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선비순례길 8코스(마의태자길)
여행일 : ‘24. 11. 16(토)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도산온천 입구→퇴계태실(왕복)→용수사→용두산→소정마을 경로당→수운정(거리/시간 : 10.6km, 실제는 12.05km를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 트레킹 들머리는 도산온천 입구(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안동방면)를 타고 27km쯤 내려온다. 지곡교차로에서 928번 지방도(녹전방면)로 옮겨 14km쯤 들어오면 ‘도산온천’ 입구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 신라 비운의 왕자 ‘마의태자’를 코스 브랜드로 삼았다. 신라가 망하자 태자였던 ‘김일’이 추종자들과 함께 부흥운동을 일으킨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의태자를 떠올릴 수 있는 유적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함께 걸었던 도반(道伴)은 ‘마의태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그나마 이곳은 종점인 수운정 근처에서 ‘태자리’와 ‘태자사’라는 지명을 찾아볼 수 있다나?
▼ 8코스(마의태자길) 안내판은 이정표(수운정 7.8km/ 국학진흥원 10.6km)와 함께 ‘온천교’ 옆 삼거리(도산온천 입구)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 이곳은 7코스(산림문학길)의 시점이기도 하다. 영지산(433.3m)을 거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간다. 반면에 8코스는 용두산(664.6m)을 거처 ‘수운정’으로 간다.
▼ 11 : 12. 탐방로는 ‘용수길’을 따라 북진한다. 하지만 난 ‘온천로(928번 지방도)’를 따라 동진한다. 길을 나서기 전 ‘퇴계태실’부터 먼저 들러보기 위해서다. 퇴계 이황이 태어난 곳인데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 11 : 14. 잠시 후 만난 ‘웅부중학교’는 기숙형 공립학교이다.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스러져가는 인근 지역의 초미니 중학교들을 통·폐합했다고 한다.
▼ 11 : 16. 웅부중학교 앞(이정표 : 노송정 종택 300m)에서 왼쪽으로 난 샛길로 들어선다. 그러자 양지바른 산자락 아래 웅크리고 있는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眞城李氏 溫惠派 宗宅, 국가문화재 제295호)’이 거대한 등치를 드러낸다. ‘노송정 종택(老松亭 宗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노송정’은 이 집을 지은 퇴계 이황의 조부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의 호라고 한다.
▼ 종택의 대문인 ’성림문(聖臨門)‘. 퇴계 선생의 어머니인 춘천 박씨가 임신 중에 꿈을 꾸었는데, 공자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대문으로 들어서더란다. 이 사연을 들은 퇴계의 수제자 학봉 김성일이 ‘성림문’이라 명명했단다.
▼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노송정(老松亭)‘이 있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이 지었는데, 계유정난 때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 온혜에 터를 잡았단다. 당시 집 주위에 오래된 소나무가 많아 ’노송정‘을 당호와 아호로 삼았다나? 하나 더. 편액은 석봉 한호가 썼단다.
▼ 노송정 왼쪽,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있는 ’본채‘에는 ’온천정사(溫泉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곳은 ‘퇴계 이황’뿐만 아니라 퇴계의 숙부이자 엄한 스승이었던 ‘송재 이우(松齋 李堣)’, 퇴계의 형님 ’온계 이해(溫溪 李瀣)‘ 등이 태어나 분가할 때까지 살며 가학을 이루던 생가다. 1454년(단종2년)에 지어진 550년이 넘는 고택으로 퇴계 선생과 관련된 수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다.
▼ 1501년 11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1571)‘이 저 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자라 조선 성리학의 거두가 되면서 ’퇴계 태실(退溪 胎室)‘이라는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 종택 마당에는 이계양이 아들인 식(埴, 퇴계의 부친)과 우(堣)에게 보낸 권학시(勸學詩)와 퇴계가 손자인 안도(安道)에 보낸 권학시가 적힌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이런 가풍이 있었기에 후대에 현달한 인물과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을 것이다.
▼ 그밖에도 종택을 건립한 이계양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사당 등 대여섯 채의 부속 건물이 더 있었다. 참! 종택에서 하룻밤 머무는 숙박체험도 가능하다고 했다.
