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도(南海島) 가족나들이

 

여행일 : ‘19. 3. 31()~4. 2()

여행지 : 경상남도 남해군(독일마을, 가천마을, 보리암, 상족암)

 

함께한 사람들 : 가족여행

 

 

특징 : 일 년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한 형제들 모임. 올해는 남해도를 돌아보기로 했다. 남해의 별명은 일점선도(一點仙島), '한 점 신선의 섬'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경관이 아름답다. 볼거리 많고 먹거리가 넘쳐나서 보물섬이라고도 불린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 한껏 달아오르는 중이다. 사천에서 창선대교를 건너 남해도로 들어선다. 다리 아래 바다색이 다르고,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결이 다르다. 참고로 남해는 행정지명이지만 한반도의 남쪽바다를 아우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부르는 산과 섬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고루 갖췄고, 그 덕분에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넘친다.

 

여행 둘째 날. 느지막이 아침 끼니를 때우고 나서 찾아간 곳은 이웃 고성군에 있는 상족암(床足巖)’. ‘세계 3대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라는 유명세말고도, 바닷가에 넓게 깔린 암반과 암반 위로 솟아오른 기암절벽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여행지로는 이만한 곳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창선대교와 삼천포대교를 건너 대방교차로(사천시 대방동)’까지 나간 다음, 77번 국도의 하일면(고성군) 방면으로 달리다가 월흥사거리(하이면 월흥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잠시 후 상족암군립공원(하이면 덕명리 제전마을)’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이곳 고성군은 미국 콜로라도, 아르헨티나의 서부해안과 함께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지로 꼽힌다. 천연기념물(411)로 지정된 이유이다. 이 공룡화석지는 백악기인 약 1~12천만 년 전의 공룡 흔적들을 보여주는데, 12종의 공룡 발자국과 공룡알, 공룡알 둥지, 새발자국 화석 등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상족암과 주상절리 등 자연이 빚어낸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혹시라도 어린이들과 함께 왔다면 공룡박물관도 꼭 둘러봐야 할 것이다. 단 매주 월요일은 박물관이 문을 닫는 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몇 곳의 민박집과 식당이 들어서 있는 제전마을은 상족암 군립공원의 중심축으로 수성암(水成巖)의 단애가 아련히 먼 시간 속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을이다. 거기다 몽돌과 은빛모래가 어우러지는 마을 앞 해변도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데 톡톡히 한몫을 한다. ‘티라노사우루스(폭군 도마뱀, Tyrannosaurus)’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바닷가에라도 서면 남해의 푸른 바다가 눈에 가득 차오른다. 해양수산부에서 아름다운 어촌으로 선정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하겠다.

 

 

마을 방파제로 가는 길 오른편에 절리로 이루어진 바위벼랑이 보인다. 부안의 적벽에서 보았던 형상, 즉 켜켜이 쌓아올린 시루떡의 모양으로 생긴 절리(節理)’. 절리란 암석에 규칙적으로 생긴 금을 말하는데, 지표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암석에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절리는 화성암(火成岩)에서는 용암이 냉각할 때 생기는 수축으로 인해 생기게 되며, 퇴적암(堆積岩)이나 변성암(變成岩)에서는 지각변동으로 인해 생긴다.

 

 

들머리에는 여러 개의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산지임을 알리면서 공룡이란 무엇인지와 공룡발자국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이 발자국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지에 대해서 적어놓았다. 다시 말해 공룡화석에 대한 교육장인 셈이다. 그 외에도 발자국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놓은 안내판들이 여럿 설치되어 있으니 한번쯤은 꼭 읽어볼 일이다.

