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흥산(聖興山, 260.1m) 가림성 솔바람길

 

여행일 : ‘21. 3. 29(월)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코 스 : 덕고개→구교리길 합류점→가림성길 합류점→가림성 사랑나무→성곽길→유금필장군 사당→대조사→임천면사무소(소요시간 : 약 7km/ 2시간 40분)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높이 260m의 나지막한 성흥산 산자락에 내놓은 ‘가림성 솔바람길’은 덕고개에서 시작해 한고개에서 끝나는 5km 길이의 둘레길이다. 중간에 백제시대 도성 수비의 요충지였던 ‘가림성’을 지난다고 해서 ‘가림성’이란 브랜드로 포장됐다. 이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순하게 이어진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전형적인 육산인지라 바닥도 보드라운 흙길이다. 거기다 이름 그대로 ‘소나무’가 많아서 솔가리까지 수북이 쌓여있다. 길이 아니라 흡사 양탄자 위를 걷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이다. 그런데도 탐방객들의 관심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있다고 한다. 가림성의 성벽 위에 올라앉은 ‘사랑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드라마 ‘서동요’의 촬영지로 인기를 끌면서 ‘육룡이 나르샤’, ‘호텔 델루나’ 등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단다. 잠깐 짬을 내어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가 있는 대조사도 한번쯤 들러볼 것을 권한다.

 

▼ 들머리는 덕고개(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4-6)

서천-공주고속도로 부여 IC에서 내려와 국도 29호선을 타고 서천방면으로 내려오다 군사삼거리에서 빠져나오면 임천면소재지인 ‘군사리’이다. 이어서 성홍로를 이용해 마을을 빠져나가면 오래지 않아 ‘덕고개’에 이른다. 고갯마루 조금 못미처에 있는 삼거리가 산행들머리이다. 코너에 영호추모공원과 해촌성결교회, 성불사(점집이 아닐까 싶다)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성흥산에는 다양한 걷기 코스가 나있다. 성곽길(1.55㎞), 솔바람길(4.63㎞), 대조사1·2길(1.1㎞·0.5㎞), 구교리길(0.4㎞), 가림성길(1.8㎞), 호리동길(0.8㎞), 지토리길(2.3㎞)이 성흥산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찢어지고 만난다. 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 산바람 맞으며 슬렁슬렁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 추모공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솔바람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통나무계단을 올라서면 이번에는 이정표(성흥산성 2.97㎞)가 길손을 맞는다.

▼ 산길은 한없이 곱다. 길이 널찍한데다 경사까지 거의 없다. 거기에 보드라운 흙길에는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 지자체의 노력도 엿보인다. 곳곳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는가 하면, 심심찮게 나타나는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다.

▼ 아무리 나지막한 산이라고 해도 가파른 오르막길 하나 없겠는가. 드물기는 하지만 밧줄까지 매어놓은 구간도 만나게 된다.

▼ 성흥산은 역시 산책삼아 오르는 산이다. 저렇게 원탁형의 벤치까지 놓아둔걸 보면 말이다.

▼ 이정표가 참 예쁘다. 아니 마음에 쏙 든다는 표현이 더 옳겠다. 지명과 거리는 물론이고 지도까지 매달았다. 그 지도의 위에다 지금 내가 서있는 위치까지 표시해 놓았으니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겠다.

▼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꽤 많은 무덤을 만나게 된다. 그만큼 풍수가 뛰어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맞다. 이곳 성흥산 자락에는 무덤 숫자만큼은 아니어도 꽤 많은 절간이 들어서있다. 명당을 가장 잘 꿰찬다는 게 본디 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만에 첫 번째 갈림길(이정표 : 성흥산성↑ 1.42㎞/ 대조사← 0.7㎞/ 덕고개↓ 1.65㎞)을 만났다. 왼편은 첨부된 지도의 ‘구교리 길’. 즉 대조사에서 올라오는 길일 것이다.

▼ 능선은 온통 소나무 세상이다. 찬 기운을 살짝 머금은 바람도 살랑살랑. 그래 이곳은 ‘솔바람길’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름 그대로 솔과 바람으로 가득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는 짙은 솔향기가 묻어난다. 그리고 그 향기는 일상에 지쳐있는 내 심신을 다시 깨워준다. 힘차게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라며.

