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아제르바이잔. 바쿠 신시가지 및 샤마흐 주마모스크
여행일 : ‘23. 5. 31(수) - 6. 12(월)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①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 이란 및 러시아와 접한 카스피 해 연안의 국가.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데 경제의 상당 부분을 석유와 천연가스가 지탱하고 있어 ‘불의 나라’로 불린다. 동유럽권에 속해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까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 달리 아제르바이잔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에 서아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점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동유럽권으로 보는 이유는 19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영향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⑧ 바쿠(Baku) :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다보다 낮은 카스피 해 연안에 위치,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도라고 한다(가장 높은 수도는 볼리비아의 ‘라파스’이다). 캅카스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약 4분의 1 가량이 집중되어 있는 경제의 중심지이다. 2000년대 이후 오일 달러로 아제르바이잔의 경제가 크게 성장하면서 도시 곳곳에 마천루 등 여러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알려진다.
▼ 신시가지 투어의 시작은 ‘불바르 공원(Bulvar Park)’이다.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바쿠 ‘구도심(올드 시티)’ 부근에 조성된 해안공원으로 드넓은 ‘카스피 해’의 아름다운 경관을 맘껏 즐길 수 있는 명소이다.
▼ 코카서스 3국(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여정이다. 첫 번째로 들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수도인 바쿠와 고부스탄, 샤마흐, 쉐키를 방문하도록 일정이 짜여있다.
▼ 패키지여행의 특성상 샅샅이 살펴보지는 못했다. 여행사는 舊도심인 ‘올드 시티(1편에서 소개)’와 신시가지에서 두어 곳을 안내해 주는 정도. 그게 분량이 적어 쉐키로 가는 도중에 들른 샤마흐의 이슬람 사원을 보태봤다.
▼ 안으로 들어서자 카스피 해(바쿠만)를 끼고 엄청 길고, 넓은 공원이 펼쳐진다. 공원 안에는 여객선 터미널, 요트 정박장, 대형 쇼핑몰, 국립 카페박물관, 아즈네프 광장, 대형 회전관람차인 ‘바쿠 아이’, 고급 호텔 등이 호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 바다인데도 바다 특유의 짭조름한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맞다. 카스피 해는 원래 바다가 아닌 ‘호수’였다. 그러다가 호수를 접하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 공해·영해 문제가 불거지면서 바다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했다.
▼ ‘카스피 해’는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 사이에 있는 내륙의 바다다. 남쪽으로는 이란고원이 펼쳐지고, 북쪽 러시아의 볼가강과 우랄강에서 민물이 유입된다.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은 해발 –1,023m. 하지만 댐건설과 산업화로 인한 물 사용량 증가 등으로 인해 수심이 계속 낮아지는 중이라고 했다. 참! 저 멀리 바다에 떠있는 듯한 건물은 카펫 박물관이라고 했다.
▼ 공원 한쪽 끝에서 반대쪽까지 걸으려면 2시간이나 걸린단다. 그러니 시간에 제약이 많은 패키지여행자로서는 꿈조차 꾸어볼 수 없다. 연꽃처럼 지어진 쇼핑몰 등 두바이에서나 볼 법한 독창적으로 지어놓은 예쁜 건물들만 카메라에 담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고개를 돌리자 또 다른 형체가 유혹한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같다 해서 ‘불꽃 타워’라 부르는 ‘플레임 타워(Flame Tower)’가 바로 그것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인 불을 형상화한 이 건물은 푸른빛을 띤 세 동으로 이뤄져 있는데 바쿠의 또 다른 ‘랜드 마크’이다.
▼ 카스피 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가 한 방향으로 치우쳐졌다는 숲속에는 꽤 많은 분수가 만들어져 있었다. 숲에는 공원을 만들 당시 수입했다는 희귀한 나무와 고급스런 소나무가 즐비하다. ‘꽤 많은 돈이 들어갔겠네요.’ 집사람의 말마따나 공원은 돈을 쏟아 부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 뭔가에 쏙 빠져있는 저 동상은 국민가수이자 아제르바이잔 클래식 음악을 대표하는 ‘무슬림 마고마예프(Muslim Magomayev: 1942~2008)’라고 한다. 그는 오페라 가수지만 팝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러시아의 프랑크 시나트라’로 불리기도 했단다. 활동무대였던 모스크바의 차이콥스키 콘서트홀·볼쇼이 극장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에서도 공연했다. 2008년 모스크바에서 죽어 고향인 바쿠에 묻혔다. 동상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 공원에는 ‘체스 판’이 그려져 있었다. 2016년 바쿠에서 ‘세계 체스 올림피아드’가 열렸다고 한다. 그게 체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회였다더니 그 영향이 아닐까 싶다. 하나 더. ‘체스’ 경기에 푹 빠져있던 소년이 나에게 반갑다는 손짓을 한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현지인들이 관심의 눈빛을 보내온다던 말이 헛소문이 아니었나보다. 특히 한류를 잘 아는 젊은이들이 그런 반응을 가장 적극적으로 보낸다나?
▼ 바쿠의 아이스크림 장수는 장난꾸러기인가 보다. 달라는 아이스크림은 안주고, 줄듯 말듯 장난치다가 바닥에 떨어뜨려버린다. 아니 떨어뜨리는 흉내를 내는데 하도 리얼 해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스크림의 점도가 높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그 덕분에 바쿠의 따가운 햇살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재미있었다.
▼ 불바르공원에서 지하보도를 건너면 ‘로데오 거리’에 이른다. 1편에서 소개한 ‘올드 시티’가 바쿠의 과거였다면 이곳은 바쿠의 현재로 들어가는 길이다. 가성비 좋은 고급 레스토랑과 블링블링(Bling Bling)한 카페, 유명 브랜드 숍들이 이어지는 보행자의 거리다. 저녁이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밤을 즐긴다는데, 인종·국적·나이·언어가 달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단다.
▼ 이슬람 국가답지 않게 거리는 번화했다. 대부분의 식당에서 술도 판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나야 물론 생맥주로 목을 축였지만. 참고로 아제르바이잔은 코카서스 3국 중 물가가 가장 비싼 편이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2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 커피 한 잔이 3.0AZN(약 2100원) 밖에 되지 않는다. 경찰국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치안도 뛰어나다.
▼ 자투리 시간에 ‘yay land fest’라는 축제장을 둘러봤다. ‘yay’가 앗싸나 야호 등 아주 기뻐서 내는 소리이니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축제장쯤 되겠다. 그래봤자 도깨비 체험관과 몇 가지 놀이시설이 전부였지만.
▼ 축제장에서의 즐거움은 주전부리를 사먹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이곳도 역시 먹거리가 축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 두 번째 방문지는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Heydar Aliyev Center)’. 버스에서 내리면 ‘별 이상스러운 건물도 다 있구나’ 할 정도로 예술성이 돋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라크계 영국인 여류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해 2012년 완공한 복합건축물(박물관·갤러리 등이 들어있다)로 1993년부터 2003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헤이다르 알리예프’에게서 이름을 따왔다. 이밖에도 바쿠에는 국제공항 등 그의 이름을 딴 시설들이 많이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2013년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해오고 있는 아들 ‘일함 알리예프(IIham Aliyeb)’가 효심을 발휘했지 않나 싶다. 참! 왼쪽 쾌속선처럼 생긴 건물은 ‘바쿠 컨벤션센터(Baku Convention Center)’라고 했다.
▼ 신미래주의(Neo-futurism) 양식이라는 저 건물에서 바쿠와 서울의 공통점을 찾는 이들도 있다. 저 건물을 디자인한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서울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를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건물은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시키고 있었다. 우아한 곡선이 바람에 흔들리 듯 굽이친다. 어찌 보면 물결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느 작가는 ‘극한의 건축물’(extreme architecture)‘로까지 표현하고 있었다.
▼ ‘시티 사인’은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찍었노라’를 외치는 관광객들을 위한 일종의 보너스이다.
▼ 무슨 행사라도 있는지 광장은 무대 설치작업이 한창이었다. 아무튼 센터는 8층 높이의 건물에 박물관, 도서관, 전시실, 공연장 등이 들어서있다고 했다. 하지만 주마간산의 패키지여행자들에게는 남의 집 불구경일 따름이다. 그저 낯선 나라에서 만난 익숙한 건축물을 배경삼아 사진 한 장 찍으면 그만이다.
▼ 맞은편 풍경. 바쿠에는 저렇게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는 건물들이 많다고 한다. 서민들의 생활수준과는 별 상관없이 넘쳐나는 석유자본이 이뤄낸 것들이란다.
▼ 바쿠의 야경은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화려함을 자랑한다고 했다. 해가 지면 도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놓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찾아간 곳이 ‘순교자의 길’. 이곳에 바쿠의 야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가 있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의 ‘현충원’ 쯤으로 보면 되겠다. 아제르바이잔 독립전쟁(1990년)과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분쟁(1988~1994년) 때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기념공원 겸 묘지다.
▼ ‘묘’마다 당사자의 약력과 사진을 게시했다. 가이드는 반정부 시위현장에 있다가 살해당한 6개월 된 신혼부부의 가슴 아픈 사연도 전해준다.
▼ 공원묘지의 끝에는 ‘순교자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 모뉴먼트(monument) 내부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365일 꺼지지 않는 추모의 불꽃이란다.
