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국 동북부 여행
여행일 : ‘18. 6. 25(월) - 6.29(금)
여행지 : 중국 대련, 단동, 집안, 통화, 환인
일 정 :
○ 6.25(월) : 대련(성해광장)
○ 6.26(화) : 단동(압록강 철교), 집안(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환도산성)
○ 6.27(수) : 통화(백두산 천지, 금강대협곡)
○ 6.28(목) : 환인(오녀산성), 단동(유람선 투어)
여행 둘째 날 오후 : 단동의 압록강 단교와 압록강 유람선 투어
특징 : ① 중국 ‘동북 3성(東北三省)’ :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중국의 ‘동북 3성’은 중국 6대 지리구의 하나로 중국 동북부 지역을 말한다. 현재 중국 전체 인구의 8%인 1억 명의 인구가 사는 이곳에는 200만 명 이상의 조선족이 산다. 또한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어 한민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이 지역은 중국의 한족과 한국의 한민족 및 여러 북방 민족이 서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한국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중국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청나라 말기 중국이 힘이 없을 때는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침략을 당해 러시아에 뤼순을 조차 당했고,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의 영토가 된 이후에도 1931년 일본에 점령되어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세워지기도 했다.
② 집안(集安, 지안) :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만포시와 마주하고 있는 집안은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이 있던 곳이다. 서기 3년 유리왕이 졸본(홀본, 忽本)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400년 이상 고구려의 중심이었다. 북쪽으로는 여러 준봉들이 병풍처럼 막아 주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는 천혜의 요새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일 위도상의 다른 도시보다 겨울이 따뜻하고 서리가 내리는 기간도 짧아 만주 지역에서는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편에 속하는데, 이런 지안의 자연 조건은 고구려를 동아시아 강국으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이 지역은 고구려의 도성이었던 국내성 터를 포함해 광개토 대왕릉비와 장군총, 귀족의 고분 등이 대량 출토되어 ‘고구려 문화유적지’로 불린다. 그중 2개 산성과 고분군이 200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늘날 지안은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압록강을 배경으로 드넓게 펼쳐진 전원과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북한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는 이점까지 더해져 관광 도시로 도약 중이다.
③ 환도산성(丸都山城, 위나암성) : 국내성(國內城)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해발 676m의 산중에 건설되었는데, 평상시에는 국내성에서 거주하고 적이 침입해 오면 환도산성으로 대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은 산의 능선을 적극 활용한 지혜가 돋보인다. 동·서·북 3면은 험준해서 자연 지형을 성벽의 기초로 삼고 부족한 곳에 돌을 쌓아 보충했다. 경사가 심한 곳은 흙을 돋워 올렸다. 타원형으로 조성된 성벽의 총 길이는 6,951m이고, 가장 지세가 험준한 서쪽을 제외한 삼면에 각각 1~2개씩 문을 설치했다. 산성의 남쪽 바로 아래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通沟河)가 흐르면서 해자 역할을 했다.
