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국 태항산 여행

 

여행일 : ‘18. 10. 8() - 10.12()

일 정 : 석가장(8)휘현 천계산·왕망령·만선산(9)임주 태항산대협곡(10)임주 팔천협(11)안양 문자박물관(11)석가장 조운묘(12)

 

여행 넷째 날 : 중국 문자박물관(中國 文字博物館)

 

특징 : 안양(安陽, 安阳) : 하남성의 최북단에 있는 인구 500만의 도시로 중국 7대 고도(古都)의 하나이자 주()의 문왕(文王)'주역(周易)'을 발전시킨 곳이기도 하다. 또한 세계 최초의 문자 중 하나로 간주되는 '갑골문(甲骨文)'의 고향인 탓에 '문자의 성지'로도 불린다. ‘은나라(, BC1384-1111)’의 수도였던 은허(殷墟)의 유적지가 이 부근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은의 뒤를 이은 주()나라가 낙양(洛陽, 뤄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쇠퇴했다가 근래에 들어와 은허를 발굴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역사의 장으로 올라섰다고 보면 되겠다. 이 작업은 중국 역사의 시작연도라고 공식적으로 알져왔던 BC 776년보다 500년 전에 찬란하고 진보된 단계의 문명이 이미 발달했었음을 입증했다고 한다. 또한 중국 고대문명의 연대에 관해 가장 확실한 증거를 제공했단다. 참고로 안양에 있는 은의 유적지는 가장 오래된 중국 문자로 신탁(神託)이 새겨진 거북등딱지와 짐승 뼈가 20세기 초에 우연히 발견됨으로써 학자들에게 알려졌다. 그러나 192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과학 장비를 갖춘 조사단에 의해 체계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으며, 이때 발굴된 것으로는 궁궐의 초석을 포함하여 청동제품·마차·도기··옥 및 신탁이 새겨진 수천 개의 뼈 조각등이 있다.

 

중국문자박물관(中國文字博物館) : 중국의 문자 발전사를 반영한 중화문명을 소개하기 위해 2009년에 설립한 박물관으로 건축면적 34,500에 건물 높이 32.5m로 지어졌다. 전시 내용은 한자의 기원·발전·변천, 한자인쇄술, 서예의 발전역사, 갑골문 발견·연구, 소수민족문자 등이다. 소장품으로는 1305점을 포함해 문화재 4,123점과 보조 전시품 1,058점 등이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용산구)에도 한글박물관이 있다. 한국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한글의 역사와 가치를 일깨우는 전시와 체험,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2014년 문을 열었다. 3층 건물로 지어졌으며 1층에는 한글누리(도서관)가 들어서 있으며, 2층은 상설전시실과 아름누리(카페 & 문화상품점), 그리고 3층은 기획전시실과 어린이를 위한 한글놀이터, 외국인을 위한 한글배움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행장이 있는 석가장으로 가는 길에 안양시(하남성)에 잠시 들른다. 이곳 안양(정확히는 안양시 관내 소둔촌小屯村이다)’은 중국 최초의 문자이자 세계최조의 문자 가운데 하나인 갑골문자(甲骨文字)를 사용하던상나라(, BC 1600-1046)’가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갑골문자가 많이 발굴되었고 지금도 계속 발굴된다고 한다. 이곳에 중국문자박물관(中国文字博物馆)’이 들어선 이유일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면 커다랗게 지어진 박물관 건물이 여행객을 맞는다. 2009년 정식으로 문을 연 박물관은 현대식 건축 스타일과 상나라의 궁전 양식을 혼합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대표적 건축물이라고 한다. 상나라의 궁전 양식인 사아중옥(四阿重屋, 네모난 지붕을 가진 2층 건물)’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단다.



본관의 높이는 32.5m, 외관은 금빛으로 빛난다. 상나라 시대의 문양이라는 도철문(饕餮紋)과 반리문(蟠螭文)으로 장식되어 있다. 참고로 상나라()’은나라()’라고도 불린다. 20대 왕 반경이 기원전 1,300년경에 은(현재의 안양)으로 수도를 옮겼기 때문이다. 주나라(, BC1046-256)에 의해 기원전 1046년경 상나라가 멸망하면서 은이 폐허가 되어 은허(殷墟)라 불린다.




입구에는 문자박물관을 상징하는 조형물인 자방(字坊)’이 세워져 있다. ‘()’이란 중국 고대건축이 갖고 있는 주요형식의 하나로 패방()’, ‘패루(牌樓)’라고도 불린다. 이곳 중국문자박물관의 자방은 높이 18.8m에 너비가 10m이며,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에서의 ()’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도철문(饕餮紋)의 그림으로 장식함으로써 고풍스러우면서도 위엄을 갖추었다고 평가받는다.



본관까지 가는 길 양쪽에는 구리로 만든 갑골편(甲骨片) 28개가 전시되어 있다. 표면에 갑골문(甲骨文)’이 새겨져 있음은 물론이다. 갑골문자는 중국 최초의 문자이다. 거북이 등이나 뼈에 새겨진 글자라서 갑골문자라고 한다. 기원전 1,600년에 세워진 상나라에서 만들어 썼던 문자로 세월이 흐르면서 한자로 변화·발전했다. 상나라 때 사용됐던 갑골문자는 3천여 자이나 이 가운데 절반만이 해독됐다고 한다. 그런 그렇고 걸려있는 갑골편들은 상당히 크다. 그렇다고 갑골문자가 새겨진 거북이의 등까지 엄청나게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모형은 모형일 따름이니까 말이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실물을 보게 되는데, 앙증맞다 싶을 정도로 그 크기가 작다.




안으로 들면 널따란 홀(hall)이 방문객을 맞는다. 이 중앙 홀은 중국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이념을 내포하고 있단다. 전시장은 본관의 1·2·3층에 자리 잡고 있으며, 총면적은 7,554에 달하고, ·기본전시장·전문전시장·특별전시장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 입구에 일편갑골경천하(一片甲骨驚天下)’라는 문구가 적혀있다는 걸 깜빡할 뻔했다. ‘한편의 갑골이 세상을 놀라게 하다는 뜻으로 중국 문명사에서 차지하는 갑골문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고 할 수 있겠다.



(dome)으로 된 중앙 홀의 천장이 눈길을 끈다. 이슬람 문화권을 여행할 때 만나게 되는 아라베스크(arabesque) 문양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수놓아져 있다.



사면(四面)에 새겨진 부각(浮刻)은 중국 문자매체의 발전사와 중국 서법 발전사, 세상을 놀랜 갑골, 소수민족 문자 대집성 등을 보여 주고 있단다.



벽에 걸린 세계지도가 눈길을 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를 표기해놓았는데, 이곳 황하 강 유역에서 일어났던 황하문명 말고도 나일 강변의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이 표시되어 있다. 큰 강의 유역에 위치한 이들 지역은 교통이 편리하고, 관개 농업에 필요한 물이 풍부하며, 공통적으로 청동기, 문자, 도시국가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각기 문자를 갖고 있었으니 이집트문명의 성각문자,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설형문자, 인더스문명의 상형문자, 그리고 이곳 황하문명의 갑골문자이다. 이중 유일하게 갑골문만이 남아 현재의 한자가 되었단다.



1층은 갑골문을 주제로 전시를 하고 있다. 안양시(安陽市) 관내 은허(發掘)에서 이루어졌던 갑골문의 발견과 발굴 및 연구과정을 보여주는데, 갑골문의 연구서적과 발굴된 일부 갑골들, 그리고 발굴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참고로 박물관의 홈페이지에는 1층의 전시를 갑골현세(甲骨現世)’, ‘과학발굴(科學’, ‘복이문의(卜以問疑)’, ‘문자해독(文字解讀)’ 등 네 부분으로 나누고 있었다.





갑골편(甲骨片)은 중국에만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미국과 영국, 러시아 등 갑골편을 수장(收藏)하고 있는 나라들과 그 보유 숫자를 세계지도에 표기해 놓았다.





2층은 3개의 상설전시실과 교류와 영상 전시실이 들어서 있다. 1전시장은 자법자연(字法自然)’갑골기사(甲骨紀事)’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창힐(倉頡)이 문자를 만든 전설, 고대에 새겨진 부호, 상주갑골과 갑골문자의 창제 방법 등 다양한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갑골기사라는 주제로 전시된 갑골편(甲骨片)들이다. 다양한 형태의 갑골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설명문을 보면 거북 배딱지에 새겨진 것이 ()’, 소의 어깻죽지 또는 짐승 뼈에 새겨진 것이 ()’이란다. 그래서 갑골문을 귀갑수골문자(龜甲獸骨文字)‘라고도 한단다. 한자가 만들어진 원리를 설명해놓은 패널(panel)들도 주의를 끌기에 충분하다. 물체의 형상을 본떠 만든 상형 문자‘. 추상적인 개념인 수나 공간을 가리키는 지사 문자와 상형 문자와 지사 문자 중에서 두 가지 이상의 글자를 결합하여 만드는 회의 문자등은 물론이고 글자의 절반은 뜻을 나타내고 글자의 절반은 음을 나타내는 형성 문자도 있단다.




종정천추(鍾鼎千秋)’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홈페이지에서 얘기하는 제2전시장인 모양이다. 이곳은 두 부문, 종정천추(鍾鼎千秋)‘물이재문(物以載文)‘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상조 때부터 춘추전국시기까지의 금문(金文)이 주로 전시되고 있다. 금문이란 은·주 시대부터 진한 시대까지 각종 청동기에 새겨 넣던 문자를 말하는데 다양한 형태의 용기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진열된 유물은 솥()이 대부분이나 준()과 배() 같은 다른 용기도 일부 보인다.



이 공간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문자들도 엿볼 수 있다. 대나무에 새긴 간독(簡牘, 죽간), 비단에 쓴 백서(帛書), 옥돌에 새긴 옥석기문(玉石器文), 화폐에 새긴 화폐문(貨幣文), 도자기에 새긴 도문(陶文), 도장에 새긴 새인문(璽印文) . 종류가 참 다양하기도 하다.











3전시장에는 문자통일(文字統一)‘, ’종예도해(從隸到楷)‘, ’설자전의(說字傳義)‘ 등의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진한시기의 금문(金文), 간독(簡牘), 돌에 세긴 비갈(碑碣)문자의 발전과 변화 과정 및 고대자서(字書), 한자의 교육, 한자의 표준화, 한자의 개혁 등 역사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문자의 통일을 이끈 진시황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고 보면 되겠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문자, 도량형, 화폐를 통일시켜 사회발전에 이바지했는데, 그중 문자의 통일이 현재 한자를 존재하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한자는 번체자로 불리는 예서, 해서체에서 더욱 간단히 한 간체자까지 빠르고 간결하게 쓰기 위해 변화를 거듭하고 있음을 전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참! 이 전시장에도 진한 시기의 금문, 간독, 돌에 새긴 비갈 문자,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활자화된 문자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부 공간에는 디오라마(diorama, 하나의 장면이나 풍경을 일정 공간 안에 입체적 구경거리로 구성한 것)로 종이를 만드는 과정이나 배움을 청하는 장면들을 재현해 놓았고, 한편에는 인물의 두상을 배치해 시각적 흡인력을 높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고대 자전과 한자의 교육이나 개혁 등에 관한 전시물도 보인다. 병음화(倂音化) 과정도 빼놓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3층은 4·5전시장과 특별전시실로 나누어져 있다. 4전시장은 민족문자 대가족 전시장이라고도 일컫는데 십문유채(拾文遺彩)‘, ’승고전금(承古傳今)‘, ’창신발전(創新發展)‘ 등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이곳에서는 티베트 문자와 몽골 문자, 위구르 문자 등 현존하는 문자는 물론이고, 점차 사라져 가는 세계 유일의 여성 전용문자인 여서(女书)와 윈난 지역에서 사용되는 징포문(景颇文) 그리고 거란(契丹)족이 사용했던 거란문 등 흥미로운 내용들을 엿볼 수 있다.



이 가운데는 훈민정음과 금강경도 소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글 또는 한국어라 칭하지 않고 조선족이 쓰는 문자로 소개했다. 우리 것이면서도 우리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을까?




5전시장은 인쇄술과 정보화 전시장이라고도 일컫는다. ’인쇄술 기원‘, ’조판인쇄(雕版印刷)‘, ’활자연변(活字演變)‘, ’새로운 도약‘, ’정보화시대등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제지(製紙)와 조판(雕版), 활자인쇄술, 현대한자, 소수민족 언어문자의 정보화 기술 등의 발전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 송나라 때 조판인쇄의 불편함을 해소함으로써 실용적인 활자 인쇄를 발명한 필승(毕昇)의 동상(銅像)도 보인다. 중국 4대 발명품의 하나인 종이와 더불어 인쇄술에 대한 자긍심도 매우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계획도 보이고 인쇄소를 재현해 놓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들른 특별전시실에서는 중국 고대 자침전(中國 古代 瓷枕展)‘이 열리고 있었다. 흙으로 구워낸 옛 베개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해설과 함께 진열되어 있는데 개중에는 기상천외한 외형을 지닌 것들도 눈에 띄었다.




여행지 : 중국 태항산 여행

 

여행일 : ‘18. 10. 8() - 10.12()

일 정 : 석가장(8)휘현 천계산·왕망령·만선산(9)임주 태항산대협곡(10)임주 팔천협(11)안양 문자박물관(11)석가장 조운묘(12)

 

여행 넷째 날 : 팔천협(八泉峡)

 

특징 : 태항산맥이 품고 있는 수많은 관광지와 협곡 가운데서도 최고를 자랑하는 태항산대협곡은 그 기세가 웅장하고 다양한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산서성 장치시(山西省 长治市)에 위치한 팔천협은 태항산대협곡을 대표하는 가장 핵심적인 관광지라 할 수 있다. 길이 13에 면적이 170인 이 거대한 협곡은 태항산의 꽃이라 불리기도 하며, 그 웅장하면서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중국의 ‘10대 협곡으로 당당히 꼽힌다. 또한 국가삼림공원·국가지질공원·국가 4A급 풍경구 등 다양한 수식어를 보유하고 있는데다 호수·계곡·기암괴석 등 한국인이 좋아하는 천혜의 관광자원까지 모두 함축하고 있다. 장가계(张家界)나 계림(桂林)을 뛰어넘는 관광지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이다. 팔천협이라는 이름은 협곡의 아래로 흐르는 세 갈래의 주요 지류(支流)가 숫자 8과 연관되어 있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물줄기가 8개로 갈라져 흐르다가 하나로 이어지고, 다시 8갈래 갈라져 흐른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곳 팔천협에서는 다양한 탈거리를 경험할 수 있다. 그만큼 팔천협의 규모가 크다는 얘기가 되겠다. 가장 먼저 전동차를 타고 15분 남짓 이동한다. 다음에는 유람선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역시 15분 남짓 간다. 다음 탈거리는 길이가 2937m나 된다는 케이블카. 그리고 마지막에는 높이가 208m나 되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이렇게 둘러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3시간 정도. 물론 팔천협 일대에도 등산로가 있어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주차장에 도착하면 누각(樓閣) 형식으로 지어진 산문(山門)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산서성의 장치시에 위치한 팔천협은 최근에야 뜨기 시작한 관광지다. 2014년부터 개발을 시작해 201631일부터 일반에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 사이에서는 장가계나 계림, 황산 등 기존의 유명 관광지들보다도 뛰어나다는 호평이 오간다고 한다. 협곡과 산상(山上)을 걸으며 세외선경(世外仙境)을 감상할 수 있는가 하면 그런 경관을 유람선과 케이블카,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재미까지 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입구에는 이곳 팔천협 풍경구의 관광안내도를 세워놓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보다 유익한 탐방을 위해서는 한번쯤 꼭 살펴보고 갈 일이다. 마침 고대의 종이()라 할 수 있는 죽간(竹簡) 모양으로 된 외형도 눈길을 끈다. 특히 양쪽 가장자리는 박물관에서 보아오던 죽간처럼 글을 아래로 써내려갔다.



산문으로 들어가면서 뒤돌아본 풍경이다. 중국은 산이나 들이나 계곡이나 무엇이든지 큼지막하다. 팔천협 역시 마찬가지였다. 산세가 험할 뿐만 아니라 사방이 온통 봉우리들로 둘러싸였다. 한 사람이 지키면 만 명도 열지 못한다는 천혜의 요새라 하겠다. 다만 그게 수려할 뿐이다.



표를 사서 안으로 들면 팔천협의 명물 가운데 하나인 천공지성(天空之城)’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높이가 무려 208m에 달하는 저 엘리베이터(elevator)는 하산을 할 때에 타고 내려오게 되는데 90도로 깎인 절벽에 이런 엘리베이터를 설치 한 자체부터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경내에는 또 다른 안내도를 세웠다. 이번에는 친절하게도 팔천협에 대한 설명과 함께 유람선과 케이블카, 엘리베이터, 빵차 등 풍경구에서 운영하고 있는 편의시설들에 대한 이용료까지 덧붙여 놓았다. 그 옆에는 국가지질공원 팔천협이라고 적힌 표지석을 세웠다. 이곳 팔천협이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긴 지질학자들은 옛날 이곳이 천해(淺海) 지역이었다면서 이 일대가 고대 해양박물관(古代 海洋博物館)‘이라고 주장한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팔천협 여행의 가장 큰 특징은 여러 종류의 교통수단을 번갈아 타고 가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을 즐기는 것이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교통수단은 ‘’빵차이다. 좌우로 문이 없어 시원한 협곡의 바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데다,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시야까지 트이는 등 장점이 많은 교통수단이다. 하지만 이곳 팔천협에서는 그런 효용가치가 필요 없어 보였다. 고작해야 산문(山門)에서 고협평호(高峽平湖)‘의 선착장까지와 천공지성(天空之城) 주차장에서 산문까지 왕복하는 게 전부인데, 거리가 짧은데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 또한 보잘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빵차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생김새가 빵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러 이름이 붙여졌단다. 또 다른 이들은 구불구불한 산길에서 서로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자주 빵빵거린다는 데서 어원(語源)을 찾기도 한다. 그만큼 중국 운전자들이 빵빵거린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중국의 운전면허는 빵빵 대들이 대’, ‘돌려 대3개의 대학을 나와야만 취득할 수 있다는 우스개까지 공공연하게 떠돌 정도이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전동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유람선 선착장. 이곳에서는 '부두'로 부른다. 수백 미터 높이의 절벽과 절벽 사이에 거대한 초록빛 호수가 있고, 그곳에 유람선 선착성이 만들어져 있다. 호수의 이름은 고협평호(高峽平湖)라고 한다. 협곡과 협곡 사이에 있는 잔잔한 호수라는 의미일 것이다. 협곡에 댐을 쌓고 물을 가둔 인공 호수인데 그 깊이가 무려 60m나 된다니 믿기 힘들 정도다.



이젠 두 번째 교통수단인 유람선을 타볼 차례이다. 구명조끼를 입고 자리에 앉자마자 출발한 배는 절벽과 절벽 사이로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유람선은 에메랄드빛 호수를 10여 분쯤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들은 어느 하나 절경이 아닌 것이 없다. 그때마다 배에 탄 사람들은 길게 목을 내밀어 하늘 끝까지 뻗어 있는 절벽의 경치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진 초록빛 물빛이 깎아지른 절벽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진정한 맛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행복에 취해 있는데 배는 어느덧 상부 선착장에 도착했다. 이제는 다리품을 팔면서 주변경관에 취해볼 차례이다.



