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도(南海島) 가족나들이
여행일 : ‘19. 3. 31(일)~4. 2(화)
여행지 : 경상남도 남해군(독일마을, 가천마을, 보리암, 상족암)
함께한 사람들 : 가족여행
특징 : 일 년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한 형제들 모임. 올해는 남해도를 돌아보기로 했다. 남해의 별명은 일점선도(一點仙島), '한 점 신선의 섬'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경관이 아름답다. 볼거리 많고 먹거리가 넘쳐나서 보물섬이라고도 불린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 한껏 달아오르는 중이다. 사천에서 창선대교를 건너 남해도로 들어선다. 다리 아래 바다색이 다르고,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결이 다르다. 참고로 ‘남해’는 행정지명이지만 한반도의 남쪽바다를 아우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부르는 산과 섬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고루 갖췄고, 그 덕분에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넘친다.
▼ 이번 여행의 베이스캠프는 ‘국립 남해편백자연휴양림’(삼동면 봉화리 산 553-1)
이름 그대로 남해 인근에 위치하며, 편백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멀리 있는 벗을 찾아가듯 넉넉한 마음으로 차를 몰아 남쪽으로 내려가면 남해와 육지를 연결하는 삼천포대교에 다다른다. 다리를 건넌 다음 3번 국도를 계속 타고 가다가 동천리삼거리(삼동면 동천리)에서 우회전해 잠시 들어가면 ‘봉화삼거리(삼동면 봉화리)’. ‘남해편백자연휴양림’ 이정표를 따라 7km쯤 더 가면 휴양림에 도착하게 된다. 1998년 개장한 휴양림은 다양한 숙박 시설을 갖췄다. 독채형 숲속의집 20동, 콘도형 산림문화휴양관 객실 13실, 단체 방문객을 위한 숲속수련장 객실 14실에 연립동 8실까지 합하면 모두 55실로 국립자연휴양림 중 가장 많은 객실을 자랑한다. 이밖에도 산림복합체험센터, 야영장, 산림욕장, 야외교실, 특산물판매장 등 위락 편의시설들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 ‘편백자연휴양림’이란 이름에 걸맞게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부터가 달라진다. 하늘로 치솟은 편백의 물결.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 또한 물결을 이룬다. 편백은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방출하는 나무로 알려지는데, 이 물질은 특유의 살균효과 덕분에 아토피를 비롯한 피부 질환에 효험이 있고, 신경계를 안정시켜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정신을 맑게 해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은 황사와 미세 먼지에 찌들어온 우리 일행에게는 힐링의 시간이 되어줄 것 같다.
▼ 첫 번째 방문지인 독일마을로 가는 길에 거대한 느티나무가 보여 잠시 차를 멈췄다. 나이가 270살이나 먹은 보호수로 나무 아래에 돌탑을 쌓고 제단까지 만들어놓았다. 이곳 ‘봉화마을’에서 신목(神木, 당나무)으로 모시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신목은 하늘과 땅,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거룩한 곳으로 여겨진다. 그래선지 나무와 탑, 제단 할 것 없이 모두 금줄을 둘러놓았다.
▼ 남해 여행의 시작은 독일마을이다. 때는 바야흐로 상춘지절(常春之節). 산하가 꽃으로 뒤덮이고 그 향기가 더 없는 낙원으로 인도하는데 어찌 길을 나서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하물며 이곳 독일마을은 명품 관광지로 소문난 곳. 마을 주차장은 더 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아랫동네인 봉화마을에 차를 대고 1Km 이상을 걸은 다음에야 ‘관광안내소’에 이를 수 있었다. 독일마을 투어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참! 투어를 시작하기 전 점심 겸해서 남해도의 명물인 ‘멸치쌈밥’을 맛봤다. 남해 멸치는 어른 손가락만큼 크고 통통해서 쌈밥의 훌륭한 재료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모든 게 입이 짧은 내 탓이겠지만 말이다.
