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부안) 마실길 5코스와 6코스 일부

 

여행일 : ‘16. 4. 4()

소재지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트레킹코스 : 국립변산자연휴양림금강가족타운김해김씨 제각모항 갯벌체험장모항모항해수욕장산림연수원상그릴라솔섬(총 거리 : 11.3km)

 

함께한 사람들 : 집사람과 함께

 

특징 : 부안은 맛과 풍경, 그리고 이야기 등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해서 변산삼락(邊山三樂)’이라 불렸다. 누군가가 그랬다. 왜 부안을 일러 변산삼락이라 했는지를 알려면 변산 마실길을 걸어보라고. 총 길이 66km8개 코스로 나눈 마실길에 부안의 모든 볼거리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길을 걸으며 자연경관 감상은 물론이고 문학과 역사에 대한 공부, 생태탐방까지도 가능하단다. 세계 최장의 새만금 방조제와 대항리 패총, 곤충체험, 여해신 계양할미를 모시고 있는 수성당, 변산·고사포·모항·상록해수욕장, 사극촬영 명소인 부안영상테마파크, 조각전시관, 소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곰소염전, 그리고 곰소 소금을 이용해 만든 젓갈, 줄포자연생태공원 등 발 딛는 곳곳이 온통 볼거리며 즐길 거리, 이야기 거리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거기다 부안의 대표 음식인 바지락 죽을 비롯한 풍부한 먹거리도 접할 수 있다고 한다. 이만하면 그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일등 둘레길이라고 할 수 있다.

 

트레킹 국립변산자연휴양림(부안군 변산면 도청리)

서해안고속도로 줄포 I.C에서 내려와 710번 지방도를 타고 줄포면(부안군)소재지까지 일단 온다. 이어서 23번 국도로 옮겨 부안방면으로 달리다가 영전사거리(부안군 보안면 영전리)에서 이번에는 30번 국도로 옮겨 변산반도 해안 일주도로를 타고 가다가 국립변산자연휴양림간판을 보고 해안 쪽으로 내려서면 바로 매표소다. 이곳에서 인터폰을 이용해 예약을 확인한 후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해안가에 지어진 자연휴양림이 나온다. 나들이를 위해 머물렀던 국립변산자연휴양림은 기존에 내가 가져왔던 고정관념(固定觀念)을 송두리째 깨버렸다. 휴양림이라면 산속에다 짓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바닷가에 지어 놓았던 것이다. 특히 2개 동으로 된 숙소는 모든 객실에서 아름다운 서해가 눈앞에 펼쳐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한 휴양림 뒤편에는 솔향과 피톤치드가 가득한 솔바람 숲길 3를 조성했다. 바다와 숲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도록 한 아이디어가 시선하게 다가온다. 휴양림은 숙소인 산림문화휴양관’ 2동 외에도 방문자안내소, 야외수영장, 생태습지관찰원과 전망대 등의 부속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객실 당 하나뿐인 화장실을 보완해 주려고 지어 놓은 크고 깔끔한 야외화장실이 눈길을 끌었다. 고객을 배려하는 자세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숙소인 산림문화휴양관은 2동으로 원룸형(5인실)과 투룸형(7인실), 그리고 원룸형 복층(다락방, 9인실) 등 다양한 타입의 객실을 갖췄으니 참조한다.



휴양림의 백미(白眉)는 뭐니 뭐니 해도 전망데크가 아닐까 싶다. 생태습지관찰원의 정중앙에 지어놓은 데크에 오르면 아름다운 변산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바다에는 어선이 한 척 떠있다. 고기잡이라도 하고 있으려니 했는데 첫날, 그리고 다음날은 물론, 우리가 떠나온 셋째 날까지도 처음 그래도 정박해 있었다. 아무래도 데커레이션(decoration)용으로 갖다 놓은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저 바다는 저녁에 더욱 빛을 발한다. 바다 건너 심원면(고창군)의 불빛들이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처럼 반짝거린다.



마실길 나들이의 시작은 자연휴양림에서부터 시작한다. 리아스식 해안을 끼고 있는 자연휴양림 앞으로 마실길 해안 탐방로’ 8개 구간 중 6코스인 쌍계재 아홉구비길이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휴양림에서 5코스의 모항까지는 2.3, 7코스인 곰소염전까지는 10.7이다.




마실길로 들어선다. 깔끔하게 잘 정비된 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될 만큼 널찍하기까지 하다. 부안군청에서 정성들여 가꾼 결과일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 1844~1900)걷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은 믿지 말라고 단언했고,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또한 약보보다 식보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가 낫다고 주장했다. 이로보아 걷는 게 좋다는 것은 동서양을 불문한가 보다. 그러니 어찌 걷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건강을 지키거나, 혹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어딘가 걷기를 원한다. 그런 마음을 지자체에서 놓쳤을 리가 없다. 그리고 앞을 다투어 가며 길 만들기사업을 벌였다. 그로 인해 생겨난 길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 변산 둘레길이다.



바닷가를 따라 쳐진 철조망 너머에 군()의 초소가 보인다. 흉물스러운 몰골이다. 철조망에는 군 작전지역이므로 승인되지 않은 접근을 금지한다.’는 경고푯말까지 붙어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겁주고 있다. 언젠가 부안 마실길 일부 구간에 군부대 시설이 수년째 방치되고 있다는 기사(記事)를 본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천혜의 자연경관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저런 시설들을 두고 했던 말인가 보다.



길을 가다보면 가끔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자그만 판자들이 눈에 띈다. 판자들 마다 추로여주(秋露如珠), 가을 이슬은 구슬과 같구나.’ ‘인자요산(仁者樂山)’ ‘화광동진(和光同塵, 재주와 덕을 감추고 세속과 어울림) 등의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적혀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당신을 기다릴 것 같아요’, ‘결코 안 갈 것 같던 시간도 가고, 절대 안 올 것 같던 시간도 온다. 시간은 글쎄도 설마도 없다.’는 등 판자의 뒷면에 적혀있는 글들이 더 눈길을 끈다. 특히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먹지라는 술타령은 실소까지 짓게 만들고 있다.



길가 풍경은 절경(絶景)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훌륭하다 할 정도의 경관을 보여준다. 작은 바위벼랑과 손바닥만한 백사장으로 이루어진 해안은 귀엽기까지 하고, 길가에는 벚꽃이나 진달래 등 화사하게 핀 꽃나무들이 즐비하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길이 잘 정비되어 있는데다 중요한 포인트마다 이정표를 꼬박꼬박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포인트가 아닌 곳일지라도 필요하다싶으면 어김없이 아래 사진과 같은 이정표를 꽂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었다면 잃은 사람이 더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길을 가다보면 심심찮게 춘란(春蘭)이 눈에 띈다. 때가 때인지라 꽃망울들을 활짝 열고 있다. 남도(南道)에서나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저 멀리 내변산의 울퉁불퉁한 암릉들이 눈에 들어오는가 싶으면 마실길은 금강가족타운이란 펜션에 이른다. 객실이 많음은 물론이고, 널따란 야외수영장과 족구장, 씨름장까지 갖추고 있는 펜션이다.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으니 갯벌체험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일 것이다. 하지만 인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아마 여름철 성수기에만 문을 열지 않나 싶다.




마실길은 펜션의 앞마당을 지난다. 이어서 맞은편 산자락으로 난 오솔길을 지나면 방조제(防潮堤)가 나온다. 둑을 따라 걷다보면 왼편에는 모항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고 오른편에서는 갑남산의 산줄기가 나타난다. 암릉으로 이루어진 능선이 나름대로 빼어난 산세(山勢)를 자랑하고 있다.




방조제를 지나면 마실길은 비록 잠시지만 30번 국도를 따른다. 도로변에 김해 김씨문중의 제각(祭閣)으로 여겨지는 건물이 보이니 참조한다.



국도를 따라 잠시 걸으면 마실길은 국도와 헤어져 왼편 바닷가로 향한다. 거북이를 빼다 닮은 바위가 보초를 서고 있는 갈림길 들머리에 이곳이 마실길의 종점임을 알리는 이정표(솔섬 4.9Km/ 곰소 13.0Km)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현재의 위치가 ‘3코스의 종점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부안군청의 홈페이지에서 다운 받은 지도에 이곳은 분명히 ‘5코스의 종점으로 나와 있다. 이왕에 예산을 들여 만들었다면 조금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지 않았나 싶다. 여행자들이 헷갈려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닷가를 따라 몇 걸음 더 걸으면 3층으로 지어진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일정한 돈을 내고 갯벌을 체험할 수 있는 모항갯벌체험장이란다. 펜션과 식당에다 체력단련장과 야외공연장, 인공폭포 등의 부대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갯벌체험을 하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텅 비어있기는 매한가지이다.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음이리라.



진행방향 저만큼에 모항이 보인다. 이름처럼 어머니의 품같이 아늑한 어촌마을이다. 19991231새천년을 잇는 영원의 불씨를 채화했던 곳이라고 한다. 자 그럼 모항으로 들어가 보자. 시인 안도현은 말대로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알아보기위해서이다.



체험장에서 조금 더 걸으면 바다의 위에다 만들어 놓은 전망데크가 나온다. 모항 앞바다의 갯벌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곳이다. 여기서 갯벌체험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는 없다. 자 그럼 체험을 떠나보자. 편안한 복장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갯벌체험장으로 간다. 갈고리와 바구니를 받아들었으면 준비는 완료된 셈이다. 이때 신발은 벗어버리자. 대신 헌 양말만 신으면 된다. 갯벌이 단단해서 발이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갯벌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갈고리로 개흙을 떠가며 조개를 잡는다. 조개는 깊은 곳에 서식하지 않기에 개흙을 조금만 떠내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갯벌에 쪼그려 앉아야 해서 힘들어 보이겠지만, 조개를 발견하고 바구니를 채우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다. 모항 갯벌에서 채취하는 조개는 가무락조개라 불리는 모시조개와 동죽이다. 채취한 조개는 집으로 가져가면 된다. , 1인당 1kg까지만 채취할 수 있다니 참조한다.



모항에서는 마을로 들어가는 것을 사양하고 곧바로 해수욕장으로 향한다. 방풍림(防風林)으로 조성된 듯한 오래 묵은 해송(海松)들이 지금은 피서객들의 편안한 쉼터로 변해있는 해수욕장이다. 이 해송 숲은 모항해수욕장의 랜드마크(landmark)이기도 하지만 전국 사진작가들의 일몰 포인트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안도현 시인의 모항 가는 길이 유명세를 타면서 변산반도의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안 시인은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반도를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라고 표현했다. 아무튼 보드랍기 짝이 없는 모래사장과 멋진 노송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경관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임에 틀림없다. 참고로 이 해수욕장은 국토해양부에서 최우수 청정 해수욕장으로 선정(2010)한바 있다.




해수욕장을 빠져나오면 국도(이정표 : 솔섬 3.1Km/ 버스타는 곳)와 다시 만난다. 이어서 국도를 따라 잠시 걸으면 모항전망대가 나온다. 망망대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변산산림수련관이 주변 풍경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멋진 경관이 조망되는 곳이다.





전망대의 맞은편 언덕 위에는 바람의 정원 펜션이 있다. 펜션은 갑남산의 암릉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언덕의 경계선에는 수많은 바람개비들을 세워 놓았다. 펜션의 이름과 잘 어울리는 조형물이 아닐까 싶다.



전망대를 조금 지나자마자 왼편으로 내려선다. 국도와 헤어지는 지점에 이정표(솔섬 2.9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잠시 후 조금 전에 보았던 변산산림수련관을 만난다. 산림공무원을 비롯한 산림관계자들의 수련과 교육 및 휴양을 위한 시설로, 3개 층 14개의 객실에 100여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산림수련관을 지나면 마실길은 바닷가 갯바위 위를 따른다. 바위의 경사가 못내 조심스러웠던지 데크로 길을 만들어 놓았다. 데크길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며 만들어 내는 풍경이 무척 아름다운 구간이다. 5코스의 백미(白眉)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바위구간이 끝나는 곳에는 정자(亭子)를 지어 놓았다. 정자에 오르면 서해바다가 거칠 것 없이 펼쳐진다.



정자를 지나서도 마실길은 계속해서 바닷가를 따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맨땅이다. 그리고 잠시 후 길가에 조성해놓은 유채 밭을 만난다. 사람들은 유채꽃, 특히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대규모의 유채꽃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제주도와 부안의 수성당을 꼽는다. 비록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샛노란 유채꽃이라도 피는 시기에라도 찾아온다면 맞은편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는 멋진 광경을 볼 수도 있겠다.




유채밭을 지나면 또 다른 정자(亭子), 그리고 잠시 후에는 널찍한 해안을 마당으로 삼고 있는 상그릴라펜션에 내려서게 된다. 이층으로 지어진 커다란 본관 외에도 가지각색으로 지어진 작은 방갈로들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조를 지닌 펜션이다. 언덕 위에 야외캠핑장도 만들어져 있는 걸로 보아 캠핑마니아들도 즐겨 찾는 모양이다. 하긴 캠핑과 물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으니 어찌 찾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곳도 역시 텅 비어있기는 매한가지이다. 그저 스쿠버다이버(scuba diver) 몇 명이 잠수 준비를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샹그릴라(shangrila)는 히말라야에 실제로 존재하는 어느 지역의 지명인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1933년에 펴낸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이란 소설에서 이상향으로 창안해 낸 가상의 도시일 따름이다. 하지만 샹그릴라는 이상향을 가리키는 어휘로 사용될 정도로 일반화 되어 있다. 이곳이 샹그릴라에 가까울 정도라고 완전하고 평화로운 곳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나 보다. 마치 자기가 이상향에 들어서기라도 한 듯 집사람의 얼굴에는 행복에 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바닷가 모래사장에 만들어 놓은 대형 그네이다. 바다를 향해 그네를 지치기라도 하면 저 너른 서해바다가 온통 내 것이 될 것만 같다. 내 발아래에 깔려있는 이상 내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말이다.




상그릴라를 지나 다시 오솔길로 들어선다. 처음으로 상록활엽수를 만나게 되는 구간이다.



길을 가다보면 줄에 매달려 있는 자그만 판자들이 보인다. 글씨가 희미해져 알아 볼 수는 없지만 매달은 이의 소망이 적혀있는 판자들일 것이다. 가끔 외국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풍경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보게 되니 반갑기까지 하다.



잠시 후 저만큼에 전북학생해양수련원 건물이 나타나면서 마실길 5코스가 끝을 맺는다. 수련원 앞에 있는 작은 섬이 바로 솔섬이기 때문이다.



무인도인 솔섬은 섬이라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작고 외로운 섬이다. 하지만 섬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가 그런 편견들을 불식시켜버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멋지다. 특히 저녁노을 때의 낙조 풍경은 전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붉은 해가 솔섬을 넘어가는 길에 솔섬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에 잠시 걸리게 되는데, 이때 용(소나무)이 여의주(태양)를 물고 있는 형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솔섬이 건너다보이는 학생해양수련원 앞에는 새겨둘 내용도 없는 글귀를 적어 놓은 솔섬에 대한 안내판과 부안마실길 안내도’, 그리고 이정표(궁항 3.0Km/ 버스타는 곳/ 모항갯벌체험장 4.7Km)가 세워져 있다. 이곳이 2코스의 종점이란다. 하지만 군청 홈페이지에는 4코스 종점으로 나와 있으니 참조한다. 하긴 마실길에 세워진 이정표들은 하나 같이 이런 식이었다. 마실길 구간을 4개의 코스로 나누느냐, 아니면 8개로 나누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게 되는데, 이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대산 선재길 트레킹

 

여행일 : ‘15. 10. 20()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트레킹코스 : 월정사 일주문전나무숲길월정사지장암동피골상원사주차장상원사(총 거리 : 10.5km)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오대산 선재길은 옛 구도자(求道者)들이 득도(得道)를 위해 걸었다고 하는 월정사에서 상원사를 잇는 약 9의 숲길이다. 길 대부분이 평지이고 울창한 전나무 숲 사이로 나있기 때문에 거닐며 명상에 잠기기 딱 좋다. 이런 길은 꼭 구도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 또한 도를 얻지 못한다고 해도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저 숨 가쁜 일상에 지친 도시인들이 잠시나마 조용히 사색(思索)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면 족할 것이다. 이때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걷기 여행지로 제격인 곳이 바로 오대산의 선재길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선재길이 개통되기 전에도 길은 있었다. 2004년 무렵부터 월정사가 걷기 행사를 하면서 옛길 복원사업이 시작됐다. 수십 년 전, 아니 아득한 옛날에 승려들이 두 발로 다졌던 흔적을 찾은 것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그 길을 선재길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개통했다. 어엿한 산책코스로 부활한 길은 이제 징검다리와 쉼터, 데크로드와 안내판을 갖추고 지친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길이 약 8, 표고차 200m로 완만해 누구나 삼림욕을 즐기며 산책하듯이 걸을 수 있다.

