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南漢山城)

 

산행일 : ‘11. 10. 3(월)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의 경계

산행코스 : 남한산성유원지→약사사→검단산 갈림길→남문방향 성벽→동문→외성(벌봉)→북문→수어장대→왕궁→남문→유원지로 원점회귀(산행시간 : 4시간20분 )

 

함께한 산악회 : 나홀로

 

특징 : 전체면적 36.4㎢, 성 면적 2.3㎢에 달하는 남한산성 성곽(城郭)의 길이는 총 11.7㎞에 이른다. 이 가운데 본성은 9.05㎞이고, 나머지 2.71㎞는 옹성(甕城)이다. 성곽은 주봉인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 동쪽의 망월봉과 벌봉, 남쪽의 이름 없는 봉우리 몇 개를 연결해서 쌓았다. 남한산성의 외부는 급경사(急傾斜)지만 성곽 안쪽에는 평균 해발고도(海拔高度) 350m 내외의 완만한 구릉(丘陵)이 있는 분지(盆地)가 형성돼 있다. 성안에는 우물 80개와 샘터 45개소가 만들어졌을 정도로 물도 풍부하다.

 

 

산행들머리는 남한산성 유원지 주차장(駐車場)

지하철 8호선 ‘산성입구 역’ 2번 출구 앞에서 버스(이곳에서 정차하는 거의 모든 버스)로 환승하여 4개 정거장 정도 들어가면 남한산성유원지(遊園地) 입구에 도착하게 된다. 남한산성을 걸어서 오를 경우에는 이 유원지를 통과해야만 한다. 유원지 안으로 들어서면 도립공원(道立公園)답게 이정표 등 편의시설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남한산성 유원지 안으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유원지답게 인파(人波)로 넘쳐나고 있다.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1/3 정도는 평상복 차림, 다들 요즘 살림살이가 어렵다고들 하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하긴 모처럼의 나들이에서까지 우거지상을 지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유원지 입구에 있는 공연장(公演場)에서는 굿이 한창이다. ‘단군제․도당굿 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는데, 무당이 굿판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도당굿을 열연(熱演)하고 있는 모양이다.

 

 

유원지(遊園地)를 지나 남한산성의 남문(南門)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오른편에 약사사(藥師寺)로 가는 길이 보인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자동차길이고 왼편은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게 되어 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왼편으로 접어든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면 오른편에 약사사가 보인다. 사찰의 규모는 크지만 장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는, 어딘지 모르게 주변의 경관(景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약사사(藥師寺) : 현 여래종(如來佛)의 종정(宗正)인 석인왕 대종사가 1967년에 세운 사찰(寺刹)이다. 약사사라는 이름은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봉안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대한불교(大韓佛敎) 여래종(如來宗) 총본산(總本山)으로서 종정스님이 상주하고 있으며, 여래종 승려의 교육장이자 수행처(修行處)이다.

 

 

 

약사사(藥師寺)를 벗어나 다시 계곡을 따라 올라선다. 약수터에서 시원한 감로수(甘露水) 한잔 마시고 다시 길을 재촉하면 얼마 안 있어 검단산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게 되는 능선위로 올라서게 된다. 검단산에서 올라오는 길은 차량(車輛)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널따란 도로(道路)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로가에 트럭이 세워져 있고, 트럭주막(酒幕)에는 막걸리를 사 마시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보인다.

 

 

 

 

검단산 갈림길에서 남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왼편에 운동시설을 갖춘 작은 쉼터가 보인다. 훌라후프(Hula-Hoop)를 하고 있는 여인들의 자태가 참 곱다. 조금 더 걷다가 오른편으로 올라선다. 어수리꽃 등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언덕위에 옹성(甕城)이 나타난다. 제2남옹성(南甕城)이다. 성을 쌓을 때는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해 온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축성한다. 이 돌출부를 옹성(甕城) 또는 치성(雉城)이라 부르며, 남한산성의 남쪽 성벽에는 3개의 옹성이 있다.

 

 

 

 

 

첫 번째로 나타나는 암문(暗門)을 지나 성곽(城郭) 안으로 들어선다. 성곽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반반하고 넓어서 도무지 산성이라는 기분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길가에는 들국화와 코스모스가 무리지어 피어있다. 꽃에 약한 게 여심(女心)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들꽃 속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여자들이, 깔깔거리며 웃는 웃음소리가 온 산을 휘젓고 있다.

