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546)

밀양아리랑길

 

여행일 : ‘24. 8. 31()

소재지 : 경남 밀양시 교동·용평동·가곡동·삼문동·내이동 일원

산행코스 : 밀양역관광안내소천경사용두보금시당월연정추화산성천문대동문고개영남루용두교유원지(소요시간 : 12.59km 4시간 15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밀양시에서 조성한 둘레길로 행정안전부의 친환경 걷는 녹색 길 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아 2013년 조성됐다. 밀양 도심과 인근에 산재한 역사문화 유적지가 하나로 연결돼 있어, 밀양의 옛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걸을 수 있는 도심 속 친환경 산책로이다.

 

 트레킹 들머리는 밀양역(경남 밀양시 가곡동)

중앙고속도로 남밀양 IC에서 내려와 25번 국도(밀양대로)를 타고 밀양시내로 3km쯤 들어오면 예림교를 건너게 되고, 곧이어 밀양역에 이르게 된다.

 순환에 가까운 별개의 3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1코스(6.2km : 읍성-삼문송림-영남루), 2코스(4.2km : 향교-시립박물관-추화산성), 3코스(5.6km : 용두목-금시당-월연정)를 따로따로 돌 수도 있고, 아래 지도처럼 용두교에서 시작해 연결해가며 걸어볼 수도 있다.

 밀양트레일 도보여행을 위해 밀양역부터 들른다. 밀양역 앞 밀양종합관광안내소에서 스탬프 북을 받아 7개 포스트에 비치된 도장을 찍어 제출하면 완주 메달과 인증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증이벤트 참여도 가능하단다. 코스 내 스탬프보관함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필수 해시태그와 함께 SNS에 게시 후 네이버 폼을 작성하면, 추첨을 통해 매달 50여 명에게 아라리쌀  2만원 상당의 상품을 지급한다. , 밀양시민은 완주하더라도 선거법 제112조에 따라 메달과 인증서 등 기념품을 받을 수 없고, SNS 인증이벤트에 당첨돼도 상품을 받을 수 없다.

 실제 출발지인 용두교유원지’. 가곡동과 삼문동을 잇는 용두교 아래 화장실까지 갖춘 널따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11 : 40. ‘밀양강 둔치를 따라 동진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밀양아리랑길의 3개 코스 중에서 ‘3코스에서 시작한다고 보면 되겠다.

 ! 길을 나서기 전에 안내도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나라도 더 많이 가슴에 담고 싶다면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

 11 : 45 : 첫 만남은 징검다리’. 밀양강에 놓인 저 징검다리(상판을 덮었으니 잠수교로 분류하는 게 옳을 것이다)를 건너면 1코스로 연결된다.

 계속해서 3코스를 따르기로 했다. ‘스탬프 북에 적힌 7개의 포인트 가운데 두 번째 포스트(첫 번째 도장은 밀양역의 관광안내소에 있다) 용두보 3코스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도장을 찍을 칸도 3코스2코스1코스 순으로 배열해 놓았다. 1코스부터 시작할 경우 자칫 길이 헷갈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11 : 47. 밀양강철교의 교각 아래를 지나간다. 밀양강철교는 개량공사가 한창이었다. 두 개의 철교(경부선 상하선인 듯) 사이에 새로운 다리를 놓는데, 공사가 끝나면 옛 다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참고로 1904년 일본 강점기 때 만든 저 다리에는 아픈 사연이 서려있다. 교각을 지을 때 사용된 석축이 다름 아닌 조선시대 밀양읍성을 허물어서 나온 돌이었기 때문이다.

 11 : 49. 강기슭이 가파르게 변하는가 싶더니 길이 잔도(棧道)로 변해버린다. 바위벼랑에 선반을 달아매듯 계단을 놓았다. 그것도 왔다갔다 갈 지()’자를 써가며 위로 올라간다. 하나 더. 얼마 뒤에는 위로 오르지 않고도 이 구간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 벼랑을 따라 다리 모양의 길은 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11 : 53.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 천경사가 반긴다. 대숲 사이로 노란 벽이 인상적인 사찰이다. 탐방로는 이 절간을 오른쪽에 끼고 빙 에둘러간다.

 천경사 일주문. 절벽에 걸터앉은 절간답게 벼랑을 기둥삼아 누각 모양으로 지었다. 절간은 붓다나라 연수원을 겸하는가 보다. 하지만 1970년대 국제적 무술배우로 활동했던 왕호씨가 직접 지도한다는 왕호영화예술학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 말고도 미술, 음악, 방송 등 각 분야의 전문 교수진들도 초빙한다고 했는데...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천경사(天鏡寺)’는 용두산 자락의 절벽에 자리한 작은 절이다. 아니 터는 좁지만 크고 작은 전각들이 빼곡히 들어찬 실속 있는 사찰이다. 하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단다. 1988, 소실되어 이름만 전하던 작은 암자 터에 수원 스님이 중창했다고 한다.

 절간은 밀양강 강변의 비탈진 벼랑에 매달리듯 의지하고 있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크게 활처럼 휜 밀양강과 그 너머 볕 좋은 들녘 암새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밀양강을 가로막고 있는 용두보도 눈에 들어온다. 강을 한 일()’자로 가로막아 물을 모은 다음 수로를 통해 농경지(상남벌) 쪽으로 흘려보내는 거대한 물막이(수리시설).

 천경사의 주요 볼거리인 석굴법당은 찾아보지 못했다. 대웅전 아래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명심보감(明心寶鑑)용 법어(法語)들을 가슴에 새기며 절간을 나선다. ‘다 잘 될거야. 당신이니까 등등...

 12 : 03. ‘용두산 갈림길(이정표 : 금시당 1.8km/ 산성산 3km/ 용두연주차장 0.7km). 밀양아리랑길은 강변길(금시당 방향)’을 따른다. 용두산의 능선을 따라가다 금시당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스탬프 북에 도장을 찍고 싶다면 강변길을 따라가야 한다.

 산성산 등산로안내도. ‘용두산(龍頭山, 116m)’은 산성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자씨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의 형세가 흡사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설화에 따르면, 이무기가 하늘의 복숭아가 담긴 바구니를 몰래 훔쳐 나오다 용두목의 용에게 들켜 싸움이 났다. 그때 엎어진 바구니가 용두산이 되고, 용이 이무기를 치면서 쏟아 부은 물이 밀양강이 됐다고 한다.

 12 : 05. 길은 밀양강 쪽으로 대밭이 길게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 잠시 걷자 용두보 갈림길이 반긴다. 두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용두보(龍頭湺)’는 수차 없이 강물을 상남벌의 농업용수로 제공해 주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수리시설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마쓰시타 베이찌로가 만들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자행된 곡식 수탈의 흔적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도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니 토착왜구들에게는 좋은 얘깃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용두목에서 옛 별서 금시당까지 가는 강변길은 500년 가까이 된 오래된 선비길이다. 조선 선비들이 학문을 닦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오가던 길이었다. 근세에 넘어오면서는 단장면 미촌리와 활성동 주민의 통행로이자 학생들이 등굣길로 이용하던 운치 있는 옛길이기도 했다.

 길 위에서 만난 구단방우(巫岩)’. ‘굿을 하는 바위라는 뜻의 지명으로 옛날부터 무당들이 이곳에서 굿을 하며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그 굿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모양인지 제단에는 과일과 술 등이 차려져 있었다.

 길은 수직에 가까운 바위지대를 지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다. 처마에 매달린 제비집처럼 잔도(棧道)를 놓아 안전을 도모했음은 물론, 오히려 낭만을 더해주고 있다.

 12 : 16. 길은 중앙고속도로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이때 밀양강에서 가장 길다는 징검다리를 눈에 담을 수 있다. 호사가들은 저 징검다리를 꼭 건너볼 것을 권한다. 밀양아리랑 노래처럼 경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종종걸음으로 건너는 기분이 색다르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는 다슬기 잡이 삼매경인 아낙네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스치듯 지나간다.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하지만 경사가 완만해 힘들지 않고 걷는 즐거움만 더해준다. 거기다 용두산 나무숲이 오뉴월 햇볕까지 막아주니 이 아니 즐거울 손가.

 숲길 왼쪽에는 밀양강이 흐른다. 덕분에 잠깐 잠깐이지만 밀양강의 물길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하나 더. 저 밀양강은 은어로 유명했었다. 청정수에서 자라 수박향이 강하고 감칠맛도 남달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은어를 찾아볼 수가 없단다. 1987년 완공된 낙동강 하굿둑 탓이다. 어릴 때 바다로 나갔다 다시 하천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길목이 막혀버렸다는 것이다.