 

 

마을방파제를 지나면서 데크로드가 시작된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널따란 암반 위에 공룡의 발자국들이 또렷하다. 이 일대에는 공룡 한 마리가 세 발자국 이상 걸은 보행렬이 250개 이상 있다고 한다. 무리 지어 있는 발자국은 초식 공룡이고, 홀로 찍혀있는 삼지창 모양의 발자국은 육식 공룡의 것일 확률이 높단다. 공룡은 몸집이 크기 때문에 어디를 걸어 다니든 발자국이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옳은 추론(推論)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공룡 발자국 화석은 흔치 않다. 주로 공룡이 진흙을 밟았을 때만 남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고성은 어땠을까? 과거 이곳은 거대한 호수였다고 한다. 호수나 늪지대의 진흙 위를 공룡이 걸어 다녀 발자국이 남았던 것이다. 진흙에 남겨진 발자국 위에 흙이 쌓이며 돌로 굳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땅속에 있던 돌이 지상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남해의 바닷물이 그 돌 위를 들어오고 나가며 흙을 씻어내자 마침내 공룡 발자국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공룡은 발자국 모양에 따라 세 분류로 나뉘는데, 고성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은 조각류가 60%, 용각류가 35%, 수각류가 5%란다. 또한 죽은 공룡의 골격 화석이 아닌, 살아있을 때 공룡이 걸어 다녔던 발자국이라니 한층 더 소중하다 하겠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공룡에 대해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공룡은 골반 모양에 따라 파충류와 비슷한 구조의 용반류, 새와 비슷한 골반을 가진 조반류로 나뉜다. 또한 발자국에 따라 뭉툭한 삼지창 모양의 조각류, 삼지창 모양에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수각류, 뭉툭한 발가락에 타원형의 발자국을 가진 용각류로 분류한다. 참고로 공룡은 중생대 트라이아스기(Triassic Period)에 출연해 중생대 마지막인 백악기(白堊紀)에 그 수가 최대에 달했다. 경남 고성과 전남 해남·화순·여수 등 우리나라 남쪽에서는 백악기 공룡 화석지로 유명하다. 특히 경남 고성은 군 전역에 걸쳐 약 5100여 개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나왔다고 한다.

 

 

길은 잔도(棧道). 험한 벼랑에다 마치 선반처럼 달아냈다. 바다와 바위벼랑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탁 트인 바다풍경과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바위, 그리고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지표면에 흘러내리면서 조성된 주상절리 등을 볼 수 있는 멋진 산책로이다.

 

 

거대한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이 바다 건너편으로 펼쳐진다. 이곳 상족암군립공원의 명물 중 하나인 병풍바위이다. 그런데 그 자태가 자못 빼어났다. 비취빛으로 물든 남해바다와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이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관광유람선 한 척이 사량도 사이로 물보라를 가르며 지나가면서 그 그림에 화룡점정을 찍는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이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모퉁이 두어 개를 돌자 저만큼에 경남 청소년수련원건물이 나타난다. 경남 도내 청소년들의 심신 단련을 위해 설립된 시설로 현재 한국스카우트 경남연맹에서 위탁운영해오고 있다. 수련원은 4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 외에도 대강당과 야외공연장, 캠프파이어장, 운동장, 족구장, 배구장, 모험개척활동장, 수상활동장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청소년 수련원 앞에는 고성 공룡테마파크라고 적힌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청소년수련원에서 갖고 있는 부대시설들을 통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공룡박물관과 공룡공원 등 이곳 상족암군립공원 일대를 아우르는 말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아무튼 수련원 너머로 공룡(恐龍)을 닮은 조형물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게 보인다. 공룡박물관 광장에 만들어놓았다는 브라키오사우루스(brachiosaurus)’ 조형물일 것이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공룡탑으로 높이가 무려 24m에 이르고 길이 34m에 너비도 8.7m나 된단다. 참고로 쥐라기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지금까지 알려진 공룡 중에서 가장 크고 긴 공룡이다.

 

 

수련원 앞의 해수욕장 역시 은빛의 고운 모래로 덮여있다. 그 뒤에 몽돌이 널려있음은 물론이다.

