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선비순례길 5코스(왕모산성길)

 

여행일 : ‘24. 10. 5()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가송마을 버스정류장고산정맹개마을백운지단천교(실제 출발지)항골 입구칼선대왕모당원천교(거리/시간 : 12km, 실제는 4.95km 2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가송마을 버스정류장(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로 영주까지 옵니다. 가흥교차로에서 36번 국도(봉화방면으로 19km), 금봉교차로에서 918번 지방도(청량산방면으로 15km), 도천삼거리에서 35번 국도로 옮겨 11km쯤 내려오면 가송리(佳松里)‘에 이르게 됩니다.

 고산정에서 낙동강을 따라 내살미 마을까지 내려가는 12km짜리 여정이랍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 낙동강은 왕모산을 넘지 못했고, 강을 건너지 못한 주변 산줄기들은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면서 맹개마을·단사마을 등 곳곳에 기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왕모산성길은 이런 기이한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걷는 여정이랍니다.

 차에서 내리자 강 건너에 위치한 고산정(孤山亭)’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옵니다. 안동팔경의 하나인 가송협의 단애 아래에 터를 잡았습니다. ‘금남수처럼 유유자적하기에 딱 좋은 자리라고나 할까요? 저곳은 최고 시청률 18.1%를 기록한 이병헌·김태리 주연의 24부작 tvN드라마 미스터션샤인(2018)’의 촬영지이기도 하답니다. 주인공 애신(김태리 분)과 유진(이병헌 분)이 배를 타고 오가던 아름다운 나루터 장면이 바로 고산정의 전경이랍니다.

 고산정은 정유재란 때 안동 수성장(守城將)으로 활약하여 좌승지에 증직된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지은 정자입니다. 금난수는 이황(李滉)의 제자로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는 데 힘썼으며, 1561(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봉화현감 등을 지냈습니다. 35세 때. 당시 선성현(宣城縣, 예안현의 별칭) 제일의 명승이던 가송협(佳松峽)에 고산정을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 한 채 유유자적하였다는 선비입니다.

 삼 칸 겹집의 팔작지붕인데 3m 가량의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얕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자연석을 가공 없이 주춧돌로 사용)를 놓고 기둥을 세웠습니다. 조선시대 정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더군요.

 낙동강의 상류인 가송협의 건너에는 송림과 함께 고산(孤山)이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룹니다. 그 아름다움에 푹 빠진 퇴계선생이 문인들과 함께 여러 차례 찾아와 영시유상(詠詩遊賞)을 즐겼다더군요.

 이 일대는 도산구곡  8곡인 고산곡(孤山曲)입니다. 협곡 모양새를 보여 가송협(佳松峽)’으로도 불린답니다. 고산정 주인장 금난수의 봉화금씨(奉化琴氏)’ 세거지인데, 퇴계의 후손인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 1755-1831) 도산구곡가에서 <팔곡이라 옥거울 같은 물가에 홀로 선 산(八曲山孤玉鏡開)/ 또렷또렷한 심법이 이 물가에 맴도는구나(惺惺心法此沿洄)>라며 그 아름다움을 읊었습니다.

 5코스(왕모산성길) 고산정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대형버스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마을 앞 버스정류장에서 종암종택 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잠수교를 건너면서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하나 더. 우리 부부는 다리를 건너는 대신 산악회 버스를 이용해 이육사문학관으로 이동합니다. 2주 전의 4코스(퇴계예던길)에 불참해서 3코스(청포도길)의 후반부를 못 걸었었거든요, 그 구간을 마치면 5코스의 중간쯤인 단천교에 이르기 때문에 5코스의 전반부는 답사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별 수 없이 몽중루 작가님과 허총무님 등 다른 도반들의 사진과 얘기를 종합해 빠뜨린 구간을 완성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가송리(佳松里)의 또 다른 자연부락. 이곳에서 왼쪽으로 400m쯤 올라가면 5코스(왕모산성길)‘가 시작되는 고산정입니다. 하지만 5코스의 잔여 구간이 오른쪽으로 나있으니 고산정을 둘러본 다음 되돌아와야 하겠지요?

 이후부터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갑니다. 고산구곡 중 고산곡을 이웃하며 걸을 수 있는 기분 좋은 구간이지요. 그런 길을 400m남짓 걸으면 월명정이란 정자가 나옵니다. 2020년에 지은 정자인데, 월명담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곳이라는 뜻이겠지요.

