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 54코스(외당마을 버스정류장 – 진포 해양테마공원)
여 행 일 : ‘24. 6. 22(토)
소 재 지 : 전북 군산시 옥산면·지곡동·나운동·송풍동·월명동·장미동 일원
여행코스 : 외당마을 버스정류장→은파 호수공원→월명호수→삼일기념탑→월명동사무소→군산근대화거리→진포해양테마공원(거리/시간 : 11.6km, 실제는 14.42km를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4코스를 걷는다. 5개로 이루어진 김제·군산 구간(51-55코스)의 네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군산시가지를 관통해 금강 하류에 있는 ‘군산 내항’까지 가는 여정이다. 은파호수공원과 월명공원, 근대화거리가 주요 볼거리로 꼽히는데, 난이도는 별이 3개(5개 가운데)로 분류된다. 중간에 두어 번 산길을 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들머리는 외당마을 버스정류장(군산시 옥산면 당북리)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 IC에서 내려와 21번 국도를 타고 새만금방면으로 달리다가 ‘당북교차로’에서 빠져나오면 곧이어 ‘지곡지구 아파트단지’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군산 54코스) 안내도는 단지 맞은편 ‘외당마을 버스정류장’ 옆에 설치되어 있다.
▼ ‘외당마을 버스정류장’을 출발, 군산 시내를 횡단해 ‘군산 내항’에 이르는 11.6km짜리 여정이다. 중간에 산길을 오르내린다고는 하지만, 별 어려움이 없는데도 거리가 무척 짧은 편이다. 막바지에서 만나게 되는 ‘근대화거리’의 각종 전시관들을 빠짐없이 돌아보면서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마음을 다잡아보라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 10 : 23.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어서 아파트단지의 사잇길(외당원길)을 따라간다. 왼편은 옥산면이나 반면에 오른편은 지곡동이니 면계(面界)를 따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 10 : 27. 아파트단지 끄트머리(숲속유치원 앞)에서 나지막한 언덕을 넘는다. 1차선 도로인데도 오가는 차량이 많아 안전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 10 : 37. 고개를 넘자마자 ‘은파호수공원’이 맞는다. 입구의 ‘서해랑길 이정표(물빛다리 2.2km/ 외당마을정류장 1.3km)’는 왼쪽으로 가란다. 하지만 근처에 있는 ‘은파호수공원 안내도’를 먼저 살펴보면 어떨까?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참고로 은파호수의 본래 이름은 ‘미제지(米堤池)’이다. 우리말로 풀면 ‘쌀뭍방죽’이 된다. 쌀이 많이 생산되도록 주변 들녘에 물을 대주는 방죽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 우리 부부는 오른쪽(주차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금은 에돌아가겠지만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보기 위해서이다. 아니, 시·종점까지의 거리표시 하나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는 이정표 자체를 믿지 못했다는 점도 배제할 수는 없다.
▼ 10 : 40. 몇 걸음 더 걸으면 만나는 정자. 이곳에서는 왼쪽 ‘습지공원’으로 가볼 것을 권한다. 습지 생태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 건너편에서 서해랑길을 다시 만난다. 그런 다음 호수에 놓인 저 다리를 건너 이쪽으로 되돌아오면 된다. 하나 더. 은파호수는 햇빛이 내려쬘 때가 제격이라고 했다. 햇살이 호수 위에 하얗게 부서지면 은파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리는 비를 멈추게야 할 수 없는 노릇. 햇살 대신 빗줄기가 만들어내는 파랑에 만족하면서 걷기로 했다.
▼ 다리는 호수를 가로지른다. 그렇다고 곧장 건너지는 않는다. 중간에 좌우로 날개를 달아 조금이라도 더 많이 호수를 느껴볼 수 있도록 했다. 그건 그렇고 경관 좋은 곳에서는 빗줄기도 문제가 되지 않는가 보다. 작은 우산 하나 쓰고 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감상하며 걷다 보면 호수의 낭만이 더욱 짙어진다.
▼ 10 : 45. 이후부터는 오른쪽 호숫가를 따라 북진한다. 리아스식 호안을 따라 널찍하니 산책로를 내놓았다. 바닥에는 야자매트까지 깔아 질퍽거릴 염려도 없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푹 빠져보라는 모양이다.
