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국 동북부 여행
여행일 : ‘18. 6. 25(월) - 6.29(금)
여행지 : 중국 대련, 단동, 집안, 통화, 환인
일 정 :
○ 6.25(월) : 대련(성해광장)
○ 6.26(화) : 단동(압록강 철교), 집안(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환도산성)
○ 6.27(수) : 통화(백두산 천지, 금강대협곡)
○ 6.28(목) : 환인(오녀산성), 단동(유람선 투어)
여행 둘째 날 오전 : 단동의 압록강 단교와 압록강 유람선 투어
특징 : ① 단동(丹東) : 압록강 어귀에서 상류 쪽으로 약 35㎞ 지점에 위치한 단동시는 면적 1만 4,918㎢, 인구 250만 명인 중국최대의 국경도시로 북한의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며 철교로 연결되어 있다. 옛 이름은 ’안동(安東)‘이었으나 1965년 단동으로 개명하였으며, 그 뜻은 ‘아침해가 뜨는 붉은도시’란 뜻이다. 단동의 역사는 16세기 후반 명나라가 현재 도시의 북동쪽 약 4㎞ 지점에다 진장바오(鎭江堡)라는 요새를 세운데서 시작된다. 단둥 주변지역은 19세기 중반까지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2~74년에 식민을 위해 개방하면서 산동성으로부터 주민을 옮겨오게 해 급속히 개발·확대되었으며, 1876년에 정규 행정체제를 갖춘 현청소재지가 되었다. 1907년 개항이 되었으며 이로부터 일본의 대륙진출 문호로서 발전하였다. 참고로 이곳은 1919년 11월에 일어났던 ‘대동단사건’의 현장이다.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이 고종황제의 둘째 왕자이며, 순종의 아우인 의친왕 이강(李堈)을 상해로 탈출시켜 망명정부의 구심점을 삼으려 했으나 아쉽게도 단동에서 붙잡혀 허사로 돌아갔던 사건이다.
② 압록강 단교(斷橋) : 단동과 신의주를 잇는 압록강 철교(鐵橋)는 북·중 물류 동맥이자 관광지이다. 철교는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위쪽에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가, 그 아래에 '끊어져버린 다리' 즉, 압록강 단교(斷橋)가 놓여 있다. 이들 다리는 일제의 한반도 및 중국 침략과 6·25의 상흔이 짙게 배어 있다. 이 가운데 ‘압록강 단교’는 1909년 5월 일본총독부가 철도사용을 목적으로 짓기 시작하여 1911년 10월에 완공하였다. 길이 944m에 넓이가 11m, 12연의 교량 중 신의주 쪽에서 9번째 중국 쪽에서 4번째가 개폐식(開閉式)으로 되어 90° 회전이 가능해서 선박들이 통과 할 수 있었다. 1950년 미군에 의해 폭파되어 신의주 쪽은 교각만이 단동 쪽은 철교와 교각이 그대로 남아있어 지금도 그 당시의 아팠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단동 외곽의 호텔을 출발한 버스가 20분쯤 달리더니 ‘압록강 단교’의 앞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이 다리는 일제침략기 일본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한국전쟁 때 미군이 중국 공산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지연시키기 위해 다리를 폭파하였는데, 전쟁 후에도 복구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어 지금은 관광 명소로 변해있다. 이 다리는 중국과 북한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품고 있는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에게 쫓겨 온 북한 인민군이 압록강까지 밀려나 완전히 수세에 몰렸을 때,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중국 공산군이 압록강을 넘어간 다리이기 때문이다.
▼ 단교는 관광지로 개방되어 입장료만 내면 누구나 끊어진 곳까지 걸어 들어갈 수 있다. 단교를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은 이 역사적인 압록강 단교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면서 전망대를 설치하는 등 시설물만 개·보수해 안보관광지로 활용하면서 관광객(특히 한국인)들을 끌어 모으는 고도의 상술을 부리고 있다. 다리가 끊어진 부근에는 총탄 맞은 흔적도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 입구에는 중국 공산군들이 압록강을 건너는 모습을 새긴 대형 기념물을 설치해 놓았다. 힘차게 진군하는 인민지원군을 형상화한 동상과 함께 '爲了和平(평화를 위하여)'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단동 개항 100주년에 맞춰 '평화의 옷'을 입혔다는 해석도 있으나, 침략자는 단호히 무찌르겠다는 의지가 더 강하다는 평이 대세(大勢)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수백 명의 군인들이 북한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인데 대단한 위용을 뽐내고 있다.