 이정표(칼선대 9.7km/ 고산정 0.8km)가 가리키는 칼선대 방향, 그러니까 낙동강의 강변으로 내려섭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深淵), 월명담(또는 월명소)은 그 푸른 색깔에서 조차 깊이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월명담 뒤의 저 절벽으로 길이 나있다는 점입니다.

 월명담(月明潭). 강물이 산줄기에 막혀 자 형태로 돌면서 벼랑 아래에 깊은 소()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보름달이 밝게 비춘다고 해서 월명담·월명소·월명당이라 했다나요? 용이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가뭄이 들면 고을 수령이 기우제를 올렸다고 전해옵니다.

 월명담은 낙동강 상류의 명승 중 하나로 꼽히는데, 퇴계는 달빛 쏟아지는 월명담을 비가 오게 하는 연못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윽한 늪이 있는 골짜기는 수려하고 맑은데(窈然潭洞秀而淸)/ 음침한 그 속엔 나무와 돌로 만든 진혼비가 있다네(陰嘼中藏木石靈)/ 열흘 동안 수심 겨운 여름 장마가 그치고 말끔히 개고(十日愁霖今可霽)/ 석양빛을 안고 집에 돌아와 누우니 달빛이 그윽하다네(抱珠歸臥月冥冥)>

 길은 강가 바위절벽을 따라 나있답니다. 바위절벽인데도 길을 낼만한 공간은 있었나 봅니다. 그렇다고 안전까지 확보할 수는 없었겠지요. 위태위태한 곳이 하도 많아 바윗길이 끝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니까요. 이런 길을 벼룻길이라고 한다나요? 아래가 강가나 바닷가로 통하는 벼랑길을 그렇게 부른다고 하네요. 아무튼 안전에 주의가 필요한 구간이지만 눈의 호사 또한 만만찮은 구간이랍니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이 일대는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루는 지형입니다. 때문에 물이 휘돌아나가는 곳마다 수십·수백 길의 단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길을 내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강안(江岸)의 바위절벽에 저렇게 벼룻길을 거쳐 놓았답니다. 치솟은 바위 벼랑을 에돌아가는 길로 딱 한사람이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랍니다.

 이즈음 벽력암(霹靂巖)과 학소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했습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편 절벽이 학소대, 그리고 왼쪽은 벽력암인데 저곳에는 전망대가 있답니다.

 벼룻길이 끝나면 다시 위로 올라가야만 한답니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5코스 최고의 전망대 중 하나인 벽력암 전망대를 만나기 위한 수고로움이니 참아야하겠지요?

 벼룻길은 벽력암 위에 만들어놓은 전망대에서 화룡점점(畵龍點睛)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가 하면, 거기에 강 건너 농암종택이 더해진다고 하네요. 농암종택은 원래 분천마을에 있었습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분천마을이 수몰되면서 저곳으로 옮겨졌다는군요. 그때 다른 곳에 있던 사당과 긍구당(肯構堂)도 함께 옮겨왔으며, 2007년에는 분강서원(汾江書院)도 재이건되었다고 하네요.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었음은 물론이지요.

 농암(聾巖)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호입니다. 연산군 시절 귀양을 갔다가 처형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죽음을 면했고, 중종반정으로 복직한 이후 주로 지방 수령으로 관료생활을 했습니다. 가끔은 중앙보직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지방 수령으로 봉직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도산면 분천리에서 태어났는데, 중종 임금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를 탔는데 고작 화분(花盆) 몇 개와 바둑판 하나가 전부였다는 일화는 나 같은 공직자(은퇴했지만)들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농암종택(聾巖宗宅)’. 안채·사랑채·대문채·별채·긍구당·명농당·사당 등 농암선생의 명성만큼이나 거대한 등치를 자랑합니다. 그중에서도 별당인 긍구당(肯構堂)’이 눈길을 끄는군요. 농암이 서경의 한 구절에서 취해서 당호를 지었는데, ‘조상들이 이루어놓은 훌륭한 업적을 소홀히 하지 말고 오래도록 이어 받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1542년 공직에서 물러날 때 경복궁과 한강의 제천정에서 전별연을 열어주었을 정도로 존경과 신망을 받던 자신을 닮으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조 유일의 정계은퇴식이었다니까요.

