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50코스(부안군청-동진강 석천휴게소)
여 행 일 : ‘24. 4. 27(토)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부안읍·동진면 및 김제시 죽산면 일원
여행코스 : 부안군청→석정문학관→상리마을→고마제 수변산책로→궁월마을→장등마을→동진강 석천휴게소(거리/시간 : 11.1km, 실제는 11.94km를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0코스를 걷는다. 10개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지난 49코스처럼 내륙의 들녘을 걷는다. 서해랑길답지 않게 바다는커녕 간척지조차 볼 수 없다는 얘기다. 석정문학관과 고마제 수변산책로가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 들머리는 부안군청(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3km쯤 내려오다 ‘신운교차로’에서 빠져나와 ‘부령로’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부안군청이 나온다. 서해랑길(부안 50코스) 안내도는 청사와 주차타워를 연결하는 공중다리 아래에 세워져 있다.
▼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마지막 여정. ‘서해랑길’ 본연의 임무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바닷가가 아닌 내륙의 들녘을 걸어 김제 땅으로 들어간다. 평지에다 거리까지 짧아서 난이도는 별이 2개(5개 중)로 분류된다.
▼ 11 : 04. 트레킹을 시작한다. 서해랑길은 군청 앞에서 ‘당산로’를 따라 동쪽으로 간다. 하지만 난 서쪽에 있는 ‘서문안 당산’으로 간다. 명색이 도로의 이름까지 된 기념물(국가 민속문화유산)이 120m 거리에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1689년(숙종 15년) 서문을 수호하기 위해 세운 ‘서문안 당산’은 쌍으로 된 ‘솟대당산(돌 짐대)’과 ‘돌장승’으로 이루어졌다. 원래는 서문으로 통하는 길 양옆에 세워져 있었으나 1980년 이곳으로 옮겼단다.
▼ 짐대는 가늘고 긴 나무나 돌 윗부분에 새를 한두 마리 올려놓고 단독으로 세우거나, 장승과 함께 마을 입구나 신성한 장소에 세워 액운을 방지하고 마을을 수호하는 솟대의 일종이다. 그래선지 돌 짐대에 바다 쪽을 바라보는 오리가 올라앉았다. 이는 화재로부터 부안 읍내를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이에 반해 장승은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나무나 돌로 세워 놓은 민간 신앙물이다. 이곳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 쌍으로 세워져 있다. 하나 더. 매년 정월 초하룻날 밤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내는데, 이때는 동문안과 남문의 당산을 이곳으로 모신다고 한다. 이곳 서문안 당산이 주신이기 때문이란다.(1978년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 11 : 09. 이번에는 ‘군청길’을 따라 ‘소우’라는 일식당을 찾아간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에서 주인공 학수(박정민)가 좋아한 미경(신현빈)의 피아노학원으로 등장하는 집이다. 그런데 건물이 있어야할 자리에 난데없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오래된 주택을 식당으로 꾸몄다고 했는데, 군청에서 ‘도심 가꾸기’사업이라도 펼쳤던 모양이다.
▼ 아무튼 메밀국수와 덮밥 말고도 서브 메뉴로 커피를 내놓는다고 해서, 커피라도 마시며 영화의 분위기를 잠시 느껴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부안읍에는 두 주인공이 밤거리를 거니는 장면에 등장하는 ‘물의 공원’도 있다. 물고기가 다이빙하는 듯한 분수 조형물 주변으로 물이 흐르는 거리를 조성해 놓았다.(사진은 인터넷에서 빌려왔다)
▼ 11 : 11 – 11 : 14. 아쉬운 발걸음을 ‘부안 역사문화관’으로 옮긴다. 근대 건축물인 옛 부안금융조합(대한민국 근대유산 등록문화재)을 리모델링하여 2021년 12월 문을 열었다. 우리 같은 외지인들에게 지역의 역사와 인물, 문화유산을 소개하고, 지역민들에게는 자긍심과 애향심을 높여주기 위해서이다. 지역 주민들의 문화활동 공간으로도 활용된다니 복합 문화공간이라 할 수 있겠다.