 강변길은 인간의 손길을 거부했다. 정비랍시고 지나친 포장을 안했다. 그러다보니 걷는 내내 강물소리와 풀냄새가 따라다닌다. 친환경 탐방로인 셈이다. 그렇다고 탐방객을 위한 배려까지 빼먹지는 않았다. 알록달록 예쁜 색상을 입힌 벤치로도 모자라 아예 드러누울 수 있는 의자까지 배치했다.

 12 : 32.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금시당(今是堂)’이다. 조선 명종 때 좌부승지를 지낸 이광진이 낙향해 지은 별서(別墅 : 현대의 별채·별장과 같은 개념)’로 주변 자연과 멋지게 조화를 이루는 영남지방 선비 가문의 전형적인 정자 건축물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이곳에 세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금시당(今是堂). 금시당은 이 별서를 지은 이광진(李光軫, 1513-1566)의 호다. 조선 성종 때인 1566년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후손들이 1744년에 복원했다. 이후 1867년에 증축을 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금시당 안에 백곡서원(栢谷書院)도 창건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 하나 더. 고택 옆에 새 한옥을 짓고 후손이 살고 있었다.

 백곡재(栢谷齋). 금시당을 복원한 이지운(李之運, 1681-1763)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인 백곡을 이름으로 삼아 1860년에 지었다. 영조 때 학행으로 이름 높아 교남처사(嶠南處士)로 불렸던 분이다.

 12 : 40. 밀양시 국궁장(國弓場). 이광진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 아래서 잠시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자 국궁장이 나온다. 주말엔 누구나 국궁을 배울 수 있고, 직접 쏴보는 체험(4천원)까지 가능한 곳이다. 이후부터는 밀양강 둑길을 따른다.

 12 : 46. 활성교(活成橋). 중앙고속도로 아래를 지나자마지 오른쪽으로 간다(왼쪽은 잠수교를 건너 암새들로 이어진다). 이어서 활성교를 건넌다. 주민들에게는 살내다리로 더 익숙하단다.

 활성교 아래 밀양강변에는 금시당 유원지가 있다. 여름철이면 많은 야영객들이 물놀이를 즐기는 곳이다. 여름철이 아니더라도 차박(車泊)을 위해 찾아오는 이들로 항상 붐빈다고 했다.

 난간 아래로 펼쳐지는 풍광이 가히 압권이다. 밀양강은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어서 오라 손짓하고, 이웃한 들녘 너머로는 가지산·운문산·억산·구만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우람스레 펼쳐진다.

 12 : 52. 다리를 건넌 다음 벚나무가로수로 치장된 용평로를 따라간다. 왼쪽 옆구리에 끼고 왔던 밀양강을 오른쪽 옆구리에 바꿔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12 : 53. ‘용호정(龍湖亭)’. 조선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둔한 격제(格濟) 손조서(孫肇瑞(1412-?)’를 모시기 위해 일직손씨 문중의 묘역 아래에 지은 건축물이다. 주 건물인 정당과 정문격인 심경루(心鏡樓)로 이루어졌는데, 이중 심경루는 정면 3, 측면 2칸의 누각으로 거울처럼 맑은 마음을 뜻한단다.

 호수처럼 잔잔한 강물을 뜻한다는 용호정(龍湖亭)은 문이 닫혀있어 담장 너머로 곁눈질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편액을 달고 있는 대청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들인 5칸 겹집이다. 참고로 손조서는 집현전학사를 거쳐 병조정랑과 봉산군수를 지냈다. 김종직과 교우했으며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정여창 등이 스승의 예로 섬겼다고 전해진다.

 도로가 1차선으로 바뀌었다. 옛 모습, 그러니까 1905년 건설된 경부선 철도가 놓여있던 시절의 풍경이라고나 할까? 1940년 경부선이 복선화되면서 선로가 다른 곳으로 이설됐고, 철길은 이제 비좁은 일반도로로 변했다.

 안내판은 오른쪽을 활성유원지라고 했다. 밀양강의 동천수(단장천)와 북천수(밀양강 본류)가 합류하면서 심연을 이루며 넓은 백사장을 만들어놓은 자연발생 유원지라나? 1566년 근재 이경홍이 그린 밀양12경도에도 나타나있는 명소라고 한다.

 13 : 02. 용평터널. 옛 경부선 철도의 또 다른 추억이다. 월연터널 또는 백송터널이라고도 하는데,  3m에 길이는 130m쯤 된다.

 증기기관차가 내뱉은 석탄 연기로 새까맣게 그을렸을 만도한데, 안은 잡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아니 은은한 조명이 터널을 신비롭게까지 만들어준다. 그래선지 사진을 찍으려는 젊은이들이 꽤 많이 보였다. 그들 덕분에 꽤 많은 차량들이 밖에서 기다려야 했지만... 참고로 터널은 일방통행만 가능하다. 때문에 안에 사람이나 차량이 있으면 입구의 전광판에 진입금지라고 뜨기 때문에 차량 진입이 금지된다.

 이곳은 정우성 주연의 영화 똥개가 촬영되기도 했다. 그래선지 생뚱맞게도 똥개터널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나?

 13 : 08. 터널을 피해 강변길을 따라간다. 그러자 또 다른 문화재인 월연정(月淵亭)’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월연정은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 등을 지낸 월연(月淵) 이태(李迨, 1483-1536)가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직전 벼슬을 버리고 밀양으로 돌아와 지은 쌍경당과 월연대 일원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이 월연대, 왼쪽은 쌍경당 영역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후손들에 의해 쌍경당은 1757, 월연대는 1866년 복원됐다. 하나 더. 네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이곳 월연정에 설치되어 있다.

 강물과 달이 맑기가 한 쌍의 거울 같다는 쌍경당(雙鏡堂)’. 이태가 세운 월연정(月淵亭)의 건물 중 하나다. 함경도 도사 재직 중 기묘사화를 예견하고 사직·귀향한 이듬해인 1520년 용평의 월영사(月影寺) 옛터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기초를 닦아 건물을 지었단다. 주변 경관을 조망하기 좋도록 방과 대청을 개방형으로 꾸미고 사철 기거할 수 있도록 아궁이를 두었다. 이밖에도 쌍경당 영역에는 제헌(霽軒)이 들어서 있었다. 이태의 맏아들인 이원량(李元亮)을 추모하는 건물로 1956년 지었다. 살림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도 살짝 엿볼 수 있다.

 쌍경당 영역을 빠져나오면 실개천. ‘쌍청교라는 돌다리를 건너자 배롱나무 꽃무리에 둘러싸인 월연대 영역이다.

 연못에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는 월연대(月淵臺)’는 정자 기능이 두드러지도록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방을 대청으로 둘렀다. 참고로 밀양의 아름다운 경승지 12곳을 일컫는 밀양십이경(密陽十二景)’ 중 하나인 연대제월(淵臺霽月)’은 월연대의 풍광을 가리킨다. 매월 보름이 되면 밀양강에 비친 둥근 달의 모습이 길게 달빛기둥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광경을 월주경(月柱景)이라고 한다나?

 월연대에서의 조망. 밀양강과 단장천이 합수하는 호수 같은 월연(月淵)’의 물결이 거울 표면처럼 맑다. 하지만 웃자란 배롱나무가 아랫도리를 잘라먹어 버렸다. 하나 더월연대의 빼어난 승경 12곳을 일컫는 월연대십이경 징담제월(澄潭霽月)’을 제일로 치는데, 이는 거울 같은 저 수면에 맑은 달이 비치는 풍광을 묘사한 것이다.

 월연정(月淵亭) 정자 정()’자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안내판은 우리나라 전통 정원의 하나임을 강조한다. 2012년에는 월연정 일원 전체를 명승(87)으로 지정까지 했다. 그렇다면 먼저 뜨락 정()’자로 이름부터 바꿔놓아야 하지 않을까?

 월연정의 또 다른 명물이 백송을 살펴보기로 했다. 백송은 월연대에서 강가로 내려서서 20m쯤 올라가면 나온다. ‘백송나무 가는길(또는 보는곳)’이라고 적힌 팻말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참고로 백송의 나무껍질 색깔은 어릴 때는 회녹색이다가 나무가 자라면서 나무껍질이 계속 벗겨지면서 점점 회백색으로 변해간다. 그리하여 나이가 많이 들면, 껍질이 마치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흰색이 된다고 한다.

 최초의 월연정 백송은 약 500년 전 중국을 다녀온 사신이 가져와 쌍경대 북쪽 축대의 모서리 끝부분에 심었으나 1925년 대홍수 때 뿌리째 뽑혀 고사되었다. 하지만 최초 심었던 백송에서 솔방울이 언덕으로 날아가 자연 발아로 바위틈에 세 그루의 백송이 자랐다. 그중 한 그루는 2014년 태풍으로 고사되었고 현재 수령이 약 280년 된 마지막 한 그루의 백송 나무만이 살아남아 월연정 절벽에서 자라고 있다.

