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산 술래길


여행일 : ‘17. 7. 18()

소재지 : 충남 금산군 금성면과 추부면 일원

산행코스 : 칠백의총뱀이실재십리장등사두봉철쭉군락지돌고개금성산(438m)상마수리마수1리 신흥마을 경로당(산행시간 : 2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갤러리산악회


특징 : ’금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이곳 말고도 전국에 여러 곳이 있다. 하지만 한자어로 금성(金城)‘을 쓰는 다른 곳들과는 달리 이곳은 금성(錦城)을 쓴다. 이 산에 있는 금성산성(錦城山城)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지 않나 싶다. ’비단 금()‘이란 글자는 예로부터 크다, 위대하다, 으뜸이다. 신성하다 등의 뜻으로도 사용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에 주변의 여러 성을 거느리는 커다란 성()이 있었다고 보면 앞뒤가 꼭 들어맞지 않겠는가. 아무튼 이 금성산에 조성된 둘레길이 바로 술래길이다. 행정안전부가 주관한 ’2012년 우리마을 녹색길전국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사업비의 절반(4억원)을 국비(國費)로 지원받았다. ’칠백의총(七百義塜)‘의 의로운 기운이 넘치는 건강한 숲길이라는 모토(motto)가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끌었던 모양이다. 술래길은 칠백의총에서 시작해서 사두봉과 금성산의 정상을 거쳐서 상마수리 소나무 숲까지 연결되는데 길이는 대략 8.5Km쯤 된다.



산행들머리는 칠백의총 주차장(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135-2)

통영-대전고속도로 추부 IC를 빠져나와 37번 국도를 타고 무주금산 방면으로 9km 정도를 달리다가 의총사거리(금산군 군북면 내부리)에서 칠백의총방향으로 우회전하여 700m쯤 들어가면 칠백의총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에 칠백의총(七百義塜)’에 들러보기로 한다. 술래길의 모토(motto)칠백의총의 의로운 기운이 넘치는 건강한 숲길인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정문이랄 수 있는 의총문(義塜門)’을 지나 안으로 들면 순의비각(殉義碑閣)이 참배객들을 맞는다. 중문(中門) 격인 취의문(取義門)’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편에 보이는 건물이다. 이 비각에는 중봉 조헌선생 일군 순의비(重峰 趙憲先生 一軍殉義碑)‘의 파비(破碑)가 보존되어 있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조헌선생이 지휘하는 칠백의사(七百義士)’가 승장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를 수복하고 금산 싸움에서 순절하기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碑文)이다. 그러나 이 비는 일제 강점기에 금산 경찰서장이었던 일본인 이씨까와 미찌오에 의해 폭파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인근 주민들이 뒷산에 묻어두었다가 8.15 해방 후에 파내어 보관하여 오던 중 1971년 경역(境域)을 확장할 때 비각을 세우고 그 파손된 비()를 보존하여 왔다고 한다. 20099월에는 분리된 상태로 비각 안에 있던 몸체와 머릿돌을 현재의 모습으로 접합복원하는 한편, 비각도 비의 규모에 맞추어 목조양식으로 새롭게 개축한바 있다. 참고로 맞은편, 즉 왼편에는 칠백의사의 전투모습 등 행적을 그린 7폭의 기록화(記錄畵)와 칠백의사와 관련된 유물(遺物) 168점이 보관전시되고 있는 기념관(記念館)’이 위치하고 있다.



취의문(取義門)’을 통과하면 이번에는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싸우다 돌아가신 의사(義士)들의 위패(位牌)를 모신 종용사(從容祠)’가 참배객을 맞는다. 종용사는 1647년 호남호서 지방의 유림들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1663년에는 현종으로부터 종용사라는 사액(賜額)까지 받았으나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는 항일 유적 말살정책에 따라 파괴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가 1952년 복원되었고 1971년 재건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셔진 위패들에 경의를 표해본다. 아니다. 비록 위패는 모셔지지 않았더라도 당시에 순국하신 칠백의사(七百義士) 모두에게 드려야 할 일이다. 우리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전문 훈련도 받지 않고 변변한 무기조차 가지지 않은 일반 백성들로 조직된 의병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수많은 외적의 침입과 전쟁 속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던 민족인지라 혈관 속에 특별한 힘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 순간까지 왜군에 맞서 싸우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모두 전사한 것을 보면 말이다.



종용사를 옆구리에 끼고 돌면 돌계단이 나타나고, 이 돌계단의 위에 칠백의총(七百義塜)’이 자리하고 있다. 사적 제105호로 지정된 칠백의총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왜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중봉(重峯) 조헌(趙憲)과 의병(義兵)들을 함께 묻어놓은 곳이다. 1592(선조 25) 81일 조헌의 의병과 영규(靈圭)의 승병(僧兵)은 합군하여 청주성을 수복했다. 이어 818일에는 남은 700인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격하여 15천명이나 되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막강한 왜군과 맞섰다. 이 전투에서 그들은 전원이 순절(殉節)했다고 한다. 4일 후인 22일 조헌의 제자인 박정량(朴廷亮)과 전승업(全承業) 등이 모든 시체를 거두어 이곳에다 함께 묻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이들의 시신을 합장한 묘소를 중심으로 사당이 건립되었고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땅은 성지가 되었다.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연못이 보이기에 들어가 본다. ‘숭의지(崇義池)’라는 당당한 이름까지 갖고 있는 연못인데 거울처럼 잔잔한 수면이 주변의 울창한 숲과 잘 어우러지며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이파리가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철에는 한층 더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을까 싶다.



칠백의총을 둘러봤다면 이젠 트레킹에 나설 차례이다. 주차장에서 아까 버스를 타고 들어왔던 길로 되돌아나간다. 왕복 2차선인 도로의 가운데는 잔디화단을 만들고 줄을 지어 태극기를 걸어 두었다. 칠백의총의 분위기에 걸맞는 치장이 아닐까 싶다.



오른편 들녘에는 수없이 많은 안테나들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하나같이 거대한 외모를 지녔는데 KT금산위성통신 제1지구국(錦山衛星通信 第一地區局)’의 시설이란다. 1969년 미국 필코포드사(Philco Ford)에서 제작된 안테나설비로 1970년 국내 최초의 위성통신지구국이 이곳에 건설된 후 개통되었다. 카세그레인 안테나(Cassegrain antenna)라 불리는 이 안테나는 주반사판, 부반사판, 안테나 지지타워, 안테나 구동장치 등으로 구성된다. 태평양 상공의 인텔셋(Intelsat) 3호 위성을 이용해 미국, 홍콩, 대만 등 태평양 연안 7개 국가간 136회선의 국제통신망을 구축하여 우리나라 국제통신 발달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기술적·사료적 가치가 큰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2009년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436로 지정된 바 있다.



도로를 따라 150m쯤 걸으면 좌측으로 금성산 술래길의 입구가 나타난다. 들머리에 금성산 술래길인삼의 고장 금산이라고 적힌 두 개의 기둥이 세워져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들머리에는 금성산 술래길 종합안내판도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길을 나설 일이다. 왼편에 지도를 그려 넣었고, 오른편에는 술래길의 주요 지점간 거리를 표기해 놓았다. 칠백의총을 출발해 사지봉과 금성산을 찍고 해너머재를 거쳐 상마수리의 소나무숲까지 나오는데 거리는 총 8Km가 된단다.



안내판 뒤로 난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50m 정도를 오르면 지능선이 나타나는데 커다란 밭으로 되어있다. 밭으로 들어서지 않고 왼편으로 50m쯤 직진한 다음 칠백의총의 담장이 나오면 그 담장을 왼편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능선에는 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눈길 한번 주지 않을 정도로 냉대를 받는 꽃이지만 무리지어 피어나니 잠깐의 눈요깃감으로는 충분하다. 사람들은 망초의 어원(語原)망할 놈의 풀이라는 데서 찾는다. 아무리 뽑아내도 또 다시 무성해지는 잡초를 보고 내뱉은 농부의 넋두리가 망초의 어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망할 놈의 풀도 어딘가에는 쓰임새가 있을 게 틀림없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창조주께서 아무 생각 없이 허투루 만들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 쓰임새라는 게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일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그렇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세상에 나올 가치는 충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순(蘇洵)의 변간론(辨姦論), 간신을 변별하는 의론事有必至(사유필지) 理有固然(이유고연)’이란 구절이 나온다. ‘일이 꼭 그렇게 된 데는 반드시 그렇게 된 이유가 있다.’라는 뜻이다. 소순이 얘기하고자 했던 논지(論旨)에서는 어긋나겠지만, 망초가 만들어 놓은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의 주장이 떠오른 건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했던 아름다움과 마주친데 대한 놀라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담장을 따라 10분 조금 못되게 진행하면 반듯하게 쌓아올린 돌탑과 이정표(금성산5.5Km/ 칠백의총/ 금산)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능선 삼거리에 올라서게 된다. ‘술래길은 물론 왼편방향이다.



아직도 술래길은 칠백의총의 담장을 옆구리에 끼고 이어진다. 하지만 주변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바뀌어 있다. 길의 폭 또한 자동차가 지나다녀도 될 만큼 엄청나게 넓어졌다. ‘십리장등이란다. ‘장등이란 게 본디 산마루(산등성이의 가장 높은 곳)’의 충청지방 방언(方言)일지니 지금 걷고 있는 이 산등성이가 십리(4Km)에 이른다고 해서 십리장등이르는 이름을 붙여놓지 않았을까 싶다.



잠시 후 안내판 하나가 나타난다. ‘칠백의총금산성 의병전투에 대한 내용을 적었는데, 칠백의사 기록화와 임진왜란의 금산지역 전투도도 함께 올려놓았다. 오늘 산행에는 이런 안내판들을 수없이 많이 만나게 된다. 적혀있는 내용도 제각각이어서 읽어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철쭉군락지나 진달래군락지 등 능선의 특징을 적었는가 하면 산림욕의 효능이나 숲의 환경보전 기능등 숲의 효용가치에 대해 설명을 할 때도 있다. ‘금성산성등 지역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도 보임은 물론이다.



여러 가지 안내판들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아무래도 마을에 대한 안내판이 아닐까 싶다. 둘레길 주변 마을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 같아서이다.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은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다. ‘마을의 위치나 유래’, ‘특산물등에 그치지 말고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마을의 미담고사(美談古事)들을 발굴해서 적어놓았더라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되었을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오른편으로 시야가 열리면서 금성면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금성면은 금성산을 제외하곤 산지가 많지 않고, 기신천이 너른 평야의 중앙부를 지나는 터라 내륙 지역에선 보기 드문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들녘의 뒤에 보이는 산은 닭이봉이 아닐까 싶다.



길은 일단 넓다. 경사 또한 완만하기 짝이 없다. 계단 또한 눈에 띄지 않는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노약자(老弱者)들까지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맞다. 이 길은 애초에 만들 때부터 유모차나 휠체어 등 보행약자(步行弱者)들의 접근성을 강화시키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일부 노선은 평평한 천연목재 및 단단한 흙길로 조성하는 등 이용편의성을 최대한 고려할 계획이라면서 말이다.



파고라(pergola의 일본식 발음)’도 보인다. 신경을 써서 만든 듯 반듯한 외관을 갖추고 있지만 효용가치는 별로일 것 같다. ‘파고라는 사방이 트여있는데다 지붕을 갖추고 있어서 햇볕이나 비를 피해 잠시 쉬어가는 일종의 휴게시설이다. 그래서 따가운 햇볕을 피할 수 없는 곳에다 설치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이곳은 주변에 숲이 짙어 애초부터 빛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왼편으로 시야가 열린다. 발아래에는 뱀실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뒤에는 진악산과 월봉산, 백마산 등 금산군 관내의 높고 낮은 산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맨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을 대둔산은 구름이 삼켜버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5분쯤 지나면 뱀이실재(또는 뱀실재)를 지난다. 의총1리와 마수리를 잇는 고갯마루(이정표 : 금성산 정상4.4Km/ 의총1/ 마수리)인데 지금은 육교(陸橋)가 놓였다. 고갯길을 내면서 잘려나갔던 허리를 다리를 놓아 다시 하나로 연결시킨 셈이다. 덕분에 급한 오르내림이 없어져 휠체어나 유모차의 통행이 가능해졌다. 이것 역시 보행약자를 위한 배려일 것이다. 아무튼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참 오는 도중에 의총1리와 의총2리로 연결되는 사거리(금성산 정상5.2Km/ 의총1/ 의총2)를 만났던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길은 계속해서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 완만해서 걷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니다. ‘술래길을 조성하면서 신경을 많이 썼다는 증거일 것이다. ‘술래길은 행정안전부가 추진하고 있는 우리마을 녹색길 사업이 만들어 낸 일종의 둘레길이다. ‘지역의 역사문화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보행자 중심의 길이라는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를 내건 이 사업은 지역공간 체험형수변공간 활용형’, ‘도심문화 생활형명상·사색형으로 나뉘는데 금성산 술래길은 지역공간 체험형에 속한다. 그런데 트레킹 도중에 만난 안내판의 각 구간 길이를 합해보니 8.5Km뿐이 안 된다. 공모 당시의 기사(記事)에는 13.2라고 되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하긴 계획대로 만든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심심찮게 시야가 열리면서 눈앞에 아름다운 풍광들이 펼쳐진다. 금산의 넓고 푸른 들녘이 잔뜩 물기를 머금은 채로 그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구름만 아니었더라면 주변의 산들과 함께 한 폭의 빼어난 산수화를 그려냈을 텐데 아쉽다.



뱀이실재에서 25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육각의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는 사지봉(사두봉)에 올라서게 된다. 해발이 265.9m로 십리장등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란다. ‘술래길 쉼터라는 공식 이름을 갖고 있는 이곳에는 정자 외에도 안내판을 세워 금산인삼을 잔뜩 자랑하고 있다. ‘금산인삼의 효능이 다른 곳에 비해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금산인삼이 백제인삼에서 맥을 잇는다는 데서 찾고 있다.



정자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남북으로 시야가 열리는데 특히 남쪽 조망이 뛰어나다. 금산의 시가지가 들어앉은 너른 들녘 너머로 우뚝 솟은 진악산이 아름답다. 금산의 진산(鎭山)이다. 북쪽으로는 금성산 정상과 407(핏재산), 계원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펼쳐진다.



금성산을 향해 잠시 걸으니 철쭉군락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철쭉에 대해 읊은 시() 한 수가 적혀있으니 한번쯤 읽어보고 가면 어떨까 싶다. 고려 고종 때의 문신인 최자(崔滋)가 편집한 시화집(詩話集)인 보한집(補閑集)에 나오는 시조이다. 아무튼 오른편 산자락이 온통 철쭉나무들 일색이다. 봄에 찾아오면 흐드러지게 핀 꽃밭을 거닐 수도 있겠다. 다만 그 범위가 그다지 넓어 보이지 않는다는 게 흠()이지만 말이다.




잠시 후, 또 다른 육교(陸橋)를 만난다. 마수리(신흥마을)에서 파초리(장목골)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를 다리를 놓아 다시 연결시킨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모양이다. 다리 아래로 난 길이 흔적을 거의 잃어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문득 임진왜란 당시의 이곳 풍경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길이 하도 좋다보니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생겼나보다. 아무튼 당시 금산에 모여들었던 의병들도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이 능선을 걸었을 게다. 다들 집에서 사용하던 낫이나 괭이를 하나씩 들고서 말이다. 그들은 과연 일본군의 무시무시한 화력을 상상이나 하고 있었을까? 질게 뻔한 전투였는데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전장(戰場)을 만들어낸 위정자(爲政者)들이 싫다. 아니 최고 책임자인 임금이 싫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십만양병설(十萬養兵設)’이 꼭 아니더라도 일본의 위협에 대한 우려는 당시 사회에 팽배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도 이를 간파하지 못한 못난 임금(선조) 때문에 나라가 박살이 났고, 그 잘난 양반님들 대신에 민초(民草)들이 낫과 괭이자루를 들고 전장에 나섰기 때문이다. 역시 임금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다 같은 모양이다. 우리나라를 뒤흔들었던 최근의 사태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겠는가. 갑자기 군주(君主)가 무능하면 쫓아내야한다.’고 외쳤던 맹자(孟子)와 민본주의(民本主義) 사상을 주장했던 정도전(鄭道傳)이 생각나는 건 무슨 이유일까



이번에는 진달래군락지안내판이 보인다. ‘화전가(花煎歌)’라는 화전놀이를 소재로 한 규방가사(閨房歌辭)를 적어 놓았다. 그 내용이 하도 가슴에 닿아 금방 떠나지를 못하고 그 분위기에 빠져본다. 새봄을 맞아 상춘(賞春)한다는 의미와 함께 시집살이의 굴레에서 하루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어 하는 부녀자들의 간절한 염원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안내판만으로는 부족했던지 근처에 진달래공원이라는 팻말까지 붙여 놓았다. 하지만 군락지의 범위가 그다지 넓어 보이지 않는 것은 철쭉군락지와 마찬가지이다.




술래길 쉼터를 출발한지 20분 남짓 되었을까 마수1(윗말머리)’의 안내판이 나타난다. 마을의 생김새가 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 옆에는 도둑이 없고 인심이 좋은 마을이라는 두곡2(돌고개)’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그런데 마을로 연결되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아래로 내려가는 침목(枕木) 계단이 놓여있을 따름이다. 그 갈림길(이정표 : 금성산 정상2.0Km/ 두곡2/ 마수1)은 건너편에 놓인 계단을 오르면 만나게 된다.



계단을 내려서니 오른편에 왕복 2차선 도로가 보인다. 두곡2리와 마수1리를 연결하는 군도(郡道)마수로인데 지금 걷고 있는 지점의 바로 아래에까지 와서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그렇다면 이곳이 돌고개인 모양이다. 그리고 잘려져 있던 고갯길을 술래길을 조성하면서 다시 연결시켜 놓았을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다리의 위가 흙으로 엎여있는 게 눈에 띈다. 양쪽 가에는 소나무까지 심어 놓았다. 능선을 연결하는 김에 동물들도 이용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모양이다. 금산군청 담당자의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하지만 다리를 조금 더 높게 놓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렇게 해서 계단을 없앴더라면 보행약자들도 마음 놓고 건너다닐 수 있을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길은 돌고개를 지나서도 거의 변화를 주지 않는다. 넓고 반반한 것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전형적인 산길로 변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주변이 온통 칡() 밭으로 변해있다. 능선은 물론이고 커다란 나무들까지도 온통 칡넝쿨로 둘러싸여 버렸다. 칡의 일번적인 특성이 아닐까 싶다. 콩과 식물에 속하는 칡은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고, 생명력이 왕성하여 숲속에 웬만한 틈만 보이면 얼른 자리를 잡고 나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터만 잡으면 하는 짓마다 망나니가 된다. 허락도 받지 않고 이웃 나무줄기를 빙글빙글 감고 순식간에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더욱이 넓적한 잎을 수없이 펼쳐, 잎 아래에 있는 나무에게는 단 한 줄기의 빛도 들어가지 못하게 거의 완전히 햇빛을 차단해버린다. 당한 나무는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린다. 공생(共生)이라는 산림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주범이 바로 칡인 것이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 역사의 바늘을 조금만 거꾸로 돌려보면 칡은 정말 고마운 식물이었다. 뿌리, 줄기, , 꽃 모두 요긴하게 쓰였다. 갈근(葛根)이라 불리는 칡뿌리는 흉년에 부족한 전분을 공급하는 대용식이었으며, 갈근탕을 비롯한 여러 탕제(湯劑)에 쓰였고 질긴 껍질을 가진 줄기는 삼태기를 비롯한 생활용구로 널리 이용되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칡꽃(葛花)에 대한 효능도 적고 있다. ‘칡꽃(갈화)과 소두화(팥꽃)를 같은 양으로 가루를 내어 먹으면 술을 마셔도 취할 줄 모른단다. 술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효능이 아닐까 싶다.




돌고개를 지난 지 20분 남짓 되면 상마수마을 갈림길’(이정표 : 금성산 정상0.67Km/ 상마수마을0.21Km)을 만난다. 구태여 정상까지 가고 싶지 않다면 이곳에서 마수리로 내려가도 될 일이다. 아무튼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의 이름은 술래길이다. 술래잡기의 그 술래이고 강강술래의 그 술래라고 한다. 감추어져 있는 것은 귀한 것이고, 숨은 술래를 찾으면 귀하기에 잘 보존하고 또 발전시키면서 즐길 수 있는 대상인 명품길이라는 것이다.



잠시 후 파고라(pergola)’가 보인다. 이번에는 그늘이 필요한 곳에 자리를 잘 잡은 것 같다. 아무튼 술래길은 정성들여 가꾼 흔적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다리품을 풀어야 할 곳에는 어김없이 벤치를 놓았고 또 어떤 곳에는 몸을 풀어가면서 걸어보라는 듯이 체육시설까지 배치했다. 그런가하면 정성들여 쌓은 돌탑들도 보인다. 그렇다고 숲길 조성이 빠질 리가 없다. 울창한 소나무 숲은 기본인데, 조그만 빈틈이라도 있을라치면 편백나무와 단풍나무 등을 심었다. 이건 숫제 산상공원(山上公遠)으로 꾸며놓았다. 그러니 어찌 금산 군민들의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금 더 올라가면 이번에는 금성산성(錦城山城)’ 안내판이 나타난다. 어떤 이들은 마한 최후의 성 금현성(錦峴城)이 이곳 금성산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 온조왕이 재위 26(BC 8)에 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마한을 공략해서 꿀꺽해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만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고 나오는데 이곳 금성산성(錦城山城)이 당시의 금현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성산성의 ()’이라는 글자의 어원에도 맞는다고 볼 수도 있겠다. ‘크고 위대하다로 해석해서 근처의 성들을 총괄하는 큰 성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나라가 멸망한 후에까지 버틸 수가 있었지 않겠는가. 하지만 충남 연기군 전의면 금성산(金城山)에 위치한 금이산성이라는 설(이병도)과 연기군 전동면의 금성산성이라는 설(양기석)도 있으니 참조한다.



돌고개를 지나면서 변화를 주던 길이 언제부턴가 상당히 가팔라졌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평상시 오르내리던 다른 산들에 비하면 이건 가파르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산자락을 에둘러서 가면서까지 경사를 죽이려고 노력한 탓일 것이다. 그리고 경사가 조금만 심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침목계단을 놓았다.



그렇게 20분쯤 오르면 금성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구릉(丘陵) 형태로 된 정상에는 데크로 전망대를 만들고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정상표지석은 전망대의 뒤에 세워져 있다. 참고로 금성산(錦城山)자는 쇠 금()’을 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전체 사람이 사흘을 먹을 만큼 많은 금()이 매장되어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정상에는 여러 가지의 안내판들이 세워져 있다. 금산군에 소재하고 있는 산들의 높이와 위치를 나열해 놓았는가 하면 조망도를 설치해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대둔산과 만인산, 서대산, 천태산, 진악산 등을 표시했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금산의 산성 조망도가 아닐까 싶다. 금산에 있는 20여 개의 성을 표시한 지도인데 삼국시대 때 이곳 금산이 백제와 신라의 ‘DMZ’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실 금산 땅 대부분은 백제에 속했었지만 일부 지역은 신라군의 최전방이었단 곳도 있었다고 한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동북쪽으로 육중한 서대산이 보이고, 동쪽으로 천태산을 비롯한 그 주변의 산들, 그리고 남쪽으로는 금산의 진산인 진악산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주변의 멋진 산들이 거의 다 보인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산을 시작한다. 전망대의 한가운데로 내놓은 계단으로 내려가면 된다. 이어서 동남릉을 따라 300m정도 내려가면 안부삼거리(이정표 : 해너무재/ 마수리/ 금성산 정상0.3Km)에 도착한다. 계속 직진하면 407봉을 넘어가서 해너머재로 연결된다. 계획대로라면 직진해야 하겠지만 선두대장의 진행방향표시지는 오른편 마수리로 향하고 있다. 오뉴월 삼복더위를 감안해서 산행거리를 단축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려가는 길 역시 곱다. 경사가 완만해서 내려서는데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파른 곳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침목계단을 놓아 가파른지조차 느끼지 못하게끔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내려서면 임도(이정표 : 마수1(상마수)/ 금성산 술래길)를 만나게 되고, 이어서 인삼밭과 오미자밭이 줄지어 늘어선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마수리(상마수)에 이르게 된다. 금성면의 진산(鎭山)인 금성산 자락에 깃든 작은 마을이다. 자연스레 '수리수리 마하수리'가 입가에 맴돌아 피식거리게 만드는 지명이지만, 사실 '마수리'라는 지명은 말머리를 닮은 마을 지형으로부터 유래한다. 이밖에도 마을엔 말과 관련된 지명이 다수 존재한다고 한다. 마책골(마책 : 말의 채찍)과 구세바위(구시 : 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 구세는 방언)가 그것이다.