▼ 전시관은 고대로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역사를 지나, 고려의 도자기 문화와 조선 후기의 동학농민혁명까지 부안의 역사를 담아낸 상설전시실과 다양한 주제의 전시와 문화 활동을 위한 기획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 한말의 큰 유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를 소개하는 코너도 있었다. 부안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1912년 부안의 계화도에 정착하여 192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그가 3000여 명의 제자를 길렀는데, 그가 죽었을 때 장례를 따르는 제자들로 계화도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나? 하지만 그는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고, 파리장서(巴里長書, 儒林에서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사건)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 기획전시실에서는 ‘김억’ 작가의 목판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변산의 변화무쌍함을 나무의 질감으로 표현하는 작가라는데, 외변산·내변산·직소폭포·마을모정 등을 담은 목판화 8점을 전시해 놓았다. 소개 글은 우리가 익히 봐온 자연과 풍광을 그의 칼로 손끝 여문 장인처럼 동화 속으로 이끌어준다고 적었다.
▼ 11 : 14. 밖으로 나와 이번에는 ‘당산로’를 따른다. 군청삼거리(11 : 18)에서는 ‘석정로’를 따라 왼쪽으로 간다.
▼ 11 : 21.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동문안 당산’이 맞는다. 돌로 만든 오리 조각을 돌기둥 위에 얹혀 놓은 돌 짐대(당산)와 돌장승 한 쌍(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민간신앙 유적이다. 이곳도 서문안 당산처럼 머리에 서해바다를 바라보는 오리가 앉아있다. 부안 읍내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임무도 같다. 하나 더. 동문안 당산은 본래 부풍현의 동쪽 문인 청원루(淸遠樓) 안쪽에 있었다. 그러다 새롭게 도로가 개설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 근처에 또 하나의 솟대당산(짐대)이 세워져 있었다. 네모진 나무기둥이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는데, 그 꼭대기에 오리가 걸터앉았다. 하단은 새끼줄로 묶고 접신이라도 하려는 듯 창호지를 매달았다. 부안읍 당산제는 새끼를 꼬아 만든 줄로 줄다리기를 하고, 그게 끝나면 돌기둥에 새끼줄을 돌려 감는 ‘당산 옷 입히기’가 이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당산제가 다시 부활되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 ‘으뜸 오일뱅크’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한 쌍의 장승이 자리한다. 상원주장군은 벙거지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으며 주먹코에 다문 입, 얼굴 양옆의 큰 귀가 인상적이다(안내판은 제주의 ‘돌하루방’을 닮았다고 적었다). 마주보는 하원당장군은 얼굴의 이마에 백호(白毫,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가 있고, 매우 크게 표현된 퉁방울눈을 가졌다.
▼ 길은 한마디로 예뻤다. 아니 내가 본 부안은 읍내 전체가 아름다웠다. 곳곳에 들어선 소공원과 길가 화단에선 철쭉과 작약 같은 예쁜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건물들도 계획도시의 느낌이 물씬 풍길 정도로 하나같이 깔끔했다.
▼ 그런 길을 걷다 만난 ‘신선마을 표지석’. ‘하늘이 저렇게 옥같이 푸른 날엔’으로 시작되는 시 ‘化石이 되고 싶어’가 적힌 팻말도 눈에 띈다. 작가 이름은 빼먹었지만 시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신석정’ 시인의 작품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는 시인의 생가가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 11 : 30.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석정문학관’이 잠시 들렀다 가란다. 마침맞게 서해랑길도 그쪽으로 인도한다. 아니 서해랑길이 아니더라도 꼭 들러봐야만 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나 5·16 군사정권 같은 암울했던 시기에도 지조를 잃지 않았던 지식인을 어디 그리 흔하게 만날 수 있겠는가. 참고로 신석정은 친일 문학지 ‘국민문학’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오자, 청탁서를 찢고 창씨개명도 끝까지 거부한 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절필을 선언한다. 5·16 쿠데타 이후에는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시를 발표해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취조를 당하기도 했다.
▼ 초입에서 만난 ‘창작놀이터’. 지역 내 관광자원에 스마트폰을 이용한 미션게임을 접목한 놀이 공간이다. 주제에 맞는 미션게임을 가족, 친구, 연인이 함께 즐기며 점수를 얻는 방식이다. 게임과 함께 천연화장품, 비누 등을 만들어보는 체험도 할 수 있다.
