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국 동북부 여행

 

여행일 : ‘18. 6. 25() - 6.29()

여행지 : 중국 대련, 단동, 집안, 통화, 환인

일 정 :

6.25() : 대련(성해광장)

6.26() : 단동(압록강 철교), 집안(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환도산성)

6.27() : 통화(백두산 천지, 금강대협곡)

6.28() : 환인(오녀산성), 단동(유람선 투어)

 

여행 둘째 날 : 집안의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

 

특징 : 집안 분지(盆地)에는 하해방고분군(下解放古墳群)과 산성하고분군(山城下古墳群), 우산하고분군(禹山下古墳群), 만보정고분군(萬寶汀古墳群), 칠성산고분군(七星山古墳群), 마선구고군분(麻線溝古墳群) 등 모두 6개의 고분군(古墳群)이 설정되어 있는데, 이를 모두 합쳐 통구고분군(洞溝古墓群)이라 한다. 오늘 둘러보게 될 광개토대왕비와 능(태왕릉), 그리고 장수왕릉(장군총)은 우산하고분군에 위치하고 있다. 이 밖에도 각저총(角抵塚)과 무용총(舞踊塚), 사신총(四神塚), 우산하 41호분과, 배총(陪冢), 오회묘 4호분, 오회묘 5호분, 마조총(馬槽塚), 산련화총(散蓮花塚) 등 우리들에게 익숙한 고분들이 이곳 우산하고분군 안에 산재되어 있다. 장군총과 태왕릉을 비롯한 고구려 중기의 대형 기단식적석묘와 고구려 후기의 대표적 봉토석실벽화분들 대부분이 이 고분군에 속해있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각 유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사진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꼭 보고 싶어 하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로 향한다. 집안시(集安市)의 동북(東北)쪽에 있는 우산하고분군(禹山下古墳群)에 조성된호태왕비 경구(好太王碑 景區)‘로 가면된다. 이 경구에는 그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다는 고구려의 제19대 태왕(太王)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과 대왕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서면 호태왕비 경구(好太王碑 景區)’를 설명해놓은 안내판이 나온다. 광개토대왕비 비문(碑文)의 탁본을 가운데다 놓은 다음, 왼편에는 해동 제일의 고비(古碑)라는 능비(陵碑)에 대한 설명을 한자와 영어, 한글, 일어의 순서로 나열해놓았고, 오른편에는 경구(景區)의 안내도를 그려 넣었다.






지도를 살펴보다가 능비로 향하는데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그리고 호흡까지 거칠어진다. 하긴 어디에 내놓고 자랑해도 하등에 꿀릴 게 없는 훌륭한 조상에게 다가가는 길이니 어찌 마음이 급해지지 않겠는가. 거기다 외국에만 나오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는 얘기도 있지 않는가.



잠시 후 능비(陵碑)의 앞에 선다. 유리로 사방을 둘러싼 보호각(保護閣) 안에 들어있는 저 비석을 중국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부른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대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 하는 것이다. 이 비석이 발견된 것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封禁)이 해제된 이후인 1877(청나라 광서 3) 일이다. 만주족인 청나라가 자신들의 발상지를 거주금지지역으로 정하면서 집안 일대도 그에 포함시켰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비석만이 있었으며 현재의 단층형 비각은 중국 당국이 새로 세운 것이란다. 아무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광개토대왕비는 인위적으로 다듬어 규격이 딱 떨어지는 비석이 아니라 더 웅장하고 자유로운 기개가 돋보인다. 그 자연스러운 형태에서 고구려인들의 자유롭고 호방한 기질을 엿볼 수 있었다.



비각 안에는 거대한 비석(碑石) 하나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올랐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이 왕 2(414)에 부왕(父王)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도읍인 국내성(길림성 집안시 통구성)에 세운 비이다. 1,600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보낸 셈이다. 높이가 6.39m인 비()는 전면(全面)이 모두 검은데 그 사면에 총 441,775개의 글자가 주먹만 한 크기의 한자로 촘촘히 들어섰다. 들어선 글자 하나하나에는 광개토대왕의 업적, 그리고 고구려의 역사가 담겨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머리에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부터 광개토대왕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고구려가 계승·발전되어 왔는가를 소개한다. 두 번째 부분은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을 연대순으로 기록했다. 세 번째 부분에는 무덤을 지키는 수릉인(守陵人)의 출신지와 차출 방식 및 수릉인의 매매 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새겨 놓았다.



