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52코스(심포항-새창이 다리)
여 행 일 : ‘24. 5. 25(토)
소 재 지 : 전북 김제시 진봉면·만경읍·청하면 및 군산시 대야면 일원
여행코스 : 심포항→진봉산→망해사→국사봉→관기마을→화포마을→만경 낙조전망대→새창이다리(거리/시간 : 18.4km, 실제는 19.35km를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2코스를 걷는다. 5개로 이루어진 김제·군산 구간(51-55코스)의 두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시종일관 동진평야 및 만경평야의 들녘, 그리고 끝없이 펼쳐지는 만경강변의 갈대밭을 바라보며 걷는 여정이다. 망해사와 만경 낙조전망대가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그보다는 지평선이라는 이국적인 풍경에 더 감명을 받게 된다.
▼ 들머리는 심포항(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서해안고속도로 서김제 IC에서 내려와 711번 지방도를 4km쯤 달려 ‘만경읍’으로 온다. ‘만경여중’ 앞 로터리에서 10시 방향 702번 지방도로 옮겨 11km쯤 내려오면 ‘심포항’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 안내도는 포구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 만경강 하류의 ‘심포항’에서 시작해 ‘새창이 다리(옛 만경대교)’까지 18.4km를 걷는다. 들길과 산길, 그리고 방조제(새만금 간척사업 이후로는 의미가 사라졌다)를 걸으나 전체적으로는 만경강을 끼고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난이도는 별이 3개(5개 가운데)로 분류된다. 낮기는 하지만 산을 2개나 넘기 때문일 것이다.
▼ ‘심포항(深浦港)’은 동진강과 만경강을 양쪽에 낀 ‘진봉반도’의 끝자락. 그러니까 두 강이 합쳐지면서 서해바다와 마주하는 곳에 위치한 어항이다. 옛날에는 100여 척이 넘는 어선이 드나드는 큰 어항이었다고 하나, 새만금방조제 공사로 바다가 담수호로 변하면서 이젠 한적하기 짝이 없는 포구로 변해버렸다. 10척도 안 되는 꼬맹이 어선이 정박해있고, 분주히 오갈 어부들 대신 갈매기 몇 마리가 한가하게 날고 있다.
▼ 10 : 55. 강변도로(심포6길)을 따라 만경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도로변에는 꽤 많은 음식점들이 들어서있었다. 수많은 어선이 드나들던 심포항의 옛 영화를 소환시켜준다고나 할까?
▼ 강변에는 글자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이게 영어가 아닌 한글이어서 더 호감이 간다.
▼ 11 : 02. 잠시 후, 이정표(망해사 1.3km)가 이제 그만 ‘진봉산’으로 올라가란다. 이렇듯 52코스는 들길과 둑길에 둔치로도 모자라 산길까지 오르내리는 고단한 여정이다.
▼ 이때 ‘만경강’의 하구역이 눈에 들어온다. 새만금방조제로 가로막힌 강은 거대한 담수호로 변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만들어진 습지와 함께 사람들에게 멋진 눈요깃거리로 제공된다.
▼ ‘심포항’도 낙조로 유명했던가 보다. 하지만 막상 살펴보면 낙조에 대한 설명은 한마디도 없고, 심포항의 유래와 주변 갯벌 얘기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 ‘새만금 바람길’ 안내도도 눈에 띈다. 자연 생태와 농촌 풍경이 잘 어우러진 김제시 진봉면 일대의 옛 바닷가에 조성해놓은 10km 길이의 걷기 길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적과 관광지를 연계시켰는데, 새만금 간척사업이 완공되고 나서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새로운 대륙을 눈에 담는 즐거움도 함께 누릴 수 있다.
▼ ‘진봉산(進鳳山)’은 높이라고 해봐야 73.2m에 불과하다. 하지만 들머리의 해발이 1m이다보니 무시할 일은 아니다. 침목계단을 두어 곳이나 놓아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 하지만 숲길은 초입 구간을 빼놓고는 무척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이 경사까지 거의 없는데, 울창한 솔숲은 솔향기로는 부족하다며 피톤치드까지 듬뿍 선물해 준다. 덕분에 김제까지 내려오면서 쌓였던 피로가 순식간에 싹 날아가 버렸다.
