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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아르메니아  세반, 세반 호수와 세바나 반크(수도원)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세반(Sevan) : 아르메니아 중부에 위치한 세반호수의 북서쪽 호안에 있는 작은 도시. 세반은 도시의 소란에서 벗어나 자연 속으로 떠나기에 딱 좋은 곳으로 꼽힌다. 세반호의 주변을 병풍처럼 두른 아름다운 산과 호수 주변의 싱그러운 초목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고 한다.

 

 두 번째 방문지인 세반 호(Lake Sevan)’로 간다. ‘딜리잔에서 높은 고개를 넘으면 환경이 크게 바뀐다. 이어서 진행방향 저만큼 호수가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인구 2만의 소도시 세반에 이른다. 호수 주변의 마을 중 교통이 가장 좋고 사람의 통행이 가장 번화한 곳이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 세반호수(세반 수도원), 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 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 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세반은 세바나 반크’(Sevana vank)’  세반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우린 유람선(꼬맹이 어선을 개조했다)부터 타기로 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부터 먼저 살펴본 다음, 수도원의 속살을 들여다봐야 은밀한 속사정까지 알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세반은 호수물이 흐라즈단강으로 흘러드는 지점에 형성된 도시로 세반호수 관광의 중심지라고 했다. 캠핑이나 수영은 물론이고 제트스키, 윈드서핑, 요트 등의 수상레포츠를 즐길 수 있단다. 유람선을 타고 세반호수 일부를 둘러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유람선은 호수를 향해 툭 튀어나간 반도(peninsula)’를 한 바퀴 돌아온다. 1930년대에 시작된 산업화 과정은 흐라즈단 강에 발전소를 만든다. 그게 숫자를 늘리면서 1949년에는 세반호에 도수터널을 뚫어 발전용수를 공급한다. 하지만 그때부터 세반호의 수위가 매년 1m씩 낮아지기 시작했고. 수면 위에 떠있던 섬은 저렇게 반도로 변해버렸다. !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아르메니아 정부가 아르파-세반, 보로탄-세반 등의 도수터널을 새로 만들면서 수위가 다시 올라가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세반반도의 호안에는 비치는 물론이고 호텔과 레스토랑, 캠핑장 등이 줄줄이 들어서 있었다. 반도의 언덕에는 세반수도원의 고색창연한 두 건물이 걸터앉았다. 1,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원으로,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에 저항해 사도교회를 지키려던 아르메니아인들의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6월인데도 호수 건너 산은 눈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즈다하크 산(Mt. Azhdahak, 3598m)’이 아닐까 싶다.

 버스를 이용해 세반반도 안으로 들어간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수위가 낮아지면서 섬은 반도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제 배 대신에 걷거나 차를 타고 들어간다. 그리고 수도원을 보기 위해 산 위로 올라간다. 경사가 제법 가파르나 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어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아니 세반호수와 주변 마을 등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다보면 힘들다는 느낌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다.

 교회는 4-5m 높이의 축대 위에 지어져 있었다. 그 입구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본 다음 안으로 들어가면 어떨까? 최소한 건물이나 유적의 이름 정도는 알아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안내판은 건물배치도와 함께 세바나 반크의 역사를 적고 있었다. 수도원은 305 그리고르 루사보리치(Grigor Lusavorich)’가 세반 섬에 있는 이교도 신전 꼭대기에 에르미타주 교회와 성 하루티언 교회를 세우면서 시작된다. 874년에는 슬룬크의 바사크 가부르 왕자의 부인 마리암 공주의 후원으로 성 아라켈로츠(거룩한 사도)’ 성 아스타바트사친(신의 성모)’ 교회를 세운다. 안내판에는 없지만 전설도 있다. 10세기 아쇼트 2(Ashot II)’는 아랍 침략자들과 싸우면서 이 섬에 야영을 한다. 당시 아르메니아 군대는 아랍인들에 비해 수적으로 훨씬 열세였다. 하지만 현지 어부로부터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전투를 벌이라는 조언을 들었고, 그 결과 태양에 눈이 먼 아랍인들은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전사한 병사들의 군복과 피로 호수가 검붉게 변하자 아르메니아어로 검은을 뜻하는 세브를 이름에 붙였다나?

 수도원의 건물배치도. 1. 성 사도교회(St. Arakelots church) 2. 승려 숙소 및 학술원 유적(monk cell and academy ruins) 3. 성모교회 전실 유적(St. Astvatsatsin gavit ruins) 4. 성모교회(St. Astvatsatsin church) 5. 성 하루티언교회 유적(St. Harutiun church ruins)

 입구의 저 조형물은 대체 뭘까? 정박(碇泊)을 의미하는 닻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1872-1946’이란 숫자도 적혀있다. 1949 세반호에 도수터널을 뚫어 발전용수를 빼내간 이래 수면이 19.01m나 내려갔으니, 그 이전에 이곳에 항구가 있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안으로 들어가니 세반수도원(Sevana vank)을 구성하는 비잔틴 양식의 두 교회가 반긴다. ‘성 사도교회(St. Arakelots church, 앞쪽)’ 성모교회(St. Astvatsatsin church, 뒤쪽)’, 두 교회 모두 십자가 형태의 건물 위로 팔각형의 톨로베이트(Tholobate: 돔이 세워진 건물의 직립 부분)와 돔을 올렸다. 참고로 세바나 반크는 지명인 세반의 아르메니아어인 세바나(Sevana)’와 수도원이란 반크(vank)’의 합성어라고 한다. 그러니 세반호수의 호반에 있는 수도원(Monastery)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성스러운 사도라는 뜻의 아라켈로츠 교회(St. Arakelots Church)’는 바르톨로메우스(St. Bartholomaeus)와 타데우스(St. Thaddeus)에게 봉헌된 교회다. 입구 철문에 예수상과 사도상이 조각되어 있다.