 

 

수련원을 지나면서 또 다시 데크로드가 이어진다. 산책로의 해안 쪽은 평탄하게 층을 이룬 퇴적암에 파도가 넘실거린다. 육지 쪽으로는 수 천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 수성암 해식애(海蝕崖)가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다.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 층리(Stratification)’라고 적혀있는 안내판 하나가 보인다. 층리(層理)란 퇴적물이 수평하게 쌓여 굳어져서 지층이나 암석이 만들어질 때 나타나는 나란한 줄무늬를 말한다. 퇴적물이 운반되어 퇴적되고 다져져서 단단한 암석으로 변한 것을 지층이라고 하는데, 지층은 각 층마다 퇴적물의 종류와 색깔, 알갱이의 크기, 퇴적 시간 등이 다르기 때문에 줄무늬, 즉 층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벼랑의 아래를 따르던 데크길이 잠시 위로 오른다. 그리고 고개 위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계속해서 오르면 공룡박물관후문을 거쳐 유람선선착장으로 연결된다. 오늘 트레킹의 목적지라 할 수 있는 상족암은 데크계단을 이용해 바닷가로 내려서야 만날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서면 널따란 암반이 나타난다. 이곳이 상족암군립공원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상족암(床足巖), 즉 천연기념물 제411호로 지정된 고성 덕명리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산지이다. 하지만 아까처럼 또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얼핏 볼 경우 바닷가 바위에 살짝 팬 구덩이에 불과하니 꼼꼼히 살펴봐야만 공룡의 발자국임을 알아 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눈에 익은 모양의 절벽들이 해안으로 펼쳐진다. 아까 데크로드를 따라 오면서 보던 모양들이 훨씬 더 정교해졌다. 그리고 이내 부안의 적벽에서 보았던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있던 그런 모양새들을 찾아낸다. 판상절리(板狀節理)란다. 절리란 암석이나 지층이 갈라지거나 쪼개지는 것을 말하는데 그 모양에 따라 주상절리와 판상절리, 방상절리(方狀節理)로 나뉘게 된다. 이중 수평방향으로 발달된 절리를 판상절리라고 한다. 기둥모양으로 형성된 수직형의 절리를 주상절리, 그리고 두 방향 또는 여러 방향의 절리들이 교차하여 거대한 장방형이나 육면체로 잘리게 되는 것을 방상절리라고 부름은 물론이다.

 

 

그나저나 사람들의 관심은 공룡발자국 보다는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에 쏠려있나 보다. 바닥을 살펴보는 사람들보다는 해벽동굴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이렇게 고운 풍경화가 펼쳐지는데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상족암(床足巖)은 층암단애(층층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로 이루어져 있는 게 특징이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여간 범상스러운 게 아니다. 암벽 깊숙이 동서로 되돌아 돌며 암굴이 뚫어져 있는 것이 밥상다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족(床足)’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이다. 또한 여러 개의 다리모양 같다 하여 쌍족또는 쌍발이라고도 불린다.

 

 

높고 낮으며, 넓고 좁은 굴 안에는 기묘한 형태의 돌들이 많은 전설을 담고 있다. 태고에 선녀들이 내려와 석직기를 차려놓고 옥황상제에게 바칠 금의를 짜던 곳이 상족굴이고 선녀들이 목욕하던 곳은 선녀탕이라 불려오고 있다. 지금도 돌 베틀모양의 물형과 욕탕모양의 웅덩이가 굴 안에 존재하고 있다니 관심을 갖고 살펴볼 일이다.

 

 

상족암 해식동굴은 오랜 세월동안 파도에 시달린 흔적이다. 그 흔적이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기기묘묘해서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든다. 동굴은 거의 직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동굴이 앞뒤로 뚫려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다.

 

 

이 동굴에서는 여느 바다 사진과는 다른 사진을 찍어 볼 수 있으니 한번쯤은 꼭 시도해 볼 일이다. 이왕에 시작한 김에 동굴 촬영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동굴은 우선 빛이 매우 부족하고 장소가 한정되어 있다. 동굴사진은 대체로 입구의 윤곽을 이용한 촬영을 많이 한다. 적당한 위치에서 동굴 외각을 잡고 바깥 경치를 촬영하는 것이다. 이때 노출은 주제에 맞추고 동굴 외곽은 노출 부족을 시켜 어둡거나 검게 처리한다. 동굴 안의 모델은 실루엣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얼굴이 보이게 할 수도 있다. 얼굴을 보이게 할 때는 보조광을 이용해야 한다.

