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白雲山, 882.5m)
산행일 : ‘12. 6. 16(토)
소재지 :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과 평창군 미탄면의 경계
산행코스 : 점재나루→점재마을→마을 뒤 산비탈→수동마을 연결능선 안부→정상→칠족령→제장마을(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와일드로즈 산악회
특징 : 동강이 마치 뱀이 기어가는 모양으로 사행천(蛇行川)을 이루며 산자락을 깎아내며 수직단애(垂直斷崖)를 만들어 놓은 백운산은, 동강의 중간지점에 자리하고 있어서 동강의 전망대(展望臺)라고 할 수 있다. 남한 땅에는 50여 개가 넘는 백운산이 존재하지만, 빼어난 절경(絶景)과 뛰어난 조망(眺望)으로 인해 이곳 동강가의 백운산이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 산행들머리는 점재나루
중앙고속도로 제천 I.C를 빠져나와, 38번 국도(國道)를 이용 태백방향으로 달리다가 예미교차로(交叉路)에서 '동강, 백운산'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 고개를 넘으면 얼마 후에 예미초교 고성분교를 지나게 되고, 이어서 나리재를 넘으면 드디어 동강이 나타난다. 동강의 강변길(교행 가능한 1차로)을 따라 얼마간 들어가면 동강을 가로지르는 점재교가 나오는데, 산행은 이 다리(橋)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점재다리는 비가 많이 내려 물이 불어날 경우에는 물에 잠겨버리는 잠수교(潛水橋)이다. 10년 전, 그러니까 내가 이곳을 처음으로 찾아왔을 때에는 이 다리는 놓여있지 않았었다. 강의 양쪽을 줄로 연결해 놓고, 줄을 당기면서 배를 이동시키는 일명 ‘줄배’를 타고 동강을 건너야만 했다. 강을 건너면서 바라보면, 동강의 은빛 물줄기와 강물을 병풍처럼 감싼 백운산 일곱 봉우리가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風光)이다.
▼ 잠수교를 건너자마자 길은 왼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면서 강변(江邊)을 따라 이어진다(이정표 : 백운산 입구 0.4Km/ 점재). 우측에 백운산 정상이, 그리고 정면에는 수리봉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강변길을 따라 200m쯤 들어가면 주차장(駐車場)이 나오는데, 지키는 사람 대신 주차요금이 4천원임을 알리는 안내판만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동네에 들어서서 민박(民泊)집 앞 삼거리에 세워져 있는 '동강유역 자연휴식지 탐방안내도' 앞에서 오늘의 산행코스를 정한 뒤에, 왼쪽으로 방향을 꺾으며 산행을 이어간다(이정표 : 백운산 정상 2.0Km). 3분 정도 걸으면 오른편에 비포장 임도(林道)가 보이는데 주의해야할 지점이다. 정규등산로는 이곳에서 조금 더 걸으면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왼편의 강변 오솔길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 앞서가는 사람들이 처음 마주친 갈림길에서 오른편 임도로 들어서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백운산 산행은 이번이 두 번째, 내 기억에 낯선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의 등산로치고는 너무 거칠기 때문이다. 지름길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따라 들어서면서 오늘 산행은 고난(苦難)의 행군으로 변해버린다. 밭두렁을 따라 들어선 산길은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이런 경우에는 좌우(左右)로 길을 뚫으며 정규 등산로를 찾는 것이 상식이건만, 산행대장은 무작정 맞은편 산비탈을 치고 오른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아마도 오늘 산행거리가 짧기 때문에 일부러 거리를 늘리려는 모양이다.
▼ ‘코에서 흙냄새가 나네요.’ 집사람의 느닷없는 멘트이다. 언젠가 제천에 있는 떡갈봉을 함께 오르시던 이석암선생(‘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이 산의 가파름을 빗대어 이르던 말씀이다. 오르고 있는 산비탈이 너무 가파르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지난 추억(追憶)이 머리에 떠올랐던 모양이다. 그만큼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산길은 심하게 가팔랐고, 거기다 더하여 미끄럽기까지 했다.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다보면 허리를 펴볼 틈도 없다. 워낙 가파른데다가, 습기를 머금은 땅이 매우 미끄러운 탓에, 최대한 엎드린 채로 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변에 보이는 나뭇가지에 의지하며 겨우겨우 비탈길을 기어오른다. 이런 곳에서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도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俗談)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모처럼 이번 산행에 참가한 박승지군(君)은 초반부터 힘들어 하더니만 언제부터인가 시야(視野)에서 사라져 버렸다.