▼ 11 : 14 – 11 : 16. 7km 전방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쫓아가느라 진봉산 정상은 어딘지도 모르고 지나쳤다. 그리고 3층 규모의 ‘진봉망해대’를 만나고 나서야 눈치 챘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 볼 수야 없는 노릇. 그냥 전망대로 올라가고 본다.
▼ 이곳에서도 글자 조형물을 만났다. 김제가 새만금의 중심도시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새만금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담수호를 배경으로 삼았다.
▼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망해대’라는 이름대로 서해바다(지금은 담수호로 변한)가 드넓게 펼쳐진다. 오늘은 해무로 시야가 흐리지만, 쾌청한 날에는 서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멀리 떠 있는 고깃배 등 바다 풍경과 만경평야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다.
▼ 11 : 18. 산에서 내려가면 담장에 둘러싸인 ‘남촌(南村) 곽경열(郭京烈, 1901-1968)’ 선생의 추모비를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애국투사로 정부로부터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은 분이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잠시 들러 감사의 묵념을 드리기로 했다.
▼ 1901년(고종 28) 요 아래 남상마을(진봉면 심포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5년 15세의 어린 나이에 항일 비밀결사대인 ‘대한광복회’에 가담해 활동을 시작했다. 친일 부호 처단, 일본 헌병소 무기탈취, 군자금 모집 등의 활발한 활약을 펼치다 체포되어 전주감옥에서 3년의 옥고를 치른다. 1929년 풀려났으나 일제의 고문으로 인해 병든 몸으로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다 세상을 떠났다.
▼ 11 : 19. 다시 길을 나선다. 오랜만에 만난 서해랑길 이정목이 벌써 1.6km나 걸어왔다고 알려준다(그러나 종점까지는 아직도 16.8km나 남았다). 아무튼 탐방로는 이곳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간다.
▼ ‘두곡서원(杜谷書院)’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다. 두곡서원은 봉호(鳳湖) 강원기(康元紀, 1423-1498)가 거처하던 곳에 지은 서원으로, 강원기 말고도 포은 정몽주와 난계 함부림을 함께 배향하고 있단다. 야은 길재 및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유풍을 크게 진작시킨 성리학자인데, 조선 태조 때 좌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만경현(지금의 진봉면 심포리)에 정착하면서 고려 때부터 이어오던 세 가지 폐단을 고쳐주었고, 지역 주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589년(선조 22년)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참고로 삼폐(三弊)란 봉화산 봉수대의 운영경비, 300필의 공마, 6,000편의 숫돌을 나라에 바치는데 따른 주민들의 고통이다. 이걸 그의 제자(당시 전라관찰사였던 李芝老)를 시켜 임금에게 청했고, 그 결과 말 기르는 것은 제주도로, 봉수대는 부안 계화도로, 그리고 숫돌 제작은 태인으로 옮겨가게 되었단다.
▼ ‘봉화산 숲길 안내도’도 눈에 띈다. 그런데 광활방조제에서 석치제방까지 이어지는 코스가 ‘새만금 바람길’과 중첩된다는 느낌이다. 바람길에 포함된 산자락(봉화산·진봉산·국사봉·나성산)에 나있는 숲길 구간을 이르는 브랜드이지 싶다.
▼ 11 : 20. 몇 걸음 걷지 않아 만나는 또 다른 삼거리에서는 오른쪽이다. 하지만 난 왼쪽으로 간다. 그리고 140m쯤 더 들어간 곳에서 ‘망해사(望海寺)’를 만났다. 671년(문무왕 11)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로, 왕조의 부침에 따라 성쇠를 거듭하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것을 1589년(선조 22년) 진묵 대사(震默大師)가 중창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낙서전·삼성각·종각·청조헌(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격인 ‘극락전’은 올해 4월에 불에 타고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 망해사는 깎은 듯이 세워진 기암절벽 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는 모양새이다. 진묵스님이 지었다는 ‘낙서전(樂西殿, 전라북도 기념물)’은 그 벼랑에 걸터앉았다. 스님이 낙서전을 짓고 기념으로 심었다는 ‘팽나무’ 두 그루를 벗 삼아. 하나 더. 매향비도 찾아볼 수 있다. 매향이란 1000년 뒤에 꺼낼 것을 기약하며 바닷물과 계곡수가 만나는 곳에 향나무를 묻어 복을 빌고 미륵불이 출연하기를 기원하는 불교 의식이다. 그 기원과 향을 묻은 자리를 기록한 비석이 ‘매향비’이다.