 

트레킹 들머리는 월정사 일주문

영동고속도로 진부 I.C에서 내려와 6번 국도를 타고 강릉방면으로 달리다가 병안삼거리에서 왼편 오대산로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월정사의 일주문에 이르게 된다.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물론 이곳까지 오려면 입구의 매표소에서 1인당 3천 원 씩의 입장료를 내야만 한다. 막무가내로 돈을 받는 것을 보니 계곡 안이 몽땅 월정사의 땅인 모양이다. 여정은 월정사 일주문에서 시작된다. 오늘 걸으려는 오대산 선재길은 월정사보다 조금 더 위에서 시작되지만 이왕에 월정사에 들른 김에 이곳의 명물로 알려진 전나무 숲을 따라 걸어보기 위해서이다.

 

 

 

일주문을 막 지나고 나면 쭉 뻗은 잘 생긴 나무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월정사 초입의 전나무숲이다. 일주문에서부터 절 입구 금강교까지 1남짓한 길 양쪽으로 1700여 그루가 자란다. 누군가 맑은 오대산을 만나려면 겨울철이 제격이라고 했다. 그러나 늦가을에 찾은 오대산도 맑기는 매한가지였다. 평균 수령(樹齡) 80여 년에 가장 오래된 나무는 무려 300년이나 묵었다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정갈함이 그 원인일 것이다. 숲길을 따라 월정사로 향하다 보면 가슴은 어느새 청량해진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솔향이 그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숲이 깊어질수록 정신이 맑아져간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간다.

 

 

길을 가다보면 숲속에 들어앉은 설치미술 작품들이 보인다. 며칠 전(10.9~18) 이곳에서 '오대 세상을 품다를 주제로 오대산문화축전이 열렸다. 산사음악회, 자연 설치미술전, 책 읽는 밤, 다람쥐 제사, 어린이 오케스트라 공연 등의 다양한 행사들이 열렸는데, 자연 설치미술전의 일환으로 전시되었던 작품들인 모양이다. 기존의 자연과 작품들이 하나로 동화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반듯하게 뻗은 전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이 길은 아름다운 숲길이다. 천년 세월 동안 월정사를 지키고 있어 천년의 숲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이 숲은 우리나라 최대의 전나무 숲 중의 하나로서 천년고찰 월정사와 함께 오대산의 대표적인 명소로 꼽히고 있다. 2011년에는 산림청과 '생명의 숲 국민운동' '유한킴벌리'가 함께 주최하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인 생명상을 받기도 했다. 이는 전나무 숲속으로 나있던 도로를 우회(迂廻)시키면서 길을 옛 모습으로 돌리는 등 생태계 복원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숲이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가을이 무르익었나보다. 아니 말라비틀어진 나뭇잎들이 더 많은 것을 보면 가을은 이미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음이리라. 단풍을 즐기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 또한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선재길을 들어서기도 전부터 난 마음의 평화를 얻어간다.

 

 

 

전나무 숲길의 끝에 오대산에 등을 기댄 월정사가 점잖게 앉아 있다.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연원 깊은 사찰이다. 643년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유학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고 그가 지명한 강원도 오대산에 월정사를 세웠다고 한다. 오대산을 한국 불교 문수 신앙의 성지라 일컫는 이유다. 하지만, 절은 그런 성스러운 역사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전쟁이라는 악업 때문이다. 6·25가 한창이던 1951년 연합군은 북한군이 이 절을 본거지로 사용할 것을 우려해 경내에 불을 놓았다고 한다. 그로인해 신라 때부터 이어온 월정사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아픈 역사만 남았다. 현재의 전각들은 그 이후 새롭게 지은 것들이란다.

 

 

월정사(月精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643(신라 선덕여왕 12)에 자장(慈藏)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慈藏)이 오대산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성지라고 생각하여 지금의 절터에 초암(草庵)을 짓고 머물면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문수보살을 만나보지 못한 채로 태백산 정암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소실(燒失)과 중창(重唱)을 반복하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1.4후퇴 때에는 사찰의 대부분이 전소되었다. 현재의 전각들은 1964년 이후 탄허(呑虛), 만화(萬和), 현해(玄海)스님 등이 중건한 것들이다. 그저 적광전(寂光殿) 앞에 있는 국보 제48호인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 그리고 성보박물관에 보관된 유물들만이 그 옛날의 월정사를 온전히 기억할 뿐이다.

 

 

적광전(寂光殿)의 내부 풍경, 적광전이란 원래 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모시는 전각을 일컫는 이름이다. 그런데도 오대산의 적광전은 주불로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미스터리한 일이지만 알고 보면 다 이유가 있다. 화엄종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적광전을 중건할 때 비로자나불을 같이 모신다는 뜻으로 적광전이라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문화축전 때 설치했던 전시물들을 느긋이 둘러보다가 다시 선재길로 향한다. 경내(境內)를 떠나기 전에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샘터에서 목을 축였음은 물론이다. ‘선재길로 가는 길은 요사채 앞으로 나있다. 그리고 오대천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를 건너 숲길로 연결된다. 물론 다리를 건너지 않고 도로를 따라 올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선재길을 걷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구태여 삭막한 도로를 따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월정사에서 선재길의 들머리까지는 0.9Km거리, 길은 오대천을 따라 나있다. 전나무와 단풍나무가 적당히 섞여있는 길이다. 푸른 녹음을 배경으로 붉은 단풍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름다움에 취해 무작정 걸을 필요는 없다. 가는 길에 잠깐만 다리품을 팔면 지장암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갈림길에 세워진 안내판의 내용은 정확했다. 울창한 전나무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정확히 3분을 걸으니 지장암(地藏庵)이 나타났다. 암자(庵子)치고는 제법 큰 규모이다. 오대산에는 동대·서대·남대·북대·중대 등 다섯 개의 암자가 있다. 그중 남대(南臺)가 바로 지장보살을 주불(主佛)로 모시는 지장암이다. 신라시대에 보천태자의 유언에 따라 지어진 암자라고 한다. 제법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암자는 단아하면서도 정갈했다. 여성스러움이 묻어난다는 얘기이다. 이곳이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장암에서 되돌아 나와 다시 선재길로 향한다. 길은 오대천을 따라 나있다. 아니 오대천 위로 나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개울가 바위벼랑의 허리쯤에다 데크로 길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길이 허공에 걸려 있으니 다리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냇가는 온통 붉게 물들어있다. 바위벼랑과 냇물, 거기다 붉게 물든 숲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낸다. 가을이 익을 대로 익어버렸다.

 

 

 

 

선재길(8km)은 월정사 북쪽 900m 지점에서 시작된다. ‘회사거리라고 부르는 곳이다. 회사라는 이름이 의아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곳에 회사(會社)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일제 강점기 때 목재공장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당시 공장에서는 박달나무로 훈련용 목총을, 측백나무로 연필을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일제 강점기의 흔적은 지금도 산재길 곳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벌목한 나무를 오대천 물길따라 한강까지 보내기 위해 만들었던 보메기()와 주문진까지 이어졌던 철로가 어렴풋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안내판을 따라 탐방로에 들어서면 곧바로 오대천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가 기다린다. 이어지는 길은 오대천의 강변을 따른다. 오대천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는 446번 지방도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비록 20~30m 남짓한 거리에 불과하지만 숲길은 비밀스럽다. 숲속 사정을 알 수 없을 만큼 숲이 빽빽하다는 얘기이다.

 

 

회사거리에서 동피골까지는 대략 5, 키가 큰 신갈나무와 단풍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가을철이면 이 길은 노랑과 빨강이 어우러지며 아름다움이 극에 이르는 구간이다. 오대산의 단풍은 설악산처럼 강렬하고 화려하진 않다. 하지만 은은함으로 유명하다. 붉은빛이 도는 졸참나무와 노란 상수리나무, 주황색 벚나무가 서로 섞이고 번지면서 조화를 이룬다. 여기에 사철 푸른 전나무 숲까지 더해 색다른 가을 풍광을 만들어낸다. 오직 오대산에서만 구경할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화일 것이다.

 

 

 

 

길을 가다보면 섶다리안내판(사진이 흐려서 게시하지는 못했다)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섶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섶다리는 소나무와 참나무로 만든 상판에 섶(솔가지나 작은 나무 등의 가지)을 엮어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다리를 말한다.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는 10월에 만들어 겨우내 강을 건넌다. 여름이면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 이별다리로도 불린다. 다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은 철이 이른가보다.

 

 

 

길은 대부분 완만하다. 거기다 내리쬐는 햇볕도 없는 숲길이어서 걷는 행위 자체에는 집중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 길에서는 자연스럽게 생각을 하게 된다.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세상을 돌아본다. ‘선재길은 오대산 월정사와 말사(末寺)인 상원사를 잇는 길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201310월 옛길을 복원하면서 선재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선재(善財)'라는 길의 이름은 화엄경 경전 속 이야기에 나오는 구도자인 선재동자(善財童子)에서 따왔다.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 얻을 마음이 생겨 53인의 좋은 지도자를 찾아 배움을 얻으며 천하를 주유하다가 다시 문수보살에게 돌아온 후 수행을 완성했다는 인물이다. 따라서 '선재길'의 길 이름은 이 길을 걷는 과정을 수행으로 삼아 마음의 평화와 깨달음을 얻어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길은 경사(傾斜)가 거의 없다. 거기다 흙으로 이루어진 바닥까지 곱다. 타박타박 걸어본다. 마침 느긋하게 생각하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그리고 복잡한 인간사 속에서 배배 꼬였던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무아(無我), 즉 나라는 존재까지 비워버리는 경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티끌만큼의 깨달음이라도 얻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일이다.

 

 

길은 강변길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오대천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건너는 곳마다 나무다리를 놓지는 않았다. 가끔은 이렇게 징검다리를 건너도록 해놓았다. 개천의 물길을 따라 징검다리 십여 개를 지그재그로 놓았다.

 

 

선재길은 쉽고 평탄한 길이다. 호젓한 숲속 오솔길과 시원한 계곡길이 전부이다. 그래서 선재길이란 이름을 얻었나보다. 느긋하게 생각하며 걷기에 좋다고 해서 말이다. 길 위에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선재동자(善財童子)처럼 이 길을 찾은 이들도 나를 돌아보며 삶의 지혜를 찾아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오대산은 예로부터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산다고 여겨지던 곳이다. 문수보살의 지혜를 찾아 여행을 떠난 구도자가 바로 불교 경전 화엄경에 등장하는 선재동자이기 때문이다.

 

 

월정사를 지나서도 전나무 숲은 심심찮게 나타난다. 웬만한 산들에는 소나무가 대세이지만 이곳 오대산은 그 자리를 전나무들이 대신하고 있다. 옛날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던 나옹선사가 공양을 하려는데 소나무에 쌓였던 눈이 그릇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때 산신령이 나타나 소나무를 쫓아낸 뒤, 전나무 아홉 그루에 절을 지키라고 했단다. 이때부터 오대산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단원 김홍도(1745?)가 그린 오대산 그림에도 월정사 주변으로 전나무가 빼곡하다. 예나 지금이나 오대산의 주인공은 전나무인 셈이다.

 

 

숲길이 옆구리에 계곡 물을 달고 고즈넉하게 이어진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선재길은 등산객들로 넘쳐난다. 그들의 입은 원색의 옷이 붉게 물든 가을산보다도 더 화려하다. 숲길을 걸으면 모든 게 저절로 치유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선재길에서 만난 등산객들은 하나같이 환한 미소를 띠고 있다. 하긴 이렇게 곱게 물든 가을산에서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거기다 날씨까지도 이렇게 화창할진데 말이다.

 

 

동피골(이정표 : 상원사 3.6Km/ 월정사 5.4Km)에 이르면 작은 산장 하나가 보인다. ‘오대산장이라는데 마침 공중화장실까지 갖추었으니 한숨 돌릴 겸 잠시 쉬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 같다.

 

 

산장 옆에는 멸종위기식물원이 자리 잡고 있다. 오대산에 자생하는 멸종 위기종과 특정 식물 등 30여 종의 희귀식물을 복원해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유리로 만든 온실 안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이 보였지만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상원사로 향한다. 상원사까지는 3정도의 거리이다. 길을 나서면 푸른 조릿대가 길손을 맞는다. 아까도 조릿대가 보이기는 했었지만 아래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출렁다리를 만난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이 부근에는 화전민 부락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계기로 월정사 아래로 모두 이주했다고 한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또 다시 계곡 옆 숲길을 만난다. 계곡과 나란히 달리는 길은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이다. 물푸레나무, 거제수나무, 참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박달나무 빼곡하게 들어서 한여름 땡볕도 쉽사리 범하지 못하는 우거진 숲길이다.

 

 

동피골에서 조금 더 걷다보면 무너져가는 돌담이 눈에 띈다. 아까 지나왔던 회사거리를 중심으로 상부에 360여 가구의 화전민(火田民)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 흔적인 모양이다. 그들이 살던 마을 앞으로 난 옛길이 선재길이 된 셈이다. 선재길은 1960년대 월정사와 상원사를 잇는 찻길이 뚫리기 전까지 사람들이 오르고 내렸다. 화전민과 벌목꾼들이 이 길에서 삶을 일궜고, 스님과 불자들은 득도를 위해 이 길을 걸었다. 세월이 흘러 넓고 평탄한 길이 나면서 옛길은 토막 나 이리저리 숲에 흩어졌다. 그 옛길을 다시 복원해 놓은 것이 선재길인 것이다.

 

 

이미 단풍은 절정을 넘어섰지만 낙엽 쌓인 고즈넉한 숲길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선방(禪房)의 스님들은 이 숲길을 걸으며 실타래처럼 꼬인 화두를 풀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상생활에 찌든 중생(衆生)들이 걷고 있다. 뭔가 깨달음을 위해 걷고 있는 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힐링코스로 인기다. 하지만 그게 뭔 대수겠는가. 건강을 위해 걷다보면 한가닥 깨달음이 찾아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개울길을 벗어나면 상원사로 들어가는 신작로가 나타나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주차장이 보인다. 선재길이 끝난 셈이다. 그러나 트레킹을 여기서 멈춰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선재길은 상원사까지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다는 적멸보궁에 들러보는 것은 어떨까? 혹시라도 부처님의 축복이라도 받을지 누가 알겠는가.

 

 

오매 불나부렀네언젠가 붉게 물든 철쭉동산에서 들려오던 내뱉던 말이다. 선홍빛으로 타오르는 꽃동산이 마치 불이 난 것 같다는 표현이었다. 가을에 찾은 오대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숲은 한없이 붉었고, 단풍이 투영된 계곡은 온통 고운 물감을 뿌린듯했다.

 

 

상원사 입구에는 묘하게 생긴 돌기둥 하나가 세워져 있다. 세조가 옷을 걸어두었다는 관대걸이로 이 돌기동에는 문수보살에 얽힌 전설(傳說)이 전해져 내려온다.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죄책감에 피부병이 도졌다고 한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세조가 오대천에 몸을 씻던 중 지나가던 동자승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 피부병이 나았음은 물론이다. 목욕을 마친 세조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발설하지 말라고 말하자, 동자승이 대왕은 어디 가든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시오.’라고 말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옷을 걸어두었다고 해서 관대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여정의 마지막은 상원사(上院寺)가 장식한다. ‘나를 찾아 나선 여행자들은 구도의 길을 걸으며 마음의 평화와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아니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이곳에서 문수보살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수보살의 도움으로 못다 이룬 평화와 깨달음을 완성하게 된다. 문수보살을 주존불(主尊佛)로 모시고 있는 국내 유일의 사찰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월정사의 말사인 상원사(上院寺)는 신라의 성덕왕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진여원이라는 절을 창건한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 병을 고쳤다. 세조는 감사의 표시로 진여원의 이름을 상원사로 고치고 왕실사찰인 원찰로 정한 후 문수동자상을 봉안했다. 그 인연으로 상원사는 문수보살을 주존불(主尊佛)로 삼고 있는 문수신앙의 성지가 되었다. 국내 유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전각(殿閣)들은 대부분 광복 이후 세워진 것들이다. 다만, 절에 남아있는 두 점의 국보(國寶)가 상원사의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바로 국보 36호 상원사 동종과 국보 221호 문수동자상이다.

 

 

상원사(上院寺)의 본전(本殿)은 문수전(文殊殿)이다. 1947년 당시 주지이던 지암스님이 금강산 미하연의 건물을 본떠지었다는 전각(殿閣)으로 안에는. 국보 221호인 문수동자상이 안치되어 있다. 문수동자상은 세조 때 왕실이 봉안한 목조상(木彫像)으로 양 갈래로 묶은 머리가 이채롭다. 조선시대 초기의 왕이었던 세조가 문수동자의 도움으로 악성(惡性) 피부병을 고치고 나서 그 보답으로 조성한 불상(佛像)이라고 한다.

