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올드 시티’
여행일 : ‘23. 5. 31(수) - 6. 12(월)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①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 이란 및 러시아와 접한 카스피 해 연안의 국가.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데 경제의 상당 부분을 석유와 천연가스가 지탱하고 있어 ‘불의 나라’로 불린다. 동유럽권에 속해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까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 달리 아제르바이잔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에 서아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점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동유럽권으로 보는 이유는 19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영향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⑧ 바쿠(Baku) :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다보다 낮은 카스피 해 연안에 위치,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도라고 한다(가장 높은 수도는 볼리비아의 ‘라파스’이다). 캅카스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약 4분의 1 가량이 집중되어 있는 경제의 중심지이다. 2000년대 이후 오일 달러로 아제르바이잔의 경제가 크게 성장하면서 도시 곳곳에 마천루 등 여러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알려진다.
▼ 아제르바이잔, 아니 바쿠에서의 첫 만남은 구시가지((Old City))이다. 버스에서 내려 잠시 걸으면 올드 시티 투어의 시작과 끝인 ‘하드록 까페(Hard Rock Cafe)’에 이른다.
▼ 이번 여행은 코카서스 3국(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여행사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흑해 연안의 ‘바투미(조지아 제2의 도시)’도 마지막에 들렀다. 그리고 튀르키예의 ‘리제’로 넘어가 이스탄불(환승)을 거쳐 귀국했다.
▼ 올드시티의 주요 볼거리는 지도에 표시된 게 다라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이 지도로 찾아다니는 것은 불가능. 앱의 길 찾기 기능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대충 방향을 잡은 다음 무작정 걸으면 된다. 올드 시티의 규모가 작으니 어렵지 않게 찾아 낼 것이다.(지도는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 ‘하드록 카페’ 앞에 아제르바이잔 최고의 서정시인 중 한 명인 ‘나타반(1832-1897, Khurshidbanu Natavan)’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카라바흐 칸국(Karabakh khanate)’의 마지막 통치자인 ’메흐디굴루 칸(Mahdiqoli Khan)‘의 딸로 인본주의·우정·사랑을 주제로 한 서정적인 ‘가잘’을 잘 썼다고 알려진다. 가잘(ghazals)이란 각 줄 끝에 은율이 있는 2행의 후렴구가 특징인 시의 한 형태이다.
▼ 올드 시티의 주 출입구인 동쪽 성문 밖에는 아제르바이잔의 국민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니자미 간자비’(Nizami Ganjavi)의 동상이 세워진 기념 공원이 있다. 참고로 ‘니자미 간자비(Nizami Gencevi, 1141-1209)’는 아제르바이잔 ‘간자’시 출신의 시인이다. 본명은 일야스 이븐 유시프(Ilyas Ibn Yusif). 니자미는 아호로 ‘실로 꿰다’, 즉 ‘단어를 조절한다’는 뜻을 갖는다. 다섯 편의 서사시 모음집인 ‘함사(Khamsa)’로 이슬람세계에 필명을 떨쳤다고 한다. 1991년 유네스코는 니자미의 850주년을 기념해 ‘세계 기념 인물’로 선정했다.
▼ 기념공원 바로 앞에는 ‘니자미 문학 박물관’도 있다. 이슬람식 문양과 디자인을 주로 사용한 건물이다. 건물의 전면 2층에는 유명 문인 6명의 동상이 있다. 이들 동상 때문에 박물관은 마치 성전 같은 분위기를 띤다.(화질 때문에 후면 사진 게재)
▼ 동문으로 들어가면서 바쿠의 과거 그 자체인 ‘올드 시티(Old City)’ 투어가 시작된다. 현대적 도시의 심장부에 위치한 올드 시티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채 7~12세기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궁전, 모스크(mosque), 탑 등을 간직하고 있다.
▼ 옛길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이정표를 만난다. 아제르바이잔어와 함께 영어를 병기해놓아 어렵지 않게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다.
▼ 오래된 도시답게 눈에 들어오는 건물마다 하나같이 중세풍이다. 맞다. 이곳 올드 시티는 옛 시내 중심이었고 지금도 시내 중심이라고 한다.
▼ 이곳은 아제르바이잔이 갖고 있는 3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바쿠 성곽도시(Walled City of Baku)’를 품은 문화유적지이다. 그래선지 공사장의 가림막까지도 중세풍의 건축물을 그려 넣었다.
▼ 시르반샤궁(Shirvanshah’s Palace)으로 가는 길, 오른편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성곽이 따라온다. 구시가지의 성곽은 12세기 메투쏘르(Menutsshochr) 왕 시대에 건설되었고, 19세기에 보수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성벽은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하지만 중세에는 카스피 해가 바로 아래까지 찰랑거렸다고 한다.
▼ 일정한 간격을 두고 포루(砲樓)가 만들어져 있는가 하면, 그 안에는 옛 풍경을 떠올려보라는 듯 당시 사용하던 대포를 전시해 놓았다. 그런데 이게 성 안의 주택가를 향하고 있으니 문제다.
▼ 아름답게 치장된 저 건물은 ‘알리 샴시 스튜디오(Workshop Ali Shamsi)’라고 했다. 대문과 벽이 요란스럽게 치장되어있는데, 특히 사자 그림이 눈길을 끈다. 용기, 고귀함, 지혜를 뜻한다나?
▼ 맞은편 나무는 한술 더 떴다. 가로수에 여자 얼굴을 새겨 포토죤으로 만들었는데, 환경운동가들의 먹잇감으로 이만한 게 없겠다.
▼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한참을 올라가니 모스크와 궁전의 돔형 지붕이 보이고, 궁전의 정면 출입구가 나타난다. ‘시르반샤 궁’은 성곽도시인 바쿠가 품은 가장 중요한 문화재 중 하나다. ‘시르반샤궁전과 메이든탑이 있는 바쿠 성곽도시(Walled City of Baku with the Shirvanshah’s Palace and Maiden Tower)’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000년 등재)됐다. 하지만 2003년 위기에 처한 유산으로 지적받기도 했다.
▼ 입구의 안내판은 아제르바이잔 건축의 진주로 불리는 ‘시르반샤 궁전(Shirvanshah’s Palace)’이 14-15세기에 지어졌음을 알려준다. 시르반샤 왕조 칼리룰라(Khalilulla) 1세와 1501년 전쟁에서 사망한 그의 아들 파루크(Faruk)의 통치 기간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18세기 러시아 해군의 폭격으로 상층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복구 작업이 진행됐다. 참고로 Shirvan은 9세기경부터 1538년 이란 사파비드에 의해 병합될 때까지 이 지역에 있던 왕국이다. 12세기 이후 문화적 전성기를 누리며 도심에 성곽을 축조하는데, 이때의 건물로 메이든 타워로 남아 있다. 13세기에는 바쿠가 일한국(Il-Khante)의 여름궁전이 되어 건축이 이루어졌다. 14세기까지 바쿠 구시가지(Icheri Sheher)를 중심으로 성이 여러 번 새로 지어지고 고쳐지는데, 그 결과가 현재 쉬르반샤 궁전으로 남아 있다.
▼ 왕궁은 부속 건물들과의 균형감 있는 조화가 자랑이라고 했다. 궁전의 단지는 여러 개의 개별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거 지역과 다반하네(Divankhane, 공식적인 회의와 연회 장소), 시르뱐샤의 묘, 첨탑이 있는 회교사원, 목욕탕(hammam), 궁중 점성술사였던 세이드 야야 바쿠비(Seyid Yahya Bakuvi)의 묘, 키구바드(Key-Gubad)의 회교사원 등이다.
▼ 입구의 안내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러니 둘러볼 동선 정도는 파악해두고 안으로 들어가자.
▼ 궁전의 ‘파사드(facade :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 이슬람의 궁전답게 아라베스크(arabesque) 문양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문자·식물·기하학적인 모티프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무늬다.
▼ 1층은 국왕의 거주 공간이었다. 집무는 2층에서 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수습된 유적과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왕의 계보를 보여주는 표, 그밖에도 왕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박물관 형태로 전시되고 있다.