▼ 11 : 32 - 11 : 39. 몇 걸음 더 걸으면 ‘석정문학관’이다. 한국 시문학의 대가 신석정(辛錫正, 1907-1974)의 청초한 인품과 시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2011년 문을 열었다. 1층의 전시관에는 5권의 대표시집과 유고 시집, 집필 원고 등 500여 점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2층은 북카페로 문학관을 찾는 이들의 휴식 공간이다. 하나 더. 우리에게는 ‘(辛)夕汀’으로 더 익숙한데, 이는 시인의 ‘아호’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 1층 전시관은 신석정 시인의 유품 500여 점이 전시된 상설전시관과 시인의 지인들 사진과 친필 서한 등을 전시한 기획전시실로 나누어져 있다. 세미나실은 시인의 생애 영상물을 관람하고 문학 관련 세미나를 여는 공간이다.
▼ ‘촛불’·‘슬픈 목가’·‘대바람 소리’ 등 5권의 대표시집, 유고시집, 친필원고, 유품 등도 살펴볼 수 있다. 참고로 신석정은 김영랑·박용철·정지용·이하윤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제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함으로써 등단했다. 1939년 첫 시집인 ‘촛불’을 발간하면서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그의 서재도 재현해 놓았다. 1931년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가담한 신석정은 그해 ‘시문학’과 ‘동광’에 시 ‘선물’과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를 발표했고, 이를 계기로 정지용·이광수·한용운 등과 교유하게 된다. 그러다 부안으로 내려와 뒤뜰이 넓은 초가를 사서 ‘청구원(靑丘園)’이라고 이름 짓고, 낮에는 고구마밭을 일구고 밤에는 독서와 시작에 매진한다. 이 무렵 아직 등단하지 않은 서정주가 찾아오면 문학에 대한 얘기를 밤이 이슥토록 이어갔다고 한다.
▼ 11 : 39 - 11: 42. 문학관을 빠져나오면 맞은편에 선생이 살았다는 ‘신석정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1930년대 김영랑 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이끌던 신석정은 부안 동중리에서 태어나 1952년 전주로 이사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시인의 첫 시집 ‘촛불(1939)’과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1947)’가 이 집에서 탄생했다.
▼ 석정은 첫 시집을 내면서 ‘청구원 주변의 산과 구름, 멀리 서해의 간지러운 해풍이 볼을 문지르고 지나갈 때 얻은 꿈 조각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 집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런 집의 뜨락은 지금 ‘기우는 해’, ‘고운 심장’ 등 시인의 작품을 담은 시비들 여럿이 지키고 있다.
▼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철제로 제작한 시판들로 나머지 여백을 채웠다. 그중 ‘산의 서곡(1967년 출간)’에 실렸던 ‘한줄기 불빛은’이라는 시를 게시해 본다.
▼ 11 : 43. 문학관 앞에서 골목길(선은2길)을 따라 ‘선은마을’로 들어간다. 그러자 엄청나게 큰 한옥이 얼굴을 내민다. 한옥체험을 운영하고 있는 ‘이갑수 고택’이라고 한다. 이곳 ‘선은(仙隱)’은 ‘선비들이 숨어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했다. 그 마을에 조선 말기에 이주해온 전주 이씨들의 오래된 고택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부안의 전통한옥마을로 불리기도 하는데, 지금 들어가 볼 ‘이갑수 고택’과 연이어 들릴 ‘이승호 고택’도 그중 하나이다.
▼ 문간채를 지나자 안채가 반긴다. 목재의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형상을 살리는 등 간결미와 자연미가 돋보이는 7칸 겹집의 한옥이다. 오른편에는 한옥체험을 하러 찾아온 사람들이 이용하는 사랑채도 있다. 한옥임에도 최신식 주방은 물론이고 화장실은 샤워시설까지 갖추었단다. 문간채에는 단체를 위한 넓은 방도 있다고 했다. 참! 이갑수 고택은 ‘이연재(夷然齊, 자연과 더불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곳)’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 11 : 45. 고택을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골목이 하나 나뉘고 있었다(서해랑길은 직진한다). 50m쯤 떨어진 곳에 독립운동가인 ‘운암 이승호(雲岩 李承鎬, 1890-1966)’ 선생의 고택이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들어가 보자.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3,600원이라는 거금을 지원하였고, 지역에서는 빈민 구휼에 앞장섰다. 이 일이 알려져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안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대문이 있다. 대문을 지나자 이번에는 옛 티를 퐁퐁 풍기는 안채가 7칸 겹집의 거대한 몸집을 드러낸다. 안채는 문간채보다 조금 더 높다. 덕분에 오랜 세월을 버텨온 색 바랜 마루로 올라서면 집안의 구조뿐만 아니라 부안읍내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하지만 이갑수 고택에 비해 관리가 잘 안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 마당 건너에서는 열 손가락으로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방을 거느린 별채가 횡으로 늘어서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사당으로 보이는 건물도 지어져 있다.
