놓은 쉼터, 또 어떤 곳은 식탁용 테이블까지 갖추고 있다. 관할 지자체인 김해시에서 이곳 신어산을 산상공원(山上公園)으로 가꾸어가고 있지 않나 싶다. 물론 시민들의 후생복리(厚生福利)를 위해서이다.

 

 

오늘은 행운이다. 산행 들머리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산딸기가 곳곳에서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것도 처음에는 뱀딸기를 닮아 냉큼 입에 넣기가 거북했었는데 조금 후부터는 제대로 된 딸기로 변하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지런한 집사람의 손길이 한층 더 빨라진다. 그러나 그 수확물의 대부분은 사진 찍느라 바쁜 내 입속으로 들어온다. 가시에 찔려가면서 딴 수확물을 자기가 먹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입속에 넣어 주는 걸 행복으로 아는 그녀, 현모양처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여자와 함께 사는 난 행운아가 분명하다.

 

 

산행을 시작한지 30, 활천충학교 갈림길에서는 3~4분쯤 되는 곳에 이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평지길이고 왼편은 약간 경사가 진 오르막길이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왼편으로 진행한다. 잠시 후 돌탑 앞에서 묵념(黙念)을 하고 있는 여성이 보인다.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일행인데, 앞에 보이는 돌탑은 ‘2002년 중국민항기 추락사고때 숨진 이들의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쌓은 탑이란다. 김해소방서 의무소방대원들이 쌓았다는데, 돌탑의 틈새에다 민항기의 파편들을 넣어가며 쌓았다지만 지금은 눈에 띄지 않는다. 참고로 이 사고는 한국인 탑승객 137명 중 129명이 사망했고, 전체 생존자는 37명에 불과한 대형 참사였다.

 

 

위령탑에서 잠시 아래로 내려섰던 산길은 또 다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중간에 거리표시도 없는 이정표를 만나기도 하고 거대한 소나무 아래에 만든 쉼터도 지난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걸으면 전망데크 모양으로 지어진 정자(亭子)를 만나게 된다. 참 잊은 게 하나 있다. 정자가 있는 이곳으로 오기 전, 산길이 진행방향의 봉우리를 피해 왼편으로 우회를 시작하는 지점이 있다. 만일 돛대산을 오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우회(迂廻)를 하지 말고 곧장 능선을 치고 오르라는 얘기이다. 물론 이곳에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다. 덕분에 나도 그냥 왼편으로 우회해 버렸지만 말이다.

 

 

정자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길이 ‘T'자형으로 길이 나뉜다. 비록 이정표는 없지만 돛대산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물론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하지만 말이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5분 가까이 치고 오르면 오른편으로 난 길이 보인다. 아까 능선을 곧장 치고 올랐을 경우 만나게 되는 지점이다.

 

 

갈림길에서 몇 걸음 더 걸으면 바윗길이 시작된다. 비록 그 거리는 짧지만 오늘 산행에서 유일하게 손맛을 볼 수 있는 구간이다. 그리고 올라서는 바위마다 시야(視野)가 뻥 뚫리는 멋진 조망처이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날씨 때문에 조망이 트이지 않는 것이 아쉽지만 말이다.

 

 

앞을 가로막는 바위들을 우회하거나, 이도 어려울 경에는 넘으면서 진행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돛대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기암괴석들이 마치 연꽃모양으로 벌어져 있는 돛대산 정상은 일단 비좁다. 그러나 정상석까지 갖춘 의젓한 산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늘은 궂은 날씨로 인해 시계(視界)가 제로에 가까운 탓에 다른 사람이 쓴 글로서 조망을 대신해 본다. ‘낙동강과 김해평야가 턱밑에 있다. 주변 봉우리를 살펴보면 진행 방향으로 신어산, 그 우측으로 푹 꺼진 생명고개와 장척산이, 11시 방향엔 까치산과 그 뒤 백두산이 확인된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신어산으로 향한다. 잠시 후 안동 갈림길’(이정표 : 신어산 정상 3.6Km/ 안동/ 선암다리 2.8Km)을 지나고, 이어서 멋진 전망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위 위로 오르면 희미하게나마 김해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지는데 그 왼편에는 방금 올랐었던 돛대산이 정확하게 삼각형을 그려내고 있다. 저런 생김새가 흡사 돛을 닮았다고 해서 돛대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렇다면 돛대산이 아닌 돛산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돛대는 돛을 달기 위해 배의 바닥에 세운 기둥을 말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길을 가다보면 공사를 하는 구간이 자주 눈에 띈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본 신어산 누리길 조성사업현수막(懸垂幕)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공사현장을 보면서 가슴에 와 닿는 게 하나 있다. 작은 감동이랄까? 가능하면 자연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공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데크로 바닥을 깔려는 모양이고, 또 다른 곳에서는 경사진 길을 네모로 칸을 막아 토사(土砂)가 흘러나가지 않게 하면서도 윗부분은 흙이 노출되도록 그대로 놓아두었다.

 

 

길을 가다보면 측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90년대 말 산불이 난 뒤 조림한 것이란다. 누군가는 편백나무라고도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측백나무로 보이니 어쩌겠는가. 나무는 굵지는 않다. 그렇지만 잠깐의 그늘을 만들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자랐다. 거기다 짙은 솔향까지 전해주니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따로 없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구간이다.

 

 

측백나무 조림지역을 지나면 또 다른 전망바위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이 지나갈 때마다 이름 모를 산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전망바위에서 잠시 더 걸으면 임도(林道)를 만나게 된다. 안동갈림길에서 30분 조금 못되는 지점이다. 임도를 만났어도 산길은 임도로 내려서지는 않는다. 임도 오른편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것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신어초등학교 갈림길’(이정표 : 산어초등학교 1.8Km/ 선암다리 4.7Km)을 지나서, 곱디고운 황톳길을 따라 7분 정도를 더 걸으면 또 다른 임도에 내려서게 된다. 벤치를 갖춘 쉼터로 만들어 놓은 곳이다. 임도에 가까워지면 저만큼에 신어산이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온다. 푸른색으로 덧칠한 산자락에 회색빛 바위 몇 개를 안고 있다.

 

 

 

 

두 번째 임도에서도 임도를 따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이번에는 임도를 가로질러 11시 방향의 샛길로 들어선다. 샛길로 들어서면 산길은 가팔라진다. 그러나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저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가팔라졌다 싶을 뿐이지, 오르기가 버겁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그저 조금만 속도를 떨어뜨린다면 별 어려움 없이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임도에서 8분쯤 올라서면 김해대학교 갈림길’(이정표 : 신어산 정상 0.9Km/ 김해대학교 1.6Km/ 선암다리 5.5Km)을 만나고, 이어서 2분 후에는 쉼터를 겸한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신어산 정상 0.8Km/ 산림욕장 0.8Km/ 천불사 3.08Km). 왼편은 삼림욕장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그대로 쭉 직진한다. 이어서 4분 후에는 비를 막을 수 있는 지붕까지 씌워진 약수터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물은 흐르지 않고 있다. 요즘 가뭄이 알려진 대로 심한 모양이다.

 

 

 

약수터를 지나면 잠시 후 나무데크 계단이 시작된다. 초입에 세워진 이정표(신어산 정상 0.45Km, 철쭉군락지/ 천불사 3.3Km)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왼편으로 길이 나있는 것이 보인다. 주능선을 거치지 않고 신어산 정상으로 오르는 지름길이지 않나 싶다.

 

 

나무데크 계단을 지나면 드넓은 평원(平原)이 펼쳐진다. 보통의 철쭉과 황철쭉, 그리고 자산홍(개량철쭉) 17,000그루의 철쭉을 식재(植栽)한 철쭉군락지라는데 그 넓이가 무려 2에 이른단다. 군락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쳐놓은 금()줄 사이를 가볍게 치고 오르면 능선안부의 삼거리(이정표 : 신어산 정상 0.3Km/ 상동매리 10Km/ 천불사 3.8Km, 선암다리 6.1Km)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 삼거리는 낙남정맥(洛南正脈)이 관통하는 구간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신어산 정상을 거쳐 서봉에 이르기까지는 낙남정맥의 마룻금을 따라 걷게 된다. 낙남정맥은 백두대간인 지리산 영신봉(靈神峰.1,652m)에서 남하하여 하동, 진주, 마산, 창원을 거쳐 김해 낙동강하류에서 그 맥을 다하는 총 도상거리 232 km의 산줄기로서 주요 산으로는 옥녀산(玉女山, 614m), 천금산(千金山), 무량산(無量山, 579m), 여항산(餘航山, 744m), 광로산(匡盧山, 720m), 구룡산(九龍山, 434m), 불모산(佛母山, 802m) 등이 있다.

 

 

삼거리에서 오른편 상동매리 방향으로 진행한다. 동봉에 다녀오기 위해서이다. 동봉을 둘러본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철쭉군락지를 지나면 숲길이 나타나고, 잡목(雜木)으로 가득한 오솔길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10분쯤 후에는 동봉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열 평이 조금 못될 듯 싶은 정상에는 김해가야산악회에서 세운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외에도 돌탑이 하나 보이지만 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돌무더기로 보는 게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동봉에서의 조망도 괜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아래 생명고개, 그 뒤에 있는 장척산과 동신어산이 보이는 것은 물론 날이 좋을 경우에는 금정산과 불모산, 굴암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오늘은 비록 구름 속에 갇혀있지만 말이다.

 

 

아까의 안부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이번에도 역시 철쭉군락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이어진다. 그리고 철쭉터널이 끝나는 곳, 두루뭉술하게 생긴 봉우리가 신어산 정상이다. 누군가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유순하게 생겼다고 했는데 이 또한 틀리지 않은 표현일 것 같다. 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2시간 30분이 걸렸다.

 

 

정상은 비록 반반하지는 않지만 많이 넓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점은 산불감시초소가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리라.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은 망루(望樓)의 바로 앞, 이 또한 신어산의 상징물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 초소가 감시의 수준을 넘어 짐짓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어쩌면 90년대 말에 이곳에서 일어났던 큰 산불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철쭉군락지 쪽에는 전망데크를 만들어 조망를 돕고, 공터의 가장자리에는 벤치들을 배치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참고로 신어산의 신어(神魚)’는 수로왕릉의 정문에 새겨진 두 마리 물고기를 뜻하면서 동시에 수로왕의 왕비인 허 황후의 고향인 인도의 아유타국와 가락국의 상징이기도 하단다. 그 이름에서부터 금관가야(金官伽倻) 탄생설화(誕生說話)’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거기다 은하사(銀河寺)나 영귀암(靈龜庵) 남방불교(南方佛敎) 전래의 성지(聖地)’로 분류될 만한 유적들까지 산속에 품고 있으니 가야의 올림포스(Olympos)이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할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일품으로 알려져 있다.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법 굵어진 빗줄기 속에서 조망은 기대할 수조차 없다. 다른 이의 글로서 아쉬움을 달래본다. ‘산마루에 서면 부산을 에워싼 능선의 연봉들이 한눈에 잡힌다. 동쪽으로 독수리 머리를 닮은 금정산 고당봉 용마루가 급격하게 내리 닫아 파리봉을 이루더니 금련산, 백양산, 엄광산을 차례로 지나 푹 꺼지다 다시 구덕산과 승학산으로 치솟아 오른다. 해운대 마린시티의 초고층 아이파크 아파트와 달맞이 고개의 AID 재건축 아파트도 하늘 한자리를 꿰찼다. 남쪽으로 유장하게 대양으로 흘러 들어가는 낙동강 뒤로 화명대교와 다대포, 몰운대, 가덕도 연대봉도 알알이 눈에 박힌다.’ 이 외에도 무척산과 토곡산, 매봉, 오봉산 등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정상에서 산길은 두 갈래(이정표 : 영운리고개 4.0Km/ 상동장척 1.5Km/ 매리(낙남정맥 10.3Km/ 선암다리 6.4Km)로 나뉜다. 하산은 영운리고개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능선을 따라 서봉까지 갔다가 은하사로 내려가기 위해서이다. 이때는 물론 서봉을 오른 후에 직전의 헬기장까지 다시 되돌아와야만 한다. 하산을 시작해도 산길은 내리막길을 만들지 못한다. 능선이 오르내림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밋밋하기 때문이다. 하산을 시작하면 잠시 후 헬기장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나타나는 숲속 오솔길을 얼마간 더 걸으면 벤치와 테이블이 있는 쉼터에 이른다. 이곳에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곳 쉼터 근처에서 영구암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니 놓치지 말고 들러보라는 얘기이다. 영구암은 마치 제비집이라도 되는 양 깎아지른 절벽 위에 매달리듯 자리하고 있다는 산중 암자(庵子)이다. 그것도 가야국의 수로왕비인 허왕옥의 오빠 장유화상이 세운 천년고찰이라니 한번쯤은 둘러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들머리를 찾는 게 그다지 쉽지 않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놓쳐버렸다. 조금 더 관심 있게 지도(地圖)를 살펴보지 못한 게 그 원인이다. 사전지식(事前知識)을 덜 알아온 게 또 다른 원인일 것이고 말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영구암(靈龜庵)은 낙동강 하구에서 바라볼 때 마치 신령한 거북이 중생을 태우고 지혜의 바다로 나아가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산을 시작한지 10분쯤 지나면 출렁다리를 만나게 된다. 이름처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출렁출렁 춤을 춘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다. 다리가 길지 않고 다리 아래에 아스라한 낭떠러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출렁이는 율동에 맞춰 걷기만 하면 된다. 거기다 흥이라도 난다면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면서 말이다.