▼ 마치 우물처럼 보이는 저 구멍은 손님이 찾아왔을 때 연회나 만찬을 준비시키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 왕이 사용하던 물건들에서 이슬람 통치자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주전자가 눈길을 끈다. 동서 문물의 교류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유형의 주전자다.
▼ 황금빛의 저 화려한 장신구는 말안장이 아닐까? 벽에는 사용하기가 아까울 정도로 화려한 칼도 세 개나 걸려 있었다. 하나 더. 전통악기도 눈에 띈다. 초구르(Chogur)로 불리는 현악기, 산투르(Santur)로 불리는 줄을 쳐서 소리 내는 타현악기, 까발(Qaval)로 불리는 북이라고 한다.
▼ 아랍어로 쓰인 책도 있다. 종교적인 서적이 아닐까 싶다.
▼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그림.
▼ 바쿠 구시가지의 모습을 미니어처 형태로 재현해 놓았다. 옛 서울, 그러니까 한성(漢城)의 4대문 안에 궁궐과 관아, 그리고 백성의 거주지역이 함께 들어서 있었음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 고궁의 전시관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도 눈에 띈다. 전임 대통령인 ‘헤이다르 알리예프’라는데, 그의 사진은 이곳 말고도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현 대통령인 일함 알리예프(Ilham Aliyev)의 아버지이기도 한데, 어느 정도 우상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헤이다르는 소련연방 시절 공산당 서기장과 정부 수반을 지냈으며, 1993년부터 2003년까지 아제르바이잔공화국 제3대 대통령을 지냈다.
▼ 정원에는 왕의 스승이자 유명한 점술가, 과학자였던 ‘세이드 야야 바쿠비’의 묘당이 있었다. 이밖에도 궁에는 역대왕의 무덤이 있는 디반카나(Divankhana)와 왕가의 영묘도 있다고 했다.
▼ 궁전 벽에는 시바이엘(Sabail) 섬의 요새에서 나온 장식용 패널(명문)과 건축 부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바이엘 요새는 1306년 지진에 의해 파괴되어 바닷물에 잠긴 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18세기 들어 바닷물이 줄어들면서 세상에 드러났다고 한다.
▼ 궁전에서는 빌딩의 숲을 뚫으며 솟아오른 타워전망대와 3개의 빌딩 중 2개만 보이는 플레임 타워(Flame Towers)도 조망된다. 가이드의 말마따나 건물의 모양새가 아제르바이잔의 상징인 불꽃을 쏙 빼다 닮았다.
▼ 나라의 근본은 백성. 그러니 민초들의 삶도 한번쯤은 엿봐야 하지 않겠는가. 첫 만남은 1078~1079년에 건설되었다는 ‘모하메드 모스크(Muhammad Mosque)’. ‘손상된 탑’이란 뜻의 ‘시니갈라 모스크(Siniggala Mosque)’로도 불린다. 1723년 러시아 함대가 바쿠에 접근 항복을 요구하다 거부당하자 포격하기 시작했을 때 포탄 중 하나가 미나렛(첨탑)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강풍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함대가 먼 바다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나? 아무튼 바쿠사람들은 이것을 외국 침략자로 부터의 하나님의 보호로 인식했으며 그후 19C 중반까지 모스크의 미나렛을 저항의 상징으로 복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나갈라(손상된 탑)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궁전 앞의 소공원. 알록달록한 홍차 잔을 포개놓은 것 같은 조형물이 얼핏 탑으로도 보인다. 맞다. 이 탑은 터키, 우즈베키스탄 등 전 세계에 있는 투르크족이 세운 일곱 나라들을 상징한단다. 아제르바이잔도 그중 하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 ‘꿩 대신 닭’이라고나 할까? 어느 여행 작가가 애국심까지 들먹거리던 무궁화는 눈에 띄지 않았고, 대신 ‘시계꽃’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나이 70을 넘기고서도 ‘세계일주’의 꿈을 이루어나가는 우리 부부의 ‘열정(시계꽃의 꽃말)’을 대변해주는 꽃이다.
▼ 잠시 후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이 눈에 띈다. 얼굴만 있는 이 흉상은 아제르바이잔의 유명한 시인이자 예술가인 ‘알리아가 바이드(1894-1965)’라고 한다. 1990년 제작된 이 조각상에는 우회적으로 표현된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과 나무줄기, 뿌리로 얽힌 모습은 가잘칸 ‘나는 위대한 푸줄리의 후계자다’라는 작가의 반문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 바쿠의 구시가지 성곽인 이체리 세히르(Icheri Sheher)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얼마 남지 않은 중세 도시 중 하나라고 했다. 그래선지 미로같이 연결되어 있는 좁은 길과 밀집되어 있는 건물, 작은 정원 등과 같은 중세 도시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 아제르바이잔은 아시아의 서쪽 끝, 유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하지만 비치파라솔을 씌운 테이블을 야외에 놓고 손님을 받는 식당에서 이곳이 유럽에 더 가까운 문화를 지니고 있음을 실감했다.
▼ 아기자기 예쁘게도 장식된 좁은 길을 따라 18세기 후반에 건설된 집들이 고풍스럽게 늘어서있다. 골목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허튼 데가 하나도 없다. 모두들 사무실이나. 작은 레스토랑, 작은 호텔, 오래된 개인집은 하우스 박물관(House Museum)으로 이용하고, 각종 기념품점, 홈메이드 공예품점들도 있었다.
▼ 옛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묵었다는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는 현재 고급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물탄(Multani) 카라반세라이’를 비롯해 16세기에 지어진 ‘부카라(Bukhara) 카라반세라이’ 등 과거 이곳이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말해준다.
▼ ‘주마 모스크(Juma Mosque)’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원래 이곳에는 배화교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1309년에 ‘아미르 샤라프 알딘 마하무드’의 명에 의해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세월이 흘러 이게 황폐해지자 1899년에 그 자리에 주마모스크를 새로 지었다고 한다.
▼ 이 나라도 카펫이 유명한 모양이다. 길가 수많은 상점으로도 모자라다는 듯 길바닥까지 전시장으로 삼았다. 그래선지 ‘카펫 박물관’까지 만들어놓았다는데 직접 가보지는 못했다.
▼ 올드 시티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12세기에 지어진 ‘메이든 타워’(Maiden Tower)다.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요새는 직경 16.5m에 높이가 29.5m인 원통형이며 성벽의 두께는 5m나 된다. ‘메이든’이란 이름은 아제르바이잔의 다른 요새에서도 나타나는데, ‘정복되지 않는다'’ 또는 ‘확고부동하다’는 뜻을 의미한단다. 이름대로 성채는 지금까지 부서지거나 외부 세력에 정복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으나 시도해보지는 않았다.
▼ 일명 ‘소녀의 탑’으로 불리는 이 탑은 12세기 건축된 800년 역사의 방어용 고탑으로 몇 가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설은 바쿠 왕의 딸 메이든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이곳에 감금당하자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다. 또 바쿠 왕이 감금한 여동생이 수치심으로 투신했다는 설과 바쿠성을 쳐들어온 적과 싸운 아름다운 여인의 전설도 있다.(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 가이드는 메이든 타워 앞 유적을 ‘바르톨로메오의 무덤’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12 제자 중 한 분이었던 바르톨로메오 사도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등에 포교를 하다가 잡혀 살갗이 벗겨져 죽임을 당했는데 그 장소가 이곳이라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에서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하나 더. 귀국해서 검색해보니 이곳을 하맘 목욕탕으로 소개하는 글이 더 많았다.
▼ 저 석상의 정체는 뭘까? 저 유적지를 지켜주는 신상일지도 모르겠다. 저곳에서 52개나 되는 무덤(석관)이 발견되었다니 말이다.
▼ 어느 레스토랑 앞에서 만난 또 다른 조형물
▼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행운이라는 ‘벼룩시장’도 만날 수 있었다. 탐나는 물건도 눈에 띈다. 하지만 눈요기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반입을 금지한다는데 어쩌겠는가.