▼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은파호수가 드넓게 펼쳐진다. 1931년 일본인들이 금강 하구의 습지와 미등록 농지 등을 탈취하여 불이농장(不二農場)을 만들고 수리조합을 구성하면서 축조했단다. 아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미제지(米堤池)’가 나오니 생성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그걸 일본인들이 증축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부근에 미원동(米原洞)·미성동(米星洞)·미장동(米場洞)·미룡동(米龍洞) 등 미(米)자가 들어 있는 지명이 많을 정도로 쌀 생산에 큰 도움을 준 저수지였음은 확실하다.
▼ 걷다보면 지명을 알리는 안내판을 심심찮게 만난다. ‘개정지’는 야외 부엌(정지)을 말한단다. 사창에 벼와 쌀의 입출고가 빈번하면 일손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고, 늦가을에서 이른 봄까지 ‘개정지’를 마련해 일꾼들의 밥을 짓던 곳이라나? 다른 안내판에서는 용처(龍處, 방죽의 水源)와 사창골(社倉을 두고 방아를 찧어가던 곳)에 대한 내용도 엿볼 수 있다.
▼ 호수의 면적 1.72㎢. 크지만 그렇다고 거대하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호안 길이는 10.2km나 된단다. 그만큼 굴곡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산책로는 그런 굴곡들을 다 이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가끔은 이렇게 허리를 무찌르다시피 지나기도 한다.
▼ 그러니 고개를 넘으면 또 다른 굴곡으로 내려설 것은 당연. 이렇듯 인공호수는 ‘리아스식 호안’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물을 가두면서 수면이 높아지고, 산봉우리와 산등성이가 물에 잠기면서 섬이나 곶으로 변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그걸 ‘귀’라 하는데, 방죽 둘레에 굽은 귀가 많다고 해서 ‘아흔아홉 귀 방죽’라 부르기도 했단다. 옛날 한 아기장수가 미제방죽을 서울 터로 만들려고 100귀로 만들면 밤에 한 귀가 무너지곤 해서 도로 아흔아홉 귀가 돼버려 끝내 실패하고 울면서 떠났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그만큼 방죽에 굴곡이 많고, 지형을 따라 보여주는 경관도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 물위에는 연 잎이 무리지어 떠 있었다. 여름마다 백련, 수련, 노랑어리연이 만개한다는 연꽃자생지일지도 모르겠다.
▼ 11 : 07. 요것조것 눈에 담으며 걷다보면 캐노피(canopy)가 쳐진 광장에 이른다. ‘물빛다리’ 동단에 조성해놓은 ‘바닥분수’이다. 하지만 장마철이라선지 물은 내뿜고 있지 않았다.
▼ 은파호수의 ‘랜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물빛 다리’를 건넌다. 길이 370m에 너비가 3m인 보도 현수교로, 다리 위에서 호수에 비친 자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지친 심신을 달래기에 딱 좋은 구간이다. 야간에는 연출된 아름다운 빛을 비추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준단다.
▼ 다리는 건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입체미를 두어 걷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양 옆으로 고저가 있는 길을 따로, 그것도 하트(♡) 모양으로 만들었다.
▼ 물빛다리는 ‘현수교(懸垂橋)’로 분류된다. 하지만 양쪽 주탑(柱塔)에서 늘어뜨린 케이블에 행거케이블을 연결시키는 다른 현수교들과는 달리 이곳은 가운데에 주탑을 세우고 양옆으로 케이블을 늘어뜨리는 형식을 취했다.
▼ 주탑 아래는 아예 사랑의 공간으로 꾸몄다. 하트 조형물을 세우고 ‘사랑의 열쇠’를 매달 수 있도록 했다. 연인들은 자물쇠를 걸고 두 손을 꼭 잡는다. 우리 사랑 영원하게 해주소서. 기도하듯 주문을 외운 다음 열쇠를 호수로 힘껏 던져버린다. 열쇠가 없으니 자물쇠는 영원히 봉인될 것이고 우리 둘의 사랑도 끝이 없겠지?
▼ 눈에 들어오는 호수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호수 둘레 따라 푸른 자연이 굽이굽이 이어지고, 빗줄기 따라 물결이 찰랑찰랑 흔들릴 때마다 더위는 저만치 물러가고, 호수는 낭만이 차오른다.