비각 안에서는 사진촬영을 할 수 없다. 그저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억지 논리로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는 나라에 위치하고 있으니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 아니겠는가. 자신들의 땅도 지켜내지 못했던 우리네 역사를 탓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이 비석이 발견되자 많은 서예가와 금석학자(金石學者)들이 탁본을 만들었다고 한다. 비석의 위에 종이를 붙여 나타난 윤곽대로 그려낸 뒤 먹을 칠하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法)’ 방식으로이다. 어린 시절 붓글씨를 연습을 할 때 아래 글씨가 다 보이는 습자지를 위에 놓고 그대로 글씨를 쓰던 방식으로 보면 되겠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정교한 탁본을 얻을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좀 더 정교한 탁본을 얻기 위해 불을 피워 비석 표면에 낀 이끼를 제거했는데 이게 돌이킬 수 없는 논란의 불씨가 되어버렸다. 일련의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고, 또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알 수 없게 된 글자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얘기는 귀에 박힐 정도로 들었을 터이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그저 고구려의 땅을 잃지 않고 이 비석의 존재를 일찍이 알았더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성찰(省察)로 대신해본다.



비석의 주인공인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고국양왕(故國讓王)의 아들로 이름은 담덕(談德)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했다(生而雄偉, 有倜儻之志)고 한다. 서기 391년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이 열여덟에 왕위에 올라 정벌에 나섰다. 그해 7월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하였고 9월에는 북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00명을 생포하고,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백제와의 싸움은 재위 4년까지 계속되는데 매번 승리했음은 물론이다. 재위 11년부터는 연()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리고 재위 22년에 대왕이 붕어하자 시호를 광개토왕이라 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내용을 간추린 것인데 비문에는 이러한 대왕을 기록하고 있다. 대왕이 다스렸던 22년 동안 고구려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였으며 군사력이 최강이었다고 한다. 비문에는 무위가 천하에 떨치고,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작을 이루었다라고 적고 있다.



비각의 옆에는 비석에 대한 안내문 외에도 표석을 하나 더 세워두었다. 중국에서도 호태왕비를 현존 최고(最古), 문자가 가장 많은 고구려 고고사료로 중시하고 있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고구려의 역사를 자기네들 것이라고 우긴다. 고구려에 고유문자가 없었고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또한 죄다 한문으로 되어 있는 점을 들며 중화왕조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지방정권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유적이 남의 나라 땅에 있다 보니 머리 터지게 싸울 수도 없는 일이고, 그저 우리네 것을 지켜오지 못한 회한(悔恨)에 가슴만 칠 따름이다.




이젠 태왕릉으로 가야할 차례이다. 광개토대왕비 서남쪽으로 200~3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바로 근처란 얘기이다. 두 지역 사이에는 나무를 심고 잔디를 가꾸어 공원처럼 꾸며놓았다.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다 하겠다.



5분쯤 걸었을까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그렇다고 어디로 갈지를 놓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길이 왕릉을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서 나있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들어서든 왕릉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난 집안의 고구려 유적하면 그저 국내성과 환도성, 그리고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만 생각했었다. 광개토대왕에게도 왕릉(王陵)이 있다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영토가 반도로 쪼그라들기 전 대륙을 누비고 다니던 이 무덤의 주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동북아의 외로운 섬처럼 나뉜 남과 북이 이제 닫힌 빗장을 풀고 문호를 열려고 하는 지금 그의 지혜를 빌려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태왕릉(太王陵)은 집안에 있는 고구려 왕릉급 고분 가운데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다고 한다. 가장 큰 것은 천추총(千秋塚, 광개토대왕의 부왕 고국양왕의 능으로 추정함)이란다. 세 번째로 큰 무덤은 장군총(將軍塚)이라는 것도 함께 알아두는 게 좋겠다.



눈에 들어온 왕릉은 거대한 자갈 무더기가 쌓여 있고 그 주위에 화강암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조금은 어수선한 모습이다. 원래는 장군총처럼 화강암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석실묘였는데,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장군총보다 4배는 컸을 것이라고 한다. 능은 거대한 돌을 방형으로 계단을 쌓아 7층으로 만들고 있어 중국에서는 대형방단계제석실묘(大型方壇階梯石室墓)’로 분류한다. 분구 정상부는 돌로 덮었다. 분구 한 변이 66m, 비뚤어진 정방형으로 최고 높이는 14.8m, 각 변에는 거대한 입석 5개를 배치했단다.