▼ 뮌헨,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베를린, 하노버…. 독일어를 몰라도 이 정도 지명은 익숙하다. 구텐베르크, 괴테, 베토벤 등도 친숙하다. ‘독일로(Deutsche Straße)’를 사이에 두고 늘어선 40채의 주택엔 이런 이름들이 붙었다. 거기다 외형도 하나같이 하얀 벽에 주황색 지붕이다. 유럽풍으로 꾸며진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관광안내소 정면으로 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독일마을 여행의 시작과 끝이랄 수 있는 ‘도이치 플리츠(Deutscher Platz)’, 즉 마을의 중심축인 ‘독일 광장’이 그쪽 언덕에 있기 때문이다. 광장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유럽의 마을을 벤치마킹이라도 했는지 ‘파독 기념관’과 식당, 기념품 판매점 등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그러니 동화 같은 풍경에 이끌려 마을로 내려가기 전에 먼저 ‘파독전시관’에 들러 마을의 역사부터 알아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
▼ 반대편은 ‘원예 예술촌’으로 연결된다. 17명의 원예인들이 모여 만든 예쁜 마을로 프랑스풍, 지중해풍, 미국풍, 호주풍, 스위스풍, 멕시코풍의 여러 정원들이 꾸며져 있으며 산책길도 벚꽃길, 매화길, 장미 터널 등으로 다양하게 꾸며졌다. 하지만 직접 찾아보지는 못했다. 5천원의 관람료가 부담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이곳 독일마을과 가천 다랑이마을까지 둘러봐야 하는 오후 일정이 너무 빠듯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원예예술촌은 단순한 테마 마을이 아니라 원예 전문가들이 거주하는 곳이자, 직접 가꾸는 정원이다. 대다수 주민이 카페나 아이스크림 가게 등을 운영하는데, 운이 좋으면 남해 출신 배우 박원숙·맹호림 씨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박씨는 이곳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맹씨는 핀란드 통나무 주택 핀란디아에 산단다.
▼ 들머리에는 정착 1세대의 명단이 새겨진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독일마을’은 1960년대 독일(당시 서독)에 간호사와 광부로 파견되었던 독일거주 교포들이 대한민국에 재정착할 수 있도록 조성해놓은 공간이다. 2003년 입주 이래 광부 출신 12명, 간호사 출신 28명이 터를 잡았다. 독일인 남편 6명도 아내를 따라왔단다. 그들은 독일에서 재료를 수입해와 이곳에다 독일식 전통주택을 지었다. 그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젠 연 100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됐다.
▼ ‘옥토버 페스트(Oktoberfest)’라고 적힌 행사용 대문도 보인다. 매년 9월 열리는 뮌헨의 축제로 도시 전체가 맥주 향기에 취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곳 독일마을에서 열린다는 맥주축제에서 이를 벤치마킹이라도 한 모양이다. 아무튼 ‘옥토버페스트’는 뮌헨 시장이 대형 오크롱 마개를 나무망치로 따면 그 순간 12발의 축포가 터지면서 시작된다. 이때 뮌헨 시장이 개봉하는 맥주를 메르첸비어(Märzenbier)라 부르는데 '3월의 맥주'라는 뜻을 갖고 있단다. 옥토버페스트를 위해 그해 3월 홉을 많이 넣고 5개월 이상 숙성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 독일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독일 공방’이다. 공방(工房)이라고 해서 단순히 공예품이나 만드는 곳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 이곳에서 만드는 공예품 외에도 와인이나 초콜릿 등 다양한 상품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 독일공방의 옆에는 독일 현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바이로이트(Bayreuth)’가 들어서 있다. 독일 전통방식으로 만든 수제 맥주와 함께 독일식 족발인 ‘슈바인학세(Schweinshaxe)’의 바삭함, 역시 독일의 전통 소시지인 ‘브랏부어스트(Bratwurst)’의 탱탱함을 맛볼 수 있는 독일식 레스토랑이다. 이밖에도 독일맥주와 음료, 식료품을 팔고 있어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받을 수 있다.
▼ 오늘도 집사람은 ‘대한민국 만세!’다. 언젠가도 얘기했듯이 외국에만 나가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애국자가 된다. 집사람에게 세계 일주를 시켜주겠다며 시작된 해외여행이 벌써 6년째. 나라로 쳐도 40개국에 가까워졌다. 거기다 이곳은 하얀 벽면에 주황색 지붕을 한 전형적인 유럽풍의 분위기. 이 정도면 만세삼창이 절로 나와야하지 않겠는가.
