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국 동북부 여행

 

여행일 : ‘18. 6. 25() - 6.29()

여행지 : 중국 대련, 단동, 집안, 통화, 환인

일 정 :

6.25() : 대련(성해광장)

6.26() : 단동(압록강 철교), 집안(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환도산성)

6.27() : 통화(백두산 천지, 금강대협곡)

6.28() : 환인(오녀산성), 단동(유람선 투어)

 

여행 셋째 날 : 백두산 금강대협곡(錦江大峽谷)

 

특징 : 백두산의 화산 폭발로 인해 분출된 용암이 흐르면서 생긴 V자 계곡과 다양한 모양의 기묘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금강대협곡은 폭 100~200m, 깊이 80~100m 그리고 길이 70로 백두산 서파 관광의 또 다른 묘미로 손꼽힌다. 19877월 발견된 이 협곡은 아름답고 장중한 경관을 이루는 협곡만 해도 10에 이른다고 한다. 백두산의 화산폭발 때 용암으로 분출된 바위들이 풍화현상을 거치면서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 모양새에 따라 오지봉(五指峰), 여와봉(女臥峰), 장성봉(長城峰), 성보봉(城堡峰), 낙타쌍봉(駱駝雙峰), 쌍웅등봉(雙熊登) 등으로 불린단다. 사람들은 금강 대협곡을 사랑의 골짜기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곳은 선녀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곳이었고, 여덟 신선이 거주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서파의 상부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35분쯤 후에 금강대협곡 입구에 마련된 주차장에 이른다. 별도의 버스 요금을 낼 필요는 없다. 백두산 서파의 경우 입장료와 셔틀버스표를 구입하면 당일 내에 여러 번 환승을 해가면서 관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를 사서 안으로 들면 장백산 금강대협곡(長白山錦江大峽谷)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커다란 대문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안으로 들면 백두산의 다양한 식물군(植物群)을 만나게 된다. 화산 분출로 만들어진 지반(地盤)에 원시림이 우거져 있는 것이다. 데크로 만든 산책로는 그런 거대한 나무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나있다. 가문비나무, 백두산자작나무, 종비나무 등 종류도 다양한 나무들이 곧고 높게 자라고 있다. 공기 또한 맑고 상큼하다.




나이테로 나무의 수령을 알아보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생태학습장을 겸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수명(壽命)을 다하고 옆으로 쓰러져 죽은 나무들도 그대로 보존하여 진정한 원시림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저런 행위가 백두산 권역 전체가 유네스코에서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1989)되는 데 일익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나무를 소개는 것으로 여겨지는 안내판들도 여럿 보인다. 이름 아래에 학명까지 적어 놓았으나 관심을 두지 않기로 한다. 가뜩이나 한자에 약한 나로서는 간자(簡字)까지 해득(解得)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시의 숲길을 지나면 웅장한 V자 협곡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지만 주변의 나뭇가지에 가려 어설픈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선지 대피소로 여겨지는 건물 옆에다 안내판 하나를 세워두었다. 조금 더 가면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가 있단다.





이제부터 탐방로는 협곡을 따라 나있다. 관광객들은 절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만들어놓은 데크로드를 걸으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계곡을 관람하게 된다. 백두산 하면 천지와 주변 봉우리, 그리고 장백폭포 정도만 있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웅장한 협곡이 있다는 게 의외이다.





잠시 후 협곡은 제대로 된 얼굴을 내밀어준다. 그렇다고 너무 좋아할 필요는 없다. 조금 더 걸으면 더 나은 경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산불 진화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이곳은 기묘한 형태의 바위들과 에메랄드 빛 계곡수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협곡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 깊은 골짜기에는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서서 각기 모양을 뽐내고 있고, 굽이굽이 흐르는 물길을 따라 절벽 역시 웅장한 병풍처럼 위용을 자랑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이 저러하면 저 안에 내려가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길을 낼 수 없는 곳에는 출렁다리를 배치했다. 길지도 그렇다고 높지도 않으니 두려워하는 관광객 또한 없다. 다들 지금 걷고 있는 곳이 출렁다리라는 것도 잃은 채로 주변 경관에 취해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다.





협곡(峽谷)은 초목(草木)과 암석으로 앙상블을 이루고 있었는데 아주 깊고 길게 뻗어 있다. 암석은 모두 회색을 띠고 있는데 도끼날처럼 생긴 돌, 송곳처럼 뾰족한 돌, 그리고 협곡을 받치고 있는 형태의 돌기둥들이 줄지어 있다.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이 흐르는 동안 비바람에 모진 고통을 당했을 터인데도 아직까지 암석의 색깔이 용암 특유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금강 대협곡(锦江大峡谷)은 용암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협곡으로 독특하게 생긴 바위들이 볼거리다. 그 모양이 가지각색이어서 어떤 것은 낙타를 닮고, 어떤 것은 손가락을 닮았다. 이곳에는 화산이 폭발했을 때 동식물이 용암에 묻히면서 만들어진 화석이 많아서 당시의 생태를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하다고 한다.








계곡탐방로가 끝나면 출구 쪽으로 나가는 숲길로 연결된다. 이곳도 역시 원시에 가까운 숲이 계속된다. 잠시 후 커다란 소나무 앞에서 홍송(紅松)이라고 적힌 팻말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그 아래에다 ‘Pinus koraiensis Siebold & Zucc’을 적어놓았으니 잣나무가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팻말까지 달아두었을까? 곁에 紅松王이라고 적힌 또 다른 팻말을 세워둔 걸로 보아 잣나무치고는 보기 드물게 굵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조금 더 걸으면 거대한 고사목(枯死木) 아래에 세워진 안내판 하나를 만난다. 뭔가 사연이 있는 모양인데 간자(簡字)로 적혀있어서 그 내용을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그 아래에 ‘populus koreana rehd’라고 적혀있는 걸로 보아 물황철나무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무가 품고 있는 사연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또 다른 안내판을 만난다. 이번에는 아예 초서(草書)로 이름을 적어놓았다. 앎이 깊지 않은 나로서는 난감한 순간이다. 아무튼 나무의 생김새로 보아 송화연(松樺戀)이라고 쓴 것도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면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서로 어울려 뿌리와 뿌리, 가지와 가지가 한데 부둥켜안고 있는 저 형상과 맞아떨어질 테니까 말이다. 또 다른 표현을 빌리면 연리지(連理枝)가 되지 않을까? 그래선지 리본에다 이름을 적어 이 나무에 걸어두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전해진단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가끔은 야생동물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요놈들이 사람 무서워 할 줄을 모른다. 그 덕분에 재롱떠는 모습을 한참이나 구경하다 나왔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출구에 이른다. 출구에는 금강대협곡을 다시 찾아 줄 것을 바란다는 내용이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글쎄다. 이런 정도의 볼거리를 가지고 다시 찾아온다는 확약은 못하겠다.




에필로그(epilogue), 유럽 여행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3대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오간다.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들러보게 되는 3대 볼거리. 오줌싸개 동상인어공주‘, ’로렐라이 언덕이 하나같이 보잘 것이 없다는 것을 에둘러서 하는 말이다. 이번 백두산 여행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과 만났으니 그게 바로 금강대협곡이 아닐까 싶다. 깊이 700m에 폭이 200m, 그리고 길이가 15인 협곡으로 `동양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기에 기대를 많이 했는데 그 기대에 한참을 못 미쳤기 때문이다. 그동안 섭렵했던 많은 계곡들은 물론이고, 이 글을 쓰기 직전에 다녀온 같은 중국 땅에 들어있는 태항산대협곡에도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왜소하기 짝이 없었다.

여행지 : 중국 동북부 여행

 

여행일 : ‘18. 6. 25() - 6.29()

여행지 : 중국 대련, 단동, 집안, 통화, 환인

일 정 :

6.25() : 대련(성해광장)

6.26() : 단동(압록강 철교), 집안(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환도산성)

6.27() : 통화(백두산 천지, 금강대협곡)

6.28() : 환인(오녀산성), 단동(유람선 투어)

 

여행 셋째 날 : 백두산 천지(白頭山 天池)

 

특징 : 단군 신화가 서린 백두산(장군봉, 2,750m)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그 중앙부에 넓고 파란 호수인 천지(天池)가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회백색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 7개는 중국에 속하며, 3개는 국경에 걸쳐 있다. 절반 정도는 우리네 땅이라는 얘기이다. 그런데도 우린 중국 땅을 거쳐야만 천지에 오를 수가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의 땅,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우리네의 현실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바쁜 모양인데, 그 바람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져 중국 땅을 거치지 않고도 천지의 아름다운 경관들을 구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참고로 백두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산해경, 山海經)은 불함산(不咸山)으로 적고 있다. 이후 기록에는 단단대령(單單大嶺개마대산(蓋馬大山태백산(太白山장백산(長白山백산 등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문헌에서 백두산(白頭山)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하여 '백두산'의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본격적으로 숭상한 것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고 추정된다.


 

통화를 출발한 버스는 4시간 남짓이 지난 후에야 해발고도가 900m나 되는 서파(西坡) 입구 주차장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서파의 파()는 언덕을 뜻한다. 그러니 서파는 서쪽으로 향하는 언덕 코스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먼 거리라 하겠다. 아니 비행기에서 내렸던 대련에서부터 계산해보면 실로 어마어마한 거리를 달려온 셈이다. 그렇다고 백두산을 찾는 사람들 모두가 다 그런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2008년에 문을 연 장백산공항을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파에서 18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여름 성수기에는 인천에서 장백산공항까지 직항 전세기가 운행된다니 말이다. 조선족자치주인 연길(延吉) 공항을 이용하더라도 대련보다는 훨씬 더 편하게 백두산을 둘러볼 수 있다. 참고로 이곳 서파보다 훨씬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북파(北坡)의 베이스캠프 도시는 이도백하(二道白河이다. 북파 입구에서 30km쯤 떨어져 있다. 북파 외에 남파(南坡) 코스도 있으나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아직은 인프라가 덜 발달되어 불편하다하니 거론하지는 않겠다.




관리사무소 앞에는 엄청나게 큰 표지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백두산(白頭山)‘이 아니라 장백산(長白山)‘이란다. 조금은 서운하지만 두 나라의 경계선 위에 놓여있으니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거야 그들 마음일 것이다. 다만 남의 나라 땅을 통해서 우리네 영산(靈山)을 올라야만 하는 상황을 탓할 수밖에... 참고로 머리가 하얀 산이란 뜻의 백두산은 화산 활동으로 생성된 흰색 부석(浮石)이 온 산을 뒤덮고 있어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1년 중 겨울이 230일 이상으로 정상에 흰 눈이 쌓여 있는 기간이 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중국인들은 백두산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같다.



너른 주차장을 빙 둘러 커다란 패널(panel)들을 세워놓다. 백두산의 아름다운 경관들을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편의시설들에 대한 광고판도 보인다. 이곳은 장백산 서경구(長白山 西景區)’,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유명 관광지이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들머리에 관광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천지와 고산화원, 금강대협곡, 금강폭포, 왕지 등 이곳 서파코스에 들어있는 관광명소들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투어를 시작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표를 사서 안으로 들면 원시림을 헤집으며 내놓은 산책로가 관광객들을 안내한다.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나이가 많이 들어보이지도 않지만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삼림(森林)이 울창하기 짝이 없다.



숲을 통과하면 검표소(檢票所)가 나온다. 이곳에서 검표를 마친 사람들은 셔틀버스를 타고 옥주봉 아래 해발 1,570m 지점에 만들어놓은 상부주차장까지 올라가게 된다.



천지를 보기 위해서는 셔틀버스를 타고 40km의 거리를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야만 한다. 이 길을 따르다보면 해발고도에 따라 식생(植生)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출발지점에는 소나무 등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자작나무와 작은 나무들로 바뀌는 것이다. 이보다 더 오르면 산은 드디어 초본식물(草本植物)들만이 자라는 공간으로 변해버린다.



40여분 후에 내리게 되는 주차장에서 본 주변은 작은 나무와 풀만이 존재한다. 흡사 초원에라도 들어온 느낌이다. 옥주봉 정차장의 높이가 2,200m나 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바람이 세차게 부는가하면 기온도 뚝 떨어진다. 차에서 내린 관광객들마다 두꺼운 파카 등 겨울옷을 입느라 분주하다. 우리 부부도 화장실을 다녀온 후 바람막이 옷을 덧입었다.





이젠 정상으로 향할 차례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전체가 계단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그 끝을 보이지 않는 채로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하긴 1,442개에 이른다니 끝이 보일 리가 만무하다. 아득하기만 한 정상을 향해 길을 나선다. 저 계단을 다 올라야만 정상에 이를 수가 있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건 그렇고 북파(北坡)는 걷지 않고도 천지까지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셔틀버스를 타고 주봉 승차정류장(主峰乘车站)까지 간 다음에 지프차로 갈아타고 천문봉(天文峰, 2,679m) 아래에 있는 전망대(展望臺)까지 올라간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비룡 폭포(飛龍瀑布) 옆에 있는 등산로를 이용해 걸어 올라갈 수도 있었는데 지금은 등산로가 완전히 폐쇄되어 지프차를 이용해야만 한단다.




계단은 두 줄로 놓여있다. 하나는 나무계단, 다른 하나는 돌계단이다. 원래의 돌계단이 밀려드는 인파를 해결 못하자 나무계단을 하나 더 놓은 게 아닐까 싶다.



계단의 입구에는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정상까지의 거리가 900m라면서 총 1442개의 계단이 놓여있단다. 내딛는 발걸음을 조심하라는 당부까지 잊지 않고 적어 넣었다.



계단이 완만하기 때문에 오르는데 크게 힘이 들지는 않는다. 그래선지 계단에 적힌 숫자까지 눈에 들어온다. 130. 135, 140... 다섯 개 단위로 숫자를 적어놓아서 자신이 어디쯤에 오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길가에 가마가 놓여있다. 가마꾼으로 보이는 사람이 계단에 걸터앉아 있는 걸로 보아 오르다가 힘이 부치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가마는 주로 몸무게 때문에 산에 오르기 힘든 사람들이 이용한다. 하지만 가마꾼들에게는 이들이 기피의 대상이란다. 그렇다고 뚱뚱한 사람들이 가마를 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저 가마꾼들은 손님이 타지 않으면 끼니를 굶을 수도 있을 것이니 아이러니(irony)라 하겠다.




잠시 후 날씨가 우중충해지기 시작한다. 비가 내리기 전에 천지에 이르겠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올라본다. 등산으로 단련된 우리 부부인지라 큰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이내 비가 내리고 말았다. 준비해온 우의를 입고 달리다 걷기를 반복해가며 빠르게 올랐다.





오르는 길목에는 폭설이나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가림막 시설도 해놓았다. 난간에 빗대어 장의자를 만들어 놓았는가하면 천지의 사계(四季)를 담은 사진을 게시해 두었다.





좌우 산자락은 나무 한 그루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적 작은 초본식물(草本植物)들만 보일 따름이다. 해발 2,000m를 훌쩍 넘기는 곳이라서 나무가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긴 겨울이 매우 길고 추우며 여름철에도 20를 넘기지 않는데다, 특히 겨울철에는 -47까지 기온이 내려가기도 한다니 어찌 나무가 자랄 수 있겠는가.




산자락에 주아료(珠芽蓼)’의 자생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아래는 ‘polygonum viviparum L.’라고 적혀있다. 학명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초본류인 씨범꼬리로 불리니 참조한다. 간염, 장염, 만성기관지염, 구강염, 인후염 등에 약효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서 자생하는가 보다.



푯말 근처에서 야생화를 만났다. 백두산은 산자락에 초지가 형성되어 있는 탓에 저런 희귀 야생화가 많이 자생한단다. 담자리꽃나무, 각시투구꽃 등의 한대성 식물과 금방망이, 분홍노루발풀 등 냉대성 식물을 볼 수 있다는데 야생화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그게 다 그거로 보일 따름이다.







계단의 끄트머리에는 묘한 문구의 안내판이 하나 세워져 있다. 해발 2,470m인 이곳의 높이를 적어놓고, 그 위에다 등정성공(登頂成功) 아진봉(我真棒)이라고 적고 그 오른편에는 엄지를 세운 주먹을 그려놓았다. 정확하진 않지만 등정 성공, 엄지 척!’이 아닐까 싶다. ! 그러고 보니 올라오면서 만났던 알쏭달쏭한 글들도 이제 반 왔다’, ‘이제 3분의 2 왔다등이었던 모양이다.



20분 정도 걸려 오른 산정에는 커다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북한과 중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에 세운 경계비란다. 빗돌의 숫자 ‘37’‘37호 경계비를 뜻한다. 통상 ‘5호 경계비라고 부른다. 1990년에 세운 비에는 ‘5’라고 적혀 있었는데, 2009년에 바뀌었단다. 북한과 중국이 국경공동조사위원회의 조사를 거쳐 2009년에 경계비를 갱신하고 번호도 바꾸었다고 한다. 37호 경계비에서 반대편 자하봉과 쌍무지개봉 사이에 있는 ‘38호 경계비(통상 6호 경계비)’를 직선으로 이으면 천지를 가르는 북·중 국경선이 된다. 9월의 ·북 정상회담과 이어 열린 ·미 정상회담의 훈풍이 국경선의 긴장감을 조금씩 녹이고 있다. 대북 경제제재가 풀리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야 가능하겠지만,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조업 재개와 백두산 관광 개시를 기대하게 만드는 분위기만으로도 반갑다. 대립과 긴장의 국경선이 우호의 접합점, 나아가 양쪽의 영역을 넓혀주는 확장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참고로 백두산의 60%는 중국 땅이고 40%만이 우리나라 땅이라고 한다. 1962년에 중국과 북한 정부가 영토의 경계를 나눈 결과란다. 하지만 가장 높은 장군봉은 우리나라 땅에 위치하고 있다. 그 덕분에 올라가볼 수가 없지만 말이다.




경계비를 중심으로 북한 쪽은 텅 비어 있고, 중국 쪽에는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북한쪽은 사람들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쳐놓았기 때문이다. 이곳 서파(西坡)는 지난 920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함께 오른 곳의 대척점으로 보면 되겠다. 남과 북이 애초 약속대로 시행했다면, 북한 쪽으로 백두산을 오르는 게 소원이었다는 문대통령의 꿈은 앞당겨 이뤄졌을 터다. ·북은 20057월 개성 및 백두산 관광을 추진하기로 합의했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때의 ‘10·4 선언’(6)에서는 백두산 관광을 위한 직항로를 열기로 했으며 그해 11월 현대아산과 북한 아태평화위원회가 관광 합의서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곧이어 정부 합동실사단의 현지답사까지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20087월 금강산관광 중단을 시작으로 남북관계가 끊기면서 미뤄졌다.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정상에 만들어놓은 널따란 전망대는 혼잡한 저잣거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한국인들이다. 떠들썩한 소리가 온통 우리나라 말인 것이다. 가끔은 악센트 강한 중국어가 들리기도 하지만 아주 드문 편이다. 흡사 우리나라에 있는 유명관광지에라도 온 느낌이라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관광지들은 대부분 한국인들이 먹여 살린다고 하던 어느 기자의 말이 생각난다. 하물며 이곳은 한민족의 영산이라는 백두산이 아니겠는가.



서파에서의 조망은 북파보다 한 수 위라고 했다. 북파보다 완만한 지세에서 천지를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사위는 온통 구름에 잠겨버렸다. 구름이 얼마나 짙던지 10m만 떨어져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저 전망대 옆에 있는 바위봉우리만이 구름 속에서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하고 있다. 문득 현지 가이드들 사이에 바이블(Bible)처럼 떠돈다는 천지는 삼대가 공덕을 쌓아야만 볼 수가 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그만큼 제대로 된 천지를 만나는 게 어렵다는 얘기일 것이다.