 

 

출렁다리를 지나면 왼편에 거대한 바위무더기가 나타난다. 잘 하면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빗속에 오르는 것은 금물, 그냥 지나친다. 이어서 나타나는 장척계곡 갈림길’(이정표 : 천진암 0.4Km/ 상동장척 1.7Km)에서 천진암 방향으로 진행하면 잠시 후에는 또 다른 헬기장에 올라서게 된다. 출렁다리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이다. 헬기장에서 또 다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은하사 1.3Km/ 영운리고개 3.0Km)로 나뉜다. 서봉은 이곳에서 영운리 방향으로 조금 더 진행해야 만날 수 있다. 은하사로 하산을 하려면 서봉을 둘러본 후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길은 희미해진다. 낙남정맥의 마룻금을 따르는 능선임에도 이용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얘기일 것이다. 잡목(雜木)들이 갈 길을 방해하는 거친 오솔길을 따라 7분 정도 걸으면 서봉 정상이다. 두세 평 남짓 되는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외에도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과 이정표(이정표 : 상동묵방 1.7Km/ 신어산 헬기장 0.3Km)가 세워져 있다. 정상으로서의 구색을 갖춘 셈이다. 낙남정맥은 이곳에서 골프장을 통과하여 영운리고개로 연결된다. 오늘 산행은 이곳에서 낙남정맥과 이별을 고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헬기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천진암으로 향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은하사 방향이다. 나무데크로 바닥을 깐 길을 따라 잠시 내려오면 다시 맨땅이 나오면서 산길은 서서히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러다가 10분쯤 후에는 구급함이 설치된 갈림길,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있지 않지만 천진암은 왼편이다. 능선을 벗어나 왼편으로 내려선다.

 

 

 

잠시 후 길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바위로 축대(築臺)를 쌓아 보금자리를 마련한 절집 천진암을 만난다. 물론 암자에 들르지 않고 곧장 은하사 방향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천진암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옛스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아마 산신각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이 현대풍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조립식으로 지어진 저런 대웅전에서 고찰(古刹)의 흔적을 찾아보라면 차라리 그것이 더 난센스(nonsense)일 것이다.

 

 

 

축대를 쌓아 올려 절터를 마련한 덕분에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김해평야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뻥 뚫리는 것이다. 짓궂은 비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날이라도 좋을 경우에는 김해시가지와 낙동강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란다. 왼편으로 잠깐 고개를 돌리자 신어산의 산자락이 멋지게 펼쳐진다. 능선에 빼꼭히 들어찬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하나같이 범상치가 않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던 오늘 산행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신어산의 배려인지도 모르겠다.

 

 

천진암에서 다듬지 않은 돌로 만든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서면 주차장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하늘을 찌르는 솔숲 아래로 난 아스팔트도로를 따라 잠시 더 걸으면 7분 후에는 은하사를 만나게 된다. 연록을 지나 진록으로 들어섰지만 산은 더욱 싱그러운 빛으로 변해 있다. 그런 숲속 저만큼에 은하사가 들어앉았다. 언제부턴가 풍경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있다. 경내(境內)를 울려 퍼뜨리다 흥에 겨워 자신도 모르게 담을 넘어온 것이리라. 그리고 그 소리는 은하사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투명하고 청아해진다.

 

경내로 들어서니 신어산 자락에 아래에 자리 잡은 은하사가 나타난다. 그런데 그 풍경이 참으로 낯설다. 지금까지 줄곧 황톳길을 걸어왔는데 뜬금없게도 산자락이 바위들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그것도 온통 기암(奇巖)들이다. 절이 들어앉기에 딱 좋은 장소다. 누군가가 그랬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기암들이 병풍을 둘러친 이런 기막힌 절경을 어찌 스님들이 놓칠 수 있겠는가. 그것도 풍수에 능하다는 스님들이 말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인 은하사(銀河寺)는 구야국(狗耶國)의 수로왕(首露王: 재위 42199) 때 인도에서 온 승려 장유(長遊)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인도불교가 들어온 것을 기념하여 신어산의 동쪽과 서쪽에다 두 개의 절을 지은 후 구야국의 번영을 기원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서쪽에 지어진 절이 서림사(西林寺), 즉 지금의 은하사이고, 동쪽에 지어진 것은 동림사(東林寺)였단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아직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이니 믿고 말고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다만 사찰에서 출토된 토기(土器)의 파편들은 삼국시대의 것들로 추정되니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각설하고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0년대에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화운루, 설선당,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종각 그리고 요사채 2동과 객사 등이 있으며, 이 중 3칸의 정사각형으로 지어진 대웅전은 조선 중기 이후에 세워진 전각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8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로 은하사라는 절의 이름은 신어산이 예전에는 은하산(銀河山)이라 불리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소금강산이라는 신어산의 별칭으로 인해 소금강사(小金剛寺)라고도 불렸다고 전한다.

 

절에 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범종루(梵鐘樓), 오는 길에 이대장이 한번쯤 눈여겨 볼만하다고 귀띔해주던 건물이다. 그의 말마따나 이층으로 된 전각(殿閣)은 예사롭지 않다. 어른 두 사람이 한꺼번에 껴안아야 할 정도로 굵은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것이 보기에도 우람스러운데, 거기다 그 기둥들이 하나같이 원목(原木)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단청(丹靑)을 하지 않아 원목의 무늬는 물론 푹 파인 옹이까지도 그대로 드러나던 백봉산 자락의 묘적사 관음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눈여겨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산행날머리는 은하사주차장

영화 달마야 놀자를 떠올리며 경내를 구경하다 이내 발걸음을 돌린다. 박신양, 정진영 주연의 달마야 놀자는 깡패와 스님들이 엮어가는 유쾌한 코믹영화이다. 절간을 접수한 깡패들과 젊은 스님들이 족구시합과 무술시합, 거기다 고스톱 대결까지 벌인다. 영화는 재미있었고 물론 흥행에도 성공했었다. 그들이 놀이터로 만들어버렸던 대웅전을 바라본다. 그러나 당시의 풍경과는 많이 동떨어진 것 같다. 하긴 진경(眞景)과 연출(演出)이 조합되었을 풍경을 실제로 찾아본 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경내를 빠져나오면 하산 길은 운치 있는 연못 가운데로 나있다. 이어서 나타나는 바위계단을 내려선 후 아스팔트도로를 따라 4~5분쯤 더 내려가면 일주문을 만나게 되면서 산행은 거의 끝을 맺는다. 산행이 종료되는 주차장은 이곳에서 돌계단을 따라 2~3분만 더 내려가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20분이 포함된 시간이다.

백암봉(白岩峰, 681.2m)-용암봉(龍岩峰, 684.7m)-소천봉(小天峰, 632m)

 

산행일 : ‘15. 5. 14()

소재지 : 경남 밀양시 상동면과 산내면 그리고 산외면의 경계

산행코스 : 도곡마을 복지회관디실재백암봉용암봉소천봉삼거리봉도곡저수지(산행시간: 3시간20)

같이한 산악회 : 강송산악회

 

특색 : 3개의 봉우리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 다만 백암봉에서 용암봉 사이의 능선에 잘 발달된 바위 무더기가 두어 곳 발달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그것도 시루떡처럼 생긴 기이하면서도 예쁘장한 것들로 채워졌다. 층리(層理)가 잘 발달된 퇴적암으로 말이다. 조망(眺望) 또한 이와 같다. 흙산의 특징대로 각 정상들 모두 조망을 허락하지 않지만, 바위가 있는 구간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전망대들은 그런 아쉬움을 보상해주기에 충분하다. 남동쪽의 천황산, 재약산과 북동쪽에 있는 구만산, 억산, 운문산, 가지산 등, 영남알프스 산군의 봉우리 대부분이 시야(視野)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오늘 걷는 코스 중, 디실재에서 용암봉까지는 운문지맥을 따라 걷게 된다. 요즘 지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등산로는 잘 뚫려있는 편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세워져 있지 않는 등 이곳 지자체(地方自治團體)에서 완전히 방치하고 있는 흔적이 역력하다. 자못 뛰어난 영남알프스의 준봉들에 가려 이곳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때문에 곳곳에서 길을 잃을 염려가 있다. 사전에 지도(地圖)와 나침판을 준비하고 찾아가는 게 바람직한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도곡복지회관(밀양시 상동면 도곡리 상도곡마을)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 I.C에서 내려와 교차로에서 청도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긴늪사거리에서 우회전해 25번 국도를 타고 달리면 상동면사무소를 지나 신곡사거리(상동면 금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1017번 지방도를 타고 들어가다 고정마을회관(상동면 고정리) 앞에서 다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도곡마을(상도곡) 복지회관 앞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도곡리에는 복지회관 외에도 마을회관을 따로 두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도곡리 중심부락에 있는 마을회관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올라가야 만나게 되는 상도곡마을의 복지회관이니 주의할 일이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아쉬운 마음을 가슴 한편에 꾹 눌러두면서 말이다. 이유는 단 하나, 이 마을의 명물이라는 호랑이굴을 둘러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네 주민에게 물어물어 겨우 호랑이굴의 위치를 파악했지만, 다들 듣는 채도 않고 골목으로 들어서기 바쁘니 어쩌겠는가. 호랑이굴이라는 것 자체가 도통 관심들이 없는 모양이다. 우리부부도 그들을 뒤쫓을 수밖에 없다. 고작해야 15분이면 충분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 부부만이 다녀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부부가 따라나선 무리는 B, 내가 알기론 방향표시지를 깔지 않는 그룹이다. 이정표도 없는 이런 오지(奧地) 산에서 자칫 잘못하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겠기에, 벗어날 생각을 애당초부터 버렸던 것이다.

 

 

마을을 벗어나면 임도(林道)를 따른다. 아니 농로(農路)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리겠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가지를 치는 곳마다 어김없이 농지(農地)나 과수원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봄이 왔나싶었는데 봄은 이미 깊어졌었나 보다. 길가 모판의 모들이 저렇게 훌쩍 자라버린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6월이 두어 주 밖에 남지 않았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에서 성숙하는 계절로 바뀌는 초입에 들어섰다는 얘기이다.

 

 

마을을 빠져나가다 뒤돌아본 풍경, 외진 산골마을답게 서슬 시퍼런 벼랑 위에 가옥(家屋)들이 들어앉았다.

 

 

길가는 대부분 감나무 과수원, 밀양에서 생산되는 과일로는 얼음골 사과대추가 유명한 것으로 아는데 의외이다. 이웃 지자체(地方自治團體)인 청도의 특산품 중에 반시(감의 모양이 둥글납작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가 있는데, 그러고 보니 이곳 상동면은 청도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도곡리는 더욱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농로를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길이 좁아지면서 순수한 임도로 변한다. 길 주변 또한 과수원에서 드릅나무 밭으로 바뀌었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냉큼 밭으로 들어간다. 이미 채취가 끝났지만 남겨진 이삭이라도 몇 개 주어보려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녀는 가시가 보송보송한, 그러니까 상품성이 조금도 없는 새순을 두 손 가득히 들고 나왔다. 다음 날 아침 밥상, 우리부부는 약간은 거칠지만 봄내음 가득한 드릅을 한 입 그득히 넣으면서 봄이 물려가면서 전해준 낭만을 맘껏 음미(吟味)할 수 있었다.

 

 

임도를 따라 7~8분쯤 더 걸으면 왼편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 하나가 나타난다. 디실재로 올라가는 길이니 놓쳐서는 안 될 일이다. 이정표가 눈에 띄지 않는 탓에 그냥 통과해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저 길 찾기에 주의를 요하는 수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지 않나 싶다. 임도가 산자락 아래에 들어붙었다 싶으면 왼편을 잘 살펴보다가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이 매달려 있는 곳으로 들어서는 방법 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얘기이다.