 

 

 

상족암의 앞에는 수백 명이 한꺼번에 앉아 쉴 수 있는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다.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이 평탄한 암반층을 파식대(波蝕臺)라고 부른다. 평탄한 암반위에 손바닥 크기의 구멍 몇 개가 보인다. 공룡발자국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지만 자신은 없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모양이다. 공룡의 발자국보다 물이 빠져나가면서 드러난 해조와 조개류에 더 관심을 갖는 걸 보면 말이다.

 

 

이번 여행의 히어로는 단연 손아래 여동생의 큰 손주다. 의사인 부모가 쌍으로 일본에 취업한 덕분에 할머니 손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길에 모처럼 귀국한 엄마까지 동행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거기다 다섯이나 되는 우리 형제들에게도 유일한 손주였으니 또 얼마나 귀염을 독차지 했겠는가.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공룡박물관으로 향한다. 잠시 후 오른편에 공룡박물관으로 연결되는 후문이 나타난다. 하지만 월요일인 오늘은 전국의 모든 박물관들이 문을 닫는 날이다. 이곳 역시 문이 굳게 닫혀있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5개 전시실과 영상실로 구성된 공룡박물관은 중생대 백악기(1억년 전)의 공룡 골격 진품 4, 복제품 10, 일반화석 55점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국내 최초의 공룡전문박물관으로써 공룡화석을 보다 흥미롭게 즐길 수 있도록 오비랩터(Oviraptor)와 프로토케라톱스(Protoceratops) 진품 화석을 비롯하여 클라멜리사우루스 (Klamelisaurus)와 모놀로포사우루스 (Monolophosaurus)와 같은 아시아 공룡, 그리고 세계의 다양한 공룡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 남해도로 되돌아가다가 삼천포 용궁수산시장에 들렀다. 한려수도의 중심지인 삼천포는 1956년에 시로 독립되어 유지되다가 1995년 사천군과 통합되어 현재는 사천시가 되었다. 하지만 시장의 이름은 아직도 삼천포그대로이다. 인근 해역에서 잡히는 해산물이 모이는 중심 어항으로 오랜 세월을 이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곳은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다는 게 매력. 굳이 복잡한 시내를 통과해가면서까지 어시장을 찾아간 이유이다. 이왕에 바닷가에 왔으니 하룻밤 정도는 회 잔치를 해야지 않겠는가.

 

 

평일, 거기다 월요일이선지 몰라도 어시장은 한산했다. 아니 점심 때가 지났는데도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곳도 있었다. 회를 떠주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 횟집의 90% 이상을 여성들이 운영하고 있단다. 다른 어시장의 경우 남성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띄는데 이곳에서는 남성들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무튼 우린 이곳에서 10만 원 조금 넘는 돈으로 광어와 우럭에 해삼·멍게까지 두둑하게 살 수 있었다. 활어 외에도 선어와 건어물, 어패류 등을 팔고 있었으나 이는 눈요기에 만족하기로 했다.

 

 

또한 이곳은 시장 옥상에 주차장이 마련돼 있어 주차장을 찾아 헤매거나 무거운 해산물을 들고 주차장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자랑거리다. 주차장으로 나오면 정박해놓은 어선들이 즐비한데 이 또한 소소한 볼거리이다. ! 어시장 주변에 정박해놓은 어선사이로 갈매기가 날아다니는데 생각보다 너무 커서 옥상 주차장에 말려놓은 해산물이 무사할까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5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죽방렴(竹防廉, 명승 제71)’도 남해도의 명품 볼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해안에 돌로 담을 쌓은 뒤 밀물과 썰물 차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석방렴(石防簾, 또는 독살)’에 대비되는 원시 어로방식이 죽방렴인데 우리가 흔히 아는 죽방멸치역시 죽방렴으로 어획하기에 이름 지어진 것. 이를 보기 위해서는 지족마을로 가야한다. 창선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빠져나오면 지족 어촌체험마을이 나온다. ! 창선대교에서도 죽방렴을 제대로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다리 아래서 진행되는 원시어업 형태의 죽방렴은 물론이고, 일몰의 아름다움까지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 유명하다.