천지 방향의 난간 앞에 섰다. 가슴이 쿵쾅대고 숨이 멎는 듯 했다. 하지만 눈앞은 텅 비어있다. 아니 짙은 구름만이 가득할 뿐이다. 웅장하고 푸르며 고요할 천지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언젠가 자연이 허락한 사람만이 천지를 볼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맞았던 모양이다. 30분을 기다려봤지만 날씨는 끝내 개이지 않았다. 하긴 1년 중 천지를 볼 수 있는 날이 고작해야 40여 일에 불과하다니 어쩌겠는가. 그저 천지에 대한 상식이나 떠올려 볼 뿐이다. 천지는 화산폭발이 빚어놓은 산물이다. 260만 년 전에 분출한 용암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면서 넓은 면적의 평탄한 땅을 만들었고, 용암이 다시 분출하면서 높은 봉우리를 형성하였다. 그 후 대규모 폭발이 일어나면서 분화구(噴火口) 주변이 무너지고 넓어졌으며 그곳에 물이 고여 천지가 되었다고 한다.



구름으로 인해 보지 못한 천지의 실경(實景)을 다른 분의 사진으로나마 대신해 본다. 백두산 천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칼데라 호수(Caldera Lake)’이다. 화산 분출 후 화구가 함몰되면서 생긴 호수를 칼데라호라고 하고 화산 분출구에 물이 고여 생기는 호수를 화구호(火口湖, crater lake)‘라고 한다. 한라산 백록담은 화구호이고 백두산 천지는 칼데라호이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넓은 칼데라 호수는 인도네시아에 있는 토바호수(Lake Toba)‘ 수심이 500m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백두산의 천지도 최대 수심이 384m나 되며, 평균 수심도 213m로 그에 버금간다고 한다. 둘레 14.4에 수량은 20억 톤에 달한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내려오는 길 쭈그리고 앉아 카메라의 셔터를 열심히 눌러대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꽤나 많은 종류의 야생화들이 사방에 피어났다. 문득 얼마 전 술자리에서 만난 지인(知人)이 침을 튀겨가며 떠들어대던 얘기가 생각난다. 천지로 오르는 코스가 남··북 등 세 곳이나 되는데도, 굳이 이곳 서파(西坡)를 찾는 가장 큰 이유가 6~8월 들판에 만발한 야생화를 보기 위해서라던 얘기가 말이다. 야생화가 사라진 계절에는 그 아름다움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그런 꽃 잔치를 볼 수가 없었다. 가이드가 야생화들이 꽃 잔치를 벌인다는 고산화원(高山花园)을 투어 코스에서 아예 빼버렸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꽃이 피지 않았단다. 해발고도가 더 높은 이곳에도 저렇게 꽃이 피어났는데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패키지여행이라는 게 본래 가이드 맘대로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큰원추리와 하늘매발톱, 개불알꽃 등 1,800여 종의 야생화가 자라고 있는 고산화원은 7월 중순에서 8월 초에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매년 7월 초에는 야생화 축제까지 열린단다.







되돌아 내려온 상부 정차장에는 어느새 먹거리촌이 들어서있다. 하지만 난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입이 짧은 탓에 자칫 배탈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휴게소까지 지나칠 수는 없었다. 기념품은 물론이고 음료수와 과자, 초콜릿, 옥수수 등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사람을 옥수수, 난 캔 맥주 하나를 주워들고 정차장으로 향한다. 요기는 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틀을 머물렀더 통화의 한림원호텔(瀚林園, Hanlinyuan Hotel), 통화(通化)시는 중국 길림성(吉林省)에서 세 번째(장춘과 길림 다음)로 큰 도시로써 예로부터 인삼의 고장’, ‘한약의 고장’, ‘우수한 쌀의 고장’, ‘와인의 고장’, ‘스키의 고장등 여러 가지 별명으로 불리어왔다. 특히 고구려 유적이 몰려있는 집안(국내성)도 통화지구에 속하기 때문에 고구려 유적의 고장라고 불리기도 했다. 때문에 우리나라 여행자들에게 있어서는 백두산과 고구려 유적지를 잇는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숙소 또한 이곳을 이용하게 된다. 볼 만한 관광지는 비록 없지만 집안에 비해 숙소가 많고 요금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호텔은 우리나라 모텔수준으로 보면 되겠다. 하지만 객실은 두 사람이 쓰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널찍하고 와이파이까지 사용이 가능하다. 커피포트가 비치되어 있어 커피를 타거나 라면을 끓여먹는데도 불편함이 없다. 세면도구 또한 완벽히 갖추어져 있다.



에필로그(epilogue), 숙도로 돌아오는 버스, 천지를 구경 못한 관광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시무룩한 표정이다. 이때 스피커를 통해 가이드의 조크가 들려온다.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를 아느냐는 것이다. 그리고는 백 번을 올라야만 천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맞다. 높은 고도 탓에 백두산의 날씨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 바뀐다. 그러니 속살을 보는 일이 어디 그리 쉽겠는가. 그 말을 듣고도 얼굴이 풀리지 않았던지 또 다른 질문이 건네진다. 천지에 괴물이 있다는 게 사실이겠느냐는 것이다. 대답은 반반, 하지만 그의 대답은 아니란다.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천지의 괴물 이야기는 중국 정부가 백두산 관광객의 유치를 위해 유포하는 치밀한 계산이라는 것이다. 설마 정부차원에서 그런 일을 저지르겠는가마는 마냥 웃고 넘길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그건 그렇고 2016SBS-TV물은 생명이다탐사팀에서도 백두산의 수질에 대한 정밀검사를 한 일이 있었다. 결론은 너무 추워서 큰 괴물의 생존 가능성은 도저히 없다로 났다는 것도 알아두는 게 좋겠다.

여행지 : 중국 동북부 여행

 

여행일 : ‘18. 6. 25() - 6.29()

여행지 : 중국 대련, 단동, 집안, 통화, 환인

일 정 :

6.25() : 대련(성해광장)

6.26() : 단동(압록강 철교), 집안(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환도산성)

6.27() : 통화(백두산 천지, 금강대협곡)

6.28() : 환인(오녀산성), 단동(유람선 투어)

 

여행 둘째 날 : 집안의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

 

특징 : 집안 분지(盆地)에는 하해방고분군(下解放古墳群)과 산성하고분군(山城下古墳群), 우산하고분군(禹山下古墳群), 만보정고분군(萬寶汀古墳群), 칠성산고분군(七星山古墳群), 마선구고군분(麻線溝古墳群) 등 모두 6개의 고분군(古墳群)이 설정되어 있는데, 이를 모두 합쳐 통구고분군(洞溝古墓群)이라 한다. 오늘 둘러보게 될 광개토대왕비와 능(태왕릉), 그리고 장수왕릉(장군총)은 우산하고분군에 위치하고 있다. 이 밖에도 각저총(角抵塚)과 무용총(舞踊塚), 사신총(四神塚), 우산하 41호분과, 배총(陪冢), 오회묘 4호분, 오회묘 5호분, 마조총(馬槽塚), 산련화총(散蓮花塚) 등 우리들에게 익숙한 고분들이 이곳 우산하고분군 안에 산재되어 있다. 장군총과 태왕릉을 비롯한 고구려 중기의 대형 기단식적석묘와 고구려 후기의 대표적 봉토석실벽화분들 대부분이 이 고분군에 속해있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각 유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사진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꼭 보고 싶어 하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로 향한다. 집안시(集安市)의 동북(東北)쪽에 있는 우산하고분군(禹山下古墳群)에 조성된호태왕비 경구(好太王碑 景區)‘로 가면된다. 이 경구에는 그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다는 고구려의 제19대 태왕(太王)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과 대왕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서면 호태왕비 경구(好太王碑 景區)’를 설명해놓은 안내판이 나온다. 광개토대왕비 비문(碑文)의 탁본을 가운데다 놓은 다음, 왼편에는 해동 제일의 고비(古碑)라는 능비(陵碑)에 대한 설명을 한자와 영어, 한글, 일어의 순서로 나열해놓았고, 오른편에는 경구(景區)의 안내도를 그려 넣었다.






지도를 살펴보다가 능비로 향하는데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그리고 호흡까지 거칠어진다. 하긴 어디에 내놓고 자랑해도 하등에 꿀릴 게 없는 훌륭한 조상에게 다가가는 길이니 어찌 마음이 급해지지 않겠는가. 거기다 외국에만 나오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는 얘기도 있지 않는가.



잠시 후 능비(陵碑)의 앞에 선다. 유리로 사방을 둘러싼 보호각(保護閣) 안에 들어있는 저 비석을 중국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부른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대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 하는 것이다. 이 비석이 발견된 것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封禁)이 해제된 이후인 1877(청나라 광서 3) 일이다. 만주족인 청나라가 자신들의 발상지를 거주금지지역으로 정하면서 집안 일대도 그에 포함시켰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비석만이 있었으며 현재의 단층형 비각은 중국 당국이 새로 세운 것이란다. 아무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광개토대왕비는 인위적으로 다듬어 규격이 딱 떨어지는 비석이 아니라 더 웅장하고 자유로운 기개가 돋보인다. 그 자연스러운 형태에서 고구려인들의 자유롭고 호방한 기질을 엿볼 수 있었다.



비각 안에는 거대한 비석(碑石) 하나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올랐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이 왕 2(414)에 부왕(父王)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도읍인 국내성(길림성 집안시 통구성)에 세운 비이다. 1,600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보낸 셈이다. 높이가 6.39m인 비()는 전면(全面)이 모두 검은데 그 사면에 총 441,775개의 글자가 주먹만 한 크기의 한자로 촘촘히 들어섰다. 들어선 글자 하나하나에는 광개토대왕의 업적, 그리고 고구려의 역사가 담겨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머리에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부터 광개토대왕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고구려가 계승·발전되어 왔는가를 소개한다. 두 번째 부분은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을 연대순으로 기록했다. 세 번째 부분에는 무덤을 지키는 수릉인(守陵人)의 출신지와 차출 방식 및 수릉인의 매매 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새겨 놓았다.



비각 안에서는 사진촬영을 할 수 없다. 그저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억지 논리로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는 나라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 아니겠는가. 자신들의 땅도 지켜내지 못했던 우리네 역사를 탓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이 비석이 발견되자 많은 서예가와 금석학자(金石學者)들이 탁본을 만들었다고 한다. 비석의 위에 종이를 붙여 나타난 윤곽대로 그려낸 뒤 먹을 칠하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法)’ 방식으로이다. 어린 시절 붓글씨를 연습을 할 때 아래 글씨가 다 보이는 습자지를 위에 놓고 그대로 글씨를 쓰던 방식으로 보면 되겠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정교한 탁본을 얻을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좀 더 정교한 탁본을 얻기 위해 불을 피워 비석 표면에 낀 이끼를 제거했는데 이게 돌이킬 수 없는 논란의 불씨가 되어버렸다. 일련의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고, 또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알 수 없게 된 글자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얘기는 귀에 박힐 정도로 들었을 터이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그저 고구려의 땅을 잃지 않고 이 비석의 존재를 일찍이 알았더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성찰(省察)로 대신해본다.



비석의 주인공인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고국양왕(故國讓王)의 아들로 이름은 담덕(談德)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했다(生而雄偉, 有倜儻之志)고 한다. 서기 391년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이 열여덟에 왕위에 올라 정벌에 나섰다. 그해 7월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하였고 9월에는 북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00명을 생포하고,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백제와의 싸움은 재위 4년까지 계속되는데 매번 승리했음은 물론이다. 재위 11년부터는 연()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리고 재위 22년에 대왕이 붕어하자 시호를 광개토왕이라 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내용을 간추린 것인데 비문에는 이러한 대왕을 기록하고 있다. 대왕이 다스렸던 22년 동안 고구려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였으며 군사력이 최강이었다고 한다. 비문에는 무위가 천하에 떨치고,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작을 이루었다라고 적고 있다.



비각의 옆에는 비석에 대한 안내문 외에도 표석을 하나 더 세워두었다. 중국에서도 호태왕비를 현존 최고(最古), 문자가 가장 많은 고구려 고고사료로 중시하고 있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고구려의 역사를 자기네들 것이라고 우긴다. 고구려에 고유문자가 없었고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또한 죄다 한문으로 되어 있는 점을 들며 중화왕조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지방정권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유적이 남의 나라 땅에 있다 보니 머리 터지게 싸울 수도 없는 일이고, 그저 우리네 것을 지켜오지 못한 회한(悔恨)에 가슴만 칠 따름이다.




이젠 태왕릉으로 가야할 차례이다. 광개토대왕비 서남쪽으로 200~3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바로 근처란 얘기이다. 두 지역 사이에는 나무를 심고 잔디를 가꾸어 공원처럼 꾸며놓았다.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다 하겠다.



5분쯤 걸었을까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그렇다고 어디로 갈지를 놓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이 왕릉을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서 나있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들어서든 왕릉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난 집안의 고구려 유적하면 그저 국내성과 환도성, 그리고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만 생각했었다. 광개토대왕에게도 왕릉(王陵)이 있다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영토가 반도로 쪼그라들기 전 대륙을 누비고 다니던 이 무덤의 주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동북아의 외로운 섬처럼 나뉜 남과 북이 이제 닫힌 빗장을 풀고 문호를 열려고 하는 지금 그의 지혜를 빌려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태왕릉(太王陵)은 집안에 있는 고구려 왕릉급 고분 가운데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다고 한다. 가장 큰 것은 천추총(千秋塚, 광개토대왕의 부왕 고국양왕의 능으로 추정함)이란다. 세 번째로 큰 무덤은 장군총(將軍塚)이라는 것도 함께 알아두는 게 좋겠다.



눈에 들어온 왕릉은 거대한 자갈 무더기가 쌓여 있고 그 주위에 화강암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조금은 어수선한 모습이다. 원래는 장군총처럼 화강암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석실묘였는데,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장군총보다 4배는 컸을 것이라고 한다. 능은 거대한 돌을 방형으로 계단을 쌓아 7층으로 만들고 있어 중국에서는 대형방단계제석실묘(大型方壇階梯石室墓)’로 분류한다. 분구 정상부는 돌로 덮었다. 분구 한 변이 66m, 비뚤어진 정방형으로 최고 높이는 14.8m, 각 변에는 거대한 입석 5개를 배치했단다.



그렇다면 이 무덤에 광개토대왕이 묻혀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야 물론 출토된 유물에서이다. 청나라 말기 이곳에서 연화문 와당(瓦當)과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이라는 글이 새겨진 기명 전(, 벽돌)이 나왔다는 것이다. 1984년에 집안시박물관이 무덤을 정비할 때도 연화문화당과 기명 전이 출토되었다. 1990년과 2003년에는 왕릉 주변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배장묘와 기와를 이용한 배수시설을 확인했는데, 이때 辛卯年 好太王…□造鈴 九十六이라는 글이 새겨진 청동 방울(동제 탁령)을 비롯해 마구, 금동제품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이 무덤에 묻힌 사람이 광개토대왕일 것으로 추정한단다. 그러나 이 무덤을 고국양왕의 것으로 보면서, 장수왕릉(장군총)을 광개토대왕의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으니 참조한다.




왕릉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에 이르자 돌계단이 보인다. 덕분에 능의 위까지 편하고 안전하게 간다. 위로 오르자 석실이 우리를 맞이한다. 그러나 안은 텅 비어있다. 태왕을 모셨던 곳이다 싶어 안에 들어가 유리벽까지 확인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도굴당하여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나마도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아예 보초까지 세워 두었다. 아래 사진도 그의 양해를 구해 겨우 찍었을 정도이다. 아무튼 텅 비어있는 묘실(墓室)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누구를 탓하랴. 우리네 땅을 지켜내지 못한 서글픈 역사를 탓할 수밖에..



왕릉을 내려오는 길, 아까는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안내판을 살펴본다. 이 무덤이 고구려 제19대 왕이었던 호태왕 담덕의 무덤이라면서 무덤의 규격과 형상에 대해 적고 있다. 하지만 난 그의 아들 장수왕의 심정이 되어 다시 한 번 무덤을 올려다본다.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당시 영락대왕으로도 불리던 광개토대왕은 재위 22년인 나이 39세에 붕어(崩御)했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의 나이가 이때 18세였으니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겠는가. 장수왕은 부왕의 무덤을 크게 쌓고 2년 후 비석을 세워 부왕을 기렸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은 391년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해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중화왕조는 황제가 즉위하면 곧바로 황제가 사후에 묻힐 능을 조성하기 시작하는데, 고구려도 그러한 중화왕조의 전통을 따랐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중화왕조의 지방정권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능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집안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시간이 조금 남아 주변을 둘러보는데 널리다시피 한 망초꽃 외에도 아름다운 꽃들이 곳곳에 많이 피어났다. 조경용으로 심어놓은 것들이겠지만 하도 아름답기에 몇 장 올려본다.





이젠 장수왕의 무덤인 장군총(將軍塚)으로 가야할 차례이다. 이곳도 역시 우산하고분군에 들어있으나 광개토대왕비에서 북쪽으로 1.7정도 떨어진 룽산(龙山)’ 자락에 위치해 있다. 때문에 해당 경구(景區)의 주차장까지 버스로 이동하게 된다.



관리사무소 앞에는 커다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가운데에다 널찍하게 벽을 쌓고 오른편에다 고구려문물고적여유경구(高句麗文物古跡旅游景區)’에 대한 설명을 해놓았다. 고구려의 역사유적이 밀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풍부하다고 해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단다. 오른편에는 경구안내도를 그려 넣었는데, 우산하고분군을 우산귀족묘지경구와 호태왕비경구, 그리고 이곳 장수왕릉경구로 나누었다. 같은 고분군에 속해있으나 또 다시 입장료를 받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표를 구입해서 안으로 들면 또 다른 안내판이 나타난다. 이번 것은 장수왕릉경구(長壽王陵景區)’에 대해 안내를 하고 있는데, 오른편 안내문에는 장수왕릉을 동방의 피라미드는 칭찬을 붙여가며 설명하고, 왼편에는 경구 안내도를 그려 넣었다.




산뜻하게 조성된 꽃길을 따라 장수왕(長壽王)을 만나러 간다. 가슴 설레는 길이다. 우리 역사를 배우면서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던 나라가 바로 고구려(高句麗)’였다. 그런 나라를 가장 잘 다스렸던 임금이 광개토대왕과 그의 아들이 장수왕이 아니겠는가. 장수왕. 드넓은 대륙을 호령한 임금, 그곳에 잠들어있는 대왕을 직접 대면하는 길이니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잠시 후 피라미드를 쏙 빼다 닮은 돌 축조물을 만난다. 장수왕의 무덤인 장군총(將軍塚)’이다. ‘장군총광개토대왕릉비와 함께 고구려 문화재 탐방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까지 유행한 계단식 돌무지돌방무덤의 대표작으로,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장군총을 쌓는 데는 길이 3~4m로 다듬은 화강암 1,100개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총 무게를 합치면 무려 19,000. 요즘의 5톤 트럭으로 옮긴다면 3,800대가 동원돼야 하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화강암을 계단처럼 7층으로 쌓고, 강돌과 흙을 다져서 안을 채웠다. 쌓은 화강암이 무게에 눌려 흘러내리지 않도록, 무덤 아래쪽에 거대한 호분석(护坟石)을 한 변에 세 개씩 비스듬히 세워놓았다. 호분석 하나가 성인 키의 두 배가 넘을 정도로 크고, 무게는 15톤을 초과한다. 그중 하나가 사라지고 현재는 11개가 남아 있단다. 안타깝게도 무덤 안의 유품은 모두 도굴(盜掘) 당했다고 한다.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놓고 지금까지 설왕설래하고 있는 이유이다. 참고로 장군총은 외형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닮았다고 해서 동방의 피라미드란 미칭(美稱)을 가지고 있다.



비록 올라가보지는 못했지만 무덤의 정상부는 평형한 형태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원래는 무덤 꼭대기에다 신묘(神廟)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이 무덤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05년이다. 일본인 학자 도리이(鳥居龍藏)가 처음으로 현지조사하고, 프랑스 학자인 샤반(Chavannes, E.), 일본인 세키노(關野貞) 등이 조사해 퉁바오(通報)’, ’남만주조사보고(南滿洲調査報告)‘, ’고고학잡지(考古學雜誌)‘ 등에 발표한 이후부터란다.