 

 

산자락에 들어서서도 산길은 계속해서 완만하게 이어진다. 흡사 정글을 연상시킬 정도로 넝쿨식물과 잡목(雜木)이 우거진 숲속으로 난 산길은 비록 또렷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찾아갈 만은 하다. 그러다가 능선에 가까워지면서 서서히 가팔라진 산길은 마지막으로 왔다갔다 갈지()자를 잠시 그린 후에 디실재위에 올려놓는다. 산자락에 들어선지 14, 산행을 시작한지는 21분이 지났다.

 

 

 

디실재는 중산에서 용암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의 안부에 있는 사거리이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중산, 그리고 고갯마루를 넘어가면 골안마을(산외면 희곡리)이 나온다. 우리가 가야할 백암봉은 물론 왼편에 보이는 능선을 따라야 한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운문지맥, 여기가 디실재입니다라고 쓰인 팻말이 가장 먼저 반긴다. ‘.라는 분의 작품인데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이런 오지(奧地)의 산에서 만나게 되는 저런 팻말들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정표도 없는 곳에서 길 찾기에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팻말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이곳 디실재에서부터는 운문지맥(雲門枝脈)을 따라 산행이 이어진다. 운문지맥은 낙동정맥의 가지산(1,241m)에서 남서쪽으로 분기하여 운문산과 억산, 구만산, 용암봉, 낙화산, 비학산 등을 만든 후 밀양시 산외면 정문마을의 밀양강변에서 그 맥을 다하는 산줄기이다.

 

 

디실재에서 산길의 풍경은 확연히 변한다. 고갯마루 부근에서 잠시 느긋했던 산길이 서서히 가팔라지더니 끝내는 산이 허리를 곧추세웠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가팔라져버린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거기다 하나 더, 바위 하나 구경할 수 없었던 순수한 육산(肉山)에 갑자기 바위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것도 커다란 것들로 말이다. 그런데 이 바위들의 생김새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 그렇다. 영락없이 시루떡을 빼다 박았다. 이곳뿐이 아니다. 오늘 산행에서 만난 바위들은 하나같이 모두 시루떡을 닮아 있었다.

 

 

 

 

디실재에서 20, 시루떡을 닮은 바위에서는 7~8분쯤 더 오르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어디로 갈지를 갖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두 길은 정상에서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다만 스릴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오른편으로, 그렇지 않다면 왼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단 오른편 코스로 갈 경우에는 안전로프에 매달리는 것은 물론 수직(垂直)에 가까워 벼랑을 나무에 의지해서 올라야하는 번거로움은 감수해야 한다.

 

 

 

 

벼랑에 올라서면 백암봉 정상은 코앞이다. 정상은 산봉우리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밋밋하다. 거기다 정상표지석은 물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만일 나무에 매달려있는 정상표지판마저 없었더라면 십중팔구(十中八九) 이곳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일 것이다. 팻말을 설치한 .라는 분께 감사를 드려본다. 산깨나 탄다는 사람들이 이골이 나도록 자주 접해왔던 .라는 분은 국제신문의 산행대장을 역임했던 최남준씨라고 한다. 그가 정상석이 없는 산들을 찾아다니며 이런 조그만 팻말형 안내판을 걸어둔다는 것이다. 시작을 같이 했던 후배는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지만, 그의 선행(善行)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삼거리인 정상에서는 왼편으로 진행한다. 만일 오른편에 보이는 희미한 길로 들어설 경우에는 괴곡마을(산외면 희곡리)로 내려서게 되니 주의할 일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잠시 후에 삼거리,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왼편은 아까 갈림길에서 완만한 왼쪽코스로 진행했을 경우 올라오게 되는 길이니 참조할 일이다. 삼거리에서 용암봉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멋진 전망바위가 나타난다. 꽉 막혀있던 백암봉 정상에서의 갈증을 해소시켜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시원스럽게 시야가 트이는 곳이다. 허나 아쉽게도 짙은 연무(煙霧)로 인해 기껏해야 신내면 방향의 골짜기만 시야에 들어올 뿐,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영남알프스의 거대한 산군(山群)들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전망바위를 지나서도 바위지대는 계속된다. 기괴하게 생긴 바위들과 소나무들이 잘 어울리는 그야말로 멋진 길이다. 바위들은 하나 같이 시루떡을 닮았다. 좀 고상하게 표현한다면 고성 상족암이나 변산반도의 채석강이 연상될 정도로 퇴적암의 층리(層理)가 잘 발달돼 있다는 얘기이다. 그 첫 번째는 백암봉 정상에서 8분쯤 되는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사각의 기둥처럼 생긴 바위 두 개가 마치 문설주처럼 나란히 서있는 것이다. 함께 걷던 일행이 통천문일지도 모르겠단다. 그러나 진짜 이름은 2 문바위란다. 이는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문바위라는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느 누군가가 걸어둔 이정표에다 그렇게 표기해 놓은 것이다.

 

 

 

 

2문바위근처에는 마당바위도 몇 개 보인다. 시루떡의 맨 위처럼 반반한 것이 여럿이 한꺼번에 쉬어가기에 딱 좋은 곳이다. 거기다 점심상이라도 차린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이고 말이다.

 

 

산에는 이런 야생화(野生花)들은 물론이고, 산나물이 지천이다. 참취는 물론이고, 비비추에 고사리, 광대나물 등 산나물들이 사방에 널려있다시피 하다. 지맥종주를 하는 사람들이나 찾는 오지(奧地) 산이라서 사람들의 때를 덜 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루떡 무더기를 지나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나오고, 짙은 소나무 향에 코끝을 찡그리다보면 10여분은 훌쩍 지나가버린다. 그리고 또 다시 거대한 시루떡들의 모임이 시작된다. 누군가가 매달아 놓은 이정표에 문바위라고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 ‘2’3’이 아닌 그냥 문바위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주위의 바위들은 아까보다 훨씬 더 커졌다.

 

 

 

 

산행은 이 바위 틈새로 오르기도 하고 에돌기도 한다. 그러다 바위 위로라도 올라설라치면 어김없이 전망대가 된다. 첫 번째는 왼편, 상동면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그러나 산하(山河)는 조망(眺望)을 허락하지 않는다. 골짜기 너머에 있을 옥교산은 물론이고 왼편 가까이에 있어야할 낙화산과 보담산까지도 흐릿할 뿐이다. 연무(煙霧)가 너무 짙은 탓이다.

 

 

시루바위로 가는 길에 만난 앙증맞은 다리가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론 고맙다. 두 바위 사이의 깊이가 겁이 날 정도로 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음 놓고 건너뛰기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중간에 683.2m봉을 지나면 또 다시 거대한 바위가 나타난다. 이번의 것도 역시 영락없는 시루떡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의 것에는 시루바위라는 어엿한 이름까지도 갖고 있다. 물론 누군가가 매달아 놓은 사제(私製) 이정표에 적혀있었지만 말이다. 바위 위에 올라서면 이번에는 오른편, 그러니까 남동에서 북동쪽으로 시야(視野)가 뻥 뚫린다. 천황산과 재약산, 그리고 구만산에서 억산과 운문산을 거쳐 가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조망된다는 곳이다. 그러나 심술궂은 연무(煙霧)는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고 있다.

 

 

 

시루바위에서는 코앞으로 다가온 용암봉을 향해 방향을 잡는다. 내려갈 때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3~4m쯤 되는 벼랑은 그다지 높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수직에 가까우면서도 면()이 고르지 못한 탓에 로프에 매달려 중심을 잡기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시루바위에서 안부까지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치고 오르면 용암봉 정상이다. 백암봉에서 50분이 조금 못 걸렸다

 

 

정상은 소나무에 둘러싸인 둥그런 형태의 공터다. 7~8년 전만 해도 사방이 확 트인 헬기장이었다지만 발아래 깔린 보도블록들이 옛이야기를 전해줄 뿐, 지금은 소나무들만이 무성하다. 때문에 조망(眺望) 또한 꽉 막혀있음은 물론이다. 정상은 작고 귀여운 정상표지석과 삼각점(동곡 334)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이정표는 역시 보이지 않는다. 길이 둘로 나누어지는 곳이니 길 찾기에 주의해야 함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곳에서 오른편은 오치고개와 육화산을 거쳐 운문산과 가지산으로 연결된다. 즉 이곳에서 함께 달려온 운문지맥과 헤어진다는 얘기이다. 답사로는 용암봉에서 왼쪽, 소천봉 방향이다.

 

 

용암산을 지나면서 능선은 다시 전형적인 육산(肉山)으로 변한다. 덕분에 걷기에 무척 편한 산길이 이어진다. 용암봉에서 10분쯤 내려서면 안정고개이다. 누군가가 고맙게도 사제(私製) 이정표를 매달아 놓았다. 왼편으로 내려가면 도곡리 윗마을이 나오고, 오른편은 신곡리 안정마을로 연결된단다.

 

 

 

안정고개에서 소천봉까지는 제법 긴 거리이다. 거기다 육산(肉山)의 특징대로 특별한 눈요깃거리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구간이다.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고 있는 능선을 따라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다.

 

 

 

안정고개를 출발해서 30분 정도가 지나면 소천봉에 올라서게 된다. 비록 용암봉 정상보다는 좁지만 그래도 펑퍼짐하다고 볼 수 있는 공터에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어른 키 높이의 돌탑이 쌓여있다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천봉도 역시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그리고 용암봉과 마찬가지로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다. 소천봉도 역시 길이 둘로 나뉜다. 돌탑 뒤로 내려갈 경우에는 신곡리 음지마을로 연결되고, 도곡저수지로 가려면 왼편 매화리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하산을 시작한다. 잠시 아래로 내려섰다가 바위 몇 개가 있는 지점을 통과하여 위로 오르면 10분 후에는 삼거리봉에 올라서게 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하산지점을 모정마을이나 매화마을로 잡았다면 맞은편으로 곧장 내려서면 된다. 그러나 만일 도곡저수지방향으로 내려가고 싶다면 왼편의 숲을 잘 살펴보아야한다. 잘 살펴보지 않을 경우 그냥 음지마을로 내려설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만큼 왼편으로 갈리는 오솔길이 희미하다는 얘기이다.

 

 

 

아쉽게도 우리 일행은 박연정(博淵亭)이라는 정자가 있다는 모정마을(또는 매화마을) 방향으로 잘못 들어서고 말았다. 무조건 또렷한 길만 고집한 탓이다. 소나무 숲이 울창한 가파른 내리막길을 얼마나 내려왔을까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까 우리가 지났던 봉우리에서 분기되는 능선이 또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 능선에 돌출된 바위들이 아침에 산행대장이 설명하던 상황과 일치한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잘못 들어선 것을 알고 나서도 그냥 진행하기로 한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내려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산지점인 도곡저수지가 왼편에 있기에 무턱대고 능선을 탈 수 만은 없는 일이다. 별 수 없이 왼편으로 길을 내보기로 한다. 그러나 첫 번째는 실패였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가팔라지기에 오른편 사면(斜面)으로 길을 열었더니 본래의 능선길과 다시 만나 버린 것이다.

 

 

본래의 능선으로 되돌아와 하산을 이어가면 얼마 후, 그러니까 소천봉에서 25분쯤 되는 지점에서 지능선이 왼편으로 분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능선으로 난 길이 비록 희미하지만 따라보기로 한다. 우리의 판단은 옳았다. 지능선을 따라 얼마쯤 내려오다 도곡저수지를 가늠해서 왼편 경사면(傾斜面)을 치고 내려서면 과수원이 나타나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고정리와 도곡리를 연결하는 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과수원에 이르기까지 우리 스스로 길을 내었음은 물론이다. 지능선으로 내러서서 17, 소천봉에서는 50분이 걸렸다.

 

 

 

산행날머리는 도곡저수지

도로에 내려서면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오른편은 고정리 모정마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분쯤 거슬러 올라가면 도곡저수지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3시간30분이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20분이 걸린 셈이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내려온 거리를 감안한다면 산행시간이 너무 짧다고 볼 수 있다. 그럴 경우에는 도곡저수지 근처에 있는 법성사에 잠시 들러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마침 저수지 주변에 땀을 씻을 만한 곳이 없으니 세수라도 할 겸 해서 말이다.