유람선에서 내리면 트래킹코스가 이어진다. 케이블카 승강장까지 약 2쯤 되는 협곡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팔천협(八川莢)은 한자에서 보듯 여덟 개의 샘물이 모여 흐르는 비좁은 협곡(峽谷)이다. 그 협곡의 가장자리를 따라 탐방로를 내놓았다. 길 아래는 온통 맑은 물이 흐른다. 운 좋으면 팔뚝만한 송어 떼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태항산대협곡 가운데 기세가 가장 웅대하고 아름답다는 팔천협은 가장 높은 곳이 1,700m인데 반해 가장 낮은 곳은 600m라고 한다. 표고차가 크다고 볼 수 있겠다. 300여 개에 이른다는 천원(泉源)에서 흘러나온 물은 이런 표고차로 인해 만들어진 협곡을 따라 아래로 흐른다. 그리고는 수많은 폭포와 소(), ()을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다는 얘기이다. 꼽을 만한 경관으로는 고협평호(高峽平湖)와 현류적취, 호혈동천, 적곡구련, 팔천홍분, 생초배천, 옥황운정, 백장천제, 시공터널, 직벽엘리베이터 등이 있다.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경관은 현류적취(懸流積翠)’라는 폭포이다. 협곡에서 흘러온 물줄기가 이곳에서 여덟 갈래의 폭포로 나뉘어 졌다가, 아래로 떨어진 뒤에는 다시 하나로 합쳐진단다. 누군가는 글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가 마치 비파를 연주하는 것 같다고 적었는데 나로서는 글쎄다. 하긴 음률에 문외한인 내 귀에까지 들린다면 어디 그게 절경이라 하겠는가.



곧이어 호혈동천(壺穴洞天)‘이 나온다. 포트(pot) 모양의 오목한 구덩이들이 여럿 보이는데 안내판은 이걸 호혈(壺穴)‘이라 적고 있다. 사람들은 산과 내로 둘러싸여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을 이르는 단어인 동천(洞天)을 덧붙여놓았다. 그나저나 저런 현상은 급한 소용돌이 안의 조약돌들이 하상을 침식하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억겁의 시간을 말없이 흐르던 물줄기가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나 보다.




탐방로는 대부분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다. 얼핏 보면 나무처럼 보이는 난간까지 죄다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엄청난 자금과 인력이 투입되었겠지만 자연(自然)을 자연답게 남겨두지 않은 점은 아쉽다 하겠다. 길에 사람이 손을 댄 흔적이 있거나 말거나 눈앞에는 절경이 펼쳐진다. 발아래에는 협곡을 따라 옥빛의 물이 흐르고 이따금 고개를 들면 까마득한 절벽이다.



얼마간 더 오르자 적곡구련(滴谷九蓮)‘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폭포수가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가 마치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 같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폭포는 눈에 띄지 않는다. 왼편에 놓인 계단을 올라야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폭포와의 만남을 포기하기로 한다. 요즘이 갈수기(渴水期)인지라 물줄기가 말라버렸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이번에는 팔천성수(八泉圣水)‘라고 적힌 안내판이 나타난다. 천연샘물이라면서 물맛이 감칠맛이 나 여름철에 이 물로 녹차를 끓이면 최상의 맛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중간에는 과자와 음료를 파는 매점도 들어서 있다. 휴게소의 역할을 겸하기에 딱 어울리는 풍광을 갖고 있으니 잠깐 쉬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다만 주전부리용 먹거리는 미리 챙겨가야 한다. 매점에서 진열해놓은 것들 중에는 입맛을 돋을 만한 게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눈에 담아둘만한 경관들은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산자락에서 물망울이 떨어져 내리며 만들어내는 작은 폭포들이 눈길을 끈다. ’()처럼 가는 물줄기들이 개울가를 따라 수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마치 장막을 펼쳐놓은 것 같다.




이 근처에는 팔천홍분(八泉洪粉)’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는 이곳이 팔천협 아래코스의 종점이라면서 그 생김새를 설명해 놓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공간이 무릉도원을 방불케 하며 산골짜기와 샘물, 암석, 그리고 짙푸른 초목이 한 폭의 그림을 그래낸다는 것이다.



몇 걸음 더 걷자 합수지점에 만들어진 쉼터가 나온다. 매점은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으니 잠시 쉬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계곡 상류에 폭포가 보이는 등 마침맞게 주변 경관까지도 괜찮은 편이다.




탐방로는 쉼터에서 왼편 계곡을 따른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나 계단을 만들어 놓아 오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그렇게 잠시 오르면 케이블카 승강장이다. 이 케이블카는 산상으로 연결되는데 그 길이가 무려 2,937m나 된다고 한다. 길이가 많이 길다보니 케이블카를 타고 산 몇 개를 한꺼번에 넘는다고 보면 되겠다. 특히 중간 정류장에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기역()’ 자로 꺾이기까지 한다.



케이블카 승강장에도 규모가 제법 큰 폭포가 있었다.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고 여러 개가 겹쳐진 것이 경관까지 빼어났다. 그나저나 이곳 팔천협에는 300여 곳의 천원(泉源)과 더불어 저런 폭포들이 30여 개나 된다고 했다. 이곳 팔천협은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의 표고 차이가 1,100m나 된다. 그러니 저런 폭포를 만들지 않고는 물길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정원이 8명인 케이블카는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그렇다고 스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리 보아도 산이요, 저리 보아도 산인데다 높이가 장난이 아니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을 지나 산과 산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다 보면 케이블카 아래로 유람선을 타고 지나갔던 물길이 내려다보인다. 그런데 까마득하게 멀다. 우리는 대체 얼마나 높은 곳에 올라와 있는 것일까?




15분 정도가 지났을까 케이블카는 산상에 만들어놓은 정류장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옥황각까지는 대형 차량 두 대가 비켜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도로로 연결된다. 정류장을 건설하면서 내놓은 도로이지 싶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첩첩이 쌓여있는 태항산맥의 산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200m 남짓 걷자 널따란 광장에 도착한다. 난간에 팔천협의 풍경 사진들이 걸려있는가 하면, 바닥에는 태극문양(太極文樣)도 그려져 있다. 이곳이 도교(道敎)와 관련이 깊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건너편 봉우리에 옥황각(玉皇阁)’이라는 도교 사원이 지어져 있으며, 그보다 더 높은 반대편 산봉우리에는 같은 성격의 옥황궁(玉皇宮)이 자리 잡았다.




광장에서도 태항산의 빼어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옥황궁에 다녀올까 하다가 그만두고 옥황각(玉皇阁)으로 향한다. 길어 보이는 계단을 오른다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옥황각과 별반 다른 느낌을 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옥황각은 8각 지붕으로 된 3층짜리 붉은색 누각(樓閣)이다. 중국의 전통문화와 도교문화가 융합되어 있는데, 붉은색은 신성(神聖)을 뜻하며 팔각은 사면팔방’, 그리고 3층은 ((()’의 삼재(三才)를 나타낸단다.



1층은 감실(龕室)이다. 안에는 도교의 신()으로 여겨지는 조각상을 모셔놓았다.



하산을 시작한다. 지그재그로 나있는 절벽 방향의 잔도(棧道)이다. 북천문(北天門)을 거쳐 절벽 엘리베이터가 있는 천공지성으로 연결되는 계단길인데 폭이 좁은데다가 경사 또한 만만치 않다. 발을 딛는 디딤면 또한 좁아터졌다. 발을 내려딛는데 주의가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건너편 바위 절벽에 구멍이 하나 뚫려있다. ‘중천문(中天門)’일 것이다. 저 아래로 운애잔도(雲崖棧道)가 지나간다. 5의 길이에 3,88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팔천협의 명품 트레킹 코스이다.



내려오는 길에 기암(奇岩) 하나가 눈에 띈다. 이정표에 그려놓은 지도의 생초배천(生肖拜天)’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저 바위를 거론하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능선 사이로 보고도 믿기 힘든 작품이 나타난다고 적었다. 그는 또 십이간지(十二干支)’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손길을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작품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저 바위에서 자신의 띠를 찾아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도 전했다. 하지만 난 그런 형상을 그려낼 수가 없었다. 그다지 높지 않는 내 수양 탓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바위를 잘못 찾았을 것이고 말이다.



계단이 놓였다곤 하지만 길은 엄청나게 좁다.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걸으면 꽉 찰 정도로 좁은데 길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이다. 거기다 경사까지도 가파르기 짝이 없다. 난간을 만들어 놓아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질 일이야 없겠지만, 까딱하다가 발을 잘못 내려딛기라도 하면 자칫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겠다. 어떻게 이런 곳에 길을 낼 생각을 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바윗길에 익숙하다는 양치기들도 다니기 힘들 정도로 험해보였기에 하는 말이다.



그렇게 조심조심 내려서다보면 어느새 북천문(北天門)이다. 얼핏 보면 사람이 쪼아 만든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자연이 만들어낸 돌문(石門)이란다. 높이 22m에 폭이 22m인 구멍이 남북으로 뚫려있는데, 벼랑 끝에 걸려있는데다 그 모양이 웅대하고 출입문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비탈길을 내려가는 길에는 팔천협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직접 눈으로 느껴볼 수 있다. ‘미국에 그랜드 캐니언이 있다면 중국에는 팔천협이 있다고 할 만큼 스케일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중국 사람들의 자랑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곳 팔천협은 관광의 다양성을 자랑한다.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이 위에서 절벽 아래로 흐르는 코로라도 강을 바라보는 관광인 반면에 이곳 팔천협은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관광으로 시작되다가 어느 순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관광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위에서 놓고, 하늘위에서 구경하고, 구름위에서 걸어 다닌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 이 부근에서 염왕비(閻王鼻)’라는 지명이 적힌 이정표를 만났다. ‘염왕비염라대왕의 코를 말한다. 그만큼 지세가 험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이런 곳에서는 한 걸음만 잘못 옮겨도 절벽으로 떨어져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고로 염라대왕의 코는 죽지 않고서는 결코 만질 수도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니 염라대왕을 만나지 않으려면 조심하라는 경고성 지명으로 보인다는 얘기이다.



팔천협은 아직도 현재진행형(現在進行形)이다. 곳곳에서 공사가 한창인데 그 가운데서도 산꼭대기에 짓고 있는 건축물이 눈길을 끄는데, 우람한 것이 호텔일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유명산들이 갖고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산의 정상에 숙소가 들어서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사현장은 한마디로 경이롭다. 자연의 거대한 변화에 인간이 어떻게 적응했는지, 자연이 얼마나 장엄한지, 그리고 그런 자연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또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달을 수 있는 현장이 아닐까 싶다.



얼마쯤 더 내러가자 아까 산문을 들어서면서 바라보던 천공지성(天空之城)’, 208m 높이의 엘리베이터가 나온다. 4000을 투자해서 설치했다는 이 엘리베이터는 반 오픈식으로 밖을 훤하게 내다 볼 수 있어서 관광용으로는 최상급이다. 3대의 엘리베이터는 각각 21명을 태우고 4m/초의 속도로 오르내린다. 특히 3층에는 현공투명관광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재미를 더 한다.



하늘 위의 도시라는 천공지성(天空之城)’의 옥상은 투명유리로 되어 있다. 일단은 유리 위를 걸어보기로 한다. 발밑에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진다. 다만 아래에 유리 층이 하나 더 만들어져 있다는 게 흠이라 하겠다. ! 여기서 팁 하나를 공유해보자. 유리 위를 걷다가 공포감이 엄습할 때는 정면을 응시하면 된다. 스릴을 느끼고자 할 때는 물론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발아래로 시선을 돌리면 된다.



조금이라도 더 스릴을 느껴보고 싶다면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된다. 유리 아래를 가로막는 게 없어서 까마득하게 먼 절벽아래까지 한눈에 쏙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두어 번의 유리잔도를 거쳐 오는 동안 사람들의 간덩이가 많이 커졌나보다. 허공에 뜬 느낌일 텐데도 그런 느낌을 사진으로 남긴답시고 아예 바닥에 누워서 팔베개를 하는 등의 온갖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인걸 보면 말이다.



엘리베이터의 탑승은 채 1분이 되지 않아 끝나버린다. 엘리베이터의 높이가 208m나 된다기에 엄청난 스릴이 느껴질 줄 알았는데, 케이블카에 비해서 한참이나 못 미쳤다. 그저 투명한 창을 통해 태항산의 웅장한 자태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게 다였다. 하긴 놀이동산도 아닌 이곳에 굳이 어드벤처(adventure)까지 가미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다중 이용시설이란 게 본디 안전이 우선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아까 고협평호로 들어올 때 타고 왔던 전동차가 여럿 대기하고 있었다. 셔틀버스처럼 운행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여행지 : 중국 태행산 여행

 

여행일 : ‘18. 10. 8() - 10.12()

일 정 : 석가장 정정현(8)휘현 천계산·만선산(9)임주 태행산대협곡(10)임주 팔천협(11)안양 문자박물관(11)석가장 조운묘(12)

 

여행 셋째 날 : 태항천로(太行天路)

 

특징 : 남북길이 약 600에 동서길이가 250나 되는 태항산맥은 그 규모가 워낙 거대한데다 웅대한 영혼을 담고 있어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창작의 원천으로 삼아왔다. 그런 태행산에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임주에 위치한 태항대협곡을 꼽을 수 있다. 동서의 폭 1~3에 남북길이가 약 45km에 달해 중국의 그랜드 캐니언으로도 불리며,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대 협곡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그런 태항대협곡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태항천로(太行天路)’이다. ‘환산선(還山線)’이란 이름으로 불려오던 이 길은 도화곡에서 종점인 '몽환지곡(夢幻之谷)'까지 이어지는데, 칼로 산을 내리치면서 깎아놓은 듯한 해발 1,200m 높이의 절벽 위에 25쯤 되는 길이로 나있다. 빵차를 타고 달리다가 곳곳에 만들어진 전망대에서 내려 태항대협곡을 굽어 살펴보는 태항산 최고의 관광코스로 알려진다.


 

도화곡(桃花谷) 트래킹이 끝나는 곳, 그러니까 도화곡의 맨 위에 작고 평화로운 산골마을인 도화동(桃花洞)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태항천로(太行天路) 투어가 바뀌어 진행된다. 30(USD)을 추가로 지불해야 하는 옵션관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환산선으로 불려오던 태항천로는 도화동촌에서 출발해 고가대(古家台)에 이르는 구간으로 해발 1,200m 내외의 절벽 상단을 달리는 코스다. 코스의 중간 여러 곳에 태항대협곡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우린 그 가운데 몽환지곡(夢幻之谷)까지만 다녀오게 된다.






태행천로(한산선)는 전동차를 타고 돌아보는 드라이브 코스다. 빵처럼 생겼다 해서 일명 빵차라 불리는 승합차인데 문이 양쪽으로 나 있어 타고 내리는 데 수월할 뿐만 아니라 시야까지 트이기 때문에 주변 경관을 감상하는 재미까지 더해지는 꼬맹이 차량이다. 빵차가 태항천로의 하이라이트라 하겠다. 타고가면서 태항대협곡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풍광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깎아지른 수직절벽의 위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촌락과 돌무더기를 일궈 만든 밭 등 때 묻지 않은 원주민들의 삶을 허투루 지나쳐서는 안 될 일이다.



길은 태항대협곡의 깎아지른 절벽 위로 나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태항천로(太行天路)’, ‘태항산 위에 내놓은 하늘 길이란다. 빵차는 아슬아슬한 하늘 길을 잘도 달린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사람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리고 신음에 가까운 괴성(怪聲)을 자신도 모르게 질러댄다. 하지만 운전사 아저씨에게는 그런 것까지도 즐거움의 대상인 모양이다. 속도를 더 높이는 걸 보면 말이다. 경쾌한 한국 가요까지 틀어준다. 손뼉까지 쳐가며 부르는 노랫소리와 신음에 가까운 괴성이 함께 어우러지며 또 다른 장르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한마디로 즐겁기 짝이 없는 여행이었다. 참고로 태항천로는 산골 마을과 마을을 잇는 촌촌통로(村村通路)이다. 4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가 15년 전쯤 2차선 콘크리트 도로로 확·포장 되었다고 한다. 누군가는 산간오지에 사는 중국인들의 생활상을 함께 엿볼 수 있다는 점을 이 코스의 장점으로 꼽고 있었다. 산속에 자리 잡은 동네에 들러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행운은 없었다. 30분이면 충분할 텐데도 가이드에게는 그런 자투리 시간마저도 아까웠던 모양이다.



대협곡의 전체적인 모양새는 거대한 기단(基壇) 위에 또다시 몇 개의 단을 쌓아 만든 성()과 같은 느낌이다. 20억 년 전 지반의 융기 이후 계속된 융기와 침식을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고 한다. 만리장성이 인간이 만든 위대한 건조물이라면 이곳 태항산은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고 조물주(造物主)가 손수 만들었다. 신이기에 저런 작품을 빚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젠 중간 중간에 자리한 몇 곳의 전망대에서 내려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에 눈을 맞춰볼 차례이다. 왜 이곳을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에 비유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면 된다는 얘기이다. 첫 번째로 만난 전망대는 천경(天境)’이다. ‘하늘과의 경계라는 이름 그대로 하늘을 바라볼만한 관망대로 손색이 없다. 그래선지 도로의 양쪽 바위절벽에 난간을 둘러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웅대하기 짝이 없는 태항대협곡과 그 위의 가장자리를 따라 나있는 하늘 길인 태항천로, 거기다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태항산맥까지 한눈에 담아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노변에는 서너 개의 좌판이 놓여있다. 이 지역에서 나오는 산나물과 버섯, 마른 산열매 같은 것을 파는 조양촌 주민들일 것이다. 눈에 익은 풍경이라 하겠다. 설악산이나 속리산 같은 우리나라 유명산의 들머리에서도 흔히 보아오던 풍경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흥정까지 한국 돈으로 하고 있었으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이곳은 태항천로(太行天路)의 속살을 가장 확실히 볼 수 있는 곳이다. ‘도화곡 풍경구왕상암 풍경구사이를 연결하는 25km2차선 포장도로인 태항천로는 1,200m 높이에서 협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말 그대로의 하늘길이다. 깎아지른 절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내놓은 도로만 해도 아찔한데, 산책로는 그 아래 절벽에다 아예 걸쳐놓았다. 저러니 탐방로 어디에서나 태항대협곡이 손쉽게 내려다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태항대협곡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 태항천로를 꼽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맞은편 언덕 위에도 또 다른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미국의 소설과 리처드 바크(Richard Bach)’는 그의 소설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에서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고 했다. 그러니 망설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냉큼 올라서고 보는 이유이다. 그래 저곳이라면 태항산이 감추고 있는 속살을 조금이라도 더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전망대로 오르려는데 중국국가지질공원에서 세워놓은 빗돌 하나가 눈에 띈다. 이곳 태행산의 지질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태항대협곡은 융기 지형이다. 25억 년 전의 선캄브리아기 변성암으로 구성된 기반암 위에 덮인 8억 년 전의 사암층이 솟아오르면서 깎여나가 깊고 깊은 대협곡을 만들었다.



막상 오르고 보니 생각했던 것 보다는 못하다. 태항천로가 도로변 바위절벽에 기대어 놓은 전망대보다 한참이나 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태항산의 암릉도 도로에서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한자리에서 전체적인 경관을 조망해 볼 수 있다는 것 정도가 이곳만의 자랑거리라 할 수 있겠다.





달리는 빵차에서 올려다본 천경전망대



두 번째로 멈춘 곳은 평보청운(平步靑雲)이다. ‘구름 위를 걷는다는 얘기인데 도로와 경작지 사이로 난 들머리의 풍경은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혹시 구름 위를 날아가는 짚라인(Zipline)’을 얘기하는지도 모르겠다. 들머리에 골삭(滑索, 짚라인의 중국어 표기)’ 안내판을 세워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참고로 평보청운의 어원이랄 수 있는 금방제명 평보청운(金榜題名, 平步靑雲)’은 중국 고대로부터 과거 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는 고시문을 황금색으로 적은 데서 유래한다. 여기서 평보청운은 한 번에 푸른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른다.’는 뜻으로 벼락출세를 의미하는데 전망대에다 그런 이름을 붙여놓을 걸 보면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최고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데크로드를 걷다보면 건너편 산자락에 들어앉은 산골마을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그런데 마을이 모두 자색의 돌로 집을 지었다. 심지어는 지붕까지도 납작한 돌을 얹어 놓았다. 내리치면 돼지 울음소리가 난다는 저규석(猪叫石)’으로 지은 집들이란다. 산간오지 절벽 위에 저런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 지금이야 잘 포장된 길이 개설되어 접근이 용이한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지만,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중국내에서도 오지(奧地) 중의 오지였단다.