정식 명칭이 우산하 1호분인 장군총은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석조 구조물로 고구려 제20장수왕의 무덤이다. 광개토 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아버지 못지않게 고구려의 힘을 강하게 키운 왕이었다.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이 넓힌 영토를 잘 다스리기 위해 정치를 안정시키는데 힘쓰는 한편, 뛰어난 외교술로 중국과 국교를 맺어 전쟁을 막았다. 특히 427년에는 고구려의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고 남쪽의 땅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북으로는 요동을 포함한 만주 땅을 차지하였고 남으로는 한강 이남까지 영토를 넓힘으로써 당시 고구려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장군총의 뒤쪽에는 고인돌 모양으로 생긴 작은 돌무덤(石塚)이 있다. 첩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군총 1호 배총(陪冢)’이다. 그런데 기단의 위에 올라가지 말라는 팻말이 올리어져 있다.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이 심심찮게 올라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돌을 쌓아올린 탓에 자칫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명색이 관광지인데 쇼핑센터가 들어서있지 않을 리가 없다. 중국 관광지의 특징대로 구경을 마친 후에는 어김없이 쇼핑센터를 거치도록 길을 내놓았다. 센터의 안은 기념품 위주로 진열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나무나 옥돌을 조각해놓은 조형물들이 눈길을 끈다.



위에서 본 무덤들 말고도 이곳 우산하 고군분에는 많은 무덤들이 분포되어 있다. 각저총과 무용총, 오회묘 4호분 등 우리들에게 익숙한 고분들이 대부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이밖에도 이러한 고분군들은 산성하고분군과 칠성산고분군 등 집안의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다. 환도산성 지역 내에만 무려 4700여 기의 고분이 있다고 하니 당시 고구려의 위세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고구려인들은 산성과 고분 축조에 특출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험준한 산악 지형을 이용해 성을 쌓고 무덤 속에는 살아있는 듯한 벽화를 그렸다. 고구려인들의 이런 솜씨는 고구려를 석조예술의 나라, 산성의 나라, 고분의 나라라는 표현으로 대표할 수 있게 했다.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등재된 이유일 것이다. 참고로 이곳 집안의 유적들은 '고구려의 수도와 왕릉, 그리고 귀족의 무덤(Capital Cities and Tom 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만주에 소재한 고구려의 수도 유적지가 망라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확정된 목록에는 오녀산성과 국내성, 환도산성. 통거우(洞溝) 고분군, 태왕릉과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오회분, 산성 아래의 고분들인 왕자총(王字墓염모총·환문총·각저총·무용총·마조총(馬槽墓장천1호분·장천2호분·임강총(臨江墓서대총(西大墓천추총(千秋墓) 등이 있다.


여행지 : 중국 동북부 여행

 

여행일 : ‘18. 6. 25() - 6.29()

여행지 : 중국 대련, 단동, 집안, 통화, 환인

일 정 :

6.25() : 대련(성해광장)

6.26() : 단동(압록강 철교), 집안(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환도산성)

6.27() : 통화(백두산 천지, 금강대협곡)

6.28() : 환인(오녀산성), 단동(유람선 투어)

 

여행 둘째 날 오후 : 단동의 압록강 단교와 압록강 유람선 투어

 

특징 : 중국 동북 3(東北三省)’ :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중국의 동북 3은 중국 6대 지리구의 하나로 중국 동북부 지역을 말한다. 현재 중국 전체 인구의 8%1억 명의 인구가 사는 이곳에는 200만 명 이상의 조선족이 산다. 또한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어 한민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이 지역은 중국의 한족과 한국의 한민족 및 여러 북방 민족이 서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한국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중국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청나라 말기 중국이 힘이 없을 때는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침략을 당해 러시아에 뤼순을 조차 당했고,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의 영토가 된 이후에도 1931년 일본에 점령되어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세워지기도 했다.

 

집안(集安, 지안) :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만포시와 마주하고 있는 집안은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이 있던 곳이다. 서기 3년 유리왕이 졸본(홀본, 忽本)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400년 이상 고구려의 중심이었다. 북쪽으로는 여러 준봉들이 병풍처럼 막아 주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는 천혜의 요새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일 위도상의 다른 도시보다 겨울이 따뜻하고 서리가 내리는 기간도 짧아 만주 지역에서는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편에 속하는데, 이런 지안의 자연 조건은 고구려를 동아시아 강국으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이 지역은 고구려의 도성이었던 국내성 터를 포함해 광개토 대왕릉비와 장군총, 귀족의 고분 등이 대량 출토되어 고구려 문화유적지로 불린다. 그중 2개 산성과 고분군이 200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늘날 지안은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압록강을 배경으로 드넓게 펼쳐진 전원과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북한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는 이점까지 더해져 관광 도시로 도약 중이다.


 

환도산성(丸都山城, 위나암성) : 국내성(國內城)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해발 676m의 산중에 건설되었는데, 평상시에는 국내성에서 거주하고 적이 침입해 오면 환도산성으로 대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은 산의 능선을 적극 활용한 지혜가 돋보인다. ··3면은 험준해서 자연 지형을 성벽의 기초로 삼고 부족한 곳에 돌을 쌓아 보충했다. 경사가 심한 곳은 흙을 돋워 올렸다. 타원형으로 조성된 성벽의 총 길이는 6,951m이고, 가장 지세가 험준한 서쪽을 제외한 삼면에 각각 1~2개씩 문을 설치했다. 산성의 남쪽 바로 아래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通沟河)가 흐르면서 해자 역할을 했다.




점심 식사를 하러 집안 시내로 들어가는 도중에 고구려(高句麗)의 왕궁이었던 국내성(國內城)의 성터가 눈에 들어온다. 국내성은 졸본성(卒本城)에 이어 두 번째로 수도(首都)가 되었던 곳이다. 2대 왕이었던 유리왕 22(AD 3)에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래 장수왕 15(AD 427)에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장장 425년 동안을 고구려의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였다. 고구려는 이곳을 중심으로 영토를 넓히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어 나갔다. 유리명왕 때인 서기 2년의 일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쓸 제물로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는 일이 생겼는데 제사 물품을 관장하던 설지가 돼지를 뒤쫓아 위나암(尉那巖)’에서 잡았다. 그리고 유리왕에게 고하기를 국내 위나암은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땅이 농사짓기에 알맞고, 사냥과 고기잡이에도 유리합니다. 대왕께서 그곳으로 수도를 옮기신다면 백성들이 살기 좋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피해도 피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리명왕이 1년 뒤, 수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이때 옮긴 고구려 두 번째 수도가 지금 눈앞에 있는 국내성이고, 위나암성은 이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2.5쯤 떨어진 곳에 있는 환도산성이다. 하지만 국내성과 환도성을 같은 곳으로 보는 학자들은 이를 부인하고, 209(산상왕 13)에 환도성으로 천도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를 토대로 209년 천도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국내성은 2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역사성과 함께, 견고한 방어력을 갖춘 고구려 성벽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소중한 유적이다. 성은 1930년대만 해도 높이 9m의 성벽이 잘 보존돼 있었다지만 국·공내전과 관리소홀로 인해 국내성의 동쪽과 남쪽 성벽은 아예 사라져 버렸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서벽마저도 집들에 둘러싸여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후 지난 2003년부터 중국이 국내성을 세계 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벌였고, 이때 서벽 주변의 300여 가구가 강제로 옮겨졌고, 북벽과 서벽이 새로 발굴되면서 국내성은 조금이나마 옛 모습의 일부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은 허물어지기 전의 국내성 사진이다. 국내성은 방형(方形)으로 쌓은 성이다. 남벽은 압록강에 접해있고, 서벽은 통구하 좌안에 접해있다. 성의 길이는 동쪽벽 554.7m, 서쪽벽 664.6m, 남쪽벽 651,5m, 북쪽벽 715.2m로 성벽의 총 둘레는 2,686m에 이르렀다. 원래는 동쪽과 서쪽에 문이 두 개씩, 남쪽과 북쪽 한 개씩 총 여섯 개가 있었다. 하지만 1921년 성을 대규모로 개수하면서 고구려 성의 원래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때 세 군데에 성문을 세웠는데, ··남 세 방향에 하나씩만 세우고 나머지 문들은 흔적도 찾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마저도 1947년 국민당과 공산당 전쟁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단다.



점심 식사 후 환도산성(丸都山城)으로 이동한다. 집안시에서 서북쪽으로 2.5정도 떨어진 산속에 위치하고 있다. 환도산성은 서기 3(유리왕 22) 고구려가 국내성(國內城)으로 수도를 천도(遷都)하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성에서 가까운 산에 축조한 산성(山城)이다. 평지성(坪地城)과 산성(山城)이 한 조()를 이루어 평지에 있는 국내성이 공격 받을 경우에 산성인 위나암성에 피난해 적과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었을 당시의 이름인 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위나야성(尉那也城)‘으로 적고 있다니 참조한다.




관리사무소 앞에 만들어진 주차장에 내리면 커다란 안내판이 길손을 맞는다. 환도산성으로 보이는 옛 그림을 가운데에 놓고 왼편엔 지도, 그리고 오른편에다 환도산성에 대한 해설을 적었다. 주변의 산을 보호벽으로 하고 곡구(谷口)를 대문으로 삼았으며 산 중턱에는 궁궐을 앉힘으로써 중국 전통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이념을 따랐다며 아예 환도산성을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렇다고 성에 대한 사료(史料)를 적어놓은 것도 아니다. 해설은 읽을 필요조차 없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지도조차 지나칠 일은 아니다. 머릿속에 넣어둬야 성안의 시설들을 빠짐없이 살펴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서면 잠시 후 환도산성(丸都山城)‘이라고 적힌 표석(標石)이 나타난다. 푯돌의 상단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중국에서도 이곳을 국가급의 문화유산으로 보호·관리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등재되었으니 국가급 보호정도는 이젠 옛 얘기쯤으로 치부해버려도 되겠다.



표석을 지나자마자 산릉에 쌓아올린 성벽이 고개를 내민다. 산성으로 올라가는 돌계단도 보인다. 하지만 출입은 안 된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보수공사가 덜 끝나서 아직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단다. 참고로 환도산성은 고로봉식(栲栳峰式) 산성이다. 고로봉식이란 산의 능선과 골짜기의 선을 그대로 활용하여 허약한 곳은 돌을 다듬어 쌓고, 경사가 급한 곳은 흙을 쌓아올리는 방식을 말한다.



왼편에 출렁다리가 보여 일단은 건너고 본다. 길지도 그렇다고 높지도 않은 덕분에 무섭지 않을 만큼만 출렁거려 건너기에 딱 좋다.




출렁다리를 건너자 우물이 나온다. 지붕까지 씌워놓았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우물이다. ‘산성고정(山城古井)’이라는데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단다. 다만 아이를 갖고 싶은 아낙네들이 보름달이 뜰 때마다 이 물을 떠다 마시면 신통한 효과가 있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직경 0;45m에 깊이가 4.5m라는 우물의 규모도 함께 적어놓았다.





남옹문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문을 나서면 평탄한 통구하(通溝河)에 닿는다고 했으니 성벽이 복원되어 있지 않은 저곳쯤일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아무래도 그냥 터로만 남아있는 모양이다.



우물을 지나면 또 다른 안내판이 보이고, 그 오른편에는 성벽이 복원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은 멀리서만 볼 수가 있단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복원이 덜 끝났기 때문이란다. 내가 보기에는 마무리 작업까지 끝난 것 같은데도 말이다. 참고로 이 성은 유리왕 때 처음 지어진 이래 198년에 전면 재 축조되었고, 342년에는 전연(前燕)의 침공에 대비하여 환도성을 중수(重修)하고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도 있다.




환도산성(丸都山城)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이라고도 하며 국내성의 북쪽 2.5지점에 있는 676m 높이의 산성자산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서쪽은 칠성산의 험준한 봉우리들과 연결되어 천연방어물을 형성하고, 북쪽은 깊은 계곡을 두고 소판차령이 솟아 있다. 동쪽은 통구하를 따라 비교적 넓은 산골짜기가 펼쳐져 있다. 산성의 형세는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은 지형에 삼태기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산성의 남쪽 바로 아래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가 흐르면서 자연적인 해자를 만들고 있다.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은 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동··3면은 험준한 지형과 암반 등을 자연 성벽으로 삼고, 산마루의 평탄한 곳에 군데군데 석축 성벽을 쌓았다. 능선의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성벽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산성의 평면은 매우 불규칙한 형태이며, 성벽의 총길이는 6,947m이다.



성벽을 지나 왼편에 보이는 돌계단을 오르자 쉼터가 나오고, 조금 더 오르면 이번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안내판에는 자기네들 용어대로 관경대(觀景台)라 적고 있다.






전망대에 서면 시야(視野)가 툭 트인다. 산으로 빙 둘러싸인 산성에서 유일하게 트여있는 집안 방향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옛날 같으면 망대(望臺)가 들어서기에 딱 좋은 장소가 아닐까 싶다. 남쪽의 좁게 터진 입구만 빼고는 삼면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 방어요새라는 환도산성의 특징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풍경이라 하겠다.



전망대에서 연화지로 내려가는 길가에는 샛노란 금계국(金鷄菊, Golden-Wave)이 지천으로 피어 장관을 이룬다. 요즘은 길가에까지 퍼져있을 정도로 흔하디흔한 꽃인데 이게 널따랗게 무리를 이루다보니 훌륭한 눈요깃감으로 변한 것이다.




금계국 꽃밭이 끝나면 연화지(蓮花池)’이다. 넓이가 대략 50-60쯤 되는데 음마지(飮馬池) 혹은 음마만(飮馬灣)이라고도 불린다. 옛날 고구려 병사들이 이곳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환도산성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18-44)은 환도산성에서 장기 농성전을 벌였다고 한다. 쳐들어온 적은 성안에 있는 고구려 군사들이 식수가 모자라 곧 항복할 것이라며 포위를 풀지 않았다. 그러자 고구려는 연못 속의 잉어를 잡아 수초(水草)에 싸서 보냈단다. 이에 적군이 성 안에 물이 풍부함을 알고 물러갔다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연화지가 당시 잉어를 잡았다는 그 연못일지도 모르겠다.




연화지에서 좁다란 길을 따라 조금 더 오르자 요망대(瞭望臺)’가 나온다. 요망(瞭望)이란 게 본디 높은 곳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는 것일지니, 돌을 높게 쌓아 산 아래쪽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한 감시초소쯤으로 보면 되겠다.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6.7×4.5m 넓이에 남아있는 높이가 4.5m라는 시설의 규모와 함께 시설의 용도를 전망대(展望臺)’라 적고 있다. 통구하와 집안시의 정경이 한눈에 쏙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낯설기는 하지만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라 하겠다. 그건 그렇고 이곳은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산성(山城)에 배치된 군사들의 동태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의 안팎을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으니 천혜의 요충지라 할 수 있겠다. 아니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해볼 때 단순히 망()만 보던 곳이 아니라 산성 안의 전투를 총 지휘하던 장대(將臺)였다고 보는 게 더 옳을 수도 있겠다. ! 요망대 뒤로 15m쯤 되는 숲이 병사들의 숙영지 터라고 했으나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요망대 맞은편에는 왕궁터가 있다. 궁터는 서너 개의 단()으로 나누어졌다. 경사지의 특성에 맞추어 궁궐을 지었나보다. 단과 단의 사이에는 나무계단을 놓아두었다. 옛날 이곳에 궁정의 계단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궁궐은 10대 왕인 산상왕에 의해 198년에 지어졌으며 주춧돌의 형태로 보아 남북의 길이 96.5m, 동서로 80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궁궐의 단()과 단은 석축(石築)으로 쌓아 구분을 했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상당히 넓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옛날 이곳에는 화려한 궁궐이 가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궁궐은 두 번이나 불탔다고 한다. 첫 번째는 244년 위()나라의 관구검(毌丘儉, ?-255)의 침입에 의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342년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 재위 337-348)에 의해서이다. 두 전쟁 모두 고구려가 처참하게 패한 전쟁이었다. 특히 모용황의 침략 때는 태후와 왕비가 사로잡히기도 했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깃대유적도 보인다. 깃대를 꽂았던 자리인 모양이다.




유적지 정비작업이 덜 마무리 되었는지 성 안에는 포도밭과 농막(農幕)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외모가 단정한 것을 보면 아직도 사용을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평상시에는 거주하지 않고 농사철에만 사용하는 시설이란다.



▼ 단동에서 집안으로 이동하는 길에 호산장성(虎山長城) 앞을 지나게 된다. 고구려 시대 박작성(泊灼城)’으로 불렸던 곳으로 요동반도에서 평양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방어하는 성()의 하나이자, 고구려가 당나라와 벌였던 전쟁 이야기에 꼭 등장하는 요충지였다. 그런데 1990년대에 중국 정부가 허물어져 있던 성을 개축하면서 만리장성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본 따서 복원하는 한편 이곳을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산성의 입구에 세워진 조형물에도 만리장성 동단기점(萬里長城 東端起点)’이라는 글귀를 적어 놓았단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관(山海關)이라는 그동안의 역사적 사실까지 제처가면서 말이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오던 중국 동북공정의 현장을 실제 눈으로 보게 된 셈이다.

여행지 : 중국 동북부 여행

 

여행일 : ‘18. 6. 25() - 6.29()

여행지 : 중국 대련, 단동, 집안, 통화, 환인

일 정 :

6.25() : 대련(성해광장)

6.26() : 단동(압록강 철교), 집안(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환도산성)

6.27() : 통화(백두산 천지, 금강대협곡)

6.28() : 환인(오녀산성), 단동(유람선 투어)

 

여행 둘째 날 오전  : 단동의 압록강 단교와 압록강 유람선 투어

 

특징 : 단동(丹東) : 압록강 어귀에서 상류 쪽으로 약 35지점에 위치한 단동시는 면적 14,918, 인구 250만 명인 중국최대의 국경도시로 북한의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며 철교로 연결되어 있다. 옛 이름은 안동(安東)‘이었으나 1965년 단동으로 개명하였으며, 그 뜻은 아침해가 뜨는 붉은도시란 뜻이다. 단동의 역사는 16세기 후반 명나라가 현재 도시의 북동쪽 약 4지점에다 진장바오(鎭江堡)라는 요새를 세운데서 시작된다. 단둥 주변지역은 19세기 중반까지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2~74년에 식민을 위해 개방하면서 산동성으로부터 주민을 옮겨오게 해 급속히 개발·확대되었으며, 1876년에 정규 행정체제를 갖춘 현청소재지가 되었다. 1907년 개항이 되었으며 이로부터 일본의 대륙진출 문호로서 발전하였다. 참고로 이곳은 191911월에 일어났던 대동단사건의 현장이다.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이 고종황제의 둘째 왕자이며, 순종의 아우인 의친왕 이강(李堈)을 상해로 탈출시켜 망명정부의 구심점을 삼으려 했으나 아쉽게도 단동에서 붙잡혀 허사로 돌아갔던 사건이다.


