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선비순례길 6코스(역동길)
여행일 : ‘24. 11. 2(토)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및 예안면 일원
여행코스 : 원천교→오성농장(트레킹 중단)→번남댁→계상고택→부라원루→성성재종택→부포리선착장(거리/시간 : 11.5km, 실제는 3.84km를 1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 트레킹 들머리는 원천교(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로 영주까지 온다. 가흥교차로에서 36번 국도(봉화방면으로 19km), 금봉교차로에서 918번 지방도(청량산방면으로 21km), 도산교차로에서 928번 지방도(토계리방면으로 7km), ‘뒷재(도산면 단천리)’버스정류장에서 ‘왕모산성길’로 옮겨 600m쯤 들어오면 ‘원천교’에 이르게 된다. 내살미마을 초입에 화장실까지 갖춘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 경사(經史)와 역학(易學)의 대가인 우탁(禹倬)의 아호(雅號)가 코스의 브랜드로 굳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길이랍니다. 우탁 말고도 성성재 금난수, 번암 이동순 등 퇴계선생과 관련된 선비들의 흔적도 엿볼 수 있지요. 하지만 결코 추천하고 싶지 않은 코스이기도 합니다. 탐방로 정비가 되어있지 않아 코스 중간이 끊겨있기 때문입니다. gpx트랙 없이 진행하다가는 조난당하기 십상인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 ‘6코스’의 시작 지점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은 퇴계예던길 안내도, 이정표(부포선착장 10.9km/ 고산정 11.9km)와 함께 주차장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 11 : 02 : ‘왕모산성길’을 따라 서진(西進)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낙동강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간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 출발지점 근처의 ‘원천리 마을회관’. 원천리(遠川里)는 3코스를 답사하면서 만났던 이육사(李陸史)의 고향이자 진성이씨(眞城李氏) 집성촌인 ‘원촌마을’, 이곳 ‘내살미마을’, 그리고 ‘이곡마을’이 포함된 법정 동리(洞里)랍니다.
▼ 마을회관 마당에 ‘다이시아’가 만개했습니다. 생명력이 강인해 게을리 키워도 잘 자라고, 예쁜 꽃도 계속해서 피워낸다니 일손 바쁜 농촌에서 키우기 딱 좋지 않나 싶습니다.
▼ 그제가 입동(立冬)이었습니다. 그해의 새 곡식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토광·터줏단지·씨나락섬에 가져다 놓았다가 먹고, 농사에 애쓴 소에게도 가져다주며, 이웃집과도 나누어 먹는다는 날입니다. 이는 추수가 이미 끝났다는 얘기도 됩니다. 그런데도 저 감나무는 튼실한 과실을 대롱대롱 매달고 있습니다. 서리를 맞힌 다음 홍시로 만들 모양입니다.
▼ 길은 들녘을 가로지르며 이어집니다. ‘왕모산’ 산자락에 기대어 들어선 모양새인데, 자그만 동네 하나쯤은 너끈히 먹여살릴만한 크기입니다.
▼ 11 : 07. 도산교회.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라는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이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 목사님은 저 말씀을 몸소 실천하고 계시나봅니다. 안동시가지로 나가는 교통편을 못 찾아 애를 먹고 있는 저희들을 안동시청까지 30km 이상 태워다 주셨을 정로로요.
▼ 교회 앞에서 길은 낙동강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낙동강 물줄기가 휘돌아가며 만들어놓은 충적지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건지산과 왕모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4코스와 5코스를 답사할 때 오를 수밖에 없는 산들이지요. 그 사이에서 청량산이 자신도 있다며 고개를 쏙 내밀고 있네요.
▼ 11 : 11. 낙동강 둔치에 이를 즈음 ‘버스정류장’을 만납니다. ‘내살미’ 마을까지 들어오는 시내버스 노선의 종점인가 봅니다.
▼ 버스정류장을 지나면서 길은 확 좁아집니다. 그리고는 ‘내살미’ 마을로 들어갑니다. 자연부락인 내살미는 원천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랍니다. 아름다운 강변마을로 알려져 있지요.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수려하고 넓은 강변에 쌓인 모래가 정결하고 광채가 아름답다 하여 예로부터 ‘천사미’라 불리었을 정도라나요?
