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국 사천성(四川省)
여행일 : ‘16. 9. 24(토) - 29(목)
일 정 :
○ 9.25(일) : 도강언(都江堰), 접계해자(疊溪垓字), 송판고성(松潘古城), 모니구(牟尼溝)
○ 9.26(월) : 구채구(九寨沟)
○ 9.27(화) : 황룡(黃龍)
○ 9.28(수) : 청성산(靑城山), 무후사(武侯祠), 금리거리(锦里古街), 천부촉운(天付蜀韻)쇼
여행 넷째 날 오전, 청성산(淸城山)
특징 : 중국 도교(道敎) 명산인 청성산(淸城山)은 사천성(四川省) 성도시(成都市, 청두시)로부터 68㎞, 도강언(都江堰)으로부터는 10㎞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짙푸른 수목으로 사계절이 모두 푸르며, 수많은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마치 성곽(城郭)과 같다고 해서 청성산(淸城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전후 두 개의 산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산(前山)이 청성산풍경명승구의 주요 부분으로 면적은 약 15㎢이며 경관이 매우 아름답고 문물고적이 매우 많다. 주요 명소로는 건복궁(建福宮)과 천사동(天洞), 조양동(朝洞), 조사전(祖殿), 상청궁(上淸宮) 등이 있다. 후산(后山)의 총면적은 100㎢로 수려하며 주요 명소로 금벽천창(金璧天倉), 성모동(聖母洞), 산천무담(山泉霧潭), 백운군동(白云群洞), 천교기경(天橋奇景) 등이 있다. 청성산은 ’동천복지(洞天福地)‘, ’인간선경 (人間仙境)‘이라는 영예를 안고 있는 중국 도교 발원지(發源地) 중의 하나이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기원전의 헌원(軒轅)황제 때에 벌써 이곳에 도사가 은둔했으며 기원전 202년부터 서기 8년까지 이어온 서한(西漢) 후반에는 청성산에 길을 깔았다고 한다. 청성산을 도교의 발원지로 만든 장본인은 서기 25년부터 220년까지 존재했던 동한(東漢) 때 사람인 장릉(張陵)이다. 143년 장릉이 청성산에 올라 도교(道敎)를 창설했고 그로써 청성산은 중국 4대 도교명산의 으뜸으로 부상했다. 그 뒤의 기나긴 세월동안 많은 도사들이 청성산에 올라 건물을 짓고 길을 닦으면서 수련에 열중했다. 2000년 청성산은 도강언(都江堰)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버스는 우리를 엄청나게 널따란 주차장에다 내려놓는다. 화장실은 물론 매점 등 편의시설까지 두루 갖추었다. 하지만 투어가 시작되는 산문(山門)까지는 한참 더 올라가야 한단다. 성도 근처에는 볼거리가 많다. 인근 100km 이내에 세계문화유산만도 네 곳이나 된다. 여행을 시작한 첫날 둘러봤던 2200년 전의 치수(治水)시설인 도장언(都江堰) 말고도 중국 불교 성지의 하나이자 선경(仙境)으로 이름이 자자한 ’아미산(蛾眉山)‘과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높이 71m)인 ’낙산대불(樂山大佛)‘, 그리고 중국 도교의 고향인 ’청성산(靑城山)‘ 등이 더 있다. 오늘은 그중에서 청성산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 주차장 앞에는 작은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조경용으로 세운 자연석에다 도(道)자를 새겨 놓았는가 하면, 또 다른 돌에는 태극문양(太極文樣)도 보인다. 이곳 청성산이 도교(道敎)의 발상지라는 게 산으로 들기 전부터 확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도교에서는 신선(神仙)들이 모여 산다는 열 곳을 일러 ‘십대동천(十代洞天)’이라 한다. 신선들이 모여 살 정도로 산수가 수려하고 경치가 빼어난 곳들이다. 이곳 청성산도 그중의 하나이다. 다섯 번째인 ‘보선구실천(寶仙九室天)’이라고 한다.
▼ 주차장에서 산문(山門)까지는 전기자동차(電氣自動車)가 운행된다. 디젤(diesel)로 인한 매연(煤煙)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다운 관리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산문까지는 걸어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다들 전기자동차를 이용한다. 아니 가끔은 걷고 있는 사람들도 보이기는 한다. 큼직한 배낭을 둘러맨 젊은이들이거나 몇몇의 중국인들뿐이지만 말이다.