▼ ‘망해사’는 서해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망해사란 이름대로 서해바다 쪽으로 시야가 툭 트이는 덕분이다.
▼ 11 : 29. 망해사 입구로 되돌아와(11 : 26) 이번에는 서해랑길을 따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전망대에 이른다. ‘녹색명소 전망대’라는데 사진 찍기 딱 놓은 곳이라는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저 녹색 습지를 배경삼아 사진이라도 찍어보라는 모양이다.
▼ 이곳 역시 낙조의 명소로 알려진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일몰은 가히 일품이라고 했다.
▼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아예 강변으로 내려서버린다. 장마 때는 여전히 물길이 길을 넘나드는 곳이다. 이렇듯 52코스는 산길과 들길, 둑길, 둔치로도 모자라 심지어는 이런 강바닥까지 내려서서 걷는 게 특징이다.
▼ 길은 웃자란 갈대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그 길을 따라 늘어선 형형색색의 바람개비가 나그네의 발길을 인도해준다. 하나 더. 바닥에는 야자매트를 깔아놓았다. 습지의 최대 단점인 질퍽거림을 없애주었으니 그저 주변 풍광에 취해 걸어볼 일이다.
▼ 바람개비로 터널을 만들어놓기도 했다. ‘새만금 바람길’이란 브랜드에 걸맞는 조형물이라 하겠다.
▼ ‘갈대 숲길’의 끄트머리쯤에서 ‘전북천리길’의 스탬프보관함을 만났다. 자연생태계를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는 선에서 사람들이 트레킹을 할 수 있도록 조성해놓은 전북특별자치도의 걷기 여행길이다. 해안길·산들길·강변길·호수길 등으로 나뉘는 14개 시·군 44개 노선을 모두 합치면 405km쯤 된단다. ‘새만금바람길’도 그중 하나인 모양이다.
▼ 11 : 39. ‘전선포 제방’에 올라서자 닻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이곳에 포구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수준점(水準點)으로 여겨지는 시설도 눈에 띈다. 동진 들녘의 물길을 만경강으로 연결시키는 저 배수갑문과 관련된 시설이지 싶다.
▼ 만경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이곳은 고군산열도와 계화도가 가까이 있어 예로부터 어선의 닻을 내리던 항구였다. 왜구와 싸우기 위해 배(戰船)를 배치시키던 전략상 요충지이기도 하다. 봉화산 정상의 봉화대에서 보내오는 신호에 따라 군선으로 왜적을 물리치던 곳이라고 해서 ‘전선포(戰船浦)’라는 지명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1920년대 일본인들이 제방을 쌓고부터는 과거의 흔적이 사라져버렸다.
▼ 탐방로는 이제 둑길을 따라간다. 길게 뻗어나가는 제방을 가운데 놓고 농경지와 습지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옛 전선포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없을 정도로 그 범위가 넓다.
▼ 오른편으로는 동진평야가 펼쳐진다. 이웃하고 있는 만경평야와 함께 이국적인 풍광을 선사해주는 곳이다. 이곳이 아니면 우리나라 그 어디서도 지평선을 구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들녘이 누렇게 익어간다. 4주 전(2주 간격으로 서해랑길을 답사해오는데, 지난 51구간은 개인사정으로 참석을 못했다)만 해도 청보리가 바람에 살랑이던 들녘이 오늘은 황금빛으로 물들어있다.
▼ 왼쪽으로는 ‘만경강’이 흘러간다. 하지만 둑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옛날 이 둑의 아래는 강물이 아닌 바닷물이 넘실거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 11 : 44. 제방의 끄트머리에서 이번에는 ‘국사봉(61.3m)’으로 오른다. 참고로 이 능선에는 국사봉 말고도 나성산(60.9m)과 이성산(61.9m)이 있다.
▼ 산자락으로 들어서자마자 길이 나뉘고 있었다. ‘봉화산 숲길’ 이정표는 나성산(1.3km 전방)으로 올라가란다. 하지만 서해랑길 표식은 국사봉의 아랫도리를 헤집는 오솔길을 따르란다.