정족산(鼎足山, 748.1m)

 

산행일 : ‘15. 5. 16()

소재지 : 경남 양산시 주남동·하북면,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삼동면의 경계

산행코스 : 영산대학 양산캠퍼스임도주남고개용바위정족산노전암천성산공룡능선 갈림길내원사주차장(산행시간: 4시간)

같이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색 : 전형적인 육산(肉山)에 정상 부위만 바위로 이루어진 독특한 외형의 산으로 정상부의 바위들이 흡사 솥발처럼 솟아있다 하여 솥발산이라고도 불린다. 700m 대의 결코 낮지 않은 산이지만 들머리에서 정상까지의 거리가 긴 탓에 산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만한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거기다 짙은 숲속으로 난 황톳길은 한없이 보드랍다. 한마디로 산행이라기보다는 동네 뒷산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양산판 둘레길을 걷는 기분이라면 이해가 갈는지 모르겠다. 또 다른 장점으로는 정상에서의 뛰어난 조망(眺望)을 들 수 있다. 거기다 하나 더한다면 노전암 앞으로 흐르는 상리천이다. 하얀 암반(巖盤) 위로 흐르는 맑은 물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자못 빼어나다. 반면에 단점도 있다. 능선의 곳곳에서 임도를 따라야 하는 탓에 따가운 땡볕아래 노출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영산대학교 양산캠퍼스(양산시 주남동 산150)

동해고속도로 문수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이용 양산까지 온다. 양산시내의 상호교차로(交叉路 : 양산시 삼호동)에서 우회전 1028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영산대학교 양산캠퍼스에 이르게 된다.

 

 

 

산행은 영산대학교 본관의 뒤편으로 열린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백련사방향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대학의 왼편 끄트머리로 난 등산로를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이곳으로 오를 경우 천성산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물론 능선으로 오른 후에 정족산으로 진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 의미도 없는 길을 일부러 길게 돌아서 갈 필요는 없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19973월 단과대학(8개 학과)으로 문을 연 영산대학교(靈山大學校, Youngsan University)는 현재 2개 캠퍼스(양산, 해운대)6개 단과대학(34개 학과)7개 대학원을 거느린 종합대학으로 발돋움하였다.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학풍 탓인지 관광, 보건, 부동산, 조리, 미용 등 주로 전문대학들에서 운영하는 학과들이 많이 눈에 띄는 것이 특징이다.

 

본관 건물 가운데로 난 통로를 이용해도 임도와 연결된다.

 

 

주남고개까지는 임도로 연결된다. 30분 이상이나 걸리는 먼 길이다. 거기다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가 차량의 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따랗다 보니 햇빛에 노출될 것이 당연하다. 여름 산행에는 달갑지 않은 코스라는 얘기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르막의 경사(傾斜)가 완만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루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른 특징이 없는 길을 타박거리며 오르는데 오른편에 둥그런 ()’이 그려진 바위가 하나 보인다. 원불교의 낯익은 표식(表式)이다. 그러면 그렇지 싶다. 어쩐지 영산대학교라는 이름이 낯이 익더라니. 원불교와 인연이 있는 대학이었나 보다. 석가여래가 설법을 마치면서 대중들에게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셨다는 영산(靈山)은 고대 인도 마갈타국(摩竭陀國)의 수도인 왕사성(王舍城)의 북동쪽에 있는 산이다. 당연히 불교에서는 신성시 여길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나라 4대 민족종교 중에서도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는 원불교(圓佛敎)에서는 교의 창립자인 소태산(少太山=박중빈) 대종사(大宗師)가 태어나고 개교(開敎)를 한 곳을 영산이란 이름을 붙여 근원성지(根源聖地)로 삼고 있을 정도이다. 원불교와 영산대학교의 연관성을 상상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해 본 결과 두 곳의 연관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정관념(固定觀念)이 불러온 착각이었던 것이다. 영산대학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백련사라는 사찰이 원불교 교단이었었나 보다.

 

 

주남고개에는 이정표(노전암 3.9Km, 한듬계곡 4.4Km/ 천성산24.2Km, 영산대 1.6Km, 가사암)천성산 등산안내도외에도 양산 누리길이라는 종합안내도가 하나 더 세워져 있다. 양산판 둘레길인 모양인데 지도만 보고는 구간이나 접근방법 등을 알 수가 없다는 게 조금 아쉽다. 고개에 올라서면 왼편 능선으로 길이 나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남정이라는 정자(亭子)가 있다지만 일부러 가볼 것까지는 없을 것 같아 곧장 정족산으로 향한다. 계속해서 노전암 방향의 임도를 따라야함은 물론이다.

 

 

일단 주남고개에 올라서고 나면 임도의 경사는 현저히 줄어든다. 거기다 그늘까지 져서 시원하기까지 하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구간이란 얘기이다. 고갯마루 근처에서 조계암 및 안적암으로 가는 길을 나뉘어보내고, 계속해서 대성암 방향으로 진행하다보면 10분 후에는 오른편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이정표 : 정족산 정상 2.4Km/ 대성암 1.9Km/ 주남고개 0.6Km)이 나타난다. 계속해서 임도를 따라도 되지만 이왕이면 오솔길로 들어설 것을 추천한다. 이왕에 산에 왔으니 시멘트길 보다는 흙길을 걷는 게 좋을 것이고, 거기다 오르내림의 경사까지 거의 없어서 걷기에 부담까지 없기 때문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능선은 금방이다. 10분이 채 안되어 능선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가파른 것도 아니다. 임도 보다 오솔길을 권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능선에 세워진 이정표(정족산 정상 2.1Km/ 주남고개 0.9Km)에 낙동정맥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 맞다. 오늘 걷게 될 능선의 대부분은 낙동정맥을 따라 걷게 된다. 참고로 낙동정맥(洛東正脈)이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구봉산(九峰山 : 강원도 태백시)에서 분기하여 부산 다대포의 몰운대(沒雲臺)에서 숨을 다하는 약 370의 산줄기를 말하며, 주요 산으로는 백병산과 주왕산, 가지산, 취서산, 금정산 등이 있다.

 

 

 

능선에 올라서서도 산길의 풍경은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보드라운 흙길과 완만한 오르막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골고루 섞여있는 나무들의 조합 또한 변함이 없다. 능선을 따라 3~4분쯤 걸으면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오른편의 전망바위에서는 울산시 방향이 열리고, 잠시 후 내려가는 구간에서는 천성산 방향이 시원스럽다. 허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하(山河)를 둘러싼 짙은 안개가 조망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연록의 능선이 갑자기 변해버린다. 누런 시체들이 능선을 가득 채우고 있다. 능선을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는 산죽(山竹)들이 모조리 죽어있는 것이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신우대란다. 하나도 남김없이 죽어버린 것이 혹시 말세(末世)의 징조일지도 모르겠다는 내 얘기를 듣고 앞서가던 김진수선배께서 산죽의 종류를 바로잡아 주신다. 종류야 어떻든 산죽은 평소에는 꽃을 피우지 않고 죽순으로 번식한다. 그러나 일생에 단 한번 꽃을 피운다. 더 이상 삶을 유지할 수 없을 때 꽃을 피운 뒤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에는 그 씨앗으로 종족을 이어간다. 그런 상황을 일러 천재지변(天災地變) 등의 징후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말세라는 표현이 생각났던 것이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무르지 않고, 대나무의 열매(練實)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원추(鵷鶵=봉황새)라는 새의 유일한 먹이라는 그 귀한 씨앗 때문에 말이다.

 

 

전망봉에서 5분쯤 더 진행하면 대성암분기점(이정표 : 정족산 정상 1.7Km/ 대성암 1.3Km/ 주남고개 1.3Km)에 이른다. 왼편에 능선과 나란히 이어지는 임도가 보인다. 그리고 이 임도는 10분쯤 후에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대성암 갈림길까지 계속된다. 아까 능선으로 올라서지 않고 곧장 임도를 따랐을 경우 더 편하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는 얘기이다. 다만 보드라운 흙길을 걷는 즐거움과 시원스런 조망을 즐기는 눈의 호사(豪奢)를 포기해야 하지만 말이다.

 

 

 

또 다른 대성암 갈림길’(이정표 : 정족산 정상 1.3Km/ 대성암 0.9Km/ 주남고개 1.7Km) 아래에 널따란 공터가 보인다.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니 차량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주차장으로 이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공터의 옆은 벤치에다 정자(亭子)까지 갖춘 반듯한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 지자체에서 등산로 정비에 쏟고 있는 노력이 돋보이는 풍경이다.

 

 

공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그렇다고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거기다 오르막의 길이까지도 짧다. 그저 쉬엄쉬엄 오르면 될 일이다. 산길은 7~8분쯤 후에는 또 다시 임도를 만나게 된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정족산 산행을 하다보면 유난히도 임도를 자주 만나게 된다. 아마 산의 곳곳을 임도로 연결시켜 놓은 모양이다.

 

 

임도를 따라 잠시 올라서면 저만큼에서 정족산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바위로 이루어진 꼭대기가 제법 수려하다. 그 자태를 즐기면서 다시 7~8분쯤 걸으면 산길은 다시 임도와 헤어지면서 왼편 산자락(이정표 : 정족산 정상 0.3Km)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이어지는 산길은 상당히 가팔라진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주변의 풍경은 확연히 달라진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의 형태를 보이던 산길이 바윗길로 변하는 것이다. 덕분에 곳곳에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천성산 방향의 산들이 나타난다. 짙게 낀 안개 탓에 비록 흐릿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지금은 천성산을 1봉과 2봉으로 합쳐서 부르지만 그 전엔 군부대가 장악한 원효암의 뒷산을 원효산, 그리고 내원사가 자리한 천성산으로 분리해서 불렀었다. 일반인의 출입이 불가능한 원효산을 한 때는 초성산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그도 못마땅했던지 최근엔 아예 원효산을 천성1, 천성산을 천성2봉으로 부르는 것이다. 원효산의 정상을 점령해버린 군부대가 그 원인을 제공했다고 보면 될 듯 싶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10분쯤 오르면 요상하게 생긴 바위가 2~3m높이로 포개져있는 것이 보인다. ‘용바위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정족산의 명물이다. 바위는 소문대로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용()을 닮지는 않았다. 꼭 집어 뭐를 닮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기록에 의하면 가뭄이 들 경우 이곳 용바위에다 제단(祭壇)을 마련하고 산신(山神)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어쩌면 비를 내리게 해주는 영물이 ()’이라는 것에서 모티브(motive)를 타온 이름이 아닐까 싶다. 이곳 언양지방의 또 다른 기우소(祈雨所)가 있는 고헌산 기우소의 이름이 용샘인 것과 같이 말이다.

 

당신은 영원한 내꺼, 사진은 비록 내 가랑이 사이이지만 실제는 언제나 내 가슴 속에 오롯이 있나이다.

 

 

용바위에서 기이한 생김새에 매료되어 사진촬영에 열을 올리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거대한 바위벼랑을 왼편으로 우회(迂廻)한 후, 길가에 늘어선 기암괴석(奇巖怪石)들에 눈을 맞추다보면 어느덧 정족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임도를 벗어난 지 20, 산행을 시작한지는 1시간40분 정도가 지났다.

 

 

 

정상은 거대한 바윗덩이들이 불규칙적으로 곧추선 형상이다. 정상표지석은 정상을 이루는 바위들 중 가장 높은 바위 위에다 세워 놓았다. 당연히 정상은 설자리도 마땅찮을 정도로 비좁다. 혹여 정상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이라도 찍으려면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하긴 정상이 반석(盤石)으로 이루어졌지 않음에야 이런 곳에서 공간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참고로 풍수가들은 정족산을 화산(火山)으로 본다고 한다. 능선이 세 발 달린 밥솥처럼 뻗어나갔다(솥발산=鼎足山)’는 데서 유래된 해석이다. 때문에 암 환자들이 맨발로 정족산을 오르내리면 낫는다는 속설(俗說)도 있다. 몸속에 똘똘 뭉친 암의 기운이 펄펄 끓는 솥에서 녹는다는 것이다.

 

 

정상의 건너편에 또 다른 바위가 보인다. 연록의 숲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바위의 상부에다 태극기를 새긴 석판(石板)을 붙여놓았다. 조금만 고생하면 바위 위로 오를 수도 있으니 태극기를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어보는 것도 괜찮은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주 먼 옛날 하늘과 땅이 열릴 때 물난리가 났는데, 정족산 정상 또한 모두 물에 잠겨버리고 솥발(鼎足)만 남아 물에 찰랑거렸다고 한다. 그 꼭대기의 높이만큼이나 바라보이는 세상 또한 넓다. 사방 어디를 봐도 거칠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조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주변에 짙게 낀 안개 때문에 그저 그게 그거려니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놓여 있는 산들의 위치를 나열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국제신문의 산행기에서 옮겨왔으니 참조하길 바란다. 서쪽으로는 영남알프스의 주능선이, 북쪽 멀리로는 경주의 남산 금오산 울산 치술령, 그 오른쪽 앞으로 문수산과 남암산이 보이고 더 오른쪽 멀리로는 울산시가지와 동해 바다까지 눈에 든다. 동쪽으로는 대운산과 시명산 불광산 능선이 남쪽으로 내달리고 더 아래로는 함박산과 달음산, 해운대 장산까지 들어온다.