▼ 전기자동차는 우릴 산문(山門)의 조금 아래에 위치한 주차장에다 내려놓는다. 차에서 내린 뒤, 하늘을 찌를 듯이 웃자란 편백나무들을 가로수 삼아 잠시 걸으면 멋들어지게 지어진 문(門)을 만난다. 삼 층으로 지어졌는데, 얼핏 보아 우리나라의 사찰 앞에 있는 일주문과 흡사하게 생겼다. 이번 문은 ‘서촉제일산(西蜀第一山)’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서촉(西蜀)은 삼국지에서 자주 나오는 지명(地名)중 하나로 소설에서는 전략적 요충지로 그려져 있다. 그런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 이어서 잠시 후에는 산문 앞의 광장에 이른다. 광장 한켠에 이곳 ‘청성산’이 근처에 있는 도강언‘과 함께 ’국가급여유경구(国家级旅游景区)‘, 즉 국가중점풍경명승구(国家重点风景名胜区)로 지정되어 있음을 알리는 빗돌이 새워져 있다. 그것도 ’A’가 다섯 개나 된단다. 최고 등급의 관광지인 것이다.
▼ ‘청성산’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산문(山門) 안으로 들어선다.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것이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숫제 어느 유적지(遺蹟地)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하긴 유적지가 맞기는 하다. 유네스코(UNESCO)가 이곳을 ‘세계유산(世界遺産, World Heritage)’으로 지정할 때 ‘자연유산(自然遺産, Natural Heritage)’이 아닌 ‘문화유산(文化遺産, Cultural Heritage)’으로 분류했으니 말이다.
▼ 산문 앞에 청성산에 대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무작정 산문 안으로 들어서는 것보다는 한번쯤 살펴보고 들어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나 싶다. 내가 가야할 코스를 미리 알아두는 것이 투어를 편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도에 나타나 있는 청성산은 꽤 크다. 아니 엄청나게 크다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산속에 또 산을 거느리는 등 주위가 무려 120km에 이른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청성산은 이 일대를 총칭하는 집합명사인 셈이다. 그 옆의 또 다른 안내판에는 청성산에 대한 소개가 적혀있다. 최고 해발이 2,434m이고 최저 해발은 736m란다. 그리고 36개 봉우리에는 여덟 개의 큰 동굴과 72개의 작은 동굴, 108개의 아름다운 경관을 거느리고 있단다. 또한 계곡이 깊고 봉우리가 수려함은 물론, 원시삼림이 짙푸르다고 해서 ‘청성천하곡(靑城天下谷)’이란 명성을 얻고 있단다. 그런데 내 눈에는 청성천하곡의 ‘곡’자가 ‘골짜기 곡(谷)’자가 아닌 ‘그윽할 유(幽)’자로 보인다. 그렇다면 청성산이 천하제일의 골짜기라는 뜻이 아니라 천하에서 가장 그윽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야만 문맥(文脈)도 맞지 않을까 싶다. 결과적으로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잘 못 번역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하긴 남의 나라 글을 옮기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아무리 정부 책임 하에 번역을 했다지만 말이다.