▼ 기념탑을 지나면 길은 ‘하이랜드 공원(Highland Park)’으로 이어진다. 지대가 높아 불꽃타워는 물론이고 바쿠 시내와 카스피 해 연안의 야경을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 공원에서 내려다본 카스피해 연안의 야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바쿠는 한때 실크로드 대상(Caravan)들의 주요 교역로였다. 그러다 석유가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작은 항구도시에서 단숨에 동서양의 문물이 어우러진 화려한 도시가 되었다. 그게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포장되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 바쿠는 카스피 해를 끼고 있어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건물 외관 LED 조명을 활용한 야경이 보는 이의 시선을 꼭 붙들어 매버린다.
▼ 런던 아이(London Eye)를 닮은 회전관람차 ‘바쿠 아이(Eye)’가 특히 눈길을 끈다. 밤에 핀 연꽃처럼 화사한 ‘데니즈(Deniz) 쇼핑몰’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 ‘메이든 타워’가 바쿠의 과거라면, 바쿠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만큼 우뚝 솟아오른 ‘플레임 타워(Flame Tower)’는 바쿠의 현재 그 자체다. 현대적인 도시 느낌이 물씬 나는 세 개의 불꽃 모양으로 된 독특한 외모로 유명하다. 불을 숭배한다고 알려진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Zoroaster)’의 출생지, 그리고 석유와 천연가스가 풍부한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을 상징한단다. 또 밤에는 빌딩 전체를 둘러싼 LED 조명이 형형색색으로 바뀌어 살아 있는 불꽃처럼 보인다.
▼ 밤하늘을 밝히는 플레임 타워의 LED쇼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을 엿보게 해준다. 다양한 색상과 패턴의 조명이 건물 외관에 투사되어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바람의 도시’ 바쿠를 ‘불의 도시’로 바꾸었다고나 할까? 하나 더. 플레임 타워에는 호텔·아파트·오피스 등이 입주해있으며, 카스피 해와 바쿠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단다.
▼ 플레임 타워(Flame towe)는 알로브 타워(Alov towe)라고도 불린다. 아제르바이잔어 ‘Alov’는 ‘화염’이란 뜻이다. 저게 붉은 레이저조명으로 입혀지면 영락없는 불꽃이 된다. ‘꺼지지 않는 불의 나라’라는 산유국 아제르바이잔의 국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새어 나오는 천연가스에 불이 붙어 비가 내려도 꺼지지 않는다는...
▼ 샤마흐로 가는 길, 카스피 해변에는 영화나 사진에서 많이 본 석유 시추시설로 한가득이다. 가이드는 ‘메뚜기’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지하를 뚫기만 하면 기름이 나온다고 했다. 참! 아제르바이잔 석유를 처음 유럽으로 가져가 막대한 부를 쌓은 이는 노벨상으로 유명한 ‘노벨’의 형이라고 했다. 석유를 발굴하고, 정유소·송유관·원유소 등을 개발해 바쿠의 석유산업을 발전시켰단다. 경제기반을 조성해 바쿠를 ‘카스피해 보석’에서 ‘유럽의 보석’으로 업그레이드시킨 것이다.
▼ ‘쉐키’로 가는 도중 ‘샤마흐(Shamakhi, ‘쉐마키’로 읽는 사람들도 있다)’에 있는 ‘주마 모스크’에 들렀다. 해발 709m에 위치한 샤마흐는 한때 쉬르반 왕국의 수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자주 일어나는 지진으로 인해 왕국의 수도가 바쿠로 옮겨지면서 지금은 샤마흐주의 주도(州都)로 만족하고 있다.(‘주마 모스크’는 많은 부분을 오마이뉴스의 ‘이슬람 국가에서 고대의 교회를 살펴보다’를 참조했다)
▼ 건물은 가운데 돔을 중심으로 양쪽에 미나레트를 대칭으로 배치하고 그 밖으로 회랑을 대는 형식을 취했다.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회교 사원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도 나타난다. 작은 미나렛 네 개가 돔 사방에 설치되어 있는가 하면, 작은 돔도 정면 출입구 위에 하나, 큰 돔 양쪽으로 하나씩 만들어져 있다.
▼ ‘수피파’ 이슬람의 성자 ‘디리바바’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살아있는(디리) 할아버지(바바)’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국민들을 위해 많은 기적을 행했던 성직자이다. 그런데 ‘수피파’라는 이름이 생소하다. 우리가 흔히 듣던 시아파나 수니파가 아닌 것이다. 맞다. 수피파는 교리나 율법보다 개인의 신앙과 각성을 중시하는 신비주의적 분파로 수니파, 시아파와 함께 이슬람의 3대 종파로 분류된단다.
▼ 사원의 역사를 기록한 표지석. 사원은 이 지역이 이슬람 왕조인 우마이야 제국의 지배를 받던 743년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남 코카서스 지역 최초의 모스크라나? 1859년, 1902년의 지진과 1918년의 아르메니아인들의 방화로 파괴와 복원을 반복하다가, 201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단다.
▼ 모스크 밖은 작은 정원으로 조성했다. 분수(물을 내뿜지는 않았지만)를 중앙에 두고 주위를 장미 꽃밭으로 둘렀다.
▼ 지하는 한술 더 떴다. 연못을 팠는가 하면, 꽃과 식물이 가득한 정원으로 꾸몄다. 하나 더. 가이드는 지하에 숙소도 있다고 했다. 옛날 학승들이 머물던 곳이라는데 직접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 정면 입구로 들어가면 미흐라브(Mihrab, 신자들의 예배 방향을 가리키는 벽면의 오목한 곳 또는 장식 패널)과 민바르(Minbar, 미흐라브의 옆에 놓이는 설교단)가 있고, 양쪽으로 예배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 모스크 내부는 외부인들의 출입이 자유로웠다. 가이드는 여자들에게 스카프를 써달라고 했으나, 스카프 대신 모자를 착용하고 있어도 별도의 제재를 하지는 않았다.
▼ 돔과 샹들리에를 겹쳐봤다. 돔의 아랫부분에 창을 만들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게 눈길을 끈다. 돔과 미흐랍, 민바르에는 아랍어 글씨와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 미흐라브와 민바르. 수피파는 흰옷을 입고 한 방향으로 계속 돌며 신과 교감하는 ‘세마’ 의식을 한다고 했다. 쉼 없이 도는 수도자들은 그야말로 몰아(沒我), 자신을 잊은 채 황홀경에 빠지는 경지라고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세마’는 구경할 수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봤지만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신자들만 눈에 띌 따름이었다.
▼ 쉐키(Shaki)로 가는 길. 샤마흐를 지나 이스마일(Ismail) 지역으로 들어서면서 황량했던 사막의 모습은 사라지고 산악과 계곡, 그리고 숲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에 들어오는 산들이 점점 우람스러워지는 건 카프카스 산악지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 가끔은 저런 노점상들도 만날 수 있었다. 산자락을 헤집어놓은 곳도 심심찮게 만난다. 쉐키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놓는 중이란다.
▼ 하룻밤을 머물렀던 ‘Arion Hotel Baku’. 5성급 호텔답게 객실은 청결했고 뷔페식 아침식사도 입에 딱 맞았다. 실내 수영장과 바/라운지, 피트니스센터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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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고원길 9구간(운일암반일암 숲길)
여행일 : ‘24. 5. 4(토)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주천면 일원
여행코스 : 운일암반일암 주차장→구름다리→국민여가캠핑장→닭밭골 산림욕장→와룡암→주천면사무소(거리/시간 : 9.0km, 실제는 알바 포함 12.66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 운일암반일암 주차장(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통영-대전고속도로 금산 IC에서 내려와 13번 국도를 타고 용담호 방면으로 내려오다 ‘용수목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55번 지방도. ‘주천삼거리’에서 다시 우회전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삼거마을’에 있는 운일암반일암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 주천면 삼거에서 출발 주천면사무소에 이르는 코스로, 운일암반일암의 계곡을 따라 조성해놓은 8.8km의 숲길을 따라 걷는다. 명덕봉과 명도봉을 잇는 구름다리와 무지개다리에서 운일암반일암의 빼어난 자태를 바라보고, 천변을 따라 조성한 산책로에서는 숲속의 속삭임을 듣는다. 진안고원길 13구간 중 가장 짧으나 난이도는 ‘중’. 구름다리까지 올라가려면 땀깨나 흘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11 : 03. 주차장 앞. 주자천에 걸쳐놓은 ‘노적교’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정면에 보이는 산은 ‘노적봉’으로 운일암반일암 28경 중 26경이라고 한다.
▼ 국내 유일의 ‘홍삼특구’답게 다리의 조형물까지도 ‘인삼’을 내걸었다. 평균 해발 400m의 남한 유일 고원지대에서 재배되는 진안인삼은 사포닌과 진세노사이드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최상의 품질을 자랑한단다. 그 지리적 특성으로 2005년 홍삼한방특구로 지정된 바 있다.
▼ 다리 아래로는 주자천이 흐른다. 천길단애와 쪽두리·천렵·대불바위 등 크고 작은 기암괴석이 계곡을 따라 5km 거리의 와룡암까지 이어지는데, 이곳을 따로 ‘운일암반일암계곡’이라 부른다. 골이 워낙 깊어 오가는 것은 구름밖에 없는 데다 햇빛은 반나절밖에 들지 않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 9구간(운일암반일암 숲길)의 출발지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다리 건너에 세워져 있다. 마침 코스 지도까지 그려져 있으니 머릿속에 기억해 둔 다음 출발하도록 하자. 하긴 나는 GPX트랙까지 깔아놓고도 종점을 놓치고 한참이나 더 걸었지만...
▼ 탐방로는 주자천을 따라 내려간다. 산자락에 들어앉은 ‘노적봉 쉼터’의 울타리와 냇가 사이로 길이 나있다. 쉼터에는 농구·족구 코트와 오토·글램핑(Glamping) 캠핑장이 들어서 있었다.