▼ 자유 시간에 들러본 먹자골목(?).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 문화권이다.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이다. 하지만 거리에는 히잡 쓴 여성이 드물었다. 술집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세속주의 이슬람을 채택하면서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인 덕분일 것이다. 하나 더.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직 낯선 나라인 모양이다. 투어를 하는 동안 우리 일행 외에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2016년 중순부터는 공항에 도착해서 간단한 비자 신청서만 작성 후 20달러만 제출하면 누구나 비자를 받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거기다 물가도 조지아·아르메니아·튀르키예 등 주변 국가들에 비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비하면 월등히 싸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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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49코스(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부안군청)
여 행 일 : ‘24. 4. 13(토)
소 재 지 : 전북 부안군 하서면 및 부안읍 일원
여행코스 :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노계마을→등용마을→석하마을→구암리 지석묘군→분장마을→장서마을→대초마을→매창공원→서림공원→부안군청(거리/시간 : 19.2km, 실제는 13.86km를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49코스를 걷는다. 10개로 이루어진 고창·부안 구간의 아홉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해랑길이라는 이름답지 않게 새만금을 멀찍이 뒤로 밀어내며 동쪽 내륙으로 들어간다. 바다는커녕 간척지조차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부안의 명기를 기리는 ‘매창공원’과 서림공원, 구암리 지석묘군이 주요 볼거리로 꼽힌다.
▼ 들머리는 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IC에서 내려와 국도 30호선을 따라 부안·곰소 방면으로 18km쯤 내려오다 백련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부안 신재생에너지 테마파크’이다. 서해랑길(부안 49코스) 안내도는 단지 맨 안쪽 ‘월포마을 경로당’ 맞은편에 세워져 있다.
▼ 6개 코스로 이루어진 부안(44~50코스) 구간의 다섯 번째 여정. 서해랑길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바닷가가 아닌 내륙의 평야지대를 걷는다. 평지를 걷지만 19.2km나 되는 길이가 부담스러웠던지 난이도는 별이 3개(5개 중)로 분류된다.
▼ 실제 출발은 ‘705번 지방도(변산로)’의 ‘석하마을 버스정류장(부안군 하서면 석상리)’에서 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을 생략하는 대신, 허난설헌, 황진이와 함께 조선 3대 여성 문인으로 꼽히는 ‘매창’의 숨결을 조금 더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 이정표(종점 13km/ 시점 6.2km)는 우리가 1/3이나 단축해서 걷게 될 것임을 알려준다. 너무 많이 줄어드는 게 아쉽지만, 그 시간에 더 많은 것을 가슴에 담을 수 있으니 억울해 할 일은 아니다.
▼ 11 : 41. 석하마을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법정 동리인 석상리(石上里)의 8개 행정부락(청일·반암·구암·용와·석상·석하·마전·운암) 중 하나로, ‘석하’란 마을 뒷산에 있는 ‘애기바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바위 인근에 있는 마을(‘돌마리’ 또는 ‘돌마을’)의 ‘아래뜸’이라고 해서 석하(石下)로 불린다는 것이다.
▼ 11 : 48. 석하마을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리고는 또 다시 도로로 올라선다. 벚꽃으로 단장한 도로는 ‘변산로’에서 ‘고인돌로’로 이름표를 바꿔달았다. 부안의 명소 중 하나인 ‘구암리 지석묘군’으로 연결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 들녘 너머에서 ‘악어산(48.7m)’이 고개를 내민다. 뒤는 석불산(289.7m)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 도로변에서 만난 ‘만첩홍매화’. 매화인데 붉은 겹꽃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 후기의 원예가 유박(柳璞 : 1730-1737)은 화암수록(花庵隨錄)에서 매화는 비스듬히 뻗은 여윈 가지에서 성글게 나온 녹악(綠萼) 단엽백매(單葉白梅)를 최고로 치며 천엽(千葉)은 속된 티가 나므로 운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유박’처럼 고매한 품격을 지니지 못한 내 눈에는 만첩홍매가 모든 매화 중에서 가장 예쁘게만 느껴진다.
▼ 11 : 50. 잠시 후, 도로를 벗어나 석상(石上) 마을로 들어간다.(초입에 마을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석상리(石上里)의 또 다른 행정부락으로 ‘돌마리’의 ‘웃뜸’ 정도로 알아두면 되겠다.
▼ 마을 입구에는 지석묘만큼이나 오래 묵어 보이는 팽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노거수(老巨樹)이니 다 같이 아껴주자는 안내문까지 달았다. 그런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이유가 뭘까?
▼ 석상마을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구암마을’로 간다. 석상리의 또 다른 행정부락으로 ‘구암(龜巖)’이란 지명은 이 마을에 있는 고인돌에서 유래했다. 고인돌의 생김새가 거북이 등딱지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 12 : 00 – 12 : 05. ‘구암리 지석묘군(사적 제103호)’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고인돌 주변의 민가를 없애고 잔디를 깔아 ‘고인돌 공원’으로 조성했다. 너른 주차장은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갖추었다.
▼ 지석묘(支石墓)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탁자처럼 생긴 북방식과 바둑판 모양인 남방식이 있는데, 이곳 구암리 지석묘는 받힘돌이 있는 남방식이라고 한다. 원래 13기가 있었지만 현재는 10기만 남아 옛 얘기를 전해준다.
▼ 고인돌은 10기가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거북이 등딱지처럼 생긴 덮개돌(上石)을 여러 개의 고임돌(支石)이 받혀주는 모양새이다. 바둑판식 지석묘가 시대를 내려오면서 덮개돌 아래에 몇 개의 주상(柱狀) 또는 판상(板狀) 고임돌을 외연을 따라 세운 것으로, 그 자체가 무덤방(石室)의 역할을 한단다.
▼ 요것은 영락없는 탁자다. 그래서일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곳에 고인돌 찻집을 차리고 싶다’고 적었다. 하지만 동네 할머니들 눈에는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가을이면 고인돌 위에 고추를 널어놓았었다니 말이다.
▼ 12 : 06. 도로(고인돌로)로 빠져나와 ‘구암교’로 ‘영은천(靈隱川)’을 건넌다. 내변산 입구 우슬재와 하서면 옥녀봉 분지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청호저수지 남쪽, 하서면 언독리와 행안면 삼간리 경계지점에서 ‘주상천’에 합류되는 하천이다. 하나 더. 다리건너 ‘도화사거리’에서는 직진이다. 하지만 지방도는 705번에서 736번으로 이름표를 바꿔달았다.
▼ ‘상서초등학교’는 잘 가꾸어진 공원을 연상시킨다. 교정에 ‘힐링 숲길’을 조성하고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의 동상과 함께 기린, 얼룩말 등의 조형물을 세워 자연학습 공간으로 꾸몄다.
▼ ‘구암교’에서 상서면으로 들어선 ‘고인돌로’는 면소재지를 향해 달려간다.
▼ 왼쪽으로는 하서면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진다. ‘구암리 지석묘군’이 있게 한 근원일 것이다. 저런 평야지대가 있었기에 지석묘를 축조할 만한 세력이 웅거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 오른쪽에는 ‘도화(봉암)마을’이 있다. 법정 동리인 통정리(通井里)를 구성하는 7개 행정부락(통정·성암·신성·도화·풍랑·수련) 중 하나로 부안의 너른 들녘이 품은 마을답지 않게 ‘명덕산’을 병풍삼아 오롯이 앉아있다.
▼ 12 : 17. 버스정류장 앞 삼거리에서 ‘고인돌로’를 벗어난다. 그리고는 ‘봉야로’를 따라 ‘분장(分章)’ 마을로 간다.(삼거리의 도로표지판은 ‘장동’ 방향으로 적고 있었다) 법정 동리인 장동리(長東里)를 구성하는 3개 행정부락(장동·장서·분장) 중 하나이다.
▼ 도로(봉야로)를 가운데 두고 통정리(왼쪽)와 장동리(오른쪽)가 나뉜다. 아래 사진은 통정리의 자연부락인 ‘성암마을’이다. 반대편에는 장동리 소속의 ‘분장마을’이 있다.