 제대 뒤 감실에는 성모자상이 모셔져 있었다.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인데, 두 분의 얼굴이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생김새가 아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알려진다. 열일곱이 넘는 세기가 흘러오면서 많은 부분이 토착화가 되었나 보다. 맞다. 6년 전쯤 들른 멕시코에서도 현지인들을 쏙 빼닮은 성모상을 만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성모라는 뜻의 아스트바츠신 교회(Surp Astvatsatsin Church)’는 말 그대로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교회이다. 사도교회와 거의 비슷한 외관이지만 조금 더 크게, 그리고 조금 더 높은 곳에 지어져있다.

 교회 입구에는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하치카르(Khachkar)’를 진열해 놓았다. 저 하치카르에 새겨진 십자가의 아래는 현세 지상을 뜻하고 위는 천상의 세계를 뜻한단다. 이 땅에 살다가 하늘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도구인 셈이다. 사람이 죽었을 때 노잣돈의 개념으로 하치카르를 만들기도 했단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좌대 위에 세우는 특별 대접을 받는 것도 있다. 그나저나 저 안경은 대체 누구의 것일까? 세반호수와 어우러지는 수도원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안경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자리를 떴을까?

 안으로 들어가면 제대 가운데 십자가와 성모자 그림이 모셔져 있다.

 이곳의 성모자상도 사도교회처럼 현지·토착화가 되어있었다.

 이색적인 풍경이 눈에 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제대가 아닌 벽화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한두 사람이 아니다. 너나없이 제대는 곁눈질만 주고 벽화 앞으로 가버린다.

 그곳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가운데 놓고, 열두 제자로 여겨지는 성인들이 여섯 명씩 양쪽에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조금 이상하다. 난데없는 몽골풍, 그러니까 머리를 땋아 길게 늘어뜨리는 변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이드는 몽골의 침입 때 수도원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살짝 꼼수를 부린 것이라고 했다. 일종의 애교작전이라고나 할까?

 그 아래는 변발을 한 예수님을 아예 하츠카르로 만들어 놓았다. 아무튼 저런 노력 덕분에 몽골군들이 자기네 장군을 숭배한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나무로 된 조각품도 눈길을 끈다. 예수님과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바르톨로메우스 타데우스상라고 들은 것 같은데, 내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예수는 왼손에 책을 들고 오른손을 들어 올려 설교하는 모습이고, 두 명의 사도는 고뇌하는 듯한 진지한 표정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형상이다.

 검은색 돌인 응회암으로 지어진 교회는 고색창연했다. 한줄기 빛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내부의 검은 돌에 반사돼 신심이 더욱 깊어진다.

 세반수도원은 아르메니아의 대표적 순례교회라고 한다.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후 세운 최초의 교회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등재된 아흐파트 수도원보다도 더 많은 신자와 봉헌용 촛불이 눈에 띈다.

 두 교회를 모두 둘러보고 나면 발길은 자연스레 교회 뒤쪽으로 향한다. 수도원은 물론이고, 수도원이 걸터앉은 세반반도를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세반호수를 조망하기 위해서이다.

 아르메니아 왕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성 그레고리우스는 이곳에 2개의 교회를 세운다. 그중 하나가 성 하루티운 교회인데 지금은 폐허로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아르메니아 특유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3개의 본당이 있는 돔형 대성당이었단다. 하나 더. 전설은 마리암 공주가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세상을 떠난 남편을 기리기 위해 30개의 교회를 짓는 임무에 착수했다고 전한다. 12사도가 호수를 가로질러 날아가 그녀가 지어야 할 곳을 알려주는 꿈을 꾼 후 위치를 특정했단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수도원 풍경. 들꽃에 파묻히다시피 한 수도원이 세반호수를 배경삼아 한 폭의 잘 그린 풍경화로 그려진다. 참고로 세반 검은(Sev, 아르메니아어)’ (van, 튀르키예 남동쪽에 위치한 호수)’의 합성어라고 한다. 예전에는 튀르키예의 동부지역도 아르메니아 영토였다고 한다. 그곳에 (van)’이라는 호수가 있는데, 호수 근처에서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이곳으로 옮겨왔던 모양이다. 그리고 검은 빛을 띠는 저 호수에 반 호수를 겹쳐보면서 향수병을 달랬다는 것이다.

 세반호수와 성모교회가 찰떡궁합을 이룬다. 세반호수는 바다가 없는 아르메니아에서 보석 같은 존재다. 용수·전기·물고기 같은 유형의 자원뿐 아니라 관광·레저·생태 같은 무형의 자원을 이 지역 사람들에게 제공해준다.

 성모교회 앞은 터만 남아있었다. 원래는 성모교회의 전실(gavit)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1956-1957년 교회가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전실의 기둥 등 일부 유물은 예레반 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세반호수의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가히 아르메니아의 진주라 불릴 수 있을만한 풍광이다. 세반호수와 함께 아르메니아의 상징으로 꼽히는 아라랏 산의 폭발로 생겨 난 호수라는데, 아르메니아에서 아니 코카서스 지역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940평방미터로 제주도와 맞먹는 크기라고 한다. 하도 넓어서 수평선이 보일 정도라나? 하나 더. ‘검은 ()호수라는 이름은 물빛이 검어서가 아니라 호수에 구름의 그늘이 져서 검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도원은 야생화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이 가슴에 매력적으로 스며드는 곳이다. 그런 꽃밭 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다 발걸음을 멈춘다. 또렷하지 않는 길을 따르는 것보다는 발아래로 펼쳐지는 세반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에 풍덩 빠져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이다.

▼ 언덕은 이름 모를 노란 꽃무리가 호수와 어우러지며 장관을 이룬다. 평생을 꽃띠로 살고 싶다는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냉큼 꽃밭으로 들어가 포즈부터 잡고 본다.