 

압록강 단교(斷橋) : 단동과 신의주를 잇는 압록강 철교(鐵橋)는 북·중 물류 동맥이자 관광지이다. 철교는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위쪽에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 그 아래에 '끊어져버린 다리' , 압록강 단교(斷橋)가 놓여 있다. 이들 다리는 일제의 한반도 및 중국 침략과 6·25의 상흔이 짙게 배어 있다. 이 가운데 압록강 단교19095월 일본총독부가 철도사용을 목적으로 짓기 시작하여 191110월에 완공하였다. 길이 944m에 넓이가 11m, 12연의 교량 중 신의주 쪽에서 9번째 중국 쪽에서 4번째가 개폐식(開閉式)으로 되어 90° 회전이 가능해서 선박들이 통과 할 수 있었다. 1950년 미군에 의해 폭파되어 신의주 쪽은 교각만이 단동 쪽은 철교와 교각이 그대로 남아있어 지금도 그 당시의 아팠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단동 외곽의 호텔을 출발한 버스가 20분쯤 달리더니 압록강 단교의 앞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이 다리는 일제침략기 일본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한국전쟁 때 미군이 중국 공산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지연시키기 위해 다리를 폭파하였는데, 전쟁 후에도 복구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어 지금은 관광 명소로 변해있다. 이 다리는 중국과 북한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품고 있는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에게 쫓겨 온 북한 인민군이 압록강까지 밀려나 완전히 수세에 몰렸을 때,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중국 공산군이 압록강을 넘어간 다리이기 때문이다.



단교는 관광지로 개방되어 입장료만 내면 누구나 끊어진 곳까지 걸어 들어갈 수 있다. 단교를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은 이 역사적인 압록강 단교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면서 전망대를 설치하는 등 시설물만 개·보수해 안보관광지로 활용하면서 관광객(특히 한국인)들을 끌어 모으는 고도의 상술을 부리고 있다. 다리가 끊어진 부근에는 총탄 맞은 흔적도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입구에는 중국 공산군들이 압록강을 건너는 모습을 새긴 대형 기념물을 설치해 놓았다. 힘차게 진군하는 인민지원군을 형상화한 동상과 함께 '爲了和平(평화를 위하여)'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단동 개항 100주년에 맞춰 '평화의 옷'을 입혔다는 해석도 있으나, 침략자는 단호히 무찌르겠다는 의지가 더 강하다는 평이 대세(大勢)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수백 명의 군인들이 북한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인데 대단한 위용을 뽐내고 있다.




입구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무기도 전시해 놓았다. ‘압록강 '단교'는 어감이 주는 서늘함 그대로 역사적 의미가 중첩돼 있다. 끊어진 모습을 고스란히 살려놓고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중국을 보노라면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이 느껴진다. 단교는 전쟁의 단면이자 단절의 상징이다. 일본이 건설하고 미국이 부순 이 단교는 우리에게 분단의 다른 이름이다. 이 단절이 걷히는 때에 남북분단 또한 걷히게 될 것이다.



압록강을 건널 수 있는 시작점인 다리 위에 압록강 단교(鸭绿江 断桥)’라고 한문으로 쓰여 있다. 그 옆에는 같은 문구의 빗돌(碑石)도 세워놓았다. ‘압록강 구교(鸭绿江 舊橋)’라고도 불리는 단교(断桥)1911년 개통한 압록강의 첫 번째 철교(鐵橋)이다. 일제는 한반도 수탈과 만주 침략을 위해 경의선을 개설하면서 의주 서쪽의 압록 강변 벌판에 신의주를 건설했다. 그 후 철교는 만주지역의 곡물과 삼림자원을 일본으로 실어내는 통로로 이용됐다. 길이 944.2m의 이 철교는 연인원 509300명이 투입되었을 정도로 당시로선 대역사였는데, 일제는 3년 만에 이를 뚝딱 해치웠다고 한다. 이후 이 철교는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 폭파됐다.



그동안 사진이나 글로만 접해오던 압록강(鴨綠江)이 눈앞에 펼쳐진다. 난생 처음을 접하다보니 여간 감격스럽지가 않다. 압록강은 물빛이 오리 머리와 같다고 하여 오리 압()자에 푸를 록()자를 쓴다. 백두산 천지(天池) 부근의 장군봉(2108m) 남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혜산(惠山중강(中江만포(滿浦위원(渭原초산(楚山신의주(新義州)를 거쳐 용천군(龍川郡) 용암포(龍巖浦)의 초하류(稍下流)에서 황해로 유입되는 총 길이 925.502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강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강은 일제 강점기에 정든 고향이나 부모·처자와 이별하고 만주나 북간도(北間島) 등으로 떠나는 유랑 이민과 애국지사들의 서러운 심정을 담은 여러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고, 광복 직후의 작품 속에서는 마음의 고향을 의미하는 뿌리의 상징으로 나타나왔다.



단교의 위는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골고루 섞여있다. 그리고 다들 끊어진 부분을 향해 설레는 마음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속하는 나라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은 전혀 다른 역사의 현장이 된다. 한국인들은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혼쭐난 중국을 연상하는 반면에 중국인들은 대륙으로 들어오려는 침략자(미군)를 막아낸 구국 항쟁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중국은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 전쟁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단교의 바로 위에는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가 놓여있다. 이 또한 일제가 세운 철교(鐵橋)이다. 1931'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중국-조선을 연결하는 철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1937년 경부선과 경의선을 복선화하면서 길이 943.3m의 압록강 철교를 추가로 건설했다. 1944년에 완공된 이 교량은 가운데에 철도(鐵道)를 놓고 양쪽에 차도(車道)를 깔았다. 지금은 이 철교를 통해 북·중 교역(交易) 물량의 80%가 처리된다고 한다. 북한경제를 사실상 지탱하는 다리라고 보면 되겠다.



좌우로 눈을 돌리면 단동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신의주와 철길로 연결되는 단동은 압록강 하류의 국경도시로 최근의 남북 화해무드에 편승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경의선 철도의 복원공사가 시작되면 대륙으로 향하는 관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시내에는 상호를 한국어로 적은 상점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다리 가운데에 들어앉은 톱니바퀴가 보인다. 다른 다리들에서는 보기 드문 시설이니 눈여겨 봐두어야 할 일이다. 원래 이 다리는 12개의 마디로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9번째 마디는 90회전이 가능하도록 해서 열면 십자(十字)가 되고 닫으면 일자(一字)가 되게 했다고 한다. 압록강을 다니는 배들이 드나드는 시간에 맞추어 개폐하도록 설계되었단다. 눈앞에 보이는 저 톱니바퀴가 바로 다리를 회전시키는 장치였던 것이다. 1934년 교량 보존상의 이유로 회전을 폐지했지만 110여 년 전에 이런 기술이 있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북한 쪽으로는 교각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유엔군의 폭격으로 인해 끊겼기 때문이다. 그러면 끊긴 이유에 대해서도 한번 짚고 넘어가 보자. 19509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참전을 결정한다. 이에 따라 펑더화이(彭德懷)'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의 의용군 26만 대군을 이끌고 19501019일부터 압록강 철교 등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온다.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중공군의 위세를 꺾기 위해 미국 공군은 B-29 폭격기 편대를 출격시켜 압록강 철교를 정밀 폭격한다. 1950118일 오전 9시였다. 그날 이후 압록강 철교는 '압록강 단교(斷橋)'로 변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있다.




끊어진 지점에는 압록강(鴨綠江)’이라고 쓰인 커다란 빗돌을 두 개나 세워놓았다.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하도 많다보니 이를 배려하려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길 건너 조중우호교를 통해 수십 대의 버스들이 줄지어 단동으로 들어오고 있다. 대북 경제제재(經濟制裁)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수십, 아니 수백 대의 컨테이너들이 끝임 없이 오갔다는 북중교역(北中交易)’의 현장이었는데, 요즘은 관광객을 태운 버스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나보다. 저 다리에는 철로(鐵路)도 함께 놓여있다. 지난 번 김정은의 특별열차도 저길 통해 중국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저 다리는 경의선이 뚫리면 중국횡단철도(TCR)로 이어져 베이징을 거쳐 유럽까지 나아갈 통로이다. 부산에서 낙동강을 따라 서울로, 한강과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대동강 청천강을 지나 신의주에서 호흡을 고른 뒤 대륙으로 내달릴 철마(鐵馬), 그 영상을 떠올리며 가슴 뭉클해 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둘러보고 나오는 길, 이곳도 역시 상가를 지나게 된다. 중국관광지에서의 통과의례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는 것도 시들해졌다. 하긴 구입해 볼만한 품목도 눈에 띄지 않았지만 말이다.



넷째 날 오후, 백두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구촌(河口村)에 들렀다. 유람선을 타고 북한의 국경지역을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하구촌은 조·중 국경인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청성군과 마주보고 있는 마을이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압록강에 있는 중요한 부두 가운데 하나였다는데 단동의 압록강단교에서 40,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 이곳에도 눈길을 끄는 게 있었다. 상인들이 내민 스크랩 북(scrap book)’이다. 북한 지도자의 초상이 있는 우표와 액면가가 다른 북한 지폐 몇 장이 빳빳한 새 돈으로 들어있었다. 남의 나라 지폐를 기념품으로 파는 행위라서 썩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건물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유람선 선착장이 나온다. 매표소 옆에 유람선을 타고 돌아보게 될 지점들을 표기해 놓은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그래야 배를 타고가면서 보게 될 건물들의 내력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배가 출발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것이 하구단교(河口断桥)’이다. 북한 쪽에서는 청성교(淸城橋)’라고 부르는데 이 다리 역시 6.25 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졌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으로 한국전쟁에 나간 중국인민지원군 제39, 40군과 지원군 제3병단과 부분 부대가 바로 이 다리를 건넜다.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이었던 팽덕회장군과 모택동주석의 맏아들 모안영도 청성교를 건너 전쟁터로 나갔단다. 전쟁기간 동안 대량의 군용물자들이 청성교를 건넜음은 물론이다. 그런 다리를 미군이 그냥 놓아두었을 리가 없다. 1951329일 미군은 6차례에 걸쳐 30대의 전투기를 투입해 청성교를 폭격해버렸다. 미군전투기의 폭격에 청성교는 중간부분 200m가 끊어지면서 3개의 교각이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단교의 중국 쪽은 단동시 관전현 하구(河口)이고 북한 쪽은 청성군이다. 그래서 이 교량이 건설된 후 청성교(淸城橋)’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다리는 당시 일제가 중국의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건설(1942)했는데 압록강에서 가장 큰 도로교(公路桥)였단다. 건설은 조선과 위만주정부가 공동으로 맡았다고 한다. 22개의 교각이 떠받히고 있는 이 다리의 총 길이는 709.12m이며 넓이 6m에 높이는 25m이었다.



강의 이쪽과 저쪽,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도 그 풍경은 완전히 다르다. 중국의 산에는 나무가 무성한데 반해 북한쪽 산은 온통 민둥산인 것이다. 밭을 일구려고 개간을 한 것인지 아니면 베어다가 화목으로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연탄이 보급되기 전의 남한 풍경이 저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북한 쪽 산들은 거의가 경작지로 만들어져 있다. 아직은 이른 철이라서 뭘 심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냉이가 아닐까 싶다. 척박한 땅에 어울리는 작물은 옥수수뿐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멀리 보이던 북쪽 산하 나지막한 능선과 기와집 마을이 서서히 가까워진다. 규모가 제법 큰 마을도 보인다. 저 부근이 청성군이라고 하더니 군청소재지일지도 모르겠다.




유람선은 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관광객에게 구경 잘하라는 듯 신의주 쪽 강변으로 바짝 붙여 서서히 몰아주기도 한다. 덕분에 압록 강변을 따라 드문드문 설치된 국경초소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들도 보인다. 대부분의 주택들이 거의 같은 외형을 갖고 있는 게 눈길을 끈다. 전체적으로는 남한의 70년대 풍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개방에 더딘 나라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먼지를 폴폴 날리며 달리고 있는 트럭도 보인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북한도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니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교통수단을 다 갖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하구촌으로 되돌아오는 뱃길, 조금은 마음이 여유로워졌던지 우리가 지금 압록강을 오가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 압록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아닐까 싶다. 조선의 베스트셀러 작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그의 나이 44세에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 연경(지금의 북경)에 다녀오면서 쓴 기행문이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이렇게 물살이 거센 것은 대체로 압록강이 먼 곳에서 발원하는 까닭이다라고 하면서 장마철인지라, 나룻가에 배 대는 곳은 찾을 수도 없으며, 강 중류의 모래톱마저도 흔적이 없어서 사공이 조금만 실수를 한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정도이다.’라고 적었다.



온전히 개방되지 않은 나라는 국경 지역의 일상이 관광 상품이 된다. 유람선에 탄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북한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이유이다. 그리고 북한 쪽에 사람이 지나가면 사람을 보며, 오토바이나 자전거가 지나가면 또 그것들을 보며 신기해한다. 심지어는 밭에서 일을 하는 아낙네들까지도 구경거리가 됐다.




첫 날과 마지막 날 저녁을 머물렀던 단동의 동항호텔(DongGang Hotel)

객실이나 화장실 등 시설이 넓고 깨끗한 것이 여느 일류 호텔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다만 욕실이 따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게 조금 불편하다면 불편하다고나 할까. 대신 세면도구는 따로 필요하지가 않다. 비누와 샴푸는 물론이고 칫솔에 치약, 그리고 헤어드라이기까지 비치해 놓았다. 와이파이도 방에서 이용할 수 있어 편리했다. 그러나 아침 식사는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았다. 대부분이 중국 현지식이라서 아메리칸 스타일 조식에 익숙해진 내 입맛에 영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화의 호텔에서도 이런 고통을 겪었으니 중국 동북부 지방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에필로그(epilogue), 단동에서 집안으로 가는 길은 오른편에 압록강을 끼고 이어진다. 널따란 강에 크고 작은 섬들이 수없이 떠있는 풍경은 흡사 바다를 연상시킨다. 차창 밖의 풍경이 바뀔 때마다 비단섬과 황금평, 위화도 등 가이드의 입을 통해 낯익은 이름들이 흘러나온다. 북한에 속해있는 황금평과 비단섬은 단동에 붙어 있는 것 같이 보여 얼핏 중국 땅처럼 보인다. 하지만 62년까지만 해도 단동과 황금평 사이에 압록강이 흘렀다고 한다. 이후 50년 세월에 퇴적물이 쌓여 1m정도로 좁아졌다는 것이다. 2011년 북한과 중국이 황금평에서 공동개발 사업 착공식을 갖기고 했으나 장성택의 처형으로 출입국사무소만 만들어진 채로 방치되고 있단다. ‘위화도는 역사의 현장이다. 고려 말기 요동을 정벌하라는 최영장군의 명을 받은 이성계가 회군(回軍)을 결정했던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에 '가람 가에 자거늘 밀물이 사흘이로되 나가서 잠겼다. 섬 안에 자실 제 홍수가 사흘이로되 비어서 잠겼다'의 섬이 바로 '위화도'이다. 4불가론을 주창하며 회군한 이성계는 끝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다. 나라를 새로 열면서 새로운 제도와 문물을 도입한 것은 바람직하다 하겠으나, 당시 주인 없는 땅을 찾지 못했다는 아쉬움까지 떨쳐버리지는 못하겠다. 참고로 압록강 사이에 있는 대부분의 큰 섬들은 북한에 속해 있다고 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북·중 국경의 451개 섬 중에서 북한령은 264, 중국령은 187개라고 했다. 면적으로 보면 북한이 85.5%를 차지한단다.

여행지 : 중국 동북부 여행

 

여행일 : ‘18. 6. 25() - 6.29()

여행지 : 중국 대련, 단동, 집안, 통화, 환인

일 정 :

6.25() : 대련(성해광장)

6.26() : 단동(압록강 철교), 집안(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환도산성)

6.27() : 통화(백두산 천지, 금강대협곡)

6.28() : 환인(오녀산성), 단동(유람선 투어)

 

여행 첫째 날 : 대련(大连)의 성해광장

 

특징 : 대련(大连, 다렌) :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랴오둥(遼東) 반도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북방의 홍콩으로 불리는 대련(大连)학업은 베이징에서, 일은 상하이에서, 노후는 다롄에서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중국인들에겐 선망의 도시라고 한다. 살아가기에 딱 좋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대련의 가장 큰 강점은 깊고 푸른 바다와 다채로운 해안선을 끼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구밀도가 낮아서 거리가 언제나 한산하고 깨끗하다. 거기다 성해광장 등 푸른 광장을 80여 개나 갖고 있는 도심(都心)은 언제나 쾌적함을 자랑한단다. 하긴 유엔 환경계획(UNEP)에서 세계 환경의 날을 맞이하여 세계 환경보호에 공헌한 도시 중 하나로 중국 도시 중에서는 유일하게 대련을 선정했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그나저나 19세기까지만 해도 대련은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고 한다. ‘·일 전쟁후 러시아가 이 지역을 조차하면서 근대화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그 시절 러시아가 건설한 건축물이 지금껏 고풍스럽게 보존돼 있단다. ·일 전쟁 후에는 일본이 조차하여 남만주철도 본사를 대련에 설치하고 만주 공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지금도 일본식 전차가 도심을 관통하면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한다. 한편 대련은 우리와도 인연이 깊다. 항일 운동에 불을 지폈던 안중근 의사가 생을 마감한 뤼순 감옥(旅顺 監獄)’이 시내에서 50분 거리에 있다.


 

성해광장(星海广场) : 1993년에 조성을 시작해서 1997년에 완공된 이 광장은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를 자랑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선 두 번째로 크다고 하며, 베이징에 있는 천안문 광장의 4배 규모인 176에 달할 정도란다. 광장의 내원 직경은 199.9m인데 이 의미는 1999, 즉 대련건설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분수와 화표 등 광장에는 볼거리가 다양한 편이다. 하지만 광장이 너무 넓어서 전 구간을 걸어서 돌아보기는 어렵다. 자전거를 대여해 하이킹을 하거나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라면 마차를 타고 한 바퀴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아무튼 군중집회용의 광장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기념 녹지공간으로 보였다.




버스에서 내리면 모시조개를 포개서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건축물이 길손을 맞는다. 청화대학의 건축공정연구설계원에서 설계한 대련 조가비박물관(大连 贝壳博物馆)’이라고 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조가비를 전시해 놓았다고 하는데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이번 여행도 역시 패키지이다. 단동으로 가는 길에 끼워 넣기 식으로 만든 빠듯한 일정이니 박물관을 둘러보는 여유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박물관에 대한 정보까지 놓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곳에는 세계 각지의 진귀한 조가비 5천여 종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4대양 30개 나라의 개인 채집 및 수매자(收買者)의 손을 거쳐 수집되었단다. 미국, 일본, 대만 등 각국 학회 또는 개인 소장가의 기부나 교류형식으로 얻기도 했음은 물론이다. 전시된 조가비 중에는 무게가 약 100킬로를 넘나드는 종류 및 식인 조가비 거거(砗磲, Tridacnidae spp)가 있는가 하면 확대경으로만 감상할 수 있다는 사베이(沙贝)도 있단다.



공원으로 향하다 보면 엄청나게 놓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용도는 모르겠으나 날로 커져가는 대련시의 현재를 보는 것 같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놀이공원의 입구가 나온다. 사무실로 쓰고 있는 객차(客車)가 눈길을 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제법 고풍스러워서이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지나친다. 주어진 시간으로는 광장 주변을 얼씬거리는 것만으로도 빠듯했기 때문이다.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책을 펼쳐놓은 것처럼 생긴 거대한 시설물이 눈에 들어온다. 롤러스케이트를 타라고 만들어 놓은 것 같기도 한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시설물은 성해광장에서 가장 볼만한, 아니 성해광장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라고 한다. 보기에 별로 높아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올라가면 서있기 무서울 정도로 경사가 급하고 또 굉장히 높다. 바람도 세게 불어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이다. 대신 광장 전체를 눈에 넣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다.




안으로 들어서자 대련의 100주년을 기념해 찍어놓았다는 1000쌍의 발자국들이 나온다. 모두 대련 시민들의 발자국을 찍어놓은 것이라는데 1899에서 2009년으로 발자국들이 향해있는 게 인상적이다. 그 중엔 1899년에 태어난 할머니의 전족도 있단다.








바다 방향에 음악 분수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이를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분수는 눈에 띄지 않고 그저 너른 바다만이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광장만 큰 게 아니었다. 광장의 앞 바다에 놓인 다리 역시 범상치가 않다. 광활한 지역의 표적이 될 수 있을 만큼 시설이 육중하고 웅장한 모습이다.