잠시 후 유리잔도(玻璃栈道)’의 입구가 나온다. 이곳도 역시 덧버선을 신은 사람만이 입장이 허락된다. 바닥에 깔아놓은 강화유리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일 테니 일단은 따르고 보자. 마침 덧신 사용료도 받지 않으니 박스에 들어있는 것들 중에서 발에 맞는 것을 하나 골라 신으면 된다.



이곳에서도 태항대협곡이 잘 조망된다. 깎아지른 바위절벽은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고, 벽면에는 수목이 자라는 띠가 가로로 층을 이루고 있다.




한꺼번에 50명 이상은 올라가지 말라는 경고문도 붙어있다. 그 뒤로 보이는 유리를 뒤집어 쓴 건물은 짚라인 탑승장으로 이어주는 엘리베이터(elevator)라고 한다. 이곳 태항산은 익스트림(extreme)한 모험까지 즐길 수 있도록 꾸며진 모양이다.



계단을 올라서자 까마득한 바위절벽에 붙여놓은 유리잔도(玻璃栈道)’가 나타난다. 유리바닥에서 절벽 아래까지의 표고차가 230m나 되는데 바닥이 유리라서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여행객들 대부분이 냉큼 들어서지를 못하고 망설이는 이유이다. 특히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올라설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어제 천계산에서 만났던 유리잔도에 비하면 이건 장난 수준이라 하겠다. 거리도 짧은데다가 철제 이음새가 중간과 가장자리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사람처럼 간이 약한 사람들은 이 부분을 딛고 걸으면 된다는 얘기이다.





어제의 모험이 내 간덩이를 부풀려 놓았나보다. 나타나는 상황들이 아까 얘기했던 평보청운(平步靑雲), 개천에서 용() 났다는 뜻으로 다가오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유리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그다지 무섭지 않는 등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이 용이 승천할만한 상황에까지는 이르지 못해 보였기 때문이다.



얼마쯤 달렸을까 또 다시 빵차가 멈춘다. ‘몽환지곡(夢幻之谷)’ 전망대의 입구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탐방로로 들어서자 우청루(雨晴樓)’라는 간판을 단 돌집이 나타난다. 음식점 아니면 카페로 보이는데 마당에 잡초가 가득한 걸 보면 문을 닫은 지 꽤 되었나 보다. 그나저나 붉은 색 돌로 이어진 건물이 참 이채롭다. 망치로 내려치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낸다는 저규석(猪叫石)’이라는데 돌기둥과 돌벽에 돌지붕을 얹었다. 돌계단과 돌담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마당까지도 돌로 깔았다. 창문 등을 제외한 건축물 전체가 석판(石版)으로 꾸며진 것이다. 얇은 육면체로 쉽게 쪼개지는 이 저규석은 가공할 필요가 없는 천연의 건축 재료다. 석기 시대라면 이 근처는 노다지 땅이라고 불렸을 법하다.





우청루 앞은 전망데크가 만들어져 있다. 난간에 서면 발아래로 태항대협곡이 펼쳐진다. 골짜기는 의외로 넓고 평평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자그만 마을들이 그림같이 들어앉았다. 험산준령과 첩첩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저곳은 분명 사시사철 포근할 것이다. 거기다 기암괴벽으로 둘러싸여 경관까지 아름다우니 옛 사람들이 꿈꾸던 무릉도원이 바로 저곳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태항대협곡이 미국의 그랜드캐니언과 다른 점은 협곡 한복판에 콜로라도강과 같은 대하천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이곳에는 옛 방식을 이어가며 살고 있는 지역주민들이 있다. 마을 뒤편 천 길 낭떠러지 아래에는 계단식 밭들이 터를 잡았다. 남해도의 가천마을 등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다랭이논을 닮았다. 그게 아름답게 보였는지 카메라에 담고 있는 사람들도 여럿 눈에 띈다. 맞다. 주민들에게는 생활의 일부이겠지만 여행객들의 눈에는 아름다움의 일부로 비쳐졌을 수도 있겠다.




눈앞에 태항대협곡이 펼쳐진다. 한반도에서는 보기 어려운 지형이다. 한반도의 퇴적지형은 주로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부안과 해남, 고흥 등지에 백악기 퇴적암층이 있긴 하나 이곳처럼 거대한 퇴적지형은 볼 수 없다. 아무튼 눈앞에 펼쳐지는 태항대협곡은 커도 너무 크다. 이처럼 거대한 위용은 수억 년에 걸친 3단계의 융기와 하식작용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한다. 퇴적경관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땅의 솟구침. 지구의 거대한 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몽환지곡(夢幻之谷)’ 전망대이다. ‘몽환지곡은 태항천로에서 가장 큰 전망대로 넓이가 약 6,000에 이른다고 한다. 이곳은 길게 펼쳐지는 대협곡과 첩첩이 쌓여있는 암봉들, 특히 왕상암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이곳에서 꼭 확인해야 할 것으로 다섯 가지를 꼽기도 했다. 첫째는 서쪽에 병풍처럼 늘어선 산이고 두 번째는 계곡의 멋진 풍광, 세 번째는 수령 300년이 넘는 두 그루의 감나무, 네 번째는 지혜의 문, 다섯 번째는 농가(農家) 등이란다. 좋은 정보였지만 감나무는 보지 못했다. 이왕이면 감나무가 있는 장소까지 알려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한쪽 귀퉁이에는 돌로 쌓은 지혜의 문(智慧門)‘이 덩그러니 서 있다. 꿈속에 너무 빠져있지 말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가 보다. 문을 통해 바라보는 산과 하늘의 조화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진학이나 취직, 입신양명 등을 원하는 사람들이 이 문을 통과해서 지혜의 신광으로 목욕을 하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니 참조해 두자.



이곳은 자전거도로코스로도 유명한 모양이다. 라이딩(riding) 조형물로도 모자라 저렇게 큰 안내도까지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지도는 출발점인 이곳 몽환곡정거장을 출발해서 종점인 노반학(魯班壑) 정거장에 이르는 길이 7의 코스라면서 중간에 3개의 서비스 구역까지 갖추고 있다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중국여행을 하다보면 엄청난 과장을 담고 있는 지명에 헛웃음이 나올 때가 자주 있다. 이곳 몽환지곡(夢幻之谷)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꿈이나 환상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골짜기라니 너무 거창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을 카메라의 앵글에 맞추다보니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 환상적인 느낌이 드는 게 아닌가. 과장스런 작명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오른편에 보이는 거대한 바위산이 왕상암(王相岩)‘이란다. ‘태항의 혼()’이라 불리는 왕상암(王相岩)은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명당(明堂)으로 역사적으로도 알아주는 수많은 명인(名人)들이 이곳에서 은거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전설 또한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왕상암이란 지명을 얻게 된 전설이라 하겠다. 아주 먼 옛날 상나라(, BC1600-BC1046)’의 제23대 왕인 무정(武丁, BC1250-1192)이 피난해 은거생활을 하던 중 노예였던 부설(傅說)을 만나 서로 문무를 가르치다가 왕이 된 후에는 그를 재상(宰相)으로 삼았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두 사람의 지위에서 한 글자씩을 따다가 왕상암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헌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니 전설쯤으로 치부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저 당시 부열이 살았다는 성인굴(聖人窟)’의 흔적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서성(山西省) 평륙현(平陸縣)에 남겨져 있다는 점만 기억해 두도록 하자.





건너편 아슬아슬한 바위절벽의 바로 위에까지 계단식 밭들이 들어서 있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만들어낸 서정적인 풍경이라 하겠다. 그렇다. 태항산대협곡은 멋진 풍경만큼이나 순수한 삶이 함께한다. 작은 돌기와집에서 절벽 바로 앞까지 계단식 밭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연을 닮아 보인다. 그래서일까? 넓고 높은 산과 깊고 험한 계곡 위를 달리고 있는 나 또한 자연을 닮아간다. 아니 닮아보고 싶다는 게 솔직한 내 표현이다.



에필로그(epilogue), 몽환곡 탐방이 끝나면서 팀이 둘로 나뉘었다. 체력이 좋은 사람들은 왕상암 입구까지 걸어서 내려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빵차를 타고 도화곡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절벽 중간에 수직으로 걸려 있다는 그 유명한 통제(筒梯), 즉 볼펜 스프링처럼 생긴 88m 높이의 회전 사다리 길이 보수공사 중이라서 이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란다. 덕문에 긴 능선을 걸어서 내려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고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귀띔을 건네 온다. 눈에 담을만한 경치가 없는데도 계단만 많아서 자칫 무릎에 무리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산행이 일상이 되다시피 한 나이기에 내려가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려는데 집사람의 눈초리가 심상찮아진다. 그리고 그 표정에 질린 난 차에서 내릴 생각도 못해봤다. 해외까지 나와서 얼굴 붉힐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결과는 진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이 너무너무 환상적이었다는 트레킹을 한 사람들의 얘기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여행지 : 중국 태항산 여행

 

여행일 : ‘18. 10. 8() - 10.12()

일 정 : 석가장(8)휘현 천계산·왕망령·만선산(9)임주 태항산대협곡(10)임주 팔천협(11)안양 문자박물관(11)석가장 조운묘(12)

 

여행 셋째 날 : 도화곡(桃花谷)

 

특징 : 태항산맥을 대표하는 협곡(峽谷)으로 중국 10대 협곡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길이는 대략 4정도 된다. 골짜기는 수억만 년 전에 형성된 지반이 유수(流水)의 침식으로 인해 홍암석이 씻겨나가면서 만들어졌으며, 가장 좁은 곳은 2m 밖에 되지 않는데 그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면서 곳곳에 폭포를 만들었고, 연못을 이루었는가 하면 때로는 폭포와 연못이 서로 어우러지기도 한다. 그런 풍경들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키면서 사람들로부터 천하제일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 넉넉잡아 2시간 정도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주요 볼거리로는 황룡담과 비룡협, 함주, 이룡희주 등을 꼽을 수 있다. 구련폭포 같은 크고 작은 물줄기가 떨어지는 폭포들도 빼놓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절벽에 기대어놓은 잔도(棧道)를 걸으며 느끼는 아찔함은 또 다른 즐거움이라 하겠다. 참고로 도화곡(桃花谷)이란 지명은 엄동설한에도 복숭아꽃이 핀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굽이굽이 돌아대는 산길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서자 드넓은 주차장이 나타난다. ’도화곡 경구주차장이다. 차에서 내리면 태항대협곡이 그 전모를 드러낸다. 아니 입맛만 보여준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소정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경구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에 올라 도화곡의 입구인 비룡협까지 이동하게 된다. 참고로 오늘은 임주(林州)에 위치한 태항대협곡(太行大峽谷)‘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몇 개의 경관이 뛰어난 경구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우리는 오늘 엄동설한에도 복숭아꽃이 핀다는 도화곡(桃花谷)과 태항대협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태항천로를 탐방하게 된다.






매표소 앞 광장에는 중국 임주 태항대협곡(中國 林州 太行大峽谷)’이라고 적힌 거대한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임주 경내에 있는 태항산 대협곡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광장의 가장자리에는 태항대협곡 풍경구의 관광안내도를 배치했다. 풍경구 내에 도화곡(桃花谷)’왕상암(王相岩)’이라는 두 개의 경구(景區)를 거느리고 있단다. 또 다른 관광안내도에는 태극빙산(太極氷山)’까지 포함시켰다. 그렇다. 임주지역의 태항대협곡은 이곳 도화곡 경구(桃花谷 景區)’를 위시해서 태항산의 혼으로 불리는 왕상암 경구(王相岩 景區)’, 그리고 여름철에도 얼음을 볼 수 있다는 태극빙산 경구(太極氷山 景區)’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장쾌한 대협곡을 조망할 수 있는 태항천로(太行天路, 옛 이름은 환산선)까지 더하면 임주 소재의 대항대협곡이 완성된다. 다만 편의시설 공사가 한창인 태극빙산경구는 아직까지 관광객들을 받지 않고 있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다 산과 물이 장관을 이루는 선대암풍경구와 태항평호(太行平湖)를 끼워넣기도 하니 참조한다.




표를 보여주고 안으로 들자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다. 연못의 가장자리에는 태항대협곡의 전경과 함께 사계(四季)의 풍경을 담은 사진을 배치했다. 래프팅 사진도 넣어놓은 걸 보면 액티비티 스포츠(activity sports)도 가능한 모양이다.



이 도로는 도화곡의 들머리와 날머리인 도화동(桃花洞)을 거쳐 왕상암까지 연결된다. 하지만 셔틀버스는 도화동까지만 운행한다. 그 이후, 그러니까 태행천로(太行天路)빵차라는 별명을 가진 전동차를 타고 둘러보게 된다. ! 잠시 후 시작되는 트레킹은 어제 둘러봤던 회룡천계산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어제 본 태항대협곡이 위에서 굽어보는 경관이었다면 이곳 도화곡은 협곡을 거닐면서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는 경관이라 하겠다.



협곡을 따라 달리던 버스가 도화곡의 입구에서 200m쯤 못 미치는 곳에다 관광객들을 내려놓는다. 멀리서 도화곡의 전체적인 외관을 눈에 담아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도화곡을 만들어내고 있는 협곡의 규모가 그만큼 크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가까이 다가갈 경우 전체적인 윤곽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도화곡의 검표소(檢票所)에 이르자 거대한 바위협곡이 건너편으로 나타난다. 바위벽에는 비룡협(飛龍峽)‘이라는 글자를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크게 적어놓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도화곡의 관광안내도가 눈에 띈다. 도화곡의 지도를 그린 다음 그 위에다 지명을 표기해 놓았으니 한번쯤 살펴본 다음에 길을 나서기 바란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꼭 보아야 할 것을 놓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안내도도 보인다. 이곳 도화곡에서 만나게 되는 구련폭포의 사진과 함께 까마득한 절벽에 붙어있는 원통형 사다리 계단인 통제‘, 그리고 하늘 위의 길인 태항천로의 풍경 사진을 지도의 양 옆에다 실었다. 풍경구를 대표할만한 경관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협곡으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도화곡을 둘러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을 가슴에 담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전동차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경관을 구경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대협곡의 속살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좀 힘들더라도 다리품을 파는 게 제격이다. 차를 타고가다 보면 숨겨진 비경들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자칫 주마간산(走馬看山)이 되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눈의 호사는 금대(琴台)‘로부터 시작된다. (, BC1046-BC256)의 무왕을 도와 상나라(, BC1600-BC1046)를 패망시킨 강자아(姜子牙, 태공망)’가 은퇴한 후에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곳이다. 어즈버 인걸(人傑)은 간 데 없고 그가 앉았던 자리만이 남아 역사의 현장이 되어버린 셈이다. 아니 경관 좋은 곳에 이왕에 들었으니 졸졸거리며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그가 타던 거문고 소리라 여긴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겠는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길을 잘 찾는 것은 물이다. 물이 흘러 내려오는 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거대한 용()이 누워있는 모양새라는 황룡담(黃龍潭)’이 나타난다. 안내판에는 도화담(桃花潭)’으로 적었다. 두 개의 못으로 나누어진 도화담 가운데 아래에 위치한 못을 황룡담(黃龍潭)’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두 개의 못은 비룡폭포(飛龍瀑布)’로 연결된다. '비룡협(飛龍狹)'의 물줄기가 아래로 떨어지다가 용()으로라도 변했나보다.





길은 옥빛의 넉넉한 소()에 가로막히면서 더 이상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 길이 없다 싶었을 때, 또 다시 길이 보였다. 왼편 절벽에다 아슬아슬하게 철계단을 걸어놓았다. 80년대 말, 사람들은 없던 길을 새로 내면서 보운잔도(步雲棧道)’라는 이름을 붙였다. 선반처럼 절벽에 매달아놓고 그 위를 걸어보니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더라는 것이다. 수직의 벼랑에 매달린 길은 저 홀로 계곡을 건너고 다시 건너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두 번째 못인 백룡담(白龍潭)’사옥폭포(瀉玉瀑布)’가 쏟아내는 물줄기가 만들었다. 못 위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며 사람들은 18m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봤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옥을 쏟아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게 분명하다. 폭포에다 사옥(瀉玉)’이란 이름을 붙여놓은 걸 보면 말이다. 그건 그렇고 구름 속을 걸어오던 보운잔도(步雲棧道)’가 이번에는 오른편 절벽에 걸쳐졌다. 아슬아슬한 모양새인 것은 아까와 매한가지다.




꼬불꼬불 흐르는 계곡물, 우뚝 솟은 봉우리와 기암괴석, 시원하게 쏟아내는 폭포수가 한데 어우러져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정말 아름다운 계곡이다.



사옥폭포 위로 올라서면 직립의 양쪽 절벽 사이로 폭 6~15m의 좁은 계곡이 300m 정도, 마치 용이 기어가듯 지그재그로 이어진다. 그래서 비룡협(飛龍峽)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부근의 길은 몸을 구겨야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대부분이 비좁은데, 이마저도 선반을 걸치듯이 절벽에다 매달아놓았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다가 줄다리를 건너면 함주(含珠)’가 나온다. 도화곡에 흐르는 물길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이 누워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함주는 용의 입에 해당하는 부분이란다. 하지만 안내판은 다른 내용을 적고 있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암반이 오랜 세월 침식과정을 거치면서 매끌매끌하게 변해, 마치 용이 입 안에다 보물을 가득 물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의 지명이 머금을 함()’자를 사용하고 있으니 후자가 더 옳아 보인다.




조금 더 오르니 이번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냇가에 터를 잡고 앉았다. 바위 표면에는 보들보들한 풀들이 자라고 있다. 이런 모양새를 멀리서 바라볼 경우 마치 사자가 엎드려 있는 것 같다고 안내판은 적고 있다. 그나저나 누군가 바위에다 일월유천(日月流泉)이란 문장을 음각(陰刻)해 놓았다. 그러나 주변에는 샘()이 보이지 않는다. 안내판이 바위 옆의 널찍한 암반에서 잠시 쉬어가면서 냇가로 내려가 샘물로 피로를 씻어보라고 적은 것을 보면 중국 사람들은 냇물도 샘으로 치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길을 아예 물위에다 내버렸다. 흙길도, 그렇다고 바윗길도 아닌 물길인 셈이다. 선반을 걸쳐 놓을만한 절벽마저도 눈에 띄지 않았던 모양이다. 안내판은 이곳을 수운간(水雲間)이라 적고 있다. 아홉 구비의 유리다리 위를 걸으면서 푸른 하늘과 구름뿐만 아니라 발아래로 흐르는 물까지 느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유리다리를 지나자 계단식으로 된 폭포를 만난다. 안내판은 이곳을 벽계(碧溪)’라고 적고 있다. 폭포가 아니라 그냥 푸른 물줄기라는 것이다. 물줄기가 하도 많은 돌계단을 넘다보니 폭포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마냥 쉽지만은 않다. 암벽에 설치된 잔도를 걷고, 때로는 고개를 쳐들 수 없는 곳과 배낭마저 통행에 지장을 주는 곳도 수시로 만난다. 머리를 숙이고 몸을 비틀며 더러는 앉은뱅이걸음까지 해야 하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이다. 하지만 인상을 찌푸리는 관광객은 단 한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 심심찮게 나타나는 작은 폭포와 못의 징검다리를 건널 때는 오히려 환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만큼 주변 풍광이 빼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얼마쯤 더 올랐을까 이번에는 이룡희주(二龍戱珠)’가 나온다. 계곡 사이에 커다란 바위가 끼어있어서 물길이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그 모양새가 마치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노는 형상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주변의 바위들이 뭔가를 층층이 쌓아놓은 것 같은 형태의 가로 줄무늬로 나타난다. 물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12억 년 전에 생성된 것이란다.



