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아르메니아 – 예레반
여행일 : ‘23. 5. 31(수) - 6. 12(월)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①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③ 예레반(Yerevan) : 아르메니아의 수도로 인간이 살아온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하지만 러시아 건축가 ‘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yan)’이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 지배하에 있을 때 설계한 계획도시이기도 하다. 포인트는 ‘공화국 광장’에서 ‘자유 광장’을 거쳐 ‘캐스케이드’에 이르는 구간으로, 거리 전체가 신고전주의풍 건물들로 장식되어 있어 마치 파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행객들이 잃어버린 예레반을 낭만을 되찾아줄 것만 같은 분홍색 빛을 띤 도시라며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캐스케이드에서 바라본 예레반 시가지. 시가지 너머로 ‘아라라트 산’의 위용이 선명하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신들의 태생과 역사가 시작했다고 믿는 민족의 성산으로, 아라라트가 자리 잡은 아나톨리아 평원의 동쪽은 오랫동안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던 저 영산은 1920년 튀르키예의 영토로 변했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한창이던 1993년 터키가 경제봉쇄와 함께 국경까지 폐쇄한 후 더욱 멀어졌다.(날씨 탓인지 아라라트 산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아, ‘나무위키’에서 사진을 빌려왔다)
▼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 세반호수(세반 수도원), 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 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 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 예레반은 격자형 가로망을 원형 순환로가 감싸는 형태의 계획도시다. 그래선지 눈요깃거리들은 예레반 중심부에 모두 몰려있다.
▼ 차에서 내리니 낯선 문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뜻은 고사하고 읽기조차 불가능한. 다른 낯선 나라에 발을 디뎠음을 눈이 가장먼저 알아차린 셈이다. 담벼락을 장식하고 있는 저 문자들은 ‘아르메니아 알파벳’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방인이 인식하기에는 너무 낯설다. 아래 오른쪽에 러시아어와 영어로 발음이 적혀 있는 것 같은데,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다.
▼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창제 문자를 가진 뿌리 깊은 문화국가라고 했다. 문자가 만들어진 것은 405년,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성직자 ‘마슈토츠(Mesrop Mashtots)’에 의해서다. 브람샤푸(Vramshapuh)왕과 사학(Sahak)대주교의 지원을 받아 36자의 아르메니아 알파벳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아르메니아 문학의 시작을 의미하며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또한 언어를 통한 민족 통합과 종교적 일체감을 갖는 일이 가능해졌다.
▼ 어찌 보면 ‘한글을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마슈토츠’가 최초로 옮겼다는 솔로몬의 ‘잠언서’ 첫 문장은 대충 이렇다. <이것은 지혜와 가르침을 인식하도록 하고 위대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을 알게 한다(Ճանաչել զիմաստութիւն եւ զխրատ, իմանալ զբանս հանճարոյ)>
▼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고문서박물관(Matena daran)’을 찾아보라고 했다(하지만 시간이 없어 다녀오지는 못하고,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을 게시한다). 안에는 1만7천여 점의 필사본과 10만권이 넘는 고문서가 보존·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고대·중세 시대의 필사본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필사본도 있단다. 그중 가장 큰 필사본은 ‘무슈의 설교집’으로 크기가 가로 55.3cm에 세로가 70.5cm나 되며 무게는 27.5kg이라고 한다. 필사본 중 가장 작은 것은 1434년도에 제작된 교회 달력으로 가로 3cm에 세로가 4cm인데, 무게는 19g에 불과하단다.
▼ 캐스케이드로 가는 길. 해외 유명 브랜드숍과 유럽풍 분위기의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이다. 예레반은 이런 길들이 광장과 광장을 연결해준다.
▼ 벽에 붙은 명패가 눈길을 끌기에 사진부터 찍고 본다. 귀국해서 알아보니 ‘아라 사르그샨(Ara Sargsyan, 1902-1969)’이었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걸출한 조각가로. 라피크 카차트리안(1937-1993)과 같은 수많은 아르메니아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데, 그의 생가(명패에는 ‘1945-1959’로 적혀있다)였던 모양이다. 이사하키안 거리에 있는 그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개조해놓았다니 말이다.
▼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예레반 관광의 하이라이트인 ‘캐스케이드(Cascade Complex)’에 이른다. 예레반의 북쪽 언덕과 도심을 연결시키고 했던 ‘알렉산더 타마니안’이 구상한 계단형 구조물이다. 하지만 착공되지 못하고 설계도로만 남아 있던 것을 1970년대 말 예레반의 도시계획위원회 위원장 ‘짐 토로스얀’이 부활시켰다. 타마니안의 원안을 기초로 내부에 공간들을 만들어 연결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으며 전면에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예술품들로 치장한 정원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1988년 대지진과 1991년 독립, 전쟁 등으로 중단되었고, 2002년에야 아르메니아 출신 디아스포라의 후손이자 미국의 사업가인 ‘카페스지안’이 재산을 출연해 2009년 미술관으로 마침내 문을 열었다.
▼ ‘캐스케이드’의 초입. 캐스케이드를 설계한 ‘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ian, 1878-1936)’이 예레반의 도면을 살펴보고 있다. 러시아 출신인 그는 러시아에서 건축가로서의 명성이 정점을 향하던 마흔다섯에 아르메니아로 이주해 이후 반생을 보냈고 또 예레반에서 숨을 거두어 아르메니아의 건축가로 남았다. 그는 예레반의 오페라하우스, 공화국 광장과 주변의 건물 등을 설계하는 등 아르메니아의 건축사와 도시사에 일획을 그었다.
▼ 캐스케이드는 외부의 카페지안 조각공원과 내부의 미술관(art gallery)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 모두 예술작품들로 꾸며졌는데, 조각공원에 조금 더 큰 조각품들이 50m 폭의 녹지와 보행로를 따라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
▼ 콜롬비아 작가 ‘보테로(Fernando Botero)’가 만들었다는 둥글둥글 오동통통한 여인이 인상적이다.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것이 담배를 피우는 여인에 대한 뭔가를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바로 위에 게시된 ‘로마 전사(Roman warrior)’도 보테로의 작품이라고 한다.
▼ 영국작가 ‘구하(Saraj Guha)’는 도약하는 임팔라를 만들었다. 한 마리의 임팔라가 도약하는 모습을 네 개 장면으로 보여준다.
▼ 한국 예술가 ‘지용호’가 만든 정크아트 사자도 전시되어 있었다.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으로 역동성과 용맹성이 두드러진다. 2008년 작품으로 스텐레스와 타이어를 활용해 만들었다.
▼ 그밖에도 포르투갈 출신의 ‘바스콘셀로스(Joana Basconcelos)’, 중국작가 위민준(Yue Minjun), 미국 작가 워이툭(Peter Woytuk) 등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출품한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 그런 작품들을 눈에 담다보면 어느덧 ‘캐스케이드’ 앞에 이르게 된다. 언덕을 향해 놓인 계단식 정원으로, 572개의 대리석 계단을 6개 층으로 나누고 각 층마다 물이 흐르는 수직적 정원을 들어앉혔다. 작고 아름다운 분수(폭포)와 조각품들로 장식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캐스케이드를 둘러보는 방법은 두 가지다. 밖에 놓인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기본, 그게 힘들다면 내부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면 된다. 이 또한 5개 층으로 나뉘어져 있으니 층이 바뀔 때마다 밖으로 나가 야외정원을 살펴보면 된다.
▼ 내부는 5개 층의 테라스 공간을 만들고 에스컬레이터로 각층을 연결했다. 여기에 기부자의 이름 딴 ‘카페스지안 아트센터’를 들어앉혔다. 경사면과 각층의 평면에 흙·유리·금속·목재·폴리우레탄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공예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 영국작가 ‘크리스티(Maylee Christie)’가 만든 거대한 저 난(蘭)은 유리와 도자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천처럼 느껴지는 것은 색상과 문양이 동양적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는 유리로 만든 보라색 초롱꽃과 쇠로 만든 나비와 꽃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 목공예품 의자도 보이는데, 예술이라기보다는 생활용품에 가깝다.
▼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은 자동차도 한 대 놓여 있었다.