광장에는 여러 종류의 동상들이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각 동상에 만들어둔 빈자리가 눈길을 끈다. 관람객들이 그곳에 들어가 자신의 동작을 하면서 사진을 찍도록 해 놓았다. 멋진 아이디어라 하겠다.





광장 가운데 있는 한백옥(汉白玉)으로 만든 화표(华表)도 주목해서 보자. 천안문의 화표보다 10m나 높은 19.97m,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것을 상징한단다. 화표는 고대 중국 전통건축의 상징으로 고궁이나 왕릉 등의 대형 건축물들 앞에 세우던 거대한 돌기둥이었다. 이 조형물은 천안문광장의 상징이기도 한데 과거 대련의 시장이었던 보시라이가 시의 발전을 위한 의지를 담아 이곳에다 세웠다고 한다. 화표의 받침판에는 여덟 마리의 용()이 덧붙어있고, 기둥에도 한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의 아홉 개 주를 상징한단다. 화표의 정상에는 2.3m 크기의 조형물을 얹었다. 망천후(望天吼)라는 짐승으로 전설에는 용왕의 아홉 번째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모습인데 지키고 바라는 습관이 있다 하여(守望) 여기서는 간절히 바라는 것(盼望)’을 상징한단다.




바다의 반대편에는 작은 인공 연못들이 끝 간데 없이 길게 늘어서 있다. 연못의 안에 작은 구멍들이 뚫려있는 걸로 보아. 아까 찾아내지 못했던 음악분수가 이것일 수도 있겠다.








주차장 근처에 있는 커피숍 후가배(后咖啡, hoou coffee), 현관에 한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라라고 적어 놓은 게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그나저나 대충 둘러봤으면 이젠 단동으로 가야할 차례이다. 성해광장은 밤에 오면 더 아름다운 모습들을 볼 수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다. 저 너른 광장 전체를 전구로 장식해 놓아 크리스마스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데 말이다. 그리고 매일 저녁마다 펼쳐지는 음악분수는 전체적인 아름다움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고들 말하지 않았던가.



중국 여행에서 마사지가 빠질 리가 없다. 기본인 발마사지 외에도 선택코스로 전신마사지를 끼워 넣는 등 이번 여행도 역시 두 번이나 포함이 되어있었다.



쇼핑도 역시 패키지여행의 필수라 하겠다. 편백(扁柏, 히노끼)과 라텍스(latex), 죽섬유(竹纖維), 잡화 등의 쇼핑이 있었다. 참가자들이 가장 부담을 느끼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일행 가운데 매상을 많이 올려주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현지 음식이 질릴 때쯤 평양고려식당이라는 북한식당을 찾았다. 평양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장어구이를 안주로 시켜 들쭉술과 대동강맥주로 반주를 했는데, 냉면이 우리가 평소에 먹어오던 평양냉면의 맛과 약간 다르다는 것을 빼면 맛은 대체로 괜찮은 편이었다. 하긴 미녀들이 펼치는 춤과 노래를 들으며 먹고 마시는데 맛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특히 미녀들이 따라주는 술맛은 옆에 앉은 집사람에게 미안할 정도로 일미(一味)였다. 그건 그렇고 남한 손님과 북한 접대원이 흉허물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게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통일이 다 된 듯한 요즘 분위기가 반영된 풍경이어서 일게다.



장거리 여행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틈틈이 휴게소에 들른다는 것이다. 90년대 말 국제회의 참석을 위해 중국 땅을 밟은 이래 중국여행은 벌써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그동안 중국은 참 많이도 변했다. 특히 휴게소가 가장 많이 변하지 않았나 싶다. 90년대에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기가 무서울 정도로 시설이 엉망이었는데 요즘은 우리나라에 버금갈 정도로 깨끗해졌으니 말이다. 휴게소의 먹거리 또한 부담을 느끼지 않고도 골라먹을 수 있을 정도로 위생적으로 변해있었다.


여행지 : 중국 사천(四川省)

 

여행일 : ‘16. 9. 24() - 29()

일 정 :

9.25() : 도강언(都江堰), 접계해자(疊溪垓字), 송판고성(松潘古城), 모니구(牟尼溝)

9.26() : 구채구(九寨沟)

9.27() : 황룡(黃龍)

9.28() : 청성산(靑城山), 무후사(武侯祠), 금리거리(锦里古街), 천부촉운(天付蜀韻)

 

여행 넷째 날 오후, 금리(锦里)거리와 천부촉운(天府蜀韻)

특징 : 무후사와 바로 옆에 있는 금리(锦里)거리는 삼국시대 거리를 재현해 놓은 골목길이다. ()나라 비단 직조공들이 모여 살던 마을을 재현했는데, 비단을 의미하는 '()'과 마을을 의미하는 '()'가 합쳐진 이름이란다. 아무튼 이 거리는 중국의 고대영화(古代映畫)에서나 볼 법한 색다른 풍경들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해서 성도(청두)를 찾는 관광객이면 한번쯤은 꼭 들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의 인사동 거리처럼 객잔, 전통음식점, 카페, 특산품점, 공방, 노점 등 당시의 문화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구석구석 흥미로운 곳이라 할 수 있다.

성도(청두)의 또 다른 볼거리인 천부촉운(天府蜀韻)는 성도시에서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제작한 사천성 최초의 창작 예술쇼다. 사천성의 모습, 문화, 역사, 자연을 음악과 춤, 그리고 시와 그림으로 묘사하여 사천의 판타지를 아름답게 그려낸 대형 공연이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즐비하게 늘어선 전통(傳統) 건물들, 그리고 고풍스런 건물 외관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홍등(紅燈)이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겨준다. 우리나라의 인사동쯤 되는 풍물거리로 알고 왔는데, 실제로 보니 그보다 한참 더 깊은 맛을 풍기는 것 같다.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성되어 있다는 얘기이다.




거리는 활기로 넘친다. 성도(청두)와 사천을 대표하는 다양한 먹거리를 판매하는 상점, 야크 피부를 오려 잇고 채색해 만든 수공예 인형, 종이 공예품 등 다채로운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도열해 있다.








이곳은 볼거리와 먹을거리로도 유명하다. 노점에서 팔고 있는 설탕공예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온갖 모양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거의 달인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쌀에 이름을 새겨 넣는 등 신기하고 특이한 갖가지 공예품들을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다.



금리(锦里)거리는 옛날 이 지역에 있었던 촉나라 시대의 거리를 재현해 놓은 거리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가게들은 아기자기한 수공예품 또는 이 지역의 특산품들을 팔고 있다. 과자 등 다른 먹거리를 파는 상점들도 보인다. 인사동처럼 식당이나 술집도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 와중에 민속객잔(民俗客棧)’이라고 적힌 고풍스런 건물도 보인다. 숙박업을 하는 집도 있다는 얘기이다. 뜨락에서 차()도 팔고 있는 모양이니 한번쯤 들어가 볼 일이다.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외국계 유명커피전문점만 찾을 게 아니고 말이다.



어느 정도 걷다가 이내 되돌아서고 만다. 주어진 시간이 이미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방금 전 무후사에서 동생 내외를 찾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소모했던 게 그 원인이다. 다음 장소로 출발하기 바로 직전에 도착한 우리 부부에게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10분 내외, 이것저것 둘러볼 시간은 아예 없다. ‘처삼촌 벌초 하듯이어설프게 둘러볼 수 있을 뿐이다. 발길을 서두르고 있는데 문득 인형을 진열해 놓은 상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작은 인형들을 진열해 놓았는데, 그중에는 갖가지 형상을 한 가면(假面)들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곳 금리거리에 천극공연장(川劇公演場)’이 소재하고 있다고 했다. 둘러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는데 저 가면으로라도 위안을 삼아야겠다. 참고로 천극이란 이곳 사천성(四川省) 지역에서 유행하던 지방극(地方劇)으로, 가면(假面)을 쓰고 하는 연극(演劇)이다. 공연을 하는 중에 계속해서 바뀌는 가면이 흡사 마술공연을 연상시킬 정도라고 한다.



카페들도 여럿 보인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중국식의 빨간 등()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최신식의 카페 분위기와는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도 꽤 멋스럽고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게 바로 중국의 전통적인 멋이 아닐까 싶다.



저녁 식사를 위해 흠선재(钦善斋, 친샨자이)를 찾았다. 코스요리인 약선요리(藥膳料理)’가 나오는 음식점인데 성도(청두)시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이란다. ‘약선(藥膳)’은 병()이 난 후 보다는 병이 나기 이전에 미리 예방한다는 동양의학 '치미병(治未病)'의 원칙을 바탕에 두고 있다. 또한 음양오행 원리를 지침으로 삼으며, , , 진액을 생명활동의 기본물질로 본다. 이러한 '약선'의 주요 역할은 오장육부의 생리기능 조절에 있다. 그렇다면 오늘 먹게 되는 약선요리는 이런 원리를 바탕에 두고 만들어 낸 음식들일 것이다. 마음 놓고 먹어볼 일이다. 참고로 성도는 춘추전국시대에는 촉()의 도읍지였고 진(전한(前漢) 때는 촉군(蜀郡)이 관할하는 청두현(成都縣)이 설치되었으며, 삼국시대 때 촉한을 통일한 유비(劉備)가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또 당()의 현종(玄宗)이 안사의 난 때에 이곳으로 피신하였고, 수당(隨唐) 시대 때는 장안(長安), 양주(揚州), 둔황(敦煌)과 더불어 4대 도시였다. 2000년이 넘는 역사의 도시라는 얘기이다. 그러니 다양한 문화를 꽃 피웠을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음식도 그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사천요리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사천요리가 중국의 ‘4대 요리중의 하나가 되었음은 익히 알려진 대로이다.



요리는 코스로 제공된다. 맨 먼저 나오는 건 배추절임, 뒤를 이어 콩의 줄기를 견과류와 함께 볶은 것이 나온다. 이어서 한약재로 가미한 오리요리, 오이와 망고 그리고 새우를 함께 넣은 탕수육 비슷한 요리, 거기다 사천성의 특산품 중 하나라는 버섯, 소갈비, , 생선 등의 육류 요리와 한약재를 넣고 끓인 탕 등이 줄줄이 나온다. 이런 코스는 배를 통째로 꿀에 절인 듯한 디저트(dessert)가 나오면서 끝이 난다. 대충 15가지 정도가 나오는데 대부분의 요리들은 한약재를 넣어 만들었다. 하지만 중국 음식답지 않게 향이 강하지가 않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입맛에 맞추었지 않나 싶다. 손님의 대부분이 한국 사람들인 것을 보면 말이다. 참고로 사천 사람들은 음식은 중국에 있고, 맛은 사천에 있다(食在中國 味在四川)’는 표현을 즐겨 쓴다. 그만큼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매운 것은 두렵지 않다. 맵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다(不辣, 不辣)’라는 표현도 쓴다. 이는 사천음식이 맵다는 증거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볼 때는 딱이지 않나 싶다. 아무래도 중국음식은 조금 느끼한 편이데 사천음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저녁식사 후에는 천부촉운(天府蜀韻)를 관람하기로 한다. 자정 무렵에 비행기를 탈 예정이니 성도의 마지막 일정이라 할 수 있다. 3D로 제작된 화려한 사천쇼(Sichuan show)인 천부촉운쇼는 아름다운 사천성(泗川省)의 모습과 함께 문화, 역사, 자연을 아우르는 대서사시(大敍事詩)라 할 수 있다. 이 환상적인 쇼는 실내 쇼 이지만, 무대 장치의 한계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볼거리를 보여준다. 5막을 통해 사천성의 아름다움과 멋을 한꺼번에 감상 할 수 있다.



공연장 앞은 널따란 광장(廣場)으로 이루어져 있다. 놀이공원이 있는가 하면 주변에는 대형 쇼핑센터도 보인다. 쇼가 시작될 때까지의 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한 볼거리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쇼는 모두 다섯 막으로 구성된다. 그 첫 번째는 도입부로 사천의 현대 모습과 과거 모습을 현대의 랩(RAP)과 함께 노래한다. 이어서 1막이 펼쳐지는데 대지의 생명-청동무사-태양의 새-사천 전통극 순으로 이루어진다. 2막은 노래로 가득 찬 궁전-제갈공명(장기와 바둑판속의 세계)-시와 화폭의 예술이 펼쳐지며, 이어서 강변의 봄소풍-낙일랑 폭포의 하모니-장족(시집가기 전날밤, 횃불축제) 등의 3막이 끝나면 극은 행복한 고향으로 결말을 맺는다. 참고로 공연은 한글 자막이 제공된다. 따라 읽기가 쉽지는 않지만 내용을 이해할 정도는 된다는 얘기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관람객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중간에 변검쇼도 펼쳐진다. 순식간에 쓰고 있는 가면(假面)이 수없이 바꿔지는 쇼 말이다. 하지만 순식간에 바뀌는데다 거리까지 멀어 자세히는 볼 수 없다는 게 흠이다. 저런 변검쇼는 극()의 중간에도 볼 수는 있다. 그것도 직접 관중석에서 말이다. 가면을 쓴 배우가 관객석으로 나와 즉석 연기를 펼치기 때문이다. 다만 무대 근처의 객석에 앉아야만 자세히 볼 수 있으니 참조한다.













쇼의 또 다른 구경거리 중의 하나는 관람객들과 함께 꾸미는 깜짝쇼이다. 진행자와 연기자 몇 명이 관객석으로 나와서 진행을 하는데, 관람객 중의 한 명을 골라 강족여인과 짝을 지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코믹하게 꾸며진다. 눈을 가린 채로 아름다운 여성을 업도록 되어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웬 떠꺼머리 남성이 업혀 있다는 설정 말이다. 온갖 행운을 다 거머쥐었던 것으로 보이던 남성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장면이 여흥(餘興)으로 꾸며진 이 단막극의 하이라이트(highlight)가 아닐까 싶다.










여행지 : 중국 사천(四川省)

 

여행일 : ‘16. 9. 24() - 29()

일 정 :

9.25() : 도강언(都江堰), 접계해자(疊溪垓字), 송판고성(松潘古城), 모니구(牟尼溝)

9.26() : 구채구(九寨沟)

9.27() : 황룡(黃龍)

9.28() : 청성산(靑城山), 무후사(武侯祠), 금리거리(锦里古街), 천부촉운(天付蜀韻)


여행 넷째 날 오후, 무후사(武侯祠)


특징 : 찬란한 역사를 뽐내는 성도(成都, 청두)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옛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중국에서 유일한 도시이다. 삼국지의 무대 중 하나였던 촉()나라의 수도로 유비, 관우, 장비 등 삼국지 주인공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적 문화 콘텐츠(content)를 직접 보여주는 청두의 명소가 바로 '무후사(武侯祠)'이다. 공식 명칭은 한소열묘(漢昭烈墓 : 惠陵)이니 참조한다.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祠堂)인 무후사는 삼국지에 매료된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하는 곳이다. 제갈량을 기리는 무후사는 중국 전역(全域)에 있지만, 유비의 묘()인 혜릉(惠陵)은 청두 무후사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혜릉 주변을 두르고 있는 원형의 담이 인상적인데, 둥글게 설계된 벽에 정확히 들어맞도록 벽돌을 하나하나 측량해 진흙을 구웠다고 한다. 담장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옛 사람들의 지혜와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961, 무후사는 중국 중점문화재 업체로 선정, 1984년 박물관으로 되었으며 2008, 중국 1급 박물관으로 선정되었다.


 

관광버스는 우릴 무후사(武侯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다 내려놓는다. 무후사의 정문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란다. 하긴 우리가 지금 서있는 곳이 중국일진데, 이 정도는 되어야 유명관광지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튼 무후사의 공식명칭은 한소열묘(漢昭烈墓)이다. 촉나라를 세운 유비의 무덤인 혜릉(惠陵)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곳을 무후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유비와 함께 합장된 다른 한 사람을 기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무후(武侯)라는 호를 가진 제갈공명이다. 무후사는 중국 전역을 통틀어 유일하게 임금과 신하를 함께 합장한 형태의 묘역(墓域)이다. ‘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서기 223, 유비가 타계한 후 그의 묘지를 성도에 두고 혜릉(惠陵)이라 했다. 당시의 제도에 의하면 무덤이 있는 곳에는 필히 사당(祠堂)이 있어야 했기에 같은 시기 한소열묘가 세워졌다. 그 뒤 명()나라 초반에 무후사를 개축할 때 무후사와 유비의 무덤, 한소열묘를 하나로 합쳐 임금과 신하를 함께 공양하는 사당을 만들어 오늘날에 이른다.




엄숙해 보이는 붉은 기둥의 거대한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중국 역사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집중적으로 모신 사당답게 입구부터 기운이 범상치 않다. 무후사(武侯祠)는 촉한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기리고자 만든 사당이다. 현재 건물은 1672년 청()나라 초기에 재건된 것이다. 중국에는 무후사가 이곳 말고도 여러 곳에 있다. 그럼에도 이곳이 유명한 것은 무후사 내에 유비를 모시는 유비전(劉備殿)을 따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경내로 들어서면 보행로를 가운데에 두고 좌우 양쪽에 두 채의 비각(碑閣)이 지어져 있다. 정면에 보이는 문은 한소열묘의 정문이랄 수 있는 이문(二門)이다. ‘명량천고(明良千古)’란 편액이 걸려 있는 것으로 유명한 문이다. ‘명군량신 유전천고(明君良臣 流传千古)’, 명군과 어진 신하가 만나 오래도록 모범이 됐다는 말을 줄인 것인데 첫 글자인 ()’자가 날 일()’ 변에 달 월()’이 아닌 눈 목()’ 변에 달 월()’ 자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유비가 인재를 뽑아 쓰는 눈이 탁월했다는 뜻을 품고 있단다.



왼편에 보이는 비각 안에 들어있는 것은 명비(明碑)’라고 한다. ()나라 때인 1547년에 건립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장시철(張時撤)이 문장을 짓고, 고등(高登)이 비석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 반대편에는 당()나라 때인 809년에 건립되었다는 당비(唐碑)’가 있다. 공명의 업적을 기리는 촉한 재상 제갈량 무후사당비(蜀漢 宰相 諸葛亮 武侯祠堂碑)‘인데 글과 서예, 그리고 조각 등, 세 가지가 절묘함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삼절비(三绝碑)‘라고도 불린다. 당나라의 대문장가(大文章家)였던 승상(丞相) 배도(裵度)가 글을 짓고, 명필(名筆) 유공탁(柳公琸)이 글을 썼으며, 최고의 석각대가(石刻大家) 노건(魯建)이 각문(刻文)을 했다.



()에는 제갈공명의 생애가 적혀 있다고 한다. 내용은 제갈량이 마속의 목을 벨 때 마속이 죽어도 한이 없다고 목을 내놓은 일과 제갈량에 의해 유배된 요립이 제갈량의 부고를 듣고 통곡했다는 일을 적었다. 또한 양각(陽刻)과 음각으로 된 비석의 옆면에는 당나라와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의 글이 새겨져 있다.



정문이랄 수 있는 이문(二門)을 지나면 한소열묘(漢昭烈墓), 즉 유비전(劉備殿)이다. 유비(劉備)를 모시는 본전(本殿)을 가운데에다 두고 양 옆과 앞으로 긴 회랑(回廊)을 배치한 형태이다. 우리가 잘 아는 사자성어 도원결의(桃園結義)와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주인공인 유비의 사당 앞에선 사람들이 향을 들고 합장한 채 절하고 있다. 마치 종교의식의 한 장면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동행한 가이드의 말로는 중국인들에게 제갈공명과 유비는 신적 존재라고 한다.