▼ 길은 국사봉과 나성산의 2부쯤 되는 산허리를 에돌며 나간다. 군인들의 경계근무지였던 숲길에는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니 철책은 거두어간지 오래고, 지금은 옛 초소만 폐허처럼 남았다. 리모델링해 놓는다면 걷기여행자들에게 좋은 볼거리 겸 배울거리가 되어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작은 오르내림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길은 가파른 경사지를 꿰뚫으며 나있다. 때문에 가끔은 위험스러워 보이는 구간도 지난다. 하지만 목제 또는 철제로 난간을 설치해 놓았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 11 : 56. 막바지에 이른 나성산 자락길은 그윽한 대나무 숲속을 지나 다시 한 번 강변으로 내려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고사(古沙)마을’ 갈림길(이정표 : 인향마을↑ 1.0km/ 고사마을→ 0.2km/ 전선포↓ 1.0km)을 지난다.
▼ 12 : 07. 탐방로는 ‘석치 배수갑문’이 수문장을 자처하는 둑길로 올라선다. ‘인향(仁香)마을’ 입구(12 : 02)를 거쳐서 왔다. 이정표(석소마을 1.2km/ 인향마을 0.5km)는 이곳이 ‘석치(石峙) 마을’로 연결되는 갈림길임을 알려준다.
▼ 이후부터는 ‘석치 제방’의 둑길을 따른다. 둑길은 시대를 뛰어넘는 두 간척지를 양 옆구리에 끼고 걷는 재미를 선사한다. 방조제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 들녘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진 간척지, 반면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왼쪽은 최근 만들어진 새만금간척지이다.
▼ ‘전선포 제방’처럼 이곳에서도 지평선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들녘의 이름은 ‘동진평야’에서 ‘만경평야’로 바뀐다. 호남정맥의 묵방산(538m)에서 갈라져 나온 ‘모악지맥(母岳支脈)’이 조금 전 지나온 나성산·국사봉으로 이어져 오는데, 이 산줄기가 동진강과 만경강의 수계를 나누기 때문이다. 하나 더. 조정래는 대하소설 ‘아리랑’의 첫 장에서 만경평야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광활한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게 외배미들’이라고 불렸다. 이곳이 김제 만경평야이며 호남평야의 한 축이다> 더 이상의 추가 설명이 필요 없는 완벽한 표현이라 하겠다. 참고로 ‘외배미’란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모두 한 배미로 툭 트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광활한 평야 한가운데에 서면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다.
▼ 만경강 습지는 아까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물줄기가 얼마나 멀찍이 물러났는지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 공자님은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이 오늘도 증명되었다. 난 보리짚이나 밀짚이 사료로 사용된다고 믿었고, 그 증거로 보리밭 사이사이 쌓여있는 곤포사일리지를 들었었다. 그런데 함께 걷던 젊은 도반이 이즈음 들녘에서 만나는 곤포사일리지 속에는 목초가 들었다는 것이다. 긴가민가했는데 지금 보니 들녘에 보리밭 말고도 목초지가 많이 있었고, 곤포사일리지는 그 둑에 쌓여있는 게 아닌가.
▼ 12 : 21. 제방 끄트머리에는 ‘석소(石所)마을’이 있었다. 옛날 질 좋은 숫돌이 나왔다는 마을로, 칼과 창을 가는 숫돌을 매년 5천 편씩이나 만들어 공물(貢物)로 바치던 역사적 유적지이기도 하다. 이로 인한 폐해가 커지자 아까 두곡서원 부분에서 얘기하던 강원기(康元紀)의 노력으로 숫돌 제작은 태인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 또 다시 이어지는 긴 제방. 초입에 ‘석소 배수갑문’이 있다. 안내판은 이곳을 ‘진봉 방조제’라 적고 있었다. 원래부터 김제는 호남평야의 중심을 이루는 넓은 평야지대였다. 일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식량 수탈의 목적으로 간척사업을 벌였고, 1924년 진봉방조제를 완공해 1,928ha의 농경지를 만들었다. 방조제는 크게 진봉지구와 심포지구로 나뉘는데, 이곳은 ‘고사리 지선’이라고 한다.
▼ 누렇게 익은 보리와 밀로 가득한 황금벌판에 하나의 점처럼 들어선 ‘연꽃 방죽’이 이색적이다.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연꽃의 꽃말은 순결과 청순한 마음이다. 또한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 고운 꽃을 피우기 때문에 물 밖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을 구원한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꽃으로 알려지며 나아가 어둠을 밝히는 빛과 극락정토를 상징한다. 하지만 저 논의 주인은 수확한 연뿌리나 연밥의 시세에 더 관심이 갈 것이다.