▼ 쉼터를 지나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간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연록’. 그 속으로 길이 나있다. 길가에 늘어선 돌탑들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 수백 기가 늘어섰는데, 개중에는 아크로바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슬아슬함을 보이기도 한다.
▼ 11 19. ‘칠은교’에 이른다. 이름처럼 7명의 도인이 은둔하여 살면서 인삼씨를 심고 가꾸었다는 곳이다. 하지만 요즘은 물놀이 장소로 더 유명하다. 지자체에서 수인성 전염병 예방을 위한 수질검사를 수시로 해오고 있을 정도로...
▼ 탐방로는 칠은교에서 오른쪽 명도봉 방향 산길을 올라간다. 대불바위 주변 바위벼랑에 길이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운일암반일암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매김한 ‘구름다리’로 인도하려는 의도가 더 크다고 하겠다.
▼ 안내판은 이곳이 구름다리로 올라가는 길임을 알려준다. 구름다리를 건넌 탐방객들이 내려올 수는 없다는 얘기다. 구름다리가 일방통행만 허용되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도중 내려오는 사람들을 만났다면 ‘명도봉’을 다녀오는 등산객들로 보면 된다.
▼ 탐방로 입구는 지자체에서 나온 관리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기상악화(강우·강설·강풍·결빙) 때나 탐방 허용시간(하절기 기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을 못 맞춘 탐방객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 구름다리로 오르는 길은 꽤 가팔랐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40층(90m 높이) 아파트를 걸어 올라간다고 여기면 되겠다. 그 거리가 400m밖에 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11 : 32. 숨이 턱까지 차오를 즈음에야 ‘운일정(雲日亭)에 올라설 수 있었다. 시야가 툭 트이는 바위벼랑 위에 팔각의 정자를 지어놓았다. 협곡에서 부는 바람하며, 바라보이는 뷰가 장난이 아닌 곳이니 정자에 꼭 올라보도록 하자.
▼ 정자는 조망의 명소다. 구름다리를 놓으면서 함께 세운 듯, 난간에 서자 구름다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 운일정에서 구름다리까지는 300m. 걷기 딱 좋은 내리막길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 11 : 39. 잠시 후 도착한 ‘구름다리’는 운일암반일암의 새로운 명소로 이미 자리매김 됐다. 명도봉과 명덕봉을 잇는 길이 220m, 폭 1.5m의 다리가 높이 80m의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 구름다리는 교량기술의 결정체라고 했다. 우선 바위를 철근콘크리트(앵커리지)로 단단히 보강한 다음 양쪽 앵커리지 위에 2개의 기둥(주탑)을 세우고 케이블 두 가닥을 빨랫줄처럼 길게 늘어뜨린다. 이어서 앵커리지 뒤쪽을 단단히 잡아당겨 고정시킨 케이블 사이사이에 세로로 뻗은 강철선(행어케이블)을 내린 다음 상판을 연결해서 고정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높이와 길이는 물론이고, 풍력·장력·하중 등 다양한 요소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계산한단다.
▼ 다리를 걷는다. 마치 허공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거기다 상판 바닥이 송송 구멍 뚫려 있어서 까마득히 지상이 내려다보이니 소름끼치는 스릴감까지 만끽할 수 있다. 하나 더. 구름다리는 ‘일방통행’이라서 명도봉쪽에서 명덕봉쪽으로 건너는 것만 허용된단다. 그래선지 오고가는 사람들로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는 여느 출렁다리들과는 달리 다리가 뻥 뚫렸다. 전환의 발상이 만들어낸 비현실적 풍경이 아닐까 싶다.
▼ 발아래로 ‘운일암반일암’의 비경이 펼쳐진다. 70여 년 전만 해도 깎아지른 절벽에 길이 없어 오로지 하늘과 돌과 나무와 오가는 구름뿐이어서 ‘운일암(雲日岩)’이라 했고, 또한 깊은 계곡이라 햇빛을 하루에 반나절 밖에 볼 수 없어 ‘반일암(半日岩)’이라 불렸다고 한다.
▼ 반대 방향으로는 ‘무지개다리’가 내려다보인다. 또 다른 ‘출렁다리’이다.
▼ 11 : 43. 하산을 시작한다. 길은 산비탈을 옆으로 째며 이어진다. 까마득한 바위절벽이라서 내려가는 길을 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 진안의 ‘랜드 마크’로까지 대접받는다는 ‘구름다리’. 그런 명소와의 이별이 못내 아쉬웠던지 산비탈에 멋진 전망대 하나를 만들어놓았다.
▼ 난간에 서자 조금 전 건너왔던 ‘구름다리’가 그 전모를 드러낸다. 그런데 화려한 붉은색 위주인 여느 구름다리들과는 달리, 이곳은 온통 은빛이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저 모습을 보고 은빛갈치가 우아한 비늘을 움직이며 하늘을 나는 형상이라고 했다.
▼ 내려가는 길은 계단의 연속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나무계단이 ‘갈 지(之)’자를 써가며 아래로 향한다.
▼ 11 : 52. 길고 긴 계단의 끝나고 55번 지방도(동상주천로)로 내려선다. 이곳도 역시 지자체에서 나온 관리원이 지키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이니 진입을 금지한다는 팻말도 눈에 띈다.
▼ 공중화장실과 식수대 등의 편의시설도 만들어져 있었다. 구름다리를 다녀오느라 참았던 인간 본능을 해결하라는 모양이다.
▼ 고원길은 도로를 횡단해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주자천’을 거슬러 올라가기로 했다. 운일암반일암이 자랑하는 비경이 저 위에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진안고원길은 그 비경을 살짝 비켜 지나간다).
▼ 도로의 왼쪽 가장자리, 그러니까 주자천의 천변을 따라 나무 덱 길을 따로 내놓았다. 운일암반일암의 은밀한 속살을 눈에 담으며 걷는 기분 좋은 구간이다. 아니 ‘국가지질공원’으로까지 지정되어 있다니 꼼꼼히 살펴보며 걷도록 하자.
▼ 운일암반일암은 ‘진안·무주 국가지질공원’ 영역 안의 지질명소다. 중생대(中生代)의 마지막 지질시대인 백악기(白堊紀), 8,000만 년 전의 흔적으로 화산폭발로 용암이 여러 차례 분출하고 쌓이기를 반복하며 만들어졌다. 그게 또 침식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처럼 변했다.
▼ 크고 작은 기암과 절벽이 저마다 다른 모습을 자랑하고, 계류를 딛고 일어선 절벽에서는 풍상을 이긴 소나무들이 절벽과 어우러지며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를 만들어낸다.
▼ 깎아지른 기암절벽 아래를 옥수가 휘감아 돌면서 곳곳에 작은 폭포와 소(沼)를 연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다. 대자연이 만들어 낸 절경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 운일암반일암의 얼굴마담격인 ‘대불바위’는 높이가 40m인데 말뚝바위에다 공깃돌을 올린 모습이 부처님을 닮았다. 바위에 새겨진 ‘쌍고도덕 대명일월(雙高道德 大明日月)’이란 글씨는 조선 후기의 학자 김중정(1602~1700년)이 썼다고 전해진다. 주천 산간오지에서 안빈낙도하며 낙향의 한을 시와 거문고를 통해 달랬고 후학들에게 충효와 근검정신을 일깨운 인물이다.
▼ ‘운일암반일암 28경’ 중 하나이기도 한 ‘대불바위’는 2019년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됐다. 생태·경관·문화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유·무형의 자산으로 꼽혔다는 얘기일 것이다. 백제가 망할 때 열두 장군이 은거하며 충절과 패기로 신라의 침공을 막으려 했다는 ‘열두 굴’도 함께 지정되었다는데, 어디를 얘기하지는 알 수 없었다.
▼ 계곡은 감입곡류의 하천이 펼쳐지면서 장관을 이룬다. 집채만 한 바위들이 계곡 안에 줄지어 들어앉아 있기도 하고, 기괴한 형상의 바위가 뜬금없이 솟구쳐 하천 자락을 붙들고 서 있기도 한다.
▼ 숫제 야외에 만들어놓은 수석(壽石)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각양각색의 기암괴석들이 곳곳에 흩어져 각자의 빼어난 몸매를 자랑한다. 족두리바위, 천렵바위 등 저마다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데 일일이 구분해 낼 수는 없었다.
▼ 산자락에서 흐르는 맑고 시원한 물이 크고 작은 폭포와 소를 형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물이 깊지 않아 계곡 전체가 물놀이에 적당한 조건을 갖췄다.
▼ 12 : 03 – 12 : 09. 400m쯤 거슬러 올라갔을까 자그만 바위봉우리에 ‘도덕정(道德亭)’이란 정자가 걸터앉았다. 운일암반일암의 백미로 꼽히는 명소인데, ‘도덕’이란 이름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명덕봉(明德峰, 846m)과 명도봉(明道峰, 863m)에서 한 글자씩 따왔지 않나 싶다.
▼ 정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멋진 풍광을 빚어내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것은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다. 정자에 앉아 산수를 굽어본다. 크고 작은 기암과 절벽이 저마다 다른 모습을 자랑한다.
▼ 주자천 상류. 55번 지방도가 산골짜기를 파고든다. 저 골짜기는 옛날 용담현에서 전주(전라도 감영)로 가던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 하지만 길이 너무 험해서 공물을 지고 가다 보면 얼마가지 못하고 해가 떨어진다 해서 떨어질 운(隕)자를 써서 ‘운일암(隕日岩)’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시집가는 새색시가 새파란 물이 흐르는 깎아지른 절벽 위를 가자니 너무 겁이나 울면서 기어갔다 하여 ‘운일암’이라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런 지명들은 해동지도와 지방지도, 호남지도 등에 표기되어 있다.