▼ 고난의 비탈길에서 1시간쯤 헤매다보면 백운산의 8부 능선쯤 되는 지능선(支稜線)에 올라서게 된다. 박군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지능선도 가파름이 약간 완만(緩慢)해졌을 뿐 사람들이 다닌 흔적(痕迹)은 찾아볼 수 없다. 10여분 정도 지능선을 밟고 오르면 갑자기 뚜렷한 등산로가 나타난다. 드디어 수동리 방향에서 올라오는 능선에 올라선 것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주능선은 완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많이 가파르지도 않다. 그저 걷기에 편하다고 할 정도이다. 거기다 말의 갈기처럼 날카로운 능선에는 심심찮게 바윗길이 나타나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아직도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는 것은 서운하지만 바위 모서리를 잡는 손맛으로 위안을 삼는다. 능선 주변의 나무들은 참나무일색(一色). 오뉴월 염천(炎天)에 지칠 법도 하건만, 울울창창(鬱鬱蒼蒼) 짙은 녹음을 자랑하고 있다.
▼ 주능선을 따라 20분 정도를 걸으면, 점재나루에서 올라오는 본래의 등산로와 만나게 된다. 갑자기 넓어지는 등산로와 보조라도 맞추려는 듯이 등산객의 숫자도 비례(比例)해서 늘어나고 있다. 등산로 주변도 점점 시끌벅적하게 변해간다. 이를 보고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표현을 쓰면 맞는 표현일까? 본래의 등산로를 만나게 되는 반가움 대신에 사색(思索)을 즐기며 걷는 낭만은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 본래 등산로와 만나는 지점에서 정상까지는 잠깐이다. 길 아닌 길에서 헛힘을 쓰는 사이에 어느덧 정상 가까이에 이르게 된 것이다. 덕분에 우린 멋진 전망대(展望臺) 하나를 지나쳐버렸다. 전망대 아래로 길게 뻗어 내린 능선 끝에 걸려있는, 동강 12경 중 제3경인 나리소와 바리소라는 볼거리를 놓쳐버린 것이다.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굽어 도는 동강의 물줄기인 나리소와 바리소는 백운산의 산세(山勢)와 절벽의 단애(斷崖)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짙게 우거진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간간히 바람까지 불어주어서 어렵지 않게 오를 수가 있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이 조금 못 되었다.
▼ 너덜로 이루어진 10평쯤 되는 정상에는 정상표석이 삐딱하게 세워져 있고, 그 뒤를 돌탑 3기(基)가 지키고 있다. 정상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탓에 저 멀리 보이는 함백산과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능선 외에는 조망(眺望)이 시원스럽지 못하다. 만일 겨울철에 왔었더라면 마치 뱀이 똬리를 틀듯 요동치고 있는 동강의 풍광(風光)을 실컷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또다시 뒤로 쳐진 박군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점심상을 차린다. 누군가가 ‘땀 흘린 자만이 참다운 밥맛을 안다.’라고 했다. 비록 산을 오르면서 땀을 흘린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땀 흘린 뒤의 밥맛은 좋아야만 했다. 그러나 밥을 보자 구토증세가 나타난다. ‘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 어쩌면 너무 많이 땀을 흘린 탓이 아닐까 싶다. ‘와일드로즈 산악회’에서 나누어준 막걸리로 점심식사를 대신하고 산행을 다시 이어간다.
▼ 하산은 칠족령(제장마을) 방향인 남서쪽 능선을 따른다.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곧바로 삼거리가 나온다(이정표 : 정상 0.2Km/ 칠족령 2.2Km, 제장 3.0Km/ 문희마을 1.7Km). 오른편은 천연기념물 제260호인 백룡동굴이 있는 문희마을 쪽으로 내려서는 길, 당연히 칠족령을 향해 직진한다. 칠족령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의 연속이다. 등산로 주변은 굴참나무와 신갈나무가 군락(群落)을 이루는 등 식생(植生)이 뛰어나다. 왼편에 동강이 내다보이는데, 동강 방향에 매어놓은 안전로프 아래는 수직(垂直)의 낭떠러지이다.