▼ 길은 울창한 숲 속을 헤집으며 나있다. 원시(原始)의 숲을 연상시킬 정도로 울창하기 짝이 없다. 그런 좋은 여건을 그냥 방치하는 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산자락에다 데크로 예쁘게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산을 오르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저곳을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Healing)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잠시 후 왼편에 삼간(三間)으로 지어진 정자(亭子)가 보인다. 개울가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들어앉힌 것이 제법 멋스럽다. 앞에 안내판을 세워 놓았는데, 온통 한자(漢字) 투성이 인데다 글자까지도 또렷하지 않아 맨 앞에 적힌 ‘쟁무(爭武)’라는 글자 정도만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옛날 이곳에서 무예(武藝)를 겨뤘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즐겨 읽는 무협소설(武俠小說)에 이곳 청성산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난 청성산 하면 무조건 검(劍)과 권(拳), 장(掌), 지(指)가 난무하는 강호무림(江湖武林)을 떠올린다. 각종 무협지에서 소림, 무당, 곤륜 등 쟁쟁한 문파들과 어깨를 겨루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청성파는 청성산에 소재하는 모든 도관(道館)과 그곳에서 수련하는 수도인, 즉 도사(道士)들을 일컫는다. 현실 속에서도 청성산은 도관들 천지이다. 그것도 하나 같이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풍토에서 모티브(móutiv)를 따온 것이 무협지 속에 나오는 청성파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청성파는 사천에 소재한 다른 문파들에 비해 그 세력이 조금 뒤떨어진 것으로 설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구파일방이라는 무협소설 속의 문파들이 대부분 도가(道家) 계열의 문파이므로 세력 간에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같은 사천 땅에 있는 아미파나 당문(唐門)에게 그 수위를 양보한다. 그래야만 소림파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도가의 일색인 무림강호를 어느 정도라도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정자 옆에는 토굴도 보인다. 그 안에 뭔가가 모셔져 있다. 중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서 특별할 것도 없지만 카메라에 담아봤다. 불상(佛像)이 모셔져 있는 것 같아서이다. 이곳 청성산의 전산(前山)은 도교(道敎)의 세상인데, 그 틈새를 불상이 비집고 들어왔으니 특이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 정자의 바로 앞, 길 한복판에 거대한 나무 두 그루가 버티고 서있다. 정려수(情侶樹)라는 이름표까지 붙어있을 정도로 소문난 나무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곳 청성산에 ‘날향’과 ‘쓰난’이라는 한 쌍의 연인이 살았단다. 그런데 결혼식 날 ‘산톱이(잘은 모르겠지만 산적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들이 신부인 ‘날향’을 납치해 버렸던 모양이다. 이에 신랑인 ‘쓰난’이 신부를 구하러 갔다가 오히려 죽음을 당했고 말이다. 얼마 후 마수를 벗어난 ‘날향’이 죽어 있는 ‘쓰난’을 발견하고 그녀도 따라 죽었다고 한다. 그날 밤 큰비가 내리자 두 사람의 시신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들이 쓰러져 있던 자리에는 한 쌍을 이루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자라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그루는 겉이 다 망가졌고, 다른 한 그루는 상처투성이였다고 한다.
▼ 정려수를 지나면 건물 몇 동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단 시설지구가 나온다. 지도에 나와 있는 청성선관(淸城仙館)이 이곳이 아닐까 싶다. 기념품가게는 물론이고 야외 테이블까지 갖춘 식당도 보인다. 생김새로 보아 숙박(宿泊)도 겸하고 있는 모양이다.
▼ 청성선관에서 왼편으로 놓인 계단을 밟고 잠시 오르면 이정표 하나가 나타난다. 왼편 방향에 천사동(天师洞)이 표기되어 있다. 천사동을 거쳐 정상에 위치한 상청궁(上淸宮)에 이른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 코스를 선택할 경우 걸어서 올라가야 함은 물론이다. 고생을 좀 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케이블카가 편안하게 능선의 위까지 모셔다 줄 테니까 말이다.
▼ 케이블카를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자마자 멋들어지게 지어진 정자가 나타난다. 청성산의 탐방로에는 저런 정자가 백여 개나 지어져 있다고 한다. 이곳 천연각(天然閣)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 정자들은 삼각(三角)이나, 사방(四坊), 육각(六角), 팔괘(八卦) 등 그 모양이 각기 다를 뿐만 아니라 심후하거나, 기이, 험난 등 정자가 품은 뜻 또한 다르단다. 그중 천연각은 삼층팔각으로 지어졌다. 원목(原木)을 기둥으로 하고, 나뭇가지를 틀로 하여 넝쿨에 감겨있는 형태이다. 나무뿌리는 의자의 역할을 하고 있단다. 이런 모양새는 ‘도법자연(道法自然)’과 ‘삼생만물(三生萬物)’의 사상을 나타낸 것이란다.
▼ 바닥에 태극(太極)의 문양이 그려져 있다. 도교의 사상이 집약된 문양이겠거니 생각하다가. 무심코 자리에 앉고 본다. 이어서 마음을 텅 비워보려 애써보지만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게 그리 쉬웠다면 따로 도(道)를 닦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무위자연(無爲自然), 즉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이 한 몸을 자연에 맡겨보려던 내 시도는 무참하게 깨져버렸다.
▼ 또 다시 길을 나선다. 하늘을 뒤엎어버릴 정도로 울창한 편백나무 숲길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난다. 이번에도 역시 천사동으로 가는 길이 나뉜다. 이번에는 중간에 거치게 될 조사전(祖师殿), 천사동(天師洞), 천연도화(天然圖畵) 등의 명소들을 줄줄이 나열해 놓았다. 그 옆에 탐방로 안내도까지 세워놓을 것으로 보아 이곳이 더 중요한 갈림길인 모양이다.