 

 

 

 

제3남옹성(甕城)을 지나면 길은 급경사를 이루면서 아래로 떨어진다. 저 멀리 동문(東門)을 지나 북장대터 쪽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선(線)이 무척 곱다. 동문의 왼편 위쪽에 비구니들의 수도처라는 망월사가 뚜렷하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동문이다. 동문 아래로는 노선버스가 지나다니는 널따란 자동차 도로(車道)가 지나가고 있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걸을 경우 1.7㎞ 지점에 남문이 있다.

* 동문(東門) : 남문(南門)인 지화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가장 높았던 성문이다. 인조 때 수축(修築)하였으며 정조 3년에 성곽을 개축한 후부터 좌익문(左翼門)이라 불렀다. 이 문이 다른 성문(城門)들과 다른 점은 성문을 돌로 계단을 쌓아 놓아 우마차(牛馬車)로 짐을 운반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곳의 지대(地帶)가 낮아서 성문을 지면(地面)보다 높은 곳에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동문(東門)에서 장경사로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성벽(城壁)을 따라 오르는 것이 보통이나 계단을 오르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여유롭게 오를 수도 있다.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계단을 밟으며 힘겹게 오르면 왼편에 조계사의 말사(末寺)라는 호국사찰(護國寺刹)인 장경사가 보인다.

* 장경사(長慶寺,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15호) : 남한산성 보수를 위해 전국의 승려(僧侶)들을 징집하여 성을 쌓게 하였고, 축성(築城) 후에는 승군(僧軍)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의 머무름을 위해 건립한 절이다. 멋스런 일주문(一柱門)에 비해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꼭 찾아보아야할 문화재(文化財)는 보유하고 있지 않으나, 윤장대(輪藏臺)는 한번쯤 둘러볼만하다. 윤장대란 티벳불교인 라마교에서 성행하고 있는 하나의 수행(修行)방식으로서, 원통에 경전(經典)을 복사해서 붙여 놓은 윤장대를, 한번 돌릴 때마다 불경(佛經)을 500번을 읽는 것과 같은 효험이 있다는 것이다.

 

 

 

 

장경사에서 다시 성벽(城壁)을 따라 가파르게 오르면 동장대터가 나오고, 암문(暗門)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봉암성이다. 봉암성의 주봉인 벌봉까지는 0.6Km, 성곽을 따라 돌아도 2Km가 채 못 되는 거리이니 한번쯤은 답사해 볼 일이다. 봉암성으로 들어가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하남시 객산 쪽으로 내려가는 암문이 보이고, 암문을 나서기 전에 오른편 성벽을 따라 위로 오르면 바위봉우리 하나가 보인다. 벌봉이다. 벌봉은 봉암(蜂巖)이라고도 부르는데, 벌봉의 꼭대기에 있는 우람한 바위가 벌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물론 이곳 외성(外城)의 이름도 봉암성으로 부르고 있다.

* 장대(將臺) : 장대란 높은 곳에 세운 일종의 지휘소에 해당되며, 남한산성에는 4개의 장대(將臺)가 있었다. 동서남북 방향으로 각각 하나씩 세웠는데 지금은 서장대(西將臺)에 해당하는 수어장대(守禦將臺)만이 남아 있다.

 

 

 

 

봉암성으로 들어가는 첫 성문(城門)으로 남한산성에 붙여 축조한 성문이다. 문루(門樓)가 있는 성문보다는 작고, 암문(暗門)보다는 다소 크다. 봉암성은 보조성곽(補助城郭)으로 위급할 경우에는 버릴 수 있도록 본성(本城)인 남한산성과는 성문(城門)으로 직접 연결시키지 않았다.

* 봉암성(蜂巖城) : 봉암성은 당초에는 없던 성곽으로 병자호란(胡亂)때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의 동쪽에 위치한 벌봉에서 남한산성을 엿보며 위협하므로 호란 후 숙종 12년(1686) 이에 대한 대책으로 남한산성과 연결하여 추가로 쌓은 보조(補助)성곽을 말한다. 성의 입구는 길고 끝은 뭉퉁한 것이 마치 호리병을 닮았다. 남한산성과는 달리 성곽 대부분이 훼손(毁損)된 채로 방치되고 있다.