▼ 두 번째는 임도(이정표 : 성흥산성↑ 0.62㎞/ 새터골→ 2.3㎞/ 덕고개↓ 2.5㎞)와 만난다. 새터골에서 올라오는 ‘지토리길’이다.

▼ 이제 솔바람길은 임도를 따른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난다. 이정표는 왼편에 대조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따가 대조사로 내려갈 때 이 길을 이용하게 되니 꼭 기억해 두자.

▼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성흥산성→ 0.42㎞/ 임천면사무소← 1.3㎞/ 대조사↓ 0.7㎞). 이번에는 임천면사무소로 연결되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이다. 참! ‘솔바람길’은 여행자들에게는 즐거운 트레킹코스가 되어주지만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운동코스란다. 그래선지 이곳 삼거리에는 작은 체육공원도 만들어져 있었다.

▼ 잠시 후 문이 닫혀있는 매점에 도착했다. 그런데 몽골텐트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자신에게 오라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다짜고짜 체온기부터 들이댄다. 맞다. 세상은 지금 패닉 상태다. ‘코로나19 팬데믹’인데 이 정도 불쾌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 너른 광장에는 꽤 많은 스틸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 성흥산성이나 사랑나무를 배경으로 촬영된 영화나 드라마를 액자 모양의 조형물로 만들어 놓았다. 지난 2006년 방영된 ‘서동요’의 촬영지로 유명해지면서 각종 예능은 물론이고 드라마 세종대왕, 신의, 육룡이 나르샤, 엽기적인 그녀 등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흥부’ 등의 촬영지로 활용되었단다. 특히 2년쯤 전인가 tvN에서 재미있게 보았던 ‘호텔 델루나’가 눈길을 끌었다.

▼ 주차장으로 여겨지는 공터 위에는 ‘충혼사(忠魂祠)’가 지어져 있었다. 백제 부흥운동 당시 나·당연합군에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들을 위해 세운 사당이란다. 맞다. 산세가 만만찮은 가림성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단숨에 정복할 엄두가 나지 않던 산성이다. 막강한 나·당연합군도 이곳을 피해 부여로 진격했으며,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왕자 풍이 이 성에 들어와 웅거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꿈은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때 스러져간 병사들의 넋을 위로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솔바람길은 이제 가림성(加林城) 구간으로 접어든다. 숲을 빽빽이 메웠던 소나무들은 사라지고, 아찔한 높이의 암벽이 앞을 막는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 가파르다싶을 뿐 길은 바위를 피해가며 위로 잘도 오른다.

▼ 절벽의 앞. 가림성(사적 제4호)의 안내판이 보이기에 집사람을 불러 세웠다. 가림성의 지도에다 설명을 덧붙인 게 전부였지만 정상석이 없는 산에서 이만한 인증물이 또 어디 있겠는가.

▼ 절벽의 위로 오르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반긴다. 바위를 뚫고 우뚝 서있는 나무는 우선 거대하다. 나이도 백 년은 족히 넘을 것 같다. 거기다 잘 생기기까지 했다. 그래선지 나무 아래에 벤치를 놓아두었다. 나무의 자태는 물론이고 빼어난 주변 풍광까지도 즐기다 가라는 모양이다.

▼ 하지만 주변 풍광은 눈에 담지 못했다. 자욱한 미세먼지가 시야를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하긴 미세먼지가 주의도 아닌 ‘경보’까지 내려진 날에 아름다운 풍경화를 기대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 몇 걸음 더 오르자 이번에는 가림성(加林城)이 얼굴을 내민다. 성벽의 위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걸터앉았다. 오늘의 주인공인 ‘사랑나무’다. 400년 전 누군가가 심었다는 높이 22m에 둘레 1.25m의 고목으로 2006년 방영되었던 SBS드라마 ‘서동요’에서 서동과 선화공주가 이 나무 밑에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그런데 다소 생경스럽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일까? 우리에게 고정관념화 되어버린 마을 어귀가 아닌 산성 꼭대기에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덕분에 먼 곳에서도 잘 보이고, 반대로 나무 옆에 서면 전망이 탁 트인다는데 말이다.