▼ 점심 식사를 하러 집안 시내로 들어가는 도중에 고구려(高句麗)의 왕궁이었던 국내성(國內城)의 성터가 눈에 들어온다. 국내성은 졸본성(卒本城)에 이어 두 번째로 수도(首都)가 되었던 곳이다. 2대 왕이었던 유리왕 22년(AD 3)에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래 장수왕 15년(AD 427)에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장장 425년 동안을 고구려의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였다. 고구려는 이곳을 중심으로 영토를 넓히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어 나갔다. 유리명왕 때인 서기 2년의 일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쓸 제물로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는 일이 생겼는데 제사 물품을 관장하던 ‘설지’가 돼지를 뒤쫓아 ‘위나암(尉那巖)’에서 잡았다. 그리고 유리왕에게 고하기를 ‘국내 위나암은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땅이 농사짓기에 알맞고, 사냥과 고기잡이에도 유리합니다. 대왕께서 그곳으로 수도를 옮기신다면 백성들이 살기 좋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피해도 피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리명왕이 1년 뒤, 수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이때 옮긴 고구려 두 번째 수도가 지금 눈앞에 있는 ‘국내성’이고, 위나암성은 이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2.5㎞쯤 떨어진 곳에 있는 ‘환도산성’이다. 하지만 국내성과 환도성을 같은 곳으로 보는 학자들은 이를 부인하고, 209년(산상왕 13)에 환도성으로 천도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를 토대로 209년 천도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 국내성은 2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역사성과 함께, 견고한 방어력을 갖춘 고구려 성벽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소중한 유적이다. 성은 1930년대만 해도 높이 9m의 성벽이 잘 보존돼 있었다지만 국·공내전과 관리소홀로 인해 국내성의 동쪽과 남쪽 성벽은 아예 사라져 버렸으며, 그나마 남아있는 서벽마저도 집들에 둘러싸여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후 지난 2003년부터 중국이 국내성을 세계 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벌였고, 이때 서벽 주변의 300여 가구가 강제로 옮겨졌고, 북벽과 서벽이 새로 발굴되면서 국내성은 조금이나마 옛 모습의 일부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 아래 사진은 허물어지기 전의 국내성 사진이다. 국내성은 방형(方形)으로 쌓은 성이다. 남벽은 압록강에 접해있고, 서벽은 통구하 좌안에 접해있다. 성의 길이는 동쪽벽 554.7m, 서쪽벽 664.6m, 남쪽벽 651,5m, 북쪽벽 715.2m로 성벽의 총 둘레는 2,686m에 이르렀다. 원래는 동쪽과 서쪽에 문이 두 개씩, 남쪽과 북쪽 한 개씩 총 여섯 개가 있었다. 하지만 1921년 성을 대규모로 개수하면서 고구려 성의 원래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때 세 군데에 성문을 세웠는데, 동·서·남 세 방향에 하나씩만 세우고 나머지 문들은 흔적도 찾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마저도 1947년 국민당과 공산당 전쟁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단다.
▼ 점심 식사 후 환도산성(丸都山城)으로 이동한다. 집안시에서 서북쪽으로 2.5㎞ 정도 떨어진 산속에 위치하고 있다. 환도산성은 서기 3년(유리왕 22년) 고구려가 국내성(國內城)으로 수도를 천도(遷都)하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성에서 가까운 산에 축조한 산성(山城)이다. 평지성(坪地城)과 산성(山城)이 한 조(組)를 이루어 평지에 있는 국내성이 공격 받을 경우에 산성인 위나암성에 피난해 적과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었을 당시의 이름인 ‘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위나야성(尉那也城)‘으로 적고 있다니 참조한다.
▼ 관리사무소 앞에 만들어진 주차장에 내리면 커다란 안내판이 길손을 맞는다. 환도산성으로 보이는 옛 그림을 가운데에 놓고 왼편엔 지도, 그리고 오른편에다 환도산성에 대한 해설을 적었다. 주변의 산을 보호벽으로 하고 곡구(谷口)를 대문으로 삼았으며 산 중턱에는 궁궐을 앉힘으로써 중국 전통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이념을 따랐다며 아예 환도산성을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렇다고 성에 대한 사료(史料)를 적어놓은 것도 아니다. 해설은 읽을 필요조차 없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지도조차 지나칠 일은 아니다. 머릿속에 넣어둬야 성안의 시설들을 빠짐없이 살펴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서면 잠시 후 ’환도산성(丸都山城)‘이라고 적힌 표석(標石)이 나타난다. 푯돌의 상단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중국에서도 이곳을 국가급의 문화유산으로 보호·관리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등재되었으니 ‘국가급 보호’ 정도는 이젠 옛 얘기쯤으로 치부해버려도 되겠다.