 분강서원(汾江書院). 1699년에 후손과 사림이 농암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2007년 현재 위치로 이건했는데, 강당(흥교당)과 동·서재 외에도 한속정사의 안채와 바깥채, 농암의 위패를 모신 사당(숭덕사) 등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있습니다. 서원의 왼편에 있는 작은 건물은 농암 신도비입니다. 농암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명종 20(1566)에 신남리의 농암 묘소 앞에 세웠는데, 2006년 현재 위치로 이전됐다고 합니다. 신도비란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으로 무덤 앞에 있는 게 보통입니다.

 맨 왼쪽에는 애일당(愛日堂)’이 있습니다. 2코스(도산서원길) 답사 때 지도만 보고 잘못 찾아갔던 그 문화재입니다. 아무튼 농암은 1512년 부모를 위해 저 별당을 지었습니다. 분강마을의 집에서 400m쯤 떨어진 곳에 귀먹바위가 있었는데 농암이 이름을 한자로 옮겨 자신의 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살아계신 나날을 아낀다는 의미의 애일당을 지었습니다. 농암은 1533년에 당시 94세였던 부친을 포함해 9명의 노인을 모시고 저곳에서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를 열었습니다. 농암 자신이 67세의 노인이었는데 더 연로한 분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때때옷을 입고 춤을 췄다고 합니다.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 것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강각(江閣)’인데 설명은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벽력암 전망대에서 내려선 길은 맹개마을로 이어집니다. 거칠게 내려오던 강줄기가 학소대를 돌아 완만해지면서 흙을 실어 놓는 곳에 맹개마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이 강 쪽으로 툭 밀려 나온 안쪽은 흡사 육지 속의 섬과도 같습니다. 그곳에 가족펜션인 소목화당(小木花堂)’이 있답니다. 휘돌아가는 낙동강 물길의 안쪽 예쁜 펜션이자, 주인 부부가 공들여 술을 담는 곳이랍니다. ‘진맥소주라는 브랜드의 전통주가 이곳에서 나온다더군요. ! gpx트랙을 살펴보니 월명담에서 맹개마을까지의 거리가 2.5km로 나타나고 있었답니다.

 술도가’. 주인장이 직접 재배한 100% 유기농 통밀로 소주를 만든다고 하네요. 자연 숙성실인 저 토굴로 들어가면 특유의 술 내음과 함께 오크통, 옹기 등에 담긴 술들이 한 눈 가득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진맥(眞麥)’은 밀의 옛말이랍니다. 그러니 진맥소주 맹개술도가에서 만든 소주의 브랜드이자, 유기농 밀로 만든 증류식 소주라는 자랑이기도 합니다. 가장 오래된 조리서로 알려진 수운잡방에 술 빚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 전통이 깊다고 합니다. 53도짜리가 자랑거린데, 미국 샌프란시스코 세계 증류주 대회에서 더블골드를 획득했을 정도라는군요.

 강 건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학소대(鶴巢臺)’라고 합니다. 건지산(577m)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로, 물길이 크게 휘어지는 바깥에 수직의 암벽으로 솟아있습니다. 예로부터 천연기념물인 오학(烏鶴. 먹황새)이 날아와 새끼를 치고 살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가로 줄무늬 퇴적층이 선명한 절벽에 학까지 날아들었으니 학소대라는 이름과 꼭 어울립니다.

 경암(景巖). 퇴계는 학소대와 맹개마을 사이에 우뚝 솟은 바위를 경암이라 부르면서 버릇대로 시 한 수를 읊었다고 합니다. 거센 물결 속에서도 천년 동안 변함없는 바위를 보면서 말이지요. <격한 물살 천년인들 다할 날 있으련만(激水千年詎有窮)/ 물살 가운데 우뚝 서서 기세를 다투누나(中流屹屹勢爭雄)/ 인생의 발자취란 부평초 줄기 같은지라(人生蹤跡如浮梗)/ 그 누군들 여기 서서 버틸 수 있으랴(立脚誰能似此中)>

 경암은 위가 상처럼 네모지게 평평한 바위입니다. 바위 주위로는 옥색 강물이 흐릅니다. 하지만 몽중루 작가님의 성에는 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특이할 게 없는 외모에 왜소하기까지 해서 퇴계선생님의 풍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맹개마을은 육지 속의 섬 같은 오지입니다. 산태극수태극의 지형이 마을 양옆을 수백 길 단애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농암종가에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네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소목화당의 주인에게 전화를 걸면 차고를 올려 튜닝한 SUV를 끌고 나오거나 트랙터에 손님을 실어 나른답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유인촌장관이 타고 있는 모습도 얼핏 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마저도 안 되면 배로 강을 건너게 해준답니다. 하나 더. 우리 도반(道伴)들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는 벼룻길을 통해 들어갈 수도 있기는 하답니다.