▼ 입구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무기도 전시해 놓았다. ‘압록강 '단교'는 어감이 주는 서늘함 그대로 역사적 의미가 중첩돼 있다. 끊어진 모습을 고스란히 살려놓고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중국을 보노라면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이 느껴진다. 단교는 전쟁의 단면이자 단절의 상징이다. 일본이 건설하고 미국이 부순 이 단교는 우리에게 분단의 다른 이름이다. 이 단절이 걷히는 때에 남북분단 또한 걷히게 될 것이다.
▼ 압록강을 건널 수 있는 시작점인 다리 위에 ‘압록강 단교(鸭绿江 断桥)’라고 한문으로 쓰여 있다. 그 옆에는 같은 문구의 빗돌(碑石)도 세워놓았다. ‘압록강 구교(鸭绿江 舊橋)’라고도 불리는 단교(断桥)는 1911년 개통한 압록강의 첫 번째 철교(鐵橋)이다. 일제는 한반도 수탈과 만주 침략을 위해 경의선을 개설하면서 의주 서쪽의 압록 강변 벌판에 신의주를 건설했다. 그 후 철교는 만주지역의 곡물과 삼림자원을 일본으로 실어내는 통로로 이용됐다. 길이 944.2m의 이 철교는 연인원 50만9300명이 투입되었을 정도로 당시로선 대역사였는데, 일제는 3년 만에 이를 뚝딱 해치웠다고 한다. 이후 이 철교는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 폭파됐다.
▼ 그동안 사진이나 글로만 접해오던 압록강(鴨綠江)이 눈앞에 펼쳐진다. 난생 처음을 접하다보니 여간 감격스럽지가 않다. 압록강은 물빛이 오리 머리와 같다고 하여 오리 압(鴨)자에 푸를 록(綠)자를 쓴다. 백두산 천지(天池) 부근의 장군봉(2108m) 남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혜산(惠山)·중강(中江)·만포(滿浦)·위원(渭原)·초산(楚山)·신의주(新義州)를 거쳐 용천군(龍川郡) 용암포(龍巖浦)의 초하류(稍下流)에서 황해로 유입되는 총 길이 925.502㎞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강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강은 일제 강점기에 정든 고향이나 부모·처자와 이별하고 만주나 북간도(北間島) 등으로 떠나는 유랑 이민과 애국지사들의 서러운 심정을 담은 여러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고, 광복 직후의 작품 속에서는 마음의 고향을 의미하는 뿌리의 상징으로 나타나왔다.
▼ ‘단교’의 위는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골고루 섞여있다. 그리고 다들 끊어진 부분을 향해 설레는 마음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그들이 속하는 나라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은 전혀 다른 역사의 현장이 된다. 한국인들은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혼쭐난 중국을 연상하는 반면에 중국인들은 대륙으로 들어오려는 침략자(미군)를 막아낸 구국 항쟁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중국은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 전쟁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 단교의 바로 위에는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가 놓여있다. 이 또한 일제가 세운 철교(鐵橋)이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중국-조선을 연결하는 철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1937년 경부선과 경의선을 복선화하면서 길이 943.3m의 압록강 철교를 추가로 건설했다. 1944년에 완공된 이 교량은 가운데에 철도(鐵道)를 놓고 양쪽에 차도(車道)를 깔았다. 지금은 이 철교를 통해 북·중 교역(交易) 물량의 80%가 처리된다고 한다. 북한경제를 사실상 지탱하는 다리라고 보면 되겠다.
▼ 좌우로 눈을 돌리면 단동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신의주와 철길로 연결되는 단동은 압록강 하류의 국경도시로 최근의 남북 화해무드에 편승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경의선 철도의 복원공사가 시작되면 대륙으로 향하는 관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시내에는 상호를 한국어로 적은 상점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 얼마쯤 걸었을까 다리 가운데에 들어앉은 톱니바퀴가 보인다. 다른 다리들에서는 보기 드문 시설이니 눈여겨 봐두어야 할 일이다. 원래 이 다리는 12개의 마디로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9번째 마디는 90℃ 회전이 가능하도록 해서 열면 십자(十字)가 되고 닫으면 일자(一字)가 되게 했다고 한다. 압록강을 다니는 배들이 드나드는 시간에 맞추어 개폐하도록 설계되었단다. 눈앞에 보이는 저 톱니바퀴가 바로 다리를 회전시키는 장치였던 것이다. 1934년 교량 보존상의 이유로 회전을 폐지했지만 110여 년 전에 이런 기술이 있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북한 쪽으로는 교각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유엔군의 폭격으로 인해 끊겼기 때문이다. 그러면 끊긴 이유에 대해서도 한번 짚고 넘어가 보자.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참전을 결정한다. 이에 따라 펑더화이(彭德懷)는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의 의용군 26만 대군을 이끌고 1950년 10월19일부터 압록강 철교 등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온다.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중공군의 위세를 꺾기 위해 미국 공군은 B-29 폭격기 편대를 출격시켜 압록강 철교를 정밀 폭격한다. 1950년 11월 8일 오전 9시였다. 그날 이후 압록강 철교는 '압록강 단교(斷橋)'로 변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있다.
