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56코스(장항도선장 입구 - 와석마을 노인회관)
여 행 일 : ‘24. 7. 13(토)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장항읍 및 마서면 일원
여행코스 : 장항도선장→장항송림산림욕장→솔리천교→옥남1리→백사마을→하소마을→와석마을(거리/시간 : 14.2km, 실제는 15.88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6코스를 걷는다. 8개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첫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천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장항 송림산림욕장과 매바위공원이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난이도는 별이 2개(전체 5개)로 분류된다.
▼ 들머리는 장항도선장 입구(충남 서천군 장항읍 신창리)
서천-공주고속도로 동서천 IC에서 내려와 29번 국도를 타고 장항방면으로 달리다가 ‘하구둑사거리’에서 68번 지방도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장항읍에 이른다. 서해랑길(서천 56코스) 안내도는 장항도선장 입구, 육교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 ‘장항 도선장’을 출발, 서천의 서쪽 해안을 걸어 ‘송석리(마서면)’까지 가는 14.2km짜리 여정이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길을 산들바람까지 맞아가며 걸을 수 있는 멋진 구간으로, 서해바다의 작은 섬들이 그려내는 예쁜 풍경화는 덤이라 할 수 있다.
▼ 10 : 02. ‘장산로(68번 지방도)’를 따라 서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 길가 담벼락은 홍보의 장이다. 타일 벽면을 화선지삼아 금강하굿둑 철새도래지, 춘장대해수욕장, 문헌서원, 희리산자연휴양림 등 ‘서천팔경’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 넣었다.
▼ 10 : 12. ‘장항항(長項港)’은 스치듯 지나간다. 1938년 개항하여 장항공단의 배후시설로 활용되고 있는데, 이곳에도 ‘뜬다리부두(浮棧橋)’가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군산항처럼 일제가 농산물 침탈을 목적으로 만든 역사적 시설은 아닌 것 같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 4차선의 ‘장산로’ 왼쪽으로는 철로가 함께 간다. 장항역과 장항항·장항공단을 잇던 철로로 장항역이 새 역사로 이전하면서 열차 운행이 끊겼으나, 철로는 녹이 슨 채로 남아있었다. 열차 운행시간 안내판이나 차단기 등 옛 시설들도 간간히 눈에 띈다.
▼ 10 : 23. 발아래로 천리길을 내달려온 금강이 거센 기세로 서해와 몸을 섞는다. 그 연안에 아담한 공원(안내판은 ‘친수서설’이라고 적었다)이 조성되어 있었다.
▼ 뒤돌아본 ‘장항항’.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꽤 크다. 이웃한 군산항과 연계하는 ‘군장항 건설사업’이 진행된 결과일 것이다.
▼ 10 : 26. ‘LS메탈(주) 장항공장’ 앞을 지나간다. 우리에게 ‘장항제련소(長項製鍊所)’로 더 익숙한 곳으로, 1936년 일제가 국내의 비철금속(금·은·동 등) 수탈을 위해 세운 아픈 역사의 흔적이다.
▼ ‘LS메탈(이정표 : 종점 12.5km/ 시점 1.7km)’ 앞에서 도로를 벗어난다. 그리고 샛길인 ‘화송길’로 들어간다.
▼ 10 : 28. ‘LS메탈’ 맞은편에는 ‘후망산(後望山, 90.1m)’이 있다. ‘LS메탈’의 거대한 굴뚝이 올라앉은 ‘전망산’과 마주보는 모양새인데, 그 산등성이에 ‘장암진성(長巖鎭城)’이 들어앉아 있다.
▼ 조선 중종 9년(1514)에 쌓은 진성(鎭城)으로, 성벽은 해발 4∼43m 사이의 산 구릉과 해수면에 임해 석축으로 만들어졌다. 둘레는 640m(동서 190m, 남북 100m).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로 남벽과 북벽에 각각 1개소의 문지가 있단다. 현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 10 : 31. 68번 지방도(장산로)와 다시 만나 횡단보도를 건넌다.
▼ 잠시지만 ‘장산로 101번길’을 따라간다. 담양이나 곡성, 진안의 메타세쿼이아 길에는 못 미치지만 나름대로의 풍치를 자랑하는 멋진 구간이다.
▼ 10 : 34. 널찍한 도로를 벗어나 들길(이정표 : 종점 11.9km/ 시점 2.3km)로 들어선다. 갈대가 무성한 습지 사이로 오솔길이 나있다.
▼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는 옛날 해수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게 물길이 막히면서 자연스레 습지로 변했다. 습지 너머 ‘전망산(前望山, 56m)’이 자신도 보아달라며 고개를 내민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인 장항제련소의 거대한 굴뚝과 함께이다.
▼ 10 : 41. 불 꺼진 장항제련소의 굴뚝을 벗 삼아 걷기를 7분. 장항송림산림욕장의 널따란 (제4)주차장에 이른다.
▼ 서천 송림마을의 ‘솔바람 숲’은 1954년 장항농고 학생들(5회·6회)이 2년생 묘목을 식재하면서 조성됐다고 한다. 바닷가 모래날림과 바람으로부터 장항농고와 주변 마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단다. 현재 70년생 곰솔(해송) 약 12,000본과 그 아래서 자라고 있는 맥문동 등 초화류가 서해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생태공간을 이룬다. 2019년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됐다.
▼ 서천은 왜 ‘9경’을 고집하는 것일까? 다른 지자체들은 다들 ‘팔경’이라며 대표 볼거리 여덟 곳을 뽑는데도 말이다. 서천을 ‘구경’하고 ‘구미’당기는 ‘Good품’을 사가라는 홍보용 멘트인 ‘9경(景)·9미(味)·9품(品)’이라면 몰라도 따로 사용할 경우에는 ‘8경’으로 통일하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 오랜만에 서해랑길 고유의 제대로 된 이정표(종점 11.4km/ 시점 2.8km)를 만날 수 있었다. 시점 및 종점의 방향과 거리에 더해 근처 주요 기점까지 표시해 놓았다.
▼ 솔숲으로 들어선다. 6만평에 가까운 숲은 어른의 허리통만큼이나 굵직굵직한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있다. 5km쯤 된다는 산책로는 그런 숲속을 사통팔달로 헤집는다. 마음 내키는 길을 골라잡아 반대편으로 가면 된다는 얘기다. 그러다보면 소나무의 피톤치드와 서해의 선선한 바람과 아름다움이 함께 느껴지며 심신은 저절로 힐링이 된다. 때라도 잘 맞추면 맥문동의 보랏빛 향기에 젖어볼 수도 있다나?
▼ 10 : 49. 장항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른 ‘장항 스카이워크’. 높이 15미터의 공중 산책로인 스카이워크는 서천의 펄과 바다와 녹음을 한데 아우르는 전망대다. 드넓게 펼쳐지는 서해바다와 서천갯벌 풍광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고 발아래에 울창한 송림 숲이 있어 힐링을 선사한다. 또한 백제와 일본, 신라와 당나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벌인 동북아시아 최초의 국제전 역사 탐방도 겸할 수 있다.
▼ 스카이워크는 15m 높이의 아찔한 하늘길이다. 피톤치드 가득한 소나무 숲을 발아래에 두고 걷는다. 시선은 서천 바다의 멋진 풍경을 마주하면서 말이다.
