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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고원길 12구간(고개너머 동향길)

 

여행일 : ‘24. 6. 15()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안천면 및 동향면 일원

여행코스 : 안천소운동장노채마을긴재(인증)상노마을가래재(인증)상능마을추동교외금마을동향면사무소(거리/시간 : 16.7km, 실제는 노채마을부터 14.66km 4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안천소운동장(진안군 안천면 노성리)

통영-대전고속도로 무주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장수방면으로 4km쯤 내려오다 적상교차로에서 30번 국도(진안방면)로 옮겨 12km쯤 들어오면 안천면 소재지인 노성리에 이르게 된다. 진안고원길(12구간) 조형물은 안천소운동장 앞에 조성해놓은 길거리장터의 캐노피(canopy) 아래 설치되어 있다.

 용담호반에 자리한 안천면소재지를 출발 용담댐의 수원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긴재, 가래재 등 600m도 넘는 높은 고갯마루를 넘어야만 금강 상류의 동향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고개넘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때문에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하는 수고로움은 필수, 눈에 들어오는 풍경도 단조로운 편이다. 대신 진안에서만 볼 수 있는 고원지대 특유의 풍광을 마주할 수 있다. 난이도는 으로 분류된다.(지도는 광주송아산악회의 것을 빌려왔다. 궤적이 올바르게 그려진 유일한 지도였기 때문이다)

 10 : 27. 실제 출발지는 노채마을’. 5km 전방의 상노마을에서 기다리기로 한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나도 2.2km를 단축해서 걷기로 했다. 기껏해야 2.8km를 더 걷는 셈이지만, 이게 높이 600m 남짓의 산 하나를 오롯이 넘어야하는 험난한 여정이라 시작부터 심난하다. 물론 서서히 걷는다면야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상노마을에서 내가 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집사람을 생각하면 어찌 속도를 늦출 수 있겠는가.

 뒤돌아본 노채마을’. 문헌에는 유채리(鍮債里)’로 적혀있기도 한데, 이는 옛날 이곳에서 놋그릇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놋쇠라는 한자어 ()’가 우리말 놋으로 변해 놋채가 되었다가 한자화 과정에서 노채(魯埰)’로 변했다는 것이다. 놋그릇 제조가 부()를 가져다주었던지 옛날에는 천석지기가 한둘이 아니었을 정도로 부촌이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을 빠져나오다 눈물겹도록 반가운 풍경을 만났다. 그렇게나 귀한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봉지로 싸놓은 것은 출하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비록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과나 배가 아닌 복숭아였지만 말이다

 10 : 35. 한성양계장 앞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그런데 농장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소독기가 설치되어있는 게 아닌가. 저렇게까지 외부로부터의 병원(病源)을 차단시키기고 있는데, 설마 걷기 여행자들에게 길을 내주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왼쪽으로 갔고, 덕분에 나는 무지막지하게 가파른 임도를 한참이나 오르다가 되돌아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하나 더. 사실은 갈림길에 고원길의 방향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섣부른 상황판단 때문에 이를 챙겨보지 못해 당한 참사였다.

 한성양계장에는 ‘()하림의 안내판(알차고 건강한 자연이야기 자연실록’)이 세워져 있었다. ‘자연실록 ()하림의 친환경 닭고기 브랜드이다. 그러니 이 농장에서는 닭을 기르면서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덕분에 우린 건강한 밥상을 차릴 수 있고...

 농장을 지나면서 길은 엄청나게 가팔라진다. 사람을 스틱, 차량은 사륜구동을 준비해야만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10 : 48. 그러니 찾는 사람들이 드물 것은 당연. 민가(이정표 : 동향면사무소 13.1km/ 안천소운동장 3.6km) 앞에서 놀던 개도 낯선 이방인이 오히려 반가웠던 모양이다. 짖어대는 대신 자신의 은밀한 속살까지 선뜻 보여주며 반긴다

 10 : 53. ‘어디서 오셨나요?’ 주인장도 내가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다. 걷기 여행자들이 잊을만하면 한둘씩 지나간다며, 조금 더 올라가면 조망 좋은 곳이 있으니 꼭 들어가 보란다. 아니 말만으로는 못 미더웠던 모양이다. 차량으로 나를 앞지르더니 탐방로를 약간 벗어난 지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10 : 54. 그의 말마따나 용담댐과 구봉산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는 관광해설사 역할까지 자진해서 해줬다. 용담댐과 구봉산이 품은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꼼꼼하게도 들려주셨다. 지면을 빌어서나마 그분께 감사드려본다.

 그런 풍경을 줌으로 당겨봤다. 용담호의 아름다운 자태가 여과 없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 끝에 걸려있어야 할 구봉산은 실루엣으로 처리되어 버린다. 그러니 4봉과 5봉 사이에 놓여있는 구름다리를 보는 건 언감생심이 되어버렸다.

 10 : 58. 그와 헤어져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산길로 들어선다.

 산길 초입에 모던(modern)한 벤치가 놓여있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전 잠시 숨을 고르라는 모양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조망은 덤이다. 하지만 조금 전 농부의 안내로 눈에 담던 조망에 비할 바는 아니다. 구봉산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용담댐도 주변 잡목들이 시야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산길은 무척 가팔랐다. 곧장 올라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를 써가면서 겨우겨우 고도를 높여간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곳곳에 침목계단을 깔아놓았으니 속도만 조금 떨어뜨리면 될 일이다.

 첩첩산중, 그것도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오르지 못할 산비탈도 인간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으니 산길을 벋어나지 말란다.

 설마 저 취나물까지도 재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나저나 12구간은 걷는 내내 저런 산나물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고개너머라는 브랜드 수식어답게 높은 고개를 넘는 탐방로 주변에는 드릅, 취나물, 당귀, 머위 등 산나물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11 : 15.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긴재에 올라섰다. 왼쪽으로는 형제봉(658.9m)를 거쳐 지장산(773.6m)로 연결되며, 오른쪽으로는 싸리재와 고산(875.8m)을 지나 금강에서 숨을 다하는 능선상의 한 지점이다. 높이는 610m(산길샘 앱). 아까 오르막길이 시작되던 한성농장의 해발이 320m이었으니 290m를 치고 오른 셈이다.

 이곳은 12구간의 첫 번째 인증지점이기도 하다. 완주에 인증을 더하고 싶은 여행자라면 이정표(동향면사무소 12.4km/ 안천소운동장 4.3km)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둘 일이다.

 반대편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안천면(노성리)으로부터 바톤을 넘겨받은 고원길은 이제 동향면(자산리)로 들어간다. 그나저나 내려가는 길도 무척 가팔랐다. 곧장 내려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를 써가며 겨우겨우 고도를 낮추어간다.

 잠시 후 내려선 계곡은 원시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길은 또렷하게 나 있었다. 표지기 또한 촘촘하게 매달려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11 : 25. ‘상노마을로 내려선다. 법정 동리인 자산리(紫山里)를 구성하는 6개 행정부락(대야·상노·용암·중노·하노·후고산·고산골) 중 하나로 해발이 456m나 되는 첩첩산중에 하늘 아래 첫 동네인양 들어앉았다. 진안군(안천면)과 무주군(부남면)의 경계에 놓여있기도 한데, 산천경개를 유람하던 창령 성씨’(昌寧成氏)가 마을 뒷산인 국사봉(國士峯,756.8m)의 아름다움에 반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마을회관 앞에서 길이 좌우로 나뉘고 있었다. 이정표(동향면사무소 11.7km/ 안천소운동장 5.0km)는 왼쪽을 가리킨다.

 군내버스 정류장, 회차(回車) 지점이어선지 꽤 넓은 공터로 이루어져 있다. 대형버스도 넉넉하게 차를 돌릴 수 있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를 몰랐던 나는 산악회장에게 13번 국도변에 있는 하노마을(이곳으로 들어오는 1차선 도로의 초입)’까지만 집사람을 실어다 줄 것을 부탁했고, 덕분에 집사람은 2.5km나 더 걷는 수고로움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을 벗어나면 길은 임도로 연결된다. 산허리를 에돌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 상노마을은 갈골로도 불린다고 했다. 자하리(紫霞里)와 합쳐지기 전의 지명인 노산리(蘆山里)’도 주위 산이 비안함로형(飛雁含蘆形 : 기러기 갈잎을 물고 나른다)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이 마을에 갈대가 많았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갈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눈에 들어오는 공터마다 망초만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망초(亡草)가 밭에 자라면 농사를 망치고, 농사를 망치면 나라가 기운다고 했다. 뽑고 또 뽑아도 없어지지 않는데 질린 농부가 에이! 망할 놈의 풀이라 투덜댔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농부, 아니 온 나라가 싫어한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추억속의 옛 얘기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 어린잎은 봄나물이 되어 식탁으로 올라가고, 초여름이면 산하를 온통 하얗게 물들이며 여심을 자극한다.

