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다산길 1코스 일부와 2코스

 

여행일 : ‘16. 10. 1()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 일대

트레킹코스 : 운길산역북한강 자전거길True us Cafe일반도로2코스 만남다산유적지일반도로능내리자전거길팔당댐팔당역(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집사람과 함께

 

특징 : 다산길은 남양주 판 올레길이다. 즉 남양주시에서 만들어 놓은 둘레길이라는 말이다. 남양주는 전체 면적의 70%가 산림(山林)이다. 그렇다고 산만 있는 게 아니다. 물길이 있다. 북한강이 남양주를 따라 흘러와 두물머리(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만나 마침내 한강이 된다. 이러한 특수한 지리적 여건을 살려 만들어 놓은 둘레길이 바로 다산길인 것이다. 또한 남양주는 조선말의 위대한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화(1801)에 연루되었던 다산은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 등 500여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가 태어났고 자라면서 학문을 닦았던 곳이 바로 남양주인 것이다. 그런 인연을 살려 둘레길에다 다산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남양주시의 전역에 걸쳐 169.3를 조성했는데 총 13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길은 정약용의 생가(生家)와 묘()가 있는 능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한강나루길(1코스)과 다산길(2코스), 새소리명당길(3코스) 3개의 길이 이곳을 걸쳐간다. 오늘은 운길산역에서 팔당역까지를 걸어보려 한다. 1코스((한강 삼패지구에서 팔당역~능내역을 거쳐 운길산역에 이르는 16.7구간)2/3를 걷게 되는데, 여기에다 2코스(3.4)의 일부(다산유적지) 구간을 포함시킬 계획이다. 한강이 넘실거리는 강변을 따라 걷는 코스로 다산길이 열리기 전부터 걷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자주 찾던 길이다.


 

트레킹의 시작은 경의중앙선 전철 운길산역(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

타고 간 승용차를 팔당역 공용주차장에다 파킹한 뒤 중앙선 전철을 이용해 운길산역까지 온다. 오늘은 두 역의 사이를 걸어볼 계획이기 때문이다. 주차 요금은 7천원, 저녁 6시 이전까지만 오면 된단다. 아무튼 느긋하게 걸어도 될 만큼 충분한 시간이다. 역사(驛舍)를 빠져나와 북한강 방향으로 향한다. ‘다산길에 대한 안내판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산길이 제법 지명도가 있는 둘레길로 알고 있었기에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는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게 상책이다. 마침 남양주 한강걷기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진행을 도우러 나온 모범운전자 아저씨들에게 들머리를 물어본다. 하지만 다들 모르겠단다. 하긴 이곳 주민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마저 다산길이라는 이름 자체를 모르는데, 더 이상 따져 무얼 하겠는가. 그저 가다보면 만나겠거니 하고 북한강 방향으로 나아갈 따름이다.




강변으로 향하는데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명함 하나를 건네준다. 장어구이 식당의 홍보용 명함이다. 직접 기른 장어를 넉넉히 줄 테니까 일단 들러보란다. 장어구이를 주 메뉴(menu)로 내걸고 있는 식당들이 많은 걸로 보아 이 근처가 장어구이 전문 식당가가 아닐까 싶다. 잠시 후 45번 국도(북한강로)를 가로지르자 자전거도로가 나오고 곧이어 북한강변에 다다른다. 너른 것이 거의 호수(湖水) 수준이다. 하긴 이곳이 팔당댐의 수역(水域)일 테니 호수가 맞다. 건너편 강변에 몽골텐트가 즐비하다. 길가에 걸려 있던 현수막의 남양주 한강걷기 페스티벌이 저곳에서 열리는가 보다.