길가에는 능소화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이 길은 원래부터 금산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오던 길이었다고 한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만발하는 꽃동산이 되기 때문이란다. 거기다 칠백의총을 끼고 있어 충절의 고장 금산을 외부에까지 널리 알릴 수 있는데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을 받는 또 다른 요인도 있다. 438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산인지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산행날머리는 마수1리 신흥마을 경로당

상마수마을에서 산행은 대충 끝났다고 보면 된다. 오늘 산행은 총 2시간 50분이 걸렸다. 간식을 먹느라 중간에 쉬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2시간 40분이 걸렸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산악회의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신흥마을 경로당까지는 아직도 10분 이상을 더 걸어야만 한다. 버스를 주차시킬만한 곳을 찾다보니 그렇게 되었다지만 오뉴월 뙤약볕에 자동차 도로를 걷는 다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다. 아무튼 상마수마을 앞에는 명품 소나무 숲이 있다. 여타 동구 숲들이 그러하듯 마수리 소나무 숲 또한 수구막이를 위해 조성된 비보림(裨補林)으로, 0.6면적에 70~140년 수령의 소나무 40여 본이 동구 밖을 감싸고 있다. 마을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동구 밖엔 낙락장송이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숲이 훼손된 이후 마을 또한 폐촌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보다 못한 백낙헌(白樂憲)이라는 이가 150여 년 전 사재를 털어 빈숲에 쏟아 부었다. 숲이 다시 채워지기 시작하자 주민들도 뒤따라 숲 가꾸기에 동참했다고 한다. 숲 앞에 세워진 기념비는 그의 공로를 기리고자 마을 사람들은 세운 것이란다. 그 숲이 이젠 '상마수 소나무 숲 산림욕장'이라는 새 이름으로 탈바꿈되었다. 숲의 가치를 인정한 산림청과 금산군에서 관리를 시작한 것이다.


몽골문화촌

 

여행일 : ‘16. 8. 20()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내방리

함께한 사람들 : 가족나들이

 

특징 : 남양주시의 주금산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몽골문화촌1998년 남양주시와 몽골 울란바토르시가 체결한 우호협력 조약에 따라 만들어진 곳으로 몽골의 전통문화와 예술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전시관 내에는 몽골의 전통의상과 악기, 생활용품 등 몽골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800여 점에 걸친 다양한 전시품들을 관람할 수 있으며, 또한 별도로 마련된 두 개의 공연장에서는 몽골 문화예술 공연이 펼쳐진다. ’몽골 문화예술단원들이 상주하며 공연을 펼치고 있는데 몽골 전통노래와 춤은 물론 악기연주, 기예, 줄서커스 등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몽골문화촌은 '몽골보다 더 몽골스럽다.'고 소개되기도 한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가보아도 이곳처럼 한 곳에서 몽골의 맛을 체험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튼 2만여 평의 대지 위에 민속전시관과 역사관, 생태관, 체험관, 5개의 게르 전시실, 민속공연장, 마상공연장, 승마체험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관람객을 맞는데, 민속전시관에는 몽골의 생활과 문화 예술, 그리고 종교를, 역사관에는 우리와 몽골의 역사를 비교하며 한 눈에 볼 수 있게끔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몽골역사를, 생태관에는 몽골의 동식물을 전시하고 있다. 체험관에서는 간단한 몽골말 익히기, 나담축제를 비롯한 놀이문화와 악기, 의상, ’종이 게르(Ger)‘ 만들기 등의 체험이 가능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다섯 쌍둥이 소형 게르에는 학교, 음식, 말 등 몽골인의 삶에 대한 이해를 돕는 특별전시공간으로 꾸며져 있고 그 밖에 실외에서는 편자던지기나 활쏘기 체험도 가능하다.


 

찾아오는 방법 : 서울양양고속도로(서울-춘천) 화도 I.C에서 내려와 창현교차로(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서 우회전한 후 387번 지방도를 타고 일동(포천시)방면으로 들어가면 수동면(남양주시)의 소재지인 입석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몽골문화촌이 소재하고 있는 수동국민관광지이다. 주차는 매표소 앞에 마련된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승용차 1대 당 2,000원의 주차요금은 감수해야만 한다. 공연관람을 하지 않을 경우 요금은 4,000원으로 늘어나니 주의한다.



몽골문화촌은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주차장을 기준으로 왼편은 민속예술공연장마상공연장등의 즐길거리가 들어있고, 반대편인 오른편에는 몽골의 문화를 배우거나 또는 직접 체험까지 해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몽골민속전시관을 중심으로 몽골역사관,생태관’, ‘문화체험관’, ‘전통 게르(Ger)’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들과 함께 왔더라면 억지로라도 오른편까지 들러봤겠지만 우린 사양하기로 한다. ‘몽골문화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미리 예약을 해놓은 몽골전통음식을 제 때에 먹으려면 중간의 대기시간까지 합칠 경우 2시간30분이나 걸리는 공연을 보기에도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먼저 들어간 곳은 민속예술공연장이다. 공연장은 몽골 유목민의 전통가옥인 게르‘(Ger)' 형식으로 지어져있다.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길에 벽면에 걸린 몇 점의 사진들이 눈에 들어온다. 몽골의 산하(山河)를 촬영한 것들인데 공연을 보기 전에 미리 몽골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보라는 의미인가 보다. 참고로 공연은 하루에 각각 2회씩, 4(정확한 시간은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가 실시된다. 민속공연과 마상공연은 별도의 공연장에서 관람하게 되는데 연이어 관람할 수도 있으나 중간에 30분 정도를 대기해야만 한다.



몽골의 전통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나와 춤을 추면서 공연이 시작된다. 여자들의 의상은 하나같이 화려하기 짝이 없고, 반면에 남자들의 의상은 모두 날렵한 경장(輕裝) 차림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유목민들의 두드러진 특징이 아닐까 싶다. 숙명적으로 말을 타야만 했던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의 활동성은 거의 없었을 것 같다는 얘기이다.



이제껏 한 번도 구경해본 적이 없는 독특한 공연이 펼쳐진다. ‘허미(Хөөмий, Khoomii)’라 불리는 몽골 전통의 노래라고 한다. 허미는 한 사람이 동시에 2개 음역 이상의 다른 음정의 소리를 내는 독특한 발성(發聲)과 목의 울림을 극대화시켜 파동을 일으키는 발성을 특징으로 하는 창법이다. 기본이 되는 굵직한 저음(低音)과 청명한 고음(高音)이 잘 조화를 이룬다. 하지만 이 창법을 체득하기가 하도 어려워서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한다. 수련을 거친다고 해도 ‘1천 분의 1’ 정도나 체득하게 된다니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 점이 인정을 받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마두금(馬頭琴)’, ‘야타크(몽골 가야금)’, ‘피리등의 전통악기 연주도 빼놓을 수 없다. 마두금은 몽골의 민속 현악기로 우리나라의 해금과 같은 2현의 찰현악기(擦絃樂器 : 활로 현을 마찰하여 소리를 내는 현악기)이다. 몸통 위쪽 끝에 말 머리 장식이 있다고 해서 마두금이라고 부르는데 호궁(胡弓)의 일종이다. 몸통은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의 모양인데 양가죽이나 말가죽으로 싸여 있으며, 여기에 약 1m 길이의 대를 세우고, 대의 위쪽 끝에 보통 2개의 줄감개가 달려 있다. 몸통 아랫부분부터 줄감개까지 말총이나 명주실로 만든 두 개의 긴 현이 연결되어 있으며, 연주할 때는 왼손으로 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활을 당겨 말총을 현에 마찰시켜 소리를 낸다. 현의 긴장도(느슨함과 조임의 정도)에 따라 음높이가 정해진다. 독주와 합주 및 노래의 반주에 쓰이며, 국가적 축제나 결혼식 등 모든 행사에서 흔히 사용되는 악기이다. 키르기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서는 피들(목이 있는 현악기의 총칭)인 마두금의 머리 부분에 금속고리를 달기도 하고 움푹 팬 곳에는 혼백의 모습이 비치도록 거울을 달기도 한다.




이 외에도 다채롭고 화려한 공연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신선한 느낌을 자아내는 공연은 일단은 이국적이다. 악기소리와 춤이 잘 어우러지면서 관람객들의 눈과 귀를 호사시킨다. 다채로운 색감의 비단옷을 입고 원색의 화장을 한 여성단원의 몸짓과 신비로운 음색의 악기연주들이 조화를 잘 이룬다는 얘기이다. 그러한 조화가 공연이 이루어지는 매 순간마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한껏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아크로바트(acrobatics)도 빼놓을 수 없다.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아름다움으로까지 승화시키는 동작들은 그 하나하나가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극한(極限)의 표현들이 아닐까 싶다. 중국에서 보았던 공연에는 조금 못 미치는 것 같았지만 국내에서는 결코 본 적이 없는 고난도의 기예(技藝)였다.





공연의 피날레(finale)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전통의상 쇼까지 감상하고 나면 관람객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몽골 예술의 종합선물세트를 양손 가득히 들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공연이 끝나면 사진촬영의 기회가 주어진다. 공연에 참여했던 연기자들이 복도까지 나와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해주는 것이다. 민속의상을 입은 이방인(異邦人)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니 오래오래 기억될 게 틀림없다.



민속공연이 끝나면 다음은 마상공연이 기다린다. 하지만 금방 이어지지는 않는다. 30분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참 어중간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지루하기 딱 좋을 정도로 길지만 그렇다고 밖으로 나갔다오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공연장의 오른편에 지어진 약간 작은 게르(Ger)에 들어가면 된다. 몇 가지 전시물들 외에도 음료대와 식탁을 놓아 쉼터의 역할을 겸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게르(Ger)의 안에는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들이 빙 둘러 게시되어 있다. 몽골의 산하를 촬영한 사진들과 함께 몽골 전체가 그려진 지도(地圖)도 보인다. 또한 몽골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책과 노트, 필기도구 등의 학용품도 보인다. 대부분이 어린이들을 위한 전시물 일색이다.





그게 마음에 걸렸던지 어른들의 시선을 끄는 전시물도 진열해 놓았다. 액자와 인형, 자수(刺繡) 등으로 몇 종류 되지는 않지만 서재에 놓아두면 어울릴 만한 것들도 보인다. 참 옆에 전통 의상 두어 점을 걸어 놓았는데 이것도 어른들을 위한 전시물로 보아도 되겠다.



얼핏 시간이 되었다싶으면 마상공연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민속공연장을 마주볼 때 그 왼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 또한 게르의 모양으로 지어져 있다. 하지만 내부는 확연히 다르다. 밀폐되어 있던 민속공연장과는 달리 이곳은 곳곳에 틈새가 나있는 것이다. 말이 뛰어다니는 공연의 특성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날에는 앉아있는 자체가 고역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긴장의 연속인 마상공연이 시작되고 나면 이까짓 더위 정도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사라져버릴 테니까 말이다.



마상공연의 입장료는 8,000, 조금 전에 보았던 예술공연이 6,000원 이었으니 2,000원이나 더 비싼 셈이다. 그만큼 펼치는 기술들이 더 어렵다는 얘기일 것이다. 두 가지의 공연을 함께 관람할 경우에는 12,000원짜리 통합권을 구입하면 되니 참조한다.



공연은 마상공연과 고공 서커스, 채찍쇼 등으로 진행된다. 광활한 대륙의 기상을 이어받은 몽골인들이 펼치는 마상공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과 박수갈채를 쏟아내게 만든다. 빠르게 내달리는 말과 공연단원이 혼연일체가 되어 아슬아슬한 묘기를 펼치는 마상 기술을 비롯하여 말을 타고 마두금을 연주하는 등 말과 함께 할 수 있는 온갖 묘기들을 펼쳐낸다.




붉은 대형 천의 물결과 함께 펼쳐지는 아름다우면서 스릴 만점인 고공(高空) 서커스도 눈길을 끈다. 특히 남성 관객들의 눈길은 반짝거릴 정도이다. 비키니 차림의 여자 기수(騎手)가 줄에 매달려 온갖 묘기를 펼치는데 좋아하지 않을 남성이 어디 있겠는가.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마상공연의 중간에는 광대들의 재롱잔치도 들어 있다. 익살스런 묘기들 하나하나가 펼쳐질 때마다 관객들의 웃음이 저절로 뒤따른다. 그만큼 재미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올해부터 마상공연에 코믹(comic)을 가미한다고 하더니 이를 두고 했던 말인가 보다.



마상공연은 말과 인간이 일심동체가 되어 펼쳐내는 아슬아슬한 묘기(妙技)들의 연속이다. 그 둘이 만들어내는 묘기들 하나하나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최고의 수준까지 능력을 끌어올린 사람들이 아니면 결코 펼치지 못할 묘기들로 보인다. 그런 내 추측이 딱 들어맞았다. 몽골에서 선발되어 오는 공연단원들은 몽골 내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수준 높은 공연자들이란다.








마상공연은 말을 오르내리는 것은 기본이고 말을 타면서 줄넘기를 하거나 활을 쏘는 묘기 등 말과 일심동체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펼칠 수 없는 묘기들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관객들이 감탄과 환호함은 물론이다. 심지어는 오뉴월의 무더위까지도 깜빡 잊어버릴 정도이다.





특히, 공연 마지막에 우리나라 태극기와 몽골 국기를 힘차게 흔드는 장면은 양국의 상호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기를 염원하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모처럼의 가족나들이다. 한 끼의 먹거리일지라도 의미를 두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래서 옛고향이라는 상호의 몽골 전통음식점을 찾았다. 선택한 메뉴는 칭기즈칸 정식’, 1인당 3만 원이니 외국의 정통음식인 점을 감안할 때 가격도 적당한 편이다. 처음으로 나온 음식은 우리나라의 소꼬리찜과 비슷한 양고기 수육’, 이어서 양갈비구이가 뒤따른다. 고기는 여기까지다. 그리고 골라쉬다라는 음식이 나온다. 카레와 토마토가 섞인 듯한 소스에 감자와 당근을 넣은 스튜(stew)와 밥, 야채 등이 함께 놓여있다. 비벼 먹어도 좋고, 그렇다고 따로 먹어도 뭐랄 사람은 없으니 입맛대로 할 일이다. 다음으로는 커다란 몽골 전통의 군만두와 칼국수, 그리고 몽골식 호떡도 나온다. 나에게는 술안주로 안성맞춤이었다. 저번 내몽고 근처에 들렀을 때 챙겨온 태무친이라는 고량주와 궁합이 잘 맞았음은 물론이다. 하긴 술의 이름인 테무친이나 음식이름인 칭기즈칸(Genghis Khan)’이 동일 인물일진데 어찌 궁합이 맞지 않겠는가.



이곳 수동면의 입석리와 수산리, 비금리 일대는 그 지명이 말해주듯 한 폭의 그림처럼 그 경관(景觀)이 빼어난 곳이다. 이 일대는 주금산과 서리산, 축령산 등에 둘러싸여있어 어디를 가나 시원한 물줄기가 흐른다. '물골안'이란 또 다른 이름을 갖게 된 이유이다. 그런 점을 인정받아 1983년에 국민관광지로 조성되었으며, 울창한 숲과 깨끗한 계곡이 어우러진 경관을 찾아 여름철이면 수많은 피서객들이 몰려든다. 그러니 냇가가 주변 음식점들의 차지가 되어버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음식점을 이용하지 않고 냇가를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는 얘기이다. 우리도 역시 거금 1인당 3만 원짜리 코스요리를 주문하고 나서야 가장 좋은 위치의 평상을 차지할 수 있었다.


농다리(충북도 유형문화재 28)

 

여행일 : ‘15. 5. 28(목)

소재지 :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함께한 사람들 : 산두레

 

특징 : 땅 위에 물이 생기고 생명이 태어났다. 물은 흘러 내려와 강을 이뤘고 주변에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왕래와 소통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이쪽과 저쪽을 잇는 다리를 놓았다. 통나무를 갈라 가로지르거나 큰 돌을 놓기도 했다. 어느 다리는 자주 큰물이 쓸어갔지만 어느 다리는 긴 세월을 견디며 발자국을 몸에 새겼다. 이 땅에는 1000년을 견뎌 온 다리도 있다. 진천 세금천(洗錦川)의 농다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언뜻 보면 그저 돌무더기처럼 보이는 이 다리는 오랜 역사만큼 수식하는 말도 많다. 동양 최고(最古)의 다리, 자줏빛 지네, 전설의 다리. 아무튼 이 다리는 고려 무신정권에 이어 권세를 잡았던 임연(林衍)이 놓았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고려 말쯤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엉성해 보이는 돌다리가 홍수와 침식의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참고로 농다리의 길이는 93.6m, 3.6m에 교각 1.2m, 그리고 교각과 교각 사이의 폭은 0.8m이다. 상판은 두께 20정도의 장대석을 얹었다. 이 다리는 심오한 동양철학을 근거로 만들었다고 한다. 교각에서부터 상판까지 붉은색을 띤 자석(紫石)을 사용했는데, 이는 음양의 기운을 고루 갖춘 돌이라는 고서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본래는 별자리 28수에 따라 28칸의 수문을 만들었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4칸이 소실되고 24칸만 남아 있던 것을 지난 20084칸을 복원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찾아오는 방법 : 중부고속도로 진천나들목에서 빠져나와 왼쪽 방향(천안·진천)으로 달리다 청주 오창 쪽으로 좌회전한 뒤, 신정사거리에서 문백 농다리 쪽으로 다시 좌회전하면 농다리가 위치한 구곡리(진천군 문백면) 주차장이 나온다. 버스는 우릴 마을의 입구에다 내려놓는다. 농다리의 앞에 별도의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는 걸로 아는데 말이다. 중부고속도로 아래로 난 굴다리가 낮은 탓에 대형버스의 통과가 불가능한 게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뭔가를 위해 진입을 통제하고 있을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마을에는 농다리 전시관이 지어져 있다. 농다리의 역사와 전설, 우수성 등을 소개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실물로는 접할 수 없는 정보들을 얻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마을 입구에 이곳이 상산 임씨(常山林氏)‘ 씨족들의 세거지(世居地) 임을 알려주는 빗돌이 세워져 있다. 농다리를 놓은 사람이 임연이라고 하더니, 그렇다면 자기 동네 사람들을 위해 놓은 셈이다. 아무튼 상산 임씨는 임팔급(林八及)을 도시조로 하고, 임희(林曦)를 중시조로 하는 성씨로 임팔급은 중국의 당()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으나 신라로 망명했다고 전해진다. 중시조인 임희는 고려 제2대 임금인 혜종의 비 의화왕후(義和王后)의 아버지로서, 그가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지면서 그 후손들이 진천군에 입향(入鄕)하였으며, 이후 1000여 년간 진천을 본관으로 하는 유력 성씨로 자리하였다. 상산은 진천의 옛 이름으로 오늘날에도 구명(舊名)을 그대로 이어내리는 후손들이 있어 본관을 진천과 상산으로 함께 일컫는다. 하지만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고종 때 최씨 정권을 무너뜨린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된 임연(林衍)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반듯한 비석(碑石)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자기네 조상들의 업적을 새겨놓은 모양인데, 숫제 숲을 이루고 있는 모양새이다. 비림(碑林)이라고 표현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농다리로 들어가다 보면 왼편 숲속에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이층 건물이 나타난다. ’농다리 천년사랑이라는 음식점이다. 강변(江邊)에 위치한 마을이니 메인(mein) 요리가 생선요리일 것임은 틀림없을 터, 매운탕 한 그릇 먹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반주로 막걸리나 동동주를 곁들이면서 말이다. 비린내가 싫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토끼탕과 궁중오골계, 한방토종닭 등도 준비해 놓았단다.



잠시 후 굴다리가 나온다. 다리의 위는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지나는 길에 높이를 헤아려 본다. 눈대중으로 보기에는 버스가 지나갈 수도 있겠다 싶다. 그렇다면 굳이 마을 입구에다 내려놓은 이유는 뭘까?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널따란 광장이 나타난다. 광장에는 몽골텐트가 즐비하게 쳐져있다. 그리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것이 보인다. 뭔가 중요한 행사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광장의 상공에 애드벌룬(ad balloon)까지 띄워져 있었다. 고개를 치켜들고 확인해본다. 내일이 농다리축제가 열리는 날이란다. 그렇다면 지금이 가장 바쁠 때다. 조용히, 그리고 아니온 듯 다녀가야겠다. 참고로 진천의 농다리는 동양 최고(最古)로 알려진 돌다리이다. 진천군에서는 조상이 물려준 소중한 문화유산인 농다리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해마다 축제를 열고 있다. 2015년에는 529일부터 31일까지 농다리, 음악으로 건너다란 주제로 열린다. 행사는 농다리가 있는 구곡리 마을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시연하는 농사철 다리건너기상여다리 건너기등 다리건너기가 재현된다. 특히 이번에는 김봉곤 훈장이 진행하는 농다리 퀴즈대회도 진행되었다. 이 퀴즈대회는 전통적인 과거시험을 현대식으로 재() 해석한 프로그램이란다. 그 외에도 농다리 씨름대회와 천년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됐다.




세금천(洗錦川) 건너에 있는 거대한 폭포(瀑布)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맞은편 산자락 암벽(巖壁)에다 인공(人工)으로 만든 것이라는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더위를 식혀준다. 이 폭포는 2009명소화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이라는데, 높이 80m(24m)에서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폭포수는 더위에 지친 관광객들을 회복시켜주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포토죤(photo-zone)의 역할까지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이곳을 찾고 있는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셔터를 눌러댄다. 그만큼 배경으로 훌륭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버드나무 한 그루가 강변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평소에 보아오던 버드나무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굵다. 천 년도 넘었다는 농다리 만큼이나 오래 묵었나 보다. 모진 세파(世波)가 버거웠던지 비스듬히 드러누워 있다.



이젠 농다리를 건너보기로 한다. 한자로 '농교(籠橋)'라 표기된다는 농다리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라고 한다. 가히 천 년 이상의 세월을 견뎌온 셈인데 그동안 유실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단다.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우리 기술력으로 만든 철근콘크리트 다리들도 홍수에 떠내려가는 판인데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 하나만 갖고도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참고로 농다리에는 과학적 원리가 들어 있다. 우선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안으로 차곡차곡 들여쌓아 교각을 만들고, 크기가 다른 돌을 적절히 배합해 서로 물리게 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폭을 좁혀 빠른 유속을 견딜 수 있도록 한 것도 특징이다. 타원형의 교각은 물살의 압력을 최대한 피하고 소용돌이가 생기는 것을 막는다. 장마 때면 물이 다리 위로 넘쳐흐르도록 수월교(水越橋) 형태로 만든 것도 장수의 비결이다. 지네가 기어가듯 구불거리는 모양 역시 빠른 물살을 고려한 설계다. 물과 돌. 서로의 부딪힘과 저항을 최소화해 상생을 도모한 선조들의 지혜에서 오늘을 살아갈 교훈을 얻는다.



농다리는 한마디로 돌다리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아한 아치(arch)형의 그런 매끈한 돌다리가 아니라 징검다리에 가까운 투박한 다리이다. 총 길이는 약 95m 정도인데 징검다리 부분을 다른 곳과 같이 큰 바윗돌 하나로 만든 것이 아니라 물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석 여러 개를 쌓아올렸다. 이것이 징검다리의 교각(橋脚)이 되고, 이런 징검다리의 사이를 평평하고 넓은 돌을 사용하여 다리의 천판(天板)으로 삼았다. 참고로 이 농다리에는 네 가지의 전설(傳說)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첫째는 임연(林衍)이 효성이 지극한 여인을 위해 말()로 돌을 날라다가 놓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친 말이 쓰러지면서 떨어뜨린 돌이 용바위(龍岩)란다. 다른 하나는 굴씨마을 임씨네 남매가 목숨을 건 내기를 하는 과정에서 누이가 놓았다.’는 설이다. 이 밖에 이런 전설들도 있다.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면 농다리가 며칠씩 우는데 한일병합 때와 6·25전쟁 때는 동네 사람들이 잠을 못 잘 정도였다고 한다. 또 장마에 농다리 상판이 뜨면 재앙이 일어나거나 훌륭한 인물이 죽는다고 전해진다. 동학혁명과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예고했다고 한다.



