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선재길 트레킹

 

여행일 : ‘15. 10. 20()

소재지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트레킹코스 : 월정사 일주문전나무숲길월정사지장암동피골상원사주차장상원사(총 거리 : 10.5km)

함께한 산악회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오대산 선재길은 옛 구도자(求道者)들이 득도(得道)를 위해 걸었다고 하는 월정사에서 상원사를 잇는 약 9의 숲길이다. 길 대부분이 평지이고 울창한 전나무 숲 사이로 나있기 때문에 거닐며 명상에 잠기기 딱 좋다. 이런 길은 꼭 구도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 또한 도를 얻지 못한다고 해도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저 숨 가쁜 일상에 지친 도시인들이 잠시나마 조용히 사색(思索)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면 족할 것이다. 이때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걷기 여행지로 제격인 곳이 바로 오대산의 선재길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선재길이 개통되기 전에도 길은 있었다. 2004년 무렵부터 월정사가 걷기 행사를 하면서 옛길 복원사업이 시작됐다. 수십 년 전, 아니 아득한 옛날에 승려들이 두 발로 다졌던 흔적을 찾은 것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그 길을 선재길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개통했다. 어엿한 산책코스로 부활한 길은 이제 징검다리와 쉼터, 데크로드와 안내판을 갖추고 지친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 길이 약 8, 표고차 200m로 완만해 누구나 삼림욕을 즐기며 산책하듯이 걸을 수 있다.

 

트레킹 들머리는 월정사 일주문

영동고속도로 진부 I.C에서 내려와 6번 국도를 타고 강릉방면으로 달리다가 병안삼거리에서 왼편 오대산로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월정사의 일주문에 이르게 된다.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물론 이곳까지 오려면 입구의 매표소에서 1인당 3천 원 씩의 입장료를 내야만 한다. 막무가내로 돈을 받는 것을 보니 계곡 안이 몽땅 월정사의 땅인 모양이다. 여정은 월정사 일주문에서 시작된다. 오늘 걸으려는 오대산 선재길은 월정사보다 조금 더 위에서 시작되지만 이왕에 월정사에 들른 김에 이곳의 명물로 알려진 전나무 숲을 따라 걸어보기 위해서이다.

 

 

 

일주문을 막 지나고 나면 쭉 뻗은 잘 생긴 나무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월정사 초입의 전나무숲이다. 일주문에서부터 절 입구 금강교까지 1남짓한 길 양쪽으로 1700여 그루가 자란다. 누군가 맑은 오대산을 만나려면 겨울철이 제격이라고 했다. 그러나 늦가을에 찾은 오대산도 맑기는 매한가지였다. 평균 수령(樹齡) 80여 년에 가장 오래된 나무는 무려 300년이나 묵었다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정갈함이 그 원인일 것이다. 숲길을 따라 월정사로 향하다 보면 가슴은 어느새 청량해진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솔향이 그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숲이 깊어질수록 정신이 맑아져간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간다.

 

 

길을 가다보면 숲속에 들어앉은 설치미술 작품들이 보인다. 며칠 전(10.9~18) 이곳에서 '오대 세상을 품다를 주제로 오대산문화축전이 열렸다. 산사음악회, 자연 설치미술전, 책 읽는 밤, 다람쥐 제사, 어린이 오케스트라 공연 등의 다양한 행사들이 열렸는데, 자연 설치미술전의 일환으로 전시되었던 작품들인 모양이다. 기존의 자연과 작품들이 하나로 동화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반듯하게 뻗은 전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이 길은 아름다운 숲길이다. 천년 세월 동안 월정사를 지키고 있어 천년의 숲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이 숲은 우리나라 최대의 전나무 숲 중의 하나로서 천년고찰 월정사와 함께 오대산의 대표적인 명소로 꼽히고 있다. 2011년에는 산림청과 '생명의 숲 국민운동' '유한킴벌리'가 함께 주최하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인 생명상을 받기도 했다. 이는 전나무 숲속으로 나있던 도로를 우회(迂廻)시키면서 길을 옛 모습으로 돌리는 등 생태계 복원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숲이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가을이 무르익었나보다. 아니 말라비틀어진 나뭇잎들이 더 많은 것을 보면 가을은 이미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음이리라. 단풍을 즐기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 또한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선재길을 들어서기도 전부터 난 마음의 평화를 얻어간다.

