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아르메니아 – 아자트 계곡(Azat Valley)의 주상절리
여행일 : ‘23. 5. 31(수) - 6. 12(월)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①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③ 아자트계곡 주상절리(Azat Valley-columnar joint) : 예레반에서 동쪽으로 23km쯤 떨어져 있는 ‘가르니 마을’. 이 마을 바로 아래 숨이 멎을 듯 아름다운 ‘아자트(또는 가르니) 협곡’이 있다. 골짜기를 따라 현무암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늘어섰는데, 중력에 맞서 매달린 기둥이 오르간을 닮았다고 해서 ‘현무암 오르간’으로도 불린다. 여기에 협곡의 물줄기가 보내주는 ‘사운드트랙’을 보태면 협곡은 ‘돌의 교향곡(Symphony of stone)’으로 승화된단다.
▼ 버스가 멈춘 ‘가르니 마을’에서 주상절리가 있는 ‘아자트계곡’까지는 사륜구동차로 이동했다. 가는 길이 좁은데다 구불거리기까지 해서 버스의 진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차를 바꿔 타는 것으로도 모자라 돈까지 따로 내야하는 불이익이 따르지만, 이를 생계수단으로 살아가는 현지인들도 있으니 당국으로서는 길을 넓히려고 서두를 일은 없겠다.
▼ 수도인 예레반에서 가깝기 때문에 당일치기 투어가 가능하다. 7k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게하르트 수도원’과 이 협곡의 절벽위에 걸터앉은 ‘가르니 신전’을 한데 묶어 투어를 진행하는 게 보통이다.
▼ ‘아자트 계곡(Azat Valley)’으로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양옆이 거대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골짜기, 즉 협곡(峽谷)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멀리서 봐도 그 암벽이 주상절리로 이루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 체력에 자신이 없거나,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둘러보고 싶은 사람들은 익스프레스라고 하는 전동차를 타면 된다.
▼ 말을 타고 돌아보는 방법도 있다. 물론 최소한의 균형감각은 필요하겠지만.
▼ 굽이진 계곡길을 잠시 내려가면 주상절리 지대가 펼쳐진다. 주상절리(柱狀節理)는 마그마의 냉각과 응고에 따른 부피 수축에 의해 생기는 다각형의 돌기둥이다. 그나저나, 여러 곳에서 주상절리를 만났던 적이 있지만 아자트(또는 가르니) 협곡에 들어서는 순간 그 위용과 규모에 할 말을 잊고 만다. 하긴 세계 최대 규모라니 어련하겠는가.
▼ 와! 여행자들은 너나없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나 또한 다를 게 없었다. 제주도 중문이나 서귀포에서 경이롭게 바라보던 돌의 향연. 그 주상절리의 최대치를 이곳 아자트 계곡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절리(節理, joint)’란 암석에 나타나는 쪼개짐 현상이다. 이게 주상(柱狀), 즉 기둥 모양으로 쪼개지면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현무암질 용암이 급하게 굳을 경우 부피가 줄어들면서 같은 간격의 수축 중심점을 향해 수축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가장 효율적인 육각형 형태로 갈라지는 현상이다. 아니 육각형으로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지만 다른 형태도 있다.
▼ 눈앞에 있는 다각형 돌기둥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자 점점 허리가 젖혀지더니 현기증이 날 듯했다. 작은 계곡에 거대한 절경을 만들어낸 자연의 경이에 감탄만 나올 뿐이다. 맞다. 아자트 계곡의 주상절리는 규모나 크기, 다양함에서 그 어느 곳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위용이 압도적이었다.
▼ 주상절리의 기둥모양 쪼개짐은 잘 부서지기 때문에 절벽 형태로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 제주도의 정방폭포도 그 때문에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폭포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판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 절벽을 따라 다각형 돌기둥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그 거대한 규모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 제주의 중문·대포 해안 주상절리대가 전체 길이 3.5km에 기둥 높이 최대 20m인데 비해 여기는 길이가 5배 이상이고 높이도 2.5배 이상이나 된단다.
▼ 주상절리는 대체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건조한 기후를 꼽는다. 나무들이 잘 자라지 않은 덕분에 바위의 균열을 막을 수 있었다나?
▼ 아자트 계곡의 주상절리는 ‘돌들의 교향곡(Symphony of Stones)’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상절리대의 현무암 기둥들이 마치 파이프 오르간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낭만파 글쟁이들은 이 ‘돌의 교향곡’이 협곡을 흐르는 아자트 강의 물소리가 내는 ‘물의 교향곡’과 앙상블을 이룬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 오르간은 50m도 넘는 거대한 대칭형 육각형 또는 오각형 현무암 기둥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게 명장이 만든 조각품처럼 하나하나가 정교하기 이를 데가 없다.
▼ 동굴 형태를 이룬 곳도 있다. 덮개로 가려져있어 그 아래서 제비들이 집을 짓고 살기도 한다. 또 주상절리 사이로 물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 요건 벌집을 쏙 빼다 닮았다. 아래 부분이 떨어져나간 것일까?
▼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은 어느 하나 경이롭지 않은 게 없다. 문득 ‘외계의 외딴 행성을 탐험하고 싶다면 굳이 태양계의 행성들로 여행할 필요가 없다.’던 모 일간지의 르포(reportage) 기사가 떠오른다. 맞다. 창조주가 선사해준 주상절리가 마치 외계의 어느 행성을 떠올리게 만들고 있다.
▼ 용암이 식을 때 수축되면서 갈라지게 되는데, 이때 아짜트 계곡을 흐르는 충분한 물이 있어, 용암이 빠르게 냉각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로인해 저처럼 멋진 주상절리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아짜트계곡의 주상절리는 세계 최대 규모라고 했다. 그게 생김새까지 경이롭다. 고개라도 들라치면 신비롭기 짝이 없는 풍경이 광범위하게 펼쳐진다.
▼ 수십 미터에 이르는 돌기둥들이 직각과 직선을 이룬다. 그 대단한 규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김새만은 우리나라의 것이 더 뛰어나지 않나 싶다. 그동안 세상 곳곳을 돌아다녀봤지만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경주(양남)의 주상절리보다 더 예쁜 것을 보지 못했기에 하는 말이다.
▼ 반대편, 그러니까 ‘아자트 강(Azat river)’ 건너 절벽에도 주상절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쪽보다 상대적으로 덜 발달되어 있다.
▼ 주상절리는 단면이 육각형으로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 이는 용암의 표면에 냉각·수축의 중심이 되는 점들이 고르게 분포할 때, 각 수축 중심점들을 중심으로 수축이 균등하게 일어나면서 형성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사각형이나 오각형 등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하나 더. 단면의 크기는 작은 것은 수 센티미터에서 크게는 수 미터에 이르기도 한다. 기둥의 길이도 수 미터에서 길게는 수십·수백 미터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 주상절리는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모양도 기기묘묘하다. 파이프 오르간처럼 돌기둥이 상하로 길게 이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말뚝처럼 땅에 박힌 것도 있다. 심지어는 물결처럼 일렁이는 것도 눈에 띈다. 사람들이 ‘돌들의 향연’이라며 탄성을 터뜨리는 이유이다.
▼ 눈이 호사를 누리며 내려가길 20분 여. 오른쪽으로 오솔길이 하나 갈려나간다. ‘가르니신전’으로 올라가는 길이라는데, 메인 탐방로도 이곳부터 거칠어지고 있었다. 가이드 말로는 주상절리는 이후로도 계속된다고 했다. 하지만 격이 떨어진다는 귀띔도 있었다. 이쯤에서 발길을 돌려야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 그곳에서 석간수를 만났다. 아르메니아나 조지아에서는 식수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해외여행을 오래 해오면서 습관화되어버린 ‘물에 대한 의심’은 마셔보는 걸 망설이게 만든다. 그러자 현장학습이라도 나온 듯한 학생들이 시범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덕분에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생수, 그것도 감로수에 가까운 석간수를 마셔볼 수 있었다.