▼ ‘Khanjyan Hall’은 사진촬영이 불가능하다기에 입구의 그림만 찍어왔다. ‘Gregor Khanjyan(1926-2000)’가 그렸다는데, 아르메니아인들의 삶, 투쟁, 역사를 담았다고 한다. 그림에는 아르메니아의 역사적 인물들 얼굴이 수십 명 그려져 있다고 했다.
▼ 밖으로 나오면 작은 공원을 만난다. 벽면에서 물이 떨어지는 인공폭포(분수로 볼 수도 있겠다)와 마름모꼴의 연못으로 이루어진 앙증맞은 공간은 각종 조각품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 예레반 시가지를 눈에 담아보는 즐거움은 덤이다. 1층과 2층에서는 조각공원과 오페라하우스를 눈앞까지 끌어당겨 볼 수 있다.
▼ 야외 공원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안성맞춤인 모양이다.
▼ 예레반 풍경은 층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고도를 높인 만큼 시야도 역시 넓어지기 때문이다.
▼ 5층 분수대에는 ‘마틴(David Martin)’의 다이버들이 놀고 있었다. 이들은 물에 뛰어들기 직전 몸의 균형을 잡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참! 2층에서는 영국작가 ‘브로이어-웨일(David Breuer-Weil)’의 방문객(visitor)도 만날 수 있었다. 물속에 잠겨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청동으로 표현했다.
▼ 에스컬레이터는 5층까지만 운행한다. 그러므로 맨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6층으로 올라서자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50주년 전승기념탑’이 반긴다. 아르메니아의 소비에트 시대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사람들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 아르메니아는 주변국인 터어키와 아제르바이잔과는 적대관계이고, 러시아와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나라이다. 그래선지 1991년 소련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했지만, 저런 조형물까지 세워가며 우호를 과시하고 있다. 1945년에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했으니 50주년이면 1995년이 된다. 이 탑이 가지는 의미와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 6층에서의 조망은 일망무제 그 자체다. 예레반 시가지가 가장 넓어진 모습으로 펼쳐지는가 하면, 저 멀리 아라라트 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운이라도 좋으면 신기루처럼 다가온 ‘아라라트 산’을 눈에 담을 수 있단다.
▼ 캐스케이드는 현재진행형인 모양이다. 맨 위쪽(6층) 뒤에 철근을 드러낸 채로 멈춰있는 공사장이 눈에 띈다. 맞다. 캐스케이드를 조금 더 확대하려는 계획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와 예술작품 수집·기증에 어려움이 있어 사업이 진척되지 않고 있단다.
▼ 전승기념탑으로 가려면 공사장을 에둘러 내놓은 통로를 따라가야 한다. 이어서 경사진 도로를 한참이나 더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 이쯤에서 캐스케이드를 내려가기로 한 이유다. 그보다는 예레반 시가지를 조금 더 걸어보는 게 낫지 않겠는가.
▼ 자유 시간을 이용해 시내 중심가를 걸어보기로 했다. 예레반은 격자형 가로망을 원형 순환로가 감싸는 형태의 계획도시라고 했다. 그래선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직각의 널찍한 도로가 인상적이다. 이 도시계획은 ‘알렉산더 타마니안’이 담당했다고 한다. 러시아 출신이나 아르메니아에 귀화한 그는 정부청사와 오페라하우스 등을 설계해 국민 건축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 첫 만남은 ‘놀이동산’. 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다양한 놀이기구들을 갖췄다. 하지만주인인 어린이들 대신 데이트 중인 어른들만 눈에 띌 따름이다.
▼ 옆에는 인공호수도 만들어놓았다. 오리배도 여러 척 띄어놓았으나 움직임은 없었다. 그저 어른들 몇 무리가 맥주잔을 앞에 놓고 담소를 즐기고 있을 따름이다. 근처 레스토랑에서 호숫가를 라운지로 삼은 모양이다.
▼ 거리 곳곳에 고급스런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길거리에 의자를 내어놓은 야외카페가 있는가하면 실내를 개방해서 카페로 꾸민 곳도 많았다.
▼ 예레반도 교통체증이 심한가 보다. 신호를 기다리는 차량들이 끝없이 늘어섰는데, 그 뒤에서 ‘아르메니아 어머니상’이 얼굴을 내민다. 원래 저곳에는 스탈린의 동상이 있었는데, 아르메니아 병사들에 의해 파괴되고 그 자리에 받침대 포함 52m의 거대한 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 아르메니아 어머니상까지 다녀오지는 못하고,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을 올려본다. 어머니상은 칼집에서 칼을 빼는 듯 넣는 듯 거대한 칼을 들고 도시 너머 터키국경을 노려보고 있다. 터키와의 아픈 역사로 지금은 평화시기이지만 언제라도 칼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 시가지 풍경. 건물들 대부분이 약간 어두운 핑크빛을 띤다. ‘알렉산더 타마니안’이 설계한 건물들은 저보다 더 확실한 핑크빛을 띠고 있었다. 대부분이 응회암(凝灰巖)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 석재는 화산이 분출할 때 재와 모래가 엉겨서 굳어진 돌로 연한 분홍색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레반을 가리켜 ‘핑크도시’라고 부른다.
▼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백조의 호수(Swan Lake)’라는 인공호수가 잠시 쉬었다가란다. 자그마한 호수인데 깨끗하게 물관리가 되어있고, 물가에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의 ‘아르노 바바자니얀(Arno Babajanyan)’의 동상까지 세워놓았다.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호수 앞 도로를 건너면 보행자 전용 거리인 ‘Tashir Street’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즈음 우린 방향을 잃어버렸고, 우여곡절 끝에 ‘Grand Hotel’을 찾아냈다. 중세 유럽풍의 외관을 지닌 이 호텔은 ‘골든 튜립상’을 여러 번 받았을 정도로 명성이 높단다. 호텔 앞에 있는 근린공원풍의 ‘샤를 아즈나부르 광장(Charles Aznavour Square)’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다. 작은 분수에 조형물들까지 설치해 놓았다.
▼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광장의 분수였다. 쉽게 볼 수 없는 ‘Zodiac Sign’을 형상화 한 조형물들을 빙 둘러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띠처럼 서양 사람들은 12가지의 별자리(양자리, 황소자리, 쌍둥이자리 등)에 생일을 대비해 운세를 본다.
▼ 분수쇼가 펼쳐진다는 ‘공화국 광장’으로 간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가는데, 하나같이 친절하게 가르쳐줘서 별 어려움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 요 삼부자도 그 친절한 시민들 중 하나다. 이렇듯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방인을 위해 기꺼이 손길을 내민다. 국민소득이 낮은 국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문화적 품격이 돋보인다고 할까? 무엇을 흉내 낸 가벼움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만의 자연스러움과 자존감이 스며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르메니아에 다시 가고 싶어 하고, 예레반을 오래 머물고 싶은 도시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 ‘공화국 광장’에 이르니 식수대가 반긴다. 맑은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데 지나다니는 시민들이 스스럼없이 물을 마신다. 맞다. ‘아자트 계곡 주상절리’에서도 얘기했듯이 아르메니아에서는 마음 놓고 물을 마셔도 된다고 했다.
▼ 예레반 투어의 귀결은 ‘공화국 광장’. 이곳에 광장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20년대 ‘알렉산더 타마니안’에 의해서다. 1940년부터 레닌광장으로 불렸고, 1942년 광장 주변에 정부청사가 들어서기 시작해, 1950년대에는 네오클래식 건물들이 사방을 꽉 채우게 된다. 광장 북쪽으로 국립미술관 및 역사박물관, 북동쪽 방향으로는 국토관리부와 정부청사, 남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중앙우체국, 북서쪽으로는 외무성 건물과 에너지 및 천연자원 공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1990년 레닌광장에서 공화국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1년 아르메니아공화국 설립 후 행정부 건물에 대한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으나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 공화국광장은 무엇보다 주변의 붉은빛 건물이 인상적이다. 정열적인 붉은빛이 아니고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붉은빛이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이 건물들은 모두 현무암으로 된 기반 위에 다공질 탄산석회의 침전물인 붉은빛의 아르메니아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 국립미술관과 역사박물관이라고 했다.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아르메니아 미술품 4만 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중 가치 있는 것들을 56개 전시실에 전시하고 있단다. 또한 아르메니아 최대 국립박물관인 역사박물관은 고고학, 인류학, 화폐, 현대사 관련 유물들을 보유 전시하고 있다.