▼ ‘고원길’로 되돌아가는데 한 무리의 라이더들이 지나간다. 운장산의 고갯마루를 넘어오느라 지쳤을 텐데도, 젊음을 과시라도 하려는 듯 힘차게 페달을 밟고 있다.
▼ 이때도 ‘구름다리’를 만날 수 있었다. 명덕봉과 명도봉의 사이를 지나는 좁고 긴 협곡, 이 골짜기를 흐르는 물길(주자천) 위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다리가 걸려있다.
▼ 12 : 16. ‘고원길’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무지개다리’를 건넌다. 무지개다리란 ‘양쪽 끝은 처지고 가운데가 무지개처럼 휘어져 높이 솟게 만든 다리’를 말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다리 어디서도 그런 모양새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다리의 난간을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로 칠했을 따름이다.
▼ 무지개다리도 역시 현수교이다. 양쪽에 주탑을 세우고 케이블로 연결한 다음, 상판을 매달았다. 아까 건넜던 ‘구름다리’와 같은 형식이다. 하지만 까마득히 높은 위치가 아니니 ‘구름다리’라는 이름은 어불성설. 그렇다고 그 흔한 ‘출렁다리’로 놓아둘 수는 없었던지 일곱 색깔 페인팅의 수고로움을 더해 ‘무지개’라는 예쁜 이름을 만들어냈다.
▼ 무지개다리를 건너면서 위를 쳐다보면 방금 전에 건너온 구름다리가 보인다. 두 다리를 오버랩 시켜봤다. 그러자 직선과 곡선의 절묘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 다리 아래 ‘주자천’은 고려 때 송나라에서 온 주자의 종손 ‘주찬’이 다녀갔다는 이름부터가 걸쭉한 하천이다. 운장산 북쪽 골짜기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굽어 주천면과 용담면을 거친 다음 용담면 월계리에서 금강 상류에 합류된다.
▼ 이후부터는 ‘숲길 산책로’를 따른다. 계곡과 나란히 산자락으로 이동하는 길로, ‘운일암반일암’이란 이름처럼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 서늘한 숲길이다. 군락을 이루는 참나무와 소나무, 서어나무가 차양막이 되고, 길가 바닥에는 조리대가 빼곡하게 뒤덮여 있다. 참! 중간에 ‘명도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도 만날 수 있었다.
▼ 경사가 거의 없는 완만한 목재 덱 산책로는 곳곳에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잠시 쉬어가기에 딱 좋다는 얘기다. 아니 잠시 물가로 내려가 보면 어떨까? 시원한 물속에 발 담근 채로 주변 풍광에 푹 빠질 테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12 : 30. 길은 ‘생태 숲(이정표 : 주천면사사무도 5.5km/ 삼거 3.5km)’으로 인도한다. ‘운일암반일암 국민관광지’의 엄청나게 큰 주차장 옆에 만들어놓은 일종의 힐링 공간이다. 숲속에서 자연을 즐기며 힐링할 수 있다나?
▼ 숲에는 체험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짚라인, 통나무 건너기, 통나무 오르기, 터널 통과하기, 흔들마루 등 어린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각종 운동기구들을 배치했다.
▼ 생태 숲 안내도. 다수를 위한 공간이니 타프(tarp) 설치나 야영·취사를 금지한다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차량이나 자전거의 출입도 금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 12 : 35.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는 ‘국민여가캠핑장’이 들어섰다. 운일암반일암의 아름다운 풍광 곁에서 머물 수 있다는 입지 덕분에 개장 전부터 캠퍼들의 많은 관심을 모았던 곳이다.
▼ 시설은 자동차야영장 78면과, 일반야영장 32면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샤워장 및 취사장, 화장실, 잔디광장 등 편의시설과 전기시설 등을 갖추고 있단다.
▼ 안내도는 글램핑(glamping) 시설도 갖추고 있음을 알려준다. 침대가 딸린 침실과 욕실이 있는가 하면, 주방에는 냉장고·오븐·밥솥·커피포트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주방기구를 갖췄다고 한다. TV에 에어컨까지 있다니 웬만한 호텔이 부럽지 않겠다.
▼ 12 : 40. 고원길은 캠핑장을 가로지른 다음 ‘명도교(이정표 : 주천면사무소 5.0km/ 삼거 4,0km)’를 건넌다. 이어서 55번 지방도를 따라 주천면소재지로 간다. 도로 가장자리에 덱 산책로를 따로 내놓았다.
▼ 주자천은 보를 막아 노천 수영장을 만들었다. 주자천에 어깨를 맞대고 있는 캠핑장의 인지도를 한결 업그레이드시켰다고 보면 되겠다. 1-2급수에만 사는 민물고기 ‘꺽지’와 함께 물놀이하는 기회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12 : 49. 200m쯤 도로를 따르다가 숲속으로 들어간다(12 : 43). 그리고 운치 있는 소나무숲길을 400m쯤 더 걸어 ‘주양교’에 이른다.
▼ 이정표(주천면사무소 4.3km/ 삼거 4.7km)가 다리를 건너란다. 그런데 공식 안내지도보다 구간거리를 0.1km 늘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까지 오면서 만난 모든 이정표가 구간거리를 9km로 적고 있었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했다. 사소한 것이지만 바로잡아야하지 않을까?
▼ 다리 건너에서 만난 멋들어진 주택. ‘목가촌’이라는 식당인데 유럽의 산간지역에서나 볼 법한 통나무집이 이국적인 멋을 퐁퐁 풍기고 있다.
▼ 다리를 건넌 고원길은 ‘닥밭골’ 골짜기 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는 개울 오른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1km쯤 올라가다가, 반대편 임도를 따라 되돌아온다. 여기서 팁 하나. 울창한 숲속을 걷는다는 것을 빼놓고는 이렇다 할 볼거리가 없는 구간이다. 그러니 완주를 목표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주양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도로로 살짝 빠져나가도 될 일이다.
▼ 12 : 53. 매번 얘기했듯이 ‘진안고원길’은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난 길을 잃고 말았다. 그동안 8구간까지 이어오면서 처음으로 방향표지판이 없는 갈림길을 만났기 때문이다. 길을 인도하고 있는 산행대장이 바닥에 방향표시지를 깔아놓고 갔지만 사진 촬영에 바쁜 내 눈에까지 들어오지 못했던 모양이다.(사진은 길을 제대로 찾고 난 다음 찍은 것이다)
▼ 무단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에도 나는 초연했다. 울타리 옆으로 가면 되니까. 하지만 정점을 찍고 되돌아오던 다른 일행들이 내지르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외침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진안고원길을 걸어오면서 처음으로 겪은 알바였다.
▼ 길을 잃었던 지점으로 되돌아와 방향표시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간다. 오솔길을 따라 개울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몇 걸음 걷지 않아 진안 특산물인 인삼과 홍삼을 상징한다는 노란색과 분홍색 묶음 리본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올라가는 도중 반대편 임도(내려올 때 걷게 된다)로 연결되는 갈림길도 만난다. 개울에 잘 생긴 다리까지 놓았다. 볼거리도 없는 산길을 걷는 게 지겨워졌다면 이제라도 저 다리를 건너면 된다.
▼ 잠깐이지만 요런 오르막길을 걷기도 한다. 길은 널찍하게 나 있었다. 질퍽거릴만한 곳에는 야자매트를 깔았고, 맨발로 걸을 수 있는 자갈길(지압 길)도 눈에 띈다. 거기다 졸졸거리는 물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니 이 아니 좋을 손가.
▼ 제각으로 여겨지는 한옥을 스치듯 지나기도 한다. 후손들이 일 년에 한두 번이나 찾아오는지 마당에는 웃자란 잡초와 잡목들만 가득했다.
▼ ‘닥밭골’은 ‘닥나무’가 많이 자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했다. 진짜로 닥나무가 많은지는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지금 그 숲은 ‘산림욕장’으로 변신해 있다. 정자와 평상, 벤치에 운동기구까지 갖춘 힐링 공간이다. 하지만 찾는 사람들이 드문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 13 : 06. 오솔길을 빠져나오니 진안고원길 이정표(주천면사무소 3.4km/ 삼거 5.6km)가 반긴다. 이곳은 9구간의 첫 번째 인증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니 완주를 목표로 하는 나그네라면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 13 : 10- 13 : 20. ‘주자천’으로 되돌아간다. 이 구간도 탐방객들을 위한 다양한 시설들을 품었다. 단체 모임을 위한 무대(공연장)가 보이는가 하면 정자와 평상까지 배치했다. 덕분에 우리부부도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느긋하게 쉬다 갈 수 있었다.
▼ 길을 가다 멋진 삶을 영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한갓지게 살아가는 모습이 컨테이너에 딸린 널찍한 잔디밭에서 그려진다. 더울 때 이용하려는 듯 개울로 내려가는 길을 냈는가하면, 취미생활을 위한 간이 골프연습시설까지 만들어놓았다.
▼ 인삼의 고장답게 곳곳에서 인삼포가 얼굴을 내민다.
▼ ‘큰꽃 으아리’라고 한다. 줄기가 약해 쉽게 끊어질 것 같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고 오히려 살로 파고들어 ‘으아~’하는 비명을 지르게 만든다나? 아무튼 꽃말이 ‘아름다운 당신의 마음, 고결’이라니 우리 집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꽃이라 하겠다.