강변에는 갈대밭이 널따랗게 분포되어 있다. 하얀 꽃들이 바람결에 일렁이고 있는 것이 가을은 이미 우리 곁에 깊숙이 다가와 있었나 보다. 가을의 전령사(傳令使)라는 별칭(別稱)까지 갖고 있는 갈대가 저리도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일단은 자전거 도로로 올라서고 본다. 그리고 제대로 올라왔음을 알아차린다. 2차선으로 이루어진 자전거길외에도 별도의 보행로(步行路)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된다. 마침 팔당대교로 가는 방향임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만일 방향 잡기가 어려울 때에는 오가는 자전거 라이더(rider )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다산길에는 볼거리만 있는 게 아니다. 읽을거리도 풍성하다. 길가에다 이야기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수종사한음 이덕형의 별서터’, ‘마재마을등 주변 명소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적어 놓은 것이 전형적인 스토리텔링(story telling)’ 형식이다. ‘글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 전달하는 형식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탐방로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조류(鳥類)’들의 특징을 설명해 놓은 안내판도 보인다. 어린이들의 현장교육용으로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 트레킹에서 처음으로 이정표(다산길 1코스 한강나루길 : 시점, 한강삼패지구 16.1Km/ 종점, 운길산역 0.6Km)를 만난다. 이정표의 방향 표시로 보아 이곳에서 운길산역으로 연결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아까 운길산역의 어디쯤엔가 들머리가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분명 그곳에도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을 것이고 말이다. 자세히 찾아보지 않은 덕분에 빙 둘러서 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하긴 그 덕분에 북한강의 풍경과 갈대밭을 눈에 담는 호사(豪奢)를 누리게 되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제부터 다산길북한강 자전거길을 따른다.



곧게 뻗은 아스팔트길은 자칫 지루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강 자전거길은 그런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만한 조그만 틈도 주지 않는다. 다리가 아플만하면 어김없이 쉼터가 나타나고, 목이라도 축여볼까 하는 생각이라도 들라치면 저만큼에 간이 카페가 보인다. 가족단위의 나들이에 안성맞춤이지 않나 싶다.




곁을 스쳐가는 자전거들은 다양하다. ‘로드 바이크(Road Bike)’가 대부분이지만 'MTB(산악자전거)'와 하이브리드 사이클(Hybrid bicycle : 로드바이크에 MTB를 합친 것), 미니벨로 사이클(Minivelo bicycle : 일반적으로 바퀴의 둘레가 20인치 이하인 작은 자전거) 등도 보인다. 하나의 자전거에 페달이 두 개인 ‘2인용 자전거와 어린이용 자전거도 눈에 띄는 건 물론이다. 그 많은 자전거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유모차를 매달은 자전거이다. 아마 젖먹이까지 데리고 나올 정도로 깊은 가족사랑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쩌다가 그 속에 들어앉은 강아지를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말이다.



트레킹을 시작하고 50분 남짓 걸었을까 이번에는 음료수 자판기까지 갖춘 쉼터가 나타난다. 식탁도 두어 개를 놓아 둔 것이 아예 푹 쉬었다 가라는 모양이다.



장맛비라는 다산(茶山)선생의 시문집에 실려 있는 시를 적어 놓은 시판(詩板)’도 보인다. 조금 전에 만났던 쉼터에 유배지의 여덟 취미 중에서라는 시판이 걸려있었던 걸로 보아, ‘다산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각종 시설물들을 꾸며놓은 모양이다. 아무튼 뭔가 가슴에 담아갈 것 까지 염두에 둔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순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쉼터에는 망원경까지 설치해 놓았다. 주변 풍경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이 예사롭지 않다. 리아스식(rias) 호안(湖岸)을 낀 호수가 주변의 울창한 숲과 어우러지면서 잘 그린 한 폭의 산수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조금 있으면 가을이 온다. 그때 저 풍경화는 또 다른 덧칠을 하게 될 것이다. 수채화 같은 가을 풍경의 주인공인 단풍이 초록빛에서 시작해 서서히 붉어지다가 마침내는 새빨간 아기 볼처럼 변할 것이다. 그런 풍경은 또 다른 풍경화로 변해 우리 눈앞에 나타날 것이고 말이다.