▼ 하늘 길의 끄트머리에 이를 즈음 ‘기벌포 해전 전망대’라고 적힌 표지판과 맞닥뜨린다. 기벌포는 서천 남서쪽에 걸친 장항읍 일대의 옛 지명으로,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을 수호하던 관문이었다. 백제는 관문인 기벌포를 적군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했고, 결국에는 나라가 망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트린 신라와 당 연합군이 한반도 패권을 두고 반목해 벌인 최후의 해상 전투도 바로 여기서 펼쳐졌다.
▼ 250m 길이 스카이워크의 끝은 ‘전망대’.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가도록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망원경까지 설치해 탐방객들의 조망을 도와준다.
▼ 전망대에 서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금강하구와 서해바다, 그리고 근대 산업중흥을 이끌었던 장항제련소까지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군산시가지와 새만금방조제도 희미하나마 조망할 수 있었다.
▼ 시선을 비틀자 이번에는 작은 섬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유부도와 유자도, 그 오른쪽은 큰대죽섬과 작은대죽섬, 그리고 묵도일 것이다. 그밖에도 꽤 많은 섬들이 서해바다를 마치 돛단배라도 되는 양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 11 : 03. 스카이워크에서 내려서면 이번에는 ‘서천갯벌’이 맞아준다. 멸종위기 철새 17종과 각종 저서동물 181종이 서식하는 자연 생태계의 보고이다. 그런 점을 인정받아 2021년 전북 고창갯벌 등 3곳의 갯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참고로 ‘서천갯벌’은 ‘개발 대신 보전’을 택해 지켜낸 소중한 자산이다. 매립과 개발이냐, 생태와 보전이냐의 갈림길에서 서천은 생태와 보전을 택했다. 고심 끝에 내린 판단이 옳았음을 유네스코가 증명해 준 셈이다.
▼ 저 갯벌에는 동죽·맛조개·고동·소라·돌게 등 수많은 갯벌 생물이 서식한다고 했다. 조개갈퀴나 호미 등으로 표면을 걷어내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잡을 수 있어 아이들에게 더할 나위없는 즐거운 여름을 선사해 준단다. 갯벌에서 노닐고 있는 수많은 저 인파가 그 증거라 하겠다.
▼ 바닷가에서 올려다본 스카이워크. 15m나 되는 허공에 매달려 있지만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었다. 강화유리처럼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소재로 바닥을 깔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 11 : 06. 길은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소나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내놓은 산책로는 여간 고운 게 아니다. 보드라운 흙길(맨발로 걷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에다 방문객들이 소나무 숲에서 편안한 힐링 타임을 가질 수 있도록 벤치, 정자, 운동시설 등 각종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추었다.
▼ 장항송림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맥문동’이다. 19만㎡(5만 7500평)의 소나무 숲에 600만 본을 식재,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그런 자랑거리를 지자체에서 놓칠 리가 없다. 맥문동에 대한 설명으로도 모자라 권혁춘 시인의 시비까지 세워놓았다. 매년 8월말에서 9월초에는 ‘맥문동축제’도 열린다고 했다.
▼ 송림이 끝나갈 무렵, 잠시지만 해변을 따라 걷기도 한다. 그런데 갯벌을 두부 자르듯이 나눠가며 울타리처럼 쳐놓은 저 목책은 용도가 대체 뭘까?
▼ 솔숲에는 캠핑장도 들어서 있었다. ‘솔바람캠핑장’이라는데 ‘작은 도서관’도 눈에 띈다. 갯벌체험으로도 모자라 독서까지 즐길 수 있다니 이 아니 좋을 손가. 하지만 텐트가 듬성듬성 들어선 것이 입소문은 아직 덜 탄 모양이다.
▼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서천의 갯벌은 멸종위기 철새 17종과 각종 저서동물 181종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그래선지 둘레길의 이름까지도 ‘철새 나그네길’이란다.
▼ 11 : 19. 송림을 벗어나 ‘장항산단로’로 내려선다. 바닷가에 걸터앉은 ‘송림 캠프’에서 구수한 파전 냄새로 나그네를 홀리지만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초반부터 막걸리로 목을 축일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 대로를 따라 70m쯤 걷다가 왼쪽으로 난 골목(장항산단로11번길)로 들어선다. 이정표(종점 9.7km/ 시점 4.5km)가 길을 안내해 준다.
▼ 소서(小暑)가 지났다지만 초복(初伏)은 이틀 뒤에나 우리를 찾아온다. 삼복더위는 아직 시작도 안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기상이변은 삼복보다도 더 높이 수은주를 끌어올렸고, 들녘의 고추는 저렇게 빨갛게 익어간다.
▼ 11 : 24. 마을길을 지나 송림리의 북쪽 해안에 이른다.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간 송림리 곶(串)을 가로질러 왔다고 보면 되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솔리천 배수갑문’을 만난다.
▼ 곶(串)의 끄트머리로도 길이 나있었다. 널따란 물양장까지 갖춘 선착장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3층의 갯골어울림센터(어민회관인 듯)가 서천군의 개발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 ‘솔리천’이란다. 장항읍 창선리에서 발원해 송림리에서 서해로 합류되는 3.67km 길이의 지방하천이다. 솔리천은 수만 마리의 도요새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금강하구에 위치한 유부도와 함께 도요새 서식의 핵심지역으로 꼽힌다. 멸종위기종인 저어새, 노랑부리백로의 서식처이기도 하다.
▼ 11 : 32. 솔리천 방조제를 지나 옥남1리(‘솔리마을’일 것이다)로 들어섰다. 이어서 마을안길(옥남길)을 따라 북진한다. 참! 이 마을에 ‘장항 국가생태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고 했다. 시골인데도 여러 동의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이유일 것이다. 하나 더. ‘솔리(率里)’는 옛날에 부자가 계속해서 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 이후부터는 마을길과 들길을 번갈아가며 걷는다. 축사와 비닐하우스 등 전형적인 시골풍경이 연이어 펼쳐지는 구간이다.
▼ 녹음방초(綠陰芳草)의 계절. 그 푸름 속에서 빨갛고 노란 칸나가 꽃망울을 활짝 열었다. 저런 칸나 꽃밭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넓이도 관상용이라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넓었다. 구근 채취를 목적으로 재배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칸나의 구근은 지혈·소종·항암·항염에 효능이 있다고 했다. 류마티스관절염·학질·산증·각기·부스럼 등의 치료제로도 쓰인단다.
▼ ‘도깨비 가지’도 연보라 빛 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냈다. 청초한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으나, 실제는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식물로 농민들에게는 기피 대상이다.
▼ 저 망고수박 밭은 이번 장마의 피해? 아니면 수확을 끝낸 뒤 남은 이삭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군침이 도는 풍경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따 먹을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 이즈음 눈에 들어오는 건물 하나. 태양광 패널을 머리에 이고 있는데, 생김새가 자못 괴이하다. 마을에서 운영하고 있는 농·어촌체험 관련 시설일지도 모르겠다. 들녘과 바닷가를 함께 끼고 있으니 체험장으로 이만한 곳도 없지 않겠는가.
▼ 11 : 52. 옥남리에서 ‘남전리’로 넘어오자 특이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도로변에 주차장에서나 볼 법한 차량방지턱이 줄줄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 11 : 55. 잠시 후 백사마을로 들어선다. 법정 동리인 ‘남전리(南田里)’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로, 서쪽 바닷가에 모래가 많다고 해서 ‘백사장’ 또는 ‘백사정’ 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 서해랑길에서 약간 빗겨나 있는 바닷가로 나가봤다. ‘백사장(白沙場)’이란 별칭까지 갖고 있다면 그만한 볼거리가 있지 않겠는가. 맞다. 이곳은 고려 말기의 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백사정(白沙亭, 지금은 터만 남아있단다)이란 정자를 짓고 안빈낙도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하얀 모래밭에 우뚝 솟은 정자’라나?