▼ 12 : 26. (분장마을)버스정류장과 양곡보관창고를 차례로 지나면 수로(水路). 서해랑길은 이 물길을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수로의 둑을 따라간다.
▼ 12 : 28. 잠시 후, 평야지대를 만나면서 수로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들녘 가장자리를 따라 난 농로를 따라간다. 왼쪽이 구릉지인데 반해 오른편으로는 푸름으로 물든 들녘이 질펀하게 펼쳐진다.
▼ 12 : 32. 그렇게 조금 더 걷자 작은 마을 하나가 반긴다. 하지만 마을은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농사철을 맞아 들일이라도 나간 모양이다. 덕분에 난 마을 이름도 알아보지 못한 채 ‘장서마을’로 갈 수밖에 없었다.
▼ 이후로도 구릉지와 농경지를 양쪽에 낀 들길은 한참이나 더 계속된다.
▼ ‘생과 사는 백지장 한 장 차이’라고 했다. 그런데 저 민들레는 그 차이마저도 없애버렸다. 꽃과 홀씨가 한데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봄바람 불고 들녘에 아지랑이 아롱거리면, 길가에 무심하게 자라는 풀 한 포기도, 야생화 한 송이도 왠지 모르게 가슴을 흔든다. 그래서일까? 문득 박미경이 부른 발라드곡 ‘민들레 홀씨 되어’의 가사가 떠오른다. <-전략- 우리는 들길에 홀로 핀/ 이름 모를 꽃을 보면서/ 외로운 맘을 나누며/ 손에 손을 잡고 걸었지 –후략->
▼ 12 : 42. 10분 정도 더 걸었을까 이번에는 ‘장서마을’이 반긴다. 장동리(長東里)에 속한 자연부락이다.
▼ 장동리의 옛 이름은 ‘장다리(長橋里)’였다. 마을 옆 두포천(斗浦川)을 오가는 다리 이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주민들이 두포천을 건너기 위해 섶다리를 놓았는데, 큰비가 오거나 해일이 닥치면 이 섶다리가 부서져 숙명처럼 다시 만들어야 했고, 지명도 ‘긴 다리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장다리’라 불렀단다. 1935년 두포천 하구에 갑문이 설치되고 농경지가 안정되면서 마을이 확장되었고, 이때 서쪽으로 형성된 새로운 마을이 ‘장서(長西)’로 불리게 된다. 장교가 ‘장동(長東)’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 12 : 44. 장서마을 앞에서 들녘으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농경지 사이로 난 들길을 따른다.
▼ 좌우로 펼쳐지는 드넓은 들녘은 온통 푸름에 젖어있다. 인근 목장에서 기르는 초지일 것이다.
▼ 들녘 곳곳에는 축사가 들어서 있었다. 최근에 지어진 듯 하나같이 최신식 시설을 갖추었다. 덕분에 곁을 스치듯 지나가는데도 분뇨 냄새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 사료용 초지도 많지만 푸름의 대부분은 ‘청보리’ 몫이다. 시선을 따라 초록빛으로 물든 청보리 물결이 가득 일렁인다. 5월에 수확하는 청보리는 4월에 한창 물이 올라 청록의 봄을 알려준다.(사진은 보리를 다치지 않으려고 고랑에서 찍었다)
▼ 들녘이 넓어서인지 물을 대는 수로도 하천만큼이나 넓다. 물막이도 바닷가 간척지의 배수관문을 연상시킨다.
▼ 12 : 57. ‘주상천(舟上川)’을 건넌다. 두포천(斗浦川) 또는 목포천(木浦川)으로도 불리는데, 상서면과 보안면의 경계를 이루는 호벌치 계곡에서 시작해 주산면·행안면·하서면을 지나 계화면(의복리) 돈지갑문에서 서해안 새만금으로 유입되는 길이 18.4km의 지방하천이다.
▼ 대초양수장. 농경지에 물을 대려면 양수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 상서면을 달려온 서해랑길은 주상천을 건너면서 ‘행안면’에 바톤을 넘긴다. 눈앞에 펼쳐지는 행안면의 들녘은 무척 넓다. 하지만 막힘없이 펼쳐지면서 지평선을 만들어내던 새만금의 모습은 아니다. 좀 넓다 싶으면 옹기종기 마을이 들어앉았고, 그 너머 산자락에서 들녘은 끝나버린다.
▼ 행안면에서의 첫 만남은 ‘야룡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대초리(大草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대초·송호·송서·야룡) 중 하나로, 늦깎이 등단 시인으로 시선을 모은 왕정순(79세) 할머니가 사는 고을이기도 하다. 2022년 ‘문해, 지금 나는 봄이다’라는 시로 전라북도 도지사상을 받았고, 2023년에는 시 부문 전북문단 신인작품상을 받아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다.
▼ 13 : 18. 창고로 여겨지는 건물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13 : 16). 이어서 만나게 되는 도로(순환북로)는 그냥 횡단해버린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농로를 탄다.
▼ 13 : 21.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도로(봉야로)에서는 오른쪽으로 간다. 도로를 따라 부안 방향으로 간다고 보면 되겠다.
▼ 13 : 23. ‘원일볼트’라는 제조공장 앞에서 도로(봉야로)를 벗어나 왼쪽으로 들어간다. 대초마을로 들어가는 길인데, 초입의 ‘주영목장’ 입간판을 참조하면 되겠다.
▼ 13 : 26 - 13 : 41. 대초마을 동구 밖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작은 경기장에 운동기구, 거기다 정자까지 갖추었으니 도시 부럽지 않은 시설이다. 덕분에 우린 느긋하게 간식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 13 : 43.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대초리(大草里)의 중심이랄 수 있는 ‘대초마을’에 이른다. 예로부터 대추나무가 많았다는 마을이다. 조촌(棗村) 혹은 ‘대추멀이’라고 불리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마을 크기와 발음 표기상의 편의를 감안 ‘대추’를 ‘대초’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 대초마을 경로당. 마을의 오랜 역사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엄청나게 굵은 팽나무가 건물을 감싸주고 있다. 서해랑길은 이 경로당 앞 골목으로 빠져나간다.
▼ 들녘은 부지런한 농부들로 그득했다. 논에 물을 대고, 밭은 갈아둔다. 돌아오는 농번기를 대비하는 평화로운 농촌 충경이라 하겠다.
▼ 13 : 50. 2차선 도로(행안중앙로)를 횡단하면 ‘신월경로당’에 이어 ‘신월마을’이 반긴다. 법정 동리인 신기리(新基里)를 구성하는 4개 행정부락(신월·청교·안기·계시) 중 하나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새터’로 불리다가 신월(또는 신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 13 : 56. 또 다른 2차선 도로(신기신월로)를 횡단하면 길은 ‘재내마을’로 이어진다. 법정 동리인 진동리(眞洞里)의 6개 행정부락(남산·지석·행산·신목·순제·재내) 중 하나다. 이 마을은 시멘트 건물 위에 별도의 지붕을 올린 정자가 눈길을 끌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지붕이 위태위태한데도, 그게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고나 할까?
▼ 서해랑길은 재내마을을 왼쪽으로 에두른 다음 작은 고개를 넘는다.
▼ 14 : 03. 고개를 넘어 ‘월륜길’로 내려선다. 그곳에 1941년에 개교했다는 ‘행안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도 부침의 세월을 겪었다고 한다. 학생 수가 줄어 한때 폐교 위기에 까지 몰렸으나 새로운 길을 모색해 이를 타개했다. 부안읍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유치했다나?
▼ 14 : 10 – 14 : 32. 행안초교사거리(로터리)를 지나면서부터는 ‘매창로’를 따른다. 부안이 자랑하는 지명답게 도로도 4차선으로 바뀌어 있다. 참! 로터리 부근 ‘진동공원’에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점심을 먼저 먹은 다음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라는 모양이다.