▼ 다리는 애기바우·중바우·개바우에 대한 설화를 배경으로 형상화했단다. 설화를 바탕으로 진입부에 놀이마당, 중간부에 주탑, 종점부에 사랑의 터널을 꾸몄다고 한다. 그 설화는 대충 이렇다. 옛날 방죽 근처에 마음씨 고약한 구두쇠 영감이 살았는데, 하루는 스님이 시주를 청하자 흙과 돼지 똥을 뿌리며 내쫓았다. 이를 본 마음 착한 며느리가 시주하니 스님이 극락왕생하려면 아들을 업고 이 집을 떠나되, 뒤를 돌아보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며느리는 정든 집과 가족 생각에 뒤돌아보았고, 그러자 일대가 물로 뒤덮이면서 며느리는 죽고, 스님과 아들, 강아지는 바위가 됐다는 슬픈 이야기다.
▼ ‘음악분수’는 은파의 특성과 이미지를 반영한 꽃잎 형태의 분수로 매회 20분씩 하루 8회 운영된다고 했다. 저녁이면 음악에 조명까지 더해지면서 여름철 더위를 한꺼번에 날려버린단다.
▼ 오리 모양의 배를 타고 은빛 물결을 가르며 떠다니는 기쁨도 놓칠 수 없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탓인지 보트장의 오리보트와 모터보트는 오실 줄 모르는 손님만 하염없이 기다린다.
▼ 11 : 13. 다리 건너에는 ‘물빛다리 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음식단지에 들러 전라도 음식의 풍미를 즐길 수도 있고, 물빛공연장에 앉아 수시로 열린다는 국악 등의 공연을 구경할 수도 있다.
▼ ‘사랑의 문’이란다. 물빛다리를 사랑이라는 콘셉트로 꾸몄다는 얘기일 것이다.
▼ 물빛다리 조형물. 은파라는 명칭의 은(銀)은 사랑의 빛(희망)이고 파(波)는 풍요의 물을 나타낸다고 적었다. ‘풍요와 미래, 사랑과 희망’을 테마로 삼아 군산시민의 따뜻한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다나?
▼ 한국농촌공사의 ‘100주년 기념탑’. 미제지의 용수는 우리나라 최초 수리조합 설립의 근거가 됐다고 한다. 미제(米堤)와 선제(船堤, 제방과 방수로만 남은 채 개답해 농지로 이용하고 있다)를 관개에 이용하기 위해, 근대 수리사업의 계기가 마련된 1906년의 수리조합 조례에 따라 1908년 12월 8일 탁지부(지금의 재경부에 해당)로부터 허가받아 설립됐는데 이것이 ‘옥구서부수리조합’이다. 조선인이 주도한 이 수리조합은 조합원 다수가 조선인이었다. 몽리(蒙利) 구역의 70%가 조선인 소유였다는 점에서 다른 수리조합들과 사뭇 구별된다. 그런 역사성 때문에 이 조합의 설립일을 오늘날 농어촌공사의 시작으로 삼고 있다.
▼ 11 : 19. 이번에는 서쪽 호숫가를 따라 북진한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그윽한 숲 향기가 어우러지면서 가슴속까지 뻥 뚫리게 해주는 산책로는 구불구불 이어진다. 그러니 군산의 명품 걷기 길인 ‘구불길’에 포함되어 있음은 당연. 5코스인 ‘물빛 길’이 이곳을 지나간다.
▼ 11 : 26. 은파시민공원에 이르면서 은파호수와의 동거는 끝난다. 참고로 은파호수는 원래 농업용 저수지였다. 그러다 주변에 도시가 형성되면서 기능을 바꿔 주변 산과 함께 1985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이후 순환도로, 물빛다리, 음악분수, 인라인스케이트장, 생활체육장, 보트장 등을 조성해 도심 속 쉼터로 꾸몄다.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지역자원 콘테스트’에서 전국 100대 관광 명소로 선정되기도 했다.
▼ 시민공원의 끄트머리는 수많은 탑들이 숲을 이룬다. 2010년 연평도에서 복무하다 순직한 해병대 ‘故 문광욱 일병’의 흉상’을 중심으로 ‘현충탑(6·25 때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29명이 전사한 군산사범학교 학생들을 기린다)’, ‘호국 무공수훈자 공적비’. ‘월남 참전 기념탑’, ‘6·25전쟁 참전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 일종의 현충시설 단지라고 보면 되겠다.
▼ 11 : 30. 공원을 벗어나 ‘대학로’로 올라선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지도(첨부 된)와 ‘두루누비’에서 배포한 새로운 트랙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서해랑길 표지기는 양쪽 모두에 걸려있으니 문제인 것이다. 뭔가의 문제로 코스를 바꾸었다면 표지기 또한 떼어버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이를 모른 우리 부부는 지도에 표시된 대로 한원컨벤션센터(예식장인 듯) 오른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갔다. kakaomap에서 이미 ‘로드 뷰’까지 확인해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00m쯤 올라가다 트랙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되돌아 나왔다. 아무래도 코리아둘길(해파랑길·남파랑길·서해랑길·DMZ평화의길)의 공식 홈페이지가 더 정확할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함께 걷던 80대 노익장 부부는 옛 코스를 그대로 따랐고, 그 결과 아무런 문제없이 해당 구간을 지날 수 있었다고 했다.
