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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57코스(와석 마을회관  선도리 갯벌체험장)

 

여 행 일 : ‘24. 7. 27()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마서면·종천면·비인면 일원

여행코스 : 와석마을회관장구2리 마을회관당정1다사항비인해변선도리갯벌 체험장(거리/시간 : 15.9km, 실제는 13.76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7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천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와석마을회관(충남 서천군 마서면 송석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천 IC에서 내려와 4번 국도를 타고 서천읍으로 들어온다. 서천교차라에서 21번 국도(홍성·보령방면으로 3km), 당정교차로에서 617번 지방도(마서·당정리방면으로 3.4km), 한성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km쯤 들어오면 와석마을에 이른다. 서해랑길(서천 57코스) 안내도는 마을회관(노인정) 앞에 설치되어 있다.

 송석리(와석마을)’을 출발, 서천군의 서쪽 해안을 걸어 선도리(갯벌체험장)’까지 가는 15.9km짜리 여정이다. 리아스식 해안의 곶()을 떠나 들녘을 걷는 구간이 유난히 많아, 서해바다의 작은 섬들이 그려내는 예쁜 풍경화 말고도 드넓은 서천의 너른 들녘에서 풍요를 만끽하며 걷는다.

 서해랑길은 해안길을 따라 송석항으로 간다. 걷기 여행자들의 발걸음도 마서면에서 종천면을 향해 간다. 그러자 아목섬이 길 떠나는 나그네들을 향해 아쉬움의 솟짓을 보내온다. 섬의 모양이 거위의 목처럼 생겼다는 섬으로, ‘아항도(鵝項島)’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목섬은 모새의 기적이 연출되는 섬이다. 썰물 때 물이 빠지면 길이 만들어지면서 섬까지 연결된다. 이때 조개류나 해삼 등 짭짤한 수확도 거둘 수 있음은 물론이다.(아래는 지난번 56코스 답사 때 찍은 사진이다)

 송석항 쪽 풍경. 방파제가 있는 곳이 송석항. 그 오른쪽 산기슭이 슴갈목(원래 섬이었다)’, 중앙에 끼어있는 낮은 산은 갈무산이다.

 10 : 20. 실제 출발지인 (해창마을)버스정류장. 원래 출발지에서 2.6m쯤 떨어진 지점인데, 35도를 오르내리는 폭염(경보까지 내려졌다)에 놀라 거리를 조금 단축했다. 아니 57코스의 특징이 발목을 잡았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바닷가와 들녘만 걷는 특징으로 인해 구간 전체가 오뉴월 뙤약볕 이래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10 : 20. ‘장천로(617번 지방도)’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해창 마을회관. 법정 동리인 한성리(漢城里)’를 구성하는 자연마을(한성·해창·골패·마동) 중 하나로, ‘해창이란 지명은 옛날 이곳에 해창(海倉, 군수 물자와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이 있었다는데서 유래했다.

 10 : 24. 대한불교삼론종 소속이라는 약사암’. 참고로 삼론종(三論宗)’은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의 중관사상(中觀思想)을 중국에서 체계화해 성립한 종파이다. 인도 대승불교에는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두 흐름이 있었다. 이들이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중관불교는 삼론종(三論宗), 유식불교는 법상종(法相宗)이 됐다. 대한불교삼론종은 1989년 대산(大汕) 이혜봉(李惠鳳) 스님이 창종했다. 여기서 삼론(三論)은 중관파의 주요한 세 논서, 즉 용수의 중론(中論), 12, 제바(提婆)의 백론(百論) 등을 말한다.

 10 : 24. 판교천은 배수갑문 위로 난 도로(장천로)를 이용해 건넌다. 참고로 판교천(板橋川)은 서천군(판교면) 복대리 무량골에서 발원 남쪽으로 흐르다가 종천면 장구리에서 서해로 유입되는 16.2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판교천의 하구역(河口域). 해창마을의 포구를 겸하는가 보다.

 10 : 28. 판교천에서 100m쯤 더 걷다가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샛길(장촌길40번길)로 들어간다. 이때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외국인 걷기여행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 온다. 흔치않은 풍경이라 하겠다. 여성이 이국의 낯선 땅을, 그것도 외진 들녘을 혼자서 걷는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10 : 33. ‘장구2 마을회관. 장구리(長久里)는 지형이 장구처럼 곶을 이루고 있다는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갯장구, 뭍장구, 이재민촌, 후촌, 참샛골 등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곳 ‘2의 자연부락 이름은 무엇일까? 그게 궁금해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주민을 붙들고 물어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이 장구2’. 동네의 규모를 좁히고 또 좁혀가도 그의 입에서는 장구2만 되풀이 될 따름이었다. 우문현답인지 현문우답인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헷갈린다.

 서천군에서는 분리수거장을 깔끔으로 부르나 보다. 예쁜 이름처럼 깔끔하고 아름답게 관리하고 있었다.

 관상용으로만 알았던 백년초를 이 마을에서는 재배하고 있었다. 맞다. 백년초를 대표적인 회춘푸드라고 하지 않았던가. 노화 방지와 질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면서 말이다. 하나 더. ‘본초강목에는 기의 흐름과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독을 풀어 주며 심장과 위통 개선, 기관지 천식 등에 이로운 약초로 기록돼 있다.

 마을을 둘러싼 들녘이 무척 넓다. 풍요로움을 상징한다고나 할까? 그래선지 마을회관 앞 안내판은 장구2 풍성한 마을로 소개하고 있었다.

 서해랑길은 이제 종구3를 향해 간다. 푸름으로 가득한 들녘을 횡단한다고 보면 되겠다.

 들녘은 사방팔방으로 논만 드넓게 펼쳐진다. 그러니 쉴 만한 곳이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벌판 한가운데 파란색까지 칠한 귀여운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들에서 일하는 분들이 잠시 쉬라고 만들어 놓은 것일까? 아니 길가는 나그네들을 배려한 쉼터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장구3라고 써놓은 나무 벤치는 이 마을이 얼마나 배려심이 깊은가를 말해준다.

 10 : 48. 서해랑길은 종구3 조금 못미처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화산(200.5m)을 병풍삼아 들어앉았는데, 그 오른쪽 어디쯤에 장구리성지가 있다고 했다.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산성인데 고려시대 이전의 성으로 추정된다나?

 이곳에도 벤치가 놓여있었다. 이정표(종점 11.7km/ 시점 4.2km)도 눈에 띈다.

 10 : 50. ‘장천로(617번 지방도)’로 다시 올라선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무척 예쁘게 다가오나 서해랑길은 이를 따르지는 않는다. 곧장 횡단해 당정리 들녘으로 나간다. 하나 더. 코스를 단축하고 싶다면 판교천 갑문에서 이곳까지 도로를 따라오면 된다.

 당정리 들녘(‘물거내들로도 불린다)으로 들어간다. 비닐하우스 앞으로 당정천이 흐른다.

 10 : 52. ‘당정천이란다. 종천면 종천리에서 발원 남쪽으로 흐르다가 장구리에서 서해로 합류되는 4.2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11 : 00. 이번에는 갯벌체험로(이정표 : 종점 10.7km/ 시점 5.2km)’로 내려선다. ‘물거내들의 끝, 구릉지 앞(이정표 : 종점 11km/ 시점 4.9km)에서 왼쪽으로 방향으로 튼 다음 충서로319번길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갯벌체험로 배롱나무길(서천군 군도 5호선 종천면 장구리에서 시작해, 비인면을 거처 서면으로 이어지는 약 20km 구간)’로도 불린다. 서천은 배롱나무 꽃길로 유명하다. 해안도로를 배롱나무 꽃길로 조성해 우리의 전통건축과 어우러지는 꽃무리의 운치를 보여준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한번 성한 것은 오래가지 않아 반드시 쇠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귀라는 꽃말의 배롱나무 꽃은 7-9월까지 계속 꽃을 피워 백일홍 나무라고도 불린다.