 맹개마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답니다. 늦은 여름에서 초가을이 특히 아름답다고 하더군요. 마을이 온통 매밀 밭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때쯤이면 하얀 메밀꽃이 소복이 피어나기 때문이랍니다. 그게 세외선경을 보는 듯 하다나? 맹개마을에서는 11월에 밀을 심어 이듬해 7월 수확하고, 밀을 수확한 땅에 메밀을 심어 가을에 수확하고 있다더군요.

 이렇게 고운 곳을 사람들이 그냥 놓아둘 리가 없습니다. 숙박예약이 힘들 정도로 인기랍니다. 하긴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이병헌과 김태리, 예능 인더숲의 세븐틴, 아마존TV ‘버터플라이의 대니얼 대 킴 등도 촬영차 찾았다가 한 눈에 반했다는데 어련하겠습니까.

 백운지로 넘어가는 길도 만만치가 않았던 모양이더군요. 끝없이 이어지는 통나무계단이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확 질려버립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요렇게 위험스런 벼랑길도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농암종택을 통해 맹개마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산자락을 빠져나온 길은 자연스럽게 백운지(白雲池)’로 이어집니다. 맹개마을에서 1.6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또 다른 오지마을이지요. 이곳은 몽중루님의 표현을 잠시 빌리겠습니다. ‘청량산을 내린 낙동강이 도산(陶山)에 이르러 큰 물굽이로 휘돌며 펼치는 작은 들녘 마을이라네요. 제방 따라 늘어선 대추와 밤나무 밭엔 붉은 대추와 알밤들이 툭툭대고, 모래땅 넓은 무밭에는 회전식 스프링클러가 돌며 연신 물을 뿌리고 있더라는 군요.

 백운지의 옛 이름은 백운동(白雲洞). 흰 구름이 넘나들며 청산과 녹수까지 세속의 기운을 넘어서버리게 만든다는 곳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흰 구름 대신 무의 푸른 잎으로 뒤덮여있습니다. <청산과 녹수는 이미 세속의 기운을 넘어섰고(靑山綠水已超氛)/ 그 사이로 희고도 흰 구름이 또 다시 밀려오네(更著中間白白雲)/ 고향의 소리 씻어내고 타고난 성품으로 돌아 가렸더니(爲洗鄕音還本色)/ 지령이 그 뜻을 알고 흔쾌히 허용하더라(地靈應許我知君)>

 백운지에서 1.5km쯤 걸어 나오면 단천교에 이릅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단사와 백운지를 연결하는 다리인데, 제가 5코스의 출발지로 삼은 지점이지요. 그래서 이후부터는 제 사진과 느낌, 기억으로 글을 적어가겠습니다.

 12 : 02. ‘단천교를 건너면서 ‘5코스(왕모산성길)’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단천교 앞에서 길이 둘로 나뉘는데, 다리를 건너면 ‘5코스(왕모산성길)’, 즉 공민왕 어머니가 피신했다는 왕모산성으로 가는 길로 연결되고, 왼쪽은 4코스(퇴계예던길)로 퇴계가 13세 때부터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 1469-1517)에게 학문을 배우러 청량산으로 다니던 길입니다.

 퇴계 오솔길은 예던길이라고도 하는데, ‘()’란 신발과 지팡이를 끌며 다니던 곳이란 뜻이라 하네요. 퇴계가 청량산에 가던 낙동강변의 길이기도 한데, ‘산태극수태극이란 말처럼 산이 굽이치는 형세에 따라 물도 S자로 굽이친다고 하네요.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학소대·월명담·고산정 등 수려한 풍경이 퇴계의 그림 속(畵圖中)’이란 표현처럼 한 폭의 동양화를 방불케 한다고 알려집니다. 아쉽게도 저는 그런 풍경을 가슴은커녕 눈에조차 담지를 못했네요. 언젠가 다시 한 번 찾아와야 하는 이유이지요.