▼ 광장의 자랑거리는 ‘음악분수’이다. 야간에 조명을 하고 클래식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춘다. 우리 부부 역시 이 쇼를 보려고 찾아왔다.
▼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밤 9시부터 펼쳐지는 분수쇼를 보기 위해 예레반 시민들과 관광객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 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 분수쇼는 유럽의 클래식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추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프랑스 국제수상쇼(Aquatique Show International) 회사의 제작으로 2007년부터 운영되고 있는데, 기계·전기·수리 공학적 토대 위에 물 분사, 빛 발사, 음악연주가 결합된 멀티미디어 분수이다.
▼ 음악성, 예술성, 오락성을 갖춘 분수로도 유명하다. 현재는 컴퓨터 공학을 활용해 물과 빛 그리고 음악과 춤이 자동으로 결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단다.
▼ 시간이 없어 가보지는 못했으나,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하는 곳으로 꼽히는 2곳은 인터넷에서 얻어온 사진을 게시해본다. 먼저 ‘아르메니아 대학살 기념탑’이다. 이왕에 왔으니 이 나라의 아픈 상처도 한번쯤은 보듬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터키인들이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발생했다. 1915년 4월 24일, 250여 명의 아르메니아인 지도자를 체포하여 앙카라로 연행한 후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를 필두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진행되었는데, 이때 희생된 희생자 수가 최소 80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추산된단다. 이 참화는 1973년 유엔에 의해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규정됐다. 제노사이드 때 학살을 피한 난민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교포)를 형성했다. 현재 해외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은 800만 명으로 아르메니아 인구보다 많다.
▼ 다른 하나는 ‘아라라트사’에서 운영하는 꼬냑박물관이다. 꼬냑은 프랑스 꼬냑(Cognac) 지방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증류하여 만든 브랜디의 일종으로 꼬냑 지역에서 생산된 술에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다. 바로 아르메니아 ‘아라라트 꼬냑’이다. 199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브랜디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워낙 맛이 뛰어나 프랑스 꼬냑협회의 승인을 받아 유일하게 ‘꼬냑’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한번쯤 들러 맛이라도 봐야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를 시행에 옮기지 못한 난 면세점에 들러 선물용으로 세 병을 챙겨왔다. 이중 한 병은 여행 중 마셨음은 물론이다.
▼ 아르메니아 여행 중 머물렀던 ‘Ani Central Inn’. 근처에 지하철역과 대형 쇼핑센터 타시르(Tashir)가 있고 예레반의 중심인 공화국 광장까지 걸어서 10분이 채 안될 정도로 시내 중심에 있는 호텔이다. 덕분에 저녁 식사 후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쇼핑을 즐길 수 있었다.
▼ 이른 새벽, 아침 입맛도 돋울 겸해서 근처 시가지를 둘러봤다. 이른 아침부터 활기에 넘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편의점조차도 문이 닫혀있어 전체적으로 한적한 풍경을 보여준다. 빵집이 유일하게 문을 열고 있었다고나 할까? 참! 아르메니아의 빵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했으니 여기서는 음식 전반에 대해 살펴보자.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는 음식에서도 라이벌이다. 사실 음식이 맛있기로 소문난 곳은 조지아다. KBS 음식 다큐멘터리 ‘요리 인류’에서도 소개된바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아르메니아 음식이 조지아 음식보다 더 입에 맞는 편이다. 특히 간이 한국인 입맛에 맞는다. 고기를 익힐 때도 그렇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모두 샤슬릭 스타일의 돼지고기 꼬치구이가 유명한데 조지아식은 살코기 위주라 좀 퍽퍽하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꼬들꼬들한 식감을 살리고 비계 부위를 중시해 한국인에게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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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아리랑길
여행일 : ‘24. 8. 31(토)
소재지 : 경남 밀양시 교동·용평동·가곡동·삼문동·내이동 일원
산행코스 : 밀양역관광안내소→천경사→용두보→금시당→월연정→추화산성→천문대→동문고개→영남루→용두교유원지(소요시간 : 12.59km를 4시간 15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밀양시에서 조성한 둘레길로 행정안전부의 ‘친환경 걷는 녹색 길 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아 2013년 조성됐다. 밀양 도심과 인근에 산재한 역사문화 유적지가 하나로 연결돼 있어, 밀양의 옛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걸을 수 있는 도심 속 친환경 산책로이다.
▼ 트레킹 들머리는 밀양역(경남 밀양시 가곡동)
중앙고속도로 남밀양 IC에서 내려와 25번 국도(밀양대로)를 타고 밀양시내로 3km쯤 들어오면 ‘예림교’를 건너게 되고, 곧이어 ‘밀양역’에 이르게 된다.
▼ 순환에 가까운 별개의 3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1코스(6.2km : 읍성-삼문송림-영남루), 2코스(4.2km : 향교-시립박물관-추화산성), 3코스(5.6km : 용두목-금시당-월연정)를 따로따로 돌 수도 있고, 아래 지도처럼 ‘용두교’에서 시작해 연결해가며 걸어볼 수도 있다.
▼ 밀양트레일 도보여행을 위해 ‘밀양역’부터 들른다. 밀양역 앞 ‘밀양종합관광안내소’에서 스탬프 북을 받아 7개 포스트에 비치된 도장을 찍어 제출하면 완주 메달과 인증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증이벤트 참여도 가능하단다. 코스 내 스탬프보관함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필수 해시태그와 함께 SNS에 게시 후 네이버 폼을 작성하면, 추첨을 통해 매달 50여 명에게 ‘아라리쌀’ 등 2만원 상당의 상품을 지급한다. 단, 밀양시민은 완주하더라도 선거법 제112조에 따라 메달과 인증서 등 기념품을 받을 수 없고, SNS 인증이벤트에 당첨돼도 상품을 받을 수 없다.
▼ 실제 출발지인 ‘용두교유원지’. 가곡동과 삼문동을 잇는 ‘용두교’ 아래 화장실까지 갖춘 널따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 11 : 40. ‘밀양강’ 둔치를 따라 동진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밀양아리랑길의 3개 코스 중에서 ‘3코스’에서 시작한다고 보면 되겠다.
▼ 참! 길을 나서기 전에 안내도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나라도 더 많이 가슴에 담고 싶다면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
▼ 11 : 45 : 첫 만남은 ‘징검다리’. 밀양강에 놓인 저 징검다리(상판을 덮었으니 ‘잠수교’로 분류하는 게 옳을 것이다)를 건너면 1코스로 연결된다.
▼ 계속해서 3코스를 따르기로 했다. ‘스탬프 북’에 적힌 7개의 포인트 가운데 두 번째 포스트(첫 번째 도장은 밀양역의 관광안내소에 있다)인 ‘용두보’가 3코스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도장을 찍을 칸도 3코스→2코스→1코스 순으로 배열해 놓았다. 1코스부터 시작할 경우 자칫 길이 헷갈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 11 : 47. 밀양강철교의 교각 아래를 지나간다. 밀양강철교는 ‘개량공사’가 한창이었다. 두 개의 철교(경부선 상하선인 듯) 사이에 새로운 다리를 놓는데, 공사가 끝나면 옛 다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참고로 1904년 일본 강점기 때 만든 저 다리에는 아픈 사연이 서려있다. 교각을 지을 때 사용된 석축이 다름 아닌 조선시대 밀양읍성을 허물어서 나온 돌이었기 때문이다.
▼ 11 : 49. 강기슭이 가파르게 변하는가 싶더니 길이 잔도(棧道)로 변해버린다. 바위벼랑에 선반을 달아매듯 계단을 놓았다. 그것도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써가며 위로 올라간다. 하나 더. 얼마 뒤에는 위로 오르지 않고도 이 구간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 벼랑을 따라 다리 모양의 길은 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 11 : 53.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 ‘천경사’가 반긴다. 대숲 사이로 노란 벽이 인상적인 사찰이다. 탐방로는 이 절간을 오른쪽에 끼고 빙 에둘러간다.