▼ 누군가는 아르메니아에서 꼭 먹어볼 음식으로 가재와 철갑상어를 꼽고 있었다. 특히 철갑상어는 캐비어가 아닌 그릴에 구운 육질이 제공된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 철갑상어를 연상시키는 물고기가 길가 둠벙에서 놀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등치까지 제법 큰 놈이 말이다.
▼ 점심상이 차려진 ‘가르니 마을’의 식당에서는 ‘라바쉬’를 굽는 시연을 해주고 있었다. 이스트를 넣지 않은 밀가루 반죽을 얇게 구워 만드는 아르메니아의 전통 빵이다. 밀가루·물·소금을 혼합한 반죽을 나무로 만든 밀대로 얇고 평평하게 밀어 만든 후 뜨겁게 달구어진 화덕이나 오븐에 넣어 30초에서 1분정도 굽는다. 반죽이 얇기 때문에 오븐에 넣는 과정에서 찢어지지 않도록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구운 직후에는 부드럽지만 시간이 지나면 수분이 증발하여 딱딱해진다. 건조된 라바쉬는 장기적으로 6개월까지 저장이 가능하며 다시 먹을 때는 물을 뿌려 부드럽게 만들거나 깨끗한 헝겊을 물에 적셔 건조된 라바쉬를 싸서 촉촉해지도록 한 후 먹는다. 장기 저장이 가능하여 가정에서 한 번에 대량으로 구운 후 저장해 놓고 먹기도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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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문화유산 탐방
여행일 : ‘24. 8. 17(토)
소재지 : 충남 서산시 및 예산군 일원
여행코스 : 서산(개심사→보원사지→용현리 마애삼존입상) 및 예산(추사고택→예산시장)
함께한 사람들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내포(內浦)는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충남 서북부의 비슷한 문화와 의식을 공유하는 지역을 총칭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는 가야산 전후와 오서산 이북의 열 개 정도의 고을’이라며,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라고 썼다. 산이 험하지 않고 평야가 넓으며 바다가 있어 농수산물이 풍부하고, 느리고 여유로운 민도가 특징이며, 예술과 음식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이번 여정은 그런 맛과 멋을 지닌 내포고을(서산·예산)의 4개 문화유적과 최근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예산전통시장을 방문한다.
▼ 여행의 시작은 ‘개심사’(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IC에서 내려와 647번 지방도를 타고 해미·홍성방면으로 7km쯤 내려온다. ‘운신초등학교(운산면 신창리)’를 지나자마자 좌회전, 개심사로를 따라 3km쯤 들어오면 ‘개심사 주차장’에 이른다. 차에서 내려 사하촌의 농·특산물 판매장을 기웃거리다보면 개심사 일주문이 반긴다. ‘상왕산 개심사(象王山開心寺)’라는 저 편액은 ‘여원구’선생이 썼나보다. ‘구당제(丘堂題)’라는 그의 호가 적힌 걸 보면 말이다.
▼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이 세워지기 전, 개심사의 문지기 노릇을 묵묵히 수행해 왔다는 노거수이다. 개심사는 그동안 저 느티나무를 경계로 성(聖)과 속(俗)이 나뉘어 왔다. 길은 자연스레 지역주민들이 농·특산물을 파는 속세를 떠나 피안(彼岸)‘의 세계로 들어선다.
▼ 널찍한 포장길을 따라 잠시 걷다보면 길이 둘로 나뉜다. 오른쪽으로 휘어져나가는 자동차 길을 제켜두고 돌계단이 산자락을 향해 일직선으로 파고든다. 그 초입, ‘세심동(洗心洞)’이라고 쓰인 빗돌이 눈길을 끈다. 맞다. 누군가는 개심사를 일러 마음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절이라고 했다.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이 정연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면서, 세심동(洗心洞)에서 마음을 씻고, 안양루(安養樓)에서 마음을 연 다음, 심검당(尋劍堂)에서 지혜를 구해보라고 했다. 일련의 마음 수련이 파노라마처럼 연결되는 사찰이라면서 말이다.
▼ 길은 꽤 가파르게 이어진다.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다. 부드럽게 휘어지면서 약간의 숨참만으로 절까지 오를 수 있도록 했다. 아무튼 이 계절은 눈을 어디에 두어도 녹색의 잔치다. 심장까지 푸르게 물들 것 같다. 그러니 최대한 속도를 늦추고 대신 숨은 크게 들이쉬면서 올라가 보자. 솔향이 코끝을 간질이며 기분이 상쾌해질 것이다.
▼ 이곳은 ‘세심동(洗心洞)’. 마음을 씻으면서 걷는 구간이다. 그러니 너무 채근하지 말고 느긋하게 걸어보자. 쉬엄쉬엄 걷다가 그마저도 힘들면 잠시 쉬어가면 그만이다.
▼ 그렇게 20분 남짓 올라갔을까 ‘안양루(安養樓, ‘누각’이 아니지만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한다고 해서 ‘樓’가 되었다 보다)’가 중생을 맞는다. 말 그대로 안양(극락)으로 들어서는 과정이니, 이 누각을 지나면 바로 극락 세상이 펼쳐진다는 의미다. 하지만 극락으로 들어가는 길이 어디 그리 쉽겠는가. 상당히 높은 계간을 두 번이나 지난 다음, 해탈문(解脫門)을 통과한 다음에야 ‘대웅보전(大雄寶殿)’에 이르게 된다. 하나 더. 안양루는 ‘상왕산 개심사’라는 또 하나의 편액을 달고 있었다.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썼다는데, 무거울 대로 무겁고, 농익을 대로 농익었고, 깊을 대로 깊다는 평을 듣는 조선 말의 명필이다.
▼ 개심사 배치도. 연못을 지나면 범종각, 해탈문, 안양루, 심검당, 대웅보전 등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밖에도 명부전, 무량수각, 독선당, 산신각 등 많은 전각들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터가 좁아선지 구석구석 들여다본다고 왔다 갔다 해 보았자 20분이면 족했다.
▼ 초입의 장방형 연못은 백제정원 양식이라고 했다. 개심사의 역사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증거라나? 참! 이 연못은 ‘경호(鏡湖)’로 불린다고도 했다. 마음을 열고 자신을 연못에 비춰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개심사(開心寺)‘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하겠다. 하나 더. 이 연못은 상왕산(象王山, 가야산 줄기)의 코끼리(불교에서는 신성한 동물로 섬긴다)가 먹을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 연못에는 부엽성(浮葉性) 연잎으로 한가득이다. 듬성듬성 노랑꽃도 피워내고 있다. 생김새로 보아 ‘남개연’으로 여겨지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연꽃은 절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꽃이다. 진흙탕 속에서 고운 꽃을 피우기 때문에 물 밖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을 구원한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꽃으로 여겨지며, 나아가 어둠을 밝히는 빛과 극락정토를 상징한다.
▼ 폭이 좁고 긴 연못 중간에는 통나무다리 하나가 놓여있다. 다리를 건너지 않아도 경내로 들 수 있지만, 일부러 걸음 한 이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이 풍경에 반해 다리를 건너게 된다. 그러면서 양보와 배려를 배운다. 최근 큰 나무 두 개를 겹쳐놓았지만, 교차 통행을 하기는 여전히 좁기 때문이다. 한쪽에서 먼저 올라서면 반대쪽에서는 그 사람이 다 건너오기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니 양보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 연못가에서 둥지를 튼 ‘배롱나무’는 구부러지고 매끄러운 줄기에서 새빨간 꽃망울을 활짝 열어 제켰다. 개심사의 자랑거리이기도 한 이 나무는 41cm나 되는 굵기에 높이도 6m나 된단다. ‘보호수’답게 나이도 150살을 훌쩍 넘겼다.