 다리를 건너다 바라본 상류쪽 풍경입니다. 백운지 근처이니 저 어디쯤에 미천장담(彌川長潭)’이 있을 것입니다. 고산을 지난 낙동강이 S자를 그리며 돌아가는 곳에 만들어진 깊은 못을 말하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험하고 물이 깊어 물고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퇴계가 어린 시절 낚시하던 때를 떠올린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이곳에서 낚시하던 때를 돌이켜 보니(長憶童時釣此間)/ 삼십년 세월동안 벼슬 때를 묻히며 살았네 그려(卅年風月負塵寰)/ 이제 돌아와 보니 산수의 옛 모습을 알겠네 그려(我來識得溪山面)/ 그렇지만 산수는 내 늙은 얼굴 알란가 몰라(未必溪山識老顔)>

 반대편, 그러니까 하류쪽 풍경이겠네요. 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 왕모산이고 그 아래 산자락을 고산구곡  단사곡이 때리며 지나갑니다.

 12 : 06. 다리 건너는 묵시골 입구입니다. ‘급행버스가 다니는지 버스정류장에 노선도와 시간표까지 붙여놓았습니다.

 예던길 이정표인데 이름 모를 새가 방향을 알려줍니다. 옆에는 갓을 씌워놓은 선비순례길 이정표(왕모산주차장 4.9km/ 고산정 7.0km)도 세워져 있습니다.

 안동도 사과가 특산물인 모양입니다. ‘정일품(正一品)’이란 브랜드에서 그 자부심이 잔뜩 묻어납니다.

 탐방로는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갑니다. 강변에 바짝 붙어서 길이 나있는데 항골로 연결된다고 해서 항곡길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12 : 13. 강변을 떠나 산골짜기로 파고듭니다. ‘왕모산의 뒤쪽에 위치한 오지마을(몇 가구 살지 않는 항곡마을일 것입니다)로 들어가는 길이랍니다. 이왕에 왔으니 왕모산에 대해 살펴볼까요? 1361년 겨울, 중국 원나라가 쇠퇴하여 기울어갈 때 생겨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와 수도 개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려 말기 공민왕 시절인데, 왕은 알콩달콩 사랑을 엮어가던 원나라 출신 노국공주와 어머니를 모시고 추위를 견디며 멀고 먼 후방 지역인 안동까지 피난을 오게 됩니다. 이때 모후(母后), 그러니까 공민왕의 어머니가 머물던 곳이라고 해서 왕모산(王母山)’이란 이름이 붙었답니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꼬맹이 마을을 만났습니다. 두어 세대쯤 되는 규모인데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12 : 19. ‘항곡길과도 헤어졌습니다. 이제 산길이 시작된다는 얘기겠지요.

 이정표는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인 칼선대까지 2.7km가 남았다고 하네요. 아까 3코스를 걸어오면서 눈여겨보았던 풍경, 즉 깎아지른 산줄기와 낙동강 물줄기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놓은 수묵담채화의 그윽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퇴계선생 말마따나 그림 속으로 표현해도 나무랄 데가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곧 나타난답니다.

 임도는 가파르게 산속으로 파고듭니다. 꽤 힘들지만 그렇다고 버거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조금만 속도를 떨어뜨리면 되니까요. 그런 다음 퇴계의 마음이 되어 걸어보면 어떨까요. 이곳은 퇴계선생님의 고향이니까요.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새벽 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내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은 오솔길로 변합니다. 이후부터는 순수한 산길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지자체에서 정비를 잘 해놓아 보드라운 흙길이 널찍하기까지 합니다.

 탐방로가 산자락을 헤집으며 나있기 때문에 심심찮게 작은 골짜기를 건너기도 합니다. 하지만 목교가 놓여있어 장마철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곳은 산속. 위급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그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답니다. 곳곳에 국가지점번호판을 설치해놓아 신고전화만 하면 금방 찾아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무리 쉬워보여도 산길은 산길이랍니다. 그러니 체력이 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선지 곳곳에 벤치도 놓아두었군요.