▼ 남문 터라지만 우리들 눈에 익숙한 성루나 성문은 보이지 않고 그저 성벽만 좌우로 늘어서있을 뿐이다. 성흥산성(聖興山城) 또는 가림성(加林城)으로 불리는 이 산성은 사비성 천도 이전인 서기 501년, 백제 시대에 쌓았다고 한다. 둘레 1,350m에 높이는 4m 가량 되는데 성 내부에는 우물터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남문과 동문, 서문의 문터가 확인된다고 한다. 백제의 성곽 가운데 쌓은 시기가 가장 확실해서 백제시대의 성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단다.

▼ 사랑나무 앞에 섰다. 나무는 성의 중앙이 아닌, 그렇다고 성흥산 꼭대기도 아닌, 성 안의 끝부분, 그러니까 주변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에 서있다. 나무 주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사랑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대부분 여자들이 아니면 커플이다. 그런데 줄이 좀 길다는 게 문제다. 하지만 사랑나무를 배경으로 인생샷을 건지려는데 까짓 20~30분쯤 못 기다리겠는가.

▼ 요즘 젊은이들은 사진을 조합까지 하는 모양이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눈에 띄기에 빌려온 사진인데 사진을 어떻게 합성했는지 아예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버렸다. 맞다. 누군가는 사랑나무 사진은 최소한 두 컷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두 컷 가운데 한 컷을 반전해서 편집하면 하트 모양의 와이드 컷이 완성된다면서 말이다. 그 안에 사랑하는 커플이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사랑나무’라는 별칭이 붙여진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옛날 건물이 들어서 있었음직한 널찍한 터를 지나 오른편으로 향한다.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이다. 그렇다고 성곽 위를 걷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성곽의 복원공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저 정도로 가파른 비탈이라면 별도의 성벽이 없어도 적을 막아내기에 충분했을 것 같다. 하긴 얼마나 난공불락이었으면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성이 험하고 견고해 공격하기가 어렵다’고까지 했을까.

▼ 그렇게 잠시 걷자 ‘동문지’다. 우리부부가 한참을 헤맨 곳이기도 하다. 이정표(서문↑ 0.6㎞/ 성곽길 지장골→/ 대조사↓ 1.25㎞)가 지시하는 성곽길(지장골)을 따랐더니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게 아니겠다는 생각에 되돌아가 확인해보니 ‘서문’ 방향에도 ‘성곽길’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런데 글씨의 크기가 지장골 방향보다 너무 적다. 무심코 지나쳤던 이유이다.

▼ 서문을 향해 방향을 틀자 곧이어 공사장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어수선한 현장이 나타난다. 안내판은 ‘제7차 가림성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복토가 진행 중인지라 지반이 약하니 출입을 금한단다. 가림성의 발굴조사는 아직까지 ‘진행형’인 모양이다.

▼ 이 구간도 역시 성곽 분위기는 나지 않는다. 우리들 눈에 익숙한 성벽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옛 병사들이 지나다녔음직한 길을 따라 10분 조금 넘게 걷자 ‘서문지’이다. 세 방향을 지시하는 이정표(성곽길/ 한고개/ 성곽길)는 날머리인 ‘한고개’까지 1.16㎞가 남아있다고 알려준다.

▼ 날머리인 한고개는 오른편으로 가야한다. 계속해서 성곽길을 걷고 싶다면 직진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왼편으로 향했다. 이정표에는 빠졌지만 그쪽으로 가야만 성흥산의 정상에 오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른 정상은 너른 분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운데는 평평한 것이 영락없는 건물터이고, 그 너머에는 현세에 지은 팔각장이 자리를 틀었다.

▼ 봉화제단(烽火祭壇)이 설치된 끄트머리로 나가자 눈앞이 훤해진다. 성흥산은 해발고도가 240m 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주변에 이렇다 할 높이의 산이 없다 보니 사방이 훤하게 열린다. 가림성을 쌓아올린 이유일 것이다. 발아래로 인간 지형은 물론이고, 적군의 움직임까지 한 번에 볼 수 있으니 이보다 저 좋은 방어진지가 어디 있겠는가. 맞다. 당시 이곳은 사비성과 외곽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없는 지금은 부여의 절경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자연의 전망대가 되었고 말이다.