 집사람과 만난 다음부터는 걷는 속도를 뚝 떨어뜨렸다. 새순으로 돋아난 드룹을 채취하느라 부산을 떠는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다. ‘단오가 지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으니 웬만한 산나물은 다 먹을 수 있다며 참취 당귀의 연한 잎도 함께 따고 있다.

 그렇다고 방심을 끼고 사는 그녀의 눈에 꽃이 들어오지 않겠는가. 꽃이 화려하고 예뻐서 나리꽃 중 으뜸으로 치는 참나리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으니 말이다. 꽃말은 순결, 깨끗한 마음, 존엄. 아름다운 꽃만큼이나 고귀한 의미를 품었다.

 11 : 51. 하노마을에서 시작되는 메인 임도와 만난다. 이곳을 기점으로라도 삼으라는 듯 이정표(동향면사무소 10.5km/ 안천소운동장 6.2km) 삼거리라는 이름표까지 달아놓았다.

 임도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풍경. 발아래는 하노마을에서 올라오는 임도, 그 뒤는 아까 노채마을에서 넘어왔던 형제봉 능선이다. 그 너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고산(875.8m, ‘깃대봉으로도 불리는데 암릉을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이 아닐까 싶다.

▼ 임도는 가래재를 향해 올라간다. 500m를 걸어가는 동안 50m쯤 고도를 높이는 정도이니 별 어려움 없이 올라갈 수 있는 구간이다.

▼ 12 : 00 – 12 : 05. 두 번째 인증지점인 가래재(이정표 동향면사무소 10.0km. 안천소운동장 6.7km)’에 올라선다덕유지맥 봉화산(885.6m)에서 국사봉(757.7m)을 지나 두억봉(503.5m)으로 가는 능선상의 고개로 높이는 해발 557m쯤 된다.

▼ 고갯마루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덕분에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차려놓은 다양한 과일들로 갈증을 다스리다 갈 수 있었다.

▼ 쉼터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시야가 툭 트이면서 덕유산의 주능선이 호쾌하게 드러난다.

▼ 이후부터는 벌목을 마친 산비탈을 따라 난 임도를 따른다덕분에 최고의 조망을 즐길 수 있다하지만 오뉴월 뙤약볕을 가려줄만한 그늘이 없어 죽음의 행진이 될 수도 있겠다.

▼ 임도는 국사봉(757.7m)의 7부쯤 되는 능선의 산비탈을 헤집으며 나아간다. ‘고원으로 대변되는 진안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걷는 멋진 구간이다.

 고원길은 백두대간을 앞이나 옆에 놓고 이어진다. 남덕유산. 무룡산. 중봉. 향적봉으로 이어지는 덕유 능선이 백두대간과 궤를 같이하며 아슴푸레하게 산그리메를 그리고 있다.

 그런 조망을 즐기라는 듯 중간쯤(이정표 : 동향면사무소 9.4km. 안천소운동장 7.3km)에 쉼터를 만들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굴곡진 임도를 걸으며 만나는 풍경들이 더 또렷하니 일부러 쉬어갈 필요는 없겠다.

 이렇듯 덕유산의 주능선을 앞에다 두고 걷기도 한다.

 눈을 들면 사방이 첩첩산중이다. 그것도 1천 미터를 훌쩍 넘기는 고산준령들이다. 문득, 진안출신 동료에게 간짓대 걸쳐놓고 턱걸이 하다 왔느냐며 놀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네 고향 순창도 오십보백보라는 되받아치기가 이어졌지만 이곳 진안 출신은 너나없이 촌놈으로 놀림 받던 시절이었다.

 벌목으로 얻은 통나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구도만 잘 잡으면 인생사진 하나쯤 거뜬히 건질 수 있는 풍경이다.

 벌목은 현재진행형이었다. 덕분에 먼지가 폴폴 나는 임도를 한참이나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0분쯤 걸었을까 임도가 숲속으로 파고든다. 울창한 골짜기 숲에서 품어져 나오는 피톤치드와 청량한 공기를 마셔가며 걸을 수 있는 기분 좋은 구간이다.

 안내판은 이 구간이 자산리 하노마을과 능금리 상능마을을 잇는 길이 8.20km의 임도임을 알려준다. 지도에 현재 위치를 표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나 혼자만의 넋두리일까?

 12 : 38. 곁가지 임도가 갈려나가는 삼거리. 이정표(동향면사무소 7.5km/ 안천소운동장 9.2km)는 이곳도 삼거리라고 적고 있었다.

 임도는 계속해서 울창한 숲속을 헤집는다. 하지만 가끔은 조망이 트이면서 덕유산능선을 보여주기도 한다.

 12 : 44. 또 다른 임도안내판을 지나자 이번에는 작은 소류지가 얼굴을 내민다. 해발 400m를 훌쩍 넘기는 진안고원의 천수답은 저런 소류지가 있었기에 논농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12 : 49. 임도를 벗어나자 상능마을(이정표 : 동향면사무소 6.7km/ 안천소운동장 10.0km)’이 얼굴을 내민다. 아니 능금마을의 윗뜸쯤으로 보면 되겠다.

 국내 자급률이 1% 미만인 우리밀 신토불이의 또 다른 축이 된다. 그런데도 서해랑길에서는 심심찮게 눈에 띄었었다. 하지만 진안고원에서는 누렇게 익은 밀밭은 보기드믄 풍경이 된다.

 코스를 단축한 여유로움이랄까 느림의 미학을 즐겨보기로 했다. 먼저 천천히 걷는다. 다음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하지만 고원길에서 만난 주민들은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그리고 하나같이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시고 안전을 응원해 주셨다. ! 상노마을에서 만난 할머니께 보리수를 한웅큼이나 얻어먹었다는 것을 깜빡 빠뜨릴 뻔했다.

 마을을 지나다가 살구나무를 만났다. 하지만 집사람을 그냥 지나쳐버린다. 구미가 당기지 않는 탓일 것이다. 하긴 홍천의 농막에 심어놓은 과일나무들 중에도 살구나무가 있지만 다른 과일들에 밀려 동네사람들 몫으로 남겨둔지 이미 오래됐다.

 13 : 16. 시시각각 변하는 능금리 풍경들을 눈에 담다보면 어느덧 상능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린 능금리(能金里) 5개 행정부락(상능·하능·추동·외금·내금) 중 하나로 ()’이 많이 출토되었다는 마을이다. 거기에 마을이 번성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능길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풍요가 넘치는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13 : 20. 49번 지방도(진성로)를 횡단한다(이정표 : 동향면사무소 5.0km/ 인천소운동장 11.7km). 그리고는 마을회관과 정자 사이를 지나 능길교를 건넌다. 이때 머리에 를 얹고 있는 마을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이 마을에서 소를 많이 키운다는 얘기일 것이다. 안내판은 그밖에도 고추, 인삼, , 마늘, 기장 등의 밭작물들을 특산물로 꼽고 있었다.

 도로변에서 바라본 상능마을(능길+웃담)’. ‘국사봉 자락이 동남쪽으로 뻗어내려 버덩(좀 높고 평평하며 나무가 없는 들)을 이루는데, 이 버덩의 위가 상능마을, 그리고 아래에 하능마을이 위치한다. 하나 더. 상능마을에는 벼슬바위가 있다고 했다. 이를 관바우, 관암이라고도 하는데, 이 바위가 떨어지면 마을에서 벼슬하는 분이 나온단다. 마을 어귀에는 밀양 박씨 열녀비 분성 김씨 열녀문도 있다고 했지만 찾아보지는 못했다.

 능길교를 건넌다. 이때 구량천(九良川)’의 물줄기가 내려다보이지만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것은 없다. 아니 물가에 걸터앉은 정자는 나름대로 멋진 풍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의 생존에 있어 물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무릇 물은 생명을 살리며, 어디 한 곳 스며들지 않는 곳이 없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순리를 일깨워준다. 그래서 고대 왕들은 물길을 다스리는 일을 가장 주요한 정사로 여겼다. 그 물길은 주요 이동수단이 되기도 한다. 물길이 사나우면 뗏목이 지나가고, 그게 수그러지면 나룻배를 띄운다. 그 길을 나는 지금 걸어서 간다. 물길이 아닌 물가로...

 그러다 앵두나무를 만났다. 때깔 좋은 과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참기로 했다. 맞은 편 민가에서 일부러 심어놓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그네에게 길을 내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민폐까지 끼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13 : 29. 징검다리로 구량천을 건넌다. 우리네 기억속의 징검다리. 즉 제멋대로 생겨먹은 돌들이 아닌 게 흠이기는 하지만 종종거리며 건너다니던 옛 추억을 소환시키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풍경이다.

