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산 술래길
여행일 : ‘17. 7. 18(화)
소재지 : 충남 금산군 금성면과 추부면 일원
산행코스 : 칠백의총→뱀이실재→십리장등→사두봉→철쭉군락지→돌고개→금성산(438m)→상마수리→마수1리 신흥마을 경로당(산행시간 : 2시간 40분)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산악회
특징 : ’금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이곳 말고도 전국에 여러 곳이 있다. 하지만 한자어로 ’금성(金城)‘을 쓰는 다른 곳들과는 달리 이곳은 금성(錦城)을 쓴다. 이 산에 있는 금성산성(錦城山城)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지 않나 싶다. ’비단 금(錦)‘이란 글자는 예로부터 크다, 위대하다, 으뜸이다. 신성하다 등의 뜻으로도 사용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에 주변의 여러 성을 거느리는 커다란 성(城)이 있었다고 보면 앞뒤가 꼭 들어맞지 않겠는가. 아무튼 이 금성산에 조성된 둘레길이 바로 ’술래길‘이다. 행정안전부가 주관한 ’2012년 우리마을 녹색길‘ 전국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의 절반(4억원)을 국비(國費)로 지원받았다. ’칠백의총(七百義塜)‘의 의로운 기운이 넘치는 건강한 숲길이라는 모토(motto)가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끌었던 모양이다. 이 ’술래길‘은 칠백의총에서 시작해서 사두봉과 금성산의 정상을 거쳐서 ’상마수리 소나무 숲‘까지 연결되는데 길이는 대략 8.5Km쯤 된다.
▼ 산행들머리는 칠백의총 주차장(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135-2)
통영-대전고속도로 추부 IC를 빠져나와 37번 국도를 타고 무주․금산 방면으로 9km 정도를 달리다가 의총사거리(금산군 군북면 내부리)에서 ’칠백의총‘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700여m쯤 들어가면 칠백의총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에 ‘칠백의총(七百義塜)’에 들러보기로 한다. 술래길의 모토(motto)가 ‘칠백의총‘의 의로운 기운이 넘치는 건강한 숲길인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정문이랄 수 있는 ‘의총문(義塜門)’을 지나 안으로 들면 순의비각(殉義碑閣)이 참배객들을 맞는다. 중문(中門) 격인 ‘취의문(取義門)’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편에 보이는 건물이다. 이 비각에는 ’중봉 조헌선생 일군 순의비(重峰 趙憲先生 一軍殉義碑)‘의 파비(破碑)가 보존되어 있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조헌선생이 지휘하는 ‘칠백의사(七百義士)’가 승장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를 수복하고 금산 싸움에서 순절하기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碑文)이다. 그러나 이 비는 일제 강점기에 금산 경찰서장이었던 일본인 이씨까와 미찌오에 의해 폭파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인근 주민들이 뒷산에 묻어두었다가 8.15 해방 후에 파내어 보관하여 오던 중 1971년 경역(境域)을 확장할 때 비각을 세우고 그 파손된 비(碑)를 보존하여 왔다고 한다. 2009년 9월에는 분리된 상태로 비각 안에 있던 몸체와 머릿돌을 현재의 모습으로 접합․복원하는 한편, 비각도 비의 규모에 맞추어 목조양식으로 새롭게 개축한바 있다. 참고로 맞은편, 즉 왼편에는 칠백의사의 전투모습 등 행적을 그린 7폭의 기록화(記錄畵)와 칠백의사와 관련된 유물(遺物) 168점이 보관․전시되고 있는 ‘기념관(記念館)’이 위치하고 있다.
▼ ‘취의문(取義門)’을 통과하면 이번에는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싸우다 돌아가신 의사(義士)들의 위패(位牌)를 모신 ‘종용사(從容祠)’가 참배객을 맞는다. 종용사는 1647년 호남․호서 지방의 유림들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1663년에는 현종으로부터 ‘종용사’라는 사액(賜額)까지 받았으나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는 항일 유적 말살정책에 따라 파괴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가 1952년 복원되었고 1971년 재건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셔진 위패들에 경의를 표해본다. 아니다. 비록 위패는 모셔지지 않았더라도 당시에 순국하신 칠백의사(七百義士) 모두에게 드려야 할 일이다. 우리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전문 훈련도 받지 않고 변변한 무기조차 가지지 않은 일반 백성들로 조직된 의병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수많은 외적의 침입과 전쟁 속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던 민족인지라 혈관 속에 특별한 힘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 순간까지 왜군에 맞서 싸우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모두 전사한 것을 보면 말이다.