농다리는 다른 곳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독특한 생김새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징검다리는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온전한 돌다리로 볼 수도 없다. 구조는 분명 징검다리인데, 징검다리 사이를 상판으로 연결해 놓은 특수한 구조인 것이다. 얼핏 보면 다리라기보다는 보()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무튼 다리는 투박하기 짝이 없다. 번듯하게 솟아오른 교각(橋脚)은 아예 없다. 돌을 멀끔하게 깎아서 얹은 것도 아니다. 자연 그대로의 돌이 쌓여 교각이 되고 상판(上板)이 됐다. 큰 돌 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워 넣었다. 그러다 보니 듬성듬성 틈도 있고 밟으면 밟는 대로 삐걱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대충 만든 다리는 결코 아니다. 그랬다면 그 긴 세월을 견뎠을 리가 없다.



농다리를 건너가면 우측으로 천년정이라는 정자(亭子)가 보인다. 바로 앞 짧은 목책계단을 올라가는 게 빠른 길이나, 천년정 쪽으로 돌아 오른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잠시 후에는 두 길이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목책계단으로 오른다. 그다지 길지도, 그렇다고 높지도 않지만 중간에 쉼터까지 만들어 놓았다. ‘생거진천(生居鎭川)’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도 보인다. 쉬엄쉬엄 읽어보다 가라는 모양이다. 진천은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는 관계로 인심이 후덕하고, 반면에 용인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묘소가 유난히 많다고 한다. 그리고 추천석이라는 진천사람에 대한 전설(傳說)도 적어 놓았다. 저승사자의 실수로 잘 못 죽은 추천석의 영혼을 용인에 사는 추천석의 육신(肉身)에다 넣어 환생(還生)시킨다는 얘기,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란 말까지 만들어낸 그 전설 말이다. 사람들은 이 문구를 살아서 진천, 죽어서 용인이라고 풀이한다. 진천의 산수(山水)가 그만큼 아름답고 살기에도 좋다는 뜻일 것이다.




장수 및 말 발자국이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임장군이 이곳 세금천에 다리를 놓기 위해 큰 바위를 메고 말을 탄 채로 용고개(살고개)를 내려오고 있었단다. 그런데 메고 있던 돌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탓에 말의 발이 바위에 푹 빠지면서 발자국을 남겼다는 것이다. 말이 움직이지 못하자 임장군이 말에서 뛰어 내렸는데, 이로 인해 발자국이 하나 더 생겼단다. 이번에는 임장군의 발자국이다. 여기서 임장군은 임연장군을 말하는 것일 게다. 농다리에 얽힌 전설 중의 하나가 임연장군 축조설(築造說)’이니까 말이다.




쉼터의 바로 위에서 임도(이정표 : 초평저수지200m, 하늘다리 1.1Km/ 천년정100m/ 농다리100m)를 만난다. 오른편은 천년정에서 올라오는 길, 농암정이나 초평저수지로 가려면 왼편으로 난 임도를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잠시 후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농암정230m/ 초평저수지150m, 하늘다리 1Km/ 밤나무 숲2Km)을 만난다. 어디로 가야할 지를 놓고 고민이 시작된다. 농다리 인근의 또 다른 명물인 하늘다리로 가려면 직진을 해야 하는데, 주어진 시간 안에 다녀오기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억지로 다녀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달리다시피 걸어야 하는 건 불가피하다. 평소에 달리기로 단련된 몸이니 그것도 괜찮다고 치자. 하지만 오늘 같은 뙤약볕 아래에서 달린 다는 것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는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느긋이 걸어서 다녀온 다른 일행들을 기다리느라 30분 가까이나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을 지키느라 보고 싶은 곳을 포기한 내가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주위의 눈치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들이 현명한 것이지 도대체 모르겠다.



농암정으로 향한다. 숲은 깊지 않으나 제철 만났다고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요란스럽다.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여름철이 무르익었나 보다. 아무튼 농암정으로 오르는 길은 조금 가파르다. 하지만 나무 사이로 보이는 세금천의 풍경을 기웃거리다보면 힘든 것쯤은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주변 풍광을 즐기며 오르다보면 어느새 꼭대기에 올라서게 된다. 시야가 확 트이니 가슴까지 후련해진다. 거기다 시원한 바람까지 살랑거린다. 여간 상큼한 게 아니다. 이런 재미가 있어 사람들은 부득부득 위를 향해 오르나 보다. 오래 닫혔던 문을 열어젖히듯 가슴을 활짝 연다. 그리고 쌓였던 근심과 잡념을 훌훌 털어버린다. 맨 꼭대기에는 농암정(蘢岩亭)’이란 정자를 지어 놓았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주변 풍광을 즐기라는 배려일 것이다. ‘높이 오르는 새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정상에는 정자 외에도 벤치와 식탁까지 마련해 두었다. 탐방객들을 배려하는 진천군청의 마음 씀씀이가 돋보이는 순간이다.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정비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햇빛을 가려줄 변변한 나무 한 그루 없다는 것이다.



정자에 오르면 일망무제로 시야가 열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축제행사장에 늘어선 몽골텐트들이다. 꿈틀거리며 세심천을 건너고 있는 지네 한 마리도 보인다. 농다리이다. 멀리 떨어진 탓인지 다리를 건너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점으로 나타난다. 흡사 돌 위에 새겨진 흔적처럼 또렷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다리를 건너며 크고 작은 흔적들을 남겼을까.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늘 무언가 남기며 살아간다.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하며 살아가야할 일이다.



반대편에는 초평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저수지를 만들기 전에는 농다리를 건너 대처로 오가던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었을 것이다. 호수 한가운데 황소처럼 길게 누운 반도(半島)’에 오래 눈길이 간다. 멀지 않은 두타산에서 바라보면 국내에서 가장 완벽한 모습의 한반도 지형이라고 한다. 만주벌과 제주도 형상까지 있다니 한번쯤 보고 싶기도 하다.



정자에서 귀한 손님을 만났다. 참새로 보이는 새가 날지를 못하고 난간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생거진천(生居鎭川)'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 진천은 토지가 비옥하고 물이 좋은 곳이다. 그러니 땅에서 나는 쌀도 기름질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 새는 몸이 허약해 날지를 못하는 것은 아닐 게다. 덜 여물었음이 분명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집사람이 고이 모셔 숲속에다 놓아드린다. 튼튼하게 잘 자라나라면서...




초평저수지로 향한다. 광복 이후 축조했고, 1985년에 증설했다는 초평호는 국내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담수량을 자랑한다. 상공에서 보면 용()이 한반도를 등에 업고 두타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여의주를 찾아 승천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곳곳에 명소가 숨어 있는 이곳은 얼음낚시와 붕어낚시터로도 유명하다. 내려가는 길은 침목(枕木(으로 계단을 놓았다. 계단이 만들어내는 곡선이 무척 아름답게 보이는 길이다.




계단을 내려서면 호숫가에서 야외음악당을 만난다. ‘현대모비스 야외음악당이라는데, 호수가 시야 가득 들어오는 곳에 지어져 있다. 외관이 산뜻한 것을 보니 최근에 현대모비스로부터 기증을 받은 모양이다. 이번(2015) 축제기간 동안에 이곳에서는 다양한 어쿠스틱(acoustic : 전자장치를 쓰지 않는) 음악들이 그린뮤직을 테마로 진행한다고 한다. 아름다운 초평호를 바라보며 차분히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나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과연 그 느낌은 어떨지가 궁금해진다. 그렇다고 내일 다시 와볼 수는 없는 일,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참고로 이번 축제 기간에는 일본인 피아니스트 유이치 와타나베, 가수 유익종, 재즈피아니스트 임인건 콰르텟(quartet : 사중주단), 가수 장필순 등이 출연한다고 한다.




음악당의 위는 갈림길(이정표 : 하늘다리1Km/ 농다리350m/ 임도)이다. ‘하늘다리라는 지명이 나타나 있는 이정표를 보며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셔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농다리를 향해 걸음을 옮길 수밖에...



잠시 후 성황당이 나온다. 떡갈나무에 감아 놓은 오색천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용고개 또는 살고개라고 부르는 이곳에는 시주를 거절한 마을 사람들과 그를 보복한 스님의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가난한 시절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에 가슴에 돌 하나가 얹힌다. 비극으로 끝나는 전설에서, 나무 아래에 쌓아 놓은 수많은 돌에서 이름 없는 백성들의 간절한 염원을 본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바라보이는 농다리의 모양새가 자못 괴이하다. 숱한 발이 달린 지네가 꿈틀거리며 내를 건너는 형국인 것이다. 이 다리를 자줏빛 지네라 부른다더니, 언뜻 봐도 실감 나는 표현이다. 누군가는 농다리가 물을 건너는 거대한 지네처럼 보이는 원인을 양쪽으로 튀어나온 교각으로 들었다. 자연석을 축대 쌓듯 안으로 물려가며 쌓아올린 교각이 그 위에 올린 상판보다 넓어 지네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아무튼 지네는 여전히 꿈틀거리며 물을 건너고, 그 위로 저만치 고속도로가 보인다. 쌩쌩 소리를 내며 달리는 자동차들과 긴 세월을 삼키고서도 조용한 다리가 대조적이다.


묵호등대(墨湖燈臺)

 

여행일 : ‘14. 10. 3()

소재지 : 강원도 동해시 해맞이길 289(묵호진동)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묵호등대는 동해바다와 묵호항구(墨湖燈臺)가 내려다보이는 해발 67m의 동문산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1963년에 건립되었으니 100년 넘은 등대들이 즐비한 가운데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방문은 다른 어떤 등대보다도 많은 편이다. 이름도 아예 묵호등대해양문화공간이다. 등대가 있는 곳을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고, 주변으로 벽화마을과 묵호항 어시장 등 명소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길 : 동해(삼척-속초)고속도로 망상 I.C에서 내려와 T.G 앞에서 7번 국도의 강릉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노봉삼거리(동해시 망상동)에서는 우회전하여 해변도로인 일출로(日出路)를 따른다. 물론 동해시 방향이다. 그렇게 해안도로를 따라 잠시 내려오면 까막바위 회마을이라는 3층 건물이 나타난다. 출렁다리를 거쳐 묵호등대로 올라가는 탐방로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근처에 서울 남대문의 정동방(正東方)이라는 까막바위가 있으니 참조한다.




들머리 근처, 그러니까 묵호항에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까막바위가 있다. 까마귀가 바위에 새끼를 쳤다 하여 까막바위라 부르는데, 서울의 남대문에서 정동(正東) 방향에 있다고 한다. 까막바위 옆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을 상징하는 문어상()을 만들어놓았다. 조선시대 중엽, 망상현(지금의 묵호동)의 의로운 호장(戶長; 지금의 통·이장)이 문어로 환생해 왜구를 물리쳤고, 그 영혼이 까막바위 아래의 굴에 살고 있다 한다. 주민들은 이 지역에서 매년 풍어제를 지내고 있다.





까막바위 회마을건물의 왼편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서 탐방이 시작된다. 출렁다리를 거쳐 등대로 오르는 한적한 산책로이다.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 벽면(壁面)에 이곳이 찬란한 유산의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2009SBS-TV에서 방영되었던 주말드라마로 당시 45%의 시청률을 자랑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었다. 불행을 한꺼번에 만난 여자 주인공 은성이 고난을 이겨내는 역경 극복의 스토리인데 20대 청춘들의 사랑과 성장기를 담은 드라마이다. 이승기와 한효주, 그리고 배수빈과 문채원 등 쟁쟁한 청춘스타들이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김미숙과 반효정, 전인택 등의 중견배우들이 뒤를 든든히 받쳐준 것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경사진 곳에다 계단을 놓았지만, 그 옆에는 경사진 길을 그대로 놓아두기도 했다. 계단이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인 모양이다. 또한 조그만 공터에는 벤치를 갖춘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등대까지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으니 쉬엄쉬엄 돌아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길이 좁아드는가 싶더니 저만큼에 다리 하나가 나타난다. 출렁다리인데 이곳도 역시 찬란한 유산의 촬영지였다고 한다. 그다지 길지도,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되는 출렁다리들보다 높은 것도 아니다. 아니 다른 곳에 비해 그 규모가 훨씬 왜소하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흥미로움은 더하다. 드라마 속의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였던 곳이라는 선입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출렁다리는 드라마 속에서 매우 특별한 장소로 등장한다. 드라마 찬란한 유산을 통해 국민 남동생으로 인기몰이를 하던 주인공 이승기와 풋풋한 매력을 발산하는 한효주가 시청자들의 애간장을 녹였던 지루한 사랑싸움에 마침표를 찍으며 첫 키스를 나누었던 곳이 바로 출렁다리이기 때문이다



다리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가 시원스럽기 짝이 없다. 탁 트인 청정 동해바다는 물론이고, 묵호항 수변공원과 횟집 거리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출렁다리를 지나면서 오름길이 시작된다. 상당히 가파른 편이나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오르기 쉽게끔 계단을 놓아 서서히만 오른다면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버겁다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보자. 짙푸른 동해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지면서 힘들다는 느낌 정도는 깔끔하게 떨쳐내버릴 것이다.




맞은편 벼랑 위에 걸터앉은 건물이 동해바다 등 주변 풍경과 어우러지며 멋진 그림으로 나타난다. ‘등대불빛 아래 펜션일 것이다. 숙박뿐만 아니라 카페까지 겸하고 있는데, 동해바다의 조망이 시원스럽다고 해서 일출(日出)을 보려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또한 잠시 후에 오르게 될 묵호등대의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등대에 오르기 직전 멋들어진 카페를 만난다. ‘등대카페란다. 숙박이 가능한 펜션도 겸하고 있다는데, 바다 풍경을 창 가득 담고 있는 카페로 알려져 있다. 꼬마 자동차나 꼬마 정자(亭子)의 안에서 커피를 마실 수도 있도록 멋을 부렸고, 또한 연인과 함께 사랑이라도 키우라는 듯이 작은 그네까지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는 포토죤(photo zone)이 더 흥미로운가보다. 벽에 그려진 천사의 날개 앞이 더 붐비는 것을 보면 말이다. 가운데에 서서 양팔을 벌릴 경우 영락없는 천사로 다시 태어난다. 비록 사진에서이지만...





몇 걸음 더 올라서자 오늘의 주인공인 묵호등대(墨湖燈臺)’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1941년에 개항(開港)한 묵호항은 기본이 어항(漁港)이나 무연탄 관련 무역항을 겸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묵호항을 드나드는 선박들의 안전운항을 위해 1963년에 문을 연 시설이 묵호등대이다. 해발 67m의 동문산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원도 해역 최대 항만인 묵호항의 연안표지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백원형 철근콘크리트구조로 높이는 12m, 내부 2층형 건물로 되어 있으며, 특히 2003년에 설치한 국내기술의 프리즘렌즈 회전식 대형 등명기의 불빛은 42km에서도 식별이 가능하다고 한다. 등대의 또 다른 볼거리는 야경(夜景)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색상을 연출하는 LED 조명등을 설치하여 야간에 아름다운 빛을 연출하고 있단다.





봄철이면 개나리가 화사하게 피어난다는 등대 주변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소공원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과 지역주민들에게 볼거리와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해주며, 공원에 마련된 작은 해양수산홍보관은 해양수산 변천사를 알려준다. 이곳은 1968년 상영되었던 정소영 감독의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주요촬영지라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03년에 영화의 고향기념비가 세워졌다고 하는데 카메라에 담지는 못했다. 세심하게 살펴보지 못하는 평소의 내 습관 때문일 것이다.



▼ 「……ㄹ썩, ……ㄹ썩, , ……. 널따란 광장의 한쪽 면은 최남선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벽면을 한가득 채우고 있다. 방파제 끝에 선 등대가 거대한 파도에 부딪히는 듯 느껴진다. 다른 한쪽에는 한국 등대 100주년 공모 작품전에서 선보인 작품들이 걸려 있다. 그 외에도 다른 시인들의 시도 몇 편 보인다. 왜 이곳을 묵호등대해양문화공간이라 부르는지 이해가 간다.



전망대에 서면 일망무제의 조망(眺望)이 펼쳐진다. 끝도 없이 뻗어 나간 동해바다가 두 눈에 가득하다. 거침없는 게 해맞이 장소로 딱 이겠다. 하긴 각종 언론매체에서 소개하는 새해 일출 명소에 빠짐없이 들어있을 정도이니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등대에서 바라보는 동해바다가 아득하다. 한눈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이곳 묵호 등대를 찾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해가 저물 무렵이라고 한다. 등대에 불이 들어올 때면 수평선 가득 오징어잡이배의 불빛이 돋는단다. 망망한 바다에 두둥실 떠 있는 어화(漁火)가 꿈결처럼 아름답다는 것이다. 아무튼 비탈진 사면을 따라 이어지는 지붕 너머의 바다가... 파란색이 저리도 짙을 수 없다.



오른편에는 묵호항(墨湖港)이 또렷하다. 동해의 중심은 예나 지금이나 묵호항이다. 지금은 쇠락하고 말았지만 묵호항은 한때 밤새 불이 꺼지지 않고 흥청거리던 항구였다. 그러나 어업의 쇠퇴로 하나둘 주민들이 떠나고, 불빛도 하나둘 꺼져가고 있다. 쇠락한 항구를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건 관광객들과 생선 좌판을 펼치고 앉은 억세지만 잔정 많은 아주머니들이란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이른 아침 포구에 부려놓는 오징어들일 것이다.



등대를 다 둘러봤다면 이제 그만 내려가야 할 차례이다. 내려가는 길의 초입에 논골담길마을지도(이 글의 머리 부분에 붙여 놓았다)가 보인다. 묵호 어시장 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모두 네 개의 코스, 지금 내려가고 있는 코스는 그중 '등대오름길'이지 싶다. 아무튼 이 논골담길은 주민들이 직접 지은 시()와 아기자기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뱃사람과 시멘트, 무연탄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만들어 냈던 그들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그려 놓았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묵호 등대마을에는 등대(燈臺)를 중심으로 논골1, 논골2, 논골3, 등대오름길 등 네 개의 대표적인 골목길이 있으며 각기 다른 주제의 벽화(壁畫)가 그려져 있다. 논골 1길은 묵호의 현재’, 등대 오름길은 희망과 미래’, 논골 2길은 모두의 묵호, 시간의 혼재논골 3길 벽화는 묵호의 과거등 각각의 주제를 담고 있다. 묵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논골이란 마을 지명은 이곳 주민들의 삶과 애환이 묻어나는 이름이다. 1960년 동해안은 오징어잡이가 활성화 되던 때였다. 마을 사람들은 묵호항으로 입항하는 배로부터 오징어를 받아 지게에 짊어지거나 머리에 이고 비탈길을 올랐다고 한다. 이때 바닥에 흘러내린 바닷물이 길가의 흙을 쓸어내릴 정도였단다. 그 모양이 마치 계단식 논과 같아 논골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논골은 묵호항이 명태와 오징어잡이로 호황을 누리던 시절, 아녀자와 노인들이 오징어를 만국기처럼 걸어두고 말리던 동네였다. ‘개도 돈을 입에 물고 다녔다던 비탈 동네는 대규모 덕장과 건조공장이 들어서며 차츰차츰 쇠퇴해갔다. 하지만 예쁜 벽화로 골목이 치장되고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또 다른 의미의 명소가 됐다.





한 때, 2만 명이 살던 마을은 어족자원이 고갈되면서 하나둘 떠나가고 현재는 4,000여 명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동해문화원은 문화체육관광부에 '묵호등대 담화(談話)마을, 논골담길' 사업을 신청하는 한편, 논골마을 어르신들을 일일이 찾아가 그들이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바탕으로 골목길과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대생 출신들로 구성된 '공공미술 공동체 마주 보기' 회원이 스케치하고 6070대의 마을 어르신들이 색칠을 맡아 벽화길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논골담길의 벽화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벽화가 아닌 묵호항을 배경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1960년대 오징어를 실어오던 시절의 이야기부터, 묵호항 개항 이후 판잣집, 어부의 애환 등 묵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삶을 그려낸 독특한 벽화들은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할 것이다.




골목에는 시와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이 인기 드라마였던 상속자들의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여자 주인공이었던 차은상이 살던 집도 보인다. 주인공 은상(박신혜)’이 어머니와 도망쳐 나와 살던 집이란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상속자들2013SBS-TV에서 방영했던 20부 작의 드라마로 25.6%의 시청률을 자랑했을 정도로 인기 절정이었다. ‘대한민국 상위 1%에 속하는 재벌가에서 자란 10대 고교생들의 이야기라는 다소 생소한 소재를 다루었는데도, 이민호와 김우빈, 그리고 박신혜와 크리스탈 등 젊고 잘생긴 배우들이 열연을 한 덕분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니 김성령과 김미경, 박준금, 정동환 등 노련한 배우들의 도움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덕분에 젊은 시청자들뿐만 아니라 나이 지긋한, 그러니까 나 같은 시청자들까지 TV 앞으로 불러 모을 수 있었다는 얘기이다.




길을 따라 팔랑개비들을 세워 놓았다. 동해바다를 향해 쉼 없이 돌고 있는 것이 흡사 이곳 논골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풍요로움에 넘쳤던 옛날의 그 바다로 다시 나가고 싶은 그들의 바램 말이다. 아무튼 적막한 골목이 환기해내는 건 아련한 추억이다. 꼭 여기 묵호나 바닷가 마을이 고향이 아니라도 좋다.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을 건너온 중년 이상의 이들에게는 이 누추한 집들 사이로 이어진 비탈진 골목에서 아릿하고 따스했던 오래전의 추억과 딱 마주치게 된다.



전국의 흔한 벽화마을 중에서도 논골마을의 벽화는 진정성과 참신성, 지속성으로 주목받는다. 지역의 삶과 이야기를 진지하면서도 위트 있게 담았고 무엇보다도 꾸준히 관리해 온 것이다. 그 진정성을 알아본 여행자들이 열렬히 화답했다. 이런 차이를 들어 이곳의 벽화를 담화’, 이 길을 논골담길이라고 부른다. 사이사이에 들어선 시들도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그림과 시들은 눈부신 바다 풍경과도 어우러져 또 다른 그림을 그려 낸다.




길가에는 의자도 놓아두었다. 힘이 드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쉬었다 가라는 모양이다. 의자를 본 집사람이 이 정도의 경사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을까요?’라며 넌지시 물어온다. 이에 대한 답은 할 필요도 없었다.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내 답변을 대신할 팻말을 만났기 때문이다.



! ! 담배 끊으셔야죠.’ 실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글귀가 보인다. 담배만 끊으면 이 정도는 거칠 것 없이 오를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내 경험으로 볼 때 맞는 말이다. 금연을 시작한지 15년이 지난 요즘의 나는 1천 미터 이상의 산들을 너끈히 올라 다니고 있으니까 말이다.



마을은 196070년대 선창가 달동네의 풍경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한두 명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좁고 가파른 골목길 양쪽으로는 슬레이트와 양철 지붕을 얹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언덕에 깃든 집들 또한 방 두어 개를 둔 작은 규모가 대부분이다. 차가 다닐 수 없으니 주민들은 아직도 짐을 직접 들고 골목을 오르내린다. 그나마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끝날 만큼 골목이 길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무연탄과 시멘트, 그리고 고기잡이에 생계를 위탁하기 위해 묵호로 들어온 가난한 이들은 항구 가까운 비탈진 언덕배기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곳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의 마지막 기항지로 불리던 이곳 논골담 마을이다. 논골담 마을에 얼기설기 판자를 잇고 덧대 겨우 거처를 마련한 이들은 거기서 매운 해풍의 겨울을 났다. 사내들은 배를 타고 나가거나 그물에서 생선을 걸러 내거나 지게질로 고된 삶을 이어갔고, 아낙네들은 젖은 명태나 오징어를 대야에 싣고 산동네를 올라와 빨랫줄에 이들 생선을 내걸고, 바다를 내려다보며 가장이 탄 고깃배의 귀환을 기다렸다.