 13 : 20. ‘2코스와의 접점인 추화산성으로 가기 위해 등산을 시작한다. 산행은 월연대의 왼쪽(정문 앞)에서 시작된다. 초입에 이정표(추화산봉수대 1,561m/ 활성교 697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은 또렷한 편이다. 거기다 밀양아리랑길 엠블럼과 리본이 곳곳에 매달려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되기 때문에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철에는 땀 깨나 쏟아야만 한다.

 13 : 42. 첫 이정표(추화산봉수대 761m/ 월연정 800m). 갈림길도 여럿 만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중요한 포스트에는 이정표를 세웠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엠블럼이나 리본이 길을 안내해 준다.

 13 : 53. 추화산성 남문 터(이정표 : 추화산봉수대 280m/ 월연정 1.28km). 5분쯤 더 걸어 사거리(이정표 : 추화산봉수대 500m/ 섬벌마을 1.5km/ 월연정 1.07km)를 만났다싶으면 곧이어 추화산성(남문 터)에 올라선다.

 밀양아리랑길 안내도가 ‘2코스와 만났음을 알려준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성황사 유지(밀양손씨 문중 사당)’와 추화산 정상(243m)으로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체력에 한계를 느낀 우리 부부는 이를 생략하고 곧장 추화산성으로 가기로 했다.

 성벽에서의 조망. 밀양시가지와 주변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밀양읍성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으로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13 : 58  14 : 21. 임도처럼 잘 닦인 길을 따라 5분쯤 더 걸으면 추화산성이다. 하지만 성벽은커녕 성터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분지처럼 널찍한 잔디밭과 건너편 언덕에 걸터앉은 봉수대가 다라고나 할까? 아니 식탁형의 의자까지 갖춘 멋진 쉼터를 겸하고 있었다. 덕분에 막걸리를 반주삼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봉화대 맞은편은 추화산(推火山, 243m)’이다. 산 이름은 밀양의 옛 이름인 추화군(推火郡)’에서 유래했다.

 이곳에는 다섯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정표(박물관 1.1km/ 월연정 1.5km)와 추화산성 안내판도 눈에 띈다. 추화산 정상 부분을 빙 둘러싼 산성인데,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보아 신라와 가야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던 시기에 만들어져 조선시대 전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단다. 특이한 것은 축성 초기에는 읍성(邑城)’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저 아래 들녘에서 농사짓던 백성들은 어떻게 이곳까지 왕래하며 살아갔을까?

 시야가 툭 터지는 민둥봉우리는 봉수대가 올라앉았다. 봉수제도가 국법으로 확립된 고려시대(1149)에 설치되어 갑오개혁(1894)으로 봉수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가락국의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할 때 봉화로 신호했다는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봉수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봉수대의 특징대로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높고 낮은 주변의 산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들어온다. 영남좌도연제 제2거서노선의 간봉선에 해당하는 주화산 봉수는 김해 성화예산에서 봉기, 분산·자암산·밀양백산남산을 거쳐 온 봉수를 경북 청도남산으로 전달했단다.

 14 : 27. 하산을 시작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하지만 나선형으로 만들어놓은 침목계단의 아름다운 곡선이 힘들다는 느낌까지 싹 날려버린다.

 산길은 한마디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쓰레기는 물론이고 잡초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잡초 대신 지자체에서 이식해놓은 맥문동 등의 꽃들이 곳곳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탐방객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벤치마다 부채를 비치해두는 친절까지 베풀고 있다.

 14 : 45.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사거리(이정표 : 천문대 130m/ 추화산성 760m/ 좌우는 아리랑고갯길)가 나온다.

 이곳에는 출향인들을 위한 쓰리랑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고향을 떠나있는 출향인들에게 고향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 숲의 특징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아닐까 싶다. 편백나무, 산수유, 산사나무, 매화나무 등 심어놓은 나무들마다 기증한 사람이나 단체의 이름이 일일이 표시되어 있었다.

 건너편에는 밀양아리랑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월남전참전비(사진)과 충혼탑도 세워져 있단다. 하지만 정규탐방로에 벗어나있어 들러보지는 않았다.

 14 : 52. 여섯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된 밀양아리랑 우주천문대’. 국내 최초로 외계 행성·생명이라는 특화된 주제의 과학 체험공간으로 조성되었으며, 관측실·천체투영관·전시체험실 등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4층 주관측실에서는 세계 최초 음성인식 제어시스템이 설치된 70cm 구경의 고성능 망원경 별이로 천체를 관측할 수 있다.

 14 : 56. 천문대를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간다. 이때 밀양성당을 스치듯 지나간다.

 14 : 58. 오른쪽에는 밀양시립박물관이 있었다. 밀양시립박물관은 1974 밀양군립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1993년 고고학 전문박물관으로 되었고, 2008년에는 이곳 교동으로 이전·개관했다. 상설전시실(역사실·민속실·유학실·서화실)과 화석전시관, 독립기념관 등을 거느리고 있다.

 갖가지 조형물들로 치장된 광장을 지나자 박물관이 반긴다. 삼한시대(변한) 미리미동국으로 불린 이래 오늘날 밀양시에 이르기까지 밀양지역의 풍성한 역사·문화 사료를 담고 있는 곳이다. 밀양아리랑 같은 민속놀이뿐 아니라 밀양의 유학자, 선비의 사랑방, 조선시대의 서화와 같은 특색 있는 전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밀양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영남지역 최초로 일어난 3·13 밀양 만세의거,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창단, 23회에 걸친 의열투쟁 등 수많은 항일 독립투쟁이 이곳 밀양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선지 박물관 안에 독립운동기념관을 별도로 두었는가 하면, 밀양시 출신 독립운동가 36인의 흉상이 둘러싸고 있는 조형물(선열의 불꽃 : 변건호 작품), 독립의열사숭모비, 파리장서비 등을 광장에 설치해 놓았다.

 15 : 07. 박물관을 빠져나오면 밀양대공원로’. 밀양읍성을 향해 왼쪽으로 간다. 오른쪽에 밀양향교와 손씨고가(孫氏古家)라는 문화재가 있으나, 약속된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 선답자의 GPX트랙도 두 문화재를 건너 뛴 채로 진행하고 있었다.

 15 : 21. 15분쯤 걷다가 만난 로터리에서는 오른쪽 3시 방향이다. 이어서 용평로를 따라 동문고개로 올라간다.

 15 : 26. ‘동문고개’. 고갯마루에는 밀양읍성(密陽邑城)의 동문이 들어섰다. 최근 복원된 동문은 크고도 견고한 것이 중국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었다. 가히 난공불각의 요새라고나 할까?

 ‘2020 공공미술프로젝트 혜택을 본 밀양읍성은 갖가지 조형물들로 치장됐다. 참고로 밀양읍성은 성종 10(1479)에 축조됐다. 대부분의 읍성이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밀양읍성은 100년 이상 일찍 만들어졌다. 높이 4.2m에 둘레가 2.2km인 성곽은 옹성(甕城치성(雉城해자(垓子)까지 갖췄었다고 한다. 하지만 1902년 성문과 성벽이 헐려 경부선 철도부설 공사에 사용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15 : 29. 성곽으로 올라가는 진입로. 길섶의 붉노랑상사화가 꽃망울을 활짝 열어젖혔다.

 상사화는 꽃과 잎이 다른 시기에 피어 만날 수 없는 연인에 빗대어 표현된다. 그래서 꽃말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됐다. 꽃은 잎을 생각하고, 잎도 꽃을 생각하지만 서로 만날 수 없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성곽을 따를 경우 만나게 되는 무봉대(舞鳳臺). 길을 달리 들었기 때문에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왔다.

 첨부된 지도(부산일보의 안내도도 같다)는 읍성의 성곽을 따라 영남루로 간다. 하지만 아리랑길 표식은 반대편(해발 88.1m 아동산을 가운데 두고)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이 길을 따른 탓에 우리는 명소 몇 곳을 둘러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15 : 35. 밀양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영남루에 이른다. 일곱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그건 그렇고 누각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왼쪽 언덕에는 작곡가 박시춘(1913-1996)의 생가가 있었다. 박시춘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시기에 유행가 3000여 곡을 지었다. ‘애수의 소야곡’, ‘비단장사 왕서방’, ‘굳세어라 금순아’, ‘신라의 달밤’, ‘봄날은 간다 등 하나하나가 당대를 풍미했다. 많은 사람들이 술집에서 노래방에서 그의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일제의 패색이 짙어진 1943년 이후 학도병 참여를 권유하는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아내 같은 노래를 지어 친일논란에 휩싸이기도 한다.