▼ 종용사를 옆구리에 끼고 돌면 돌계단이 나타나고, 이 돌계단의 위에 ‘칠백의총(七百義塜)’이 자리하고 있다. 사적 제105호로 지정된 칠백의총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왜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중봉(重峯) 조헌(趙憲)과 의병(義兵)들을 함께 묻어놓은 곳이다. 1592년(선조 25) 8월 1일 조헌의 의병과 영규(靈圭)의 승병(僧兵)은 합군하여 청주성을 수복했다. 이어 8월 18일에는 남은 700인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격하여 1만 5천명이나 되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막강한 왜군과 맞섰다. 이 전투에서 그들은 전원이 순절(殉節)했다고 한다. 4일 후인 22일 조헌의 제자인 박정량(朴廷亮)과 전승업(全承業) 등이 모든 시체를 거두어 이곳에다 함께 묻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이들의 시신을 합장한 묘소를 중심으로 사당이 건립되었고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땅은 성지가 되었다.
▼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연못이 보이기에 들어가 본다. ‘숭의지(崇義池)’라는 당당한 이름까지 갖고 있는 연못인데 거울처럼 잔잔한 수면이 주변의 울창한 숲과 잘 어우러지며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이파리가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철에는 한층 더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을까 싶다.
▼ 칠백의총을 둘러봤다면 이젠 트레킹에 나설 차례이다. 주차장에서 아까 버스를 타고 들어왔던 길로 되돌아나간다. 왕복 2차선인 도로의 가운데는 잔디화단을 만들고 줄을 지어 태극기를 걸어 두었다. 칠백의총의 분위기에 걸맞는 치장이 아닐까 싶다.
▼ 오른편 들녘에는 수없이 많은 안테나들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하나같이 거대한 외모를 지녔는데 KT의 ‘금산위성통신 제1지구국(錦山衛星通信 第一地區局)’의 시설이란다. 1969년 미국 필코포드사(Philco Ford)에서 제작된 안테나설비로 1970년 국내 최초의 위성통신지구국이 이곳에 건설된 후 개통되었다. 카세그레인 안테나(Cassegrain antenna)라 불리는 이 안테나는 주반사판, 부반사판, 안테나 지지타워, 안테나 구동장치 등으로 구성된다. 태평양 상공의 인텔셋(Intelsat) 3호 위성을 이용해 미국, 홍콩, 대만 등 태평양 연안 7개 국가간 136회선의 국제통신망을 구축하여 우리나라 국제통신 발달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기술적·사료적 가치가 큰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2009년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436호’로 지정된 바 있다.
▼ 도로를 따라 150m쯤 걸으면 좌측으로 ‘금성산 술래길’의 입구가 나타난다. 들머리에 ‘금성산 술래길’과 ‘인삼의 고장 금산’이라고 적힌 두 개의 기둥이 세워져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들머리에는 ‘금성산 술래길 종합안내판’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길을 나설 일이다. 왼편에 지도를 그려 넣었고, 오른편에는 술래길의 주요 지점간 거리를 표기해 놓았다. 칠백의총을 출발해 사지봉과 금성산을 찍고 해너머재를 거쳐 상마수리의 소나무숲까지 나오는데 거리는 총 8Km가 된단다.
