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암(舍人巖)

 

여행일 : ‘14. 6. 6()

소재지 :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특징 : 산길을 굽어 돌던 골짜기가 넉넉하게 하늘을 연다. 하늘 아래엔 그리 넓지도 그리 깊지도 않은 천()이 자작하게 흐르고 있다. 남조천이다. 남조천이 죽령천과 만나기 전, 한번 큰 호흡을 한 듯 청록의 소()를 만들어 놓았다. 그 곁에는 70m 높이의 서슬 시퍼런 단애(斷崖)가 솟아 있다. 단양팔경 중 하나인 사인암(舍人巖)이다. 사인암은 흡사 높다란 석탑(石塔) 세워져 있는 형상이다. 사각형의 바위 수십 개를 정교하게 짜 맞춘 탑처럼 솟아 절경을 빚었다. 어떤 이들은 자연 병풍 같다고도 말하기도 한다. 어떻게 표현하든 그게 뭔 대수겠는가. 중요한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저런 절경을 결코 빚어낼 수 없다는 점이다. 아무튼 사인암은 그 생김새가 자못 빼어나서 옛날부터 수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그중에는 바위의 이름에까지 영향을 미친 고려 말의 대학자 우탁선생과 조선 제일의 화가였다는 김홍도도 있다. 그만큼 사인암의 경관이 빼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찾아오는 방법 : 중앙고속도로 단양 I.C에서 내려와 927번 지방도를 타고 예천방향으로 3.5쯤 들어오면 된다. 사인암 맞은편에 주차한 후 출렁다리를 건널 수도 있고 청련암 주차장까지 다리를 건너갈 수도 있다.

 

 

사선암의 투어는 집단시설단지에서 시작된다. 이곳에다 우리를 내려 놓는 것이 더 이상 관광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모양이다. 길가에 공동우물 등 편의시설 들이 잘 갖추어져 있는 것이 여름철 휴가를 보내는데 불편이 없을 것 같다.

 

 

남조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오른편, 그러니까 상류 쪽은 수심(水深)이 얕아 물놀이하기에 적당하다. 물속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아마 올갱이를 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바위 위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람은 낚시를 하고 있을 것이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내려다보며 그들과의 교감(交感)을 시도해 본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으로 살짝 들어선다. 좋다. 즐겁다. 행복하다.

 

 

 

아래로 내려가면 물은 점점 더 깊어진다. 그리고 물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굵어진다. 올갱이 잡기나 낚시는 이들에게는 관심 밖인 모양이다. 그저 물놀이에 푹 빠져있을 따름이다.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잠시 더 걸으면 저만큼에 현수교(懸垂橋)가 나타난다. 사인암으로 건너가는 다리이다. 다리 아래에는 흰 강돌과 검은 바위가 저마다 무리를 이루어 물가에 앉아있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사인암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조천 물굽이가 만들어 놓은 푸른 소() 곁에 70m 높이의 서슬 시퍼런 단애(斷崖)가 솟아 있다. 그 모양새는 우직하게 솟은 듯도 하고 강직하게 내려 꽂인 듯도 하다. 단호한 직벽(直壁)이다. 표피는 수많은 직선의 절개로 가득하다. 그리고 정상의 바위틈에는 몇 그루 소나무가 자란다. 이 절벽이 바로 사인암(舍人岩)이다. 사인암(舍人岩)이란 이름을 붙인 이는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임제광(林齊光)이라 한다. 그는 고려 충선왕 때의 대학자 역동(易東) 우탁(禹倬 : 1263~1342) 선생이 정4품 벼슬인 사인(舍人) 재직 시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해서 선생의 벼슬 이름을 지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탁선생이 이곳에 머무르며 사인암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는 강행(江行)’이란 시()‘를 옮겨본다. ‘이슬 머금은 단풍잎 붉게 땅위에 떨어지고 / 석담엔 바람이 일어 푸른 하늘을 흔드네. / 숲 사이엔 숨겨진 채 환한 외딴 마을이 아물거리고 / 구름 밖엔 우뚝 솟은 산봉우리 이어지네.’

 

 

사인암 앞 천변에는 널찍한 바위들이 널려 있다. 한 바위에는 장기판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 옆에는 바둑판까지 그려있다니 옛 사람들이 신선(神仙)처럼 노닐었던 흔적들일 게다. 물소리 유유한 사인암의 그늘 아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닐었으니 신선놀음이 아니고 무어겠는가. 그래서 후세 사람인 추사 김정희도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 그림과 같다며 무릎을 쳤을 것이다. 신선경(神仙景)인 사인암은 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사랑을 받았다. 조선 후기의 화가 이윤영(李胤永, 1714~1759)단정하고 엄숙하며, 화기롭고 깨끗하여 엄숙하면서도 뻣뻣하지 않으니 하루 종일 마주하고 있어도 싫증나지 않는다.’고 썼고(사인암기), 사인암을 그린 단원 김홍도는 이곳의 풍경을 그리는데 1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만큼 내재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가 어려웠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밖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비들이 사인암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사인암을 뒷 배경으로 삼아 들어앉은 절이 하나 나타난다. 청련암(靑蓮庵)이다. 원래는 황정산 아래에 있던 대흥사(大興寺)의 부속암자였다고 한다. 고려 말 공민왕 22(1373)에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창건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 숙종 때인 1710년에 중창되었다. 그러다가 6.25때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1954년 공비소탕 작전 때 내려진 황정리 일대의 소개령(疎開令)을 피해 이곳 사인암리로 대들보와 기둥을 옮겨 이전하였다는 것이다.