▼ 천경사 일주문. 절벽에 걸터앉은 절간답게 벼랑을 기둥삼아 누각 모양으로 지었다. 절간은 ‘붓다나라 연수원’을 겸하는가 보다. 하지만 1970년대 국제적 무술배우로 활동했던 ‘왕호’씨가 직접 지도한다는 ‘왕호영화예술학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 말고도 미술, 음악, 방송 등 각 분야의 전문 교수진들도 초빙한다고 했는데...
▼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천경사(天鏡寺)’는 용두산 자락의 절벽에 자리한 작은 절이다. 아니 터는 좁지만 크고 작은 전각들이 빼곡히 들어찬 실속 있는 사찰이다. 하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단다. 1988년, 소실되어 이름만 전하던 작은 암자 터에 수원 스님이 중창했다고 한다.
▼ 절간은 밀양강 강변의 비탈진 벼랑에 매달리듯 의지하고 있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크게 활처럼 휜 밀양강과 그 너머 볕 좋은 들녘 ‘암새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밀양강을 가로막고 있는 ‘용두보’도 눈에 들어온다. 강을 ‘한 일(一)’자로 가로막아 물을 모은 다음 수로를 통해 농경지(상남벌) 쪽으로 흘려보내는 거대한 물막이(수리시설)다.
▼ 천경사의 주요 볼거리인 ‘석굴법당’은 찾아보지 못했다. 대웅전 아래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명심보감(明心寶鑑)용 법어(法語)들을 가슴에 새기며 절간을 나선다. ‘다 잘 될거야. 당신이니까’ 등등...
▼ 12 : 03. ‘용두산’ 갈림길(이정표 : 금시당↑ 1.8km/ 산성산↗ 3km/ 용두연주차장↓ 0.7km). 밀양아리랑길은 ‘강변길(금시당 방향)’을 따른다. 용두산의 능선을 따라가다 ‘금시당’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스탬프 북에 도장을 찍고 싶다면 ‘강변길’을 따라가야 한다.
▼ 산성산 등산로안내도. ‘용두산(龍頭山, 116m)’은 산성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자씨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의 형세가 흡사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설화에 따르면, 이무기가 하늘의 복숭아가 담긴 바구니를 몰래 훔쳐 나오다 용두목의 용에게 들켜 싸움이 났다. 그때 엎어진 바구니가 용두산이 되고, 용이 이무기를 치면서 쏟아 부은 물이 밀양강이 됐다고 한다.
▼ 12 : 05. 길은 밀양강 쪽으로 대밭이 길게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 잠시 걷자 ‘용두보’ 갈림길이 반긴다. 두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용두보(龍頭湺)’는 수차 없이 강물을 상남벌의 농업용수로 제공해 주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수리시설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마쓰시타 베이찌로’가 만들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자행된 곡식 수탈의 흔적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도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니 토착왜구들에게는 좋은 얘깃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 ‘용두목’에서 옛 별서 ‘금시당’까지 가는 강변길은 500년 가까이 된 오래된 선비길이다. 조선 선비들이 학문을 닦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오가던 길이었다. 근세에 넘어오면서는 단장면 미촌리와 활성동 주민의 통행로이자 학생들이 등굣길로 이용하던 운치 있는 옛길이기도 했다.
▼ 길 위에서 만난 ‘구단방우(巫岩)’. ‘굿을 하는 바위’라는 뜻의 지명으로 옛날부터 무당들이 이곳에서 굿을 하며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그 굿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모양인지 제단에는 과일과 술 등이 차려져 있었다.
▼ 길은 수직에 가까운 바위지대를 지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다. 처마에 매달린 제비집처럼 잔도(棧道)를 놓아 안전을 도모했음은 물론, 오히려 낭만을 더해주고 있다.
▼ 12 : 16. 길은 ‘중앙고속도로’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이때 밀양강에서 가장 길다는 징검다리를 눈에 담을 수 있다. 호사가들은 저 징검다리를 꼭 건너볼 것을 권한다. 밀양아리랑 노래처럼 경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종종걸음으로 건너는 기분이 색다르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는 다슬기 잡이 삼매경인 아낙네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스치듯 지나간다.
▼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하지만 경사가 완만해 힘들지 않고 걷는 즐거움만 더해준다. 거기다 용두산 나무숲이 오뉴월 햇볕까지 막아주니 이 아니 즐거울 손가.
▼ 숲길 왼쪽에는 밀양강이 흐른다. 덕분에 잠깐 잠깐이지만 밀양강의 물길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하나 더. 저 밀양강은 은어로 유명했었다. 청정수에서 자라 수박향이 강하고 감칠맛도 남달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은어를 찾아볼 수가 없단다. 1987년 완공된 낙동강 하굿둑 탓이다. 어릴 때 바다로 나갔다 다시 하천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길목이 막혀버렸다는 것이다.
▼ 강변길은 인간의 손길을 거부했다. 정비랍시고 지나친 포장을 안했다. 그러다보니 걷는 내내 강물소리와 풀냄새가 따라다닌다. 친환경 탐방로인 셈이다. 그렇다고 탐방객을 위한 배려까지 빼먹지는 않았다. 알록달록 예쁜 색상을 입힌 벤치로도 모자라 아예 드러누울 수 있는 의자까지 배치했다.
▼ 12 : 32.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금시당(今是堂)’이다. 조선 명종 때 좌부승지를 지낸 이광진이 낙향해 지은 ‘별서(別墅 : 현대의 별채·별장과 같은 개념)’로 주변 자연과 멋지게 조화를 이루는 영남지방 선비 가문의 전형적인 정자 건축물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이곳에 세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 금시당(今是堂). 금시당은 이 별서를 지은 이광진(李光軫, 1513-1566)의 호다. 조선 성종 때인 1566년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후손들이 1744년에 복원했다. 이후 1867년에 증축을 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금시당 안에 백곡서원(栢谷書院)도 창건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 하나 더. 고택 옆에 새 한옥을 짓고 후손이 살고 있었다.
▼ 백곡재(栢谷齋). 금시당을 복원한 이지운(李之運, 1681-1763)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인 백곡을 이름으로 삼아 1860년에 지었다. 영조 때 학행으로 이름 높아 교남처사(嶠南處士)로 불렸던 분이다.
▼ 12 : 40. 밀양시 국궁장(國弓場). 이광진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 아래서 잠시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자 국궁장이 나온다. 주말엔 누구나 국궁을 배울 수 있고, 직접 쏴보는 체험(4천원)까지 가능한 곳이다. 이후부터는 ‘밀양강’ 둑길을 따른다.
▼ 12 : 46. 활성교(活成橋). 중앙고속도로 아래를 지나자마지 오른쪽으로 간다(왼쪽은 잠수교를 건너 ‘암새들’로 이어진다). 이어서 ‘활성교’를 건넌다. 주민들에게는 ‘살내다리’로 더 익숙하단다.
▼ 활성교 아래 밀양강변에는 ‘금시당 유원지’가 있다. 여름철이면 많은 야영객들이 물놀이를 즐기는 곳이다. 여름철이 아니더라도 차박(車泊)을 위해 찾아오는 이들로 항상 붐빈다고 했다.
▼ 난간 아래로 펼쳐지는 풍광이 가히 압권이다. 밀양강은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어서 오라 손짓하고, 이웃한 들녘 너머로는 가지산·운문산·억산·구만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우람스레 펼쳐진다.
▼ 12 : 52. 다리를 건넌 다음 ‘벚나무’가로수로 치장된 ‘용평로’를 따라간다. 왼쪽 옆구리에 끼고 왔던 밀양강을 오른쪽 옆구리에 바꿔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 12 : 53. ‘용호정(龍湖亭)’. 조선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둔한 ‘격제(格濟) 손조서(孫肇瑞(1412-?)’를 모시기 위해 ‘일직손씨’ 문중의 묘역 아래에 지은 건축물이다. 주 건물인 정당과 정문격인 심경루(心鏡樓)로 이루어졌는데, 이중 심경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거울처럼 맑은 마음’을 뜻한단다.
▼ ‘호수처럼 잔잔한 강물’을 뜻한다는 용호정(龍湖亭)은 문이 닫혀있어 담장 너머로 곁눈질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편액을 달고 있는 대청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들인 5칸 겹집이다. 참고로 손조서는 집현전학사를 거쳐 병조정랑과 봉산군수를 지냈다. 김종직과 교우했으며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정여창 등이 스승의 예로 섬겼다고 전해진다.