▼ 11 : 24. 온혜초등학교 쪽으로 200m 남짓 더 들어가면 ’온계종택(溫溪宗宅)‘을 만날 수 있다.
▼ 온계종택은 퇴계의 형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가 노송정에서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이해의 12대손 이인화(李仁和, 1858-1929가 의병 활동을 주도했고, 이곳이 그 거점이었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사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태웠다. 지금의 종택은 후손들이 뜻을 모아 불타기 전 선조들이 그린 설계도를 바탕으로 2011년 다시 지었다고 한다.
▼ 안채는 후손들의 안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기웃거리는 것조차 삼가기로 했다. 대신 별채로 여겨지는 ’삼백당(三栢堂)‘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온계선생의 손자 이유도의 호이기도 한데, 잣나무 세 그루처럼 선비의 의리를 지키라는 가르침을 담았단다.
▼ 온계종택 뒤에는 ’요산정(樂山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지었는지는 몰라도 이름처럼 소나무를 배경삼아 들어선 아름다운 정자다.
▼ 집은 비록 옛것이 아니지만, 수령 500년 된 밤나무가 묵묵히 자리를 지켜왔다. 나무 둘레가 5.5m나 된다니 성인 3명이 양팔을 벌려 맞잡아야 하는 거목이다. 하나 더. 저 밤나무는 아직도 밤이 열린다고 했다. 매년 300~500개의 밤알이 수확되는데, 단단해서 벌레가 먹지 않는 토종이라나?
▼ ’선비순례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하지만 안동시에서 배포한 지도나 각종 안내문 등 그 어디서도 선비순례길이 이곳을 지나간다는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 11 : 37.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용수길‘을 따라 북진한다. 도로표지판이 ’운곡리‘ 방향임을 알려준다.
▼ ’무‘도 안동의 특산물 중 하나인 모양이다. 광활한 무밭 풍경으로 점철되던 5코스나 6코스만큼은 아니어도 길가 농경지가 온통 무밭이다. 맞다. 이곳 도산면은 ’무청 시래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단무지용 무라고는 하지만 시래기를 주로 하고, 무 뿌리는 거의 거둬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밭에서는 무는 무대로 무청은 무청대로 구분해서 거둬들이고 있었다.
▼ 수확은 파종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저 농부는 대체 무엇을 심고 있을까. 그게 궁금해 물어보니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만 되돌아올 따름이다. 기초 대화만 가능한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문득 외국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없으면 농사도 지을 수 없다던 어느 농부의 넋두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 11 : 53. 풍천임씨(豊川任氏) 문중의 빗돌이 눈길을 끈다. 부근에 용담(龍潭) 임흘(任屹, 1557~1620)의 ‘취규정(翠虬亭)’이 있다는 게 아닌가. 임흘은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활약했다. 전쟁이 끝나고 공을 인정받아 동몽교관에 제수되기도 했지만 향리로 돌아와 자연을 벗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 정자는 5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부담스러워 일부러 다녀오지는 않았다. 그저 퇴계 집안과 인연이 있어 그리도 청백하게 살았으려니 하며 지나치기로 했다. 그의 부인이 퇴계의 숙부이자 스승인 이우(李堣)의 증손녀 진성이씨(眞城李氏)였기 때문이다.
▼ 탐방로는 ‘용두산’을 바라보며 간다. 용두산에서 발원해 도산면소재지인 ‘온혜리’에서 토계천에 합류되는 ‘온혜천’의 골짜기를 따라 도로(용수길)가 나있다.
▼ 12 : 04. ‘용문정(龍門亭)’이란다. 옆에는 하마비(下馬碑)까지 세워놓았다.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할 정도로 존귀한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이와 관련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 개울에 놓인 ‘용문교(龍門橋)’는 옛 멋까지 폴폴 풍긴다. 꽤 오래된 다리를 복원해 놓은 것 같은데, 이 역시 내력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뭔가를 조성(또는 복원)하려면, 안내판 하나쯤은 예의가 아닐까?
▼ 잠시 후 모퉁이를 돌아서자 ‘용두산’이 그 전모를 드러낸다. 무척 높다. 저걸 어떻게 올라가지?