▼ 몸매가 부풀려진 만경강은 습지로도 부족했던지 울창한 숲까지 들어섰다. 옛날 바닷물이 들락거리던 때는 섬이었을 것이다.
▼ 12 : 31, 진행방향에 놓인 교회를 스쳐지나가면서 ‘관기마을’로 들어선다. 고사·인향·석치·석소·관기·평동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고사리’의 중심이자 진봉면의 관청소재지이기도 하다. ‘관기(館基)’는 조상의 선견지명이 빚어낸 지명이다. ‘관청의 터’라는 이름대로 일제강점기 옮긴 지서를 시작으로 다른 곳에 있던 행정관서가 모두 이곳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 교회 앞 서해랑길 이정표(종점까지 11.4km)가 이제 그만 ‘새만금바람길’과 헤어지란다. 바람길 이정표도 다른 방향인 ‘진봉면사무소’를 가리키고 있다.
▼ 이정표가 지시하는 ‘만경 낙조전망대’ 쪽으로 간다. 잠시지만 마을안길을 걷는다. 걷기 여행자들에게 길을 내준 주민들의 안정을 지켜주기 위해서 정숙보행이 필요한 구간이다.
▼ 마을을 벗어나자 이번에는 둑길이 기다린다. 수로(대덕제수문↔관기수문)의 둑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농로가 나있다. 수로는 꽤 컸다. 물가에서 졸고 있는 꼬맹이 어선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안내판은 이 수로를 ‘간사지 어업계’에서 관할하는 하천이라고 적고 있었다. 간사지란 간석지(干潟地)의 비표준어이다. 밀물 때에는 물속에 잠겨 있다가 썰물이 되어 바닷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갯벌을 말한다. 이게 간척사업으로 인해 들녘으로 변했고, 이때 만들어진 인공수로가 어업을 영유할 수 있을 정도로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 금주 월요일(20일)은 만물이 점차로 생장하여 가득 차게 된다는 ‘소만(小滿)’이었다. 그래선지 만경 들녘은 들일 나온 농부들로 분주했다.
▼ 농작물은 ‘파종-성장-수확’이라는 순환과정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저 모내기 현장은 삶이 시작되는 첫 단계이다. 하지만 또 다른 삶은 이미 막바지에 와 있었다. 얼마나 부지런한 농부였으면 노지 고추가 따 먹을 수 있을 만큼이나 자랐을까?
▼ 만경평야는 지평선이라는 단어의 참뜻을 알게 해줄 정도로 드넓다. 그것도 살짝살짝 고개를 내미는 구릉지 말고는 모두가 다 농경지다. 그래선지 시선이 옮겨가는 곳마다 수로가 따라다닌다. 간선 수로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가지를 쳐가면서 점점 가늘어진다. 그게 실핏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 수로 곳곳에 낚시꾼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입질은 괜찮나요?’, ‘씨알이 굵은가요?’ 입에 발린 말을 건네 보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고기 다 도망가게 웬 소란이냐는 듯 오히려 분위기만 싸늘해졌다. 문득 ‘보스프러스 해협’에서 만났던 낚시꾼이 생각난다. 그 날도 오늘과 똑 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그리고 난 팔뚝만큼이나 큰 생선을 선물 받을 뻔 했었다. 여행 중이라서 뜻만 받겠다며 사양했지만 낚시질을 멈추어가면서까지 대화에 응해주던 튀르키예인들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옛 사람들은 낚시꾼을 ‘강태공’이라 불러왔다. 고기와 함께 세월을 낚는다며... 하지만 요즘 낚시꾼들은 오직 고기만 낚는 모양이다.
▼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수로는 ‘만경강’에 한쪽 어깨를 기댔다. 밀물 때면 바닷물로 차오르던 강은 지금 온통 습지로 변했다. 참! 수로를 메우다시피 하고 있는 갈대숲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했다. 가을철이면 또 하나의 명소로 변신할 수 있겠다.
▼ 길바닥에는 ‘길뚝개꽃’이 무리지어 피어났다. 한국의 야생화는 무리지어 피어날 때 제멋이라고 했다. 그래선지 안개꽃만큼이나 작은 꽃들이 뭉쳐있는 게 여간 아름다운 게 아니다. 그걸 접사로 찍다보니 요렇게 변해버렸지만...