 영남루(嶺南樓 : ‘國寶로 지정되어 있다)’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3대 누각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로 꼽히는데, 신라 경덕왕(742-765) 때 신라 5대 명사 중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 누각으로 세워졌다. 화재·전쟁으로 몇 차례 소실됐다가, 1844년 밀양부사 이인재가 중건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하나 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누각은 기둥과 기둥 사이가 넓고, 땅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마루를 만들어 누각 자체가 시원하고 웅장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누각의 다양한 현판들도 주요 볼거리다. ‘강성여화(강과 밀양읍성이 한데 어우러져 그림과 같다)’ ‘용금루(높은 절벽에 우뚝 솟은 아름다운 누각)’, ‘고남명루(문경새재 이남의 이름 높은 누각)’ 등 하나같이 영남루의 아름다움과 명성을 찬양하는 것들이다.

 누각 끝으로 발길을 옮기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만큼이나 가슴도 확 트인다. 육지 속의 섬 삼문동과 이를 에돌아나가는 물줄기가 어우러지며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낸다.

 널따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맞은편에는 천진궁(天眞宮)’이 들어서 있었다. 천진궁은 단군을 비롯한 역대 왕조 시조들이 배향된 사당이다. 조선 효종 때 건립됐으며, 원래는 객사(공진관)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을 비롯한 역대 왕조를 세운 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역할을 하고 있다.

 단군(檀君)으로 여겨지는 신상(神像). 곁을 지키고 있는 빗돌은 태상노군(太上老君). 칠원성군(七元星君), 삼신제왕(三神帝王)’이라 적었다. 우리네 시조가 이들의 직위를 겸한다는 얘기일까?

 마당에서는 밀양향토예술단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밀양백중놀이, 무안용호놀이, 감내게줄당기기, 밀양법흥상원놀이, 작약산예수제 등 밀양의 무형유산을 매월 첫째·셋째 주 토요일에 번갈아가며 보여준단다.

 영남루 근처에는 다른 문화재들도 여럿 있다. 천년고찰 무봉사(舞鳳寺)도 그중 하나지만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다. 발품만 조금 더 팔면 아랑각(조선 명종때 정절을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은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모신 사당)이나 밀양이 낳은 역사적 인물인 사명대사 유정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15 : 52. 수변공원길로 가기 위해서는 돌계단을 내려서야 한다. 그런데 이 계단이 특이한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계단으로도 이용할 수 있고 지그재그로 걸으면 경사로로 이용할 수 있다. 휠체어나 자전거, 캐리어 등도 다닐 수 있는 무장애 탐방로라고나 할까? 그래선지 위에서 내려다보면 심오함을 담은 조형작품을 연상시킨다.

 15 : 54. ‘밀양교를 건너 삼문동(三門洞)’으로 간다. 서울로 치면 여의도이다. 오래 전 이곳 삼문동은 강 건너 가곡동과 붙어 반도모양 지형을 이루고 있었단다. 그러다 1920년대의 대홍수가 반도의 허리를 끊어버렸고, 저곳 삼문동은 섬 아닌 섬이 되어버렸다.

 영남루 앞, 밀양강의 둔치는 숫제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그 앞으로 흘러가는 강물이 영남루를 두고 떠나는 것이 아쉬운지 흐르지 않고 멈추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라며 아리랑 소리를 자아내는 듯하다.

 15 : 56. 다리 건너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하긴 이처럼 온전하게 영남루를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선지 글자조형물을 세워 포토죤까지 겸하도록 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밀양강의 본류가 바뀌면서. 물길을 잃은 영남루의 풍치는 내세울 게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만들어 놓은 게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징검다리가 놓인 ()’. 보를 막아 밀양강의 물을 가둠으로써 예전처럼 영남루 앞이 물로 넘실거리게 만든 것이다. 아무튼 물길 너머 영남루는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맞다. 저런 풍광이 있었기에 옛날부터 수많은 명사가 찾아왔을 것이고, 그럴듯한 시들을 남겼을 것이다. 영남루에 걸린 수많은 시판(詩板)이 그 증거다. 당대 최고의 인플루언서들이 핫플레이스를 찾았다가 일종의 리뷰를 남긴 셈이다.

 전망대 앞에서는 밀양아리랑 아트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밀양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장르의 젊은 작가들이 임시 공방을 열고 있다. 일단은 체험을 해보고 마음에 들 경우 구입하면 된다는 얘기다.

 15 : 58. 공방 몇 곳을 기웃거리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밀양강 제방을 따라간다. 둑 위에 차도가 부럽지 않을 만큼 널찍하니 산책로가 나있다.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던 밀양강 둔치가 언제부턴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바뀌었다. 산림유전자 보호림으로 지정된 삼문송림으로 약 2ha에 이르는 면적에 수령이 100년도 넘는 곰솔 2000여 그루가 울창하다. 소나무 아래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여름이면 맥문동, 가을이면 구절초가 만발한단다. 참고로 이곳 송림공원은 조선시대 말엽 고종 때 밀양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방수림으로 조성됐다.

 16 : 10. 송림공원의 끄트머리에서 둔치로 내려서니 이재금 시비가 반긴다. 밀양 출신 이재금(1941-1997) 시인의 시 도래재가 적혀있다.

 16 : 15. () 위에 놓은 징검다리(뚜껑을 덮었으니 엄밀한 의미의 징검다리는 아니다)를 건너면 용두교유원지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 15분을 걸었다. 앱이 12.59km를 찍고 있으니 추화산을 올랐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라 많았다는 얘기가 되겠다.

 

여행지 : 아르메니아  가르니 신전

 

여행일 : ‘23. 5. 31() - 6. 12()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가르니 신전Garni Temple) : 예레반에서 남동쪽으로 32km쯤 떨어진 코타이크(Kotayk) 지방에 있는 신전. BC 3세기 요새로 지어졌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BC 1세기 아르메니아 왕 트리다테스 1(Tiridates I)’가 네로황제의 후원을 받아 태양신 미트라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했다.

 

 아자트 협곡 위에 형성된 가르니 마을에서 투어를 시작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10분쯤 걷자 목적지인 가르니 신전이 나온다. 참고로 가르니 지역이 역사에 나오는 것은 기원전 8세기 우라르트(Urart) 왕국 때부터라고 한다. 이후 기원전 3세기 오론트(Oront) 왕국 때 이곳에 왕의 여름궁전이 지어졌다.

 수도인 예레반에서 가깝기 때문에 당일치기 투어가 가능하다. 7k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신전이 걸터앉은 아자트 협곡의 세상에서 가장 큰 주상절리를 한데 묶어 투어를 진행하는 게 보통이다.

 입장권을 사서 안으로 들어온다. 저렇게 견고한 성벽(지금은 성문에 문짝도 없지만)이 있었기에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평을 들었을 것이다. 참고로 기원후 1세기 이베리아(Iberia) 왕조의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 AD 32-51) 왕과 그의 가족이 양자이자 조카였던 라다미스투스(Rhadamistus)에 의해 암살당한 후부터 이곳은 왕궁보다는 성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신전은 동··남이 절벽으로 차단되고, 북쪽으로만 접근이 가능한 천연의 요새다. 높이 6-8m(두께 2-3m)에 길이 374m인 성벽에는 14개의 망루 겸 탑까지 있었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원형을 너무 많이 상실했다는 이유로 등재에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래 문장을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떡 거린다. 유네스코에서 선정하는 문화경관의 보호와 관리를 위한 그리스 멜리나 메르쿠리 국제상(Greece Melina Mercouri International Prize for the Safeguarding and Management of Cultural Landscapes)’을 수상했다는 것이다. 대상자는 가르니 역사문화박물관(Historical and Cultural Museum-Reservation of Garni)’이고 말이다. 참고로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 1920-1994)’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정치활동가로 문화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약탈문화재 반환 등 문화재보호 활동에 큰 족적을 남겼다.

 다른 안내판은 1945년 가르니 마을의 공동묘지에서 발견했다는 비문을 소개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 화가 마르티로스 사얀(Martyros Saryan)’이 발견한 이 비문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리다테스 1(66-88, 재위 년도인 듯)’가 기원후 77년에 난공불락의 요새(복원이었을 게다)와 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안내판이 전하는 헬라어 비석은 북쪽 성벽의 문(조금 전 들어온) 맞은편에 놓여있었다. 빙 둘러 쳐놓은 금줄에서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이 유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꼬맹이의 호기심까지 막을 수 있겠는가. 아니 저 소년은 지금 음각되어 있는 메시지와 교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르메니아의 위대한 왕인 티리다테스가 즉위 11년 만에 신전과 함께 난공불락의 요새를 지었다.’...

 탐방로를 야외 박물관으로 삼은 모양이다. 출토된 유물들을 좌대까지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복원 과정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것들이지 싶다. 그렇다고 허투루 대할 수는 없었을 테고.