 

 

앞마당에는 동정각(動靜閣)이라는 전각이 있다. 국보 제36호인 동종(銅鐘)을 보관하는 곳으로 편액(扁額)은 탄허스님이 직접 쓴 글이란다. 전각 앞에는 천음회향(天音回香)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하나 세워져 있다. ‘하늘의 소리가 향기를 품고 내려온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종소리가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소리뿐만이 아니다. 동종의 외관(外觀) 또한 보는 이들이 넋을 빼앗길 정도로 그 자태가 빼어나다. 참고로 현재 타종을 하고 있는 동종은 복제품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 즉 성덕왕(725) 때 만들어졌다는 본래의 동종은 바로 옆 유리관 속에 보존돼 있다.

 

 

상원사는 물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세조가 절 앞의 오대천에서 몸을 씻고 악성 피부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앞마당에 있는 샘은 항상 물이 넘쳐흐른다. 물맛 또한 달고 시원한 것이 감로수가 따로 없다.

 

 

선재길은 상원사에서 끝을 맺지만 적멸보궁을 두고 돌아서기는 아깝다. 하지만 이미 서너 번을 둘러본지라 이번에는 사양하기로 한다. 대신 이곳 상원사를 빛낸 큰스님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기로 한다. 상원사로 오르는 돌계단 옆에 한암(漢岩), 탄허(呑虛), 만화(萬和) 삼화상 탑비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난 한암스님(1876~1951)22세에 금강산 장안사로 출가하여 24세 때 경허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그 뒤 50세에 이곳 상원사로 들어와 열반 때까지 산문을 나가지 않고 중생교화하신 큰스님이다. 조계종 초대 종정이었으며 네 번이나 종정에 추대되었을 정도로 근대 한국불교를 이끄신 선지식(善知識)이었다. 특히 스님은 6.25 전쟁 당시 이곳 상원사의 전소 위기를 막았다고 전해진다. 전라도 김제에서 태어난 탄허스님(1913~1983)은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은 이극종선생께 수학했을 정도로 한학에 능통하였다. 하지만 학문으로 해결되지 않는 도의 근원을 찾아 불교에 귀의했다. 22세에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 스승인 한암스님을 모시고 선교겸수로 수많은 경전을 번역하는 등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큰 선지식이었다. 특히 스님은 유··교 삼교에 통달한 대석학이자 시대를 통찰한 사상가로 알려진다. 마지막으로 평안도 덕천에서 태어난 만화(1022~1983)스님은 18세에 상원사에서 탄허스님을 모시고 출가하였다. 34세에 월정사의 주지가 되어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월정사를 재건하는 등 오대산의 버팀목 역할을 한 큰스님이었다.

 

포천 아트벨리(Art Valley)

 

산행일 : ‘14. 9. 9()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특징 : 포천아트밸리는 원래 고급 품질의 화강암을 캐던 채석장이 있던 자리이다. 그러다가 채석장이 문을 닫은 후 자연환경이 파괴된 채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오던 것을 포천시에서 국내 최초로 문화와 예술로 치유하고 환경을 복원하여 복합 문화예술 공간으로 2009년 문을 열었다. 주요 시설로는 관람 시설, 편의 시설, 문화 시설 등 3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관람 시설로는 화강암을 채석하여 생긴 웅덩이에 샘물과 우수가 유입되어 형성된 3000천평 규모의 천주호(天柱湖)를 중심으로 전망대와 산책로, 조각 공원, 돌 문화 전시관, 기타 상징 조형물 등이 있다. 천주호는 수질 보호와 안전을 위하여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호수의 최대 수심은 20m로 가재, 도롱뇽, 피라미 등이 살고 있는 1급수의 호수이다. 편의 시설로는 전망 카페와 전시관 카페, 한식당과 매점, 모노레일 등이 있다. 문화 시설로는 야외 공연장이 두 개 있다. 그리고 최근(20148)에는 놀이와 체험이 있는 우주 천체과학 전시관 및 최첨단 4D영상관과 별자리 체험이 가능한 천체관측실 등을 갖춘 천문과학관을 추가로 열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 매년 100만 명 이상이 찾아오는 관광명소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찾아오는 방법 : 서울·의정부에서 43번 국도를 타고 철원방면으로 달리면 포천시청을 지나 신북면 소재지인 기지리에 이른다. 이곳 면사무소 앞 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아트벨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에서 매표소까지 올라가는 길, 벨리(Valley)의 시설로 들어서기도 전부터 조형물(造形物)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설의 이름에 아트(Art)가 왜 붙었는지가 실감나는 순간이다.

 

 

 

잠시 후 매표소(입장료 : 성인 기준 3,000)에 이르면 가장 먼저 돌문화 홍보 전시관이 맞는다. 쉽게 말해 매표소와 같은 건물에 있다고 보면 된다. 무료입장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꼭 한번 들어가 보기 바란다. 그래야 왜 이곳에 이런 시설이 세워졌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시관에는 포천석이 무엇인지, 포천의 화강암 채석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를 영상과 음성 서비스를 통해 친절히 설명한다. 포천석으로 조각된 작품들도 전시돼 있음은 물론이다.

 

 

 

 

 

매표소 근처에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노란색 모노레일(monorail)이 보인다. 다소 경사(傾斜)가 심한 아트벨리 관람을 위한 시설이다. 그러나 꼭 타야할 필요는 없다. 아트벨리까지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고 경사 또한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아서 걸어서도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편도 요금인 6.500원까지 절약할 수 있으니 괜찮은 선택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모노레일은 50인승으로 레일은 420m이고 승하차장이 2개소가 있어 내리는 곳과 타는 곳이 각기 다르다.

 

 

매표소를 지나 위로 올라가는 길에 보면 오른쪽 경사면에 무더기로 쌓인 돌 더미를 볼 수 있다. 조금 전 홍보관에서 공부했던 내용을 떠올리게 만드는 순간이다. 포천에서 나는 화강암은 질 좋기고 유명했다. 그중에서도 세계에 수출 할 만큼 질 좋은 포천석 산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몇 년 전 산정호수에서 있었던 국제조각 심포지엄(symposium)’에 참석했던 외국작가들이 극찬한 것도 포천석이었다고 한다.

 

 

낭떠러지라는 뜻의 낭바위란다. 이 부근에 살던 정창국이라는 사람이 병자호란 때 변방을 지키다 전사하자 그의 부인인 창원 유씨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이 바위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떨어질 낙()와 바위 암()를 붙여 낙암바위라 부르기도 했단다.

 

 

 

모노레일 하차하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천문과학관(天文科學館)과 대공연장(大公演場)이 자리 잡고 있다. 천문과학관은 기존의 전시관을 리모델링(remodeling)하여 별나라 우주과학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다. 우주 천제 과학 전시관, 천체투영실, 과학체험실, 천체 별 관측실 등으로 이루어졌다. 두 시설 모두 둘러보는 것은 생략하기고 한다. 천문과학관은 이미 영천과 영월 등 다른 곳에서 서너 번 들러본 경험이 있고, 공연장이야 그게 그거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과학관에서 조금 더 걸으면 갑자기 눈 맛이 시원해진다. 아래로 굽어다 보이는 천주호(天柱湖)의 멋진 모습 때문이다. 눈앞에 한가득 펼쳐지는 천주호의 풍광에 사람들은 신세계를 만난 듯 경이로운 감탄사를 너도 나도 보낸다. 그러나 사실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폐 채석장(廢 採石場)이었다고 한다. 질 좋기로 유명했던 화강암을 더 이상 캘 수가 없게 되자 흉물스럽게 버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자연의 힘은 무한하다고 했다. 인간의 힘 또한 그에 못하지 않는가 보다. 인간들의 노력으로 저렇게 아름다운 곳으로 탈바꿈된 것을 보면 말이다.

 

 

 

 

계단을 내려와 천주호와 마주한다. 바위의 색깔들은 이미 검은 색으로 변해있다. 허옇게 배를 드러내고 있어야 할 채석장의 흔적은 이젠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천주호가 있어 왔던 것처럼 아득한 정겨움까지 몰려온다. 이 호수의 최대 수심은 20m에 이르고 현재 가재, 도롱뇽, 피라미 등 1급수에 사는 생물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천주호의 물이 맑다는 증거일 것이다.

 

 

전망대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그 하나는 하늘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곧바로 조각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우선 하늘공원으로 올라가보기로 한다. 상당히 가파르지만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그 거리가 멀지 않은데다가 나무계단을 놓아 편하게 오를 수 있도록 해놓았기 때문이다.

 

 

 

아트벨리는 산책로를 잘 조성해 놓았다. 특히 랜드 마크(land mark)’라고 할 수 있는 천주호를 가운데에 놓고 곳곳에서 호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이곳 하늘공원에 있는 전망대도 그중의 하나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호수는 아까와는 또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이런 풍광이 있기에 드라마의 촬영지로 선택받지 않았을까 싶다. 누군가 MBC-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를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하기에 하는 말이다.

 

 

 

전망대 옆에 좀 특이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소원의 하늘정원이란다. 소망을 적은 소원지를 걸어 놓는 곳이라는데 사방의 벽이 소원지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이 없이 갈망하는 마음들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소망하는 것들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행복, 건강, 사랑 같은 단어들이 가장 많이 적혀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참고로 소원을 적을 종이는 천주호 매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천주호는 화강암을 채석한 곳에 샘물과 우수(雨水)가 유입되면서 만들어졌다.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들어진 곳이라서 자연스러운 멋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마치 옛날부터 호수가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들 정도로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포천시에서 신경을 많이 쓴 덕분이 아닐까 싶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공존하며 치유를 해간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포천시가 만들어낸 것이다.

 

 

하늘공원에서 조각공원으로 내려오는 길에 돌음계단이 있다. 뱅글뱅글 돌며 내려온다고 해서 달팽이 계단으로 불리기도 한다. 높이가 만만찮게 높은 곳에서 뱅글뱅글 돌며 내려오다 보니 고소공포증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찔하다. 임산부나 노약자는 위험할 수 있으니 이용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아래로 내려와서 올려다본 달팽이 계단은 그냥 계단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빼어난 작품 말이다.

 

 

 

 

 

아래로 내려오면 하얀색 이글루(igloo)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전체가 빈 막걸리병 만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특이한 발상이다. 이글루로 안에 들어가 보면 왜 그런 발상을 했는지 금방 이해가 된다. 포천의 명물인 이동막걸리를 홍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글루에서 왼편으로 조금 더 가면 공연장이 마련되어 있다. 화강암 채석으로 절단된 약 50m의 화강암 직벽(直壁)과 천주호 사이에 설치된 무대로 약 300여 명의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다. 공연장의 무대가 천주호의 물위에 떠 있음은 물론이다. 저런 곳에서 공연을 하면 그 울림은 과연 어떠할까? 이런 궁금증을 갖는 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수상무대에서 다시 한 번 천주호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에머랄드(emerald) 빛 호수가 신비감과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호수 양 옆은 서슬 시퍼런 단애(斷崖), 자세히 보면 돌을 캐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저곳에서 채굴되던 석재는 양질의 석재로 판정되어 포천 화강암으로 불렸으며 건축자재로 인기가 높았다. 단단한 재질과 화강암의 고유 무늬를 간직하고 있어 국회의사당, 세종문화회관, 인천국제공항 등 중요시설물과 건축물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글루 근처는 놀이터로 만들어져 있다. 팽이 돌리기나 윷놀이 등 전통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한껏 즐거워하는 표정이다. 하긴 평소에 가까이 접하기 어려웠던 놀이를 부모님들과 함께하고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놀이터 바로 옆에 조각공원(彫刻公園)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모두 포천에서 생산된 화강암으로 만든 것들이란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작품들 주변에 푸른 잔디가 넓게 깔려 있어 쉬어가기에 딱 좋다. 마음껏 뛰놀다 지치면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돗자리 깔고 쉬기에 딱 좋은 공간이란 얘기이다. 그나저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벌거벗은 사람이 바위에 깔린 듯한 모습의 19금 조형물이었다.

 

 

 

 

 

 

 

조각공원의 끄트머리에 선다. 저 멀리 첩첩히 쌓인 산들이 자연스럽게 조망(眺望)되는 곳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솟대들이 늘어서있다. 솟대는 옛날 우리 선조들이 뭔가를 갈구하며 세웠던 대이다. 그렇다면 아트벨리의 저 솟대들은 과연 어떤 소망을 갖고 있을까? 어쩌면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더 나은 세상이 아닐까 싶다. 하여간 그냥 버려뒀으면 자연훼손으로 흉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곳을 개발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친환경 문화예술 공간으로 만든 포천시청 관계자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사인암(舍人巖)

 

여행일 : ‘14. 6. 6()

소재지 :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특징 : 산길을 굽어 돌던 골짜기가 넉넉하게 하늘을 연다. 하늘 아래엔 그리 넓지도 그리 깊지도 않은 천()이 자작하게 흐르고 있다. 남조천이다. 남조천이 죽령천과 만나기 전, 한번 큰 호흡을 한 듯 청록의 소()를 만들어 놓았다. 그 곁에는 70m 높이의 서슬 시퍼런 단애(斷崖)가 솟아 있다. 단양팔경 중 하나인 사인암(舍人巖)이다. 사인암은 흡사 높다란 석탑(石塔) 세워져 있는 형상이다. 사각형의 바위 수십 개를 정교하게 짜 맞춘 탑처럼 솟아 절경을 빚었다. 어떤 이들은 자연 병풍 같다고도 말하기도 한다. 어떻게 표현하든 그게 뭔 대수겠는가. 중요한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저런 절경을 결코 빚어낼 수 없다는 점이다. 아무튼 사인암은 그 생김새가 자못 빼어나서 옛날부터 수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그중에는 바위의 이름에까지 영향을 미친 고려 말의 대학자 우탁선생과 조선 제일의 화가였다는 김홍도도 있다. 그만큼 사인암의 경관이 빼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찾아오는 방법 : 중앙고속도로 단양 I.C에서 내려와 927번 지방도를 타고 예천방향으로 3.5쯤 들어오면 된다. 사인암 맞은편에 주차한 후 출렁다리를 건널 수도 있고 청련암 주차장까지 다리를 건너갈 수도 있다.

 

 

사선암의 투어는 집단시설단지에서 시작된다. 이곳에다 우리를 내려 놓는 것이 더 이상 관광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모양이다. 길가에 공동우물 등 편의시설 들이 잘 갖추어져 있는 것이 여름철 휴가를 보내는데 불편이 없을 것 같다.

 

 

남조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오른편, 그러니까 상류 쪽은 수심(水深)이 얕아 물놀이하기에 적당하다. 물속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아마 올갱이를 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바위 위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람은 낚시를 하고 있을 것이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내려다보며 그들과의 교감(交感)을 시도해 본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으로 살짝 들어선다. 좋다. 즐겁다. 행복하다.

 

 

 

아래로 내려가면 물은 점점 더 깊어진다. 그리고 물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굵어진다. 올갱이 잡기나 낚시는 이들에게는 관심 밖인 모양이다. 그저 물놀이에 푹 빠져있을 따름이다.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잠시 더 걸으면 저만큼에 현수교(懸垂橋)가 나타난다. 사인암으로 건너가는 다리이다. 다리 아래에는 흰 강돌과 검은 바위가 저마다 무리를 이루어 물가에 앉아있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사인암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조천 물굽이가 만들어 놓은 푸른 소() 곁에 70m 높이의 서슬 시퍼런 단애(斷崖)가 솟아 있다. 그 모양새는 우직하게 솟은 듯도 하고 강직하게 내려 꽂인 듯도 하다. 단호한 직벽(直壁)이다. 표피는 수많은 직선의 절개로 가득하다. 그리고 정상의 바위틈에는 몇 그루 소나무가 자란다. 이 절벽이 바로 사인암(舍人岩)이다. 사인암(舍人岩)이란 이름을 붙인 이는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임제광(林齊光)이라 한다. 그는 고려 충선왕 때의 대학자 역동(易東) 우탁(禹倬 : 1263~1342) 선생이 정4품 벼슬인 사인(舍人) 재직 시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해서 선생의 벼슬 이름을 지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탁선생이 이곳에 머무르며 사인암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는 강행(江行)’이란 시()‘를 옮겨본다. ‘이슬 머금은 단풍잎 붉게 땅위에 떨어지고 / 석담엔 바람이 일어 푸른 하늘을 흔드네. / 숲 사이엔 숨겨진 채 환한 외딴 마을이 아물거리고 / 구름 밖엔 우뚝 솟은 산봉우리 이어지네.’