이 쉼터 근처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다산유적지로 가는 길이 이 부근에서 나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정표 등 이곳이 갈림길이라는 표시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눈치로 찾아갈 수밖에 없을 듯 싶다. 다만 오른편으로 보이는 본래의 용도를 다한 녹슨 철로(鐵路)‘True us'라는 카페(Cafe)를 기준으로 삼을 수는 있겠다. 그리고 자동차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세워진 조안1리 비선골마을안내도를 참조해도 될 일이고 말이다.



이제부터는 자동차도로를 따른다. 오른편 방향이다. 도로 가장자리에 데크산책로를 만들어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저 여유롭게 걷기만 하면 될 일이다. 참고로 이곳에서 반대방향으로 조금 나가다가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능내역이 나온다. 지금은 비록 폐역(廢驛)으로 남아있지만 누군가에는 그리움으로 또 누군가에는 행복한 추억으로 가슴에 남아있는 곳이니 한번쯤 들러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난 사전지식이 부족했던 관계로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삼거리를 만난다. 이곳에 다산길 2코스 이정표’(종점, 다산유적지 0.6Km/ 시점 0.7Km)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갈 경우 다산길의 시점이 나오는 모양이다. 이정표의 하단에 표기된 성당 가는 길의 방향표시가 시점을 가리키고 있는 걸로 보아, 2코스의 시점은 천주교 마재성지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참고로 마재성지는 정약용 형제가 천주교를 접했던 곳이다. 또 모진 박해와 탄압 속에서도 정약종이 가솔을 데리고 살기도 했다. 천주교 성지(聖地)들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편이지만 창의적으로 디자인된 십자가 등의 성물(聖物)들이 볼만하다고 알려져 있다.





자전거길을 벗어난 지 15분쯤 지나면 저만큼에 다산 유적지가 나타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선생의 생가(生家)와 묘(), 그리고 그의 기념관 등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선생의 자는 미용(美庸), 그리고 호는 다산(茶山) 또는 사암(俟菴), 여유당(與猶堂), 채산(菜山).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등을 쓴다.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유적지 관람은 다산문화관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산(茶山)은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그런 그의 삶을 그리고 그의 사상을 담은 작품들과 함께 진열해 놓은 곳이 문화관이다.






문화관을 빠져 나오면 이번에는 다산 기념관이 길손을 맞는다. 이곳도 역시 선생의 삶과 그의 사상을 알리고자 하는 공간이다. 그러다보니 그가 발명해서 수원 화성의 축성과정에서 사용했다는 기중기(起重機)의 실물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 외에는 조금 전에 들렀던 문화원과 별반 다른 게 없다.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두 개를 합쳐서 더 조리 있고 광범위 하게 진열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참고로 선생은 남인 가문 출신이다. 18세기 후반의 당쟁(黨爭) 과정에서 오랫동안 정치 참여로부터 소외되었던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들은 기존의 통치방식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들이 존중하는 성리설과는 달리 선진유학에 기초한 새로운 개혁의 이론을 일찍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학문적 경향을 근기학파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정약용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고, 소시적부터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양근(楊根 :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땅 일대는 뒷날의 연구자들로부터 실학자로 불리게 된 일군의 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이었다. 그의 친인척들도 이곳의 학풍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기념관을 빠져나오면 저만큼이 선생의 동상(銅像)이 보인다. 그의 실물을 얼마만큼 반영했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단아한 모습이다. 선생이 지은 목민심서(牧民心書), 고을의 수령들이 지켜야 할 지침(指針)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이다. 그리고 내가 공직생활을 해오면서 항상 머리맡에 두고 살았던 책이다. 그 책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그려봤던 선생의 모습을 저 동상이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동상의 뒤에 보이는 언덕을 오르면 선생의 묘()가 나타난다. 다산 선생과 부인인 풍산 홍씨를 함께 모셨다. 그런데 홍씨 부인의 봉직(封爵)숙부인(淑夫人)’으로 적혀있다. 이는 선생의 벼슬이 정삼품(正三品)에 그쳤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이다. 그의 높은 지명도는 차지하고라도, 정조대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그이기에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선생은 자찬묘지명에서 '이 무덤은 열수 정약용의 묘이다'라고 했다. 열수(洌水)는 한강의 옛 이름으로, 능내리에서 태어난 다산은 한강을 무척이나 사랑해 자신의 호로 '열수'를 자주 사용했다.