 

 

좁은() 바다길이라 하여 손도라고도 불리는 지족해협은 하루 두 번씩 밤낮으로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할 때마다 바닷물이 좁은 해역을 빠져나가는 물살이 당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거세다는 이야기다. 그런 조류(潮流)의 특징을 이용한 원시 어로기법이 이곳 죽방렴이다. 물때를 이용하여 고기가 안으로 들어오면 가두었다가 필요한 만큼 건지는 방식으로 이곳에서 잡힌 생선은 최고의 횟감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물살이 빠른 바다에서 사는 고기는 탄력성이 높아 그 맛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V’자 모양의 대나무 정치망인 죽방렴은 길이 10m 정도의 참나무 말목 300여개를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얕은 갯벌에 박고 주렴처럼 엮어 만든 그물을 물살 반대방향으로 벌려 놓은 원시어장이다. 물살에 떠내려 오는 고기를 잡는 단순한 방법으로 현재 남해군 지족해협에 유일하게 23통이 남아있어 보존가치가 높은 관광자원으로 관심을 모은다. 아래 사진들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다음 방문지는 남해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금산(錦山)이다. 아니 정확히는 정상 근처에 있는 보리암 菩提庵)’이다. 강화도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라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다 요즘은 산책삼아 다녀올 수도 있다는데 말이다. 찾아가는 방법도 간편하다. 남해읍 바로 아래에 있는 무림사거리(이동면 무림리)’에서 19번 국도로 올라타고 상주해수욕장 방향으로 가다보면 금산을 안내하는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보리암로를 따라 들어가면 복곡저수지 상류의 하부주차장(복곡매표소)’을 거쳐 상부주차장(보리암매표소)’에 이르게 된다. ! 하부주차장에서 상부주차장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20년 전 처음으로 찾았을 때의 보리암은 얼굴 보기가 만만찮았다. 가파른 산길을 낑낑대며 올라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동네 마실 나가는 것만큼이나 수월해졌다.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사찰인데도 인접한 곳까지 자동차가 들어가는 까닭이다. 차에서 내린 후 금산의 수려함과 맑은 공기를 느끼며 10여분만 걸으면 보리암이다.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풍광도 빼어나다. 금산의 자랑거리인 기암절벽과, 한려수도의 특징인 다도해의 풍광을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전망대를 지나게 되기 때문이다.

 

 

잘 닦인 탐방로를 따라 10분 남짓 걸었을까 금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갈려나가는 삼거리에 도착했다. 보리암 뒤편에 우뚝 솟은 웅장한 대장봉과 대장봉을 향해 절을 하는 듯한 모습의 형리암의 멋진 절경을 이룬다. 그건 그렇고 절 입구의 안내소에서 보광전까지 100는 가파른 돌계단이다. 손잡이가 있긴 하지만 무릎 관절이 좋지 않다면 조심해야 한다.

 

 

보리암(菩提庵)’에 도착하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절집의 위용에 놀라게 된다. ‘어떻게 이런 곳에 절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절로 드는 광경이다. 이 절이 창건된 이야기는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신문왕 3(683) 운수행각 하던 원효대사가 온 산이 빛나듯 방광한 모습에 홀려 초당을 짓고 수행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한 원효는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하고 절의 이름도 보광사(普光寺)’라 불렀다. 그 뒤 태조 이성계가 100일 기도를 올리며 수행한 뒤 조선을 개국하자 산의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바꾸었고, 현종 때는 보광사 대신 새로 절을 지어 이름을 보리암으로 한 후 왕족의 명복이나 현세를 축원하기 위한 절인 원당으로 삼았다. 1300여년의 긴 역사만큼이나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가 담긴 사찰이다.