▼ 11 : 37. 공원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대학로’를 따라간다. 6차선 도로의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인도와 자전거길이 따로 만들어져 있으니 알아서 선택하면 된다.
▼ 11 : 48. ‘나운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공단대로(6차선 도로)’를 따른다. 코너에 있는 등산용품점(Black Yak)을 참조하면 되겠다.
▼ 11 : 56. 터널 모양의 동물이동통로 앞에서 숲속으로 들어간다. 입구에 구불길(6코스인 ‘달밝음길’)의 방향표지판과 함께 ‘서해랑길’ 표지기가 매달려 있다.
▼ 탐방로는 꽤 가파르게 올라간다. 그게 부담스러웠던지 나무계단까지 설치해놓았다.
▼ 오른쪽은 상수도 ‘나운배수지’. 태양광 패널이 숲을 이루고 있다. 배수지를 덮고 그 위에 태양광발전소를 만든 모양이다. 유휴시설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발상이 아닐까 싶다.
▼ 12 : 04. 차도(월명공원2길)로 내려서서 ‘월명공원’으로 진입한다. 길이 오솔길에서 아스팔트 포장길로 바뀌었다. 잘 닦인 이 공원길은 산자락 옆구리를 타고 가다 월명호수 옆을 스치듯 지나간다.
▼ 안내판이 ‘월명공원’으로 들어섰음을 알려준다.
▼ 이후부터는 ‘월명공원2길’을 따른다. 은파호수 공원에 이어 이번에는 군산의 또 다른 관광지인 ‘월명공원’을 횡단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선지 주변은 정리정돈이 잘 된 느낌이다. 산뜻하게 뚫린 산책로는 기본, 편백나무 등으로 울창한 숲은 시민들의 힐링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 12 : 14. 월명호수가 얼굴을 내민다. 호숫가로 내려가는 산책로도 만들어져 있다.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저 수변길은 일상에 지친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버리기에 딱 좋다. 하지만 내려가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근대화 거리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아니 3년 전쯤 가족들과 함께 이미 둘러봤으니 또 가볼 필요가 없어서이다.
▼ 편백나무 숲속에는 ‘작은 독서실’까지 들어앉혔다. 괜찮은 아이디어라 하겠다. 심신을 맑게 해주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편백나무’로 알려지고 있으니 말이다.
▼ 12 : 29. 호수를 왼쪽 허리춤에 끼고 숲길을 따르다보면 점방산 밑에 자리한 ‘청소년수련관’을 만난다. 탐방로는 수련관 앞에서 2차선 도로(청소년회관로)를 만나 오른쪽으로 간다.
▼ 송풍동(반대편은 소룡동) 방향으로 100m쯤 내려가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숲속(월명호수1길)으로 들어간다.
▼ 12 : 38. 염불사(念佛寺).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사찰로 누가 언제 지었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그저 일제 때 ‘산재당’으로 불렸고, 일본인들이 이곳에 와서 재를 지내고 갔다고 전해질 따름이다. 그래선지 안내판은 절의 역사보다는 절이 품은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 전북 문화유산자료)’에 대해 전하고 있었다. 명나라 시대의 티베트 불상과 조선시대의 불상 양식이 적절하게 혼합된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단다.
▼ 12 : 41. 잠시 후 월명산(101.3m)과 장계산(108.3m)을 잇는 능선의 안부로 올라선다. 길이 사통팔달로 나뉘는 지점이기도 하다. 수시탑과 월명호수, 월명동사무소로 각각 이어지는 길 말고도, 월명산과 장계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이곳에서 나뉜다.
▼ 고갯마루에는 ‘군산 3·5만세 운동’을 기념하는 ‘삼일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참고로 한강이남 최초의 3·1만세 운동지인 군산에서는 1919년 3월 5일 첫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총 28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참여한 인원도 3만7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3월 5일에 일어났지만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맥락에서 ‘3·1 운동’이라 부른단다.