▼ 마을은 충적지 들녘에 들어앉았습니다. 그래선지 주변이 온통 무밭이군요. 무가 본디 배수가 잘 되는 토양에서 잘 자라니까 말입니다.
▼ 마을을 둘러싼 비닐하우스도 무가 차지했네요. 산간 고지대의 특징인 일교차를 감안했나봅니다.
▼ 마을을 빠져나오면 낙동강변입니다. 정확히는 도산구곡 중 6곡인 ‘천사곡(川沙曲)’이랍니다. 선성지(宣城誌)에 예안14곡의 하나로 기록되었을 정도로 풍광이 뛰어난 곳입니다.
▼ 낙동강 건너는 ‘원촌마을’의 들녘일 것입니다. 이육사가 광야의 시상을 가다듬었다는 그 너른 들녘 말입니다.
▼ 이후부터 길은 강변을 따라갑니다. 낙동강과 맞닿은 산자락의 아랫도리를 잘라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보여주는 풍경만큼은 전국의 소문난 명소들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 11 : 21. 축대에 ‘월란정사 등산로’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군요. 축대 위를 조금 더 걸으면 이정표(월란정사 0.23km)도 만납니다. 그런데 월란정사로 가는 길을 ‘등산로’로 적은 이유가 뭘까요?
▼ 길은 시작부터 무척 가팔랐습니다. 거기다 이끼가 잔뜩 낀 너덜구간도 있습니다. 통나무 계단을 놓았다지만 험하기가 산길보다 더하면 더했지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이정표에 ‘등산로’라고 적혔던 이유일 것입니다.
▼ 11 : 29 :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월란정사’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길이 거칠었던 탓인지 230m를 오르는데 8분이나 걸렸습니다.
▼ 월란정사(月瀾精舍)는 ‘월란암’이란 암자가 있던 터에 지어졌습니다. 퇴계 이황이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던 도산학의 발상지라는군요. 농암 이현보 등과 어울려 시문을 읊기도 했답니다. 현재 건물은 퇴계의 제자 중 이곳에서 가장 늦게까지 머물렀던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 1539-1601)의 후손들이 1860년에 지었다고 합니다.
▼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一’자형 홑처마 팔작지붕입니다. 퇴계와 관련된 역사적 의미를 가진데다, 건축양식도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며 안동시에서 문화유산(제105호)으로 지정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해온 듯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한국 유교문화의 본고장임을 자랑하는 안동시답지 않은 행정이라 하겠습니다.
▼ 퇴계선생의 시 ‘月瀾臺(월난대)’가 적힌 편액이 눈에 띕니다. 높은 산에는 모서리도 있고 펀펀한 곳도 있는데(高山有紀堂)/ 경치도 좋은 곳은 모두 강가에 있네(勝處皆臨水)/ 오래된 암자 저절로 적막하니(古庵自寂寞)/ 그윽하게 사는 이에게 있을 수 있네(可矣幽棲子)/ 넓은 하늘에 구름이 문득 걷히니(長空雲乍捲)/ 짙푸른 소(沼)에 바람일 것 같네(碧潭風欲起)/ 바라노니 달을 즐기는 사람을 쫓아서(願從弄月人)/ 이 물결 이는 것을 관찰하는 취지에 부합하고자 하네(契此觀瀾旨)
▼ ‘월란암칠대기적비(月瀾庵七臺紀蹟碑)’는 퇴계선생의 시 ‘月瀾臺(월란대)’를 떠올릴 수 있는 바깥마당에 세워놓았습니다.
▼ 퇴계의 시를 떠올리며 주변 경관을 살펴봅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천사곡’이 발아래 놓여있는가 하면, 눈을 들자 청량산 등 크고 작은 주변 산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퇴계가 농암선생과 함께 시문을 읊기에 충분한 풍광이라 하겠습니다.
▼ 11 : 36. 도로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갑니다. 낙동강과 접하고 있는 바위벼랑을 깎아 길을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조망 하나만은 끝내줍니다.
▼ 낙동강 상류 쪽 풍경. 이육사가 태어났고, 그가 시상을 떠올리던 원촌마을과 내살미마을의 들녘이 드넓게 펼쳐집니다. 그 뒤에서는 청량산이 우뚝 솟아오릅니다.