▼ 연못을 지나면 ‘범종각(梵鐘閣)’이 반긴다. 최근 개축을 했는지 아직도 송진 냄새가 폴폴 풍기고 있다. 하지만 휘휘 구부러진 나무기둥은 예나 다름이 없었다. 휘어진 대로 비틀린 대로의 육송 기둥들이 세상살이에 힘들고 고달파 뒤틀리고 꼬여진 우리네를 편히 다가오게 만들어준다고나 할까? 휘어지고 갈라지며 옹이 박힌 기둥들, 즉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에서 편안함과 위로를 느꼈기 때문이지 싶다.
▼ 해탈문을 지나면 불국토라 할 수 있는 금당(金堂)이다. 개심사(開心寺)는 뜻 그대로 ‘마음을 여는 절’이다. 백제가 망하기(660년) 불과 6년 전인 의자왕 14년, 서기 654년에 창건되었으니 말 그대로 천년 고찰이다. 당시 절을 창건한 해감 스님은 절의 이름을 개원사(開元寺)로 했으나 고려 때인 1350년에 처능 스님이 중건하면서 오늘의 이름인 개심사로 개칭했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1955년 전면 보수 공사의 결과물이다.
▼ 1484년 건립된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143호)은 조선 초 건물이 갖는 정갈함의 표상과도 같다. 다포식이지만 쇠서를 강하게 빼지 않아 장식적이지 않고, 맞배지붕을 하고 있어 단정하다. 안내판은 주심포계와 다포계가 절충되어 있는 걸 특징으로 꼽고 있었다.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부재를 공포라 하는데, 이러한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것을 ‘주심포계’, 기둥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걸 ‘다포계’라 한다. 참! 안에 모셔놓은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도 보물(제1619호)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사진촬영은 금하고 있었다.
▼ 대웅전의 측문 섬돌. 기와 조각에 적힌 ‘이곳에 신발을 올려놓지 마세요’라는 문구에 미소부터 짓는다. 신발에서 이물질이 떨어질 때마다 물걸레질을 해야만 했을 스님의 애교스런 넋두리가 아닐까? 그런데 하나가 더 있다. 섬돌에 덧대서 만든 디딤판에도 같은 내용을 적어놓았다. 문제는 이 둘이 겹쳐지면서 경고판 같은 썩 편치 않은 느낌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결과? 귀여운 넋두리가 일그러진 불평으로 변해버렸다.
▼ 오층석탑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중정은 대웅보전과 안양루, 심검당, 무량수각이 둘러싸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심검당(尋劍堂)은 대웅보전을 전면에 두고 왼쪽에 있다. 그런데 높은 기단과 풍요로운 다포, 화려한 단청으로 이루어진 대웅전에 비해 심검당은 스산할 정도로 검박(儉朴)했다. 기거하고 있는 승려들의 마음을 나타낸다고나 할까? 심검당의 검이 마지막 무명(無明)의 머리카락을 단절하여 부처의 혜명(慧明)을 증득(證得)하게 하는 검(劍)을 상징한다니 말이다.
▼ 심검당의 검박함은 아래쪽에 덧댄 툇간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숲에서 자라난 뒤틀린 나무를 그대로 기둥과 서까래로 세우고 얹은 탓에 집의 모양까지 기우뚱하다. 격벽조차 제멋대로인 판재를 이어 붙였다. 이렇듯 개심사의 건물들 대부분(해탈문·범종각·심검당·요사 등)은 자연 그대로이다. 각 가람을 지탱하는 기둥들이 굽어있고 배가 불룩하며 위아래의 굵기가 다르다. 매끈하지 않고, 참 못생겼다. 나무를 전혀 손질하지 않고 원래의 모습대로 갖다 쓴 탓이다.
▼ 요사채(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오른편에 있는 명부전(冥府殿)은 겹벚꽃 맞이 장소로 알려진다. 오래된 돌담 아래로 탐스러운 가지를 늘어뜨린 모습이 세월을 머금은 절과 잘 어울린다.
▼ 개심사는 붉은색·분홍색·흰색 등 여러 색깔의 겹벚꽃으로 유명하다. 꽃잎이 쌓이고 쌓여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만드는 겹벚꽃(만첩개벚)은 4월 중순부터 핀다. 이곳 개심사가 봄 여행지로 꼽히는 이유이다. 하지만 개심사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명부전’ 옆에서 자라고 있는 ‘청벚꽃’이다. 푸른빛이 감도는 겹벚꽃은 오로지 개심사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절간을 빠져나오다 ‘서해랑길’ 표식이 붙어있는 이정표를 만났다. 맞다. 이곳 개심사는 서해랑길의 지선인 ‘64-3’코스가 지나간다. 우리부부가 서해랑을 걸어온지도 벌써 3년째, 다음 주말에는 58코스(서천 지역)를 걷게 된다. 그러니 올 겨울쯤이면 이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 미처 보지 못한 문화재를 빠짐없이 둘러봤으면 좋겠다. 문화절정기인 영·정조 시대에 제작되었다는 영산화괘불탱(보물 제1264호)와 오방제위도·사진사자도(보물 제1265호), 제석·범천도 및 팔금강·사위 보살도(보물 제1766호), 달마대사관심론 목판(보물 제1915로) 등이다. 특별한 날에만 일반에게 공개된다고는 하지만...
▼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신창저수지와 서산 한우목장을 눈에 담다보면 버스는 어느덧 ‘용현리(개심사와 같은 운산면)’에 이른다. 두 번째 방문지인 ‘보원사지(普願寺址, 사적 제316호)’에 도착한 것이다.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보원사의 옛터로, 축구장의 2배도 더 되는 너른 부지에 삼국시대에서 고려 초기에 축조된 유물들이 다섯 기나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 안내판은 보원사가 백제시대에 지어졌음을 알려준다. 100개의 암자와 1천여 명의 승려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교국가인 조선이 들어서면서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자리에 민가와 논밭이 들어섰다가 다시 절터로 복원되었으나, 석물들만 남아 그 옛날의 자취와 영광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 ‘가야산 옛절터 이야기’라는 안내판도 눈에 띈다. 가야산에 숨겨진 옛 절터를 찾아 그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어가며 산행을 즐길 수 있는 등산로라고 한다. 산행을 하면서 불교의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다나?
▼ 첫 만남은 ‘석조(石槽, 보물 제102호)’이다. 치석수법(治石手法)이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초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남아있는 석조 중 국내에서 가장 크다(길이 3.5m, 너비 1.8m, 높이 0.9m)고 한다.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케 해주는 유물이라 하겠다. 이 석조 안의 물을 떠서 1000여 명의 스님들이 먹을 밥을 했고, 그 쌀뜨물이 용현 계곡을 뿌옇게 만들었다나? 특히 절의 행사가 있는 날이면 그 물이 홍수가 날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
▼ 밋밋한 장방형으로 파낸 이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로 아래편에 구멍을 내어 물이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안쪽과 위쪽을 정교하게 다듬은 반면 밖은 거친 것으로 보아 땅속에 묻어두고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나? 내 눈에는 오십보백보로 보였지만...
▼ 석조 근처에는 높이 4.2m의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103로)’가 있다. 통일신라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자리도 옮기지 않고 제자리라고 한다. 지주의 안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바깥쪽에만 양편 가장자리에 돌대를 돋을새김 하였다. 참고로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 작은 개울을 건너면 길은 ‘오층석탑(五層石塔, 보물 제104호)’으로 이어진다. 백제와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으로, 2중으로 만들어진 기단부 위에 5층의 탑신을 형성했는데 안정감이 있고 수려하다. 1968년과 2003년에 해체·보수작업을 했는데, 1968년 해체 때 사리구와 함께 납석제 소탑(작은 모형탑)이 나왔다고 한다.