▼ 월명동사무소 방향으로 내려간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난 길은 얼마나 오래 묵었던지 어른의 허리통보다도 더 굵은 나무들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있다.

▼ 12 : 52. 월명동에서의 첫 만남은 ‘동산교회’. 탐방로는 이제 군산의 옛 역사와 문화 속으로 들어간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시가지 곳곳에 들어서 있으니 하나도 빼먹지 말고 꼼꼼히 둘러보도록 하자.

▼ 군산체육관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은 아니다. 하지만 김완수 관장의 피와 땀이 배어있는 군산 복싱의 전설이다. 동양챔피언에 오르면 최고 스포츠스타로 대접받던 시절.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제2회 아세아 아마복싱선수권대회(1965년)’에서 한국은 8체급을 석권한다. 그중 3명(서상영, 박구일, 황영일)이 김완수관장의 지도를 받은 군산체육관 소속이었다.

▼ 기적으로 불리며 세간을 놀라게 했던 체육관은 지금 ‘포토 죤’이라는 임무를 하나 더 보탰다. ‘군산관광 포토투어’의 한 지점이 되어 오가는 관광객들을 맞는다.

▼ 몇 걸음 더 걸어 ‘동국사길’로 나오면 ‘평화의 박물관’이 반긴다. 평화라는 주제를 갖고 전시가 이루어지는 독특한 공간이다. 무기로 평화를 지키는 군사안보에 저항하는 평화운동의 기록이라나? 하지만 ‘힘없는 평화는 바람 앞의 등불일 뿐’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들여다볼 가치조차 없는 기록들이다. 박물관 앞에 전시해놓은 ‘꽃마차(전국의 분쟁현장을 누비던 차량이 낡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조형물로 꾸며놓았다)’만 카메라에 담고 자리를 떠나버리는 이유이다.

▼ 13 : 00. 오른쪽으로 100m쯤 가면 ‘동국사’가 나온다.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로, 한일합방 1년 전인 1909년 6월에 창건됐다. 일본 조동종 승려 ‘우찌다’가 ‘금강선사’란 포교소로 개창했고, 1913년 현 위치로 옮겨와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정부로 이관됐다가 1955년 불교전북교당이 인수하면서 ‘동국사’로 개명했다. 1970년 조계종 24교구 선운사에 증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지붕이 높고 단청을 하지 않은 절집은 대웅전과 요사채가 복도로 연결된 점이 이채롭다. 누군가는 대웅전 지붕이 에도막부 시대 쇼군(장군)의 투구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글쎄다.

▼ 경내에는 일본 조동종 운상사 주지 일호창황의 주도로 건립했다는 ‘참사비(懺謝碑)’가 세워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만행을 참회하는 조동종의 참사문을 발췌해서 새겼단다. 하지만 내 눈에는 군산시민과 일본인들이 성금을 모아 제작했다는 ‘평화의 소녀상’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 동국사 앞에서 만난 ‘근대화 거리’ 안내판. 17개의 주요 포인트들을 지도에 표시하고, 효율적으로 둘러볼 수 있는 방법을 3개 코스로 나누어 소개해준다.

▼ ‘평화의 박물관’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왼쪽으로 간다. 이후부터는 일본식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바둑판식 거리를 둘러보며 걷는다.

▼ 13 : 03. 첫 만남은 ‘군산 항쟁관’이다. 일제강점기 항거의 현장을 재현한 기념관이라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라지만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 내부관람은 포기하기로 했다. 호남지방에서 최초로 일어난 3·5 대한독립 만세운동은 물론이고, 1920년대의 미선공과 부두노동자들의 항쟁, 옥구 농민항쟁 등에 대한 자료도 살펴볼 수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항쟁관 부근은 ‘맛의 거리’로 꾸며져 있었다. 군산은 과거 해상물류유통의 중심지였다. 이는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고, 이 지역만의 독특한 음식문화를 만들어냈다.

▼ 월명로를 따라 조금 더 가면 ‘군산 부윤 관사’가 있다. 일제강점기 수탈을 총괄하던 군산부 부윤(시장)이 생활하던 곳으로, 1930년대 건축한 일본 고민가 형태의 근대건축물이다. 해방 후에도 1990년 초까지 시장 관사로 사용됐다.

▼ 이후부터는 ‘구영6길’을 따른다. 옛 멋을 퐁퐁 풍기는 건물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예쁘장한 골목이다.