▼ 도로가 1차선으로 바뀌었다. 옛 모습, 그러니까 1905년 건설된 경부선 철도가 놓여있던 시절의 풍경이라고나 할까? 1940년 경부선이 복선화되면서 선로가 다른 곳으로 이설됐고, 철길은 이제 비좁은 일반도로로 변했다.
▼ 안내판은 오른쪽을 ‘활성유원지’라고 했다. 밀양강의 동천수(단장천)와 북천수(밀양강 본류)가 합류하면서 심연을 이루며 넓은 백사장을 만들어놓은 자연발생 유원지라나? 1566년 근재 이경홍이 그린 밀양12경도에도 나타나있는 명소라고 한다.
▼ 13 : 02. 용평터널. 옛 경부선 철도의 또 다른 추억이다. 월연터널 또는 백송터널이라고도 하는데, 폭 3m에 길이는 130m쯤 된다.
▼ 증기기관차가 내뱉은 석탄 연기로 새까맣게 그을렸을 만도한데, 안은 잡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아니 은은한 조명이 터널을 신비롭게까지 만들어준다. 그래선지 사진을 찍으려는 젊은이들이 꽤 많이 보였다. 그들 덕분에 꽤 많은 차량들이 밖에서 기다려야 했지만... 참고로 터널은 일방통행만 가능하다. 때문에 안에 사람이나 차량이 있으면 입구의 전광판에 ‘진입금지’라고 뜨기 때문에 차량 진입이 금지된다.
▼ 이곳은 정우성 주연의 영화 ‘똥개’가 촬영되기도 했다. 그래선지 생뚱맞게도 ‘똥개터널’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나?
▼ 13 : 08. 터널을 피해 강변길을 따라간다. 그러자 또 다른 문화재인 ‘월연정(月淵亭)’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월연정’은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 등을 지낸 월연(月淵) 이태(李迨, 1483-1536)가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직전 벼슬을 버리고 밀양으로 돌아와 지은 쌍경당과 월연대 일원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이 월연대, 왼쪽은 쌍경당 영역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후손들에 의해 쌍경당은 1757년, 월연대는 1866년 복원됐다. 하나 더. 네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이곳 월연정에 설치되어 있다.
▼ 강물과 달이 맑기가 한 쌍의 거울 같다는 ‘쌍경당(雙鏡堂)’. 이태가 세운 월연정(月淵亭)의 건물 중 하나다. 함경도 도사 재직 중 기묘사화를 예견하고 사직·귀향한 이듬해인 1520년 용평의 월영사(月影寺) 옛터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기초를 닦아 건물을 지었단다. 주변 경관을 조망하기 좋도록 방과 대청을 개방형으로 꾸미고 사철 기거할 수 있도록 아궁이를 두었다. 이밖에도 쌍경당 영역에는 제헌(霽軒)이 들어서 있었다. 이태의 맏아들인 이원량(李元亮)을 추모하는 건물로 1956년 지었다. 살림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도 살짝 엿볼 수 있다.
▼ 쌍경당 영역을 빠져나오면 실개천. ‘쌍청교’라는 돌다리를 건너자 배롱나무 꽃무리에 둘러싸인 월연대 영역이다.
▼ 연못에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는 ‘월연대(月淵臺)’는 정자 기능이 두드러지도록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방을 대청으로 둘렀다. 참고로 밀양의 아름다운 경승지 12곳을 일컫는 ‘밀양십이경(密陽十二景)’ 중 하나인 ‘연대제월(淵臺霽月)’은 월연대의 풍광을 가리킨다. 매월 보름이 되면 밀양강에 비친 둥근 달의 모습이 길게 달빛기둥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광경을 월주경(月柱景)이라고 한다나?
▼ 월연대에서의 조망. 밀양강과 단장천이 합수하는 호수 같은 ‘월연(月淵)’의 물결이 거울 표면처럼 맑다. 하지만 웃자란 배롱나무가 아랫도리를 잘라먹어 버렸다. 하나 더. 월연대의 빼어난 승경 12곳을 일컫는 ‘월연대십이경’은 ‘징담제월(澄潭霽月)’을 제일로 치는데, 이는 거울 같은 저 수면에 맑은 달이 비치는 풍광을 묘사한 것이다.
▼ 월연정(月淵亭)은 ‘정자 정(亭)’자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안내판은 우리나라 전통 정원의 하나임을 강조한다. 2012년에는 월연정 일원 전체를 명승(87호)으로 지정까지 했다. 그렇다면 먼저 ‘뜨락 정(庭)’자로 이름부터 바꿔놓아야 하지 않을까?
▼ 월연정의 또 다른 명물이 ‘백송’을 살펴보기로 했다. 백송은 월연대에서 강가로 내려서서 20m쯤 올라가면 나온다. ‘백송나무 가는길(또는 보는곳)’이라고 적힌 팻말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참고로 백송의 나무껍질 색깔은 어릴 때는 회녹색이다가 나무가 자라면서 나무껍질이 계속 벗겨지면서 점점 회백색으로 변해간다. 그리하여 나이가 많이 들면, 껍질이 마치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흰색이 된다고 한다.
▼ 최초의 월연정 백송은 약 500년 전 중국을 다녀온 사신이 가져와 쌍경대 북쪽 축대의 모서리 끝부분에 심었으나 1925년 대홍수 때 뿌리째 뽑혀 고사되었다. 하지만 최초 심었던 백송에서 솔방울이 언덕으로 날아가 자연 발아로 바위틈에 세 그루의 백송이 자랐다. 그중 한 그루는 2014년 태풍으로 고사되었고 현재 수령이 약 280년 된 마지막 한 그루의 백송 나무만이 살아남아 월연정 절벽에서 자라고 있다.
▼ 13 : 20. ‘2코스’와의 접점인 ‘추화산성’으로 가기 위해 등산을 시작한다. 산행은 월연대의 왼쪽(정문 앞)에서 시작된다. 초입에 이정표(추화산봉수대 1,561m/ 활성교 697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산길은 또렷한 편이다. 거기다 밀양아리랑길 엠블럼과 리본이 곳곳에 매달려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되기 때문에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철에는 땀 깨나 쏟아야만 한다.
▼ 13 : 42. 첫 이정표(추화산봉수대 761m/ 월연정 800m). 갈림길도 여럿 만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중요한 포스트에는 이정표를 세웠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엠블럼이나 리본이 길을 안내해 준다.
▼ 13 : 53. 추화산성 남문 터(이정표 : 추화산봉수대 280m/ 월연정 1.28km). 5분쯤 더 걸어 사거리(이정표 : 추화산봉수대 500m/ 섬벌마을 1.5km/ 월연정 1.07km)를 만났다싶으면 곧이어 추화산성(남문 터)에 올라선다.
▼ 밀양아리랑길 안내도가 ‘2코스’와 만났음을 알려준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성황사 유지(밀양손씨 문중 사당)’와 추화산 정상(243m)으로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체력에 한계를 느낀 우리 부부는 이를 생략하고 곧장 추화산성으로 가기로 했다.
▼ 성벽에서의 조망. 밀양시가지와 주변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밀양읍성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으로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 13 : 58 – 14 : 21. 임도처럼 잘 닦인 길을 따라 5분쯤 더 걸으면 ‘추화산성’이다. 하지만 성벽은커녕 성터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분지처럼 널찍한 잔디밭과 건너편 언덕에 걸터앉은 ‘봉수대’가 다라고나 할까? 아니 식탁형의 의자까지 갖춘 멋진 쉼터를 겸하고 있었다. 덕분에 막걸리를 반주삼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 봉화대 맞은편은 ‘추화산(推火山, 243m)’이다. 산 이름은 밀양의 옛 이름인 ‘추화군(推火郡)’에서 유래했다.
▼ 이곳에는 다섯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정표(박물관 1.1km/ 월연정 1.5km)와 추화산성 안내판도 눈에 띈다. 추화산 정상 부분을 빙 둘러싼 산성인데,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보아 신라와 가야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던 시기에 만들어져 조선시대 전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단다. 특이한 것은 축성 초기에는 ‘읍성(邑城)’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저 아래 들녘에서 농사짓던 백성들은 어떻게 이곳까지 왕래하며 살아갔을까?