 찰떡궁합을 이루는 것들도 눈에 띈다. 성곽이니 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을 게다. 그러니 어디선가 물을 끌어왔을 테고, 성 안에는 크고 작은 물길이 거미줄처럼 퍼져있었을 것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천 길 낭떠러지에 위태롭게 걸터앉은 가르니 신전이 얼굴을 내민다. 1세기 후반 아르사스 왕조의 티리다테스(Tiridates) 1가 지었다는 태양신 미르(Mihr)에게 바치는 이오니아식 신전이다. 왕은 신전과 함께 왕비를 위한 궁전 겸 성채도 건축했다고 한다.

 신전은 아르메니아가 로마에 속하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한 방편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네로황제의 후원을 받아 태양신 미트라(Mitra, 혹은 Mihr)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했다. 때문에 가르니 태양신전으로 불리기도 한다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닮은 신전은 아르메니아 장인들이 어떻게 전통적인 그리스·로마식 신전 디자인을 변형해 받아드렸는가를 보여준다고 했다. 신전 외부는 둥근 기둥으로 둘러싼 이오니아 양식의 그리스·로마 사원 형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만든 반면, 건축자재는 대리석 대신 현무암을 사용했다. 내부 장식은 이 지역이 로마의 문화를 수용했다는 증거로 포도와 석류 등의 장식을 풍부하게 사용했으며, 로마 이전 시기에 성행했던 황소와 사자의 모티브 장식도 많이 나타나고 있단다.

 신전은 기독교가 공인된 4세기 초반 티리다테스 3세 때 호스로비둑트의 여름궁전으로 변신했단다. 그러다 8-9세기경에는 궁전과 교회(Saint Sion), 목욕탕이 들어선 복합단지로 변한다. 하지만 1386년 티무르제국의 침입과 1679년의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고, 이후 동서로 분열된 아르메니아가 이란과 튀르키에의 지배를 받으면서 잊혀졌다. 그러다 20세기 초·중엽의 발굴과정을 거쳐, 1968-1976년 건축가 사히냔(Sahinyan)의 주도로 발굴 부자재를 활용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본래 것이 66%가 되지 않아 세계문화유산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정면 6개 측면 8개의 원형 기둥이 우뚝하다. 기둥의 상부 주두(柱頭)는 이오니아식으로 되어 있다. 그 위로 면석과 장식벽 그리고 천장받침이 있다. 식물문양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는 벽은 프리즈 형태로 연결된다. 천장받침 위로 삼각형 모양의 박공과 지붕이 보인다. 박공은 민무늬이다. 부조장식이 있었을 게 확실하지만 이에 맞는 부자재를 찾아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대신 용마루에는 화려한 장식의 조각품을 올려놓았다.

 신전 파사드(facade). 주워 모은 부자재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추어나간 흔적들이 감탄보다는 오히려 짠하게 느껴졌다면 나 혼자만의 오해였을까?

 내부에는 전실이 있고, 그 안쪽에 신과 만나는 기도공간을 만들었다. 지붕과 벽이 있는 건물 형태로 만들어진 신실(神室)이다. 제단과 지성소는 그 안에 있었을 것이다.

 아르메니아 교회당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천장을 뚫어 만든 구멍, 즉 예르디크(Yerdik)를 꼽을 수 있다. 이 구멍은 환기와 더불어 내부를 밝히는 역할까지 해준다. 그런데 그리스·로마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가르니신전도 천정에 구멍을 뚫어놓지 않았겠는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로마의 판테온에서도 저런 구멍을 봤다는 기억을 소환해내면서 그만 수긍하기로 했다.

 신전을 빠져나오자 건물 터가 나온다. 역사는 AD 897년 신전 근처에 2층으로 된 여름 궁전을 추가로 지어졌다고 전한다. 아니 목욕탕과 교회 등이 함께 들어선 커다란 복합지구를 형성했단다. 하지만 모진 세월을 이겨내지 못한 채 지금은 저렇게 터만 남아있다.

 원통형으로 생긴 이 터에 성 시온교회(St. Sion Church)’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완전히 파괴된 탓에 원형의 벽과 내부 구조만 확인해 볼 수 있다.

 안내판은 이 일대를 왕궁으로 적고 있었다. 아치형의 큰 홀을 가진 2층 건물이었을 것이란다. 그밖에도 꽤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나, 술을 좋아하는 내 관심은 포도주를 만들던 시설에 대한 설명에 꽂히고 있었다.

 지대가 조금 높은 곳으로 가면 목욕탕 유적이 나온다. 3세기에 지어진 로마식 목욕탕으로 왕실 여름궁전의 부속시설이지 싶다. 목욕탕은 바닥의 모자이크화와 난방시설 일부가 남아 있어, 아르메니아 왕실의 목욕문화와 목욕탕의 역사를 알려준다.

 목욕탕은 건물 상부가 없어져 정확한 외관은 알 수 없다. 현재의 지붕은 복원과정에서 유적지 보호를 위해 씌워놓은 것이다.

 하지만 일부 벽과 배관, 바닥의 모자이크화가 남아 있기 때문에, 목욕 시스템과 평면구조는 어느 정도 짐작된다고 했다.

 목욕탕은 네 개의 연속된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 쪽 방이 탈의실 겸 전실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방은 열탕과 온탕으로 여겨진다.

 방은 한쪽 벽에 반원형의 공간을 할애해 보일러 시설을 만들었다. 지면 위에 지름이 20-25cm 되는 원통형의 배관 기둥을 세우고, 배관을 통해 뜨거운 물과 증기를 목욕탕으로 공급하는 구조다. 때문에 목욕탕은 배관 위에 평평하게 만들어졌다.

 네 번째 방의 바닥에는 1953년에 발견되었다는 2.9x2.9m 크기의 모자이크화가 있다. 그래선지 전문가들은 이곳을 휴게실로 분류하고 있었다.(사진 상태가 좋지 않아 인터넷에서 빌려왔다)

 모자이크화는 사각형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Oceanus)’와 바다의 여신 탈라사(Thalassa)’로 추정되는 두 신을 그려 넣었다. 남신은 뿔이 달린 댕기 머리를 하고, 여신은 긴 머리에 아름다운 눈을 갖고 있다. 머리 위에 적힌 두 줄의 헬라어는 우리는 열심히 일했지만 얻은 게 없다로 번역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건축에 동원된 예술가들이 보수를 받지 못한데 대한 항의 표시로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Thetis)’라고 했다. 그 아래에는 돌고래가 그려져 있다. 이들 주변으로 물고기나 굴 같은 바다생물과 그물을 던지는 어부와 선원이 묘사되어 있다. 반인반수의 켄타우로스와 반인반어인 인어도 보인다. 하나 더, 누군가는 이 모자이크를 설명하면서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의 실생활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모자이크를 만든 이들이 지중해 도시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안내판은 이곳이 가르니 왕실목욕탕이었음을 알려준다. 가르니 왕궁의 다른 건물들과 같은 재료와 기술로 지어졌으며,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천장 회반죽의 파편들로 보아 둥근 형태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그밖에도 목욕탕의 제작시기, 구조, 가열방법, 모자이크에 대한 설명 등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가르니 요새는 난공불락이라고 했다. 북쪽의 성벽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이 천 길의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요새(가르니 신전) 곳곳에서 멋진 조망을 즐길 수 있다. 발아래로 아까 둘러봤던 아자트 계곡의 주상절리가 광활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다리품만 조금 더 팔면 계곡으로 내려가 볼 수도 있다.

 

 절벽위에 들어선 마을이 보기만 해도 아찔하게 만든다. 문득 스페인을 여행하다 만났던 절벽 위의 도시 론다(Ronda)’가 생각난다. 당시도 건너편 절벽 위에 위태위태하게 들어선 하얀색 일색의 구시가지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하긴 소설가 헤밍웨이는 그런 풍경에 반해 호텔 론다 파라도르(Parador de Ronda)’에 머물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다지만...

 ‘wines upona time’. 조망을 즐기며 돌아다니다 와인역사박물관에 대한 안내판도 만날 수 있었다. 와인의 역사를 노아의 방주까지 끌고 올라가며 와인 종주국임을 고집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안내판이라고나 할까?

 옆에는 가르니 요새(The fortress of Garni)’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기원전 3세기에 지어졌을 것이라며, 요새가 소개되어 있는 각종 문헌의 저자와 내용 및 성곽의 구조에 대해 자세히 전하고 있었다.



서해랑길 58코스(선도리 갯벌체험장  춘장대 해변)

 

여 행 일 : ‘24. 8. 24()

소 재 지 : 충남 서천군 비인면·서면 일원

여행코스 : 선도리갯벌체험장월하성마을서울시연수원띠목섬해변공정마을홍원항춘장대 해변(거리/시간 : 11.7km, 실제는 14.46km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58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서천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3(전체 5)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선도리 갯벌체험장(충남 서천군 비인면 선도리)

서해안고속도로 춘장대 IC에서 내려와 21번 국도를 타고 서천방면으로 4km쯤 내려오다, ‘해본마린(보트 판매·수리업체)’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빠져나오면 잠시 후 비인해변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서천 58코스) 안내도는 선도리갯벌체험장 앞에 설치되어 있다.