▼ 예스런 길을 걷다보면 눈에 띄는 간판마저도 고상해진다. ‘당신이 나보다 행복하길 바래’. 수제 전통차 한 잔에 행복을 듬뿍 담아주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 ‘여미랑(오래된 친구의 집을 뜻한단다)’은 군산시에서 만든 게스트 하우스다. 군산에 오래된 일본식 가옥이 많다는 점을 감안 한 블럭을 통째로 일본식 집을 지어놓았다. 그러니 일본식 다다미방에서 하룻밤 보내보는 것도 여행의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부대시설인 ‘고우당 찻집’에서 배달시킨 전통차에 담소까지 곁들이면서...

▼ 길을 걷다보면 군산시의 야무진 노력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홍보에 대한 노력도 그중 하나다. 군산의 역사와 문화를 근대화를 중심으로 알리고 있다.

▼ 월명동사무소의 저 조형물은 ‘3·5 독립 만세운동’을 형상화 한 모양이다. 아니면 1905년 을사늑약 때 스승인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임병찬 의병장’일 수도 있겠고...

▼ 군산상고 야구부도 역사적 가치로 충분하다. 1972년 제26회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군산상고가 부산고에 1-4로 끌려가고 있었다. 9회 말 군산상고 선두타자 김우근이 안타로, 고병석과 송상복이 볼넷을 얻어 만루가 됐다. 김일권이 몸에맞는볼로 출루하며 한 점 따라붙고, 양기탁의 적시타로 4-4 동점을 이뤘다. 2사 만루에 김준환이 끝내기 좌전안타를 날려 역전승(사진)을 거뒀다. 그 뒤에도 군산상고는 유독 짜릿한 역전승이 많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역전의 명수’라고 불렀다.

▼ 시계 바늘을 일제강점기로 되돌려 놓은 저 조형물도 훌륭한 볼거리이다. 사내아이가 사탕을 빨아먹으며 심부름 가는 여자아이를 놀리는 모양새인데, ‘그때 그 시절’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 일제강점기의 옛 가옥인지, 아니면 새로 복원해놓은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닭요리 전문점인데, 비오는 날 파전에 막걸리 한 잔하기 딱 좋은 곳이란다. 복고풍의 인테리어가 술맛을 북돋아준다나?

▼ ‘국제반점’은 ‘짬뽕의 도시’ 군산에서도 소문난 맛집으로 꼽힌다. 비를 맞아가면서도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저 관광객들이 그 증거다. 참고로 ‘군산 짬뽕’의 역사는 산둥성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일으켰다. 개항 후 화교들은 짬뽕의 원조 격인 초마면(炒碼麵)을 만들어 팔았다. 초마면은 해물과 고기, 다양한 야채를 기름에 볶아 닭이나 돼지 뼈로 만든 육수를 넣고 끓인 다음 면을 넣어 말아 먹는 요리다. 고춧가루 대신 후춧가루만 넣어 먹었다. 이때만 해도 흰 국물이었다. 한국인 입맛에 맞게 고춧가루를 넣으면서 빨간 국물인 짬뽕이 됐다.

▼ ‘이성당’은 줄이 더 길었다. 대전에 '성심당'이 있다면 군산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인 ‘이성당’이 있다. 지난해 매출(266억원)도 동네 빵집 매출액 순위에서 성심당에 이어 전국 2위를 기록했다. 이성당은 1945년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제빵 기구를 사용해 빵을 만든 것이 시초다. 이곳에서 만드는 ‘단팥빵’은 빵 마니아들 사이에서 죽기 전에 꼭 먹어봐야 하는 빵으로 꼽힐 정도다. 요즘은 ‘야채빵’을 찾는 마니아들이 더 많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맞다. 우리 부부의 입에도 ‘야채빵’이 더 맞았다.

▼ ‘근대 쉼터’. 우수저류소의 유휴공간을 활용한 쉼터로 공연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는 듯 계단식 관람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부근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등을 패러디한 벽화도 몇 점 눈에 담을 수 있다. 공공미술 프로젝트(우리 동네 미술)의 일환으로 그렸다는 ‘군산 사람들’의 모습도 눈길을 끈다.

▼ ‘초원사진관’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이다. 제작진이 마땅한 촬영지를 물색하기 위해 전국의 사진관을 찾아다니다 겨우 발견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실제 사진관은 아니고 시나리오에 맞게 개조한 것인데, 촬영이 끝난 후 철거되었다가 군산시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복원했다. 내부에는 촬영당시 사용된 사진기와 선풍기 등 소품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영화 팬들의 추억을 자극한다.