저만큼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걸로 보아 거의 다 내려왔나 보다. 그렇다면 논골담마을’, 즉 작은 집들이 산비탈에 의지해서 오손도손 마주보고 있는 골목길을 다 구경했다는 얘기가 된다. 아무튼 푸른 동해바다는 끝도 없이 펼쳐진다. 어떤 이들은 저 바다를 보고 아름답다고 한다. 하지만 긴긴 세월을 아찔한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포구에서 일하던 지역민들의 삶의 애환이 담긴 곳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동네는 바다와 함께한 지역의 이야기와 예술로 재탄생시킨 벽화 작품들로 인해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 진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동해문화원주도로 지역 어르신과 작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해 마을이야기를 반영하는 벽화 등을 그리며 마을을 새롭게 꾸며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해변에 내려선다. 그리고 해안도로를 따라 탐방을 시작했던 곳으로 올라간다. ‘아름다운 바다의 도시라고 쓰인 조형물이 보인다. 이곳 동해가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니 묵호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이곳 묵호(墨湖)는 새들이 새카맣게 몰려든다고 해서 그 옛날 새나루 또는 오이진(烏伊津)이라 불렸다. 그러던 것이 바다빛깔이 먹물 같다고 해서 묵호(墨湖)라는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순조 때 들이닥친 큰 해일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파견된 이유옹이라는 부사(府使)의 작품이란다. 마을의 이름이 속지명과 한자로 나뉜다는 것을 안 그가 물도 검고 바다도 검고 물새도 검다는 뜻으로 먹묵()자를 써서 묵호(墨湖)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해안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벤치는 물론이고, 식탁까지 놓아두었다. 준비해온 음식들을 먹으면서 주변 풍광에 빠져보라는 자부심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인근의 경관이 빼어나다는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하긴 이곳 망상해변길은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전국의 52개 걷기 좋은 해안길, 해안누리길로 선정된바 있다. 동해 망상해변에서 묵호항을 지나 송정동에 이르는 10.5의 이 길은, 길과 포구의 정취뿐만 아니라 바다와 고단한 바다 사람들의 생까지 엿보게 해준단다. 그리고 한때 번성했던 포구와 마을의 흔적, 그리고 새롭게 바뀌는 포구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단다.



해안을 따라 걷다보면 아까 탐방을 시작했던 까막바위 회마을건물이 나타난다. 이젠 출출해진 배를 달래야 할 시간이다. 이곳 묵호항은 경매(競賣)에 열을 올리는 경매사들과 동해시 횟집에서 나온 상인들로 늘 북적이는 곳이다. 오징어가 한참 올라올 때는 항구가 온통 오징어 천지란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이 지방의 명물인 오징어나 가자미 정도는 먹어보고 가야하지 않겠는가. 특히 싱싱한 생선으로 만드는 물회를 먹어보지 않고 어찌 묵호를 다녀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찾아든 곳이 오부자 횟집이다. 이곳은 냄비 물회로 유명한 집이다. SBS-TV에서 인기리에 방영하고 있는 생활의 달인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물회분야에서는 그 실력이 뛰어나단다. 수십 년간 한 분야에 종사하며 부단한 열정과 노력으로 달인의 경지에 이르게 된 사람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니 더 말하면 뭐하겠는가. 참고로 물회에 넣는 생선의 종류는 그날그날 다르단다. 묵호항에서 경매되는 어황(漁況)에 영향을 받지 않나 싶다. 아무튼 살얼음이 동동 떠있는 물회가 나오면 육수에다 야채와 회를 골고루 섞어 어느 정도 먹다가 소면을 넣어 함께 먹는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밥을 말아먹으면 상황 끝이다. 맛은 물론 환상적이다. 생선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니 비린내 때문에 거부하다시피 하는 내 입에까지도 맞았으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양 또한 풍족하게 나오니 서두르지 말고 서서히 음미하면서 먹어볼 일이다.


철원여행

 

여행일 : ‘16. 12. 10()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일원

 

트레킹코스 :

고석정(孤石亭)

두루미평화마을→평화전망대소이산 전망대

 

함께한 사람들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철원에도 여러 곳의 전망대(展望臺)가 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전망대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의미를 갖는다. 눈에 보이는 산하가 모두 분단의 아픔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오른 평화전망대와 소이산전망대 역시 그런 의미를 갖는다. 눈에 담을 만한 풍경들이 모두 남북분단이 만들어낸 산물들인 것이다. 쏟아지는 포탄으로 인해 높이가 1m나 낮아졌다는 백마고지나 포격으로 인해 산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는 아이스크림 고지’, 후고구려의 궁예가 나라를 세우며 진산으로 삼은 '고암산 (김일성 고지)' 남방 한계선이자 한반도의 녹색지대인 DMZ 등 어느 것 하나 분단의 아픔을 품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서울면적(605)보다 훨씬 넓은 약 650(2억 평)에 달하는 거대한 철원평야의 풍요로움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분단의 현실을 삶의 현장으로 여기는 것들도 있다. 우리에겐 아픔이지만 철새들에겐 행운이기 때문이다. 분단은 사람의 간섭이 없는 비무장지대와 민간인통제구역을 만들었다. 드넓은 철원 평야 농경지는 먹거리인 낙곡을 제공하였고, 한탄강의 여울과 곳곳에 자리 잡은 대형 저수지는 잠자리로 최적이다. 이런 환경 덕분에 철원은 멸종위기 종()인 두루미와 재두루미, 독수리를 비롯해 수많은 철새의 월동지가 되었다. 오늘 여행을 즐기면서 끊임없이 마주치게 되는 풍경들이다.


 

고석정을 출발한 버스가 처음으로 들른 곳은 철원읍 대마리에 위치한 두루미평화관이다. 건물의 외형이 노동당사를 닮았다고 해서 리틀 노동당사라고도 불린다는 건물인데, 숙식이 가능하다고 해서 산악회에서 미리 식사를 예약해 놓았기 때문이다. 자율배식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맛과 양이 부족함이 없다고 해서 일부러 들른 것이란다.




두루미평화관이 위치한 대마리는 두루미평화마을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치열한 한국전쟁 이후 식량증산과 대북선전마을의 목적으로 지뢰밭과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쌀농사가 주민소득의 90% 이상을 차지하는데, 요즘은 환경농업을 확대시켜 무농약재배, 유기재배를 실시하고 있으며 그 면적 또한 점차 확대되고 있단다. 오늘의 식단(食單)은 이 마을 주민들이 직접 수확한 농산물들로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의 화두(話頭)는 무농약, 유기농 등 친환경이 대세이다. 그렇다면 우린 지금 최상의 음식을 먹고 있는 셈이다. 보약(補藥)을 먹고 있다는 얘기이다.



건물 앞에는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상허 이태준(1904~?)의 문학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고향에 세웠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의 고향이 이곳이었나 보다. 상허는 남과 북 양쪽 모두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 불운한 문학가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월북했기 때문이다. 중편 해방전후와 단편 농군, 달밤 등의 소설과 산문집 무서록, 그리고 문장강화 등으로 유명한 이태준은 1904114일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광수와 김동인을 거치며 싹이 튼 한국 근대 단편소설양식을 완성한 작가로 평가된다. 당시 그의 문학적 위치는 시에는 정지용, 소설에는 이태준이라는 평판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30년대에 박태원, 이상 등과 함께 구인회 활동을 하고 잡지 문장을 창간하는 등 순수문학에 전념했던 그는 해방과 함께 문학가동맹 부위원장을 맡는 등 좌익 문인 단체를 이끌다가 월북한다. 그러나 전쟁 이후 숙청된 그는 60년대 말 탄광에서 노역에 시달리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 이외에는 지금까지도 행적과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동송읍 중광리에 있는 평화전망대로 이동한다. 155마일 휴전선의 중앙부위에 위치한 전망대로 2007년에 개관하였다. 전략적 요충지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현재 DMZ에서 북한의 휴전선 감시 초소와 가장 근접한 곳이기도 하다. 즉 북한군의 이동모습은 물론남북 분단의 현장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전망대로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모노레일(monorail)을 타고 오르는 방법이다. 나머지 하나는 물론 걸어서 오르는 방법이다. 부담 없는 요금(성인 기준 2천원) 덕분에 대부분의 탐방객들은 모노레일을 이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는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다. 거리가 얼마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올라가는 길에 또 다른 구경거리가 있을까 해서이다.



우리의 예상은 적중했다. 올라가는 길에 우린 신·구 기독교 교인들이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예배당과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을 둘러볼 수 있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방문을 기념해서 세운 소박한 기념비(記念碑)도 눈에 띄었다





잠시 후 전망대에 이른다. 안보관광(安保觀光)을 목적으로 지어진 철근콘크리트로 2층 건물이다. 평화전망대는 비무장지대(DMZ : Demilitarized Zone) 부근에 위치한 여러 전망대들 가운데 북한의 모습을 관찰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전망대가 산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 북한지역에 대한 관측이 용이해서, 농번기에는 북한 군인들이 자급자족하는 농사 장면까지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전망대는 2층에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태봉국의 옛성터와 철원 평야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쌍안경을 통해 북한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전망대에는 안보전시관도 마련되어 있다. 제2 땅굴과 군막사, 검문소를 재현한 전시물과 비무장 지대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소이산 전망대이다. 봉의산(鳳儀山)이란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소이산(所伊山)은 철원평야 논바닥에 떠 있는 작은 섬 같은 산으로 철원평야와 비무장 지대를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점이다. 해발고도가 362.3m로서 주변 지역과의 표고(標高) 차이가 200m에 불과한 탓에 나지막한 산으로 보이지만 산정에 오르면 넓은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 그리고 그 건너편으로 북한지역의 평강고원이 한 눈에 잘 들어오는 것이다. 아무튼 버스는 우릴 소이산 입구의 삼거리에다 내려놓는다. 왼편은 수도국지(水道局址)’로 가는 길이고, 소이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이정표를 겸한 안내판에는 새우젓 고개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옛날 임진강과 한탄강의 뱃길을 따라 용담까지 실려 온 새우젓을 철원 장날에 맞춰 내가 팔기 위해 장사치들이 넘나들며 쉬어가던 고갯마루라는 것이다.




소이산 생태숲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철원군은 지난 2011행정안전부 친환경 생활공간 조성공사사업의 일환으로 이곳 소이산을 확 바꿔놓았다. 국비 등 50억 원을 들여 북부지방 산림청과 공동산림사업구역으로 협약을 체결하여 소이산 2,382의 면적에 지뢰꽃길 1.3km’생태숲길 2.7km’, ‘봉수대오름길0.8km’생태숲 녹색길을 조성했다. 60여 년 동안이나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던 이곳을 전면 개방한 것이다.



길가에 수도국지(水道局址)’에 대한 안내판이 보인다. ‘수도국(水道局)’이란 일제 강점기에 옛() 철원 시가지 주민들의 상수도 공급을 위해 설치한 저수탱크 및 관리소 건물을 말하는 것이란다. 1937년에 발행된 철원읍지에 의하면 당시의 급수 인구는 500가구에 2,500명이었고, 1일 급수 가능량은 1,500로 강원도에서 유일한 상수도 시설이었다고 한다. 아니 서울이나 부산보다도 더 빨리 수돗물을 먹었던 지역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픔도 있다. 국군이 북진하자 북한 공산당이 친일, 반공인사 300여명을 이곳에서 총살하거나 지하 6미터의 저수탱크에 생매장하고 도주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또 다시 길이 나뉜다. 정비가 한창인 왼편 길을 무시하고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들머리에 이정표(정상 0.8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생태 숲길을 따라 오른다.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지만 삭막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주변의 숲이 이 모든 것을 가려버릴 정도로 울창하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인 생명의 숲2006년에 이 소이산을 천년의 숲수상지(受賞地)로 선정한바 있다. 또한 2008년에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평화의 숲' 상을 받았다. 통일을 대비한 선제적 대응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통일이 되고나면 이를 기념할만한 평화 도시를 만들자는 의견이 대두될 것이고, 그 대상지는 아마 철원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럴 경우 이곳 소이산은 서울의 남산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겠는가.



잠시 후 왼편으로 길이 나뉜다. 이번의 이정표(생태숲 녹색길/ 소이산 전망대)에는 일일 영농출입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에는 행정권이 민정으로 이양이 되었지만 민간인들의 전방 출입은 극히 제한되었단다. 이후 출입영농(出入營農)이 가능해졌지만 아침에 들어갔다가 해지기 전에 나와야만 했다. 이곳 소이산도 역시 민통선 북방으로 출입이 통제된 곳이었다. 참고로 철원군에는 1959년부터 1979년까지 철원평야에 총 14개의 민북마을 (민통선 북쪽 마을)을 조성하여 975세대를 입주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조금 더 오르면 대문(大門)이 하나 나타난다. 그 너머에는 군부대(軍部隊)로 여겨지는 시설이 보인다. 옛날 이곳에 미군(美軍)들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당시의 시설인 모양이다.



대문의 앞에 군인들이 사용했음직한 시설물이 보인다. 생김새로 보아 벙커(bunker)로 보이는데 반대편으로 난 틈으로 철원평야와 북녘의 산하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곳 소이산을 방어하는데 이만한 방패막이가 없겠다.




일단 오른편의 나무계단을 오른다. 소이산 전망대로 가기 위해서이다. 소이산의 정상은 물론 왼편이다.



잠시 후 소이산의 전위봉이라 할 수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이곳은 고려시대 때부터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회령을 출발한 봉화(烽火)가 길주와 함흥, 영흥, 안변, 철원을 거쳐서 서울 남산으로 연결되던 제1선인 경흥선 봉수로((慶興線 烽燧路)’에 속해있었다는 것이다. 철원평야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가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봉수대가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2층의 정자가 지어져 있다. 탐방객들의 전망을 돕기 위해서일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전망대에는 조망판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게 좀 특이하다. 투명한 아크릴판에다 남북한의 역사적 장소들을 표기해 놓은 것이다. 실제의 풍경에 맞추어 가며 옛날을 회상해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 같다.



정자에서는 오대쌀로 유명한 철원평야가 눈앞에 넓게 펼쳐진다. 철원평야는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과 그의 아들 세종, 손자 문종이 자주 찾던 사냥터였다. 사냥이 끝나면 신하들과 인근지방 관료들을 임진강가의 정자 고석정(孤石亭)에 초대하여 잡은 동물과 술을 베풀며 위무했다고 전한다. 저 멀리로는 평강고원도 조망된다. 그리고 비무장지대 내의 삼자매봉과 그 뒤로 백마고지가 보인다. 산명호(山明湖) 뒤로는 피의능선이 나타나고 더 멀리로는 김일성고지(고암산)와 낙타고지 등이 희미하게 조망되고 있다.



철원용암대지(鐵原熔岩臺地)’라고 적힌 안내판도 보인다. 글씨가 지워져 내용을 알 수가 없지만 이곳이 용암대지(熔岩臺地, plateau of lava) 임을 설명해 놓지 않았을까 싶다. 공식 명칭이 철원평강용암대지(鐵原平康熔岩臺地)인 이 일대는 넓이가 590이고 평균높이는 340m이다. 신생대 제4기 충적세에 현무암이 분출하면서 이루어진 화산지형으로서 현무암 분출의 중심은 평강읍 남서쪽 약 4지점에 있는 오리산[鴨山454m]과 검불랑(劒拂浪) 북동쪽 약 5지점에 있는 높이 680m의 화산인 것으로 지질조사에서 밝혀졌다. 화산쇄설물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용암이 조용히 분출한 것으로 보인다.



경계용 난간에 산악회의 리본들이 흡사 무당집 처마처럼 어수선하게 매달려 있다 그만큼 많은 산악회에서 이곳을 다녀갔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무계단을 되돌아 내려와 이번에는 아까 보았던 대문으로 들어선다. 해발 362.3m의 소이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이다. 대문의 왼편에 소이산 평화마루공원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옛날 군부대가 있던 자리를 공원으로 리빌딩(rebuilding) 해놓은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괴상하게 생긴 사각(四角)의 조형물들이 줄줄이 서있다. 철망으로 둘러싸인 틀 속에는 군화와 수통, 코펠(kocher), 탄통 등 군용장비들이 들어있다. 당시 미군들이 사용하던 것들을 전시해 놓은 모양이다




당시 미군들이 쓰던 막사(幕舍, barracks)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출입은 사양한단다. 아무튼 이 시설들은 미군의 레이더기지가 주둔할 당시 군인들이 머물던 숙소였다. 전쟁 종료 후 한국군이 사용해오다가 지금은 폐쇄된 상태이다. 이왕에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면 그냥 놀리기 보다는 관광객들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만들었어도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소이산의 꼭대기는 널따란 광장(廣場)을 만들어 놓았다. 군부대가 떠난 뒤 새로 조성한 모양인데, 뛰어난 전망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시야(視野)를 막는 것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소이산이 없었다면 6.25전쟁 때 철원평야를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는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軍部隊) 공보참모의 말을 인용했었다. 그렇다. 이런 곳이라면 적의 동태를 속속들이 살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손자병법(孫子兵法)’이 꼭 아니더라도 이런 곳을 선점한 쪽이 우세했을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전망대에서는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이 펼쳐진다. 넓은 철원평야는 물론이고 비무장지대의 백마고지(백마산), 김일성고지(고암산), 북한의 평강고원 등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노동당사도 보인다. 아니 아까 전위봉에서 볼 때보다도 훨씬 더 또렷해졌다. 노동당사를 기점으로 해서 북쪽방향으로 철원경찰서, 도립병원, 철원군청, 철원공립보통학교, 철원역에 이르는 3km의 거리는 일제강점기 철원의 중심가였다. 경원선 기찻길이 생기고 금강산 전기철도가 건설되면서 철원군은 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되었고 각종 농수산물의 집산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6.25전쟁은 인구 2만의 철원읍 시가지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조차 모두 떠나게 만들어 버렸다.



노동당사는 1946년 공산치하에서 지역주민들의 강제 동원과 모금에 의하여 완공된 지상 3층의 철근이 들어가지 않은 콘크리트건축물이다. 1946년 연건평 580평으로 건축되었는데, 성금이란 명목으로 하나의 리()마다 백미 200가마씩의 자금과 인력 또는 장비를 동원시켰다고 한다. 당시 이곳은 러시아의 영향을 받는 북한정권의 관할 아래 있어서 많은 건축물들이 러시아의 기술적 지원과 러시아가 추구하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realism) 건축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노동당사 또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건축적 특징과 시대성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언덕을 이용한 기단의 설정과 대칭적 평면, 비례가 정돈된 입면의사용으로 공산당사로서의 권위를 표현하고 있다. 전쟁 중 내부 벽체가 대부분 파괴 되었으나 외부의 형태가 남아 있어 원래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 일부 구조체에서 철근 콘크리트의 사용과 벽식 구조의 혼용, 화강석과 콘크리트, 벽돌 및 목재의 혼용은 당시 건축의 일면을 엿보게 하고 있다. 현재 이 건물은 근대건축문화재 제22호로 등록되어 있다. 분단의 비극과 전쟁의 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 아래 사요리는 옛 철원읍의 중심지였다. 농축산물이 모이고 경원선을 통하여 금강산 관광객이 북적대던 곳이다. ‘철원군지(鐵原郡誌)’에 실려 있는 1930년에 찍은 사진을 보면 그 당시 소이산 주변으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을 볼 수 있다. 해방 때만 해도 철원읍의 인구는 8만 명이나 되었고, 은행 2개소와 도립병원까지 있었단다. 농산물 검역소 등 과거의 추억들은 근대문화유적으로 남았다. 하지만 농가와 논밭의 상당수는 습지와 숲으로 바뀌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고려 삼은(三隱) 중의 한 사람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의 싯귀(詩句)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전위봉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조망판이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이번 것은 투명판이 아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과 겹쳐보는 재미는 덜하지만 특히 보고 싶은 지명을 찾아보기에는 더 유리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추수가 끝난 텅 빈 철원평야의 전경은 물론이고 비무장지대와 그 너머 북한의 산하가 펼쳐진다. 포탄을 얼마나 퍼부었는지 산등성이 높이가 1m정도 낮아졌다고 하는 산 '백마고지'는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말 산등성이가 평평하게 보인다. 극심한 포격에 산이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내렸다는 '아이스크림 고지'(원래 이름은 삽슬봉), 남방 한계선이자 한반도의 녹색지대 DMZ, 후고구려의 궁예가 나라를 세우며 진산으로 삼은 '고암산 (김일성 고지)'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에 있다. 서울 면적(605)보다 훨씬 넓은 약 650(2억 평)에 달하는 거대한 철원평야는 풍요로움에 이어 민족분단의 아픔까지도 그대로 느껴진다.


철원여행

 

여행일 : ‘16. 12. 10()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일원

 

트레킹코스 :

고석정(孤石亭)

두루미평화마을승리전망대소이산 전망대

 

함께한 사람들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철원읍 동송읍 장흥리, 한탄강 중류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亭子)로 신라 진평왕 때 세워졌다.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과 고려 충숙왕(재위 12941339)이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고려 승려 무외(無畏)의 고석정기와 김량경의 시() 등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의적 임꺽정이 고석정 앞에 솟아 있는 고석바위의 큰 구멍 안에 숨어 지냈다고 하는데, 이 바위에는 성지, 도력이 새겨져 있고 구멍 안의 벽면에는 유명대, 본읍금만이라고 새겨 있다고 한다. 지금의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71년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것이다. 19711216일 강원도의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


 

여행의 시작은 고석정 국민관광지주차장(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20-15)

43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다가 의정부와 포천, 철원을 차례로 지난 다음 문혜교차로(철원읍 갈말읍 문혜리)에서 좌회전, 463번 지방도로 갈아탄 뒤 한탄강을 건너면 곧이어 고석정 국민관광지주차장이 나온다.




먼저 고석정으로 향한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의 대표적인 명소이기 때문이다. 고석정(孤石亭)은 철원팔경 중 하나이며 철원 제일의 명승지로 꼽힌다. 한탄강 한복판에 치솟은 10여 미터 높이의 거대한 기암(奇巖)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양쪽으로는 한탄강물이 휘돌아 흐른다. 여기에 신라 진평왕 때 축조된 정자(亭子)와 고석바위 주변의 계곡을 통틀어 고석정이라 한다. 참고로 지방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고석정은 신라 때 진평왕이, 고려 때는 충숙왕이 찾아와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석정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조선시대 명종 때 임꺽정(林巨正, ?-1562)의 배경지로 알려지면서부터이다.



고석정으로 가는 길에는 작은 공원(公園)이 조성되어 있다. 한가운데에 분수(噴水)를 배치하고 그 둘레에다 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캐릭터(character)들을 만들어 놓았다. 어린이들과 함께 사진 찍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공원에는 임꺽정의 동상도 모인다. 근육질의 맨몸에 환도를 비켜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형상이 으스스하다. 하긴 저런 외형(外形)이었기에 탐관오리들이 무서워했었을 것이다. 양주 등 경기 북부 일원의 산을 오르다보면 임꺽정의 전설을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되는데, 임꺽정이 이곳까지도 그의 활동무대로 삼았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임꺽정은 황해 봉산에서 갈대를 꺾어 고리를 만드는 고리백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황해 일원에는 왕실과 명문거족들 소유의 토지가 많았는데 조선 중기부터 대대적인 개간사업이 진행되었다. 개간에 동원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음은 당연했을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도 황해도 개간사업에 대한 백성들의 고통과 불만이 상세하게 묘사되니 참조한다. 아무튼 임꺽정은 생계 터전인 갈대밭이 개간되어 더 이상 고리백정 노릇조차 할 수 없게 되자 그 참담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황해도와 경기도 경계에 있는 재약산 청석골로 들어가 화적패가 된다.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열어 약탈물들을 인근 백성들에게 나눠주면서 민심(民心)을 얻은 임꺽정은 점차 세력을 키워 반란군(叛亂軍)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역사학자들이 이 사태를 임꺽정의 난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끝내는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던 남치근 장군이 지휘하는 정예 부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측근이었던 서림의 밀고로 체포되어 참수(斬首)가 되었지만, 민초(民草)들의 가슴에는 영웅으로 남아있다. 영웅에 대한 민초들의 기대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모양이다.



고석정으로 내려가는 들머리에는 식탁 몇 개를 놓아두었다. 옆에는 음수대(飮水臺)도 보인다. 탐방객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두루미를 새긴 입석(立石)과 고석정에 대한 안내판도 보인다. 한탄강 협곡에 우뚝 서있는 화강암을 고석(孤石)이라 부른다면서,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암석을 뚫고 들어온 마그마에 의해 만들어진 화강암이 고석 주변의 기반암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고석이 용암대지 형성 이전의 원지형(原地形)을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지형·지질 유산이라는 설명과 함께, 고석의 아름다운 경관은 각종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의 배경이 되었다는 부언(附言)을 달아 놓았다.