그렇다면 이 무덤에 광개토대왕이 묻혀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야 물론 출토된 유물에서이다. 청나라 말기 이곳에서 연화문 와당(瓦當)과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이라는 글이 새겨진 기명 전(, 벽돌)이 나왔다는 것이다. 1984년에 집안시박물관이 무덤을 정비할 때도 연화문화당과 기명 전이 출토되었다. 1990년과 2003년에는 왕릉 주변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배장묘와 기와를 이용한 배수시설을 확인했는데, 이때 辛卯年 好太王…□造鈴 九十六이라는 글이 새겨진 청동 방울(동제 탁령)을 비롯해 마구, 금동제품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이 무덤에 묻힌 사람이 광개토대왕일 것으로 추정한단다. 그러나 이 무덤을 고국양왕의 것으로 보면서, 장수왕릉(장군총)을 광개토대왕의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으니 참조한다.




왕릉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에 이르자 돌계단이 보인다. 덕분에 능의 위까지 편하고 안전하게 간다. 위로 오르자 석실이 우리를 맞이한다. 그러나 안은 텅 비어있다. 태왕을 모셨던 곳이다 싶어 안에 들어가 유리벽까지 확인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도굴당하여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나마도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아예 보초까지 세워 두었다. 아래 사진도 그의 양해를 구해 겨우 찍었을 정도이다. 아무튼 텅 비어있는 묘실(墓室)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누구를 탓하랴. 우리네 땅을 지켜내지 못한 서글픈 역사를 탓할 수밖에..



왕릉을 내려오는 길, 아까는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안내판을 살펴본다. 이 무덤이 고구려 제19대 왕이었던 호태왕 담덕의 무덤이라면서 무덤의 규격과 형상에 대해 적고 있다. 하지만 난 그의 아들 장수왕의 심정이 되어 다시 한 번 무덤을 올려다본다.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당시 영락대왕으로도 불리던 광개토대왕은 재위 22년인 나이 39세에 붕어(崩御)했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의 나이가 이때 18세였으니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겠는가. 장수왕은 부왕의 무덤을 크게 쌓고 2년 후 비석을 세워 부왕을 기렸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은 391년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해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중화왕조는 황제가 즉위하면 곧바로 황제가 사후에 묻힐 능을 조성하기 시작하는데, 고구려도 그러한 중화왕조의 전통을 따랐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중화왕조의 지방정권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능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집안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시간이 조금 남아 주변을 둘러보는데 널리다시피 한 망초꽃 외에도 아름다운 꽃들이 곳곳에 많이 피어났다. 조경용으로 심어놓은 것들이겠지만 하도 아름답기에 몇 장 올려본다.





이젠 장수왕의 무덤인 장군총(將軍塚)으로 가야할 차례이다. 이곳도 역시 우산하고분군에 들어있으나 광개토대왕비에서 북쪽으로 1.7정도 떨어진 룽산(龙山)’ 자락에 위치해 있다. 때문에 해당 경구(景區)의 주차장까지 버스로 이동하게 된다.



관리사무소 앞에는 커다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가운데에다 널찍하게 벽을 쌓고 오른편에다 고구려문물고적여유경구(高句麗文物古跡旅游景區)’에 대한 설명을 해놓았다. 고구려의 역사유적이 밀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풍부하다고 해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단다. 오른편에는 경구안내도를 그려 넣었는데, 우산하고분군을 우산귀족묘지경구와 호태왕비경구, 그리고 이곳 장수왕릉경구로 나누었다. 같은 고분군에 속해있으나 또 다시 입장료를 받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표를 구입해서 안으로 들면 또 다른 안내판이 나타난다. 이번 것은 장수왕릉경구(長壽王陵景區)’에 대해 안내를 하고 있는데, 오른편 안내문에는 장수왕릉을 동방의 피라미드는 칭찬을 붙여가며 설명하고, 왼편에는 경구 안내도를 그려 넣었다.