▼ 약간 비탈진 곳에 들어앉은 ‘선은마을’은 나지막한 야산이 뒤를 에워싸고, 앞으로는 드넓은 부안평야가 펼쳐지는 모양새이다. 큰 부자가 많이 나는 전형적인 명당의 형국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거대한 고택들은 물론이고, 새로 지은 주택들도 하나같이 여느 부잣집 부럽지 않게 크고 멋졌다.
▼ 11 : 53. 서해랑깅은 마을 뒤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그리고는 품고 달려온 바톤을 동진면(내기리)에 넘겨준다. 이어서 상소산과 망월산을 잇는 구릉지의 산자락을 따른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신록의 푸르름이 펼쳐지는 기분 좋은 숲길이다.
▼ 11 : 58. ‘봉황교차로’ 부근에서 국도 30호선(변산바다로)를 만나 국도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이어서 30호선을 국도 23호선(부안로)으로 연결시키는 접속도로의 옆길(내기·상리길)를 따라 잠시 간다.
▼ 12 : 03.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서해랑길 리본이 안내해준다)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꾼다. 상리마을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 12 : 07. ‘상리마을’을 지난다. 내기리(內基里)에 속한 3개 행정부락(상리·신흥·신리) 중 하나로 주변에 ‘내기평야’가 있어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하단다. 2014년경부터 날아든 백로가 지금은 수천마리로 늘어나 이를 보러오는 사람들로 늘 붐비는 마을이기도 하다.
▼ 풍성한 상차림을 꿈꾸는 집사람의 손길은 오늘도 바쁘다. 논에 미나리가 자라고 있다며 부지런히 뜯어대는데, 이를 본 동네 아주머니가 농약을 한지 얼마 안 되었다며 말린다. 하지만 흐르는 물속에 한 이틀 담가두면 괜찮다는 집사람. 그리고 그 미나리는 부침개로 변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서재의 책상에 올려져있다. 막걸리 한 병과 함께...
▼ 상리마을을 지나 잠시지만 숲길을 걷는다. 연록의 싱그러움을 맘껏 즐기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백로 떼가 펼치는 군무를 볼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날아다니는 백로 떼가 주변경관과 어우러지며 한 폭의 동양화를 심심찮게 연출해낸다.
▼ 숲은 소나무로 울울창창했다. 그런 숲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백로 떼가 생활하고 있었다. 수천마리가 숲에 둥지를 틀면서 마치 산 천체가 흰 꽃이 핀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며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백로는 하얀 겉모습 때문에 예로부터 선비의 상징처럼 묘사되며 길조로 여겨진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고 한다. 산성을 띤 분비물로 인해 나무가 고사하고, 토양이 황폐화 되는 등 피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 12 : 19. 숲속을 빠져나오니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7.7km/ 시점 3.4km)가 세워져 있다. 이후부터는 2차선 도로인 ‘동진남로’를 따른다.
▼ 잠시 후 ‘내기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신흥마을’을 지난다. 아니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고 마을 앞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신흥마을 앞’으로 표기한다.
▼ 도로변에 위치한 ‘쌍구제’는 물 대신에 창포만 한가득이다. 그래도 뭔가 볼거리가 있는 모양이다. 안쪽 가장자리에 전망데크까지 만들어놓았다.
▼ 12 : 24. 쌍구제가 끝나는 지점에서 ‘동진남로’를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소로(오봉길)을 탄다. ‘오봉마을’로 연결된다는 얘기겠지? 하지만 kakaomap은 입구의 버스정류장을 ‘쌍구’로 적고 있었다.