▼ 광장 한켠에는 ‘파독 전시관’이 들어서 있었다. 지하 1,200m 갱도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파독 광부와 외롭고 고된 생활을 이겨 낸 파독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곳. 즉 이곳 주민들이 살아온 길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독일 생활의 향내를 간직한 실제 유물과 영상이 독일 생활의 흔적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곳이니, ‘글릭아우프(Glück Auf)!’ 살아서 돌아오라는 인사로 시작된 그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꼭 방문해 보자. 남과 북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1960년대. 뼈저리게 가난했던 나라에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있었다. 1963년 12월에 광부 247명이 서독행 비행기에 올랐고 1966년에는 젊은 간호사들이 서독으로 떠났다. 이후 1977년까지 광부 7,936명, 1976년까지 간호사 1만1000여 명이 비행기를 탔다. 이들은 먼 타향에서 열심히 일했고, 그 대가로 받은 돈을 한국에 보냈다. 그 돈으로 나라에서는 다리를 놓고 공장을 세웠다. 고향집에서는 동생들이 공부를 했고, 아버지는 막걸리를 마셨다.
▼ 먼저 눈에 띄는 건 탄광에서 쓰던 물건들. 외화를 벌기 위해 멀리 독일로 떠났던 파독 광부들의 노고가 담겨있다. 1963년 부자나라에서 운명을 바꿔보겠다며 광부들은 독일 땅을 밟았다. 광부를 지원한 사람 중에는 대학 졸업자도 많았는데 손이 고우면 뽑히지 않을 것 같아 몰래 손등에 검정 칠을 하는 사람도 있었단다. 동방에서 온 작은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다. 몸집이 큰 독일인들이 착용했던 작업복을 입고 지하 1000m에서 석탄을 캤다. 장비가 무거워 허리가 휘어졌다. 고향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무조건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잠을 청하기도 했단다.
▼ 머나먼 타국에서 가족을 위해 묵묵히 일했던 파독 간호사들의 애환 역시 들여다볼 수 있다. 1966년에 독일 땅을 밟은 한국의 딸들도 말이 통하지 않아 처음에는 청소나 빨래 같은 허드렛일을 했다. 시간이 지나자 손끝이 야무지고 매사에 헌신적인 간호사들은 동방에서 온 천사로 불렸다.
▼ 간단하나마 유럽식 노천카페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전시관 옆에 마을주민들이 운영한다는 간이식당 ‘도이체임비스(Deuche Imbiss)’가 문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독일식으로 만든 전통 소시지를 맛볼 수 있다. 독일에서 직접 공수해 온 다양한 맥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니 맥주 마니아인 내가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독일식 그릴 소시지를 안주 삼아 마이셀(밀맥주) 한 잔. 아니 나는 석 잔이나 마셔버렸다.
▼ 맥주하면 또 독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선지 이곳에서는 조형물까지도 오크통이다. 아니 마차에 실어놓은 것이 매년 10월에 열린다는 ‘독일마을 맥주축제’ 때 사용하는 소품일지도 모르겠다. 세계 3대 축제의 하나인 독일 뮌헨의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를 벤치마킹해 독일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정통 독일맥주와 소시지를 맛볼 수 있다는 그 이색적인 축제 말이다.
▼ ‘남해 스몰비어 파티’라는 이름표를 단 오크통 마차도 보인다. ‘스몰비어 파티’가 맥주축제 때 독일맥주와 소시지, 학센 등 독일음식을 비롯한 다양한 음식부스가 설치되는 광장의 이름일지니 이 또한 축제 때 사용되는 소품이 분명하다.
▼ 광장을 모두 둘러봤다고 해서 끝난 게 결코 아니다. 남쪽 끄트머리에 독일마을과 물건마을은 물론이고 드넓은 남해바다까지 한꺼번에 조망되는 멋진 전망대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맞다. 남해를 바라보는 언덕바지에 지어진 수십 채의 예쁜 독일식 주택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볼거리다.
▼ 전망대 앞에는 전경사진을 담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독일마을이 생겨난 배경과 함께, 이 주택들이 독일 교포들의 주거지임과 동시에 관광객들을 위한 민박으로도 활용되고 있다는 특수성을 적고 있다. 2006년 최고의 인기를 누린 MBC 드라마 ‘환상의 커플’과 KBS-2의 인기 버라이어티 ‘1박2일’의 촬영지였다는 자랑도 늘어놓았다.