 

 

절을 돌아보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역시 관음을 모신 사찰이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보리암은 불당들도 볼 만하지만 역시 관음을 직접 만나러 가야 한다. 사찰의 제일 양지바른 곳, 남해가 한눈에 보이는 장소에 해수관세음보살상(海水觀世音菩薩像)이 우뚝 서 있다. 해수관세음보살상은 연꽃 문양의 상·하 좌대를 서로 마주 보게 포갠 뒤 그 위에 화강석으로 조각됐다. 왼손에는 보병을 들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채 가슴에 두었다. 양 어깨를 감싸고 각각의 팔을 휘감아 흘러내린 옷깃은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실물을 보는 듯하다.

 

 

관음상이 세워진 것은 1970년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보리암에서 가장 기()가 강한 곳이라선지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려고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면 누구에게나 한 가지 소원만은 꼭 들어 주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인자한 미소를 띤 보살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이들의 소망은 무엇일까.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들은 다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그들의 기도가 성취되기를 바라며 함께 고개를 숙여본다.

 

 

해수관음상 바로 옆에는 삼층석탑(菩提庵前 三層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이 자리하고 있다. 가야시대 때 허왕후가 인도에서 올 때 배가 태풍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실었던 돌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683년 개산(開山)을 기념하기 위해 원효대사가 이곳에 세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강암으로 만든 이 탑은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인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아무튼 땅에 서린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 지은 탑으로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보리암을 지켜온 것만은 사실이다.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비는 것도 이곳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축대 위에는 각양각색의 꼬맹이 불상들이 한 가득이다. 불심 가득한 신자들이 하나둘 가져다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보리암의 보리(菩提)는 깨달아 도를 이루었다는 뜻, 이곳에서 빌면 뭔가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소문이 난, 영험하고 자비스런 관음기도 도량이다. 그러니 뭔가를 염원하는 불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왔을 것이고, 또 그들은 신심에서 우러나오는 뭔가의 공물(供物)을 바치지 않았겠는가.

 

 

썩 좋지 않은 풍경도 보였다. 석탑 근처 바위면의 각자(刻字)가 바로 그것인데, 자신의 허울 좋은 이름을 드러내려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낙서들이었던 것이다. 부처님의 영험에 기대어보려는 중생의 바람이었는지는 몰라도 또 다른 중생인 내 눈에는 한갓 넋두리로 보일 따름이었다.

 

 

해수관음상 앞은 보리암 최고의 전망대이다. 난간에 서면 발아래 한려수도(閑麗水道)의 시원한 풍광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저 멀리 남해바다의 만경창파가 넘실거리는데, 그 파도위에 자그마한 섬들이 마치 돛단배인양 두둥실 흘러 다니고 있다. ! 저런 아름다움이 있기에 이곳 금산이 산이면서도 유일하게 한려수도에서 포함되어 있나보다. ! 이곳뿐만 아니라, 금산 어느 곳에서나 기암괴석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바다풍경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보리암 주변의 기암괴석들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곳 금산은 남해의 금강산이란 애칭을 갖고 있을 정도로 빼어난 암릉미를 갖고 있는 산이다. 여유를 갖고 시야를 돌려보면 그야말로 절경, 자연이 빚어 놓은 수석 전시장은 눈길이 가는 곳마다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난간에서 바다를 등지고 보리암 주변을 둘러보면 가장 높은 대장봉에서부터 왼편으로 형리암·농주암·화엄봉·일월봉·제석봉·상사바위 등이 차례로 보인다. 삼불암은 탑대 오른편으로 건너다보이는 바위이다. 이곳 금산에는 저렇듯 아름다운 경관들, 금산의 38이라는 빼어난 경관을 보유하고 있어 해마다 많은 탐방객들로 붐빈다. 38경에는 망대, 문장암(文章岩), 대장봉, 형리암, 탑대, 천구암, 이태조기단(李太祖祈壇, 이씨기단), 가사굴, 삼불암, 천계암, 천마암, 만장대, 음성굴(音聲窟), 용굴, 쌍홍문(雙虹門), 사선대(四仙臺), 백명굴, 천구봉, 제석봉, 좌선대, 삼사기단(三師祈壇), 저두암, 상사바위(相思巖), 향로봉(香爐峰), 사자암(獅子岩), 팔선대, 촉대봉(燭臺峰), 구정암, 감로수, 농주암, 화엄봉, 일월봉, 흔들바위, 부소암, 상주리석각, 세존도, 노인성, 일출경 등이 꼽힌다.