▼ 시야가 툭 터지는 민둥봉우리는 ‘봉수대’가 올라앉았다. 봉수제도가 국법으로 확립된 고려시대(1149년)에 설치되어 갑오개혁(1894년)으로 봉수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가락국의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할 때 봉화로 신호했다는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봉수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 봉수대의 특징대로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높고 낮은 주변의 산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들어온다. 영남좌도연제 제2거서노선의 간봉선에 해당하는 주화산 봉수는 김해 성화예산에서 봉기, 분산·자암산·밀양백산남산을 거쳐 온 봉수를 경북 청도남산으로 전달했단다.
▼ 14 : 27. 하산을 시작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하지만 나선형으로 만들어놓은 침목계단의 아름다운 곡선이 힘들다는 느낌까지 싹 날려버린다.
▼ 산길은 한마디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쓰레기는 물론이고 잡초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잡초 대신 지자체에서 이식해놓은 맥문동 등의 꽃들이 곳곳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 탐방객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벤치마다 부채를 비치해두는 친절까지 베풀고 있다.
▼ 14 : 45.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사거리(이정표 : 천문대 130m/ 추화산성 760m/ 좌우는 아리랑고갯길)가 나온다.
▼ 이곳에는 출향인들을 위한 ‘쓰리랑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고향을 떠나있는 출향인들에게 고향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 숲의 특징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아닐까 싶다. 편백나무, 산수유, 산사나무, 매화나무 등 심어놓은 나무들마다 기증한 사람이나 단체의 이름이 일일이 표시되어 있었다.
▼ 건너편에는 ‘밀양아리랑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월남전참전비(사진)과 충혼탑도 세워져 있단다. 하지만 정규탐방로에 벗어나있어 들러보지는 않았다.
▼ 14 : 52. 여섯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된 ‘밀양아리랑 우주천문대’. 국내 최초로 ‘외계 행성·생명’이라는 특화된 주제의 과학 체험공간으로 조성되었으며, 관측실·천체투영관·전시체험실 등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4층 주관측실에서는 세계 최초 음성인식 제어시스템이 설치된 70cm 구경의 고성능 망원경 ‘별이’로 천체를 관측할 수 있다.
▼ 14 : 56. 천문대를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간다. 이때 밀양성당을 스치듯 지나간다.
▼ 14 : 58. 오른쪽에는 밀양시립박물관이 있었다. 밀양시립박물관은 1974년 ‘밀양군립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1993년 고고학 전문박물관으로 되었고, 2008년에는 이곳 교동으로 이전·개관했다. 상설전시실(역사실·민속실·유학실·서화실)과 화석전시관, 독립기념관 등을 거느리고 있다.
▼ 갖가지 조형물들로 치장된 광장을 지나자 ‘박물관’이 반긴다. 삼한시대(변한) 미리미동국으로 불린 이래 오늘날 밀양시에 이르기까지 밀양지역의 풍성한 역사·문화 사료를 담고 있는 곳이다. 밀양아리랑 같은 민속놀이뿐 아니라 밀양의 유학자, 선비의 사랑방, 조선시대의 서화와 같은 특색 있는 전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 밀양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영남지역 최초로 일어난 3·13 밀양 만세의거,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창단, 23회에 걸친 의열투쟁 등 수많은 항일 독립투쟁이 이곳 밀양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선지 박물관 안에 ‘독립운동기념관’을 별도로 두었는가 하면, 밀양시 출신 독립운동가 36인의 흉상이 둘러싸고 있는 조형물(선열의 불꽃 : 변건호 작품), 독립의열사숭모비, 파리장서비 등을 광장에 설치해 놓았다.
▼ 15 : 07. 박물관을 빠져나오면 ‘밀양대공원로’. 밀양읍성을 향해 왼쪽으로 간다. 오른쪽에 밀양향교와 손씨고가(孫氏古家)라는 문화재가 있으나, 약속된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참! 선답자의 GPX트랙도 두 문화재를 건너 뛴 채로 진행하고 있었다.
▼ 15 : 21. 15분쯤 걷다가 만난 로터리에서는 오른쪽 3시 방향이다. 이어서 ‘용평로’를 따라 ‘동문고개’로 올라간다.
▼ 15 : 26. ‘동문고개’. 고갯마루에는 밀양읍성(密陽邑城)의 동문이 들어섰다. 최근 복원된 동문은 크고도 견고한 것이 중국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었다. 가히 난공불각의 요새라고나 할까?
▼ ‘2020 공공미술프로젝트’ 혜택을 본 밀양읍성은 갖가지 조형물들로 치장됐다. 참고로 ‘밀양읍성’은 성종 10년(1479년)에 축조됐다. 대부분의 읍성이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밀양읍성은 100년 이상 일찍 만들어졌다. 높이 4.2m에 둘레가 2.2km인 성곽은 옹성(甕城)·치성(雉城)·해자(垓子)까지 갖췄었다고 한다. 하지만 1902년 성문과 성벽이 헐려 경부선 철도부설 공사에 사용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 15 : 29. 성곽으로 올라가는 진입로. 길섶의 ‘붉노랑상사화’가 꽃망울을 활짝 열어젖혔다.
▼ 상사화는 꽃과 잎이 다른 시기에 피어 만날 수 없는 연인에 빗대어 표현된다. 그래서 꽃말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됐다. 꽃은 잎을 생각하고, 잎도 꽃을 생각하지만 서로 만날 수 없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 성곽을 따를 경우 만나게 되는 무봉대(舞鳳臺). 길을 달리 들었기 때문에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왔다.
▼ 첨부된 지도(부산일보의 안내도도 같다)는 읍성의 성곽을 따라 ‘영남루’로 간다. 하지만 아리랑길 표식은 반대편(해발 88.1m의 ‘아동산’을 가운데 두고)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이 길을 따른 탓에 우리는 명소 몇 곳을 둘러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 15 : 35. 밀양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영남루’에 이른다. 일곱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그건 그렇고 누각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왼쪽 언덕에는 작곡가 박시춘(1913-1996)의 생가가 있었다. 박시춘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시기에 유행가 3000여 곡을 지었다. ‘애수의 소야곡’, ‘비단장사 왕서방’, ‘굳세어라 금순아’, ‘신라의 달밤’, ‘봄날은 간다’ 등 하나하나가 당대를 풍미했다. 많은 사람들이 술집에서 노래방에서 그의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일제의 패색이 짙어진 1943년 이후 학도병 참여를 권유하는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아내’ 같은 노래를 지어 친일논란에 휩싸이기도 한다.
▼ ‘영남루(嶺南樓 : ‘國寶’로 지정되어 있다)’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3대 누각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로 꼽히는데, 신라 경덕왕(742년-765년) 때 신라 5대 명사 중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 누각으로 세워졌다. 화재·전쟁으로 몇 차례 소실됐다가, 1844년 밀양부사 이인재가 중건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하나 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누각은 기둥과 기둥 사이가 넓고, 땅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마루를 만들어 누각 자체가 시원하고 웅장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누각의 다양한 현판들도 주요 볼거리다. ‘강성여화(강과 밀양읍성이 한데 어우러져 그림과 같다)’ ‘용금루(높은 절벽에 우뚝 솟은 아름다운 누각)’, ‘고남명루(문경새재 이남의 이름 높은 누각)’ 등 하나같이 영남루의 아름다움과 명성을 찬양하는 것들이다.
▼ 누각 끝으로 발길을 옮기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만큼이나 가슴도 확 트인다. 육지 속의 섬 ‘삼문동’과 이를 에돌아나가는 물줄기가 어우러지며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낸다.
▼ 널따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맞은편에는 ‘천진궁(天眞宮)’이 들어서 있었다. 천진궁은 단군을 비롯한 역대 왕조 시조들이 배향된 사당이다. 조선 효종 때 건립됐으며, 원래는 객사(공진관)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을 비롯한 역대 왕조를 세운 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역할을 하고 있다.
▼ 단군(檀君)으로 여겨지는 신상(神像). 곁을 지키고 있는 빗돌은 ‘태상노군(太上老君). 칠원성군(七元星君), 삼신제왕(三神帝王)’이라 적었다. 우리네 시조가 이들의 직위를 겸한다는 얘기일까?