 

 

사인암 앞 천변에는 널찍한 바위들이 널려 있다. 한 바위에는 장기판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 옆에는 바둑판까지 그려있다니 옛 사람들이 신선(神仙)처럼 노닐었던 흔적들일 게다. 물소리 유유한 사인암의 그늘 아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닐었으니 신선놀음이 아니고 무어겠는가. 그래서 후세 사람인 추사 김정희도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 그림과 같다며 무릎을 쳤을 것이다. 신선경(神仙景)인 사인암은 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사랑을 받았다. 조선 후기의 화가 이윤영(李胤永, 1714~1759)단정하고 엄숙하며, 화기롭고 깨끗하여 엄숙하면서도 뻣뻣하지 않으니 하루 종일 마주하고 있어도 싫증나지 않는다.’고 썼고(사인암기), 사인암을 그린 단원 김홍도는 이곳의 풍경을 그리는데 1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만큼 내재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가 어려웠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밖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비들이 사인암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사인암을 뒷 배경으로 삼아 들어앉은 절이 하나 나타난다. 청련암(靑蓮庵)이다. 원래는 황정산 아래에 있던 대흥사(大興寺)의 부속암자였다고 한다. 고려 말 공민왕 22(1373)에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창건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 숙종 때인 1710년에 중창되었다. 그러다가 6.25때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1954년 공비소탕 작전 때 내려진 황정리 일대의 소개령(疎開令)을 피해 이곳 사인암리로 대들보와 기둥을 옮겨 이전하였다는 것이다.

 

 

 

최근에 지어진 법당 극락보전(極樂寶殿)은 아직까지 단청도 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고, 사인암을 배면에 두고 앉은 암자가 비교적 고색(古色)을 띠고 있다. 이것 역시 고색이라는 표현을 쓰기가 민망스러울 정도였지만 말이다. 요사채(寮舍寨)인 것 같은데 청련암이란 현판은 이 건물에 걸려있다.

 

 

 

청련암 옆 좁고 가파른 계단이 사인암 속으로 파고든다. 양 옆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협곡의 모양새를 만들고 있기에 파고든다는 표현을 썼다. 계단의 끄트머리에서 암벽(巖壁)에 둘러싸인 삼성각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렇다고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까지는 없다. 계단 앞 바위에다 우탁선생의 시조 탄로가(백발가)를 새겨 놓았으니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한손에 막대 잡고 / 또 한손에 가시 쥐고 / 늙는 길 가시로 막고 /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 백발이 제 먼저 알고 / 지름길로 오더라.’ 누군가 인생의 속도는 나이와 비례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60을 넘긴 나의 속도는 시속이 60Km나 된다. 하루하루가 눈 깜작 할 사이에 지나간다는 얘기이다. 안타까운 내 마음을 어찌 저리 잘 표현했는지 모르겠다.

 

 

계단 입구 벽에 몇 가닥의 줄을 길게 매어놓고 뭔가를 덕지덕지 묶어 놓았다. 앞에 놓인 단()소원지(所願紙)’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그 종이에다 자기의 소원을 적고 소원성취해보란다. 가격은 한 장에 3천원이다. 그런데 그 위에 적힌 글이 좀 묘하다. 소원지와 함께 추억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정성을 다해 소원을 빌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단순하게 추억을 만들어보라는 것인지 모르겠기에 하는 말이다.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발길을 옮긴다. 여기는 사찰(寺刹), 스님들이 하는 일을 중생인 우리가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계단을 밟으며 잠시 오르면 바위틈에 들어앉은 삼성각(三聖閣)이다. 삼성각이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당우(堂宇)를 말한다. 삼성 신앙은 불교가 한국 사회에 토착화하면서 고유의 토속신앙(土俗信仰)이 불교와 합쳐져 생긴 신앙 형태이다. 전각(殿閣)은 보통 사찰 뒤쪽에 자리하며, 각 신앙의 존상(尊像)과 탱화를 모신다. 그리고 삼성을 함께 모실 때는 정면 3, 측면 1칸의 건물을 짓는다. 이곳 청련암의 삼성각 또한 그런 규칙을 잘 따르고 있다.

 

 

 

삼성각 뒤에는 조금 전에 올라왔던 협곡보다 더 좁은 바위 문(石門)이 있다. 지금은 비록 기왓장으로 막혀있지만 저 문을 통과하면 사인암의 정수리로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바위 면에 새겨진 소유천문(小有天門)’이란 전서체(篆書體)는 앞에서 거론했던 조선 후기의 화가 이윤영이 쓴 글씨란다. 이외에도 삼성각의 석벽에는 몇 개의 글을 더 새겨져 있다. '우뚝하여 무리 짓지 않고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의 탁이불군(卓爾不群) 확호불발(確乎不拔)’이 오른쪽 벽에 해서체(楷書體)로 새겨져 있고, 왼쪽 석벽에는 퇴장(退藏)이라는 글씨가 큼지막한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사인암을 다 둘러보고 나며 또 다시 출렁다리를 이용해서 마을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그리고 남조천의 천변(川邊)을 따라 나있는 데크길을 한참을 더 걸어야만 한다.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가 지방도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을 지나는 길은 대형차량의 진입이 불가능한 것이 마을 밖에서 기다리는 원인이란다.

 

 

길가에 이곳이 KBS-2TV‘12촬영지였음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동 프로그램을 촬영했다면 이곳에는 아름다운 경관은 물론이고, 또 다른 눈요깃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방도로 나가는 길은 심심치는 않다. 빼어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경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을 막아 만든 보()에는 푸른 물이 넘실거리고 건너편 벼랑은 비록 사인암 만큼은 아니어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억불산(億佛山, 518m)과 편백숲 우드랜드

 

산행일 : ‘15. 4. 6()

소재지 : 전남 장흥군 장흥읍, 안양면, 용산면의 경계

산행코스 : 우드랜드 관리실데크길억불산 정상우드랜드 관리실(산행시간: 1시간30)

같이한 산악회 : 형제들과 함께

 

특색 : 세계적 석학 하버트 벤슨(Herbert benson) 박사는 마음으로 몸을 다스려라는 책에서 스트레스와 심신의 고통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명상과 휴식을 통해 질병의 80%를 치유할 수 있다고 했다. 거기다 신선한 공기와 향기까지 더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런 곳이 바로 편백나무 숲이 아닐까 싶다. 편백나무는 소나무보다 45배 많은 피톤치드를 내뿜기 때문이다. 편백나무의 피톤치드(phytoncide)는 항()우울, 항스트레스 성분이 많다. 이로 인해 편백나무 숲을 찾으면 스트레스 수치가 낮아지고 저항력도 높아진다. 그런 편백나무 숲을 찾는 사람들에게 장흥의 우드랜드를 추천하고 싶다. 장흥군에서 편백나무 숲에다 일종의 휴양림인 우드랜드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우드랜드는 일반 휴양림과 다른 점이 있다. 나무와 관련된 다양한 전시·체험장이 곁들여졌다는 것이다. 132(4만평)의 편백나무 숲 안에 숲 치유 체험장’, ‘목재전시장’, ‘목공예 체험장등 체험시설과 12채의 황토한옥, 통나무집, 황토흙집을 지었다. 편백나무 숲 사이로 톱밥을 깐 산책로를 내고 지하수를 끌어올려 편백 노천탕도 만들었다. 특히 억불산 정상(518m)까지 오를 수 있도록 만든 산책로 말레길은 우드랜드의 백미(白眉)가 아닐 수 없다. 바닥을 목제(木製)로 깔면서 계단을 없앴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도 정상까지 오를 수 있도록 했다. 노약자(老弱者)까지 배려한 장흥군청 관계자들께 감사를 드려본다.

 

장흥으로 가는 길에 들른 심청 이야기 마을’, 곡성의 명물로 자리 잡은 증기기관차가 마지막으로 멈추는 가정역 북쪽에 위치한 송정리에다 철도공사에서 만든 한옥마을이다. 곡성에 웬 심청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긴 몇 년 전만 해도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기에 하는 말이다. 3년쯤 되었을 거다. 난 이 부근에 있는 곤방산과 천덕산 산행을 마치고 하산을 이곳으로 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낯선 풍경과 맞닥뜨리게 된다. 궁금증을 못 이기고 인터넷을 검색한 끝에 이곳 곡성과 심청이에 얽힌 설화를 찾아낼 수 있었다. 곡성이 심청전의 모티프가 된 실존 인물 원홍장의 고향이라는 것을 말이다. 원홍장의 이야기는 곡성군 오산면의 성덕산 기슭에 있는 백제 때 창건된 고찰(古刹)인 관음사(觀音寺)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절에 전해져 내려오는 '관음사사적기'에 심청전의 원형이라는 원홍장의 설화(說話)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700여 년 전인 백제 고이왕 때 오늘의 곡성군 오곡면 송정리 도화촌에 원량이란 가난한 장님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 눈이 멀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생계를 꾸려오던 아내까지 산고(産苦) 끝에 죽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홀아비가 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원량은 갓 태어난 딸 홍장을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키울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홍장은 어느덧 꽃다운 열여섯 살 처녀로 자라났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시주로 바쳐졌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중국으로 건너가 고귀한 신분의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향땅과 눈먼 아비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금동관음보살상을 조성하여 이를 돌배에 실어 보냈는데 이 불상을 모신 곳이 성덕산에 있는 관음사라는 것이다. 이후 이 불상은 영험하다고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듣고 찾아온 원량의 눈도 뜨게 되었단다. 이러한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전해내려 오다가 언젠가부터 구전소설의 형태로 변해 마침내 '심청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마을은 11채의 개별 한옥(韓屋)으로 구성돼 있다. 압권(壓卷)은 황토. 방마다 황토가 듬뿍 발려 있어 자고 나면 기운이 절로 넘쳐난다고 하니 하룻밤쯤 머물러 볼 일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꽃 이파리들. 봄바람이 꽃가지를 흔든다. 소리 없는 바람의 일렁임에 따라 허공에서 춤추듯 길가로 고요히 내려앉는 꽃비들.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장관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 어느 화가가 그린 그림이 이보다 더 아름답고 더 화려할 수 있을까. 아름답다 못해 처연할 정도이다. 마지막 생을 앞 다퉈 지는 꽃잎들을 찾아 섬진강변을 찾았다. 물론 장흥으로 향하는 일정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조금 돌면 되겠기에 망설이지 않고 감행한 것뿐이다. 그만큼 국도 17호선과 19호선을 낀 섬진강변의 벚꽃터널이 유명했기 때문이다. 국도는 어질어질했다. ()의 이쪽과 저쪽에 벚꽃이 지천이다. 속된 말로 환장하게 흐드러지게 피었다. 전국에서도 알아준다는 벚꽃 군락지. 가지와 가지가 맞닿은 벚나무 터널, 큰아기 속살같이 희뿌연 벚꽃이 피어나 있다. 시선을 벚꽃과 강물에 빼앗겨 빠른 속도로 달리는 사치를 부리지 못한 탓에 예정보다 조금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조금도 후회되지 않은 여행이었다.

 

 

우드랜드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장흥읍에 있는 토요시장으로 향한다. 장흥의 명물인 삼합을 먹어보기 위해서이다. ‘삼합이란 세 가지를 합한다는 뜻, 사람들은 보통 삭힌 홍어와 돼지고기를 묵은 김치에 싸먹는 홍어 삼합을 떠올린다. 그러나 장흥의 명품요리인 장흥 삼합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풀만 먹여 기른다는 장흥한우와 전국 생산량의 10%를 차지한다는 장흥 표고버섯, 그리고 장흥 앞바다에서 방금 건져 올린 도톰하게 살이 오른 키조개로 조합한 장흥삼합은 한우의 부드럽고 고소한 맛에 버섯의 깊은 향 그리고 키조개의 담백함이 더해져 미식가(美食家)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한 잔 술이라도 곁들여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 지금은 봄, 남도의 봄에 어울리는 술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난 그냥 진로소주를 집어 든다. 익숙함이 좋아서이다. 하긴 외국에 출장 나갈 때에도 꼭 챙겨가는 것이 진로소주일 정도니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치유의 숲으로 유명한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는 편백나무 숲 사이사이에 들어 앉아 있다. 억불산의 편백나무 숲은 무려 20만평에 이른다고 한다. 이 숲은 독림가(篤林家)였던 고() 손석연씨가 1959년부터 심고 가꾸어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곳에 47만 그루의 편백나무와 삼나무를 심었다. 이놈들이 무럭무럭 자라 수령이 이제 50년을 넘겼다. 사람으로 치면 지천명이 된 셈이다. 숲이 전하는 하늘의 뜻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일까 장흥군에서는 이 일대 132(4만평)을 사들여 일종의 휴양림인 우드랜드를 열었다. 숙박시설과 산책로, 삼림욕장 등을 갖춘 일종의 힐링(healing : 몸과 마음의 치유)단지인 셈이다.

 

 

 

우드랜드에서의 숙소는 쌍둥이복층등 세 가지 형으로 지어진 흙집중에서 원형이다. 이 집은 2010SBS-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대물(大物)’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되었던 가옥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의 줄임말인 대물은 제목 그대로 한 여자의 인생역정을 그린 드라마이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고현정과 권상우가 영원히 함께할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다는 것이다. 숙소 앞에 영화촬영지였음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방 얻기가 만만치 않았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운이 우리에게 돌아온 것을 보면 예약을 맡았던 매제(妹弟)가 얼마만큼 신경을 썼을지 능히 짐작이 된다. 덕분에 우린 고현정의 향기를 느끼며 즐기기만 하면 되고 말이다.

 

 

 

산행들머리는 편백숲 우드랜드 관리사무소

숙소인 흙집촌을 빠져나오면 곧바로 우드랜드의 관리사무소이다. 억불산 산행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일부러 산행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느긋하게 걸어도 기껏해야 2시간을 채 넘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마침 근처에 표고버섯을 닮은 음수대가 만들어져 있으니 목도 축일 겸해서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옆에 있는 우드랜드 안내도도 살펴볼 겸해서 말이다. 장흥은 우리나라 총 생산량의 1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표고버섯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샘터까지도 이렇게 표고버섯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나 보다. 이곳뿐만이 아니다. 조금 후에 만나게 될 연못에도 표고버섯의 조형물을 세워 놓았다. 참고가 될 것 같기에 이곳으로 오는 방법을 적어본다. 남해고속도로 장흥 I.C에서 내려와 23번 국도를 타고 일단 장흥읍까지 들어온다. 읍내에 있는 관산5구 삼거리(장흥읍 건산리)에서 좌회전, 다음 군민회관 5거리(건산리)에선 오른쪽 두 번째 방향의 남부관광로를 따른다. 이어서 향양삼거리(장흥읍 항양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편백숲 우드랜드에 이르게 된다.

 

 

 

 

관리사무소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음식점과 매점을 겸하고 있는 수라간앞을 지나면 목조 2층집이 나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곧바로 100m만 더 가면 편백소금집이 나온다. 편백나무의 피톤치드와 국내산 천일염에서 발생하는 원적외선을 이용해 아토피, 천식, 고혈압, 우울증을 치유하는 공간이란다. 소금마사지방 소금 해독방’, ‘소금 호흡방’, ‘황토방’, ‘편백방’, ‘소금동굴등의 시설이 있다.

 

 

 

 

2층집 바로 못미처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잠시 들어가면 왼편에 표고버섯 모양의 조형물을 세워둔 연못이 보인다. 연못 주변에 크고 작은 한옥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보면 이 부근이 한옥촌인 모양이다.

 

 

 

 

연못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나오는 강의실에서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나타나는 갈림길들을 무시하고 곧장 100m쯤 걸으면 말레길이 나온다. 그리고 데크로 만들어진 말레길에 올라서면서 본격적인 억불산 산행이 시작된다.

 

 

말레길에 입구에서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우드랜드의 명물로 꼽히는 풍욕장(風浴場) ‘비비 에코토피아(Vivi Ecotopia)’로 가는 길이다. 한때 누드삼림욕장으로 소개되면서 화제를 불러오기도 했던 비비에코토피아는 부직포로 만들어진 가벼운 옷을 걸치고 풍욕(風浴)을 체험하는 공간이다. 나무의자, 해먹, 토굴, 움막 등이 설치된 비비에코토피아는 피톤치드가 상큼해 삼림욕을 즐기기에 좋다고 한다. 좋은 경험이 되겠지만 아직은 철이 이르니 포기할 수밖에 없다.

 

 

말레길의 총 길이는 3,736m, ‘비비에코토피아앞에서 억불산 정상까지 놓여 있다. ‘말레는 대청 또는 마루를 일컫는 전라도 사투리란다. 이 길을 걷는 가족들에게 이해와 소통의 장()이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단다. 말레길에는 여느 나무데크와 달리 계단이 없다.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등반할 수 있도록 정상까지 완만하게 설계됐다.