 세반수도원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소문났다. 특히 해질 무렵이면 세반 호수를 바라보며 서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에 비해 관리가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낙서판으로 변한 저 안내판이 그 증거이다.



진안고원길 14구간(진안천 물길)

 

여행일 : ‘24. 7. 20()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상전면 및 진안읍 일원

여행코스 : 상전면사무소수변체련공원연지고개(인증)중기마을도치재(인증)상도치마을운산인공습지공원진안만남쉼터(거리/시간 : 13.4km, 실제는 중기마을부터 10.9km 3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무진장(茂鎭長)’은 무주·진안·장수를 일컫는 말로 수려한 경관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중 진안은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산과 고갯마루를 품고 있는 곳이다.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도 마음껏 굽이진다. 그런 진안에 일상에서 찌든 근심을 훌훌 털고 자연을 즐기며 걷기 좋은 길을 내었으니 이게 진안고원 길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사람 왕래가 끊겼던 묵은 길, 잊혔던 옛길, 땔감과 약초 구하러 다니던 산길을 되살려냈다. 놀며 쉬며 걷는 재미있는 느린 여행길로 미슐랭가이드지로부터 별3개 만점을 받은 세계적인 둘레길이기도 하다.

 

 트레킹 들머리는 상전면사무소(진안군 상전면 주평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 진안 IC에서 내려와 30번 국도를 타고 무주방면으로 8km쯤 달리다가 언건교차로에서 49번 지방도(상전·동향방면)로 옮겨 2km쯤 들어오면 상전면 소재지인 주평리에 이르게 된다. 진안고원길(12구간) 조형물은 상전면사무소 앞에 설치되어 있다.

 상전면에서 진안천을 따라 진안읍에 이르는 길이다. 연지고개와 도치재를 넘은 다음, 진안읍으로 들어서서 진안천변에 조성된 길을 따라 걷게 된다. 읍내에서는 재래시장과 삼지교, 우화정 등을 거쳐 종점(진안 만남쉼터)으로 간다.

 10 : 29. 실제 출발지는 중기마을 입구(버스정류장). 비가 시간당 20-40나 내린다는 기상청의 예보(실제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에 우산을 쓴 채로 연지고개를 넘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전면사무소에서 1km남짓 떨어진 (중기마을)버스정류장(49번 지방도가 지나간다)까지는 산악회 버스로 이동했다.

 길을 나서기 전 용담호부터 가슴에 담는다. 10구간에서의 첫 만남 이후 늘 함께 걸어온 호수를 더 이상은 만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2001년에 완공된 용담호(龍潭湖)’는 진안군의 1 5면을 수몰시키며 만들어진 거대한 담수호이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라는 크기만큼이나 보여주는 경관 또한 빼어나다. 그래선지 진안군에서는 진안고원 길이라는 트레일을 만들면서 5개 구간(10구간-14구간)을 용담호를 옆에 끼고 걷을 수 있도록 길을 냈다.

 10 : 30. ‘중기길을 따라 산골짜기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 양옆으로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은행나무가 멋진 구간이다. 용담호의 완공시기와 맞물려 심어졌음인지 나무의 굵기도 지난 세월만큼이나 풍성해졌다. 하나 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던 비가 언제부턴가 보슬비로 변해있다.

 10 : 35. ‘상전 공설묘지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 연지고개를 넘어온 진안고원 길은 이곳을 지나 중기마을로 간다.

 이정표는 출발지(상전면사무소)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3.3km로 적었다. 내 앱은 현재 0.37km를 찍는다. 그러니 폭우를 핑계 삼아 3km를 단축하고 있는 셈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산자락에 들어붙듯이 다가가더니 뭔가를 따느라 열중한다. 사진작가이신 도반은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느라 여념이 없다. 걷는 것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그곳에는 복분자가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이십여 년을 이어온 산행, 집사람의 무릎이 시원찮아진 이후로는 트레킹 위주로 매 주말 집을 나선다. 그게 삼십 년에 가까워졌지만 이번 구간처럼 복분자가 많은 것은 처음이다. 일부러 기른다고(실제 내 고향인 순창에서는 복분자를 재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길가 산비탈이 온통 복분자 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10 : 45. 길은 다시 둘로 나뉜다. 오른쪽은 임도. 고원길은 중기마을이 위치한 왼쪽으로 간다. 하지만 마을 구경이 별로인 사람이라면 그냥 임도를 따라가도 된다. 이럴 경우 코스도 300m쯤 단축된다.

 10 : 48. ‘중기마을(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9.3km/ 상전면사무소 4.1km)’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갈현리가 통째로 용담댐에 수몰되면서 새로 조성된 마을이다. 좁다란 산골짜기에서 20세대, 38명이 옹기종기 살아가는 전형적인 산골마을로, ‘중기라는 지명은 상전면의 중앙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중터라 하다가 한자음으로 고치면서 중기(中基)’가 되었다.

 중기 마을회관(경로당). 경로당 그린리모델링 사업이라도 마쳤는지 산뜻하게 단장되어 있다. 고령을 넘어서 초고령 사회로 변한 시골은 요즘 어르신들의 복지 증진과 환경 보호가 최대 화두가 되었다.

 중기마을은 경주 김씨 집성촌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상서공파 중기문중의 제각이 커다랗게 지어져 있었다.

 10 : 53. 제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나온다. 그러자 아까 마을 입구에서 헤어졌던 임도와 다시 만난다.

 임도 안내판. 갈현리(상전면) ‘중기마을과 물곡리(진안읍) ‘상도치마을을 잇는 3.5km 길이의 임도란다.

 이즈음 만난 경고판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임도에 건축 잔재물이나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불법 투기자를 신고하면 상금까지 지급한단다. 불법 투기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면 저런 경고판까지 붙여 놓았겠는가.