 탐방로는 배롱나무 꽃길을 만나자마다 헤어져버린다. 그리고는 당정1를 향해 구릉지로 올라간다.

 11 : 08. 여염집처럼 지어진 당정1마을회관. 법정 동리인 당정리(堂丁里)는 대부분 낮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골뜸·뚜두렁이(당곡삼막골(산막) 등이 있는데, 이곳 당정1리는 삼막골이라고 한다.

 탐방로는 마을회관에서 오솔길로 바꿔 탄다. 시멘트포장길이 반듯하게 나있으나 구태여 에둘러갈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11 : 11. 당정1리 마을은 언덕의 남과 북에 나뉘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 또 다른 삼막골 마을이라 할 수 있겠다.

 마을 앞 모정을 지나 당정리 들녘으로 들어간다.

 여름철을 만난 정미소는 낮잠 잘 일만 남았다.

 11 : 16.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이정표 : 종점 9.6km/ 시점 6.3km)가 이번에는 들녘을 횡단한다. 이때 썩 편치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익성이 더 뛰어나는지는 몰라도 농경지까지 훼손해가며 들어선 태양광발전소는 언제 봐도 눈에 거슬린다.

 11 : 23. 종천천(鍾川川)을 건넌다. 판교면(서천군) 상좌리를 기점으로 하여 종천면 종천리에 이르는 12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중류에 종천저수지, 장항저수지 등이 있어 종천평야와 당정평야를 관개한다.

 다리를 건너면 종천리(鐘川里)’ 땅이다. 하지만 취락지구로 들어가지는 않고 그저 들녘만 지나간다. 참고로 이곳은 토정(李之菡) 선생이 찾던 명당자리가 있다는 곳이다. 그래선지 냇물에 물이 흐를 때 가끔 종소리가 울리기도 한단다.

▼ 11 : 27. 들녘의 끝(이정표 종점 8.7km/ 시점 7.2km)에서 산자락(봉산, 124.4m)과 마주친 길이 좌우로 나뉜다서해랑길은 왼쪽(충서로)으로 간다이때 당정리 들녘을 만들어낸 종천방조제가 기다랗게 눈에 들어온다.

▼ 11 : 34. ‘다사2마을로 들어섰다서쪽과 남쪽을 서해에 접하고 있는 다사리(多沙里)’는 모래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하지만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다사리 해변은 백사장 대신 검은 갯벌만 한가득이었다.

▼ 11 : 41. 마을 뒤 언덕을 넘으니 다시 바다가 우리를 기다린다보령해경 다사출장소가 발아래에 놓였는가하면 다사항’ 전체가 한눈에 조망된다.

▼ 11 : 44. ‘다사2마을회관 앞에서 갯벌체험로(이정표 종점 7.2km/ 시점 8.7km)’를 다시 만났다그런데 배롱나무 꽃길로 단장되어 있던 아까와는 달리 이곳에는 해송(海松)이 가로수로 심어져 있었다하나 더. ‘구수메라는 식당 간판이 이곳 다사2리의 또 다른 지명이 구수메임을 알려준다.

▼ 탐방로는 갯벌체험로를 그냥 가로질러 버린다그리고는 해안도로(갯벌체험로44번길)를 따라 다사항으로 간다항아리처럼 내륙을 향해 움푹 들어온 다사리 해변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 어촌체험관광안내소. ‘다사리도 어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다저 안내소는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고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다는 것은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예산 낭비일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나 혼자만의 기우이기를 바래본다.

 어항을 끼고 있어선지 길은 대체로 어수선한 풍경이었다. 도로변에 어망을 널어놓았는가 하면 반대편에는 통발이 수북이 쌓여있다.

 이곳은 쭈꾸미를 소라껍질로 잡는가 보다. 쭈꾸미 잡이용 소라껍데기가 줄에 묶인 채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쭈꾸미는 낚시로 잡는 것보다 소라방 잡이 방식으로 잡는 것이 힘은 더 든다고 했다. 하지만 쭈꾸미에게 스트레스를 적게 주는 만큼 가격을 더 비싸게 받는다고 한다.

 11 : 55. 다사항(多沙港). 바다보다 뭍으로 올라와있는 배들이 더 많다. 서천지역에 들어오면서부터 눈에 띄는 이색적인 풍경이다(지난 56코스 때 만난 주민은 금어기라서 하릴없어진 배가 쉬는 중이라고 했다). 아무튼 물양장에는 경운기와 트랙터도 쉬고 있었다. 언제든지 바다를 향해 배를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다사항은 남쪽의 송석항과 마주보면서 큰 만()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썰물 때면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갯벌 너머로 송석항과 갈무산, 그리고 아목섬이 조망된다.

 서천갯벌은 습지보호지역(습지보전법에 의한) 및 람사르습지(국제 환경협약)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11 : 57. 이후부터는 해변산책로를 따른다. 다사항에서 장포항까지 바닷가를 따라 멋진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지난 2009년 서천군이 연안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해놓은 명품 둘레길이다.

 다사항 근처의 독살’. 독살은 의 사투리인 과 사냥을 뜻하는 의 합성어로, 바다에 돌을 둥글게(또는 ‘V형으로) 쌓아 밀물 때 들어온 고기가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여 잡는 가장 원시적인 포획방법이다. 남해에서는 석방렴(石防簾)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아직도 많은 곳에서 이런 원시어업이 이루어지고 있단다. 특히 태안군에서는 30여 곳이나 행해지고 있다나?

 시선을 조금 옮기자 서해바다가 아득하다. 바다 건너로 보이는 섬은 개야도와 죽도가 아닐까 싶다.

 산책로는 돈 깨나 쏟아 부은 흔적이 역력했다. 생김새도 다양한 파고라나 의자는 물론이고, 특이한 조형물들까지 세워 탐방객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하지만 조성만 해 놓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듯, 무너지기 직전인 시설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하나 더. 최근에 철거(보수가 아닌)를 했는지 바다 쪽 안전펜스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소라껍데기 조형물. 저 안에 들어가면 파도소리가 들릴까? ‘바닷가 작은 집(저자 : 케빈 헹크스)’에서 할머니는 소라 껍데기는 누군가의 작은 집이었다고 손녀에게 일러준다. 그러자 소녀의 상상력은 주황색 둥그런 방이 있는 집, 하얗고 올록볼록한 집, 반짝이거나 빛바랜 집을 만들어냈고, 나중에는 그 안의 풍경까지로 발전한다. 소라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무슨 소리일까. 둥근 껍데기 속에 꼬마유령이 살고 있는 건 아닐까?

 12 : 06. 어떤 용도인지는 몰라도, 갯바위 지대에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가는 방파제도 만들어놓았다.

 방파제는 전망대로 변신해 있었다. 세 방향으로 툭 트이는 서해바다를 편하게 구경하라는 듯 돌의자까지 놓아두었다. 구호장비를 비치하고 사방에 금줄까지 둘러 안전을 확보했음은 물론이다.

 계속해서 해변산책로를 따른다. 이후부터는 장포리 해안을 앞에 두고 걷게 된다.

 12 : 10. 갯바위를 등받이 삼아 힐링하고 있는 저 조각상은 다사리 해안산책로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지 않나 싶다. 최고로 편한 자세로 서해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처가 산책로(갯바위로 도배된) 곳곳에 널려있다는 특징 말이다.