▼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해안은 하얀 모래 대신 시커먼 갯벌만 가득했다. 옛날 이곳을 찾은 선비들이 바닷가를 거닐며 글을 읽고 시를 지었다고 했는데, 저런 갯벌을 보고 시를 지을만한 흥취가 났을까 싶다.
▼ 대신 갯벌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습지는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데크 탐방로라도 만든다면 탐방객들을 유치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 백사마을은 해안가와 맞닿은 나지막한 구릉지에 기대듯 들어서 있다. 서해랑길은 마을 뒤 구릉지(이정표 : 종점 6.4km/ 시점 7.8km)를 넘어간다. 바닷가로 길을 내는 게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 12 : 05. 고개를 넘은 서해랑길은 자연스레 바닷가로 향한다. kakaomap는 이곳을 ‘삼바골’로 적고 있었다. 농경지로 개간된 골짜기라고 보면 되겠다.
▼ 12 : 12. 그렇다고 무작정 진행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중간에 논두렁을 이용해 맞은편 산자락으로 들어붙어야하니까 말이다(해안길을 따로 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표지기(리본)을 잘 찾아가며 진행할 일이다.
▼ ‘앞장불산’의 능선은 임도를 따라 넘는다. 울창한 숲속으로 길이 나있어 오늘처럼 햇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에 제격인 구간이다.
▼ 12 : 21. 능선을 넘으면 ‘신창동(新艙洞)’이다. 법정 동리인 월포리(月浦里)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로 선창가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그래선지 바닷가를 따라 수산업체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 월포선착장으로 내려서서 해안길을 따라 북진한다.
▼ 이즈음 매바위공원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실컷 구경할 수 있다. 들쑥날쑥 하는 것이 리아스식 해안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 12 : 27 – 12 : 49. 하릴없는 배들이 낮잠을 자고 있는 ‘물양장(이정표 : 종점 5.1km/ 시점 9.1km)’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정자의 그늘에다 바다에서 냉장고 바람까지 불어오니 이만한 쉼터가 없었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간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느긋하게 쉬어갈 수 있었다.
▼ 12 : 49. 2차선의 ‘마서로’를 따라 100m남짓 걷다가 왼쪽으로 나뉘는 소로(같은 ‘마서로’이지만 1차선)로 들어선다.
▼ 12 : 51. ‘죽산배수갑문교’를 건너면 커다란 저수지가 얼굴을 내민다. 오른쪽에는 대규모 태양광발전단지가 들어서 있다.
▼ 염전 아니면 양식장이 있었을 법한 곳에 들어선 대규모 태양광발전소.
▼ 12 : 58. 하소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이정표(종점 4.4km/ 시점 9.8km)가 1km쯤 더 걸으면 매바위공원을 만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참고로 ‘하소마을’은 직진해야 만날 수 있다.
▼ 13 : 01. ‘하소길’을 만나자 이번에는 대하양식장이 길손을 맞는다.
▼ 단지를 이루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데, 개개의 방죽마다 수차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 13 : 07. 민가 몇이 듬성듬성 들어서있는 하소마을을 빠져나와 바닷가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해안길을 따라 매바위공원으로 간다. 참! ‘하소’라는 지명은 지형이 소처럼 생긴 ‘소매’ 아래에 위치한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했다.
▼ 13 : 12. 잠시 후 도착한 ‘하소마을 선착장’.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간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56코스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인 ‘매바위 공원’이 왼쪽에 있기 때문이다.
▼ ‘매바위’란 공원 이름은 공원 한가운데 있는 집채만 한 저 갯바위에서 따온 것이다. 매를 닮아 그렇게 부른다는데, 둥근 바위의 형상에서는 매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매를 꼭 닮았던 이 바위는 어느 해인가 태풍으로 목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 탐방로는 공원을 한 바퀴 빙 둘러 나있다. 공원은 이런 산책로 말고도 조형물과 구름다리, 정자, 나무 덱 등으로 잘 꾸며져 있다. 하지만 공원 이름을 적은 팻말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은 흠이라 하겠다. 차량용 내비게이션이나 포털사이트 전자지도로는 검색조차 되지 않는다. 지자체가 꾸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널리 알리는 것이란 걸 모르는 모양이다.
▼ 공원은 조망의 명소다.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갯벌과 함께 까마득한 갯벌 가운데로 이어지는 길이 드러난다. 이 일대의 갯벌은 죽산리 어민들이 관리하는 바지락·가무락·동죽·굴 양식장이라고 한다.
▼ 공원 앞 갯벌에는 칼바위, 먹섬, 한목 등의 이름을 가진 갯바위들이 늘어서 있다. 그 뒤로 길게 늘어진 섬은 ‘임가르매(가르마를 탄 것처럼 생겼다나?)’일 것이다. 하나 더. 이곳은 썰물 시간이 해지는 시간과 맞아떨어지는 날에 찾는 게 제일이라고 했다. 드넓은 갯벌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노을 풍경 한가운데로 들어가, 일몰과 겹치는 저 바위들을 배경으로 삼으면 ‘인생 사진’ 몇 장쯤은 너끈히 건질 수 있단다.
▼ 공원에는 매의 형상을 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없는 것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원을 조성한 취지를 감안했었더라면, 틀림없이 목이 떨어나가기 전의 형상으로 만들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 13 : 24. 선착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해안길을 따라 북진한다. 길가에 줄지어 늘어선 선박들이 이색적으로 다가오는 구간이다. 바다에 있어야 할 배들이 하나같이 뭍으로 올라와있는 것이다. 주민들 말로는 ‘금어기(禁漁期)’라서 발이 묶인 탓이라고 했다. 하나 더. 금어기가 해제되면 저 배들은 경운기에 이끌려 바다로 간다.
▼ 뒤돌아 본 ‘매바위 공원’. 선착장에서 갯벌로 나가는 길이 살짝 드러난다. 썰물 때의 뱃길이라고 보면 된다. 갯벌이 드러나 배를 띄울 수 없으니 경운기에 배를 싣고 갯벌 끝까지 가서 바다에 배를 띄우는 것이다.
▼ 13 : 36. 그렇게 한참을 걷자 또 다른 선착장(이정표 : 종점 2.2km/ 시점 12km)이 나온다.
▼ ‘아목섬(거위의 목처럼 생겼단다)’ 방향. 반짝이는 갯벌 한가운데로 잔돌이 깔린 길이 이어져 있다. 죽산리의 어민들은 바다가 멀리 물러나는 썰물 때는 경운기 뒤에 배를 싣고 이 길 끝까지 가서 바다에 배를 띄운다. 이게 또 이색적인 풍경으로 비쳐지면서 탐방객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킨다나? 맞다. 끝 간 데 없는 갯벌 위로 배를 싣고 바다로 가거나,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배를 싣고 나오는 경운기들의 행렬이 어디 그리 흔한 풍경이겠는가.
▼ 선착장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숲속으로 들어간다. 녹슨 어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조금은 어수선한 풍경을 보여준다.
▼ 13 : 41. 청해수산 앞에서 ‘마서로783번길’을 따라 하소마을로 간다. 죽산리에 속한 자연부락이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죽산교회’가 큼지막하게 들어서있다. 저 교회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이 하소마을, 왼쪽은 상소마을이라고 한다.
▼ 13 : 44. 하소마을 못미처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농로를 탄다. 죽산리 들녘을 벗어나 송석리의 드넓은 들녘으로 들어간다고 보면 되겠다.