 

 

 

암문(暗門) : 성벽에 비밀히 뚫어놓은 문 또는 성벽에다 누(樓) 없이 만들어 놓은 문(門)을 말한다. 성곽(城郭)으로 통하는 문은 여러 곳이 있으나 모두 적(敵)이나 일반인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문이다. 하지만 암문은 비상시에 사용하는 문으로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전시(戰時) 상황이 되면 군수물자를 조달하거나 비밀리에 군사를 이동시키는 용도로 사용된다. 숲이 우거진 곳이나 성곽 깊숙한 곳에 만들어져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는 문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만들어진다(네이버백과 참조)

 

 

 

 

벌봉에서 다시 내성(內城)으로 들어가려면 주의가 필요하다. 성벽을 따라 곧바로 진행할 경우에는 꽤나 먼 곳에 위치한 한봉성까지 가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봉에서 다시 돌아오기는 만만치 않은 거리이니 가는 길에 보이는 이정표를 확인하고 방향을 잡아야 한다. 봉암성의 남쪽으로 다시 한봉성이 길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장대터에서 북문까지 성곽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대부분 산책로 같은 느낌이다. 급경사 내리막길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 거리는 길지 않기 때문에 걷는데 큰 부담이 없다.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오른편 성곽너머로 하남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북문(北門) : 인조 때에 신축(新築)되었으며 이 문을 통해 세곡(稅穀)을 운반하였다. 정조 3년에 성곽을 개축한 후 전승문(戰勝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문으로 들어오는 길은 험하기 때문에 적들이 이 문으로 치고 들어올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우리 군(軍)이 적을 습격할 경우에나 사용했던 문이 아닐까 싶다. 전투용 문이니 당연히 전승문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고...

 

 

 

북문에서부터는 성을 벗어나 성곽의 아래로 난 오솔길을 따라 답사(踏査)를 계속한다. 다소 거칠지만 들국화 등 야생화(野生花)가 만발한 천연(天然)의 길을 걷는 맛이 나름대로 운치(韻致)가 있어 좋다. 서문을 향해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서두르지만 않으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을 정도이다. 들꽃들을 구경하며 여유롭게 거닐다보면 저만큼에 암문(暗門)이 보이고 암문과 이어진 옹성이 보인다. 연주봉 옹성(瓮城)이다. 연주봉 옹성위로 오르면 하남시와 서울의 시가지(市街地)가 가깝게 다가온다.

 

 

 

옹성(瓮城) :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다. 남쪽에 제1, 2, 3 옹성, 북쪽에 연주봉 옹성, 그리고 동쪽에는 장경사 신지옹성 등이다.

 

 

 

 

‘연주봉 옹성’을 둘러보고 돌아와 이번에도 성곽(城郭) 아래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성곽의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이곳에서 서문(西門)이 그리 멀지 않을뿐더러, 길을 따라 걷다가 바라보는 서울시가지의 조망이 뛰어남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걷다보니 전에는 보지 못하던 시설이 보인다. 망원경(望遠鏡)까지 갖춘 전망대(展望臺)이다. ‘아빠 홈플러스가 보여요.’ 망원경을 이용해서 자기 집 근처를 찾아낸 꼬마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전망대에서 고개만 돌리면 서문이 눈에 들어온다.

 

 

 

서문(西門) :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으며 정조 3년에 개축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불렀다. 1637년 인조가 세자와 함께 청나라 진영으로 들어가 항복(降伏)할 때 이 문을 통과했다고 한다. 가슴 아픈 역사(歷史)의 현장이다. 서쪽 경사면이 가파르기 때문에 물자를 이송하기는 힘들지만 서울 광나루와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서문(西門)에서부터는 다시 성곽의 위로 난 길을 따라 답사(踏査)를 이어간다. 서문에서 수어장대(守禦將臺)까지 이어지는 길은 한마디로 말해서 대로(大路)이다. 자동차 3~4가 한꺼번에 비켜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널따랗다. 성곽을 따라 세워진 울긋불긋한 깃발들이 바람에 힘차게 휘날리고 있다. 어느 영화에서 본 한 장면 같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심경(心境)인지 성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뿜는 엔도르핀을 흡수하며 걷다보면 봉우리의 맨 꼭대기에 있는 수어장대에 도착하게 된다.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서,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 서․ 남․ 북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將臺)로서, 수어청의 장관(將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장대의 특징대로 주변을 잘 살펴볼 수 있도록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있다. 인조 2년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 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로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에 이층 누각으로 증축하면서 수어장대로 이름을 바꿨다.