▼ 석탑의 상하층 기단부에는 각각 팔부중상(부처의 법을 지키는 8명의 선신)과 사자장이 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많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하나하나 꼼꼼히 보면 어느새 윤곽이 나타나고 전체적인 윤곽이 그려진다. 참! 안내판에 탑의 구조와 신상(神像)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으니 비교해가며 살펴보면 이해가 쉽지 않을까 싶다.
▼ 오층석탑 뒤에는 ‘금당지(金堂址)’가 있었다. 절의 본존불을 모시는 건물, 즉 대웅전 같은 본당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놓여있는 초석만으로는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한가운데 있는 저 좌대는 부처가 앉아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 금당 터 뒤편의 축대 위에는 법인국사탑(法印國師塔, 보물 제105호)‘과 법인국사탑비(法印國師塔碑, 보물 제106호)가 있었다. 이중 법인국사탑은 고려 초의 승려 탄문(坦文)의 승탑(僧塔 : 부도)인데, 광종 때 왕사가 되었고 은퇴하면서 국사가 되어 이곳 보원사에서 열반한 고승이다. 그러니 탄문이 입적한 975년(광종 26) 어림에 세워졌다고 보면 되겠다. 하나 더. 5m에 육박하는 부도의 온 몸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가득했다.
▼ ’법인국사탑비‘에는 법인국사 탄문에 대한 내력이 적혀있다고 한다. 까만 대리석에 빼곡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글은 김정언이 짓고, 글씨는 한윤이 썼다고 한다. 참고로 고려태조 왕건은 왕후가 임신하자 탄문에게 백일기도를 주문했고, 4대 왕인 광종을 낳았다. 과거시험과 노비안검법을 매개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왕이다. 왕건에 이어 혜종·정종·광종까지 4명의 왕이 모두 탄문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고, 국사가 되어 가야산 자락의 보원사로 옮겨갈 때는 광종이 왕후와 백관을 데리고 전송하였으며 어의를 보내 병을 살피게 했을 정도란다. 탄문은 다음해 3월에 가부좌한 채 입적하였으니 그 때 나이 75세다. 광종 또한 탄문이 죽은 지 2개월 후에 죽으니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다.
▼ 탑비의 이수(螭首)는 사방에서 용이 모여드는 모양새를 취한다. 그런데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龜趺)가 거북이가 아니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라는 게 특이하다. 하지만 몸통은 거북이가 분명했다. 그것도 꼬리까지 달린...
▼ 탑비 뒤쪽으로 가니 숲속으로 난 오솔길이 보이고, 초입에 서해랑길 표식이 붙은 이정표(개심사 1.7km/ 마애여래삼존상 1.2km)가 세워져 있었다. 개심사에서 상왕산을 넘어 이곳으로 내려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라메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현재 서산시에는 ‘아라메길’이 조성되어 있다고 했다. 아라는 백제 고유어로 바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바다와 산을 걷는 길이란 뜻이 된다. 고대와 중세 때 이 바닷길과 산길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이 들어오고 나갔다. 이러한 사실은 용현리 마애삼존불, 보원사지, 백화산 마애삼존불(태안) 등이 말해준다. 또한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로 가기 전 해골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은 곳도 이 지역 이야기다.
▼ 유적지를 모두 둘러보고 나서야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작은 절간이 눈에 들어왔다. 보원사 복원을 위한 임시법당이란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 보원사를 복원한다며 사적지 내 200평 정도의 땅을 기증받아 ‘보원사’를 개설하고 제7교구의 말사로 등록했다나? 하지만 난 유적지에 사찰을 짓고 중들이 관리하는 것은 절대 반대다. 언젠가는 또 문화재관람료라는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30년 가까이 등산을 해오면서 절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은 채 입장료를 강탈당한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 절간 옆 안내판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여래입상(국립부여박물관 소장)과 고려시대에 제작된 철불좌상 등이 있다. 이중 철불은 해외에서 열리는 전람회 때마다 출품되는 스타라고 한다. 철조여래좌상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에 대한 설명도 눈에 띈다.
▼ 그 옆에는 와편과 석조물들이 정리되어있었다. 아마 이곳을 발굴하면서 나온 듯한데 그 양이 상당하다. 지난날 보원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 다시 버스를 타고 아까 들와왔던 길로 1km쯤 되돌아가다 ‘용현계곡’에서 내린다. 버스정류장(마애여래삼존상) 말고도 유적지의 입구임을 알리는 표지목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용현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산림이 우거져 여름철 휴양지로 유명하다. 그래선지 많은 사람들이 용현계곡을 찾아 여름철 끝자락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 나무다리를 이용해 용현계곡을 건넌다. 반대편 산자락으로 들어붙자 데크 탐방로가 맞는다. 이쯤에서 마애삼존불을 대중들에게 알린 유홍준 교수의 글을 빌어보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삼존불과 관련된 에피소드와 함께 30여 년간 서산마애불을 관리해온 노인장의 사연이 실려 있다. 부여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 선생이 보원사터를 올 때마다 동네 사람들에게 바위에 부처님 새긴 것이나, 석탑이 무너진 것 등을 묻곤 했는데 어느 날 나이 많은 나무꾼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산 중턱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바위에 새겨져 있유. 양 옆에 본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도 있는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 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 마누라가 장돌을 쥐고 집어던질 려고 하는 게 있슈.> 어느 전문가의 해석보다도 현실적이고 그럴듯한 해석이 아니겠는가.
▼ 잠시지만 용현계곡을 왼쪽에 끼고 올라간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테크 길을 만들어 놓았다.
▼ 그러자 가파른 돌계단이 나타난다. 하지만 길지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거기다 이곳은 울창한 숲속. 빛살 한 점 파고들기 힘들 정도로 숲이 우거져있다. 조금 전 따가운 햇볕 아래서 고행하듯 ‘보원사지’를 둘러보던 것에 비하면 숫제 소풍 나왔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 잠시 후 ‘관리사무소’에 올라선다.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하는 곳으로 원할 경우 ‘마애여래삼존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 관람시간은 제한을 두고 있었다. 문화제 훼손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 아닐까 싶다. 일부 몰지각한 광신도(어느 종교나 이런 사람들은 있다)들이 다른 종교의 문화재들을 훼손했던 게 어디 한두 번이었는가.
▼ ‘불이문(不二門)’을 넘어야 ‘마애삼존불’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불이’라 함은 둘이 아님을 뜻하는데, 생과 사, 부처와 중생 등 분별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다르지 않음을 말하는 불교의 교리다. 즉, 불이를 깨닫고 속세로부터 벗어나(解脫), 진정한 불국토에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 불국토(佛國土)는 불이문을 지나서도 한참을 더 걸어야 만날 수 있다. 돌계단을 따라 한참이나 올라간다. 하긴 ‘부처님의 나라’에 드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磨崖如來三尊像, 국보 제84호)’은 동문리(태안) 마애삼존불입상(국보 제307호)과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꼽힌다. 높이 10m가 넘는 거대한 암벽을 깎아 만든 마애여래삼존상은 풍부한 입체감과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높이 2.8m의 석가여래입상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높이 1.7m 협시보살을 두었는데 우측의 보살은 보통의 보살입상이지만 좌측의 보살은 특이하게도 반가사유상의 형식으로 조각되었다. 반가사유상은 6-7세기 무렵 한반도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불상으로 많이 제작되었지만 마애불 중에서는 사례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
▼ 화강암 암벽에 조각한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가운데 석가여래입상은 엄숙하면서도 넉넉한 미소로, 왼쪽의 제화갈라보살입상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오른쪽 미륵반가사유상은 천진난만하고 꾸밈 없는 미소로 맞이한다. 80도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는 미학적 설계도 뛰어나다. 1965년에 삼존상을 보호하겠다고 보호각을 설치했는데 오히려 습기가 차고 백화현상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자 2005년부터 문과 벽을 부분적으로 철거했고 2006년에는 완전히 철거했단다.