 힐링하는 조각상이 있던 곳. 혹자는 저곳을 다사곶이라 부르고 있었다.

 12 : 12. ‘다사곶 모퉁이를 돌자 주변 풍광이 확 바뀐다. 바닷가가 갯바위나 갯벌이 아닌 모래사장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오른쪽 사구(沙丘)에는 캠핑하기 딱 좋은 송림도 들어앉았다. 그래서일까? 누군가는 이곳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 와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꼭 다시 찾아올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라나?

 이곳도 역시 멋진 산책로가 나있었다. 야자매트를 바닥에 깔아 모래가 신발 속으로 들어오는 걸 막아주는가 하면, 바닷가 비탈진 곳에는 해당화를 심어 꽃길로 탈바꿈시켰다. 해당화는 꽃 대신 붉은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그러니 제 철도 모르고 피어난 저 꽃은 본의 아니게 귀하신 몸이 된다.

 순비기나무도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통기성이 좋은 자갈밭이나 모래사장, 특히 바닷가에서 짠물을 뒤집어쓰고도 잘 자라니 당연하다 하겠다. 아무튼 순비기나무는 모래 위를 기어 다니면서 터전을 넓혀 방석을 깔아놓듯이 펼쳐나가므로 덩굴식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무가 분명하단다.

 해변 한가운데, 기다랗게 설치된 저 목책은 거친 파도를 잠재우기 위한 시설이 아닐까 싶다. 저렇게 좋은 모래가 파도에 휩쓸려나가는 건 막아야하지 않겠는가.

 탐방로는 모래사장으로 내려서기도 한다. 질 좋은 모래사장을 걸어보라는 모양이다. 아무튼 모래사장은 걷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었다. 규사 성분을 띄었는지 발자국도 찍히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12 : 25. 이때 장포해안의 명물인 옵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장포리 곶()의 끄트머리에 갯바위 몇 개가 뾰쪽하니 솟아올랐다. 그게 군함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바위라고도 불린단다.

 바위의 생김새는 자못 빼어나다. 하지만 옵바위가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그 형태보다 바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몰 때문이라고 한다. 바위 위에다 떨어지는 해를 걸쳐놓기라도 할라치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명품 풍경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옵바위 주변은 조개를 잡는 탐방객들로 한가득이었다. 이 지역에서 많이 난다는 동죽이라도 잡나보다.

 옵바위를 실컷 구경했다면, 이제 서해랑길로 돌아갈 차례이다. 모래사장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 해변에는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포장마차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영업을 하지 않는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정표가 철새나그네길이 이곳으로 지나감을 알려준다.

 19 : 29. 다사리 해안산책로를 빠져나와 갯벌체험로(이정표 : 종점 4.5km/ 시점 11.4km)’로 다시 올라선다. 이어서 방조제를 건너 장포리로 넘어간다.

 방조제 아래 바닷가는 장포리 어민들의 포구를 겸하는가 보다. 선착장이나 물양장 등 포구다운 시설이 일절 없는데도, 격식을 갖춘 다사항보다도 더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육지 풍경도 볼만하다. 소유를 표시하는 알록달록한 깃발들로 무당집 같다.

 방조제가 만들어놓은 간척지에는 대하양식장이 집단으로 들어서 있었다. 수많은 수차가 물살을 일으키는 풍경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12 : 33. 방조제를 건너자마자 ‘Sea Garden 펜션 앞에서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샛길(‘1 마을회관으로 연결된다)로 들어선다. 걷기 여행자들의 안전을 위한 배려로 보이는데, ‘갯벌체험로의 통행량이 적어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 같다. 이로 인해 한참이나 에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 : 36. 100m 남짓 걷다가 첫 삼거리(이정표 : 종점 4.1km/ 시점 11.8km)에서 왼쪽으로 간다. 이어서 조금 더 걸어 장포2로 들어간다. 참고로 서해와 접한 장포리(長浦里)’는 자연마을로 지리실과 장진개, 산적말 등이 있다. 이곳 ‘2 지리실이라고도 불리는데, 마을의 흙이 몹시 질퍽거린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마을을 빠져나와 농로를 따라간다. 나지막한 산자락과 농경지 사이로 길이 나있다.

 12 : 45. ‘장포1버스정류장에서 다시 갯벌체험로를 만났다. 하지만 탐방로는 도로로 올라서지 않은 채 방향을 틀어 장포1 마을로 들어간다.

 그렇다고 마을을 누비지는 않는다. 60m쯤 걷다가 첫 삼거리(이정표 : 종점 3km/ 시점 12.9km)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포성대교회쪽으로 간다.

 장포1리 앞에서 왼쪽으로 빠져나가 바닷가로 간다. 참고로 마을에는 포성대교회가 있었다. 이로보아 이곳에 장포리산성이 있었지 않나 싶다. 앞바다의 장진(長津)을 감시하고, 포루의 역할을 담당했다는데 지금은 남벽 일부만 남아있단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포성대(浦城臺)’가 되었다고 한다.

 13 : 56  13 : 03. 길은 또 다시 갯벌체험로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종점인 선도리갯벌체험장을 향해간다. 그렇다고 무작정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고개만 돌려도 이곳 비인해변의 최고 볼거리인 할미바위를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파도에 씻기고 씻긴 모습이 할머니를 닮아서일까?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 섬을 할미섬이라 불렀다. 할머니가 홀로 살다가 죽어 섬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단다. 하나 더. 할미섬은 낙조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할미섬 뒤로 넘어가는 불덩어리 같은 낙조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고 소문났다.(내 사진이 별로여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13 : 04. 할미섬이 만들어내는 멋진 풍광에 취해 있다 다시 길을 나선다. ‘갯벌체험로를 따라 북진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는 게 아닌가. 기상청은 오후 4시부터 2시간 동안 폭우가 쏟아질 것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하늘은 그 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저녁 무렵처럼 어둑해져 버린다.

 13 : 06.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데크로 만들어놓은 할미섬전망대가 나온다. 잡초가 무성한 전망대로 올라서니 할미섬이 가까운 바다에서 포즈를 취해준다. 할미섬은 밀물에는 바위 윗부분만 드러나고, 썰물에는 해안과 갯벌로 연결되는 갯바위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쌍도가 눈에 들어온다. 57코스가 끝나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고개를 넘어온 서해랑길은 선도리에 바톤을 넘겨준다. ! 넘어오는 도중에 쌍도 창문가(雙島 昌文家)’라는 정체 모를 저택을 만나기도 했다. ‘창성할  글월 이니 어느 문학가의 집일지도 모르겠다. 하나 더. 이 부근 민가의 처마에서 소나기를 피하느라 5분쯤 쉬기도 했다.

 13 : 17. 선도리3리 버스정류장(이정표 : 종점 1.5km/ 시점 14.4km)에는 노거수 한 그루가 커다란 등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늘이 필요했던지 주민들이 나무 아래에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아무튼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방향을 꺾어 바닷가로 간다.

 13 : 21. 선도2리에 도착한 다음에는 비인해변의 해안길(갯벌체험로564번길)을 따라 북진한다. 비인해변은 갯벌에서 잡은 조개를 이용한 조개구이와 해물칼국수가 유명하다. 별미 중의 별미로 알려지는 칼국수 맛에 해변을 바라보며 먹는 분위기까지 곁들여지는 맛의 핫 플레이스로 알려진다.