풍월교(風月橋)는 옥빛 계곡 위에 걸려있는 나무다리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아오던 여느 다리와는 그 생김새가 다르다. 계단을 놓듯이 간격을 띄워 놓음으로써 발아래로 콸콸 흘러가는 계곡수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했다. 도화곡에서 가장 넓은 곳이나 풍광 또한 뛰어나다.



순하던 탐방로가 또 다시 허공에 걸쳐졌다. 이번에는 화계잔도(花溪棧道)란다. 이 부근에 자라고 있는 복숭아나무들이 꽃을 피울 때면 계곡의 수면(水面) 위를 떨어진 꽃잎들이 아름답게 장식한다는 것이다.



화계잔도를 통과하면 수많은 폭포들이 연결되어 있는 구련폭(九蓮瀑)‘이 나온다. ’‘구련폭은 하나의 폭포만이 아니고 이 지역의 폭포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고대(古代)의 중문(中文)에서 구()는 많다는 뜻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안내판은 또 폭포마다 각기 다른 자태를 보여주고 있으니 갈 길을 서두르지 말고 한번쯤 살펴보라는 조언까지 해두었다.



구련폭(九連瀑) 근처에는 과일과 토산품 등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함께 걷고 있던 고등학교 선배님이 달걀만한 배를 사서 건네주셨는데 맛이 괜찮은 편이었다. 이번 여행 중에 처음으로 만난 분이었는데 내가 후배인데도 불구하고 여행 내내 요것조것 많이도 보살펴 주셨다. 동문(同門)이란 말만 들어도 친근함이 솟아나는 낱말이가 보다.



도화곡의 대미는 구련폭포(九蓮瀑布)’가 장식한다고 보면 되겠다. 장마철이 아니라서 물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아홉 갈래 이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풍광을 사람들이 놓칠 리가 없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배경으로 앞에 놓인 징검다리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폭포는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물줄기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아름답다는 말 이외에 다른 표현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하긴 이곳 도화곡은 중국 내 아름다운 협곡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태항산은 사람이 살기 힘들 정도로 척박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곳이지만 도화곡이라는 지명은 무릉도원처럼 왠지 이상향의 염원을 담고 있을 것만 같다.





구련폭포의 위에는 무릉원(武陵源)’이라는 쉼터가 들어섰다. ()와 커피, 쥬스 등 음료는 물론이고, 옥수수와 라면 등의 먹거리들도 판다. 그런데 밖에 걸어놓은 메뉴판이 한글로 적혀있는 게 눈길을 끈다. 라면도 한국산을 내놓는가 하면 심지어는 이동막걸리까지 팔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예 한국인 전용 쉼터라는 간판까지 내걸고 있었다. 그만큼 한국 관광객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귓가를 스쳐갔던 언어는 한국어가 대부분이었다.




쉼터를 지나면 유원(柳苑)’이다. “유원은 구련폭포 상류의 넓은 전망처 위에 세워진 버드나무 정원이다.” 커피를 마시며 여유 있게 주위 풍광을 즐길 수 있는 휴식처다.



조금 더 오르면 도화곡의 물줄기를 막아놓은 도화당(桃花塘)’이 나온다. 도화곡의 수량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만든 인공(人工) 저수지란다. 그러다보니 보여주는 풍광은 별로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바라보는 태항산의 자태는 자못 빼어나다. 그래선지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이 곳곳에 들어앉아 삼매경(三昧境)에 빠져 붓끝을 놀리고 있었다.



탐방로는 잠시 후 도화동(桃花洞)’에 올라선다. 해발이 1,300m에 이른다는 도화촌은 대협곡의 8부 능선에 들어앉은 자연부락이다. 이곳에는 화장실은 물론이고 기념품가게와 음식점 등의 편의시설들을 갖춘 민속광장(民俗廣場)이 조성되어 있다. 하룻밤을 머물고 싶은 여행자라면 길 건너에 있는 도화동 마을에서 찾아보면 될 것 같다. 참고로 도화동은 겨울철 엄동설한에도 복숭아꽃이 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이곳의 기후가 따뜻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며 이름이 붙게 된 원인을 협곡의 특징인 자홍색(紫訌色) 석영사암(石英砂岩)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사방이 하얀 눈에 덮여 있는데 유독 골짜기만 자홍색을 띠고 있는 것이 마치 복숭아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란다.



도화동에 이르면 전동차로 올라온 관광객들과 합류하게 된다. 도화곡 트레킹이 이곳에서 끝을 맺는 대신에 태항천로(太行天路)의 투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광장에는 도화곡이 아닌 태항천로에 대한 안내도를 세워 놓았다. 그건 그렇고 트레킹을 마쳤다고 생각하니 뭔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맞다. 누군가 이곳 도화곡에는 3대 명물로 꼽히는 것이 있다고 했다. 한겨울에 핀 복숭화 꽃(桃花)’과 한여름에 언 얼음()’, 그리고 내리치면 돼지 울음소리를 낸다는 저규석(猪叫石)’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도 난 도화곡이라는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태항천로에서라도 만나봤으면 좋겠다.



이틀 밤을 머물렀던 임주의 희복원호텔

임주가 자그마한 도시임을 감안할 때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준 4성급 호텔이다. 그래선지 객실이 널찍한데다 깨끗하기까지 했다. 커피포트와 헤어드라이기가 준비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일회용 세면도구들도 풀로 제공하고 있었다. 아침식사의 질과 양은 보통수준으로 보면 되겠다. 하지만 난 이곳에서 생각하기 싫은 풍경을 만나버렸다. 아침식사를 하려고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식권과 삶은 달걀 하나씩이 맞교환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우리부부는 매년 분기마다 한 번 이상씩 해외여행을 나간다. 그 여행이 대부분 패키지여행이다 보니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여행을 함께 하게 된다. 가끔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들과도 여행을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싫었던 것은 호텔의 아침상에 차려졌던 삶을 계란을 여러 개씩 챙겨와 버스를 타고 가면서 먹는 사람들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했었는데 이번에 배급제라는 망신살을 만나버린 것이다. 그것도 북유럽의 크루즈에서 뷔페식단의 제공을 거부해버릴 정도로 에티켓(etiquette)이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는 중국인들로부터 말이다. 끔찍했기에 오래갈 수밖에 없는 기억이라 하겠다.


여행지 : 중국 태항산 여행

 

여행일 : ‘18. 10. 8() - 10.12()

일 정 : 석가장(8)휘현 천계산·왕망령·만선산(9)임주 태항산대협곡(10)임주 팔천협(11)안양 문자박물관(11)석가장 조운묘(12)

 

여행 둘째 날 : 만선산(萬仙山)의 단분구(丹分溝) 트레킹

 

특징 : ’단분구(丹分溝)‘는 붉은 골짜기라는 의미이다. 단분(丹分) 마을을 출발해 수백 길 높이의 바위협곡(峽谷)을 따라 내려오면서 백룡담과 흑룡담 등의 아름다운 경관들을 구경하는 트레킹 코스이다. 이때 만나게 되는 양쪽 절벽은 우리가 흔히 보는 회색이나 검은 색의 암석이 아닌 붉은색의 암벽으로 이루어졌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12억 년 전에 형성된 이 일대의 암석이 산화철 성분이 많은 석영사암(石英砂巖)이라서 붉은 색조를 띠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곳 단분구 경구(만선산풍경구)‘는 별이 4개나 되는 최고급 풍경구 가운데 하나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안에는 붉은 벼랑과 깊은 협곡, 그 사이를 수직 낙하하는 여러 폭포와 수많은 연못들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단분구는 그런 풍경들을 속으로 갈무리해두었다. 탐방로 전체가 바위협곡의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모든 지질학적 특징을 보존하기 위해 중국 당국은 이곳을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해 놓았다.

 

트레킹은 단분(丹分)’ 마을에서 시작된다. 들머리에 선경(仙境)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일 것이다. 대표적 구경거리인 황룡동(黃龙洞)과 단분구(丹分溝), 흑룡담(黑龙潭)의 진행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도 세워져 있다. 사진은 올리지 않았지만 단분(丹分) 마을의 표지석도 보인다. 단분(丹分)()’붉다는 뜻으로 바위절벽의 색깔을 나타내며, ‘()’은 절벽들이 층층으로 나뉘어져 있다는데서 얻게 된 이름이란다. 다른 한편으론 이곳 남평(南坪) 지역에 많은 신선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불로환이란 조그만 알약을 먹고 살아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설과, 이 지역이 진나라 때는 단분(單分)이었는데 발음이 같은 단()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들머리에는 안내소와 기념품가게 등의 편의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건 단연 목공예품 판매점이다. 탱크나 배 모양으로 만든 소품들이 주를 이루지만 개중에는 산천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산수경목(山水景木)’도 보인다. 흔하디흔한 기념품이 아니라 아예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놓았다는 얘기이다.




골짜기로 들어서자마자 자그마한 폭포(瀑布)가 길손을 맞는다. 이런 폭포들은 앞으로 많이 만나게 된다. 아니 앞으로는 이보다 훨씬 더 부피를 불린 폭포들이 나타난다. 그뿐만이 아니다. 협곡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곳곳에서 단분구의 물길이 빚어놓은 소()와 담()들도 만나게 된다.




협곡으로 들어서면 홍암절벽에 설치된 난간길을 따르게 된다. 그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갈수록 풍광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층층을 이룬 절벽이 마주하는 협곡의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절묘하게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 길을 걸으며 만나는 풍광은 한눈을 팔 겨를도 없이 변화무쌍하다. 돌계단과 바위를 지나면 나타나는 좁은 철계단, 이어서 흔들다리를 건너면 다시 철계단과 바위길이 번갈아 등장한다.



이곳은 중국에서 지정한 국가지질공원(國家地質公園)‘이다. 그래선지 지질의 특성에 대한 내용을 적은 빗돌(碑石)을 곳곳에 세워놓았다. 맨 위에다 자기네 나라말로 적고 그 아래에는 영어와 한글로 번역을 해놓았다. 오전에 들렀던 천계산의 안내판만 해도 일본어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아예 빼버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많이 찾는다는 얘기겠지만 기분 좋은 일이라 하겠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사교층리(斜交層理)‘라고 적힌 빗돌이다. 사교층리란 상하로 겹친 지층이 서로 접하는 면에 대하여 비스듬히 엇갈리는 작은 층리를 말하는데, 모래 언덕이나 강바닥, 강어귀의 퇴적층에서 볼 수 있으며 주로 사암층 내부에서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주변을 살펴보지만 설명과 같은 형상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법학을 전공한 내 눈에까지 띌 정도라면 누가 지질학을 어려운 학문이라 하겠는가.



잠시 후 빙글빙글 돌아대는 철계단이 나타난다. 좁디좁은 협곡이 고도(高度)까지 높다보니 돌리지 않고서는 아래로 내려설 수가 없었나 보다. 그 생김새 또한 빼어나다. 거기다 좁아터진 틈새에는 폭포까지 들어앉았다. 그러니 누군들 카메라의 앵클을 맞추지 않고서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계곡은 한마디로 아름답다. 다만 물이 조금 적은 게 흠이라면 흠이라 하겠다. 이런 경관에 청수(淸水)까지 넘실거렸더라면 그야말로 선경(仙境)이 따로 없었을 거라는 얘기다.. 문득 아까 들머리에서 보았던 선경(仙境)‘ 표지석이 떠오른다. 그렇게 표현한 이는 틀림없이 우기(雨期)에 이곳을 찾았었을 것이다.






걷다보면 부드러운 잔물결이 뚜렷한 파도석들이 가끔 눈에 띈다. 오래 전 이 땅이 바다 속에 있었다는 증거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셈이다.






짧기는 하지만 동굴을 지나기도 한다. 붉은색 일색인 기암절벽에다 폭포··담 그리고 동굴까지 품었으니 이곳 단분구는 관광객들에게 보여줄 만한 것들을 모조리 갖췄다고 보면 되겠다.




동굴을 지나자 갑자기 길이 사라져버린다. 막다른 난간 아래는 아찔한 천 길 낭떠러지다. 그리고 그 건너편 절벽에서는 흑룡담 폭포가 무심하게 떨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함께 해온 물길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려온 협곡 말고도 또 다른 계곡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사라진 것 같았던 길은 왼편의 절벽을 따라 급하게 내려가는 계단으로 바뀌었다. 절벽에 기대다보니 선반을 매달 듯 내놓은 곳도 보인다. 잔도(棧道)라 불러도 되겠다.




아래로 내려가다가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 이정표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이정표는 왼편에 보이는 계단으로 오를 경우 황룡동(黃龙洞)’으로 연결된다고 표기해놓았다. 만선산이 자랑하는 비경 가운데 하나라기에 다녀올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거리표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정표의 중단에 그려 넣은 지도까지도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아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쯤에 있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찾아갈 수야 없지 않겠는가.



이정표 옆에는 붕괴주림(崩壞柱林)’이라고 적힌 빗돌이 세워져 있다. 영어로는 ‘collapse pillar forest’라고 적었다. ‘무너져 내린 돌기둥 숲이라는 뜻일 게다. 하단에는 그 특징을 수직으로 솟아오른 돌기둥들이 일정하지 않은 형태로 숲을 이룬다고 적었다. 붕괴작용 때문이란다. 석영 사암의 수직 절리가 변형된 것이라서 쉽게 부서지기 때문이란다. 풍화작용으로 인해 암석이 부서지고 붕괴되면서 받침부분만 남게 되어 돌기둥과 석림(石林)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련 현상 역시 눈으로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돌기둥, 아니 돌기둥처럼 생긴 바위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래로 내려서자 오른편 협곡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전까지 함께 해온 물줄기가 만들어 놓은 백룡담·폭포(白龙潭·瀑布)’이니 놓치지 말고 꼭 들어가 보자. 직폭(直瀑)과 와폭(臥瀑)이 합쳐졌을 뿐만 아니라 얕기는 하지만 연못()까지 갖추고 있어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갈수기(渴水期)인 요즘은 왜소해 보이지만 폭포의 생김새로 보아 장마철에는 장관이 펼쳐질 게 분명하다.



조금 더 내려가면 이번에는 단분구의 하이라이트라는 흑룡담·폭포(黑龙潭·瀑布)’가 나타난다. 높이 80에 물이 떨어져 이루는 소의 깊이가 13에 이르는 거대한 폭포이다. 거기다 만선산의 제일경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주변경관까지도 뛰어나다. 걸어 내려오느라 고단해진 다리도 쉴 겸해서 잠시 쉬어가기에 딱 좋은 곳이라 하겠다. 참고로 흑룡(黑龙)이란 이름은 폭포의 생김새가 하늘로 비상하는 용의 눈썹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후부터 길은 순해진다. 내려딛는 조심을 할 필요도 없으니 이젠 주변 경관에 푹 빠져볼 차례이다. 그래도 여유가 있다면 이곳까지 내려오면서 눈에 담아두었던 풍경들을 되짚어 볼 일이다. 단분구는 넉넉잡아 2시간이면 족할 만큼 길지 않은 코스이다. 하지만 풍경이 하도 변화무쌍해서 정리해나가기 바빴었으니 말이다.





천애의 절벽을 헤집으며 이어지는 협곡에는 어린 예술 지망생들이 곳곳에 뿌려져 있다. ‘중국의 위대한 자연 현상이라는 찬사를 받는지라 인근에 위치한 미술학교 학생들에게 끝없는 도전의 대상이 되고 있단다. 캔버스와 팔레트, 물통을 손에 든 젊은이들이 폭포 아래나 계곡, 마을에 앉아 몇 시간씩 산을 응시하는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느긋하게 내려오다 보니 이곳 지질의 특징과 생성과정, 보호의 필요성 등을 적은 빗돌들이 여럿 눈에 들어온다. 이 일대는 구조 지질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으로 암석의 연대는 12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협곡을 장식한 붉은 색 암벽들은 석영 사암의 풍부한 산화철 성분으로 인해 붉은 색조를 띄기 때문이란다. 그런 특이성을 살려 나라에서는 이곳을 국가지질공원(國家地質公園)‘으로 지정해두었다. 참고로 암석은 그 암석이 만들어진 원인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한다. 화산의 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화성암(火成巖), 흙이나 모래가 쌓여서 굳어진 퇴적암(堆積巖), 그리고 화성암이나 퇴적암이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변형된 변성암(變成巖) 등이 있는데 사암(砂巖)은 퇴적암의 일종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암벽들은 철분이 섞인 사암이다. 철이 산화하면서 붉은 색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오니 주차장이 나온다. 이정표에는 이곳을 용담구주차장(龙潭沟停车场)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이쯤에서 아름다운 협곡 단분구의 트래킹이 끝났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우린 100m 남짓 더 내려가기로 한다. 버스가 일월성석 정자근처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념품가게가 늘어선 골목길을 따라 100m 남짓 더 내려가면 또 다른 주차장이 나타난다. 근처에 일월성석 정자가 있으니 일월성석 주차장이라고 부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주차장 근처에는 일월정(日月亭)이라는 정자가 지어져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일월성석(日月星石)‘이라는 석판을 세워 놓았는데 자연석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선명하게 해()와 달() 그리고 별()의 문양이 나타나 있다. 이 석판은 1994년 마을의 한 농부가 집을 짓기 위해 바위를 캐다가 발견한 천연석이라고 한다. 홍콩의 갑부가 당시 한화 13천만 원에 사려고 했으나 마을 사람들은 거액의 제안을 거부하고 이 돌을 마을의 보물로 삼아 이곳에다 모셔놓고 있단다. 물을 뿌리면 그 문양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니 참조한다. 이 돌에다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이뤄진다는 얘기도 전해지니 기억해 두자.


여행지 : 중국 태항산 여행

 

여행일 : ‘18. 10. 8() - 10.12()

일 정 : 석가장(8)휘현 천계산·왕망령·만선산(9)임주 태항산대협곡(10)임주 팔천협(11)안양 문자박물관(11)석가장 조운묘(12)

 

여행 둘째 날 : 만선산(萬仙山)과 비나리길(崑山 掛壁公路)

 

특징 : 만선산(萬仙山)은 만 명의 신선이 살 정도로 아름다운 봉우리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풍경구(風景區)는 하남성 신향시 휘현의 태항산대협곡 남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총면적 64Km²에 최고해발고도는 1,672m. 수많은 봉우리들이 층층이 겹치면서 웅장한 산세를 자랑하는데다, 엄청난 석벽(石壁)경관이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풍경구의 안에는 영화와 TV 촬영지로 유명한 곽량촌(郭亮村), 조용하고 우아한 마을 남평(南坪), 지상천국이라는 로라채와 함께 홍암절벽대협곡, 절벽장랑, 천지. 연화분, 백령동, 함천, 일월성석, 흑룡담폭포, 오봉산 임해, 황룡동, 마검봉, 손빙천, 칠랑봉 등 200개소가 넘는 명승지들이 있다고 한다. 이를 모두 둘러보려면 2~3일 정도가 소요된단다.


 

만선산으로 이동할 때는 비나리길은 이용했다. 왕망령경구의 산문에서 ‘SUV 차량에 올라타면 만선산경구의 산문까지 이동시켜준다. 이때 비나리길을 통과하는 것이다. 비나리길은 검문소(檢問所)의 역할을 하고 있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시작된다. 비나리길의 원래 이름은 곤산괘벽공로(崑山 掛壁公路)’. 한쪽 방향으로만 달릴 수 있는 이 길은 외부차량의 진입을 금지시키고 있다. 풍경구의 로고가 그려진 전용차량만 이용할 수가 있단다. 지역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운영권까지 그들에게 주어졌나보다.