▼ 13 : 48. 725번 지방도(정주천로)를 횡단한다. 횡단보도가 따로 나있지 않으니 오가는 차량을 살펴가며 건너야 한다. 참고로 이곳을 ‘먹고개’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 9구간의 종점인 ‘주천면사무소’는 이곳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도로를 따라가면 금방 이를 수 있다. 하지만 탐방로는 반대편 348m봉 아래를 돌아가는 오솔길(초반은 농로)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 ‘주자천’을 만난다.
▼ 이곳도 만만찮은 풍경을 보여준다. 문득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생각난다. ‘이 세상/ 우리 사는 일이/ 저물 일 하나 없이 팍팍할 때/ 저무는 강변으로가/ 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팍팍한 마음 한끝을/ 저무는 강물에 적셔/ 풀어 보낼 일이다’. ‘섬진강 5’에 나오는 시 구절이다.
▼ 13 : 59.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만난 또 다른 비경. 조선 시대에 지어졌다는 정자, 와룡암이 주자천의 풍치를 더해준다. 용이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의 와룡바위를 걸터앉은 저 정자는 원래 이쪽에서 주천서원의 강당(講堂) 역할을 수행했었다. 그러다 물 때문에 왕래가 불편하자 순조 때인 1827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단다.
▼ 돌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이 온몸에 청량함을 전해주고, 숲속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은 몸속 깊이 자연의 숨결을 불어 넣어준다. 물이 흙탕물이라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속세에서 살다보면 비일비재한 게 공사판이 아니겠는가.
▼ 아무튼 풍치에 반해 무턱대고 징검다리를 건너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오른편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조금 전 거론한 주천서원이 있으니 말이다. 사당과 홍살문, 외삼문인 월요문(月要門)으로 이루어진 주천서원(朱川書院)은 1924년 김대현(金大鉉)이 전국의 유림과 광산김씨 문중의 협조를 받아 세웠다. 초기에는 주천사(朱川祠)라 불리다가 1975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 서원은 주자를 중심으로 여대림과 주잠, 그리고 조선의 유학자인 이황과 이이, 여기에 광산김씨인 김충림과 김중정 등 7인을 모신다고 했다.
▼ 징검다리를 건너자 ‘와룡암(臥龍庵, 전북문화유산자료)’이 반긴다. 긍구당(肯構堂) 김중정(金重鼎, 1602-1689)이 병자호란 때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효종 때인 1650년 건축한 암자이다. 김중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지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항복하자 할아버지인 김충립(金忠立)과 함께 진안 용담(주천)으로 내려와 후학들을 가르치다 생을 마쳤다.
▼ 건물은 도리 기둥에 난간을 갖추고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누각이다. 루에는 기정(起亭)·와룡암(臥龍菴)·와룡암기(臥龍菴記)·와룡암중수기(臥龍菴重修記)·주천사중수기(朱川祠重修記)·주천서원기(朱川書院記) 등 많은 편액과 시액(詩額)이 걸려 있다. 기정과 와룡암은 도암(陶菴) 이재(李縡 :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가 직접 썼다고 한다.
▼ 와룡암 이정표가 이곳이 두 번째 인증지점임을 알려준다. 그러니 이정표와 본인의 얼굴이 한꺼번에 나오는 사진을 꼭 찍어두도록 하자. 그래야만 완주를 인증해준다니 말이다.
▼ 와룡암 부근에서 만난 이 빗돌 때문에 알바를 하고 말았다. 1965년 겨울 와룡보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다 물에 빠진 두 어린이를 구하고 나머지 한 명을 더 구하려다 어린이와 함께 세상을 떠난 ‘김영덕’님의 행적을 기리는 빗돌이다. 아무튼 이 빗돌의 뒤로 보이는 이정표가 길고 긴 알바의 단초를 제공했다. 진행방향을 가리키는 노란색 표지판이 ‘주신교’를 건너라고 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0구간의 이정표인데도 이를 모르고 따라버리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 14 : 11 – 14 : 41. 덕분에 우리 부부는 1.5km나 더 걷다가 ‘성암마을’에 이르러서야 잘못된 것을 알고 돌아올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돌아온 ‘와룡암’. 진행방향 저만큼에 주천면소재지가 놓여있다.
▼ 14 : 47. 식당과 상점 등이 늘어선 중심가를 지나 ‘주천면사무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10코스의 시작 지점임을 알리는 조형물은 면사무소 앞 화단에 설치되어 있다. 그나저나 오늘은 알바시간을 포함해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2.66km를 찍고 있으니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수몰의 아픔,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열어가는 사람들, 진안고원길 11구간(금강 물길) (2) | 2024.0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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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50코스(부안군청-동진강 석천휴게소)
여 행 일 : ‘24. 4. 27(토)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부안읍·동진면 및 김제시 죽산면 일원
여행코스 : 부안군청→석정문학관→상리마을→고마제 수변산책로→궁월마을→장등마을→동진강 석천휴게소(거리/시간 : 11.1km, 실제는 11.94km를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0코스를 걷는다. 10개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지난 49코스처럼 내륙의 들녘을 걷는다. 서해랑길답지 않게 바다는커녕 간척지조차 볼 수 없다는 얘기다. 석정문학관과 고마제 수변산책로가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 들머리는 부안군청(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3km쯤 내려오다 ‘신운교차로’에서 빠져나와 ‘부령로’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부안군청이 나온다. 서해랑길(부안 50코스) 안내도는 청사와 주차타워를 연결하는 공중다리 아래에 세워져 있다.
▼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마지막 여정. ‘서해랑길’ 본연의 임무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바닷가가 아닌 내륙의 들녘을 걸어 김제 땅으로 들어간다. 평지에다 거리까지 짧아서 난이도는 별이 2개(5개 중)로 분류된다.
▼ 11 : 04. 트레킹을 시작한다. 서해랑길은 군청 앞에서 ‘당산로’를 따라 동쪽으로 간다. 하지만 난 서쪽에 있는 ‘서문안 당산’으로 간다. 명색이 도로의 이름까지 된 기념물(국가 민속문화유산)이 120m 거리에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1689년(숙종 15년) 서문을 수호하기 위해 세운 ‘서문안 당산’은 쌍으로 된 ‘솟대당산(돌 짐대)’과 ‘돌장승’으로 이루어졌다. 원래는 서문으로 통하는 길 양옆에 세워져 있었으나 1980년 이곳으로 옮겼단다.
▼ 짐대는 가늘고 긴 나무나 돌 윗부분에 새를 한두 마리 올려놓고 단독으로 세우거나, 장승과 함께 마을 입구나 신성한 장소에 세워 액운을 방지하고 마을을 수호하는 솟대의 일종이다. 그래선지 돌 짐대에 바다 쪽을 바라보는 오리가 올라앉았다. 이는 화재로부터 부안 읍내를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이에 반해 장승은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나무나 돌로 세워 놓은 민간 신앙물이다. 이곳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 쌍으로 세워져 있다. 하나 더. 매년 정월 초하룻날 밤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내는데, 이때는 동문안과 남문의 당산을 이곳으로 모신다고 한다. 이곳 서문안 당산이 주신이기 때문이란다.(1978년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 11 : 09. 이번에는 ‘군청길’을 따라 ‘소우’라는 일식당을 찾아간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에서 주인공 학수(박정민)가 좋아한 미경(신현빈)의 피아노학원으로 등장하는 집이다. 그런데 건물이 있어야할 자리에 난데없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오래된 주택을 식당으로 꾸몄다고 했는데, 군청에서 ‘도심 가꾸기’사업이라도 펼쳤던 모양이다.
▼ 아무튼 메밀국수와 덮밥 말고도 서브 메뉴로 커피를 내놓는다고 해서, 커피라도 마시며 영화의 분위기를 잠시 느껴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부안읍에는 두 주인공이 밤거리를 거니는 장면에 등장하는 ‘물의 공원’도 있다. 물고기가 다이빙하는 듯한 분수 조형물 주변으로 물이 흐르는 거리를 조성해 놓았다.(사진은 인터넷에서 빌려왔다)
▼ 11 : 11 – 11 : 14. 아쉬운 발걸음을 ‘부안 역사문화관’으로 옮긴다. 근대 건축물인 옛 부안금융조합(대한민국 근대유산 등록문화재)을 리모델링하여 2021년 12월 문을 열었다. 우리 같은 외지인들에게 지역의 역사와 인물, 문화유산을 소개하고, 지역민들에게는 자긍심과 애향심을 높여주기 위해서이다. 지역 주민들의 문화활동 공간으로도 활용된다니 복합 문화공간이라 할 수 있겠다.
▼ 전시관은 고대로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역사를 지나, 고려의 도자기 문화와 조선 후기의 동학농민혁명까지 부안의 역사를 담아낸 상설전시실과 다양한 주제의 전시와 문화 활동을 위한 기획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 한말의 큰 유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를 소개하는 코너도 있었다. 부안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1912년 부안의 계화도에 정착하여 192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그가 3000여 명의 제자를 길렀는데, 그가 죽었을 때 장례를 따르는 제자들로 계화도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나? 하지만 그는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고, 파리장서(巴里長書, 儒林에서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사건)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 기획전시실에서는 ‘김억’ 작가의 목판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변산의 변화무쌍함을 나무의 질감으로 표현하는 작가라는데, 외변산·내변산·직소폭포·마을모정 등을 담은 목판화 8점을 전시해 놓았다. 소개 글은 우리가 익히 봐온 자연과 풍광을 그의 칼로 손끝 여문 장인처럼 동화 속으로 이끌어준다고 적었다.