 

 

 

전나무 숲길의 끝에 오대산에 등을 기댄 월정사가 점잖게 앉아 있다.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연원 깊은 사찰이다. 643년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유학하던 중 문수보살을 만나고 그가 지명한 강원도 오대산에 월정사를 세웠다고 한다. 오대산을 한국 불교 문수 신앙의 성지라 일컫는 이유다. 하지만, 절은 그런 성스러운 역사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전쟁이라는 악업 때문이다. 6·25가 한창이던 1951년 연합군은 북한군이 이 절을 본거지로 사용할 것을 우려해 경내에 불을 놓았다고 한다. 그로인해 신라 때부터 이어온 월정사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아픈 역사만 남았다. 현재의 전각들은 그 이후 새롭게 지은 것들이란다.

 

 

월정사(月精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643(신라 선덕여왕 12)에 자장(慈藏)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慈藏)이 오대산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성지라고 생각하여 지금의 절터에 초암(草庵)을 짓고 머물면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문수보살을 만나보지 못한 채로 태백산 정암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소실(燒失)과 중창(重唱)을 반복하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1.4후퇴 때에는 사찰의 대부분이 전소되었다. 현재의 전각들은 1964년 이후 탄허(呑虛), 만화(萬和), 현해(玄海)스님 등이 중건한 것들이다. 그저 적광전(寂光殿) 앞에 있는 국보 제48호인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 그리고 성보박물관에 보관된 유물들만이 그 옛날의 월정사를 온전히 기억할 뿐이다.

 

 

적광전(寂光殿)의 내부 풍경, 적광전이란 원래 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모시는 전각을 일컫는 이름이다. 그런데도 오대산의 적광전은 주불로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미스터리한 일이지만 알고 보면 다 이유가 있다. 화엄종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적광전을 중건할 때 비로자나불을 같이 모신다는 뜻으로 적광전이라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문화축전 때 설치했던 전시물들을 느긋이 둘러보다가 다시 선재길로 향한다. 경내(境內)를 떠나기 전에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샘터에서 목을 축였음은 물론이다. ‘선재길로 가는 길은 요사채 앞으로 나있다. 그리고 오대천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를 건너 숲길로 연결된다. 물론 다리를 건너지 않고 도로를 따라 올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선재길을 걷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구태여 삭막한 도로를 따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월정사에서 선재길의 들머리까지는 0.9Km거리, 길은 오대천을 따라 나있다. 전나무와 단풍나무가 적당히 섞여있는 길이다. 푸른 녹음을 배경으로 붉은 단풍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름다움에 취해 무작정 걸을 필요는 없다. 가는 길에 잠깐만 다리품을 팔면 지장암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갈림길에 세워진 안내판의 내용은 정확했다. 울창한 전나무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정확히 3분을 걸으니 지장암(地藏庵)이 나타났다. 암자(庵子)치고는 제법 큰 규모이다. 오대산에는 동대·서대·남대·북대·중대 등 다섯 개의 암자가 있다. 그중 남대(南臺)가 바로 지장보살을 주불(主佛)로 모시는 지장암이다. 신라시대에 보천태자의 유언에 따라 지어진 암자라고 한다. 제법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암자는 단아하면서도 정갈했다. 여성스러움이 묻어난다는 얘기이다. 이곳이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장암에서 되돌아 나와 다시 선재길로 향한다. 길은 오대천을 따라 나있다. 아니 오대천 위로 나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개울가 바위벼랑의 허리쯤에다 데크로 길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길이 허공에 걸려 있으니 다리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냇가는 온통 붉게 물들어있다. 바위벼랑과 냇물, 거기다 붉게 물든 숲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낸다. 가을이 익을 대로 익어버렸다.

 

 

 

 

선재길(8km)은 월정사 북쪽 900m 지점에서 시작된다. ‘회사거리라고 부르는 곳이다. 회사라는 이름이 의아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곳에 회사(會社)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일제 강점기 때 목재공장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당시 공장에서는 박달나무로 훈련용 목총을, 측백나무로 연필을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일제 강점기의 흔적은 지금도 산재길 곳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벌목한 나무를 오대천 물길따라 한강까지 보내기 위해 만들었던 보메기()와 주문진까지 이어졌던 철로가 어렴풋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안내판을 따라 탐방로에 들어서면 곧바로 오대천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가 기다린다. 이어지는 길은 오대천의 강변을 따른다. 오대천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는 446번 지방도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비록 20~30m 남짓한 거리에 불과하지만 숲길은 비밀스럽다. 숲속 사정을 알 수 없을 만큼 숲이 빽빽하다는 얘기이다.