▼ 이들 마애불의 미소는 ‘백제의 미소’로 불린다. 불상의 미소는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보이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자애로워 보이는 ‘웃상(웃는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며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간다.
▼ 도로로 되돌아오니 버스가 보이지 않는다. 입구 주변의 주차장은 모두가 식당이나 민박집의 소유라서 차를 댈만한 곳이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공용주차장까지 500m정도를 더 걸을 수밖에 없었다.
▼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다.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무더운 날씨에 걷는다는 것은 재난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볼거리를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그중 하나가 ‘인바위(印巖)’, 이를테면 ‘도장바위’이다. 전설은 오랜 옛날 상왕(像王)이 이곳에다 도장(금 나와라 뚝딱 하는 요술방망이였단다)을 감춰 놓았다고 전한다. 고을 수령이 이 말을 듣고 석공을 불러 큰 정으로 바위를 깨뜨리려고 하자 갑자기 운무가 모여들더니 천둥과 함께 소낙비가 내려 산천이 진동하더란다. 크게 놀라 도망간 수령이 그 후에는 얼씬도 못했음은 물론이다.
▼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강댕이미륵불’이 나온다.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모셔놓았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억7000만 년이 지나 이 사바세계에 오시는 부처님이다. 그래선지 이 미륵불에 기도를 드리려 찾아오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단다. 인근 고풍저수지를 축조할 때 수몰지역 안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는데, 보원사를 수호하는 비보장승이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 고려말-조선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미륵불은 높이 216cm에 어깨의 폭은 65cm, 두께는 25cm이다. 머리에 보관을 썼으며, 오른팔을 위로 올려 가슴에 붙이고, 왼팔은 구부려 배위에 대어 서산지방의 다른 미륵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추사 고택’. 인근 고을인 예산에 위치하기 때문에 버스로 30분 이상을 이동해야 한다. 참!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개심사를 인근의 서산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 해미읍성과 함께 한나절로 답사를 마칠 수 있는 최고의 코스로 소개했다. 하지만 우린 해미읍성 대신에 추사고택을 묶어보기로 했다. 예산군에 소재하고 있어 조금 멀지만 점심이 예정되어 있는 예산 전통시장(예산읍 소재)으로 보면 지근거리이기 때문이다.
▼ ‘추사고택(秋史故宅)’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생가로, 예산군(신암면) 용궁리의 나지막한 언덕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집 앞은 예당평야, 평야 너머로 삽교천과 무한천이 흐른다.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혼인해 용궁리 일대를 하사받고 이 집을 지었는데, 당시 충청도 53개 군현이 한 칸씩 비용을 분담해 53칸으로 지어졌다고 전한다. 1976년 복원사업을 해 현재 안채·사랑채·사당 등 34칸이 남아있다.
▼ 안으로 들어서면 ‘ㄱ’자의 사랑채가 맞는다. 사랑채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ㄱ’자로 꺾이는 곳에 대청을 두고 온돌방이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 있다. 큰방이 추사가 머물던 곳이다. 방안에는 추사의 글씨로 만든 큰 병풍과 보료‧서탁이 놓여 있다.
▼ 안채는 사랑채에 살짝 비켜서 있다. 사랑채가 동향인 데 비해 안채는 남향으로 자리한 ‘ㅁ’자 집이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대갓집 형태로 6칸의 대청과 두 칸의 안방, 그리고 건넛방이 있고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도 보인다. 전체적으로 넓지는 않지만 이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정갈한 마음을 엿보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 안채는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가 머물던 집이기도 하다. 화순옹주는 김정희의 증조모다. 그건 그렇고 고택은 주련 천지였다. 기둥마다 하나씩 매달고 있어 눈만 들면 주련의 글씨가 성큼 다가온다. 주련은 글씨마다 추사의 성품과 노력과 고난이 배어있다. 그러니 하나하나 살펴보며 그의 자취를 따라가 보자. 한자를 몰라도 하등 문제가 될 게 없다. 하단에 글귀의 한자와 음 그리고 뜻이 적혀 있다.
▼ 울타리 밖에는 우물이 있었다. 가문 대대로 이용해온 우물로, 김정희의 출생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민규호(閔奎鎭, 1836-1856)가 쓴 ‘완당김공소전(阮金公小傳)’에 따르면 어머니 유씨가 임신한지 24개월 만에 김정희를 낳았다고 한다. 그 무렵 우물이 갑자기 마르고 뒷산의 풀과 나무들이 모두 시들었는데, 그가 태어나자마자 우물이 다시 차오르고 나무와 풀들도 생기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 우물 근처에 있는 김정희의 묘(墓). 묘는 봉분도 높지 않고 석물들도 고만고만하다. 하지만 범접하지 못할 기품을 갖추고 있었다. 참고로 김정희의 묘에는 첫째 부인 한산이씨와 둘째 부인 예안이씨가 합장되어 있다. 하나 더. 유배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머물다 생을 마쳤다고 한다. 죽기 전까지 계속 글을 썼는데, 죽기 사흘 전에 쓴 봉은사 경판전의 현판이 마지막이었다고 전해진다.
▼ 고택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길은 소나무 숲과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 묘, 그리고 화순옹주 홍문을 거쳐 ‘용궁리 백송(천연기념물)’으로 이어진다.
▼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의 묘(月城尉金漢藎墓)’. 이 묘에는 김한신과 그의 부인인 화순옹주가 합장되어 있다.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은 13세에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진다. 영조가 애지중지했던 외동딸 화순옹주는 13살에 동갑의 김한신과 부부의 연을 맺고 25년을 살았다. 39살이 되던 해 남편이 세상을 뜨자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물 한 모금 넘기지 않은 채 지내다가 보름 만에 남편을 따라갔다고 한다.
▼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 홍문(紅門). 영조의 둘째 딸이자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정면 8칸, 측면 1칸의 열녀문이다. 옹주는 동갑인 남편 월성위(1720-1758)가 세상을 떠나자 음식을 입에 대지 않다가 보름 뒤 따라 죽었다. 조선 왕실 여성 중 유일하게 남편을 따라 죽은 ‘열녀’다. 영조가 화순옹주의 집에 찾아와 미음을 먹으라고 권했지만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고 한다. 영조가 부왕의 뜻을 저버렸다 하여 정려를 내리지 않았으나, 조카인 정조가 고모의 사후 25년인 1783년 정절을 기리며 열녀문을 세웠다.
▼ 안에는 ‘묘막(墓幕) 터’가 있었다. 53칸이나 될 정도로 거대했으나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주초(柱礎)만이 남아 있다. 하나 더. 이쯤에서 고모의 정절을 칭송하는 정조의 글도 한번쯤 음미해보자. <부부의 의리를 중히 여겨 같은 무덤에 묻히려고 결연히 뜻을 따라 죽기란 어렵지 않은가. … 어찌 우리 가문의 아름다운 법도에 빛이 나지 않겠는가. … 아! 참으로 어질도다>
▼ 홍문 옆엔 백송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최근에 만들었는지 조형물의 색깔이 티끌 하나 없이 선명하다. 이곳에는 여러 그루의 어린 백송이 심어져있다고 했다. 세월이 가면 그 흰 등걸의 아름다움이 곁의 조각품들과 잘 어울릴 것 같다.
▼ 그리 넓지 않은 면적이지만 추사가 남긴 서예작품을 주제로 한 조각 작품들이 꽤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추사의 글씨를 한 번 더 살필 시간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 진짜 백송을 구경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더위, 그것도 뙤약볕 아래서 700m(왕복 거리)를 더 걷는다는 게 무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신 추사기념관을 더 꼼꼼히 살펴보기로 했다. 참고로 ‘용궁리 백송(천연기념물)’은 추사가 25세 때 청나라 연경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씨앗을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밑에서부터 세 가지로 자란 아름다운 모양이었지만, 현재는 두 가지는 말라 죽고 한 가지만 남았다고 한다.