▼ 전망대에 서면 발아래에 깔린 독일마을은 물론이고 그 아래 바닷가에 터를 잡은 ‘물건마을(勿巾里)’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물건마을은 마음의 독까지 빼준다는 소박한 마을. 아름다운 어촌으로 선정된 마을답게 그 풍경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거기다 지중해풍의 빨강 지붕이 더해지면서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에 행복을 안겨준다. 그렇다면 저 가운데 하나는 철수네 집일 것이다. 촬영 당시 가정집을 임대해서 사용했다니 지금쯤은 원상으로 복구되어 있을 것이고 말이다.
▼ 물건마을은 팽나무와 말채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등을 촘촘하게 심은 ‘방조어부림(防潮魚付林, 천연기념물 제150호)’으로 유명하다. 500m 길이의 바닷가를 따라 조성된 초승달 모양의 저 숲은 약 300년 전 마을사람들이 방풍과 방조를 목적으로 심었는데, 마을에는 숲을 해치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그 덕분에 한 가지의 나무도 함부로 베는 일 없이 숲을 지켜오고 있단다. 그건 그렇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해안은 여인의 허리처럼 한껏 휘어진 게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가지를 뻗은 나무들은 남해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당당한 모습이다. 남해 12경중 10경으로 꼽히는 이유일 것이다. 또 하나. 물건방조어부림은 다른 세 가지 이름이 있다. 거칠고 거센 바닷바람을 막아준다고 하여 방풍림(防風林)이며, 쉴새없이 달려드는 파도에 의한 해일이나 염해·조수를 막아준다고 하여 방조림(防潮林), 숲의 초록빛이 남해를 떠도는 물고기떼를 불러들인다 하여 어부림(魚付林)이다. 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 두 번째 방문지는 독일마을과 함께 남해도 마을관광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가천마을(加川里)’이다. ‘좁고 작은 논배미’를 뜻하는 ‘다랭이 마을’로 더 알려져 있는데 바다를 끼고 있지만 배 한척 없는 마을이다. 마을이 해안절벽을 끼고 있는 탓이다. 방파제는 고사하고 선착장 하나도 만들 수 없다보니 주민들은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고, 설흘산과 응봉산의 가파른 비탈을 개간해 논으로 만들었다. 걷어낸 돌로 논둑을 쌓고 물이 쉬 빠져나가지 않도록 점토나 흙으로 마감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올린 계단식 논이 108층. ‘다랭이 논(명승 제15호)’은 그렇게 태어났다.(아래 사진은 내가 찍은 게 마땅찮아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 도로변에 만들어놓은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니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바다와 도로 사이는 벼랑에 가까운 비탈진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벼랑에 걸려있는 마을이 바로 ‘다랭이 마을’이다. 이 마을의 참맛은 남해인의 억척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다랭이 논’을 돌아보는 것이다. 경사가 심한 바닷가 비탈진 곳에 마을과 손바닥만한 논들이 층층이 산을 이루는 모습은 이색적인 파노라마 풍광이다.
▼ 다랭이마을의 장점은 우리 고유의 문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을은 하얀 벽에 주황색 지붕을 인 독일마을과는 외관부터가 사뭇 다르다. 주황이나 파랑 등도 보이지만 검정색 기와지붕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담벼락도 마을의 일상을 묘사한 각종 벽화로 장식해 탐방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또한 독일식 소시지와 맥주 대신에 이곳에서는 해물파전에 막걸리를 내놓는다.
▼ 마을로 들어서자 '다랭이 마을안내도'가 길손을 맞는다. 안내도는 마을회관과 두레방 등 공공시설 외에도 민박·맛집·슈퍼·카페 등의 편의시설, 그리고 밥무덤과 암수바위 같은 볼거리까지 다양하게 그려 넣었다. 거기다 지명마다 버튼이 있어 누르면 위치를 표시해 준다고 한다. 하지만 고장이 나 있어 무용지물이라는 귀띔이 있어 대충 위치만 보고 그냥 통과한다.