▼ 안내판 뒤로 난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50m 정도를 오르면 지능선이 나타나는데 커다란 밭으로 되어있다. 밭으로 들어서지 않고 왼편으로 50m쯤 직진한 다음 칠백의총의 담장이 나오면 그 담장을 왼편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 능선에는 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눈길 한번 주지 않을 정도로 냉대를 받는 꽃이지만 무리지어 피어나니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하다. 사람들은 망초의 어원(語原)을 ‘망할 놈의 풀’이라는 데서 찾는다. 아무리 뽑아내도 또 다시 무성해지는 잡초를 보고 내뱉은 농부의 넋두리가 ‘망초’의 어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망할 놈의 풀’도 어딘가에는 쓰임새가 있을 게 틀림없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창조주께서 아무 생각 없이 허투루 만들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 쓰임새라는 게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그렇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세상에 나올 가치는 충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순(蘇洵)의 변간론(辨姦論), 즉 ‘간신을 변별하는 의론’에 ‘事有必至(사유필지) 理有固然(이유고연)’이란 구절이 나온다. ‘일이 꼭 그렇게 된 데는 반드시 그렇게 된 이유가 있다.’라는 뜻이다. 소순이 얘기하고자 했던 논지(論旨)에서는 어긋나겠지만, 망초가 만들어 놓은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의 주장이 떠오른 건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했던 아름다움과 마주친데 대한 놀라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 담장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반듯하게 쌓아올린 돌탑과 이정표(금성산← 5.5Km/ 칠백의총↓/ 금산→)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능선 삼거리에 올라서게 된다. ‘술래길’은 물론 왼편방향이다.
▼ 아직도 술래길은 칠백의총의 담장을 옆구리에 끼고 이어진다. 하지만 주변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바뀌어 있다. 길의 폭 또한 자동차가 지나다녀도 될 만큼 엄청나게 넓어졌다. ‘십리장등’이란다. ‘장등’이란 게 본디 ‘산마루(산등성이의 가장 높은 곳)’의 충청지방 방언(方言)일지니 지금 걷고 있는 이 ‘산등성이’가 십리(4Km)에 이른다고 해서 ‘십리장등’이르는 이름을 붙여놓지 않았을까 싶다.
▼ 잠시 후 안내판 하나가 나타난다. ‘칠백의총’과 ‘금산성 의병전투’에 대한 내용을 적었는데, 칠백의사 기록화와 ‘임진왜란의 금산지역 전투도’도 함께 올려놓았다. 오늘 산행에는 이런 안내판들을 수없이 많이 만나게 된다. 적혀있는 내용도 제각각이어서 읽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철쭉군락지나 진달래군락지 등 능선의 특징을 적었는가 하면 ‘산림욕의 효능’이나 ‘숲의 환경보전 기능’ 등 숲의 효용가치에 대해 설명을 할 때도 있다. ‘금성산성’ 등 지역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도 보임은 물론이다.
▼ 여러 가지 안내판들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아무래도 마을에 대한 안내판이 아닐까 싶다. 둘레길 주변 마을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 같아서이다.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은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다. ‘마을의 위치나 유래’, ‘특산물’ 등에 그치지 말고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마을의 미담고사(美談古事)들을 발굴해서 적어놓았더라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되었을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금성면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금성면은 금성산을 제외하곤 산지가 많지 않고, 기신천이 너른 평야의 중앙부를 지나는 터라 내륙 지역에선 보기 드문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들녘의 뒤에 보이는 산은 닭이봉이 아닐까 싶다.
▼ 길은 일단 넓다. 경사 또한 완만하기 짝이 없다. 계단 또한 눈에 띄지 않는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노약자(老弱者)들까지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맞다. 이 길은 애초에 만들 때부터 유모차나 휠체어 등 보행약자(步行弱者)들의 접근성을 강화시키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일부 노선은 평평한 천연목재 및 단단한 흙길로 조성하는 등 이용편의성을 최대한 고려할 계획이라면서 말이다.
▼ ‘파고라(pergola의 일본식 발음)’도 보인다. 신경을 써서 만든 듯 반듯한 외관을 갖추고 있지만 효용가치는 별로일 것 같다. ‘파고라’는 사방이 트여있는데다 지붕을 갖추고 있어서 햇볕이나 비를 피해 잠시 쉬어가는 일종의 휴게시설이다. 그래서 따가운 햇볕을 피할 수 없는 곳에다 설치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이곳은 주변에 숲이 짙어 애초부터 빛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기 때문이다.