▼ 12 : 08. 용수사 버스정류장(이정표 : 수운정 8.3km/ 도산온천 2.3km). 삼거리인데 왼쪽은 이름(구레실황정길)대로 ‘구레실’과 ‘황정’마을로 연결된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용수길’을 따른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운곡리 경로당’이다. 운곡리(雲谷里)는 지대가 높아(고도계는 244m를 찍고 있었다), 용두산과 국망봉 사이 골짜기에 항상 구름이 서려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우리말로는 구름실·구래실·구레실로 불린다.
▼ 경로당은 ‘미소쉼터’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다. 행복에 겨운 미소가 넘치는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도 지루하다 싶으면 밖으로 나와 쉬라는 듯, 개울가에 야외 쉼터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 개울도 예산을 들여 물고기가 헤엄치는 도랑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나? 혼자 사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농·어촌에 대한 정부의 배려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따뜻해졌다.
▼ 12 : 14. 용수사 일주문(이정표 : 수운정 7.8km/ 도산온천 2.8km). 정자와 화장실까지 갖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용수사의 부도전도 이곳에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선비순례길과 용수사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기 때문이다.
▼ ‘퇴계예던길’ 안내도도 보인다. 아까 온계종택에서 봤던 ‘안동선비순례길’ 안내도와 품은 내용이 얼추 비슷한데도 다른 제목을 달았다. 이왕에 ‘안동선비순례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알렸으니 탐방로에 설치된 시설물들도 이름을 통일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옛 이름이 더 마음에 든다면 새로운 이름은 이쯤에서 없애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 선비순례길 8코스는 일부 구간이 ‘퇴계 귀향길’과 겹친다. 안동 출신인 퇴계는 선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1568년 조정이 거듭해서 부르자 고향에서 상경했다. 그는 대제학으로 어린 임금을 보좌했으나, 낙향해 학문을 수양하며 만년을 보내고자 했다. 이에 퇴계는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한 끝에 1569년 3월 4일 일시적 귀향 허락을 받아냈다. 다음날 바로 길을 나선 퇴계는 임금의 배려로 충주까지 관선(官船)을 이용했고, 이후는 말을 타고 죽령을 넘어 도산서원에 이른다. 그 길이 지금의 ‘퇴계 귀향길’이다.
▼ 탐방로에서 약간 벗어나 있지만 ‘용수사(龍壽寺)’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대한불교조계종에 속한 ‘용수사’는 고려 의종 원년(1146년) 봉화의 각화사(覺華寺) 주지 성원(誠源)이 암자를 지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1164년 왕명으로 ‘용수사’란 사액(賜額)을 받아 화엄종단의 독립사찰이 되었다. 그러다 1895년 을미의병 와중에 전소된 것을 원행스님과 불자들이 힘을 합쳐 1994년 대웅전과 요사를 건립했단다.
▼ ‘수월루(水月樓)’로 올라가기 전 광장부터 살펴보는 게 어떨까 싶다. ‘육바라밀길’을 꾸며놓았으니 말이다. 팻말에 적혀있는 여섯 가지 덕목(보시·인욕·지계·정진·선정·지혜)을 의미하는 코스를 걷다가 열반에라도 들지 누가 알겠는가.
▼ 절간의 구조는 무척 단출했다. 산신각과 용왕전 등 꼬맹이 전각 두엇과 대웅전과 두 채의 요사에 공양간이 전부다. 하지만 대웅전이나 요사, 공양간은 총림에 있는 전각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인심도 절간만큼이나 컸다. 주지스님이 점심 공양을 하고 가라며 한사코 붙잡는 것이다. 차량 출발시간이 정해져 있다며 사양했지만 절간, 아니 안동에 대한 이미지까지 좋아지게 만든 기분 좋은 상황이었다.
▼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참! 이곳은 어린 퇴계가 학문을 연마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은 퇴계는 7세부터 용수사에서 공부했다. 조선시대는 유학을 숭상하는 분위기였으나 퇴계는 유교와 불교에 칸막이를 친 시대적 제약을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절간이 너무 커진 탓인지 당시의 면학 분위기는 느낄 수가 없었다.
▼ 12 : 32. 일주문으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들머리는 일주문에서 용수사 쪽으로 50m쯤 떨어진 지점에서 열린다. 초입에 ‘용두산 등산로’ 이정표(정상 1.9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하나 더. 이 코스는 선비순례길이 아닌 일반 등산로라는 것도 알아두자.