▼ 13 : 54. 서해랑길은 ‘동지산 마을’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가 56코스 종점인 ‘와석마을’로 간다. 하지만 난 그보다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종점이 코앞인데 일부러 돌아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이다.
▼ 조상의 얼이 깃는 보호수라고 했다. 그래서 소중히 관리해오고 있단다. 그런데도 수령이 322년이라는 팽나무는 죽어 있었다.
▼ 14 : 02. 송석리 ‘와석마을’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마을에 넓은 바위가 누워있다고 해서 ‘눈돌’로 불리다가 한자화되면서 와석이 되었다. 서해랑길(서천 57코스) 안내도는 마을회관(눈돌노인회관) 맞은편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이 15.88km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주었다. 어느 현인은 친구를 일러, 힘들 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내 말을 편견 없이 끝까지 들어주고, 외롭고 쓸쓸할 때 나의 허전함을 채워주며, 내가 잘못할 땐 뼈아픈 충고도 가리지 않는, 늘 따뜻한 눈길로 내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집사람은 내게 둘도 없는 친구가 분명하다. 더불어 그런 친구를 둔 나는 분명 ‘성공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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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조지아 - 시그나기
여행일 : ‘23. 5. 31(수) - 6. 12(월)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①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 조지아(Georgia) : 코카서스 3국 중 하나로, 지정학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 남하정책의 접점이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이동 통로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외부세력과 문명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조지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다. 하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이 빚어낸 멋진 풍광으로 인해 ‘코카서스의 스위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③ 시그나기(Sighnaghi) : 시그나기는 과거 조지아에서 무역과 상업의 거점도시 역할을 해왔다. 18세기 초, 당시 왕이었던 헤라클리우스 2세(Heraclius)가 약탈을 일삼는 주변 부족들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쌓아 올리고 23개의 망루를 설치하면서 지금의 도시 형태가 갖춰졌다.
▼ 조지와의 첫 만남인 라고데키(Lagodekhi) 국경검문소.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을 뒤로 하고 기독교의 나라, 와인의 나라 조지아로 들어간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로 가는 길은 고단했다. 국경에서 차에 탄 사람은 짐을 다 가지고 내려야 한다(운전기사와 차량은 따로 검사와 절차를 밟는다). 승객은 비행기 탑승하듯 여권과 짐을 확인받아야 한다. 자신의 모든 짐을 자기가 챙겨가야 함은 물론이다. 아제르바이잔의 조그만 건물을 통과하자 눈앞에는 경사가 높은 좁은 계단길이 나타났다. 그곳을 각자 짐을 가지고 올라가면 그 위쪽에 조지아의 건물이 있다. 뜨거운 날씨에 짐을 들고 길을 올라가 다시 한 번 절차를 밟고 나서야 드디어 조지아에 입성했다.
▼ 이번 여행은 코카서스 3국(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여행사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마지막에 흑해 연안의 ‘바투미(조지아 제2의 도시)’도 들렀다. 그리고 튀르키예의 ‘리제’로 넘어가 이스탄불(환승)을 거쳐 귀국했다.
▼ ‘카헤티(Kakheti province)’ 지역의 ‘라고데키(Lagodekhi municipality)’에 있는 와인 저장고(wine cellar)부터 들른다. 와이너리 투어 겸 점심을 먹기 위해서이다. 점심은 빵 안에 야채를 넣은 므흐르바니, 소고기, 스프, 힌칼리(Khinkali)가 와인 1리터와 함께 제공된다. 참고로 힌칼리는 만두피가 두툼하고 육즙이 가득한 고기만두다. 육즙이 쏟아지지 않게 먹는 게 요령이기도 하다. 꼭지는 먹지 말라는 가이드의 조언도 있었으나 시험 삼아 먹어봤고, 다음부터는 가이드의 말을 무조건 믿기로 했다.
▼ ‘키라말라 와어너리(Chateau Kiramala)’쯤 되겠다. 유럽연합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조지아 농촌개발모델 강화사업’의 대상 사업장이고.
▼ 농장 안으로 실개천이 흐르고, 그 옆에 상당히 넓은 레스토랑이 있다. 조경도 사진 찍기 딱 좋게 꾸며놓았다.
▼ 저건 야외 테이블? 두셋이 단출하게 왔을 때 이용하면 딱 좋겠다.
▼ 식사를 마치고 지하의 와인 저장고로 들어가 10분 정도 조지아 전통 크베브리 양조법, 와인 양조에 사용되는 기구, 땅 속에 묻힌 크베브리 등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설명이 끝나면 입구에 차려진 시음대로 자리를 옮겨 시음에 들어간다. 투명한 노란빛을 띠는 화이트와 검은빛에 가까운 레드 등 주어지는 서너 종류의 와인은 하나같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향긋한 과일향과 꽃향이 풍부했고 상쾌하면서도 뒤로 갈수록 묵직한 맛을 내는 것이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 ‘크베브리(kvevri)’가 묻혀있는 와인 저장고.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크베브리 양조법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했다. 카헤티 지방에서는 사츠니헬리(압착기)에서 압착한 포도즙과 차차(포도껍질·포도줄기·씨앗)의 혼합물을 크베브리의 85%정도 채운다. 자연적으로 발효되도록 뚜껑을 뚫고 통을 저어주다가 3주가 지나 발효가 되었다싶으면 뚜껑을 점토나 실리콘으로 밀봉한 뒤 다시 6개월 정도 숙성시킨다. 이후 숙성된 포도주를 와인병이나 다른 항아리로 옮기는데, 항아리의 둥근 벽이 침전물이 바닥에 잘 가라앉도록 만들어주는 덕분에 따르기가 쉽다나?
▼ ‘크베브리’는 조지아 전통양조의 역사이다. 조지아 전역에서 크베브리 양조법에 의해 와인이 만들어지는데, 특히 이곳 카헤티지역은 대표적인 생산지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마당까지 따라 나온 크베브리 두 개가 손님을 배웅하고 있었다.
▼ 시그나기(Signagi)로 가는 길. 양 옆으로 포도농장이 줄을 잇는다. 맞다. 이곳 ‘카헤티(Kakhet)’는 조지아 와인을 상징한다. 전체 조지아 와인 생산량의 60% 이상이 생산되는 최대 와인 산지이며, 조지아 와인의 맛과 양조방식의 전통을 지켜온 곳이다. 카헤티의 와인산지는 알라자니라는 강을 끼고 형성되어있어, 영양분과 수분이 풍부하며 배수가 잘되는 토양에서 포도를 수확할 수 있다. 여기에 흑해의 따스한 바람과 시리아 고원의 햇빛이 더해져 조지아 와인만의 특별한 맛을 얻을 수 있다.
▼ 조지아에서의 첫 방문지는 ‘보드베(Bodbe) 수도원’이었다. 하지만 보드베 수도원은 홍수피해로 인한 진입로 보수공사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단다.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Nino)’가 묻혀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본다. 참로고 성녀 니노(St. Nino)는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래한 인물로 조지아 정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로 꼽힌다. 전설에 따르면 카파도키아 출신인 니노는 신의 계시를 받고 조지아로 건너와 죽어가는 아이를 소생시키고 병자를 낫게 하는 기적을 행한다. 이런 소문은 조지아 왕비에게까지 전달됐고 불치병을 앓고 있던 왕비는 니노에게 자신의 병을 치료해 주길 부탁한다. 니노의 기도로 병이 완치된 왕비는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고 니노는 기독교로 개종해 줄 것을 청한다. 선교를 위해 평생을 힘쓴 니노는 보드베 계곡으로 돌아와 은수자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후에 수백 명의 장정이 그녀의 유해를 므츠헤타(Mtskheta)로 옮기려 했지만 유해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이곳에 영원히 잠들게 됐다.