 임도치고는 오르막의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다. 정점인 도치재의 높이는 393m. 반면에 임도 초입인 중기마을은 294m에 불과하다. 1.1km쯤 걸으면서 고도를 100m나 높여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11 : 13. 임도로 들어선지 22. ‘도치고개에 올라서니 이정표(진안만남쉼터 7.8km/ 상전면사무소 5.6km)가 반긴다. 멀리 금남호남정맥의 성수산(聖壽山 1059.2m)에서 내려온 산줄기에 속한 안부로, 고갯마루에는 국가지점번호 표지목과 벤치도 설치되어 있었다. 걷기 여행자들을 위한 쉼터인 모양이다.

 하늘색 마름모꼴 모자를 쓰고 있는 이정표가 이곳이 14구간의 완주 인증지점임을 알려준다.

 비 때문에 곧바로 하산을 시작한다. 오늘은 임도를 걷다가 쓰러져 있는 나무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집중호우’. 올해 장마의 특징이라고 했다. 어느 한 지점을 target으로 삼아 집중적으로 쏟아 붓는다는 것이다. 그 집중호우가 이곳 진안도 때리고 지나갔다는 얘기일 것이다.

 길은 무척 곱다. 포장과 비포장이 번갈아 나타나지만, 잔디밭으로 이루어진 비포장 구간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숲이 우거진 탓에 조망은 일절 없다고 보면 되겠다.

 11 : 27. 작은 오름 끝에 또 다른 고갯마루(363m) 올라섰다. 이정표(진안만남쉼터 6.8km/ 상전면사무소 6.6km)는 이곳이 14구간(진안천물길)의 중간쯤 되는 지점임을 알려준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임도안내판이 얼굴을 내민다. 이런 안내판은 잠시 후 하나가 더 나온다. 하지만 걷는데 하등의 도움도 되지 못하기에 그냥 지나쳐버리기로 했다. 지도에 현재 위치라도 표시해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11 : 39. ‘상도치(上道峙)’ 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물곡리(物谷里)’를 구성하는 5개 행정부락(원물곡·궁동·종평·상도치·하도치) 중 하나로 아까 지나온 중기마을처럼 이곳 역시 산골짜기로 파고든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이틀 후면 일 년 중 가장 무덥다는 대서(大暑)’. 그런데도 길가 자두나무는 아직도 파릇파릇한 열매를 매달고 있다. 홍천에 있는 내 농장에서는 일주일 전에 이미 자두 수확을 끝냈는데도 말이다. 지대가 높은 만큼 철도 늦게 찾아오나 보다.

 11 : 43 - 12 : 02. 마을에 들어서자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길손을 맞아준다. 마을의 신목(神木)으로 옛날에는 이곳에서 정월 대보름날에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하나 더, 빗줄기가 거세져 당산나무 근처 비닐하우스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산골마을의 정적을 깨뜨렸나 보다. 할머니 한 분이 내다보더니 뭐 볼게 있다고 이런 비까지 맞아가며 찾아왔냐고 혀까지 차신다.

 어른의 몸통 둘을 합쳐도 모자랄 만큼 굵은 느티나무 아래에 당산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낭당(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을 쌓고 제단까지 만들어 놓았다.

▼ 12 : 06. 잠시 후 본마을로 들어선다상도치(上道峙)의 옛 이름은 웃되재’, ‘되재의 웃뜸(윗마을의 방언정도로 여기면 되겠다예전에 진안읍에서 마을로 가려면 빠른 길이 되재를 넘어야 했기에 마을을 되재라 부르다가 뒤에 한자어로 도치(道峙)라 부르게 되었다.

 상도치 마을회관. 중기마을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12 : 09. 마을을 빠져나와 2차선 도로인 물곡로로 내려선다. 이어서 100m 조금 못되게 이 길을 따라간다.

 이후부터는 내오천(머우내)’ 둑길을 따라간다.

 머우내의 물줄기가 제법 사납다. ‘양동이로 쏟아 붓다는 표현이 떠오를 정도로 거세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그나마 빨리 그쳤기에 저 정도일 것이다.

 상도치 들녘. 상도치는 동쪽 초승봉과 서쪽 우제산 사이의 충적지에 위치한다. 오천리·죽산리·구룡리·물곡리에서 흘러내린 머우내(오천)가 마을 앞으로 휘감아 흐르면서 마을이 들어설만한 충적지를 만들었다.

 12 : 22. ‘하도치교(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4.4km/ 상전면사무소 9.0km)’에서 아까 헤어졌던 물곡로를 다시 만났다.

 하도치 마을회관과 버스정류장. 다리 근처에 위치한 하도치(下道峙)’ 마을은 스치듯 지나친다.

 진안천에 합류되기 직전의 내오천(內梧川, 머우내)’. ‘오천리는 마을 앞으로 하천이 흐르고 그 가장자리에 머우나무(머귀나무, )가 많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하천이 머우내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때 마을이 그 바깥쪽이 되므로 외오천이라고 하고 그 안쪽을 내오천이라 했다.

 이후부터는 물곡로를 따라간다. 교통량은 많지 않지만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니 안전에 유의해가며 걸어야 한다.

 내오천과 진안천이 합류되는 곳에는 충적평야가 드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두 하천이 실어온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삼각주(三角洲, delta)’일 것이다.

 12 : 28. ‘도치교를 건너면 하도교차로(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3.9km/ 상전면사무소 9.5km)’. 고원길은 교차로 못미처에서 180도로 방향을 틀어 진안천의 둑길로 내려선다.

 다리(도치교)에서 내려다본 진안천(鎭安川)’. 진안읍 반월리에서 발원하여 단양리·군하리·군상리·운산리·갈현리를 거쳐 용담호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요 아래에서 내오천과 합쳐진다.

 이후부터는 진안천의 둑길을 탄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느티나무가 울창하게 가지를 뻗어 한여름 뙤약볕에도 걱정 없겠다.