비나리길은 절벽에 동굴을 뚫어 만든 길을 말한다. 곤산의 절벽 위 마을에 살던 주민들이 산 아래의 외부로 나가기 위해 징과 망치로 뚫은 절벽 터널이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래선지 안개가 피어오르는 산자락 절벽에 동굴을 뚫어야 했던 사연도 여럿으로 나뉜다. 어떤 이들은 산을 가로질러 병원을 가야 하는 산마을의 염원을 담아 10년간 고생한 끝에 뚫린 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이드는 여자가 귀한 마을에서 살던 총각들이 결혼할 여자들을 얻기 위해 낸 길이라고 했다.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던 석애구(錫崖沟)는 근친혼(近親婚)으로 인해 지적장애인이 많았다고 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외부로 나가는 길을 수직암벽에 뚫은 것이 비나리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설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얘기를 옮겨볼까 한다. 왕망령의 서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석애구 마을은 사면이 웅장한 산세와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다 쉬엄쉬엄 하천이 흐르는 그림 같은 마을이라고 한다. 반면에 이런 환경은 외부와의 단절을 초래했고, 이는 주민들에게 큰 고통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를 견디다 못한 이곳 주민들이 1960년에 자발적으로 곡괭이와 정으로 절벽을 뚫어 괘벽공로를 만들고 바깥세상과 소통했다는 것이다. 3km의 길이 완성될 때까지는 무려 15년이나 걸렸단다.




비나리길이라는 지명의 유래 또한 재미있다. ‘비나리여행사에서 가장 먼저 안내를 했다고 해서 '비나리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부를 마땅한 이름이 없어 비나리 여행사에서 갔던 그 길 있잖아이러다가 비나리길로 굳어져 버렸단다.




비나리길은 안에 들어가 걸을 때보다 밖으로 나와 멀리서 볼 때가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인공 동굴에 창문처럼 환기구를 냈는데, 저걸 죄다 사람 손으로 만들었다는 걸 생각하면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길 아래는 당연히 깎아지른 절벽이다.






절벽에는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수도 없이 뚫려있다. '천창(天窓)'이라 불리는 통풍구이고 채광창이자 전망대다. 공사 중에는 굴에서 캐낸 돌을 밖으로 내놓는 배출구 역할까지 했다.



비나리길에서는 20분 조금 못되게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200~300m 정도의 거리를 걸으면서 주변 경관을 직접 느껴보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면 카메라에 가득히 담아두면 될 일이다. 덕분에 우린 JTBC-TV뭉쳐야 뜬다멤버들이 떨던 너스레를 따라해 볼 수 있었다.




절벽으로 난 창()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마치 액자 속에 갇혀있는 풍경화 같다. 드넓은 태항산이 제한된 공간으로 들어오면서 그 아름다움이 더욱 세련된 모양이다. 한 폭의 그림, 그것도 아주 잘 그린 풍경화라 하겠다.







비경의 산길을 지나면 만선산이 사직되는 관문이 나온다. 이곳에서 우린 자그마한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만선산을 둘러보게 된다. 만선산 풍경구는 크게 절벽장랑으로 유명한 곽량촌과 남평촌으로 나뉘는데 곽랑촌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신선들이 살고 있기라도 한 듯 신비로운 풍경이 자못 범상치가 않다.





만선산은 곽량촌을 거쳐서 가게 된다. 그런데 버스가 수천 길 높이의 바위벼랑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암벽 등반가들도 부담스러워 할 만큼 날카롭게 허리를 곧추세운 바위절벽인데도 말이다.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행위들이 자주 일어나는 중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아니나 다를까 저곳에도 길이 나있었다. 절벽장랑(絶壁長廊)이란다. 절벽장랑은 말 그대로 절벽 안에 있는 회랑이라는 뜻으로 바위절벽의 바깥에 구멍이 뚫려 있는 동굴이다. 이 회랑은 고도가 1,700m나 되는 곳에 살고 있던 곽량촌의 주민 13명이 직접 뚫은 것이라고 한다. 1971년부터 시작해서 1977년까지 6년이 걸렸단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리던 버스는 어느덧 바위벼랑 속으로 파고든다. '세계 9대 불가사의'로 일컬어지는 인공터널 '곽량동(郭亮洞, 궈량동)'이다. 품고 있는 내력도 만만치 않지만 보여주는 풍광 또한 뛰어난 곳이지만 그것을 눈에 담을 행운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잠시나마 차량을 멈추어주는 배려가 없이 그냥 지나쳐버렸기 때문이다. 가이드에게야 일상(日常)이겠지만 이방인인 우리로서는 선경(仙境)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부득이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다 올려놓은 이유이기도 하다. 설명에 필요한 사진 몇 장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로부터 곽량촌(郭亮村, 궈량춘)’에서 외부와 통하는 길은 오직 협곡과 절벽 위를 이어주는 '천제(天梯, 사다리길)' 뿐이었다고 한다.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너무 위험했을 것이다. 이에 마을 서기였던 신명신(申明信, 선밍신)의 제의로 신신복(申新福, 선신푸), 왕휘당(王懷堂, 왕휘이당), 신복귀(申福貴, 선푸구이) 등이 밧줄을 사용해 절벽의 높이와 거리를 측정했고 전통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상급기관의 전문가에게 터널 공사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1971년 가을이다. 해머와 정() 등 돌 깨는 장비를 구입한 마을 주민들은 13명의 '동굴 굴착 돌격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197239일 본격적인 터널 공사에 들어갔다. 그들은 허리에 줄을 감고 절벽에 매달려 정으로 돌을 깨 홍암절벽 곳곳에 일렬로 발파구를 만들었다. 전기도 없고 기계도 없는 최악의 조건이었단다. 당시 그들에게 지급되었던 식비라고 해봐야 고작 ‘0.12위안에 불과했다니 강냉이로 만든 죽이나 떡, 찜이 하루 세끼의 전부였을 것은 당연하다. 1975년 말에는 마을주민이 모두 팔을 걷고 나섰단다. 더 이상의 경비 조달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곽량촌 절벽의 평균 높이는 약 105m. 절벽 중간에서 발파 작업을 하려면 밧줄이 필요했지만 이를 살 돈이 없어 집집마다 소의 고삐를 풀어와 하나하나 이어서 밧줄을 만들었단다. 그렇게 해서 절벽에는 길이 생겨났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5년 동안 26000의 돌덩어리를 캐냈고, 12톤을 마모시켰으며, 8파운드짜리 쇠추 4000개를 소모했단다. 197751, 마침내 '절벽장랑(絶壁長廊)'이라 불리는 곽량터널은 왕휘당(王懷堂, 왕휘이당) 등 희생자들을 남기고 공식 개통됐다. 터널이 완공된 뒤, 사람들은 이곳을 태항산 동쪽에 만든 '인공천하(人工天河)'라 불렀다. 그리곤 홍기거(紅旗渠, 홍치쥐)’와 함께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실례이자 가난한 민초들이 일궈낸 '기적'으로 자리매김 했다.




절벽장랑이 끝나는 곳에는 곽량촌(郭亮村, 궈량춘)’이 자리 잡았다. 해발 고도가 1700m나 되는 태항산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형성된 자연 부락으로 하남성(新鄕市 輝縣)의 태항산에 속해있지만 만선산(萬仙山)과 잇닿아 있고, 산서성(晋城市 陵川縣)과도 접해 있다. 현재 83가구에 320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곽량촌의 역사는 2천 년 전인 전한(前漢: BC206-AD8)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진협(晋陜) 일대에 살던 이들이 난리를 피해 이동했고, 전한 말기부터 촌락을 형성했다고 전해진다. 왕망(王莽) 시대(AD8-23)에 후한(後漢, 25-220)의 장수 곽량(郭亮)은 관군의 공격에 태항산(太行山)까지 쫓겨 왔다고 한다. 이에 그의 부장 주군(周軍, 조우쥔)을 매수한 관군은 산문을 봉쇄해 고사작전을 폈었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겨난 고사성어가 현양뢰고(懸羊擂鼓)‘이다. ()을 치고 산양(山羊)을 달리게 해 적군을 속이는 동안 군사를 산서성(山西省)으로 빼돌렸다는 것이다. 이에 분통이 터져 죽은 적장이 묻힌 곳은 '조우쥔장(周軍場)'이란 지명으로 불리고 있단다. 후세 사람들은 곽량의 용기와 지략을 기리기 위해 그가 주둔했던 절벽도 '곽량애(郭亮崖, 궈량야)'라 부른단다. 곽량촌에는 곽씨와 더불어 신씨들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원말명초(元末明初), 수도인 남경((南京, 난징)에서 변방인 청해(靑海, 칭하이)로 쫓겨나게 된 신씨가문이 이곳 곽량촌으로 흘러들어왔다는 것이다. 당시 그들은 커다란 가마솥을 쪼개어 수백 명이 나눠가졌다고 한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원래대로 붙일 심산이었다. '큰 가마솥 신(大鍋申)'라 불리는 이유이다. 또한 그 후손들은 곽량동을 만드는데 앞장 선 사람들이다.



'중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태항산 협곡을 끼고 온갖 풍파를 이겨낸 곽량촌은 '중국 제일의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 받고 있다고 한다. ‘사진(謝晉, 셰전)’이 연출한 '청량사의 종소리(淸凉寺的鐘聲)' 40여 편의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하긴 텅 빈 세트장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산골 마을이었으니 영상으로 옮기기에는 최상의 조건이었을 게 분명하다. 카메라만 돌려도 한 세대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곳을 어디서 쉽게 찾아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를 태운 버스는 이곳도 역시 통과해 버린다. 자투리 시간이라도 조금 내주었으면 하는 우리의 가녀린 바램이 무참히 짓밟혀 버린 것이다. 가이드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게다. 하루에 천계산과 만선산, 왕망령에 단분구까지 둘러봐야하니 자투리 시간일지라도 어디 쉽게 쓸 수 있었겠는가. 값싼 패키지여행을 따라나선 내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곽량촌을 지나쳐버린 버스는 잠시 후 곽량촌과 절벽장랑이 잘 조망되는 멋진 전망대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전망대에는 취곡단병(翠谷丹屛)’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붉은 병풍에 둘러싸인 비취빛 골짜기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가잘 잘 표현한 이름이라고 하겠다.





난간으로 나아가면 바위절벽을 뚫고 지나간 절벽장랑(絶壁長廊)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아까 차를 타고 지나오면서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보았던 풍경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 ‘절벽장랑이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참고로 태항산 일대에는 인간의 무한한 힘을 보여준 저곳 절벽장랑 말고도 아까 지나왔던 비나리길(곤산터널)과 석애(錫崖, 시야)터널, 회룡(回龍, 후이롱)터널, 정저(井底, 징디)터널, 진가원(陳家園, 전쟈위안)터널 등이 있다고 한다.







조금 멀기는 하지만 곽량촌도 시야에 잡힌다. 그런데 마을의 풍경보다는 그 아래에 형성된 붉은색 절벽과 그 틈새에서 쏟아지고 있는 폭포가 더 눈길을 끈다. 다른 한편으론 절벽장랑이 뚫리기 전까지 저런 절벽을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절벽의 높이가 인간이 내려오기에는 너무 높아보였기 때문이다.





만선산은 천계산보다 웅장한 멋은 덜하지만 아기자기한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이름처럼 신선이 노닐만한 풍경이라 하겠다.




만선산 투어는 달리는 버스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편이다.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만선산은 천계산과 비슷한 비주얼(visual)이라고 보면 되겠다. 수백 길 높이의 바위절벽들이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태항산맥이 갖고 있는 특징이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어떤 이들은 저런 풍경을 보고 칼봉, 칠형제봉, 호리병봉 등 봉우리의 이름들을 잘도 나열하고 있었지만 이곳 지리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그저 신선들이 산다는 봉우리일 따름이다.




전망대를 출발한 셔틀버스는 절벽 허리춤으로 난 길을 따라 사정없이 달린다. 곡예를 하듯 달리는 차속에서의 스릴은 액티비티 스포츠(activity sports)와는 또 따른 느낌이자 여행만이 가질 수 있는 남다른 매력이 아닐까 싶다. 스릴에 더해 아름다운 경관까지 가슴에 담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만선산의 기암괴봉들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버스는 이내 산 아래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이른다. 이젠 만선산의 또 다른 명소인 단분구를 둘러볼 차례이다. 단분구(丹分構)로 들어가는 입구는 여러 가지 풍광을 보여 준다. 높이 솟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으로 펼쳐지는 풍경들, 그리고 우리가 지나왔던 곤산의 괘벽공로 터널 창들이 아득히 보인다. 그래선지 들머리에다 선경(仙境)’이라고 적힌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여행지 : 중국 태항산 여행

 

여행일 : ‘18. 10. 8() - 10.12()

일 정 : 석가장(8)휘현 천계산·왕망령·만선산(9)임주 태항산대협곡(10)임주 팔천협(11)안양 문자박물관(11)석가장 조운묘(12)

 

여행 둘째 날 : 왕망령(王莽嶺)

 

특징 : 중국국가지질국에 의해 중국의 가장 아름다운 협곡 중 하나로 선정된 왕망령(王莽嶺)은 하남성과 산서성(晋城市 陵川县)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풍경구로, 해발 800m~1,665m 사이의 웅장하고 기이한 50여 봉우리들이 한데 집중되어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중국의 명산들이 갖고 있는 풍경들을 두루 함축하고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산정에는 4,335m의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탐방로를 걷다보면 신귀봉과 선타봉, 방지애, 석고천서, 유수조, 한무석림, 소태항, 금대, 한류, 팔선봉 등 10개 관광지를 만나볼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왕망령은 태항산맥에서 으뜸으로 꼽힐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수백m에 달하는 수직절벽과 굽이굽이 늘어선 기이한 능선과 봉우리 등으로 인해 남태항 최고봉,’ ‘태항지존,’ ‘무릉도원같은 별칭으로 불릴 정도이다. 특히 이곳은 일출과 운해를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알려진다. 인근에 있는 비나리길이라는 괘벽공로(掛壁公路)와 세외도원이라고 불리는 석애구(錫崖溝)를 함께 둘러볼 수 있는 장점도 갖고 있다. 참고로 왕망령이란 이름은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 8-23)를 세웠던 왕망(王莽)이 훗날 후한(後漢, 25-220)을 세운 유수가 항산으로 도망하자 80만 대군을 이끌고 뒤쫓아 와 진을 쳤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천계산을 빠져나와 다음 행선지인 왕망령으로 향한다. 천계산 경구에서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잠깐 달리니 관문(關門) 하나가 나타난다. ‘왕망령 경구의 안내도가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목적지인 왕망령의 입구쯤 되는 모양이다.






이곳에는 레스토랑으로 여겨지는 건물들 외에도 홍암대협곡(紅岩大峽谷)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협곡의 길이는 7.5km이며, 폭은 넓은 곳은 200m에서 좁은 곳은 10m 가량으로 온통 붉은색 사암(沙岩)의 절벽으로 이뤄져 있다.






광장에는 석애구(錫崖溝)’라고 적힌 커다란 빗돌(碑石)과 함께 석애구에 대한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이곳이 석애구라는 얘기일 것이다. 아니면 석애구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일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석애구(錫崖溝)는 외부와 단절된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알려져 있다. 깎아지른 절벽과 사방을 둘러싼 웅장한 산세,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함께 모여 있는 곳에서 200여 가구 800여 명의 주민들이 외부와 단절된 채로 살아가고 있단다. 그 모습이 흡사 속세를 떠나 무릉도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버스를 갈아타고 40분쯤 들어가자 널따란 주차장이 나온다. 태항산에서 아름다운 일출과 운해를 조망하기에 가장 좋다는 왕망령(王莽嶺)’에 도착한 것이다. 이곳에는 레스토랑과 매점은 물론이고 호텔까지 들어서있다. 관광객들을 위한 집단시설지구라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왕망령 풍경구국가 4A관광지이자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왕망령과 석애구, 곤산, 유수성 등 4개의 관광지를 포함한다.



집단시설지구에 지어진 저 건물은 생태빈관이라는 3성급 호텔이란다. 계단 모양으로 지어진 3층짜리 건물인데 앞 건물 지붕이 뒷 건물의 테라스 역할을 하고 있는 게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인기척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귀국 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시설이 엉망이라는 사용 후기를 보았는데,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생태빈관에 이르자 왕망령 관광의 핵심이랄 수 있는 관일대방향이 눈에 들어온다. 왕망령은 원래 고갯마루를 뜻하지만 주위의 봉우리들을 한데 묶어 통칭하는 지명으로도 통한다. 왕망령에는 수십 개의 봉우리들이 있지만 실지로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봉우리들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대부분의 봉우리들이 송곳처럼 솟아오르면서 사방에 바위절벽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우리가 탐방하게 될 관일대는 사람이 오를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봉우리 가운데 하나이다. 귀하디 귀한 대접을 받기에 손색이 없다 하겠다.



생태빈관 뒤편 언덕에는 피라미드처럼 생긴 송신시설이 자리 잡았다. 그 앞에 청풍림(淸風林)’이라고 쓰인 빗돌이 세워져 있는데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맑고 부드러운 바람이 수풀처럼 넘실대는 언덕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송신시설이 있는 언덕의 위까지 올라가보기로 한다. 조망이 뛰어날 것 같아서이다. 그런 내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집단시설지구는 물론이고 왕망령 주변의 뛰어난 경관들이 한눈에 쏙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젠 왕망령의 속살을 엿볼 차례이다. 주차장의 반대편 방향인데, 한글로 병기(倂記)된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이를 따르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 가는 길에 여러 개의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 최종 목적지가 관일대(觀日台)라는 것을 꼭 기억해 두자.



탐방을 시작하자마자 왕망령표지석이 이라고 적힌 빗돌이 길손을 맞는다. ‘왕망령(王莽嶺)’은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건국한 왕망(王莽)이란 인물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왕망은 훗날 후한(後漢)을 건국한 유수(劉秀, 광무제)가 태항산으로 도망을 치자 80만 대군을 몰고 쫓아와 지금의 왕망령에다 진을 쳤다는 것이다. 왕망은 비록 유수에 패해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산봉우리에 남아 후세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전한 황실의 외척이었던 왕망(王莽)은 원제(元帝, 재위 BC48-33)의 황후였던 효원황후(王氏)’의 비호 아래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다. 애제(哀帝, 재위 BC7-1)가 죽자 9세의 평제(平帝, 재위 BC1-AD5))를 옹립한 후 안한공(安漢公)이 되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평제를 죽인 다음 유자 영을 세워 스스로 섭정이 되어 가황제(假皇帝)라 자칭하였으며, 8년에는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유교경전을 근거로 개혁정치를 단행한 군주였다. 하지만 현실에 맞지 않아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에는 왕조를 연지 15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잠시 후 왼편으로 시야가 트인다. 그러나 내놓고 자랑할 만한 풍경은 못된다. 저런 정도의 경관쯤이야 중국, 아니 이곳 태항산맥만 해도 비일비재하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5분 남짓 지났을까 갈림길 하나가 나타난다. 왼편은 영지버섯바위(靈芝石)’로 가는 길이라니 개의치 말고 직진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관일대(觀日台)‘ 방향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는 야외 장터에서는 륵마애(勒馬崖)와 와운강(臥雲崗부운애(浮雲崖)가 좌우로 나뉜다. 그리고 곧이어 나타나는 삼거리에서는 금대(琴台)로 연결되는 길이 갈려나간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관일대(觀日台)‘ 방향을 따른다.