▼ 잠시 후 길가에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는 우물이 나타난다. 세학천(洗鶴泉)이란다. 청성도인(淸城道人) 서좌경(徐佐卿)은 기분이 날 때마다 학(鶴)으로 변신하여 삼산오악(三山五岳)을 누볐다고 한다. 한나절이면 족히 돌아보았는데, 돌아와서는 천수의 물로 날개를 깨끗이 씻었단다. 당시에 그가 씻었던 샘물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이다. 물이 하도 맑아 한 모금 마셔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만두기로 한다. 수질분석표 한 장 붙어있지 않은 물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칫 배탈이라도 날 경우 여행을 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이다.
▼ 왼편에 제법 규모가 있는 건물도 보인다. ‘석순당(石筍堂)’이라는 휴게소(遊客接待所)이다. 석순봉(石筍峰)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원래 ‘청성 제2소학교’가 있던 자리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1955년 주은래수상이 방문한 사실에 더 의의를 두고 있는 모양이다. 그가 청성산을 유람하는 길에 이곳에 들러 학생들을 격려해주었던 일을 홍보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후 학교는 산 밖으로 옮겨나갔고, 석순당은 주은래총리를 기리는 곳으로 남게 되었단다. 간판을 보니 숙식(宿食)도 가능한 모양이다.
▼ 석순당을 지나면 곧이어 아치(arch)형으로 생긴 월동문(月洞門)이 나온다. 문이 멋지게 생겼다고 해서 그 안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그저 기념품가게가 있을 따름이다. 안으로 들어가 예쁜 돌계단을 오르면 월성호(月城湖)이다.
▼ 산중호수인 월성호(月城湖)는 계곡 속에 들어앉은 탓인지 물살이 없어 수면(水面)이 거울처럼 잔잔하다. 그 수면을 울창한 숲이 빙 둘러싸고 있다. 뒤편에는 거대한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도 나타난다. 멋진 풍광이 아닐 수 없다. 하기는 이 정도는 되었기에 ‘서유기’의 촬영지로 선택되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로 청성산은 산봉(山峯)과 계곡, 그리고 건물들이 모두 아늑한 푸름 속에 숨어 한적하다. 건물들도 재료를 자연 속에서 취하고 인공적인 수식을 많이 가미하지 않아 산과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단다. 소박과 자연을 숭상하는 도교(道敎)의 교리를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 월성호는 앙증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그만 호수(湖水)이다. 호수 주변은 유원지(遊園地)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정자와 회랑(回廊) 등 조경에 도움이 되는 시설들 외에도 기념품가게 등 잡다한 시설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거기다 유람선(遊覽船)까지 띄워 놓았다. 청성산 여행에 낭만을 가미해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 케이블카 건너편에 위치한 탑승장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그중 첫 번째는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건너는 방법이다. 부담 없는 요금(5위안/1인) 때문인지 여행객 대부분아 이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나머지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르게 되는 유람선보다는 호수가로 난 길을 따라 서서히 걸으면서 더 많이 호수를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 길은 호숫가를 따라 반 바퀴를 돌도록 되어있다. 길은 데크로 만들어져 있다. 덕분에 걷는데 조금도 부담이 없다. 그저 물가에서 노닐고 있는 오리들을 희롱해가며 여유롭게 걸어볼 일이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생각이 든다면 유람선에 타고 있는 사람들과 반갑다는 손인사라도 나누면 될 것이고 말이다.
▼ 그렇게 걷다보면 어느덧 건너편이 이르게 된다. 이제 케이블카에 올라타기만 하면 청성산의 위이다. 고생 하나 없이도 산에 오르게 되는 셈이다. 아무튼 4명씩을 태운 케이블카는 10분이 채 안되어 상부(上部)의 탑승장에다 올려놓는다. 자칫 한눈이라도 팔다가는 주변 풍광을 찍을 사이가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다보면 절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뭔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순서에 따라 그려놓은 것 같은데, 숲에 가려 있어서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추측만 해볼 따름이다.