▼ 경운기가 겨우 지날 수 있는 골목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마을 담벼락은 그네들의 지난했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주름 가득한 할아버지의 얼굴, 좁다란 논밭을 갈고 있는 소. 모두 이곳의 일상을 담은 그림들이다. 모를 내고 가꾸어 거두어들이는 논농사는 오로지 농부들 몫. 소의 도움을 받아 쟁기질이라도 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그런 악조건까지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슬기롭게 헤쳐 나온 것도 농부들이었다. 새참으로 나온 막걸리 한잔으로 새로운 힘을 불러일으키면서 말이다. 다랭이마을은 2천 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에서 가장 소득이 낮은 지역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상전벽해가 되었다. 선조의 땀이 밴 한 뼘의 역사가 희망이 되어 2002년 환경부의 '자연생태보존우수마을'에 선정됐고, 2005년 문화재청은 명승 제15호로 마을 전체를 포함한 다랭이 논을 지정했다. 농림수산식품부도 다랭이마을을 '색깔 있는 마을'로 선정했다. 이뿐이 아니다. CNN에서 운영하는 ‘CNN GO’도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50곳' 중 하나로 이곳 다랭이마을을 선정한바 있다.
▼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민박으로 생계용 직종을 바꾼 지 오래되었다. 척박한 환경을 탓하며 좌절과 숙명론에 빠지는 대신 약점을 특색과 장점으로 살리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천형'의 땅에서 '천혜'의 땅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을 훼손하거나 망가뜨리지는 않았다.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다랭이마을의 원천적인 경쟁력이자 매력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먼 옛날 농토 한 뼘이 아쉬워 산비탈을 깎아 만들었다는 계단식 논과 마을의 풍광은 여전하고, 남쪽 바다는 변함없이 새파랗다.
▼ 마을 곳곳에 세워놓은 이정표도 민박집 일색이다. 그런데 적혀있는 이름들이 재미있다. 해가 뜨는 돋을양지에 있는 ‘해뜨는집’, 느티나무 아래에 있어 ‘느티나무집’, 그밖에도 마을안길을 걷다보면 샘(우물) 옆에 있는 ‘새미끌집’, 비파나무가 있는 ‘비파나무집’, 가파르게 경사진 곳에 있는 ‘까꾸막’, 돌담을 길게 쌓아놓은 ‘긴돌담집’ 등 무척 정겹고 재미나는 이름들을 만날 수 있다.
▼ 가파른 비탈 사이로 구석구석 골목길은 마치 미로와 같다. 그 길을 헤매다보면 옛 우물들도 만나게 된다. 바닷가 비탈진 곳에 마을이 들어섰으니 우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가랑모샘’이다. 지금은 눈요깃거리 삼아 안내판까지 세워놓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다랭이마을의 주 식수원이었다.
▼ 또 하나의 샘은 ‘아랫모샘’이다. 1970대 새마을운동 이전에는 고랑모샘과 더불어 다랭이마을의 주 식수원이었다.
▼ 옛 우물이라서 두레박으로 물을 직접 길어보는 재미도 있다. 그렇다고 123가구 720여 명이 마시던 ‘생명의 샘’이었다는 것까지 잊어서는 결코 안 된다.
▼ 마을을 돌아다니다보면 ‘밥무덤’이라는 특별한 민속자료도 만날 수 있다. 매년 음력 10월15일 풍작과 풍어를 기원하는 동제(洞祭)를 지낸 후 제사에 올린 밥을 묻는 구덩이로 마을 중앙(아래 사진)과 동·서쪽 등 세 곳에 설치되어 있다. 이 가운데 마을 중앙의 것은 삼층탑 모양의 구조물이고 동서쪽의 것은 돌담 벽에 감실을 만들어 밥 무덤으로 쓰고 있다. 밥을 묻을 때는 밥을 정갈한 한지에 서너 겹으로 싸서 정성껏 묻고 흙으로 덮은 다음 그 위에 반반한 덮게 돌을 덮어둔다. 이는 제물로 넣은 밥을 고양이나 쥐 등의 짐승이 해치면 부정한 일이 생기거나 신에게 바친 밥의 효력이 없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귀한 제물인 밥을 땅속에 넣는 것은 마을을 지켜주는 모든 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풍요를 점지해 주는 땅의 신, 즉 지모신(地母神)에게 밥을 드림으로써 그 기운이 땅속에 스며들어 풍요를 되돌려 받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다고 한다. 항해 등에 나갔다가 목숨을 잃어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하는 혼령들을 위해 밥을 묻어둔다는 의미도 있단다.