▼ 30도가 넘는 무더위라는 일기예보(日氣豫報)가 이곳에서는 100% 오보(誤報)가 되어버렸다. 나뭇잎을 살랑살랑 흔들어 줄 정도로 불어대는 산들바람은, 무더위는커녕 차라리 선선한 가을 날씨를 연상시킬 정도인 것이다. 산자락 끝에 걸려있는 제장 마을이 보인다. 동강은 강 마을에서 잠시도 쉴 생각을 하지 않고 또다시 휘어 돈다. 여기저기로 뻗어나가려는 산줄기를 동강이 가로막고 있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의 품처럼 산줄기들을 감싸 안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 울퉁불퉁한 바위길 왼쪽은 아찔한 낭떠러지. 아까 산행을 시작할 때 보았던 천길 단애(斷崖)인 것이다. 대단히 겁나는 코스이지만 조금만 주의하면 위험하지는 않다. 절벽(絶壁) 방향에 매어놓은 안전로프를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이기 때문이다. 10분 가까이 내려가다 보면 왼편 동강방향으로 시야(視野)가 뻥 뚫리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첫 번째로 만나는 전망대(展望臺)이다. 전망대에 서면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형상의 동강과 제장나루가 뚜렷이 드러나고, 맨 오른편에는 칠족령도 눈에 들어온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전면(前面)에 나타나는 바위 절벽(絶壁)을 바라보면서 마치 커다란 캔버스(canvas)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만일 그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었는데, 이제야 그 해답을 찾은 것 같다. 그 캔버스에는 바로 이런 비경(秘境)을 담아야만, 캔버스가 지닌 본래의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 백운산의 동강쪽 단애(斷崖) 위를 걷는 산길은 계속된다. 산길은 동강방향으로 빠짐없이 로프를 연결해 놓았고, 경사(傾斜)가 가파른 내리막길에는 어김없이 나무테크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조금만 주의하면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온몸으로 느끼는 긴장감까지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 왼쪽으로 드러나는 동강의 비경(秘境)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구경하면서 여유로운 산행을 즐겨본다.
▼ 가지 말라는 능선 쪽으로 나갔다가 화들짝 놀란다. 멋진 조망(眺望)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발아래 절벽(絶壁) 끝으로 굵은 물뱀처럼 동강의 강줄기가 기어가고 있고, 그 뒤에는 산봉우리들이 뭉게구름처럼 떠다닌다. 맞은 편 산골짜기에 조용히 누워있는 산골마을은 떠나온 고향마을처럼 정겹기만 한데, 옛 생각에 잠긴 나그네는 발걸음을 떼어놓을 줄을 모르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風光)이다.
▼ 전망대(展望臺)에 올라서면 ‘정선아리랑’의 애환(哀歡)이 서린 동강의 아홉 구비 물줄기가 발아래에 펼쳐지고 있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강원도 심심산골의 나무들은 잘리어 뗏목으로 만들어 졌다. 이 뗏목들을 아우라지에서 서울까지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백운산을 휘감고 있는 동강을 필히 거쳐 갈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공(砂工) 들이 암초와 벼랑에 부딪혀 물속으로 사라지기 일쑤였을 것이고, 그래서 '정선 아리랑'이라는 지역민요(民謠)가 생겨났을 것이다. 백운산 주변의 아홉 굽이를 돌아 평창군 미탄면의 '황새여울'까지 통과해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을 만큼 백운산 주변의 물굽이는 험하고 또 험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가슴 졸이게 만들었던 물길이 바로 발아래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 ‘백운산 암반구간은 지형이 험준하고 대단히 위험하여 추락 및 낙석위험이 있으니 탐방객들의 주의를 부탁드린다.’며 겁을 주고 있는 동강관리사업소의 안내판(案內板)이 아니더라도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구간이 계속된다. 하나 주의해야할 점은, 조심할 곳에서는 조심하더라도 ‘위험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지점을 그냥 지나치는 우(愚)는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풍광(風光)을 가장 잘 보이는 구간마다 안내판을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 정상에서 시작된 하산길은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보았던 이 능선은 서너 개의 봉우리만 넘으면 될 것처럼 생각되었는데, 실제로는 주봉을 포함해 총 7개 봉우리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만 넘으면 제장마을이겠거니 하며 봉우리 위로 오르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또 하나의 봉우리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렇게 하산길 오르내림은 지루하게 반복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곳곳에 지나치기 어려울 만큼 조망(眺望)이 아름다운 전망대(展望臺)가 심심찮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 이제나 저제나 하며 마지막 봉우리를 찾아 진행하다보면, 깊게 패인 안부를 지나 돌탑(石塔)이 있는 봉우리 위로 올라서게 된다. 진행방향에 또 하나의 봉우리가 솟아있는 것을 보면 여섯째 봉우리인 모양이다. 돌탑 뒤에는 98년 산행 중 실족(失足) 추락사했다는 어느 여성산악인을 기리는 추모비(追慕碑)가 박혀 있다. 돌탑에서 바라보는 동강은 또 하나의 절경(絶景)을 만들어 내고 있다. 만일 추모비의 주인공이 이곳에서 추락했다면 저런 아름다운 풍광(風光)에 넋을 잃었던 것이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 돌탑봉에서 가파른 내리막을 잠깐 내려서면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문희마을 갈림길이다(이정표 : 정상 2.2Km/ 칠족령 0.2Km, 제장 1.2Km/ 문희마을 1.4Km)
▼ 문희마을 갈림길 안부에서 맞은편 봉우리를 향해 짧은 오르막을 타면 칠족령(이정표 : 정상 1.8Km/ 칠족령전망대 0.5Km, 문희마을 2.0Km/ 제장 1.0Km)에 올라서게 된다. 정선 땅인 신동읍 덕천리 제장마을과 평창 땅인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을 연결하는 길목인 칠족령은 안부가 아니라 조그마한 봉우리 위에 있는 갈림길이다. 보통 령(嶺)이라는 지명(地名)은 고갯마루를 뜻하는데, 이곳 칠족령은 해발 527m의 작은 봉우리인 것이다. 아마 봉우리 위가 납작하게 생긴 탓에 고갯마루로 불리는 모양이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칠족령 전망대‘와 ’하늘벽 유리다리‘를 거쳐 연포마을로 하산할 수 있다. 칠족령에 올라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동강 위로 치솟은 백운산 정상부가 훤칠하다. 그래서 백운산과 칠족령을 한데 묶어서 동강 12경 중 제4경으로 치는 모양이다.