▼ 11 : 14. 밖으로 나와 이번에는 ‘당산로’를 따른다. 군청삼거리(11 : 18)에서는 ‘석정로’를 따라 왼쪽으로 간다.
▼ 11 : 21.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동문안 당산’이 맞는다. 돌로 만든 오리 조각을 돌기둥 위에 얹혀 놓은 돌 짐대(당산)와 돌장승 한 쌍(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민간신앙 유적이다. 이곳도 서문안 당산처럼 머리에 서해바다를 바라보는 오리가 앉아있다. 부안 읍내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임무도 같다. 하나 더. 동문안 당산은 본래 부풍현의 동쪽 문인 청원루(淸遠樓) 안쪽에 있었다. 그러다 새롭게 도로가 개설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 근처에 또 하나의 솟대당산(짐대)이 세워져 있었다. 네모진 나무기둥이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는데, 그 꼭대기에 오리가 걸터앉았다. 하단은 새끼줄로 묶고 접신이라도 하려는 듯 창호지를 매달았다. 부안읍 당산제는 새끼를 꼬아 만든 줄로 줄다리기를 하고, 그게 끝나면 돌기둥에 새끼줄을 돌려 감는 ‘당산 옷 입히기’가 이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당산제가 다시 부활되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 ‘으뜸 오일뱅크’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한 쌍의 장승이 자리한다. 상원주장군은 벙거지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으며 주먹코에 다문 입, 얼굴 양옆의 큰 귀가 인상적이다(안내판은 제주의 ‘돌하루방’을 닮았다고 적었다). 마주보는 하원당장군은 얼굴의 이마에 백호(白毫,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가 있고, 매우 크게 표현된 퉁방울눈을 가졌다.
▼ 길은 한마디로 예뻤다. 아니 내가 본 부안은 읍내 전체가 아름다웠다. 곳곳에 들어선 소공원과 길가 화단에선 철쭉과 작약 같은 예쁜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건물들도 계획도시의 느낌이 물씬 풍길 정도로 하나같이 깔끔했다.
▼ 그런 길을 걷다 만난 ‘신선마을 표지석’. ‘하늘이 저렇게 옥같이 푸른 날엔’으로 시작되는 시 ‘化石이 되고 싶어’가 적힌 팻말도 눈에 띈다. 작가 이름은 빼먹었지만 시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신석정’ 시인의 작품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는 시인의 생가가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 11 : 30.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석정문학관’이 잠시 들렀다 가란다. 마침맞게 서해랑길도 그쪽으로 인도한다. 아니 서해랑길이 아니더라도 꼭 들러봐야만 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나 5·16 군사정권 같은 암울했던 시기에도 지조를 잃지 않았던 지식인을 어디 그리 흔하게 만날 수 있겠는가. 참고로 신석정은 친일 문학지 ‘국민문학’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오자, 청탁서를 찢고 창씨개명도 끝까지 거부한 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절필을 선언한다. 5·16 쿠데타 이후에는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시를 발표해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취조를 당하기도 했다.
▼ 초입에서 만난 ‘창작놀이터’. 지역 내 관광자원에 스마트폰을 이용한 미션게임을 접목한 놀이 공간이다. 주제에 맞는 미션게임을 가족, 친구, 연인이 함께 즐기며 점수를 얻는 방식이다. 게임과 함께 천연화장품, 비누 등을 만들어보는 체험도 할 수 있다.
▼ 11 : 32 - 11 : 39. 몇 걸음 더 걸으면 ‘석정문학관’이다. 한국 시문학의 대가 신석정(辛錫正, 1907-1974)의 청초한 인품과 시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2011년 문을 열었다. 1층의 전시관에는 5권의 대표시집과 유고 시집, 집필 원고 등 500여 점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2층은 북카페로 문학관을 찾는 이들의 휴식 공간이다. 하나 더. 우리에게는 ‘(辛)夕汀’으로 더 익숙한데, 이는 시인의 ‘아호’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 1층 전시관은 신석정 시인의 유품 500여 점이 전시된 상설전시관과 시인의 지인들 사진과 친필 서한 등을 전시한 기획전시실로 나누어져 있다. 세미나실은 시인의 생애 영상물을 관람하고 문학 관련 세미나를 여는 공간이다.
▼ ‘촛불’·‘슬픈 목가’·‘대바람 소리’ 등 5권의 대표시집, 유고시집, 친필원고, 유품 등도 살펴볼 수 있다. 참고로 신석정은 김영랑·박용철·정지용·이하윤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제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함으로써 등단했다. 1939년 첫 시집인 ‘촛불’을 발간하면서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그의 서재도 재현해 놓았다. 1931년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가담한 신석정은 그해 ‘시문학’과 ‘동광’에 시 ‘선물’과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를 발표했고, 이를 계기로 정지용·이광수·한용운 등과 교유하게 된다. 그러다 부안으로 내려와 뒤뜰이 넓은 초가를 사서 ‘청구원(靑丘園)’이라고 이름 짓고, 낮에는 고구마밭을 일구고 밤에는 독서와 시작에 매진한다. 이 무렵 아직 등단하지 않은 서정주가 찾아오면 문학에 대한 얘기를 밤이 이슥토록 이어갔다고 한다.
▼ 11 : 39 - 11: 42. 문학관을 빠져나오면 맞은편에 선생이 살았다는 ‘신석정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1930년대 김영랑 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이끌던 신석정은 부안 동중리에서 태어나 1952년 전주로 이사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시인의 첫 시집 ‘촛불(1939)’과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1947)’가 이 집에서 탄생했다.
▼ 석정은 첫 시집을 내면서 ‘청구원 주변의 산과 구름, 멀리 서해의 간지러운 해풍이 볼을 문지르고 지나갈 때 얻은 꿈 조각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 집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런 집의 뜨락은 지금 ‘기우는 해’, ‘고운 심장’ 등 시인의 작품을 담은 시비들 여럿이 지키고 있다.
▼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철제로 제작한 시판들로 나머지 여백을 채웠다. 그중 ‘산의 서곡(1967년 출간)’에 실렸던 ‘한줄기 불빛은’이라는 시를 게시해 본다.
▼ 11 : 43. 문학관 앞에서 골목길(선은2길)을 따라 ‘선은마을’로 들어간다. 그러자 엄청나게 큰 한옥이 얼굴을 내민다. 한옥체험을 운영하고 있는 ‘이갑수 고택’이라고 한다. 이곳 ‘선은(仙隱)’은 ‘선비들이 숨어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했다. 그 마을에 조선 말기에 이주해온 전주 이씨들의 오래된 고택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부안의 전통한옥마을로 불리기도 하는데, 지금 들어가 볼 ‘이갑수 고택’과 연이어 들릴 ‘이승호 고택’도 그중 하나이다.
▼ 문간채를 지나자 안채가 반긴다. 목재의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형상을 살리는 등 간결미와 자연미가 돋보이는 7칸 겹집의 한옥이다. 오른편에는 한옥체험을 하러 찾아온 사람들이 이용하는 사랑채도 있다. 한옥임에도 최신식 주방은 물론이고 화장실은 샤워시설까지 갖추었단다. 문간채에는 단체를 위한 넓은 방도 있다고 했다. 참! 이갑수 고택은 ‘이연재(夷然齊, 자연과 더불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곳)’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 11 : 45. 고택을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골목이 하나 나뉘고 있었다(서해랑길은 직진한다). 50m쯤 떨어진 곳에 독립운동가인 ‘운암 이승호(雲岩 李承鎬, 1890-1966)’ 선생의 고택이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들어가 보자.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3,600원이라는 거금을 지원하였고, 지역에서는 빈민 구휼에 앞장섰다. 이 일이 알려져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안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대문이 있다. 대문을 지나자 이번에는 옛 티를 퐁퐁 풍기는 안채가 7칸 겹집의 거대한 몸집을 드러낸다. 안채는 문간채보다 조금 더 높다. 덕분에 오랜 세월을 버텨온 색 바랜 마루로 올라서면 집안의 구조뿐만 아니라 부안읍내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하지만 이갑수 고택에 비해 관리가 잘 안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 마당 건너에서는 열 손가락으로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방을 거느린 별채가 횡으로 늘어서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사당으로 보이는 건물도 지어져 있다.
▼ 약간 비탈진 곳에 들어앉은 ‘선은마을’은 나지막한 야산이 뒤를 에워싸고, 앞으로는 드넓은 부안평야가 펼쳐지는 모양새이다. 큰 부자가 많이 나는 전형적인 명당의 형국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거대한 고택들은 물론이고, 새로 지은 주택들도 하나같이 여느 부잣집 부럽지 않게 크고 멋졌다.
▼ 11 : 53. 서해랑깅은 마을 뒤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그리고는 품고 달려온 바톤을 동진면(내기리)에 넘겨준다. 이어서 상소산과 망월산을 잇는 구릉지의 산자락을 따른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신록의 푸르름이 펼쳐지는 기분 좋은 숲길이다.
▼ 11 : 58. ‘봉황교차로’ 부근에서 국도 30호선(변산바다로)를 만나 국도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이어서 30호선을 국도 23호선(부안로)으로 연결시키는 접속도로의 옆길(내기·상리길)를 따라 잠시 간다.
▼ 12 : 03.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서해랑길 리본이 안내해준다)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꾼다. 상리마을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 12 : 07. ‘상리마을’을 지난다. 내기리(內基里)에 속한 3개 행정부락(상리·신흥·신리) 중 하나로 주변에 ‘내기평야’가 있어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하단다. 2014년경부터 날아든 백로가 지금은 수천마리로 늘어나 이를 보러오는 사람들로 늘 붐비는 마을이기도 하다.