 ! ‘당산바위를 깜빡 빠뜨릴 뻔했다. 비인해변의 남쪽 초입에 있는 갯바위인데, 바위틈에서 해송 세 그루가 자라고 있는 게 영락없는 분재다. ‘철모바위라고도 불리는데, 군인들이 쓰는 철모에 위장용 나뭇가지를 꽂아놓은 형상이라나? 아무튼 이곳은 아침 일출과 저녁 일몰 사진을 찍기에 좋은 장소로 알려진다.

 고개를 조금 돌리면 기다란 해변을 이룬 선도리갯벌체험장이 펼쳐진다. 그 한가운데 비인해변의 명물인 쌍도가 놓여있다. 두 개의 작은 섬은 물이 빠지면 하나의 섬이 됐다가 물이 차면 두 개의 섬이 된다. 70m 정도 떨어져 있는 두 섬은 둘이면서 하나인 부부를 닮았다. 선도리 쪽에서 보면 왼쪽 섬은 거북모양이고, 오른쪽 섬은 고래모양이란다.

 비인해변의 장점은 울창한 송림을 배후 숲으로 거느리고 있다는 점이다. 주민들은 그 숲에 야영장을 열었다. 그리고 청소비라며 소정의 이용료를 받는다.

 13 : 26. 비인해변은 여느 유명해변에 못지않게 잘 꾸며 놓았다. 하지만 보수공사가 한창이라 이곳저곳 금줄을 쳐놓았다. 뭔가 또 주민들의 혈세를 낭비했다는 지적이라도 받았던 모양이다. 공사만 해놓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서 말이다. 그렇다 해도 이것은 너무했다. 바닷가이니 여름철이 성수기일 텐데 하필이면 지금 보수공사를 하고 있단 말인가.

 이곳 역시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서천갯벌에 포함되어 있다. 서천 군민들이 개발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켜낸 소중한 자연유산이다.

 비인해변을 왼쪽에 끼고 북진한다. 비인해변은 길이 2.km에 폭이 700m인 광활한 해수욕장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커 썰물 때면 2km나 갯벌이 펼쳐진단다. 덕분에 해수욕과 갯벌 체험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단다.

 시선을 조금 비틀면 선도리갯벌체험장이 드넓게 펼쳐진다. 선도리는 원래 이름난 해수욕장이었다. 해변에 물막이용 방파제가 세워진 뒤 모래가 쓸려나가 백사장이 많이 줄었다. 하나 더. 비인해변의 갯벌은 모래가 섞인 모래갯벌이라 장화를 신지 않고도 걸을 수 있다.

 13 : 41. ‘선도리갯벌 글램핑장이란다. 숙소 말고도 바닷가에 광장과 야외무대를 만드는 등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선도리 갯벌체험마을이라는 입간판도 이곳에 세워져 있었다.

 13 : 46. 선도리 갯벌체험장 입구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끝난다. 앞바다의 쌍도로 연결되는 노둣길의 초입으로 보면 되겠다.

 쌍도는 섬으로 떨어지는 일몰 풍경이 아름다워 사진 동호회 회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과 천석지기 부잣집 외동딸의 애틋한 사랑얘기가 전해지는 전설의 섬이기도 하다.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남녀가 바다에 몸을 던지는 극단적 선택을 했고, 선도리 앞바다의 두 개의 작은 섬으로 우뚝 솟아났다나? 그러자 고래와 거북 모양을 닮은 두 개의 섬을 후대의 사람들이 쌍도(雙島)라고 불렀단다. 지자체에서 이런 관광 호재를 놓쳤을 리가 없다. 러브() 조형물을 세우고 전설까지 적어 넣었다.

 비인해변은 갯벌체험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갯벌이 하도 넓다보니 다녀오는 게 만만찮았던 모양이다. 트랙터를 개조해 체험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하긴 쌍도까지만 해도 거리가 300m나 되는데, 그 너머로도 한참이나 더 펼쳐지는 갯벌을 어떻게 걸어 다닐 수 있겠는가.

 서해랑길(서천 58코스) 안내도는 갯벌체험장 입구(검문소까지 지어놓았다) 뒤편에 세워놓았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3.76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아니 폭염경보까지 내린 날씨를 감안하면 무리하게 속도를 냈지 않나 싶다.

 카메라 앞에 선 집사람이 활짝 웃는다. 웃는 얼굴은 타인의 마음도 열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의 얼굴과 표정은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한순간에 무장해제 시킬 수 있으며, 병든 마음을 치유하는 놀라운 능력도 있다. 그런 집사람이 늘 함께 해주기에 난 언제나 행복하다.

 

여행지 : 아르메니아  세반, 세반 호수와 세바나 반크(수도원)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세반(Sevan) : 아르메니아 중부에 위치한 세반호수의 북서쪽 호안에 있는 작은 도시. 세반은 도시의 소란에서 벗어나 자연 속으로 떠나기에 딱 좋은 곳으로 꼽힌다. 세반호의 주변을 병풍처럼 두른 아름다운 산과 호수 주변의 싱그러운 초목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고 한다.

 

 두 번째 방문지인 세반 호(Lake Sevan)’로 간다. ‘딜리잔에서 높은 고개를 넘으면 환경이 크게 바뀐다. 이어서 진행방향 저만큼 호수가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인구 2만의 소도시 세반에 이른다. 호수 주변의 마을 중 교통이 가장 좋고 사람의 통행이 가장 번화한 곳이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 세반호수(세반 수도원), 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 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 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세반은 세바나 반크’(Sevana vank)’  세반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우린 유람선(꼬맹이 어선을 개조했다)부터 타기로 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부터 먼저 살펴본 다음, 수도원의 속살을 들여다봐야 은밀한 속사정까지 알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세반은 호수물이 흐라즈단강으로 흘러드는 지점에 형성된 도시로 세반호수 관광의 중심지라고 했다. 캠핑이나 수영은 물론이고 제트스키, 윈드서핑, 요트 등의 수상레포츠를 즐길 수 있단다. 유람선을 타고 세반호수 일부를 둘러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유람선은 호수를 향해 툭 튀어나간 반도(peninsula)’를 한 바퀴 돌아온다. 1930년대에 시작된 산업화 과정은 흐라즈단 강에 발전소를 만든다. 그게 숫자를 늘리면서 1949년에는 세반호에 도수터널을 뚫어 발전용수를 공급한다. 하지만 그때부터 세반호의 수위가 매년 1m씩 낮아지기 시작했고. 수면 위에 떠있던 섬은 저렇게 반도로 변해버렸다. !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아르메니아 정부가 아르파-세반, 보로탄-세반 등의 도수터널을 새로 만들면서 수위가 다시 올라가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세반반도의 호안에는 비치는 물론이고 호텔과 레스토랑, 캠핑장 등이 줄줄이 들어서 있었다. 반도의 언덕에는 세반수도원의 고색창연한 두 건물이 걸터앉았다. 1,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원으로,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에 저항해 사도교회를 지키려던 아르메니아인들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6월인데도 호수 건너 산은 눈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즈다하크 산(Mt. Azhdahak, 3598m)’이 아닐까 싶다.

 버스를 이용해 세반반도 안으로 들어간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수위가 낮아지면서 섬은 반도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제 배 대신에 걷거나 차를 타고 들어간다. 그리고 수도원을 보기 위해 산 위로 올라간다. 경사가 제법 가파르나 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어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아니 세반호수와 주변 마을 등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다보면 힘들다는 느낌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다.