 징검다리를 건넌 다음, 이번에는 구량천을 왼쪽에 끼고 간다. 이 구간은 검붉은 오디를 주렁주렁 매단 뽕나무가 함께 해준다. 집사람이 가다서기를 반복하며 오디를 따먹느라 여념이 없었던 구간이기도 한다. 아무튼 작년 이맘 때 코카서스 3을 여행하면서 따먹던 오디처럼 새콤달콤하지는 않았지만 간식거리로는 이만한 것도 없었다.

 탐방로 오른편으로 심심산골에서는 보기 드믄 풍경이 펼쳐진다. 구량천의 감입곡류(嵌入曲流)가 만들어놓은 충적평야(沖積平野)이다.

 건강 밥상이 대세인 요즘이다. 이곳은 우렁이 농법으로 친환경 쌀을 생산하는가 보다. 뿌리를 내린 벼 포기마다 우렁이 알들이 매달려 있었다.

 감입곡류의 물길은 저렇게 멋진 바위절벽들을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그게 훌륭한 눈요깃거리가 된다.

 들녘 너머에는 능금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추동마을이 있다. 옛 이름은 가래골’. 가래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그걸 한자화하면서 추동(楸洞)’이 되었다. 저 마을은 또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아래서 지내는 당산제가 볼만하다고도 알려져 있다.

 진안은 인삼의 고장이다. 하지만 수박도 이에 못지않은 모양이다. 들녘 곳곳을 수박밭이 점령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맞다. 인터넷은 진안 수박을 명품으로 꼽고 있었다. 20 이상의 일교차가 큰 고랭지 기후의 영향으로 아삭한 식감과 12brix 이상의 높은 당도를 자랑한단다.

 13 : 48. 2차선 도로인 능금로를 가로지른다. 이때 추동교를 장식하고 있는 한우가 눈길을 끈다. ‘진안하면 흑돼지가 연상될 정도로 진안에서의 흑돼지는 독보적인 존재다. 그런데 저런 조형물을 스스럼없이 내걸 정도면 한우도 그에 못지않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길은 계속해서 구량천을 옆구리에 끼고 간다. 이즈음 큼지막하게 들어선 사과밭을 만날 수 있었다. 사과는 진안의 또 다른 특산품이다. 청정 고랭지에서 맑은 이슬을 머금고 자란 진안 사과는 큰 일교차와 비옥한 토양성분으로 당분과 유기산, 펙틴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알려진다.

 오뉴월 뙤약볕에 알알이 여물어간다. 하지(夏至)를 코앞에 두어선지 어떤 것은 붉은 빛깔까지 띠고 있었다. 제발 무럭무럭 잘 자라서 올 가을에는 부담 없이 사과를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감입곡류의 구량천이 아름다운 자태로 다가온다. 구량천은 하천 생태계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자연의 보고로 알려진다. 청정 1급수에서만 자라는 다슬기와 쉬리, 쏘가리, 모래무지 등 어패류는 물론이고 갈대와 억새풀 등 수생식물도 만날 수 있다. 회색빛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이 잠시 쉬어가기에 딱 좋은 곳이다.

 이후부터는 구량천의 물길을 돌리게 만든 산자락을 따라 걷는다. 산비탈과 구량천 사이에 도로를 만들었는데, 양옆으로 굵직한 벚나무가 도열하고 있어 나름대로의 풍치를 자랑한다. 하지만 구간의 양쪽을 철망으로 막아 통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이 구간의 간식거리는 산딸기가 되어 주었다. 걷기 여행을 해오면서 따먹던 것들보다 작고, 새콤달콤한 맛도 약간 떨어졌지만 잠깐의 주전부리로는 충분했다. 거기다 산딸기를 장복하면 오줌줄기까지 굵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딸나무도 붉고 탐스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열매가 우리가 흔히 먹는 딸기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과실은 식용이 가능하고, 달달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산딸기가 지천인데 그보다 맛이 떨어지는 것을 일부러 먹을 필요가 있겠는가.

 14 : 10. 금곡교를 건너온 49번 지방도(진성로)로 올라선다. ‘외금마을의 군내버스정류장(이정표 : 동향면사무소 1.9km/ 안천소운동장 14.8km)이기도 하다.

 탐방로는 도로(진성로)’를 만나자마자 다시 헤어진다. 그리고는 능금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외금마을로 들어간다. 고려시대까지는 금구사로 불리었는데, 언제부턴가 바깥 쇠실로 바뀌었고, 이걸 한자화하면서 외금(外金)’이 되었다고 한다.

 외금마을 안내판. 저 조형물의 정체는 과연 뭘까? 아까 상능마을의 것에서는 뿔이 달려있어 한우를 유추해낼 수 있었는데, 요것에는 그마저도 없으니 정체불명의 짐승이 되어버렸다. 안내판이 마을 특산물로 꼽고 있는 한우가 맞겠지?

 탐방로는 마을회관(경로당)을 기점으로 삼아 유턴(U turn)을 한다. 그리고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자락을 에둘러간다. 지도에 나오는 말고개로 연결시키기 위해 일부러 마을로 이끈 게 아닐까 싶다. ‘고개넘어 동향길이란 브랜드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시답잖은 고개 하나를 추가했을 테고...

 14 : 19. 잠시 후 49번 지방도(진성로)와 다시 만났다. 웬만한 왕릉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큰 고분이 눈길을 끄는 고갯마루(이정표 : 동향면사무소 1.5km/ 안천소운동장 15.2km)이다. 묘역에 창령 성공 양세 효자비가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창령성씨(昌寧 成氏) 문중의 지체 높으신 분이 묻혀있지 않을까 싶다.

 탐방로는 이제 도로(진성로)를 따라간다. 도로 확포장공사로 인해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데, 오가는 차량이 드물어 먼지라도 덜 일으킨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14 : 24  14 : 29. 용담향교의 홍살문이 잠깐 들렀다가란다. 그것도 말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오란다. 그런데 용담향교가 왜 동향면에 있지? 이유는 간단했다. 원래는 용담면 옥거리(龍潭縣 邑治)에 있었으나 용담댐 수몰로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했단다. 다른 군에 병합된 옛 군현, 나중에는 옛 고을마저 물에 잠겨버렸다. 그러니 향교라고 해서 옛 터를 고집할 수 있었겠는가.

 향교로 들어가는 길가는 향교이건비, 헌성비, 공적비, 기적비 같은 빗돌들이 차지했다. 그중 용담향교 600주년 기념비가 가장 눈길을 끈다. 2017년 향교 중건 626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의미를 다지기위해 세웠다는데, 당시 행사에 정세균 국회의장까지 참석했단다. 향교에 대한 진안군민들의 자부심을 살짝 엿볼 수 있는 귀띔이었다.

 고려 초에 설립된 용담향교(龍潭鄕校, 전북 문화재자료 17) 1391(공양왕 3)에 현령 최자비(崔自俾)의 발의로 중건(重建)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남은 건물을 이듬해 박지술이 동쪽으로 약간 옮겨지었고, 1664(현종 5) 현령 홍석(洪錫)이 개축했는데 원래는 옥거리의 용강산 남쪽기슭에 있었으나 용담댐 수몰로 지금의 자리로 이건했다. 참고로 이 일대는 백제의 물거현(勿居縣)’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청거(淸渠)’로 이름을 고쳤다가 고려 충선왕 5년부터 용담(龍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는 독립된 군현이었으나 현재는 진안군에 포함된 상태다. 진안군 용담면·주천면·안천면·정천면 일대를 관할하였고 용담면 옥거리가 읍치(邑治)였다.

 주말이어선지 외삼문(外三門)은 굳게 닫혀있었다(박물관이나 미술관 등 대부분의 관람시설은 주말에 문을 열고 대신 월요일에 쉰다). 아쉽지만 대문 앞에 있는 비각을 살펴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용담향교 공적비(진안군 유형 향토문화유산 제2)’, 안에는 정유재란 당시 공자 등 다섯 성인의 위패를 옮긴 고계춘과 구순의 공적이 기록된 빗돌 두 기를 모셔놓았다. 화재의 위급함속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성현들의 위패를 지켜냈다나?

 14 : 31. 몇 걸음 더 걸어 도착한 동향체련공원’. 수박축제 등 동향면의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풋살장으로 여겨지는 전천후 경기장과 널찍한 잔디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 더. 요즘은 파크 골프가 대세라고 하더니 이곳에서도 파크골프장을 만드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천변도로를 따라간다. ‘능금리를 달려온 고원길도 이즈음 대량리로 바톤을 넘겨준다.