▼ 끊어진 지점에는 ‘압록강(鴨綠江)’이라고 쓰인 커다란 빗돌을 두 개나 세워놓았다.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하도 많다보니 이를 배려하려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 길 건너 ‘조중우호교’를 통해 수십 대의 버스들이 줄지어 단동으로 들어오고 있다. 대북 경제제재(經濟制裁)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수십, 아니 수백 대의 컨테이너들이 끝임 없이 오갔다는 ‘북중교역(北中交易)’의 현장이었는데, 요즘은 관광객을 태운 버스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나보다. 저 다리에는 철로(鐵路)도 함께 놓여있다. 지난 번 김정은의 특별열차도 저길 통해 중국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저 다리는 경의선이 뚫리면 중국횡단철도(TCR)로 이어져 베이징을 거쳐 유럽까지 나아갈 통로이다. 부산에서 낙동강을 따라 서울로, 한강과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대동강 청천강을 지나 신의주에서 호흡을 고른 뒤 대륙으로 내달릴 철마(鐵馬), 그 영상을 떠올리며 가슴 뭉클해 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 둘러보고 나오는 길, 이곳도 역시 상가를 지나게 된다. 중국관광지에서의 통과의례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는 것도 시들해졌다. 하긴 구입해 볼만한 품목도 눈에 띄지 않았지만 말이다.
▼ 넷째 날 오후, 백두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구촌(河口村)에 들렀다. 유람선을 타고 북한의 국경지역을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하구촌은 조·중 국경인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청성군과 마주보고 있는 마을이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압록강에 있는 중요한 부두 가운데 하나였다는데 단동의 ‘압록강단교’에서 40㎞,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참! 이곳에도 눈길을 끄는 게 있었다. 상인들이 내민 ‘스크랩 북(scrap book)’이다. 북한 지도자의 초상이 있는 우표와 액면가가 다른 북한 지폐 몇 장이 빳빳한 새 돈으로 들어있었다. 남의 나라 지폐를 기념품으로 파는 행위라서 썩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 건물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유람선 선착장이 나온다. 매표소 옆에 유람선을 타고 돌아보게 될 지점들을 표기해 놓은 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그래야 배를 타고가면서 보게 될 건물들의 내력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 배가 출발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것이 ‘하구단교(河口断桥)’이다. 북한 쪽에서는 ‘청성교(淸城橋)’라고 부르는데 이 다리 역시 6.25 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졌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으로 한국전쟁에 나간 중국인민지원군 제39군, 제40군과 지원군 제3병단과 부분 부대가 바로 이 다리를 건넜다.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이었던 팽덕회장군과 모택동주석의 맏아들 모안영도 청성교를 건너 전쟁터로 나갔단다. 전쟁기간 동안 대량의 군용물자들이 청성교를 건넜음은 물론이다. 그런 다리를 미군이 그냥 놓아두었을 리가 없다. 1951년 3월 29일 미군은 6차례에 걸쳐 30대의 전투기를 투입해 청성교를 폭격해버렸다. 미군전투기의 폭격에 청성교는 중간부분 200m가 끊어지면서 3개의 교각이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 이 단교의 중국 쪽은 단동시 관전현 하구(河口)이고 북한 쪽은 청성군이다. 그래서 이 교량이 건설된 후 ‘청성교(淸城橋)’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다리는 당시 일제가 중국의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건설(1942)했는데 압록강에서 가장 큰 도로교(公路桥)였단다. 건설은 조선과 위만주정부가 공동으로 맡았다고 한다. 22개의 교각이 떠받히고 있는 이 다리의 총 길이는 709.12m이며 넓이 6m에 높이는 25m이었다.
▼ 강의 이쪽과 저쪽,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도 그 풍경은 완전히 다르다. 중국의 산에는 나무가 무성한데 반해 북한쪽 산은 온통 민둥산인 것이다. 밭을 일구려고 개간을 한 것인지 아니면 베어다가 화목으로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연탄이 보급되기 전의 남한 풍경이 저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북한 쪽 산들은 거의가 경작지로 만들어져 있다. 아직은 이른 철이라서 뭘 심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냉이가 아닐까 싶다. 척박한 땅에 어울리는 작물은 옥수수뿐일 테니까 말이다.