▼ 이번에는 왼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발아래에는 뱀실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뒤에는 진악산과 월봉산, 백마산 등 금산군 관내의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맨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을 대둔산은 구름이 삼켜버렸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5분쯤 지나면 뱀이실재(또는 뱀실재)를 지난다. 의총1리와 마수리를 잇는 고갯마루(이정표 : 금성산 정상↑ 4.4Km/ 의총1리←/ 마수리→)인데 지금은 육교(陸橋)가 놓였다. 고갯길을 내면서 잘려나갔던 허리를 다리를 놓아 다시 하나로 연결시킨 셈이다. 덕분에 급한 오르내림이 없어져 휠체어나 유모차의 통행이 가능해졌다. 이것 역시 보행약자를 위한 배려일 것이다. 아무튼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참 오는 도중에 의총1리와 의총2리로 연결되는 사거리(금성산 정상↑ 5.2Km/ 의총1리←/ 의총2리→)를 만났던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 길은 계속해서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완만해서 걷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니다. ‘술래길’을 조성하면서 신경을 많이 썼다는 증거일 것이다. ‘술래길’은 행정안전부가 추진하고 있는 ‘우리마을 녹색길 사업’이 만들어 낸 일종의 ‘둘레길’이다. ‘지역의 역사문화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보행자 중심의 길’이라는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를 내건 이 사업은 ‘지역공간 체험형’과 ‘수변공간 활용형’, ‘도심문화 생활형’ 및 ‘명상·사색형’으로 나뉘는데 금성산 술래길은 ‘지역공간 체험형’에 속한다. 그런데 트레킹 도중에 만난 안내판의 각 구간 길이를 합해보니 8.5Km뿐이 안 된다. 공모 당시의 기사(記事)에는 13.2㎞라고 되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하긴 계획대로 만든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 심심찮게 시야가 열리면서 눈앞에 아름다운 풍광들이 펼쳐진다. 금산의 넓고 푸른 들녘이 잔뜩 물기를 머금은 채로 그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구름만 아니었더라면 주변의 산들과 함께 한 폭의 빼어난 산수화를 그려냈을 텐데 아쉽다.
▼ 뱀이실재에서 25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육각의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는 사지봉(사두봉)에 올라서게 된다. 해발이 265.9m로 십리장등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란다. ‘술래길 쉼터’라는 공식 이름을 갖고 있는 이곳에는 정자 외에도 안내판을 세워 금산인삼을 잔뜩 자랑하고 있다. ‘금산인삼의 효능’이 다른 곳에 비해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금산인삼이 백제인삼에서 맥을 잇는다는 데서 찾고 있다.
▼ 정자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남북으로 시야가 열리는데 특히 남쪽 조망이 뛰어나다. 금산의 시가지가 들어앉은 너른 들녘 너머로 우뚝 솟은 진악산이 아름답다. 금산의 진산(鎭山)이다. 북쪽으로는 금성산 정상과 407봉(핏재산), 계원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펼쳐진다.
▼ 금성산을 향해 잠시 걸으니 ‘철쭉군락지’ 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철쭉에 대해 읊은 시(詩) 한 수가 적혀있으니 한번쯤 읽어보고 가면 어떨까 싶다. 고려 고종 때의 문신인 최자(崔滋)가 편집한 시화집(詩話集)인 보한집(補閑集)에 나오는 시조이다. 아무튼 오른편 산자락이 온통 철쭉나무들 일색이다. 봄에 찾아오면 흐드러지게 핀 꽃밭을 거닐 수도 있겠다. 다만 그 범위가 그다지 넓어 보이지 않는다는 게 흠(欠)이지만 말이다.