 

 

저렇듯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지는데도 집사람의 잔뜩 웅크린 몸은 풀릴 줄 모른다. 이곳 보리암은 관음성지로 명성을 떨치는 곳. 어머니 관음이 사는 곳이라선지 엄숙하기보다는 따뜻한 느낌이다. 그런데도 집사람이 느끼는 이른 봄의 쌀쌀함까지 없애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녀로서는 그런 관음사상이 강 건너 불구경일 수도 있겠다. 고향집 같은 포근함 속에서 소원을 빌며 칭얼대고, 한껏 휴식을 취하기도하면서 위로를 받는다는 느낌까지도 남의 집 얘기일 것이고 말이다.

 

 

금산의 정상은 올라가지 않기로 했다. 이미 세 번이나 다녀갔기 때문이다. 대신 9년 전 들렀을 때 사용했던 사진과 글을 올려본다. <정상으로 가려면 보리암 뒷편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서야 한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문장암(명필바위)을 지나 정상에 오르면 명승 제39호 금산이라고 적힌 정상석이 세워져 있고, 그 뒤에 금산 제1경인 망대(望臺)가 서있다. 망대는 사방으로 조망이 뛰어나다. 넓고 아름다운 남해바다의 만경창파가 잘 보인다고 해서 망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망대는 또 고려시대 때부터 우리나라 최남단의 봉수대(烽燧臺)로 사용되어 왔는데, 조선시대에는 오장 2명과 봉졸 10명이 교대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높이 3.5m 둘레 56m 8m 되는 장방형의 돌담으로 작지 않은 규모이며,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또 다른 명소도 소개해 본다. 단군성전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수백 길 절벽위에 치솟은 거대한 암봉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웃집 처녀를 짝사랑했던 총각의 전설이 서린 상사바위이다. 상사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이다. 보리암 주변의 기암괴석들이 빠짐없이 눈에 들어오고, 한려수도의 수려한 풍광이 눈앞에 빈틈없이 들어차고 있다.

 

 

상사바위는 보리암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조망의 명소다. 금산의 정상어림 바위절벽 위. 관음성지로 이름을 떨치는 다른 사찰들처럼 보리암도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민중들은 관음보살이 천축국 낙가산 바닷가 굴에 살았다고 믿었다. 친정 같은 편안한 곳에 관음보살을 모시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 기운이 가까운 곳에 관음성지를 지었다. 그 편안함 속에는 삶에 지친 사람들이 들어가 함께 쉴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쌍홍문(雙虹門)’이다. 커다란 바위에 두 개의 구멍이 뻥 뚫린 것이 마치 해골을 보는 듯, 원래는 천양문이었는데 원효대사가 두 개의 구멍이 마치 쌍무지개 같다 하여 쌍홍문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역시 깨우친 현인들 눈에는 같은 사물도 이렇듯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내 눈에는 해골로만 보이는데도 말이다. 쌍홍문을 통과하면서 바라보는 바깥세상은 또 하나의 경이로운 세상이다. 왼편 구멍으로는 계단을 따라 쌍홍문으로 줄지어 오르는 군상들이 늘어서 있고, 오른편 구멍으로는 저 멀리 남해 한려수도의 만경창파가 넘실거린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남도에는 벌써 벚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남도에서도 꽃의 절정은 남해도다. 벚꽃 길을 따르다보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눈부신 쪽빛 바다와 알록달록 꽃들이 만나 즐거운 수다를 떨고 있다. 한마디로 서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 서러움에 겨웠는지 벚꽃은 천지사방에 꽃잎을 흩날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