▼ 14 : 45. 매창로를 따라 걷길 13분. ‘매창공원(이정표 : 종점까지 3.2km)’에 이른다.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여류문장가로 유명한 부안의 명기 이매창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매창의 묘와 시비가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매창(李梅窓 : 1573-1610)은 조선 선조 때의 여류시인으로 이름은 계생 또는 향금이라 했으며, 자는 천향이고 호는 매창이다.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서녀(庶女)로 태어나 아버지한테 글을 배워 한시에 뛰어났으며 가무도 잘했는데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 또한 시조에도 능하여 그의 작품이라 전하는 시가 수십 편에 이르는데 그중 ‘이화우’는 이별을 노래한 으뜸 시로 꼽힌다.
▼ 1592년, 20살 무렵의 매창은 촌은 유희경(劉希慶 : 1545-1636)과 만나 사랑을 나누고, 평생의 연인이 된다. 이귀와 허균과도 깊은 교류를 했다고 한다. 갓 스무 살이 된 매창은 막 피어오른 꽃봉오리 같은 나이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홀로 남겨져 외로움과 그리움에 시달린다. 봄비처럼 흐느끼는 ‘이화우(梨花雨)’ 즉 ‘배나무 꽃비’는 그런 매창의 처지를 읊지 않았을까 싶다.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며 잊혀져가는 사랑을 애태우는...<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 그밖에도 억고인(憶故人), 증취객(贈醉客), 병중(病中) 등 매창의 여러 시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연인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규원(閨怨)’도 그중 하나다. 사랑하는 그 마음 바다처럼 깊은데 소식은 끊어지고 긴긴 밤에 애간장만 탄다나?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손가락이 마를 정도였을까. <애끓는 情 말로는 할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半남아 세였고나/ 생각나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던/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 유희경과 매창은 28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인 사이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의병을 일으킨 유희경과 이별하게 되었고 매창이 37세로 죽을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유희경은 독보적인 예학과 임금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천민의 너울에서 빠져나온 행운아다. 그러나 유희경은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분상승으로 인한 양반들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매창의 간절한 연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마음까지 끊을 수 있겠는가. 매창에 대한 그리움을 ‘오동우(梧桐雨)’란 시로 남긴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
▼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라는 허균(許筠 : 1569-1618)의 시도 눈에 띈다. 허균과 매창이 처음 만난 것은 1601년 7월이었다. 허균이 조운(漕運)을 감독하기 위해 전라도로 내려가던 중, 비가 많이 내려 부안에 머물게 되었고, 이때 매창을 만나게 된다. 이후 10년간의 교류가 이어진다. 허균의 문집에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시원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여 종일토록 술잔을 놓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 후세 문인들도 그녀를 기리고 있었다. ‘매창 뜸’이란 시를 지은 가람 이병기(李秉岐 : 1891-1968)도 그중 하나이다. <-전략- 이화우(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 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그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나삼을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겼으리/ 그리던 운우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남았다>
▼ ‘정비석(鄭飛石 : 1911-1991)은 ‘매창묘를 찾아서’라는 글을 썼다. <-전략- 그대가 가슴 가득히 설움을 품고 죽어간 지 3백 60여 년 후인 이 날에 60노부가 그대의 시를 사랑하고, 그대의 인품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에서 엄동설한에 천리 길을 멀다않고 찾아와 무덤 앞에 경건히 머리 수그리는 이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후략->
▼ 유희경과의 슬픈 사랑을 남긴 채, 매창은 37세를 일기로 동고동락하던 거문고와 함께 잠들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 뜸’이라고 부른다. 묘는 소박한 묘비와 상석이 석물의 전부였다. 그러나 알 만한 이들은 오석비신에 팔작지붕을 얹은 근사한 묘비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 그의 인품과 시를 사랑하는 선비와 풍류가에 의해 세워지고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 더. 정비석이 찾아왔을 때만 해도 이곳은 공동묘지였다. 부안군에서 다른 묘들을 이장하고 공원을 조성하면서 주민들의 뜻에 따라 매창의 묘만 남겨두었단다.
▼ 공원은 복합 문화공간으로 꾸몄다. 매창의 묘와 시비 외에도 매창테마관, 습지공원, 어린이놀이터, 농구장, 운동기구 등이 들어서 있었다. 부안의 출향 인사들이 세운 ‘부사(扶士)의 탑’도 눈에 띈다.
▼ 15 : 06. ‘매창테마관’은 2층의 한옥으로 지었다. 1층은 전시관이고 2층은 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기 휴일인 월요일을 빼고 매일 10시에 개관해 5시에 문을 닫는다. 하나 더. 사람들은 ‘매창’을 사랑의 화신으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트(♡) 조형물을 배경삼아 사진부터 찍어두고 테마관으로 들어가 보자. 화사하게 핀 튜립이 당신의 사랑을 한껏 축복해줄 것이다.
▼ 매창테마관의 현판, ‘매창화우상억제(梅窓花雨相憶齋)’는 ‘매화꽃 핀 창가에 꽃비가 내릴 때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집’이란 뜻으로 전북대학교 김병기 교수가 짓고 썼다고 한다.
▼ 전시관은 4개의 주제로 나누었다. 먼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풍경에 그녀의 대표적 시문을 감상할 수 있게 했고, 이어 매창의 생애, 매창이 남긴 작품 감상과 매창집이 남긴 의미 등을 알아보는 순서로 꾸몄다. 맨 마지막엔 디지털 포토죤이 설치되어 있었다.
▼ 만일 58편의 작품이 담긴 ‘매창집’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매창을 알 수도 없었겠지? 매창은 시재(詩才)가 특출하고 가무(歌舞)와 현금(玄琴)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여류 예술인으로 한시 수백 수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매창의 작품으로는 시조 1수와 58수의 한시가 ‘매창집’에 실려 있을 따름이다. 부안현의 아전들이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던 것들을 모아 개암사(開巖寺)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 후세에 전해진다. 3부를 간행했는데, 2부는 서울 간송미술관에 1부는 미국 모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단다.
▼ 내가 좋아하는 매창의 시 ‘춘사(春思, 봄날의 그리움)’가 적혀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유희경에 대한 그리움을 <삼월이라 동녘바람이 불어/ 곳곳마다 꽃이 져 흩날리네/ 상사곡 뜯으며 임 그리워 노래해도/ 강남으로 가신 임은 돌아오시질 않아라>로 읊는다. 나 같으면 단숨에 부안으로 달려왔을 텐데...
▼ 테마관 뜨락에서 만난 글자 조형물. 매창을 낳은 고장답게 ‘바람 부는 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파도치는 소리’, ‘새 우는 소리’ 등 부안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함께 들어 행복한 소리’이자 ‘사랑 그리고 사랑’으로 표현했다.
▼ 공원은 한마디로 잘 꾸며져 있었다. 아직도 새 맛을 퐁퐁 풍기는 각종 시설물들은 물론이고, 산책로에는 나무와 꽃들을 식재하고 곳곳에 조형물과 쉼터를 설치했다. 밤이 되면 조명이 켜져 운치 있는 야간 산책도 가능하단다. 그런 여건을 살려 매년 5월 이곳에서 ‘부안 마실축제’가 열린다고 했다.
▼ 15 : 18. 매창공원을 빠져나와 도로(오리정로)를 건너면 ‘부안예술회관’이다. 문화·예술 공연시설로 1층은 300명 수용의 다목적 강당과 전시실, 2층은 499석의 공연장과 회의실·연습실·분장실 그리고 3층은 조명실과 영사실로 구성되어 있다.
▼ 15 : 23. 조금 더 진행해, ‘번영로’를 가로지르면 이번에는 ‘부안중학교’가 반긴다. 이정표가 종점까지 1.7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 15 : 29. 부안중학교 뒤 나지막한 고개를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상소산(上蘇山, 114.9m)’이 고개를 내민다. 조선시대 부안현의 진산으로 ‘한국지명총람’에는 삼국통일 당시 당나라 소정방이 진을 쳤었다고 수록되어 있다. 상소산(소정방이 오른 산)이란 지명과 어울리는 얘기이다. 하나 더. 저 산에는 부안현의 사묘 중 고을 수호신을 모시던 성황사가 있었다고 한다. ‘성황산(城隍山)’으로도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 공원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초입의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저 가운데에 서면 천사로 변할 테니 최고의 포토죤이라 하겠다.