장터는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물론 최종 목적지인 관일대로 가려면 곧장 직진해야 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와운강(臥雲崗부운애(浮雲崖) 방향, 즉 오른편으로 나있는 코스를 이용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이정표에 적힌 두 곳은 물론이고 방지애와 유수조, 선몽장산, 석고천서 등의 명소들을 만나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돌아오는 길에 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들머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미리 알아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코스를 난 아예 빼먹어버렸다. 이곳 왕망령이 옵션코스였던 탓에 예습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갔던 길로 되돌아 나오라는 가이드의 멘트까지 있었으니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 덕분에 한번쯤은 꼭 들러보았어야 할 방지애(方知崖)’를 놓쳐버렸다. 방지애는 조훈현국수가 중국의 진조덕기사와 친선바둑을 두었던 곳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당시 진조덕은 왕망령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깨우쳤노라고 하면서 두어나가던 바둑을 멈춰버렸다고 한다. 상대편을 잡아먹고 집칸수를 늘리는 바둑을 더 두어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말이다.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방지정(方知亭)’이란 정자를 짓고 두 사람이 두다 그만둔 바둑을 돌로 제작해 놓아두었고 한다.



금대(琴台) 갈림길을 지나면서 왕망령의 절경들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이정표에서 보았던 금대가 발아래에 놓여있는가 하면 그 너머에는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봉들이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잘 그린 산수화를 무한히 확대해 놓았다고나할까. 그 아름다운 풍광을 어찌 인간의 세치 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왕망령이 '남태항의 최고봉'이자 '태항지존(太行至尊)'으로 불리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특징도 엿볼 수 있다. 바위산임에도 불구하고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어느 글에선가 이곳 왕망령의 녹화비율이 90%에 이른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다. 그는 또 여름 평균 기온이 섭씨 22도인 점과 1000에 달하는 평균 강수량을 그 원인으로 꼽았었다.





잠시 후 탐방로는 소태항(小太行)으로 연결된다. 작은 기암괴석들이 수 없이 널려있는데, 그 모양새가 태항산맥을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그러나 내 눈에는 별로일 따름이다. 상술이 뛰어난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이야깃거리쯤으로 보일 따름이라는 얘기이다. 조망도 역시 볼품이 없었다.






소태항에 있는 매점은 한국 관광객들을 위한 서비스가 만점이다. 컵라면은 물론이고 맥심커피까지 준비해놓고 있었다.



몇 걸음 더 걷자 관일대(觀日台)‘가 나온다. 이름 그대로 ()‘바라 보()‘는 조망대라는 뜻이다. 왕망령은 일출과 운해로 유명한 곳이다. 면적이 40에 이르는 왕망령 풍경구의 여러 전망대 가운데서도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이 백미(白眉)로 알려져 있다. 그런 점을 감안했는지 꽤 너른 조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곳은 안개 낀 풍광도 일품인 것으로 알려진다. 찬기류와 따뜻한 기류가 자주 만나면서 중국 북방지역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믄 안개 낀 풍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란다.




관일대에서의 조망도 일품이다. 동쪽으로 일출 배경이 되는 수많은 암봉들이 일렬로 도열하고 있는데, 그 생김새가 자못 빼어나다. ‘산 위에 또 다른 산이 있다는 말을 확인시켜주는 풍경이라 하겠다. 아래는 수천 길의 낭떠러지이고, 그 위에는 수직 절벽의 바위봉우리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올랐다. 왕망령의 이런 경관들은 보면 볼수록 그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소수민족의 전통 복장을 빌려주는 곳도 보인다. 한나라 때의 것으로 보이는 갑옷도 갖춰놓았다.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배경삼아 인증사진을 찍어보라는 유혹일 것이다.




내려가는 길에 시단석(試胆石)’이란 바위도 볼 수 있었다. ‘쓸개즙을 시험하는 바위라는데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담(, 쓸개)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바위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수백 길의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저 바위에 올라서서도 단(, 쓸개즙)이 제대로 분비되는지를 시험해본다는 의미 말이다. 바위로 들어가는 입구를 쇠창살로 막아놓은 것을 그 증거로 치면 앞뒤가 딱 맞는다 하겠다.




대미는 산화대(散花台)가 장식한다. 관일대가 일출의 명소라면 이곳 산화대는 일몰(日沒) 사진을 찍기 딱 좋은 명소로 소문나있다. 그런 점을 감안했던지 바위 벼랑 끄트머리에다 두 개의 단으로 나누어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전망대에 오르면 왕망령이 광활하고 웅장한 알몸을 세상에 드러낸다. 수많은 암봉들과 푸른 숲이 조화를 이루며 그림 같다는 느낌을 자아내게 만드는 절경이 눈을 호강시킨다.




안내판에는 이곳이 태항산과 중주 평원의 냉온 기체가 교착되는 곳이라고 적었다. ’마오쩌둥(毛泽东) 주석이 시에서 묘사한 것처럼 높은 하늘에는 파도치는 찬바람이 급하고 대지에는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이다. 벼랑 아래의 따뜻한 기류가 상승하여 절벽과 충돌하고 찬 공기의 눌림을 받아 이 틈새에서 파도친다고 한다. 그래서 벼랑에서 흩날리는 복숭아꽃이 골짜기에서 춤을 추며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는단다. 중국인들은 이런 풍광을 천녀가 꽃을 뿌리는 듯하다로 표현하는 모양이다. 이곳에 산화대(散花台)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걸 보면 말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오전에 보았던 천계산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까마득한 절벽 일색이던 천계산의 거대한 바위 협곡과는 달리 이곳은 바위봉우리들이 울쑥불쑥 솟아올라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장가계·원가계에서 보았던 풍경에 더 가깝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수 만년 동안의 침식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천계산의 협곡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뾰쪽뾰쪽한 기암괴봉 들이 빽빽하게 솟아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혹시 땅과 하늘을 연결한다는 건곤주(乾坤柱)가 저런 형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경이롭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마오쩌둥(毛泽东)의 비서였던 리루이(李锐)’는 그의 시에서 왕망령에 오르지 않고는 태행산을 보았노라고 얘기할 수 없고, 왕망령에는 천하의 기봉들이 모여 있어 굳이 오악(五岳)에 오를 필요가 없다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그의 눈에 저런 경관들이 펼쳐졌기에 그런 표현이 가능했었을 것이다.




에필로그(epilogue), ‘왕망령 경구옵션관광코스이다. ‘선택 관광이라고도 하는데 이름 그대로 선택이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그에 대한 불이익도 없을 것이라는 여행사의 약속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그게 통용이 되지 않았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버렸다는 얘기이다. 다음 행선지가 만선산인데 가는 길목에 위치한 왕망령비나리길을 옵션코스로 넣어버렸기 때문이다. 옵션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에는 천계산경구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버스를 타고 만선산의 입구까지 빙 돌아서 와야 한단다. 그럴 경우 만선산을 둘러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없을 것이라는 겁까지 준다. 이번 여행 일정은 대부분 그렇게 편성되어 있었다. 이곳 왕망령과 비나길 같이 꼭 지나가야하는 곳이나, 팔천협과 노야정, 단분구 등과 같이 꼭 보아야만 하는 경관들, 특히 운봉화랑과 만선산의 환산선 전동차처럼 타지 않고서는 시간을 맞출 수 없는 운송수단 등은 하나같이 옵션관광에다 포함시켜 놓았다. 그러니 바보가 아닌 이상 어찌 선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들어간 돈이 무려 310(US), 여기에 마사지 비용까지 합치면 40만원을 훌쩍 넘겨버린다. 이번 패키지여행의 가격이 459,000원이었으니 배꼽보다 크다고는 할 수 없으나 배꼽만큼이나 커져버린 여행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 쇼핑센터에서 가이드의 눈치까지 보아야 했으니 싼 것이 비지떡이라는 속담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여행지 : 중국 태항산 여행

 

여행일 : ‘18. 10. 8() - 10.12()

일 정 : 석가장(8)휘현 천계산·왕망령·만선산(9)임주 태항산대협곡(10)임주 팔천협(11)안양 문자박물관(11)석가장 조운묘(12)

 

여행 둘째 날  : 천계산(天界山) 운봉화랑(雲峰畫廊)

 

특징 : 풍경이 아름답다고 해서 백리화랑(百里画廊)이라고도 불리는 천계산의 정확한 이름은 '회룡 천계산(回龍 天界山)'이다. 보통 줄여서 회룡또는 천계산이라 부른다. 총면적은 43km²로 용음협, 운봉화랑, 천하철정, 사자령 등 네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천계산(天界山)‘은 산과 하늘의 경계선이라는 산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오른 산이다. 정상인 노야정(老爺頂)과 주변 산봉우리를 전동카를 타고 한 바퀴 돌면서 태항산의 멋진 절경과 장엄한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데, 이 길을 운봉화랑(雲峰畵廊)이라 부른다. 절벽 위에 구름이 걸쳐 있을 때 구름과 봉우리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 빼어난 경관 덕분에 '북방의 계림'이란 별명까지 얻고 있단다. 이 운봉화랑에는 청선대(聽禪台문금대(聞琴台여화대(如画台단봉대(丹凤台귀진대(歸眞台희룡대戱龍台시담대(試膽台) 등 모두 7개의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특히 길이가 300m에 이르는 유리잔도는 낭떠러지 위에서 걷는 짜릿함을 선사해준다.


 

주차장에 이르자 산문(山門) 위에 적힌 회룡(回龍)‘이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누군가 천계산의 정확한 이름이 '회룡천계산(回龍天界山)'이라더니 맞는 모양이다. 그는 또 이를 줄여서 회룡(回龍)’ 또는 천계산(天界山)’이라 부른다고도 했다. 입구에 세워진 관광 안내판도 역시 같은 지명을 쓰고 있었다. 남태항산맥의 대표적 풍경구인 이곳 회룡관광지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고 홍색문화와 도교문화가 잘 융합된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홍색문화란 홍암절벽을, 그리고 도교문화는 중국 도교의 최초발상지라는 노야정(老爺頂)‘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안내판에는 예로부터 중국에서 전해온다는 남금정 북철정(南金頂 北鐵頂)‘이라는 문구도 적어놓았다. ’남정은 무당산에 있고 북철은 태항산에 있다는 전설이란다. 신선(神仙)의 도()를 이룰 수 있는 이상향(理想鄕)이 이곳 천계산에 있다는 말일 게다.




하늘과 산의 경계라는 천계산 역시 한국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많이 찾는 관광지인 게 분명하다. 입구에 세워진 경구안내도(景區案內圖)가 그 증거라 하겠다. 맨 위에다 자기네 말인 한자로 이곳에 대한 설명을 적고, 그 아래에 영어와 한글, 그리고 일본어의 순서로 번역해 놓았다. 이뿐만 아니라 잠시 후에 만나게 될 7개의 전망대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도 한글 설명이 들어가 있다.




표를 끊어 안으로 들어서니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천계산의 암릉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천계산'(회룡) 풍경구는 국가급 여유경구가운데서도 두 번째 등급인 ’AAAA‘라고 한다. 품고 있는 경관이 그만큼 아름답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에 들어오는 풍경 하나하나가 빼어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천계산의 하이라이트는 물론 운봉화랑(雲峰畵廊)이다. 그 운봉화랑이 시작되는 상부 주차장까지는 여유경구(旅遊景區)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한다. 한없이 꿈틀거리는 구절양장의 도로를 따라 위로 오른다. ’괘벽공로(掛壁公路)‘라는데 구불대지도 못하는 곳에서는 아예 절벽을 뚫고 지나가버렸다. 그것도 기계의 힘을 빌지 않고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만 뚫었단다. 그러다보니 곡괭이와 정으로 쪼아낸 바위조각들을 내다버릴 구멍이 필요했을 것이다. 절벽에 일렬로 뚫려있는 구멍들이 바로 그것이란다. 그 구멍이 지금은 채광창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단다.



이 길은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이 밖의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기계의 도움 없이 삽과 정, 곡괭이로 15(안내도에는 3년으로 적고 있었다)에 걸쳐 암벽을 뚫은 길이 1,250m의 터널이다. 터널의 초입에서 우린 주민들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는 동상(銅像)을 만날 수 있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고사성어(故事成語)를 만들어낸 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답다 하겠다.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뜻의 우공이산(愚公移山)‘은 열자(列子)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데 나이가 90에 가까운 우공(愚公)이란 사람이 왕래를 불편하게 하는 두 산(太形山王屋山)을 대대로 노력하여 옮기려고 하자, 이 정성에 감동한 옥황상제가 산을 옮겨 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당시 우공이 태항산의 흙을 파서 발해만까지 한 번 운반하는데 1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저 거대한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는 어떤 일이든 꾸준하게 열심히 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말도 된다. 빨리 결정하고 빨리 포기해버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현대인들에겐 귀감이 될 수 있는 고사가 아닐까 싶다.



상부 주차장에 도착하자 청봉관(淸峰關)‘이라고 적힌 구역안내도가 길손을 맞는다. ’예진관(豫晋關)‘이라고도 불린다는데 하남성과 산서성의 경계에 놓인 탓에 지세가 험준하여 방어하기는 쉽지만 공격하기는 어려우므로 전략적으로 필히 쟁탈해야만 하는 곳이란다. 노야정 아래에 있는 고개 또한 청봉위(淸峰蘶)라고 하기에 산으로 명명하여 청봉관이라 부른다는 지명에 얽힌 사연을 적어 놓았다. ’()‘자로 적어놓은 것이나. ’청봉관을 산으로 여겨 만들어낸 이름이라는 것(’은 산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등 엉성한 번역이 다소 헷갈렸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그건 그렇고 안내판에는 회룡 주민들이 고생해서 괘벽공로를 만들었다는 내용과 함께 청봉관은 노야정에서 사다리로 연결된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청봉관은 이곳이 아니라 노야정을 이르는 말일 수도 있겠다.




광장에 이르자 건너편 산자락에 설치해놓은 케이블카가 눈에 들어온다. 관광객들을 1,570m 높이의 노야정(老爺頂)‘으로 데려다주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한다. 저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서는 노야정에 오를 수 없다는 얘기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뒤에는 또 다시 777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하겠지만 말이다. 노야정은 도덕경(道德經)의 저자이자 도교사상(道敎思想)의 창시자인 노자(老子)120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42년간 도를 닦으며 지냈다는 곳이다. 그런 곳을 도교에서 그냥 놓아두었을 리가 없다. 성지(聖地)로 꾸며 놓았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극히 성스러운 곳은 아무 때나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 모양이다. 오늘은 바람이 심해 케이블카가 운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전을 위한 인간의 조치겠지만, 바람을 일으킴은 본디 하늘만의 능력일지니 노자의 안식처를 보거나 그러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절벽 쪽으로 나아가자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오른편이 온통 붉고 거대한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별천지라 하겠다. 누군가 대륙의 절경들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이는 곳이 바로 태항(太行) 대협곡이라고 했다. 면적이 225에 이를 정도니 동양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그야말로 대륙의 스케일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 주는 압도적인 규모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거론했듯이 이곳은 한국 관광객들의 천지다. 귓가를 스쳐가는 언어가 중국어보다 한국어가 더 많다면 믿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 증거는 산위에서도 만나게 된다. ’드림, 산채비빔밥이란 브랜드를 내건 한국식당이 가장 커 보였기 때문이다. 메뉴 역시 컵라면과 이동막걸리에 파전, 비빔밥 등 한국의 여느 식당에라도 들어온 듯했다. 이런 풍경은 천계산 입구의 카페에서도 볼 수 있었다. 막걸리를 팔고 있었는데 이동막걸리 2병을 주문하면 파전 하나는 서비스로 준단다.




식당가를 지나자 또 다른 안내도가 기다린다. 이번에는 운봉화랑(雲峰畵廊)‘에 대해 적어놓았다. 해발 1,570m인 노야정의 산 중턱에 위치한 길이 8의 둥그런 회랑식 풍광대(回廊式 風光帶)‘인데 옥띠가 청산 사이를 감싸고 있는 듯하고, 늘 구름 속에 묻혀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천 길 낭떠러지를 한 바퀴 돈다고 해서 ’360도 관광이라고도 한단다. 이때 만나게 되는 청선대와 시담대, 문금대, 여화대, 희룡대, 단봉대, 귀진대 등 뷰포인트 7곳은 덤이란다.




천계산 관광의 꽃은 단연 전동차를 타고 운봉화랑(雲峰畵廊)에 있는 전망대들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다. 네모진 식빵처럼 생겼다고 해서 빵차(面包車)‘라는 별명을 얻은 운송수단이다. 반쯤 우스개로 운행 중에 하도 빵빵거려서 빵차로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참조한다.




빵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더니 이내 절벽길을 내달린다. 해발 1,570m의 천계산 허리길인 운봉화랑(雲峰畵廊)이다. 천계산의 백미(白眉)는 누가 뭐래도 빵차를 타고가면서 만나게 되는 7곳의 뷰포인트에서 구름과 봉우리가 빚어내는 수려한 경관을 만끽하는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주변 풍경이 하나같이 천 길의 낭떠러지다. 이렇게 험한 곳을 어떻게 관광지로 개발할 생각을 했을까.



사방이 온통 붉은색의 사암(沙岩)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계산이 홍암 대협곡(紅岩 大峽谷)’이라고도 불리는 이유가 바로 저렇게 선명하게 빛나는 사암 때문일 것이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암 절벽 곳곳에서 천계산의 역사가 기록된 단층이 보인다고 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과거 수심이 얕은 잔잔한 퇴적 환경이었음을 암시하는 연흔(漣痕)과 사층리(斜層理)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진흙과 모래가 뚜렷이 구분된 퇴적층의 두께와 색깔도 각양각색이란다.



첫 번째로 빵차가 멈춘 곳은 희룡대(戱龍台)‘이다.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산의 모양새가 마치 봉황(鳳凰)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고, 산 아래의 두 산마루는 용() 두 마리가 날아오르려는 자태란다. 안내판에는 쌍용희벽(双龍戱璧)’이라는 문구도 적혀있다. 누군가 운봉화랑을 설명하면서 불와태항영공관협’, ‘봉황전시’, ‘쌍용희벽’, ‘균태태항’, ‘승상태조’, ‘십이금균뇨태항등의 경관을 볼 수가 있다고 했는데, 전면에 보이는 경관이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건너편 바위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잔도(栈道)가 눈에 들어온다. 천애(天涯)의 까마득한 절벽에다 선반을 매달 듯 다리를 놓았다. 가이드의 말로는 귀진대(歸眞台)’ 부근에 있는 고공잔도(高空棧道)란다. 그렇다면 운봉화랑에 있는 7개 전망대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는 귀진대를 그냥 지나쳐버렸다는 얘기가 아닌가. 하지만 시설을 수리하는 중이라는데 어쩌겠는가. 아쉽지만 얼마 전 JTBC-TV에서 방영했던 영상을 보았던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두 번째로 멈춘 곳은 운봉화랑의 하이라이트라는 유리잔도(玻璃栈道)‘. 수백m 높이의 까마득한 절벽에 선반을 매달 듯 만들어 놓은 다리인데 바닥을 유리로 깔았다고 해서 유리잔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니 마치 허공을 걷는 느낌이 들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겁나는 이 길은 길이까지 엄청나게 길단다. 악명 높은 장가계의 유리잔도보다도 무려 5배나 긴 300m라는 것이다. 이곳은 JTBC-TV의 인기 여행프로그램인 뭉쳐야 뜬다에서 소개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바 있다. 평소에 겁이 없다고 알려진 김용만과 조세호까지도 생각보다 세다는 평을 했을 정도이며, 겁쟁이로 소문난 정형돈의 걷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특히 누군가 옆으로라도 다가올라치면 오지마라고 외쳐대던 여성 진행요원의 괴성은 지금까지도 귓가를 맴돌고 있을 정도이다.