▼ 잠시 후, 또 다른 육교(陸橋)를 만난다. 마수리(신흥마을)에서 파초리(장목골)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를 다리를 놓아 다시 연결시킨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모양이다. 다리 아래로 난 길이 흔적을 거의 잃어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 문득 임진왜란 당시의 이곳 풍경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길이 하도 좋다보니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생겼나보다. 아무튼 당시 금산에 모여들었던 의병들도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이 능선을 걸었을 게다. 다들 집에서 사용하던 낫이나 괭이를 하나씩 들고서 말이다. 그들은 과연 일본군의 무시무시한 화력을 상상이나 하고 있었을까? 질게 뻔한 전투였는데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전장(戰場)을 만들어낸 위정자(爲政者)들이 싫다. 아니 최고 책임자인 임금이 싫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設)’이 꼭 아니더라도 일본의 위협에 대한 우려는 당시 사회에 팽배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도 이를 간파하지 못한 못난 임금(선조) 때문에 나라가 박살이 났고, 그 잘난 양반님들 대신에 민초(民草)들이 낫과 괭이자루를 들고 전장에 나섰기 때문이다. 역시 ‘임금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다 같은 모양이다. 우리나라를 뒤흔들었던 최근의 사태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겠는가. 갑자기 ‘군주(君主)가 무능하면 쫓아내야한다.’고 외쳤던 맹자(孟子)와 민본주의(民本主義) 사상을 주장했던 정도전(鄭道傳)이 생각나는 건 무슨 이유일까
▼ 이번에는 ‘진달래군락지’ 안내판이 보인다. ‘화전가(花煎歌)’라는 화전놀이를 소재로 한 규방가사(閨房歌辭)를 적어 놓았다. 그 내용이 하도 가슴에 닿아 금방 떠나지를 못하고 그 분위기에 빠져본다. 새봄을 맞아 상춘(賞春)한다는 의미와 함께 시집살이의 굴레에서 하루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어 하는 부녀자들의 간절한 염원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안내판만으로는 부족했던지 근처에 ‘진달래공원’이라는 팻말까지 붙여 놓았다. 하지만 군락지의 범위가 그다지 넓어 보이지 않는 것은 철쭉군락지와 마찬가지이다.
▼ ‘술래길 쉼터’를 출발한지 20분 남짓 되었을까 ‘마수1리(윗말머리)’의 안내판이 나타난다. 마을의 생김새가 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 옆에는 도둑이 없고 인심이 좋은 마을이라는 ‘두곡2리(돌고개)’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그런데 마을로 연결되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아래로 내려가는 침목(枕木) 계단이 놓여있을 따름이다. 그 갈림길(이정표 : 금성산 정상↑ 2.0Km/ 두곡2리←/ 마수1리→)은 건너편에 놓인 계단을 오르면 만나게 된다.
▼ 계단을 내려서니 오른편에 왕복 2차선 도로가 보인다. 두곡2리와 마수1리를 연결하는 군도(郡道)인 ‘마수로’인데 지금 걷고 있는 지점의 바로 아래에까지 와서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그렇다면 이곳이 ‘돌고개’인 모양이다. 그리고 잘려져 있던 고갯길을 ‘술래길’을 조성하면서 다시 연결시켜 놓았을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다리의 위가 흙으로 엎여있는 게 눈에 띈다. 양쪽 가에는 소나무까지 심어 놓았다. 능선을 연결하는 김에 동물들도 이용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모양이다. 금산군청 담당자의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하지만 다리를 조금 더 높게 놓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렇게 해서 계단을 없앴더라면 보행약자들도 마음 놓고 건너다닐 수 있을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 길은 돌고개를 지나서도 거의 변화를 주지 않는다. 넓고 반반한 것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전형적인 산길로 변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주변이 온통 칡(葛) 밭으로 변해있다. 능선은 물론이고 커다란 나무들까지도 온통 칡넝쿨로 둘러싸여 버렸다. 칡의 일번적인 특성이 아닐까 싶다. 콩과 식물에 속하는 칡은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고, 생명력이 왕성하여 숲속에 웬만한 틈만 보이면 얼른 자리를 잡고 나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터만 잡으면 하는 짓마다 망나니가 된다. 허락도 받지 않고 이웃 나무줄기를 빙글빙글 감고 순식간에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더욱이 넓적한 잎을 수없이 펼쳐, 잎 아래에 있는 나무에게는 단 한 줄기의 빛도 들어가지 못하게 거의 완전히 햇빛을 차단해버린다. 당한 나무는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린다. 공생(共生)이라는 산림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주범이 바로 칡인 것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역사의 바늘을 조금만 거꾸로 돌려보면 칡은 정말 고마운 식물이었다. 뿌리, 줄기, 잎, 꽃 모두 요긴하게 쓰였다. 갈근(葛根)이라 불리는 칡뿌리는 흉년에 부족한 전분을 공급하는 대용식이었으며, 갈근탕을 비롯한 여러 탕제(湯劑)에 쓰였고 질긴 껍질을 가진 줄기는 삼태기를 비롯한 생활용구로 널리 이용되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칡꽃(葛花)에 대한 효능도 적고 있다. ‘칡꽃(갈화)과 소두화(팥꽃)를 같은 양으로 가루를 내어 먹으면 술을 마셔도 취할 줄 모른단다. 술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효능이 아닐까 싶다.