▼ 추사기념관. 추사를 연상하기에는 어쩐지 어색해 보이는 디자인의 2층 건물이 주차장 한켠에 있다. 이름처럼 안에다 추사 김정희의 삶과 학문, 예술의 세계를 펼쳐놓았다. 추사의 작품 50건, 71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단다.
▼ 추사 연보 및 유년기가 적힌 입구로 들어서면 추사의 학문과 업적(1전시실), 제주 유배기와 만년기(2전시실), 서예사 및 추사의 서예개관(3전시실), 추사의 서예 작품 및 심훈家 기증 유물(4전시실), 영상실 등이 차례로 나온다. 체험실에서는 추사 낱말 퍼즐 맞추기, 틀림 그림 찾기 등도 체험해 볼 수 있다.
▼ 추사의 수많은 서예 작품과 기증유물을 만나 볼 수 있다. 추사는 끊임없이 단련하고 타고난 천품으로 서예에 구현했다고 알려진다. <나는 70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 추사의 다양한 서체들을 엿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된다. 추사는 고증학의 문호를 개설한 학자이며 문장가다. 글씨는 물론이고 그림에도 뛰어나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금석학 연구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천문학·지리학·문자학·음운학에도 정통했다.
▼ 가슴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 한학과 사학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실제로 가문의 비문을 직접 짓고 쓰기까지 할 정도였다)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주장하며 졸필인 나를 줄곧 못마땅해 하셨다. 이왕에 들어선 관직이니 승승장구해야 할 것이 아니냐며 말이다. 그런데 추사선생이 그 원인이 책을 덜 읽어서였다고 알려준다. 나도 꽤 많은 책을 읽었다고 자부해왔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 밖으로 나오니 세한도(歲寒圖)가 반긴다.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최고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제자인 역관 이상적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 기념관 앞 이정표. 내포문화숲길은 충청남도 서북부지역에 조성된 길이 315.3km의 걷기 길이다. 서산시·당진시·홍성군·예산군이 역사·문화·생태적 가치가 있는 자연 친화적인 4개 테마별 숲길(26코스)을 조성하였다. 그중 ‘백제부흥군길’이 이곳을 지나가는 모양이다. 나· 당 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역사적 의미를 갖는 지점들을 연결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 기념관을 마지막으로 추사고택 투어는 끝을 맺는다. 버스로 향하는데 추사선생이 뭐라도 좀 챙겨 가느냐며 이별을 아쉬워한다. 참고로 1819년 문과에 급제한 추사는 규장각 대제·호서안찰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친다. 55세 때 윤상도 옥사에 연루돼 9년에 걸친 제주도 유배생활을 했다. 65세 때는 진종조예론(眞宗弔禮論)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다시 2년간 함경도 북청에 유배됐다. 하지만 추사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예술로 승화시켜 추사체라는 독특한 경지의 글씨를 만들었다. 스스로 불우를 딛고 불후의 작품들을 남긴 것이다.
▼ 추사고택의 상사화(相思花). 상사화는 꽃과 잎이 다른 시기에 피어 만날 수 없는 연인에 빗대어 표현된다. 그래서 꽃말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됐다. 그런데도 집사람은 상사화를 배경삼아 활짝 웃는다. 우리 사랑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우리 부부는 하루 24시간을 내내 붙어서 다닌다. 상사화를 비웃는 것은 아니지만.
▼ 참! 이왕에 왔으니 포토죤에 올라가 사진을 남겨보면 어떨까? 글씨라도 써내려가다 보면 인생샷 하나쯤 너끈히 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 눈요기를 마쳤으니 이젠 먹거리를 찾아 나설 때다. 그렇게 찾아간 예산읍은 군청 소재지다. 도시계획을 새로 새운 듯 군청과 각종 행정기관은 대부분 외곽에 있었다. 하지만 입소문을 탄 맛집들은 하나같이 노포,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옛 동네에 들어앉아 있었다.
▼ 앗! 대한민국에도 저런 시설이 있었다니. 10년쯤 전, 두바이 인근을 돌아보는 기회가 있었다. 이때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버스정류장’에서 땀을 식히며 놀라워한 적이 있는데, 이곳 예산에서 그런 냉방 버스정류장을 본 것이다.
▼ 우리 부부가 찾아든 곳은 ‘외갓집 한우 암소국밥’. 2대를 이어온 음식점이란다. 안에는 백종원씨와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주인장의 사진을 내걸어 신뢰감을 더해주고, 유명 연예인들의 사인지도 엄청나게 많이 붙어 있었다. 맛과 양도 훌륭했었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예산 국밥은 다른 지역 시장과 차별화된 맛으로 유명하다. 평야와 들판, 낮은 구릉이 많은 지리적 특성이 농사와 축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수도권과 활발한 수운 교류는 예산 지역의 활발한 오일장 문화를 형성했다. 오가는 보부상들은 빠르게 먹을 식사를 찾았고 그 결과 자연스레 국밥 문화가 발달한 것이다.
▼ ‘백종원 거리’로 불리며 관심을 모은바 있는 국밥거리’. 가게 지붕을 볏짚으로 덮고 표주박을 걸어 조선시대 주막을 연상시키는데,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 낸 국밥가게가 즐비하다. 가게 간판에 원조라고 쓰여 있거나, 6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한다. 사장님의 증명사진이 걸린 가게도 있다. 하지만 작년에는 백종원씨가 자신의 이름(7년 전인 2016년부터 ‘백종원’이란 이름을 사용해왔다)을 떼고 철수한다고 밝히기도 했었다. 그게 사실이었던지 백종원이란 이름이 브랜드화 되어있다시피 한 대로변 음식점들과는 달리 국밥거리에서는 백종원씨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 입소문을 탄 음식 몇 가지를 사가기 위해 ‘예산전통시장’으로 간다. 아니 정확히는 ‘장터광장’. 터가 좁은 전통시장의 흠을 상쇄시키고자 널찍한 광장을 만들고 테이블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 2023년 1월. 예산시장은 새롭게 리뉴얼했다. 그리고 이 뉴트로 시장은 그야말로 초대박이 났다. 주말이나 예산 오일장이 열리는 날에는 전국적으로 엄청난 인파가 모여든다고 한다.
▼ 예산시장은 게이트가 총 8곳이라고 했다. 많은 점포로 둘러싸인 이곳 장터광장은 1번 게이트이다. 광장의 테이블에 앉기 위해서는 게이트에서의 대기번호 접수가 필수라고 했다. 전국적으로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염경보는 이마저도 훼방을 놓는 모양이다. 주말인데도 꽤 많은 테이블이 비어 있었고, 대기줄도 운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참고로 메뉴 주문 방법은 간단하다. 우선 대기번호를 접수하고 카톡으로 자리를 안내받은 뒤 매장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된다. 음식은 각각의 매장에서 먹어도 되고 광장으로 갖고 나와서 먹어도 된다.
▼ 하지만 우리가 찾고 있던 매장에는 전통시장 안으로 들어오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별수 없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장소, 예산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예산시장은 꽤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공식 시장 인가는 1926년에 받았지만, 조선 후기부터 시장이 형성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1980년대에는 지역 주민과 상인으로 붐볐지만, 1990년 이후 수도권으로 인구가 유출되며 시장의 규모는 점차 축소됐다.
▼ 그러던 2018년, ‘더본코리아’의 백종원 대표가 예산군과 상호 협약을 체결하여 예산시장 일대에 ‘예산형 구도심 지역상생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시장의 낙후된 시설을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정비했고 상인들에게 '더본코리아'에서 개발한 레시피를 제공했다. 아무튼 카메라를 들이대느라 정신없는 나와는 달리 집사람을 거침없이 시장을 누빈다. 그리고는 ‘광시 카스테라’를 찾아냈다. 우리를 장터광장으로부터 이곳으로 오게 만든 장본인이다.