 

 

하산길은 철쭉 군락지 사이로 나 있다. 그렇게나 화사했던 꽃들은 져버린 지 이미 오래, 그저 늦부지런을 떠는 꽃들 몇 개가 이미 시들어버린 꽃들의 잔해(殘骸) 속에서 봄을 보내는 아쉬움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도 좋다. 볼품없는 꽃이라고 해서 꽃이 아닐 리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꽃들은 어김없이 아름다울 테고 말이다.

 

 

철쭉꽃밭을 지나면 또 다시 임도가 반긴다. 임도를 따라 15분쯤 걷다가 이번에는 왼쪽 산자락(이정표 : 동부마을 5.9Km/ 삼덕공원묘지 0.5Km/ 정족산 0.9Km)으로 들어선다. 또 다시 시원한 숲길이 이어진다. 날씨가 더워지는 만큼 따가운 햇볕이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날씨, 이런 때에 딱 좋은 산길이다.

 

 

 

산자락에 들어서도 큰 오르내림이 없는 산길이 이어진다. 가는 길에는 또 하나의 멋진 전망대를 만난다. 천성산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넓게 열리지만 아쉽게도 또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짙게 낀 안개가 아직까지도 걷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조금 더 걸으면 무인산불감시탑이 있는 662m봉이다. 산자락으로 들어서서 7분 정도 걸은 지점이다. 낙동정맥은 이 봉우리에서 서북진하며 지경고개로 내려섰다가 영취산 신불산으로 이어지며 북상한다. 봉우리에 올라서면 북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조망(眺望)이 트인다. 영축산이나 신불산이 보여야하지만 아쉽게도 안개에 둘러싸인 산하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662m봉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첫 번째 헬기장이 나오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기괴하게 생긴 바위를 하나 만나게 된다. 언제가 어린이용 애니메이션(animation)에서 보았던 괴물의 얼굴이 떠오르는 형상이다. 그리고 근처에서 또 다시 조망이 트인다. 이번에는 천성산방향이 열리면서 조금 후에 내려가게 될 북대골이 눈에 들어온다.

 

 

 

기암(奇巖)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오른편 숲속에 작은 연못이 하나 보인다. 길은 나있지 않지만 냉큼 들어서서 카메라의 셔터부터 누르고 본다. 혹시 습지(濕地)’가 아닐까 해서이다. 그만큼 이곳 정족산은 습지와 연관이 깊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생태계 보존지역으로 지정된 '무제치 늪으로 정족산의 어깨부분에 있다. 6000년 전에 생성된 무제치늪은 과학적 검증을 거친 국내의 늪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져 한반도 남부지역의 자연생태계 변천과정과 습지 동식물의 서식변화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자연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런 내 추측이 틀렸음은 채 차 한잔 마시기도 전에 알아차리게 된다. 그 연못은 천연습지가 아니라 근처 공원묘지에서 인공적으로 만든 저수지였던 것이다.

 

 

두 번째 헬기장을 지난 후, 한적한 숲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오른편에 임도가 보인다. 662m봉에서 20분 조금 더 되는 지점이다. 이 임도를 스쳐지나가자마자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계속해서 능선을 따르는 길, 노전암으로 하산코스를 잡았다면 왼편의 북대골짜기로 내려서야함은 물론이다. 갈림길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북대골, 골짜기 상류는 물기 한 점 없는 건천(乾川)이다. 물 대신에 크고 작은 수많은 바위들이 흡사 물결처럼 아래로 흘러가는데, 산길은 그 너덜을 피해 골짜기 옆으로 나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법 많은 양의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산행에서 흘린 땀을 씻고 가기에 충분한 양이다.

 

 

 

 

북대골은 그다지 넓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골짜기 주변을 돌로 축대(築臺)를 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수많은 작은 밭들이 만들어져 있다. 아마 화전민(火田民)들이 살았던 흔적인 모양이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자투리땅일망정 허투루 내버려두지 않았던 우리내 조상들의 지난(至難)했던 삶에 가슴 한편이 저려오는 순간이다.

 

 

물소리 그득한 개울을 서너 번 건너다보면 저만큼에 노전암(露田庵)이 나타난다. 임도 옆 갈림길에서 40분 정도 되는 지점이다. 노전암은 비좁은 절터를 조금이라도 더 넓혀보려 했던 스님들의 고심(苦心)이 역력하게 나타나는 모양새이다. 개울 쪽에다 길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절터를 조성해 놓았다. 노전암을 보았다고 해서 곧장 경내(境內)로 들어갈 수는 없다. 절의 입구 쪽에 있는 예쁘장하게 생긴 나무다리(이정표 : 한듬계곡 2.0Km, 성불암 2.0Km/ 주남리 5.1Km)를 건넌 후, 다시 거슬러 올라와야만 절간 안으로 들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노전암 경내에 들게 된다. 돌탑과 석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전암엔 주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은 보이지 않는다. 돌탑 주변에 조성된 제법 너른 공터의 뒤에 외로운 듯 산신각(山神閣)만이 서있을 따름이다. 그리고는 공터의 왼편에 제법 규모가 있는 요사(寮舍)가 보인다. 대웅전을 찾아 서성이는데 절에서 키우는 개들이 사납게 짖어댄다. 이를 본 스님(아니 보살님인지도 모르겠다)이 새로 지으려고 준비 중이라고 알려주신다. 그러고 보니 요사 앞에 도란도란 앉아 있는 대여섯 명의 스님들이 모두 여자들이다. 비구니(比丘尼)들이 수도하는 사찰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소문이 자자한 점심공양이 가능할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경남유형문화재 제202호인 노전암(露田庵)은 내원사(內院寺:경남기념물 81)의 암자 중 하나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가 없고, 그저 조선 순조 때 태희선사가 중건했다는 것 정도만 전해지는 자그만 산중 사찰이다. 그러나 원효(元曉)대사가 내원사를 창건했고, 원적산에 데리고 온 1,000명의 제자를 가르치자 모두 득도하여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이 산을 천성산(千聖山)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점, 또한 도를 닦을 시기에 산중에 89개의 암자(庵子)를 지었다고 전하는 바로 미루어보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수통에 물을 채운 후에 일주문을 빠져나온다. 이제부터는 널따란 임도(도로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를 따라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왼편은 옥수가 흐르는 상리천, 그러나 물가로 내려갈 수는 없다. 인근 주민들의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잠시 후에는 계곡이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전암에서 15분 정도 내려오면 천성산공룡능선 갈림길’(이정표 : 성불암방향, 짚북재 2.7Km/ 공룡능선 짚북재 2.9Km/ 노전암방향 짚북재 4.7Km)에 이르게 된다.

 

 

공룡능선 갈림길 근처부터는 물놀이하기 딱 좋은 장소의 연속이다. 하얀 암반(巖盤) 위로 흐르는 물은 하도 맑아서 그냥 마셔도 될 정도이다. 거기다 주변 경관까지 뛰어나니 잠시 발길을 멈추고 쉬었다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산행 중에 흘렸던 땀도 씻을 겸해서 말이다. 마침 주민들이 묶어 놓았던 상수도보호구역도 어느새 부턴가 풀려있다.

 

 

산행날머리는 내원사매표소

내려오는 계곡은 제법 길다. 그러나 지루하지는 않다. 계곡주변의 경관이 뛰어난데다가 물놀이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계곡 반대편에 놓인 데크길이 계곡을 따라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몇 년 전에 천성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걸었던 길이다. 공룡능선 갈림길에서 대략 15분 정도 걸으면 내원사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중간에 성불암 갈림길’(이정표 : 천성산24.4Km)을 거쳤음은 물론이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 20분 정도가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거나 땀을 씻으며 20분 이상을 쉬었으니 4시간 정도가 걸린 셈이다.

문수산(文殊山, 599.8m)-남암산(南巖山, 542.9m)-영축산(352m)

 

산행일 : ‘15. 4. 25()

소재지 :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과 범서읍, 웅촌면, 삼동면의 경계

산행코스 : 율리농협망해사영축산전망대문수산문수사남암산마당재문수초교(산행시간: 3시간50)

같이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색 : ‘부산일보'&'에 들어가 문수산편을 들여다보면 울산의 대표 산을 놓고 문수산과 무룡산(舞龍山·452m)이 경합했다는 얘기를 읽을 수 있다. 논란은 흐지부지 되었지만 울산시민들은 문수산을 '울산의 허파'로 추켜세우고 즐겨 찾으면서 사실상의 판정승을 거뒀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산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내가 과연 산속에 들어왔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이는 울산시민들이 그만큼 문수산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산세(山勢)는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다. 문수산이나 남암산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 육산의 고질적인 특징대로 특별한 볼거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조망(眺望) 하나는 뛰어나다. 비록 시야(視野)가 자주 열리지는 않지만 남암산 정상 부근과 문수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시원스럽기 짝이 없다.

 

산행들머리는 청량농협 율리지점(울주군 청량면 율리)

동해고속도로 문수 I.C에서 내려와 우회전, 7번 국도를 타자마자 나오는 문수사입구 교차로(청량면 율리)에서 좌회전하면 저만큼에 청량농협 율리지점이 보인다. 농협에서 안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등산로로 연결되는 오른편 도로는 대형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산행이 시작되는 율리마을은 신화(神話)의 마당이다. 신라 백제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하던 일연스님은 이곳에다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삼국시대에 일어난 수많은 얘기들을 고르고 또 골라내면서 이 고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5개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다 옮겨 놓았다. ‘역사책에 등재될 정도로 귀한 신화들이 이렇게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할 것이다. 전설의 첫 번째는 이차돈의 불교 공인을 위해 영취산에서 지원법회를 연 낭지법사이고, 매에 쫓기던 꿩이 두 새끼를 껴안고 있는 모정을 보고 지었다는 영축사가 그 두 번째이다. 세 번째는 보현수(普賢樹)이다. 지통이라는 어린 노비가 까마귀의 안내로 보현보살을 만났다는 나무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문수사에 얽힌 연회스님의 설화, 그리고 마지막은 망해사에 얽힌 헌강왕과 처용랑에 관한 설화이다.

 

 

 

산길은 삼거리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서 오른편으로 열린다. 길이 널따란데다가 반질반질하게 윤까지 나 있을 정도로 잘 닦여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등산로는 자연 그대로이다. 나무나 바위 등 지형지물(地形地物)을 그대로 놓아둔 채 길이 나있는 것이다. 걷기는 다소 거추장스럽지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어 좋지 않나 싶다. 연초록으로 물든 산길을 따라 15분 남짓 오르면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망해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정표에 적힌 망해사는 갈림길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들러볼 것을 권한다. 조상들이 남긴 흔적을 가까이서 느껴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오른편으로 내려서면 망해사(望海寺)의 절터(寺址)가 나온다. 사지에는 석조부도(石造浮屠) 2(보물 제173)’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형적인 신라 하대 부도의 양식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 전체 평면이 팔각을 이루는 승탑)이다. 9세기 말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양식상 884년에 제작된 전 흥법사염거화상탑(傳 興法寺廉居和尙塔)893년에 제작된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각각의 높이가 3.4m(동쪽)3.3m(서쪽)인 두 부도는 동서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데, 전체 규모나 조성 양식, 세부의 조각 수법은 같다. 다만 서쪽 승탑에 비해 동쪽 승탑은 손상된 부분이 많은 편이다. 이 부도들은 절의 창건설화와 관련해볼 때 헌강왕 때 또는 그 직후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측되며, 조각수법으로 보아서도 창건연대를 헌강왕 이전이라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나저나 주변에 석등 부재임이 분명한 석재들이 벤치처럼 놓여 있다. 발굴과정에서 나온 유물들일 것이다.