 구량천은 바닥이 암반으로 되어있어 물놀이하기에 딱 좋겠다. 거기다 오는 도중 양악천 등을 합치면서 등치까지 한껏 부풀렸다. 그런 풍경에 반해 잠시 내려가 탁족이라도 할까하다 그만두기로 했다. 인근에 건설 현장이라도 있는 듯 강물이 온통 흙탕물이었기 때문이다.

 14 : 38. ‘창령 성씨 집성촌이라는 대량리(大良里) 양지(陽地)마을에 이르니 지역 특산물인 수박을 벽화로 그려 넣었다. 맞다. 동향면에서 수박은 매년 수박축제를 개최해 올 정도로 자부심이 크단다. 축제기간에는 수박화채를 상시 시식할 수 있으며, 깜짝 수박경매, 수박왕 선발대회, 수박 빨리먹기 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단다.(작년은 폭우로 인해 취소됐다)

 구량천을 사이에 두고 양지마을은 둘로 나뉜다. 오른쪽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큰 마을, 구량천 건너에도 면사무소와 농협을 중심으로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두 마을은 파출소 앞에서 아치형의 인도교로 이어진다.

 다리는 장애인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계단 말고도 무장애 통로를 따로 만들어놓았다.

 두 마을은 인도교로만 잇는 것은 아니다. 차량통행이 가능한 구량교(양지길)과 동향교(49번 지방도)가 인도교 좌우에서 두 마을을 이어준다.

 14 : 47.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을 방향을 튼다. 그리고 몇 걸음 더 걷지 않아 면사무소를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진안고원길(13구간) 조형물은 버스정류장 옆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4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이 14.66km를 찍고 있으니 무던히도 더디게 걸은 셈이다. 길가에 널리다시피 한 간식거리를 따먹느라 지체했던 게 원인이지 싶다.

 

서해랑길 53코스(새창이 다리-외당마을 버스정류장)

 

여 행 일 : ‘24. 6. 8()

소 재 지 : 전북 군산시 대야면·회현면·옥산면 일원

여행코스 : 새창이다리(서단)금광교차로옥성마을(실제 출발지)광지산마을회현면사무소군산호수백석마을외당마을(거리/시간 : 19.6km, 실제는 11.84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3코스를 걷는다. 5로 이루어진 김제·군산 구간(51-55코스)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만경강의 둔치를 따라가다 하구역 직전에서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군산 시내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만경강변의 갈대밭과 군산호수가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난이도는 별이 3(5개 가운데)로 분류된다. 19km가 넘는 거리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들머리는 새창이 다리(군산시 대야면 복교리)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 IC에서 내려와 712번 지방도를 타고 김제방면으로 4km쯤 내려오다 만경대교 직전 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빠져나오면 신촌마을(복교리)’이 나온다. 마을 앞에 새창이 다리가 있고, 서해랑길(군산 53코스) 안내도는 다리 초입에 세워놓았다.

 만경강 하류 새창이 다리에서 시작해 외당마을 버스정류장(옥산면 당북리)’까지 19.6km를 걷는다. 만경강 하구의 둔치를 따라 걷다 드넓은 옥구들녘을 거쳐 군산 시내로 들어간다. 하지만 난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유로 옥성마을에서 시작했다. 첨부된 지도의 744번 지방도와 서해랑길의 붉은 선이 만나는 지점 오른쪽에 있는 삼거리이다.

 10 : 44. 실제 출발지는 신기촌 버스정류장(군산시 회현면 금광리)’으로 삼았다. 윗 이빨을 4개나 뽑고 인공 뼈까지 이식한 게 월요일이라서 무리한 운동을 삼가야 할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내 의지를 꺾지 못한 의사선생님도 가능한 한 거리를 줄여야한다는 전제조건 하에 트레킹을 허락해주셨다.

 10 : 44. 수로(水路) 옆 둑길을 따라 서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744번 지방도(남군산로)를 따라갈 수도 있었으나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아, 수로를 가운데 두고 내놓은 둑길을 따르기로 했다.

 10 : 48. 잠시 후 이른 옥성마을’. 전봇대에 매달린 노랑·빨강 리본이 서해랑길에 올라섰음을 알려준다(참고로 해파랑길은 빨강·파랑, 남파랑길은 노랑·파랑이다). ‘두리누비에서 제공한 트랙은 53코스 시점에서 이곳까지를 8.13km로 찍고 있었다. 반면에 내 앱은 0.24km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그러니 53코스는 정규 코스의 60%쯤을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옥성마을 표지석. 법정 동리인 금광리(金光里)를 구성하는 9개 자연부락(월평·월평2·원당·광지산·금당·신기촌·옥성·옥흥·옥삼) 중 하나이다. 주민들은 만경강 하구에 제방을 쌓아 만든 간척지에서 보리와 쌀 위주의 농업을 위주로 살아간다.

 탐방로는 수로를 따라 조금 더 간다. 비가 오시려는지 하늘이 더 어두워졌다. 비가 그것도 제법 많은 양이 내릴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들어맞는 것일까? 하지만 고맙게도 하늘은 우리 편이었다. 빗방울이 잠시 떨어지더니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한다.

 10 : 50. ‘남평 문씨(南平文氏)’ 제각

 제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744번 지방도(남군산로)를 가로질러 금광리(회현면)의 너른 평야지대로 들어간다.

 우렁이 농법은 한때 친환경 벼 재배의 아이콘으로 여겨졌었다. 아니 요즘도 우렁이 방사에 대한 뉴스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화학 제초제 대신 물속의 풀을 먹는 데는 우렁이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수로의 벽에 우렁이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들녘은 모내기가 한창이다. 하지만 곡식 낱알을 누렇게 매단 채로 남아있는 곳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채종포(採種圃)’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은 품종을 하이스피드로 적고 있었다. 경영비를 절감해보려는 축산농가에서 하이스피드라는 사료용 귀리를 심었고, 또 최고의 종자를 얻기 위해 수확시기를 맞추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이스피드 고숙기(낱알이 완전히 익는 시기)’에 채종해야 발아율이 가장 높아진다니 말이다.

 11 : 00. ‘광지산 마을에 이른다. 아니 동구 밖에 있는 버스정류장이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동서로 뻗어나가는 도로(‘회미로’, 회현면의 옛 이름이 회미였단다)를 따라 같은 금광리의 광지산, 금당, 원당, 월평 등의 자연부락들이 들어서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만경강유역의 간척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수확한 쌀은 옥토 진미라는 브랜드로 시장에 나온다.

 11 : 06. 광지산마을의 북쪽 끝에는 두릉 두씨(杜陵 杜氏)’ 문중 제각이 지어져 있었다. 참고로 두릉두씨 시조는 중국 송나라에서 병부상서를 지낸 두경령(杜慶寧)’이다. 타 세력에 밀린 그가 일족과 함께 고려의 궁지현(조선시대의 만경현)으로 이주했고, 이를 안 조정에서 만경지역 일부를 식읍으로 하사하며 두릉군으로 삼았단다. 두경령의 11세손인 두승손(杜承孫)이 만경에서 옥구로 이주한 이후 후손들이 회현면·옥산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오는데, 이곳 광지산마을도 그중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금광리에서 대정리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에도 민가 몇 채가 들어섰다. 광지산마을의 윗뜸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역사는 본뜸보다도 더 오래된 듯 당산목으로 여겨지는 팽나무 한 그루가 커다란 등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팽나무 뒤로 보이는 지성어린이집도 나그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동화나라에서나 볼 법한 궁전을 커다랗게 지어놓았다. 하지만 난 담벼락에 붙어있는 풍경화에 더 관심이 간다. 대체 어디에 있는 산이기에 저런 멋진 풍경을 보여줄까?

 11 : 10. 고개를 넘으면 대정리(大政里)’이다. 회현면의 소재지답게 건물의 등치부터가 달라진다. 2층은 기본. 3층짜리도 흔하고, 귀하지만 고층이랄 수 있는 4층 건물도 눈에 띈다.

 탐방로는 마을을 동서로 관통하는 711번 지방도(회현로)를 따라간다. 길가에 늘어선 면사무소·파출소·우체국·농협 등 공공시설들이 이곳이 회현면의 행정 중심임을 알려준다. 음식점·편의점·상점은 물론이고 카페까지 들어서있는 게 면소재지치고는 제법 번화하다는 느낌을 준다.

 회현면사무소. 회현면(澮縣面)의 옛 이름은 회미현(澮尾縣)이다. 백제의 부부리현이었던 것을 통일신라의 경덕왕이 개칭했다. 고려 때까지 회현현(澮縣縣)으로 남아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옥구군 장면 풍면이라는 생뚱맞은 이름으로 나누어진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 면이 통합되어 옥구군 회현면이 된다. 현재 8개 법정 동리(월연리·금광리·대정리·세장리·고사리·학당리·원우리·증석리)를 관할한다.