▼ 서해랑길은 진봉면에서 만경읍으로 넘어온다. 그러자 들녘은 더 펑퍼짐해진다. 심심찮게 떠오르던 구릉지의 둔덕마저도 이젠 사라져버렸다. 하긴 오죽했으면 김제에서 ‘지평선축제’까지 열리겠는가. ‘2024 Pinnacle Awards and Asia Festival City Conference’에서 ‘베스트 교육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지명도가 있는...
▼ 소만(小滿)이 지난 농촌은 색깔부터가 달라진다. 초록의 보리와 밀들이 누렇게 익어가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농부는 벌써 수확을 시작했다. ‘고양이 손도 빌린다’, ‘부지깽이도 나와서 돕는다’는 계절이다. 하지만 걷기 여행에 나선 집사람에겐 사진 찍기 딱 좋은 풍경일 뿐이다.(농작물 피해가 없도록 고랑에서 찍었다)
▼ 13 : 06. ‘간선수로’답게 수문의 규모가 제법 크다. 안내판에 적혀있는 ‘대덕제 수문’일지도 모르겠다. 안내판은 외지인들이 간선수로(관기수문↔대덕제수문)에서 낚시하는 걸 금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각망(角網, 길그물의 끝에 직사각형의 통그물을 설치하여 어군이 길그물을 따라 통그물 안으로 유도되도록 하여 대상물을 포획하는 방법) 어업 허가를 받아놓은 구역이라면서.
▼ 13 : 27 – 13 : 37. 둑길은 계속된다. 그렇다고 아까처럼 간선수로만 따르는 것은 아니다. 지선도 따라다니다 가끔은 아래 사진처럼 수로를 건너기도 한다. 마침맞게 그곳에 쉼터용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덕분에 우린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느긋이 쉬다 갈 수 있었다.
▼ 지금 우리가 ‘새만금 광역탐방로’를 걷고 있는 모양이다. 토정마을(만경읍)에서 심포마을(진봉면)까지 이어지는 ‘둘레길’로, 자연경관이 우수한 만경강 유역을 보려고 찾아온 걷기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새만금배후도시 개발지역 주변에 길이 12.5km의 탐방로를 개설했단다.
▼ 13 : 47. 이후부터는 농로를 따라간다. 그러다가 2차선 도로인 ‘화포로’로 올라섰다싶으면 어느새 ‘화포마을’에 이른다. 화포·창자·장흥·토정 등으로 이루어진 ‘화포리(火浦里)’의 중심마을이다. ‘화포(火浦)’란 지명은 진묵대사(震默大師)가 태어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불개·불거(佛居)·불포(佛浦)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처 불(佛)’자를 ‘불 화(火)’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참고로 진묵대사는 1562년(명종 17)에 태어나 1633년 열반에 들기까지 살아 있는 부처로 일컬어지던 고승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거병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 받기도 한다.
▼ 동구 밖에는 1870년에 세워졌다는 ‘평산신씨 충효열 정려각’이 있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정려는 정판이 걸려 있고 안에다 비석을 세웠다. 하지만 정판이 낡고 글씨가 번져 있어 알아보기 힘들었다. 특히 비문(평산신씨 충효열지비)이 한글로 적힌 게 눈길을 끈다. 저 빗돌을 세우던 당시는 너나없이 한자로 적었던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만경의 진관포 어부의 딸로 태어난 ‘신성녀’는 농촌 출신인 이독금(李禿金)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맹인이었고 시어머니는 앉은뱅이였단다. 거기다 남편마저 일찍 보내고 10대 청상과부가 되었다. 하지만 평생을 수절하면서 날아가는 오리라든지 동절기에 잉어라든지 또 죽순이라든지 시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지성을 다하여 봉양한 후 일생을 마치자 나라에서 효부 열녀비를 세워 주었단다.
▼ 탐방로는 화포마을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리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구릉지 모퉁이를 돈 다음, 둑길을 따라 ‘만경강’으로 다가간다.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먼 거리지만 심심찮게 뽕나무를 만날 수 있었고, 주렁주렁 매달린 잘 익은 오디를 따먹으며 가게 해주면서 오히려 행복한 여정이 될 수 있었다.
▼ 14 : 12. 느닷없이 나타난 ‘자전거길’. 새만금광역탐방로가 시작되는 ‘토정마을’은 오른쪽으로 간다. 하지만 서해랑길 이정표(종점까지 4,4km)는 자전거길을 따르란다.