 12 : 34. 콧노래 흥얼거리며 잠시 걸으면 운산인공습지에 이른다. 진안읍을 가로질러 용담호로 흘러드는 진안천 주변 부지 57490에 조성된 자연공원이다. 습지로 이루어진 공원에는 수질정화식물인 꽃창포, 억새, 붓꽃, 수크령 등 다양한 수생식물이 식재되어 있다.

 탐방로는 습지의 양옆으로 나있다. 마을 내키는 대로 골라잡아 반대편으로 가면 된다는 얘기다. 아니 맨발산책로도 만들어놓았으니 힐링 삼아 한번쯤 걸어볼 일이다.

 인공습지(人工濕地)’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자연습지의 특성을 설계에 반영 및 시공하여 운영하는 습지를 말한다. 그래선지 침강지나 생태연못 말고도, 깊은 습지와 얕은 습지 거기다 수평 지하흐름 습지까지 그 형태도 다양했다. 개개의 습지에는 꽃창포와 물억새, 수크렁 등 각종 수질정화식물들이 자라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탐방객들을 위한 시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관람 데크가 놓여있는가 하면, 징검다리가 습지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자연석을 그것도 자연스럽게 휘는 모양새로 놓아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물방울을 형상화 한 조형물도 눈에 띈다. ‘수몰의 아픔과 노력으로 충남과 전북의 생명수를 지키고 있는 가치를 세상에 알리고, ‘버려진 땅(수몰)’에서 생명의 땅으로 거듭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인공습지의 공정과 조감도를 담은 안내판.

 12 : 50. ‘운산인공습지를 빠져나온다. 습지를 횡단하는데 16분이나 걸렸다면 그 규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공습지와의 경계를 나누는 수로(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2.8km/ 상전면사무소 10.6km)를 건너자 ‘cafe 카요코코가 잠시 쉬었다 가란다. 공간도 넓은데다 뷰 맛집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젊은이들의 발길이 불어났다는 곳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연꽃단지가 반긴다. 조금 전 둘러봤던 운산인공습지의 조감도에는 없었던 시설인데, 엄청나게 넓은 연못에서 크고 탐스런 연꽃이 꽃망울을 활짝 열고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가 타고 나왔다는 연꽃이 저만큼이나 예뻤을까?

 그런 연꽃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없음은 흠이라 하겠다. 더 가까이서, 특히 위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관람데크나 관망대를 만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다른 인공습지. 이곳도 역시 운산인공습지의 조감도에는 없었다.

 13 : 04. 공공하수처리장(이정표 : 진안만남쉼터 2.2km/ 상전면사무소 11.2km)과 진안천교의 교각 아래를 지나 진안 읍내로 들어간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사위가 밝아지면서 주변 풍광이 또렷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장마까지 물러가지는 않은 듯 부귀산은 아직도 구름 속에 잠겨 있다.

 13 : 07. 진안교육지원청 앞에서는 인도교를 이용해 진안천을 건넌다. 그리고는 천변에 걸치듯이 내놓은 인도를 따라 진안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진안읍은 한마디로 잘 가꾸어졌다는 느낌이다. 도시 전체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거기다 도로는 온통 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국회의장을 배출한 고장답다고나 할까?

 진안 인삼이 세계가 인정하는 고려인삼의 원조라는 넉살이 낯설지 않음은 왜일까? 그동안 진안고원길을 걸어오면서 진안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그만큼 더 가까워졌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13 : 16. ‘시장2를 지키고 있는 저 조형물은 대체 무엇을 형상화한 것일까. 지나가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모르겠다며 마이산을 닮았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가버린다.

 요즘 시골은 젊은이들이 귀하다고 했다. 지자체들마다 그네들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이유다.  청년 몰도 그런 절박함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13 : 24. 고원길에서 잠시 벗어나 진안향교에 들렀다. ‘시장교를 건넌 다음 중앙로를 따라 잠시 올라가면 진안향교의 입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향교는 문이 닫혀있었고, 볼거리에 목말라하는 나그네는 아쉬운 발걸음 돌릴 수밖에 없었다. 후문 쪽으로 가서 담장너머로 살짝 엿본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진안향교(鎭安鄕校, 전북 문화재자료) 1414(태종 14)에 창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1(선조 34) 중건했고, 1636(인조 14)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번안당(番安堂서재(書齋) 등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五聖), 송조4(宋朝四賢), 우리나라 18(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3 : 26. 향교를 빠져나오자 상촌천(桑村川)’이 반긴다. 진안읍 군상리에서 발원하여 중앙동에서 진안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상촌(桑村)’이란 뽕나무가 많은 마을 사이를 흐른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kakaomap에는 상림천으로 표기되어 있다.

 13 : 28. 하류 쪽으로 나오자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하천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삼지교(이정표 : 진안만남쉼처 0.7km/ 상전면사무소 12.7km)’라는 다리를 놓았다. 이름처럼 다리를 세 지점으로 연결시키는데, 이게 만만찮은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다리 난간을 꽃으로 장식했는가하면 중앙에는 잘생긴 팔각정까지 들어앉혀 멋스러움을 더했다.

 삼지교를 건넌 다음에는 진안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13 : 32. 몇 걸음 더 걷자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길을 막고 있는 바위벼랑에 걸치듯이, 그것도 왔다갔다 갈 지()’자를 써가며 계단을 놓았다.

 13 : 34. 계단을 오르면 우화정(羽化亭)’이 맞는다. 우화산(향토문화대전은 월랑산으로 적는다)의 남쪽 기슭 바위절벽에 걸터앉은 정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 정자가 현재 위치에서 서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우화산 산등성이 너머 암벽 아래에 위치한다고 했다. 그게 퇴락하자 1921년 지역 유지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했단다. 1998년에 진안군에서 다시 중수하였다. 하나 더. 기암절벽과 그 사이의 초목이 어우러지는 경관이 매우 빼어나 월랑팔경(月浪八景)의 하나로 꼽힌다.