 

 

회사거리에서 동피골까지는 대략 5, 키가 큰 신갈나무와 단풍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가을철이면 이 길은 노랑과 빨강이 어우러지며 아름다움이 극에 이르는 구간이다. 오대산의 단풍은 설악산처럼 강렬하고 화려하진 않다. 하지만 은은함으로 유명하다. 붉은빛이 도는 졸참나무와 노란 상수리나무, 주황색 벚나무가 서로 섞이고 번지면서 조화를 이룬다. 여기에 사철 푸른 전나무 숲까지 더해 색다른 가을 풍광을 만들어낸다. 오직 오대산에서만 구경할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화일 것이다.

 

 

 

 

길을 가다보면 섶다리안내판(사진이 흐려서 게시하지는 못했다)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섶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섶다리는 소나무와 참나무로 만든 상판에 섶(솔가지나 작은 나무 등의 가지)을 엮어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다리를 말한다.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는 10월에 만들어 겨우내 강을 건넌다. 여름이면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 이별다리로도 불린다. 다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은 철이 이른가보다.

 

 

 

길은 대부분 완만하다. 거기다 내리쬐는 햇볕도 없는 숲길이어서 걷는 행위 자체에는 집중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 길에서는 자연스럽게 생각을 하게 된다.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세상을 돌아본다. ‘선재길은 오대산 월정사와 말사(末寺)인 상원사를 잇는 길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201310월 옛길을 복원하면서 선재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선재(善財)'라는 길의 이름은 화엄경 경전 속 이야기에 나오는 구도자인 선재동자(善財童子)에서 따왔다.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 얻을 마음이 생겨 53인의 좋은 지도자를 찾아 배움을 얻으며 천하를 주유하다가 다시 문수보살에게 돌아온 후 수행을 완성했다는 인물이다. 따라서 '선재길'의 길 이름은 이 길을 걷는 과정을 수행으로 삼아 마음의 평화와 깨달음을 얻어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길은 경사(傾斜)가 거의 없다. 거기다 흙으로 이루어진 바닥까지 곱다. 타박타박 걸어본다. 마침 느긋하게 생각하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그리고 복잡한 인간사 속에서 배배 꼬였던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무아(無我), 즉 나라는 존재까지 비워버리는 경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티끌만큼의 깨달음이라도 얻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일이다.

 

 

길은 강변길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오대천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건너는 곳마다 나무다리를 놓지는 않았다. 가끔은 이렇게 징검다리를 건너도록 해놓았다. 개천의 물길을 따라 징검다리 십여 개를 지그재그로 놓았다.

 

 

선재길은 쉽고 평탄한 길이다. 호젓한 숲속 오솔길과 시원한 계곡길이 전부이다. 그래서 선재길이란 이름을 얻었나보다. 느긋하게 생각하며 걷기에 좋다고 해서 말이다. 길 위에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선재동자(善財童子)처럼 이 길을 찾은 이들도 나를 돌아보며 삶의 지혜를 찾아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오대산은 예로부터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산다고 여겨지던 곳이다. 문수보살의 지혜를 찾아 여행을 떠난 구도자가 바로 불교 경전 화엄경에 등장하는 선재동자이기 때문이다.

 

 

월정사를 지나서도 전나무 숲은 심심찮게 나타난다. 웬만한 산들에는 소나무가 대세이지만 이곳 오대산은 그 자리를 전나무들이 대신하고 있다. 옛날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던 나옹선사가 공양을 하려는데 소나무에 쌓였던 눈이 그릇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때 산신령이 나타나 소나무를 쫓아낸 뒤, 전나무 아홉 그루에 절을 지키라고 했단다. 이때부터 오대산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단원 김홍도(1745?)가 그린 오대산 그림에도 월정사 주변으로 전나무가 빼곡하다. 예나 지금이나 오대산의 주인공은 전나무인 셈이다.