 

 

사지(寺址)의 바로 아래에 망해사(望海寺)가 있다. 이 절은 한국불교태고종 소속의 사찰이다. 신라 헌강왕(재위: 875886)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당시에는 망해사라는 이름 이외에 신방사(新房寺)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 望海寺條)에 따르면,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 현재의 울산광역시)에 유람을 다녀오다가 갑자기 구름과 안개에 덮여 길을 잃고 말았다. 신하에게 물으니 동해의 용이 심술을 부린다며 좋은 일을 해야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지으라고 명령하자 구름이 걷히더니 동해의 용이 아들 7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용은 왕의 덕을 칭송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아들 하나를 보내 왕을 돕도록 하였으니 그가 바로 처용(處容)이었다고 한다. 이때 지은 절이 망해사(신방사)라는 것이다. 아무튼 고려시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출토된 기와편이나 울산부여지도(蔚山府與地圖 : 정조10년 편찬)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절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1800년대 중후반기에 폐사되었던 것을 1957년 영암(影庵)이 중창하고, 1988년부터 혜학(慧學)이 대웅전을 중건하는 등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에서 빠져나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에는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왼편으로 조망(眺望)이 트인다. 이곳이 혹시 망해대(望海臺)’가 아닌지 모르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방금 지나왔던 망해사에 망해대라는 조망 좋은 곳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멀리 바다가 보여 선비들이 자주 찾아와 시를 읊었다는 것이다. 정포(鄭浦 : 고려말의 문신)가 지은 작품 중에도 망해대라는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망해대라는 전망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절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절 근처에서는 이곳이 유일하게 조망이 트이기 때문에 해본 말이다.

 

 

 

전망대에서 조금 더 오르면 산길이 왼편으로 휘면서 맞은편 산봉우리를 우회(迂廻)시킨다. 지금 피하고 있는 산봉우리가 바로 영축산이다. 망해사를 나와 15분 쯤 더 오르면 삼거리(이정표 : 문수산 정상 1.9Km/ 우신고등학교 1.8Km, 신복초등학교 2.6Km/ 율리)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구태여 이곳 삼거리까지 올 필요 없이 아까 우회를 시작했던 지점에서 곧바로 영축산 정상으로 치고 오르는 것이 더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비록 그곳에서 길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삼거리에 이르면 고속도로처럼 시원스럽게 뚫린 길이 오른편으로 나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신고등학교나 문복초등학교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영축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우신고등학교 방향으로 열린다. 다만 그쪽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로 찾아봐야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일단 들머리만 찾으면 그 다음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정표에 나타나 있지도 않을 정도로 방치되고 있는 산봉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는 등 등산로는 생각보다 잘 정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들머리를 찾지 못한 난 영축산의 반대방향에 있는 쉼터까지 가고야 말았다. 혹시라도 나 같은 경우를 당한 사람들에게 당황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다. 쉼터에서 지나온 방향을 살펴보면 영축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희미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만한 산길을 5분 정도만 치고 오르면 영축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알바까지 해가면서 어렵게 올라온 정상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대여섯 평 남짓한 분지(盆地)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문수산 2.3Km/ 자연체험학습장 1.8Km), 그리고 ‘119구호지점 표시목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다른 볼거리는 일절 없다. 물론 조망(眺望)도 트이지 않는다. 아니 하나 있기는 하다. ‘국가지점번호를 적어 놓은 표시목이다. ‘국가지점 번호란 전 국토와 인접해양을 좌표체계 격자(grid)로 나누어 한글과 아라비아숫자를 조합한 10자리로 표시된 번호로서 지금까지 지역별(), 기관별(구청, 소방, 경찰, 산림청, 국립공원관리공단 등)로 사용하던 위치표시 체계를 국가에서 통일한 제도이다. 조난 및 응급상황 발생 시 정확한 신고가 가능하도록 전국의 위치표시를 하나로 통일시켰다고 보면 된다. 그건 그렇고 삼국유사에서는 문수산을 영취산(靈鷲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영취산은 가사굴산의 번역어로 인도 마갈타국 부처님이 설법하던 산이다. ()는 독수리 추, 또는 수리 취이지만 불가에서는 축으로 익는다. 그러니까 문수산은 청량산이고, 또 영취산이며, 불가(佛家)식으로 읽으면 영축산이 되는 것이다. 그런 영취산을 문수산으로 고쳐 부르면서 그게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문수산 산줄기 중의 하나를 골라 영축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문수산 방향으로 진행한다. 영축산을 다녀오는 데는 16분이 걸렸다. 문수산으로 향하면 조금 후에 긴 나무계단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철탑을 지나자 산길을 둘로 나뉜다. 오른편은 404m봉을 넘는 능선길이고 왼편은 사면(斜面)으로 난 우회(迂廻)길이니 마음 내키는 대로 진행하면 된다.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다음 안부에서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오른편의 능선길을 권하고 싶다. 가는 길에 뛰어난 전망대를 만날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다만 이때에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는 고생을 감수해야만 한다.

 

 

 

 

삼거리를 출발한지 15분쯤 지나면 울산대가 세운 앙증맞은 표지석을 만난다. 404m봉이다. 앞서 지나간 일행 중 누군가가 종이에다 문수봉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산행을 나서기 전 인터넷에서 문수산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던 중에 이곳을 문수봉이라고 적은 글들을 몇 개 보았던 기억이 난다.

 

 

404m봉에서 조금만 더 가면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는 바위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바위에 오르면 맞은편에 있는 남암산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그리고 남암산을 기준으로 왼쪽에 대운산과 꽃장산 그리고 동해바다가, 오른쪽으론 천성산과 정족산 그리고 솥발산 등이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전망대를 지나면 산길은 다시 내리막길로 변한다. 나무계단으로 이루어진 길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러니까 404m봉에서 7~8분쯤 떨어진 안부에서 아까 404m봉을 오르기 전에 헤어졌던 길과 다시 만나게 된다.

 

 

삼거리에서 깔딱고개 아래에 있는 안부사거리까지는 2~3분만 더 걸으면 된다. 경사가 거의 없는 편안한 길이다. 주변은 온통 신갈나무 천지, 녹음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하는 나무들이 싱그럽기 짝이 없다. 거기다 도심의 공원에서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길까지 잘 닦여있으니 걷는 것 자체가 곧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안영축 및 천상리로 내려가는 길이 나뉘는 널따란 안부는 평상과 벤치 등을 갖춘 쉼터로 조성해 놓았다. 조금 후에 만나게 될 깔딱고개를 대비해서 잠시 숨을 골라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에게까지 주어질 공간은 없다. 앉을만한 곳은 이미 사람들로 꽉 들어차있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산행안내도와 이정표(#1 : 문수산 0.7Km/ 안영축 1.1Km/ 신복초등학교 3.3Km, #2 : 약수터 0.3Km/ 안영축 1.0Km/ 천상리 3.8Km)들 앞에서 가야할 방향만 가늠해본 후에 곧바로 산행을 이어간다.

 

 

문수산으로 오르는 구간은 깔딱고개, 물론 내가 지어낸 것은 아니고, 산행안내도에 표기되어 있는 이름이다. 호된 가풀막을 통상 깔딱고개라고 부른다. 그러나 고개 이름을 아예 깔딱이라 대놓고 붙인 경우는 많지 않다. 과연 얼마나 가파를지가 자못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결과는 간단했다. ‘삼악산보다 한참 뒤지는데요.’라는 집사람의 말마따나 이곳과 마찬가지로 깔딱고개라는 공식 이름을 지닌 삼악산의 깔딱고개에 비하면 깔딱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로 그 가파름이 약했다.

 

 

안부에서 20분 조금 못되게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약수터갈림길’(이정표 : 약수터 0.4Km/ 안영축 1.5Km)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다시 한 번 10분 정도를 더 치고 오르면 드디어 문수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40분이 지났다. 문수산은 신라와 고려 때에는 영축산(靈鷲山)이라 불렸다.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설법했던 고대 인도의 마가타국에 있던 산 이름이 불교를 따라 우리나라에까지 전해진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영취산(靈鷲山) 또는 청량산(淸凉山)으로 불린다고도 했다. 산 이름이 대부분 불교색이 짙은 것을 보면 요 아래에 있는 문수사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정상은 널따란 분지, 가운데를 초지(草地)로 남겨 놓고 빙둘러가며 길을 내 놓았다. 그리고 곳곳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게 했다. 가을에라도 찾는다면 바람에 나풀거리며 춤을 추는 하얀 억새꽃 잔치를 만날 수 있겠다. 정상에는 예쁘장한 정상표지석과 이정표(#1 : 문수사 0.5Km, 범서·천상 4.4Km/ 깔딱고개 0.6Km) 외에도 반듯하게 쌓아올린 돌탑도 보인다. 가장 높은 곳을 점령하고 있는 이동통신사의 중계시설만 아니었어도 멋진 공원이 되었을 텐데 안타깝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일품이다.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이 넓은 탓에 제대로 된 조망을 즐기려면 발품을 팔아야 한다. 울산 시내와 태화강을 보려면 북동쪽으로, 낙동정맥과 영남알프스의 가지산, 간월산, 영축산 산줄기를 보려면 서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물론 동쪽으로의 전망도 광활하다. 그래서 울산사람들에게 문수산은 가장 사랑받는 해돋이 전망대의 하나라고 한다.

 

 

 

문수사로 향한다. 서쪽으로 난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라 40~50m쯤 내려가면 왼편(이정표 : 문수사 0.3Km)으로 길이 열린다. 내려가는 길은 경사(傾斜)가 거의 없어 편안한 편이다. 잠시 후에 삼동갈림길’(이정표 : 문수사/ 삼동(둔기)/ 문수산 정상)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연초록으로 물든 참나무 군락을 통과하면 10분 후에는 문수사에 이르게 된다.

 

 

 

바위 협곡에 들어앉은 절집인 문수사(文殊寺)는 터가 비좁은 데도 불구하고 일주문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종각이나 대웅전 등 전각(殿閣)들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다. 롯데그룹에서 도움을 주었다는 글을 본 것 같은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문화재는 보잘 것이 없다. 석가모니후불탱화(幀畵), 지장탱화, 칠성탱화 등 겨우 탱화 3점만이 울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16)로 지정되었을 따름이다. 그건 그렇고 종각에 매달린 현판은 청량산 문수사라 적혀있다. 문수(文殊)보살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인도에서 태어났다. 반야경의 지혜와 도리를 사부대중에게 설파했다. 그리고 길상과 복덕을 상징한다. 이 보살은 중국 산시성(山西省)의 청량산(일명 오대산)에 기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문수사가 문수보살을 모시는 절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문수사(文殊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신라 때 창건 되었다고만 알려졌을 뿐 누가 어떤 연유로 지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연회도명문수점(緣會逃命文殊岾)’편에 문수보살과 변재천녀(辨財天女)에 얽힌 설화가 나오는데, 연회라는 승려가 이 절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읽자 연못에 있던 연꽃이 사시사철 시들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신라 때부터 존재했던 절이라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원성왕이 연회를 국사(國師)로 초빙하려 했고, 번거로움이 싫어 도망가던 연회가 노인(文殊大聖:문수대성)과 노파(辨財天女:변재천녀)를 만나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닫고 마침내 국사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얘기가 연회도명문수점(緣會逃命文殊岾)’편이다. 참고로 문수사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에 대한 얘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경순왕이 나라의 장래에 대한 계시를 받고자 문수산의 동쪽에 위치한 문수보살을 찾아가던 길에 동자승을 만났고, 가는 길을 안내해 주겠다는 그 동자승(문수동자)을 따라가다 갑자기 동자가 사라져버린 것을 보고 나라의 운명이 이미 다한 것으로 알고 고려의 태조에게 항복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동자승이 자취를 감춘 태화강 근처를 무거(無去)라 불렀고, 설화의 이름 또한 무거(無去)설화라 하였다.

 

 

문수사에서의 하산 길은 절 입구와 식당 사이로 나있다. 계단을 밟고 내려서서 3분 정도를 더 가면 아름드리 소나무 옆 바위전망대가 천하의 명당처럼 앉아있다. '문수 암장'으로 불리기도 하는 전망대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정면에 있는 남암산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전망대의 바위 틈새로 난 길을 통과하면 산길은 사면(斜面)을 따라 이어진다. 곧바로 아래로 길을 낼 수 없을 정도로 산자락이 가파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사면을 따라 10분 정도를 더 내려가면 문수사 주차장이 나온다. 전망이 보잘 것 없는 3층짜리 전망대와 간식을 파는 가게가 있다.

 

 

 

 

주차장에서 잠깐 내려오면 사거리이다. 도로공사로 인해 주위가 비록 산만하지만 이곳에서 왼편으로 가면 영축마을, 오른편은 둔기리(울주군 삼동면) 행두나무골로 연결된다. 그리고 남암산으로 가려면 맞은편 청송마을(울주군 청량면 율리) 방향으로 곧장 직진해야 함은 물론이다.