▼ 정상에서 내려오는데 고색창연한 사당이 고개를 내민다. 유태사지묘(庾太師之廟). 고려의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그는 왕건이 태봉왕 궁예의 장수였을 때 박술희·신숭겸과 함께 의형제를 맺은 인물이다. 그런데 황해도 평주 사람인 유금필의 사당이 왜 이곳에 있을까? 그 이유는 1929년 발행된 ‘부여지’의 ‘성흥산성 실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 태조 때 유금필이 송도로 가던 도중 이 성에 올라 주민 가운데 빈궁한 자를 진휼했는데, 그 후 주민들이 은덕을 잊지 못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 아까 거론했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대조사로 향한다. 이 구간 역시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를 낮춰가는 전형적인 오솔길이다.

▼ 그렇게 잠시 내려서자 천년고찰 ‘대조사(大鳥寺)’다. 대조사는 성흥산성이 축성되고 26년 뒤인 527년 인도 유학승 겸익(謙益)이 창건한 사찰로 알려진다. 이름 그대로 이 절은 새와 관련된 창건 설화를 갖고 있다. 겸익 스님이 성홍산 큰 바위 아래에서 기도를 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관음조 한 마리가 날아와 그 바위 위에 앉더란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큰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해 있어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대조사’라 했다는 것이다. 주불전인 ‘원통보전’은 바로 그 ‘관세음보살’을 모셔놓은 불전이라고 한다. 원통보전 앞의 석탑도 사연이 있다. 1970년대 이곳에 머물던 스님들이 지붕 하나 달랑 남아있던 석탑을 보고 신도들과 함께 주변 숲을 샅샅이 뒤진 끝에 몸통을 발견했단다. 우여곡절 끝에 기도처. 아니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 원통보전 왼쪽으로 ‘불유정(佛乳井)’이란 약수터가 하나 있다. 대조사는 풍수 상 명당에 위치하면서도 좋은 물길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들은 예산 성당의 ‘장 크랭캉(Jean Crinquand)’ 신부가 대조사를 찾아와 이 약수를 찾아주었단다. 약수터 뒤로는 명부전과 산신각이 있었다. 이밖에도 범종각과 스님이 머무는 요사채도 눈에 띈다.

▼ 절간을 돌아 위로 오르면 대조사의 명물이자 보물 217호인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大鳥寺石造彌勒菩薩立像)’이 묵직하게 서있다. 하나의 돌을 다듬어 조각한 불상인데 높이가 무려 10m에 둘레도 4.8m나 된다. 미래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이 보살상은 균형미는 다소 떨어지지만 후덕하고 인자한 얼굴 표정이 인상적이다.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12세기)로 추정된다.

▼ 작은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대조사는 일주문이 없었다. 해탈문이나 천왕문도 보이지 않는다. 절간을 빠져나왔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절을 빠져나와 잠시 오르니 삼거리(이정표 : 임천면사무소← 0.7㎞/ 성흥산성→ 1.1㎞, 각시바위 50m/ 대조사↓). 이젠 산악회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임천면사무소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 이정표에 나타나있는 ‘각시바위’가 궁금해서 성흥산성 방향으로 올라가봤다. 하지만 더 이상의 표식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니 어떤 게 ‘각시바위’인지 알 수 없는 노릇. 그저 이정표에 표시된 거리(50m) 쯤에서 나타난 ‘호서제일경(湖西第一景)’이라 적힌 빗돌과 그 앞에 깔려있는 바위가 전부였다.

▼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만나게 되는 ‘산장가든’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아니 정확히는 ‘사랑나무 찻집’이다. 임천면사무소를 200m쯤 남겨놓은 지점인데 시를 적어 넣은 항아리들로 조경을 해놓은 게 여간 멋지게 보였기 때문이다.

▼ 마을로 들어서니 사당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고려 말 문신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을 모시는 영당이란다. 원래 홍산면 북촌리에 있었으나 홍산 관아터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2010년 후손들에 의해 이곳 군사리로 옮겨왔단다. 그런데 고려 삼은(三隱) 가운데 하나인 이 분의 영정이 무슨 연유로 이곳, 아니 이전에 있었다는 홍산에 있었을까? 궁금했지만 영당의 문이 굳게 닫혀있어 알아 볼 수는 없었다.