▼ 집사람은 ‘이신복 꽈배기’도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다. 내일 교회에서 만날 손주들에게 건네준다며 넉넉히 주문하고 있었다.
▼ 장사가 얼마나 잘 되는지 두 집 모두 줄을 서야만 했고,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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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 아르메니아 – 게하르트 수도원(Geghard Monastery)
여행일 : ‘23. 5. 31(수) - 6. 12(월)
세부 일정 : (아제르바이잔)바쿠→고부스탄→쉐키→(조지아)카헤티→시그나기→트빌리시→(아르메니아)알라베르디→세반→예레반→코르비랍→에치미아진→(조지아)트빌리시→아나우리→구다우리→카즈베기→므츠헤타→바투미→(튀르키에)리제
특징 : ① 코카서스(Caucasus)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현지어로는 ‘캅카스(Kavkaz)’라 부른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산악지역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오랜 역사·문화를 자랑하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아)·아르메니아가 있다. 뻔한 코스와 일정,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으로 연일 북적거리는 기존 관광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여행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지역이다.
② 아르메니아(Armenia) : 인구 324만 명의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크기 나라지만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로마·몽골·오스만 등 끊임없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구소련의 해체로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웃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갈등으로 전쟁(1994)을 치렀고, 현재는 불완전한 휴전 상태이다.
③ 게하르트 수도원(Geghard Monastery) :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위대한 정신적·문화적 유산으로 꼽힌다. 4세기경 아르메니아를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개종시킨 성 그레고리우스(St, Gregorius)가 기도하러 왔다가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동굴을 파서 수도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절벽을 깎아 만든 교회, 동굴 안에 만든 교회, 벽을 쌓아 만든 교회, 절벽 안 깊은 곳에 만든 교회 등 다양한 형태의 교회가 지어졌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차에서 내리니 신선이 산다 해도 믿을 만큼 수려한 골짜기가 나타난다. 그 골짜기 깊숙한 곳에 ‘게하르트 수도원’이 있다. 덕분에 우린 한참을 걸은 뒤에야 수도원을 만날 수 있었다.
▼ 아르메니아 여행은 알라베르디(아흐파트 수도원)에서 시작해, 세반호수(세반 수도원), 코르비랍(수도원 및 아라랏 산 조망), 예레반(에치미아진 대성당), 아자트 계곡(게하르트 수도원), 가르니 계곡(가르니 신전 및 주상절리)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 수도인 예레반에서 35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당일치기 투어가 가능하다. 7k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가르니 신전’과 ‘주상절리’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 골짜기로 들어가다 보면 수도원에 이르기도 전부터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깊은 산속, 높은 바위산에 둘러싸인 풍경 때문이지 싶다. 그런 느낌은 잠시 후 동굴교회에서 정점을 찍는다. 바위굴을 깎아 교회를 만든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심과 절벽에 석굴을 깎아 절을 만든 불교도들의 신앙심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깎아지른 듯한 저 바위절벽은 수도승들의 기도처였다고 한다. 사다리나 밧줄로만 닿을 수 있는 수많은 동굴에서 거주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단다.
▼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기념품 말고도 토피 사탕처럼 달고 쫀득한 건살구를 파는 노점상들이 있었다. 동그란 모양에 장식이 된 달콤한 빵 ‘가타(Gata)’가 쌓여 있고, 길게 엮은 호두를 젤리가 될 때까지 포도 시럽에 담가 초의 심지처럼 땋은 긴 줄 모양의 ‘수죽(Sujukh)’도 여러 뭉치 놓여있다. ‘아르메니아식 스니커스(snickers, 초콜릿 바)’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런 것들이 아르메니아 여행의 전형적인 길거리 간식이 되어준다.
▼ 이곳도 ‘하츠카르(Khachkar)’가 먼저 길손을 맞아준다. 수도원 입구 외벽을 따라 수많은 하츠카르를 세웠다. 이렇듯 아르메니아에서는 하츠카르를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다. 어딜 가나 있다. 교차로에도 서 있고, 도시의 공원을 수놓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무덤에 세워지기 때문에 교회 주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하츠카르는 마을의 이정표나 기념비가 될 수도 있고, 사람들의 기도를 실질적으로 가시화시켜 놓은 징표가 될 수도 있다.
▼ 수도원의 아치형 정문. 이곳도 역시 성곽을 연상시킨다. 수도원을 둘러싼 높은 축대는 성벽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유일한 통로에는 두텁고 높게 성벽을 쌓고 작게 문을 냈다.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온 나라들의 전형적인 건축 스타일이라 하겠다.
▼ 입구에 건물 배치도가 들어간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1. 카토히케 교회(Katoghikeh church). 2. ‘카토히케 교회’의 가비트(Gavit). 3. 아바잔 동굴교회(Avazan cave church) 4. 프로시안 묘지교회(Proshian chapel-sepulcher) 5. 성모교회(St. Astvatsatsin‘Proshian’ church), 6. 상부 가비트. 파팍과 루주칸의 묘역(Papak & Ruzukan Gavit-sepulcher). 7. 루사보리치 동굴교회(Lusavorich cave church). 8. 구내시설(Service premises). 9. 주교관(Residence). 10. 사제관(Parsonage). 11. 식당(Refectory). 12. 성모 동굴교회(St. Astvatsatsin cave church)
▼ 투어를 시작하기 전, 행운이 있는지부터 시험해보자. 입구 바위벽에 동전이나 돌멩이를 던져 바위 구멍이나 경사진 턱에 안착하면 행운이 온다니 말이다.
▼ 수도원 전경. 뒤쪽 커다랗게 돔을 올린 건물이 ‘카토히케 교회(Katoghikeh church)’이고, 앞부분의 펑퍼짐한 건물은 카토히케 교회의 ‘가비트(Gavit, 전실)’다. 참고로 게하르트 수도원의 역사는 4세기 초 ‘성 그레고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수도원은 교회와 수도원, 순례자를 위한 시설 등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8세기부터 이슬람의 탄압을 받았고, 923년에는 아르메니아 지역 통치자인 ‘알 나스르(Al Nasr)’에 의해 대대적으로 파괴됐다. 건물은 물론이고 성경과 필사본 등 중요한 서적까지 불태워졌단다. 그러다 타마르 여왕 때 재건이 시작됐고, 1215년 중심 건물인 카토히케 교회가 완성되었다. 13세기 후반에는 이 지역 영주였던 ‘프로시(Prosh Khaghbakian)’의 경제적 도움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당시 7개의 교회 건물에 40개의 제단이 있었단다.
▼ 반대방향에서 본 수도원. 수도원은 네다섯 개의 교회와 그 앞의 넓은 홀(narthex)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동굴교회인데, 거대한 바위를 파내고 안을 세심하게 조각해 만들었다. 사람의 힘으로 들 수 없는 무거운 돌덩이를 쌓고 깎은 것으로도 모자라 암벽을 파내기까지, 신심이 이끌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 이해를 돕기 위해 ‘나무위키’에서 얻어온 사진을 올려본다.
▼ 수도원이니 그 중심이 교회 건물들일 것은 당연, 그밖에도 학교, 필사실, 도서관, 그리고 성직자들의 주거시설들이 교회를 빙 둘러싸고 있다.
▼ ‘카토히케 가비트(Katoghike church Gavit)’ 입구. 문안의 전실(Gavit)은 본당 말고도 북쪽(왼쪽)으로 아바잔교회, 프로시안 예배묘당, 성모교회와 연결된다.
▼ ‘가비트(Gavit, 전실)’란 서양 교회의 나르텍스(Narthex)와 비슷한 개념으로, 교회 정면 입구와 본당 사이에 꾸며 놓은 공간을 말한다. 즉 주교좌 교회인 ‘카토히케’로 들어가기 전 만나는 공간으로 신자들의 기도공간이자 성직자의 설교공간으로 사용된다.