묘에서 내려오면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이다. 1799, 38세 되던 해에 다산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병조 참지, 형조 참의 등의 벼슬을 지내고 있었으나 반대파들은 다산을 가만두지 않았다. 천주교 신자인 다산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었다. 특히 그 무렵 천주교 탄압을 적극적으로 막아주던 영의정 채제공이 죽은 뒤여서 반대파의 공격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다산은 결국 무고(誣告)를 반박하는 자명소(自明疏)를 정조에게 바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정조도 말리다 못해 허락하였다. 이듬해 1800년 봄, 다산은 가족을 데리고 고향 마현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사는 집의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불렀다. '여유'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인데, 겨울에 살얼음 위를 걷듯이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매사에 조심하라는 뜻이다. 다산은 그 당호를 자신의 호로 삼을 만큼 '여유'라는 말뜻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삶이 잘 반영된 이름이 아닐까 싶다. 





유적지 안에는 곳곳에다 벤치와 의자들을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민속놀이인 투호(投壺)도 만들어 놓았다. 항아리에다 화살()을 던지는 놀이인데, 우리나라에는 당나라 때 들어왔고, 서울의 양반가정이나 궁중에서 하던 놀이이다. 투호의 옆에는 열십()자로 만들어진 나무 판()도 보인다. 아마도 곤장(棍杖)을 맞을 때 엎드리던 판인 모양이다. 준비된 3개의 투호를 던져서 하나도 못 넣을 경우 곤장을 맞게 된다는 내 말에도 집사람의 표정은 시큰둥하다. 아마 거짓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물론 그녀의 짐작이 옳았지만 말이다.



생가를 빠져나오면 실학박물관이 기다린다. 그리고 그 주위는 꽤나 많은 음식점들이 둘러싸고 있다. 이 두 곳은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실학이야기가 가득한 곳이라지만 평소부터 역사에 취미가 있었던 나이기에 꼭 들어가 보지 않아도 그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준비해온 간식으로 이미 요기를 때운지라 음식점에도 들러볼 일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대신 길가에 세워진 각종 시설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수원성을 쌓을 때 사용했던 실물크기의 기중기도 보고, 다산의 글을 새겨놓은 석판(石板)도 살펴본다.




유적지를 빠져나오면 연꽃방죽이 길손을 맞는다. 여름철 내내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했을 연꽃들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갈색치마를 연상케 하는 씨방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완연한 가을 풍경이다.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는 창포가 가득 들어차 있다. ‘다산 생태공원이 이곳인 모양이다. 이곳에서 길 찾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산길에 대한 이정표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길 찾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산책로 용 이정표‘(토끼섬 1.5Km/ 산책로시작점, 2주차장 1Km)연꽃체험마을안내판만이 눈에 띌 따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산길 2코스는 토끼섬 방향이다. 토끼섬을 거쳐 능내리에서 1코스인 자전거길과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우린 그러지를 못했다. 길을 잘못 들어 고생하는 것이 두려워 도로를 따라 나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볼거리가 거의 없는 삭막한 길을 한참동안이나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가을꽃인 들국화나 남의 집 뜨락에 조성해 놓은 조각상을 기웃거리는 게 다인 그런 길을 따라서 말이다.