▼ 시그나기 관광의 시작과 끝은 버스주차장. 보드베수도원을 걸른 채 곧바로 시그나기로 향했다. 역사성(시그나기 주변지역은 역사지구로 지정되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으로 인해 카헤티(Kakheti)주의 관광명소가 된 인구 2,500명의 작은 마을이다.
▼ 시그나기는 주변 평야지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 전쟁 때 피난지로 삼기위해서다. 그러니 관광 포인트로 가기 위해서는 잠시지만 경사로를 올라가야 한다. 참고로 시그나기는 1762년에 피난용 성곽마을이 조성됐고,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후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였으나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마을의 규모가 줄어들어 농업 위주의 작은 마을로 퇴락했단다.
▼ ‘당나귀를 탄 왕진 의사(Doctor Benjamin)’. 이곳 출신의 천재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의 그림 속 인물을 조형물로 제작했다. 이밖에도 시그나기에는 그의 그림에서 나오는 장면들을 본뜬 조형물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 시청으로 올라가다 만난 분수. 크베브리(Qvervri) 항아리 위에서 귀여운 사슴이 노닐고 있다.
▼ ‘결혼등록소(예식장)’라고 했다. 24시간 이용이 가능한데, 공증인과 하객 앞에서 신랑신부가 사인을 하면 부모가 참석하지 않아도 결혼으로 인정한단다. 시그나기가 ‘사랑의 도시’가 된 주요 근원 중 하나라나?
▼ 앞마당에는 장미 꽃다발을 든 소녀상이 세워져 있었다. ‘백만 송이 장미’를 의미하는 조형물일지도 모르겠다. 일화에 의하면 이곳 출신의 천재화가 ‘니코 피로스마니’는 시그나기에 머물던 프랑스 여배우 ‘마르가리타’에게 첫눈에 반해 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 재산을 털어 100만 송이의 장미를 가득 실고 그녀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했단다. 그의 사랑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후 시그나기는 사랑의 도시가 되었다. 참고로 심수봉이 불러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백만 송이 장미’는 러시아의 국민가수인 ‘푸카초바’가 불러 대 히트를 쳤는데, 그 가사 주인공이 바로 ‘니코 피로스마니’라고 한다.
▼ 시그나기 시청사(Signagi Municipality administration). 결혼식 장소로도 유명하다니 ‘시티센터 웨딩하우스’쯤 되겠다. 아무튼 유명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곳 ‘시그나기’가 ‘사랑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결혼하려는 커플들이 몰려온다나? 이쯤에서 아재개그 하나. 결혼 등록비용은 우리 돈으로 7,500원. 오늘 7,500원 내고 결혼하고, 다음날 7.500원만 더 내면 이혼도 가능하단다.
▼ 시그나기 극장(Signagi theater)이라고 했다.
▼ 시그나기 박물관으로 올라가다 ‘니코 피로스마니(Niko Pirosmani, 1862–1918)’의 흉상을 만났다. 원초주의라 불리는 독특한 화풍으로 조지아의 전통과 자연, 사람들의 삶을 그린 화가다. 그는 정규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고, 상점 간판이나 초상화 등을 그려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사후에 유명해졌으며, 피카소와 같은 유명한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하나 더. 니코 피로스마니는 짝사랑의 노래 ‘백만송이 장미’의 주인공이다. 혹시 그가 살아생전에 유명한 화가였다면 여배우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 1959년 문을 연 ‘시그나기 박물관’은 리노베이션을 거쳐 2007년도에 현대적인 운영체계를 갖춘 뮤지움으로 재탄생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조지아의 5대 국립박물관에 들 정도로 내실 있는 박물관이다. 2009년에는 조지아 최초로 ‘피카소 전’이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카헤티 지역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물론이고, ‘니코 피로스마니’의 작품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시그나기 박물관 뜨락의 ‘깐지를 든 타마다’. 조지아에도 우리처럼 전통 건배 문화인 ‘타마다(Tamada)’가 있다. 타마다는 저녁식사 혹은 연회를 뜻하는 말로, 수르파(Surpa)에서 건배를 제의하는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이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에 만든 ‘깐지’라고 부르는 각배(角盃)를 들고 건배를 제의하는 타마다상이 발견됐는데, 이는 조지아가 와인의 발원지임을 알려주는 유물이라고 한다.
▼ 이밖에도 박물관 주변에는 여러 개의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 조지아 학생들은 언제보아도 명랑해 보인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함께 사진찍자는 주문이 심심찮게 들어온다.
▼ 박물관 뒤 테라스는 뛰어난 ‘뷰 포인트’이다. 주황색 주택 지붕과 멀리 코카서스산맥의 웅장함, 그 아래로 펼쳐지는 알라자니 평원의 풍경이 숨이 턱 멎을 정도로 아름답다.
▼ 옆은 ‘솔로몬 도다슈빌리(Solomon Dodashvili) 공원’으로 조지아의 역사를 보여주는 부조가 있다. ‘World War Ⅱ Memorial 기념공원’으로도 불린다고 했다. 부조는 포도농장에 일하는 농부들을 그리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러 나가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평화를 바라는 염원을 올리브나무와 비둘기로 표현하기도 했다.
▼ 전사의 벽‘에는 2차 세계대전 때 소련에 강제적으로 징집되어 전사한 사람들의 이름이 깨알같이 새겨져 있다. 그 옆의 글귀는 죽어가는 병사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라고 가이드가 귀띔해준다. 그루지아어를 알지 못하니 내용은 모르겠고, 대충 ‘Be Sad, mother I am dying give me the light of your love’쯤 되지 않을까?
▼ 소련에 대항하여 트빌리시에서 벌어졌던 시위 때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리는 ‘4월9일 비’라고 했다. 참고로 ‘4월 9일의 비극(트빌리시 대학살, 트빌리시 비극으로도 알려짐)’은 1989년 4월 9일 그루지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트빌리시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의 반-소비에트 시위는 소련군에 의해 해산되었고, 20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4월 9일은 ‘국가 통일의 날’로 기억되며, 조지아에서는 공휴일이라고 한다.
▼ ‘솔로몬 도다쉬빌리(Solomon Dodashvili, 1805-1836)’의 동상. 시그나기 태생의 문학가이자 역사학자, 계몽주의 철학자로 ‘니코 피로스마니’와 함께 시그나기의 자랑으로 여겨지는 사람이다.
▼ 공원에서 만난 또 다른 이의 흉상. 그루지아어를 모르니 누구인지는 모르겠고.
▼ ‘사랑의 도시’답게 결혼식을 막 끝내고 나온 신혼부부도 눈에 띈다. 신랑신부와 하객들이 공원에서 흥겨운 춤판을 벌이고 있었다.
▼ 고개 너머 성곽으로 가는 길. 시그나기는 광장을 중심에 두고 마을이 길쭉하게 형성되어 있다. 바삐 서두르는 게 미안할 정도로 거리는 잘 꾸며져 있었다. 집들은 예쁘고, 마당과 테라스에는 어김없이 꽃들이 자란다. 이런 길은 걷는 것 자체가 힐링이 된다.
▼ 경사진 박공지붕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동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방식인데, 이곳 코카서스도 동유럽 문화의 영향권에 놓여있지 않나 싶다.