▼ 우리네 시골마을에도 ‘마을회관’ 정도는 필수다. 2016년에 지어진 지상 2층의 건물에는 이장 집무실과 회의실, 그리고 남·여 경로당 등이 들어서 있다. 참! 마을회관 옥상이 가천마을 최고의 전망대로 알려져 있으니 한번쯤 올라가보는 것도 괜찮겠다. 잠깐 앉아 쉬면서 아픈 다리품도 달래고, 맑고 잔잔한 겨울바다를 보면서 번거로운 일상을 한순간이라도 잊어버릴 수 있을 테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 마을은 그동안 국내외를 통해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그리고 이제는 해마다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조상 대대로 가난을 면치 못하던 좁은 다랭이 논을 하나의 상품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에는 주민들의 노력도 크게 한몫을 했단다. 허물어져 가던 집을 고쳐 펜션과 민박 시설로 탈바꿈하고 마을의 주변 볼거리를 코스로 엮었으며 다랭이 만들기, 농사 체험 등 사계절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몰려드는 관광객을 맞았다. 그 현장이 바로 체험관인 ‘다랭이 두레방’이다. ‘두레’란 농촌에서 농민들이 농사일이나 길쌈 등을 공동으로 하기 위해 마을 단위로 만든 노동조직을 말하는데, 이 마을에는 ‘다랭이논보존회’라는 두레가 조직되어 있다. 이들은 일부 다랭이 논에 벼를 심어 가을 농촌경관을, 10월에는 유채를 파종해 이듬해 봄에 유채꽃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고 있단다.
▼ 다랭이마을에서는 꼭 맛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유자 잎 막걸리’인데 그 유래가 독특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 할머니 한 분이 집에서 만든 막걸리를 관광객들에게 건네기 시작했는데, 그 맛에 반한 이들이 주변에 전하면서 입소문을 탔고, 이후 다랭이 마을을 찾는 여행자들은 너나없이 할머니의 막걸리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열흘 익힌 막걸리에 유자 잎을 넣고 나머지 사흘을 숙성시켜 거른 ‘유자잎막걸리’는 그렇게 다랭이 마을의 명물이 되었다. 유자 향이 솔솔 풍겨오는 것은 물론이고 달큼한 맛이 함께 혀끝을 타고 넘어오는 것이 특징. 현재 이 막걸리는 할머니의 유지를 이어받은 ‘시골할매 막걸리’라는 음식점에서 팔고 있다. 해물된장 정식과 해물칼국수 등 다양한 음식이 있지만 막걸리와 함께하는 해물파전이 가장 인기라고 한다. 투어를 끝낸 다음, 해물파전을 안주삼아 막걸리 한 사발 걸쭉하게 마셔볼 일이다.
▼ 골목길을 누비다가 ‘박원숙’씨가 운영한다는 ‘커피&스토리’를 만났다. 독일마을 앞 예술촌에 그녀가 운영하는 ‘앤티크 커피숍’이 있다고 했으니, 이곳은 2호점쯤 되는 모양이다. 2008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모친과 함께 ‘남해도’에 눌러앉았다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워낙 많아 사랑방 같은 커피숍을 만들었단다. 그게 또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지 최근에는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라는 버라이어티 예능프로의 무대가 되고 있는 중이다.
▼ 고소한 빵 냄새에 홀려 따라가다 ‘다랭이 빵집’을 만났다. 육쪽마늘빵과 치즈고로께, 꽈베기, 팥도너츠, 수제햄버거에 아메리카노 커피까지 판단다.
▼ 전망 좋은 곳에는 ‘울 마더’라는 카페도 들어서 있다. 층층이 쌓여있는 다랭이논과 함께 남해의 푸른 바다가 한눈에 쏙 들어오니 커피한잔의 여유를 권해본다. 그러다가 색색의 머그잔을 소품삼아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둘 일이다. 낭만 가득한 인생샷이라도 건질지 누가 알겠는가.