 

 

데크로 들어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편백나무 들이 뜸해져 버렸다. 언젠가 이곳 숲이 태풍의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때의 상흔(傷痕)인 모양이다. 민둥산처럼 변해버린 것이 보기 흉했나 보다. 그 빈자리에다 좋은 글귀를 적은 각양각색의 조형물들을 세워 놓았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글귀가 있어 옮겨본다. ‘나를 위해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봅니다.’ 그렇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조금 후에는 또 다시 편백나무 숲에 든다. 봄비를 맞아 촉촉해진 숲은 편백향 만이 가득하다. 맑고 상쾌하기 그지없다. 편백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놓인 완만한 나무데크를 따라 숲을 오른다. 서로 견주 듯 하늘로 쭉쭉 뻗은 편백나무들이 울창하다.

 

 

억불산 말레길에는 이정표가 없다. 비록 오는 길 중간, 그러니까 옛길이 말레길을 횡단하는 지점과 정상 근처에서 이정표를 볼 수가 있지만 말레길과는 무관하다고 보면 된다. 데크로 만든 길이 외길이다 보니 구태여 만들 필요가 없었나 보다. 대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던 독특한 이정표(?)를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출발지인 우드랜드에서 정상까지를 일정 비율로 나누고, 현 위치에 이를 때까지 소모되는 열량(calorie)을 적어 놓았다. 멋진 아이디어다. ‘말레길을 이용해 억불산 정상에 오르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힐링을 위해 우드랜드를 찾아온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건강에 쏠려있을 것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는 구간의 거리보다는 소모되는 칼로리(calorie)의 양()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보면 너덜겅을 만나게 된다. 안내판이 없는 것을 보면 비슬산이나 무등산과 같이 학술적 가치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그래선지 너덜겅 위에다 안냇가라는 이름표를 단 쉼터까지 만들어 놓았다. 조금 전에 보았던 안내판은 안냇가 떨밭이었으니 이곳 지명이 안냇가인 모양이지만, ‘떨밭은 과연 무슨 뜻일까?

 

 

 

데크로 만들어진 길은 대부분 별다른 특징이 없이 이어진다. 하긴 휠체어를 타고도 오를 수 있도록 만든 길에다 변화까지 준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빗줄기 때문에 시야(視野)까지 막히다보니 눈 돌릴 곳도 마땅히 없다. 그저 길가에 핀 진달래에나 눈길을 맞출 수밖에 없다. 하긴 봄 산행에서 꽃구경만큼 좋은 눈요깃거리도 없겠지만 말이다.

 

 

30분 남짓 걸으니 데크의 양쪽 난간이 트이면서 기존의 옛 산길과 연결시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거리(이정표 : 억불산 정상 0.8Km, 며느리바위 1.0Km/ 평화상선약수마을 1.4Km, 천문과학관 주차장 1.2Km/ 우드랜드 2.3Km, 천문과학관 0.4Km)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천문과학관이나 평화상선약수마을로 내려가는 모양이고, 왼편은 정상으로 오르는 옛 산길인 모양이다. ‘우드랜드2천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만일 입장료가 부담스럽다면 평화리의 상선약수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되겠다.

 

 

말레길에서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참 많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 하나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한 금기사항, 여느 산에서나 볼 수 있으니 특이할 게 없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스틱이나 아이젠의 착용 금지, 그리고 자전거 통행금지 등 이곳에서만의 특별한 금기사항이다. 하긴 많은 자금과 노력을 들여 만든 시설이다 보니 그만큼 관리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거다.

 

 

 

얼마쯤 올랐을까 진행방향에 괴이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뭐랄까 개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억불산의 정상을 향해 기어 올라가는 거북이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말레길을 걷다보면 또 다른 등산로가 눈에 띈다.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는 안전로프까지 매달아 놓았다. 그만큼 산길의 경사(傾斜)가 만만치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 지형에다 계단을 두지 않은 채로 길을 만드느라 고뇌(苦惱)했을 관계자들을 생각하니 새삼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말레길이 막바지에 이르면 길은 좌우로 꿈틀대기 시작한다. 그만큼 산자락이 가팔라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장흥시가지와 그 뒤를 바치고 있는 수인산과 천관산, 부용산, 오봉산, 용두산이 잘 조망되는 곳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의 시계(視界)는 제로(zero). 제법 거세어진 빗줄기로 인해 50m 앞도 제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데크에 세워진 조망도(眺望圖)로 그 안타까움을 대신 위로받을 수밖에 없다. ‘광화문에서 정남쪽으로 내달아 도착한 나루터가 바로 정남진(正南津)이라는 짧은 지식 한 토막 주워 담으면서 말이다.

 

 

 

 

 

첫 번째 전망대에서 옆에 있는 바위를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하면 또 다른 전망대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아예 망원경까지 갖춰 놓았다. 그러나 시계가 열리지 않기는 매한가지이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망원경일지라도 이 빗줄기를 뚫을 수는 없을 것이다. 기암괴석(奇巖怪石)이 솟아 있는 모양이 모두 부처가 서있는 것을 닮았다고 해서 억불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내용이 적힌 또 다른 조망도를 보면서 마음속으로나마 조망을 즐겨볼 따름이다. 이곳에서는 장흥 앞바다가 잘 조망되는 곳이다. 바로 앞에 있는 소록도와 장재도, 거금도는 물론이고 금당도와 금일도, 생일도, 고금도까지 시야에 잘 들어온다고 한다.

 

 

 

 

두 번째 전망대의 맞은편에 보이는 바위봉우리가 억불산 정상이다. 전망대에서 내려서면 이정표(며느리바위 0.2Km/ 암릉구간 0.7Km/ 우드랜드 1.5Km, 천문과학관 1.2Km)가 두 바위봉 사이 양 옆으로 길이 나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길을 찾지는 못했다. 바위가 물기를 흠뻑 품고 있어서 자세한 탐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정표 바로 뒤의 바위봉우리가 정상이다. 두세 평도 채 되지 않는 비좁은 정상에는 사각의 기둥으로 된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도 역시 전망이 좋기는 매한가지이다. 사방으로 시야가 열리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빗줄기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특히 억불산의 명물이라는 며느리바위를 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워할 것 같다. 정상 근처에 구두쇠 영감과 그 며느리에 얽힌 옛 이야기가 적힌 며느리바위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정상에서 조망이 가능한 모양인데도 비 때문에 보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아쉬운 마음만 가득 안은 채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정상을 둘러본 후에는 다시 말레길을 따라 내려온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갈지()자를 그리고 있는 것이 마치 아흔아홉 구비의 길인 천문산의 통천대도(通天大道: 하늘로 통하는 길)를 떠올리게 만든다. 계단을 만들지 않으려다보니 저렇게 힘겨울 수밖에 없었나 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톱밥산책로를 걸어보았다. 잘게 썬 편백나무 알갱이들이 톱밥처럼 바닥에 있어 걷기만 해도 편백나무향이 코끝을 찌른다. 갑자기 심신이 날아갈 듯이 가뿐해진다.

나각산((螺角山, 240m)

 

산행일 : ‘14. 11. 16()

소재지 : 경북 상주시 낙동면

산행코스 : 낙동중학교들머리조망대나각산출렁다리옛길갈림길주능선낙단보갈림길낙동강변 한우촌주차장(산행시간: 1시간45)

같이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색 : 상주 MRF(Mountain·River·Field)11개 코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제11코스인 숨소리 길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낙동리 들판을 지나 산길을 따라 기암(奇巖)과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나각산을 넘고, 거기에다 다시 낙동강을 허리춤에 끼고 걷는 강변(江邊)길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산촌의 호젓함을 만끽하며 나 홀로 사색(思索)에 빠져 걷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반쪽짜리 투어(tour)로 끝나버렸다. 길을 잘못 든 덕분에 낙동강변을 걷지 못하는 우()를 범해 버렸기 때문이다.

 

들머리는 낙동중학교 앞

경천대국민관광단지 앞에서 경천로를 이용하여 상주농공단지 방면으로 되돌아 나오면 헌신교 다리를 건너게 된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25번 국도로 올라가 대구방면으로 달리다가 낙동강을 건너기 직전에 빠져나와 좌회전하여 59번 국도를 타면 금방 낙동면 낙동리에 이르게 된다. ‘숨소리 길의 투어(tour)는 낙동마을에서 시작된다. 강원도 태백의 황지못에서 시작된 낙동강의 1300(525.15) 물길은 남해바다에 이르는 동안 수많은 고을들을 지난다. 그 수많은 고을들 중에 낙동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고을은 이곳 낙동마을이 유일하다. 거기다 면의 이름까지도 낙동면일 정도이니 할 말 다한 셈이다. 참고로 이곳 낙동리는 예로부터 낙동나루로 유명했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낙동나루는 조선시대만 해도 원산, 강경, 포항과 함께 우리나라 4대 수산물 집산지로 꼽혔단다. 김해에서 거슬러 올라온 소금배와 상선(商船)들이 꼬리를 이었고, 주변 객줏집과 주막에는 항시 외지인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뤘다는 것이다.

 

 

낙동마을에 들어서면 먼저 낙동중학교를 찾은 것이 순서다. ‘숨소리길의 들머리가 낙동중학교 정문 못미처에서 왼편으로 열리기 때문이다. 투어가 시작되면 금방 마을을 벗어나 들판으로 들어서게 된다. 벼의 수확이 다 끝난 들녘은 그루터기만이 논바닥에 뿌리박혀 덩그러니 널려있다. 드문드문 나타나는 한우축사(韓牛畜舍)가 보이는 논길을 따라 15분쯤 걸으면 길가 좌대 위에 엎어놓은 옹기(甕器)가 보인다. 근처 덕산 도예에서 설치한 조형물(造形物)이다. 나각산으로 오르는 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열린다.

 

 

 

 

마을길을 벗어나 산길로 들어서도 길은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길은 넓고, 보드라운 흙길은 곱다. 주위는 온통 소나무 천지, 다른 나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나무들 세상이다. 소나무 군락을 비집고 들어가는 숲길은 가을의 끝자락임에도 울창하다. 거기다 산길이 완만(緩慢)하니 동네 뒷산을 산책하듯이 여유롭게 걷는다.

 

 

 

짙은 소나무 숲 아래로 난 숲길은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능선을 따르다보면 얼마 안가 간이화장실이 나오고, 그 뒤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갈림길에 이정표(나각산 전망대/ 낙단보)가 세워져 있으나 거리표시가 없는 게 아쉽다. 물론 이곳에서는 나각산 전망대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산길은 과연 이게 산길일까 싶을 정도로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길이 계속된다. 거기다 주변의 나무들도 변함없이 소나무들뿐이다. 변함없는 풍경이 무료하다고 느껴질 경우에는 왼편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낙동면의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러나 현재 걷고 있는 지점이 낮은 탓에 조망(眺望)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저 들녘에 있는 집들의 툇마루에는 곶감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을 것이다. 이곳 상주가 전국 곶감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감의 고장이니까. 그리고 감나무 가지 끝에는 어쩌면 까치라도 올라 앉아있을지 모르겠다. 자기들 먹으라고 남겨 놓은 잔챙이 홍시들을 쪼아 먹으려고 말이다. 이곳 상주의 감은 상주둥시로 불린다. 둥시는 둥근 감이란 뜻이다. 떫은맛을 내는 타닌(tannin) 성분이 5060일 동안의 건조 과정을 거치면 하얀 당분(糖分)으로 변하면서 달짝지근한 맛을 낸다. 그게 바로 곶감인 것이다.

 

 

 

갈림길에서 10분 정도 숲길을 따르면 이정표(나각산전망대 0.6Km/ 낙동리마을)가 나오고,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갈리나 개의치 말고 곧장 직진하면 된다. 오른쪽으로 난 길은 옛길로서 이 길을 따를 경우 낙동강변으로 내려서게 되기 때문이다. 갈림길을 지나면 금방 팔각정(八角亭)에 이르게 되고, 곧이어 벤치를 갖춘 쉼터(이정표 : 나각산 전망대 0.2Km/ 팔각정자 0.3Km)에 이르게 되니 잠깐 쉬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조금 후에 가파른 나무계단이 기다리고 있으니 체력도 비축할 겸 해서 말이다. 참고로 이곳에서 또다시 오른편으로 갈림길이 보이나, 낙동강변으로 내려가는 길이니 개의치 말고 곧장 능선길을 따른다.

 

 

 

 

 

쉼터에서 근처에 뜬금없는 체육시설이 보인다. 산을 오르다보면 이런 체육시설을 설치해 놓은 산들이 가끔 눈에 띈다. 그런데 난 설치한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과연 이런 체육시설을 이용할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이런 시설은 동네 근처에 만들어 주민들이 이용하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체육시설에서 조금 더 가면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제법 가파른 계단을 밟으며 힘겹게 오르면 그 끝에 나무로 만든 전망대(展望臺)가 나타난다. 발아래에 펼쳐지는 낙동강 줄기가 가히 환상적이다. 날씨가 화창한 탓인지 저 멀리에 있는 낙단교와 낙단대교, 그리고 낙단보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참 잊은 게 있다. 계단에 오기 전에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보인다는 것을 말이다. 이 길은 이따가 하산을 할 때에 길을 잘못 들어 만나게 되니 그때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겠다.

 

 

 

 

 

 

전망대를 지나면 또 다시 짙은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솔가리(소나무 落葉)가 수북하게 쌓여 마치 양탄자처럼 폭신폭신한 길이다. 한가하게 걷는데 때맞추어 바람 한줄기가 스쳐 지나간다. 바람결에 실려 온 짙은 솔향기가 코끝을 맴돈다. ! !‘ 나도 몰래 들썩거리는 코끝은 차라리 추임새다. 그만큼 숲길이 나를 호젓한 풍경 속에 빠져들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솔향기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덧 정상이다. 그러나 정상으로 오르는 것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정상으로 오르기 바로 직전 오른편에 전망대 하나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서면 또 다시 낙동강이 나타난다. 아까 전망대에서 본 것보다도 훨씬 또렷하게 말이다. 유장(流長)한 낙동강 물줄기가 만들어 놓은 절벽(絶壁)이 풍성한 강물과 어우러지며 또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전망대에서 방향만 틀면 정상이다. 낙동마을에서 바라볼 때 소라()의 뿔()을 닮았다는 나각산(螺角山)의 정상은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바위 속에 작은 자갈들이 박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주 오랜 옛날 강바닥이었던 땅이 치솟아 산이 됐다는 증거이다. 정상의 꼭대기에는 이층으로 지어진 정자(亭子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커다란 정상표지석이 마치 수문장(守門將)처럼 지키고 있다. 투어(tour)를 시작한지 45분이 지났다.

 

 

 

전망대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터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비옥한 들판 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낙동강, 강물이 내쉬는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강과 함께 어우러지는 주변의 낮은 산세(山勢)와 넓은 들녘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건너편에 보이는 출렁다리이다. 출렁다리와 건너편 정자(亭子)가 마치 보란 듯이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아슬아슬한 절벽위에서 말이다.

 

 

 

정상에서 출렁다리로 간다. 그런데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라는 산행대장의 전갈이다. 아마 산행대장도 이곳을 처음으로 찾은 모양이다. 정상적인 숨소리 길은 출렁다리의 끝에 있는 정자에서 옛길로 내려서야 하는데도 구태여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 나오라고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나저나 정상에서 조금만 더 진행하면 출렁다리이다.

 

 

출렁다리는 아찔하다. 오전에 건넜던 경천대의 출렁다리보다 한층 위라고 보면 된다. 조그만 움직임에도 출렁거리기는 매한가지이지만 지상에서의 높이가 경천대의 것보다 한참을 더 높기 때문이다. 갑자기 어디선가 괴성(怪聲)이 들려온다. 다리 위를 건너던 여자들이 사색(死色)을 지으며 내지르는 소리이다. 바람이 조금만 거세도 오금이 저릴 정도인데, 함께 걷던 남자가 아예 작정을 하고 발을 구르는 모양이다.

 

 

 

출렁다리 건너의 전망대에 서면 또 다시 시야(視野)가 열린다. 아까 지나왔던 정상에 못잖은 조망(眺望)이 터지는 것이다. 산자락 아래에는 인기척 없는 마을이 조용히 엎드려있고, 그 뒤에는 낙동강의 큰 물줄기가 유유히 흐르고 있다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 나온다. 출렁다리를 다녀오는데 정확히 10분이 걸렸다. 주위경관까지 둘러보는데 걸린 시간이니 실제 걷는 시간은 그보다 한참 짧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다시 아까 올라올 때 지나왔던 전망대까지 되돌아 내려간다. 다만 이곳 전망대에서는 아까 올라왔던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왼편에 보이는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길로 진행한다. 이 길을 따라 잠깐 걸으면 갈림길(이정표 : 옛길, 낙동강 0.8Km, 낙단보 3.6Km, 낙동강 먹거리촌 3.6Km/ 출렁다리 0.1Km/ 팔각정자 0.6Km)이 나타난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출렁다리의 이쪽 그러니까 정상쪽에서 정상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오는 길인 모양이다.