▼ 12 : 30. 그렇게 잠시 걷자 50코스의 자랑거리인 ‘고마제(雇馬堤)’가 얼굴을 내민다. 고마 지구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축조(1958년)한 큼지막한 저수지로 3만 8200㎥의 저수량을 자랑한다. 제방도 높이 8.5m에 길이가 746m나 된단다. 하나 더. ‘고마(雇馬)’라는 지명이 재미있다. 저수지 확장공사를 하는데, 그 생김새가 말발굽을 닮았었다나?
▼ 농업생산 기반시설인 ‘고마제’는 그동안 잡풀만 무성했다고 한다. 그러다 2022년 군민과 관광객들에게 힐링 친수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농촌테마공원’을 조성했단다. 계절장터·광장·화장실 등 기초생활기반시설과 뽕체험장·생태체험장·쉼터·산책길 등 체험·휴양시설과 농산물판매시설을 갖췄다.
▼ 서해랑길은 이제 고마제 수변산책로를 따른다. 아니 전체는 아니고 서·북쪽 모서리쯤인 이곳에서 시작해 동·북쪽 모서리쯤까지 2/3쯤 걷게 된다. 참고로 산책로는 저수지의 호반(가끔은 가로지르기도 하지만)을 따라 한 바퀴 돌도록 나있다. 길이는 5.7km.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둘레둘레 해찰도 해가며 걸어도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젊은 연인들이라면 여기다 30분 정도 더 보태야 한다. 아름다운 경관에다 곳곳에 만들어놓은 조형물을 벗 삼아 사진도 찍어두어야 하니 말이다.
▼ 탐방로는 저수지를 한 바퀴 돈다. 그 바깥으로 ‘고마제윗길’나 ‘고마제로’ 같은 도로가 지나가기 때문에 산책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며 쉬엄쉬엄 걸어보는 것도 괜찮다. 산책로 곳곳에 광장이나 쉼터를 조성해놓았는가 하면,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커피 한 잔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카페도 여럿 들어서 있다.
▼ 위에서 예기했다시피 산책로는 호숫가 경관 좋은 곳에 쉼터나 광장을 들어앉혔다. 그래선지 이정표는 현재위치를 표기한 다음 앞뒤 쉼터까지의 거리를 적고 있었다.
▼ 탐방로를 걸으며 생태관찰은 물론이고, 멀리 보이는 풍경까지 한눈에 담아볼 수 있으니 ‘힐링 산책길’이라 할 수 있겠다. 한적한 시골길을 걸으며 자연과 여유로움을 벗 삼아 시간을 보내니 이 아니 힐링이겠는가.
▼ 12 : 35. 첫 만남은 ‘고마 광장’이다. 호숫가에 꽃밭이 딸린 널따란 광장을 조성해놓았다. 주변에 ‘샤스타데이지’라도 심었는지 안내판까지 세워두었지만 샤스타데이지는 눈에 띄지 않는다. 지금쯤 사진 찍기 딱 좋은 하얀 꽃망울을 내밀고 있을 텐데...
▼ 꿩 대신 닭이라고나 할까? ‘천국의 계단’ 조형물이 샤스타데이지를 대신하겠단다. 사람들은 누구나 천국에 가길 원한다. 계단의 끝에 문까지 달아놓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저 계단을 올라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나 나올법한 분위기를 느껴보자.
▼ 호숫가 길이 끊기는 곳에는 나무다리를 놓아 산책로를 연결했다. 가끔은 예쁜 나무다리로 저수지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그게 ‘고마제’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결 돋보이게 만든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사방으로 풍경화가 그려진다. 그것도 무척 아름다운 그림으로다.
▼ ‘고마제’는 늪지형 저수지라서 바닥이 완만하고 수심이 고르다고 했다. 거기다 수초까지 우거져 붕어와 잉어 등이 많이 잡힌단다. 세월이라도 낚으려는 듯, 하릴없이 찌만 응시하고 있는 강태공에게 넌지시 물으니 입질만 좋은 게 아니라 씨알까지 굵다는 대답이 금방 돌아온다. 호반 곳곳에 들어앉은 저 많은 낚시꾼들이 그 증거라 하겠다.