▼ 마당에서는 ‘밀양향토예술단’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밀양백중놀이, 무안용호놀이, 감내게줄당기기, 밀양법흥상원놀이, 작약산예수제 등 밀양의 무형유산을 매월 첫째·셋째 주 토요일에 번갈아가며 보여준단다.
▼ 영남루 근처에는 다른 문화재들도 여럿 있다. 천년고찰 무봉사(舞鳳寺)도 그중 하나지만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다. 발품만 조금 더 팔면 아랑각(조선 명종때 정절을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은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모신 사당)이나 밀양이 낳은 역사적 인물인 사명대사 유정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 15 : 52. 수변공원길로 가기 위해서는 돌계단을 내려서야 한다. 그런데 이 계단이 특이한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계단으로도 이용할 수 있고 지그재그로 걸으면 경사로로 이용할 수 있다. 휠체어나 자전거, 캐리어 등도 다닐 수 있는 무장애 탐방로라고나 할까? 그래선지 위에서 내려다보면 심오함을 담은 조형작품을 연상시킨다.
▼ 15 : 54. ‘밀양교’를 건너 ‘삼문동(三門洞)’으로 간다. 서울로 치면 ‘여의도’이다. 오래 전 이곳 ‘삼문동’은 강 건너 ‘가곡동’과 붙어 반도모양 지형을 이루고 있었단다. 그러다 1920년대의 대홍수가 반도의 허리를 끊어버렸고, 저곳 삼문동은 섬 아닌 섬이 되어버렸다.
▼ 영남루 앞, 밀양강의 둔치는 숫제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그 앞으로 흘러가는 강물이 영남루를 두고 떠나는 것이 아쉬운지 흐르지 않고 멈추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라며 아리랑 소리를 자아내는 듯하다.
▼ 15 : 56. 다리 건너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하긴 이처럼 온전하게 영남루를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선지 글자조형물을 세워 포토죤까지 겸하도록 했다.
▼ 아까도 얘기했듯이 밀양강의 본류가 바뀌면서. 물길을 잃은 영남루의 풍치는 내세울 게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만들어 놓은 게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징검다리가 놓인 ‘보(湺)’다. 보를 막아 밀양강의 물을 가둠으로써 예전처럼 영남루 앞이 물로 넘실거리게 만든 것이다. 아무튼 물길 너머 영남루는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맞다. 저런 풍광이 있었기에 옛날부터 수많은 명사가 찾아왔을 것이고, 그럴듯한 시들을 남겼을 것이다. 영남루에 걸린 수많은 시판(詩板)이 그 증거다. 당대 최고의 인플루언서들이 핫플레이스를 찾았다가 일종의 ‘리뷰’를 남긴 셈이다.
▼ 전망대 앞에서는 ‘밀양아리랑 아트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밀양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장르의 젊은 작가들이 임시 공방을 열고 있다. 일단은 체험을 해보고 마음에 들 경우 구입하면 된다는 얘기다.
▼ 15 : 58. 공방 몇 곳을 기웃거리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밀양강 제방을 따라간다. 둑 위에 차도가 부럽지 않을 만큼 널찍하니 산책로가 나있다.
▼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던 밀양강 둔치가 언제부턴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바뀌었다. 산림유전자 보호림으로 지정된 ‘삼문송림’으로 약 2ha에 이르는 면적에 수령이 100년도 넘는 곰솔 2000여 그루가 울창하다. 소나무 아래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여름이면 맥문동, 가을이면 구절초가 만발한단다. 참고로 이곳 송림공원은 조선시대 말엽 고종 때 밀양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방수림으로 조성됐다.
▼ 16 : 10. 송림공원의 끄트머리에서 둔치로 내려서니 ‘이재금 시비’가 반긴다. 밀양 출신 이재금(1941-1997) 시인의 시 ‘도래재’가 적혀있다.
▼ 16 : 15. 보(湺) 위에 놓은 징검다리(뚜껑을 덮었으니 엄밀한 의미의 징검다리는 아니다)를 건너면 용두교유원지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 15분을 걸었다. 앱이 12.59km를 찍고 있으니 ‘추화산’을 올랐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라 많았다는 얘기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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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아르메니아 – 가르니 신전
여행일 : ‘23. 5. 31(수) - 6. 12(월)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①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③ 가르니 신전Garni Temple) : 예레반에서 남동쪽으로 32km쯤 떨어진 코타이크(Kotayk) 지방에 있는 신전. BC 3세기 요새로 지어졌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BC 1세기 아르메니아 왕 ‘트리다테스 1세(Tiridates I)’가 네로황제의 후원을 받아 태양신 미트라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했다.
▼ 아자트 협곡 위에 형성된 ‘가르니 마을’에서 투어를 시작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10분쯤 걷자 목적지인 ‘가르니 신전’이 나온다. 참고로 가르니 지역이 역사에 나오는 것은 기원전 8세기 우라르트(Urart) 왕국 때부터라고 한다. 이후 기원전 3세기 오론트(Oront) 왕국 때 이곳에 왕의 여름궁전이 지어졌다.
▼ 수도인 예레반에서 가깝기 때문에 당일치기 투어가 가능하다. 7k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게하르트 수도원’과 ‘가르니 신전’이 걸터앉은 아자트 협곡의 세상에서 가장 큰 주상절리를 한데 묶어 투어를 진행하는 게 보통이다.
▼ 입장권을 사서 안으로 들어온다. 저렇게 견고한 성벽(지금은 성문에 문짝도 없지만)이 있었기에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평을 들었을 것이다. 참고로 기원후 1세기 이베리아(Iberia) 왕조의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 AD 32-51) 왕과 그의 가족이 양자이자 조카였던 라다미스투스(Rhadamistus)에 의해 암살당한 후부터 이곳은 왕궁보다는 성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신전은 동·서·남이 절벽으로 차단되고, 북쪽으로만 접근이 가능한 천연의 요새다. 높이 6-8m(두께 2-3m)에 길이 374m인 성벽에는 14개의 망루 겸 탑까지 있었다고 한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원형을 너무 많이 상실했다는 이유로 등재에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래 문장을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떡 거린다. 유네스코에서 선정하는 ‘문화경관의 보호와 관리를 위한 그리스 멜리나 메르쿠리 국제상(Greece Melina Mercouri International Prize for the Safeguarding and Management of Cultural Landscapes)’을 수상했다는 것이다. 대상자는 ‘가르니 역사문화박물관(Historical and Cultural Museum-Reservation of Garni)’이고 말이다. 참고로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 1920-1994)’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정치활동가로 문화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약탈문화재 반환 등 문화재보호 활동에 큰 족적을 남겼다.
▼ 다른 안내판은 1945년 가르니 마을의 공동묘지에서 발견했다는 비문을 소개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 화가 ‘마르티로스 사얀(Martyros Saryan)’이 발견한 이 비문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리다테스 1세(66-88, 재위 년도인 듯)’가 기원후 77년에 난공불락의 요새(복원이었을 게다)와 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 안내판이 전하는 ‘헬라어 비석’은 북쪽 성벽의 문(조금 전 들어온) 맞은편에 놓여있었다. 빙 둘러 쳐놓은 금줄에서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이 유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 그렇다고 꼬맹이의 호기심까지 막을 수 있겠는가. 아니 저 소년은 지금 음각되어 있는 메시지와 교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르메니아의 위대한 왕인 티리다테스가 즉위 11년 만에 신전과 함께 난공불락의 요새를 지었다.’는...
▼ 탐방로를 야외 박물관으로 삼은 모양이다. 출토된 유물들을 좌대까지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복원 과정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것들이지 싶다. 그렇다고 허투루 대할 수는 없었을 테고.
▼ 찰떡궁합을 이루는 것들도 눈에 띈다. 성곽이니 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을 게다. 그러니 어디선가 물을 끌어왔을 테고, 성 안에는 크고 작은 물길이 거미줄처럼 퍼져있었을 것이다.
▼ 조금 더 들어가면 천 길 낭떠러지에 위태롭게 걸터앉은 ‘가르니 신전’이 얼굴을 내민다. 1세기 후반 아르사스 왕조의 ‘티리다테스(Tiridates) 1세’가 지었다는 태양신 미르(Mihr)에게 바치는 이오니아식 신전이다. 왕은 신전과 함께 왕비를 위한 궁전 겸 성채도 건축했다고 한다.