 교회는 4-5m 높이의 축대 위에 지어져 있었다. 그 입구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본 다음 안으로 들어가면 어떨까? 최소한 건물이나 유적의 이름 정도는 알아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안내판은 건물배치도와 함께 세바나 반크의 역사를 적고 있었다. 수도원은 305 그리고르 루사보리치(Grigor Lusavorich)’가 세반 섬에 있는 이교도 신전 꼭대기에 에르미타주 교회와 성 하루티언 교회를 세우면서 시작된다. 874년에는 슬룬크의 바사크 가부르 왕자의 부인 마리암 공주의 후원으로 성 아라켈로츠(거룩한 사도)’ 성 아스타바트사친(신의 성모)’ 교회를 세운다. 안내판에는 없지만 전설도 있다. 10세기 아쇼트 2(Ashot II)’는 아랍 침략자들과 싸우면서 이 섬에 야영을 한다. 당시 아르메니아 군대는 아랍인들에 비해 수적으로 훨씬 열세였다. 하지만 현지 어부로부터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전투를 벌이라는 조언을 들었고, 그 결과 태양에 눈이 먼 아랍인들은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전사한 병사들의 군복과 피로 호수가 검붉게 변하자 아르메니아어로 검은을 뜻하는 세브를 이름에 붙였다나?

 수도원의 건물배치도. 1. 성 사도교회(St. Arakelots church) 2. 승려 숙소 및 학술원 유적(monk cell and academy ruins) 3. 성모교회 전실 유적(St. Astvatsatsin gavit ruins) 4. 성모교회(St. Astvatsatsin church) 5. 성 하루티언교회 유적(St. Harutiun church ruins)

 입구의 저 조형물은 대체 뭘까? 정박(碇泊)을 의미하는 닻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1872-1946’이란 숫자도 적혀있다. 1949 세반호에 도수터널을 뚫어 발전용수를 빼내간 이래 수면이 19.01m나 내려갔으니, 그 이전에 이곳에 항구가 있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안으로 들어가니 세반수도원(Sevana vank)을 구성하는 비잔틴 양식의 두 교회가 반긴다. ‘성 사도교회(St. Arakelots church, 앞쪽)’ 성모교회(St. Astvatsatsin church, 뒤쪽)’, 두 교회 모두 십자가 형태의 건물 위로 팔각형의 톨로베이트(Tholobate: 돔이 세워진 건물의 직립 부분)와 돔을 올렸다. 참고로 세바나 반크는 지명인 세반의 아르메니아어인 세바나(Sevana)’와 수도원이란 반크(vank)’의 합성어라고 한다. 그러니 세반호수의 호반에 있는 수도원(Monastery)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성스러운 사도라는 뜻의 아라켈로츠 교회(St. Arakelots Church)’는 바르톨로메우스(St. Bartholomaeus)와 타데우스(St. Thaddeus)에게 봉헌된 교회다. 입구 철문에 예수상과 사도상이 조각되어 있다.

 제대 뒤 감실에는 성모자상이 모셔져 있었다.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인데, 두 분의 얼굴이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생김새가 아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알려진다. 열일곱이 넘는 세기가 흘러오면서 많은 부분이 토착화가 되었나 보다. 맞다. 6년 전쯤 들른 멕시코에서도 현지인들을 쏙 빼닮은 성모상을 만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성모라는 뜻의 아스트바츠신 교회(Surp Astvatsatsin Church)’는 말 그대로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교회이다. 사도교회와 거의 비슷한 외관이지만 조금 더 크게, 그리고 조금 더 높은 곳에 지어져있다.

 교회 입구에는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하치카르(Khachkar)’를 진열해 놓았다. 저 하치카르에 새겨진 십자가의 아래는 현세 지상을 뜻하고 위는 천상의 세계를 뜻한단다. 이 땅에 살다가 하늘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도구인 셈이다. 사람이 죽었을 때 노잣돈의 개념으로 하치카르를 만들기도 했단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좌대 위에 세우는 특별 대접을 받는 것도 있다. 그나저나 저 안경은 대체 누구의 것일까? 세반호수와 어우러지는 수도원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안경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자리를 떴을까?

 안으로 들어가면 제대 가운데 십자가와 성모자 그림이 모셔져 있다.

 이곳의 성모자상도 사도교회처럼 현지·토착화가 되어있었다.

 이색적인 풍경이 눈에 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제대가 아닌 벽화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한두 사람이 아니다. 너나없이 제대는 곁눈질만 주고 벽화 앞으로 가버린다.

 그곳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가운데 놓고, 열두 제자로 여겨지는 성인들이 여섯 명씩 양쪽에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조금 이상하다. 난데없는 몽골풍, 그러니까 머리를 땋아 길게 늘어뜨리는 변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이드는 몽골의 침입 때 수도원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살짝 꼼수를 부린 것이라고 했다. 일종의 애교작전이라고나 할까?

 그 아래는 변발을 한 예수님을 아예 하츠카르로 만들어 놓았다. 아무튼 저런 노력 덕분에 몽골군들이 자기네 장군을 숭배한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나무로 된 조각품도 눈길을 끈다. 예수님과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바르톨로메우스 타데우스상라고 들은 것 같은데, 내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예수는 왼손에 책을 들고 오른손을 들어 올려 설교하는 모습이고, 두 명의 사도는 고뇌하는 듯한 진지한 표정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형상이다.

 검은색 돌인 응회암으로 지어진 교회는 고색창연했다. 한줄기 빛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내부의 검은 돌에 반사돼 신심이 더욱 깊어진다.

 세반수도원은 아르메니아의 대표적 순례교회라고 한다.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후 세운 최초의 교회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등재된 아흐파트 수도원보다도 더 많은 신자와 봉헌용 촛불이 눈에 띈다.

 두 교회를 모두 둘러보고 나면 발길은 자연스레 교회 뒤쪽으로 향한다. 수도원은 물론이고, 수도원이 걸터앉은 세반반도를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세반호수를 조망하기 위해서이다.

 아르메니아 왕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성 그레고리우스는 이곳에 2개의 교회를 세운다. 그중 하나가 성 하루티운 교회인데 지금은 폐허로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아르메니아 특유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3개의 본당이 있는 돔형 대성당이었단다. 하나 더. 전설은 마리암 공주가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세상을 떠난 남편을 기리기 위해 30개의 교회를 짓는 임무에 착수했다고 전한다. 12사도가 호수를 가로질러 날아가 그녀가 지어야 할 곳을 알려주는 꿈을 꾼 후 위치를 특정했단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수도원 풍경. 들꽃에 파묻히다시피 한 수도원이 세반호수를 배경삼아 한 폭의 잘 그린 풍경화로 그려진다. 참고로 세반 검은(Sev, 아르메니아어)’ (van, 튀르키예 남동쪽에 위치한 호수)’의 합성어라고 한다. 예전에는 튀르키예의 동부지역도 아르메니아 영토였다고 한다. 그곳에 (van)’이라는 호수가 있는데, 호수 근처에서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이곳으로 옮겨왔던 모양이다. 그리고 검은 빛을 띠는 저 호수에 반 호수를 겹쳐보면서 향수병을 달랬다는 것이다.

 세반호수와 성모교회가 찰떡궁합을 이룬다. 세반호수는 바다가 없는 아르메니아에서 보석 같은 존재다. 용수·전기·물고기 같은 유형의 자원뿐 아니라 관광·레저·생태 같은 무형의 자원을 이 지역 사람들에게 제공해준다.

 성모교회 앞은 터만 남아있었다. 원래는 성모교회의 전실(gavit)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1956-1957년 교회가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전실의 기둥 등 일부 유물은 예레반 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세반호수의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가히 아르메니아의 진주라 불릴 수 있을만한 풍광이다. 세반호수와 함께 아르메니아의 상징으로 꼽히는 아라랏 산의 폭발로 생겨 난 호수라는데, 아르메니아에서 아니 코카서스 지역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940평방미터로 제주도와 맞먹는 크기라고 한다. 하도 넓어서 수평선이 보일 정도라나? 하나 더. ‘검은 ()호수라는 이름은 물빛이 검어서가 아니라 호수에 구름의 그늘이 져서 검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도원은 야생화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이 가슴에 매력적으로 스며드는 곳이다. 그런 꽃밭 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다 발걸음을 멈춘다. 또렷하지 않는 길을 따르는 것보다는 발아래로 펼쳐지는 세반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에 풍덩 빠져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이다.