▼ 잠시 후 성곽에 이른다. 시그나기는 4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이다. 약탈을 일삼은 주변 다케스탄 부족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1762년 헤라클리우스 2세(Heraclius)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한다. 성곽은 주변을 살피기 위해 23개나 되는 레이스 모양의 둥근 망루와 6개의 성문을 세웠다고 한다. ‘시그나기’라는 이름도 터키어에서 온 대피소, 피난처(Shelter)에서 유래되었단다.
▼ 마을을 아늑하게 에워싼 기다란 성벽과 파스텔 톤의 가옥들이 줄지어 선 삐뚤빼뚤한 골목들,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워 누운 돌담의 풍경은 언뜻 서유럽의 작은 성벽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관광지답게 골목에는 기념품 판매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소박한 공예품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사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아직은 여행의 초반. 가급적 짐을 줄여야만 한다.
▼ ‘성 조지교회(St. George basilica)’. 시그나기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1793년 아르메니아 교회로 만들어졌다. 1920년대 이후 조지아정교회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벽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성 스테판교회’는 찾아보지 못했다.
▼ 성문은 빈약하다는 느낌을 준다. 성문을 부수려고 공성기를 앞세워 쳐들어오는 적들을 과연 막아낼 수 있었을까? 이들에게 활을 쏘아야 할 병사들이 올라설만한 지지대가 안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 이젠 성벽의 위를 걸어볼 차례이다. 성벽의 길이는 4km쯤 되지만 공개된 구간이 한정돼 있으니 쉬엄쉬엄 걸어보면 되겠다.
▼ 성벽 길. 처마에 매달린 제비집처럼 성벽 상단에 잔도(棧道)를 매달아놓았다. 이런 길을 20분 정도 걷게 된다.
▼ 위태한 난간을 따라 성벽 위를 걷는다. 그러자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의 형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 성벽도 조망의 명소다. 알라자니 평원이 드넓게 펼쳐지는가 하면, 그 뒤로는 가프카스 산맥이 동서로 이어진다. 누군가는 저 풍경, 즉 카헤티 지방의 황홀한 전경을 피로스마니가 그린 동화적인 색채의 원천이라고 했다.
▼ 느긋하게 걷다보면 망루가 나타난다. 조망이 괜찮다는 가이드의 귀띔에 홀려 일단을 들어가고 본다.
▼ 나무 계단을 밟고 망루의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올라오는 게 편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보수를 안했는지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날 뿐만 아니라, 판자가 떨어져나간 곳이 눈에 띈다. 방심하다간 자칫 사고가 날 수도 있겠다는 얘기다.
▼ 망루에라도 오를라치면 능선을 따라 할머니의 가르마처럼 뻗어나간 성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 관광객들은 성곽을 따라 걸으며 발아래로 펼쳐지는 대평원과 멀리 코카서스 산맥을 바라본다. 주위의 풍경이 워낙 빼어나 걷다보면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 성곽 위는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마을 외곽을 둘러싼 성곽은 과거 평원과 마을을 가로막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단절됐던 것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면서 여행객들을 불러들인다. 그래서일까?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낀 성곽이 지극히 평화스러워 보이는 것은...
▼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자 우직한 자태로 서 있는 성문이 모습을 드러내고, 성벽 투어는 끝을 맺는다. 성곽 전체를 공개하지 않아 일부만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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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셰키 역사중심지와 칸의 궁전 그리고 아르메니아교회
여행일 : ‘23. 5. 31(수) - 6. 12(월)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①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 이란 및 러시아와 접한 카스피 해 연안의 국가.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데 경제의 상당 부분을 석유와 천연가스가 지탱하고 있어 ‘불의 나라’로 불린다. 동유럽권에 속해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까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 달리 아제르바이잔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에 서아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점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동유럽권으로 보는 이유는 19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영향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③ 셰키(Sheki) : 아제르바이잔 북서부에 위치한 인구 7만의 작은 도시. 기원전 6세기부터 존재했으며, 후에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가 되었다. 오늘날의 시가지는 1772년의 진흙 홍수로 인해 본래의 마을이 파괴된 이후 재건되었으며 높은 박공지붕을 얹은 집들이 이때 생겨났다. ‘칸의 궁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참고로 셰키라는 지명은 기원전 4세기에 흑해(黑海)에서 살던 사카족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됐다.
▼ 셰키에서의 첫 일정은 ‘알바니아교회’ 탐방이다. 교회는 키쉬(Kish)라는 작은 동네에서 내려 4륜구동의 승용차로 갈아타고 올라간다. 산자락에 있는 교회로 가는 길이 좁고 가파르기 때문이다. 조그만 하천을 건너고 마을을 지나면 이윽고 교회. ‘키쉬의 알바니아 교회(Kish Alban Mabadi)’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 코카서스 3국(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여정이다. 첫 번째로 들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수도인 바쿠와 고부스탄, 샤마흐, 셰키(‘쉐키’ 또는 ‘섀키’)를 방문하도록 일정이 짜여있다.
▼ 아치형 문을 지나면 단순하면서도 고색창연한 교회가 반긴다. 육면체 형태의 2층 건물에 원통형 3층이 얹혀 있는 모양새이다. 지붕은 6각형의 빨간 기와로 끝이 뾰족하게 만들어졌다. 참고로 교회의 역사는 20세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단다. 당시(BC 1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 카프카스 지역에 콜키스(서부) 왕국과 이베리아(중부) 왕국, 알바니아(동부) 왕국이 있었는데, 이곳에 있던 ‘알바니아 왕국’이 지금과는 달리 기독교를 믿었던 모양이다. 참! 여기서 말한 알바니아는 현재 발칸반도 서부에 있는 알바니아 공화국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도 알아두자.
▼ 뒷마당에서 바라본 교회. 장미꽃이 만발한 꽃밭에 둘러싸인 건물은 창이 무척 작았다. 춥고 바람이 많은 산악지역의 건물이 지니는 특징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알바니아 왕국은 1세기 무렵 기독교가 전해졌다고 한다. 타데우스(Thaddeus)의 제자인 엘리세우스(Eliseus)에 의해서였다. 이후 조지아정교 계열의 교회를 거쳐, 8세기경에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계열의 교회로 변한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신도가 없어지면서, 이 교회도 카프카스 알바니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외부 담벼락은 전시장으로 꾸몄다. 감실 모양의 작은 방을 만들고 그 안에 교회의 변천과정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키쉬의 알바니아 교회가 로마교회 계열의 바실리카 양식과 정교회 계열의 비잔틴 양식을 결합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나?
▼ 후기 중세시대 때 도자기를 굽던 가마라고 한다. 그 위에는 당시를 재현이라도 하려는 듯 도기들을 놓아두었다.
▼ 바닥의 우물처럼 파인 곳은 성직자들의 무덤이라고 했다.
▼ 출토된 인간의 유골도 전시해 놓았다. 안내판은 전기 중세시대의 무덤이라고 적고 있었다.
▼ 이젠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에 제대와 촛대모양의 십자가가 놓여있다. 천정의 돔과 제대 뒤로 난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빛줄기가 어둠을 밝혀준다.
▼ 천정의 돔과 샹들리에. 톨로베이트(tholobate, 둥근 천장을 떠받치는 하부 구조) 위 흰색 돔에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샹들리에에는 세 마리 새가 장식되어 있었다.
▼ 촛대 모양의 십자가.
▼ 교회 내부에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신도는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그러니 신도가 없는 교회가 박물관으로 바뀌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 종교용으로 사용하던 도기와 생활용 도기, 화폐, 장신구 등이 벽을 따라 전시되어 있다. 도기는 BC 2~3세기에 사용되던 것이란다.