▼ 케이블카에서 내려 조금만 더 오르면 도관(道館)이 하나 나타난다. 자운각(慈雲閣)이란다. 벽에 새겨진 그림이나 모셔진 신상(神像)들이 호화롭기 짝이 없는 건물이다. 도교는 무채색의 종교로 알아왔던 내 상식에 비추어볼 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도교(道敎)는 신선사상(神仙思想)에 뿌리를 둔 중국 자생의 종교로 중국의 역사와 풍토, 지리적 조건하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20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노자(老子)를 개조(開祖)로 하고 장도릉(張道陵, 본명은 張陵·?∼156)을 교조(敎祖)로 하는 도교는 그 역사적 전개과정이 유교(儒敎)와 비슷하지만 내용상으로는 큰 차이를 보여 왔다. 유교가 중국의 사회질서나 학문과 기술을 통치자(統治者)의 입장에서 규명하려 했다면 도교는 종교적 요소를 바탕으로 이를 ’민중(民衆)‘의 입장에서 대변해왔다. 이렇듯 민중의 정서가 흠뻑 밴 도교를 모르고는 중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니 오늘 청성산 투어는 중국의 문화를 살짝 엿보았다고 치부하면 되겠다.
▼ 청성산은 후한시대(2세기경) 사람인 장릉(張陵)이 ‘도(道)’를 찾아 산에 든 이후로 도교의 발원지가 되었다. 장릉은 은 한나라 초기의 책사였던 장량(張良)의 8대 손으로 키가 구척팔촌이고 짙은 눈썹에 뺨이 컸으며 붉은 두정(頭頂)에 녹색의 눈을 가졌다고 전한다. 일곱 살 때 이미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완독했으며, 나이가 든 후엔 수행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그가 ‘도’를 터득했다는 소문이 나돌자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고, 이에 장릉은 최초의 교단인 천사도를 창설했다. 그는 또 병을 치료해주고 그 사례로 1년에 쌀 다섯 말(약 3kg)을 받았다. 때문에 민간에선 ‘오두미도(五斗米道)’라 불렸다. 치료비나 종교 헌금의 명목으로 쌀을 거둔 것은 조직의 보전과 신자들의 복지와 후생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교단은 급속하게 커져갔다. 이들의 존재가 ‘삼국지’의 첫머리에 나올 정도이다. 장릉이 죽은 뒤 직계인 장형(張衡)을 거쳐 장로(張魯)에 이르러 오두미도는 중국 전역에 그 세력을 넓혀 갔다. 이는 장로가 조조에게 투항하는 조건으로 오두미도를 국교화(國敎化) 시켰기 때문이다.
▼ 자운각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화려한 전각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로 두 개의 전각이 더 있다. 삼간(三間)으로 된 오른편 건물은 약왕전(藥王殿)과 장생전(長生殿), 그리고 재신전(財神殿)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강한 몸으로 부귀영화까지 누린다니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신(神)들이 아닐까 싶다.
▼ 전각(殿閣)의 안은 연기가 자욱하다. 향(香)을 타면서 내는 연기다. 전각의 안에는 신(神)들을 모셨다. 누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전각 앞의 현판에 해당되는 신들일 것이다. 카메라에 담아두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청성산에 도관 어디에서도 내부의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반대편 건물에는 ‘위선최락(爲善最樂)’과 ‘자운보복(慈雲普覆)’이란 편액(扁額)이 결려있다. '선(善)을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다'라는 위선최락은 이해가 가는데 자운보복이라는 편액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르겠다. 구름이 하늘을 덮듯이 널리 은혜가 미친다는 뜻일 것 같지만 자신은 없다.
▼ 행여 무예(武藝)를 수련 중인 도사(道士)들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기웃거려보지만 인기척조차 없다. 궁금했던 그들의 무술을 살짝 엿보려던 꿈이 확 깨져버리는 순간이다. 아무튼 무협소설에 푹 빠져 살던 추억이 있는 난 그들의 무술에 관심이 높은 편이다. 도가(道家)의 무술은 신선(神仙)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내기를 쌓고, 그 기운을 인도하기 위한 술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중국 무협영화에서 나오는 소림사(少林窟)의 달마(達磨)가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髓經)으로 승려들의 체력을 보완했던 것처럼 도인들도 그와 비슷한 연유로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체력에 대한 안배로 무술을 연마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들의 무술은 동진(東晉) 때의 도교이론가인 갈홍(葛洪)이 쓴 포박자(抱朴子) 뿐만 아니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까지도 등장하니 참조한다.