▼ 돌고개를 지난 지 20분 남짓 되면 ‘상마수마을 갈림길’(이정표 : 금성산 정상↑ 0.67Km/ 상마수마을→ 0.21Km)을 만난다. 구태여 정상까지 가고 싶지 않다면 이곳에서 마수리로 내려가도 될 일이다. 아무튼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의 이름은 ‘술래길’이다. 술래잡기의 그 술래이고 강강술래의 그 술래라고 한다. 감추어져 있는 것은 귀한 것이고, 숨은 술래를 찾으면 귀하기에 잘 보존하고 또 발전시키면서 즐길 수 있는 대상인 명품길이라는 것이다.
▼ 잠시 후 ‘파고라(pergola)’가 보인다. 이번에는 그늘이 필요한 곳에 자리를 잘 잡은 것 같다. 아무튼 술래길은 정성들여 가꾼 흔적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다리품을 풀어야 할 곳에는 어김없이 벤치를 놓았고 또 어떤 곳에는 몸을 풀어가면서 걸어보라는 듯이 체육시설까지 배치했다. 그런가하면 정성들여 쌓은 돌탑들도 보인다. 그렇다고 숲길 조성이 빠질 리가 없다. 울창한 소나무 숲은 기본인데, 조그만 빈틈이라도 있을라치면 편백나무와 단풍나무 등을 심었다. 이건 숫제 산상공원(山上公遠)으로 꾸며놓았다. 그러니 어찌 금산 군민들의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조금 더 올라가면 이번에는 ‘금성산성(錦城山城)’ 안내판이 나타난다. 어떤 이들은 마한 최후의 성 금현성(錦峴城)이 이곳 금성산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백제본기’에 온조왕이 재위 26년(BC 8)에 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마한을 공략해서 꿀꺽해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만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고 나오는데 이곳 금성산성(錦城山城)이 당시의 금현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성산성의 ‘금(錦)’이라는 글자의 어원에도 맞는다고 볼 수도 있겠다. ‘크고 위대하다’로 해석해서 근처의 성들을 총괄하는 큰 성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나라가 멸망한 후에까지 버틸 수가 있었지 않겠는가. 하지만 충남 연기군 전의면 금성산(金城山)에 위치한 금이산성이라는 설(이병도)과 연기군 전동면의 금성산성이라는 설(양기석)도 있으니 참조한다.
▼ 돌고개를 지나면서 변화를 주던 길이 언제부턴가 상당히 가팔라졌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평상시 오르내리던 다른 산들에 비하면 이건 가파르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산자락을 에둘러서 가면서까지 경사를 죽이려고 노력한 탓일 것이다. 그리고 경사가 조금만 심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침목계단을 놓았다.