▼ 놀랍게도 유리로 덮인 바닥에 유골이 놓여있었다. 키가 2m에 달하는 이 유골은 유전자가 노르웨이인과 일치한단다. 이 지역에 노르웨이인들이 최초로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이다. 그래선지 교회를 복원할 때 노르웨이에서 자금을 댔다고 한다.
▼ 안내판은 붙어있지 않았지만 요건 카펫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아니다. 이 건물은 10세기에는 조지아정교회 교회, 18세기에는 이슬람 사원, 19세기에는 기독교 교회 등 시대에 따라 용도가 바뀌었다고 했다. 그러니 아라베스크 문양이 남아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 이곳은 ‘알바니아교회’. 그러니 ‘코카서스 알바니아 건축양식’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빠듯해서 읽어보는 것까지는 사양했다.
▼ 밖으로 나오니 기념품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알바니아교회를 찾는 관광객들의 숫자가 만만찮다는 증거일 것이다.
▼ 돌아오는 길, ‘키쉬강’을 건너는데 차가 움직일 줄 모른다. 목장에서 노닐어야 할 소들이 다리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전기사는 이런 풍경에 익숙해져있는지 천하태평. 그저 ‘빨리빨리’가 일상화 되어있는 우리네만 툴툴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들르게 될 왕의 여름궁전은 5km나 떨어져 있고, 궁전의 문이 닫힌다는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 셰키 여행의 시작은 도심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칸의 여름궁전’이다. 궁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성벽을 통과해야만 한다. 방어용의 육중한 성곽을 예상했으나 막상 눈에 들어오는 성벽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성문(남·북문 중 북문일 것이다)이 더 초라한 것을 보면 외세의 침입이 별로 없었지 않나 싶다.
▼ 조금 더 들어가면 담장에 둘러싸인 궁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화려함의 극치라는 ‘칸의 여름궁전(Khan Xan Sarayi)’이다. 궁전은 1762년 칸의 집무실로 건축됐는데 주변에 겨울궁전과 가족 거주지, 하인의 집 등 건물 40여 채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여름궁전만 남아 있다.
▼ 앙증맞은 매표소. 더 귀여운 기념품판매소가 같은 건물에 들어서 있다.
▼ 이곳은 ‘셰키 역사중심지와 칸의 궁전(Historic Centre of Sheki with the Khan’s Palace)’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019년)되었다. 셰키 역사지구는 18세기 후반 건축된 전통적인 도시 형태를 유지해 왔으며 여러 문화가 조화된 건축적 앙상블이 뛰어난 예라고 한다. 1790년 건설된 도시 방어용 성채와 칸의 궁전, 공공건물과 상점, 장인의 공방, 실크 공장 및 협동조합건물, 개인 주거용 건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칸의 궁전’이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 ‘셰키 성채’의 지도도 눈에 띈다. 칸의 여름궁전을 중심으로, 주립미술관, 역사·민속박물관, 수공예가들의 집, 원형 사원, 섀배캐 공방 등이 들어서 있단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머릿속에 담아두고 투어를 시작해보자. 패키지여행을 따라온 나는 다음 방문지로 향하는 가이드의 꽁무니를 쫓기에 바빴지만...
▼ 매표소 뒤는 잔디광장, 담벼락에 셰키의 사계를 담은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입장권을 사는 동안 둘러보기에 딱 좋은 곳이다. 아니 꼭 살펴보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수도인 ‘바쿠’에서 북서쪽으로 325㎞ 떨어져 있는 셰키(Sheki). 카프카스산맥 남쪽 능선의 해발 675m에 포근하게 자리하고 있다. 작지도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인구 7만의 도시는 낮은 산과 짙은 녹음이 둘러싸고 있어 거대한 숲 속에 들어선 듯 평온하고 싱그럽다(사진은 겨울 풍경을 게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마을’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풍경이다.
▼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2층짜리 직사각형 건물. 즉 화려함의 극치라는 ‘칸의 여름궁전’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궁전은 규모는 작지만 극도의 화려함을 자랑한다. 건물의 정면은 청록색과 황토색, 하늘색의 기하학적 무늬와 꽃 그림을 표현한 타일로 덮여있고, 창문 양쪽의 입구와 테라스는 반짝이는 은빛 아치로 설계됐다. 2층짜리 저 목조건물을 못 등을 쓰지 않고 모든 재료를 하나하나 짜 맞추었다는 점이 특히 놀랍다.
▼ 궁전은 셰키의 왕인 ‘하지 샬랍(Haji Chalab: 1743~1755)’에 의해 건축이 시작되어, 1762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궁전은 2층이다. 하지만 두 층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아랫층이 공식행사를 위한 공간(왕의 서재와 응접실, 집무실)인 반면, 윗층은 왕과 가족들의 주거 공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다양한 그림도 주요 볼거리다. 아랫층에는 사냥과 전투장면 등의 역사기록화, 그리고 윗층에는 문학과 전설 속의 이야기가 프레스코화로 그려져 있다. 하나 더. 건물 보호를 위해 관람인원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순서를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 이제 ‘칸’이 되어볼 차례이다. 뒷짐을 지고 한껏 거스름을 피우며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벽면이 온통 다양한 색깔의 화려한 꽃과 나무, 화병, 기하학적 무늬로 덮여 있는 것이다. 하긴 프랑스의 문호 ‘알렉산드르 뒤마’도 ‘위대한 신이시여! 이 아름답고 역사적인 유적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주소서’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는데 어련하겠는가. 하나 더.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된다. 하지만 내가 본 광경이 너무 아름다웠기에 그 아쉬움을 인터넷에서 퍼온 사진으로 전해본다.
▼ 그중에서도 백미는 단연 ‘섀배캐'(Sebeke)’라 불리는 아름다운 문양의 창문이다. 화려한 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데, 어두운 실내에서 바라보는 창문의 화려함은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5500개나 된다는 호두나무 조각을 퍼즐처럼 끼워 만든 작고 세밀한 틀에 박혀 환상적인 정취를 연출한다.
▼ ‘섀배캐’는 제작하는 방법도 흥미롭다. 호두나무를 4~5㎝ 크기로 잘라 틀을 만들고, 거기에 왕궁을 짓기 위해 실크와 물물교환 해왔다는 베니스의 무라노산(産) 색유리를 끼워 완성한다. 문양에 따라 유리의 크기와 색깔이 제각각이어서 제작에 엄청난 정교함이 요구된단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 못을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한다.
▼ 건물 정면의 테라스 아래쪽으로는 중앙에 분수대까지 이어지는 돌길이 조성돼 있다. 그중 백미는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 건물 바로 앞에 궁전보다 200년이나 오래됐다는 플라타너스 두 그루가 우람하게 서 있다.
▼ 내 여행기의 모델은 오늘도 집사람이다. 궁전과의 앙상블이 맞지 않아 정원을 배경삼아 테라스에 앉혔지만...
▼ 성채를 빠져나가는 길, 길가 울타리는 홍보용으로 변했다. 셰키의 사계와 함께 주민들의 삶을 담은 사진들을 게시하고 있었다. 참고로 ‘셰키 역사지구’는 1790년대 건설된 도시 방어용 성채와 칸의 궁전, 공공건물과 상점, 장인의 공방, 실크 생산 공장과 협동조합 건물, 개인 주거용 건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지도는 ‘Round temple’로 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지었는지는 물론이고, 현재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 ‘칸의 여름궁전’ 투어는 남쪽 성문을 빠져나오면서 끝난다. 그런데 성벽이 북문과는 달리 육중하게 변해있다. 하지만 공성기기로 성문을 들이받는 영화에 익숙해서인지는 몰라도 성문은 여전히 초라했다. 참고로 궁전을 둘러싼 성벽은 궁전보다 늦게 완성되었다고 한다. 길이 1.2km의 성벽은 높이 4-6m에 두께가 2m란다.