▼ 15 : 30. 서해랑길은 서림공원(西林公園)으로 들어간다. 1848년 부안 현감으로 부임해 온 조연명에 의해 숲이 조성되었는데, 관아 주변의 성황산이 황폐한 것을 보고 동네 유지 33인으로 ‘삼십삼수계(三十三修稧)’를 조직하여 나무를 심고 서림정이라는 정자도 건립했다. 이후 이필의 현감이 부임해 왔을 때 숲이 다시 황폐해져 있어 앞서의 ‘계’를 다시 부활시켜 숲을 가꾸면서 오늘의 서림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서림(西林)이란 부안 관아의 서쪽에 있는 숲이라는 뜻이다.
▼ ‘서림공원’은 부안 현감이던 조연명(趙然明)과 이필의(李弼儀)가 나무를 심고 가꾼 데서 시작됐다. 반대편 산자락에 있는 임정유애비(林亭遺愛碑)에는 두 현감의 서림 숲 조성과 서림정을 건립하여 가꾼 것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관의 주도 하에 가꾸어진 서림공원은 2016년 산림청의 ‘국가산림문화자산’에 지정된바 있다.
▼ 15 : 34. 조금 더 걷자 gpx트랙이 이제 그만 산책로(임도)를 벗어나란다. 그리고는 편백나무 숲속으로 인도한다. 수십 년은 족히 묵은 듯 어른의 몸통만큼이나 굵은 편백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는 멋진 구간이다. 울창한 숲속에는 누워서 쉴 수 있는 벤치까지 놓아 힐링의 공간으로 조성했다.
▼ 15 : 39. 정상에는 팔각정이 지어져 있었다. 종합안내도에 ‘아래 전망대’로 표기된 곳인데, 조금이라도 더 낳은 조망을 보여주려는 듯 이층으로 올렸다.(내 사진이 역광이라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렸다)
▼ 전망대에 오르자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부안읍내는 물론이고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산하의 속살까지 샅샅이 보여준다.
▼ 계화면 방향은 아예 막힘이 없다. 지도를 다시 그려야만 했다는 ‘새만금’의 드넓은 들녘은 물론이고, 그 너머에 있는 서해바다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 15 : 44. 반대방향으로 가파르게 내려서면 다시 산책로를 만난다. 그런데 이게 또 만만찮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우람한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길게 뻗어나가는 풍경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다. 포커스만 잘 맞추면 인생샷 하나쯤은 너끈히 건질 수도 있겠다.
▼ 오른쪽 산자락에는 ‘부안 향교’가 들어앉았다. 1414년(태종 14) 창건된 부안향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0년(선조 33)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건하는 등 대대적인 확장을 해 오늘에 이른다.
▼ 서림공원에도 ‘매창’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백운사에 걸어 올라가니/ 절은 흰구름 사이에 있네/ 스님이여 흰구름을 쓸지 말아요/ 마음 또한 흰구름과 함께 한가로운 것을...> 그런데 저 ‘백운사’는 대체 어디에 있는 절일까?
▼ 시비 근처. 매창의 시처럼 예쁜 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동백꽃은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도 곱지만, 바닥에 떨어진 후에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동백꽃이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시인묵객이라면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선홍빛 피의 애처로움’이란 이미지도 있다. 옛날 선비들에게는 후자가 주는 이미지가 더 강했던 모양이다. 귀양을 간 곳에 동백나무라도 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니 말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자신의 목이 댕강 떨어지는 것을 연상했기 때문이라나? 그렇다면 지금 난 선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시체처럼 누워있는 낙화(落花)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새색시의 붉은 볼처럼 고운 꽃들만 눈에 차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 이 고장 출신인 백양촌 신근의 시비도 보인다. ‘생거부안(生居扶安)’을 예찬하는 시이다. <여기 서면/ 태고의 숨결이 강심에 흐려/ 어머니, 당신의 젖줄인 양 정겹습니다/ 푸른 설화가 물무늬로 천년을 누벼오는데/ 기슭마다 아롱지는 옛님의 가락/ 달빛 안고 하얀 눈물로 가슴 벅차 옵니다 –후략->
▼ 15 : 53. 능선 삼거리에서 오른쪽(왼쪽은 성황사와 윗전망대로 연결된다)으로 간다. 이정표는 트레킹이 종료되는 부안군청까지 0.5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 잠시 후 만난 혜원사(慧圓寺).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1924년 해인사 삼선암 승려 지승이 세웠다. 서외리(부안읍)에 인법당을 세우고 ‘청일암’이라 했다. 1970년 현 위치로 옮겨왔고 1999년에는 ‘혜원사’로 이름까지 바꿨다. 금당인 극락전을 위시해 인법당·산신각·무구원·마하문화원 등의 전각을 거느리고 있다.
▼ 15 : 58. 서림정(西林亭)은 부안 현감이던 조연명이 33인으로 시계(詩契)를 결성하여 건립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 건물은 없어졌고 그 터에 근래에 새로 지었다. 노휴재(老休齋, 조선 후기의 경로당)에서 소장하고 있는 ‘상소산도(上蘇山圖)’에 조선시대 당시의 서림정과 상소산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 주변에는 옛 부안 현감들의 송덕비 등 부안지역과 관련한 각종 비석들이 서있다. 현감 조연명(趙然明)과 이필의(李弼儀) 임정유애(林亭遺愛) 비(碑)도 찾아볼 수 있다
▼ ‘석암(石菴) 정형태(鄭㺾兌) 기적비’와 ‘춘헌(春軒) 이영일(李永日) 송덕비’도 눈에 띈다. 하지만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암각서(巖刻書)는 찾지를 못했다. 19세기 중엽-20세기 중엽 부안 지역의 시인 묵객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어, 지은 시나 글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사랑나무’란다. 맞다. 100년 넘은 서어나무 두 그루가 한 몸처럼 붙어 있으니 ‘연리목’이 분명하다. 서로 다른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 한 몸이 되었다고 해서 ‘연리지(連理枝)’라고도 부른다. 특히 한 쪽씩 날개를 가진 ‘비익조(比翼鳥)’와 더불어 남녀가 만나 새로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사랑과 결혼, 화합 등의 상징이자 좋은 조짐으로 여긴다.
▼ 16 : 12. 활 쏘는 사람들이 무예수련을 했다는 ‘심고정(審固亭)’ 터를 지나면, 잠시 후 부안군청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앱이 13.86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매창의 숨결을 느껴보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던 모양이다.
▼ 서해랑길(부안 50코스) 안내도는 군청과 의회 건물을 잇는 공중통로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 부안군청에서 만난 ‘평화의 소녀상’은 낯선 모습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여느 소녀상들과는 달리 서있는 모습이다. 머리는 단발하기 전의 긴 머리로, 침탈받기 전의 순수하고 맑고 밝은 소녀로 표현했다. 발은 맨발이다. 우리나라가 주권을 잃었다는 것과,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단다.
▼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성공한 사람의 기준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나’였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내 맘에 드는 나’로 바뀐다. 나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하며, 지금 하는 일을 무엇보다 좋아하고,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인생이 풍요로워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난 성공한 사람이 분명하다. 나를 믿고 따라주는 집사람이 늘 곁에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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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메테오라(Meteora)
여행일 : ‘23. 3. 22(수)-29(수)
세부 일정 : 아테네→수니온곶→아테네→산토리니→아테네→델피→테르모필레→메테오라→아테네
특징 : ‘메테오라(Meteora)’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지방 북서부 트리칼라주 일대에 있는 거대한 사암 바위기둥 위에 세워진 수도원들을 두고 지어진 이름이다. 바위들의 평균 높이는 300m이며, 가장 높은 것은 550m에 이른다.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들이 있어 성지순례 코스에 들기도 하는 이곳은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 독특한 풍광을 보여준다. 거대한 바위 위에 만들어진 수도원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과거에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밧줄과 도르래를 이용해야만 올라갈 수 있었다. 1960년대 이후 정부는 관광객들을 위해 험준한 산속까지 도로를 냈고, 수도원이 있는 높은 바위까지 계단을 만들거나 계곡의 바위와 바위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덕분에 우린 개방된 6개의 수도원을 별 어려움 없이 둘러볼 수 있다.