▼ 언덕은 이름 모를 노란 꽃무리가 호수와 어우러지며 장관을 이룬다. 평생을 꽃띠로 살고 싶다는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냉큼 꽃밭으로 들어가 포즈부터 잡고 본다.

 세반수도원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소문났다. 특히 해질 무렵이면 세반 호수를 바라보며 서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에 비해 관리가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낙서판으로 변한 저 안내판이 그 증거이다.



진안고원길 14구간(진안천 물길)

 

여행일 : ‘24. 7. 20()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상전면 및 진안읍 일원

여행코스 : 상전면사무소수변체련공원연지고개(인증)중기마을도치재(인증)상도치마을운산인공습지공원진안만남쉼터(거리/시간 : 13.4km, 실제는 중기마을부터 10.9km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트레킹 들머리는 상전면사무소(진안군 상전면 주평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 진안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를 타고 무주방면으로 8km쯤 달리다가 언건교차로에서 49번 지방도(상전·동향방면)로 옮겨 2km쯤 들어오면 상전면 소재지인 주평리에 이르게 된다. 진안고원길(12구간) 조형물은 상전면사무소 앞에 설치되어 있다.

 상전면에서 진안천을 따라 진안읍에 이르는 길이다. 연지고개와 도치재를 넘은 다음, 진안읍으로 들어서서 진안천변에 조성된 길을 따라 걷게 된다. 읍내에서는 재래시장과 삼지교, 우화정 등을 거쳐 종점(진안 만남쉼터)으로 간다.

 10 : 29. 실제 출발지는 중기마을 입구(버스정류장). 비가 시간당 20-40나 내린다는 기상청의 예보(실제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에 우산을 쓴 채로 연지고개를 넘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전면사무소에서 1km남짓 떨어진 (중기마을)버스정류장(49번 지방도가 지나간다)까지는 산악회 버스로 이동했다.

 길을 나서기 전 용담호부터 가슴에 담는다. 10구간에서의 첫 만남 이후 늘 함께 걸어온 호수를 더 이상은 만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2001년에 완공된 용담호(龍潭湖)’는 진안군의 1 5면을 수몰시키며 만들어진 거대한 담수호이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라는 크기만큼이나 보여주는 경관 또한 빼어나다. 그래선지 진안군에서는 진안고원 길이라는 트레일을 만들면서 5개 구간(10구간-14구간)을 용담호를 옆에 끼고 걷을 수 있도록 길을 냈다.

 10 : 30. ‘중기길을 따라 산골짜기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 양옆으로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은행나무가 멋진 구간이다. 용담호의 완공시기와 맞물려 심어졌음인지 나무의 굵기도 지난 세월만큼이나 풍성해졌다. 하나 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던 비가 언제부턴가 보슬비로 변해있다.

 10 : 35. ‘상전 공설묘지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 연지고개를 넘어온 진안고원 길은 이곳을 지나 중기마을로 간다.

 이정표는 출발지(상전면사무소)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3.3km로 적었다. 내 앱은 현재 0.37km를 찍는다. 그러니 폭우를 핑계 삼아 3km를 단축하고 있는 셈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산자락에 들어붙듯이 다가가더니 뭔가를 따느라 열중한다. 사진작가이신 도반은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느라 여념이 없다. 걷는 것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그곳에는 복분자가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이십여 년을 이어온 산행, 집사람의 무릎이 시원찮아진 이후로는 트레킹 위주로 매 주말 집을 나선다. 그게 삼십 년에 가까워졌지만 이번 구간처럼 복분자가 많은 것은 처음이다. 일부러 기른다고(실제 내 고향인 순창에서는 복분자를 재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길가 산비탈이 온통 복분자 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10 : 45. 길은 다시 둘로 나뉜다. 오른쪽은 임도. 고원길은 중기마을이 위치한 왼쪽으로 간다. 하지만 마을 구경이 별로인 사람이라면 그냥 임도를 따라가도 된다. 이럴 경우 코스도 300m쯤 단축된다.

 10 : 48. ‘중기마을(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9.3km/ 상전면사무소 4.1km)’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갈현리가 통째로 용담댐에 수몰되면서 새로 조성된 마을이다. 좁다란 산골짜기에서 20세대, 38명이 옹기종기 살아가는 전형적인 산골마을로, ‘중기라는 지명은 상전면의 중앙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중터라 하다가 한자음으로 고치면서 중기(中基)’가 되었다.

 중기 마을회관(경로당). 경로당 그린리모델링 사업이라도 마쳤는지 산뜻하게 단장되어 있다. 고령을 넘어서 초고령 사회로 변한 시골은 요즘 어르신들의 복지 증진과 환경 보호가 최대 화두가 되었다.

 중기마을은 경주 김씨 집성촌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상서공파 중기문중의 제각이 커다랗게 지어져 있었다.

 10 : 53. 제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나온다. 그러자 아까 마을 입구에서 헤어졌던 임도와 다시 만난다.

 임도 안내판. 갈현리(상전면) ‘중기마을과 물곡리(진안읍) ‘상도치마을을 잇는 3.5km 길이의 임도란다.

 이즈음 만난 경고판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임도에 건축 잔재물이나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불법 투기자를 신고하면 상금까지 지급한단다. 불법 투기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면 저런 경고판까지 붙여 놓았겠는가.

 임도치고는 오르막의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다. 정점인 도치재의 높이는 393m. 반면에 임도 초입인 중기마을은 294m에 불과하다. 1.1km쯤 걸으면서 고도를 100m나 높여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11 : 13. 임도로 들어선지 22. ‘도치고개에 올라서니 이정표(진안만남쉼터 7.8km/ 상전면사무소 5.6km)가 반긴다. 멀리 금남호남정맥의 성수산(聖壽山 1059.2m)에서 내려온 산줄기에 속한 안부로, 고갯마루에는 국가지점번호 표지목과 벤치도 설치되어 있었다. 걷기 여행자들을 위한 쉼터인 모양이다.

 하늘색 마름모꼴 모자를 쓰고 있는 이정표가 이곳이 14구간의 완주 인증지점임을 알려준다.

 비 때문에 곧바로 하산을 시작한다. 오늘은 임도를 걷다가 쓰러져 있는 나무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집중호우’. 올해 장마의 특징이라고 했다. 어느 한 지점을 target으로 삼아 집중적으로 쏟아 붓는다는 것이다. 그 집중호우가 이곳 진안도 때리고 지나갔다는 얘기일 것이다.

 길은 무척 곱다. 포장과 비포장이 번갈아 나타나지만, 잔디밭으로 이루어진 비포장 구간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숲이 우거진 탓에 조망은 일절 없다고 보면 되겠다.

