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셰키 역사중심지와 칸의 궁전 그리고 아르메니아교회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 이란 및 러시아와 접한 카스피 해 연안의 국가.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데 경제의 상당 부분을 석유와 천연가스가 지탱하고 있어 불의 나라로 불린다. 동유럽권에 속해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까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와 달리 아제르바이잔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에 서아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점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동유럽권으로 보는 이유는 19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영향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셰키(Sheki) : 아제르바이잔 북서부에 위치한 인구 7만의 작은 도시. 기원전 6세기부터 존재했으며, 후에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가 되었다. 오늘날의 시가지는 1772년의 진흙 홍수로 인해 본래의 마을이 파괴된 이후 재건되었으며 높은 박공지붕을 얹은 집들이 이때 생겨났다. ‘칸의 궁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참고로 셰키라는 지명은 기원전 4세기에 흑해(黑海)에서 살던 사카족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됐다.

 

 셰키에서의 첫 일정은 알바니아교회 탐방이다. 교회는 키쉬(Kish)라는 작은 동네에서 내려 4륜구동의 승용차로 갈아타고 올라간다. 산자락에 있는 교회로 가는 길이 좁고 가파르기 때문이다. 조그만 하천을 건너고 마을을 지나면 이윽고 교회. ‘키쉬의 알바니아 교회(Kish Alban Mabadi)’라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코카서스 3(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조지아)을 둘러보는 여정이다. 첫 번째로 들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수도인 바쿠와 고부스탄, 샤마흐, 셰키(‘쉐키 또는 섀키’)를 방문하도록 일정이 짜여있다.

 아치형 문을 지나면 단순하면서도 고색창연한 교회가 반긴다. 육면체 형태의 2층 건물에 원통형 3층이 얹혀 있는 모양새이다. 지붕은 6각형의 빨간 기와로 끝이 뾰족하게 만들어졌다. 참고로 교회의 역사는 20세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단다. 당시(BC 1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 카프카스 지역에 콜키스(서부) 왕국과 이베리아(중부) 왕국, 알바니아(동부) 왕국이 있었는데, 이곳에 있던 알바니아 왕국이 지금과는 달리 기독교를 믿었던 모양이다. ! 여기서 말한 알바니아는 현재 발칸반도 서부에 있는 알바니아 공화국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도 알아두자.

 뒷마당에서 바라본 교회. 장미꽃이 만발한 꽃밭에 둘러싸인 건물은 창이 무척 작았다. 춥고 바람이 많은 산악지역의 건물이 지니는 특징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알바니아 왕국은 1세기 무렵 기독교가 전해졌다고 한다. 타데우스(Thaddeus)의 제자인 엘리세우스(Eliseus)에 의해서였다. 이후 조지아정교 계열의 교회를 거쳐, 8세기경에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계열의 교회로 변한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신도가 없어지면서, 이 교회도 카프카스 알바니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외부 담벼락은 전시장으로 꾸몄다. 감실 모양의 작은 방을 만들고 그 안에 교회의 변천과정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키쉬의 알바니아 교회가 로마교회 계열의 바실리카 양식과 정교회 계열의 비잔틴 양식을 결합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나?

 후기 중세시대 때 도자기를 굽던 가마라고 한다. 그 위에는 당시를 재현이라도 하려는 듯 도기들을 놓아두었다.

 바닥의 우물처럼 파인 곳은 성직자들의 무덤이라고 했다.

 출토된 인간의 유골도 전시해 놓았다. 안내판은 전기 중세시대의 무덤이라고 적고 있었다.

 이젠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에 제대와 촛대모양의 십자가가 놓여있다. 천정의 돔과 제대 뒤로 난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빛줄기가 어둠을 밝혀준다.

 천정의 돔과 샹들리에. 톨로베이트(tholobate, 둥근 천장을 떠받치는 하부 구조) 위 흰색 돔에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샹들리에에는 세 마리 새가 장식되어 있었다.

 촛대 모양의 십자가.

 교회 내부에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신도는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그러니 신도가 없는 교회가 박물관으로 바뀌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종교용으로 사용하던 도기와 생활용 도기, 화폐, 장신구 등이 벽을 따라 전시되어 있다. 도기는 BC 2~3세기에 사용되던 것이란다.

 놀랍게도 유리로 덮인 바닥에 유골이 놓여있었다. 키가 2m에 달하는 이 유골은 유전자가 노르웨이인과 일치한단다. 이 지역에 노르웨이인들이 최초로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이다. 그래선지 교회를 복원할 때 노르웨이에서 자금을 댔다고 한다.