 

 

 

 

 

 

 

출렁다리 갈림길에서 몇 발짝만 더 걸으면 또 하나의 갈림길(옛길/ 팔각정자 0.7Km, 낙단보 3.55Km, 낙동강 먹거리촌 4.15Km/ 출렁다리 0.2Km)이 나온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이정표의 방향표시가 보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은 낙단보, 그렇다면 팻말을 옛길 아래에다 붙여 놓아야 하는데, 팔각정자 방향에다 붙여놓은 것이다. 사실 조금만 유심히 살펴본다면 팔각정자와는 방향표시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난 건성으로 보았고, 산행대장 또한 나와 같았던 모양이다. 결국 우리는 팔각정 방향으로 진행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낙동강변을 허리춤에 끼고 걷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산행을 하면서 만났던 탐방로 안내도를 한번만 주의 깊게 봤더라도 이런 실수를 안했을 텐데 안타깝다.

 

 

 

 

길을 잘못 들어선 덕분에 20분이 채 안되어서 아까 정상으로 올라갈 때 보았던 갈림길을 다시 만나게 되고, 산을 올라갈 때 지나왔던 길을 따라 다시 간이화장실까지 내려온다. 그리고 낙단보 갈림길에서 이번에는 낙단보 방향으로 내려선다. 낙단보로 방향을 틀어 조금 더 내려오면 들길(이정표 : 낙단보 1.9Km/ 나각산전망대 1.4Km)을 만나게 되고, 들길로 들어서면 한우(韓牛) 축사(畜舍)가 드문드문 나타난다. 이곳 상주의 한우들은 감 껍질을 먹고 자란다고 한다. 사람들이 먹기도 쉽지 않은 귀한 감 껍질을 먹고 자란 한우라면 육질(肉質)이 좋을 것이 틀림없다. 낙동마을의 먹거리촌에 한우요리 전문 식당들이 많은 이유일 것이다.

 

 

들길을 따라 얼마간 더 걸으면 투어를 시작했던 낙동마을이다. 그리고 마을의 중심가를 통과하면 끄트머리에서 먹거리촌을 만나게 되고, 주차장이 만들어진 강변(江邊)에 내려서면 숨소리 길투어는 끝을 맺게 된다. 투어에 걸린 시간은 총 1시간45, 만일 낙동강의 강변을 따라 걷는 구간을 생략하지 않았더라면 이보다 조금 더 걸렸을 것이다. 후미그룹이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기에 낙단보(洛丹洑) 근처까지 강변길을 걸어보았다.

 

 

낙동강 위로 길게 누운 낙단보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낙동강에 만들어진 8개의 보(: 수리시설) 중 하나다. ‘이락지천(利樂之天. 자연은 이롭게, 사람들은 즐거운, 생명이 유익한 생태 환경 조성)’을 콘셉트(concept)로 만들어졌다는 낙단보가 낯설게 보이는 건 무슨 이유일까? 아마 모()사업인 ‘4대강 사업이 너무 많이 구설수(口舌數)에 오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국민들 대다수가 반대했던 대단위 사업을 고집스럽게 추진했으니 어찌 뒤탈이 없을까마는 이왕에 지어졌으니 지어진 목적대로 유용하게 잘 활용되었으면 좋겠다.

 

 

낙단보 우측에 보이는 옛 건물은 관수루(觀水樓)이다. 부산 동래에서 거슬러 올라온 황포돛대를 단 배들이 가득했다는 낙동나루터는 없어진지 이미 오래고, 지금은 관수루만이 남아 옛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아니 그때의 그 모습은 아닐지라도 주막(酒幕)은 있다. 강 건너 이쪽에 먹거리촌이 생겼으니 말이다. 이 고장에서 자랑하는 한우(韓牛) 고기를 안주 삼아 텁텁한 막걸리라도 한 사발 마셔보면 어떨까? 비록 주모(酒母)의 걸쭉한 대꾸는 없을지라도 말이다.

비봉산(飛鳳山, 230m)

 

산행일 : ‘14. 11. 16()

소재지 : 경북 상주시 중동면

산행코스 : 상주자전거박물관경천교동봉청룡사비봉산상도촬영세트장경천교경천대경천대국민관광단지주차장(산행시간: 3시간)

같이한 산악회 : 월산악회

 

특색 : 상주에 가면 ‘MRF 코스라는 다소 생소한 낱말을 접하게 된다. 요즘 탐라도의 걷기 열풍'이 육지(陸地)에 상륙해 저마다 '걷는 길'을 만들고 있는데, 그런 이슈(issue)에 편승해서 만들어 낸 상주시의 둘레길이라고 보면 된다. ‘MRF’란 산(Mountain)과 강(River)과 들(Field)을 말한다. 즉 산길과 강길, 들길을 모두 아우르는 둘레길이라는 얘기이다. ‘MRF 코스는 총 11개 코스로 낙동강길(1코스), 똥고개길(4코스), 너추리길(7코스), 물소리길(9코스) 등 코스마다 이야기가 있는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입소문을 많이 탄 코스는 당연히 비봉산과 경천대국민관광지를 끼고 있는 낙동강길(1코스)과 나각산길과 낙동강변을 함께 걷는 숨소리길(11코스)이다. 이번 상주여행에서는 이 두 코스를 들러보기로 했다.

 

산행들머리는 상주자전거박물관(상주시 도남동)

중부내륙고속도로 상주 I.C에서 내려와 25번 국도를 이용 상주방면으로 잠깐 들어가다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하자마자 국도에서 빠져나온 뒤 우회전하여 헌신교 다리를 건넌다. 이어서 경천로를 따라 달리다가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병성교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용마로를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상주자전거박물관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용마로로 접어들지 않을 경우에는 경천대국민관광지로 가게 된다. 자전거박물관(博物館)은 상주시가 자전거 도시임을 대변해 주는 존재다. 2002년 남장사 입구에 개관했다가 201010월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박물관의 전시물(展示物)은 모두가 자전거, 초창기에 발명된 자전거에서 현재의 MTB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전거가 전시되어 있다. 나무로 만든 자전거, 이층자전거, 물 위를 달릴 수 있는 수륙양용자전거 등 희귀한 자전거도 있다고 해서 비봉산을 둘러보고 돌아 나오는 길에 들려보고 싶었지만 시간 때문에 희망사항으로만 남았다. 경천대를 들렀다가 국민관광단지까지 가야하는데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자전거박물관 앞,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경천교(擎天橋) 다리를 건너면서 투어(tour)가 시작된다. 낙동강길은 원래 경천대국민관광지에서 출발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 경우에는 박물관에서 경천대까지의 구간을 중복해서 걷게 되므로 중복구간을 생략한 것이다. 경천교 다리의 난간에는 커다란 모형자전거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모두 30대란다. 요즘 '자전거도시'임을 내세우고 있는 상주시가 상징으로 만들어 놓은 조형물인 모양이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낙동강은 웅장하다. 그리고 건너편 강변을 이루고 있는 절벽 또한 우람하다.

 

 

 

다리를 건너면 가장 먼저 커다란 비석(碑石)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옛날 이곳 회상나루에서 사람을 태워 나르거나 물건을 운반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세워 놓은 모양이다. '회상나루는 회곡진(回谷津)이라고도 하며 풍양에서 상주로 상주에서 안동으로 왕래하는 관문 역할을 했다. 객주촌이 번성해 애환과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고 적혀 있다. 비석 옆에 낙동강생태문화탐방로 안내도와 이정표(봄꽃군락지 1.1Km,상도세트장 1.5Km/ 자전거박물관 0.3Km)가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길을 나설 일이다.

 

 

이야기가 있는 낙동강 길은 이곳에서 낙동강변(江邊)을 따라 오른편으로 크게 휜다. 들머리에 위에서 말한 시설물들 외에도 낙동강 투어로드라는 이정표를 하나 더 만들어 놓았으니 화살표를 따라가면 된다. ‘낙동강 길은 이곳에서 잠시 강과 함께 간다. 왼편은 산이 호위하고 오른편에서는 강이 따라오는 길이다. 길바닥은 걷기에 좋을 만큼 곱고, 마침 차량통행까지 금지되어 있으니 함께 걷는 이와 도란도란 낙동강 이야기라도 나누면서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이정표가 지시한 화살표를 따라 잠시(300m) 걷다보면 왼편으로 산길 하나가 열린다. 비봉산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에서부터 강길을 버리고 산길을 따른다. 계속해서 투어로드를 따르더라도 비봉산으로 갈 수 있겠지만, 이럴 경우에는 같은 길을 두 번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들머리에 이정표(#1 : 비봉산 4Km, #2 : 청룡사등산로 3.1Km/ 자전거박물관 0.6Km)가 두 개나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의 초입은 제법 경사(傾斜)가 가파르다. 숨을 할딱거리면서 오르는데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난다. 비봉산의 높이는 겨우 230m, 어린 시절 우리네가 뛰어놀던 뒷동산의 수준이다. 그런데도 숨을 할딱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산은 높으나 낮으나 간에 산은 산인 것이다.

 

 

일단 능선에 오르면 산길은 고와진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이 평탄한데다 바닥까지 고운 흙길이다 보니 걷는데 조금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걷기 좋은 능선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가 있다. 능선이 하도 밋밋하다보니 중간 포인트인 동봉(東峯)이 어디인지를 도대체 알아차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이쯤이려니 하고 산행을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숲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생기(生氣)를 북돋워준다. 강바람은 시원하기 그지없고 거기에다 간혹 들려오는 새소리까지도 청아하다. 능선은 온통 소나무 숲, 가끔 참나무 군락도 보이지만 그저 소나무 천지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당연히 코끝을 간질이며 지나가는 바람결에는 짙은 솔향이 배어 있다. 거기에 두텁게 바닥을 덮고 있는 솔가리(소나무 落葉)는 융단처럼 푹신하다. 흔히 접할 수 없는 '자연숲길'이다.

 

 

산길을 걷다보면 소나무 한 그루를 등에 이고 있는 '이무기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 모양새가 이름만큼이나 이채롭다. 아주 오랜 옛날 낙동강 가운데에 있는 하중도에 금개구리(金蛙)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근처에 살고 있던 학()이 이 금개구리를 잡아먹고 봉황(鳳凰)으로 변해서 하늘로 날아간 모양이다. 이를 뒤늦게 안 뱀()이 울면서 내려오다. 굳어진 바위가 바로 이 바위란다. 하긴 금개구리를 잡아먹었더라면 용()으로 변해 승천(昇天)했을 텐데 그 행운을 학에게 빼앗겼으니 얼마나 분했을까?

 

 

비봉산의 들머리에서 전망대까지 이어지는 능선 길은 대략 4정도. 산길은 줄곧 오른쪽 옆구리에다 강줄기를 끼고 이어진다. 얼마쯤 걸었을까 남쪽을 향해 내달리던 산길이 갑자기 호젓해진다. 그렇게나 또렷하던 길의 흔적 또한 희미해진다. 그러다가 능선을 가로지르며 지나가는 자전거도로에 이르기 얼마 전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물론 이정표는 없다. 바닥에 놓인 방향표시지는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옳은 선택은 능선을 따라 곧장 진행하는 것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타난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 거리는 짧다. 하긴 이렇게 낮은 산의 능선에서 내려오는 길이니 길고 싶어도 길수가 없었을 것이다. 능선을 내려서면 아까 산으로 올라올 때 헤어졌던 길, 그러니까 들머리의 이정표에 적혀있던 낙동강 투어로드(tour road)’를 다시 만나게 된다. 이 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청룡사 입구가 있는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또렷하게 나있는 산길 하나가 왼편에 보인다. 아까 삼거리에서 곧장 진행했더라면 이곳으로 내려왔을 것이다. 괜히 고생을 사서 했던 것이다.

 

 

 

삼거리(이정표 : 청룡사 0.3m/ 삼림욕장 0.8Km 제철꽃단지 1.6Km)에서 오른편으로 들어서면 잠시(300m) 후에 청룡사(靑龍寺)가 나타난다. 비봉산 중턱에 자리 잡은 청룡사는 일주문과 천왕문이 따로 없지만, 낙동강 풍경이 펼쳐지는 오붓한 숲길이 경내까지 이어진다. 1672(숙종 원년)에 창건된 청룡사는 비봉산 중턱의 가파른 절벽 위에 세워진 대한불교법화종 소속의 작은 사찰(寺刹)이다. 그러나 낙동강을 굽어보고 있는 뛰어난 풍광(風光) 때문에 예로부터 불자(佛子)뿐 아니라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많이 찾았다 한다. 낙동강 물줄기 중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는 경천대보다도 이곳에서 굽어보는 낙동강의 풍광이 더 뛰어나다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그동안 몇 번의 중창을 거쳐 현재는 주 전각(殿閣)인 극락전과 산신각, 종각, 그리고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세월의 흔적이 덜 느껴지는 것을 보면 새로 지은 지 오래지 않은 모양이다. 투어를 시작한지 정확히 1시간이 지났다. 물론 쉬지 않고 걸은 시간이다.

 

 

 

 

비봉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청룡사의 오른쪽 뒤편으로 나있다. 정상까지는 20분 남짓, 그러나 서두를 필요는 없다. 오른쪽이 벼랑으로 이루어진 길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뛰어나니 구태여 갈음을 재촉하지 말고 느긋이 음미하며 걸어보라는 얘기이다. 걷다가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유장한 강물이 계속 따라붙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상으로 가다보면 바위절벽 위에 걸터앉은 전망대가 나타난다. 전망대에 서면 상류의 경천교에서 하류의 상주보까지 일망무제(一望無題)의 경관이 펼쳐진다. 발아래 깔린 낙동강은 상주보가 물을 가둔 덕에 수량이 풍부하고, 그 한가운데엔 인공섬으로 변한 경천(擎天)섬이 두둥실 떠있다. 4대강 정비사업에 의해 만들어진 섬에는 잔디와 나무들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려 놓았다. 멋진 발상이다. 섬 뒤에 보이는 마을은 어쩌면 도남마을일 것이다. 그리고 그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릴라치면 저 멀리 MBC-TV에서 인기리에 방영(放映)했던 드라마 상도의 촬영지가 또렷하다. 참고로 이곳 전망대는 해질녘이면 찾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고 한다. 이곳에서 맞는 해넘이가 장관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정상으로 향하면 조금 후에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삼거리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이름표가 떨어져 나가버린 탓에 방향을 가늠함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눈치로 방향을 가늠할 수밖에 없다. 그 눈치가 바로 왼편이다. 왼편방향이 위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만난 이정표들은 대부분 이렇듯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다. 생김새로 보아 설치한지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도 대부분의 이름표들이 떨어져 나가버린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설치나 관리 등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썼었더라면 보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삼거리에서 정상은 금방이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이정표에서 자전거길을 벗어나 왼편 산자락으로 올라서면 잠시 후에는 비봉산 정상이다. 벗어나는 지점에 이정표(자전거박물관 3.5Km/ 상주보 2.5Km/ ?)가 세워져 있고, 이도 아닐 경우에는 도로를 만드느라 생긴 절개지(切開地)의 모서리를 따라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세(山勢)가 봉황이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모습을 닮았다는 비봉산의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외에도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바로 아래로 청룡사 경내(境內)가 한눈에 들어오고, 낙동강이 그 전모(全貌)를 드러낸다. 산과 들을 감고 돌아 흐르는 물길, 산자락은 강()을 보듬고 있고, 그 강은 들녘을 마치 어머니처럼 보살피고 있다. 강의 한가운데에 떠있는 경천섬은 어쩌면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품(藝術品)이 아닐까 싶다. 온통 강과 산, 그리고 하늘이 빚어내는 아스라한 전경이 한없이 펼쳐진다.

 

 

 

 

비봉산 정상을 둘러보고 난 후에는 올라갔던 길을 따라 다시 청룡사까지 내려와야 한다. 드라마 상도의 촬영지로 가는 길이 청룡사에서 삼거리로 되돌아나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이다. 갈림길에 이정표(상도촬영장 1.0Km, 경천교 2.2Km, 경천대 4.1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청룡사에서 정상을 올랐다가 다시 청룡사로 돌아오는 데는 35분이 걸렸다.