▼ 이분은 아예 살림살이를 통째로 옮겨왔나 보다. 얼마 전에 본 신문의 사회면이 떠오른다. 저수지마다 낚시꾼들의 무분별한 쓰레기 투기로 몸살을 앓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분만이라도 아니온 듯 다녀가셨으면 좋겠다.
▼ 12 : 46. 두 번째로 만나는 ‘방죽 쉼터’에는 정자와 함께 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 ‘식물 안내판’. 샤스타데이지 대신 이번에는 노랑꽃창포와 수크렁, 벌개미취를 담았다. 이 근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수변산책로 바깥으로 ‘고마제윗길’나 ‘고마제로’ 같은 도로가 지나간다. 잠시지만 도로를 따라가기도 한다. 하나 더. 산책로 길섶은 꽃밭으로 꾸몄다. 거기서 철쭉과 샤스타데이지, 작약 같은 화초가 꽃망울을 활짝 열고 길손을 맞는다. 맞다. 부안군청은 농촌테마공원을 만들면서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도록 수변공원을 꾸몄다고 했다. 개화시기를 조절해 수목 및 초화류를 식재함으로써 계절에 따라 생동감 있는 볼거리를 제공한단다.
▼ 12 : 51. ‘고마 장터’에 이른다. 지역 특산품을 파는 ‘계절장터’가 열리는 곳이다. 그래선지 단체 관광객들을 수용할 수 있는 널따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정자나 벤치,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도 완벽하게 갖췄다.
▼ 카페도 눈에 띈다. 하지만 문은 열고 있지 않았다. 지역 언론은 그 이유를 접근성에서 찾고 있었다. 부안 읍민들이 산책삼아 찾아오기에는 너무 멀다는 것이다. 일부러 승용차를 몰고 와야만 하니 누가 찾겠느냐며 테마공원 조성사업을 비판하고 있었다.
▼ 12 : 53 - 13 : 05. ‘농촌테마공원’ 조성사업은 고마저수지 전체를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산책로 곳곳에 쉼터나 소공원을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경관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 벤치, 조형물 등을 배치했다. 덕분에 이곳에서 느긋하게 간식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 의미심장한 조형물.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네)가 가는 곳이라면 (나)도 꼭 간다? 둘이 마주보며 오래오래 간직해둘만한 사진이라도 찍어보라는 모양이다.
▼ 호숫가에 ‘뽕체험장’까지 있다기에 ‘누에고치’인줄만 알았다. 하지만 ‘못줄’을 감아놓은 것이란다. ‘못줄’은 모를 일정한 간격으로 띄어서 심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마다 붉은 표시를 해 놓은 줄을 말한다. 나무토막에서 풀린 못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면 농부들은 일제히 열을 맞춰 못줄 앞에 선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못줄에 매달린 붉은 작은 띠 위치에 모를 심었다. 모를 다 심으면 못줄자비가 줄을 다음 위치로 옮긴다.
▼ 이번에는 물위를 걷는다. 누구처럼 공중부양을 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지자체에서 호수에 다리를 놓는 멋을 부렸다. 그나저나 다리 건너에도 못줄을 감아놓은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렇다면 둘을 연결시키는 이 다리는 못줄이 된다. 그래서 다리 이름도 ‘못줄다리’가 됐다.
▼ 산책로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배롱나무’가 아닐까 싶다. 일본인지 한국인지도 모르게 만드는 벚꽃나무가 아닌 것 자체만으로도 좋은데, 붉은 꽃이라도 피우면 그야말로 천상의 길이 될 수도 있겠다.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 꽃을 피우면, 산천초목이 모두 초록 세상이라서 배롱나무 꽃이 한층 더 돋보일 테니 말이다.
▼ 대나무쉼터와 은사시나무군락, 아랫도리를 물속에 담근 수양버들을 차례로 지난다. 리아스식 호안이라서 아름다운 경관을 수시로 만나는데, 전망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벤치를 놓았다.
▼ 길가 뽕나무에서는 오디가 알알이 영글어간다.