 안내판은 붙어있지 않았지만 요건 카펫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아니다. 이 건물은 10세기에는 조지아정교회 교회, 18세기에는 이슬람 사원, 19세기에는 기독교 교회 등 시대에 따라 용도가 바뀌었다고 했다. 그러니 아라베스크 문양이 남아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곳은 알바니아교회’. 그러니 코카서스 알바니아 건축양식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빠듯해서 읽어보는 것까지는 사양했다.

 밖으로 나오니 기념품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알바니아교회를 찾는 관광객들의 숫자가 만만찮다는 증거일 것이다.

 돌아오는 길, ‘키쉬강을 건너는데 차가 움직일 줄 모른다. 목장에서 노닐어야 할 소들이 다리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전기사는 이런 풍경에 익숙해져있는지 천하태평. 그저 빨리빨리가 일상화 되어있는 우리네만 툴툴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들르게 될 왕의 여름궁전은 5km나 떨어져 있고, 궁전의 문이 닫힌다는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셰키 여행의 시작은 도심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칸의 여름궁전이다. 궁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성벽을 통과해야만 한다. 방어용의 육중한 성곽을 예상했으나 막상 눈에 들어오는 성벽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성문(·북문 중 북문일 것이다)이 더 초라한 것을 보면 외세의 침입이 별로 없었지 않나 싶다.

 조금 더 들어가면 담장에 둘러싸인 궁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화려함의 극치라는 칸의 여름궁전(Khan Xan Sarayi)’이다. 궁전은 1762년 칸의 집무실로 건축됐는데 주변에 겨울궁전과 가족 거주지, 하인의 집 등 건물 40여 채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여름궁전만 남아 있다.

 앙증맞은 매표소. 더 귀여운 기념품판매소가 같은 건물에 들어서 있다.

 이곳은 셰키 역사중심지와 칸의 궁전(Historic Centre of Sheki with the Khan’s Palace)’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019)되었다. 셰키 역사지구는 18세기 후반 건축된 전통적인 도시 형태를 유지해 왔으며 여러 문화가 조화된 건축적 앙상블이 뛰어난 예라고 한다. 1790년 건설된 도시 방어용 성채와 칸의 궁전, 공공건물과 상점, 장인의 공방, 실크 공장 및 협동조합건물, 개인 주거용 건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칸의 궁전이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셰키 성채의 지도도 눈에 띈다. 칸의 여름궁전을 중심으로, 주립미술관, 역사·민속박물관, 수공예가들의 집, 원형 사원, 섀배캐 공방 등이 들어서 있단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머릿속에 담아두고 투어를 시작해보자. 패키지여행을 따라온 나는 다음 방문지로 향하는 가이드의 꽁무니를 쫓기에 바빴지만...

 매표소 뒤는 잔디광장, 담벼락에 셰키의 사계를 담은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입장권을 사는 동안 둘러보기에 딱 좋은 곳이다. 아니 꼭 살펴보자.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수도인 바쿠에서 북서쪽으로 325 떨어져 있는 셰키(Sheki). 카프카스산맥 남쪽 능선의 해발 675m에 포근하게 자리하고 있다. 작지도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인구 7만의 도시는 낮은 산과 짙은 녹음이 둘러싸고 있어 거대한 숲 속에 들어선 듯 평온하고 싱그럽다(사진은 겨울 풍경을 게시했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마을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풍경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2층짜리 직사각형 건물. 즉 화려함의 극치라는 칸의 여름궁전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궁전은 규모는 작지만 극도의 화려함을 자랑한다. 건물의 정면은 청록색과 황토색, 하늘색의 기하학적 무늬와 꽃 그림을 표현한 타일로 덮여있고, 창문 양쪽의 입구와 테라스는 반짝이는 은빛 아치로 설계됐다. 2층짜리 저 목조건물을 못 등을 쓰지 않고 모든 재료를 하나하나 짜 맞추었다는 점이 특히 놀랍다.

 궁전은 셰키의 왕인 하지 샬랍(Haji Chalab: 1743~1755)’에 의해 건축이 시작되어, 1762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궁전은 2층이다. 하지만 두 층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아랫층이 공식행사를 위한 공간(왕의 서재와 응접실, 집무실)인 반면, 윗층은 왕과 가족들의 주거 공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다양한 그림도 주요 볼거리다. 아랫층에는 사냥과 전투장면 등의 역사기록화, 그리고 윗층에는 문학과 전설 속의 이야기가 프레스코화로 그려져 있다. 하나 더. 건물 보호를 위해 관람인원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순서를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제 이 되어볼 차례이다. 뒷짐을 지고 한껏 거스름을 피우며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벽면이 온통 다양한 색깔의 화려한 꽃과 나무, 화병, 기하학적 무늬로 덮여 있는 것이다. 하긴 프랑스의 문호 알렉산드르 뒤마 위대한 신이시여! 이 아름답고 역사적인 유적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주소서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는데 어련하겠는가. 하나 더.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된다. 하지만 내가 본 광경이 너무 아름다웠기에 그 아쉬움을 인터넷에서 퍼온 사진으로 전해본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단연 섀배캐'(Sebeke)’라 불리는 아름다운 문양의 창문이다. 화려한 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데, 어두운 실내에서 바라보는 창문의 화려함은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5500개나 된다는 호두나무 조각을 퍼즐처럼 끼워 만든 작고 세밀한 틀에 박혀 환상적인 정취를 연출한다.