▼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메테오라’에 도착했다. 아니 정확히는 메테오라의 배후도시인 ‘칼람바카’이다. 도시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기둥 모양으로 우뚝 솟은 거대한 사암(沙岩)으로 이루어진 바위산들과 그 정상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하나 더. ‘칼람바카(Ka1abaka)’란 ‘전망 좋은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단다.
▼ 메테오라는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400Km쯤 떨어진 ‘테살리아’ 지방에 있는 UNESCO 지정(1988년) 세계문화유산이다.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10대 불가사의 건축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 메테오라에는 24개의 수도원·수녀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6곳만 복원을 끝내고 손님을 맞는다. 대 메테오른 수도원(1356)을 비롯해 발람 수도원(1530), 로사노 수도원, 세인트 니콜라스 아나퍼프사스 수도원(1458), 트리니티 수도원, 그리고 유일한 수녀원인 성 스테파노 수녀원(1312)이다.
▼ 저녁식사 전에 둘러본 ‘칼람바카’는 여느 소도시와 다를 게 없었다. 호텔, 식당, 카페, 편의점 등 웬만한 편의시설은 다 들어서 있다. 관광도시이다 보니 기념품 판매점이 유독 많다는 게 조금 다르다고나 할까?
▼ 하룻밤 묵은 ‘KOSTA FAMISSI 호텔’. ‘칼람바카(Kalambaka)’라는 마을의 입구에 자리하는데, 3성급이지만 깔끔한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 호텔은 가족가업으로 운영한다고 했다. 그래선지 벽면을 자랑스러운 마테오라의 역사를 담은 사진들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창문을 열자 수도원을 머리에 인 메테오라의 거대한 바위봉우리들이 일렬로 늘어선다. 누군지는 몰라도 ‘전망 좋은 곳’이라는 동네 이름 한번 잘 지었다.
▼ 여행사는 메테오라에 있는 여섯 곳 수도원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발람수도원(Holy Monastery of Varlaam)’만 안내해준다. 인상적인 건축물과 탁 트인 전망,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곳이다.
▼ 발람수도원의 평면도, 붉은 선의 왼쪽은 수도사들의 생활공간으로 관광객의 출입이 제한된다. 수도원은 카톨리콘(예배당)과 식당, 도서관, 기숙사, 감방, 종탑,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버스에서 내리면 널따란 광장.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대문 좌우 벽감 속에 성화가 들어있다. 참! 메테오라의 여섯 수도원은 일주일에 하루씩 돌아가면서 쉰다고 했다. 우리 같은 패키지여행자야 현지 가이드가 알아서 찾아가겠지만, 자유여행자들은 미리 알아보는 게 바람직하겠다.
▼ 왕관까지 쓰고 있는 저 쌍두 독수리 문장은 뭘 의미하는 걸까? 어쩌면 비잔틴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395년 로마가 동·서로 나뉘고, 10세기 경 동로마에서 쌍두독수리의 나타나기 시작해 12세기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때는 황실의 문장으로 굳어졌다. 당시 비잔틴제국의 황제는 세속적인 권한과 동방정교회의 수장이라는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황실의 문장이 교회의 문장이 되었고, 동방정교회의 전통과 비잔틴제국의 문화를 이어받은 그리스나 동유럽의 나라들에서 교회의 상징 혹은 나라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발람수도원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삼각주였던 테살리아 평원의 칼람바카의 페네야스 계곡은 400m 이상 우뚝 솟은 험준한 바위산이다. 오스만의 종교탄압을 피해 수도사들은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저런 바위 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었다. 초기에는 암벽에 나무사다리를 세우고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러다 지상으로 연결되는 도르래를 설치하고, 밧줄에 두레박이나 그물을 매달아 수도사들이 타고 오르내리거나 생필품을 공급했다.
▼ 수직으로 무려 373m나 끌어올리는 데 사용되던 밧줄이 수도사들의 전통적 생활 방식을 잘 보여준다. 메테오라에 수도원 건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이슬람 투르크족의 침략과 종교 박해를 피해 수도사들은 바위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높이가 수백 미터에 이르는 바위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은 당연히 없었다. 이때 누군가의 지혜로 나온 게 밧줄을 걸어 타고 올라가는 것. 다음에는 도르래를 만들어 벽돌과 흙을 운반해 일일이 손으로 다듬고 빚어 수도원을 세웠다.
▼ 저 다리만 걷어내면 수도원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한다. 다리 건너. 바위를 톱니바퀴처럼 깎아서 만든 계단을 빙빙 돌아서 올라간다. 한쪽은 아찔한 바위절벽. 난간이 둘러져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 계단이 길고 가팔라서 올라가는 게 만만치 않다. 오르면 오를수록 하늘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숨은 가빠진다. 그렇다고 안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 이왕이면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라는 느낌으로 올라가보자. ‘하늘의 기둥’, ‘하늘의 정원’, ‘땅과 하늘을 잇는 계단’ 같은 인간 세상이 아닌듯한 별칭이 실감날 것이다.
▼ 고개라도 들라치면, 더 높은 곳에서 ‘대 메테오론 수도원(The Monastery of Great Meteoron)’이 내려다본다. 메테오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원이다. 1340년에 아토스 산에서 온 아타나시오스라는 학승이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해발고도 613m의 거대한 바위덩어리에 ‘공중에 떠있는 거대한 장소’라는 뜻의 ‘대 메테오로(Megalo Meteoro)’란 이름을 붙이고 여기에 수도원을 세웠다. 세월이 흘러 이게(메테오르) 이 지역의 거대한 바위군 및 수도원 전체를 일컫는 단어가 되었다.
▼ 짜릿한 스릴을 즐기며 계단을 올라서면 또 하나의 문이 길손을 맞는다. 수도원 내부로 들어가려면 이곳에서 입장권(3 EUR)를 사야 한다. 하나 더, 이곳도 역시 남성은 반바지와 짧은 티셔츠 차림, 여성은 바지 차림과 소매 없는 셔츠차림은 입장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입구에서 치마 등을 빌려주기(구매한다는 얘기도 있으나 우린 현지 가이드가 다 챙겨줬다) 때문에 크게 불편한 점은 없다.
▼ 발람수도원은 메테오라에서 두 번째로 큰 수도원이다. 1350년 은둔자 발람이 이 암봉에 올라 수행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3개의 교회와 생활공간(cell)을 만들었지만 그가 죽은 후 200년간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518년 ‘테오파네스’와 ‘넥타리우스’라는 두 수도사가 재건했다. 수도원이 날로 번창하면서 16세기 말에는 수도사가 35명이나 머물기도 했단다. 하지만 17세기 이후로 수도원이 쇠락하면서 많은 수도사들이 떠났고, 현재는 7명의 수도사(monk)가 머물 뿐이란다.
▼ 수도원 건물은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직사각형 십자가 평면 위에 팔각형 돔을 얹은 건물 두 채를 이어붙인 정교회 건물(아래 사진)도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오스만 스타일의 건물(위 사진)이 들어서 있다. 이층이 앞쪽으로 약간 돌출해 있고 이 돌출부를 살짝 휜 나무지지대가 떠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 ‘앗! 꽃이다’. 빗물로 버텨야하는 바위봉우리에서 나무가 자란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2층 높이까지 자랐는가 하면 꽃망울까지 활짝 터뜨렸다. 사람들이 천국이 연상된다며 이곳을 ‘하늘의 정원’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 그리스풍의 정자가 들어선 공중 정원은 발람수도원의 자랑거리다. 최고의 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난간에 서면 메테오라의 기기묘묘한 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하지만 감탄해 할 수밖에 없는 저 풍광을 오스만의 종교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든 수도사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온다.