▼ 진행방향에는 도산구곡 중 6곡인 천사곡(川沙曲)이 놓여있습니다. 5곡(탁영담곡)에서 물줄기가 한 굽이를 크게 왼쪽으로 휘돌아간 뒤 다시 오른쪽으로 휘감는 뾰족한 모서리가 6곡 천사곡이랍니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고도가 뚝 떨어집니다.
▼ 11 : 45. 도로를 버리고 강변으로 내려섭니다. 이정표는 보이지 않습니다. 초입의 갓처럼 생긴 ‘선비순례길 조형물’이 길이 갈려나감을 암시한다고나 할까요?
▼ ‘천사곡(川沙曲)’이랍니다. 도심의 삭막한 일상에서 벗어나 모처럼 눈이 호사를 누리는 있는 풍광을 만났습니다.
▼ 잠시지만 둔치를 따라갑니다. 찾는 사람이 드문 탓인지 길은 나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이유는 잠시 후 알게 됩니다.
▼ 11 : 48. 앗! 안동호가 갈 길을 막아버립니다. gpx트랙은 안동호를 가로지르라고 하네요. 하지만 물에 잠긴 호수는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물에 잠기지 않은 상류까지 에돌아갈 수밖에요. 하나 더. 안동시는 왜 이곳으로 길을 냈을까요. 물이 엔간히만 차도 길이 끊겨버리는 데도요.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안동은 인구가 15만도 넘습니다. 그렇다면 행정도 그에 걸맞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후부터는 길을 개척해가며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길이 거칠지만 활짝 핀 억새꽃밭을 누비기 때문에 싫지만은 않은 구간이랍니다.
▼ 높아진 가을 하늘 아래 억새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는 춤을 추듯 일렁거리며 낙동강 둔치를 은빛 물결로 물들입니다.
▼ 억새 꽃밭이 끝나자 이번에는 갈대 꽃밭이 펼쳐집니다. 억새만은 못해도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 상류에 도착했습니다. 저곳에서 개울을 건너 맞은편 산자락에 들어붙으면 됩니다. 그런데 앞서가던 일행들이 산비탈에 매달린 채로 도로로 되돌아나가라고 외쳐대는군요. 길이 없는 탓에 방향만 보고 무작정 치고 오르는데, 하도 가팔라서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 11 : 55. 상류에 이르니 일행 몇 명이 되돌아 나오는 게 보입니다. 그 중에는 몽중루 작가님과 ‘꿈이 있다면 멈출 수 없다’의 저자 이석암 작가님도 끼어있습니다. 목숨까지 담보로 잡혀가며 산을 오를 수는 없답니다. 덕분에 저희 부부도 별 고민 없이 도로로 되돌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 되돌아 나오는 길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도깨비바늘’ 군락이라서 갈고리처럼 생긴 가시에 찔릴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가 나지는 않지만 모기에 쏘인 것처럼 따끔거리는가 하면 옷에서 잘 떨어지지도 않는 애물덩어리 풀입니다.
▼ 11 : 59. 이후부터는 도로를 따라갑니다. 되돌아가라며 외치던 분이 도로를 따라 오라고 했거든요. 도로가 맞은편 능선을 넘어가나 봅니다.
▼ 12 : 10.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였습니다. 잠시 후 만난 외딴집에서 길이 끊겨있었으니까요. Naver 지도에 ‘오성농장’으로 표기되어 있는 곳인데, 주인장 말로는 더 이상 길이 없는데 저희 같은 걷기여행자들이 심심찮게 길을 물어온다고 합니다. 아무튼 산을 넘기를 포기한 저희 일행 10명은 마음씨 좋은 주인장의 배려로 ‘내살미마을’까지 트럭을 타고 되돌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더 태워다주고 싶지만 트럭이라서 사람들을 태울 수가 없다는 군요.
▼ 그런 이유로 ‘6코스’의 잔여 구간은 걸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허총무님 등 둘레길 도반들의 사진을 이용해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건너편 산자락에는 길이 나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절벽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른데다 잡목까지 앞을 가로막아 한 걸음 내딛기조차 힘들었답니다.