▼ 붉은색 선이 우리가 오른 코스다. 그 왼쪽에 있는 코스가 ‘선비순례길’이다.
▼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이정표(용두산 정상↑ 1.8km/ 용수사→ 02km/ 등산로 입구↓ 0.2km). 산길은 이렇듯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가파른 곳에는 계단이 놓여있고, 갈림길이라도 나올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두었다.
▼ 산길을 울창한 솔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지만 산길은 산길이다. 거기다 오랜만의 산행, 그것도 전보다 몸이 불은 탓인지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숨이 턱에 차오른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가 심신을 맑게 해준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 소나무가 많으니 ‘송이버섯’이 날 것은 어쩌면 당연, 그래선지 곳곳에 입산금지 현수막과 표지판이 붙어있다.
▼ 12 : 46. 지자체는 나처럼 힘들어하는 걷기 여행자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중간 중간에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 쉼터를 지나면서 산길이 가팔라졌다. 아니 버거울 정도로 가파르다는 것이 더 옳겠다. 나처럼 배가 나온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구간이 될 수도 있겠다.
▼ 13 : 02. 이번 쉼터에는 등산로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등산로 입구에서 이곳까지는 1.2km, 정상까지는 아직도 0.8km를 더 올라가야한단다.
▼ 임산금지 경고판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금줄까지 쳐놓은 곳도 수시로 나타난다. 하긴 송이 채취꾼들은 가을 한 철을 벌어서 일 년을 먹고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 산길은 전형적인 육산의 특징을 보여준다. 울창한 숲 때문에 조망이 트이지 않는데다 눈요깃거리도 없다. 이런 길은 한시라도 빨리 정상에 오르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오르고 또 올라도 정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기에 찾아갔더니, 행복은 그 다음 산 너머에 있다더라’고 했던가? 정상이려니 하고 올라서면 또 다른 봉우리가 어서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 13 : 16.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임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정표(용두산 정상↑ 360m/ 녹전,매정리←/ 용수사↓ 1.54km)가 정상이 코앞이라고 알려준다.
▼ 13 : 20. 또 한 번의 오름짓 끝에 능선에 올라선다. ‘굴티고개’라는 지명이 적힌 이정표(용두산↑ 240m/ 굴티고개← 3.8km)가 우리가 지금 ‘문수지맥’과 만났음을 알려준다. ‘만리산(萬里山)’에서 뻗어온 문수지맥은 용두산을 거쳐 ‘굴티고개’로 간다.
▼ 13 : 28 – 13 : 41.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만에 정상에 올라선다.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칡넝쿨과 억새 등이 주변에 쌓여있는 걸 보면 한두 달 전에 정비를 했던 모양이다.
▼ ‘용두산(龍頭山, 664.6m)’은 산의 모양이 용의 머리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머리 두(頭)’ 대신 ‘머리 수(首)’자를 쓰기도 하며, 용수사(龍壽寺)에서 이름을 따와 용수산(龍壽山)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참! 정상석 뒷면에는 ‘안동의 정기 용두산에서 발원하다’고 적혀 있었다.
▼ 정상에는 퇴계예던길(8코스) 안내도 말고도 문수지맥트레킹길(6구간) 안내도와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제단이 놓여있는 걸 보면 기우제도 지내는 모양이다. 참고로 ‘문수지맥(文殊枝脈)’은 백두대간 옥돌봉(1,244m) 서남쪽 280m 지점에서 분기, 서남진하며 문수산·용두산·학가산·보문산 등을 일구고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낙동강 본류에 합수되는 삼강나루터 앞에서 그 맥을 대하는 도상거리 114.5 km의 산줄기이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청량산 말고는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학가산과 일월산, 국망봉 등도 조망된다고 했다.
▼ 13 : 41.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하산길은 시작부터 거칠었다. 칡넝쿨이 허리춤까지 차올라 여름철에는 진행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 길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곳곳에 매달려있는 가이드리본이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오늘은 청마산악회 허총무님 것도 눈에 띈다. 퇴계태실에 다녀오느라 20분 정도 늦게 출발했더니 나보다 한참이나 먼저 이곳을 지나간 모양이다.