 

 

숲길이 옆구리에 계곡 물을 달고 고즈넉하게 이어진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선재길은 등산객들로 넘쳐난다. 그들의 입은 원색의 옷이 붉게 물든 가을산보다도 더 화려하다. 숲길을 걸으면 모든 게 저절로 치유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선재길에서 만난 등산객들은 하나같이 환한 미소를 띠고 있다. 하긴 이렇게 곱게 물든 가을산에서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거기다 날씨까지도 이렇게 화창할진데 말이다.

 

 

동피골(이정표 : 상원사 3.6Km/ 월정사 5.4Km)에 이르면 작은 산장 하나가 보인다. ‘오대산장이라는데 마침 공중화장실까지 갖추었으니 한숨 돌릴 겸 잠시 쉬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 같다.

 

 

산장 옆에는 멸종위기식물원이 자리 잡고 있다. 오대산에 자생하는 멸종 위기종과 특정 식물 등 30여 종의 희귀식물을 복원해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유리로 만든 온실 안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이 보였지만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상원사로 향한다. 상원사까지는 3정도의 거리이다. 길을 나서면 푸른 조릿대가 길손을 맞는다. 아까도 조릿대가 보이기는 했었지만 아래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출렁다리를 만난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이 부근에는 화전민 부락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계기로 월정사 아래로 모두 이주했다고 한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또 다시 계곡 옆 숲길을 만난다. 계곡과 나란히 달리는 길은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이다. 물푸레나무, 거제수나무, 참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박달나무 빼곡하게 들어서 한여름 땡볕도 쉽사리 범하지 못하는 우거진 숲길이다.

 

 

동피골에서 조금 더 걷다보면 무너져가는 돌담이 눈에 띈다. 아까 지나왔던 회사거리를 중심으로 상부에 360여 가구의 화전민(火田民)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 흔적인 모양이다. 그들이 살던 마을 앞으로 난 옛길이 선재길이 된 셈이다. 선재길은 1960년대 월정사와 상원사를 잇는 찻길이 뚫리기 전까지 사람들이 오르고 내렸다. 화전민과 벌목꾼들이 이 길에서 삶을 일궜고, 스님과 불자들은 득도를 위해 이 길을 걸었다. 세월이 흘러 넓고 평탄한 길이 나면서 옛길은 토막 나 이리저리 숲에 흩어졌다. 그 옛길을 다시 복원해 놓은 것이 선재길인 것이다.

 

 

이미 단풍은 절정을 넘어섰지만 낙엽 쌓인 고즈넉한 숲길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선방(禪房)의 스님들은 이 숲길을 걸으며 실타래처럼 꼬인 화두를 풀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상생활에 찌든 중생(衆生)들이 걷고 있다. 뭔가 깨달음을 위해 걷고 있는 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힐링코스로 인기다. 하지만 그게 뭔 대수겠는가. 건강을 위해 걷다보면 한가닥 깨달음이 찾아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개울길을 벗어나면 상원사로 들어가는 신작로가 나타나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주차장이 보인다. 선재길이 끝난 셈이다. 그러나 트레킹을 여기서 멈춰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선재길은 상원사까지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다는 적멸보궁에 들러보는 것은 어떨까? 혹시라도 부처님의 축복이라도 받을지 누가 알겠는가.

 

 

오매 불나부렀네언젠가 붉게 물든 철쭉동산에서 들려오던 내뱉던 말이다. 선홍빛으로 타오르는 꽃동산이 마치 불이 난 것 같다는 표현이었다. 가을에 찾은 오대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숲은 한없이 붉었고, 단풍이 투영된 계곡은 온통 고운 물감을 뿌린듯했다.

 

 