▼ 두 번째 방문지는 ‘카라반 사라이(caravan sarai)’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실크로드가 지나던 나라였다. 그중 셰키는 바쿠와 트빌리시(조지아 수도), 현재의 러시아 데르벤트(Derbent)를 이으며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 역할을 했다. 그러니 실크로드 대상(카라반)이 쉬어가던 ‘카라반 사라이’가 있었을 것은 당연. 건물은 도적으로부터 상인과 물품을 보호하기 위해 성(城)처럼 지어졌다. 출입구도 저처럼 견고하게 만들어놓았다.
▼ 18-19세기,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은 ‘카라반세라이'(Karvansaray)’라 부르던 숙소에 머물렀다. 실크로드 무역이 성황을 이루던 당시는 이곳 셰키에 카라반사라이가 다섯 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젠 두 곳만 남아 있는데, 칸의 여름궁전에서 구불거리는 돌길을 따라 내려가면 그중 어퍼(Upper) 카라반사라이를 만날 수 있다.
▼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중앙에 분수대가 있는 어둠침침하고 둥근 공간이 나타난다. 오래 전, 셰키는 동서양의 정보와 물물교환의 허브이자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무역의 거점이었다. 그러니 짐을 풀고 여독을 풀기 위해 찾아온 많은 상인들이 이곳에서 입실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참고로 지역 영주들은 낙타가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인 30~40km마다 대상을 상대로 한 숙소를 만들어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면서, 대상들을 자신의 지역으로 통과하도록 했단다.
▼ 이어서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숙소의 안뜰이 모습을 드러낸다. 카라반사라이는 2층 구조로, 상인들은 위층에서 휴식을 취하고, 타고 온 낙타와 말, 가져온 물건은 아래층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 정원은 야자나무와 활엽수를 심어 그늘을 드리우도록 했다. 작은 연못 주위에는 의자를 놓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쉬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했다. 소품 삼아 진열해놓은 옛 물건들도 눈길을 끈다.
▼ 객실이 있는 2층부터 올라가본다. 객실의 수가 300개나 된다는데, 객실 문 앞과 복도가 모두 아치를 이루고 있다. 방 앞으로 길게 복도를 나있는데, 그 복도에서 중정(中庭)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1층 창고에 보관해놓은 물건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 2층에서의 조망. 직사각형의 정원을 2층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옛날, 고즈넉한 저 정원은 카라반들이 쌓인 노독을 푸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또한 식량과 물을 비롯한 여행 필수품을 공급받으며 다음 여정을 구상했을 게 분명하다.
▼ 객실은 텅 비어있다. 그렇다고 옛 영화까지 떠올리지 못할 이유야 되겠는가. 카라반사라이는 단순히 카라반들이 하룻밤 묵고 가는 장소가 아니었다. 각지의 카라반들이 서로 만나 문물을 교환하는 교역 장소이자 오가는 카라반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징세소(徵稅所) 역할을 했다. 또한 식량과 물을 비롯한 여행 필수품을 제공하거나 파는 공급소이기도 했다.
▼ 일부 객실은 복층으로 나누어지기도 했다. 용도는 모르겠지만... 하나 더. 지금까지 둘러본 카라반사라이는 20세기 들어 기차와 자동차가 보편화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숙박과 창고 기능에서 문화와 관광 기능으로 그 쓰임새도 바뀌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문화유산과 호텔로 카라반사라이를 찾는다.
▼ 카라반사라이는 지역경제를 지탱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오래전부터 카라반사라이 주변에 상가가 들어서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곳에는 기념품점과 ‘셰키 할바'(S, ki Halva)’라 부르는 과자를 만들어 파는 상점, 카페, 식당 등이 들어서 있었다. 특히 실크로드 거점도시답게 실크 카펫이 눈길을 끌었다.
▼ 셰키 투어의 마지막은 ‘재래시장’이다. 대형마트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에게는 다소 생소한 풍경. 즉 1990년대, 그것도 시골에서나 만날 수 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며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
▼ 주변 농가에서 길렀을 과일이나 채소 등 진열되어있는 상품만 볼 때는 우리네 재래시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 하지만 원산지 표시와 함께 가격표가 필수인 우리네와는 달리 이곳은 흥정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 시장은 여자들 세상이다. 물건을 팔려는 사람들이나 사려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자들이다. 그런데도 ‘히잡’을 쓰지 않는 등 놀랍게도 ‘이슬람 국가’의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제르바이잔에서 히잡을 쓰고 있는 여성들은 100% 타 이슬람 국가의 방문객들이라고 보면 된다던 어느 기사가 문득 떠오른다. 하지만 그들은 본인이 이슬람교라는 것에 강한 자각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혼전순결, 이슬람교인 혹은 이슬람교로 개종할 사람과의 결혼, 돼지고기 금식 등을 잘 따르고 있는 편이라고도 했다.
▼ 참! 셰키는 전통적으로 누에 번식과 누에고치 무역에 경제의 중점을 두었다고 했다. 뽕나무가 자라기에 유리한 기후 조건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양잠업이 발달했고, 실크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이를 활용한 실크카펫 직조와 자수 같은 직물 수공예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관련 공방과 상점이 늘어났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내가 둘러본 재래시장에는 그런 실크관련 제품들 보다는 화학섬유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고객들의 기호가 바뀌었나보다.
▼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저렴한 가격이었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을 외쳐오던 체리(cherry)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가 하면, 가격도 1kg에 1달러 밖에 되지 않는다. 덕분에 너도나도 한 보따리씩 사들고 하루 종일 먹어댈 수 있었다. 현지 화폐가 없어 가이드에게 선불을 부탁했음은 물론이다.
▼ 이동 중에 만난 푸줏간. 주렁주렁 매달린 고깃덩어리가 눈길을 끈다. 참! 실크산업의 중심지였던 셰키는 현재 농업과 목축으로 경제의 중심축이 옮겨졌다고 했다. 실크공장 한 곳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반면, 농산물과 축산물 가공공장은 성황을 이루는 중이란다.
▼ 맥주집도 눈에 띈다. 통닭과 불가분의 관계인 우리네 호프집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소시지를 안주로 내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토마토와 고추는 서브메뉴?
▼ 하룻밤을 머문 ‘셰키 팰리스호텔’. 4성급 호텔로 카라반사라이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넓은 욕실에 샤워부스와는 별도로 월풀 욕조가 설치되어 있는 게 특징. 지대가 높아서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이었다. 본관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가는 어려움이 옥의 티라고나 할까?
▼ 에필로그(epilogue) : 아제르바이잔 여행을 마치고 이제 조지아로 넘어간다. 여행사는 2박 3일의 짧은 일정에도 이곳저곳 열심히 안내해줬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 3대 성지’ 중 하나라는 ‘아테시카 사원’을 둘러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성스러운 불의 나라에 와서 불을 숭배하는 종교의 성지를 찾아보지 않았으니 어찌 서운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조로아스터교’는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의 예언자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가 창시했다. 불을 숭배해 ‘배화교’라고도 한다. 그 성지인 ‘아테시카 사원’은 수백 년 동안 조로아스터교 신도들 신앙의 중심이었다. 사원 중앙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아직도 타오르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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