▼ 마을 끄트머리에 이르자 사람의 성기를 닮은 커다란 한 쌍의 바위가 서있다. 다랭이마을의 자랑거리인 ‘암수바위(경남 민속문화재 제13호)’이다. 이 바위들은 조선 영조 27년(1751) 남해 현령 조광진의 꿈에 나타난 노인의 계시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에서는 ‘미륵불(彌勒佛)’로 불리는데, 5.8m(둘레 2.5m) 높이의 ‘숫미륵’은 귀두와 힘줄까지 나타나는 등 남성의 성기를 영락없이 빼다 닮았고, 3.9m(둘레 2.3m) 크기의 ‘암미륵’은 여인이 잉태하여 만삭이 된 모습을 한 채로 비스듬히 누워있다. 성기 모양으로 돌을 깎아 자식을 많이 낳고 농사의 풍요로움을 빌던 대상이 마을전체의 수호신으로 바뀌고, 다시 불교의 미륵불로 이어지는 민간신앙의 한 예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 이 바위들은 간절히 소원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득남을 원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고 한다. 또한 마을 주민들은 욕심을 부려 바위 가까이에 작물을 심거나 바위에 손가락질을 하면 화를 입는다고 믿는단다. 그 믿음은 매년 음력 10월23일 풍농과 풍어를 비는 동제(洞祭)로 발전했다. 배를 가지고 있는 어민들이 개별적으로 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처음 잡는 고기를 바위에 걸어 놓으면 고기도 많이 잡히고 사고도 방지된단다. 참! 숫미륵의 모양새에 대비되는 암미륵을 찾다가 헷갈리고 말았다. 남성의 성기에 대비되는 여성의 성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의문은 안내문을 읽어보고서야 풀렸다. 1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인데 여성의 성기가 아니라 임신하여 만삭이 된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있는 모습이란다.
▼ 마을을 다 둘러봤다면 이제 주변을 둘러볼 차례이다. 바닷가로 내려가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일명 삿갓논, 삿갓배미라고도 불리는 다랭이논의 논두렁을 걸어볼 수도 있다. 옛날에 어떤 농부가 논을 갈다가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들어보니 그 안에 논이 하나 더 있더라는 데서 유래된 ‘삿갓논’은 자투리땅도 소중히 활용한 남해 사람들의 억척스러움을 대변한다. 그처럼 작은 논은 다른 이름으로도 나타난다. 죽이나 밥 한 그릇과 바꿀 정도로 작다고 해서 ‘죽배미’나 ‘밥배미’로도 불린다.
▼ 개울가를 따라 잠시 내려가니 ‘바래길’ 이정표가 보인다. '바래'라는 말은 남해 어머니들이 가족의 먹거리 마련을 위해 바닷물이 빠지는 물때에 맞춰 갯벌에 나가 파래나 조개, 미역, 고둥 등 해산물을 손수 채취하는 작업을 일컫는 토속어이다. 그러니 ‘바래길’은 마을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갯벌로 가던 길을 이어 만든 남해도판 ‘올레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다랭이마을은 19개 코스(본선 16개+지선 3개) 231km로 이루어진 ‘바래길’ 중 ‘지겟길’과 ‘앵강다숲길’에 속해 있다. 지겟길은 조상들이 지게를 지고 땔감과 곡식을 나르던 길이고, 반대편인 앵강다숲길은 조용한 호수 같은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앵강만(鶯江灣)을 중심으로 남면, 이동면, 상주면 9개 마을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길이다. 참! ‘바래길’ 가운데 11개 코스는 남해안 전체를 잇는 '남파랑길'의 36~46코스와 노선이 일치되기도 한다.
▼ ‘남해 바래길’을 따라 잠시 걸어보기로 했다. 들쭉날쭉 제 멋대로 생긴 논들이지만 그 사이사이로 산뜻한 산책로와 전망대가 마련돼 있어 편안히 돌아볼 수 있다. 이 길은 옛날 다랭이마을의 조상들이 지게를 지고 땔감과 곡식을 나르던 길이라고 해서 ‘다랭이 지게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남해 바래길’ 1코스(평산항에서 가천초교까지 16㎞)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데, 해안선을 따라 나있기 때문에 줄곧 한쪽으로 남해의 비경을 안고 숲과 바다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아름다운 길이다. 참! 다랭이 마을의 논두렁길은 또 소를 몰고 다니면서 소에게 풀을 뜯게 했다는 뜻을 지닌 ‘소몰이살피길’, 마을과 다랭이 논 사이를 걷는 ‘상수리길’, 고기 떼가 들어오는지 망을 보던 망수의 발자취를 재현한 ‘망수길’ 등으로 나뉘기도 했다.