들머리에는 이정표(직탕폭포 3Km/ 대교천 현무암협곡 1Km/ 철원 용암대지 12Km/ 직탕폭포 3Km/ 삼부연폭포 6Km)도 세워져 있다. 하지만 적혀 있는 지명들이 이곳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곳들뿐이어서 탐방객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다. 그저 철원 전체를 놓고 방향이나 잡으면 될 듯 싶다.



계단을 내려서면 한탄강 물굽이를 내려다보면서 우람하게 서 있는 바위, 즉 고석(孤石)바위가 나타난다. 그 맞은편 언덕에 정자(亭子) 하나가 마치 제비집처럼 걸터앉아 있다. 그동안 드라마나 다큐, 또는 사진에서 자주 접하던 고석정(孤石亭)이다. 정자는 고석바위를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조망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역광(逆光)으로 인해 사물이 흐릿해져버렸기 때문이다. 누군가 난간에 기대어서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다보면 누구라도 시 한수는 절로 읊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다.




고석정(孤石亭)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의 명물인 고석(孤石) 바위를 빠짐없이 둘러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모양이다. 일단은 오른편으로 내려선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하얀 모래밭으로 내려서자 한탄강의 협곡(峽谷)이 그 속살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이곳에서 순담계곡으로 연결되는 구간이 한탄강 물줄기 중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뒤돌아보면 협곡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고석바위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조금 전 정자에서 바라볼 때에는 역광(逆光) 때문에 또렷이 보지를 못했는데, 이제야 그 전모가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다. 15m 높이로 우뚝 선 화강암 봉우리가 그 빼어난 자태를 한껏 자랑하고 있다. 저 기암(奇巖)에는 임꺽정이 은신하였다는 자연 석실(石室)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건너편 벼랑에는 임꺽정이 웅거(雄據)했다는 석성(石城)의 흔적도 남아있다.





이번에는 고석의 뒤편으로 돌아 가본다. 이번에는 한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여있다. 예쁘장하게 생긴 섶다리이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일부러 가설한 모양인데, 난간까지 갖춘 의젓한 다리이다. 참고로 한탄강은 은하수 한()자에 여울 탄()자를 써서 우리말로 큰 여울이라는 뜻이다. 200~1만 년 전 10여 차례 이어진 오리산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철원 일대를 평평하게 뒤덮었다. 용암이 굳어진 현무암 사이로 물이 스며들면서 틈이 커지고, 거기에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게 한탄강이다. 빠른 물살에 바위가 깎이고 파여 좁고 깊은 협곡과 주상절리, 수직 절벽 등이 형성됐다.




섶다리는 경북 청송 땅에 살던 청송 심씨문중에서 1428(세종 10)에 최초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청송 심씨시조묘(始祖墓)가 덕리(청송읍)의 보광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장마로 인해 불어난 용전천 강물 때문에 혹시라도 제사(祭祀)를 지내려고 온 자손들이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을 걱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섶나무(잎나무와 풋나무 등)를 엮어 만들었다는 이 다리는 한때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1996년에 청송군에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복원하면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바 있다. 아무튼 이 복원사업은 꽤나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았고, 이를 본 전국의 지자체들이 너도나도 섶다리를 놓았다. 이곳 철원군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다리를 건너면 강 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고석(孤石) 바위와 건너편 언덕에 자리 걸터앉은 고석정 정자(亭子)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그렇다. 그동안 사진에서 보아오던 고석정의 풍경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섶다리는 바로 이런 풍경들을 놓치지 말라고 놓았던 모양이다.






젊은 연인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드나들었을 나루터는 현재 텅 비어있다. 고석정의 명물인 통통배가 부지런히 드나들었으련만 강물이 얼어붙었으니 배가 움직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고석정을 둘러보고 나와 이번에는 철의 삼각 전적관으로 향한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 철원은 철의 삼각지라고 불릴 만큼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던 곳이다. 한국군과 북한군은 드넓은 철원곡창지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지만 결국 그 자리는 철조망에 가려져 겨울 철새들의 풍요로운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래서 만들어낸 시설이 철의삼각 전적관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철의 삼각 지대 전투(三角地帶戰鬪)’는 철원·김화를 저변으로, 평강을 정점으로 한 통칭 철의 삼각 지대에서 벌어진 전투들을 총칭한다. 당시 철의 삼각 지대는 신고산평강으로 이어진 추가령지구대를 통과하는 경원선과 5번 국도가 여러 곳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였고, 공산군측이 나진·성진·원산항에 양륙된 군수물자와 각지에서 동원한 병력을 이 일대에 집결시킨 뒤 전선에 최대 병력으로 투입한 중간 책원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지대를 '철의 삼각(Iron Triangle)'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이 일대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났다.



전적관의 앞마당에는 한국전쟁 당시에 썼던 것으로 보이는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항공기는 물론이고, 탱크와 장갑차, 대포 등도 보인다. 어린이들이 보면 꽤 좋아할만한 것들이다.



국내 최대 안보교육장이라는 전적관은 지상 2, 지하 1층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남북한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에 비추어 미래의 통일모습을 자료로 전시하고 있다. 6.25 철의삼각지전투, 한국의 정치사회, 군사, 통일에 대한 것, 북한 주민 생활사와 변화과정을 보여주며, 특히 북한 주민 생활용품이 전시되어있어 흥미로운 관람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아이들에게 좋은 배움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1층인 통일관으로 들어서면 정부의 대북 통일정책이 일목요연하게 적혀있다. 또한 북한의 정치에서부터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시해 놓았다. 북한 주민들의 의식주(衣食住)도 엿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2층은 교육관이다. 그래선지 천안함 피격사건연평도 포격 도발등 북한이 도발한 여러 사건들을 판넬(pannel)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또한 그곳에는 사람이 없다는 내용의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실상도 전시해 놓았다. 북한군이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무기들도 진열되어 있다.





전적관을 둘러보고 난 뒤에도 시간이 남아 주변을 둘러보기로 한다. 먼저 고석정랜드쪽으로 걸음을 옮겨본다. 가는 길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고석정으로 내려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인 모양이다. 아무튼 나선형(螺旋形)으로 만들어진 나무계단이 너무 예뻐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놀이공원 조금 못미처에서 팔각의 정자(亭子)를 만난다. 바위벼랑의 위에 지어져 전망대의 역할을 겸하는 곳이다. 정자에 오르면 고석정 아래 방향의 협곡(峽谷)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저 계곡을 따라 내려갈 경우 한탄강의 또 다른 명소 순담계곡이 나온다. 순담이란 고석정에서 2떨어진 곳에 있는 계곡을 일컫는데, 조선 영조(재위17241776) 때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16911767)가 요양하던 곳이다. 이름은 순조(재위 18001834)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17431806)20평 정도의 연못을 파고 물풀인 순채를 옮겨다 심고서 순담이라 불렀다는 데서 유래한다. 아무튼 기묘한 바위와 깎아 내린 듯한 벼랑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계곡에는 찾아보기 힘든 하얀 모래밭이 천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놀이동산인 고석정랜드는 정자의 바로 옆에 있다. ‘에버랜드롯데월드등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왜소하기 짝이 없는 규모이나 웬만한 놀이기구들은 다 갖추고 있다. 거기다 입장료까지 저렴해서 자주 찾아도 부담이 없을 듯 싶다. 하지만 오늘은 문이 굳게 닫혀있다. 아마 겨울철에는 운영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주차장을 가운데에 끼고 돌아보기로 한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건 야생조수류보호사이다. 이곳 철원은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이다. 겨울이면 시베리아와 몽골 등에서 사는 수천 마리의 철새가 찾아온다. 그만큼 이곳 철원이 철새한테 좋은 쉼터를 제공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먹이가 넉넉하고, 느긋하게 쉬면서 맞잡이한테서 몸을 지킬 만한 곳이라는 얘기이다. 그렇게 찾아온 철새들을 보살피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로 보이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토요일이어선지 문이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조류보호사를 오른편에 끼고 돌면 이번에는 한탄리버 스파호텔이 나온다. 지상 3, 지하 1층 등 연면적 9,917.468개의 객실과 최신시설이 완비된 연회장 및 세미나실, 게르마늄 온천, 워터파크, 찜질방, 웰빙 다이어트 푸드(닥터로빈), 헬스클럽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는 종합 휴식공간이다. 인근에 한탄강 컨트리클럽이 있는데, 라운딩이 끝난 후에 한번쯤 들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화산온천욕이나 수영 등으로 몸을 풀어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길가에 자전거들이 진열되어 있다. 1회당 2시간을 탈 수 있는데, 주민등록증 등 관공서에서 발행한 신분증만 소지하고 있으면 무료이용이 가능하단다. ‘자전거 대여대장자전거이용 준수사항 확인서등을 자필 작성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으나, 손쉽게 관광을 즐길 수 있는 것에 비하면 그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참 잊을 뻔 했다. 자전거를 타고 나가기 전에 주의사항을 꼭 읽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잃어버리거나 파손되었을 때에 책임져야할 사항들을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주차장에는 2층짜리 철원관광안내소건물이 지어져 있다. 민통선 관광의 메카(mecca)인 철원의 명소들을 둘러볼 수 있는 투어가 시작되는 곳이다. 민통선 내부 관광은 문화해설사와 동행해야 가능하다. 때문에 여행 전에 예약을 하거나, 이곳에서 하루 4회 진행하는 안보 투어를 이용해야만 한다. 2땅굴과 평화전망대, 승리전망대, 노동당사, 백마고지 전적비 등이 포함된 일정으로 요금은 성인 기준 12,000원이다. 다만 매주 화요일과 신정, 설날·추석 연휴, 어린이날은 쉰다고 하니 참조한다.




관광단지의 곳곳에 두루미의 조형물들이 보인다. 아까 고석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두루미를 새긴 입석이 보이더니 가로등까지도 두루미를 형상화 시켜놓았다. 강원도를 상징하는 새()이자 이곳 철원군의 마스코트(mascot)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곳 철원은 세계적인 철새도래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세계적인 희귀조류인 두루미가 겨울철을 이곳에서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연기념물 제202호로 지정된 두루미는 학()이라고도 하며, 선학(仙鶴선금(仙禽노금(露禽태금(胎禽단정학(丹頂鶴) 등으로도 불리는데, 흔히 신선이 타고 다니는 새로 알려져 있으며, 천년을 장수하는 영물로 인식되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매우 친숙하게 등장하고 있다.



강릉 바다부채길

 

산행일 : ‘16. 12. 11()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강동면 일원

산행코스 : 옥계해변금진해수욕장금진항헌화로심곡항바다부채길썬크루즈리조트모래시계공원정동진주차장(소요시간 : 3시간)

 

함께한 산악회 : 청마산악회

 

특징 : 강릉의 정동진과 심곡항 사이에는 천연기념물 제437로 지정된 해안단구(海岸段丘, marine terrace)가 있다. 그동안 민간의 통행이 불가능했던 지역이다. 애초부터 길이 없었음은 물론이려니와 길이 나있다고 해봐야 해안경비를 위한 군()의 경계근무 정찰로로만 사용돼 왔을 따름이다. 단 한 번도 민간인에게 개방된 적이 없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그 비밀의 문이 최근 열렸다. 강릉시에서 총 사업비 70억 원을 들여 총 길이 2.86km의 둘레길을 조성한 후 바다부채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동진의 부채 끝 지명과 탐방로가 있는 지형의 모양이 마치 동해(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 놓은 모양과 비슷하다 해서 이런 근사한 이름까지 얻었단다. 민간인 개방을 위해 국방부와 문화재청의 협의와 허가에만 2년간의 세월이 소요됐다니 얼마나 어렵게 세상에 공개됐는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아무튼 2300만 년 전 동해의 탄생 비밀을 간직한 이곳은 온통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새로 만든 길 또한 아름답기 짝이 없다. 바위벼랑을 따라 위 아래로 이어지는 길이 비취빛 동해와 어우러지는 것이 마치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둘레길이 해안선을 따르다보니 바위벼랑의 위는 물론이고 벼랑의 중턱으로까지 길을 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거리가 짧다는 것만 뺀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둘레길이 아닐까 싶다. 짧다는 흠을 보완할 방법도 있다. 동해안의 해안선을 따라 나있던 기존 헌화로의 일부구간을 포함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 역시 옥계해수욕장까지 연장해서 걸어 보았다. 참고로 바다부채길이란 이름은 공모를 통해 정해졌다고 한다. 강릉이 고향인 소설가 이순원의 작품이란다. 강릉의 대표 걷기길인 바우길도 그가 지은 이름이다.

 

트레킹의 들머리는 옥계해수욕장(강릉시 옥계면 금진리)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옥계 I.C에서 내려온다. T.G를 빠져나와 좌회전, 곧이어 만나는 7번 국도에서 또 다시 좌회전, 이어서 낙풍삼거리(옥계면 낙풍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옥계해수욕장이 나온다. 표현은 길었지만 실제로는 한순간에 이루어지다시피 하니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옥계해수욕장(玉溪海水浴場)의 모래사장 가로 난 길을 따라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 해수욕장은 강릉시 옥계면 금진리에서 주수리까지 약 2.5에 이르는 비교적 넓은 사빈(沙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낮은 해안 사구(沙丘)들과 해식애(海蝕崖) 등이 해당화와 어우러진 경치가 아름다우며 인근의 다른 해수욕장들에 비해 비교적 조용하기 때문에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이 이용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백사장을 따라 얼마쯤 걸었을까 철망으로 된 울타리가 길을 막는다. 이후의 백사장은 개인사유라도 되는 모양이다. 별 수 없이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한국여성수련원앞에서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소나무 숲길로 들어선다. 이후부터는 수령 40~50년은 너끈히 넘어 보이는 울창한 송림(松林)이 길손을 맞는다.



솔향에 취해 걷다보면 저만큼에 2차선 도로(이정표 : 금진항2.4Km, 정동진 9.7Km/ 옥계시장4.3Km)가 나타난다. 헌화로(獻花路)이다. 헌화로는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의 낙풍사거리에서 강동면 정동진리 정동진역 앞 삼거리에 이르는 도로로서, 헌화로라는 이름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때 지어진 헌화가(獻花歌)’에서 유래되었다.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가 되어 부임하던 길에 그의 부인 수로(水路)부인이 바닷가 절벽 위에 핀 철쭉을 탐냈으나 위험한 일이므로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소를 끌고 가던 한 노인이 나서서 꽃을 꺾어 바치면서 부른 노래가 바로 헌화가이다. ‘자줏빛 바위 가에(紫布岩乎邊希),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執音乎手母牛放敎遣),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吾肸不喩慚肸伊賜等),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



10Km 길이의 헌화로는 관광도로이다. 한적하던 이 도로는 금진리와 심곡리를 잇는 해안구간이 개통되면서 활성화되었다. 199811월 이전만 해도 이 구간은 통행이 불가능했었다. 해안단구(海岸段丘)의 바다 쪽이 절벽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이곳에 해안도로를 내고 나머지 구간과 연결하면서 헌화로(獻花路)가 되었다. 아무튼 이 구간은 해수욕 철과 봄가을 관광 철만 되면 차량이 몰려 주차장으로 변하곤 한다.



도로에 올라섰다 싶은데 벌써 금진해수욕장이다. 옥계면 금진1,2리에 걸쳐 있는 길이 900m63,000의 백사장을 가진 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의 초입에는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옥빛으로 물든 끝없이 너른 동해바다를 실컷 구경해보라는 모양이다.



길은 해수욕장과 마을을 양 옆에 끼고 나있다. 금진해수욕장은 어느 해변보다 조용하고 아늑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한번이라도 와본 사람들은 해마다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삭막하기 짝이 없다. 따가운 햇볕을 피할 만한 나무 한그루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민박집이나 상점들이 도로를 끼고 늘어서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그늘 대신으로 이용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참 깜빡하고 그냥 지나칠 뻔 했다. 모래사장에 서핑보드가 수북이 쌓여 있는 광경을 말이다. 동해안에 서핑보드의 명소가 생겼다고 하더니 어쩌면 이곳일지도 모르겠다.



백사장이 끝나면 길은 또 다시 벼랑의 아랫자락을 지난다. 구불구불한 도로의 바다 쪽에 군()의 경계용 철제 펜스가 설치되어 있고, 반대편 산자락은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벼랑의 아래에는 차를 세울 수 있는 소규모 주차 공간과 벤치도 드문드문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비록 포장마차들이 점령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헌화로의 전형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이곳 헌화로는 강릉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찾는 드라이브 코스이다. 그렇다고 오롯이 차량만 오가는 도로는 아니다. 두 개 뿐인 도로면의 하나를 자동차와 자전거, 그리고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도록 설계해 놓은 것이다. 이로 인해 가끔은 위험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자칫 한눈이라도 팔다가는 사고를 당할 수도 있으니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가며 걸어야 할 일이다.



잠시 후, 그러니까 트레킹을 시작한지 25분 만에 작은 고깃배가 드나드는 한적한 바닷가 마을인 금진항(金津港)에 이른다. 1971년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고, 1989년에 제반 시설이 완공된 금진항은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하지만 세상에 알린 것은 드라마 '시그널'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시그널이 인기를 타면서 촬영지였던 이곳 또한 자연스레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주변은 무척 어수선한 모습이다. 시설물들이 오래된 탓일 게다. 그런 점이 중앙정부에까지 알려졌던 모양이다. 2020년 까지 국비 250억 원을 들여 수산물 유통·판매와 관광 중심지로 만들 계획이라니 말이다.



금진항의 선착장 근처에 제법 너른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갖가지 조형물과 벤치 등의 시설물들 외에도 돌로 만든 책도 보인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수로부인의 설화가 적혀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두 수의 노래가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헌화로(獻花路)와 연결시켜 관광객들을 유치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그래야만 현재 운행하고 있는 유람선 사업도 더 번창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금진항에서 출발해 심곡항과 정동진, 안인진 앞바다를 항해하는 골드코스트 유람선은 여행의 낭만을 더해준다고 알려져 있다.



심곡항으로 향한다. 항구를 빠져나가는데 아치형의 문()이 보인다. 문 위에는 몇 마리의 새()가 올라 앉아 있다. ‘강원도의 새라는 두루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고니(백조)라고 보는 게 더 옳겠다. 이곳 강릉시를 상징하는 새는 천연기념물 제 201호인 고니이니까 말이다. 겨울철에 이 지역에서 머물다가 봄이 오기 전에 떠나는 이 새는 길조(吉鳥)로 알려져 있다. 풍년을 상징하며, 또한 청순하고 깨끗한 순백색의 자태는 학문과 지조(志操)를 나타내기도 한다.



헌화로의 백미(白眉)는 금진리와 심곡리 사이의 2.4구간이다. 이 구간의 지형은 높이 60m 안팎의 해안단구(海岸段丘)로 이루어져 있고, 이 단구의 절벽을 따라 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주변 경관이 가히 절경(絶景)이다.



노면(路面)이 젖어있는 곳도 보인다. 파도가 조금이라도 높으면 바닷물이 도로에까지 들이친다는 증거일 것이다. 누군가 한반도 땅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도로라고 했는데, 그 말이 실감이 난다. 한마디로 표현할 경우 헌화로는 아름답다. 한쪽은 무너져 내릴 듯 아슬아슬한 기암절벽이고, 다른 한쪽은 금방이라도 파도가 밀려들 듯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바다이다. 한 폭의 산수화라 할 수 있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왼편 산자락에 기괴하게 생긴 선 바위(立石)’ 하나가 보인다. 바위의 뒤는 움푹하게 파인 골짜기이다. ‘합궁(合宮)이라 불리는데 탄생의 신비를 보여주는 곳이란다. 남근(男根)과 여근(女根)이 마주하는 신성한 장소로서 동해의 떠오르는 서기(瑞氣)를 받아 우주의 기()를 생성하며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루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오면 금슬이 좋아지고 기다리는 아기가 생기게 된단다.



곡의 입구에 선 저 바위를 일러 헌화가(獻花歌)의 첫 소절에 나오는 자포암(紫布岩)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자포암은 발기했을 때의 검붉은 색을 띠는 남성의 성기(性器)’를 표현한 것이며 헌화가는 남근석(男根石)을 숭배하는 노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바위는 결코 무너질 일이 없겠다. 여성의 음문(陰門) 앞에 버티고 서있는 남근(男根)이 어찌 죽을 수가 있겠는가. 이에 대한 설명은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께서 해주시겠단다. 여근곡(女根谷)에 숨어든 백제군이 죽는 이유를 남성(男性)이 여성(女性)의 몸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신 말씀으로 말이다. 참고로 합궁골은 해가 뜨면서 남근의 그림자가 여근과 마주할 때가 가장 강한 기()를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아들 낳기를 원해서 이곳을 찾으려는 사람들이라면 알아두어야 할 일이다.



배가 출출할 경우에는 금진항이나 심곡항에서 해결할 수 있다. 싱싱한 회를 파는 음식점들이 상당 수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음식 등 다른 식단을 차리는 음식점도 문을 열고 있음은 물론이다. 신경을 조금 더 쓸 경우에는 탐방로 주변에서도 허기를 때울 수가 있다. 간간이 푸드 트럭(food truck)’들이 보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도로는 바위 절벽과 바다 사이의 좁은 지역을 지난다. 바다에 바싹 붙어 있는 길이라는 얘기이다. 구불구불한 해안가를 걷다보면 바다에 흩어져 있는 독특한 바위들이 눈에 들어온다. 바닷물에 침식되면서 계단 형태로 만들어진 해안단구(海岸段丘, marine terrace)란다. 아무튼 바위들의 형태가 독특해서 눈길을 끈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해안단구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라고 한다.



심곡항에 가까워지자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해버린다. 그에 따라 해안가로 난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의 숫자도 늘어만 간다. 나아갈 줄 모르는 차량에서 내려버린 관광객들이다. 하지만 누구하나 얼굴을 찌푸리지는 않는다. 그만큼 주변의 풍광이 아름답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꼭 경관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즐거워했을 것 같다. 30~40대의 젊은 연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걷는데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그렇게 조금 더 걸으면 어느덧 심곡항(深谷港 : 강동면 심곡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의 본래 이름은 지필(紙筆)’이었다고 한다. 마을의 생김새가 종이를 바닥에 깔아 놓은 듯이 평평한데, 그 옆에 붓이 놓여 있는 형국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러던 것이 1916년에 행정구역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깊은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심곡(深谷)’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곳은 양쪽에 산줄기를 끼고 있는 오지(奧地)이다. 거기다 나머지 한 면은 바다로 막혀있다. 이 마을 주민들이 6·25사변 때에도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지냈다고 알려졌을 정도이다. 얼마나 깊 길래 전쟁까지도 몰랐다는 말이 전해져 오겠는가. 하긴 이런 오지였으니 수로부인에 얽힌 전설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고 있을 것이다.



심곡항에서 바다부채길이 시작된다. 초입의 데크계단은 방파제 부근에 있다. 입구에서 탐방객의 숫자를 헤아리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얼마 후부터 유료(有料)로 전환한다고 하더니 사전에 뭔가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강릉시에서는 성인은 3000, 청소년·군인 2500, 어린이 2000원의 관람료를 받을 계획이란다. 바람직한 계획이라 할 수 있다. 둘레길의 시설들을 유지·관리하려면 꽤나 많은 예산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돈을 물어야만 한다. 이럴 경우에는 수익자 부담의 원칙이 적용되는 게 옳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두고두고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참고로 이 길은 탐방시간이 제한된다. 안보상 이유로 49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30분까지, 103월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30분까지만 개방한다는 것이다. 너울성 파도나 태풍, 강설, 강우, 강풍 등 기상악화 시에도 출입이 통제된다고 하니 미리 알아보고 길을 나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강릉시청 민원콜센터(033-660-2018)에 확인할 수 있다.



들머리에는 바다부채길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 심곡항에서 해돋이 명소인 정동진을 연결하는 2.86Km 길이의 둘레길에 대한 설명과 함께 지도를 그려 놓았다. 그리고 이곳 둘레길에서 주의해야 하거나, 해서는 안 될 행위들을 나열해 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길을 나서기 전에 한번쯤 살펴본다면 탐방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트레킹의 하는데 도움을 주는 안내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단출입 또는 무단촬영을 할 경우에는 군형법에 의해 처벌하겠다는 군() 부대장(部隊長)의 서슬 시퍼런 경고판도 세워 놓았다.



계단을 오르면 4~5층 높이의 전망대로 연결된다. 철제 구조물로 만들어진 이 전망대는 갈매기를 형상화한 것이란다. 하지만 옆에서는 갈매기의 형상이 그려지지 않는다. 위에서 볼 때에만 나타난다고 하니 꼭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헬리콥터라도 타고 볼 일이다.