남한산성은 인산인해(人山人海),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성곽(城郭)을 따라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려는 사람들과, 이곳 지자체(地自體)에서 개발한 둘레길을 돌며 심신(心身)을 단련하고 있는 사람들, 하나같이 건전한 생각과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들 사이에서 호흡하며 걷고 있는 나 또한 행복한 사람들에게서만 나온다는 엔도르핀(endorphin)이 무한정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수어장대(守禦將臺)에서는 성곽(城郭)을 벗어나 왼편 오솔길로 접어든다. 행궁(行宮)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행궁으로 내려서는 길은 울창한 수림(樹林)으로 뒤덮여있다. 소나무 군락지(群落地)가 장관으로 펼쳐지고 있다. 가파른 경사(傾斜)를 이겨내기 위해 갈지(之)자를 만들어내고 있는 내리막길을 20여분 걸어 내려오면 음식점이 몰려있는 로터리(rotary) 부근이다. 왼편에 행궁이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공사 중이라서 관람(觀覽)이 불가능하단다.

* 행궁(行宮) : 인조 때 지은 조선시대의 별궁(別宮) 또는 이궁(離宮)으로, 후금(後金)의 침입에 대비해 백제 때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해 축조하였다. 유사시에 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던 궁궐의 하나로, 병자호란 당시에는 임시 궁궐(宮闕)로 사용되었다. 원래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 등 총 3단 227칸으로 이루어진 행궁이었으나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다. 지난 2003년 왕의 침소였던 상궐이 복원됐고, 이어서 업무를 보던 하궐도 2010년 가을에 준공되었다. 다만 일반인들에게 공개(公開)는 단청이 끝난 후에야 가능하단다.

 

 

행궁(行宮) 앞에 있는 주차장을 지나 성남 방향으로 얼마간 걸어 올라가다보면 왼편에 남문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널따란 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이내 고풍(古風)스런 남문을 만날 수 있다. 남문(南門)은 지화문(至和門)이다. 남한산성 4대문 중에 유일하게 현판 글씨가 남아 있는 문이기도 하다. 조선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 할 때 지화문으로 불렀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단다.

남문(南門)을 통과한 후 뒤돌아보면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성곽(城郭)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성을 수축(修築)할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수령 350년된 느티나무 4그루이다. 느티나무들의 고고한 자태는,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려는 탐방객(探訪客)들에게 오랜 세월동안 지켜본 옛이야기라도 들려줄 것 같은 느낌이다. 하나 아쉬운 것은 치료를 위함인지 한쪽 면을 보호막으로 감싸고 있어서 마치 기둥처럼 보이는 것이 안쓰럽다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들은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어 있다.

 

 

산행날머리는 남한산성유원지 주차장(원점회귀)

남문에서 백련사를 거쳐 산행을 시작하면서 들머리로 삼았던 남한산성유원지까지 내려오는 길은 공원의 산책로를 방불케 한다. 경사가 진 곳도 있고, 굴곡이 크지 않은 계단도 있지만 오르내리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백련사 근처에까지 유모차(乳母車)를 끌고 온 젊은 아주머니도 볼 수 있었다. 등산로 주변은 헬스클럽형의 체육공원과 통일탑공원, 그리고 수많은 쉼터와 화장실을 곳곳에 설치해 놓아 찾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흔적들이 역역했다.

 

 

백련사(白蓮寺), 대한불교 원효종(元曉宗) 소속의 사찰(寺刹)로서 1975년 법선스님이 원래 정각사(正覺寺)가 있던 자리에 새로이 절을 개축하면서 이름을 백련암(白蓮庵)이라 고쳤고, 1979년 절을 신축(新築)하면서 다시 백련사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