▼ 이곳 남해도는 500년 전부터 '꽃밭(花田)'이란 별칭으로 불렸던 아름다운 보물섬이다. 바래길은 그런 꽃밭 사이를 누비면서 시작되고 있었다. 유채꽃이 흐드러진 꽃밭은 기본, 공들여 가꾼듯한 라벤더도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거기다 길이 스며드는 산자락에서는 하얀 벚꽃이 꽃비를 내리고 있다. 이야기꾼들이 풀어놓는 500년 전의 남해도가 이런 풍경이 아니었을까?
▼ 바래길은 가천마을 바닷가가 가장 잘 조망되는 핫 플레이스이기도 하다. 4월의 다랭이 마을은 유채꽃이 한 몫을 톡톡히 수행한다. 가을걷이를 끝낸 논은 물론이고 길가 빈터에도 어김없이 유채꽃이 피어났다. 맞다. 어느 여행전문가는 다랭이 마을을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를 유채꽃이 만발하는 봄철로 꼽고 있었다. 친절하게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서 다랭이마을과 마주하면 ‘어떻게 저런....정말 신기하다’라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게 된다면서 말이다. 그는 또 모내기를 끝낸 6월과 추수를 앞두고 누렇게 벼가 익는 무렵인 가을도 좋기는 매한가지라고 했다.
▼ 맨 마지막은 바닷가 탐방이다. 비탈과 갯바위에 데크길과 다리, 심지어는 출렁다리까지 놓아가며 길을 냈다. 다랑이 논들이 올려다 보이는 이 산책로는 한마디로 절경이다. 아래로는 아찔한 기암절벽이 뻗어나가고 뒤돌아보면 금빛 다랑이 논이 눈부시다. 한려수도 청정해역의 푸른 바다는 기본이다. 그 가운데서도 백미는 출렁다리. 호들갑스런 여성들의 비명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오는 곳이다.
▼ 바닷가에서 올려다보는 마을 풍경도 일품이다. 첩첩이 쌓여있는 논들이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맞다. ‘다랭이 마을’은 손바닥만 한 논이 언덕 위에서부터 마을을 둘러싸고 바다까지 이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45도 경사 비탈에 108개 층층 계단, 10제곱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것부터 1,000제곱미터에 이르는 것까지 680여 개의 논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길, 집, 논 등 모든 것이 산허리를 따라 구불거리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곡선 위의 오선지 같은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 바닷가에 이르자 갯바위지대가 펼쳐진다. 그런데 조각배 하나 정박할 공간이 보지지 않는다. 맞다. 이곳 다랭이마을은 남해에서 선착장이 없는 유일한 갯마을이라고 한다. 더구나 이곳 남해도는 태풍이 잦은 곳. 거친 바위와 거센 파도로 인해 배의 쉼터가 되지 못하니 고기잡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산비탈에라도 기댈 수밖에 없었을 게고. 손바닥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작은 논이나마 층층이 만들어가며 고단한 삶을 이어왔을 것이다.
♧ 에필로그(epilogue), 문득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이라던 법정스님의 게송(偈頌)이 생각난다. 이 가운데 마지막 구절은 ‘수주작처 입처개진(隨主作處 立處皆眞)’. 즉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이니라’라는 당나라 임제(臨濟) 선사의 말씀을 인용했다. 이 말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늘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현재 살아가는 이곳이 가장 행복한 세상이라는 삶의 진리를 담은 글이다. 말하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려운 이 말씀이 하필이면 지금 머리에 떠오른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가천마을 주민들의 삶에서 그 진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척박한 환경을 탓하며 좌절과 숙명론에 빠지는 대신 약점을 특색과 장점으로 살리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천형'의 땅에서 '천혜'의 땅으로 변화시킨 그네들의 삶 말이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지금 머무르고 있는 이곳에서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 삶을 영위해 나간다면 세상은 모두 참된 진리로 채워질 것이고, 다랭이마을 앞바다의 맑고 푸른 바다처럼 마음은 온통 행복으로 가득 차오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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