 

 

사거리에서 비포장 임도를 따라 5분쯤 걸으면 송전탑 옆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3층 석탑(보물 제382)이 있는 청송사지(寺址)를 거쳐 청송마을로 연결된다. 남암산으로 가려면 성불암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오른편 시멘트포장 임도로 들어서면 된다. 갈림길에 문수산·남암산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살펴보면 길 찾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남암산의 들머리는 성불암 방향으로 10분 조금 못되게 더 들어가다 왼편으로 열린다. 등산로 입구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도를 따라 걷던 집사람의 입이 갑자기 함박만큼이나 벌어진다. 그리고 그녀의 손길이 바람 같이 날렵해진다. 길가에 널려있는 두릅나무의 새순을 따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난 다음 주 내내 봄 내음이 가득한 밥상머리에 앉을 수가 있었다.

 

 

 

일단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길은 고와진다. 부드러운 흙길에다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서 폭신하기 짝이 없다. 덕분에 약간의 가파름 정도는 힘든 줄도 모르고 진행하게 된다. 가는 길에는 청송자연농원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세 번이나 만나게 된다. 산자락에 들어서자 만나게 되는 갈림길(이정표 : 정상 1.1Km/ 청송자연농원/ 문수사 1.0Km)을 위시해서 4~5분 정도의 간격으로 연이어 나타나는 두 번째(이정표 : 남암산 정상 1.1Km/ 청송자연농원 0.7Km/ 문수산 2.3Km)와 세 번째(이정표 : 남암산 정상 0.7Km/ 청송자연농원 1.3Km/ 성불암 0.5Km/ 문수산 2.7Km) 갈림길이다.

 

 

 

마지막 갈림길에서 7분 정도를 더 오르면 멋진 바위전망대가 나온다. 울산시내가 한눈에 잘 들어오지만 구태여 바위전망대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바로 위에 데크로 만들어진 진짜 전망대가 있기 때문이다. 두 곳에서의 조망(眺望) 수준은 얼추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산길은 전망대를 지나면서 엄청나게 가팔라진다. 그러나 다행이도 계단이 놓여있다. 비록 힘은 들지만 어렵지 않게 올라설 수 있는 이유이다. 전망대에서 15분 정도를 힘겹게 치고 오르면 드디어 남암산 정상이다. 문수산에서 1시간 15분이 걸렸다.

 

 

제법 너른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외에도 지역의 한 업체에서 세워 놓은 또 다른 비석(碑石)도 보인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라이온스클럽에서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정상판까지 세워 놓았다. 거기다 이정표(한솔그린빌아파트 2.9Km/ 성불암 1.0Km/ 전망대 0.3Km, 문수산 3.4Km)와 또 다른 안내판까지 더하니 차라리 어수선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참고로 남암산은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동생 범공이 해인사에 머물다 옮겨와 암자를 짓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썩 좋지 않다. 동쪽 멀리 울산 시가지와 동해 바다가 보이지만 확 트인 것은 아니다. 정상으로 올라오는 길에 만났던 전망대보다 훨씬 못하다고 보면 된다.

 

 

정상에서 남서쪽(이정표 '한솔그린빌아파트' 방면)으로 내려선다. 가파르지 않는 호젓한 산길이 이어진다. 길가는 온통 철쭉들의 세상, 어른 무릎 정도의 높이로 낮게 자란 철쭉들이 무리지어 연분홍 꽃망울을 활짝 터뜨리고 있다. 길가에 널려있는 널찍한 바위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은 한 폭의 잘 그린 그림을 연상시킨다. 아마 오늘 산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 아닐까 싶다.

 

 

 

하산을 시작해서 5분쯤 걸으면 이정표(한솔그린빌아파트 2.6Km/ 율리 2.4Km/ 남암산 정상 0.3Km)를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다시 율리 쪽으로 10분쯤 더 가면 마당재에 다다른다. 사거리이지만 이정표(청송자연농원/ 대복/ 남암산)가 부실해서 이정표만 보고는 방향을 잡기가 어려운 지점이다. 갑자기 그동안 만났던 이정표들과는 완전히 다른 지명들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무조건 왼편의 청송자연농원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산행날머리는 문수초등학교 앞

마당재에서 다시 7분쯤 더 걸으면 이번에는 이정표도 없는 갈림길, 이곳에서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가파르지도 그렇다고 밋밋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산길은 정갈하면서도 호젓하기 짝이 없다. 이웃 문수산의 유명세 덕에 도심의 산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오염되지 않은 산으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17분 정도를 더 진행하면 도로에 내려서게 된다. 청량면 청송부락이다. 이제부터는 도로를 따른다. 산행이 종료되는 문수초등학교까지는 10분 이상을 더 걸어야 한다. 오늘 산행은 총 4시간5분이 걸렸다. 중간에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뺄 경우 3시간 50분이 걸렸다.

상투봉(725m)-광려산(匡廬山, 752m)-대산(大山, 726m)

 

산행일 : ‘15. 4. 18()

소재지 :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마산합포구와 함안군 여항면의 경계

산행코스 : 삼계성당 앞 도로변투구봉상투봉삿갓봉광려산대산바람재쌀재고개만날고개(산행시간 : 5시간5)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오늘 오른 산은 광려산과 대산 등 2개이다. 그러나 상투봉을 하나 더 추가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들 광려산의 부속 봉우리쯤으로 보고 있지만 두 봉우리 사이의 골이 깊어 따로 분류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아서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 오른 산들의 특징을 들라면 뭐니 뭐니 해도 뛰어난 조망(眺望)’이 아닐까 싶다. 함께 산행을 한 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 이석암 선생께서도 망설임 없이 꼽았을 정도이니 말이다. 눈을 들면 서북산과 여항산 등 낙남정맥의 산군(山群)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하도 시원스러워서, 다도해(多島海)의 빼어난 풍광은 차라라 보너스로 쳐야할 정도이다. 그렇다고 진달래를 빼놓을 수는 없다.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광려산과 대산의 정상에 봄이면 화사한 연분홍 꽃 잔치가 열리기 때문이다. 산행을 하다보면 곳곳에서 진달래꽃 터널을 통과하게 되는데 혹시 천국에 들어온 것이나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거기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암릉까지 끼고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한번쯤은 올라봐야 할 산들로 꼽고 싶다.

 

산행들머리는 천주교 삼계성당 앞 도로변(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삼계리)

중부내륙고속도로 내서 I.C에서 빠져나오면 곧바로 4거리다. 4거리를 직진으로 통과한다. 그러면 곧 T자형 3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왼쪽의 동신아파트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이정표의 마산 방면이다. 다시 300m쯤 가면 정면으로 고가도로가 보인다. 고가도로에 닿기 전의 4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광려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삼계삼거리(내서읍 삼계리)에서 다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천주교 삼계성당 앞에 이르게 된다.

 

 

 

도로에서 법륜사(法輪寺)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진입로에 들어서면 가장먼저 길가에 도열해있는 돌탑들이 길손을 맞는다. 아니 이 길을 절에서 만들었을 테니 중생(衆生)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절 앞에 이르자 마치 기계체조라도 하고 있는 듯 일렬로 등에 올라타고 있는 일곱 마리의 돼지들이 나타나고, 그 뒤에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돌부처들이 늘어서있다. 그 외에도 환하게 웃고 있는 득남불(得男佛)이나, 동자불(童子佛) 등 다양한 부처님들이 경내는 물론이고 산자락에까지 빽빽하게 들어찼을 정도로 사방이 부처님 천지다. 그 부처님들이 종류별로 하나 같이 똑 같은 모양새에 똑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쉬웠지만 말이다.

 

 

절은 비록 부처님 세상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사찰의 내력은 끝내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진입로 초입에 세워진 문설주에는 분명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이라고 적혀있었는데도, 조계종 홈페이지에서도 검색이 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조계종 소속의 법륜사가 전국에 11개나 있는데도 말이다. 경내(境內)를 통과하며 보았던 풍물들에서 짙은 미신의 냄새가 느껴졌는데 설마 그 탓은 아니었기를 빌어본다. 그건 그렇고 절에 들어서면 요사채 앞에서 오른편으로 빠져나가는 길이 하나 보인다. 그러나 그 길로 들어설 필요는 없다. 그래봤자 절을 한 바퀴 빙 둘러서 다시 대웅전 앞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요사채 앞에서 왼편의 정자(亭子) 쪽으로 가면 몇 걸음만 걸어도 닿게 되는 대웅전을 한참을 돌게 만든 것이다.

 

 

등산로는 대웅전 뒤로 열린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산뜻하게 가꾸어져 있다. 길 양편에 돌탑들이 쌓여있는가 하면 동백나무들을 가로수 모양으로 배치해 놓기도 했다 그러나 인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듯 고즈넉하다. 사색하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끝에 산신각이 있다. 여기까지가 법륜사의 경내이다. 들머리에서 법륜사까지 5, 절을 벗어나기까지는 10분이 더 걸렸다.

 

 

산신각을 벗어나면서 오솔길로 변한 산길은 갑자기 가팔라져버린다.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고 나서야 겨우 위로 향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8분이면 능선에 올라설 수 있을 정도로 그 거리가 짧다는 것이다. 등산로 주변에 부지런히 나뭇잎을 따고 있는 동네 아낙들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길가 나무들이 연두색 새싹들을 상당히 내밀고 있다. 그렇다.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었나 보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면 산길은 경사(傾斜)를 누그러뜨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가파르게 변해버린다. 그렇다고 그 가파름이 버거울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난 초반부터 가픈 숨을 헐떡이고 있다. 지난 주 내내 운동을 하지 않은 채로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지냈던 탓이리라. 조망(眺望)이 딱 막혀버린 산길은 지루하게 이어진다. 그저 간간히 나타나는 진달래꽃들에게 눈길을 맞추어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된다.

 

 

숨을 헐떡거리며 30분 조금 못되게 오르면 드디어 조망이 터지기 시작한다. ‘흔들바위를 닮은 기암(奇巖)이 나타나고, 그 바위를 왼편에 끼고 오르면 왼편 무학산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트이면서 산군(山群)들 사이로 남해바다가 첫 선을 보이는 것이다.

 

 

첫 번째 조망대에서 다시 한 번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면 10남짓 후에는 또 다른 바위전망대 위에 올라서게 된다. 이번에는 전망대 주위에 진달래꽃까지 피어있어 아름다운 풍취(風趣)까지 더해진다. 발아래에 펼쳐지는 내서읍 시가지가 진달래꽃으로 치장되며 아름다운 그림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바위전망대를 지나서도 오르막길은 계속된다. 단지 그 가파른 기세(氣勢)만 조금 누그러뜨렸을 뿐이다. 그리고 10여분 후에는 투구봉(704m)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화계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이 갈리는 이곳에서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이정표(삿갓봉 2.4Km/ 화계산 7.0Km/ 삼계회관 2.9Km)를 만나게 된다. 정상표지석은 없다. 또한 이곳이 투구봉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 어떤 표지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지도(地圖)를 보고 이곳이 투구봉 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투구봉에서 상투봉(725m)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지척이다. 거기다 오르막의 경사(傾斜)도 거의 느끼지 못한 정도로 완만하다. 그저 시야(視野)가 터지는 두어 곳에서 조망을 즐기면서 걷기만 하면 된다. 왼편에는 저 멀리 남해바다가 어렴풋이 나타나고,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리는 곳에서는 봉화산 아래를 지나가는 79번 국도까지 또렷하게 나타난다.

 

 

 

3~4평 남짓한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상투봉 정상은 정상표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삿갓봉 2.2Km/ 화개산 7.8Km/ 신감마을 1.8Km)에 매달린 정상표지판이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생김새로 보아 대구의 산꾼 김문암씨의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상투봉에서의 조망은 썩 뛰어난 편은 못된다. 그저 서쪽 한 방향으로만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낙남정맥의 산군들이 나타날 따름이다. 참고로 이곳에서 왼편으로 보이는 오솔길은 신감마을에서 올라오는 길로서 요 아래에 있는 광산사에서 원점회귀 산행을 하려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코스이다.