▼ 맞닿게 조성해놓은 ‘영화거리’도 눈요깃거리로 넘친다. 군산은 영화 촬영의 메카로 알려진다. 마더, 아저씨, 박하사탕, 장군의 아들, 타짜 등 많은 작품들이 촬영됐다. 거리를 누비다보면 영화 속 주인공이 품은 간절한 사랑이야기와 수많은 감성포인트에 공감할 것이다.

▼ 13 : 43.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골목을 누비다보면 어느덧 ‘해망로’에 이른다. ‘근대화 거리’라는 애칭답게 일제강점기의 건축물들이 몰려있는 곳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미즈카페’. 1930년대에 지어진 일본식 건물(무역회사)이라서 적산가옥을 찬찬히 구경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어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기에 제격이란다. 자그마한 정원을 공유하고 있는 또 다른 적산가옥은 ‘장미갤러리’이다.

▼ 그 옆에는 아이보리색 외관에 초록색 지붕을 한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국가 등록문화재 제372호)’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일본 지방은행으로 조선에서는 1890년 처음 문을 열었다. 이후 전국에 지점을 개설했는데 군산은 1907년 일곱 번째 지점으로 건립됐다. 하나 더. 이 은행은 일본인들이 고리대금업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갈취하는 자금줄 역할을 했다. 일본인들은 은행에서 싼 이자로 대출을 받아 농민들에게 토지를 담보로 고리대금을 일삼았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은행은 일본인들의 배를 불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 현재는 ‘근대미술관’으로 바꾸어 놓았다. 옛 건물의 특징을 살린 갤러리로 꾸민 다음 군산시민들이 기증한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를 진행한다. 미술품 전시 외에도 별실을 활용해 ‘일제수탈사 사진전’, ‘18은행 건물 역사 전시’ 등도 열린단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舊 조선은행 군산지점(국가등록문화재 제374호, 現 근대건축박물관)’을 만날 수 있었지만, 다리가 아프다며 중간에서 쉬고 있는 집사람을 생각해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탐방로에 접해있는 ‘근대역사박물관’을 찾았다. 군산의 역사를 한눈에 엿볼 수 있는 곳으로, 과거 무역항으로 해상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옛 군산의 모습과 전국 최대의 근대문화자원을 전시 중이다. 군산시민들의 물품 기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 로비에 들어서면 일제가 대륙에 진출할 목적으로 건설한 ‘어청도등대’가 반겨준다. 조선시대 군산은 호남평야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수송하기 위한 조창이 있던 경제적 요충지였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할 무렵에는 무역항으로서 황금빛 미래도 꿈꿨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면서 식민지 수탈의 근거지로 왜곡된 성장을 겪는다. 근대화의 상징인 기찻길이 놓이고 신작로가 뚫렸지만, 일제의 약탈을 위한 것이었다.

▼ 박물관은 해양물류역사관, 근대생활관,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기획전시실(사진)은 다양한 테마전시를 수시로 교체·전시하여 방문객의 꾸준한 관심을 유도하는 공간이다. 또한 해양물류역사관에서는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군산의 과거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군산의 현재와 미래를 통찰해 볼 수 있다.

▼ 근대생활관에는 일제강점기 군산의 다양한 풍경을 재현해 놓았다. 홍풍행(鴻豊行)은 화교가 운영하던 식료품 잡화점이었다고 한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미두장’으로 등장하는 군산미곡취인소도 눈에 띈다. 군산 최고 번화가였다는 영동상가 맞은편에는 산비탈로 쫓겨난 도시 빈민이 거주하던 토막집이 있어 대비된다.

▼ 독립영웅관은 군산에서 호남 최초로 일어난 3·1만세운동과 악질적인 일본인 농장을 대상으로 벌인 옥구 농민 항쟁을 다룬다. 그래선지 만세운동을 재현한 퍼포먼스도 보여주고 있었다.

▼ 이번에는 ‘舊 군산세관(국가지정 사적 제545호)’으로 간다. 1899년 군산항을 개방한 이후 인천세관 관할에 있던 군산세관은 1906년 인천세관 군산지사를 설립하고 1908년 이 건물을 완공한다.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건축 재료를 수입해 유럽 양식으로 지었다. 이 같은 양식은 서울역과 한국은행 등 단 3곳뿐이라고 한다.