▼ 매우 가파른데다 습지라서 미끄럽기까지 했다나요? 매 순간순간이 위험의 연속이었다는 전언입니다. 그러다보니 할퀴고 찔리는 것은 기본. 가끔은 잡목에 싸대기까지 얻어맞아가며 진행했다더군요.
▼ 그렇게 20여 분의 사투를 치룬 뒤에야 산등성이에 올라설 수 있었고, 그곳에서 제대로 된. 아니 방치되고 있는 탐방로를 만날 수 있었답니다.
▼ 산자락을 빠져나오면 이렇듯 좋은 길을 만난답니다. 강변을 따라 나있기 때문에 뷰가 무척 좋은 구간입니다.
▼ 이곳에서 천사곡(川沙曲)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을 수 있답니다. 다음은 이야순(李野淳)이 읊은 천사곡의 풍경입니다. <육곡이라 나무숲이 옥 같은 물굽이를 감싼 곳(六曲林墟抱玉灣)/ 피라미와 백로는 사이좋게 지내네(鯈魚白鳥好相關)/ 하명동(霞明洞)에 핀 늦은 꽃 더욱 어여뻐(更憐花晩霞明處)/ 서쪽 바라보며 한적한 골짜기 하나 차지했네(西望曾專一壑閒)>
▼ 6코스는 버려진 듯한 고택들을 여럿 만난다고 했습니다.
▼ 창덕궁(昌德宮)을 모방했다는 번남고택(樊南古宅)은 퇴계의 9세손인 번엄(樊广) 이동순(李同淳, 1779-1860)이 지었다고 합니다. ‘번남’은 이동순의 아호라고 하더군요. 1807년(순조 7) 문과에 급제해 시강원설서, 병조·호조 참판 등의 벼슬을 지냈습니다. 순조 때 삼척부사를 지낸 아들(李彙溥, 1809-1869)이 1857년 북쪽 사랑채(번남정사)를 지었으며, 남쪽 사랑채(삼호당)는 1870년에 손자인 이만윤(李晩胤)이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99칸으로 지어진 가옥은 전체 모습이 ‘成’자 모양을 이룬다고 합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일부가 소실되고 현재는 50여 칸 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역사적 가치까지 사라지지는 않았겠지요.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전통적 주거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며 국가민속문화유산(제268호)으로 지정·관리하고 있습니다.
▼ 선비순례길은 이제 ‘의촌길’을 따라갑니다. 법정 동리인 ‘의촌리(宜村里)’를 지나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길은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고 시내버스도 다닙니다. 하지만 폭이 좁은데다 구불거리기까지 해서 대형버스의 진입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참! 의촌리는 ‘청보리밭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도산서원 맞은편에 있던 ‘시사단(試士壇)’ 기억하시죠? 시사단 부근의 너른 들녘에 청보리를 심고 매년(안동호의 수위 변화로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축제를 열어오고 있답니다.
▼ 코스를 완주하지 못한 아쉬움을 가장 심하게 만든 사진입니다. 단풍이 늦는다느니, 조금 더 나아가 고운 단풍은 애초부터 포기해야 할 것이라는 기사가 심심찮게 떠도는 요즘, 저렇게나 고운 단풍을 볼 수 있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습니까.
▼ 총무님은 남의 문중 재실(齋室)까지 촬영했나봅니다. 하긴 어느 여행자는 저곳까지 다녀왔다면서 ‘평산 신씨’까지 들먹이기도 했었습니다.
▼ 어느 지점에서는 탐방로가 도로를 벗어난다고도 했습니다. 안동호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에돌아가도록 한 모양입니다.
▼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도 눈에 담을 수 있었겠죠? 빨강 단풍과 새하얀 억새꽃의 멋진 앙상블로도 모자라 안동호의 파란 물결까지 더해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냅니다.
▼ 계상고택(繼尙古宅)은 역동 우탁을 배향하는 역동서원이 있던 곳입니다. 퇴계 이황이 고려 후기 대학자인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2-134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70년 건립한 안동지역 최초의 서원인 역동서원이 있던 곳인데, 그 자리에 퇴계선생의 11대손인 이만응(李晩鷹, 1829-1905)이 1800년대 후반 전통한옥을 지었답니다. 하나 더. 역동서원(易東書院)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69년 송천동(안동시)로 옮겨 복원시켜 놓았답니다.