▼ 그렇게 20분쯤 오르면 금성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구릉(丘陵) 형태로 된 정상에는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고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정상표지석은 전망대의 뒤에 세워져 있다. 참고로 금성산(錦城山)의 ‘금’자는 ‘쇠 금(金)’을 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전체 사람이 사흘을 먹을 만큼 많은 금(金)이 매장되어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 정상에는 여러 가지의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다. 금산군에 소재하고 있는 산들의 높이와 위치를 나열해 놓았는가 하면 조망도를 설치해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대둔산과 만인산, 서대산, 천태산, 진악산 등을 표시했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금산의 산성 조망도’가 아닐까 싶다. 금산에 있는 20여 개의 성을 표시한 지도인데 삼국시대 때 이곳 금산이 백제와 신라의 ‘DMZ’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실 금산 땅 대부분은 백제에 속했었지만 일부 지역은 신라군의 최전방이었단 곳도 있었다고 한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동북쪽으로 육중한 서대산이 보이고, 동쪽으로 천태산을 비롯한 그 주변의 산들, 그리고 남쪽으로는 금산의 진산인 진악산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주변의 멋진 산들이 거의 다 보인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 하산을 시작한다. 전망대의 한가운데로 내놓은 계단으로 내려가면 된다. 이어서 동남릉을 따라 300m정도 내려가면 안부삼거리(이정표 : 해너무재↑/ 마수리→/ 금성산 정상↓ 0.3Km)에 도착한다. 계속 직진하면 407봉을 넘어가서 해너머재로 연결된다. 계획대로라면 직진해야 하겠지만 선두대장의 진행방향표시지는 오른편 마수리로 향하고 있다. 오뉴월 삼복더위를 감안해서 산행거리를 단축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 내려가는 길 역시 곱다. 경사가 완만해서 내려서는데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파른 곳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침목계단을 놓아 가파른지조차 느끼지 못하게끔 만들어 놓았다.
▼ 그렇게 15분 정도를 내려서면 임도(이정표 : 마수1리(상마수)→/ 금성산 술래길↓)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인삼밭과 오미자밭이 줄지어 늘어선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마수리(상마수)에 이르게 된다. 금성면의 진산(鎭山)인 금성산 자락에 깃든 작은 마을이다. 자연스레 '수리수리 마하수리'가 입가에 맴돌아 피식거리게 만드는 지명이지만, 사실 '마수리'라는 지명은 말머리를 닮은 마을 지형으로부터 유래한다. 이밖에도 마을엔 말과 관련된 지명이 다수 존재한다고 한다. 마책골(마책 : 말의 채찍)과 구세바위(구시 : 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 구세는 방언)가 그것이다.
▼ 길가에는 능소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이 길은 원래부터 금산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오던 길이었다고 한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만발하는 꽃동산이 되기 때문이란다. 거기다 칠백의총을 끼고 있어 충절의 고장 금산을 외부에까지 널리 알릴 수 있는데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을 받는 또 다른 요인도 있다. 438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산인지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는 점이다.
▼ 산행날머리는 마수1리 신흥마을 경로당
상마수마을에서 산행은 대충 끝났다고 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2시간 5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2시간 40분이 걸렸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산악회의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신흥마을 경로당까지는 아직도 10분 이상을 더 걸어야만 한다. 버스를 주차시킬만한 곳을 찾다보니 그렇게 되었다지만 오뉴월 뙤약볕에 자동차 도로를 걷는 다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다. 아무튼 상마수마을 앞에는 명품 소나무 숲이 있다. 여타 동구 숲들이 그러하듯 마수리 소나무 숲 또한 수구막이를 위해 조성된 비보림(裨補林)으로, 0.6㏊ 면적에 70~140년 수령의 소나무 40여 본이 동구 밖을 감싸고 있다. 마을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동구 밖엔 낙락장송이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숲이 훼손된 이후 마을 또한 폐촌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보다 못한 백낙헌(白樂憲)이라는 이가 150여 년 전 사재를 털어 빈숲에 쏟아 부었다. 숲이 다시 채워지기 시작하자 주민들도 뒤따라 숲 가꾸기에 동참했다고 한다. 숲 앞에 세워진 기념비는 그의 공로를 기리고자 마을 사람들은 세운 것이란다. 그 숲이 이젠 '상마수 소나무 숲 산림욕장'이라는 새 이름으로 탈바꿈되었다. 숲의 가치를 인정한 산림청과 금산군에서 관리를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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