▼ 13 : 35. ‘솟대 다리’가 또 다시 호수를 가로지른다. 그런데 직선이던 ‘못줄다리’와는 달리 이번에는 물고기처럼 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간다. 다리를 따라 늘어선 수많은 물고기 조형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 ‘솟대다리’라는 이름처럼 수많은 솟대들이 다리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안내판은 벽송대사의 구부러진 지팡이를 모티브로 ‘솟대’를 만들었다고 적었다. 그 위의 물고기 조형물은 생명력 있는 역사적 숨결과 어머니에 대한 숨결을 자연의 화려한 색상으로 표현했단다. 참고로 ‘벽송 지엄(碧松 智嚴)’ 스님은 이곳 부안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禪脈)을 잇는 큰 스님 가운데 한 분으로, 스승인 ‘벽계 정심(碧溪 正心)’ 스님이 도를 깨우쳐주기 위해 ‘자! 내 법 받아라!’는 고함과 함께 주먹을 불쑥 내민 일화로 유명하다.
▼ 수변산책로의 대미는 나무다리가 장식한다. 호숫가 길이 끊기는 곳에 다리를 놓아 산책로를 연결했다.
▼ 13 : 46. 길었던 수변산책로는 ‘알땅 카페’에서 끝을 맺는다. 참숯불가마찜질방을 부대시설로 두고 있는데, 커피를 마시며 새만금을 이야기하기에 딱 좋다는 홍보문구를 내걸었다. 하나 더. 커피에 디저트를 곁들일 수 있는데, 당일 3만원 이상 결재시 롯데시네마의 전국 400개 개봉관에서 이용 가능한 영화티켓 한 장을 준단다.
▼ 이곳에도 포토존이 만들어져 있었다. 어설프기는 하지만 천국의 계단을 놓고, 옆에서는 자전거가 하늘로 올라간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는 듯이.
▼ 카페는 이벤트가 꼭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들러보고 싶은 분위기를 퐁퐁 풍기고 있었다. 스페인의 ‘구엘공원(Park Güell)’을 떠올리게 만드는 저 담장도 그중 하나다. 당시의 기억을 소환해보자. 가우디의 아이덴티티(identity)이기도 한 ‘곡선의 미’가 파도를 치듯 물결을 이루는 벤치는 한마디로 동화적이며 환상적이다. 아랍식의 이국적인 면모와 미래적인 이미지까지 동시에 담고 있단다. ‘까탈루나 스타일’이기도 한 트랜카디스기법(Trencadis : 타일과 유리, 거울 등을 깨서 모자이크화)인데 하나하나의 파편들이 모여 일정하면서도 창의적인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이 보면 볼수록 경이롭다.
▼ 13 : 52. ‘동진남로’를 따라 ‘궁월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장등리(長登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장기·궁월·청운·장등) 중 하나로 마을 지형이 ‘활 궁(弓)’자를 닮았다고 한다. 그래서 ‘궁상’이라 불리다가 후에 마을 형태가 달같이 변했다며 ‘달 월(月)’자를 써 궁월(弓月)이 되었다. 아무튼 서해랑길은 마을 앞 버스정류장에서 왼쪽 샛길로 들어간다. 영신교회를 앞에 두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 산길과 들길을 누비던 서해랑길은 이제 산 하나 보이지 않는 순수한 평야지대로 들어간다. 함께 걸어온 구릉지는 그게 서운했던 모양이다. 황토색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주며 이별을 아쉬워한다.
▼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도 이미 8일이 지났다. 들일 나온 농부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이유일 것이다.
▼ 13 : 57. 평야지대로 들어가기 직전에 만난 삼거리.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종점’은 오른쪽으로 가야하는데도 이정표(종점 2.5km/ 시점 8.6km)는 반대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 14 : 05. 들녘의 한가운데 들어앉은 ‘장등마을’은 장등리(長登里)의 중심 부락이다. 김제나 전주 등 외지에서 부안으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하는 ‘동진나루’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그 자리에 지금은 동진대교가 놓였다) 옛날부터 큼지막한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선지 철종(哲宗) 때 이곳에서 ‘부안민란(扶安民亂)’이 일어나기도 했단다.
▼ 마을안내판은 장등마을의 유래를 적고 있었다. 망기산의 줄기가 내려와 장기마을과 청운마을을 거쳐 장등마을에서 끝을 맺었다고 하여 ‘긴 장(長)’, ‘오를 등(登)’ 자를 써서 장등(長登)이라 하였다나? 참고로 ‘청운마을’에는 조선시대 출장 온 관원들이 묵어가던 ‘동진원(東津院)’이, 그리고 부안에서 김제·전주·서울로 이어지는 통로인 ‘장기마을’에는 ‘동진장터’가 있었다고 한다.