▼ 20m쯤 더 진행했을까 길가에 도톰하니 언덕 하나가 솟아올랐다. 김제에서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곳 중 첫손에 꼽힌다는 ‘만경 낙조전망대’이다. 서해랑길은 저곳을 비켜 지나간다. 하지만 볼거리가 제법 많은 곳이니 꼭 올라가보도록 하자.
▼ 언덕 꼭대기에는 ‘만경정(萬頃亭)’이 지어져 있었다.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만경강의 대표적인 쉼터이니, 느긋이 쉬다가 낙조까지 구경하고 가라는 모양이다.
▼ 먼저 ‘만경강’부터 가슴에 담아둔다. 그리고는 액자형 포토존 안에 그런 풍경을 차곡차곡 넣는다. 김제의 옛 지명인 만경(晩景)은 만(萬)이랑이나 되는 논을 이르는 말이다. 그 많은 논에 물을 대는 저 만경강은 들녘의 온갖 생물을 기르는 젖줄이다.
▼ 만경강 얘기는 안내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만경강은 황금빛 들녘과 푸른 물길이 만나는 ‘풍요의 강’이란다. 과거에는 호남의 정취가 머물었고, 나루터를 통해 문물이 오가던 소통의 중심지였다. 그게 지금은 보호종의 서식처이며 희귀 철새가 날아드는 생태계의 통로가 되었다. 그런 만경강의 비경 8곳을 선정했으니 바로 ‘만경팔경’이란다.
▼ 이곳은 만경강의 아름다운 노을을 구경할 수 있는 제1경 ‘만경낙조’라고 한다. 하지만 빗돌은 낙조(落照)가 아니라 낙조(落潮)로 적혀있다. 담당자의 실수로 여겨지는데 빨리 고쳐졌으면 좋겠다. 저녁노을 조망의 명소에서 썰물을 바라보라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겠는가.
▼ 만경강 이야기는 빗돌에도 담았다. 본래 이름은 ‘사수(泗水)’라고 한다. 공자의 고향 ‘곡부’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 ‘풍패’ 지역에도 동명의 강이 있단다. 이중 하나를 벤치마킹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주차장은 자동차 캠퍼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탐방로 주변의 다른 주차장들도 같은 풍경을 보여준다. 하긴 경관 좋고 한적한데다가 수돗물 사용이 가능한 화장실까지 갖추었으니 이보다 더 나은 ‘차박’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 되돌아온 탐방로에는 ‘안도현’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지만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이리중학교에서 근무까지 했으니 전북특별자치도와 인연이 깊다면 깊은데, 그가 ‘만경강 노을’이란 시를 지었었나 보다.
▼ 또 다른 저 시비는 누구의 작품을 실었을까? <노을빛 그리움으로 물드는/ 강둑에 갈대들이여/ 그리움에 흔들려라/ 굽이치는 만경강따라/ 내 마음도 흘러가리>
▼ 이후부터는 ‘만경강 자전거길’을 따른다. 오른쪽에서는 자동차도로가 나란히 달려온다. 만경강을 끼고 있어 경관도 빼어난 편이다. 하지만 썩 편치 않은 풍경도 만났다. 걷기 여행자들을 위해 자동차도로로 피해주는 자전거가 있는 반면, 덜 떨어진 오토바이 한 대가 맞은편에서 씽씽 달려오는 게 아닌가.
▼ 만경강은 갈대로 가득 차있다. 강변으로 길이 나있기 때문에 웃자란 갈대에 가려 물줄기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 14 : 37. 강을 통째로 삼켜버리다시피 하고 있는 ‘갈대밭’은 만경강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지자체가 그걸 버려둘 리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습지를 관찰해보라는 듯 데크로드를 설치했다.
▼ 그 끄트머리에는 정자까지 지어놓았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조성된 44km의 만경강 자전거길에는 이렇듯 전망대, 쉼터, 화장실 등 각종 편의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 14 : 58. 청하대교 아래. 오는 도중 흐드러지게 피어난 금계국을 희롱하느라 집사람의 발걸음이 더디어졌나 보다. 나 역시 그런 집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고. 그러다 80대 중반의 둘레길 도반에게 추월당했다. 아니 서해랑길의 51개 코스를 이어오는 동안 예외 없이 나보다 먼저 종점에 도착하신다. 집사람과 보조를 맞추다보니 어쩔 수 없었지만, 노익장을 자랑하는 그 분의 체력은 부러울 수밖에 없다.