▼ 표석을 지나자마자 산릉에 쌓아올린 성벽이 고개를 내민다. 산성으로 올라가는 돌계단도 보인다. 하지만 출입은 안 된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보수공사가 덜 끝나서 아직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단다. 참고로 환도산성은 고로봉식(栲栳峰式) 산성이다. 고로봉식이란 산의 능선과 골짜기의 선을 그대로 활용하여 허약한 곳은 돌을 다듬어 쌓고, 경사가 급한 곳은 흙을 쌓아올리는 방식을 말한다.
▼ 왼편에 출렁다리가 보여 일단은 건너고 본다. 길지도 그렇다고 높지도 않은 덕분에 무섭지 않을 만큼만 출렁거려 건너기에 딱 좋다.
▼ 출렁다리를 건너자 우물이 나온다. 지붕까지 씌워놓았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우물이다. ‘산성고정(山城古井)’이라는데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단다. 다만 아이를 갖고 싶은 아낙네들이 보름달이 뜰 때마다 이 물을 떠다 마시면 신통한 효과가 있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직경 0;45m에 깊이가 4.5m라는 우물의 규모도 함께 적어놓았다.
▼ 남옹문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문을 나서면 평탄한 통구하(通溝河)에 닿는다고 했으니 성벽이 복원되어 있지 않은 저곳쯤일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아무래도 그냥 터로만 남아있는 모양이다.
▼ 우물을 지나면 또 다른 안내판이 보이고, 그 오른편에는 성벽이 복원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은 멀리서만 볼 수가 있단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복원이 덜 끝났기 때문이란다. 내가 보기에는 마무리 작업까지 끝난 것 같은데도 말이다. 참고로 이 성은 유리왕 때 처음 지어진 이래 198년에 전면 재 축조되었고, 342년에는 전연(前燕)의 침공에 대비하여 환도성을 중수(重修)하고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도 있다.
▼ 환도산성(丸都山城)은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이라고도 하며 국내성의 북쪽 2.5㎞ 지점에 있는 676m 높이의 산성자산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서쪽은 칠성산의 험준한 봉우리들과 연결되어 천연방어물을 형성하고, 북쪽은 깊은 계곡을 두고 소판차령이 솟아 있다. 동쪽은 통구하를 따라 비교적 넓은 산골짜기가 펼쳐져 있다. 산성의 형세는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은 지형에 삼태기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산성의 남쪽 바로 아래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가 흐르면서 자연적인 해자를 만들고 있다.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은 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동·서·북 3면은 험준한 지형과 암반 등을 자연 성벽으로 삼고, 산마루의 평탄한 곳에 군데군데 석축 성벽을 쌓았다. 능선의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성벽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산성의 평면은 매우 불규칙한 형태이며, 성벽의 총길이는 6,947m이다.
▼ 성벽을 지나 왼편에 보이는 돌계단을 오르자 쉼터가 나오고, 조금 더 오르면 이번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안내판에는 자기네들 용어대로 관경대(觀景台)라 적고 있다.
▼ 전망대에 서면 시야(視野)가 툭 트인다. 산으로 빙 둘러싸인 산성에서 유일하게 트여있는 집안 방향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옛날 같으면 망대(望臺)가 들어서기에 딱 좋은 장소가 아닐까 싶다. 남쪽의 좁게 터진 입구만 빼고는 삼면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 방어요새라는 환도산성의 특징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풍경이라 하겠다.
▼ 전망대에서 연화지로 내려가는 길가에는 샛노란 금계국(金鷄菊, Golden-Wave)이 지천으로 피어 장관을 이룬다. 요즘은 길가에까지 퍼져있을 정도로 흔하디흔한 꽃인데 이게 널따랗게 무리를 이루다보니 훌륭한 눈요깃감으로 변한 것이다.