본전은 업소고광(業紹高光)‘이라고 적힌 편액을 달고 있다. ()의 고조 유방(劉邦)과 광무제 유수(劉秀)의 제업(帝業)을 이어 발전시킨다는 뜻이란다. 촉나라를 촉한(蜀漢)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본전(本殿)의 중앙, 즉 유비전(昭烈殿)의 전각 안에는 황제의 면류관을 쓰고 황금색 곤룡포를 입은 유비 상이 안치되어 있다. 오늘날 현존하는 무후사 내 모든 인물상은 청나라 때 찰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인물상이 그러하듯 유비 상은 긴 귀와 수염을 강조하고 후덕한 얼굴 표정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유비상 왼쪽에는 유비의 손자인 유심(劉諶)의 상이 있다. 제갈량이 죽고 위나라의 대군이 침범하자, 유선은 목숨이 아까워 옥새를 들고 나가 항복하려 했다. 유심은 이를 극렬히 반대하고 청두의 군사를 모두 모아 결사항전하려 했다. 유선과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심은 유비묘를 찾아와 대성통곡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처자식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자결함으로써 촉한 남아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특이한 점은 유비의 오른쪽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원래 유비전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유선의 좌상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헌데 한 해가 채 넘어가기 전에 누군가 유선상을 훼손해 버렸다. 지방관청은 바로 유선상을 복원했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다시 파괴되었다. 한동안 새로 만들고 없애지기를 반복하다가, 청나라에 들어와 중건할 때 유선 상을 아예 만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천신만고 끝에 이룬 왕업을 손쉽게 내다버린 유선에 대한 성도(청두) 사람들의 반감이 어떠한지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지금도 유선 상 자리에는 커다란 나무뿌리 하나만 쓸쓸히 놓여 있다. 유약하고 무능했던 유선을 꾸짖는 듯한 후대인의 회초리처럼 냉엄하다.



유비상이 있는 대청의 양 옆 방에는 관우와 장비의 상이 배치되어 있다.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에 모여 같은 장소, 같은 날에 죽을 것을 결의했다. 비록 삼형제는 한시에 죽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무후사 유비전 아래 모여 대업 성취를 위해 분투하는 듯하다. 관우와 장비 상 바로 앞에는 그들의 아들과 손자 상도 안치되어 있다. 생동감이 느껴지는 토우(土偶)들에서 서로 판이했던 관우와 장비의 성격, 그들의 용맹한 성격 등이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황제의 복장을 하고 있는 관우의 상이 눈길을 끈다. 무신(武神)으로 추앙을 받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한 나라에 황제가 두 명이라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 싶다.




묘역에 들어오는 문의 옆으로 난 회랑(回廊)의 벽면을 따라 길게 붙여져 있는 석판(石板)이 눈에 들어온다.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가 새겨져 있는데 글씨는 악비(岳飛)가 직접 썼다고 한다. 출사표는 제갈공명이 촉의 2대 황제 유선에게 위나라 징벌을 위해 진군할 것임을 나타내는 글이다.



출사표의 양 옆 회랑(回廊)에는 청나라 때 만들어진 실물크기의 토우(土偶)들이 문신(文臣)과 무신으로 나뉘어 서열 순으로 공봉(供奉)되어 있다. 오른편은 방통(龐統)을 대표로 하는 촉한 문신들의 조각상이고, 왼편에는 조운(趙雲)을 대표로 하는 무신들 조각상이 있다. 마치 촉한을 대표하는 28명의 문·무신(·武臣)들이 나란히 서서 안쪽 중앙에 있는 유비의 사당을 지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참고로 조각상들 옆에는 그 인물의 생애를 적어놓았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을 듯 싶다.





유비의 사당 뒤쪽에 제갈공명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왕인 유비의 사당에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후대의 사람들 눈에는 촉의 왕인 유비보다도 인덕과 지혜를 갖춘 전설의 전략가가 더 위대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촉한(蜀漢)의 재상(宰相)이었던 제갈량(諸葛亮)은 서기 234년에 오늘날의 섬서(陝西) 보계(寶鷄)에서 54살을 일기로 타계했다. ‘무향후(武鄕侯)’란 생전의 작위(爵位)는 그의 사후 충무후(忠武侯)’로 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사당의 이름도 자연스레 무후사(武侯寺)’가 되었다. 최초의 무후사는 제갈량이 타계한 장소인 섬서에 세워졌다. 하지만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큰 무후사는 서진(西晉) 초반인 260년대에 신축한 이곳 성도의 무후사이다. 이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양된 사당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보여주는 삼국유적박물관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판에 새겨진 명수우주(名垂宇宙)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이름이 온 우주에 널리 빛난다.’라는 뜻으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가 무후사에 들러 제갈공명을 기리기 위해 쓴 시의 한 대목이라고 한다. 눈길을 끄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지붕 위에 올라앉은 미륵불(彌勒佛)과 신선상(神仙像)이다.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이 공존하는 것으로 중국에서 유일하단다.



무후사 본전에는 제갈량(諸葛亮) 조손(祖孫) 3대의 조각상이 공양되어 있는데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손에 부채를 잡은 제갈량의 조각상에는 금박칠을 했다. 조각상 앞에 있는 북()은 제갈량이 싸움터로 갈 때 가지고 다녔다고 해서 제갈고(諸葛鼓)’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귀중한 역사문화재로 취급되고 있다니 한번쯤 더 바라봐도 되겠다.




무후사의 뒤쪽에는 삼의묘(三義廟)’가 있다. 맨 뒤쪽에 배치되어 있는 셈이다. ‘의중도원(義重桃園)’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전각(殿閣)의 안에는 유비와 관우, 장비를 새긴 거대한 상()이 모셔져 있다. 유비는 인자한 모습으로, 장비와 관우는 힘센 기운이 있는 장군으로 묘사됐다. 특히 얼굴을 검게 하고 눈을 부릅뜨게 만든 장비의 상이 눈길을 끈다. 세 사람에 대한 소개의 글도 적혀 있으나 읽어보지는 않기로 한다. 삼국지를 서너 번이나 읽었으니 더 이상 알아낼 게 없을 것 같아서이다. 참고로 삼의묘는 청나라 초반에 신축하였으나, 1784년에 화재로 불탔던 것을 1787년에 다시 지었고, 1842년의 보수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건물은 청나라 도광(道光)년간인 1843년의 것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제독가(堤督街)에 위치해 있었다는 점이다. 1998년 도시 건설의 수요에 따라 무후사의 경내로 옮겨왔단다.



삼의묘는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추모하고자 지은 사당이다. 유비와 관우, 장비는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형제지의(兄弟之誼)를 맺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장소를 골랐다고 하기 보다는 어쩌다보니 복숭아나무 아래에 자리 잡았지 않나 싶다. 이곳 사천성에는 원래부터 복숭아나무가 많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열매가 나는데 매년 봄이 되면 복숭아꽃으로 장관을 이룬단다. 이 고장의 복숭아는 중국의 한무제(漢武帝)가 특히 즐겼다고 한다. 또한 도교(道敎)에서 최고의 여신으로 받들어지는 서왕모(西王母)가 잘 익은 복숭아 30개를 가져왔는데 동박삭(東方朔)이 몰래 3개를 훔쳐 먹어 천 년을 더 살 수 있었다는 얘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묘당의 밖은 도원결의부터 유비의 죽음까지 삼형제와 관련된 다양한 고사를 벽화로 전시하여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공명원(孔明苑)으로 향한다. 제갈량의 일생을 전시한 곳이다. 하지만 안은 구경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문이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공명원 옆으로 난 원형의 문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별천지를 만난다. 기기묘묘한 수석(壽石)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가 하면, 그 사이사이에는 오만가지의 형태로 만들어진 분재(盆栽)들이 널려있다. 하나는 조물주가 빚어낸 천연의 작품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의 손길에 의해 가공된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그 둘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극한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눈의 호사(豪奢)가 이루어진다는 얘기이다.






분재와 수석의 기묘함에 푹 빠져 있다가 혜릉으로 향한다. 붉은 담벼락을 뚫어 만든 예쁘장한 원형의 문()이다. 문을 통과하면 붉은 담벼락 사이로 난 좁은 길이 나타난다. 포토존(photo zone)이라며 가이드가 적극 추천하는 곳이다. 그의 말마따나 대칭을 이루는 구도가 사진 찍기에 안성맞춤이다. 아무튼 이 길은 무후사의 숨은 진주라 할 수 있다. 수백 년 된 대나무 숲 사이에 닦여진 길은 1980년대 초반에 닦여졌다. 그리 길지 않은 연륜을 지녔지만 회색 돌바닥, 붉은 벽, 푸른 대나무 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걷는 이의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이 길은 청두를 소개하는 선전 광고에도 자주 등장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담벼락을 따라가면 혜릉(惠陵)이라 부르는 유비의 묘()가 나온다. 이 능묘는 제갈량이 유비를 위해 선택한 자리라고 한다. 강희제가 직접 묘비를 썼다는 한소열황제지릉(漢昭烈皇帝之陵)’의 무덤에는 유비와 두 부인이 합장되어 있다. 능묘는 조벽과 문, 신도, 침전 등 건물로 구성되어 있고 동쪽의 무후사와 붉은 담벽의 좁은 길로 연결되어 있다. 능의 입구에는 천추늠연(千秋凜然)’이란 편액이 달려있다. ‘영웅의 기세는 천년이 지나도 늠름하다는 뜻으로 유비의 기품을 나타내는 문구가 아닐까 싶다.



촉한의 1대 황제 유비는 2234, 63세로 백제성(白帝城)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도읍(都邑)이었던 이곳 성도로 옮겨 이장(移葬)됐다. 시호는 소열황제(昭烈皇帝)’, 능묘는 혜능(惠陵)이다. 무덤의 둘레는 180m, 무덤의 위는 나무를 심어 도굴을 방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에 기세를 떨친 황제의 능묘 치고는 그 규모가 비교적 작은 편이다. 그것이 죽기 전 유비의 유지였다니, 후대의 존경과 사랑을 길이길이 받을 만하다.



혜능(惠陵)의 안으로 들면 묘()를 두르고 있는 원형의 담이 인상적이다. 작은 벽돌을 촘촘하게 원형으로 두른 담은 지난 사천대지진때도 무사했다고 한다. 선대의 기술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둥글게 설계된 벽에 정확히 들어맞도록 측량해 진흙을 굽고, 벽돌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올렸단다. 벽돌을 유심히 살펴보면 각기 다른 이름이 드문드문 새겨져 있는 게 보인다. 벽공(甓工)의 이름이란다. 각자 작업한 부분에 이름을 새긴 것은 벽이 허물어졌을 때 벽공은 물론 그의 가족들의 목숨을 담보로 잡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가만히 이름을 쓰다듬어본다. 1700여 년 전에 이 벽돌에 이름을 새기던 벽공이 느꼈을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장인의 정신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진다.



유비의 묘는 한 번도 도굴되지 않은 황제의 능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로 재미있는 두 설화(說話)가 전해 내려온다. 첫째는 서민적이었던 유비의 평소 생활에 비추어 무덤에 금은보화를 묻었을 리가 없다는 추측 때문이다. 실제 위나라나 오나라에 비해 국력이 뒤처졌던 촉한은 유비 사후에 화려한 능원 건설을 엄두도 못 냈다. 또 다른 이유는 묘를 도굴하려다 비명횡사한 도굴꾼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도굴을 꺼려했다는 것이다. 청두 민중들 사이에는 유비묘 위에 자란 나무를 꺾었다고 해서 후손이 팔 병신이 됐거나 무덤 풀을 뜯어먹은 양이 돌연 죽었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유비묘를 둘러싼 무서운 전설이 도굴꾼들의 의욕을 상실케 함으로써 17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전되어 왔다는 것이다.



혜릉을 빠져나오면 삼국문화진열실(三國文化陳烈室)이다. 무후사 경내에 있는 삼국문화의 전시실 겸 박물관으로 이곳 성도를 도읍(都邑)으로 삼았던 촉()나라 외에도 위()나라와 오()나라의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당연히 중국 전역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또한 후한의 멸망부터 삼국의 주요 전투, 당시의 문화풍속 등을 다양한 사진과 그래픽으로 정리하여 보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다. 북벌을 위해 절벽에 찍어 만든 나무로 된 삭도 모형은 제갈량이 얼마나 힘들게 위나라를 치러 갔는지 잘 보여준다. 참고로 박물관 내 유물 중 으뜸은 '설창용'(說唱俑)이다. 설창용은 청두 근교 톈후이산(天回山)의 한 후한시대 묘소에서 발굴됐는데, 중국 국보 문화재 중 하나다. 높이 55에 채색된 토용이었지만, 발견 당시에는 이미 탈색된 상태였다. 오른 발을 치켜들고 왼손에 든 북을 치며 파안대소 하는 설창용의 모습은 너무나 생생하고 유쾌하다. 고대 중국인의 해학과 유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오직 쓰촨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무후사의 경내에는 계하루(桂荷樓)라는 성도 등 사천성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을 판매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식당과 찻집도 있다. 유서 깊은 곳이라 엄숙한 분위기만 가득할 것이라는 편견은 버리자. 그리고 마실 나왔다 생각하고 찻집에라도 앉아보자. 예스러움이 저절로 묻어나는 곳에 자리를 잡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2000년 전의 세계로 들어설지 누가 알겠는가.






대자연오목(大自然烏木)이란 팻말이 생소해서 안을 기웃거려본다. 오목(烏木)이란 흑단(黑檀)의 중심부에 있는 단단한 부분으로 빛깔은 순흑색 또는 담흑색으로 몹시 단단하며, 젓가락, 담배설대, 문갑 따위를 만드는 재료로 쓰인다. 내 추측이 맞았나 보다. 안에는 검은 색의 나무를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수많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AD 233년에 혜릉이 조성되었으니 1700년이 넘은 셈이다. 그래선지 구도가 엄밀하고 건물이 첩첩하며 나무들도 울창하다.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수려한 경치로 장엄하면서도 숙연한 느낌을 준다. 산책하듯 여유롭게 걸어볼 일이다. 아무튼 이러한 경관이 마음에 들었던지 무후사는 역대 문인들이 즐겨 찾던 명소였다. 특히 760년 안사의 난을 피해 청두에 정착했던 시성(詩聖) 두보(杜甫는 유별나게 자주 찾았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그가 지었다는 '촉상(蜀相)’이란 시를 옮겨본다. 제갈량을 기리는 내용인데 지면 관계상 그중 일부분만 옮긴다. < 세 번 다시 찾은 번거로운 일도 천하 위한 계책이요, (三顧頻煩天下計), 두 임금을 섬겨 나라를 구하려는 노신의 마음을 보여주셨네. (兩朝開濟老臣心), 전쟁에 나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出師未捷身先死), 후세의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을 옷깃에 적시게 하는구나. (長使英雄淚滿襟) >





군현당(群賢堂)이란 이층 건물도 보인다. 하지만 무슨 목적으로 지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외관(外觀)으로 보아 지은 지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서둘러가며 한 바퀴를 돈 다음 정문을 빠져나오니 인파(人波)로 둘러싸인 빗돌이 반긴다. 빗돌(碑石)에는 삼국성지(三國聖地)’라고 적혀 있다. 그래 맞는 말이다. (), (), ()의 세 나라 중에서 가장 국력(國力)이 약했지만, 나관중(羅貫中)이 쓴 장회소설(章回小說)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중심축은 뭐니 뭐니 해도 ()’ 나라이다. 그 촉나라의 탄생설화나 마찬가지인 도원결의(桃園結義)’는 물론이려니와, 유비(劉備)가 묻혀있는 혜능(惠陵)‘에다 촉나라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제갈공명(諸葛孔明)까지 모신 곳이니 어찌 성지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여행지 : 중국 사천(四川省)

 

여행일 : ‘16. 9. 24() - 29()

일 정 :

9.25() : 도강언(都江堰), 접계해자(疊溪垓字), 송판고성(松潘古城), 모니구(牟尼溝)

9.26() : 구채구(九寨沟)

9.27() : 황룡(黃龍)

9.28() : 청성산(靑城山), 무후사(武侯祠), 금리거리(锦里古街), 천부촉운(天付蜀韻)

 

여행 넷째 날 오전, 청성산(淸城山)


특징 : 중국 도교(道敎) 명산인 청성산(淸城山)은 사천성(四川省) 성도시(成都市, 청두시)로부터 68, 도강언(都江堰)으로부터는 10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짙푸른 수목으로 사계절이 모두 푸르며, 수많은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마치 성곽(城郭)과 같다고 해서 청성산(淸城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전후 두 개의 산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산(前山)이 청성산풍경명승구의 주요 부분으로 면적은 약 15이며 경관이 매우 아름답고 문물고적이 매우 많다. 주요 명소로는 건복궁(建福宮)과 천사동(天洞), 조양동(朝洞), 조사전(祖殿), 상청궁(上淸宮) 등이 있다. 후산(后山)의 총면적은 100로 수려하며 주요 명소로 금벽천창(金璧天倉), 성모동(聖母洞), 산천무담(山泉霧潭), 백운군동(白云群洞), 천교기경(天橋奇景) 등이 있다. 청성산은 동천복지(洞天福地)‘, ’인간선경 (人間仙境)‘이라는 영예를 안고 있는 중국 도교 발원지(發源地) 중의 하나이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기원전의 헌원(軒轅)황제 때에 벌써 이곳에 도사가 은둔했으며 기원전 202년부터 서기 8년까지 이어온 서한(西漢) 후반에는 청성산에 길을 깔았다고 한다. 청성산을 도교의 발원지로 만든 장본인은 서기 25년부터 220년까지 존재했던 동한(東漢) 때 사람인 장릉(張陵)이다. 143년 장릉이 청성산에 올라 도교(道敎)를 창설했고 그로써 청성산은 중국 4대 도교명산의 으뜸으로 부상했다. 그 뒤의 기나긴 세월동안 많은 도사들이 청성산에 올라 건물을 짓고 길을 닦으면서 수련에 열중했다. 2000년 청성산은 도강언(都江堰)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버스는 우리를 엄청나게 널따란 주차장에다 내려놓는다. 화장실은 물론 매점 등 편의시설까지 두루 갖추었다. 하지만 투어가 시작되는 산문(山門)까지는 한참 더 올라가야 한단다. 성도 근처에는 볼거리가 많다. 인근 100km 이내에 세계문화유산만도 네 곳이나 된다. 여행을 시작한 첫날 둘러봤던 2200년 전의 치수(治水)시설인 도장언(都江堰) 말고도 중국 불교 성지의 하나이자 선경(仙境)으로 이름이 자자한 아미산(蛾眉山)‘과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높이 71m)낙산대불(樂山大佛)‘, 그리고 중국 도교의 고향인 청성산(靑城山)‘ 등이 더 있다. 오늘은 그중에서 청성산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주차장 앞에는 작은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조경용으로 세운 자연석에다 도()자를 새겨 놓았는가 하면, 또 다른 돌에는 태극문양(太極文樣)도 보인다. 이곳 청성산이 도교(道敎)의 발상지라는 게 산으로 들기 전부터 확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도교에서는 신선(神仙)들이 모여 산다는 열 곳을 일러 십대동천(十代洞天)’이라 한다. 신선들이 모여 살 정도로 산수가 수려하고 경치가 빼어난 곳들이다. 이곳 청성산도 그중의 하나이다. 다섯 번째인 보선구실천(寶仙九室天)’이라고 한다.



주차장에서 산문(山門)까지는 전기자동차(電氣自動車)가 운행된다. 디젤(diesel)로 인한 매연(煤煙)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다운 관리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산문까지는 걸어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다들 전기자동차를 이용한다. 아니 가끔은 걷고 있는 사람들도 보이기는 한다. 큼직한 배낭을 둘러맨 젊은이들이거나 몇몇의 중국인들뿐이지만 말이다.