유리잔도를 걸어야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이 시작된다. 지난번 뭉쳐야 뜬다의 멤버 가운데 하나인 정형돈이 겁에 질려 허둥대던 모습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 진행요원이 질러대던 괴성이 아직도 귓가에서 맴도는데 나 역시 겁이 많은 편이니 어쩌란 말인가. 몇 번을 망설이다가 그냥 모험을 감행하기로 한다. 겁쟁이라 놀려대는 집사람 앞에서 사내대장부의 품위를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 잠시 후 강화유리로 된 바닥이 나타난다. 그러자 여행객들의 걷는 속도가 갑자기 더뎌진다. 아니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하고 괴성만 질러대는 사람들도 몇 보인다.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서 도저히 못 걷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전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바닥에 깔린 유리가 특수 제작된 강화유리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난 평소와는 다른 집사람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었다. 나를 두고 겁쟁이라고 놀려대던 집사람이 막상 이곳에서는 유리 위로 올라서지를 못하는 것이다. 암벽과 유리 사이에 만들어진 좁은 틈새에 올라서서 걷는 모습이 차라리 가관이었다. 반대로 난 대범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금을 못 펴고 있는 집사람을 보살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유리 위를 걷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난간에 기대어 포즈까지 취할 정도였으니 겁쟁이라는 말은 이제 나에게는 필요 없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세 번째로 들른 곳은 시담대(試膽臺)‘이다. 무시무시한 절벽도 모자라 그 끝에다 돌출형의 10m짜리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다리인 시담대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선사하는 곳이다. 특히 다리 끝에 위치한 팔각전망대는 운봉화랑 전망대 중 끝판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과 아찔한 기분을 선사한다. 참고로 시담대라는 이름은 담력을 시험해 볼 수 곳이라는 뜻을 갖고 있단다. 사람들의 몸무게까지도 부담스러웠던지 한꺼번에 올라설 수 있는 인원까지 제한하고 있었다.






시담대에 올라서면 맞은편에 위치한 와불산(臥佛山)‘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부처님 두 분이 누워있는 모습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난 부처님의 형상을 그려낼 수 없었다. 무학대사께서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하찮은 중생의 눈으로 어찌 그런 현묘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다른 한편으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천계산풍경구의 대협곡은 대륙의 웅장함그 자체다.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불리는 거대한 협곡 속으로 흐르는 한줄기 강은 강인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가진 자연의 위대함을 새삼스레 느끼게 해준다.




다섯 시간이 넘게 달려서 도착한 휘현(輝縣)려도호텔(Hualong lidu hotel)‘

휘현은 중국 호남성 북부의 현으로 태항산 관광의 거점도시이다. 인근에 은·상나라 중·후기의 유적이 분포되어 있으며, 춘추전국시대에는 진위나라(晋魏)의 문화권이었다. 그만큼 여행객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 자그만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호텔의 규모나 시설, 제공되는 서비스 등이 다른 거대 도시들의 호텔에 비해 하등 뒤길 게 없었다. 아침식사 또한 준 4성급답게 우리 입맛에 딱 맞았다.


여행지 : 중국 태항산 여행

 

여행일 : ‘18. 10. 8() - 10.12()

일 정 : 석가장 정정현(8)휘현 천계산·만선산(9)임주 태항산대협곡(10)임주 팔천협(11)안양 문자박물관(11)석가장 조운묘(12)

 

여행 첫째 날과 다섯째 날 : 석가장의 조운묘와 정정현(正定縣) 옛 거리

 

특징 : 태항산맥(太行山脈) : 중국 중북부 동쪽의 화북평야와 서쪽의 산서고원(황토고원의 최동단)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400km 길이의 산맥으로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별명이 붙여져 있다. 산맥의 끝자락이라 할 수 있는 태항대협곡에는 팔천협을 비롯해 홍두협·흑룡담·청룡협·자단산 등의 주요 관광지구 5곳을 포함하고 있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이런 점을 강안한 중국정부에서는 이 일대를 장가계와 황산을 잇는 중국의 대표 관광지구로 개발해 놓았다. 그만큼 빼어난 경관을 지녔다는 증거일 것이다. 반면에 이 산맥은 예로부터 산서성(山西省, 산시성)과 하북성(河北省, 허베이성)의 교통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어왔다. '태항을 넘는 길'이란 말은 인생의 좌절을 상징하는 시적 표현이 되었고,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篇)에 등장하는 '어떤 일이든 꾸준히 노력하면 결국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의 고사 '우공이산(愚公移山)'에 등장하는 산 역시 태항산맥을 두고 한 말이다. 그나저나 세상에 알려진 게 2014년부터라는데 4년이나 지난 지금 찾아온 나로서는 꽤나 늦은 셈이다.

 

석가장(石家庄, 스좌장) : 하북성의 성도(省都)로 태항산맥의 동쪽 기슭의 하북평원에 위치하고 있다. 관내에 있는 신악시(新乐市, 신러시)에 복희대가 남아 있는 말 그대로 복희씨(伏羲氏, 3황의 첫머리에 올라있는 중국 전설상의 제왕) 전설의 옛 땅이다. 전국시대에는 중산국(中山國)이 형성되어 병산현(屏山县. 핑산현)에는 중산국의 도성 유적이 남아있고, 중산왕 무덤에서는 진기한 문물이 출토되었다. 하지만 당나라 이후로는 시장도시에 지나지 않아 교역 중심지였던 북쪽의 정정(正定, 정딩)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05년 베이징-우한 철도가 이 지역을 지나게 되면서 성장하기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하북성 서부의 대도시로서 행정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정정보다 발달한 교역도시이자 공업도시로도 발전했다.

 

조운묘(趙雲廟) : 삼국시대(三國時代)의 명장이었던 조운(趙雲)’을 모시는 문묘(文廟)이다. 유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든 조자룡은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명장중의 명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러한 조자룡을 기리는 조운묘는 중국인들이 많이 찾는 명소 중 한 곳이라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지난 1996년 청나라 도광제 때 건립된 조운묘의 터 위에다 청나라 건축양식을 그대로 재현하여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조운(趙雲)은 상산(常山) 사람으로 자는 자룡(子龍)이다. ’조운이라는 본명보다는 조자룡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유이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으로 본래 백마장군 공손찬(白馬將軍 公孫瓚)의 휘하에 있었으나 유비(劉備)를 만나 그를 평생 동안 섬겼다. 유비를 따라 박망파(博望坡), 장판교(長阪坡), 강남평정(江南平定) 등의 전투에 참여했고, 단독으로는 한수(漢水), 기곡(箕穀) 등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런 공로로 관우(關羽), 장비(張飛), 마초(馬超), 황충(黃忠)과 더불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으로 일컬어진다. 벼슬은 편장군(偏將軍), 계양태수(桂陽太守), 익군장군(翊軍將軍), 진군장군(鎮軍將軍) 등을 역임하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해졌다. 사후에 순평후(順平侯)로 추봉되었다


  

이번 태항산 여행의 시작은 석가장(石家庄, 스좌장)이다. 패키지여행에 참가했었기에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여행사로 봐서는 비행기 값이 저렴하다는 등 뭔가 유리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비행기 값이 저렴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태항산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태항산에서 가장 가까운 정주(郑州, 정저우)까지 비행기로 와서 버스를 이용해 목적지로 가는 방법이 가장 선호되고 있다. 다음은 우리와 같이 석가장(石家莊, 스자좡)를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성수기에만 이용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으니 참조한다. 그 외에도 제남(济南, 지난)이나 북경 또는 태원(太原, 타이위엔)을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심지어는 배를 타고 청도까지 와서 태항산으로 장거리 이동을 하는 여행사도 눈에 띈다. 하긴 상하이를 경유해 약 400쯤 떨어진 한단(邯鄲)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그저 일정이나 비용, 체력 등을 감안해서 자신의 처지에 맞는 방법을 선택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석가장에서의 첫 방문지는 석가장(石家庄)의 외곽에 있는 정정현(正定縣, 중국발음으론 정딩)이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거리를 걸어보라는 모양이다. 정정현은 예로부터 바오딩(保定), 베이징과 함께 북방삼웅진(北方三雄镇)으로 불렸으며, 삼국시대 촉한(蜀汉)의 만능명장이자 전략가로서 영웅호걸 중 단 한 번도 주군을 배신한 적이 없다는 의리의 표상조자룡(赵云)의 고향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론 현 국가주석인 시진핑(习近平)이 처음으로 공직에 나온 지역이라고 한다. 군복무를 마친 1982년부터 85년까지 이곳에서 공산당 부서기로 재직했다는 것이다. 이때 인연을 맺었다는 리잔수(栗战书)는 현재 권력서열 3위인 전인대상무위원장자리에 앉아있단다. 그러니 시진핑 주석이 제창했던 初心不忘(초심을 잃지말자)’의 발원지로 각인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차에서 내리면 천령사(天寧寺)이다. 사찰 안에 세워진 9층탑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가이드는 그냥 지나쳐버린다. 나 또한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갑자기 변경된 일정이라서 꼭 보아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든다. 이번 여행 내내 이런 식의 안내를 받게 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참고로 여행사에서 나눠준 일정표에는 민족루 도보거리의 투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석가장시중심가에 위치한 번화가로 차도와 인도가 따로 나뉘어 있지 않은 프리마켓(free market이며 벼룩시장인 flea market와는 구분됨)’ 거리이다. 상가건물들 사이에 음식과 잡화를 파는 노점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고 보면 되겠다. 전통시장을 걸으면서 현지인들의 삶을 관찰·이해해 보라는 배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풍경은 야시장, 즉 저녁에 들러야 제격일 것이다. 사방에 즐비한 먹거리들을 맛보면서 느긋하게 눈요기까지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낮, 우리를 정정현으로 옮겨 놓은 이유일 것이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나 같이 후기를 써오는 사람들에게는 횡포나 다름없는 일이다. 꼭 필요한 뭔가를 자세히 살펴보고 사진까지 찍어야만 귀국 후에 글을 써나갈 수 있는데도,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미리 알아두어야 할 사항 등을 챙겨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정에는 많은 보배들이 있다. 고대 중국의 5대 대궐로 인정되는 정정 문묘(文廟)의 대성전(大成殿)은 물론이고 모양과 풍격이 각각인 보탑 4기는 모두가 국보급이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금 지나치고 있는 천령사(天寧寺)9층짜리 능소탑(凌宵塔)이다. 천여 년 동안을 줄곧 한 모양으로 이어오고 있는 게 특징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특히 개원사(開元寺)에 있다는 수미탑(須彌塔)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두고두고 한으로 남을 것 같다. 귀국 후 고구려가 쌓은 탑이라고 적은 누군가의 글을 발견했기에 하는 말이다. 문헌으로는 확인이 되지 않는 주장이지만 직접 눈으로 보았다면 어느 정도나마 감을 잡을 수는 있지 않았겠는가. 나머지 2기는 임제사(臨濟寺)의 징령탑(澄靈塔)과 광혜사(廣惠寺)의 송나라 화탑(華塔)이란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도(古都) 가운데 열한 번째라는 정정(正定)은 세월 속 고건물의 보고(寶庫)로 알려진다. 일찍이 베이징, 보정(保定, Baoding)과 함께 중국 북방 3대 도시였던 탓으로 천여 년 전 당송(唐宋)때의 고건물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참고로 천여 년 전만 해도 석가장은 정정부 산하의 작은 동네였을 따름이고 당시의 정정은 베이징과 어깨를 겨룬 대도시였다고 한다. 하지만 찬란함은 어제에 머물러 있다. 중국 북방지역에서 정정의 위치는 한 때 보정에 대체되고 그 뒤에는 석가장에 빼앗겨 오늘날 정정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 그렇다고 모두가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덕분에 정정의 고건물들이 모던한 빌딩들에 둘러싸이지 않고 자신을 지키면서 세월을 이어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거리는 끝나버린다. 그만큼 걷는 코스를 짧게 잡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곳 정정(正定)에는 천년고찰 융흥사(隆兴寺)와 천령사의 능소탑(凌霄塔) 외에도 임제사(临济寺)와 개원사(开元寺), 화탑(华塔), 고문묘(古文庙) 중점문물보호단위7개소나 소재하고 있다. ‘중국 역사문화 명승고적지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이니 마음만 먹으면 구경거리는 얼마든지 널려있다는 얘기이다. 다만 가이드에게 그럴 의향이 조금도 없다는 게 문제일 따름인 것이다. 그렇다고 예비지식이 전무한 여행객들이 다른 마음을 먹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대체 어디로 가야 무엇을 볼 수 있는지를 모르니 어찌하겠는가. 주어진 자투리 시간을 광장에서 서성이다가 집결장소로 모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융흥사(隆興寺)는 중국 북방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불교사원이라고 한다. 경내에 칠십 척이 넘는 청동으로 만든 대불(大佛)상이 있다고 해서 대불사(大佛寺)라고도 부른다. 사찰은 수()나라 개황(開皇) 6(서기 586)에 처음 지어졌으며, 전체 면적이 64에 달한다. 이 절은 수많은 왕조를 거치면서도 원래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해 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 규모와 화려함을 더해 왔단다. 절 내에는 수()나라부터 시작하여 당(), (), (), (), ()대의 각 시대별 문화적 특색이 살아있는 4개의 전(殿)5개의 누각, 2개의 정자, 1개의 단() 등 건축물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황제들이 직접 돈을 들여 짓는 등의 총애를 받아온 덕분이란다. 황가사찰이라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찰의 안은 둘러보지 못했다. 북쪽을 향해 앉아서 부처가 미처 보지 못한 신도들을 보살핀다는 동방의 여신이라는 보살상과 만들 당시 세 살짜리 아이의 손으로도 돌릴 수 있었다는 10m 높이와 어른 다섯 명이 넘게 팔을 벌려야 겨우 감싸 안을 만한 둘레를 가진 전륜장전’, 어마어마한 크기의 통나무를 조각해 만든 부처상, 21.3m 높이의 천수천안관음상 등 볼거리가 넘친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융흥사 앞 광장에는 한가운데에 용()을 새겨 넣은 거대한 벽체(壁體)를 세워놓았다. 행사가 있을 때 뒤를 막아주는 용도가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벽면이 온통 붉은 색으로 도배를 해놓은 게 눈길을 끈다. 아니 주변의 건물들도 온통 빨강 일색이다. 하긴 갓 시집 온 새댁이 친정 갈 때 옷, 가방 등을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할 정도로 붉은 색을 좋아한다는 중국 사람들이라니 오죽하겠는가.




웨딩촬영을 나온 예비부부가 보인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리라는 얘기일 것이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오고 있는 이 거리처럼 자기네들의 사랑도 그렇게 변치 않고 싶다는 바램일지도 모르겠다.



맨 마지막 날의 일정은 삼국시대의 명장 조운(趙雲)을 모시는 문묘(文廟)이다. 삼국시대 촉나라의 명장인 조운은 '항상 승리하는 장군'이라는 의미로 상승장군(常勝將軍)이라 불리었다. 그는 유비가 도망간 장판교 전투 때 자기 칼이 못쓰게 되자 조조 군대의 창과 칼을 빼앗아 싸워 유비의 부인 감씨와 아들 유선을 구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는 속담이 생겼다. 원래는 남의 헌 칼을 빼앗아 자기 마음대로 쓴다.’는 뜻이었으나, 요즘은 주어진 권한이나 권력을 함부로 남용할 때 사용되고 있다. 세월 따라 인심(人心)도 변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긴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도 있지 않는가.




조자룡의 이름을 따서 조운묘(趙雲廟)’라 불리는 문묘의 정문이랄 수 있는 산문전(山門殿)의 앞은 널따란 광장이다. 그 한가운데에 삼국지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을 재현한 조운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조운이 유비의 아들인 유선을 왼쪽 팔로 안고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조조의 대군으로부터 구해오는 장면이다. 서늘한 눈빛과 앙다문 입술, 주군의 아들을 구하러 가기 위해 창 하나 들고 홀로 말을 타고 적진으로 뛰어 든 조자룡의 비장한 각오와 깊은 충심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동상의 앞에는 삼국명장 상승장군 순평후 조운고리(三國名將 常勝將軍 順平侯 趙雲故里)라고 적힌 빗돌을 세워놓았다. ’항상 이겼던 삼국의 명장 순평후 조운이 태어난 동네라는 뜻일 게다. 조운(趙雲)은 항상 승리한다고 해서 상승장군(常勝將軍)이라고도 불리었다. 고향이 이곳 인근의 상산군(常山郡)이라고 해서 상산장군이라 불리기도 했다니 참조한다.



광장에는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놀이기구도 보인다. 우리나라의 투호(投壺)와 비슷한 개념인데 화살과 항아리 대신에 동전이 대체하고 있으니 투전(投錢)이라고 하면 딱 맞은 표현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전각들은 지난 1996년 정딩현 정부에서 총 400만 위안을 투자해 청 도광제(道光帝, 1782-1850) 때 세운 조운묘 터에 다시 재건한 것이다. 8000의 넓은 대지에 세워진 이 사당은 모두 청나라 때 건축양식을 그대로 본떠 재건했다고 한다. 주요 건축물로 묘문(庙门)과 사우전(四义殿) 오호전(五虎殿), 군신전(君臣殿), 순평후전(顺平侯殿) 등이 있다



조운묘의 관광지 등급 표시판이 보인다. 국가급인 ‘A’가 둘이니 겨우 국가급에 들 정도의 관광지라는 의미일 것이다. 참고로 중국의 관광지는 일반에서 성급, 국가급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관광지로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 이 가운데 국가급 관광지가 가장 차원이 높음은 물론이다. 또한 이 국가급관광지는 A에서 AAAAA까지 다섯 등급으로 나뉜다. A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뛰어난 관광지라고 보면 된다. 5A는 현재 66개가 운영되고 있을 따름이다.



묘문(庙门)을 들어서니 전면에 군신전(君臣殿)이 나타난다. 전각을 정면 가운데에 두고 앞마당 왼편에는 순평후 비정(順平侯 碑亭)’, 그리고 오른편에는 육각비정(六角碑亭)’이 자리 잡았다.



군신전(君臣殿)은 군신이 함께 모여 있는 모양새이다. 황제인 유비를 가운데에 놓고 왼쪽부터 조운과 장비, 관우 제갈공명의 상()을 배치했다. 촉한의 초대 황제인 유비의 재위(221-223) 때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지 싶다. 벽면에는 비문을 탁본(拓本)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들이 여럿 걸려있었으나 기초 수준에 그치는 내 한자 실력으로는 출처나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순평후전으로 들어가는 길에 방생지(放生池)를 만났다. 잡다한 신들을 많이 모시는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군신전 뒤는 조운의 사당인 순평후전(順平侯殿)’이다. 전각으로 연결되는 중앙 통로에 향나무로 여겨지는 나무들이 줄지어 심어져 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이 모두 사람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손에는 십팔반병기(十八般兵器) 하나씩을 들고 있다. 나무와 병기를 조합해서 삼국시대의 상황을 재현해 놓은 모양이다. 멋진 발상이라 하겠다.



순평후전(順平候殿)은 조자룡 부자(父子)를 모셔놓은 전각이다. 순평후는 조자룡이 대장군으로 봉해질 당시 받았던 시호라고 한다. 62세의 나이로 사망한 조운의 조각상 좌우로 각종 무기를 든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구조이다. 조운의 앞쪽 좌우에는 커다란 징과 북을 배치했다. 전쟁에서 승리할 때 치는 북인 승득격고(勝得擊鼓)’와 재물을 얻었을 때 울리는 징인 발재명나(發財鳴锣)’라고 한다. 참고로 이 전각 안에는 조자룡의 생가에서 발견되었다는 한순평후조운고리비가 모셔져 있다. 청나라 광서황제때 조자룡의 용맹함을 기리며 세운 기념비라는데 아쉽게도 사진촬영에는 실패했다.