 

 

 

최근에 지어진 법당 극락보전(極樂寶殿)은 아직까지 단청도 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고, 사인암을 배면에 두고 앉은 암자가 비교적 고색(古色)을 띠고 있다. 이것 역시 고색이라는 표현을 쓰기가 민망스러울 정도였지만 말이다. 요사채(寮舍寨)인 것 같은데 청련암이란 현판은 이 건물에 걸려있다.

 

 

 

청련암 옆 좁고 가파른 계단이 사인암 속으로 파고든다. 양 옆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협곡의 모양새를 만들고 있기에 파고든다는 표현을 썼다. 계단의 끄트머리에서 암벽(巖壁)에 둘러싸인 삼성각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렇다고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까지는 없다. 계단 앞 바위에다 우탁선생의 시조 탄로가(백발가)를 새겨 놓았으니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한손에 막대 잡고 / 또 한손에 가시 쥐고 / 늙는 길 가시로 막고 /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 백발이 제 먼저 알고 / 지름길로 오더라.’ 누군가 인생의 속도는 나이와 비례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60을 넘긴 나의 속도는 시속이 60Km나 된다. 하루하루가 눈 깜작 할 사이에 지나간다는 얘기이다. 안타까운 내 마음을 어찌 저리 잘 표현했는지 모르겠다.

 

 

계단 입구 벽에 몇 가닥의 줄을 길게 매어놓고 뭔가를 덕지덕지 묶어 놓았다. 앞에 놓인 단()소원지(所願紙)’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그 종이에다 자기의 소원을 적고 소원성취해보란다. 가격은 한 장에 3천원이다. 그런데 그 위에 적힌 글이 좀 묘하다. 소원지와 함께 추억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정성을 다해 소원을 빌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단순하게 추억을 만들어보라는 것인지 모르겠기에 하는 말이다.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발길을 옮긴다. 여기는 사찰(寺刹), 스님들이 하는 일을 중생인 우리가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계단을 밟으며 잠시 오르면 바위틈에 들어앉은 삼성각(三聖閣)이다. 삼성각이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모시는 당우(堂宇)를 말한다. 삼성 신앙은 불교가 한국 사회에 토착화하면서 고유의 토속신앙(土俗信仰)이 불교와 합쳐져 생긴 신앙 형태이다. 전각(殿閣)은 보통 사찰 뒤쪽에 자리하며, 각 신앙의 존상(尊像)과 탱화를 모신다. 그리고 삼성을 함께 모실 때는 정면 3, 측면 1칸의 건물을 짓는다. 이곳 청련암의 삼성각 또한 그런 규칙을 잘 따르고 있다.

 

 

 

삼성각 뒤에는 조금 전에 올라왔던 협곡보다 더 좁은 바위 문(石門)이 있다. 지금은 비록 기왓장으로 막혀있지만 저 문을 통과하면 사인암의 정수리로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바위 면에 새겨진 소유천문(小有天門)’이란 전서체(篆書體)는 앞에서 거론했던 조선 후기의 화가 이윤영이 쓴 글씨란다. 이외에도 삼성각의 석벽에는 몇 개의 글을 더 새겨져 있다. '우뚝하여 무리 짓지 않고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의 탁이불군(卓爾不群) 확호불발(確乎不拔)’이 오른쪽 벽에 해서체(楷書體)로 새겨져 있고, 왼쪽 석벽에는 퇴장(退藏)이라는 글씨가 큼지막한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사인암을 다 둘러보고 나며 또 다시 출렁다리를 이용해서 마을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그리고 남조천의 천변(川邊)을 따라 나있는 데크길을 한참을 더 걸어야만 한다.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가 지방도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을 지나는 길은 대형차량의 진입이 불가능한 것이 마을 밖에서 기다리는 원인이란다.

 

 

길가에 이곳이 KBS-2TV‘12촬영지였음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동 프로그램을 촬영했다면 이곳에는 아름다운 경관은 물론이고, 또 다른 눈요깃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방도로 나가는 길은 심심치는 않다. 빼어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경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을 막아 만든 보()에는 푸른 물이 넘실거리고 건너편 벼랑은 비록 사인암 만큼은 아니어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