▼ 선도리(갯벌체험장)’에서 서천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춘장대해변까지 가는 11.7km짜리 여정이다코스 대부분이 바닷가를 따라 나있어 여름철에는 다소 힘들 수도 있다하지만 곱디고운 모래사장을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데다생태계가 잘 발달된 갯벌에서는 재수라도 좋으면 조개 한두 개 정도는 너끈히 주워들 수 있다.

 이곳 선도리해변은 전국 제일의 갯벌체험장으로 꼽히는 곳이다. 접수창구 앞에 줄지어 늘어서있는 저 인파가 그 증거다.

 10 : 00. 해안산책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때 쌍도(雙島)’가 눈에 들어온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과 천석지기 부잣집 외동딸의 애틋한 사랑얘기가 전해지는 전설의 섬이기도 하다.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남녀가 바다에 몸을 던지는 극단적 선택을 했고, 선도리 앞바다의 두 개의 작은 섬으로 우뚝 솟아났다나?(갯벌체험장의 분위기 연출을 위해 지난 57코스 때 사진을 게시했다)

 진행방향에는 옥녀봉을 병풍삼은 월호리(월하성 어촌체험마을)’ 포구가 놓여있다.

 10 : 10. 해안에서 빠져나간다. 해안산책로도 이쯤에서 끝나고 있음은 물론이다.

 10 : 12. ’갯벌체험로로 올라섰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갯벌체험로 배롱나무길(서천군 군도 5호선 종천면 장구리에서 시작해, 비인면을 거처 서면으로 이어지는 약 20km 구간)’로도 불린다. 서천은 배롱나무 꽃길로 유명하다. 해안도로를 배롱나무 꽃길로 조성해 갯벌과 어우러지는 꽃무리의 운치를 보여준다.

 아재개그 하나.  배롱나무인지 아시나요?’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한번 성한 것은 오래가지 않아 반드시 쇠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부귀라는 꽃말의 배롱나무 꽃은 7-9월까지 계속 꽃을 피워 백일홍 나무라고도 불린다. 그걸 자랑하며 십일홍일 뿐인 다른 나무들에게 메롱하며 놀린 것이 시간이 자나면서 배롱으로 변했다나?

 10 : 23. 인생은 좋은 일로만 계속될 수는 없는가 보다. 비인천(庇仁川)을 가로지르는 쌍도교를 건넜다싶으면 이정표(종점 10.2km/ 시점 1.5km)가 이제 그만 배롱나무 꽃길과 헤어지란다.

 이정표가 서해랑길 본연의 임무를 되찾았다. 시점과 종점까지의 거리를 기본으로 인근의 주요 포인트를 추가했다. 하단의 지도에는 현재위치의 주소까지 적어 넣었다.

 이후부터는 방조제의 둑길을 따라간다. 길은 월하성 어촌체험마을로 이어진다.

 이즈음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한 쌍도를 눈에 담을 수 있다. 그저 뭉툭한 모양새일 따름이었던 섬이 언제부턴가 고래와 거북 모양을 닮은 두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다.

 10 : 27. 바닷가 습지에는 조류관찰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아니 무늬만 탐조대였다. 바다생물 관찰 사이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찰 구멍을 아래가 아닌 위에다 뚫어 놓은 이유는 대체 뭘까?

 안내판은 철새가 아닌 흰발농게, 갯게, 대추귀고둥 등 해양생물에 대한 설명만 잔뜩 늘어놓고 있었다. 반 폐쇄형 갯벌인 월호리 갯벌에 3종의 해양보호생물이 서식하고 있는데, 특히 갯게는 서해안에서 유일한 서식지라고 한다.

 10 : 29. ‘해뜨는비치하우스 펜션’. 서해랑길(kakaomap)은 펜션 앞에서 직진이다. 하지만 두루누비(한국관광공사의 공식 사이트)’에서 배포한 트랙은 오른쪽으로 가란다. 우리 부부는 kakaomap을 따르기로 했다. ‘월하성 포구를 둘러본 다음 바닷가를 따라 띠섬목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10 : 32. 월하성 마을. 법정 동리인 월호리(月湖里)’를 구성하는 3개 자연부락(화동·월하성·큰장굴) 중 하나로 달빛 아래 신선이 노는 것 같은 마을이라고 해서 예로부터 신성지로 꼽히던 마을이다.

 마을 담벼락은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보수를 안해서인지 없던 것만도 못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10 : 35. 월하성마을 앞 풍경. 58가구 196명이 살아간다는 마을은 규모가 제법 컸다. 민박이나 펜션은 기본. 편의점에 식당(그것도 셋이나)까지 들어서 있었다.

 바닷가에는 철새나그네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충남 서천은 서해안을 끼고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데, 보령 땅과 경계를 이룬 부사호에서 전북 군산을 마주보고 있는 장항까지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 서천 철새나그네길이다.  5개 코스 37.8km에 이르며, 1코스(붉은낭만길) 8.8km, 2코스(해지게길) 5km, 3코스(나그네길) 14km, 4코스(윤슬길) 5km, 5코스(해찬솔길) 5km로 조성되어 있다.

 앞바다는 만 형태의 지형으로 수심이 얕아 갯벌이 잘 발달해있다. 썰물 때면 갯벌이 1km 가까이 드러난다. 또한 질퍽한 갯벌이 아니라 고운 모랫벌이라 움직이기도 편하다. 덕분에 봄부터 가을까지 갯벌에 직접 들어가 바지락, 모시조개, 맛조개 같은 조개류를 채집하고 갯벌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다.

 월하성 포구의 어선들도 하나같이 물양장으로 올라와 있었다. 서천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만나오다 보니 이젠 익숙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배는 경운기나 트랙터에 의해 바다로 옮겨진다. 저 배는 언제라도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마친 상태다. 아니 다른 배들도 출발선상에 선 달리기 주자들처럼 신호가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길가에는 쭈꾸미 잡이용 소라껍데기가 줄에 묶인 채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쭈꾸미는 낚시로 잡는 것보다 소라방 잡이 방식으로 잡는 것이 힘은 더 든다고 했다. 하지만 쭈꾸미에게 스트레스를 적게 주는 만큼 가격을 더 비싸게 받는다고 한다.

 저 길은 어선 전용이다. 어민들은 바다가 멀리 물러나는 썰물 때는 경운기 뒤에 배를 싣고 이 길 끝까지 가서 바다에 배를 띄운다. 이게 또 이색적인 풍경으로 비쳐지면서 탐방객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킨다나? 맞다. 끝 간 데 없는 갯벌 위로 배를 싣고 바다로 가거나,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배를 싣고 나오는 경운기들의 행렬이 어디 그리 흔한 풍경이겠는가.

 10 : 43. 포구의 끝. 방파제 앞에는 어촌체험 안내소 겸 매표소가 있었다. 8월에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이용한 월하성 횃불문화축제까지 열어가며 체험객들을 유치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때 배올리기 문화체험, 어부체험, 맨손으로 고기잡기 체험, 돌게잡이 등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단다.

 방파제에서 바라본 월하성 마을’.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모양이 달을 닮았다하여 달 아래 성 , ‘월하성(月下城)’이라고 부른다나? 해안가의 지형이 기러기 날개처럼 굽어졌다고 해서 월아성으로 불리기도 했단다. 1864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 마을 서쪽에 월아산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게 지금의 옥녀봉으로 추측되며 마을 이름도 이 월아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마을의 끝에는 봉긋하니 솟아오른 동산이 하나 있었다. 내가 띠섬으로 오해했던 섬이다. 주민들 말로는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육지로 변한 섬이라고 했다.

 방파제에서 바라본 북쪽 해안. 저 해안선을 따라 띠섬목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주민들 말로는 무릎까지 빠질 각오를 해야 한단다. 갯고랑이 제법 깊다는 것이다. 고민해볼 필요도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이유이다.

 10 : 52. 마을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월하성길을 따라 서울시 서천연수원쪽으로 간다.

 10 : 58. 고갯마루에서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8.7km/ 시점 3km)를 만났다. 그런데 옥녀봉(75.9m)으로 올라가라는 게 아닌가.