▼ 풍성한 상차림을 꿈꾸는 집사람의 손길은 오늘도 바쁘다. 논에 미나리가 자라고 있다며 부지런히 뜯어대는데, 이를 본 동네 아주머니가 농약을 한지 얼마 안 되었다며 말린다. 하지만 흐르는 물속에 한 이틀 담가두면 괜찮다는 집사람. 그리고 그 미나리는 부침개로 변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서재의 책상에 올려져있다. 막걸리 한 병과 함께...
▼ 상리마을을 지나 잠시지만 숲길을 걷는다. 연록의 싱그러움을 맘껏 즐기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백로 떼가 펼치는 군무를 볼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날아다니는 백로 떼가 주변경관과 어우러지며 한 폭의 동양화를 심심찮게 연출해낸다.
▼ 숲은 소나무로 울울창창했다. 그런 숲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백로 떼가 생활하고 있었다. 수천마리가 숲에 둥지를 틀면서 마치 산 천체가 흰 꽃이 핀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며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백로는 하얀 겉모습 때문에 예로부터 선비의 상징처럼 묘사되며 길조로 여겨진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고 한다. 산성을 띤 분비물로 인해 나무가 고사하고, 토양이 황폐화 되는 등 피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 12 : 19. 숲속을 빠져나오니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7.7km/ 시점 3.4km)가 세워져 있다. 이후부터는 2차선 도로인 ‘동진남로’를 따른다.
▼ 잠시 후 ‘내기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신흥마을’을 지난다. 아니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고 마을 앞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신흥마을 앞’으로 표기한다.
▼ 도로변에 위치한 ‘쌍구제’는 물 대신에 창포만 한가득이다. 그래도 뭔가 볼거리가 있는 모양이다. 안쪽 가장자리에 전망데크까지 만들어놓았다.
▼ 12 : 24. 쌍구제가 끝나는 지점에서 ‘동진남로’를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소로(오봉길)을 탄다. ‘오봉마을’로 연결된다는 얘기겠지? 하지만 kakaomap은 입구의 버스정류장을 ‘쌍구’로 적고 있었다.
▼ 12 : 30. 그렇게 잠시 걷자 50코스의 자랑거리인 ‘고마제(雇馬堤)’가 얼굴을 내민다. 고마 지구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축조(1958년)한 큼지막한 저수지로 3만 8200㎥의 저수량을 자랑한다. 제방도 높이 8.5m에 길이가 746m나 된단다. 하나 더. ‘고마(雇馬)’라는 지명이 재미있다. 저수지 확장공사를 하는데, 그 생김새가 말발굽을 닮았었다나?
▼ 농업생산 기반시설인 ‘고마제’는 그동안 잡풀만 무성했다고 한다. 그러다 2022년 군민과 관광객들에게 힐링 친수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농촌테마공원’을 조성했단다. 계절장터·광장·화장실 등 기초생활기반시설과 뽕체험장·생태체험장·쉼터·산책길 등 체험·휴양시설과 농산물판매시설을 갖췄다.
▼ 서해랑길은 이제 고마제 수변산책로를 따른다. 아니 전체는 아니고 서·북쪽 모서리쯤인 이곳에서 시작해 동·북쪽 모서리쯤까지 2/3쯤 걷게 된다. 참고로 산책로는 저수지의 호반(가끔은 가로지르기도 하지만)을 따라 한 바퀴 돌도록 나있다. 길이는 5.7km.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둘레둘레 해찰도 해가며 걸어도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젊은 연인들이라면 여기다 30분 정도 더 보태야 한다. 아름다운 경관에다 곳곳에 만들어놓은 조형물을 벗 삼아 사진도 찍어두어야 하니 말이다.
▼ 탐방로는 저수지를 한 바퀴 돈다. 그 바깥으로 ‘고마제윗길’나 ‘고마제로’ 같은 도로가 지나가기 때문에 산책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느림보의 미학’을 추구하며 쉬엄쉬엄 걸어보는 것도 괜찮다. 산책로 곳곳에 광장이나 쉼터를 조성해놓았는가 하면,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커피 한 잔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카페도 여럿 들어서 있다.
▼ 위에서 예기했다시피 산책로는 호숫가 경관 좋은 곳에 쉼터나 광장을 들어앉혔다. 그래선지 이정표는 현재위치를 표기한 다음 앞뒤 쉼터까지의 거리를 적고 있었다.
▼ 탐방로를 걸으며 생태관찰은 물론이고, 멀리 보이는 풍경까지 한눈에 담아볼 수 있으니 ‘힐링 산책길’이라 할 수 있겠다. 한적한 시골길을 걸으며 자연과 여유로움을 벗 삼아 시간을 보내니 이 아니 힐링이겠는가.
▼ 12 : 35. 첫 만남은 ‘고마 광장’이다. 호숫가에 꽃밭이 딸린 널따란 광장을 조성해놓았다. 주변에 ‘샤스타데이지’라도 심었는지 안내판까지 세워두었지만 샤스타데이지는 눈에 띄지 않는다. 지금쯤 사진 찍기 딱 좋은 하얀 꽃망울을 내밀고 있을 텐데...
▼ 꿩 대신 닭이라고나 할까? ‘천국의 계단’ 조형물이 샤스타데이지를 대신하겠단다. 사람들은 누구나 천국에 가길 원한다. 계단의 끝에 문까지 달아놓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저 계단을 올라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나 나올법한 분위기를 느껴보자.
▼ 호숫가 길이 끊기는 곳에는 나무다리를 놓아 산책로를 연결했다. 가끔은 예쁜 나무다리로 저수지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그게 ‘고마제’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결 돋보이게 만든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사방으로 풍경화가 그려진다. 그것도 무척 아름다운 그림으로다.
▼ ‘고마제’는 늪지형 저수지라서 바닥이 완만하고 수심이 고르다고 했다. 거기다 수초까지 우거져 붕어와 잉어 등이 많이 잡힌단다. 세월이라도 낚으려는 듯, 하릴없이 찌만 응시하고 있는 강태공에게 넌지시 물으니 입질만 좋은 게 아니라 씨알까지 굵다는 대답이 금방 돌아온다. 호반 곳곳에 들어앉은 저 많은 낚시꾼들이 그 증거라 하겠다.
▼ 이분은 아예 살림살이를 통째로 옮겨왔나 보다. 얼마 전에 본 신문의 사회면이 떠오른다. 저수지마다 낚시꾼들의 무분별한 쓰레기 투기로 몸살을 앓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분만이라도 아니온 듯 다녀가셨으면 좋겠다.
▼ 12 : 46. 두 번째로 만나는 ‘방죽 쉼터’에는 정자와 함께 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 ‘식물 안내판’. 샤스타데이지 대신 이번에는 노랑꽃창포와 수크렁, 벌개미취를 담았다. 이 근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수변산책로 바깥으로 ‘고마제윗길’나 ‘고마제로’ 같은 도로가 지나간다. 잠시지만 도로를 따라가기도 한다. 하나 더. 산책로 길섶은 꽃밭으로 꾸몄다. 거기서 철쭉과 샤스타데이지, 작약 같은 화초가 꽃망울을 활짝 열고 길손을 맞는다. 맞다. 부안군청은 농촌테마공원을 만들면서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도록 수변공원을 꾸몄다고 했다. 개화시기를 조절해 수목 및 초화류를 식재함으로써 계절에 따라 생동감 있는 볼거리를 제공한단다.
▼ 12 : 51. ‘고마 장터’에 이른다. 지역 특산품을 파는 ‘계절장터’가 열리는 곳이다. 그래선지 단체 관광객들을 수용할 수 있는 널따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정자나 벤치,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도 완벽하게 갖췄다.
▼ 카페도 눈에 띈다. 하지만 문은 열고 있지 않았다. 지역 언론은 그 이유를 접근성에서 찾고 있었다. 부안 읍민들이 산책삼아 찾아오기에는 너무 멀다는 것이다. 일부러 승용차를 몰고 와야만 하니 누가 찾겠느냐며 테마공원 조성사업을 비판하고 있었다.
▼ 12 : 53 - 13 : 05. ‘농촌테마공원’ 조성사업은 고마저수지 전체를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산책로 곳곳에 쉼터나 소공원을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경관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 벤치, 조형물 등을 배치했다. 덕분에 이곳에서 느긋하게 간식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 의미심장한 조형물.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네)가 가는 곳이라면 (나)도 꼭 간다? 둘이 마주보며 오래오래 간직해둘만한 사진이라도 찍어보라는 모양이다.
▼ 호숫가에 ‘뽕체험장’까지 있다기에 ‘누에고치’인줄만 알았다. 하지만 ‘못줄’을 감아놓은 것이란다. ‘못줄’은 모를 일정한 간격으로 띄어서 심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마다 붉은 표시를 해 놓은 줄을 말한다. 나무토막에서 풀린 못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면 농부들은 일제히 열을 맞춰 못줄 앞에 선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못줄에 매달린 붉은 작은 띠 위치에 모를 심었다. 모를 다 심으면 못줄자비가 줄을 다음 위치로 옮긴다.
▼ 이번에는 물위를 걷는다. 누구처럼 공중부양을 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지자체에서 호수에 다리를 놓는 멋을 부렸다. 그나저나 다리 건너에도 못줄을 감아놓은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렇다면 둘을 연결시키는 이 다리는 못줄이 된다. 그래서 다리 이름도 ‘못줄다리’가 됐다.