산뜻하게 조성된 꽃길을 따라 장수왕(長壽王)을 만나러 간다. 가슴 설레는 길이다. 우리 역사를 배우면서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던 나라가 바로 고구려(高句麗)’였다. 그런 나라를 가장 잘 다스렸던 임금이 광개토대왕과 그의 아들이 장수왕이 아니겠는가. 장수왕. 드넓은 대륙을 호령한 임금, 그곳에 잠들어있는 대왕을 직접 대면하는 길이니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잠시 후 피라미드를 쏙 빼다 닮은 돌 축조물을 만난다. 장수왕의 무덤인 장군총(將軍塚)’이다. ‘장군총광개토대왕릉비와 함께 고구려 문화재 탐방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까지 유행한 계단식 돌무지돌방무덤의 대표작으로,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장군총을 쌓는 데는 길이 3~4m로 다듬은 화강암 1,100개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총 무게를 합치면 무려 19,000. 요즘의 5톤 트럭으로 옮긴다면 3,800대가 동원돼야 하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화강암을 계단처럼 7층으로 쌓고, 강돌과 흙을 다져서 안을 채웠다. 쌓은 화강암이 무게에 눌려 흘러내리지 않도록, 무덤 아래쪽에 거대한 호분석(护坟石)을 한 변에 세 개씩 비스듬히 세워놓았다. 호분석 하나가 성인 키의 두 배가 넘을 정도로 크고, 무게는 15톤을 초과한다. 그중 하나가 사라지고 현재는 11개가 남아 있단다. 안타깝게도 무덤 안의 유품은 모두 도굴(盜掘) 당했다고 한다.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놓고 지금까지 설왕설래하고 있는 이유이다. 참고로 장군총은 외형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닮았다고 해서 동방의 피라미드란 미칭(美稱)을 가지고 있다.



비록 올라가보지는 못했지만 무덤의 정상부는 평형한 형태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원래는 무덤 꼭대기에다 신묘(神廟)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이 무덤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05년이다. 일본인 학자 도리이(鳥居龍藏)가 처음으로 현지조사하고, 프랑스 학자인 샤반(Chavannes, E.), 일본인 세키노(關野貞) 등이 조사해 퉁바오(通報)’, ’남만주조사보고(南滿洲調査報告)‘, ’고고학잡지(考古學雜誌)‘ 등에 발표한 이후부터란다.



정식 명칭이 우산하 1호분인 장군총은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석조 구조물로 고구려 제20장수왕의 무덤이다. 광개토 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아버지 못지않게 고구려의 힘을 강하게 키운 왕이었다.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이 넓힌 영토를 잘 다스리기 위해 정치를 안정시키는데 힘쓰는 한편, 뛰어난 외교술로 중국과 국교를 맺어 전쟁을 막았다. 특히 427년에는 고구려의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고 남쪽의 땅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북으로는 요동을 포함한 만주 땅을 차지하였고 남으로는 한강 이남까지 영토를 넓힘으로써 당시 고구려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장군총의 뒤쪽에는 고인돌 모양으로 생긴 작은 돌무덤(石塚)이 있다. 첩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군총 1호 배총(陪冢)’이다. 그런데 기단의 위에 올라가지 말라는 팻말이 올리어져 있다.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이 심심찮게 올라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돌을 쌓아올린 탓에 자칫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명색이 관광지인데 쇼핑센터가 들어서있지 않을 리가 없다. 중국 관광지의 특징대로 구경을 마친 후에는 어김없이 쇼핑센터를 거치도록 길을 내놓았다. 센터의 안은 기념품 위주로 진열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나무나 옥돌을 조각해놓은 조형물들이 눈길을 끈다.



위에서 본 무덤들 말고도 이곳 우산하 고군분에는 많은 무덤들이 분포되어 있다. 각저총과 무용총, 오회묘 4호분 등 우리들에게 익숙한 고분들이 대부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이밖에도 이러한 고분군들은 산성하고분군과 칠성산고분군 등 집안의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다. 환도산성 지역 내에만 무려 4700여 기의 고분이 있다고 하니 당시 고구려의 위세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고구려인들은 산성과 고분 축조에 특출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험준한 산악 지형을 이용해 성을 쌓고 무덤 속에는 살아있는 듯한 벽화를 그렸다. 고구려인들의 이런 솜씨는 고구려를 석조예술의 나라, 산성의 나라, 고분의 나라라는 표현으로 대표할 수 있게 했다.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등재된 이유일 것이다. 참고로 이곳 집안의 유적들은 '고구려의 수도와 왕릉, 그리고 귀족의 무덤(Capital Cities and Tom 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만주에 소재한 고구려의 수도 유적지가 망라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확정된 목록에는 오녀산성과 국내성, 환도산성. 통거우(洞溝) 고분군, 태왕릉과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오회분, 산성 아래의 고분들인 왕자총(王字墓염모총·환문총·각저총·무용총·마조총(馬槽墓장천1호분·장천2호분·임강총(臨江墓서대총(西大墓천추총(千秋墓)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