▼ 15 : 06. 신창마을에 이른다. 동지산리(東芝山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로 1905년경 일본인 중시가 시장마을(동지산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에 살면서 군산으로 가기 위해 나룻배를 이용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새로 생긴 나루터라는 뜻에서 ‘새창이’로 부르다가 신창으로 고쳤다. 가을이면 전국 최대의 망둑어 낚시터가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 이곳은 만경팔경의 제2경인 ‘신창지정(新倉之情)’의 현장이기도 하다. 팔각정 앞에 안내 빗돌을 세우고 그 사연을 적어 넣었다. 나루터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이곳을 오고가던 사람들과 문물이 남기고 간 역사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나?
▼ 정자에 오르자 풍요의 강이라는 만경강과 이를 가로지르는 ‘새창이 다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마을 앞 강변에는 꼬맹이 어선 두어 척이 매어있어 이곳이 ‘새창이 나루터(新倉津)’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만경강의 대표적인 포구로 서해로부터 고산포·동자포·춘포를 물길로 연결시키며 번성을 누렸었다고 한다.
▼ 신창마을 앞에 기다란 다리가 세 개나 놓여있다. ‘새창이 다리’와 711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만경대교’, 그리고 서해안고속도로의 ‘서해만경강교’이다. 서해랑길은 이 가운데 ‘새창이 다리’를 건너 군산 땅으로 넘어간다.
▼ 새창이다리의 옛 이름은 ‘만경대교’. 일제강점기인 1933년 기존 가교의 안전문제와 김제-군산 간 수송상 편의를 위해 건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시멘트다리(전주 남부시장에 1922년 건설한 ‘싸전다리’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사라졌다)라고 한다. 아니 김제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더 옳겠다. 세월이 흘러 교통량이 늘고 다리가 낡으면서 1998년 이웃에 새로운 만경대교를 놓고, 옛 다리는 보행자 전용으로 리모델링해 세상에 내놓았다.
▼ 김제시는 다리를 홍보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금산사(사적 제496호)와 수류성당(1895년 문을 연 천주교 성당), 금산교회(1905년 미국 선교사 테이트가 지었다), 증산법종교(강일순 증산교 창시자의 무덤이 있는 종교 성지) 등의 종교 성지를 비롯해 김제지평선·하소백련·진봉보리밭 등의 축제를 소개하고 있다. 김제 농·특산물이나 미즈노씨네 트리하우스와 아리랑문학마을 같은 요즘 뜨고 있는 명소는 덤이다.
▼ 하류이어선지 만경강 물줄기가 등치를 한껏 부풀렸다.
▼ 다리는 딱 중간에서 김제와 군산이 갈리고 있었다. 그런데 군산 땅으로 넘어오자마자 다리 풍경이 확 바뀌어버린다. 벤치와 화단으로도 부족해 홍보판까지 설치해 놓았던 김제와 달리 군산은 손을 하나도 대지 않은 채로 방치하고 있었다.
▼ 대신 다리 아래 둔치를 멋진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새창이 연꽃마당’이라는데 공중에서 보면 연꽃이 심어진 저 연못들이 합쳐지면서 한반도 모양을 이룬다고 한다.
▼ 15 : 20. 다리 건너에 만들어놓은 쉼터를 겸한 ‘관망대’에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9.35km를 찍고 있다. 나지막하지만 산을 두 개나 넘었음을 감안하면 무척 빨리 걸은 셈이다. 7km나 앞에서 출발한 집사람을 따라잡느라 뛰다시피 걸었던 결과일 것이다.
▼ 군산시는 다리 대신 이곳에다 홍보용 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 안내판은 ‘새창이다리 이야기’와 ‘새창이 이야기’, 새창이연꽃마당 이야기‘를 담았다. 나머지 둘은 동아일보 기사(1933년 10월 7일자와 같은 해 8월 4일자)를 나누어 ‘구(舊) 만경대교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 오늘도 집사람은 든든한 내 지원자가 되어주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까레니나’의 첫 문장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르다.’로 시작된다. 모든 가정의 행복과 불행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럼 행복한 가정과 인생을 살고 싶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종교와 철학이 찾고자 하는 숙제일 것이다. 우리 부부는 ‘사랑과 배려’에서 행복을 찾아간다. 한쪽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상대방은 기꺼이 함께 해준다. 그래서 오늘도 트레킹을 함께 했고, 웃고 떠들며 행복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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