 11 : 27. 작은 오름 끝에 또 다른 고갯마루(363m) 올라섰다. 이정표(진안만남쉼터 6.8km/ 상전면사무소 6.6km)는 이곳이 14구간(진안천물길)의 중간쯤 되는 지점임을 알려준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임도안내판이 얼굴을 내민다. 이런 안내판은 잠시 후 하나가 더 나온다. 하지만 걷는데 하등의 도움도 되지 못하기에 그냥 지나쳐버리기로 했다. 지도에 현재 위치라도 표시해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1 : 39. ‘상도치(上道峙)’ 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물곡리(物谷里)’를 구성하는 5개 행정부락(원물곡·궁동·종평·상도치·하도치) 중 하나로 아까 지나온 중기마을처럼 이곳 역시 산골짜기로 파고든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이틀 후면 일 년 중 가장 무덥다는 대서(大暑)’. 그런데도 길가 자두나무는 아직도 파릇파릇한 열매를 매달고 있다. 홍천에 있는 내 농장에서는 일주일 전에 이미 자두 수확을 끝냈는데도 말이다. 지대가 높은 만큼 철도 늦게 찾아오나 보다.

 11 : 43 - 12 : 02. 마을에 들어서자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길손을 맞아준다. 마을의 신목(神木)으로 옛날에는 이곳에서 정월 대보름날에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하나 더, 빗줄기가 거세져 당산나무 근처 비닐하우스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산골마을의 정적을 깨뜨렸나 보다. 할머니 한 분이 내다보더니 뭐 볼게 있다고 이런 비까지 맞아가며 찾아왔냐고 혀까지 차신다.

 어른의 몸통 둘을 합쳐도 모자랄 만큼 굵은 느티나무 아래에 당산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낭당(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을 쌓고 제단까지 만들어 놓았다.

▼ 12 : 06. 잠시 후 본마을로 들어선다상도치(上道峙)의 옛 이름은 웃되재’, ‘되재의 웃뜸(윗마을의 방언정도로 여기면 되겠다예전에 진안읍에서 마을로 가려면 빠른 길이 되재를 넘어야 했기에 마을을 되재라 부르다가 뒤에 한자어로 도치(道峙)라 부르게 되었다.

 상도치 마을회관. 중기마을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12 : 09. 마을을 빠져나와 2차선 도로인 물곡로로 내려선다. 이어서 100m 조금 못되게 이 길을 따라간다.

 이후부터는 내오천(머우내)’ 둑길을 따라간다.

 머우내의 물줄기가 제법 사납다. ‘양동이로 쏟아 붓다는 표현이 떠오를 정도로 거세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그나마 빨리 그쳤기에 저 정도일 것이다.

 상도치 들녘. 상도치는 동쪽 초승봉과 서쪽 우제산 사이의 충적지에 위치한다. 오천리·죽산리·구룡리·물곡리에서 흘러내린 머우내(오천)가 마을 앞으로 휘감아 흐르면서 마을이 들어설만한 충적지를 만들었다.

 12 : 22. ‘하도치교(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4.4km/ 상전면사무소 9.0km)’에서 아까 헤어졌던 물곡로를 다시 만났다.

 하도치 마을회관과 버스정류장. 다리 근처에 위치한 하도치(下道峙)’ 마을은 스치듯 지나친다.

 진안천에 합류되기 직전의 내오천(內梧川, 머우내)’. ‘오천리는 마을 앞으로 하천이 흐르고 그 가장자리에 머우나무(머귀나무, )가 많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하천이 머우내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때 마을이 그 바깥쪽이 되므로 외오천이라고 하고 그 안쪽을 내오천이라 했다.

 이후부터는 물곡로를 따라간다. 교통량은 많지 않지만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니 안전에 유의해가며 걸어야 한다.

 내오천과 진안천이 합류되는 곳에는 충적평야가 드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두 하천이 실어온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삼각주(三角洲, delta)’일 것이다.

 12 : 28. ‘도치교를 건너면 하도교차로(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3.9km/ 상전면사무소 9.5km)’. 고원길은 교차로 못미처에서 180도로 방향을 틀어 진안천의 둑길로 내려선다.

 다리(도치교)에서 내려다본 진안천(鎭安川)’. 진안읍 반월리에서 발원하여 단양리·군하리·군상리·운산리·갈현리를 거쳐 용담호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요 아래에서 내오천과 합쳐진다.

 이후부터는 진안천의 둑길을 탄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느티나무가 울창하게 가지를 뻗어 한여름 뙤약볕에도 걱정 없겠다.

 12 : 34. 콧노래 흥얼거리며 잠시 걸으면 운산인공습지에 이른다. 진안읍을 가로질러 용담호로 흘러드는 진안천 주변 부지 57490에 조성된 자연공원이다. 습지로 이루어진 공원에는 수질정화식물인 꽃창포, 억새, 붓꽃, 수크령 등 다양한 수생식물이 식재되어 있다.

 탐방로는 습지의 양옆으로 나있다. 마을 내키는 대로 골라잡아 반대편으로 가면 된다는 얘기다. 아니 맨발산책로도 만들어놓았으니 힐링 삼아 한번쯤 걸어볼 일이다.

 인공습지(人工濕地)’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자연습지의 특성을 설계에 반영 및 시공하여 운영하는 습지를 말한다. 그래선지 침강지나 생태연못 말고도, 깊은 습지와 얕은 습지 거기다 수평 지하흐름 습지까지 그 형태도 다양했다. 개개의 습지에는 꽃창포와 물억새, 수크렁 등 각종 수질정화식물들이 자라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탐방객들을 위한 시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관람 데크가 놓여있는가 하면, 징검다리가 습지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자연석을 그것도 자연스럽게 휘는 모양새로 놓아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물방울을 형상화 한 조형물도 눈에 띈다. ‘수몰의 아픔과 노력으로 충남과 전북의 생명수를 지키고 있는 가치를 세상에 알리고, ‘버려진 땅(수몰)’에서 생명의 땅으로 거듭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인공습지의 공정과 조감도를 담은 안내판.

 12 : 50. ‘운산인공습지를 빠져나온다. 습지를 횡단하는데 16분이나 걸렸다면 그 규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공습지와의 경계를 나누는 수로(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2.8km/ 상전면사무소 10.6km)를 건너자 ‘cafe 카요코코가 잠시 쉬었다 가란다. 공간도 넓은데다 뷰 맛집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젊은이들의 발길이 불어났다는 곳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연꽃단지가 반긴다. 조금 전 둘러봤던 운산인공습지의 조감도에는 없었던 시설인데, 엄청나게 넓은 연못에서 크고 탐스런 연꽃이 꽃망울을 활짝 열고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가 타고 나왔다는 연꽃이 저만큼이나 예뻤을까?

 그런 연꽃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없음은 흠이라 하겠다. 더 가까이서, 특히 위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관람데크나 관망대를 만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다른 인공습지. 이곳도 역시 운산인공습지의 조감도에는 없었다.

 13 : 04. 공공하수처리장(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2.2km/ 상전면사무소 11.2km)과 진안천교의 교각 아래를 지나 진안 읍내로 들어간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사위가 밝아지면서 주변 풍광이 또렷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장마까지 물러가지는 않은 듯 부귀산은 아직도 구름 속에 잠겨 있다.

 13 : 07. 진안교육지원청 앞에서는 인도교를 이용해 진안천을 건넌다. 그리고는 천변에 걸치듯이 내놓은 인도를 따라 진안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진안읍은 한마디로 잘 가꾸어졌다는 느낌이다. 도시 전체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거기다 도로는 온통 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국회의장을 배출한 고장답다고나 할까?

 진안 인삼이 세계가 인정하는 고려인삼의 원조라는 넉살이 낯설지 않음은 왜일까? 그동안 진안고원길을 걸어오면서 진안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그만큼 더 가까워졌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13 : 16. ‘시장2를 지키고 있는 저 조형물은 대체 무엇을 형상화한 것일까. 지나가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모르겠다며 마이산을 닮았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가버린다.