▼ 산길은 엄청나게 가팔랐다. 이런 곳에서는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집사람은 끝가지 스틱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 결과 손목 인대를 상한 그녀는 병원진료를 한참이나 받아야만 했다.
▼ 13 : 51. 그렇게 길 아닌 듯 길이었던 곳에서 한참이나 고생한 뒤에야 제대로 된 등산로를 만날 수 있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아까 정상에서 ‘문수지맥’을 잠시 따라가다 어느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갈려나왔더라면 수월했지 않나 싶다.
▼ 이후로는 별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아까 산을 올라올 때처럼 등산로 정비가 잘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정표를 세우는 등 기초적인 정비는 해 놓았다.
▼ 그렇다고 가파른 경사까지 없앨 수야 있겠는가. 거기다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무릎 관절이 약한 집사람은 죽을 맛인 모양이다.
▼ 길이 조금 수월해진 뒤에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주변 활엽수들이 이미 헐벗어버렸다. 제대로 된 단풍을 보지도 못했는데 잎은 이미 져버린 것이다. 올 가을을 ‘단풍 없는 단풍철’이라며 넋두리하던 어느 등산객의 인터뷰가 문득 떠오른다.
▼ 하산길이라고 해서 계속 내려가는 것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이렇게 올라가는 구간도 나타난다. 짧고 완만한 오르막에 길고 가파른 내리막의 연속이라고나 할까?
▼ 14 : 12. 그렇게 얼마를 내려갔을까 산자락이 앙상한 고사목들로 가득하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귀가해 확인해보니 2020년 3월 25일 이곳(도산면 운곡리 일대)에서 산불이 발생했다는 기사가 떠 있었다.
▼ 산불은 백해무익하다고 했다. 아니 좋은 점도 있기는 하다. 그 여파로 숲이 헐거워지면서 조망이 트이기도 하니 말이다.
▼ 경각심이라도 불러일으키려는 것일까? 화마로 쓰러진 나무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를 피해 에도는 것은 기본, 아래를 지나거나 심할 때는 나무를 타고 넘기도 한다.
▼ 산불 구간만 지나면 길은 수월해진다. 경사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납던 기세를 확 떨어뜨린다.
▼ 14 : 26. 길이 편해지니 심신도 편해진 모양이다.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으니 말이다. 그렇게 잠시 내려서자 이정표(수운정← 2.9km/ 용두산↓ 1.1km)가 이제 그만 능선에서 탈출하란다.
▼ 길이 더 완만해졌다. 널찍한 게 영락없는 임도다. 지자체에서 신경을 써가며 정비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조금 전 탈출지점에는 벤치까지 놓여있었다.
▼ 14 : 30. 잠시 후, 길이 잡초와 잡목으로 뒤덮이는가 싶더니 이내 임도로 내려선다. 아니 ‘용수골’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물이 흔한 골짜기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 날머리(임도와 접한)에는 이정표(수운정 2.2km/ 용두산 1.8km)가 세워져 있었다. 역방향으로 트레킹을 하는 경우 꼭 필요한 시설이라 하겠다. 어디로 들어서야 할지를 모를 정도로 웃자란 잡초가 길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라간다. 아니 주위가 온통 사과밭이니 농로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 사방이 온통 사과밭이다. 맞다. 안동사과는 전국 최대의 생산면적과 생산량을 자랑한다고 했다. 거기다 청정지역에서 비옥한 토질과 밤낮의 일교차가 큰 지리적 여건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자연 그대로의 맛과 신선한 향이 그윽하고 당도도 무척 높단다.
▼ 열매를 대롱대롱 매달고 있는 사과밭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유럽의 농촌지역을 여행하면서 고급 와인을 얻기 위해 서리가 내릴 때까지 포도 수확을 늦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안동사과도 뭔가를 위해 일부러 수확을 늦추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안동사과에는 ‘애이플’이란 브랜드가 있다. 안동사과 생산량의 1%에만 붙여주는 최고급 사과브랜드이다.
▼ 빨갛게 영근 사과가 군침을 흘리게 만든다. 하긴 한국소비자만족지수 ‘농·특산물 공동브랜드(사과)’ 1위를 8년간이나 지킨바 있는 귀하신 몸이니 어련하겠는가.