 

 

 

갈림길에서 가파르게 내려서면 잠시 후에 낙동강 투어로드(tour road)’를 다시 만나게 된다. 촬영세트장으로 가는 길에 오른편 언덕 위에 멋들어지게 지어진 3층짜리 철새 관찰전망대가 보이나 생략하고 발길을 재촉한다. 지금까지 투어(tour)를 이어오는 동안 단 한 마리의 철새도 눈에 띄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올라가봤자 철새구경은 물 건너갔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길가에는 온통 감나무 과수원들뿐이다. 그리고 그 과수원의 나무들마다 빨갛게 익은 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이 역시 삼백(三白)의 고장답다. 상주는 본디 삼백(三白)의 고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삼백이란 이곳 상주에서 많이 생산된다는 쌀과 곶감, 그리고 누에고치를 이르는 말이다. 이 세 가지 특산품의 색깔이 하얗다고 해서 삼백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이다. 올해 감이 풍년이라는 신문보도를 본 기억이 있는데, 감을 따봐야 인건비도 안 나온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또 하나 우리네 이웃들의 가슴 아픈 현장을 보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길가에 보이는 감나무에서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홍시 두어 개를 따먹으며 걷다보면 이내 드라마 상도의 촬영세트장에 이르게 된다. MBC-TV에서 200110월부터 방영되었던 드라마 상도는 조선시대 최고의 거부(巨富)이자 무역상(貿易商)이었던 임상옥(林尙沃)의 일대기를 그린 대하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는 미천한 장돌뱅이에서 3품의 고위 관직(官職)에까지 오른 극적이고 변화무쌍했던 임상옥이 평생을 통해 추구했던 상도정신(商道精神)과 이재술(理財術), 그리고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다라는 말과 함께 말년에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그의 상업철학(商業哲學)을 드라마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경제정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방영 당시가 IMF사태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기업인들의 윤리의식과 상도덕이 요구되는 시점이었기에 이 드라마는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그 결과 장장 6개월이 넘도록 인기리에 방영된바 있다.

 

 

 

촬영세트장을 빠져나오면 낙동강 길(10.8)’은 다시 왼편에 낙동강을 끼고 이어진다. 널따란 길은 곱고 한가롭다. 그 한가로움 끝에서 사념(思念)의 장으로 들어서본다. 이 길의 이름은 낙동강 길’, 상주시에서 조성한 ‘MRF 코스의 첫 번째 구간이다. 강원도 태백의 황지못에서 시작된 낙동강의 1300(525.15) 물길은 남해바다에 이르는 동안 수많은 고을들을 지난다. 강이 지나는 각 고을들마다 낙동강이라는 이름을 들먹일 수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그런 흔한 이름을 지었을까? 상주고을이 낙동강과 맺고 있는 진한 인연 때문이란다. 우선 낙동강이라는 이름부터가 상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상주의 옛 이름이 상락(上洛)’인데 물길이 상락고을의 동쪽으로 흘러간다고 해서 낙동강(洛東江)’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니 말이다. 또한 상주에는 조선시대에 ‘4대 수산물집산지(水産物集散地 : 원산, 강경, 포항)’의 하나인 낙동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인해 당당하게 첫 번째 구간에다 그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다시 자전가박물관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경천대로 향한다. 박물관에서 경천대까지는 대략 1.9Km정도, 이중 1Km이상은 자동차도로를 따라 걸어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구간이다. 자동차도로 옆에 자전거도로가 있지만 오가는 자전거들 때문에 위험하기는 매 한가지이다. 도로를 따라 15분 정도를 걷다가 자전거도로가 데크로 변하는 지점에서 오른편 산자락으로 올라서면 경천대로 가게 된다.

 

 

산길은 오른편이 바위절벽인 벼랑 위로 나있다. 그러나 길이 벼랑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서 나있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위태롭게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의 풍경을 즐기면서 걷기만 하면 된다.

 

 

 

부드러운 능선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철()다리가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출렁다리다. 그런데 이 출렁다리를 건너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다른 곳의 출렁다리들은 흔들림을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인데 비해 이곳은 엄청나게 출렁거려서 스릴(thrill)을 만끽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다리에 매달려 있는 위험, 뛰지 마시오!!’라는 경고판(警告板)일 것이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다리 아래 오른편에 옛날 가옥들이 보인다. 드라마 상도의 또 다른 촬영세트장이란다. 청룡사에서 50분, 투어를 시작한지는 2시간25분이 지났다.

 

 

 

 

출렁다리에서 야트막한 언덕 하나를 더 넘으면 드디어 경천대이다. 거대한 바위무더기로 이루어진 경천대에 바로 옆에 반듯하게 지어진 정자(亭子) 하나가 보인다. 바로 무우정(舞雩亭)이다. 무우정은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 : 1605-46)가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무릎을 꿇은 삼전도의 굴욕에 울분을 삭이며 은거(隱居)했던 곳이다. 그 전까지 자천대(自天臺)로 불리던 바로 옆 암봉(巖峰)을 경천대(擎天臺)라고 고쳐 부른 이도 채득기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우여곡절 끝에 세자와 대군을 따라 중국 심양으로 들어가면서 부른 노래가 봉산곡(鳳山曲)’인데, 그 첫 구절이 가노라 옥주봉아, 잘 있거라 경천대야로 시작되는 것을 보면 그가 이곳을 얼마나 아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우정(舞雩亭) 바로 옆이 경천대이다. 예로부터 낙동강 물길에서 가장 빼어난 절경으로 일컬어지는 경천대(擎天臺)낙동강 제1으로 꼽히는데, 원래는 자천대(自天臺)라고 불렸다. 하늘이 스스로 만든 절경이라는 의미란다. 그만큼 이곳 경천대가 빼어나다는 의미일 것이다. 경천대는 빼어난 풍경뿐만이 아니라 여러 선인들의 발자취가 남아있어 더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정기룡장군에 얽힌 이야기가 가장 가슴에 와 닿는다. 임진왜란 당시 육지의 이순신이라고 불렸던 명장 정기룡(鄭起龍 : 1562~1622)장군이 젊은 시절 용마(龍馬)와 함께 수련을 쌓은 곳이 바로 이곳 경천대라고 한다. 입구에 장군의 동상(銅像)이 서 있는 이유란다.

 

 

 

 

암봉으로 이루어진 경천대에 올라서면 눈앞에 유장한 낙동강이 펼쳐진다. 건너편에는 금빛 모래사장이 아름답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위절벽 위에 우거진 소나무 숲이 늠름하다. 이곳 경천대와 인연이 짙은 선비들의 올곧은 기상(氣像)을 대변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발아래로 보이는 강물은 좀 아쉽다. 거울처럼 고요하면서도 잔잔한데, 파란 하늘이 비치는 강물이 유난히도 녹색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녹조현상(綠藻現象)일까? 아니기를 빌어본다.

 

 

 

경천대를 빠져나오면 매점을 겸한 상가시설이 나타나고, 곧 이어 차도로 올라서게 된다. 길가에 보이는 공원의 시설들을 구경하며 고갯마루로 올라서면 오른편에 전망대로 올라가는 들머리가 보이나 올라가볼 시간이 나지 않기에 이를 무시한다. 고갯마루에서 반대편으로 내려가다 보면 이번에는 왼편에 수영장과 어린이놀이시설 등을 갖춘 위락시설인 경천대랜드가 나타나고, 곧이어 국민관광단지 주차장이 나오면서 낙동강 길투어가 끝을 맺는다.

여행지 : 두웅습지(濕地) 및 신두리 해안사구(海岸砂丘)

 

여행일 : ‘14. 6. 7()

 

소 재 지 : 충남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두응습지(濕地)와 신두리 사구(砂丘)는 서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둘러보는 게 좋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어느 곳 하나 서운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식생을 보여주는 두웅습지는 람사르습지로 등록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연습지이고, 바람이 만들어낸 모래언덕인 신두리 사구는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되었을 정도이니 어찌 하나라도 빼먹을 수 있겠는가.

 

관리사무소 앞 주차장에 도착하면 의외의 풍경에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그 놀라운 표정들이 실망감을 가득 안고 있다는 게 문제다. **)‘람사르습지(Ramsar wetlands)’라는 거창한 이름에 잔뜩 기대를 하고 찾아왔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그 규모가 너무 왜소(矮小)하기 때문일 것이다. 웬만한 동네 저수지들보다 더 작은 저수지를 보고 실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차라리 그것이 더 이상하다 할 것이다.

(**)람사르습지는 물새 서식지로서 중요한 습지 보호에 관한 협약인 람사르협약(Ramsar Convention)이 만들어낸 귀한 산물이다. 람사르습지가 물새 및 생물종 다양성을 위해 람사르협약에 근거해서 등록·지정 보호하는 습지를 말하기 때문이다. 1971년 이란의 해안도시인 람사르 회의에서 채택되었기에 람사르협약이라 부른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1997년 람사르협약에 가입한 이래 인제 대암산 용늪을 시작으로 2012년 말 현재까지 창녕 우포늪, 울주 무제치늪, 신안 장도습지, 태안 두웅습지, 제주 물영아리오름, 전남 무안갯벌, 순천만·보성갯벌, 강화도 초지리 매화마름군락지, 오대산 질뫼늪·소황병산늪·조개동늪, 제주 물장오리오름, 충남 서천갯벌, 한라산 1100고지 습지, 고창·부안갯벌, 제주 동백동산습지, 고창 운곡습지, 신안 증도갯벌, 그리고 2012년 등록한 서울 한강 밤섬 등 모두 18곳의 습지를 등록해 보호하고 있다.

 

 

 

 

두웅습지에서 자생(自生)하고 있는 동식물 중에서 자랑거리는 아마 금개구리(金蛙)인 것 같다. 공중화장실까지 황금빛 개구리모형으로 만든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공중화장실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고장이 났다는 것이다. 이곳의 주요 고객은 어린이들이라고 알고 있다. 비상시 대응이 서툰 어린이들이 당황해 하는 광경이 연상되면서 갑자기 입맛이 씁쓸해진다.

 

 

습지(濕地 : )는 다양한 생물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간이다. 자연(自然)은 사람이 손대지 않을 경우에는 생물들이 모여들어 스스로 그렇게 되는(自然)’ 생명의 땅으로 자연스레 변한다. 이러한 생명의 땅들 중에서 국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습지들은 람사르습지에 등록돼, 보전되고 있다. 두웅습지도 그중의 하나이다. 두웅습지는 사막 지형으로 이름난 신두리사구(砂丘 : 태안군 소재)의 해안(海岸) 가까이 형성된 사구배후습지. 굴곡 심한 해안의 앞쪽에 모래가 쌓이면서 사구지대와 내륙 산지 사이에 민물이 고이면서 형성된 습지다. 4500~7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나 그 규모는 작다. 길이 200m에 폭 100m가량의 자그마한 저수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생물들은 다양하다. 식물 311, 육상곤충 110, 어류와 양서류 20여종이 살고 있는데, 금개구리·표범장지뱀 등 희귀종도 다수 포함돼 있다고 한다.

 

 

 

 

 

습지(濕地)와의 경계선인 목책(木柵) 앞에 왠 통이 하나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올챙이들이 들어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그 안에 들어있는 올챙이는 금개구리가 아니고 황소개구리(bullfrog)란다. 북아메리카의 동부지방이 원산지인 황소개구리는 70년대에 식용(食用)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들어오는 과정이 물론 식량 자급자족이었다지만, 그 이면에는 남성들의 보신용(保身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막상 들어와 보니 생각보다는 잘 팔리지 않았던가 보다. 그래서 주변에 방생(放生)해버리는 사례가 늘기 시작했고, 그 개구리들이 이제는 사회문제화가 되고 있다. 자연생태계(自然生態界) 파괴의 주범(主犯)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이런 애물단지를 전시해 놓았을까. 토종(土鐘)도 아닌 외래종(外來種), 그것도 설명 한마디 없이 말이다.

 

 

 

두웅습지는 자그마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찾는 사람들은 많은 편이다. 비교적 접근이 쉽다는 게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 외에 또 다른 이유를 들어보라면 신두리사구를 꼽고 싶다. 신두리해수욕장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사구(濕地)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면서도 우이도에 있는 풍성사구와는 달리 일반인의 출입을 허용하고 있다. 해수욕장이나 사구를 찾아온 사람들이 이곳 두웅습지까지 둘러보는 것이다. 두웅습지에서 사구까지는 서서히 걸어도 넉넉잡아 15분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잠시 나무데크를 따라 걸으며 다양한 동식물들을 관찰할 수 있다. 요즘 볼거리는 늪을 수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수련들이다. 붕어마름과 애기마름이 깔린 늪 일부를 수련들이 메우고 있다.

 

 

 

 

 

 

 

 

 

 

두웅습지를 둘러보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하다. 만일 곳곳에 세워진 설명판까지 꼼꼼하게 읽어보는 수고를 덜겠다면 그 절반만 투자해도 넉넉할 것이다. 이곳 두웅습지에서 다음에 답사(踏査)하려고 하는 신두리사구(濕地)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하면 된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는 관람을 먼저 끝낸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긴다. 서서히 돌고 있는 사람들이 관람을 끝낼 때까지의 시간을 때울 마땅한 소일거리가 근처에 없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에는 그냥 걸어서 신두리사구로 이동하면 된다. 15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사구까지는 임도(林道)로 연결되어 있고, 중간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서 혼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신두리해안사구로 가는 길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냥 임도만 따라서 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해해야 할 곳도 있다. 7~8분쯤 걸으면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이정표(신두리사구 0.7Km/ 두웅습지 0.8Km)에서 이정표를 무시하고 왼편으로 접어들라는 얘기이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대로 곧장 진행해도 되지만 이럴 경우 조금 더 멀게 돌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왼편으로 접어들어 100m쯤 진행하면 다시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편은 아까 이정표(이정표 : 신두리사구 0.5Km/ 두웅습지 1.0Km)가 지시했던 길이 돌아서 오는 길이다. 삼거리에서 사구는 금방이다. 몇 발자국 걸은 것 같지도 않은데 저만큼 앞에 황량한 모래언덕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구의 들머리에는 커다란 빗돌이 세워져 포토 죤 (photo-zone)’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공식명칭은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되었단다. 사구 옆으로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해안사구(海岸砂丘)의 투어(tour)가 시작된다. 길은 사구를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만든 모양인데, 사구를 보호하려면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에 다녀온 신안 우이도의 풍성사구처럼 말이다. 사구의 하단에 이르면 웅장한 모래언덕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래언덕엔 어김없이 바람의 땅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운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다. 인간의 족적 따위는 하룻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는 마법의 땅이라고나 할까.

 

 

 

 

신두리 해안사구는 바람의 땅이다. 서해를 건너온 매서운 바닷바람이 파도에 밀려온 고운 모래를 육지로 실어 나른다. 무너지면 쌓고 또 무너지면 쌓고, 그래서 바람이 불 때마다 지형이 바뀐다. ‘티끌 모아 태산이란 속담(俗談)이 있다. 바로 이곳을 두고 한말이 아닐까 싶다. 오랜 세월동안 한줌씩 쌓아온 모래들이 이정도로 어마어마한 모래언덕으로 거듭났으니 이보다 더 위의 속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례는 아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참고로 신두리 해안은 겨울철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크게 받는 곳이다. 먼저 파도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신두리 해변에 쌓여 사빈으로 불리는 모래해안이 형성된다. 사빈의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는 겨울철 초속 17m가 넘는 강한 바람에 날려가다 모래언덕을 만든다. 그렇게 쌓이고 날아오고 또 쌓이고 날아오기를 15000,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모래언덕 즉 사구(砂丘)인 것이다.

 

 

 

사구는 잘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그 그림은 우리가 일상에서 보아오던 동양화(東洋畵)가 아닌 서양화(西洋畵), 그래서 그 풍경은 더 이색적(異色的)으로 나타난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황금빛 모래언덕의 능선은 청과 적의 경계가 된다. 그 경계선(境界線) 위에 떠도는 행글라이더(hang-glider)들이 황금빛 모래사장과 어우러지면 풍경화(風景畵)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모래언덕을 걷다보니 어디선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궁금해서 찾아가보니 해안의 반대편 모래언덕은 온통 아이들 차지하고 있다. 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아이나, 모래언덕 위로 낑낑거리며 올라오는 아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의 표정에는 행복과 만족의 표정들로 넘쳐난다. 아까 들려오던 웃음소리는 그 표정들이 밖으로 표출해내는 함성이었던 것이다. 한참을 구경하다 발걸음을 돌리는데 저만큼 능선 위를 걷는 연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의 손에 끌려가는 것은 아마 썰매일 것이다.

 

 

 

 

더 멀리 나가봐야 특별한 게 없을 것 같고, 마침 시장기까지 느껴지기에 사구(砂丘)를 벗어난다. 입구에 있는 매점에 들러 컵라면이라도 하나 사먹기 위해서이다. 사구를 빠져나오는데 이색적(異色的)인 풍경이 하나 눈에 띈다. 온통 황금빛으로 빛나는 모래사장에,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녹색의 물결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보면 아름답게 피어난 해당화 꽃들이 반갑게 길손을 맞는다. 바람에 날려 온 해당화 씨앗이 척박한 모래땅에 뿌리를 내리면서 새로운 생명의 땅으로 거듭난 것이다. 해당화 꽃에 취해 나도 몰래 흥얼거리는데, 그 소리는 아마 섬마을 선생님이란 노래일 것이다.