 섀배캐는 제작하는 방법도 흥미롭다. 호두나무를 4~5 크기로 잘라 틀을 만들고, 거기에 왕궁을 짓기 위해 실크와 물물교환 해왔다는 베니스의 무라노산() 색유리를 끼워 완성한다. 문양에 따라 유리의 크기와 색깔이 제각각이어서 제작에 엄청난 정교함이 요구된단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 못을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한다.

 건물 정면의 테라스 아래쪽으로는 중앙에 분수대까지 이어지는 돌길이 조성돼 있다. 그중 백미는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 건물 바로 앞에 궁전보다 200년이나 오래됐다는 플라타너스 두 그루가 우람하게 서 있다.

 내 여행기의 모델은 오늘도 집사람이다. 궁전과의 앙상블이 맞지 않아 정원을 배경삼아 테라스에 앉혔지만...

 성채를 빠져나가는 길, 길가 울타리는 홍보용으로 변했다. 셰키의 사계와 함께 주민들의 삶을 담은 사진들을 게시하고 있었다. 참고로 셰키 역사지구 1790년대 건설된 도시 방어용 성채와 칸의 궁전, 공공건물과 상점, 장인의 공방, 실크 생산 공장과 협동조합 건물, 개인 주거용 건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는 ‘Round temple’로 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지었는지는 물론이고, 현재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칸의 여름궁전 투어는 남쪽 성문을 빠져나오면서 끝난다. 그런데 성벽이 북문과는 달리 육중하게 변해있다. 하지만 공성기기로 성문을 들이받는 영화에 익숙해서인지는 몰라도 성문은 여전히 초라했다. 참고로 궁전을 둘러싼 성벽은 궁전보다 늦게 완성되었다고 한다. 길이 1.2km의 성벽은 높이 4-6m에 두께가 2m란다.

 두 번째 방문지는 카라반 사라이(caravan sarai)’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실크로드가 지나던 나라였다. 그중 셰키는 바쿠와 트빌리시(조지아 수도), 현재의 러시아 데르벤트(Derbent)를 이으며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 역할을 했다. 그러니 실크로드 대상(카라반)이 쉬어가던 카라반 사라이가 있었을 것은 당연. 건물은 도적으로부터 상인과 물품을 보호하기 위해 성()처럼 지어졌다. 출입구도 저처럼 견고하게 만들어놓았다.

 18-19세기,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은 카라반세라이'(Karvansaray)’라 부르던 숙소에 머물렀다. 실크로드 무역이 성황을 이루던 당시는 이곳 셰키에 카라반사라이가 다섯 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젠 두 곳만 남아 있는데, 칸의 여름궁전에서 구불거리는 돌길을 따라 내려가면 그중 어퍼(Upper) 카라반사라이를 만날 수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중앙에 분수대가 있는 어둠침침하고 둥근 공간이 나타난다. 오래 전, 셰키는 동서양의 정보와 물물교환의 허브이자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무역의 거점이었다. 그러니 짐을 풀고 여독을 풀기 위해 찾아온 많은 상인들이 이곳에서 입실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참고로 지역 영주들은 낙타가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인 30~40km마다 대상을 상대로 한 숙소를 만들어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면서, 대상들을 자신의 지역으로 통과하도록 했단다.

 이어서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숙소의 안뜰이 모습을 드러낸다. 카라반사라이는 2층 구조로, 상인들은 위층에서 휴식을 취하고, 타고 온 낙타와 말, 가져온 물건은 아래층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정원은 야자나무와 활엽수를 심어 그늘을 드리우도록 했다. 작은 연못 주위에는 의자를 놓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쉬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했다. 소품 삼아 진열해놓은 옛 물건들도 눈길을 끈다.

 객실이 있는 2층부터 올라가본다. 객실의 수가 300개나 된다는데, 객실 문 앞과 복도가 모두 아치를 이루고 있다. 방 앞으로 길게 복도를 나있는데, 그 복도에서 중정(中庭)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1층 창고에 보관해놓은 물건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2층에서의 조망. 직사각형의 정원을 2층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옛날, 고즈넉한 저 정원은 카라반들이 쌓인 노독을 푸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또한 식량과 물을 비롯한 여행 필수품을 공급받으며 다음 여정을 구상했을 게 분명하다.