▼ 고샅길을 걸어 마을을 횡단한다. 둘레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그러니 주민들의 안정을 헤치지 않도록 조용히 지나가도록 하자.
▼ 14 : 09. 마을정미소를 마지막으로 마을을 벗어나면 잠시 후 국도 23호선(부안로)를 만난다. 하지만 자동차 전용도로라서 횡단하지는 못하고 도로 아래로 난 농로를 따라간다.
▼ 300m쯤 더 걸으면 국도 아래로 굴다리가 뚫려있다. 이때 앞서가던 집사람이 느닷없이 만세를 부르는 게 아닌가. 종점이 다와 간다는 안도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굴다리를 지나서도 한참이나 더 농로를 따른다. 이번에도 국도 아래로 길이 나있다. 참 도중에 또 다른 굴다리(신설도로 아래)를 통과하기도 한다.
▼ 들녘은 온통 초지로 덮여있었다. 목초(牧草)를 베어놓은 곳도 보인다. 저장을 위해 건조시키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 14 : 21. ‘동진대교’로 올라서면서 부안과 이별을 고한다. 예로부터 부안은 맛, 풍경, 이야기 등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하여 ‘변산삼락(邊山三樂)’으로 불리었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도 <어염시초(물고기·소금·땔나무)가 풍부해 부모를 봉향하기 좋으니 ‘생거(生居) 부안’이로다>라고 했다. 그만큼 사람이 살기 좋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부안과 헤어져 이제 김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다리 ‘갓길’을 따라 걷다보면 중간쯤에서 ‘동진강(東津江)’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정읍시 산외면의 상두산(象頭山, 575m)에서 발원해 김제평야를 지나 황해로 흘러드는 44.7km 길이의 강이다. 상류 지역은 도원천이라고 불리며, 칠보면(정읍시)에서 칠보천을 합친 이후 하폭이 넓어지면서 동진강이 된다.
▼ 다리 건너 휴게소는 ‘지평선 새마루’란 이름표를 달았다. 김제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으로는 이만한 게 없겠다. 2012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던 옛 ‘동진강휴게소’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었다. 2층 건물에 식당과 카페, 편의점, 농·특산물판매장이 입주한단다. 부대시설로 쉼터와 주차장, 공원, 산책로 등은 이미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에 축조된 ‘벽골제(碧骨堤, 사적 제111호)’는 김제의 자랑거리로 우리나라 저수지의 효시다. 고대 수리시설 중 규모도 가장 크다. 지자체에서는 그걸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도로변에 벽골제의 수문 조형물과 함께 설명을 담은 빗돌을 세워놓았다.
▼ 14 : 30. 국도를 사이에 두고 ‘지평선 새마루 휴게소’와 마주보고 있는 ‘동진강 석천휴게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길을 나선지 3시간 20분 만인데, 앱이 11.94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나 더. 석천휴게소는 공사를 하다가 중단했는지 뼈대만 앙상했다.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건너편 동진휴게소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 집사람이 웃는다. 한 점의 티도 없는 해맑은 모습이다. 여행, 아니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다 보니 잡다한 일상의 걱정들까지도 훌훌 떨쳐버렸나 보다. 언젠가 웃음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영국의 한 의과대학에서 발표한 ‘어릴 때는 하루에 평균 400~500번을 웃다가 장년이 되면서 하루 15~20번으로 줄어든다.’는 웃음에 관한 연구결과이다. 그런데 웃음을 잃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경험에서 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간이 고민하고 염려하는 일들 가운데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박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란 글에서 어느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인간의 걱정에 대하여 분석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걱정들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것이 40%이고,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것이 30%, 별로 신경 쓸 일도 아닌 작은 것이 22%,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것이 4%’라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96%의 불필요한 걱정 때문에 기쁨과 웃음, 그리고 마음의 평화까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사람은 지금 96%의 필요 없는 걱정들을 내려놓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게 비록 잠시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왕에 내려놓았으니 까짓 거 다시 집어들 필요가 있을까? 그냥 오래오래 저렇게 즐겁고 행복한 얼굴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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