전망대에 서면 주변 풍광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끝없이 펼쳐지는 동해의 푸른 물결은 물론이려니와 제법 번화하다고 할 수 있는 심곡항도 숨김없이 그 속살을 드러낸다. 그뿐만이 아니다. 진행방향에서는 이제부터 걷게 될 바다부채길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전망대를 내려와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은 탐방객들이 오가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넓다. 하지만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두 사람이 겨우 비켜 지나가야 할 만큼 좁다란 구간도 만들어져 있다. 이런 곳에서는 어김없이 병목현상이 일어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10월에 개방한 이후 월 평균 20만 명 이상이 다녀갔다고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이곳의 아름다움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는 증거일 것이다.



탐방로는 시작부터 아름다움의 연속이다. 왼편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그리고 오른편에는 푸른 바다가 계속해서 동행한다. 옥빛 바닷물에 기암괴석, 주상절리, 비탈에 아슬아슬하게 선 소나무와 향나무 등 수많은 볼거리에 눈이 호사를 누린다. 곳곳에 벤치도 만들어 놓았다. 잠시나마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세상사 시름을 날려버리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먼저 선점한 사람들이 있어 실행에 옮겨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탐방로의 핵심은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기암괴석들을 감상하며 걷는 것이다. 해안가 바위들은 2300만 년 전 일어났던 한반도 지반 융기의 비밀을 곳곳에 새겨 놓고 있다. 이를 통칭해 정동진 해안단구(海岸段丘)’라 부른다. 해안단구는 계단 형태의 평탄한 지형을 말한다. 오랜 세월 침식(浸蝕) 또는 퇴적(堆積) 작용으로 만들어진 파식대(波蝕台, wave-cut platform)가 지반 융기나 해수면 하강으로 육지화되면서 형성된다. 동해 어달동, 부산 태종대 등에도 비슷한 형태의 해안단구가 있지만 정동진 해안단구는 길이가 압도적으로 길다. 2004년 천연기념물(437)로 지정된 것도 이 때문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는 정동진 해안단구는 학술적으로 우리나라의 지질구조 발달 과정과 퇴적 환경, 지각운동, 해수의 침식작용, 해수면 변동 연구에 대단히 중요하고 자연과학 학습장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고 적고 있다.




험상궂은 절벽이 나타난다. 바닷가로 내려서지 못한 길은 절벽의 경사면(傾斜面)을 따라 나있다. 아까 헌화로 구간에서 거론했던 수로부인(水路夫人)이 용()에게 납치되었다는 장소로 거론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바윗길은 험하다. 아무튼 수로부인은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사나운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물고 물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일행들이 어쩔 줄 몰라 할 때 역시 한 노인이 나타나 여러 입으로 떠들자고 선동하였단다. 백성들을 불러 모아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면서 항의의 노래를 부르면 부인을 다시 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 내 놓아라라고 협박하였고 마침내 용이 수로부인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때 불렀다는 노래가 해가(海歌)’이다. ‘龜乎龜乎出水路(구호구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약인부녀죄하극) 남의 아내 앗은 죄 그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여약패역불출현) 네 만약 어기고 바치지 않으면, 入網捕掠燔之喫(입망포략번지끽)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바위의 모양이 거북이의 머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한편 거북이의 머리는 남성의 성기(性器)로 상징되기도 한다. 성기를 닮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몸통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모양새가 발기된 음경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수로부인의 설화를 떠올리다 문맥까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버렸다.



발아래로 파도가 들이친다. 상큼한 바다냄새가 듬뿍 실려 있는 파도이다. 넘실대는 파도를 따라 춤을 추고 있는 것들이 보인다. 정동진과 심곡이 자랑하는 특산물 미역들일 것이다. 여름철이면 이 일대는 또 다른 구경거리로 넘친다고 한다. 붉게 핀 해당화가 탐방로 주변을 지키고 갯메꽃과 하얀 찔레꽃도 곳곳에서 탐방로를 빛낸단다. 내년 여름에 다시 한 번 찾아봐야할 이유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부채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부채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바라보는 방향에 관계없이 어디서 봐도 부채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하지만 45도 각도(角度)로 기울어져 마치 좌초(坐礁)하는 배()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니 참조한다. 다른 한편으론 시루떡을 닮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아무튼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암석이 세월의 깊이를 대변해준다. 중생대 쥐라기부터 백악기 초까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지각변동의 영향을 받아 솟아오르거나 기울어진 암석들이란다.



이 바위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200여 년 전 심곡마을에 살고 있던 한 노인의 꿈에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왔다는 여인이 나타났다. 이 여인은 내가 심곡과 정동진 사이에 있는 부채바위 근방에서 떠내려가고 있으니 구해 달라고 했다. 노인은 배를 타고 부채바위 인근으로 갔고 그곳에서 나무 궤짝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여인의 화상(畵像)이 있었는데 노인은 서낭당을 지어 이 화상을 정중히 모셨고, 이후 이 마을엔 풍어(豊漁)가 이어졌다고 한다. 심곡마을에 가면 그 서낭당을 만날 수 있다



옥색바다가 일렁인다. 그 파도에 실려 온 해풍(海風)이 귓불을 건드린다. 수로부인의 치명적인 유혹이 나풀대는 해풍처럼 내 가슴 속에서 물결친다. 두근거림은 끝내 멈출 줄을 모른다. 북받치는 감정에 겨운 난 더 이상 걷지를 못하고 바위에 걸터앉아버린다. 해풍을 맞아 움푹 파인 양 볼을 보여주는 바위가 천년도 지난 옛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전해준다. 어느새 바다는 수로부인의 매혹적인 미소로 바뀌어 있다.



탐방로에는 해안 경계철조망이 그대로 남아 있고 절벽 곳곳에는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한 시설 등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하지만 해안철책은 탐방로 안쪽으로 설치돼 있어 조망을 해치지는 않는다. 아무튼 스스럼없이 분단의 현실을 접할 수 있으니, 이곳 바다부채길은 관광과 안보교육을 겸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사실 이 길의 진면목은 바다가 미친 듯이 울부짖을 때 드러난다고 한다. 집채만 한 파도가 기암괴석에 부딪쳐 포말로 날리는 모습이 장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상상황을 원할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런 날에는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이다.



바다부채길의 최고 절경은 투구바위 부근이다. 바위의 모양이 투구를 쓴 장수가 양손을 올리고 전투 자세를 취하는 형상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투구바위 주위에는 다양한 모양의 크고 작은 바위가 조각공원을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이 발가락이 여섯인 육발호랑이를 백두산으로 쫓아냈다는 전설도 깃든 곳이다.




사선(斜線), 혹은 수직으로 세밀하게 갈라진 바위 군상이 거센 파도에 닳고 닳아 그대로 작품이다. 간간이 제주에서나 볼 수 있는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玄武岩, basalt)도 보인다. 가끔은 거센 파도가 밀려오기도 한다. 파도가 몰려올 때마다 물줄기가 바위 사이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장관이 펼쳐진다.



굴곡진 해안을 따라 굽이굽이 절경이 펼쳐진다. 기암괴석과 쪽빛 바다가 빚어내는 풍광은 아무리 감성이 무딘 사람의 마음도 촉촉하게 만들어버린다. 중간 중간 가던 길을 멈추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게 된다.



얼마쯤 걸었을까 저만큼에 자갈밭으로 이루어진 해변이 나타난다. 사람의 손길이 만들어낸 바닷가탐방로는 여기까지다. 꿈길을 거닐던 환상여행은 이쯤에서 끝났다고 보면 된다. 주변 풍광이 언제 그렇게 아름다웠냐는 듯이 평범하게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굵직한 돌맹이로 이루어진 자갈밭은 동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갖가지 소망을 담은 수많은 돌탑들이 늘어선 해변에 앉아본다. 자갈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심신(心身)을 맑게 해주고, 하얀 포말은 속세에 찌든 마음마저 씻어주는 듯하다.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길이 끝나면 이젠 올라갈 일만 남았다. ‘썬크루즈 리조트로 연결되는 이 계단은 한마디로 길다. 거기다 가파르기까지 하다. 리조트가 산 위에 지어졌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곳에서는 서서히 걷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끝이 나올 테니까 말이다



길고 긴 계단을 오르면 썬크루즈 리조트주차장이 나온다. 그 뒤에는 선박의 외형을 닮은 썬크루즈 리조트건물이 위풍당당한 전모(全貌)를 드러내고 있다. 3만 톤급 호화 유람선이란다. ‘정동진역모래시계 소나무’, ‘밀레니엄 모래시계는 정동진을 대표적인 상징(象徵)들이다. 정동진을 내려다보는 산 위에 자리 잡은 배 썬크루즈 리조트도 그중의 하나이다. ‘썬크루즈 리조트CNN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CNNGO’에서 20122월 발표한 한국에서 가장 특이한 호텔 501위를 차지한 곳으로, ‘크루즈를 타고 있지만 실제로 바다에서 운항하지 않는 리조트라고 평가했다. 121개의 호텔형 객실과 82개의 콘도형 객실, 8개의 스위트룸으로 구성되어 있다.



리조트 진입로를 따라 내려가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해돋이 명소로 널리 알려진 정동진에 다다르게 된다. 드라마 모래시계를 촬영한 곳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으면서 내방객을 위한 숙박업소, 음식점, 노점상, 노래방, 유흥점 등 관광 시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한때 어촌 마을 속 도시를 방불케 하였다. 지금은 예전만 못하지만 평일에도 여전히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정동진은 두말이 필요 없는 우리나라 최고의 일출(日出) 명소이다. 명성이 자자한 해돋이를 감상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일 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요즘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최근에 새로 연 바다 부채길을 탐방하려는 사람들이 주중이나 주말을 가리지 않고 몰려드는 탓이다. 모처럼 이곳까지 찾아온 그들이 어찌 모래시계공원을 들러보지 않고 그냥 돌아갈 수 있겠는가.



모래시계공원에는 최근 새로운 볼거리가 생겼다. 철로를 깔고 그 위에 1985년에 제작된 기차 7량을 세워 정동진 박물관을 꾸며놓은 것이다. 실제 기차가 오가는 정동진역과는 1정도 떨어져 있다. 정동진역의 기차와 이 공원의 모래시계를 모티브로 삼은 박물관 안에는 동서양의 시계 관련 유물 13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1912415일 타이타닉호에서 침몰 당시 멈춰버린 타이타닉 금장 회중시계도 전시되어 있다.



설악산 주전골(鑄錢溪谷)

 

산행일 : ‘16. 10. 13()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서면

산행코스 : 오색주차장오색석사(성국사)선녀탕용소삼거리용소폭포용소폭포 탐방지원센터역방향으로 하산오색주차장((산행시간 : 2시간 30)

 

함께한 산악회 : 산두레

 

특징 : 오늘 설악산을 찾은 목적은 46년 만에 개방된다는 망경대에 올라보기 위해서이다. 그것도 기간을 정해 임시로 개방한다니 어떻게 해서라도 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음먹었던 목표는 끝내 이룰 수가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줄에 놀라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만 망경대 등산로로 들어설 수 있다는 말에 산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난 주전골을 왕복하는 것으로 원래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주전골 트레킹만으로도 하루 일정으로는 충분한 나들이가 되지 않았나 싶다.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은 안타까웠지만 주전골의 아름다운 풍광이 이를 상쇄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주전골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단풍이 아직은 붉게 물들지 않았던 것이 흠()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아쉬움은 좋은 일을 하나 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이틀 후에 이곳을 찾아올 계획인 청마산악회의 이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망경대를 쉽게 오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오색약수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용소폭포 탐방지원센터앞에서 내려서 먼저 망경대를 올랐다가 오색약수로 내려간 다음, 주전골을 탐방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래야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을 줄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오색약수 대형버스 주차장(양양군 서면 오색리)

서울-양양(춘천)고속도로 동홍천 I.C에서 내려와 44번 국도를 타고 인제를 거쳐 한계령을 넘으면 강원도 양양이다. 오색약수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주전골 탐방로의 출발지인 오색지구가 나온다. 입구에 대형버스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서 내려 오색약수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진행방향 저 멀리에 설악산의 특징이랄 수 있는 헌걸찬 암릉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가는 길에 오색약수 온천 지구 안내도가 보이니 잠깐 살펴보고 진행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따가 산행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돌아올 때 길이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오색약수를 향해 가는 길, 오른편은 온천(溫泉) 지구이다. 그런데 길을 걷다보면 이곳이 어디인지를 확실하게 알려주는 시설이 보인다. ‘족욕(足浴) 체험장이 바로 그것이다. 길게 물길을 내어 놓은 것이 맨발로 그 위를 걸어보라는 모양이다. ‘오색온천의 유래와 효능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워 놓은 걸 보면 오색온천의 온천수를 흘려보내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물은 흐르지 않고 있다. 이왕에 만든 시설이니 관리를 잘 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잠시 후 오색천(五色川)을 만난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지만 어느 길을 따르더라도 주전골로 들어갈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둘 모두 산채음식점들이 늘어선 상가를 지나도록 되어있지만, 왼편 상가의 규모가 조금 더 크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트레킹을 끝내고 목이라도 축이고 싶다면 오른편에 보이는 오색교(五色橋)를 건너 주전골로 들어갔다가 돌아 나오는 길에 왼편의 주전교(鑄錢橋)를 건너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때 마음에 드는 음식점에 들러 산책정식으로 요기를 때울 것임은 물론이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주전골 방향, 골짜기 끄트머리에 바위 봉우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는데, 그 생김새가 자못 범상치가 않다. 오늘의 트레킹은 저 기암절벽의 아래를 지나게 된다. 눈이 누릴 호사(豪奢)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려온다.



다리를 건너 냇가와 나란히 난 길을 따른다. 왼편 산자락 아래의 좁은 부지에는 상가가 들어서 있다. ‘산채음식점(山菜飮食店)’이라고 적혀있던 이정표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하나 같이 음식점 일색이다. 하지만 가끔은 토산품(土産品)’을 파는 곳도 보이니 시간이 나면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식당가가 끝나면 또 다시 다리가 나온다. 약수교(藥水橋)이다. 국립공원의 탐방지원센터는 약수교를 건너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발길을 재촉할 필요는 없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면 그 유명한 오색약수(五色藥水, 천연기념물 제529)’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약수는 1500년경 성국사(城國寺)의 승려가 반석에서 용출하는 천맥을 발견하였고, 오색약수라는 이름은 당시 성국사 후원에 있던 ‘5가지 색의 꽃(五色花)’이 피는 신비한 나무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론 약수의 맛이 5가지라는 데서 연유됐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다리 아래로 가면 오색약수(五色藥水)가 나온다. 토양에 흡수된 물이 나트륨과 철분을 용해한 후 기반암 절리를 통해 솟아나는 형태의 약수이다. 약수가 대개 암설(岩屑)층에서 솟는데 반해 기반암(基盤岩)에서 솟아나는 희소성이 있다. 나트륨 함량이 높아 특이한 맛과 색을 지고 있으며, 살충력이 강하고, 밥을 지으면 푸른 빛깔이 도는 특이한 약수로도 유명하다. 빈혈·위장병·신경통·기생충구제·신경쇠약·피부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너럭바위의 암반을 뚫고 나오는 샘은 둘이다. 이 둘은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나뉜단다. 위쪽 약수는 유황 성분이 많고 부드러워 여성들이 밥짓기에 좋다고 해서 암약수라고 불리고, 아래쪽은 탄산 성분이 많고 톡 쏘는 맛이 강해 남성을 건장하게 만든다고 해서 숫약수란다. 하지만 두 곳 모두 남녀의 구분 없이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하긴 물맛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그런 구분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약수교를 건너면 길은 냇가 오른편으로 나있다. 그리고 잠시 후 오색약수 탐방지원센터를 만난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46년 만에 개방되었다는 망경대로 연결된다. 하지만 진입은 불가능하다. 일방통행로로 망경대에서 내려오는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주전골은 왼편에 보이는 현수교(懸垂橋)를 건너야 한다.



현수교를 건너면 아치(arch)형으로 생긴 나무문이 나타난다. ‘오색약수 편한 길이라는 문패를 달고 있다. 문 옆에 무장애(無障礙) 탐방로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장애인들의 통행이 가능하게끔 길을 만들어 놓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문을 통과하면서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된다. 주전골(鑄錢溪谷)으로 들어선 것이다. 주전골은 설악산국립공원 남쪽에 있는 오색약수터에서 선녀탕을 거쳐 점봉산(1,424m) 서쪽 비탈에 이르는 계곡이다. 남설악의 큰 골 가운데 가장 수려한 계곡으로 계곡미와 가을 단풍으로 유명하다. 골이 깊어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며 고래바위와 상투바위, 새눈바위, 여심바위, 부부바위, 선녀탕, 용소폭포 등 곳곳에 기암괴석과 폭포가 이어져 풍광이 빼어나다. 주전골이란 이름은 용소폭포 입구에 있는 시루떡바위가 마치 엽전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론 옛날 이 계곡에서 승려를 가장한 도둑 무리들이 위조 엽전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 적힌 내용이다.



잠시 후 또 하나의 다리를 건넌다. 이번에는 아치(arch)형으로 생긴 예쁘장한 철교(鐵橋)이다. 트레킹 중에는 이런 다리를 여러 번 만나게 된다. 계곡을 따라 나있는 탐방로가 심심찮게 좌우를 오가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얘기 했듯이 탐방로는 계곡을 따라 나있다. 보통이라면 걷는 게 사납겠지만 주전골만은 예외이다. 장애인들도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고 탐방할 수 있도록 반듯하게 정비되어 있는 것이다. 들머리에 세워진 무장애 탐방로입간판을 보고 너무 자랑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반감이 들었었는데, 이제 보니 그 정도 자랑은 해도 되겠다. 아무튼 이러한 탐방로는 3.5킬로미터 구간을 데크로 잇는다. 주전골의 자연과 생태와 주전골의 명소 등을 소개하는 22개의 안내 표지판도 곳곳에 설치해 놓았다.



약수터에서 10분 남짓 진행했을까 오른편에 사찰이 하나 나타난다. 신라 말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조(開祖)인 도의(道義)가 창건했다는 성국사(城國寺)이다. 이후 성주산파(聖住山派)의 개산조(開山祖)인 무염(無染)이 이 절에서 출가했다고 전해질 뿐 절의 역사는 알려진 바 없다. 그래선지 인법당(因法堂) 1동이 전부일 정도로 절의 규모 또한 단출하다. 하지만 전해오는 얘기만은 범상치가 않다. 전설에 의하면 이 절의 후원에 한 그루의 이상한 나무가 있어 다섯 가지 색의 꽃이 피었으므로 절 이름을 오색석사(五色石寺)라 하고 지명을 오색리라 하였으며, 절 아래에 있는 약수도 오색약수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청····흑색의 오색을 정색(正色)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들 다섯 가지 색에서 절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절은 오랫동안 폐사로 방치되다가 근래에 인법당을 세우고 성국사라 이름 하여 명맥을 잇고 있다.



경내(境內)로 들어서면 돌로 만들어진 용()이 물을 내뿜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절 입구에 오색석에서 분출되는 약수가 있다고 하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아무튼 약수부터 받아 마시고 본다. 당뇨와 위장병, 이뇨, 위하수, 위채, 혈압, 중풍, 위장병, 변비 등 만병에 효과가 있다는데 어찌 안 마실 수 있겠는가. 특히 고혈압 약을 상시 복용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말이다.



절간에는 국보급 문화재도 보유하고 있다. 보물 제497호로 지정된 양양오색리삼층석탑(襄陽五色里三層石塔)’이 바로 그것이다. 1971년에 복원해 놓은 높이 4.1m의 이 석탑은 5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결구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건립되었는데, 상하 2층의 기단(基壇)을 형성하고 그 위에 탑신부(塔身部)를 놓았으며 탑 꼭대기에 상륜부(相輪部)를 장식하였던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조탑(造塔) 양식을 보이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부터 텅 비어있다. 다만 3층옥개석 정상면에 지름 7, 깊이 4.5의 둥근 찰주공이 있을 뿐이다. 오래되다 보니 유실되었나 보다.



절간을 나서자 헌걸찬 암릉이 선을 뵈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아직은 탐방로 주변의 울창한 숲에 가려 그 위용을 반 밖에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국사를 나선지 5~6분쯤 지났을까 독주암교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다리를 만난다. 주전골이 자랑하는 명물인 독주암을 조망할 수 있는 다리인 모양이다.



다리에 올라서면 독주암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혼자만 올라 비경을 즐길 수 있다는 기기묘묘한 바위가 계곡의 한편에 우뚝 서서 우람한 자태를 한껏 자랑하고 있다. 저렇게 거대한 바위가 맨 위는 한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좁다니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홀로 독()’자에 자리 좌()’를 써서 독좌암(獨坐岩)’이라 불러오다가 언젠가부터 독주암으로 바뀌었단다.




독주암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눈의 호사(豪奢)가 시작된다. 설악산은 바위가 많아 수려하지만 험한 산이다. 그러나 오색에서 만나는 남설악은 다르다. 바위들이 계곡 양옆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흡사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다.




독주암에서 10분 남짓이면 이번에는 선녀탕을 만난다. 암반(巖盤) 위를 흐르던 맑은 물길이 아담한 물웅덩이, 즉 소()를 만들고 있다.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이 목욕탕으로 보였나 보다. 선녀탕이라는 이름을 떡하니 붙여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아무튼 이곳에는 전설이 하나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달이 밝은 밤이면 선녀(仙女)들이 내려왔단다. 그리고 반석 위에다 날개옷을 벗어 놓고 목욕을 즐기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이 큰 선녀들이었나 보다. 이 골짜기에 본거지를 두었다는 도둑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느긋하게 걷다가 성급하게 물든 한 그루 단풍을 만난다. 이제 막 정상에서 첫 단풍이 시작됐으니 주전골의 단풍은 아직 열흘쯤 더 기다려야 한다. 한데도 성미 급한 단풍나무 한 그루가 온통 선명한 붉은빛의 단풍을 매달고 있다. 지난여름 가뭄과 폭염이 길었던 탓인지 단풍잎이 좀 마른 듯했지만 붉은색만큼은 고왔다. 이 정도라면 올해 설악의 단풍도 기대할 만 하겠다.



이번에는 전망대교라는 이름표를 단 다리를 건넌다. 다리 이름으로 보아 조망(眺望)이 뛰어난 다리인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의 위는 트레킹 코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전망대였다. 언젠가 중국의 장가계를 다녀온 일이 있었다. 원가계와 양가계를 함께 둘러봤음은 물론이다. 당시 빼어난 경관에 놀란 난 열린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하긴 2010년 제67회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그리고 제82회 아카데미에서는 촬영상과 미술상, 시각효과상 등을 수상한바 있는 아바타(Avartar)의 촬영지였을 정도이니 더 말하면 뭣하겠는가. 그런데 당시 보았던 절경(絶景)이 또 다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 규모만 조금 작을 뿐이지 갖고 있는 기괴한 아름다움은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걷는 속도가 자꾸만 더뎌진다. 인파들 때문에 속도를 낼 수가 없는 것이 그 원인이지만, 주변의 경관에 정신이 팔려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것도 또 다른 원인일 것이다. 그만큼 주변의 풍광이 빼어나다는 얘기이다.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진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서 기암절벽(奇巖絶壁)이 반기고, 기암을 돌아서면 맑은 물을 가득 저장한 연못이 나타난다. 그 가장자리에 있는 단풍나무들이 불긋불긋한 색동옷이라도 갈아입었더라면 더욱 환상적이었겠지만 그러지 못한 게 조금은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설악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선녀탕에서 15분 정도 걸었을까 금강문(金剛門)이 나온다.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맞물리면서 ()’자 모양, 아니 왼편 바위가 더 크니 ()’자 모양이라고 해야겠다. 하여튼 두 바위가 맞물리면서 직삼각형 모양의 문()을 만들고 있다. 겨우 한 사람이 비집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다. 문의 앞에는 금강문에 대한 해설을 적어 놓았다. 불교에서 금강석처럼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부처의 지혜를 배우고자 들어가는 문을 금강문이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잡귀(雜鬼)가 미치지 못하는 강한 수호신이 지키는 문이라고 첨언을 했다.



탐방로는 계곡을 끼고 나있다. 하지만 바닥으로 난 것은 아니다. 계곡 사면(斜面)의 허리를 잇대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아니 바위 위에다 다리를 놓았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저런 길을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아마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아니었더라면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중국여행을 하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탐방로를 보면서 심심찮게 감탄을 했었다. 이곳 주전골의 탐방로도 그에 뒤지지 않는 것 같다.