 요즘 시골은 젊은이들이 귀하다고 했다. 지자체들마다 그네들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이유다.  청년 몰도 그런 절박함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13 : 24. 고원길에서 잠시 벗어나 진안향교에 들렀다. ‘시장교를 건넌 다음 중앙로를 따라 잠시 올라가면 진안향교의 입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향교는 문이 닫혀있었고, 볼거리에 목말라하는 나그네는 아쉬운 발걸음 돌릴 수밖에 없었다. 후문 쪽으로 가서 담장너머로 살짝 엿본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진안향교(鎭安鄕校, 전북 문화재자료) 1414(태종 14)에 창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1(선조 34) 중건했고, 1636(인조 14)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번안당(番安堂서재(書齋) 등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五聖), 송조4(宋朝四賢), 우리나라 18(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3 : 26. 향교를 빠져나오자 상촌천(桑村川)’이 반긴다. 진안읍 군상리에서 발원하여 중앙동에서 진안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상촌(桑村)’이란 뽕나무가 많은 마을 사이를 흐른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kakaomap에는 상림천으로 표기되어 있다.

 13 : 28. 하류 쪽으로 나오자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하천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삼지교(이정표 : 진안만남쉼처 0.7km/ 상전면사무소 12.7km)’라는 다리를 놓았다. 이름처럼 다리를 세 지점으로 연결시키는데, 이게 만만찮은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다리 난간을 꽃으로 장식했는가하면 중앙에는 잘생긴 팔각정까지 들어앉혀 멋스러움을 더했다.

 삼지교를 건넌 다음에는 진안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13 : 32. 몇 걸음 더 걷자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길을 막고 있는 바위벼랑에 걸치듯이, 그것도 왔다갔다 갈 지()’자를 써가며 계단을 놓았다.

 13 : 34. 계단을 오르면 우화정(羽化亭)’이 맞는다. 우화산(향토문화대전은 월랑산으로 적는다)의 남쪽 기슭 바위절벽에 걸터앉은 정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 정자가 현재 위치에서 서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우화산 산등성이 너머 암벽 아래에 위치한다고 했다. 그게 퇴락하자 1921년 지역 유지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했단다. 1998년에 진안군에서 다시 중수하였다. 하나 더. 기암절벽과 그 사이의 초목이 어우러지는 경관이 매우 빼어나 월랑팔경(月浪八景)의 하나로 꼽힌다.

 안내판은 이 일대를 우화산 일원 유적군(진안군 향토문화유산 2)’로 적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화정에 얽힌 전설을 전해준다.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글 읽기에 정성을 다하며 동네사람들을 잘 보살펴주던 한 홀아비 선비가 칼바위에 앉아 손을 씻고 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우뢰와 함께 하늘에서 어여쁜 선녀가 내려와 선비와 함께 두 개의 날개로 둔갑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 했고, 이게 자연스레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정자가 걸터앉은 우화산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월랑산으로도 불리는지 akaomap는 이 일대를 월랑체육공원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13 : 35. 고원길은 정자 뒤쪽의 나무계단으로 올라가면서 이어진다.

 13 : 37. 계단은 암각서가 즐비한 바위절벽으로 인도해 준다. 옛날 우화정이 있었다는 가학대라는 곳이다.

 암벽에는 초서로 가학(駕鶴)’이라 새겨놓았다. 신선이 학을 타고 노니는 자리라는 뜻이니 우화정에서 얘기한 우화등선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또 다른 각자인 영모대(永慕臺)’는 이 지방 호족인 천안 전씨들이 자신들의 집안 내력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천안전씨 시조인 환성군이 백제 개국공신이란 내용과 후손들의 명단도 적어 놓았다. 하나 더. 광서 16(1889) 현감 김요협이 고을의 선비 전의호, 전재택과 이름을 연이어 각하고 썼다는 소서(小序)도 있다고 했으나 일일이 살펴볼 여유가 없어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계속해서 나무계단을 따른다. 이 계단은 산등성이를 넘도록 나있다. 트레킹 막바지에서 만나는 오르막이라 힘들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구간이다.

 오르는 게 싫은 사람들은 천변으로 내려가 진안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

 13 : 45. 산등성이를 넘으면 진안청소년수련관’. 14코스가 종료되는 진안만남쉼터는 수련관 바로 아래 들어서 있었다. 주차장과 캐노피(canopy) 그늘막이 전부인 단조로운 쉼터이다. 산자락에 세워놓은 두어 개의 기념탑과 시비가 그나마 쉼터라는 이름값을 해준다.

 일단은 ‘6.25참전호국영웅기념탑에 묵념을 드리고 본다. 우리가 웰빙·힐링을 외치며 전국의 산하를 누빌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저런 분들이 목숨을 바쳐 이 땅을 지켜주신 덕분이 아니겠는가. 하나 더. 이곳 진안과 인연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 옆의 진안사랑가과 맞은편의 진안예찬도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진안고원길 안내도 앞에서 7개월에 걸쳐 이어온 대장정(개인 사정으로 14개 구간 중 11개만 끝냈다)을 종료한다. 진안은 전체 면적의 76% 5 9406가 산림이자 평균 해발 400m의 고원지대이다. 산이 많아서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이 마음껏 굽이지는 곳이기도 하다.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 장수의 뜬봉샘에서 시작되는 금강의 물길이 진안을 흐르고 만경강 발원지인 밤샘도 진안 땅에 바짝 붙어 있다. 그런 진안의 매력을 제대로 살펴보고 싶다면 진안고원길을 걸어볼 것을 권한다. 진안고원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210.2km의 걷기 여행길로, 100개의 마을과 40개의 고개를 지나는 총 14개 구간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1구간 마이산길, 9구간 운일암반일암 숲길, 11-1 용담 감동벼룻길 등 3개 구간은 전북 1000리 길에 포함돼 있기도 하다.

 오늘은 장마철 폭우를 핑계로 중기마을부터 시작했고, 덕분에 3시간에 끝마칠 수 있었다. 앱이 10.9km를 찍고 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우산을 쓰고 걷느라 속도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귀경길 산악회의 배려로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의 진안마이산휴게소에 들를 수 있었다. 진안의 얼굴마담이라 할 수 있는 마이산(馬耳山)’이 가장 또렷이 조망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7개월 동안 진안의 방방곳곳을 둘러봤으니, 제대로 된 마이산도 한번쯤은 구경해야하지 않겠는가.

 주차장의 한쪽 귀퉁이 언덕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누군가 그랬다. ‘진안 여행의 절반은 마이산을 어디서 보느냐라고. 마이산의 남, 북부 구역에선 오히려 마이산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이산에 오르니 마이산이 안 보이더라라나? 그러니 좀 멀찌감치 떨어져서 봐야 한다. 이곳 진안휴게소 전망대는 그중에서도가 최고의 포인트로 알려진다.

 전망대에 오르자 포토죤이 반긴다. ‘I  you’. 마이산도 사랑하나 그보다는 당신을 더 사랑한다? 이 얼마나 새콤달콤한 사랑의 메시지인가.

 마이산을 조금 더 당겨보고 싶다면 팔각정을 추천한다. 정자에 오르면 마이산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다.

 마이산은 조선의 3대 왕 태종이 이 일대를 지나다 말()의 귀()와 같다며 붙여놓은 이름이다. 두 봉우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게 태종의 눈에는 말의 귀로 보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서쪽의 암마이봉은 687.4m, 동쪽의 수마이봉이 681.1m로 다소 낮다. 산은 전체가 거대한 암석 덩어리다. 특히 암마이봉의 타포니 지형이 인상적이다. 타포니는 풍화혈(風化穴)을 뜻하는 지질용어다. 풍화와 차별 침식 등으로 암석의 측면에 형성된 구멍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