 11 : 14. 회현사거리. 비석이 3개이니 비석군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문종철이라는 면장의 청직기념비를 가운데 놓고 양옆에 다른 이(인터넷에서도 조회가 되지 않는)의 영세불망비와 기념비를 세웠다.

 건너편에는 회현중학교가 있다. 무작정 교정으로 들어가는 게 싫어, 문지기 삼아 세워둔 장승만 카메라에 담고 자리를 떴다. 아니 장승에 쓰인 나를 무엇에 쓸까’, ‘어떤 세상을 만들까의 의미를 가슴에 담아왔다. 그리고 그 뜻이 회현중학교 학생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빌어줬다.

 11 : 20. 회현초등학교.

 11 : 22. 회현초등학교의 담장 끝. 삼거리에서 711번 지방도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서기길을 따른다. 모퉁이의 청암산 생태학습장(1km)’ 입간판을 참조하면 되겠다.

 서기마을(대정리)은 서울 근교의 전원주택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지어진 집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담쟁이넝쿨을 뒤집어쓰고 있는 창고형 건물에 더 눈길이 갔다. 공생(共生)을 아는 놈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감고 기어올라도 엉겨서 살아가지 진까지 빨아먹지는 않으며, 줄기를 움푹 패게 만들지만 죽이기까지는 않는 것이다. 벗하며 즐길 줄 안다고나 할까?

 옥산저수지로 들어가는 1km 정도의 구간은 도로 확포장공사가 한창이었다. 그건 그렇고, 비 멎은 하늘은 언제 빗줄기를 뿌렸냐는 듯이 싱그러운 햇살을 내보낸다. 맑고 푸른 게 영락없는 가을하늘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공활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사부작사부작 걸어보자. 마침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까지 빼어나지 않는가.

 이때 청암산(118.8m)’이 눈에 들어온다. 군산호수를 에워싸고 있는 저 산은 원래 취암산(翠岩山)’이었다. 푸르다는 의미인데. 일제강점기에 푸를 청()’자를 써서 청암산으로 이름을 둔갑시켰다나? 아무튼 저수지를 둘러싸고 있는 저 산의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구슬처럼 예쁘다고 해서 옥산이란 지명이 생겨났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옥산(玉山)’이란 지명은 저수지가 축조되기 전인 조선시대에도 존재했었다. 옥구현의 다른 명칭인데, ‘대려골 북쪽, 꼭대기에 흰 돌이 있다는 작은 산의 이름에서 유래했단다.

 11 : 30. ‘죽동마을에 이른다. 세장리를 구성하는 4개 자연부락(죽동·신성동·사오개·가운데뜸) 중 하나로 마을이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댓골로 불리다가 죽동이 되었다.

 이왕에 들렀으니 죽동마을에 대한 이야기도 한번쯤 들어보면 어떨까? 주차장 옆에 마을의 유래를 담은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마을은 한때 80여 세대 400여 명이 살았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하지만 농촌 공동화현상을 피해가지 못해 한적한 시골마을로 전락했던 모양이다. 최근 은퇴자 및 자녀를 관내 초·중학교로 입학시키고자하는 학부모들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옛 영화를 되찾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사오갯 샘이라고 한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서, 인근 주민들은 물론이고 타 지역 사람들까지 물지게를 지고 찾아와서 물을 길어가는 진풍경을 연출했다는 소문난 우물이다. 해방 직후 콜레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나 죽동마을에서는 일절 해를 입지 않았는데, 주민들은 사오갯 샘 덕분으로 믿고 있다나?

▼ 11 : 37. 마을 뒤 고개(‘사오개가 아닐까 싶다)는 온통 대나무 숲으로 뒤덮여있다그 대숲이 만들어놓은 터널을 지나면 작은 광장이 나온다군산시의 명품 걷기 길인 구불길을 만나는 지점으로이와 관련된 안내판들을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이 세워놓았다.

 군산호수를 도는 방법은 구슬뫼길(구불 4), 수변길(13.8km), 청암산 등산로( 7km) 등 세 가지가 있다. 이중 수변길이 등산로보다 두 배 가까이 긴데, 이는 리아스식 호숫가를 굽돌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걷게 될 구슬뫼길(구불4)’은 수변길과 청암산 등산로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이어나간다. 어느 구간에서는 그 길을 따르기도 한다.

 이곳을 설명하는 안내판도 눈길을 끈다. ‘사오개는 옥산저수지가 축조되기 전 회현면 대정리·월연리·세장리 사람들이 옥산이나 군산으로 갈 때 넘나들던 고개라고 한다. 6척 이상의 큰 길이 시내까지 연결되어있었으나 1939년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대부분 물속에 잠겨버렸단다.

 이 사진은 군산시청을 나무라기 위해 게시했다. 서해랑길의 이정표이니 가장 필요한 것은 종점과 시점까지의 거리다. 그런데도 앞뒤 주요 포인트만 표시했다. 그러니 대체 얼마를 걸어왔고, 또 앞으로 얼마를 더 걸어야 할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하단의 지도라도 옳게 표시했으면 좋았으련만 시점 및 종점까지의 거리 대신 위 방향표지판에 적힌 거리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 군산 지역에서 만난 이정표는 모두가 다 이러니 문제다. 30만에 가까운 인구를 자랑하는 큰 도시답지 않은 행정이라 하겠다.

 이후부터는 구슬뫼길(구불4)’을 따라간다. 어느 선답자는 청암산 등산로를 따르면 빠르긴 하나 호수의 그윽한 맛을 느끼기 어렵고, 수변길은 편하지만 호수의 다양한 표정을 엿볼 수 없다고 했다. ‘구슬뫼길은 그런 두 길의 장점을 합쳐놓았다니 이를 따르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나 더. 구슬뫼길의 길이는 수변길과 비슷하다고 했다. 하지만 난이도는 약간 더 높단다. 청암산 등산로와 만나려고 고도를 높이는 구간이 종종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탐방로에 들어서는 순간 서해랑길 표식은 사라져버린다. 대신 구슬뫼길 이정표가 길을 안내해준다. 참고로 구슬뫼길은 쉬지 않고 걸어도 6시간 이상 걸리는 긴 코스다. 그래서 사람들은 옥산저수지 주변을 도는 3-4시간짜리 단축 코스를 선호한다. 옥산저수지 둘레만 그려놓은 저 안내도가 그 증거이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나아가는 산책로는 무척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호숫가 습지로도 길을 냈다. 다리를 놓듯 테크로드를 조성,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자연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가끔은 호수를 향해 툭 튀어나간 전망대도 만들어놓았다.

 전망대에 서자 발아래까지 다가온 호수가 살갑게 맞는다. 수면 위는 초록의 연꽃잎으로 한가득이다.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인 가시연꽃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군산호수는 가시연꽃의 주요 서식지로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개화시기(7-8)가 아니어선지 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가시가 돋은 긴 꽃대와 자줏빛 꽃이 무척 아름답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호숫가 곳곳에는 쉼터를 배치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자에 벤치는 기본, 심지어는 그네형의 의자까지 만들어놓은 곳도 보인다.

 강의실을 연상시키는 의자 배열이 생태학습장이 아닐까 싶다. 안내도에 나와 있던 습지관찰원이 이곳일지도 모르겠다.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오랜만에 느림의 미학을 즐기기로 했다. 6km 이상이나 코스를 단축해서 시간까지도 느긋한데 구태여 서두를 일이 없지 않겠는가. 덕분에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호수와 주변 숲의 그윽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길은 호숫가를 따라간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시야가 열리며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구슬뫼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대나무 숲을 걷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울창한 대나무 숲이 가고 또 가도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진다.

 1930-1940년대, 만경강 하구에는 민물고기나 바닷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어촌마을이 있었다. 그들은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 죽동마을로 몰려왔고, 댓금 흥정이 끝나면 대나무 다발을 바리바리 실은 달구지를 몰고 흙먼지 폴폴거리는 길을 되돌아갔단다. 밀물과 썰물을 이용한 고기잡이 방식인 쑤기놓기에 대나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주민들은 대나무를 잘라 팔면 논농사로 얻는 소득보다 대여섯 배나 더 많이 벌 수 있었다나? 당시 대나무 군락이 얼마나 넓게 분포되었을 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얘기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사연을 품은 대숲이니 무작정 통과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듯 작은 공간을 만들고 청암정이란 정자를 들어앉혔다. 빙 두른 판넬은 생태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청암산과 옥산저수지 주변에서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들의 생태계를 소개하고 있다.

 청암산 둘레길의 지도는 큐알 코드로도 받아볼 수 있는 모양이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으니 어슬렁어슬렁 걸어보란다.