계곡 좌우로 기암절벽이 우뚝 솟아 병풍처럼 이어져 있는데, 마치 계곡이 오랜 세월 동안 거친 암반을 깎아내며 물이 흘러내린 듯 계곡의 암반과 기암절벽이 어우러진 경관이 독특하다. 거대한 암석이 차례차례 포개지며 그 사이로 물줄기를 쏟아내는 풍경도 압권이다. 한마디로 비경(秘境) 그 자체이다.




금강문에서 조금만 더 진행하면 용소삼거리가 나온다. 등선대를 거쳐 흘림골로 이어지는 탐방로가 이곳에서 나뉜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고, 계곡이 깊으면 안개가 잦은 법. 흘림골은 늘 안개가 끼고 날씨가 흐린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자연휴식년제로 묶인 지 20년 만인 지난 2004년에 개방됐다. 이 구간에는 등선대와 여심폭포라는 명소가 있다. 신선이 날아올랐다는 등선대는 시야가 확 트인 전망대이다. 기암절벽으로 무장한 칠형제봉과 장엄하게 펼쳐지는 설악산의 서북 능선이 잘 조망되는 곳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흘림골의 명소는 20m나 되는 기암절벽에서 떨어지는 여심폭포(女深瀑布)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생김새부터 특이한 이 폭포는 한때 폭포수를 떠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알려지면서 신혼부부가 많이 찾던 명소이기도 했다. 어쩌면 여성의 음부(陰部)를 닮은 폭포의 생김새가 그런 속설을 낳았지 않나 싶다.



흘림골 입구는 꽉 막혀있다. 725일부로 막았다는데, 지난해 8월에 일어났던 흘림골 탐방로의 낙석사고(사망 1명에 부상이 2)가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별도의 안전성 평가를 마친 후에야 다시 열겠다니 그 기한을 장담할 수는 없겠다. 언젠가 망경대 개방(開放)’흘림골의 폐쇄(閉鎖)’와 맞바꾼 것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단풍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주전골 계곡의 단점은 그 길이가 짧다는 것이다. 이런 아쉬움은 계곡이 온통 붉게 물들 때면 더욱 짙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존의 주전골에다 흘림골 구간을 보탬으로서 그 아쉬움을 달래 왔다. 흘림골이 막혀버린 올해는 그 부족한 부분을 망경대 코스로 대신해 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하나를 잃게 된 대신에 다른 하나를 얻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또 하나, 지금으로써는 실낱같긴 하지만 흘림골이 다시 열릴 것이란 기대와 희망을 가져본다.




드디어 단풍을 만난다. 어쩌다 한 그루씩 나타나던 단풍이 흘림골 갈림길부근에서는 제법 무리를 짓고 있는 것이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이란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있다. ‘온 산에 단풍이 들어 붉게 물든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오늘 찾은 주전골은 단풍으로 유명세를 탄 계곡이다. 때문에 난 만산홍엽을 기대하면서 주전골을 찾아왔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붉음 정도로는 내가 기대했던 만산홍엽에는 근접조차 할 수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난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한다. 무릇 행복이란 작은 만족에서부터 찾아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만족을 하고 나니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이 한없이 아름다워진다. 행복이 별거던가. 현실에 만족하면 그게 바로 행복인 것을 말이다. 행복에 겨워하다가 문득 김영랑 시인의 오매 단풍 들것네라는 시구(詩句)를 떠올린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이 얼마나 감성적인 표현인가.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보는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은 각기 다른 모양이다. 그리고 난 김영랑시인의 감성에 한참을 못 미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용소삼거리근처에서 기괴하게 생긴 바위를 만난다. 절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흡사 무엇인가를 쌓아 올린 것 같다. 혹시 동전을 쌓아올린 듯한 모양으로 생겼다는 그 주전(鑄錢)바위일지도 모르겠다. 시루떡을 쌓아 놓은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시루떡바위라고도 불린다는 그 바위 말이다. 아무튼 저런 현상은 암석의 절리(節理, joint)라고 한다. 암석에 외력(外力)이 가해져서 생긴 틈이다. 참고로 절리에는 구상절리, 판상절리, 주상절리 등이 있는데 주전바위는 판상절리의 한 형태라고 한다.



삼거리에서 주전골 탐방로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용소폭포(龍沼瀑布)는 지척이다. 삼거리를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또 다른 현수교(懸垂橋)를 건너면 반대쪽이 막혀 있는 다리가 하나 나온다. 끝이 막혀있다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들어가 볼 일이다. 용소폭포를 조망(眺望)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다리 전망대이기 때문이다.




다리에 서면 용소폭포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폭포는 붉은빛을 띠는 높이 10m의 부드러운 암반 위를 하얀 계곡물이 미끄러지며 우렁찬 소리를 뱉어내고 있다. 이곳에도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천년 묵은 이무기 두 마리가 용이 돼 승천(昇天)하려 하다가 수놈만 승천하고 암놈은 미처 준비가 안 돼 이곳에서 굳어져 바위와 폭포가 됐다는 것이다.



상부에서 바라본 용소폭포, 7m 깊이의 소()는 옥색 물빛을 자랑하고 있다. 버들개와 날도래, 가재 등의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1급수라고 한다.



용소폭포에서 조금 더 오르자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보인다. 다정하면서 행복에 겨운 모습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앉아 있는 주변 풍경이 더욱 시선을 끈다. 바닥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그 물빛이 어쩐지 눈에 익다. 지난달에 다녀온 구채구에서 만난 호수의 물빛, 즉 옥색(玉色)인 것이다. 황룡의 작은 연못에서 저 물빛을 본 나는 하마터면 눈물까지 흘릴 뻔 했다. 그 정도로 감동스러웠던 것이다. 그런 감동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니 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전골 입구를 출발해 1시간여 만에 용소폭포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다. 이젠 새로 개방된 망경대 둘레길 탐방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차례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과 부닥치고 만다. 탐방지원센터 앞에 천 명도 훨씬 넘는 사람들이 붐비고 있는 것이다. 하나 같이 망경대 둘레길의 입장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현장통제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인데 20여 명씩 나누어 시차(時差)를 두고 입장을 시키고 있단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줄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거기다 줄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까지 있다 보니 관리가 잘될 리가 없다. 극심한 정체현상이 혼란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왕에 왔으니 망경대를 올라보기로 한다. 그리고 늘어선 줄의 맨 뒤로 향한다. 그리고 족히 200m는 더 뒤로 가서 줄지어 선다. ‘까짓 두 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되겠지 뭐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다. 도대체 줄이 줄어들지를 모르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한두 사람이라면 이해라도 하겠다. 20~30명씩 몰려온 단체관광객들이 미안스러운 기색도 없이 비집고 들어온다. 줄을 서있던 기존의 사람들이 나무라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들은 채도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결국에 난 줄을 빠져나오고야 만다. 더 이상 그 혼탁 속에 내 심신을 맡길만한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전골을 따라 되돌아 나오면서 오늘의 트레킹을 마감한다.


에필로그(epilogue), 여행이 취미인 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자주 나가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들렀던 나라도 꽤나 많을 것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끔은 무질서를 만나기도 한다. 특히 중국에 들렀을 때 그런 경우를 가끔 접한다. 늘어서있는 줄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말이다. 그들을 보면서 난 질서를 잘 지키는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했었다. 하지만 오늘부로 그런 생각은 지워야 할 것 같다. 아귀(餓鬼)처럼 덤벼드는 저 아줌마 부대들은 중국에서 보았던 그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날 더욱 비참하게 만든 것은 세상이 다 그런 거라며 앞에서 아줌마들을 부추기고 있는 한두 명의 몰지각한 아저씨들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대장부(大丈夫)인데, 그깟 혼란을 빌미삼아 소영웅주의(小英雄主義)를 내세워서야 되겠는가.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있다. 낯이 두꺼워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는 뜻으로, 중국의 하나라 계() 임금의 아들 태강이 정치를 돌보지 않고 사냥만하다가 끝내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그의 다섯 형제들이 나라를 망친 형을 원망하며 번갈아가면서 노래를 부른데서 유래한 고사성어(故事成語)이다. 그중 막내가 부른 노래에 만백성들은 우리를 원수라 하니 우린 장차 누굴 의지할꼬. 답답하고 서글프다. 이 마음, 낯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워지구나(萬姓仇予, 予將疇依. 鬱陶乎予心, 顔厚有)’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후안(厚顔)에다 무치(無恥) 를 더하여 후안무치(厚顔無恥) 라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이다. 나들이를 끝내면서 오늘을 되돌아본다. 오늘의 혼란 속에서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렸던 것이 과연 내 잘못이었을까를 말이다.

남양주 다산길 1코스 일부와 2코스

 

여행일 : ‘16. 10. 1()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 일대

트레킹코스 : 운길산역북한강 자전거길True us Cafe일반도로2코스 만남다산유적지일반도로능내리자전거길팔당댐팔당역(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집사람과 함께

 

특징 : 다산길은 남양주 판 올레길이다. 즉 남양주시에서 만들어 놓은 둘레길이라는 말이다. 남양주는 전체 면적의 70%가 산림(山林)이다. 그렇다고 산만 있는 게 아니다. 물길이 있다. 북한강이 남양주를 따라 흘러와 두물머리(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만나 마침내 한강이 된다. 이러한 특수한 지리적 여건을 살려 만들어 놓은 둘레길이 바로 다산길인 것이다. 또한 남양주는 조선말의 위대한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화(1801)에 연루되었던 다산은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 등 500여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가 태어났고 자라면서 학문을 닦았던 곳이 바로 남양주인 것이다. 그런 인연을 살려 둘레길에다 다산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남양주시의 전역에 걸쳐 169.3를 조성했는데 총 13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길은 정약용의 생가(生家)와 묘()가 있는 능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한강나루길(1코스)과 다산길(2코스), 새소리명당길(3코스) 3개의 길이 이곳을 걸쳐간다. 오늘은 운길산역에서 팔당역까지를 걸어보려 한다. 1코스((한강 삼패지구에서 팔당역~능내역을 거쳐 운길산역에 이르는 16.7구간)2/3를 걷게 되는데, 여기에다 2코스(3.4)의 일부(다산유적지) 구간을 포함시킬 계획이다. 한강이 넘실거리는 강변을 따라 걷는 코스로 다산길이 열리기 전부터 걷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자주 찾던 길이다.


 

트레킹의 시작은 경의중앙선 전철 운길산역(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

타고 간 승용차를 팔당역 공용주차장에다 파킹한 뒤 중앙선 전철을 이용해 운길산역까지 온다. 오늘은 두 역의 사이를 걸어볼 계획이기 때문이다. 주차 요금은 7천원, 저녁 6시 이전까지만 오면 된단다. 아무튼 느긋하게 걸어도 될 만큼 충분한 시간이다. 역사(驛舍)를 빠져나와 북한강 방향으로 향한다. ‘다산길에 대한 안내판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산길이 제법 지명도가 있는 둘레길로 알고 있었기에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는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게 상책이다. 마침 남양주 한강걷기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진행을 도우러 나온 모범운전자 아저씨들에게 들머리를 물어본다. 하지만 다들 모르겠단다. 하긴 이곳 주민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마저 다산길이라는 이름 자체를 모르는데, 더 이상 따져 무얼 하겠는가. 그저 가다보면 만나겠거니 하고 북한강 방향으로 나아갈 따름이다.




강변으로 향하는데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명함 하나를 건네준다. 장어구이 식당의 홍보용 명함이다. 직접 기른 장어를 넉넉히 줄 테니까 일단 들러보란다. 장어구이를 주 메뉴(menu)로 내걸고 있는 식당들이 많은 걸로 보아 이 근처가 장어구이 전문 식당가가 아닐까 싶다. 잠시 후 45번 국도(북한강로)를 가로지르자 자전거도로가 나오고 곧이어 북한강변에 다다른다. 너른 것이 거의 호수(湖水) 수준이다. 하긴 이곳이 팔당댐의 수역(水域)일 테니 호수가 맞다. 건너편 강변에 몽골텐트가 즐비하다. 길가에 걸려 있던 현수막의 남양주 한강걷기 페스티벌이 저곳에서 열리는가 보다.



강변에는 갈대밭이 널따랗게 분포되어 있다. 하얀 꽃들이 바람결에 일렁이고 있는 것이 가을은 이미 우리 곁에 깊숙이 다가와 있었나 보다. 가을의 전령사(傳令使)라는 별칭(別稱)까지 갖고 있는 갈대가 저리도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일단은 자전거 도로로 올라서고 본다. 그리고 제대로 올라왔음을 알아차린다. 2차선으로 이루어진 자전거길외에도 별도의 보행로(步行路)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된다. 마침 팔당대교로 가는 방향임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만일 방향 잡기가 어려울 때에는 오가는 자전거 라이더(rider )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다산길에는 볼거리만 있는 게 아니다. 읽을거리도 풍성하다. 길가에다 이야기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수종사한음 이덕형의 별서터’, ‘마재마을등 주변 명소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적어 놓은 것이 전형적인 스토리텔링(story telling)’ 형식이다. ‘글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 전달하는 형식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탐방로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조류(鳥類)’들의 특징을 설명해 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어린이들의 현장교육용으로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 트레킹에서 처음으로 이정표(다산길 1코스 한강나루길 : 시점, 한강삼패지구 16.1Km/ 종점, 운길산역 0.6Km)를 만난다. 이정표의 방향 표시로 보아 이곳에서 운길산역으로 연결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아까 운길산역의 어디쯤엔가 들머리가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분명 그곳에도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을 것이고 말이다. 자세히 찾아보지 않은 덕분에 빙 둘러서 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하긴 그 덕분에 북한강의 풍경과 갈대밭을 눈에 담는 호사(豪奢)를 누리게 되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제부터 다산길북한강 자전거길을 따른다.



곧게 뻗은 아스팔트길은 자칫 지루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강 자전거길은 그런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만한 조그만 틈도 주지 않는다. 다리가 아플만하면 어김없이 쉼터가 나타나고, 목이라도 축여볼까 하는 생각이라도 들라치면 저만큼에 간이 카페가 보인다. 가족단위의 나들이에 안성맞춤이지 않나 싶다.




곁을 스쳐가는 자전거들은 다양하다. ‘로드 바이크(Road Bike)’가 대부분이지만 'MTB(산악자전거)'와 하이브리드 사이클(Hybrid bicycle : 로드바이크에 MTB를 합친 것), 미니벨로 사이클(Minivelo bicycle : 일반적으로 바퀴의 둘레가 20인치 이하인 작은 자전거) 등도 보인다. 하나의 자전거에 페달이 두 개인 ‘2인용 자전거와 어린이용 자전거도 눈에 띄는 건 물론이다. 그 많은 자전거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유모차를 매달은 자전거이다. 아마 젖먹이까지 데리고 나올 정도로 깊은 가족사랑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쩌다가 그 속에 들어앉은 강아지를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말이다.



트레킹을 시작하고 50분 남짓 걸었을까 이번에는 음료수 자판기까지 갖춘 쉼터가 나타난다. 식탁도 두어 개를 놓아 둔 것이 아예 푹 쉬었다 가라는 모양이다.



장맛비라는 다산(茶山)선생의 시문집에 실려 있는 시를 적어 놓은 시판(詩板)’도 보인다. 조금 전에 만났던 쉼터에 유배지의 여덟 취미 중에서라는 시판이 걸려있었던 걸로 보아, ‘다산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각종 시설물들을 꾸며놓은 모양이다. 아무튼 뭔가 가슴에 담아갈 것 까지 염두에 둔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순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쉼터에는 망원경까지 설치해 놓았다. 주변 풍경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이 예사롭지 않다. 리아스식(rias) 호안(湖岸)을 낀 호수가 주변의 울창한 숲과 어우러지면서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조금 있으면 가을이 온다. 그때 저 풍경화는 또 다른 덧칠을 하게 될 것이다. 수채화 같은 가을 풍경의 주인공인 단풍이 초록빛에서 시작해 서서히 붉어지다가 마침내는 새빨간 아기 볼처럼 변할 것이다. 그런 풍경은 또 다른 풍경화로 변해 우리 눈앞에 나타날 것이고 말이다.



이 쉼터 근처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다산유적지로 가는 길이 이 부근에서 나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정표 등 이곳이 갈림길이라는 표시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눈치로 찾아갈 수밖에 없을 듯 싶다. 다만 오른편으로 보이는 본래의 용도를 다한 녹슨 철로(鐵路)‘True us'라는 카페(Cafe)를 기준으로 삼을 수는 있겠다. 그리고 자동차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세워진 조안1리 비선골마을안내도를 참조해도 될 일이고 말이다.



이제부터는 자동차도로를 따른다. 오른편 방향이다. 도로 가장자리에 데크산책로를 만들어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저 여유롭게 걷기만 하면 될 일이다. 참고로 이곳에서 반대방향으로 조금 나가다가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능내역이 나온다. 지금은 비록 폐역(廢驛)으로 남아있지만 누군가에는 그리움으로 또 누군가에는 행복한 추억으로 가슴에 남아있는 곳이니 한번쯤 들러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난 사전지식이 부족했던 관계로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삼거리를 만난다. 이곳에 다산길 2코스 이정표’(종점, 다산유적지 0.6Km/ 시점 0.7Km)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갈 경우 다산길의 시점이 나오는 모양이다. 이정표의 하단에 표기된 성당 가는 길의 방향표시가 시점을 가리키고 있는 걸로 보아, 2코스의 시점은 천주교 마재성지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참고로 마재성지는 정약용 형제가 천주교를 접했던 곳이다. 또 모진 박해와 탄압 속에서도 정약종이 가솔을 데리고 살기도 했다. 천주교 성지(聖地)들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편이지만 창의적으로 디자인된 십자가 등의 성물(聖物)들이 볼만하다고 알려져 있다.





자전거길을 벗어난 지 15분쯤 지나면 저만큼에 다산 유적지가 나타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선생의 생가(生家)와 묘(), 그리고 그의 기념관 등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선생의 자는 미용(美庸), 그리고 호는 다산(茶山) 또는 사암(俟菴), 여유당(與猶堂), 채산(菜山).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등을 쓴다.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유적지 관람은 다산문화관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산(茶山)은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그런 그의 삶을 그리고 그의 사상을 담은 작품들과 함께 진열해 놓은 곳이 문화관이다.






문화관을 빠져 나오면 이번에는 다산 기념관이 길손을 맞는다. 이곳도 역시 선생의 삶과 그의 사상을 알리고자 하는 공간이다. 그러다보니 그가 발명해서 수원 화성의 축성과정에서 사용했다는 기중기(起重機)의 실물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 외에는 조금 전에 들렀던 문화원과 별반 다른 게 없다.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두 개를 합쳐서 더 조리 있고 광범위 하게 진열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참고로 선생은 남인 가문 출신이다. 18세기 후반의 당쟁(黨爭)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로부터 소외되었던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들은 기존의 통치방식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는 성리설과는 달리 선진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학문적 경향을 근기학파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정약용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고, 소시적부터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양근(楊根 :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땅 일대는 뒷날의 연구자들로부터 실학자로 불리게 된 일군의 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이었다. 그의 친인척들도 이곳의 학풍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기념관을 빠져나오면 저만큼이 선생의 동상(銅像)이 보인다. 그의 실물을 얼마만큼 반영했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단아한 모습이다. 선생이 지은 목민심서(牧民心書), 고을의 수령들이 지켜야 할 지침(指針)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이다. 그리고 내가 공직생활을 해오면서 항상 머리맡에 두고 살았던 책이다. 그 책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그려봤던 선생의 모습을 저 동상이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동상의 뒤에 보이는 언덕을 오르면 선생의 묘()가 나타난다. 다산 선생과 부인인 풍산 홍씨를 함께 모셨다. 그런데 홍씨 부인의 봉직(封爵)숙부인(淑夫人)’으로 적혀있다. 이는 선생의 벼슬이 정삼품(正三品)에 그쳤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이다. 그의 높은 지명도는 차지하고라도, 정조대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그이기에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선생은 자찬묘지명에서 '이 무덤은 열수 정약용의 묘이다'라고 했다. 열수(洌水)는 한강의 옛 이름으로, 능내리에서 태어난 다산은 한강을 무척이나 사랑해 자신의 호로 '열수'를 자주 사용했다.



묘에서 내려오면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이다. 1799, 38세 되던 해에 다산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병조 참지, 형조 참의 등의 벼슬을 지내고 있었으나 반대파들은 다산을 가만두지 않았다. 천주교 신자인 다산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었다. 특히 그 무렵 천주교 탄압을 적극적으로 막아주던 영의정 채제공이 죽은 뒤여서 반대파의 공격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다산은 결국 무고(誣告)를 반박하는 자명소(自明疏)를 정조에게 바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정조도 말리다 못해 허락하였다. 이듬해 1800년 봄, 다산은 가족을 데리고 고향 마현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사는 집의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불렀다. '여유'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인데, 겨울에 살얼음 위를 걷듯이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매사에 조심하라는 뜻이다. 다산은 그 당호를 자신의 호로 삼을 만큼 '여유'라는 말뜻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삶이 잘 반영된 이름이 아닐까 싶다. 





유적지 안에는 곳곳에다 벤치와 의자들을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민속놀이인 투호(投壺)도 만들어 놓았다. 항아리에다 화살()을 던지는 놀이인데, 우리나라에는 당나라 때 들어왔고, 서울의 양반가정이나 궁중에서 하던 놀이이다. 투호의 옆에는 열십()자로 만들어진 나무 판()도 보인다. 아마도 곤장(棍杖)을 맞을 때 엎드리던 판인 모양이다. 준비된 3개의 투호를 던져서 하나도 못 넣을 경우 곤장을 맞게 된다는 내 말에도 집사람의 표정은 시큰둥하다. 아마 거짓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물론 그녀의 짐작이 옳았지만 말이다.



생가를 빠져나오면 실학박물관이 기다린다. 그리고 그 주위는 꽤나 많은 음식점들이 둘러싸고 있다. 이 두 곳은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실학이야기가 가득한 곳이라지만 평소부터 역사에 취미가 있었던 나이기에 꼭 들어가 보지 않아도 그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준비해온 간식으로 이미 요기를 때운지라 음식점에도 들러볼 일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대신 길가에 세워진 각종 시설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수원성을 쌓을 때 사용했던 실물크기의 기중기도 보고, 다산의 글을 새겨놓은 석판(石板)도 살펴본다.




유적지를 빠져나오면 연꽃방죽이 길손을 맞는다. 여름철 내내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했을 연꽃들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갈색치마를 연상케 하는 씨방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완연한 가을 풍경이다.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는 창포가 가득 들어차 있다. ‘다산 생태공원이 이곳인 모양이다. 이곳에서 길 찾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산길에 대한 이정표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길 찾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산책로 용 이정표‘(토끼섬 1.5Km/ 산책로시작점, 2주차장 1Km)연꽃체험마을안내판만이 눈에 띌 따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산길 2코스는 토끼섬 방향이다. 토끼섬을 거쳐 능내리에서 1코스인 자전거길과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우린 그러지를 못했다. 길을 잘못 들어 고생하는 것이 두려워 도로를 따라 나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볼거리가 거의 없는 삭막한 길을 한참동안이나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가을꽃인 들국화나 남의 집 뜨락에 조성해 놓은 조각상을 기웃거리는 게 다인 그런 길을 따라서 말이다.



다산유적지에서 20분 정도를 걸으니 이정표가 보인다.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다산길의 이정표(시점 0.2Km/ 종점, 다산유적지 1.9Km)이다. 이정표와 겹쳐서 세워놓은 능내1리 연꽃 체험마을의 안내도를 비교해보면 2코스는 이곳에서 토끼섬을 거쳐 다산유적지로 연결된다. 결과적으로 우린 둘레길이 아닌 일반 도로를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이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는 2코스의 특징을 들어 호숫길부터 숲길, 시골마을길, 야트막한 산길이 이어지는 다이내믹한 경관이라고 했다.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우린 그런 아름다운 경관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는 분명 내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여행을 나서기 전에 그날 걸어야 할 코스를 미리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내판이나 이정표를 제대로 세워놓지 않은 지자체도 그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날 걸어야할 길을 미리부터 파악하고 길을 나설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다산유적지 방향으로 비닐하우스 모양의 터널을 만들어 놓았다. 머루로 생각되는 넝쿨식물로 둘러싸인 것이 제법 운치가 있어 보인다. 연꽃마을에 대한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 공을 들여 가꾼 흔적도 역력하다. 아무튼 터널로 들어서본다. 다이내믹한 경관을 선사한다고 알려진 둘레길을 조금이라도 걸어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까지 여유롭지가 못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팔당 호변 소내나루터에 정박되어 있다는 황포돛배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조선시대 포구의 분위기를 자아낸다는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다시 자전거길을 따른다. 어쩌면 이 길은 다산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둘레길의 지명도에 비해 너무나 삭막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한강을 왼편에 끼고 이어지다 보니 주변에 펼쳐지는 풍경들은 아름다운 편이다. 하지만 지금 걷는 길은 둘레길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스팔트길이다. 걷는 게 그다지 편하지만은 않기에 삭막하다는 표현을 써봤다.