 

 

삿갓봉으로 가는 길은 어른 허리춤 정도로 자란 산죽(山竹) 밭으로 시작된다. 산죽들로 가득한 분지(盆地)를 지나면 십여 명이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해도 충분할 정도로 넓은 너럭바위가 나오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광산사갈림길(이정표 : 광산사 0.7Km)에 이르게 된다. 왼편의 길 역시 광산사에서 원점회귀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코스이다. 상투봉에서 이곳 갈림길까지는 20분 가까이 걸렸고, 고도(高度) 또한 한참을 까먹었다. 비록 급경사(急傾斜) 내리막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광산사 갈림길에서 다시 15분 정도를 걸으면 또 다른 광산사갈림길(이정표 : 삿갓봉 0.4Km/ 상투봉 1.8Km)을 만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광산사로 내려가는 길이 막혀있다. 물론 이정표에 방향표지판도 없애버렸다. 옆에 세워진 안내판에 문화재보호구역 및 입산금지구역을 그려놓고 문화재보호구역이니 들어오지 말라고 적혀있다. 내가 알기론 광산사에는 국보급(國寶級) 문화재는 없다. 그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440)인 우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상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겨우 한 점 뿐이다. 그런 정도를 갖고 출입금지까지 시키는 경우를 다른 곳에서는 결코 본 일이 없다. 아마 사찰에서 자기들 땅이라고 막아버린 모양이다. 설마 행정청에서 이런 막무가내의 행위를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갈림길에서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10분 조금 넘게 오르면 삿갓봉이다. 크고 작은 바위 몇 개가 땅에 널려있는 모양새의 정상에는 정상표지석과 이정표(광려산 0.7Km/ 한치고개 1.7Km, 여항산 10.7Km/ 투구봉 2.52Km)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이 비좁은 탓인지 한쪽 귀퉁이에다 데크로 전망대를 겸한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삿갓봉은 낙남정맥의 분기점(分岐點)이다. 이곳에서 오른편은 한치고개에서 올라오는 정맥길이고, 이곳에서부터 대산을 거쳐 무학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낙남정맥을 따른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온 능선은 화개지맥, 광려산에서 북으로 갈려나간 산줄기로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장포마을까지 이어지는 약 34Km의 산줄기이다. 참고로 국립지리원의 지형도에는 이곳 삿갓봉이 아직까지 광려산 정상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뻥 뚫린 삿갓봉 정상에서의 조망은 썩 뛰어나다. 우선 서남쪽에는 진동만과 추곡리, 그 너머로 남해바다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리고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화개지맥의 투구봉과 그 너머 오른쪽에 무학산이 보인다. 그 외에도 삿갓봉을 중심으로 낙남정맥의 산군들이 길게 이어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삿갓봉에서 광려산까지는 큰 오르내림이 없이 연결된다. 중간에 한번 안부까지 떨어지기는 하지만 골이 깊지 않기 때문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산행을 즐길 수 있다. 그저 길을 가다 조망 좋은 곳에 멈춰 서서 눈앞에 펼쳐지는 남해바다와 그 위를 떠다니는 크고 작은 섬들을 구경하는 호사(豪奢)만 누리면 된다. 삿갓봉에서 광려산까지는 17분이 걸렸다.

 

 

 

두세 평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비좁은 광려산의 정상은 정상표지석과 글씨가 지워져버려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이정표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다른 볼거리는 없다. 물론 조망만은 예외이다. 광려산은 아까 지나온 삿갓봉보다 높아 주봉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정상표지판이 세워진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752m봉으로 등재되어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참고로 광려산은 중국의 명산인 여산(廬山)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여산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은 도연명이 태어난 곳으로 중국 불교 정토신앙(淨土信仰)의 성지로 알려진 산이다. 그 여산에서 '()'자를 따오고, 그 여산에 살았다는 유명한 은둔자(隱遁者)인 광유(匡裕)선인의 이름에서 '()'자를 따다가 이 둘을 합쳐서 광려산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광활하다. 사통팔달로 시야(視野)가 터지기 때문이다. 진행방향에는 조금 후에 오르게 될 대산을 가운데에 놓고 좌우로 남해바다가 펼쳐지고, 지나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삿갓봉을 기준으로 오른편에 상투봉과 무학산이, 그리고 왼편에는 봉화산과 그 뒤에 있는 서북산과 여항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을 경우 지리산까지 눈에 들어온다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조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비가 내리기 직전의 꾸부정한 날씨 때문이다.

 

 

대산으로 향하는 능선 역시 왼편 산자락으로의 통행을 막고 있다. 들어갈 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철조망을 쳐 놓은 것이다. 그리고 갈림길(이정표 : 대산 2.2Km)이 있던 곳, 그러니까 광려산에서 5분쯤 가면 만나게 되는 광산사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아예 목책(木柵)까지 동원해서 통행을 막아버렸다. 폐쇄된 광산사갈림길에서 안부로 잠깐 내려섰다가 맞은편 능선으로 다시 치고 오르면 암릉이 나타난다. 비록 바윗길의 거리가 짧지만 오늘 산행에서 가장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는 구간이다. 오른편은 수백 길의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 산길은 바위벼랑을 따라 나있다. 당연히 위험이 수반(隨伴)될 수밖에 없다. 바윗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왼편 사면(斜面)으로 난 우회로(迂廻路)를 이용해야 할 일이다.

 

 

 

 

바윗길에서는 남해바다의 조망(眺望)을 실컷 즐길 수 있다. 가덕도와 거제도 등 커다란 섬은 물론이고, 그밖에도 수많은 섬들이 바다에 널려 있다. 흡사 작은 돛단배가 파도 따라 떠다니고 있는 것 같다. 거제도의 오른편에 보이는 산들은 아마 거류산 등 고성의 산들일 것이다.

 

 

암릉에서 안부로 내려섰다가 다시 맞은편 능선을 치고 오르면 무명봉, 두어 개의 벤치를 놓아 등산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이러한 쉼터는 산행 내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무명봉을 지나면 산길은 능선을 벗어나 왼편 사면을 따라 이어진다. 능선의 끝자락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능선안부에 이르게 된다. 광려산과 대산을 구분하는 안부로 보면 될 것 같다.

 

 

대산에 가까워지면서 진달래들의 꽃 잔치가 시작된다. 그렇다고 지나온 길에 진달래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상투봉이나 삿갓봉, 광려산에서도 진달래는 무리지어 있었다. 다만 그 범위가 그저 잠깐의 눈요기로 만족해야할 정도로 작았다는 얘기일 뿐이다. 그러나 대산에 가까워지면서 진달래의 무리는 한없이 광범위(廣範圍)해진다.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진달래들이 산자락을 온통 점령해버린 것이다. 이른바 동화 속에 나오는 꽃 대궐이란 바로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산길은 온통 연분홍 꽃물결을 이룬 진달래 무리 속으로 나있다. 그 진달래들은 하나같이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웃자라있다. 그러다보니 산길은 자연스레 꽃으로 이루어진 터널을 통과하게 된다. 함께 걷고 있는 집사람의 얼굴이 붉은 색으로 곱게 물들어 있다. 그리고 해맑게 빛나고 있다. 눈이 부시다. 자연이 만들어낸 조화가 바로 이런 것이리라. 아름다움은 사람들까지도 티 없이 밝게 만들어버리는 모양이다.

 

 

 

진달래 꽃밭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 남해바다가 조망되는 멋진 바위전망대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대산 정상이다. 광려산을 출발한지 1시간이 조금 못 걸렸다.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만나게 되는 대산 정상에는 아담한 크기의 정상표지석과 이정표(광산사 2Km/ 광려산 2.5Km, 삿갓봉 3.2Km) 그리고 119의 구호지점표시목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산의 정상도 비좁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잠깐 쉬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은 되니 짬을 내어 머물러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사방으로 펼쳐지는 조망에 눈이 호사(豪奢)를 누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대산 정상에 오르면 시야(視野)는 더욱 넓어진다. 마산항과 진해만, 진동 앞바다, 그리고 진해 창원 김해 쪽 산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마산항 뒤에 보이는 시가지는 물론 창원과 진해이다. 그리고 그 시가지를 비음산과 불모산, 웅산, 시루봉, 천자봉, 장복산 등이 둘러싸고 있다. 이곳도 역시 날씨가 좋을 경우에는 지리산이 보인다고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행운이 없나보다. 꾸부정했던 날씨가 조금 전부터 가느다란 빗줄기를 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산에 오르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들 비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다. 나 또한 카메라를 배낭 속에 갈무리하고 방수용 카메라를 꺼내 든다. 그리고 가늘게 내리는 빗속을 거닌다. 물론 아직도 진달래 꽃길이다. 그리고 진달래 바다에 빠져 그 사이로 난 꽃길을 걷는다. 바람결 따라 흩날리는 꽃들에 정신을 놓아버린 난 꿈결이 따로 없다. 이 정도의 빗줄기 갖고는 봄날의 아름다움을 결코 막을 수 없다는 증거이리라.

 

 

꽃길을 따라 5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억새와 진달래가 어울려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는 널따란 공터에 올라서게 된다. ‘광산먼등이라고 적힌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지만 왜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라는 낱말 중에 가운데가 솟아서 불룩하게 언덕이 진 곳을 나타내는 둔덕이라는 뜻도 있으니 어쩌면 광산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때 광산은 요 아래에 있는 광산사의 광산인지, 아니면 광려산을 이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정상표지석에 적힌 높이는 727m, 그렇다면 방금 지나온 대산의 정상석에 적혀있던 높이와 같으니 참조할 일이다.

 

 

광산먼등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오른편에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물론 산길은 바위를 피해 왼편으로 나있다. 그러나 난 바위로 올라볼 것을 권하고 싶다. 멋진 기암괴석(奇巖怪石)들 위로 길이 나있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위를 오르내리는 약간의 번거로움은 있지만 대신 눈은 맘껏 호사(豪奢)를 누리게 된다. 빼어난 자태의 기암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것이다. 특히 남해바다로 펼쳐진 파노라마는 진경(珍景)이다. 진동만은 물론 진해만과 그 너머 가덕도 앞바다까지 하나의 눈길로 담긴다.

 

 

바윗길에서 내려와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부드럽게 치고 오르면 넓은 공터로 이루어진 윗바람재봉(570.5m)이다. 정상표지석과 산불감시초소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상의 오른쪽에는 마산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돌섬과 마창대교, 그리고 무학산이 잘 조망되는 곳이다.

 

 

 

윗바람재를 지나면서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이 코스를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방향에서 올라온다면 많이 힘들겠다. 아니나 다를까 오르는 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힘든 표정이 역력하다. 이런 때의 방법은 딱 하나, 그저 쉬엄쉬엄 올라가는 방법뿐이다. 그러다 들꽃이라도 만나면 눈길도 맞추어가면서 말이다.

 

 

윗바람재봉에서 15분 정도를 내려오면 널따란 안부에 이르게 된다. 육각의 정자(亭子)와 전망데크가 세워져 있는 바람재이다. 그러나 조망은 썩 뛰어나지 못하다. 고도(高度)를 낮추면서 시야(視野) 또한 그만큼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람재는 공원(公園)으로 가꾸어져 있다. 곱게 자란 잔디와 조경수들은 물론이고, 벤치에 체육시설까지 갖추었을 정도다.

 

 

바람재에서는 임도를 따른다. 맞은편 447m(작은대곡산)을 넘는 방법도 있겠으나 별다른 볼거리가 없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편한 임도를 따르도록 한 것이다. 임도는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과 스스럼없이 비켜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아마 매년 331일에 열리는 바람재 진달래축제를 위해 만든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바람재에서 쌀재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린다. 참고로 쌀재고개는 쌀이 쌓였다는 의미에서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시대 조창(漕倉)이 인접하였고, 고개 북쪽에 위치한 무학산의 옛 지명이 조창에 쌀이 쌓인 모습을 나타내는 두척(斗尺)’산인 것과 연관이 있을 듯 싶다. 그러나 떠도는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는 쌀재 고개라는 명칭의 유래를 단정하기에 무리일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만날고개

쌀재에서 대곡산으로 가는 길이 나뉜다. 이곳에서 낙남정맥과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산행날머리인 만날고개는 이곳에서 1.4Km, 역시 임도를 따르기로 한다. 임도를 따라 얼마쯤 내려가다 만날공원의 이정표를 보고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날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만날고개(해발 180m)는 모녀(母女) 상봉의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고개이다. 고려 말 마산포 바닷가에 가난한 양반(李氏)가문의 편모슬하 세 딸과 어머니에 얽힌 이야기다. 맏딸은 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고개 너머에 있는 윤진사댁에 돈을 받고 시집을 갔다고 한다. 신랑이 반신불수(半身不隨)에다 말도 못하는데도 이를 개의치 않았나 보다. 3년 만에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후에도 혹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리던 맏딸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친정 소식이라도 들을까 해서 음력 817일 살그머니 만날고개로 올라갔다고 한다. 때마침 친정어머니도 같은 생각에서 고개로 나왔다가 서로 만나게 돼 모녀는 얼싸안고 눈물을 쏟았다는 이야기다. 해마다 음력 817일이 되면 그간 소식이 끊겨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숱한 사연들을 가지고 이곳에 모인다고 한다. 마산에서는 1983년부터 해마다 추석 즈음에 이곳에서 민속축제로 '만날제()'를 열고 있다. 고갯마루에서 잘 가꾸어진 근린공원지역을 내려서면 일반도로(무학로)에 이르게 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총 5시간15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5시간5분이 걸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