 문제는 나 하나쯤이야이다. 누군가 죽순에 손을 댔던 모양이고, 참다못한 지자체는 저런 팻말을 매달아놓았다. 나무껍질이나 식물을 무단채취 말라는...

 잠시 후, 이번에는 왕버드나무 군락지를 지난다. 물과의 친화력이 강한 나무라서 계곡의 하류나 호숫가에서 심심찮게 만나는 풍경이기도 하다. 깊은 물속에서도 썩지 않고 잘 자라는 특성 덕분이다. 수질정화 능력이 뛰어나서 일부러 심는 경우도 있다.

 그중에서도 호수가 품었을 때를 제일로 친다. 아랫도리를 물속에 담그고 있는 풍경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거기다 아침 안개라도 피어오를라치면 그 풍경은 창조주만이 그려낼 수 있는 작품으로 승화된다.

 다시 나타난 대나무 숲.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솟아오른 대나무 숲길. 깊은 호흡 두어 번이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맑아진다. 이산화탄소를 몽땅 빨아들이고 산소를 품어내는 대나무 숲의 효능 때문일 것이다. 하나 더. 안내도는 이곳을 죽림원으로 적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대나무 숲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히는 담양의 죽녹원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 자신감은 안내판에서도 확인된다. 대나무의 음이온 샤워로 걱정과 긴장을 풀 수 있는 청암산 죽향길에서는 카메라를 들이대는 곳마다 최고의 포토존이 된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아까보다 더 울창해진 대숲은 비밀의 숲이란 밀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누군가는 이 숲을 정돈되지 않았다고 적고 있었다. 담양 죽녹원이나 울산의 십리대숲 등 잘 가꿔진 대숲들의 조형미에 견주지 못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외려 그 덕에 한결 자연스럽고 웅숭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소나무가 섞인 풍경이 이채롭기 짝이 없다.

 몇 걸음 더 걸어 만나는 또 하나의 전망대. 안내도는 이곳을 수변생태관찰장으로 적고 있다. 습지가 잘 발달된 곳으로 곤충과 야생화, 새들이 공생하는 체험학습장이다.

 안내판은 호수와 접한 어림을 연못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청암산에서 유일하게 연중 물이 마르지 않는 습지를 이용한 생태연못으로, 군산호수에 서식하는 수생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단다.

 맨발로 걷고 있는 여행자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만큼 길이 곱다는 증거일 것이다.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인 듯. 포토존도 만들어 놓았다. 구슬뫼길을 다녀간 여행자들의 앨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명소이다.

 사랑꾼인 집사람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냉큼 사랑마크부터 만들고 본다. 그걸 본 나는 입이 함박만큼 벌어진 채로 카메라에 주워 담는다.

 숲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호숫가의 가장 큰 단점은 길이 질퍽거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들뫼길에서는 그런 걱정은 놓아도 된다. 조금이라도 질퍽거릴라치면 맷돌모양의 석판을 징검다리처럼 놓았고, 그로도 안 될 경우에는 데크로드를 설치했다. 각종 편의시설도 눈길을 끈다. 노란색 안내판하며 둥근 통나무의자, 나이테가 선명한 널빤지 모양의 긴 의자, 녹색 화살표가 선명한 빨래판 모양의 이정표 등 세심하게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쉼터도 각양각색이다. 정자나 파고라는 기본. 특이하게도 대나무를 엮어 만든 곳도 눈에 띈다. 잠시나마 급할 것 없이 살아가던 원시인이 되어. 시간에 쫒기지 말고 푹 쉬다 가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12 : 41. 구불구불, 한없이 구불대던 숲길을 빠져나와 둑으로 올라선다. 초입에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구불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구불길은 군산시에서 조성한 둘레길이다.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수풀이 우거진 길을 여유·풍요·자유를 느끼며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은 여행길로 만들겠다는 게 조성 목적이다. 모두 11개 코스로 나뉘는데 비단강길·햇빛길·큰들길·구슬뫼길·물빛길·달밝음길·탁류길·고군산길 등 이름만으로도 정겹다. 그중 옥산저수지를 에둘러 돌아가는 구슬뫼길은 구불길의 정수 중 하나로 꼽힌다. 서해랑길은 이 구슬뫼길의 일부 구간을 따라 걷는다.

 길이가 400m쯤 되는 저수지 제방을 따라간다. 군산호수(옛 옥산저수지)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조성됐다. 공업용수 확보가 주요 목적이었다. 1963년에는 군산의 제2수원지 노릇을 하느라 상수원보호구역에 지정됐고, 자연스레 사람들의 출입도 통제됐다. 그러다 2008, 45년 만에 상수원보호구역에서 해제됐다. 호수를 에둘러 아름다운 수변길이 조성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구슬뫼길(구불4)’은 옥산저수지의 호숫가를 에돈다. 한자이름 구슬 옥()’ 뫼 산()’을 순우리말로 바꿔 브랜드를 삼았다. 거리는 18.8km. 군산역에서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이영춘 박사 고가와 옥산저수지 등을 지나 남내마을까지 간다.

 둑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놓았다. 탐방객들을 위해 망원경까지 배치했으니 잠시 머무르며 조망을 즐겨보자.

 난간에 서자 옥산저수지가 드넓게 펼쳐진다. 뒤로는 청암산의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가지런히 도열하고 있다. 저수지에 물이 차면서 산 중턱까지 물에 잠긴 산은 산봉우리들만 동글동글하게 남았다. 그걸 구슬이라고 본 사람들은 옥산이란 지명을 만들어냈고.,.

 물억새 사이를 걸어볼 수도 있다. 둑 아래 억새밭을 조성하고 산책로를 내놓았다. 지금은 허리춤에도 못 미치지만 늦가을쯤이면 흐드러진 억새꽃이 장관을 이룰 게 분명하다.

 12 : 52. 제방 끝(군산역에서 출발한 구슬뫼길로 봤을 때는 수변길의 초입이 된다)에는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청암산이 좋다는 글자 조형물을 중심으로 대나무로 만든 대형 오리, 토끼와 거북이 등 여러 조형물을 배치했다. 가장 큰 볼거리로 꼽히는 가시연꽃은 아예 쉼터로 만들어놓았다.

 전국은 요즘 맨발걷기 열풍으로 뜨겁다. 맨발로 걸으면서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이 늘면서 각 지자체마다 각자의 특성에 맞는 맨발 길을 조성하느라 부지런을 떤다. 하긴 맨발 걷기가 발바닥의 신경을 자극해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체내 독소배출이나 불면증 개선, 치매 예방 등에 도움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어싱족(earthing+)’까지 등장할 정도이니 군산시라고 해서 별 수 있겠는가.

 12 : 57. 저수지 아래는 양수장관리사무소가 들어서 있었다. 사무소 마당은 화장실까지 갖춘 대형주차장으로 꾸몄다. 시골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다소 생뚱맞게까지 보이지만, 이는 옥산저수지의 호반을 따라 내놓은 걷기 길이 그만큼 많이 입소문을 탔다는 증거이도 하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걸어온 구슬뫼길 전북천리길에 포함되어 있는 모양이다. 군산시의 걷기 여행길 중 서너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전북천리길은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적 가치, 이야기가 있는 길을 엄선해 선정한 명품 둘레길이이다. 14개 시·군에서 3-4개씩 선정했는데, 각 길들은 해안길·강변길·산들길·호수길로 구분되며 짧게는 두세 시간에서 길게는 대여섯 시간을 걷는다. 현재 44개 노선 405km의 길이 개통되어 있다.

 12 : 59. 서해랑길은 이제 옥구평야를 향해 달려간다. ‘새만금이 아닌 기존의 들녘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이때 옥산면 일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오른쪽에는 옥산면 소재지인 옥산리의 여로마을이 있다. 왼쪽은 같은 옥산리인 대려마을’, 드넓게 펼쳐지는 석교들 너머에서는 군산시가지의 고층빌딩들이 삐쭉이 고개를 내민다.

 눈에 들어오는 석교들도 무척 넓었다. 옥산저수지에서 시작 경암동에서 금강에 합류되는 경포천이 만들어놓은 충적평야이다. 하지만 막힘없이 펼쳐지면서 지평선을 만들어내던 새만금의 모습은 아니다. 좀 넓다 싶으면 옹기종기 마을이 들어앉았고, 그 너머 산자락에서 들녘은 끝나버린다.

 탐방로는 농로를 빌려 쓴다. 대려마을 앞에서 잠시 차도로 올라서기도 하나, 몇 걸음 걷지 않아 다시 농로로 내려서버린다. 그 길의 양옆으로 옥구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지평선으로 대변되던 김제들녘,  징게 맹게 외배미들 만큼은 아니어도 걷고 또 걸어도 끝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눈이 모자라 다 볼 수 없다는 표현에 어울리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평야지대에서 수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래선지 농로 옆에는 수로가 항상 따라다니고 있었다. 수로의 크기가 조금씩 다를 뿐...