 안내판은 이 일대를 우화산 일원 유적군(진안군 향토문화유산 2)’로 적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화정에 얽힌 전설을 전해준다.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글 읽기에 정성을 다하며 동네사람들을 잘 보살펴주던 한 홀아비 선비가 칼바위에 앉아 손을 씻고 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우뢰와 함께 하늘에서 어여쁜 선녀가 내려와 선비와 함께 두 개의 날개로 둔갑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 했고, 이게 자연스레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정자가 걸터앉은 우화산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월랑산으로도 불리는지 akaomap는 이 일대를 월랑체육공원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13 : 35. 고원길은 정자 뒤쪽의 나무계단으로 올라가면서 이어진다.

 13 : 37. 계단은 암각서가 즐비한 바위절벽으로 인도해 준다. 옛날 우화정이 있었다는 가학대라는 곳이다.

 암벽에는 초서로 가학(駕鶴)’이라 새겨놓았다. 신선이 학을 타고 노니는 자리라는 뜻이니 우화정에서 얘기한 우화등선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또 다른 각자인 영모대(永慕臺)’는 이 지방 호족인 천안 전씨들이 자신들의 집안 내력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천안전씨 시조인 환성군이 백제 개국공신이란 내용과 후손들의 명단도 적어 놓았다. 하나 더. 광서 16(1889) 현감 김요협이 고을의 선비 전의호, 전재택과 이름을 연이어 각하고 썼다는 소서(小序)도 있다고 했으나 일일이 살펴볼 여유가 없어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계속해서 나무계단을 따른다. 이 계단은 산등성이를 넘도록 나있다. 트레킹 막바지에서 만나는 오르막이라 힘들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구간이다.

 오르는 게 싫은 사람들은 천변으로 내려가 진안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

 13 : 45. 산등성이를 넘으면 진안청소년수련관’. 14코스가 종료되는 진안만남쉼터는 수련관 바로 아래 들어서 있었다. 주차장과 캐노피(canopy) 그늘막이 전부인 단조로운 쉼터이다. 산자락에 세워놓은 두어 개의 기념탑과 시비가 그나마 쉼터라는 이름값을 해준다.

 일단은 ‘6.25참전호국영웅기념탑에 묵념을 드리고 본다. 우리가 웰빙·힐링을 외치며 전국의 산하를 누빌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저런 분들이 목숨을 바쳐 이 땅을 지켜주신 덕분이 아니겠는가. 하나 더. 이곳 진안과 인연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 옆의 진안사랑가과 맞은편의 진안예찬도 한번쯤 살펴볼 일이다.

 진안고원길 안내도 앞에서 7개월에 걸쳐 이어온 대장정(개인 사정으로 14개 구간 중 11개만 끝냈다)을 종료한다. 진안은 전체 면적의 76% 5 9406가 산림이자 평균 해발 400m의 고원지대이다. 산이 많아서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이 마음껏 굽이지는 곳이기도 하다.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 장수의 뜬봉샘에서 시작되는 금강의 물길이 진안을 흐르고 만경강 발원지인 밤샘도 진안 땅에 바짝 붙어 있다. 그런 진안의 매력을 제대로 살펴보고 싶다면 진안고원길을 걸어볼 것을 권한다. 진안고원길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210.2km의 걷기 여행길로, 100개의 마을과 40개의 고개를 지나는 총 14개 구간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1구간 마이산길, 9구간 운일암반일암 숲길, 11-1 용담 감동벼룻길 등 3개 구간은 전북 1000리 길에 포함돼 있기도 하다.

 오늘은 장마철 폭우를 핑계로 중기마을부터 시작했고, 덕분에 3시간에 끝마칠 수 있었다. 앱이 10.9km를 찍고 있으니 꽤 더디게 걸은 셈이다. 우산을 쓰고 걷느라 속도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귀경길 산악회의 배려로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의 진안마이산휴게소에 들를 수 있었다. 진안의 얼굴마담이라 할 수 있는 마이산(馬耳山)’이 가장 또렷이 조망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7개월 동안 진안의 방방곳곳을 둘러봤으니, 제대로 된 마이산도 한번쯤은 구경해야하지 않겠는가.

 주차장의 한쪽 귀퉁이 언덕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누군가 그랬다. ‘진안 여행의 절반은 마이산을 어디서 보느냐라고. 마이산의 남, 북부 구역에선 오히려 마이산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이산에 오르니 마이산이 안 보이더라라나? 그러니 좀 멀찌감치 떨어져서 봐야 한다. 이곳 진안휴게소 전망대는 그중에서도가 최고의 포인트로 알려진다.

 전망대에 오르자 포토죤이 반긴다. ‘I  you’. 마이산도 사랑하나 그보다는 당신을 더 사랑한다? 이 얼마나 새콤달콤한 사랑의 메시지인가.

 마이산을 조금 더 당겨보고 싶다면 팔각정을 추천한다. 정자에 오르면 마이산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다.

 마이산은 조선의 3대 왕 태종이 이 일대를 지나다 말()의 귀()와 같다며 붙여놓은 이름이다. 두 봉우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게 태종의 눈에는 말의 귀로 보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서쪽의 암마이봉은 687.4m, 동쪽의 수마이봉이 681.1m로 다소 낮다. 산은 전체가 거대한 암석 덩어리다. 특히 암마이봉의 타포니 지형이 인상적이다. 타포니는 풍화혈(風化穴)을 뜻하는 지질용어다. 풍화와 차별 침식 등으로 암석의 측면에 형성된 구멍을 일컫는다.