전기자동차는 우릴 산문(山門)의 조금 아래에 위치한 주차장에다 내려놓는다. 차에서 내린 뒤, 하늘을 찌를 듯이 웃자란 편백나무들을 가로수 삼아 잠시 걸으면 멋들어지게 지어진 문()을 만난다. 삼 층으로 지어졌는데, 얼핏 보아 우리나라의 사찰 앞에 있는 일주문과 흡사하게 생겼다. 이번 문은 서촉제일산(西蜀第一山)’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서촉(西蜀)은 삼국지에서 자주 나오는 지명(地名)중 하나로 소설에서는 전략적 요충지로 그려져 있다. 그런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산문 앞의 광장에 이른다. 광장 한켠에 이곳 청성산이 근처에 있는 도강언과 함께 국가급여유경구(国家级旅游景区)‘, 즉 국가중점풍경명승구(国家重点风景名胜区)로 지정되어 있음을 알리는 빗돌이 새워져 있다. 그것도 ’A’가 다섯 개나 된단다. 최고 등급의 관광지인 것이다.



청성산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산문(山門) 안으로 들어선다.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것이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숫제 어느 유적지(遺蹟地)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하긴 유적지가 맞기는 하다. 유네스코(UNESCO)가 이곳을 세계유산(世界遺産, World Heritage)’으로 지정할 때 자연유산(自然遺産, Natural Heritage)’이 아닌 문화유산(文化遺産, Cultural Heritage)’으로 분류했으니 말이다.



산문 앞에 청성산에 대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무작정 산문 안으로 들어서는 것보다는 한번쯤 살펴보고 들어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나 싶다. 내가 가야할 코스를 미리 알아두는 것이 투어를 편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도에 나타나 있는 청성산은 꽤 크다. 아니 엄청나게 크다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산속에 또 산을 거느리는 등 주위가 무려 120km에 이른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청성산은 이 일대를 총칭하는 집합명사인 셈이다. 그 옆의 또 다른 안내판에는 청성산에 대한 소개가 적혀있다. 최고 해발이 2,434m이고 최저 해발은 736m란다. 그리고 36개 봉우리에는 여덟 개의 큰 동굴과 72개의 작은 동굴, 108개의 아름다운 경관을 거느리고 있단다. 또한 계곡이 깊고 봉우리가 수려함은 물론, 원시삼림이 짙푸르다고 해서 청성천하곡(靑城天下谷)’이란 명성을 얻고 있단다. 그런데 내 눈에는 청성천하곡의 자가 골짜기 곡()’자가 아닌 그윽할 유()’자로 보인다. 그렇다면 청성산이 천하제일의 골짜기라는 뜻이 아니라 천하에서 가장 그윽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야만 문맥(文脈)도 맞지 않을까 싶다. 결과적으로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잘 못 번역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하긴 남의 나라 글을 옮기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아무리 정부 책임 하에 번역을 했다지만 말이다.



길은 울창한 숲 속을 헤집으며 나있다. 원시(原始)의 숲을 연상시킬 정도로 울창하기 짝이 없다. 그런 좋은 여건을 그냥 방치하는 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산자락에다 데크로 예쁘게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산을 오르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저곳을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Healing)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후 왼편에 삼간(三間)으로 지어진 정자(亭子)가 보인다. 개울가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들어앉힌 것이 제법 멋스럽다. 앞에 안내판을 세워 놓았는데, 온통 한자(漢字) 투성이 인데다 글자까지도 또렷하지 않아 맨 앞에 적힌 쟁무(爭武)’라는 글자 정도만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옛날 이곳에서 무예(武藝)를 겨뤘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즐겨 읽는 무협소설(武俠小說)에 이곳 청성산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난 청성산 하면 무조건 검()과 권(), (), ()가 난무하는 강호무림(江湖武林)을 떠올린다. 각종 무협지에서 소림, 무당, 곤륜 등 쟁쟁한 문파들과 어깨를 겨루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청성파는 청성산에 소재하는 모든 도관(道館)과 그곳에서 수련하는 수도인, 즉 도사(道士)들을 일컫는다. 현실 속에서도 청성산은 도관들 천지이다. 그것도 하나 같이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풍토에서 모티브(móutiv)를 따온 것이 무협지 속에 나오는 청성파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청성파는 사천에 소재한 다른 문파들에 비해 그 세력이 조금 뒤떨어진 것으로 설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구파일방이라는 무협소설 속의 문파들이 대부분 도가(道家) 계열의 문파이므로 세력 간에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같은 사천 땅에 있는 아미파나 당문(唐門)에게 그 수위를 양보한다. 그래야만 소림파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도가의 일색인 무림강호를 어느 정도라도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자 옆에는 토굴도 보인다. 그 안에 뭔가가 모셔져 있다. 중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서 특별할 것도 없지만 카메라에 담아봤다. 불상(佛像)이 모셔져 있는 것 같아서이다. 이곳 청성산의 전산(前山)은 도교(道敎)의 세상인데, 그 틈새를 불상이 비집고 들어왔으니 특이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정자의 바로 앞, 길 한복판에 거대한 나무 두 그루가 버티고 서있다. 정려수(情侶樹)라는 이름표까지 붙어있을 정도로 소문난 나무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곳 청성산에 날향쓰난이라는 한 쌍의 연인이 살았단다. 그런데 결혼식 날 산톱이(잘은 모르겠지만 산적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들이 신부인 날향을 납치해 버렸던 모양이다. 이에 신랑인 쓰난이 신부를 구하러 갔다가 오히려 죽음을 당했고 말이다. 얼마 후 마수를 벗어난 날향이 죽어 있는 쓰난을 발견하고 그녀도 따라 죽었다고 한다. 그날 밤 큰비가 내리자 두 사람의 시신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들이 쓰러져 있던 자리에는 한 쌍을 이루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자라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그루는 겉이 다 망가졌고, 다른 한 그루는 상처투성이였다고 한다.



정려수를 지나면 건물 몇 동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단 시설지구가 나온다. 지도에 나와 있는 청성선관(淸城仙館)이 이곳이 아닐까 싶다. 기념품가게는 물론이고 야외 테이블까지 갖춘 식당도 보인다. 생김새로 보아 숙박(宿泊)도 겸하고 있는 모양이다.





청성선관에서 왼편으로 놓인 계단을 밟고 잠시 오르면 이정표 하나가 나타난다. 왼편 방향에 천사동(天师洞)이 표기되어 있다. 천사동을 거쳐 정상에 위치한 상청궁(上淸宮)에 이른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 코스를 선택할 경우 걸어서 올라가야 함은 물론이다. 고생을 좀 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케이블카가 편안하게 능선의 위까지 모셔다 줄 테니까 말이다.



케이블카를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자마자 멋들어지게 지어진 정자가 나타난다. 청성산의 탐방로에는 저런 정자가 백여 개나 지어져 있다고 한다. 이곳 천연각(天然閣)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 정자들은 삼각(三角)이나, 사방(四坊), 육각(六角), 팔괘(八卦) 등 그 모양이 각기 다를 뿐만 아니라 심후하거나, 기이, 험난 등 정자가 품은 뜻 또한 다르단다. 그중 천연각은 삼층팔각으로 지어졌다. 원목(原木)을 기둥으로 하고, 나뭇가지를 틀로 하여 넝쿨에 감겨있는 형태이다. 나무뿌리는 의자의 역할을 하고 있단다. 이런 모양새는 도법자연(道法自然)’삼생만물(三生萬物)’의 사상을 나타낸 것이란다.




바닥에 태극(太極)의 문양이 그려져 있다. 도교의 사상이 집약된 문양이겠거니 생각하다가. 무심코 자리에 앉고 본다. 이어서 마음을 텅 비워보려 애써보지만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게 그리 쉬웠다면 따로 도()를 닦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무위자연(無爲自然), 즉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이 한 몸을 자연에 맡겨보려던 내 시도는 무참하게 깨져버렸다.



또 다시 길을 나선다. 하늘을 뒤엎어버릴 정도로 울창한 편백나무 숲길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난다. 이번에도 역시 천사동으로 가는 길이 나뉜다. 이번에는 중간에 거치게 될 조사전(祖师殿), 천사동(天師洞), 천연도화(天然圖畵) 등의 명소들을 줄줄이 나열해 놓았다. 그 옆에 탐방로 안내도까지 세워놓을 것으로 보아 이곳이 더 중요한 갈림길인 모양이다.




잠시 후 길가에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는 우물이 나타난다. 세학천(洗鶴泉)이란다. 청성도인(淸城道人) 서좌경(徐佐卿)은 기분이 날 때마다 학()으로 변신하여 삼산오악(三山五岳)을 누볐다고 한다. 한나절이면 족히 돌아보았는데, 돌아와서는 천수의 물로 날개를 깨끗이 씻었단다. 당시에 그가 씻었던 샘물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이다. 물이 하도 맑아 한 모금 마셔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만두기로 한다. 수질분석표 한 장 붙어있지 않은 물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칫 배탈이라도 날 경우 여행을 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이다.



왼편에 제법 규모가 있는 건물도 보인다. ‘석순당(石筍堂)’이라는 휴게소(遊客接待所)이다. 석순봉(石筍峰)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원래 청성 제2소학교가 있던 자리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1955년 주은래수상이 방문한 사실에 더 의의를 두고 있는 모양이다. 그가 청성산을 유람하는 길에 이곳에 들러 학생들을 격려해주었던 일을 홍보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후 학교는 산 밖으로 옮겨나갔고, 석순당은 주은래총리를 기리는 곳으로 남게 되었단다. 간판을 보니 숙식(宿食)도 가능한 모양이다.




석순당을 지나면 곧이어 아치(arch)형으로 생긴 월동문(月洞門)이 나온다. 문이 멋지게 생겼다고 해서 그 안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그저 기념품가게가 있을 따름이다. 안으로 들어가 예쁜 돌계단을 오르면 월성호(月城湖)이다.




산중호수인 월성호(月城湖)는 계곡 속에 들어앉은 탓인지 물살이 없어 수면(水面)이 거울처럼 잔잔하다. 그 수면을 울창한 숲이 빙 둘러싸고 있다. 뒤편에는 거대한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도 나타난다. 멋진 풍광이 아닐 수 없다. 하기는 이 정도는 되었기에 서유기의 촬영지로 선택되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로 청성산은 산봉(山峯)과 계곡, 그리고 건물들이 모두 아늑한 푸름 속에 숨어 한적하다. 건물들도 재료를 자연 속에서 취하고 인공적인 수식을 많이 가미하지 않아 산과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단다. 소박과 자연을 숭상하는 도교(道敎)의 교리를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월성호는 앙증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그만 호수(湖水)이다. 호수 주변은 유원지(遊園地)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정자와 회랑(回廊) 등 조경에 도움이 되는 시설들 외에도 기념품가게 등 잡다한 시설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거기다 유람선(遊覽船)까지 띄워 놓았다. 청성산 여행에 낭만을 가미해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케이블카 건너편에 위치한 탑승장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그중 첫 번째는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건너는 방법이다. 부담 없는 요금(5위안/1) 때문인지 여행객 대부분아 이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나머지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르게 되는 유람선보다는 호수가로 난 길을 따라 서서히 걸으면서 더 많이 호수를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길은 호숫가를 따라 반 바퀴를 돌도록 되어있다. 길은 데크로 만들어져 있다. 덕분에 걷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다. 그저 물가에서 노닐고 있는 오리들을 희롱해가며 여유롭게 걸어볼 일이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생각이 든다면 유람선에 타고 있는 사람들과 반갑다는 손인사라도 나누면 될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걷다보면 어느덧 건너편이 이르게 된다. 이제 케이블카에 올라타기만 하면 청성산의 위이다. 고생 하나 없이도 산에 오르게 되는 셈이다. 아무튼 4명씩을 태운 케이블카는 10분이 채 안되어 상부(上部)의 탑승장에다 올려놓는다. 자칫 한눈이라도 팔다가는 주변 풍광을 찍을 사이가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다보면 절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뭔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순서에 따라 그려놓은 것 같은데, 숲에 가려 있어서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추측만 해볼 따름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조금만 더 오르면 도관(道館)이 하나 나타난다. 자운각(慈雲閣)이란다. 벽에 새겨진 그림이나 모셔진 신상(神像)들이 호화롭기 짝이 없는 건물이다. 도교는 무채색의 종교로 알아왔던 내 상식에 비추어볼 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도교(道敎)는 신선사상(神仙思想)에 뿌리를 둔 중국 자생의 종교로 중국의 역사와 풍토, 지리적 조건하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20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노자(老子)를 개조(開祖)로 하고 장도릉(張道陵, 본명은 張陵·?156)을 교조(敎祖)로 하는 도교는 그 역사적 전개과정이 유교(儒敎)와 비슷하지만 내용상으로는 큰 차이를 보여 왔다. 유교가 중국의 사회질서나 학문과 기술을 통치자(統治者)의 입장에서 규명하려 했다면 도교는 종교적 요소를 바탕으로 이를 민중(民衆)‘의 입장에서 대변해왔다. 이렇듯 민중의 정서가 흠뻑 밴 도교를 모르고는 중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니 오늘 청성산 투어는 중국의 문화를 살짝 엿보았다고 치부하면 되겠다.



청성산은 후한시대(2세기경) 사람인 장릉(張陵)()’를 찾아 산에 든 이후로 도교의 발원지가 되었다. 장릉은 은 한나라 초기의 책사였던 장량(張良)8대 손으로 키가 구척팔촌이고 짙은 눈썹에 뺨이 컸으며 붉은 두정(頭頂)에 녹색의 눈을 가졌다고 전한다. 일곱 살 때 이미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완독했으며, 나이가 든 후엔 수행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그가 를 터득했다는 소문이 나돌자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고, 이에 장릉은 최초의 교단인 천사도를 창설했다. 그는 또 병을 치료해주고 그 사례로 1년에 쌀 다섯 말(3kg)을 받았다. 때문에 민간에선 오두미도(五斗米道)’라 불렸다. 치료비나 종교 헌금의 명목으로 쌀을 거둔 것은 조직의 보전과 신자들의 복지와 후생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교단은 급속하게 커져갔다. 이들의 존재가 삼국지의 첫머리에 나올 정도이다. 장릉이 죽은 뒤 직계인 장형(張衡)을 거쳐 장로(張魯)에 이르러 오두미도는 중국 전역에 그 세력을 넓혀 갔다. 이는 장로가 조조에게 투항하는 조건으로 오두미도를 국교화(國敎化) 시켰기 때문이다.



자운각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화려한 전각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로 두 개의 전각이 더 있다. 삼간(三間)으로 된 오른편 건물은 약왕전(藥王殿)과 장생전(長生殿), 그리고 재신전(財神殿)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강한 몸으로 부귀영화까지 누린다니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신()들이 아닐까 싶다.



전각(殿閣)의 안은 연기가 자욱하다. ()을 타면서 내는 연기다. 전각의 안에는 신()들을 모셨다. 누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전각 앞의 현판에 해당되는 신들일 것이다. 카메라에 담아두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청성산에 도관 어디에서도 내부의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편 건물에는 위선최락(爲善最樂)’자운보복(慈雲普覆)’이란 편액(扁額)이 결려있다. '()을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다'라는 위선최락은 이해가 가는데 자운보복이라는 편액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르겠다. 구름이 하늘을 덮듯이 널리 은혜가 미친다는 뜻일 것 같지만 자신은 없다.



행여 무예(武藝)를 수련 중인 도사(道士)들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기웃거려보지만 인기척조차 없다. 궁금했던 그들의 무술을 살짝 엿보려던 꿈이 확 깨져버리는 순간이다. 아무튼 무협소설에 푹 빠져 살던 추억이 있는 난 그들의 무술에 관심이 높은 편이다. 도가(道家)의 무술은 신선(神仙)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내기를 쌓고, 그 기운을 인도하기 위한 술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중국 무협영화에서 나오는 소림사(少林窟)의 달마(達磨)가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髓經)으로 승려들의 체력을 보완했던 것처럼 도인들도 그와 비슷한 연유로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체력에 대한 안배로 무술을 연마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들의 무술은 동진(東晉) 때의 도교이론가인 갈홍(葛洪)이 쓴 포박자(抱朴子) 뿐만 아니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까지도 등장하니 참조한다.



가이드의 발길은 자운각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별 수 없이 나 혼자만이라도 상청궁(上淸宮)으로 출발하려는데 가이드가 말린다.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1시간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데도 이제 그만 내려갈 시간이란다. 그 정도로 시간이 촉박했다면 이곳에서 허송세월을 했을 게 아니라 곧장 상청궁으로 올라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항의를 하는 나에게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우리 일행 중에 체력이 너무 약한 사람들이 있어 그들을 배려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올라갈 생각도 안했단다. 그렇다면 그런 얘기를 우리에게 미리 전했어야 옳았다. 만일 그랬더라만 평소 등산으로 단련해온 우리 부부는 달려서라도 상청궁까지 다녀왔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성산의 수많은 도관(道館)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가 들어간 곳인데도 구경을 못했으니 말이다




자운각에도 관광객들을 그냥 놓아 보내지 않기는 매한가지이다. 기념품가게는 물론이곳 사천지방의 전통과자라는 깨강정도 즉석에서 만들어 팔고 있다.



아까 올라왔던 코스를 그대로 되돌아 내려온다. 그리고 산문에 이르게 되면서 청성산의 투어는 끝을 맺는다. 결과적으로 이번 청성산 투어는 반쪽짜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반의 반쪽도 못될 것 같다. 제대로 된 도관(道館)을 하나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곳 청성산에는 본전(本殿)이라 할 수 있는 상청궁(上淸宮)과 장릉(張陵)이 수도했다는 천사동(天师洞), 그리고 조양동(朝陽洞) 등 명소가 제법 많다. 그런데 그중에서 하나도 구경을 하지 못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 또한 패키지여행의 특징이니 말이다. 저렴한 가격에 따라나선 여행이니 그에 맞는 서비스가 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가이드들이 조금만 더 자기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날그날의 일정을 미리 알려줄 경우, 참가자들이 그에 맞춰 일정을 조정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난 1년이면 4회 정도 해외여행을 해오고 있다. 거의 일 년에 한 달 동안을 외국에서 머무는 셈이다. 그 여행의 대부분은 패키지여행, 당연히 그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습관이 되어 있다.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기본 일정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안 맞을 경우에는 가이드와 조율하여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을 다녀오기도 한다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기본도 지키지 않는 여행사를 따라나선 덕분에 이번 여행은 수박 겉핥기가 되어버렸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루이홍 호텔(Rui Hong International Hotel), 청성산 근처의 깊은 산중에 위치하고 있는 준 5성급 호텔이다. 3층 건물에 95실 규모이니 제법 크다고 볼 수 있다. 세면도구나 헤어드라이어 등 웬만큼 필요한 것은 다 갖추고 있고, 시설 또한 깔끔한 편이다. 특히 온천수를 이용한 수영장은 이 호텔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맑은 공기에 온천욕까지 즐길 수 있으니 휴양지로 제격이 아닐까 싶다. 그래선지 다른 호텔에 비해 노인들의 숫자가 유난히도 많아 보였다.



에필로그(epilogue), 사람들은 청성산에 갈 경우 꼭 보고 와야 할 것으로 세 가지를 추천한다. 일출(日出)과 운해(雲海), 그리고 브로켄 현상(Brocken現象)이다. 그 중에서도 성등(聖燈) 혹은 신등(神燈)으로 부르는 브로켄 현상이 가장 기이하며, 저 멀리 비쳐진 불빛속의 자신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상청궁이라고 한다. 참고로 브로켄현상이란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의 앞에는 안개가 끼어 있고 뒤에서 해가 비칠 때, 그 사람의 그림자가 안개 위에 크게 비치고 목둘레에 무지개 테가 여러 겹 둘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상 광학 현상을 말한다. 하지만 우린 이들 중에 하나도 보지 못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버렸고, 운해나 브로켄현상은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여 상청궁에라도 갔었다면 기대라도 해봤으련만 가이드는 상청궁 답사를 아예 생략해버렸다. 우리 일행들 중 몇 사람의 체력으로 보아 다녀올 겨우 오후 일정에 차질이 생길게 뻔하다는 것이다.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패키지여행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같이 동행을 하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편을 겪을 수 있다는 점 말이다.