 하지만 우린 서울시 서천연수원으로 간다. 해안선을 따라가며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띠섬을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아니 해안선을 따라가는 철새나그네길(3코스)’이 옥녀봉을 넘는 서해랑길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11 : 09. 연수원 경내를 횡단해 바닷가로 내려선다. 건물들이 밀집해있어 길 찾기가 수월치는 않으나 연수원 이정표의 보존습지·모래톱마당·해변가 등을 참조하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더. 해안선을 따르는 이 구간은 밀물 때는 이용할 수 없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해변은 광활하지는 않지만 연수원 식구들을 소화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널찍했다. 거기다 규사 성분의 모래사장은 한없이 보드랍다. 이런 고품격의 프라이빗 비치를 갖고 있는 서울시청은 대체 무슨 복일까? 서울 시내의 지하철역을 시작으로 독도 지우기를 나서고 있는 매국 행위는 토착 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던데...

 가는 입자의 모래가 물에 다져진 탓에 발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로 바닥이 단단했다. 아니 발바닥으로는 폭신폭신한 촉감이 느껴져 온다. 보드라우면서도 단단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런 로드 컨디션이라면 하루 종일 걸어도 좋을 것 같다.

 띠섬은 육지와 300m도 채 떨어져 있지 않다. 저 섬은 하루 두 번 썰물 때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 육지와 연결된다고 했다. 그래선지 바다에서 조개를 캐고 있는 사람들이 몇 보인다.

 길은 갯바위지대로 연결된다. 위험하다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을만한 검붉은 바위들이 해안선을 따라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갯바위는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흡사 조각전시장을 보는 것 같다. 언젠가 TV 화면에서 살짝 스쳐지나가던 달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모두가 다 오밀조밀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험상궂으면서도 거대한 갯바위들이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살짝 비켜 지나가면 그만이었지만... 아무튼 모래해변은 모래해변대로, 갯바위는 갯바위대로 바다와 찰떡궁합을 이루고 있었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갯바위들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동안 바다와 사랑에 빠져 지금과 같은 아기자기한 모양이 됐다. 그러다보니 해식지형의 변화과정도 살짝 엿볼 수 있다. 해안절벽이 침식을 거쳐 해식동굴로 변한... 저런 동굴들은 흐르는 세월과 함께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마량포구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즉 반도가 눈에 들어온다. 서천화력의 거대한 마천루도 시야에 잡힌다.

 11 : 14. 갯바위로 이루어진 모퉁이를 돌아서면 띠섬목이다. 이정표(종점 8.3km/ 시점 3.4km)는 월하성마을에서 이곳까지를 1km로 적고 있다. 하지만 내 트랙은 1.4km를 찍는다. 해안선을 따르는 철새나그네길(3코스)이 서해랑길보다 더 길다는 얘기일 것이다.

 들일 나온, 아니 갯일 나온 어느 가족. 꽤 오래 버틸 요량인지 바닷가에 돗자리까지 펼쳐놓았다. 바리바리 싸온 간식도 펼쳐놓았음은 물론이다.

 띠섬목이란 지명을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 ‘띠섬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곧 띠섬목이 아니겠는가.

 이후부터는 띠섬목 해변을 따른다. 규사성분의 고운입자로 이루어진 백사장이 자랑인 해변이다. 배후에 울창한 송림까지 끼고 있으니 해수욕장 부지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하지만 사유지인지 해안선을 따라 길게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마량포구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곶(), 즉 반도가 점점 더 선명해진다.

 해변은 가고 또 가도 끝이 없었다. 맞다. ‘띠섬목 해변은 그 길이가 4km나 된다고 했다. 물먹은 규사성분의 모래사장이 단단하게 굳어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딱딱하다는 것은 아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폭신폭신하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의 연한 움직임이 있었다.

 뒤돌아 본 띠섬’. ‘띠 모()’자를 써 모도라고도 하는데, 월호리에서 갯벌로 이어진 덕분에 갯벌체험장으로 이용된다.

 11 : 35  11 : 55. 바닥이 곱다고 뜨거운 태양열까지 없애주지는 못했나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스스럼없이 해송펜션으로 올라가버린다. 더 이상은 무리라면서 잠시 쉬어가자는 것이다. 덕분에 우린 다른 일행들과 함께 막걸리 잔을 나누며 20분 정도 푹 쉬어 갈 수 있었다.

 이 일대의 갯벌은 장벌어촌계 및 개인 소유의 양식장이라고 한다. 그러니 펜션손님이나 관광객들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조개를 채취해야 한단다.

 11 : 55. 다시 길을 나선다. 모래사장은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못 견딜 정도로 지루하지는 않았다. 조개를 캐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고, 바지락·동죽··고동 등 그들이 거둔 수확에 대해 나눌 이야기가 차고도 넘쳤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국물이 시원한 바지락, 구우면 더욱 맛있는 모시조개, 뽀얀 속살이 쫄깃한 돌조개 등 각양각색의 조개가 잘 잡힌다고 했다. 하지만 서천 갯벌체험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맛조개 잡기. 호미로 흙을 파낸 뒤 조개를 줍는 것과 달리 송송 뚫린 갯벌 구멍 안에 소금을 뿌리면 맛이 쏙 튀어나온다.

 맛조개 잡이는 삽과 소금만 있으면 충분하다. 펜션에서 장비를 빌려주고, 잡는 방법도 간단해서 아이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다. 먼저 삽으로 개흙을 살짝 걷어내고 구멍에 소금을 한 움큼씩 뿌려놓으면 소금의 짠 기운을 견디지 못한 맛이 마치 안테나를 올려 갯벌 위를 탐색하듯 고개를 살짝 내민다. 이때 맛을 억지로 잡아 빼는 것은 금물. 잘못하면 끊어지기 때문에 스스로 튀어나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반 이상 올라왔을 때 재빨리 낚아채야 한다.

 ! 모래사장이 거칠어졌다. 엊그제 지나간 태풍 종다리가 남긴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12 : 10. 해변은 배후 숲이 계속해서 따라온다. 울창한 송림이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이룬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또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그만큼 그늘이 절실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날, 그것도 오뉴월 뙤약볕 아래서 모래사장을 걷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숲에는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었다. 캠핑 사이트도 눈에 띈다. ‘해오름관광농원에서 만들어놓은 부대시설이다. 철새나그네길(3코스 : 해오름관광농원다사항) 걷기 여행자들이 기점으로 삼는 곳이기도 하다.

 12 : 16. 그 끝에는 해오름 모텔이 있었다. 서해의 푸른 경관을 두 눈에 담으며 잠들 수 있으니 하룻밤 머물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하지만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12 : 19. 길이 끊겨있어 다시 해변으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더 모래사장을 걸어야만 했다.

 12 : 24. 드디어 도로(공암남촌길)로 올라섰다. 이후부터는 방파제의 축대 위를 걷는다. 축대의 높이가 상당하기 때문에 음주 보행을 삼가야 하는 구간이다. 하나 더. 이 일대는 긴 벌판이란 뜻의 장벌로 불리기도 한다. 벌판이 하도 길어 가다가 쉬어갔다고 해서 쉬엄장벌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12 : 29. 해양재난구조대 앞에서는 도로 오른편으로 들어붙는다. 널찍하니 길이 나있었기 때문이다.

 12 : 30. 서도초등학교. 서해바다를 뜨락 삼았으니 입지조건으로는 이만한 곳도 없을 듯 싶다. 하지만 이번 종다리 태풍 때만 해도 학교 앞 도로가 통제되는 등, 기상이변 때마다 비상이 걸린다니 세상 일이란 마냥 좋을 수만은 없나보다.

 12 : 35. ‘신바람 난 찐빵·만두집 앞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간다. ‘남촌마을이다. 법정 동리인 도둔리(都屯里, ’군사가 주둔하던 곶에서 유래된 지명)’에 속한 행정부락 중 하나로 도둔리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남촌마을 골목. 장방형의 마을을 남북으로 짧게 관통한다.

 요즘은 민박도 월 단위로 내주는 모양이다. 하긴 작년 코카서스 3국을 여행하면서 들른 조지아에서는 주민들이 한 달이 아니라 일 년 살기를 권하기도 했었다. 내가 수령하는 연금이면 호화롭지는 않아도 여유롭게 주변 나라들까지 모두 둘러볼 수 있다면서 말이다.

 12 : 37. 골목을 빠져나와 서면로를 횡단한다. 이어서 도둔리의 또 다른 행정부락인 공정마을(7)’로 들어선다. 마을에는 노인정(마을회관) 말고도 커뮤니티센터가 따로 지어져 있었다. 그런데 춘장대역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맞다. 저곳에는 서천화력선(간치~동백정) 춘장대역(春長臺驛)’이 있었다. 영등포역에서 출발하는 관광열차(통통통 뮤직카페트레인)가 이곳까지 운행하기도 했으나, 2018년 서천화력선이 폐지되면서 2020년 춘장대역 커뮤니티센터로 변신했다.