 

여행지 : 아르메니아  알라베르디, 아흐파트 수도원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알라베르디(Alaverdi) : 조지아와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공업도시로 한때 아르메니아 최대의 구리광산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폐광 수준이라고 한다. 이 지역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흐파트 수도원 사나힌 수도원이 있다.

 

 아르메니아에서의 첫 방문지는 아흐파트 수도원(Haghpat Monastery)’이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남쪽으로 50km쯤 떨어진 국경도시 사다클로(Sadakhlo)’ 바그라타쉔(Bagratashen)’에서 간단한 짐만 챙겨 출·입국 수속을 밟은 뒤 아르메니아로 넘어왔다(‘Debeda’강이 국경 노릇을 한다). 이어서 50분쯤 더 달려 알라베르디에 위치한 아흐파트 수도원을 찾았다. ! 아르메니아의 첫 인상은 무척 좋았다. 입국심사장에서 만난 젊은 관리로부터 불편하겠지만 즐겁고 행복한 시간 보내다 돌아가라는 인사를 들은 덕분이다. 뜻은 고사하고 읽기조차 불가능한 언어를 가진. 또 다른 낯선 나라에 발을 디디자마자 만난 호의가 그 나라의 대한 이미지를 확 굳혀버린 것이다.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 세반호수(세반 수도원), 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 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 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안내판은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아흐파트 사나힌 마을에 위치한 두 수도원(Monasteries of Haghpat and Sanahin)은 비잔틴 양식의 수도원으로, 10-13세기에 번성했던 키우리크 왕조의 중요 교육기관이었다. 특히 사나힌은 역사적으로 장식가와 서예가의 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두 수도원은 중세시대 아르메니아 종교건축의 걸작으로, 비잔틴 양식의 토대 위에 아르메니아 지역의 전통 건축양식을 가미한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건물배치도(규모가 큰 수도원이었음을 알려준다)

1. 성 십자가교회(St. N‘shan Church) 2. 성 십자가교회 집회실(St. N’shan Gavit) 3. 성 그레고리 교회(St. Grigor Church) 4. 성모 예배당(Astvatsatsin Chapel) 5. 회랑(Gallery & Academy) 6. 서적 보관소(Book depository) 7. 하마자습 교회(Hamazasp Church) 8. 종탑(Belfry) 9. 식당 및 사무실(Dining room & service building) 10. 우카난츠 가족묘(Ukanants family sepulcher)

 아흐파트 수도원은 10-13세기 사이 조성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수도원이다. 중세 바그라티(Bagrati) 왕조의 아쇼트 3(Ashot III)’ 때인 976년 왕비 호스로바누이시(Khosrovanuysh)의 후원으로 성 십자가교회(St. N’shan Church)‘를 짓기 시작해 숨바트 2(Sumbat )’ 때인 991년 완공했다. 이후 성 그리고르 교회 등의 건물들이 지어진다. 하지만 지진과 외세 침략으로 여러 번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걸 재건·확장하면서 원형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덕분에 아르메니아에서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수도원이 되었다. 이웃하고 있는 사나힌 수도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이다.

 수도원에서 가장 큰 건축물은 성 십자가를 봉헌하기 위해 지어진 본당 성 십자가 교회(St. N‘shan Church)’이다. ‘아쇼트 3의 아내인 호스로바누이쉬에 의해 976년 착공, ‘숨바트 1에 의해 991년 완공된 10세기 아르메니아 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외벽의 4개 기둥 위에 중앙 돔이 놓여있는데, 11세기와 12세기 한두 차례 소규모 복원작업이 있었으나 원래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단다.

 본당인 성 십자가교회의 파사드(facade)는 단조로운 편이었다. 예술품에 가까운 조각품들로 장식되어 있는 로마가톨릭의 교회들에 비하면 여염집 느낌이라고나 할까?

 대신 하치카르라 불리는 석조 십자가가 벽면을 비롯하여 교회의 내부와 외부에 가득했다. 그것이 예배의 중심을 이룬다고 했다.

 아르메니아의 교회는 조지아의 것과 흡사하다고 했다. 십자가 모양의 구조에 가운데에 둥근 모양의 탑이 솟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상황이 확 바뀐다. 조지아와는 달리 초입에 가비트(Gavit)’라고 하는 널따란 방이 있기 때문이다. 서양 교회의 나르텍스(Narthex)와 비슷한 개념으로, 교회 정면 입구와 본당 사이에 꾸며 놓은 공간을 말하는데 회의나 교습, 장례의식이 행해졌다고 한다.

 예배당은 그 안쪽에 따로 만들어져 있다. 문 하나를 더 지나야 이르게 된다.

 안으로 들어가면 통로 양쪽으로 나무 의자가 놓여 있다. 앞쪽 돔 아래로 제대가 있고, 그 안쪽에 하츠카르(Khachkar)’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역사가 9-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하츠카르는 아르메니아 특유의 십자가다. 십자가를 보석처럼 정교하게 가공하고 조각한 예술작품이다.

 하츠카르 뒤쪽 반원형의 벽면과 천정에는 색깔이 바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 가장 위쪽은 예수 그리스도의 차지다. 우주의 지배자로서 그리스도를 묘사한 듯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의 호위를 받으며 앉아 있다. 그 아래로 예수의 삶과 관련된 그림, 그리고 줄을 바꿔 십이사도로 여겨지는 성인들이 창을 중심으로 양쪽에 여섯 명씩 서있다. 그림은 흐릿한 게 전문가가 아니면 내용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 역시 전문가의 글을 많이 인용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 받는 성화가 걸려있는 장소는 세례 받는 장소라고 했다. 제대 앞 서쪽 벽면에는 최근에 그려진 성모자상도 걸려 있었다. 하지만 조지아처럼 많지는 않았다. 또한 조지아에서처럼 이콘에다 키스를 하거나 이콘을 향해 예배드리는 신자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가장 남쪽에 있는 성 그레고리 교회(St. Grigor Church)’ 1005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남쪽 벽에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있는 게 눈에 띈다. 벽의 끝까지 발이 땅에 닿지 않고 건너가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믿음에서라고 한다. 전설 같은 얘기에 귀가 솔깃해진 집사람도 도전해봤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맞다.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기에 찾아갔더니 행복은 그 다음 산 너머에 있더라고 하지 않았던가.