▼ 금계국 꽃밭이 끝나면 ‘연화지(蓮花池)’이다. 넓이가 대략 50-60㎡쯤 되는데 음마지(飮馬池) 혹은 음마만(飮馬灣)이라고도 불린다. 옛날 고구려 병사들이 이곳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 환도산성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漢)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18-44)은 환도산성에서 장기 농성전을 벌였다고 한다. 쳐들어온 적은 성안에 있는 고구려 군사들이 식수가 모자라 곧 항복할 것이라며 포위를 풀지 않았다. 그러자 고구려는 연못 속의 잉어를 잡아 수초(水草)에 싸서 보냈단다. 이에 적군이 성 안에 물이 풍부함을 알고 물러갔다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연화지가 당시 잉어를 잡았다는 그 연못일지도 모르겠다.
▼ 연화지에서 좁다란 길을 따라 조금 더 오르자 ‘요망대(瞭望臺)’가 나온다. 요망(瞭望)이란 게 본디 ‘높은 곳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는 것’일지니, 돌을 높게 쌓아 산 아래쪽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한 ‘감시초소’ 쯤으로 보면 되겠다.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6.7×4.5m 넓이에 남아있는 높이가 4.5m라는 시설의 규모와 함께 시설의 용도를 ‘전망대(展望臺)’라 적고 있다. 통구하와 집안시의 정경이 한눈에 쏙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낯설기는 하지만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라 하겠다. 그건 그렇고 이곳은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산성(山城)에 배치된 군사들의 동태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성(城)의 안팎을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으니 천혜의 요충지라 할 수 있겠다. 아니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해볼 때 단순히 망(望)만 보던 곳이 아니라 산성 안의 전투를 총 지휘하던 장대(將臺)였다고 보는 게 더 옳을 수도 있겠다. 참! 요망대 뒤로 15m쯤 되는 숲이 병사들의 숙영지 터라고 했으나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 요망대 맞은편에는 왕궁터가 있다. 궁터는 서너 개의 단(段)으로 나누어졌다. 경사지의 특성에 맞추어 궁궐을 지었나보다. 단과 단의 사이에는 나무계단을 놓아두었다. 옛날 이곳에 궁정의 계단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궁궐은 10대 왕인 산상왕에 의해 198년에 지어졌으며 주춧돌의 형태로 보아 남북의 길이 96.5m, 동서로 80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 궁궐의 단(段)과 단은 석축(石築)으로 쌓아 구분을 했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상당히 넓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옛날 이곳에는 화려한 궁궐이 가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궁궐은 두 번이나 불탔다고 한다. 첫 번째는 244년 위(魏)나라의 관구검(毌丘儉, ?-255)의 침입에 의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342년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 재위 337-348)에 의해서이다. 두 전쟁 모두 고구려가 처참하게 패한 전쟁이었다. 특히 모용황의 침략 때는 태후와 왕비가 사로잡히기도 했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 깃대유적도 보인다. 깃대를 꽂았던 자리인 모양이다.
▼ 유적지 정비작업이 덜 마무리 되었는지 성 안에는 포도밭과 농막(農幕)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외모가 단정한 것을 보면 아직도 사용을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평상시에는 거주하지 않고 농사철에만 사용하는 시설이란다.
▼ 단동에서 집안으로 이동하는 길에 호산장성(虎山長城) 앞을 지나게 된다. 고구려 시대 ‘박작성(泊灼城)’으로 불렸던 곳으로 요동반도에서 평양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방어하는 성(城)의 하나이자, 고구려가 당나라와 벌였던 전쟁 이야기에 꼭 등장하는 요충지였다. 그런데 1990년대에 중국 정부가 허물어져 있던 성을 개축하면서 만리장성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본 따서 복원하는 한편 이곳을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산성의 입구에 세워진 조형물에도 ‘만리장성 동단기점(萬里長城 東端起点)’이라는 글귀를 적어 놓았단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관(山海關)이라는 그동안의 역사적 사실까지 제처가면서 말이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오던 중국 동북공정의 현장을 실제 눈으로 보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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