 객실은 텅 비어있다. 그렇다고 옛 영화까지 떠올리지 못할 이유야 되겠는가. 카라반사라이는 단순히 카라반들이 하룻밤 묵고 가는 장소가 아니었다. 각지의 카라반들이 서로 만나 문물을 교환하는 교역 장소이자 오가는 카라반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징세소(徵稅所) 역할을 했다. 또한 식량과 물을 비롯한 여행 필수품을 제공하거나 파는 공급소이기도 했다.

 일부 객실은 복층으로 나누어지기도 했다. 용도는 모르겠지만... 하나 더. 지금까지 둘러본 카라반사라이는 20세기 들어 기차와 자동차가 보편화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숙박과 창고 기능에서 문화와 관광 기능으로 그 쓰임새도 바뀌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문화유산과 호텔로 카라반사라이를 찾는다.

 카라반사라이는 지역경제를 지탱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오래전부터 카라반사라이 주변에 상가가 들어서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곳에는 기념품점과 셰키 할바'(S, ki Halva)’라 부르는 과자를 만들어 파는 상점, 카페, 식당 등이 들어서 있었다. 특히 실크로드 거점도시답게 실크 카펫이 눈길을 끌었다.

 셰키 투어의 마지막은 재래시장이다. 대형마트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에게는 다소 생소한 풍경.  1990년대, 그것도 시골에서나 만날 수 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며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

 주변 농가에서 길렀을 과일이나 채소 등 진열되어있는 상품만 볼 때는 우리네 재래시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원산지 표시와 함께 가격표가 필수인 우리네와는 달리 이곳은 흥정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시장은 여자들 세상이다. 물건을 팔려는 사람들이나 사려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자들이다. 그런데도 히잡을 쓰지 않는 등 놀랍게도 이슬람 국가의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제르바이잔에서 히잡을 쓰고 있는 여성들은 100% 타 이슬람 국가의 방문객들이라고 보면 된다던 어느 기사가 문득 떠오른다. 하지만 그들은 본인이 이슬람교라는 것에 강한 자각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혼전순결, 이슬람교인 혹은 이슬람교로 개종할 사람과의 결혼, 돼지고기 금식 등을 잘 따르고 있는 편이라고도 했다.

 ! 셰키는 전통적으로 누에 번식과 누에고치 무역에 경제의 중점을 두었다고 했다. 뽕나무가 자라기에 유리한 기후 조건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양잠업이 발달했고, 실크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이를 활용한 실크카펫 직조와 자수 같은 직물 수공예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관련 공방과 상점이 늘어났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내가 둘러본 재래시장에는 그런 실크관련 제품들 보다는 화학섬유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고객들의 기호가 바뀌었나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저렴한 가격이었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을 외쳐오던 체리(cherry)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가 하면, 가격도 1kg 1달러 밖에 되지 않는다. 덕분에 너도나도 한 보따리씩 사들고 하루 종일 먹어댈 수 있었다. 현지 화폐가 없어 가이드에게 선불을 부탁했음은 물론이다.

 이동 중에 만난 푸줏간. 주렁주렁 매달린 고깃덩어리가 눈길을 끈다. ! 실크산업의 중심지였던 셰키는 현재 농업과 목축으로 경제의 중심축이 옮겨졌다고 했다. 실크공장 한 곳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반면, 농산물과 축산물 가공공장은 성황을 이루는 중이란다.

 맥주집도 눈에 띈다. 통닭과 불가분의 관계인 우리네 호프집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소시지를 안주로 내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토마토와 고추는 서브메뉴?

 하룻밤을 머문 셰키 팰리스호텔’. 4성급 호텔로 카라반사라이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넓은 욕실에 샤워부스와는 별도로 월풀 욕조가 설치되어 있는 게 특징. 지대가 높아서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이었다. 본관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가는 어려움이 옥의 티라고나 할까?

 에필로그(epilogue) : 아제르바이잔 여행을 마치고 이제 조지아로 넘어간다. 여행사는 2 3일의 짧은 일정에도 이곳저곳 열심히 안내해줬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 3대 성지 중 하나라는 아테시카 사원을 둘러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성스러운 불의 나라에 와서 불을 숭배하는 종교의 성지를 찾아보지 않았으니 어찌 서운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조로아스터교는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의 예언자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가 창시했다. 불을 숭배해 배화교라고도 한다. 그 성지인 아테시카 사원은 수백 년 동안 조로아스터교 신도들 신앙의 중심이었다. 사원 중앙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아직도 타오르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