* 동강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한 칠족령은 이름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옛날 문희마을에 살던 이진사(進士)가 가구에 칠하려고 옻나무진액을 통에 담아 두었는데, 어느 날 기르던 개가 옻통을 쏟아 놓고 사라져 버렸던 모양이다. 이진사가 옻나무진액이 묻은 개 발자국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다 만난 곳이 칠족령이라고 한다. 그는 그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개 발자국을 따라 길을 만들었고, 후세(後世) 사람들은 그 고갯마루 이름을 옻칠(漆), 발족(足) 자를 써서 '칠족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칠족령의 울창한 참나무 숲 아래로 이어지는 산길을 내려서면, 한동안 가파른 내리막길이 이어지다가 끝을 맺으면서, 또 하나의 갈림길이 나타난다(이정표 : 하늘벽 유리다리 600m/ 백운산/ 제장). ‘하늘벽 유리다리’로 가는 길과 나뉘는 삼거리이다. 삼거리에서 산길이 잠깐 평평하게 이어지더니,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치는 양 다시 한 번 가파른 내리막길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구간은 잠깐이면 끝이 나면서 이내 걷기 좋은 흙으로 변한다. 고단한 다리에 평화가 깃든다. 마을 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아마 제장마을이 멀지 않은 모양이다.
▼ 산행날머리는 제장마을 주차장
고운 빛깔의 황톳길을 걷다가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면서, 등산로는 왼편에 사과나무 과수원(果樹園)을 끼고 이어진다. 사과나무 과수원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매점에는 간단한 안주(부침개 종류)와 주류를 팔고 있으니 짬이 날 경우에는 잠깐 쉬었다가 가도 좋을 것이다. 다문화(多文化) 가정(家庭)의 안주인인 듯한 이국적(異國的) 용모(容貌)의 주인장이 건네 오는 너스레가 맛깔스럽기 때문이다. 매점에서 왼편으로 꺾어 나오면 이내 여러 채의 민박집들이 보이고, 그 옆에 널따란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서 100m쯤 더 걸어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동강에서 땀에 찌든 몸을 씻고 돌아와 산행을 마친다.
▼ 제장마을 앞 절벽(絶壁)을 주민들은 '하늘벽'이라 부른다. 비록 절벽 아래를 돌면서 동강이 만들어내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물줄기와 겹치는 광경을 한꺼번에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깎아지른 듯한 '뼝대(바위로 이뤄진 높고 큰 절벽을 일컫는 영서지방의사투리)' 하나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자랑하고 있다.
♧ 에필로그(epilogue)
오늘 따라나선 산악회는 주변에서 흔히 보아오던 안내산악회가 아니었다. 스위스의 아웃도어(outdoor) 제품인 ‘와일드 로즈’를 수입해다 팔고 있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산악회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늘 산행은 저렴(低廉)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 받을 수 있었다. 맛깔스런 음식점에서 사준 점심식사는 차지하고라도 산에 올라가서 마시라고 나누어주는 막걸리는 그 어떤 산악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었다. 아무튼 ‘와일드 로즈’라는 브랜드는 여성만을 위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귀경길에 들른 천호동 매장(賣場)에는 비록 종류는 많지 않지만 남성의류도 진열되어 있었다. 아마 광고모델인 티아라의 미모(美貌)에 반해 여성전문점임에도 불구하고 기웃거리는 사내들이 심심찮게 보였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