가을 햇빛 아래 비늘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는 호수는 가없는 바다와 같다. 밤낮의 일교차(日較差)가 만들어 놓은 물안개 탓인지 몰라도 모든 풍경이 실루엣으로 처리되고 있다. 아니 지금은 안개가 생길 시간이 아니니 연무(煙霧) 탓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풍경들이 신비감을 더해준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누군가는 세속을 벗어난 이상향(理想鄕)을 일러 상그릴라(shangrila)’라고 했다.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그곳 말이다. 혹시 저런 풍경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산길을 일러 극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호반의 길이라고 말하나 보다.



길은 무척 위험스럽기까지 하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자전거들 중 일부가 사람들이 다니는 보행로(步行路)까지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앞에 이르러서는 다시 자전거길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보행자들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달려오는 사람들도 있다. 이중 대부분은 여자들이다. 어쩌면 자전거의 진로를 자유자재로 옮길만한 능력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의 행동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런 능력을 갖추고 난 다음에 자전거를 몰고 나오면 어떨까 싶다. 그래야만 불시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끼섬 갈림길에서 30분쯤 걸었을까 터널 내에서는 선글라스를 벗으세요.’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이어서 공원처럼 잘 가꾸어 놓은 호반(湖畔) 시설을 지났다 싶으면 저만큼에 터널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영락없는 열차(列車)의 터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자전거길은 폐() 철로를 이용해서 만들었다고 들었던 것 같다.



터널도 역시 오가는 자전거길 외에 왼편에다 보행로를 하나 더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터널 밖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길과 길 사이의 경계선(境界線)을 노란색으로 칠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절대로 넘어가지 말라는 메시지(message)가 분명하다. 하긴 이 정도의 조명(照明) 아래에서는 사물의 분간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자전거의 빠른 속도를 감안할 때에는 더욱 어렵지 않겠는가.



터널을 빠져나오면 팔당댐의 하단이다. 이제부터는 한강을 구경하면서 걷는다고 보면 된다. 강 건너에 검단산이 우뚝하지만 가을 햇빛에 가려 나타나지 않고 있다. 참고로 팔당댐은 검단산과 예봉산이 마주하는 협곡(峽谷)에 만들어 놓은 다목적 댐이다. 댐은 한강의 물길을 막아섰고, 그 댐에 갇힌 거대한 팔당호는 남한강의 양평에서 북한강의 청평까지 이르기까지 바다 같은 대호(大湖)를 만들며 육지속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우려했던 사고의 현장을 보고야 만다. 서툰 사람들과 능숙한 사람들이 서로 뒤섞이다보니 유연성을 잃고 뒤엉켜 버린 것이다. 5명이나 넘어졌지만 큰 부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저 멀리 팔당대교가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미사신도시가 아스라하다. 그 풍경들이 실루엣으로 처리되면서 또 다른 수묵화를 만들어 낸다. 그것도 감상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그림이다.



팔당역이 가까워지면서 달라지는 풍경이 있다. 길가에 카페의 숫자가 늘어난 것이다. 그만큼 오가는 라이더(rider)들이 많아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사고가 발생할 빈도도 높아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또 다른 사고현장이 보인다. 이번에는 119의 구급차까지 와있다. 길가에서 응급처지를 하고 있는 것이 제법 많이 다친 모양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육교(陸橋)의 아래를 지나면서 자전거길과 헤어진다. 그리고 마을안길로 들어선다. 길가에는 자전거 대여점 천지이다. 그리고 아까 오는 길에 보았던 갖가지의 자전거들이 길게 진열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많은 라이더(rider)들이 이곳에서 자전거를 빌려 탔던 모양이다. 터널에서 이곳까지는 40분이 걸렸다.



트레킹의 날머리는 중앙선전철 팔당역

마을길로 들어섰다 싶은데, 그새를 못 참고 길은 또 다시 도로로 내려선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전거길이 아니다. 일반도로의 옆으로 난 인도(人道)를 따라 걷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더 걸으면 팔당역이 나타나면서 오늘의 트레킹은 종료된다. 오늘 트레킹은 총 5시간40분이 걸렸다. 하지만 다산유적지에서 1시간40분 정도를 머물렀으니 실제로 걸은 시간은 4시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에필로그(epilogue), 다산길 13개의 코스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져 있다. 1코스 한강나루길’(한강 삼패지구에서 팔당역~능내역을 거쳐 운길산역에 이르는 16.7구간). 2코스 다산길’(다산유적지가 있는 마재마을에 이르는 3.4구간. 상팔당에서 1코스와 만나 조안면 능내리까지 겹친다. 남양주역사발물관과 경기도 실학박물관, 연꽃체험마을 등이 있다), 3코스 새소리명당길’(마재마을에서 폐철로~조안리를 거쳐 운길산역에 이르는 7.5구간), 4코스 운길산의 옛 이름인 큰사랑산길’(도심역에서 고대농장~새재고개~세정사~임도를 거쳐 운길산역에 이르는 15.4구간), 5코스 문안산길’(운길산역에서 이덕형(李德馨) 생가~재재기마을~문안산~문바위~금남교를 거쳐 피아노폭포에 이르는 17.3구간), 6코스 머재고개길’(피아노폭포에서 금남산~모란공원 등을 지나 소래비고개에 이르는 6.5구간), 7코스 마치고개길’(남양주시청에서 아르내미고개~백봉산~마치고개를 거쳐 남양주시 보호수로 지정된 가곡리 은행나무에 이르는 20.3구간), 8코스 물골안길“(장천교 방마고개에서 파위마을~서낭당고개~불당골~외방리를 거쳐 축령산 입구에 이르는 9.2구간), 9코스 축령산자락길‘(축령산 입구의 외방리에서 전자동 두몽안계곡을 건너 서리산의 허리를 끼고 돌아 몽골문화촌에 이르는 10.1구간), 10코스거문고길‘(몽골문화촌에서 비금계곡(秘琴溪谷)을 올라 주금산에서 철마산으로 이어지는 고개를 넘어 조선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묘소가 있는 광릉내에 이르는 12.4구간), 11코스 수목원길‘(광릉내에서 하천길~47번 국도~진접중~무시골~천겸산~순강원을 거쳐 내각리의 대궐터에 이르는 11.6구간), 12코스 옛성산길‘(대궐터에서 안골~잣고개~국사봉~순화궁~흥국사를 거쳐 덕릉마을에 이르는 12.6구간), 13코스 사릉길‘(사릉역에서 마치고개에 이르는 15.2구간)

                                          

변산(부안) 마실길 4코스

 

여행일 : ‘16. 4. 4()

소재지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트레킹코스 : 솔섬전북학생해양수련원상록해수욕장휴리조트전망대궁항마을불멸의 이순신 세트장해넘이공원채석강(총 거리 : 5km)

함께한 사람들 : 집사람과 함께

 

특징 : 마실은 마을을 뜻하는 사투리로 마실길은 동네 아낙들이 해거름에 이웃으로 놀러갈 때 걷던 고샅길이다. 굳이 해안선을 따라 걷는 이 길에 마실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만큼 친숙하고 정감이 가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안마실길은 여느 도보여행길과 달리 바닷길, 갯벌길, 마을길, 산길 등을 교대로 걷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버스가 다니는 해안도로로 올라설 수 있다. 하지만 마실길에서는 고도가 높은 해안도로가 보이지 않아 고즈넉한 분위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밀물 때 걸을 수 없는 바닷길 구간에는 우회로가 조성돼 있는 것도 특징. 바닷물이 빠지면 어머니의 넉넉한 품처럼 드러나는 갯벌도 부안마실길이 갖고 있는 매력이다. 참고로 변산 마실길의 해안코스는 모두 8개 코스로 나뉜다. 1코스(조개미 패총길, 새만금전시관~송포 5), 2코스(노루목 상사화길, 송포~성천 6), 3코스(적벽강 노을길, 성천~격포항 7), 4코스(해넘이 솔섬길, 격포항~솔섬 5), 5코스(모항갯벌 체험길, 솔섬~모항갯벌체험장 9), 6코스(쌍계재 아홉구비길, 모항갯벌체험장~왕포 11), 7코스(곰소 소금밭길, 왕포~곰소염전 12), 8코스(청자골 자연생태길 곰소염전~부안자연생태공원 11)이다.

 

4코스의 시작은 전북학생해양수련원(부안군 변산면 도청리)

오늘 트레킹을 시작했던 변산자연휴양림과 같다고 보면 된다. 즉 서해안고속도로 줄포 I.C에서 내려와 710번 지방도를 타고 줄포면(부안군)소재지까지 일단 온다. 이어서 23번 국도로 옮겨 부안방면으로 달리다가 영전사거리(부안군 보안면 영전리)에서 이번에는 30번 국도로 옮겨 변산반도 해안 일주도로를 타고 가다가 이번에는 수련원의 간판이 지시하는 대로 왼편으로 들어서면 되는 것이다.



솔섬을 바라보며 고민을 시작한다. 붉은 해가 솔섬을 넘어가는 길에 만들어 낸다는 용(소나무)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을 볼 것인가. 아니면 마실길 코스(4코스)를 더 답사할 것인가로 말이다. 하지만 이내 발걸음을 옮기고 만다. 모처럼 나선 마실길 밟기이니 한 코스라도 더 많이 답사해보는 것이 더 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길을 나서기 전에 다시 한 번 이정표(궁항 3.0Km/ 버스타는 곳/ 모항갯벌체험장 4.7Km)를 살펴본다. 그리고 궁항 방향으로 진행한다. 하지만 이내 다시 돌아오고 만다. 해변을 따르던 길이 수련원의 축대(築臺)를 만나면서 끊겨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 한참으로 헤매다가 수련원 직원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마실길이 수련원의 정 중앙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오른편, 즉 이정표에 버스 타는 곳이라고 표기된 방향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마실길은 학생해양수련원의 안을 통과하며 이어나간다. 학생해양수련원은 다채로운 해양 체험 활동과 알찬 수련활동을 통해 학생들에게 진취적인 기상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심어주기 위해 세운 체험학습의 장이라고 한다. 학생들이 머물 수 있는 생활관과 강의실, 강당, 체육관은 물론이고 실내수영장과 해양수산실, 해양생태실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경비실 건물이 있는 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언덕 위에 삼 층짜리 생활관이 있으니 참조한다.



생활관 건물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서면 또 다른 백사장이 펼쳐진다. 학생들이 실제로 해양수련을 하는 장소로 활용되지 않나 싶다.



4층으로 지어진 광전자연수원이 나오고 잠시 후 오른편 언덕에 지어진 하얀색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씨윈드(Sea Wind)펜션이라는데 지중해 해안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건물이라서 눈길을 끈다.



펜션 근처에서 마실길은 백사장으로 내려선다. 그리고 백사장 끄트머리에서 축대(築臺)로 오르도록 되어있다. 축대에다 페인트로 화살표시를 해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마실길은 해안가 산자락을 따라 이어진다. 왼편에는 시종일관 광활한 바다가 펼쳐진다. 먼 바다로 나가는 배들이 보인다. 아마 야간 조업이라도 나가는 모양이다. 그리고 잠시 후 바닷가 조망 좋은 곳에 지어진 정자(亭子)를 만난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주변 경관을 둘러보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그 뜻을 저버리지 못하고 정자에 오르니 학생수련원과 솔섬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런데 그 경관이 장난이 아니다. 자못 빼어나다는 얘기이다.




계속해서 해안가 산자락을 따라 걷다보면 잠시 후 언포마을에 이른다. 바닷가에 내려서니 뭔가를 위해 부지를 새롭게 조성해 놓았다. 화장실과 예술성이 있는 조형물(造形物)까지 갖춘 걸 보면 마실길을 걷는 이들을 위한 휴식공간이 아닐까 싶다. 이정표(궁항 1.8Km/ 솔섬 1.2Km) 외에 친절하게도 언포마을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까지 세워 놓았다. ‘바닷물의 자연현상으로 모래등이 갯벌을 막았다하여 ’ ‘()’’ ‘()’ 자를 써서 마을이름을 언포라고 지었다고 한다. ‘어염시초가 풍성하여 소금을 굽는 가마터에서 소금을 만들었다고 하여 염포라고 부르기도 했다니 참조할 일이다.




바닷가에는 꽤나 많은 배들이 정박해있다. 자그마한 것으로 보아 고기잡이용은 아닐 것 같고, 어쩌면 이 지역의 특산품이라는 백합을 양식할 때 사용하지 않을까 싶다.



마을 앞 해안도로를 따르다 해안이 끝나기 전에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또 다시 해안가 산자락을 따라 난 오솔길을 따른다. 바닷가 바위벼랑이 아름다운 구간이다.




잠시 후 널따란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상록해수욕장이란다. 19887월에 개장한 이 해수욕장은, 공무원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서 휴양장소로 선정 개발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주변경관이 좋고 수심이 얕으며 물이 깨끗하고 해송 및 모래사장이 좋아 해수욕장으로서의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 이곳을 상록해수욕장이라 명명한 것은 선정(善政)공무원의 표상이 상록수이기 때문이란다.



이곳은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촬영세트장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 이곳에는 왜군성(倭軍城)과 망루(望樓), 그리고 군선(軍船)의 촬영세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내판 하나만 외로울 뿐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하긴 10년 더 된(2004) 시설을 유지해 오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해안을 따라가다 중간쯤에서 음식점과 숙박시설 등 편의시설들이 밀집해 있는 마을로 빠져나온다. 물론 마실길을 따라서이다. 해수욕장과 다리 건너의 두포부락(변산면 도청리)은 다리로 연결된다. 해수욕장과 마을의 중간에 물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꽤 많은 배들이 물가에 정박해 있는 것을 보면 마을 주민들의 선착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궁항은 다리건너에서 왼편 방향이다. 방향을 틀자마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멋진 건물 하나가 나타나니 방향을 잡는데 참조하면 될 일이다. 벼랑위에 지어진 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리조트(resort)이다.



휴리조트(곁에 제이제이리조트도 있으니 참조한다)를 지나면 코너진 언덕 위에 원형의 전망대(展望臺)가 세워져 있다. 빙 돌아가며 위로 오르도록 되어 있는 3층 높이쯤 되어 보이는 전망대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이 터진다. 오른편에는 궁항마을은 물론이고 궁항의 방파제와 등대가 보이고, 왼편으로는 상록해수욕장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 사이에 서해바다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전망대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궁항(弓亢)마을이다. 궁항은 반월모양의 산에 둘러싸여 있는 마을로 100m 지점의 개섬과 해안의 거센 물결이 잔잔해진다.’도당금이 있는데 그 형상이 활과 화살촉을 흡사하게 닮았단다. 그 개섬과 마을 사이에 100m의 목이 있다하여 ()()자를 써서 궁항이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궁항에도 이정표(격포항 3.3Km/ 솔섬 3.0Km)가 보인다. 1코스 종점이라고 적혀있어 헷갈리게 만들지만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될 일이다. 격포항까지 이어지는 3.3Km1코스이면 어떻고, 설혹 4코스의 일부 구간이라고 해도 어떤 문제가 있겠는가.



궁항마을 통과하면 색깔만 다른 쌍둥이 펜션이 나타나고, 왼편 바닷가에는 전북요트학교 건물이 숨을 죽인 채로 그림처럼 앉아있다.




뒤돌아본 궁항마을 쪽 풍경



조금 더 걸으면 바닷가에 지어진 옛 건물들이 나타난다. 무턱대고 아래로 내려가 본다. 문루(門樓)를 위시해서 옛 건물들이 즐비하다. ‘전라좌수영세트장’(이정표 : 격포항 2.3Km/ 궁항 1.1Km)이란다. ‘대한민국 영상촬영의 메카, 부안이라는 현수막에 불멸의 이순신명량의 스틸(still)사진을 넣은 걸로 보아 두 드라마를 이곳에서 촬영했었나 보다.






세트장을 지나면서 마실길은 임도를 따른다. 말이 임도이지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시멘트로 포장까지 해 놓았다. 군부대(軍部隊) 입구 근처에 있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반듯하게 지어진 팔각정을 만난다. 이곳에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격포항/ 봉수대/ 이순신세트장)로 나뉜다. 오른편은 격포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봉수대로 올라가는 오솔길이다.



계속해서 임도를 따른다. 길은 언제부턴가 비포장도로로 변해있다. 길가에 핀 산벚꽃들과 휘어진 옛길이 어우러지며 멋스러움을 한껏 자랑하는 길이다. 그리고 얼마 후 길이 오른편으로 크게 휘는 지점(이정표 : 격포항 0.7Km/ 궁항 1.7Km)에서 마실길은 임도와 헤어져 왼편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선다.



이제부터 마실길은 잘 닦인 공원(公園)의 안길을 걷는 느낌으로 변한다. 운동시설과 벤치 등은 물론이고 조경까지, 신경을 써서 가꾼 흔적들이 역력하다. 흡사 도심(都心)의 공원에라도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10분 남짓 걸었을까 저만큼 아래에 격포항이 내려다보인다. 마실길 4코스가 종료되는 것이다. 격포항은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우리나라 '아름다운 어촌 100개소' 중 한곳으로, 198631, 1종항으로 승격되었으며 위도, 고군산군도, 홍도 등 서해안도서와 연계된 해상교통의 중심지다. 서해 청정해역의 감칠맛나는 수산물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봄 주꾸미 산란철과 가을 전어철에는 차를 주차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전국 각지에서 온 미식가와 관광객들로 붐빈다고 한다.



오솔길을 빠져나오는 곳에 해넘이공원이라는 빗돌이 세워져 있다. 주위를 둘러본다. 공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깔끔하게 지어진 화장실 옆에 비행기 두 대가 전시되어 있을 따름이다. 옛날에는 전차와 장갑차, 유도탄, 항공기 등 퇴역한 각종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모두 철거된 상태이다.




날머리를 빠져나오니 목제(木製)로 된 다리가 보인다. 일단 다리에 올라서고 본다. 어디선가 요트계류장으로 가는 길이라고 적은 걸 본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요트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다리만이 방파제를 향해 길게 놓여있을 따름이다. 요트는 행사 때나 찾아오는 모양이다.



대신 바닷가 풍경이 눈길을 끈다. 건너편이 채석강이건만 이쪽 해안 절벽도 그 생김새가 만만찮게 기이한 것이다. 마치 시루떡을 쌓아 놓은 듯한 형상이다. 문득 책을 쌓아 놓은 것 같다는 건너편의 채석강이 궁금해진다.



건너편에 보이는 닭이봉 아래가 채석강이다. 그리고 그 오른편은 격포항이다. 항구에는 배 몇 척이 정박해 있다. 격포는 일찍이 수군(水軍)의 요새지로서 별장이나 첨사가 주둔했었다. 조선시대에는 전라우수영 관할의 격포진이 있었다.



채석강으로 가려면 격포항을 지나야 한다. 서해안권의 대표 국가어항인 격포항은 청정해역을 품고 있어 봄 주꾸미, 가을 전어를 비롯해 갑오징어, 꽃게, 백합, 바지락 등 사시사철 다양한 수산물들을 만날 수 있는 풍요로운 항구다. 마침 수산물을 집단으로 파는 시설들을 두어 곳 만들어 놓았으니 한번쯤 들러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우리가 들른 식당은 남편이 기른 해산물을 아내가 직접 팔고 있었다. 이 식당뿐만 아니라 인근 식당이 대부분 그런 형태로 영업을 하고 있단다. 그래서 더 싱싱한 해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채석강(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3)으로 향한다. 다리를 건너면 방파제 위에 인공으로 만든 휴식공간이 나타난다. ‘격포항 종합안내변산팔경등의 관광홍보판과 함께 어항이용안전수칙등의 안전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채석강을 구경할 때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의미인 모양이다.



방파제 옆으로 난 계단을 내려가면 채석강이 모습을 드러낸다. 20m 높이의 해안절벽은 오랜 세월 동안 파도에 깎이고 부서져, 책 수십만 권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 같은 독특한 지형이 되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자연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1.5의 해안절벽인 채석강은 중생대 백악기(7천만 년 전)에 형성된 퇴적암으로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올린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수북하게 쌓아 놓은 시루떡 같다고도 한다니 보는 이의 생각에 따라서 그 형상도 달리 나타나는가 보다. 원래의 채석강(彩石江)은 강물에 배를 띄우고 놀던 중국 시인 이태백이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의 강물이다. 이태백이 놀던 채석강에 견줄 만큼 아름답다고 해서 그 이름을 차용했다고 한다. 아무튼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며 이태백처럼 술 한 잔 기울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는 나는 조금 전까지 앉아있었던 횟집에서 마신 술로 진작부터 거나하게 취해 있지만 말이다.




해식애(海蝕崖)로 이루어진 채석강(彩石江)은 바다의 수석전시장이다. 바닷물 침식에 의해 층을 이룬 절벽 아래로 편마암층이 닳고 닳아 벼루처럼 반들반들하고 닭이봉 아래의 층암절벽은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바위절벽을 움푹 파고 들어간 해식동굴에서 만나는 해넘이도 장관이란다. 하지만 이는 시간을 잘 맞추어야만 볼 수 있으니 참조한다.




이곳 채석강은 '연인과 함께 가면 사랑이 깨진다'는 오래된 속설이 있다고 한다. ‘돌 깨는 작업장인 채석장(採石場)’과 소리()가 같아서였을 것이다. ‘채석장 돌이 깨지듯 사랑이 깨진다.’고 여긴 게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70~80년대 만 해도 이곳은 사랑이 무르익었던 곳이었다. 이곳에 놀러왔던 연인들이 아름다운 경관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집으로 돌아갈 차편을 놓쳐버리기 일 수였기 때문이다. 귀가를 못한 젊은 남녀들이 따로 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상상에 맡기기로 하겠다. 하여간 그로 인해 결혼까지 간 커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파도가 일렁이는 그 절벽 앞에 서면 켜켜이 쌓인 세월과 자연의 신비감이 더해진다. 계속 나아가본다. 해안가 바닥은 끝없는 바위멍석을 깔아놓은 듯하다. 바위가 거북 등껍질처럼 갈라진 데다 높낮이 차가 있어 발 디딜 곳을 확인하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채석강의 암반지대를 지나면 격포해수욕장이다.



에필로그(epilogue), 변산에는 계절별로 주꾸미, 전어 등 다양한 해산물이 넘쳐난다. 그 가운데서도 청정갯벌에서 나온 백합과 바지락은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그 백합으로 만들어낸 백합죽은 변산이 자랑하는 최고의 음식으로 꼽힌다. 부안의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은 백합죽은 인근 식당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데, 백합 조갯살을 잘게 썰어 넣고 약간의 참기름과 깨소금만으로 간을 해 끓여내기 때문에 백합 고유의 담백한 풍미가 일품이다. 하지만 난 7~8년 전 이곳을 다녀갔던 기억을 살려 바지락을 원했다. , 회무침, 죽 등 바지락을 재료로 한 다양한 코스요리인데 엄청나게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식단을 갖고 있는 식당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식당이 어디에 있는지도 검색해보지도 않고 여행을 떠나온 내 불찰이니 어쩌겠는가. 아쉽지만 바지락칼국수로 이를 대신하고. 백합죽을 한 그릇 따로 시켜본다. 죽에 골고루 우러나온 백합의 은은한 향에 코가 먼저 반하고, 씹으면 씹을수록 쫄깃하고 진하게 퍼지는 백합의 맛에 입이 반한다. 식감 넘치는 백합 조갯살이 듬뿍 들어가 있는 백합죽을 한 수저 가득 떠서 그 위에 부안의 또 다른 명물인 젓갈을 올려 먹는 그 맛 또한 침샘을 자극한다. 참고로 백합죽은 부드럽게 씹혀 위에 부담을 주지 않아 어린 자녀나 연로한 부모님도 함께 즐길 수 있단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여행지로 변산을 꼽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