▼ 고택의 대문 위에는 ‘역동’이란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역동서원을 옮겨갔어도 역동 우탁의 기억은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역동선생은 단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말년에 안동에 머물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으셨다고 합니다.
▼ 관수대는 계상고택(尙)을 둘러싼 나지막한 언덕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곳에 하상(河床)으로부터 수직으로 10여 미터 높이로 솟아있던 천연 오석을 부르던 이름입니다. 역동서원을 찾은 퇴계선생이 낚시를 즐기던 곳으로도 알려지는데 안동 댐 건설로 물속으로 숨어버렸답니다. 현재의 관수대는 계상고택의 아름다웠던 옛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2015년에 쌓은 것이라는군요.
▼ 탑처럼 생겼지만 탑은 아니랍니다. 하지만 계상고택의 풍치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드는 데는 이만한 것도 없겠습니다. 고택의 긴 세월을 헤아려보게 만드는 거대한 고목 그루터기(아래 두 번째 사진)도 그중 하나랍니다.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모양새가 후진양성을 위해 애쓰셨을 우탁선생의 기품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 tvN의 ‘개똥이네 철학관’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던 모양입니다. 나이·성격·직업 등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게스트가 호스트들과 함께 철학관에서 하루를 보내며 소통하고 교감하는 과정을 담은 프로그램입니다.
▼ 고택 부근은 공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하긴 이 부근에서 ‘청보리축제’까지 열린다니 어련하겠습니까. 전통 한옥과 드넓은 청보리밭이 어우러지는 절묘한 콤비네이션으로 인해 안동의 대표적 힐링 명소로 손꼽히고 있으며, 많은 사진작가들이 이곳을 찾는다더군요.
▼ ‘풍월정’이랍니다. 정자에 올라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풍월이라도 읊으라는 모양입니다.
▼ 선비순례길은 호안 데크길을 조금 더 걷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차도로 변하면서 내륙으로 파고든다나요? 서너 개나 되는 고갯마루를 오롯이 넘는 이 구간을 걷기 여행자들은 차도를 따라 지겹게 걷는다며 투덜댔습니다. 힘들게 높여가는 고도에 비해 주변 경관은 보잘 것이 없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 경주손씨(慶州孫氏)의 문중 제각인 ‘부포재(浮浦齋)’라고 합니다. 경주손씨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을 구성하는 양대 성씨 중 하나입니다.
▼ ‘부라원루(浮羅院樓)’는 다들 놓쳤더군요. 탐방로가 지나가는 도로에서 약간 비켜나있었던 탓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사진을 구해 올려봅니다. 조선시대 예안현에 있던 부라원루는 전통 교통수단이던 역원(驛院) 건물이 있었던 곳입니다. ‘영가지(永嘉誌, 안동부의 역사지리지)’는 안동부 관내에 27개의 원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 가운데 그 자취가 남은 곳은 부라원이 유일하다네요. 원사(院舍)는 없어지고 원루(院樓)만 남았지만요. 부포리 앞 들판에 있던 것을 1976년 안동댐 건설로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 편액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라원루는 1600년 이전에 지어졌겠지요?
▼ 고갯마루를 넘나드는 게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래 사진처럼 아름다운 경관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며 다들 호들갑을 떨더군요.
▼ ‘부포마을’이랍니다. 부라원이 있어 ‘부라리’로도 불리는 마을은 금난수(琴蘭秀)의 종택이 있는 봉화금씨 집성촌입니다. 조선시대 이래 예안현은 한국 유학을 대표하는 고장으로 굳어졌습니다. 영남학파의 중심지로 그 선두에는 퇴계 이황이 있었습니다. 금난수도 한 축을 담당했답니다. 퇴계의 제자인 금난수는 이황이 도산서당을 지을 때 ‘도산서당 영건기’를 썼던 인물입니다. 퇴계선생도 금난수가 머물던 청량산 자락의 고산정(孤山亭)을 자주 방문했고, 시도 여러 편 남겼습니다.
▼ 부포마을에 위치한 ‘성성재종택(惺惺齋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은 5코스를 답사하면서 들른바 있는 고산정(孤山亭)을 지은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 가문의 종갓집입니다. 금난수는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로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는 데 힘썼으며,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봉화현감 등을 역임했습니다. 정유재란 때는 안동 수성장(守城將)으로 활약해 좌승지에 증직되기도 했답니다.