 탐방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누빕니다. 향긋한 소나무 향기가 코끝을 스쳐갑니다. 그 속에는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가 가득할 것입니다. 조금도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정도로 소나무가 울창하니 틀림없이 송이버섯이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산길을 따라 줄지어 붙어있는 저 입산금지 표시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숲속에 들어가는 것은 삼가고 대신 길가에서 만날 수 있는 야생버섯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고사목이 심심찮게 나타났고, 그때마다 버섯들이 눈에 띕니다.  말발굽버섯도 그중 하나입니다. 혈당조절과 콜레스테롤 감소, 면역력 강화, 암 예방에 효능이 있다는 버섯입니다. 물론 눈에만 담아갑니다.

 요건 버터애기버섯? 가을철이면 눈에 띄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네요. 식용이라지만 이 또한 채취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12 : 49. 이런 첩첩산중에 웬 민가?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지 마당 아니 집 전체가 웃자란 잡초에 파묻혀 있습니다.

 이후부터는 데크 로드를 따릅니다. 산길이니 계단이 주를 이룸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계단을 두지 않고 경사만 주는 곳도 많습니다. 길을 낼 말한 처지가 아니다보니 어쩔 수 없이 통째로 데크 로드를 만들었나 봅니다. 흡사 다리처럼 말입니다.

 가끔은 비탈진 산자락을 헤집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길고 가파른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길이 오솔길로 변합니다. 비탈지지만 길을 낼만은 했던지 통나무계단을 깔아놓았습니다.

 13 : 05.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다리 모양의 데크 로드로 변해버립니다. 그만큼 왕모산의 사면이 비탈지다는 얘기겠지요.

 13 : 16. 데크로드에서 오솔길 갈려나가고 있습니다. ‘왕모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랍니다.

 이곳에는 이정표 대신 안내지도를 세워놓았습니다.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는 모두 4개인데, 이곳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1코스로 출발지는 원천교라는군요.

 13 : 18. 몇 걸음 더 걸으면 오른편으로 작은 봉우리 하나가 나타납니다. ‘칼선대로 오르는 길이니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20m쯤 더 가면 또 다른 입구가 나타나고, 그곳에는 이정표까지 세워져 있어 무심코 지나칠 일은 없겠습니다.

 왕모산 능선이 내려와 낙동강으로 떨어지며 폭이 약 1km쯤 되는 병풍바위를 빚어 놓았습니다. 그 바위능선의 위, 한 지점에 칼선대가 놓여있습니다. 봉긋한 봉우리가 칼끝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갈선대라고도 부르더군요. 갈선(葛仙)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신선이 된 갈현(葛玄)을 말합니다. 도교에서는 갈선공(葛仙公)이라 존칭하며 태극좌선공(太極左仙公)으로 높여 부르는 인물이랍니다.

 칼선대는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어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집니다.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 너머로 건지산과 청량산의 축융봉이 한꺼번에 펼쳐집니다. 발아래로는 단사마을의 들녘이 깔려있습니다. 예천의 회룡포나 안동의 하회마을 만큼은 아니어도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신선하면서도 아름답기 짝이 없습니다.

 갈선대 아래로는 단사협(丹砂峽)’이 흘러갑니다.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이 그 신비함을 묘사하기 위해 도교까지 끌어들인 곳이랍니다. <칠곡이라 휘감아 도는 한줄기 여울물(七曲縈迴一水灘)/ 갈선대와 고세대를 다시 돌아서 보네(葛仙高世更回看)/ 만 섬의 붉은 단사 하늘이 감춘 보배네(丹砂萬斛天藏寶)/ 푸른 절벽에 구름 일어 찬물이 서리네(靑壁雲生相暎寒)>

 하류 쪽 풍경입니다. 강 건너 저 능선에는 이육사가 광야의 시상을 떠올렸다는 윷판대가 있을 것입니다. 낙동강은 그 아래를 휘돌면서 속도를 확 떨어뜨린 다음 안동호로 들어갑니다.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왕모산(王母山)’이 성큼 다가옵니다. 높이는 648.2m.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경사가 매우 급해 천연의 요새로 알려지는 산이랍니다. 천혜의 피난처라고나 할까요?

 전망대에는 이육사의 ‘절정(絶頂)’ 시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곳까지 올라 절정의 시상을 가다듬었나 봅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3 : 22: 다시 산행을 이어갑니다. 잠시 데크 길을 따르는가 싶더니 이내 흙길로 변하는군요.