다산유적지에서 20분 정도를 걸으니 이정표가 보인다.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다산길의 이정표(시점 0.2Km/ 종점, 다산유적지 1.9Km)이다. 이정표와 겹쳐서 세워놓은 능내1리 연꽃 체험마을의 안내도를 비교해보면 2코스는 이곳에서 토끼섬을 거쳐 다산유적지로 연결된다. 결과적으로 우린 둘레길이 아닌 일반 도로를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이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는 2코스의 특징을 들어 호숫길부터 숲길, 시골마을길, 야트막한 산길이 이어지는 다이내믹한 경관이라고 했다.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우린 그런 아름다운 경관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는 분명 내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여행을 나서기 전에 그날 걸어야 할 코스를 미리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내판이나 이정표를 제대로 세워놓지 않은 지자체도 그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날 걸어야할 길을 미리부터 파악하고 길을 나설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다산유적지 방향으로 비닐하우스 모양의 터널을 만들어 놓았다. 머루로 생각되는 넝쿨식물로 둘러싸인 것이 제법 운치가 있어 보인다. 연꽃마을에 대한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 공을 들여 가꾼 흔적도 역력하다. 아무튼 터널로 들어서본다. 다이내믹한 경관을 선사한다고 알려진 둘레길을 조금이라도 걸어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까지 여유롭지가 못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팔당 호변 소내나루터에 정박되어 있다는 황포돛배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조선시대 포구의 분위기를 자아낸다는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다시 자전거길을 따른다. 어쩌면 이 길은 다산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둘레길의 지명도에 비해 너무나 삭막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한강을 왼편에 끼고 이어지다 보니 주변에 펼쳐지는 풍경들은 아름다운 편이다. 하지만 지금 걷는 길은 둘레길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스팔트길이다. 걷는 게 그다지 편하지만은 않기에 삭막하다는 표현을 써봤다.



가을 햇빛 아래 비늘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는 호수는 가없는 바다와 같다. 밤낮의 일교차(日較差)가 만들어 놓은 물안개 탓인지 몰라도 모든 풍경이 실루엣으로 처리되고 있다. 아니 지금은 안개가 생길 시간이 아니니 연무(煙霧) 탓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풍경들이 신비감을 더해준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누군가는 세속을 벗어난 이상향(理想鄕)을 일러 상그릴라(shangrila)’라고 했다.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그곳 말이다. 혹시 저런 풍경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산길을 일러 극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호반의 길이라고 말하나 보다.



길은 무척 위험스럽기까지 하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자전거들 중 일부가 사람들이 다니는 보행로(步行路)까지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앞에 이르러서는 다시 자전거길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보행자들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달려오는 사람들도 있다. 이중 대부분은 여자들이다. 어쩌면 자전거의 진로를 자유자재로 옮길만한 능력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의 행동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런 능력을 갖추고 난 다음에 자전거를 몰고 나오면 어떨까 싶다. 그래야만 불시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끼섬 갈림길에서 30분쯤 걸었을까 터널 내에서는 선글라스를 벗으세요.’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이어서 공원처럼 잘 가꾸어 놓은 호반(湖畔) 시설을 지났다 싶으면 저만큼에 터널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영락없는 열차(列車)의 터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자전거길은 폐() 철로를 이용해서 만들었다고 들었던 것 같다.



터널도 역시 오가는 자전거길 외에 왼편에다 보행로를 하나 더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터널 밖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길과 길 사이의 경계선(境界線)을 노란색으로 칠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절대로 넘어가지 말라는 메시지(message)가 분명하다. 하긴 이 정도의 조명(照明) 아래에서는 사물의 분간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자전거의 빠른 속도를 감안할 때에는 더욱 어렵지 않겠는가.



터널을 빠져나오면 팔당댐의 하단이다. 이제부터는 한강을 구경하면서 걷는다고 보면 된다. 강 건너에 검단산이 우뚝하지만 가을 햇빛에 가려 나타나지 않고 있다. 참고로 팔당댐은 검단산과 예봉산이 마주하는 협곡(峽谷)에 만들어 놓은 다목적 댐이다. 댐은 한강의 물길을 막아섰고, 그 댐에 갇힌 거대한 팔당호는 남한강의 양평에서 북한강의 청평까지 이르기까지 바다 같은 대호(大湖)를 만들며 육지속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우려했던 사고의 현장을 보고야 만다. 서툰 사람들과 능숙한 사람들이 서로 뒤섞이다보니 유연성을 잃고 뒤엉켜 버린 것이다. 5명이나 넘어졌지만 큰 부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저 멀리 팔당대교가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미사신도시가 아스라하다. 그 풍경들이 실루엣으로 처리되면서 또 다른 수묵화를 만들어 낸다. 그것도 감상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그림이다.