여행지 : 중국 사천(四川省)

 

여행일 : ‘16. 9. 24() - 29()

일 정 :

9.25() : 도강언(都江堰), 접계해자(疊溪垓字), 송판고성(松潘古城), 모니구(牟尼溝)

9.26() : 구채구(九寨沟)

9.27() : 황룡(黃龍)

9.28() : 청성산(靑城山), 무후사(武侯祠), 금리거리(锦里古街), 천부촉운(天付蜀韻)

 

여행 셋째 날 오전, 황룡(黃龍)

특징 : 이왕에 구채구까지 갔다면 꼭 들러봐야 할 곳이 황룡(黄龙)풍경구이다. 구채구와 함께 1992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2000년에는 세계생물보호권 보호구로 지정되었다. 구채구에서 13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해발(海拔)이 대략 3,800m쯤 된다. 3.5km의 계곡 전체가 석회암이 용해되면서 침전물이 오랜 기간 퇴적되어 생긴 카르스트 지형이다. 계곡이 계단식 물웅덩이로 이루어져있어 아름다운 물색과 풍광을 자랑한다. 황룡이란 말처럼 황금색 웅덩이가 계곡 아래까지 이어진다고 보면 된다. 3,400개의 황금색 웅덩이에 해발 5,588m의 설보정(雪寶頂)의 만년설(萬年雪)이 녹아 흘러내리면서 오묘한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또한 계곡 주위에는 전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있으며, 고산준령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참고로 황룡(黄龙)풍경구의 주요 관광 포인트는 황룡구(黄龙沟)과 단운협(丹云峡)그리고 설보정(雪宝顶) 등이 있다.


 

오늘도 역시 새벽부터 기상이다. 아니 오늘은 더한 편이다. 아예 아침식사까지 거른 채로 출발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면서 가는 도중에 먹으라고 도시락 하나씩을 나누어준다. 황룡을 둘러보고 난 뒤에 성도(청두)까지 나가려면 서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도와 황룡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천주사(川主寺)까지 두 시간 정도, 여기서도 한 시간 여를 더 달려야만 황룡에 이를 수가 있다. 고산준령(高山峻嶺)을 넘어가는 험난한 여정이다. 하지만 주변 경관은 아름답다. 저 멀리 만년설(萬年雪)을 뒤집어 쓴 고산(高山)들이 보이는가 하면, 풀을 뜯고 있거나 무리지어 걸어가는 야크(yak)의 무리들도 심심찮게 눈에 담을 수 있다. 그렇게 세 시간 정도를 고생하고 나면 황룡풍경구의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입장권을 구입한 후에 긴 회랑(回廊)을 따라 걷는다. 황룡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이다. 8시부터 황룡의 입장이 허용된다니 케이블카도 그에 맞추어 운행을 시작할 게다. 아무튼 그에 맞추느라 새벽부터 서둘렀나 보다. 참고로 이 케이블카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2006년도에 건설됐다고 한다. 그래선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케이블카를 이용한다. 하긴 힘든 코스를 일부러 선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보고 싶은 경관을 빠뜨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이 얘기는 황릉의 볼거리들이 계곡을 따라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다는 의미이다.



케이블카는 한 대에 68명씩 타는데 보통 1분 간격으로 끊임없이 왕복하고 있다. 하부 승차장의 해발이 3,160m이고 오채지(五彩池)3,560m이니 케이블카가 단숨에 400m 높이를 올려다준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나 무조건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갑자기 고도(高度)를 올리다보면 신체의 리듬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3,000m가 훨씬 넘는 고지대에서는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이다.



상부 탑승장에서 내리면 커다란 안내판이 보인다. ’황룡풍경구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적고, 그 옆에다 전경도(全景圖)까지 그려 놓았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가는 게 좋겠다. 그래야 둘러봐야 할 곳을 빼먹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주어진 시간에 쫒겨 허둥대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망대로 향한다. 이때 고산병(高山病)을 주의해야 한다. 갑자기 3,000m를 훌쩍 넘기는 고지대(高地帶)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천천히 호흡하거나, 물을 조금씩 마시면 좋다. 황룡을 오르기 전에 고산병 약이나 산소통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예외이다. 그제 들렀던 모니구(牟尼溝)에서 달리다시피 해서 폭포의 위까지 올라갔던 게 그 증거이다.



잠시 후 황룡을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 이른다. 누런색으로 빛나는 황룡계곡은 물론이고, 만년설(萬年雪)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있는 설산(雪山)들이 한눈에 잘 들어오는 뛰어난 전망대이다. 그 옆으로 아까 넘어왔던 고갯마루인 설산마루(雪山梁, 설산량, The Snow Ridge, 해발 3,960m)가 보인다. 그 고개를 넘어오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도로의 오른편에는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위봉우리들이 늘어서있다. 바위가 하도 하얗다 보니 자칫 설산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다.





오채지로 향한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선 숲길이다. 주변이 온통 삼림으로 가득 차 있는데, 말 그대로 삼림의 보고다. 안내문에 의하면, 황룡은 천연식물자원의 녹색보물창고로, 여기에 자라나는 식목은 88.9% 정도 덮여 있고, 삼림은 65.8%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풍경구 안에는 1500여 종류의 식물이 자란다고 한다. 이처럼 원시적인 산림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황룡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판다(panda)‘와 원수이의 일종인 금사후(金絲侯)‘ 같은 멸종위기의 동물이 서식하는 자연의 보고라니 참조 한다.



탐방로는 한마디로 잘 가꾸어져 있다. 모든 구간을 데크로 깔아 인간의 때가 묻는 것을 경계했다. 곳곳에 화장실도 만들었다. 건물 전체를 목재(木材)와 자연석만으로 지은 것이 친환경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하다.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길가에는 매점(賣店)도 보인다. 대부분 간이매점이지만 어떤 곳은 나름대로 슈퍼마켓 정도의 규모를 갖춘 곳도 있다. 곳곳에 기파(氣吧)‘라는 산소카페도 만들어 두었다. 고산병(高山病) 등 높은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불의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배려한 모양이다.



오채지를 향해서 가는 길, 진행방향에 만년설을 뒤집어 쓴 거대한 설산(雪山)이 나타난다. 해발 5,160m의 옥취봉(玉翠峰)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5,582m 높이의 설보정(雪寶頂)일 게고 말이다. 아무튼 저곳에서 발원된 물이 석회질을 함유해 계곡을 내려가며 황룡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데크의 오른편에는 계곡이 나타난다. 황룡곡(黄龙谷)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이미 황룡에 이르렀다는 얘기가 된다.



길가에 간이매점이 보인다. 음료수와 과자 몇 가지를 진열해 놓았는데, 그보다는 산소통이 눈길을 끈다. 우리 일행들의 손에도 산소통 하나씩이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이곳 황룡은 해발이 3,000m를 훨씬 넘기는 높은 곳이라서 고산병(高山病)이 찾아올 우려가 있다면서 가이드가 반 강제적으로 나누어준 것이다. 특히 심장병이나 고혈압 등의 지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주의가 필요하다면서 말이다. 구채구로 들어올 때부터 겁을 주기 시작하던 가이드의 말투가 언제부턴가 겁박(劫迫)의 수준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니 나누어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제 모니구의 찰알폭포를 달리다시피 올랐던 우리 부부에게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이 매점에서 황당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산소통의 가격이 15위안이라는 것이다. 한화로 2,550원이니 환율 계산하는 과정에서 바가지를 조금 쓴다고 해도 3천원이면 족하다. 그런데도 우린 거금 1만원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가격을 알 수가 없었으니 주라는 대로 줄 수밖에... 이런 불쾌한 감정의 찌꺼기는 여행을 마칠 때까지 계속 이어져 여행을 망치고야 말았다. 가이드의 추천이 있을 때마다 색안경을 끼고 들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괜히 가격을 물어봤다는 생각을 여행 내내 떨쳐버리지 못했다. 몇 푼 되지 않는 돈 때문에 즐거워야 할 여행을 망쳐버렸으니 말이다.




20분 가까이 걸었을까 다랑이논을 닮은 물웅덩이들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게 하나 둘이 아니고 수십, 아니 수백도 더 되겠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황룡풍경구내에서도 가장 백미(白眉)라는 오채지(五彩池)이다. ’다섯 가지 빛깔로 이루어진 호수라는 뜻인데 해발이 3,900m나 되는 높은 곳에다 총 693개의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21,000의 면적 안에 들어있다니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채지(彩池)의 숫자 또한 가장 많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아무튼 그 웅덩이에는 설산(雪山)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인다. 그런데 그 물빛이 장난이 아니다. 찬란한 빛을 발산하는 광경이 마치 선경(仙境)에라도 와 있는 것처럼 몽환적이다.



깊고 넓은 연못에 넘쳐흐르는 물은 오색찬란한 것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눈앞에 펼쳐지는 석회암 연못의 물은 에메랄드, 코발트 빛 등 형형색색의 빛깔이 되어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킨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연의 현상에서 빚어진 오채지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보노라면 어떻게 이런 풍경들이 만들어졌을까하는 의문마저 든다.



탐방로는 오채지를 가운데에 놓고 빙 둘러서 나있는 모양새이다. 황룡의 하이라이트이니 곳곳에다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음은 물론이다. 누가 뭐래도 이곳 오채지의 특징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별로 달갑지 않은 특징도 있다. 바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인파(人波)이다. 인증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보통이고, 사진의 한쪽 귀퉁이에 다른 사람의 옆얼굴이 들어가는 것쯤은 감수해야만 한다. 이럴 때는 자리를 옮기면 될 일이다. 그리고 조금 한산한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으면 된다. 곳곳에 만들어진 전망대들은 어느 곳 할 것 없이 뛰어난 조망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습 뒤편에 오채지의 비경(祕境)을 배경화면으로 넣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황룡을 장족어로 하면 `써얼휘`라고 한다. `오색영롱한 호수`라는 의미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고 오묘한 색깔의 팔색조 같은 빛의 향연이 벌어진다. 이런 경관이 특이하면서도 기이하다고 해서 현생(現生)의 신선경(神仙境)‘이라 불리기도 한다니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에메랄드빛을 기저에 깔고 있는 푸르고 투명한 연못들이 극한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오채지의 바로 아래에 위치한 황룡사(黄龙寺)에 이른다. 황룡고사((黄龙古寺)라고도 불리는데 황룡풍경구라는 이 지역의 이름을 낳게 한 절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해서 어떻게 생긴 부처님을 모셨나 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상과는 달리 도교(道敎)의 사원이다. 하지만 이곳은 400년이나 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불교(佛敎)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명나라 장수가 세웠는데, 이 일대가 티베트인들의 거주지였던 탓에 라마불고의 사원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당시엔 ’18나한상(羅漢像)‘을 모셨으며 전각(殿閣)도 다섯 채나 되었단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도교사원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때 홍위병에 의해 불살라지고 파괴되었다는 기록을 읽었던 것 같은데, 복원(復原)되는 과정에서 도교사원으로 변했나 보다. 도교란 게 본디 중국에서 발흥하여 발전한 중국의 민족종교(民族宗敎)라고도 할 수 있으니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게 아니라면 유네스코 자연유산인 황룡에서 티베트 및 라마불교의 역사를 지우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산하(山河)는 그대로이되 역사가 바뀐 현실, 어쩌면 오늘날 티베트와 티베트인들이 처한 현실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황룡사에서 잠깐 내려오니 누런색의 바위지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아니 색깔이 누런 것이 진흙일지도 모르겠다. 그 위로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는 흙탕물로 보인다. 아마 바닥의 색깔 때문인 모양이다. 아무튼 이 계곡을 위에서 바라볼 때는 흡사 용()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황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단다.



잠시 후, 또 다른 사찰(寺刹)이 나온다. 황룡중사((黄龙中寺)일 것이다. 이 사찰 역시 명대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증축하였는데 설산사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단다. 아무튼 라마불교의 사찰인 황룡중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양을 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금()줄을 쳐놓아 사람의 출입을 막고 있다. 삼존불과 십팔나한상이 모셔졌다고 해서, 티베트인들의 전통 조각기법이라도 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다. 사찰 근처에 식당을 겸한 휴게소가 위치하고 있으니 배가 출출할 경우 요기를 하고 내려가도 되겠다.




황룡중사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접선교(接仙橋)가 나온다. 이곳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편은 급한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단축코스이다. 주어진 시간이 부족할 경우 망설이지 말고 들어서면 된다. 하지만 모든 비경(祕境)들을 두루두루 구경하고 싶다면 오른편으로 들어서야 함은 물론이다.



선경(仙境)을 기대하며 접선교(接仙橋)를 지난다. 잠시 후 아까 황룡사 근처에서 보았던 누런 암반지대를 다시 만난다. 그 넓이는 아까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하지만 눈에 담아둘만한 경관은 아니다. 그렇다면 접선교(接仙橋)라는 다리의 이름이 의미하는 선경(仙境)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분명히 선경을 만난다는 뜻인데 말이다.



곧이어 멋진 연못들이 다시 한 번 관광객들의 눈을 호사시켜준다. 쟁염지(争艳池)지이다. `연못 하나하나가 아름다움을 서로 다툰다.`는 뜻을 가진 연못의 이름답게 어느 것 하나 빼어나지 않은 연못이 없다. 아무튼 해발 3500m에서 658개의 연못을 자랑하고 있는 쟁염지 역시 황룡이 자랑하는 명소 중의 하나다.



이곳도 아름답기는 매한가지이다. 오채지에 뒤지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흡사 신이 그려놓은 그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오묘한 빛깔을 내는 연못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만년설에 뒤덮인 주변 풍경과 어우러진 환상의 광경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낀다.



수많은 연못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금황ㆍ파랑ㆍ주홍 등의 요염한 물빛을 자랑한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은 겨울철에 극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황금빛 석회암 연못의 비취색 물빛이 순백의 눈과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는 것이다. 아무튼 가을 단풍에 함박눈이 내리는 황룡의 설경은 3대가 덕을 쌓아야만 볼 수 있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전해진다.




수많은 연못들이 조화롭게 칸막이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연못들은 다랑이 논처럼 계단식으로 층을 이루고 있다. 그런 광경이 흡사 한 마리의 노란 용()이 계곡을 타고 승천하는 모습 같다고 황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단다. 석회질 성분이 많은 암석이 녹아내리면서 생겨난 용의 비늘 같은 수많은 연못이 맑은 물을 머금은 채 계곡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물의 색깔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다.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서도 달리 보이고 계절별로도 변한다고 한다.



곧이어 또 다른 연못의 무리를 만난다. 이번에는 사라영채지(裟羅映彩池)‘란다. 6,840의 면적에 400여 개의 채색연못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라(裟羅)‘는 두견화, 즉 진달래를 뜻한다. 매년 4~5월이면 앞 다투어 피는 진달래가 연못의 물은 물론 푸른 하늘과도 어울려 빛나면서 보는 사람들을 도취하게 만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크고 작은 연못들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맑은 물이 고여 있다. 그 물이 서로 다를 리가 없겠건만 연못들은 서로 다른 물빛을 만들어 내고 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갖가지 빛깔의 연못들이 주변의 바위, 울창한 삼림 등과 함께 최상의 조화를 이루어 낸다. 흡사 동화 속의 세계에 온 듯한 환상의 불러일으킨다.



계속해서 연못들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중간 중간에 울창한 숲길을 걷기도 한다.



조금 더 내려가니 금빛으로 빛나는 모래언덕이 나온다. ’금사포지(金沙鋪地)‘인데 만년설이 지하로 녹아들어 석회물질들을 응고시켜 형성된 금빛 찬란한 언덕이란다. 1,300m 길이에 폭이 40~122m에 이르니 자못 거대하다 할 수 있다.




금사포지 옆에는 분경지(盆景池)가 있다. 20,000의 면적에 330여 개의 채색 연못이 집단으로 모여 있다. 이곳의 연못들은 그 모양이 각기 다르고, 연못 둑의 크기와 높이는 나무의 뿌리와 지세의 변화에 따라 서로 다르단다. 각기 다른 형태의 연못들의 층층겹겹을 이루는데, 연못가 또는 물속에 있는 목(), (), (), ()들은 흡사 천연분경(天然分景)과도 같다.





금사포지와 분경지를 구경하고서 조금 더 내려오니 높이 10m 넓이 40m세신동폭포(洗身洞瀑布)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석회화 함몰층이라고 한다.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부서지며 금빛이 도는 폭포다. 황룡사를 가는 참배객들이 이곳에서 몸을 씻었다하여 세신동(洗身洞)이라 불러지게 됐다고 한다. 참고로 이곳에는 높이 1m에 넓이가 1.5m인 용동(龍洞)이 있다고 한다. 선인(仙人)이 몸을 깨끗이 씻고 도()를 닦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동굴이다. 하지만 찾아볼 수는 없었다. 어쩌면 물줄기 뒤편에 숨어있지 않나 싶다  



조금 더 내려오면 연태비폭(蓮台飛瀑)이다. 울퉁불퉁하면서도 정교한 모습인 암반(巖盤) 사이로 하얗게 갈라지는 물보라가 아름다운 폭포이다. 폭포의 길이 167m, 폭은 19m이다. 상대적 낙차는 45m라고 한다. 그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있다가 안내판을 들여다본다. 폭포의 생김새가 흡사 용의 발을 닮았단다. 그러고 보니 용의 발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부처님의 좌대 형태로 형성된 연대비폭의 위와 아래에는 아름다운 호수를 갖고 있다.



다음은 비폭유휘 폭포(飛瀑流煇 瀑布)’이다. 높이 14m에 폭은 68m이다. 흘러내리는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이리 저리 흩어지면서 비단을 깔아놓은 것과 흡사한 형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황룡의 아름다움을 '사절(四絶)’로 압축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년설로 뒤덮인 설산과 그림 같은 절경이 자리 잡은 협곡, 울창한 원시림, 다양한 빛깔의 연못 등을 가리킨다. 하지만 난 폭포를 포함시켜 오절(五絶)’이라 하고 싶다. 내세울 만한 것은 두 개밖에 없지만 크고 작은 폭포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뽐내기 때문이다.




비폭유휘를 지나면 울창한 편백나무로 둘러싸인 영빈지(迎宾池). 9,600의 면적에 구조가 정교하고 모양이 독특한 350여 개의 연못들로 이루어져 있다. 크고 작은 채색연못들이 층층으로 연결되어 있어,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즐거운 영빈곡과 같이 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사방에서 온 손님들은 반갑게 맞이한다는 것이다.



계단식 다랑이 논을 닮은 석회암의 연못이 이루어내는 기이한 광경에 넋이 나갈 정도이다. 이 모든 게 오랜 시간동안 자연이 이루어 낸 결과물이라고 하니 더 놀라울 수밖에 없다. 연못이 마치 물감을 타 놓은 듯 청명한 옥빛을 띄고 있는데, 이 물빛은 깊이와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낸다고 한다.



영빈지에서 황룡의 절경은 끝났다고 보면 된다. 이후부터는 울창한 숲길을 따라 내려가게 된다. 이곳 역시 원시의 숲 그대로이다. 가끔 송라松蘿)‘라고 하는 기생식물인 소나무 겨우살이가 보이기도 한다. 넝마를 걸친 듯 여기저기 죽은 나무에 걸쳐져 있다. 고산지대와 맑고 찬 공기 등의 영향으로 독특한 식물이 자라게 된다고 한다.



조금만 더 가면 출구이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지가 않다. 그만큼 황룡의 준 이미지가 강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쉬운 발걸음을 자연스레 잡는 건 간이매점이다. 케이크와 도넛, 스무디(smoothie) 등을 팔고 있다. 도넛으로 요기를 하면서 오늘의 투어를 정리해 본다. 아직까지도 두근거림이 멈추어지지 않는 절경이었다. 눈 덮인 민산산맥의 봉우리들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호수와 폭포 등은 한마디로 아름다운 자연환경의 다양함 그 자체였다. 참고로 황룡에는 693개의 연못과 3,400여개의 수반, 5개의 폭포, 4개의 석회동굴, 3개의 사원이 있다고 한다. 1992년에 구채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관광객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