▼ 메테오라의 바위는 6000만 년 전, 지각변동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알프스 조산대의 충돌로 드러낸 거대한 사암 바위는 풍화와 침식 작용을 거치면서 단단한 부분만 남았고, 점차 뾰족하게 솟았다. 검은 바위 위 가로로 된 단층선은 오랜 시간 진행된 침식작용의 흔적이라고 한다. 이런 표현은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도 썼었다.
▼ 정원에서 바라본 ‘루사노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Rousanou /St. Barbara)’. 저 수도원은 이름의 내력부터 알쏭달쏭하단다. 최초로 지어질 당시 이곳에 기거하던 은둔 수도사나 기부자의 이름을 땄을 것으로 추정될 따름이란다. 1745년경, 3세기 레바논지역의 순교자이자 성인인 St. Barbara의 유골 일부를 이곳으로 가져오면서 ‘세인트 바바라 수도원’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1930년 다리가 놓이면서 가장 접근이 쉬운 수도원이 되었다.
▼ ‘이 뭐꼬?’ 정원 한쪽 귀퉁이에 수도꼭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슬람 국가를 여행하면서 흔하게 보던 시설이다. 기도를 드리러 온 신자들이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얼굴을 씻는 시설인데, 그리스 정교회도 그런 규칙이 있었나?
▼ 이젠 건축물들을 둘러볼 차례이다. 건물은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기도 공간인 오른쪽만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왼쪽은 수도사들이 거주하는 곳이라서 출입을 막고 있다. 공개 지역으로 들어가면 전실(narthex), 이곳은 성인들의 순교 장면을 그려놓은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어떠한 고통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공간, 신앙의 자리에 나아가겠느냐고 묻는 의미란다.
▼ 사도, 성인들의 모습이 교회를 장식하고 있는데, 아주 오래된 종교 시설 특유의 엄숙한 공기가 그 화려함을 누르듯이 내려앉아 있다.
▼ 예배당(nave)에 들어가면 바닥과 천장의 성화, 나무로 만든 의자 등 장식 하나하나가 정교하고 조화롭다. 특히 천장의 프레스코화에선 예수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하지만 촬영은 입구의 홀까지만 허용된다.
▼ 발람수도원을 재건했다는 ‘테오파네스’와 ‘넥타리우스’ 수도사가 아닐까 싶다.
▼ 성당을 빠져나와 뒤란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옛날 수도사들의 힘겨웠던 삶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 예전 수도사들이 사용했다는 우물에는 아직도 두레박이 매달려 있었다.
▼ 그 뒤에는 거대한 오크통이 있었다. 바위봉우리에 걸터앉은 수도원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물’이었다. 그래서 수도원을 지을 때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물탱크를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12톤짜리 물탱크가 3개나 있는데, 만드는데 무려 18년이나 걸렸다고 전해진다.
▼ 투어는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목조십자가, 성골함, 성화 등 수도사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아이템들이 전시되어 있다.
▼ 박물관에는 다양한 기록물들과 함께 비잔틴 스타일의 성화가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참! 박물관을 둘러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게 하나있다. 정교회에서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성경말씀에 근거해 예수나 마리아, 성인들의 이콘(Icon)만 허용하고 가톨릭처럼 조각상은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 수도나 미사집전 때 사용했을 법한 갖가지 집기들도 진열해 놓았다.
▼ 정교회 성직자들의 의복. 정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수도사들과는 달리 평신도들의 통과의례(通過儀禮) 주관과 함께 성당에서 예배를 집전했다고 한다.
▼ 수도사들의 삶은 어느 작가의 시선으로 살짝 엿본다. <그들의 모습은 깊은 묵상으로 이마가 넓어지고, 세상이 풍기는 냄새를 멀리하고 영성의 향기만을 맡아 코가 좁고 길쭉하며, 삶에 필요한 것만 먹는 것으로 절제의 삶을 살아서 입도 작으며 그나마 수염으로 가리고 있다. 무엇을 보았는지 놀란 눈같이 크고 또 저들의 귀는 왜 그렇게 큰지, 들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겠다고 귀를 크게 열고 있는 것이리라.>
▼ 필경(筆耕)은 수도사들의 주요 일과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필경이 성서에서 그치지 않고 희극 같은 소설도 필사했다고 전해진다. 소설이란 본디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는 장르다. 잡념을 떨치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며 심신을 수양하는 게 수도사들의 삶일지니, 필사하면서 마음이 고생 깨나 했겠다.
▼ 수도원의 역사를 담은 사진들도 게시되어 있다.
▼ 박물관 근처 화장실 때문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메테오라에 대한 자세한 자료들을 게시해 놓았기에 살펴보다가 그만 시간가는 줄 몰랐던 모양이다. 나 혼자 집결장소로 가버린 걸로 오해한 집사람을 이해시키느라 고생깨나 했다.
▼ 투어를 마친 후 야외전망대로 이동했다. 메테오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 전망바위에 서자 바위 숲이 펼쳐진다. 마치 돌로 된 숲처럼 울퉁불퉁한 회색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그 뒤로 그리스를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핀두스 산맥과 메테오라 유적지의 거점도시인 칼람바카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 최고의 ‘뷰 포인트’답게 메테오라의 여섯 개 수도원 가운데 네 개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밖에도 메테오라에는 두 개의 수도원이 더 있다고 한다. 가보지도, 그렇다고 눈에 담지도 못했지만 007시리즈 ‘포 유어 아이즈 온리(For Your Eyes Only, 1981)’의 로케이션 장소로 더 유명한 ‘성 트리니티(성삼위) 수도원(Holy Trinity Monastery, Agia Triada)’과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고 사마리아 여자, 물고기 잡이의 기적 등의 벽화가 볼거리라는 ‘성 스테파노 수녀원(St. Stephen Nunnery)’이다.
▼ 루사노 수도원이 발아래로 펼쳐지는데 붉은 지붕의 수도원 건물과 웅장한 바위덩어리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그 뒤에는 ‘성 니콜라스 아나파프사스 수도원(The Holy Monastery of St. Nicholas Anapausas)’이 있다. 16세기에 지어진 수도원으로 크레타 출신의 화가 ‘Theophanis Strelitzas’가 그렸다는 벽화로 유명하다.
▼ 시선을 들자 이번에는 ‘대 메테오론 수도원’과 함께 조금 전에 다녀온 ‘발람수도원’이 얼굴을 내민다. 참고로 수도사들이 자연동굴에 처음 온 것은 9세기였다고 한다. 수도원 건물이 건축된 것은 14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이게 공동체로 발전했고, 15세기 말 스물네 채의 수도원을 포함하는 규모로 성장하기도 했다. 덕분에 오스만제국 치하에서 소멸되어 버릴 그리스의 전통과 헬레니즘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이곳은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래선지 촬영용 의상까지 챙겨온 여성분들이 꽤 있었다. 하긴 장쾌하면서도 아름다운 마테오라의 풍경을 배경 삼는 일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 공자는 나이 칠십을 ‘종심(從心)’이라고 했다. 깨우칠 만큼 깨우친 이들이니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해도 도(道)에 어긋나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그러니 인생샷 하나 건져보려는 집사람의 저 몸짓은 또 하나의 도가 분명하다.
▼ 20대 초·중반을 외국인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난, 그네들의 습성이 몸에 배어 사진 찍는 건 좋아하지만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별로로 여긴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일 수밖에 없었다. 인생샷도 일심동체라야 제멋이라는데 어쩌겠는가.
♧ 에필로그(epilogue), 어느 전문가는 메테오라에 수도원이 들어선 이유를 셋으로 나누고 있었다. 첫째는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다는 것. 하나님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했으니 높은 곳이라면 하나님의 소리를 조금이라도 잘들을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다음은 속세에서 은둔하기 위해서다. 세속의 번잡함을 피해 오롯이 홀로 신과 마주할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접근이 어려운 곳에 은둔처를 만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도자들이 종교 탄압으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위해 어떤 세력도 닿기 힘든 곳으로 도망간데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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