▼ 산행날머리는 임천면사무소

대조사 앞 삼거리에서 출발한지 10분 만에 날머리인 ‘임천면사무소’에 도착했다. 임천은 백제시대에는 가림군, 고려시대에는 가림현으로 불렸다. 조선 후기까지도 행정의 중심 역할을 하는 큰 고을이었다. 면사무소는 당시 관아가 있던 자리이다. 하지만 지금은 청사로 쓰이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앉았을 따름이다. 관아의 정문이던 ‘배산루’는 일제강점기에 백마강변의 부소산성으로 옮겨진 뒤 ‘사자루’로 현판을 바꿔 달았고, 임천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객사 건물도 해체돼 대조사 경내의 원통보전(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을 짓는 데 쓰였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성흥산 산행은 총 3시간이 걸렸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2시간 40분을 걸은 셈이다.

▼ 면사무소 옆에는 360년이나 묵었다는 소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자못 괴이하다. 높이는 4m에 불과하지만 가지가 옆으로 넓게 퍼져있는 것이다. 그게 흡사 온몸을 뒤틀며 가지들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 금강 자전거 길로 이동하는 도중 잠시 ‘유왕산(留王山)’에 들렀다. 백제가 패망하고 당으로 끌려가던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이 잠시 머물다 떠났다고 전해지는 산이다. 인근 망배산은 의자왕이 타고 떠나가는 배를 향해 백제 백성들이 절을 올렸다는 전설도 함께 전해진다. 정상에는 유왕정(留王亭)이란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 정자에 오르자 금강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의자왕과 귀족, 백성 등 1만 2천여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실은 배도 저 무심한 강물을 따라 내려갔을 것이다.

▼ 제단(祭壇)도 만들어 놓았다. ‘백제유민정한불망비(百濟流民情恨不忘碑)’.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과 백제 유민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유왕산 추모제’가 열린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이를 위한 장소가 아닐까 싶다. 당시 기사는 위령제는 물론이고 당군이 백제포로를 끌고 가는 모습을 재연한 15척의 포로선단 행렬, 금강변 상여놀이, 씻김굿 등 백제 유민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고 했다.

▼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서천군. 대청댐에서 출발해 군산·장항 사이 하굿둑까지 이어지는 ‘금강종주 자전거길(146km)’의 마지막 구간을 자전거가 아닌 다리로 직접 걸어보기 위해서이다. 서천군의 금강하구에 있는 조류생태전시관부터 신성리 갈대밭까지 이어지는 총 14km의 이 ‘금강하구 자전거길’은 은빛 물결이 넘실대는 금강을 배경으로 맑은 공기와 갈대밭을 누비며 힐링 할 수 있는 명소로 알려진다. 오늘 걷게 되는 구간은 이 가운데서도 맨 마지막 4㎞이다.

▼ 갈대는 신성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갈대의 굵기나 분포된 면적은 신성리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이곳에서도 넘실대는 황금물결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둑으로 막힌 금강의 아랫자락은 현재 바다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선창하나 없겠는가. 하지만 그 유명한 철새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작은 점이 모이고 흩어지고 다시 모이면서 만들어내는 군무가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공연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긴 미세먼지로 뒤덮인 산하가 온통 뿌옇기만 한데 어디서 어떻게 철새 때를 찾아내겠는가.

▼ 금강하굿둑으로 이어지는 자전거길 주변은 철새들의 세상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둔치에 널따란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탐조대는 물론이고 철새 조형물도 곳곳에 배치했다.

▼ 공원으로 단장한 갈대밭을 S자로 달리던 자전거길은 금강하굿둑과 인접한 서천조류생태전시관에서 대장정을 마친다. 금강과 서해바다의 경계인 이곳은 금강에서 폭이 가장 넓은 곳으로 가창오리를 비롯해 청둥오리, 흰빰검둥오리, 흰죽지, 알락오리, 큰고니, 개리 등 온갖 겨울철새들의 보금자리다. 조류생태전시관이 이곳에 자리한 이유이다.

▼ 조류생태전시관은 ‘금강자전거길’ 종주의 기점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이를 알리는 여러 조형물들을 철새 조형물과 함께 세워두었다. 자전거 대여소도 만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공간도 공원으로 꾸몄다. 그런데 황금물결의 갈대밭 속에 들어앉은 움막이 눈길을 끈다. 패총의 유적으로나 알아낼 수 있는 오랜 옛날, 원시인들이 이곳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시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