순평후전을 앞에 두고 왼편에는 오호전(五虎殿)’이 자리 잡았다. 촉한(蜀漢)의 오호장군(五虎將軍)을 모시는 사당이다. 좌로부터 황충(黃忠), 조운(趙雲), 관우(關羽), 장비(張飛), 마초(馬超)의 순으로, 삼국지에서 용맹을 떨치던 무시무시한 장수들이 소설이 아닌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오호대장군을 모시는 옆쪽 벽면에 그려진 그림은 황충과 조운이 참전했던 정군산 전투의 장면이라고 한다. 박근혜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주석이 선물했던 그림과 같은 것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오호전의 맞은편에 있는 전각은 사의전(四義殿)이다. 이곳은 삼국지의 명장면 도원결의의 세 주인공인 유비, 관우, 장비에다 조자룡까지 포함해 모두 네 영웅을 모신 곳이다. 실제로 서진(西晉)의 역사가인 진수(陳壽, 233-297)는 삼국지에서 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서술했다. 조자룡이 유비로부터 관우, 장비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긴 자신의 아들을 두 번이나 구해주고 항상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친 충직한 신하를 어찌 피붙이 같이 여기지 않았겠는가.




아래 사진은 조자룡 음마조(趙子龙饮马槽)’로 조자룡이 말에 물을 먹이던 구유라고 한다. 우측에 보이는 우물에서 물을 길러 구유에 부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조자룡의 생가에서 발견되었으나 이곳으로 옮겨와 보관 중이란다. 그렇다면 그 옆에 있는 우물은 가짜인 셈이다.




청동(靑銅)으로 만든 조자룡의 말() 조형물도 눈에 띄었다. 그 옆에는 그의 장남이 탔다는 말의 조형물도 만들어져 있다. 고삐를 잡고 있는 이의 정체를 묻는 누군가의 질문에 마부(馬夫)라는 가이드의 조크가 금방 뒤따른다. 하지만 차림새로 보아 말의 임자가 분명할 것이다. 일반병사는 저런 차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평후전의 뒤편은 정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비림(碑林)과 쉼터 등을 갖추었으나 어딘가 엉성한 풍경이다. 아까 입구에서 보았던 ‘AA’라는 등급표시에 어울리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을 머문 석가장의 태화상무주점(泰华商务酒店)’이다. 주점(酒店)이란 우리가 중국 무술영화에서 흔하게 보아오던 장소로 술과 음식, 그리고 잠자리가 제공되는 곳이다. 그게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뀌면서 ‘Taihua Business Hotel’이란 영문 이름까지 덤으로 얻었다고 보면 되겠다. 우리나라로 치면 주막(酒幕), 오늘날의 호텔이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아무튼 객실은 깨끗했고 제공되는 일회용품도 넉넉했다. 아침 식사도 우리 입맛에 딱 맞았다. 중국의 관광지에 소재한 호텔들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그런 가운데도 다른 호텔에 비해 객실이 넓은 것은 장점이라 하겠다.



에필로그(epilogue), 이번 여행도 조선족(朝鮮族) 가이드가 안내를 맡았다. 그런데 자기 소개를 하는 도중에 모국(母國)대한민국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그의 말이 가슴에 닿았다. 그런 말은 이곳에서만 들었던 것이 아니다. 직장에서 물러난 지 어느덧 4, 퇴직한 후에는 집사람과 함께 세계 일주를 해보겠다는 목표대로 매년 4번 이상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만났던 많은 현지 가이드들도 저와 같은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가이드가 살고 있는 중국이란 나라는 다민족 국가다. 다수족인 한족(漢族)92%을 중심으로 장족·회족·만주족·묘족·이족·토카족 등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조선족은 약 200만 명으로 15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단다. 중국의 인구가 14억이 넘는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아주 적은 숫자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모국의 경제가 발달해 있는 덕분에 중국내 소수민족은 물론이고 한족들까지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긴다니 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이겠는가. 반면에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도 발생하고 있단다. 한국으로 돈 벌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덕분에 동북 3(흑룡강성, 랴오닝성, 길림성)’의 조선족들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여행지 : 중국 동북부 여행

 

여행일 : ‘18. 6. 25() - 6.29()

여행지 : 중국 대련, 단동, 집안, 통화, 환인

일 정 :

6.25() : 대련(성해광장)

6.26() : 단동(압록강 철교), 집안(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환도산성)

6.27() : 통화(백두산 천지, 금강대협곡)

6.28() : 환인(오녀산성), 단동(유람선 투어)

 

여행 넷째 날 : 환인(桓仁) 의 오녀산성(五女山城)

 

특징 : 환인(桓仁) : 중국 요녕성(遼寧省)에 있는 인구 31만의 만족자치현(滿族自治縣)이다. 청나라 광서3(1877) 화이런현(懷仁縣)이 설치된 이래 여러 차례 개편을 거쳐 1989년 자치현(自治縣)이 되었다. 삼림이 많아 인삼·패모(貝母당삼 등의 약재가 많이 나고 농사는 벼농사를 주로 한다. 주민은 현의 이름대로 만족(滿族)이 많이 살고 있으나, 한족(漢族)과 후이족(回族), 몽골족 등도 다수 거주하고 있으며, 특히 조선족중학교까지 있을 정도로 우리 동포들도 많이 사는 지역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고구려의 도읍(都邑)이었던 곳으로 더 친숙하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이곳에서 나라를 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쌓았던 졸본성이 지금의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고 한다. 근처에는 상고성자고분군(上古城子 古墳群), 고력묘자고분군(高力墓子古墳群), 망강루고분군(望江樓 古墳群), 미창구장군묘(米倉溝將軍墓) 등의 고구려 무덤군(高句麗古墳群)‘들도 존재한다.

 

오녀산성(五女山城) : 환인 시내에서 8km정도 떨어진 해발 800m의 오녀산(五女山)에 천연성벽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정상부에 남북 1km, 동서 300m인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는가하면 항상 물이 솟아나오는 샘이 있어 평상시에도 거주하기에 크게 불편하지 않다. 주몽이 나라를 세우면서 수도로 삼았던 흘승골성 또는 졸본성이라는 견해가 제기되는 이유이다. 집안과 서쪽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라는 점도 수도(首都)라고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성돌은 30×20×35의 크기이며, 성벽의 축조공법에는 굽도리축조공법이 남벽에서 확인되었다. 굽도리축조공법이란 굽도리를 조성할 때 계단식으로 경사지게 쌓는 방법으로 산성에서는 협곡에 쌓을 때와 높은 성벽을 축조할 때 많이 적용된다. 산성의 동문지(東門址)에서는 성벽이 서로 엇갈리면서 한쪽 벽이 다른 쪽 벽을 모나게 감싸서 옹성(甕城)을 이루었다. 이런 형식은 오녀산성과 국내성에서만 보인다고 한다. 고구려 초기의 옹성을 보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런 점들이 <추모왕(鄒牟王)이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서쪽의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였다>는 광개토대왕비의 비문과 같다면서 졸본성으로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숙소인 통화를 떠난 버스가 멈춰선 곳은 오녀산 아래에 있는 널따란 주차장이다. 산성으로 오르려면 먼저 오녀산성 박물관(五女山城 博物館)’을 둘러봐야 한다. 매표소를 지나 박물관으로 들어가서 관람을 한 후 셔틀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2층으로 나가도록 동선(動線)이 만들어져 있다.




오녀산성으로 가려면 일단은 오녀산성 박물관(五女山城 博物館)’을 들러야 한다. 소지품에 대한 엑스레이 검사를 치른 후에야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지만 사진은 찍을 수 없다고 한다. 중국에 소재하는 박물관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싶다. 카메라의 플래시(flash)만 터트리지 않으면 촬영을 허락하는 다른 나라들과 다른 점이고 말이다. 관람객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감추어야만 할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오녀산성에서 발굴된 유물이라며 석기·철제갑옷·무기·토기 등을 전시해 놓았는데 특별히 가슴에 담아둘만한 유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2층에는 미창구 장군묘(米倉溝將軍墓)’1:1 재현모형이 있었다. 환인현의 미창구촌에 위치한다고 해서 미창구 장군묘(米倉溝將軍墓)’란 이름이 붙여졌다.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東明聖王)’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라서 이곳에 재현해 놓았는가 보다.



박물관의 2층 뒷문을 빠져나오면 널따란 광장이 나온다. 셔틀버스의 주차장을 겸하는 곳이다. 왼쪽에는 주로 기념품과 함께 토산품을 파는 상점가가, 그리고 오른쪽에는 고구려 시조비(高句麗 始祖碑)’라 쓰인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윗부분에 삼족오를 새기고 중국 특유의 빨간 글씨로 고구려 시조비라 썼다.




산성까지는 셔틀버스로 이동해야 한다. 30명 정도가 탈 수 있는 버스는 꾸불꾸불한 비탈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며 위로 오른다. 그러다보니 오녀산성의 정상부가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보면 볼수록 위엄이 넘치는 풍경이다. 실제로 오녀산성은 성의 전체 둘레인 4,754m 가운데 4,189m가 천연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성벽의 대부분이 저런 암벽이다. 인위적으로 쌓은 성벽은 전체 중 12%565m에 불과하다고 한다. 내가 동명성왕이었더라도 서슴없이 수도로 삼았을만한 난공불락의 요새임이 분명하다.




20분쯤 지나자 오녀산성으로 오르는 계단의 초입에 있는 상부주차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음료와 기념품을 파는 가판대가 우리를 맞이한다. 한쪽 귀퉁이에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고 적은 거대한 비석도 세워져 있다. 비석은 이곳 오녀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실을 알리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참고로 오녀산은 정상부의 지세가 평탄하지만 주변은 100-200m 높이의 절벽을 이룬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천혜의 이점을 살린 게 오녀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길쭉한 부정형을 이루고 있으며, 절벽 윗부분의 평탄한 정상부와 정상부 동쪽의 완만한 사면을 포용하고 있다. 정상부는 남북의 길이가 600m 동서의 너비가 110-200m 정도이며, 전체적으로 천연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서쪽방면에서 정상부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서문주변에만 일부 성벽이 구축되어 있다.




입장권을 내고 개찰구를 통과하니 가파른 돌계단이 끝도 없이 길게 뻗어 있다.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고나 할까? 아무튼 계단을 본 사람들마다 놀래는 기색들이 역력하다. 그리고는 이내 우거지상으로 변해버린다. 하긴 저렇게 길고 가파른 계단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계단은 그 숫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경사까지도 가파른 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은 편해진 또 다른 길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갈 즈음 십팔반(十八盤)’이라고 쓰인 비석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고구려 시대 때부터 있었던 길을 이르는 말로 당시에는 말과 마차까지 다녔다고 한다. 이 길을 따르더라도 정상에 오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전체 길이는 938m, ‘갈 지()’자를 그리는 구절양장의 길을 따라 열여덟 구비를 지나야만 정상에 이를 수 있다고 해서 십팔반(十八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글쎄다. 십팔반이란 게 본디 중국에서 전해지는 열여덟 가지의 무예를 이르는 말인데..




얼마쯤 올랐을까 대나무를 엮은 시설물이 길게 만들어져 있다. 위에는 레일까지 깔려있다. 정상에 오른 후에 확인해보니 공사용 자재를 운반하는 궤도(軌道)였다. 정상에서 제법 큰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올라가기 시작한 지 30분쯤 지났을까. 계단과 나무만 보이던 풍경이 바뀐다. 더욱 좁아진 계단 길 양쪽으로 수직 절벽이 높게 솟아 범상치 않은 에너지를 내뿜고 있는 것이다. 아까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그 바위절벽이 아닐까 싶다. 절벽이 시작되는 입구의 너럭바위에 천창문(天昌門)’이라는 글씨를 굵게 새기고 붉은 페인트를 칠해 놓았다. 이렇게 생긴 곳은 대부분 통천문(通天門)’이라 부르는 게 보통인데 왜 이곳에서는 창성할 창()’자를 썼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억겁의 세월을 견뎌온 바위 덩어리들은 마치 저 위쪽에 있는 그 무언가를 지키는 수호신이라도 되는 양 통과하려는 사람들을 매섭게 지켜보는 형상이다. 바위 안으로 한 발 내딛자 서늘한 바람이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은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들과 섞여 신성지역으로 들어가기 전 온 몸에 남아있는 답답하고 무거운 기운을 씻어주려는 듯 했다.




땀을 한바가지나 흘린 후에야 정상에 올라서니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왕궁유적과 천지(天池)를 거쳐 점장대(点將臺)로 이어지고, 왼편은 비래봉(飛來峰)과 자매교(姉妹橋), 오녀송(五女松)을 거쳐 점장대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어느 한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얘기이다. 탐방로가 산상(山上)의 바위벼랑을 따라 한 바퀴 빙 둘러볼 수 있게 나있는 것이다.




조망을 기대하면서 일단은 왼편으로 가본다. 그런 내 예상은 적중했다. 운해송수(雲海松濤)라고 적힌 커다란 비석이 세워진 곳이 뛰어난 전망대였기 때문이다. ‘운해송수'구름바다에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물결을 이룬다.'는 뜻이니 주변 풍광을 잘 표현한 글귀가 아닐까 싶다. 실제 풍경도 구름바다와 바람이 소나무를 흔들며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인(桓仁) 시내와, 시내를 S로 굽이굽이 흐르는 훈강(渾江)이 멀리 보인다. , 주몽이 첫 도읍지를 고를 때 물과 땅이 어우러진 곳을 찾다가 훈강의 넉넉한 물줄기에 반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나저나 저곳이 바로 광대한 만주 벌판이다. 고대 역사를 공부를 할 때마다 가슴 뛰게 하던 고구려의 주 활동무대였던 곳이다. 저기를 고구려 무사들이 말을 달려 기상을 한껏 높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나 혼자만의 감흥이었을까?




조금 더 나아가보기로 한다. 자매교(姉妹橋)라는 다리 아닌 다리를 건너자 이번에는 쉼터용 정자가 지어져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정자는 소정봉(小丼峰)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이름으로 미루어볼 때 옛날 이곳에 작은 우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아무튼 주변 풍광이나 조망 등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곳이니 특별히 염두에 둘 필요는 없겠다.




반대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향한다. 잠시 후 냉과류와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나온다. 화장실은 물론이고 커다란 안내도까지 세워두었으니 잠시 쉬어가는 것도 괜찮겠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지도라고 꼼꼼히 살펴둔다면 꼭 봐두어야 할 볼거리를 놓치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매점의 옆은 서문(西門)이다. 오녀산성의 성문은 동문과 서문, 남문 등 3개가 확인된다고 한다. 그중 서문(西門)은 서쪽에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너비는 3m이며, 문의 남쪽과 북쪽은 성벽을 이어 쌓았는데 북쪽의 성벽은 ㄱ자 형태로 회절(回折)하도록 하여 마치 치()나 적대(敵臺)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성돌의 면석은 쐐기모양의 다듬은 성돌을 사용하였으며, 뒷채움돌은 길쭉한 마름모꼴의 성돌을 사용하였다. 문지의 바깥쪽 양쪽바닥에는 구멍이 파여진 확돌이 놓여있고, 문 안쪽부분의 양쪽에는 자 형태의 위실(衛室)이 구축되어 있다.



통로 옆에 아까 올라오면서 보았던 대나무를 엮어 만든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의 대나무 위에는 레일(rail) 말고도 운반용 기구까지 놓여있다.



본격적인 투어에 나선다.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길이 널찍할 뿐만 아니라 바닥은 판석(板石)을 깔아 비가 오는 날에도 질퍽거리지 않도록 했다. 탐방로 주변은 거의 평원 수준이다. 지각변화를 겪는 과정에서 정상의 단단한 바위부분만 침식당하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이란다. 그 바위지대가 오랜 세월 풍화작용(風化作用, weathering)을 거치면서 나무가 우거지고 샘물까지 솟아올랐다. 사람이 기거할 수 있게 변한 것이다.



산성에는 왕궁과 병영(兵營), 초소, 장대(將臺), 주거지가 자리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주몽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터(王宮址)이다. 공식 이름은 ‘1호건축기지(一號建築基址)’. 길이 13.5m에 넓이 5m의 건물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7개의 기둥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에는 옥황관(玉皇觀)의 건물터가 나온다. 청나라 광서제 때 선양 태청궁감원의 리선선이 옥황상제를 모시는 전각을 지었으나 1966년에 철거되었단다. 오녀산성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건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잠시 후 오녀산성에서 가장 뛰어난 전망대라는 태극정(太極亭)에 이른다. 이곳에서 바라볼 경우 태극의 문양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 문양을 찾아 절벽의 끄트머리로 나가본다. 저 멀리 주몽이 건넜다는 비류수의 흐름이 'S'자를 반대로 뒤집어 놓은 듯한 형태를 띠고 있다. 완전한 태극이라 하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자의 중앙 바닥에 태극도(太極圖)를 그려놓았는가 하면, 정자 곁에는 태극의 문양을 만들어내는 풍경을 담은 사진까지 걸어두었다.






조금 더 걷자 '천지(天池)'라 불리는 작은 못이 길손을 맞는다. 이 못의 물은 말라본 일이 없다고 한다. 못은 동서로 긴 장방형인데 그 크기는 동서의 길이 12m 남북의 너비 5m, 깊이 2m아담하지만 성안에 있는 주민을 먹여 살리던 생명수였다. 못은 암반을 깎아낸 다음 변두리에 큼직큼직한 막돌을 쌓았으며 지면에 나타나는 부분에만은 네모나게 잘 다듬은 돌을 규모 있게 쌓았다. 못의 북쪽 벽 가운데에는 물이 빠져나가는 구멍을 만들었다고 한다.




못의 서남 모서리 밖에는 이 못과 연결된 조그마한 샘을 팠다. 이 샘 역시 못에 쓴 돌과 같은 잘 다듬은 돌로 쌓았다. 안에는 관우 동상이 세워져 있고, 동전을 던져 무사안녕을 기원하게 만들었다.



‘3호 대형건축기지(三號 大型建築基址)’거주건축군지(居住建築群址)’ 등 이후에 나오는 유적지들은 복원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구간을 지나 동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산성에서 가장 높은 점장대(點將臺)가 나온다. 점장대는 고구려 사람들이 진을 치고 전략을 짜던 곳으로 '집선대'라고도 하며, 오녀산 정상의 전망대 중에서 환룡호(桓龍湖)’를 바라보는 풍경이 가장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수백 미터의 절벽위에서 바라보는 호수는 용이 꿈틀대는 모양을 흡사하게 닮았다. 한마디로 절경이라는 얘기다.




S로 흐르는 훈강(渾江)이 그 흐름을 잠시 멈춘 곳이 바로 환룡호(桓龍湖)이다. 댐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호수를 만들었지만 득과 실은 분명하다. 중국인들에게는 득()이 될지 모르겠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크나큰 실()이라 하겠다. 인공호수 때문에 많은 고구려 유적이 수몰되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 호수가 구름과 잘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그림으로 변했다. 그래 지금은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는데 만족해보자.



점장대 근처에는 또 다른 매점이 들어서 있다.



조망을 즐기다가 또 다시 탐방을 이어간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잠시 걸으니 허공을 향해 툭 튀어나간 지점에 정자가 지어져 있다. 지도에 나오는 소점장대(小點將臺)가 아닐까 싶다. 아니 장대보다는 초소가 제격일 위치다.



정자에 오르면 환룡호가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다. 저 물속에는 고구려 시대와 그 이전 시대까지도 점쳐 볼 수 있는 수많은 피라미드 적석총과 고구려 성터들이 잠겨있다고 한다. 안타깝고 답답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네 땅도 지켜내지 못한 우리네 처지를 탓할 수밖에.



다시 서문으로 돌아와 하산을 시작한다. 오는 도중에 하늘이 한줄기로 보인다는 일선천(一線天)으로 내려가는 길을 만났지만 직접 걸어보지는 못했다. 앞에서 성큼성큼 걷고 있는 가이드의 걸음에 발맞추다보니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녀산성이 자랑하는 절경 가운데 하나를 놓쳐버렸다. 안타깝지만 이런 게 패키지여행의 특징이니 어쩌겠는가. 이런 불상사를 없애기 위해서는 동문으로 올랐다가 서문으로 내려가도록 코스를 짜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튼 서문에서 시작되는 하산은 십팔반(十八盤)‘을 이용했다. 계단이 아니어서 무릎 보호에도 좋을뿐더러, 주변 경관까지도 썩 뛰어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