▼ 14 : 48. 작은 마을을 지나가기도 한다. 길의 이름이 ‘소정리길’인 걸로 보아 ‘소정마을’이 아닐까 싶다. 법정 동리인 ‘태자리(太子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다. 사과재배를 생업으로 살아가는.
▼ 15 : 00. 차도인 ‘태자로’와 만나는 곳에는 ‘소정마을 경로당’이 들어서 있었다.
▼ 이후부터는 ‘태자로’를 따라간다. 35번 국도상의 (태자리)버스정류장에서 ‘다랫재’까지 이어지는 군도(郡道)로, 행정구역인 ‘태자리(太子里)’에서 이름을 따왔지 않나 싶다. 태자리라는 지명은 또 신라의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갈 때 잠시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됐을 거고 말이다. 민초(民草)들은 자기 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구전(口傳)으로 1000년 뒤 후손에게 전한다. 지명과 전설로 말이다. 덕분에 역사책에 없는 마의태자 발자국은 이곳 안동에도 찍혀있다. ‘국망봉’에서 경주를 돌아봤는가 하면, ‘태자리’에서는 잠시 머물기도 했다.
▼ 15 : 08. ‘수운정’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50분을 걸었다. 앱이 12.05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아니 높이가 664.6m나 되는 용두산을 오롯이 넘은 점을 감안하면 무척 빠르게 걸은 셈이다.
▼ ‘수운정(水雲亭)’은 퇴계 이황의 제자 매헌(梅軒) 금보(琴輔, 1521-1586)가 60세 때 지은 건물이다. 물과 구름을 벗하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한다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참고로 금보는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낙향하여 성리학에 뜻을 두고 퇴계에게 수학했다. 글씨에 뛰어나 이숙량(李叔樑), 오수영(吳守盈)과 더불어 삼절이라 불렸으며, 퇴계묘비(退溪墓碑)·도산신판(陶山神版) 등을 썼다.
▼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의 일자형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는데다 담장까지 높아 자세한 내부구조는 확인할 수 없었다.
▼ 수운정은 8코스(마의태자길)의 종점이자 9코스(서도길)의 시점이다. 이와 관련된 시설(안내판 및 이정표)들은 수운정 앞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다.
▼ 수운정에서 시작되는 9코스(서도길)는 가송마을의 ‘고산정 입구’까지 7.4km를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간다. 그러다보니 특별한 얘깃거리나 가슴에 담을만한 풍광을 만나지 못한다. 그저 브랜드처럼 글씨를 공부하러 가는 선비의 마음으로 걸어야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걷는 걸 포기하고 산악회 황사장님께 부탁해 버스를 이용해 종점으로 곧장 갔다.
▼ 점심상은 ‘가송리 마을회관’ 앞 공터에 마련되어 있었다. 4코스 때도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고, 5코스는 이 근처에서 걷기 시작했다. 둘레길 도반들이 종점인 ‘고산정 입구’까지 다녀오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 마을회관 건너편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고산정(孤山亭)과 가송협(佳松峽)을 가장 확실히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다.
▼ 전망대에 서자 눈앞에 세외도원이 펼쳐진다. 어느 유명화가가 저리도 예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창조주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 내 느낌은 지난번 5코스 때 적었으니 이번에는 다른 분의 느낌을 잠시 빌려보자 <날아갈 듯 멋들어진 바위 절벽을 양옆에 끼고 맑게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고, 물 건너 바위 절벽 옆 물가에 멋들어진 소나무를 벗하여 앉아 있는 것이 고산정이다. 흐르는 물은 맑고, 물가 바위 절벽은 날아가는 듯하고, 정자가 자리한 곳은 아늑하다.>
▼ 퇴계는 고산정의 수려한 풍경을 보고 ‘그림 속(畵圖中)’으로 들어간다고 읊었다. 그런가하면 나귀를 타고 미천을 건너며 ‘맑고 맑은 여울(淸淸灘)과 높고 높은 산(高高山)’이 끊임없이 ‘사라졌다 다시 보이네(隱復見)’라며 지형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풍경을 표현했다. 산이 굽이치는 형세에 따라 물이 S자로 굽이치는 저런 아름다운 풍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표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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