▼ 산책로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배롱나무’가 아닐까 싶다. 일본인지 한국인지도 모르게 만드는 벚꽃나무가 아닌 것 자체만으로도 좋은데, 붉은 꽃이라도 피우면 그야말로 천상의 길이 될 수도 있겠다.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 꽃을 피우면, 산천초목이 모두 초록 세상이라서 배롱나무 꽃이 한층 더 돋보일 테니 말이다.
▼ 대나무쉼터와 은사시나무군락, 아랫도리를 물속에 담근 수양버들을 차례로 지난다. 리아스식 호안이라서 아름다운 경관을 수시로 만나는데, 전망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벤치를 놓았다.
▼ 길가 뽕나무에서는 오디가 알알이 영글어간다.
▼ 13 : 35. ‘솟대 다리’가 또 다시 호수를 가로지른다. 그런데 직선이던 ‘못줄다리’와는 달리 이번에는 물고기처럼 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간다. 다리를 따라 늘어선 수많은 물고기 조형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 ‘솟대다리’라는 이름처럼 수많은 솟대들이 다리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안내판은 벽송대사의 구부러진 지팡이를 모티브로 ‘솟대’를 만들었다고 적었다. 그 위의 물고기 조형물은 생명력 있는 역사적 숨결과 어머니에 대한 숨결을 자연의 화려한 색상으로 표현했단다. 참고로 ‘벽송 지엄(碧松 智嚴)’ 스님은 이곳 부안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禪脈)을 잇는 큰 스님 가운데 한 분으로, 스승인 ‘벽계 정심(碧溪 正心)’ 스님이 도를 깨우쳐주기 위해 ‘자! 내 법 받아라!’는 고함과 함께 주먹을 불쑥 내민 일화로 유명하다.
▼ 수변산책로의 대미는 나무다리가 장식한다. 호숫가 길이 끊기는 곳에 다리를 놓아 산책로를 연결했다.
▼ 13 : 46. 길었던 수변산책로는 ‘알땅 카페’에서 끝을 맺는다. 참숯불가마찜질방을 부대시설로 두고 있는데, 커피를 마시며 새만금을 이야기하기에 딱 좋다는 홍보문구를 내걸었다. 하나 더. 커피에 디저트를 곁들일 수 있는데, 당일 3만원 이상 결재시 롯데시네마의 전국 400개 개봉관에서 이용 가능한 영화티켓 한 장을 준단다.
▼ 이곳에도 포토존이 만들어져 있었다. 어설프기는 하지만 천국의 계단을 놓고, 옆에서는 자전거가 하늘로 올라간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는 듯이.
▼ 카페는 이벤트가 꼭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들러보고 싶은 분위기를 퐁퐁 풍기고 있었다. 스페인의 ‘구엘공원(Park Güell)’을 떠올리게 만드는 저 담장도 그중 하나다. 당시의 기억을 소환해보자. 가우디의 아이덴티티(identity)이기도 한 ‘곡선의 미’가 파도를 치듯 물결을 이루는 벤치는 한마디로 동화적이며 환상적이다. 아랍식의 이국적인 면모와 미래적인 이미지까지 동시에 담고 있단다. ‘까탈루나 스타일’이기도 한 트랜카디스기법(Trencadis : 타일과 유리, 거울 등을 깨서 모자이크화)인데 하나하나의 파편들이 모여 일정하면서도 창의적인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이 보면 볼수록 경이롭다.
▼ 13 : 52. ‘동진남로’를 따라 ‘궁월마을’로 들어간다. 법정 동리인 ‘장등리(長登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장기·궁월·청운·장등) 중 하나로 마을 지형이 ‘활 궁(弓)’자를 닮았다고 한다. 그래서 ‘궁상’이라 불리다가 후에 마을 형태가 달같이 변했다며 ‘달 월(月)’자를 써 궁월(弓月)이 되었다. 아무튼 서해랑길은 마을 앞 버스정류장에서 왼쪽 샛길로 들어간다. 영신교회를 앞에 두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 산길과 들길을 누비던 서해랑길은 이제 산 하나 보이지 않는 순수한 평야지대로 들어간다. 함께 걸어온 구릉지는 그게 서운했던 모양이다. 황토색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주며 이별을 아쉬워한다.
▼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도 이미 8일이 지났다. 들일 나온 농부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이유일 것이다.
▼ 13 : 57. 평야지대로 들어가기 직전에 만난 삼거리.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종점’은 오른쪽으로 가야하는데도 이정표(종점 2.5km/ 시점 8.6km)는 반대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 14 : 05. 들녘의 한가운데 들어앉은 ‘장등마을’은 장등리(長登里)의 중심 부락이다. 김제나 전주 등 외지에서 부안으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하는 ‘동진나루’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그 자리에 지금은 동진대교가 놓였다) 옛날부터 큼지막한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선지 철종(哲宗) 때 이곳에서 ‘부안민란(扶安民亂)’이 일어나기도 했단다.
▼ 마을안내판은 장등마을의 유래를 적고 있었다. 망기산의 줄기가 내려와 장기마을과 청운마을을 거쳐 장등마을에서 끝을 맺었다고 하여 ‘긴 장(長)’, ‘오를 등(登)’ 자를 써서 장등(長登)이라 하였다나? 참고로 ‘청운마을’에는 조선시대 출장 온 관원들이 묵어가던 ‘동진원(東津院)’이, 그리고 부안에서 김제·전주·서울로 이어지는 통로인 ‘장기마을’에는 ‘동진장터’가 있었다고 한다.
▼ 고샅길을 걸어 마을을 횡단한다. 둘레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그러니 주민들의 안정을 헤치지 않도록 조용히 지나가도록 하자.
▼ 14 : 09. 마을정미소를 마지막으로 마을을 벗어나면 잠시 후 국도 23호선(부안로)를 만난다. 하지만 자동차 전용도로라서 횡단하지는 못하고 도로 아래로 난 농로를 따라간다.
▼ 300m쯤 더 걸으면 국도 아래로 굴다리가 뚫려있다. 이때 앞서가던 집사람이 느닷없이 만세를 부르는 게 아닌가. 종점이 다와 간다는 안도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굴다리를 지나서도 한참이나 더 농로를 따른다. 이번에도 국도 아래로 길이 나있다. 참 도중에 또 다른 굴다리(신설도로 아래)를 통과하기도 한다.
▼ 들녘은 온통 초지로 덮여있었다. 목초(牧草)를 베어놓은 곳도 보인다. 저장을 위해 건조시키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 14 : 21. ‘동진대교’로 올라서면서 부안과 이별을 고한다. 예로부터 부안은 맛, 풍경, 이야기 등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하여 ‘변산삼락(邊山三樂)’으로 불리었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도 <어염시초(물고기·소금·땔나무)가 풍부해 부모를 봉향하기 좋으니 ‘생거(生居) 부안’이로다>라고 했다. 그만큼 사람이 살기 좋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부안과 헤어져 이제 김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다리 ‘갓길’을 따라 걷다보면 중간쯤에서 ‘동진강(東津江)’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정읍시 산외면의 상두산(象頭山, 575m)에서 발원해 김제평야를 지나 황해로 흘러드는 44.7km 길이의 강이다. 상류 지역은 도원천이라고 불리며, 칠보면(정읍시)에서 칠보천을 합친 이후 하폭이 넓어지면서 동진강이 된다.
▼ 다리 건너 휴게소는 ‘지평선 새마루’란 이름표를 달았다. 김제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으로는 이만한 게 없겠다. 2012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던 옛 ‘동진강휴게소’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었다. 2층 건물에 식당과 카페, 편의점, 농·특산물판매장이 입주한단다. 부대시설로 쉼터와 주차장, 공원, 산책로 등은 이미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 백제 비류왕 27년(330년)에 축조된 ‘벽골제(碧骨堤, 사적 제111호)’는 김제의 자랑거리로 우리나라 저수지의 효시다. 고대 수리시설 중 규모도 가장 크다. 지자체에서는 그걸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도로변에 벽골제의 수문 조형물과 함께 설명을 담은 빗돌을 세워놓았다.
▼ 14 : 30. 국도를 사이에 두고 ‘지평선 새마루 휴게소’와 마주보고 있는 ‘동진강 석천휴게소’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길을 나선지 3시간 20분 만인데, 앱이 11.94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나 더. 석천휴게소는 공사를 하다가 중단했는지 뼈대만 앙상했다.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건너편 동진휴게소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 집사람이 웃는다. 한 점의 티도 없는 해맑은 모습이다. 여행, 아니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다 보니 잡다한 일상의 걱정들까지도 훌훌 떨쳐버렸나 보다. 언젠가 웃음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영국의 한 의과대학에서 발표한 ‘어릴 때는 하루에 평균 400~500번을 웃다가 장년이 되면서 하루 15~20번으로 줄어든다.’는 웃음에 관한 연구결과이다. 그런데 웃음을 잃어가는 가장 큰 이유는 경험에서 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간이 고민하고 염려하는 일들 가운데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박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란 글에서 어느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인간의 걱정에 대하여 분석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걱정들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것이 40%이고,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것이 30%, 별로 신경 쓸 일도 아닌 작은 것이 22%,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것이 4%’라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96%의 불필요한 걱정 때문에 기쁨과 웃음, 그리고 마음의 평화까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집사람은 지금 96%의 필요 없는 걱정들을 내려놓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게 비록 잠시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왕에 내려놓았으니 까짓 거 다시 집어들 필요가 있을까? 그냥 오래오래 저렇게 즐겁고 행복한 얼굴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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