▼ 집은 ‘ㅁ’자 형의 본채와 사당 및 아래채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사진은 담장너머로 찍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1700년대에 건립된 안동지방의 주택에서 가끔 발견되는 특이한 유형의 구조라는데, 주인장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니 어쩌겠습니까. 하나 더. 금난수는 월천 조목 선생과는 처남 매부지간이라고 했습니다. 2코스의 시작시점이었던 그 ‘월천서당’을 지었다는 분 기억하시죠?
▼ 성성재종택을 지나면 또 다시 고개 하나를 넘습니다. 이때 먼발치로 안동호를 건너오는 배 한척을 볼 수도 있답니다. 월천서당과 부포선착장을 오가는 배인데, 이게 안동호반에 녹아들면서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낸다더군요. 하지만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는 점도 알아두어야 합니다.
▼ ‘애국지사 기념공원’도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멋진 해넘이가 펼쳐진다고 해서 ‘해넘이공원’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 부포리에서 출생한 이동하(1875-1959) 선생과 이선호(1904-?) 선생을 기리는 빗돌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동하 선생은 1909년 안동 보문의숙을 설립하고, 1911년 만주 망명 이후 동창학교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이선호 선생은 1925년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를 창립했고, 1926.6.10.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렀습니다.
▼ 6코스는 ‘부포선착장’에 이르면서 끝납니다. 월천서당을 오가는 도선이 배를 대는 곳이랍니다. 배는 안동시에서 운영하고 있다는 군요. 선원도 공무원 신분이라서 무척 친절하다는 평가였습니다.
▼ ‘도산교회’ 목사님이 데려다 준 안동시청입니다. 우리네 한옥에서 모티브를 따온 현관이 눈길을 끄는군요. 안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양반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안동’하면 많은 사람들이 먼저 ‘하회마을’을 떠올리며, 하회마을과 함께 꼭 가봐야 할 곳으로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을 꼽습니다. 물론 저처럼 술을 좋아하는 한량들이라면 안동 쌀로 빚은 ‘안동소주’와 제사 후 남은 음식을 다시 조리해 먹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안동찜닭’도 발길을 안동으로 이끌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 점심을 먹었던 ‘안동구시장’입니다. 시장이 온통 ‘찜닭’ 일색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랍니다. 하지만 몽중루 작가님은 닭 냄새도 못 맡을 정도로 닭요리를 싫어한다는군요. 덕분에 찜닭골목에서 보리비빔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해 버렸답니다. 하지만 음식은 맛깔스러웠고, 잔술까지 따라주는 주인장 모자의 친절도 ‘도산학’의 본고장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진풍경이었습니다. 벽걸이 액자 속에서 주인장과 함께 활짝 웃던 가수 ‘설훈도’가 가히 자랑할 만한 식당이었습니다.
▼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택시를 이용해 안동댐으로 갔답니다. 공원처럼 잘 단장되어 있다는 댐 주변의 경관들을 카메라에 담아보기 위해서지요. 아니 술이 고팠던 저는 아름다운 풍경을 안주삼아 술을 마셔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들과 헤어져 식당을 찾았지요. 하지만 이는 최악의 선택이 되어버렸습니다. 맛없는 음식에 불친절까지 더해져 ‘선비문화의 도시, 안동’이라는 그동안 지녀왔던 좋은 선입감까지 사라지게 만들어버렸으니까요.
▼ 안동댐 하부의 ‘월영교’. 옛날에는 하부 교각까지도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는 다리입니다. 이게 썩어서 보수해놓은 게 지금 저 모습이랍니다. 아직도 상판은 나무로 되어 있었습니다.
▼ 안동호를 배경으로 선 집사람이 활짝 웃습니다. 아니 ‘이때까지만’이라고 하는 게 옳겠습니다. 이 지점을 지나자마자 선비순례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이를 대처할 수 있는 안내를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요. 잔여 구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지요. ‘걷기 길’을 만들고 이를 세상에 알린 지방자치단체가 결코 해서는 안 될 행정이었습니다. 거기다 차선책으로 찾아간 안동호에서까지 불친절을 겪었으니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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