 공정마을 뒤 언덕을 넘으면 요포마을(10)’이다. 참고로 도둔리는 1리 장벌, 2리 남촌, 3리 동리, 4리 아파트촌, 5리 중리, 6리 요치, 7리 정동, 8리 공암, 9리 홍원, 10리 요포 등 10개의 행정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길가 화단에 설악초(雪嶽草)’가 화사하다. 회녹색의 잎이 나는데 가장자리가 흰색 테두리를 친 듯 하얗다. 그런데 난생 처음 본 꽃마저 온통 하얀 게 아닌가. ‘설악초(snow-on-the-mountain)’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란다.

 길은 이제 홍원항으로 이어진다. 서면에서도 제일 서단에 위치한 어촌마을로, 옛날에는 탄포라 불리었는데, 70년대 공정마을에서 분구하여 행정구역상 홍원리(도둔9)’가 되었다. 이쯤에서 팁 하나. ‘요포 마을회관을 지나면 두 곳에서 길이 오른쪽으로 나뉜다. 중간 기점인 홍원항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곧장 오른쪽으로 가면 될 일이다. 이 경우 2km 정도를 단축하게 된다.

 12 : 59. ‘홍원마을(이정표 : 종점 2.4km/ 시점 9.3km)’에 이른다. 바닷가 마을이라서 90%가 어업에 종사하고 어선만도 60척에 이른단다. 그래선지 마을에서 열리는 풍어제가 주요 볼거리로 꼽히고 있었다. 음력 1 7일에는 마을주민 2백여 명이 참여하여 마을의 안녕과 어민들의 안전사고 및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단다.

 서천 지명 탄생 600주년 기념 조형물. 1413(태종 13)에 서천군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모양이다. 참고로 서천은 마한시대의 비미국(卑彌國), 백제의 설림군(舌林郡:서천마산현(馬山縣:한산비중현(比衆縣:비인), 통일신라(西林郡·嘉林郡), 고려(知西州使·知韓州使) 등을 거쳐 조선 태종 때 서천군이 되었다. 그러다 1913년 서천군·한산군·비인군이 합쳐져 현재의 서천군이 된다.

 13 : 02. ‘홍원항은 서해랑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었다. 1940년경 중국·일본 어선 4-5척이 갈치·조기 등을 싣고 입항하면서 어항이 형성되었는데, 그 후 꾸준히 늘면서 어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 성어기에는 하루 150여척이 입·출항한다니 어업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고 보면 되겠다.

 물양장에서는 홍원항 자연산 전어·꽃게 축제(8.24-9.8)’가 한창이었다. 참고로 홍원항 근해에서는 전어·농어·꽃게 등이 많이 잡힌다고 했다. 특산물로는 앞바다에서 잡힌 멸치로 담근 액젓이 꼽힌단다. ’잡어 젓갈도 하나쯤 챙겨갈 만하다고 했다.

 언론에서는 맨손 전어잡기 체험과 홍원항 보물찾기, 수산물 깜짝경매, 홍원항 수산물장터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된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몽골텐트도 엄청나게 많이 쳐져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썰렁한 풍경이었다. 비어있는 텐트가 보이는가 하면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전어회와 전어무침 등을 파는 저 음식코너가 그 썰렁함을 대변한다고 보면 되겠다. 50평도 더 되어 보이는 널찍한 매장에 손님이 한 명도 없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들어간 편의점 주인장은 음식을 식당에서 먹지 왜 광장에서 먹겠느냐며 에둘러 얘기했지만 말이다.

 뜨거운 여름날, 사람들은 에어컨도 없는 노점보다는 초대가수의 열창에 더 이끌렸던 모양이다. 무대 앞 50석쯤 되는 객석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차있었다.

 포구는 꽤 번화했다. 펜션이나 민박 등의 숙박업소와 횟집·식당들이 웬만한 도시의 번화가 못지않게 늘어서 있다. 맞다. 주말이면 외지에서 수많은 차량들이 포구로 들어오며, 성수기에는 그 숫자가 5백여 대도 더 넘는다고 했다.

 13 : 16. 축제 구경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잔디광장(주차장이 들어있다)을 왼쪽에 끼고 나있는 요포길을 따라 북·동진한다.

 13 : 23. 마리나방파제 못미처 삼거리(이정표 : 종점 1.9km/ 시점 9.8km)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나간다.

 13 : 27. 고개 위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왼쪽으로 간다. 길은 아직도 요포길이다. ‘파도소리 카페 바다내음 캠핑장 등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오롯이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조망의 명소들이 들어서 있는 구간이다.

 꽃범의 꼬리가 길가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꽃잎이 호랑이가 크게 입을 벌린 것 같은데다, 꽃대가 기다란 범의 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호랑이처럼 무섭지는 않고 오히려 화사한 분홍빛이 달콤한 입맞춤을 하고 싶게 만든다. 꽃말은 청춘’, ‘젊은 날의 회상이다.

 고개를 넘는 도중 서해바다 쪽으로 시야가 트인다. 그런데 언덕 아래로 길이 나있는가 하면, 바다에는 산책용 다리까지 놓여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아까 서해랑길이 방향을 꺾던 삼거리(마리나방파제 입구)에서 탐방로를 연결시키는 방법은 없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쯤에서라도 바닷가로 내려가도록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개를 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춘장대 해변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동리(‘도둔고지의 동쪽)와 중리(‘도둔고지의 중앙), 요치 등이 밀집해 제법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참고로 도둔리는 신라시대 서림군의 비비현에 속하면서 마을이 시작됐다. 하지만 오랑캐들이 잦은 침범으로 고생깨나 했단다. 조선 세종 때는 만호(萬戶) 김성길이 아들 윤()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왜적의 배 50여척과 싸우다 전사하기도 했다. 이곳에 바다로 쳐들어오는 오랑캐를 무찌르는 관방(官房)을 두었던 이유이다.

 13 : 41. 막바지에 이른 서해랑길은 춘장대 해변을 따라 북진한다. 이 구간을 걷는 방법은 두 가지다. 바닷가로 내려서서 모래사장을 걸을 수도 있고, 우리처럼 해안 산책로를 따라가도 된다.

 안전지킴이용 전망대가 막혀있는 걸 보면 해수욕 시즌은 이미 마감되었나 보다.

 1.5km나 되는 긴 백사장을 자랑하는 춘장대해수욕장 1.5도의 완만한 경사와 얕은 수심, 잔잔한 파도 등 해수욕을 즐기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알려진다. 한국관광공사가 지정한 자연학습장 8선에 꼽히기도 했다. 1978년 서천화력발전소 건설로 동백정해수욕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서면 도둔리 북서쪽 토지를 개발해 새로운 해수욕장을 조성했는데, 그곳이 오늘날 춘장대해수욕장이다. 춘장대란 이름은 이때 토지 문제를 너그럽게 해결해준 땅 주인의 호 춘장(春長)’에서 따왔다고 한다.

 춘장대 해수욕장의 자랑거리는 낙조라고 했다. 해무가 잦지 않은 여름이면 횃불처럼 타오르는 해넘이를 볼 수 있단다. 거기다 먼 바다에서 야간 조업을 하는 고깃배라도 지나갈라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아름다운 풍경화가 그려진다고 한다.

 즐거운 어울림은 오뉴월 삼복더위까지도 날려버리나 보다.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날씨인데도 23각 경기 삼매경에 푹 빠져있다.

 13 : 50. 캠핑사이트와 평상(대여를 하는 듯)이 늘어선 해안길을 따르다보면 중앙광장이 나온다. 이곳에는 네덜란드에서나 볼 법한 초대형 풍차가 두 대나 세워져 있다. 그것도 날개까지 돌린다.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해변에 기념촬영용 문자 조형물을 설치해 인생샷 한 장쯤 건질 수 있도록 했다.

 13 : 56. 중앙광장에서 마을 쪽으로 한 브럭 더 걷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춘장대길8번길을 따른다. 이어서 150m쯤 더 걸으면 중앙솔밭·백일 캠핑장의 주차장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는 서해랑길(보령 59코스) 안내도를 만나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은 14.46km를 찍고 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정규코스보다 3km나 더 걸었나 보다.

 하버드대학교에서 8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의 인생 궤적을 추적하며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를 연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행복하고 건강한 삶의 원천은 바로 좋은 인간관계다. 외로움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로 요약했다. 그렇다면 우리 부부는 행복하다 할 수 있겠다. 하루 24시간도 부족하다며 항시 붙어 다니니 말이다.

 오늘은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사양하고 맛집을 찾았다. 춘장대 해변은 갯벌에서 잡은 조개를 이용한 조개구이와 해물칼국수가 유명하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너 한쌈 나 한쌈에 들어가 메인 메뉴인 쌈밥을 먹었다. 맛집 검색에서 유일하게 5점 만점을 받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평은 틀림이 없었다. 맛도 맛이지만 주인장의 친절한 서비스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