상원사 입구에는 묘하게 생긴 돌기둥 하나가 세워져 있다. 세조가 옷을 걸어두었다는 관대걸이로 이 돌기동에는 문수보살에 얽힌 전설(傳說)이 전해져 내려온다.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죄책감에 피부병이 도졌다고 한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세조가 오대천에 몸을 씻던 중 지나가던 동자승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 피부병이 나았음은 물론이다. 목욕을 마친 세조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발설하지 말라고 말하자, 동자승이 대왕은 어디 가든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시오.’라고 말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옷을 걸어두었다고 해서 관대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여정의 마지막은 상원사(上院寺)가 장식한다. ‘나를 찾아 나선 여행자들은 구도의 길을 걸으며 마음의 평화와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아니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이곳에서 문수보살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수보살의 도움으로 못다 이룬 평화와 깨달음을 완성하게 된다. 문수보살을 주존불(主尊佛)로 모시고 있는 국내 유일의 사찰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월정사의 말사인 상원사(上院寺)는 신라의 성덕왕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진여원이라는 절을 창건한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 병을 고쳤다. 세조는 감사의 표시로 진여원의 이름을 상원사로 고치고 왕실사찰인 원찰로 정한 후 문수동자상을 봉안했다. 그 인연으로 상원사는 문수보살을 주존불(主尊佛)로 삼고 있는 문수신앙의 성지가 되었다. 국내 유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전각(殿閣)들은 대부분 광복 이후 세워진 것들이다. 다만, 절에 남아있는 두 점의 국보(國寶)가 상원사의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바로 국보 36호 상원사 동종과 국보 221호 문수동자상이다.

 

 

상원사(上院寺)의 본전(本殿)은 문수전(文殊殿)이다. 1947년 당시 주지이던 지암스님이 금강산 미하연의 건물을 본떠지었다는 전각(殿閣)으로 안에는. 국보 221호인 문수동자상이 안치되어 있다. 문수동자상은 세조 때 왕실이 봉안한 목조상(木彫像)으로 양 갈래로 묶은 머리가 이채롭다. 조선시대 초기의 왕이었던 세조가 문수동자의 도움으로 악성(惡性) 피부병을 고치고 나서 그 보답으로 조성한 불상(佛像)이라고 한다.

 

 

앞마당에는 동정각(動靜閣)이라는 전각이 있다. 국보 제36호인 동종(銅鐘)을 보관하는 곳으로 편액(扁額)은 탄허스님이 직접 쓴 글이란다. 전각 앞에는 천음회향(天音回香)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하나 세워져 있다. ‘하늘의 소리가 향기를 품고 내려온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종소리가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소리뿐만이 아니다. 동종의 외관(外觀) 또한 보는 이들이 넋을 빼앗길 정도로 그 자태가 빼어나다. 참고로 현재 타종을 하고 있는 동종은 복제품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 즉 성덕왕(725) 때 만들어졌다는 본래의 동종은 바로 옆 유리관 속에 보존돼 있다.

 

 

상원사는 물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세조가 절 앞의 오대천에서 몸을 씻고 악성 피부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앞마당에 있는 샘은 항상 물이 넘쳐흐른다. 물맛 또한 달고 시원한 것이 감로수가 따로 없다.

 

 

선재길은 상원사에서 끝을 맺지만 적멸보궁을 두고 돌아서기는 아깝다. 하지만 이미 서너 번을 둘러본지라 이번에는 사양하기로 한다. 대신 이곳 상원사를 빛낸 큰스님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기로 한다. 상원사로 오르는 돌계단 옆에 한암(漢岩), 탄허(呑虛), 만화(萬和) 삼화상 탑비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난 한암스님(1876~1951)22세에 금강산 장안사로 출가하여 24세 때 경허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그 뒤 50세에 이곳 상원사로 들어와 열반 때까지 산문을 나가지 않고 중생교화하신 큰스님이다. 조계종 초대 종정이었으며 네 번이나 종정에 추대되었을 정도로 근대 한국불교를 이끄신 선지식(善知識)이었다. 특히 스님은 6.25 전쟁 당시 이곳 상원사의 전소 위기를 막았다고 전해진다. 전라도 김제에서 태어난 탄허스님(1913~1983)은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은 이극종선생께 수학했을 정도로 한학에 능통하였다. 하지만 학문으로 해결되지 않는 도의 근원을 찾아 불교에 귀의했다. 22세에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 스승인 한암스님을 모시고 선교겸수로 수많은 경전을 번역하는 등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큰 선지식이었다. 특히 스님은 유··교 삼교에 통달한 대석학이자 시대를 통찰한 사상가로 알려진다. 마지막으로 평안도 덕천에서 태어난 만화(1022~1983)스님은 18세에 상원사에서 탄허스님을 모시고 출가하였다. 34세에 월정사의 주지가 되어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월정사를 재건하는 등 오대산의 버팀목 역할을 한 큰스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