 이름도 생소한 송엽국(松葉菊)’이란다. 솔잎 모양의 입에 꽃은 국화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꽃말은 나태 또는 태만. 연분홍(자주색과 흰색도 있다)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꽃이 너무 아름다워 꽃에 푹 빠져서 나태해진다나?

 그제가 망종(芒種)’ 수확한 보리가 밥상에 올라오고 보리를 베어낸 논에 모내기를 한다는 절기다. 그래선지 들녘은 이미 모내기가 끝나간다. ‘고양이 손도 빌린다’, ‘부지깽이도 나와서 돕는다라는 속담까지 오가는 농번기가 시작된 것이다. 아니 지금이야 기계가 다 해주니 조금은 나아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 이맘때는 들판은 온통 사람들로 북적댔다. 어린 모를 찌고 모심기를 시작하면 한 손에 막걸리 주전자를, 머리에는 정성스럽게 준비한 못밥을 이고 오던 우리네 어머니도 있었다. 이젠 그런 정다운 풍경들이 사라졌지만, 올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해 본다.

 13 : 37. 길고도 길었던 농로는 백서마을에 이르러서야 끝을 맺는다. 법정 동리인 당북리(堂北里)를 구성하는 여러 자연부락(원당·백석·한림·석교·건니법·동숙·뒤미티·들랑뒤·새터·서숙·서원뜸·옥석) 중 하나다. ! 걷다가 마주치는 상황, 즉 방향을 꺾는다던지, 옥구선 철도의 아래를 지난다던지 등 너절한 설명은 생략했다. 이 구간은 앱을 보거나, 서해랑길의 리본을 찾아가며 걷는 게 최상이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백석로를 따라간다. 2차선에다 심심찮게 차량이 오가지만 보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다.

 13 : 46. 국도 21호선(새만금북로)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하면 원당마을이다. 당북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에 불과하지만 역사는 모체인 당북리보다 더 오래됐다. ‘당북(堂北)’이란 지명이 원당(元堂)’의 북쪽에 위치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니 말이다.

 13 : 51. 당북초등학교.

 13 : 58. 잠시 후 지곡동 지구 아파트단지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1.84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의사의 권유를 핑계 삼아 거리를 단축했고, 그로 인해 생긴 여유시간을 느림의 미학으로 소비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어진 시간보다 40분이나 먼저 도착했지만...

 서해랑길(군산 54코스) 안내도는 외당마을 버스정류장 오른편에 세워져 있다.

▼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삶은 저마다의 길을 가는 것이다그 길은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항상 선택이 수반된다어떤 길을 갈 것인지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인지누구와 함께 갈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오늘 우리 부부가 함께 걸었던 여정도 그런 결정 중 하나였다그 여정에 배려와 사랑이 넘쳤기에 훗날 인생을 복기할 때 아름다운 추억만 새록새록 돋아나지 않을까?

 

여행지 : 아제르바이잔. 고부스탄 암각화 유적  진흙 화산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 이란 및 러시아와 접한 카스피 해 연안의 국가.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데 경제의 상당 부분을 석유와 천연가스가 지탱하고 있어 불의 나라로 불린다. 동유럽권에 속해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까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 달리 아제르바이잔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에 서아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점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동유럽권으로 보는 이유는 19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영향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고부스탄(Gobustan) :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인류 문명의 발상지로 여기는 곳. 반사막지대 바위산에 4만 년 전에 기록된 6천여 점의 암각화가 고대인들의 생활상과 문화를 보여준다. ·낙타 같은 동물과 자연현상, 사냥을 하거나 축제를 여는 사람들 등이 바위마다 빼곡히 그려져 있다. 덕분에 숨은그림찾기 하듯 그림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바쿠를 출발한지 한 시간여. 버스는 우리를 드넓은 반사막지대 언덕배기에 내려놓는다. 암각화가 있는 바위산으로 오르기 전 먼저 고부스탄 박물관부터 들러보라면서.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박물관에 들러 꼼꼼히 알아본 다음 투어를 시작해보자. 참고로 고부스탄(Gobustan)’은 돌을 뜻하는 고부(Gobi)’와 땅을 의미하는 스탄(Stan)’의 합성어라고 한다. ‘바위가 널리다시피 한 지역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코카서스 3(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여정이다. 첫 번째로 들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수도인 바쿠와 고부스탄, 샤마흐, 쉐키를 방문하도록 일정이 짜여있다.

 고부스탄 암각화박물관. 여기서 암각화에 대한 내용을 어느 정도 학습하고 현장으로 간다. 박물관은 관람객들이 바위에서 관찰이 어려운 그림에 대해 미리 확인하고, 또 암각화가 무엇인지, 왜 그려졌는지, 이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알기 쉽게 전달하고 있다. 특히 암각화가 새겨진 시대별 문화, 그림의 형태와 위치 등을 전시와 영상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해 놓았다.

 안으로 들어서면 수많은 문양을 만난다. 바위에 새겨진 여러 형태의 문양을 한데 그려 전시해 놓았다. 6,000여 개의 암각화 가운데 그림이 명확하게 관찰되는 것은 200여 개에 불과하다고 했다. 숨은그림찾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니 저 그림들을 꼭 기억해 두었다가 이따가 바위산을 누비면서 활용해보자.

 그림은 당시 사람들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며 새긴 것이다. 수렵 및 채취를 하는 그림, 배를 타고 노를 젓는 사람들, 사슴·낙타·소 같은 동물, 춤추는 사람들, 창을 쥔 전사, 태양과 별 등 하나하나가 삶이고 역사이다. 덕분에 우린 이를 통해 당시의 문화와 기후, 식생 등을 이해할 수 있다.

 고부스탄 암각화의 유래부터 알아보자. 고부스탄 암각화 문화경관은 1939~1940년에 최초로 발견되었으며, 1947년부터 ‘I. M. 디자파르사드(Djafarsade)’에 의해 체계적으로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는 750개 암석에 있는 3,500개 이상의 이미지를 기록하고 분석했다. 그리고 추가 발견을 한 ‘R. 디자파르굴리(Djafarguly)’에 의해 확대됐다. ‘D. 루스타모프(Rustamov)’ 10,000년의 기간을 이해할 수 있는 깊이 2m의 지층을 발견했고, 청동시대의 판각 조각에서 의인화된 형상을 통해 대략적인 제작시기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전기 구석기시대(the upper paleolithic, 35,000-15,000년 전)와 중석기시대(the mesolithic)의 자연환경도 알려준다. 당시의 생활상과 암각화를 비교해가며 살펴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이곳에는 6천여 개의 암각화가 모여 있다고 한다. 바위지대에 사람이 살던 동굴과 무덤이 흩어져 있어, 빙하시대 말기부터 구석기·신석기를 거쳐 청동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려준단다.

 고부스탄의 암각화 컬렉션은 선사시대의 사냥, 동식물, 인간들의 생활방식, 선사 및 중세 시대의 문화적 연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암각화를 새길 당시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멧돼지·여우·사슴·표범·영양 등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전시했다. 원시인들의 삶도 재현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나무··조개껍질·사슴의 뿔 등으로 여러 가지 사냥도구를 만들고, 뼈나 뿔로 바느질을 해 만든 옷을 지어 입던 원시인의 모습에서 우리네 조상의 삶을 유추해본다.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골과 생활용품 등도 전시돼 그 시대를 짐작하게 해준다. 돌도끼 돌칼 같은 석기가 눈에 띄는가 하면, 골각기로는 바늘·빗 같은 생활도구와 목걸이 같은 장신구가 있다. 토기는 민무늬 토기로 갈색과 검은색 계열이 주를 이룬다.

 박물관 앞. 원시인의 주거지를 복원해 놓았다.

 박물관에서 바라본 바위산. 저곳에 암각화 문화유산이 있다. 유네스코는 아제르바이잔 중부의 반사막 지대, 바위투성이들의 표석(漂石) 평원으로 이루어진 3개 지역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놓았다. 빙하시대 말기의 장마부터 후기구석기, 중세까지 인간이 살던 유적(동굴·정착지·묘지)과 함께, 그들이 남긴 6,000개 이상의 뛰어난 암각화 컬렉션이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에서 암각화가 있는 바위산까지는 1km 남짓. 걸어서 가기에는 다소 먼 거리라 하겠다. 그래선지 바위산 입구 주차장까지 우리가 타고 온 버스로 이동했다.

 

 주변은 온통 바위투성이다. 바위산이 뭔가(지진일지도 모른다)의 영향을 받아 조각조각 떨어져나간 모양새라고나 할까? 저 바위틈에서 인간이 거주했고, 또 그네들의 삶을 하나하나 바위에 그려 넣었다.