▼ 가이드의 발길은 자운각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별 수 없이 나 혼자만이라도 상청궁(上淸宮)으로 출발하려는데 가이드가 말린다.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1시간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데도 이제 그만 내려갈 시간이란다. 그 정도로 시간이 촉박했다면 이곳에서 허송세월을 했을 게 아니라 곧장 상청궁으로 올라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항의를 하는 나에게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우리 일행 중에 체력이 너무 약한 사람들이 있어 그들을 배려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올라갈 생각도 안했단다. 그렇다면 그런 얘기를 우리에게 미리 전했어야 옳았다. 만일 그랬더라만 평소 등산으로 단련해온 우리 부부는 달려서라도 상청궁까지 다녀왔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성산의 수많은 도관(道館)들 중에서 유일하게 ‘궁(宮)’자가 들어간 곳인데도 구경을 못했으니 말이다.
▼ 자운각에도 관광객들을 그냥 놓아 보내지 않기는 매한가지이다. 기념품가게는 물론이곳 사천지방의 전통과자라는 깨강정도 즉석에서 만들어 팔고 있다.
▼ 아까 올라왔던 코스를 그대로 되돌아 내려온다. 그리고 산문에 이르게 되면서 청성산의 투어는 끝을 맺는다. 결과적으로 이번 청성산 투어는 반쪽짜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반의 반쪽도 못될 것 같다. 제대로 된 도관(道館)을 하나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곳 청성산에는 본전(本殿)이라 할 수 있는 상청궁(上淸宮)과 장릉(張陵)이 수도했다는 천사동(天师洞), 그리고 조양동(朝陽洞) 등 명소가 제법 많다. 그런데 그중에서 하나도 구경을 하지 못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 또한 패키지여행의 특징이니 말이다. 저렴한 가격에 따라나선 여행이니 그에 맞는 서비스가 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가이드들이 조금만 더 자기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날그날의 일정을 미리 알려줄 경우, 참가자들이 그에 맞춰 일정을 조정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난 1년이면 4회 정도 해외여행을 해오고 있다. 거의 일 년에 한 달 동안을 외국에서 머무는 셈이다. 그 여행의 대부분은 패키지여행, 당연히 그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습관이 되어 있다.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기본 일정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안 맞을 경우에는 가이드와 조율하여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을 다녀오기도 한다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기본도 지키지 않는 여행사를 따라나선 덕분에 이번 여행은 수박 겉핥기가 되어버렸다.
▼ 하룻밤을 머물렀던 루이홍 호텔(Rui Hong International Hotel), 청성산 근처의 깊은 산중에 위치하고 있는 준 5성급 호텔이다. 3층 건물에 95실 규모이니 제법 크다고 볼 수 있다. 세면도구나 헤어드라이어 등 웬만큼 필요한 것은 다 갖추고 있고, 시설 또한 깔끔한 편이다. 특히 온천수를 이용한 수영장은 이 호텔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맑은 공기에 온천욕까지 즐길 수 있으니 휴양지로 제격이 아닐까 싶다. 그래선지 다른 호텔에 비해 노인들의 숫자가 유난히도 많아 보였다.
♧ 에필로그(epilogue), 사람들은 청성산에 갈 경우 꼭 보고 와야 할 것으로 세 가지를 추천한다. 일출(日出)과 운해(雲海), 그리고 브로켄 현상(Brocken現象)이다. 그 중에서도 성등(聖燈) 혹은 신등(神燈)으로 부르는 브로켄 현상이 가장 기이하며, 저 멀리 비쳐진 불빛속의 자신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상청궁이라고 한다. 참고로 브로켄현상이란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의 앞에는 안개가 끼어 있고 뒤에서 해가 비칠 때, 그 사람의 그림자가 안개 위에 크게 비치고 목둘레에 무지개 테가 여러 겹 둘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상 광학 현상을 말한다. 하지만 우린 이들 중에 하나도 보지 못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버렸고, 운해나 브로켄현상은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여 상청궁에라도 갔었다면 기대라도 해봤으련만 가이드는 상청궁 답사를 아예 생략해버렸다. 우리 일행들 중 몇 사람의 체력으로 보아 다녀올 겨우 오후 일정에 차질이 생길게 뻔하다는 것이다. 억울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패키지여행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같이 동행을 하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편을 겪을 수 있다는 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