팔당역이 가까워지면서 달라지는 풍경이 있다. 길가에 카페의 숫자가 늘어난 것이다. 그만큼 오가는 라이더(rider)들이 많아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사고가 발생할 빈도도 높아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또 다른 사고현장이 보인다. 이번에는 119의 구급차까지 와있다. 길가에서 응급처지를 하고 있는 것이 제법 많이 다친 모양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육교(陸橋)의 아래를 지나면서 자전거길과 헤어진다. 그리고 마을안길로 들어선다. 길가에는 자전거 대여점 천지이다. 그리고 아까 오는 길에 보았던 갖가지의 자전거들이 길게 진열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많은 라이더(rider)들이 이곳에서 자전거를 빌려 탔던 모양이다. 터널에서 이곳까지는 40분이 걸렸다.



트레킹의 날머리는 중앙선전철 팔당역

마을길로 들어섰다 싶은데, 그새를 못 참고 길은 또 다시 도로로 내려선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전거길이 아니다. 일반도로의 옆으로 난 인도(人道)를 따라 걷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더 걸으면 팔당역이 나타나면서 오늘의 트레킹은 종료된다. 오늘 트레킹은 총 5시간40분이 걸렸다. 하지만 다산유적지에서 1시간40분 정도를 머물렀으니 실제로 걸은 시간은 4시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에필로그(epilogue), 다산길 13개의 코스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져 있다. 1코스 한강나루길’(한강 삼패지구에서 팔당역~능내역을 거쳐 운길산역에 이르는 16.7구간). 2코스 다산길’(다산유적지가 있는 마재마을에 이르는 3.4구간. 상팔당에서 1코스와 만나 조안면 능내리까지 겹친다. 남양주역사발물관과 경기도 실학박물관, 연꽃체험마을 등이 있다), 3코스 새소리명당길’(마재마을에서 폐철로~조안리를 거쳐 운길산역에 이르는 7.5구간), 4코스 운길산의 옛 이름인 큰사랑산길’(도심역에서 고대농장~새재고개~세정사~임도를 거쳐 운길산역에 이르는 15.4구간), 5코스 문안산길’(운길산역에서 이덕형(李德馨) 생가~재재기마을~문안산~문바위~금남교를 거쳐 피아노폭포에 이르는 17.3구간), 6코스 머재고개길’(피아노폭포에서 금남산~모란공원 등을 지나 소래비고개에 이르는 6.5구간), 7코스 마치고개길’(남양주시청에서 아르내미고개~백봉산~마치고개를 거쳐 남양주시 보호수로 지정된 가곡리 은행나무에 이르는 20.3구간), 8코스 물골안길“(장천교 방마고개에서 파위마을~서낭당고개~불당골~외방리를 거쳐 축령산 입구에 이르는 9.2구간), 9코스 축령산자락길‘(축령산 입구의 외방리에서 전자동 두몽안계곡을 건너 서리산의 허리를 끼고 돌아 몽골문화촌에 이르는 10.1구간), 10코스거문고길‘(몽골문화촌에서 비금계곡(秘琴溪谷)을 올라 주금산에서 철마산으로 이어지는 고개를 넘어 조선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묘소가 있는 광릉내에 이르는 12.4구간), 11코스 수목원길‘(광릉내에서 하천길~47번 국도~진접중~무시골~천겸산~순강원을 거쳐 내각리의 대궐터에 이르는 11.6구간), 12코스 옛성산길‘(대궐터에서 안골~잣고개~국사봉~순화궁~흥국사를 거쳐 덕릉마을에 이르는 12.6구간), 13코스 사릉길‘(사릉역에서 마치고개에 이르는 15.2구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