 고부스탄 암각화(Gobustan Rock Art Cultural Landscape)’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세계 최고의 선사시대 유적으로 사라져 버린 옛 삶의 방식에 대한 이례적인 증거라면서. 암각화는 오늘날보다 따뜻하고 습했던 당시의 사냥과 어업에 관한 활동들을 아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옛날 이곳은 카스피 해에 잠겨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바다의 융기로 육지화 되었고, 지진으로 부서지면서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서로 얽히고설켰다. 우리네 조상들은 그 속에다 삶의 흔적들을 남겼다. 1930년대 채석장에서 일하던 인부가 그것을 우연히 발견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지구촌 나그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고부스탄 암각화 문화유산’. 이를 알리는 바위를 그냥 지나칠 집사람이 아니다. 바위에 걸터앉아 떡하니 폼부터 잡고 본다.

 유적지는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답게 잘 보존되고 있었다. 탐방로 양쪽에 금줄을 쳐 유적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했다. 그런 길이 바위 사이를 누빈다. 작은 게 집채만 하고, 큰 것은 웬만한 빌딩보다도 더 큰 바위들이 숲을 이루는데, 그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잘도 나아간다.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답게 탐방객들은 지켜야 할 게 많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위에 올라가면 안 된다는 점이다. 어디에 암각화가 그려져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담배도 피우지 말란다. 하지만 주위에는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았다. 불에 탈만한 시설물도 만들어놓지 않았다.

 손도 대지 말란다. 암각화가 마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맞다. 그림 하나하나가 그 시대를 대표한다는데 이를 말이겠는가. 가장 오래된 암각화에는 염소 사냥이나 창으로 의식 춤을 추는 장면, 반면에 나중의 그림에는 말에 오르지 않은 사냥, 집단 작업, 수확, 불 근처에 있는 여성의 이미지 등이 주를 이룬단다. 그런 암각화의 주제를 통해 인간의 진화 과정을 알 수 있다나?

 물론 금줄을 넘어가서도 안 된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겠지만, 바위산의 특징인 독사로부터 여러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또 다른 명분도 있다.

 탐방로는 몇 개의 암벽화를 둘러볼 수 있도록 꾸몄다. 그림 앞에는 전망데크와 함께 그림에 대한 설명판을 세워놓았다.

 ‘Boyukdash mountain. upper terrace, rock No.29’은 지그재그 무늬로 이루어진 암각화 20(20 petroglyphs consistion of zigzag pattern)으로 구성됐다. BC 10세기 작품으로 14명의 인간. 사슴, 보트 등이 그려져 있다. 참고로 고부스탄의 암각화는 BC 10~18세기에서 중세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단다.

 암벽화 실물

 ‘Ana Zaga shelter. stones No.29 and No.31’ 39명의 남자와 24명의 여자, 그리고 야생소, 염소, 보트 등이 그려져 있다. ! 암각화 보존을 위해 암각화마다 번호가 부여되어 있었다.

 암벽화 실물

 ‘Ana Zagha shelter. stones No.30 and 31b’. 야생소, 염소, , 인간을 찾아 볼 수 있다. 참고로 암각화에는 힘세고 중요한 존재는 크게 그리고, 약한 존재는 작게 그려져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소는 크게, 말은 작게 그렸다는 것이다. 농경시대에 접어들어 가축을 치면서부터 동물들이 사람보다 작게 나타난단다.

 암벽화 실물

 요것은 황소대피소(Okuzler(Bull) shelter)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하나 더. 75년경 로마황제 도미티아누스(Domitian)가 통치하던 때 로마의 병사들이 이곳을 통과하며 바위에 새겨놓은 글도 발견되었다는데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암벽화 실물

 지름 10-40cm, 깊이 10-20cm의 저 구멍은 ‘Cup marks’라고 했다.  움직일 수 없는 컵(unmovable cup)’은 석제 공구로 파냈단다. 고고학적 기록에 의하면 중석기 말기에서 신석기 초기까지의 과도기에 제작되었는데, 빗물 또는 제물용 피를 받거나, 식사 준비용으로 사용되었단다.

 ‘Cup marks’ 설명판

 가발 대시라는 아제르바이잔, 그것도 고부스탄에서만 볼 수 있는 천연 음악석이라고 한다. ‘노래하는 돌이라고도 하는데, 2m쯤 되는 큰 바위가 작은 돌과 부딪히자 텅 빈 울림소리가 났다. 그게 아제르바이잔어로 가발이라 불리는 탬버린 소리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암각화 지역은 어디서나 카스피 해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전망대가 된다. ‘카스피 해는 현재 줄어드는 중이라고 했다. 멀리서 보면 크고 아름다운 호수지만, 가까이서 보면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단다. 그 증거가 이곳이다. 과거에는 암각화가 있는 고부스탄 언덕까지 물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암각화에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다음은 같은 지역(고부스탄)에 있는 진흙화산이다. 세계 7대 경관 후보지 28곳에 선정된 곳으로, 불덩이 같은 용암 대신 붉은 진흙이 지면으로 솟아난 이색적인 지형을 볼 수 있는 명소이다. 오일과 가스가 함유된 짙은 회색 진흙의 기포가 터지면 가스냄새가 나기도 하는 등 작은 진흙 화산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생생한 지형 형성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진흙 화산을 보러가는 길은 마치 오지탐험을 연상케 했다. 비포장도로여서 대형 버스가 갈 수 없어 까라코사(Qarakosa)’에서 구 소련시대에 생산된 낡은 중고차로 갈아타고 비탈진 민둥산을 올라가기 때문이다. 저절로 포켓에서 지갑을 꺼냈을 정도로 운전기사의 서비스도 최고였다. 길이 아닌 산비탈을 속도감 있게 오르내리며 스릴을 느끼게 해주는가 하면, 아제르바이잔의 노래를 계속해서 틀어준다. 귀에 익은 노래도 두어 곡 섞여있는 걸 보면 우리나라에서 온 관광객의 숫자가 만만찮다는 얘기일 것이다.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언덕을 굽이돌아 도착한 곳에는 분화구 같은 나지막한 봉우리가 형성되어 있다. 진흙화산이 분출하면서 높아진 일종의 오름이다. 그 중 일부에서는 아직도 묽디묽은 진흙의 분출현상이 진행된다. 진회색 진흙을 머금고 뽀글뽀글 끓으며 톡톡 분출하고 있다.

 진흙화산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다. 가이드는 햇빛이 무척 강한데다 그늘까지 없으니 알아서 보호조치를 하란다. 하지만 선크림 바르는 걸 싫어하는 우리 부부는 카스피 해변의 따가운 햇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불그스레 잘 익어버렸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분화구가 있는 봉우리로 달려간다. 그리고는 낯선 풍경의 경이로움에 정신을 빼앗겨버린다. 분출이 강하지 않아 흙이 튈 염려도 없다. 그러니 가까이 다가가 꼼꼼히 살펴보자.

 이곳은 용암 대신 진흙이 지면으로 솟아오른다. 부글거리는 진흙의 용솟음은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가스가 섞인 진흙이 솟아오르면서 생기는 기포라고 한다. 진회색 기포가 터지면 가스냄새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지구에는 이런 진흙화산이 700개가 있다고 했다. 그중 300개가 이곳 아제르바이잔에 분포한단다. 가히 진흙화산의 천국이라 할 수 있겠다. ! 화산은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했다. 2001년과 2010년에 폭발을 일으킨 로크바탄 화산은 그 불꽃이 50m 이상 솟아올랐다고 한다.

 자그마한 화산 분화구에서 진흙이 끊임없이 부글거리는 모습은 보면 볼수록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가이드는 진흙이 미세하기 때문에 머드팩(mud pack)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 때문에 이곳을 찾는 젊은이들도 있단다. 하지만 샤워장이나 탈의실 등 이를 위한 편의시설은 전무했다.

 운전기사는 이곳에서도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고 있었다. 분화구에 대고 라이터를 켠다. 그러자 파란 불꽃이 피어났다.

 분화구 아래 광장에는 연못이 있었다. 아니 점도 높은 흙탕물에서 기포가 솟아오르는 걸 보면, 또 다른 분화구라고 보면 되겠다.

 얼핏 산상호수로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곳곳에서 기포가 솟아오른다. 과학자들은 저 진흙의 나이를 2,500만년으로 추정한단다.

 하얀 띠를 두른 곳이 보이기에 다가가 봤다. 그러자 땅이 가뭄에 찌든 논바닥처럼 조각조각 갈려져있다.

 표면의 흰색. 염분일거라는 가이드의 귀띔이 있었으나 짠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