▼ 이 건물은 건축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의 곡물을 수탈하는 역사적 현장이었다는 점에서 후대에 교훈을 준다. 그래선지 내부를 박물관으로 꾸며놓았다. 시대별 수입·수출 품목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해방이후-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20년 단위로 전시되어 있다. 2000년대에 와서야 전기·전자 제품과 자동차 등 익숙한 제품들이 눈에 띄는 걸 확인할 수 있다.

▼ 군산의 역사와 문화는 박물관 밖에서도 만날 수 있다. 청동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축산리 유적’과 산북동의 ‘공룡발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548호)’ 등을 복원해 놓았다. 1944년 군산항의 제지공장에서 사용하던 초대형 천장 크레인도 눈에 띈다.

▼ 박물관 투어를 마치고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인 ‘째보선창(군산 내항)’쪽으로 간다. 이때 ‘장미공연장’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옛 ‘미곡창고’를 리모델링해 다목적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참고로 ‘장미’라는 이름은 군산항을 포함한 일대의 지명에서 따왔다. 장미동하면 얼핏 꽃을 떠올리지만 전혀 다른 의미다. 곳간의 ‘장(藏)’과 쌀의 ‘미(米)’가 합쳐져 쌀 창고를 뜻한다. 마을 이름에 쌀 수탈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 공연장은 장편소설 ‘탁류’의 등장인물들 동상이 둘러싸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군산을 알리는데 ‘탁류’만한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서천 출신 정주사는 군산에 가면 번듯한 직업을 구할 수 있다는 말에 가족을 데리고 똑딱선에 오른다. 정주사는 이 화려한 근대도시에서 재산을 모두 잃고, 딸 초봉마저 팔아넘기듯 고태수에게 시집보낸다. 발버둥 칠수록 깊은 수렁에 빠진 초봉의 운명처럼 일제강점기 군산은 절망의 밑바닥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 종점인 ‘진포해양테마공원’으로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축구장 하나쯤 되는 구역에 울타리를 두르고 ‘2024 군산 수제맥주 블루스 페스티벌’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100m 더 가다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 이때 구불길(6-1, 탁류길) 안내판이 눈에 띈다. 구불길은 총 11개 코스(188.4km)가 만들어졌다. 이중 ‘탁류길’은 도심 복판에 만들어진 골목길이다. 길이는 6km, 근대역사박물관을 출발해 원점 회귀하는 코스를 중심으로 골목마다 역사의 현장이 숨어 있다.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의 배경지(原도심)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을 둘러보는 시간여행지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 14 : 20. 트레킹이 종료되는 ‘진포해양공원’에 이른다. 육·해·공군의 퇴역 군장비 13종 16대를 전시하고 있는 공원은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인 진포대첩의 역사적 현장이다.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50척의 배로 왜선 500척을 이곳에서 물리쳤다.

▼ 째보선창(군산 내항)에는 일제강점기 3천t급 기선이 접안하던 부잔교(뜬다리부두)가 아픈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 부잔교는 밀물 때 다리가 수면에 떠오르며 썰물 때 수면만큼 내려가는 수위에 따라 다리의 높이가 자동 조절되는 선박 접안 시설물이다. 3천t급 배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었고 이 다리를 통해 쌀 등이 일본으로 반출됐다. 현재 전체 4기 중 3기만 남아 있다. 부잔교 준공식에 참가한 사이토 총독이 ‘오, 고메노 군산(쌀의 군산)’이라며 경탄했다는 일화가 근대 군산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12 : 25. 서해랑길(군산 55코스) 안내도는 2번 부잔교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4.42km를 찍고 있으니 엄청나게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월명공원에 들어서면서부터 회한의 역사를 되뇌며 걸었으니 걸음이 더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자신만 생각하고, 내 이야기만 하며, 상대 의견은 묵살하라’. 미국의 한 신문에서 ‘비참해지는 방법’이라는 기사를 실으며 제시한 10가지 방법 중 첫 번째다. 이걸 반대로만 살아간다면 인생을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걷기 여행에서 우리 부부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하나라도 더 보려고 나대는 나, 반면에 체력이 약한 집사람은 조금이라도 덜 움직이려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도 똑 같은 상황이 발생했고, 이때 위의 방법을 떠올렸으면 좋았으련만 난 그러지를 못했다. 때문에 집사람의 고운 얼굴에서 짜증어린 표정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고사성어를 떠올리며 오늘 하루를 반성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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