▼ 신전은 아르메니아가 로마에 속하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네로황제의 후원을 받아 태양신 미트라(Mitra, 혹은 Mihr)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했다. 때문에 ‘가르니 태양신전’으로 불리기도 한다나?
▼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닮은 신전은 아르메니아 장인들이 어떻게 전통적인 그리스·로마식 신전 디자인을 변형해 받아드렸는가를 보여준다고 했다. 신전 외부는 둥근 기둥으로 둘러싼 이오니아 양식의 그리스·로마 사원 형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만든 반면, 건축자재는 대리석 대신 현무암을 사용했다. 내부 장식은 이 지역이 로마의 문화를 수용했다는 증거로 포도와 석류 등의 장식을 풍부하게 사용했으며, 로마 이전 시기에 성행했던 황소와 사자의 모티브 장식도 많이 나타나고 있단다.
▼ 신전은 기독교가 공인된 4세기 초반 티리다테스 3세 때 호스로비둑트의 여름궁전으로 변신했단다. 그러다 8-9세기경에는 궁전과 교회(Saint Sion), 목욕탕이 들어선 복합단지로 변한다. 하지만 1386년 티무르제국의 침입과 1679년의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고, 이후 동서로 분열된 아르메니아가 이란과 튀르키에의 지배를 받으면서 잊혀졌다. 그러다 20세기 초·중엽의 발굴과정을 거쳐, 1968-1976년 건축가 사히냔(Sahinyan)의 주도로 발굴 부자재를 활용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본래 것이 66%가 되지 않아 세계문화유산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 정면 6개 측면 8개의 원형 기둥이 우뚝하다. 기둥의 상부 주두(柱頭)는 이오니아식으로 되어 있다. 그 위로 면석과 장식벽 그리고 천장받침이 있다. 식물문양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는 벽은 프리즈 형태로 연결된다. 천장받침 위로 삼각형 모양의 박공과 지붕이 보인다. 박공은 민무늬이다. 부조장식이 있었을 게 확실하지만 이에 맞는 부자재를 찾아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대신 용마루에는 화려한 장식의 조각품을 올려놓았다.
▼ 신전 파사드(facade). 주워 모은 부자재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추어나간 흔적들이 감탄보다는 오히려 짠하게 느껴졌다면 나 혼자만의 오해였을까?
▼ 내부에는 전실이 있고, 그 안쪽에 신과 만나는 기도공간을 만들었다. 지붕과 벽이 있는 건물 형태로 만들어진 신실(神室)이다. 제단과 지성소는 그 안에 있었을 것이다.
▼ 아르메니아 교회당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천장을 뚫어 만든 구멍, 즉 예르디크(Yerdik)를 꼽을 수 있다. 이 구멍은 환기와 더불어 내부를 밝히는 역할까지 해준다. 그런데 그리스·로마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가르니신전도 천정에 구멍을 뚫어놓지 않았겠는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로마의 판테온에서도 저런 구멍을 봤다는 기억을 소환해내면서 그만 수긍하기로 했다.
▼ 신전을 빠져나오자 건물 터가 나온다. 역사는 AD 897년 신전 근처에 2층으로 된 여름 궁전을 추가로 지어졌다고 전한다. 아니 목욕탕과 교회 등이 함께 들어선 커다란 복합지구를 형성했단다. 하지만 모진 세월을 이겨내지 못한 채 지금은 저렇게 터만 남아있다.
▼ 원통형으로 생긴 이 터에 ‘성 시온교회(St. Sion Church)’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완전히 파괴된 탓에 원형의 벽과 내부 구조만 확인해 볼 수 있다.
▼ 안내판은 이 일대를 ‘왕궁’으로 적고 있었다. 아치형의 큰 홀을 가진 2층 건물이었을 것이란다. 그밖에도 꽤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나, 술을 좋아하는 내 관심은 포도주를 만들던 시설에 대한 설명에 꽂히고 있었다.
▼ 지대가 조금 높은 곳으로 가면 ‘목욕탕’ 유적이 나온다. 3세기에 지어진 로마식 목욕탕으로 왕실 여름궁전의 부속시설이지 싶다. 목욕탕은 바닥의 모자이크화와 난방시설 일부가 남아 있어, 아르메니아 왕실의 목욕문화와 목욕탕의 역사를 알려준다.
▼ 목욕탕은 건물 상부가 없어져 정확한 외관은 알 수 없다. 현재의 지붕은 복원과정에서 유적지 보호를 위해 씌워놓은 것이다.
▼ 하지만 일부 벽과 배관, 바닥의 모자이크화가 남아 있기 때문에, 목욕 시스템과 평면구조는 어느 정도 짐작된다고 했다.
▼ 목욕탕은 네 개의 연속된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 쪽 방이 탈의실 겸 전실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방은 열탕과 온탕으로 여겨진다.
▼ 방은 한쪽 벽에 반원형의 공간을 할애해 보일러 시설을 만들었다. 지면 위에 지름이 20-25cm 되는 원통형의 배관 기둥을 세우고, 배관을 통해 뜨거운 물과 증기를 목욕탕으로 공급하는 구조다. 때문에 목욕탕은 배관 위에 평평하게 만들어졌다.
▼ 네 번째 방의 바닥에는 1953년에 발견되었다는 2.9x2.9m 크기의 모자이크화가 있다. 그래선지 전문가들은 이곳을 휴게실로 분류하고 있었다.(사진 상태가 좋지 않아 인터넷에서 빌려왔다)
▼ 모자이크화는 사각형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Oceanus)’와 바다의 여신 ‘탈라사(Thalassa)’로 추정되는 두 신을 그려 넣었다. 남신은 뿔이 달린 댕기 머리를 하고, 여신은 긴 머리에 아름다운 눈을 갖고 있다. 머리 위에 적힌 두 줄의 헬라어는 ‘우리는 열심히 일했지만 얻은 게 없다’로 번역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건축에 동원된 예술가들이 보수를 받지 못한데 대한 항의 표시로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 바다의 여신 ‘테티스(Thetis)’라고 했다. 그 아래에는 돌고래가 그려져 있다. 이들 주변으로 물고기나 굴 같은 바다생물과 그물을 던지는 어부와 선원이 묘사되어 있다. 반인반수의 켄타우로스와 반인반어인 인어도 보인다. 하나 더, 누군가는 이 모자이크를 설명하면서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의 실생활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모자이크를 만든 이들이 지중해 도시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 안내판은 이곳이 ‘가르니 왕실목욕탕’이었음을 알려준다. 가르니 왕궁의 다른 건물들과 같은 재료와 기술로 지어졌으며,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천장 회반죽의 파편들로 보아 둥근 형태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그밖에도 목욕탕의 제작시기, 구조, 가열방법, 모자이크에 대한 설명 등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 ‘가르니 요새’는 난공불락이라고 했다. 북쪽의 성벽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이 천 길의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요새(가르니 신전) 곳곳에서 멋진 조망을 즐길 수 있다. 발아래로 아까 둘러봤던 ‘아자트 계곡의 주상절리’가 광활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다리품만 조금 더 팔면 계곡으로 내려가 볼 수도 있다.
▼ 절벽위에 들어선 마을이 보기만 해도 아찔하게 만든다. 문득 스페인을 여행하다 만났던 절벽 위의 도시 ‘론다(Ronda)’가 생각난다. 당시도 건너편 절벽 위에 위태위태하게 들어선 하얀색 일색의 구시가지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하긴 소설가 헤밍웨이는 그런 풍경에 반해 호텔 ‘론다 파라도르(Parador de Ronda)’에 머물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다지만...
▼ ‘wines upona time’. 조망을 즐기며 돌아다니다 와인역사박물관에 대한 안내판도 만날 수 있었다. 와인의 역사를 ‘노아의 방주’까지 끌고 올라가며 ‘와인 종주국’임을 고집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안내판이라고나 할까?
▼ 옆에는 ‘가르니 요새(The fortress of Garni)’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기원전 3세기에 지어졌을 것이라며, 요새가 소개되어 있는 각종 문헌의 저자와 내용 및 성곽의 구조에 대해 자세히 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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