 

 

 

신두리사구를 한국의 사막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규모가 광활(廣闊)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길이 3.4에 폭이 500m1.3에 이르는데, 이는 서울 여의도보다 조금 더 넓다(98)고 보면 된다. 그러나 이 사구는 보존에 문제가 있었다. 1990년대까지는 군사지역으로 묶인 덕분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전되었으나, 이후 사유지를 중심으로 숙박시설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훼손의 길을 걷기 시작됐다. 급기야 개발이 안 된 북쪽 지역이 20011130일에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일 처음부터 관리를 잘 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멋진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다.

 

 

 

 

사구(砂丘)를 빠져나오면 왼편에 신두리사구센터가 보인다. 센터는 일종의 박물관(博物館)인 셈이니 시간이 있다면 한번쯤 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신두리사구를 살리기 위해 해온 노력들과 사구의 생성(生成)과 진화(進化)에 관한 역사들이 진열되어 있고, 사구와 관련된 각종 체험공간(體驗空間)이 마련되어 있어서 사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센터의 왼편에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의 건물들은 리조트(resort)와 펜션(pension)들이란다.

                                                       

 

2014년 새해의 해맞이 행사는 전라남도에 있는 완도군(莞島郡)에서 치르기로 했다. 멀리까지 내려간 보람이 있어서인지 흠 하나 없는 온전한 일출을 볼 수가 있었다.

 

 

한반도의 땅끝은 해남군(海南郡)에 있다. 그 해남군보다도 더 아래에 위치한 섬이 바로 완도(莞島)이다. 그렇게 머나먼 곳까지 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완도에 일몰(日沒)과 일출(日出)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해서이다. 완도읍의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있는 동망산(완도읍 군내리)이다. 완도군에서는 이곳 동망산에다 '다도해 일출공원'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완도여객선터미널 주차장에 도착하니 새벽 6, 차에서 뭉그적거리다가 630분쯤 공원으로 향한다. 사위가 캄캄한데도 유일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바로 완도타워(tower)에서 내리쏘는 레이저(laser)광선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휘젓고 있는 광선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진다. 완도타워는 의외로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다보면 겨울인데도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쉼 없이 흘러내린다. 오늘은 새해 첫날, 며칠 후에는 일 년 중에서 가장 춥다는 절기(節氣)인 소한(小寒)이다. 당연히 엄동설한이어야 하건만 날씨는 포근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은 손으로 훔치기에는 이미 한계를 넘어서버렸다. 이 땀방울들을 만일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오뉴월이 다시 돌아왔나 의심하지나 않을까 싶다. 오래 전에 남녘으로 귀순했던 김만철씨가 동경(?)하던 따뜻한 남쪽나라가 바로 이곳인가 보다.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타워가 점점 크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숫자도 정비례로 늘어난다. 뭔가 바라는 소망을 한가득 안고 오는 사람들일 것이다.

 

 

 

 

타워(tower) 앞 광장(廣場)에는 해맞이 축제를 위한 무대가 만들어져 있지만, 아직은 이른 시간인지라 무대는 텅 비어있다. 타워 안으로 들어가니 풍선을 하나씩 나누어주고 있다. 다들 한 해의 소원을 적은 리본을 풍선에다 매달고 있다. 이 풍선은 이따가 봉수대(烽燧臺)에서 하늘로 날려 보내게 된다. 한 해의 재난(災難)을 멀리 날려 보내는 의미란다. 타워에는 올라갈 수가 없었다. 미리 예약을 한 사람들만 올라갈 수 있단다. 첨탑(尖塔)까지 76m 높이인 완도타워에 오르면 맑은 날이면 남쪽으로 가까이 보길도와 청산도를 비롯해 멀리 제주도까지 시야(視野)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또 청산도 왼쪽인 동남쪽으로는 멀리 고흥반도 아래 여수 거문도도 뚜렷이 볼 수 있단다. 역시 민주당 텃밭인가 봐요집사람이 뜬금없는 말을 한다. 이유를 물으니 나누어주는 풍선의 색깔이 민주당을 나타내는 노란 색깔이란다. 그랬었나? 정치에 무관심한 난 그 말을 듣고서야 민주당의 색깔이 노란빛이었음을 떠올리게 된다. 참고로 타워는 6~9월에는 밤 10, 나머지 달에는 밤 9시까지 개장한다.

 

 

 

완도의 특산품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을 둘러본 다음에 다시 축제가 열리는 광장으로 나왔다. 7시가 되자 드디어 축제(祝祭)가 막을 올린다. 먼저 해조류국제박람회및 완도홍보 영상물을 상영하고, 뒤이어 희망의 북소리공연이 이어진다. 새해에는 만복이 가득하길 하늘에 고하는 북소리라고 한다. 북소리 공연이 끝나자 이번에는 진도아리랑의 구성진 노랫가락과 함께 국악인 오정혜씨가 무대에 오른다. 서편제라는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을 맡았던 인연으로 축제에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서편제 촬영이 완도군에 있는 청산도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오정혜씨의 무대가 끝나면 사람들은 손에 풍선을 든 채로 봉수대를 향해 높다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 줄이 줄어들 줄을 모르자 다른 줄이 하나 더 생긴다. 봉수대로 오르지 않고 해맞이가 가능한 사면으로 곧장 가려는 것이다. 우리부부도 그들을 따라가 자리를 잡고 해를 기다려본다. 사회자의 구령에 따라 풍선을 날리고 얼마 안 있어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주름하나 없는 온전한 해가 바다에서 두둥실 떠오른다. 한마디로 행운(幸運)이다. 이렇게 온전한 해를 볼 수 있음은 올 한해 소망하는 일들이 모두 마음먹은 대로 술술 잘 풀릴 것이라는 예고가 아닐까 싶다. 조심스럽게 해를 향해 작은 소망(所望)하나 띄워 보내본다. ‘올 한 해도 우리가족 모두 사랑과 믿음이 충만한 건강한 가정이 되게 해 주소서!’

 

 

 

 

 

하나 아쉬운 점은 사회자가 그렇게 자랑하던 오메가(Ω)’ 일출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메가(Ω)’ 일출이란 점점이 흩어진 섬들 사이로 붉은 해가 떠오르는 형상이 마치 오메가(Ω)’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의 표현을 빌 것 같으면 섬들과 한판 잘 어울리는 일출은 가히 장관(壯觀)이라고 한다. 하나 아무리 눈을 끄게 뜨고 보아도 오메가(Ω)’를 닮은 일출은 보지 못했다. 날씨가 맑아서 제대로 된 일출을 보았는데도 오메가(Ω)’가 보이지 않은 이유는 모르겠다.

 

 

 

 

일출을 보고 난 뒤,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에 왼편에 꽃으로 둘러싸인 터널이 보인다. 조화(造花)려니 하고 들어섰더니 의외로 생화(生花)이다. 겨울의 한가운데인데도 싱싱한 장미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다. 역시 이곳은 따뜻한 남쪽나라인가 보다.

 

 

 

 

 

 

 

 

 

 

여행지 : 상족암(床足巖)

소재지 :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85번지

여행일 : ’13. 8. 1()

함께한 사람들 : 영진투어(소나무산악회)

 

특이사항 :  오늘은 여름휴가의 첫날, 삼천포에 왔다. 여행목적지인 제주도로 들어가는 배가 삼천포항에서 출항하기 때문이다. 배가 출항하는 10시30분까지의 남은 9시간을 뭔가 의미있게 보내야만 한다. 이번 여행을 주관한 영진투어에서는 사천의 명산인 와룡산 등반을 일정으로 잡았지만 이미 두 번이나 정상에 올랐던 산이기에 집사람과 나, 그리고 친구 형우군 부부 등 4명은 일행에서 빠져나와 상족암 관광으로 대신했다. 오래전부터 한 번 다녀가려고 마음 먹고있던 여행지였기 때문이다.

 

상족암(床足巖)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상족암의 뒤편 언덕위에 자리 잡은 공룡박물관(博物館)을 먼저 둘러보는 것이 좋다. 상족암군립공원(床足巖郡立公園)을 거쳐서 박물관으로 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공룡들의 습성이나 역사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고 난 다음에 공룡들의 발자취를 만나보는 것이 이해가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은 공원으로 먼저 갈 경우 상족암을 구경할 수가 없다. 지난 태풍피해로 인해 공원에서 상족암으로 오는 탐방로(探訪路)가 막혀있기 때문이다. 상족암으로 가려면 택시(13천원)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삼천포에서 시내버스가 운행하고 있지만 그 간격이 커서 시간 맞추기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참고로 상족암의 해식애 암벽(巖壁)은 시루떡처럼 겹겹이 층을 이루는 수성암(水成岩)이다. 그 모습이 밥상다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상족(床足)이라고도 하고 여러 개의 다리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쌍족(雙足)이라고도 부른다.

 

 

 

해남이나 경산 등 우리나라에는 공룡박물관(博物館)이 여러 개가 있지만, 그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고 있는 곳은 고성의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공룡 발자국 화석(fossil , 化石)지를 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의 둥근 지붕과 높다란 브라키오사우루스 모양의 공룡탑을 보면 문득 공룡알이 머리에 떠오르게 된다. 그 생김새 때문일 것이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간다. 공룡의 알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 알 속에 있을 공룡들의 삶을 떠올리자 가슴이 설레어 온다. 박물관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3층 전체를 아우르는 중앙홀을 가운데에 두고 2층에 1, 2전시실, 1층에는 3, 4, 5전시실, 그리고 기획전시실로 사용하는 3층이 있다. 먼저 중앙홀에 들어서면 중생대 중반부인 쥐라기에 아시아 지역에서 살았던 거대한 공룡들이 나타난다. 바로 클라멜리사우루스와 모놀로포사우루스인데, 중국의 내몽골 지역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거대한 몸집의 용각류(Sauropoda , 龍脚類) 클라멜리사우루스와 수각류(獸脚類 , Theropoda) 모놀로포사우루스는 서로 대결하는 듯 마주 서 있다. 두 공룡의 머리 위에 날고 있는 익룡은 지구의 하늘을 날았던 생물 중에서 가장 큰 동물이었던 케짤코아틀루스라고 하는데, 양 날개를 활짝 편 길이가 무려 8~11m에 이르렀다고 한다.

 

 

 

야외광장에서 박물관으로 들어서면 2층이다. 중앙홀을 가운데에 두고 오른편이 제 1전시실이다. 1전시실은 실물크기의 공룡골격화석(骨格火石)과 부분골격화석, 공룡의 계통도(系統圖) 등 공룡에 대한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전시해 놓은 게 특징이다. 1전시실의 끝에는 아주 특별한 공룡 화석이 전시되고 있다. 바로 오비랩터의 한 종류인데, 분류학적으로 오비랩터과에 속하는데 정확히 어떤 종인지는 아직 연구 중이라고 한다. 1전시실을 둘러보다 보면 어쩌면 저렇게 공룡의 화석이 많을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사실 이곳의 화석들은 모형이 대부분이다. 전 세계적으로 발굴되는 공룡의 골격 화석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2전시관은 고성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들을 전시함으로써 발자국들의 종류(種類)와 형태(形態) 크기들을 통해 당시 고성에서 살았던 공룡들의 생태(生態)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이 발자국 화석에 대해서 쉽게 이해하고 발자국 종류를 구분할 수 있도록 발자국 화석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되어 있는 게 돋보이는 공간이다. 고성에서 발견한 실제 발자국 화석의 복제품(複製品)도 전시되어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직접 만져 볼 일이다. 특히 2전시실에서는 실제 고성 공룡 발자국 화석지의 연구(硏究)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과학자들이 발자국 화석의 크기를 재고,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여 공룡이 얼마나 빨리 걸었는지를 연구하는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3전시관은 공룡들이 가장 번성했던 백악기(白堊紀, Cretaceous period) 공룡들의 삶을 디오라마(diorama : 배경을 그린 길고 큰 막 앞에 여러 가지 물건을 배치하고, 그것을 잘 조명하여 실물처럼 보이게 장치. 스튜디오 안에서 만들 수 없는 큰 장면의 촬영을 위한 세트로 쓴다)로 설치하여 초식(草食)공룡과 육식(肉食)공룡의 습성을 알 수 있게 전시해 놓았다. 그리고 제 4전시실은 보고 듣고 만지는 체험(體驗)을 통해 공룡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이곳에서 눈에 띄는 공간은 공룡의 달리는 속도(速度)를 알아보는 곳이다. 체험자가 실제로 달리면서 공룡의 달리는 속도와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맨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제 5전시실은 화석(火石)전시실이다. 각 시대(선캄브리아대,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별로 나누어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화석을 전시함으로써 고대의 지구 생물들을 화석으로 만나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박물관을 빠져나오면 공룡공원(公園)이다. 널따란 구릉(丘陵) 위에 분수와 벤치, 매점 등 각종 편의시설을 조성해 놓았다. 특히 가족단위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여러 곳에 야외테이블을 설치한 것이 돋보였다. 공원을 지나면 구릉의 끄트머리에 전망대(展望臺)가 세워져 있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깔끔한 전망대에 올라서면 발아래에 남해의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양 옆으로는 상족암공원의 해안절벽이 늘어서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서 잠깐 옆으로 걷다가 제 2매표소를 통과한 후, 나무계단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서면 상족암이다. 상족암으로 내려서기 전에 왼편에 상족암공원 탐방로(探訪路)가 보이나 태풍피해로 시설이 파괴되었다며 막아 놓았다. 상족암에서 바라보는 남해 바다는 푸르고 정갈하다. 바다와 마주하는 상족암 바위는 해식작용으로 숭숭 뚫린 바위구멍이 밥상다리를 닮아 신비하다. 암벽 깊숙이 뚫린 굴 안은 더욱 신비롭다. 파도에 깎여서 생긴 미로가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마치 변산반도의 채석강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고 있다.

 

 

 

 

 

 

 

상족암(床足巖)은 파도에 깎인 해안지형이 육지 쪽으로 들어가면서 만들어낸 해식애(海蝕崖 : 파도의 침식작용과 해면상의 암석에 행해지는 풍화작용으로 인하여 해안에 이루어진 낭떠러지)이다. 상족암의 해식동굴은 오랜 세월 파도에 의해 변화무쌍하고 기묘하게 뚫려 있어 절경(絶景)을 연출해 내고 있다. 그러나 명품(名品) 답사지(踏査地)로 만든 것은 해식애보다는 암반위에서 발견된 공룡들의 발자국(천연기념물 제411: 1999년 지정)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982년의 학술조사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들은 그 수가 무려 2,000여 개로서, 세계 최대인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상족암 바닷가에는 너비 24, 길이 32의 작은 물웅덩이 250여 개가 연이어 있다. 15천만 년 전에 호숫가 늪지대였던 이곳은 공룡들이 집단으로 서식하여 발자국이 남았다가 그 위로 퇴적층이 쌓이면서 암석으로 굳어졌고 그 뒤 지층이 솟아오르면서 퇴적층이 파도에 씻기자 공룡 발자국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상족암의 앞에는 수백 명이 한꺼번에 앉아 쉴 수 있는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다.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이 평탄한 암반(巖盤)층을 파식대(波蝕臺 : 암석해안에서 육지의 기반암이 파식을 받아 후퇴할 때, 해식애 밑에 형성되는 평평한 침식면)라고 부른다. 평탄한 암반(巖盤) 위에 손바닥 크기의 구멍 몇 개가 보인다. 공룡발자국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지만 자신은 없다. 대부분의 공룡발자국들은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상족암의 공룡발자국도 보전을 위하여 막아 놓았기 때문에 해안 절벽을 이어가는 탐방로를 따라가며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상족암 해식동굴은 오랜 세월동안 파도에 시달린 흔적이다. 그 흔적이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기기묘묘(奇奇妙妙)해서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든다. 이곳은 아득한 옛날에 천상의 선녀들이 이곳에 내려와 돌베틀로 옥황상제에게 바칠 금옷(錦衣)을 짰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입구가 바다와 맞닿은 동굴의 내부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이 목욕했다는 웅덩이도 있다. 층진 바위절벽의 좁은 틈 사이로 뿌리를 내린 작은 나무들의 모습도 한려수도의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며 멋진 경관을 연출해 낸다.

 

 

 

 

 

 

 

 

상족암을 둘러보고난 후에는 다시 삼천포로 나간다. 이번에는 시내버스를 이용해서다. 마침 운행시간에 맞출 수 있기도 했지만 버스를 타야 제대로 시내구경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로 가는 930분 출항시간까지 시간에 여유가 있어 어시장으로 향한다. 요즘 제철이라는 전어회를 먹어보기 위해서이다. 소라는 삶고, 전어는 회와 구이로,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도미매운탕으로 저녁까지 즐긴 후에 삼천포항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