 통행금지 안내판도 눈에 띄더군요. 안전을 위해 바위 벼랑 안쪽으로 길을 내놓았지만, 바위벼랑 위를 지나 칼선대로 올라가려는 무모한 사람들도 있었나봅니다.

 길이 무척 가팔라졌습니다. 침목계단이 놓여있지만 집사람처럼 무릎이 시원찮은 사람들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구간입니다.

 13 : 29  13 : 41. 지자체도 그게 미안했던 모양입니다. 안부삼거리(이정표 : 왕모산주차장 0.79km/ 천곡지 1.53km)에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덕분에 우리 부부도 준비해간 치즈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답니다. 그러다 문득 이게 임하막걸리였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더군요. 안동쌀과 밀, 누룩으로 빚는다는 막걸리의 맛이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임하양조장은 무려 10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술을 빚어 왔다고 하지 않던가요.

 13 : 41. 선비순례길 이정표(왕모산주차장 1.1km/ 고산정 10.8km)가 가리키는 왕모산 주차장 방향으로 갑니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임도를 만납니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왕모당에서 제사를 올린다고 하더니, 제물 등을 운반하기 위해 놓은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3 : 44. 공민왕의 어머니를 모시는 왕모당(王母堂)’이랍니다. 이 일대는 공민왕계 신을 모시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청량산 꼭대기에 좌정한 공민왕을 중심으로 내살미의 공민왕 어머니, 북고리와 높은데의 부인, 가송리와 정자골, 등자다리의 딸, 새터의 사위와 같이 청량산 일대 20여 개 마을에서 공민왕계 신을 동신으로 모시고 있답니다. 이 중에서도 내살미·가송리·산성마을은 공민왕 신앙의 핵심지역이라고 합니다.

 왕모당은 공민왕의 어머니가 기거하던 터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내살미왕모당이나 공민왕어머니당으로도 불리는데, 내살미마을(원천리)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기 위해 공동으로 동신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그래선지 당집 안에 신체로 남녀 목신상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탐방로는 왕모당 뒤쪽 산봉우리로 올라갑니다.

 이 봉우리를 중심으로 왕모산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1361년 고려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왔을 때 축성했다는 전설 속의 성()입니다. 하지만 성은커녕 돌무더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전설은 그저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3. 50. 왕모산 등산안내도가 국가지점번호판과 함께 세워져 있네요. 뭔가 특이한 점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야가 툭 트이더니 낙동강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네요. 강폭을 한껏 넓힌 낙동강은 요 아래 내살미마을에서 안동호로 숨어듭니다.

 길이 또 다시 가팔라졌습니다. 어찌나 가파른지 그냥 떨어지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자를 쓰면서 고도를 낮추어갑니다.

 울창한 숲 사이로 원천교가 내려다보이네요. 원천리의 단사마을과 내살미마을을 잇는 다리랍니다.

 이후로도 산길은 한참이나 계속됩니다. 하지만 길이 고와서 걷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아니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걸을 수 있는 기분 좋은 솔숲 길이랍니다.

 14 : 06. 내살미 마을에 내려섭니다. ‘천사미(川沙美)’라고도 불리는데, 말 그대로 내()의 모래()가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는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얘기하고요. 중간의 모래 사()자만 억양이 들어가서 살이라는 말로 변하여 내살미가 되었답니다.

 14 : 08. 왕모산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됩니다. 주차장은 지자체에서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대학병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화장실에 유압식 흙먼지털이기까지 설치되어 있더군요. 이정표와 안내판은 기본이구요. 아무튼 오늘은 3코스 후반부와 5코스 후반부를 함께 걸었습니다. 소요시간은 3시간 10. 트랙이 8.96km를 찍고 있으니 느긋하게 걸었나봅니다. 아니 절반이 산길이었음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차장에 왕모산 등산로안내도가 세워져 있기에 게재해 봅니다. 5코스를 답사하면서 왕모산까지 다녀오시고 싶은 분들이 참조하면 되겠습니다.

 집사람의 표정이 오늘따라 더 활짝 피었습니다. 전 구간을 저와 함께, 거기다 느긋하게까지 걸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더 웃고, 더 떠들고, 그로 인해 더 행복했으니 그 표정이 어디로 가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