▼ 아르메니아인들은 성당에 들어오자마자 (교회에서)구입한 초를 꽂고 기도를 드린다. 초를 꽂아야만 기도가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 문 하나를 더 지나면 본당인 ‘카토히케 교회(Katoghike church)’다. 투르크로부터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을 되찾은 타마르 여왕의 장군인 자카레(Zakare)와 이반(Ivane) 형제의 후원으로 1215년 세워졌다. 고전 아르메니아 양식의 십자가 형태 건물로, 건물 중앙에 거대한 기둥 4개가 중심을 이루고, 그 위에 톨로베이트(Tholobate: 돔이 세워진 건물의 직립 부분)와 돔을 얹었다. 돔형 천정에 구멍이 있어 빛이 은은하게 들어오지만 전체적으로 어두운 편이다.
▼ 반원형 제대 벽면에는 천사들의 축복을 받는 성모자상이 모셔져 있다. 성모자 양쪽에서 ‘세례 요한’과 ‘성 그레고르’가 성모자를 축복해준다. 이들의 양쪽 벽면 아래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과 승천하는 예수상이 그려져 있다.
▼ 전실에서 북측 왼쪽으로 난 문으로 들어가면 ‘아바잔 동굴교회(Avazan cave church)’를 만난다. 바위에 동굴을 파서 만든 예배당인데, 정교하게 조각된 제대와 하치카르가 눈길을 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샘에 쏠리고 있었다. 성 게오르그가 발견하고 수도원을 짓기로 결심했다는 그 전설의 샘이 아닐까 싶다. 암벽에서 물이 졸졸 흘러나오는데, 이 물이 웅덩이에 모였다가 예배당 바닥을 수로삼아 밖으로 흘러나간다. 하나 더. 이곳 어딘가에 건축가 갈작(Galdzak)이 40년 동안 이 동굴수도원을 지었다는 명문이 적혀있다는데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 내부는 무척 어두웠다. 동굴 속이라서 빛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천장을 뚫어 예르디크(Yerdik)라고 부르는 구멍을 만들었다. 이 구멍이 환기와 더불어 내부를 밝히는 역할까지 한다. 참고로 아르메니아의 수도원은 묵직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어두운 내부를 비추는 것은 신과 만나기 위해 뚫어놓은 천장 구멍과 창으로 들어오는 빛, 그리고 촛불뿐. 화려하게 장식된 유럽 대도시 성당과는 다른 단정하고 신성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다.
▼ 다음은 ‘프로시안 예배 묘당(Proshian chapel-sepulcher)’이다. 수도원 복구에 막대한 후원을 했던 프로시안 왕자를 위한 동굴 예배당 겸 그의 묘가 안치된 곳이다. 그래선지 예배당 안에 프로시안을 상징하는 동물을 조각해 놓았다(가문의 문장이라고 했다). 맨 위쪽은 뿔을 가진 숫양(ram)이 고리를 입에 물고 두 마리 사자를 조종하고 있다. 고리와 줄 아래 두 마리 사자 사이에는 독수리가 반쯤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한다. 독수리는 두 발톱으로 어린 양(lamb)을 잡고 있다. 상단의 숫양은 죽은 자들을 관장하는 하늘나라의 저승사자로, 낮과 밤이라는 두 마리 사자를 조종하면서 세월을 관장한단다. 주님의 어린 양인 인간은 이 세월의 흐름을 거역 못하고 죽는데,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주는 독수리의 도움을 받아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나?(내 사진이 흐려서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 이들 교회를 둘러보고 나서 ‘카토히케 교회(Katoghikeh church)’의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이층에 있는 성가대실로 올라가기 위해서이다. 참! 사진은 없지만 성모교회도 둘러봤고, 내부에서는 하츠카르와 인물 및 동식물 벽장식을 만날 수 있었다.(어두웠던 탓에 사진은 한 장도 못 건졌다)
▼ 본당 파사드는 부조로 새겨진 화려한 문양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맨 위와 유리창 오른쪽에 보이는 둥근 모양의 장식은 영생을 의미한단다. 조금 내려오면 사자가 황소를 공격하는 부조가 있는데, 수도원 재건을 적극 지원한 자칼리안(Zakarian) 가문의 프로시안 왕자를 용맹함을 상징하는 사자에 비유하고 있단다. 조금 더 내려가서 만나는 공작새 두 마리는 왕실을 상징하는데, 수도원 재건에 주도적으로 지원한 왕실에 대한 예우란다. 맨 아래는 포도나무로 장식했다. 조지아보다 먼저 와인을 만들었다는 암묵적 주장이 아닐까 싶다.
▼ 2층으로 올라 ‘상부 가비트(Upper Gavit)’로 간다. 안내도는 ‘파팍과 루주칸의 묘역(Papak & Ruzukan Gavit-sepulcher)’이라 적는다. 수도원 재건에 큰 후원을 한 프로시안 가문의 왕자들 유해가 묻혀있다고 한다. ‘자마툰(zhamatun)’이라고도 불린다는데, 벽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1288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단다.
▼ 이곳은 ‘성가대실’로도 이용된다고 했다. 때문에 구조가 음향을 고려해서 지어졌을 것이라며, 여러 명이 함께 성가를 부르면 그 소리가 더욱 웅장하게 들린다고도 했다. 실제 소리를 내보면 돔과 벽에 소리가 울려 증폭되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렇다면 천장의 저 ‘예르디크(Yerdik)’도 음향효과를 감안해 뚫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곳에서 아카펠라 중창단의 공연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동굴의 울림이 가미된 음은 이곳이 천상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름답다고도 했다. 하지만 때를 못 맞췄던지 실제로 들어볼 수는 없었다.
▼ 바닥에도 구멍이 하나 뚫려있었다. 이곳에서 부르는 성가대의 노래를 아래층에 있는 ‘프로시안 묘지교회(Proshian chapel-sepulcher)’로 흘려보내기 위해서란다. 하나 더. 성가대실을 2층에 둔 것은 노래를 잘 부르는 여성들을 성가대에 포함시키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다. 옛날에는 여성이 성가대원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안 보이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 밖으로 나오니 ‘게하르트 수도원’의 유래를 알려주는 그림이 눈에 띈다. 이 수도원의 원래 이름은 동굴 사원을 뜻하는 ‘아이리방크(Ayrivank)’였다고 한다. 그러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 병사가 찌른 창을 뜻하는 게하르트(Gehard)로 변경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유대인 사도였던 타데우스(Thaddeus)가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로마 병사의 창을 아르메니아로 가져왔다고 한다. 현재 이 창은 에치미아진 교회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다.
▼ ‘게하르트 수도원’이 들어간 코인도 주조하는 모양이다. 소정의 대가를 지불하면 저 구멍에서 코인이 나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 정문 앞에서 또 다른 유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안내도에 성모교회(St. Astvatsatsin cave chapel)로 표기된 지점이 이 부근이었기 때문이다.
▼ 비탈길을 잠시 오르니 수도사들이 은거하며 묵상과 기도를 드리던 수많은 암혈기도처들이 나타났다. 성모교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춘 건물도 있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주어진 시간이 다되어간다는 집사람의 채근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내부로 들어가려면 조금 더 올라가야 한다. 문을 낼 수 있는 공간이 그쪽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보기만 해도 아찔한 저런 곳에서 세속의 즐거움을 모두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고자 했던 수도승들의 헌신에 경의를 표해본다.
▼ 집사람의 채근에 쫒기면서도 살짝 들여다본 어느 동굴. 앗! 내가 잘못 봤나? 서툴게 쌓아올린 돌탑들이 꽉 차있는 게 아닌가. 덕분에 골짜기를 들어오면서 느꼈던 감정이 이곳에서 대미를 장식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사람 사는 것은 똑 같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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