▼ 그리고 잠시 후 멀리 보이던 북쪽 산하 나지막한 능선과 기와집 마을이 서서히 가까워진다. 규모가 제법 큰 마을도 보인다. 저 부근이 청성군이라고 하더니 군청소재지일지도 모르겠다.
▼ 유람선은 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관광객에게 구경 잘하라는 듯 신의주 쪽 강변으로 바짝 붙여 서서히 몰아주기도 한다. 덕분에 압록 강변을 따라 드문드문 설치된 국경초소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들도 보인다. 대부분의 주택들이 거의 같은 외형을 갖고 있는 게 눈길을 끈다. 전체적으로는 남한의 70년대 풍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개방에 더딘 나라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 먼지를 폴폴 날리며 달리고 있는 트럭도 보인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북한도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니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교통수단을 다 갖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 하구촌으로 되돌아오는 뱃길, 조금은 마음이 여유로워졌던지 우리가 지금 압록강을 오가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 압록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아닐까 싶다. 조선의 베스트셀러 작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그의 나이 44세에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 연경(지금의 북경)에 다녀오면서 쓴 기행문이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이렇게 물살이 거센 것은 대체로 압록강이 먼 곳에서 발원하는 까닭이다’라고 하면서 ‘장마철인지라, 나룻가에 배 대는 곳은 찾을 수도 없으며, 강 중류의 모래톱마저도 흔적이 없어서 사공이 조금만 실수를 한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정도이다.’라고 적었다.
▼ 온전히 개방되지 않은 나라는 국경 지역의 일상이 관광 상품이 된다. 유람선에 탄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북한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이유이다. 그리고 북한 쪽에 사람이 지나가면 사람을 보며, 오토바이나 자전거가 지나가면 또 그것들을 보며 신기해한다. 심지어는 밭에서 일을 하는 아낙네들까지도 구경거리가 됐다.
▼ 첫 날과 마지막 날 저녁을 머물렀던 단동의 동항호텔(DongGang Hotel)
객실이나 화장실 등 시설이 넓고 깨끗한 것이 여느 일류 호텔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다만 욕실이 따로 마련되지 않았다는 게 조금 불편하다면 불편하다고나 할까. 대신 세면도구는 따로 필요하지가 않다. 비누와 샴푸는 물론이고 칫솔에 치약, 그리고 헤어드라이기까지 비치해 놓았다. 와이파이도 방에서 이용할 수 있어 편리했다. 그러나 아침 식사는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았다. 대부분이 중국 현지식이라서 아메리칸 스타일 조식에 익숙해진 내 입맛에 영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화의 호텔에서도 이런 고통을 겪었으니 중국 동북부 지방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 에필로그(epilogue), 단동에서 집안으로 가는 길은 오른편에 압록강을 끼고 이어진다. 널따란 강에 크고 작은 섬들이 수없이 떠있는 풍경은 흡사 바다를 연상시킨다. 차창 밖의 풍경이 바뀔 때마다 비단섬과 황금평, 위화도 등 가이드의 입을 통해 낯익은 이름들이 흘러나온다. 북한에 속해있는 황금평과 비단섬은 단동에 붙어 있는 것 같이 보여 얼핏 중국 땅처럼 보인다. 하지만 62년까지만 해도 단동과 황금평 사이에 압록강이 흘렀다고 한다. 이후 50년 세월에 퇴적물이 쌓여 1m정도로 좁아졌다는 것이다. 2011년 북한과 중국이 황금평에서 공동개발 사업 착공식을 갖기고 했으나 장성택의 처형으로 출입국사무소만 만들어진 채로 방치되고 있단다. ‘위화도’는 역사의 현장이다. 고려 말기 요동을 정벌하라는 최영장군의 명을 받은 이성계가 회군(回軍)을 결정했던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에 '가람 가에 자거늘 밀물이 사흘이로되 나가서 잠겼다. 섬 안에 자실 제 홍수가 사흘이로되 비어서 잠겼다'의 섬이 바로 '위화도'이다. 4불가론을 주창하며 회군한 이성계는 끝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다. 나라를 새로 열면서 새로운 제도와 문물을 도입한 것은 바람직하다 하겠으나, 당시 주인 없는 땅을 찾지 못했다는 아쉬움까지 떨쳐버리지는 못하겠다. 참고로 압록강 사이에 있는 대부분의 큰 섬들은 북한에 속해 있다고 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북·중 국경의 451개 섬 중에서 북한령은 264개, 중국령은 187개라고 했다. 면적으로 보면 북한이 85.5%를 차지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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