 파사드는 본당보다도 더 단조롭다. 그저 벽면에 뚫어놓은 작은 구멍(조명용 창)들이 눈길을 끈다고나 할까?

 내부는 더 단조로웠다.

 본당 왼쪽의 작은 건물은 성모의 예배당(St. Astvatsatsin)’이라고 했다.

 북쪽 끄트머리에는 본당의 측실이랄 수 있는 하마자습 교회(Hamazasp Church)’가 있다. ‘하마자습은 아흐파트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이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고 해서 안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다.

 본당(성 십자가교회)과 하마자습 교회 사이에 회랑이 있다. 이 회랑에 수도원에서 가장 유명한 하츠카르(Khachkar. 십자가가 새겨진 기념 비석)’가 있다. ‘1273년에 세운 구세주 하츠카르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십자가 죽음에 이르는 생애가 새겨져 있단다.

 그림은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했다. 아랫부분의 둥근모양은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세를 상징하고, 가운데 공간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그리고 맨 위는 하느님의 공간인 천국을 나타낸다. 하늘과 땅이 있는 것은 십자가위의 예수님이고 예수님 양 옆으로 제자들이 있다. 원래, 아르메니아의 하츠카르는 예수를 새기지 않는데 이 조각물에는 독특하게도 예수의 형상을 새겨 놓았다.

 회랑 뒤쪽 깊숙한 곳은 학술원이라고 했다. 뒤로 보이는 저 단에 서서 강의도 하고 음악 연주도 했단다. 지금도 그런 행사가 열리는지 알쏭달쏭한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experience the magic’ 마법을 경험해 보란다. ‘ARLOOPA(컴퓨터 생성 콘텐츠와 실제 환경을 실시간으로 완벽하게 결합하는 대화형 경험을 얘기하는 것일까?)’라는 어플로 스캔까지 떠보란다. 대체 뭘 전하고 싶은 것일까?

 서적 보관소는 1200년대 완벽하게 재건되었다고 했다. 도서관의 땅바닥에는 커다란 항아리들이 묻혀 있었다. 구세주 하츠카르와 함께 이 항아리는 다른 수도원에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제대로 관리가 안 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 항아리는 원래 와인과 유제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외침 때는 양피지에 기록된 아르메니아의 기록물을 은폐하는 곳으로 쓰였다고 한다. 때문에 습도와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 지붕을 제외하고 모든 부분을 흙으로 덮어 놓았단다.

 교회는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했다. 이를 천장을 뚫어 해결했는데, 세련된 기하학적 무늬 조각이 놀랍다. ‘예르디크(yerdik, 연기가 나가도록 지붕에 낸 구멍)’라고 하는데 이 구멍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은 물론 내부의 공기를 환기시키는 역할도 했단다.

 십자가가 없는 저 건물은 빵을 굽고 밥을 먹던 식당이라고 한다. 1248년에 지어졌단다.

 안내도는 요 어림을 우카난츠 가족묘(Ukanants family sepulcher)’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그래선지 무덤과 비석들이 많이 보인다.

 요것도 하츠카르(Khachkar)? 이렇듯 수도원은 건물 안팎에 돌을 새겨서 만든 하치카르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하치카르를 파는 법도 이곳 아흐파트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참고로 하츠카르는 9-11 세기 바그라트 왕조(Bagratid Dynasty) 때 저런 돌에 십자가와 꽃문양을 새기는 아르메니아 전통양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수도원 뒤쪽으로 가면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가 드러난다. 건물의 지붕 아랫부분까지 흙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흙을 제거하지 않은 채로 건물을 지었는지. 아니면 일부러 흙을 채워 넣었는지는 몰라도 전문가들은 건물 내부의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적고 있었다.

 교회 북동쪽에 있는 3층짜리 종탑은 1245년에는 지어졌다. 하나 더. 아흐파트 수도원은 요새화된 대규모 수도원 단지였다. 당시 저 종탑은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루의 역할까지 수행했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고 했다. 맨 위가 원통형으로 솟아 끝이 뾰족하거나 돔양식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특징. 건물 중앙부는 별다른 장식 없이 직사각형 형태를 유지하며 좁고 긴 창문이 위치한단다.

 누군가는 아흐파트 수도원의 건축물을 장식 없이 단순 질박함 그 자체라고 적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스스로의 격을 갖고 있단다. 굵은 기둥, 묵직한 천장, 그러면서도 요소요소에 디테일이 살아있는 양각 조각은 육중함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나?

 사랑꾼인 집사람에게는 낯선 나라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모양이다. 앉으나 서나 카메라 앞에만 서면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오느라 여념이 없다.

 두 번째 방문지인 세반호수로 가는 도중 딜리잔 국립공원 부근에 있는 작은 고을에 들렀다. 화장실이 급한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의 배려였다.

 화장실이 급하지 않았던 나는 호수를 한 바퀴 돌아봤다. 호숫가를 따라 산책로를 내는 등 공원처럼 잘 꾸며 놓았다.

 호숫가 레스토랑의 벽면을 장식한 벽화. 그라피티의 수준을 넘어섰다.

 어느 카페 앞 조형물에서는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을 받아가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아르메니아는 사막 기후도 나타나는 건조한 지형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물 부족 국가가 아닌 그 반대이다. 나는 손바닥으로 떠서 마셔봤다. 특별한 맛은 없으나 청량해서 좋았다. 이곳 아르메니아처럼 어디에서나 안전하게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과연 몇 나라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