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국 사천성(四川省)
여행일 : ‘16. 9. 24(토) - 29(목)
일 정 :
○ 9.25(일) : 도강언(都江堰), 접계해자(疊溪垓字), 송판고성(松潘古城), 모니구(牟尼溝)
○ 9.26(월) : 구채구(九寨沟)
○ 9.27(화) : 황룡(黃龍)
○ 9.28(수) : 청성산(靑城山), 무후사(武侯祠), 금리거리(锦里古街), 천부촉운(天付蜀韻)쇼
여행 첫째 날 오후, 송판고성(松潘古成)
특징 : ‘국가지정 역사문화명성(歷史文化名城)’인 송판고성(松潘古城)은 진(秦)나라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가 감숙성과 청해성, 산서성 일대를 연결하며 통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당(唐)나라 때 송판은 토번국과의 국경을 이루던 곳이다. 당시 번성했던 토번의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던 당나라는 태종의 양녀 문성공주를 토번왕에게 시집보낸다. 토번을 포용하려는 유화정책의 일환이다. 당시의 역사를 말해주듯 성문 앞에 토번국왕과 문성공주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아무튼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명(明) 왕조 홍무제때 만들어진 것으로 성내에는 이슬람교 사찰 청진사(淸眞寺)와 고송교(古松橋), 영월교(映月橋), 7층루(7層樓) 등 문화적 의미가 풍부한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 꿈의 여행지라는 구채구(九寨沟)로 가는 길, 모질고 험한 협곡(峽谷)을 따라 왔다갔다 용틀임을 하며 고도(高度)를 높여가던 도로가 끝내 고원(高原)에 올라선다. 그리고 그곳에서 송판(松潘)이라는 작은 도시 하나를 만난다. 지리적으로 평원(平原)과 고원의 접경지대에 놓여 있는 읍(邑)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사천성 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송판(松潘)은 구채구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종의 관문과 같은 곳이다. 말 트레킹(horse tracking)의 천국이란 명성에 걸맞게 매년 트레킹 시즌이면 전 세계에서 몰려온 여행객들로 붐비는 제법 유명한 곳이기도 하지만,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그저 구채구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 가는 중간 기착지(寄着地)에 불과한 작은 마을일 따름이다. 이번 여행일정도 역시 그렇게 짜져 있었던 모양이다. 차창 밖으로 성벽이나 구경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게 못마땅해 투덜거렸더니 가이드가 들었던 모양이다. 30분 정도의 시간을 줄 테니 성문 근처라도 한 바퀴 둘러보란다.
▼ 옛 시가지로 연결되는 성문(城門)의 맞은편은 신시가지이다. 우리나라의 읍(邑) 정도 규모가 아닐까 싶다. 시가지 또한 산간오지(山間奧地) 답지 않게 상당히 번화한 편이다. 하긴 진나라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가 감숙성, 청해성, 산서성 일대를 연결하며 통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인데 어련할까 싶다.
▼ 성문으로 향하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성문은 '송주(松州)'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송판의 옛 이름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마을은 옛날부터 사천성의 변방을 지키던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천서의문' 즉 ‘사천 북쪽 문’이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 짐칸을 매달은 자전거가 성문을 빠져나오는 것이 보인다. 걸어서 돌아다니는 게 힘겨운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라 할 수 있겠다. 구시가지에 차량통행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택시 대용으로 운행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전거 택시’인 셈이다.
▼ 성문 주변은 온통 울긋불긋한 치장들을 해 놓았다. 영구시설로 보이지 않는 것이 무슨 행사라도 준비하고 있나 보다.
▼ 성문 앞에는 ‘송첸감포(松贊干布, Songtsen Gampo)왕’과 문성공주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7세기 초 노예제를 바탕으로 봉건영주들이 난무하던 티베트에 불세출의 민족영웅 송첸감포왕이 출현했다. 냉철하고 영민하며 비전(vision)을 지닌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티베트 전역을 정복, 티베트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당시 티베트와 인접한 당나라는 태종에 의해 국가의 기틀이 다져지면서 세계 대제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통일의 과업을 완수한 송첸감포왕은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통치제도를 확립하려 했다. 이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 태종에게 정중히 구혼을 요청하지만 당의 지방관은 사신의 방문조차 인정치 않고 송주에 억류시켰다. 분노한 송첸감포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송주에 내려와 당나라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당 수도인 장안까지 위협했다. 이에 당 태종은 여러 차례 대군을 파견하지만 당군은 용맹한 티베트군에게 줄곧 대패를 당했다. 강대한 티베트의 역량에 놀란 당 태종은 회유책으로 애지중지하던 수양딸 문성공주를 시집보냈고, 송첸감포왕은 직접 캄(khams)지역 고원까지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이 세기(世紀)의 결혼을 통해서 티베트에는 불교가 전래되어 라마불교가 창시되었고, 제지기술과 문자창달 등 티베트만의 독자적인 문화가 꽃피게 된다.
▼ 성문의 양쪽에 기마상(騎馬像)이 세워져 있다. 의젓한 것이 장군쯤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삶이 그만큼 치열했다는 증거일 테고 말이다. 아무튼 송판은 한족과 티베트인이 서로 뺏고 뺏기는 전쟁을 되풀이한 접경 지역이었다. 군사적 요충지였을 게 당연하다. 송판 곳곳에 남아있는 옛 성곽(城廓)들이 그 증거일 것이다.
▼ 성 안에는 이덕유(李德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당(唐)의 헌종(穆宗)과 문종(文宗) 때 재상을 지냈던 이덕유는 이종민(李宗闵)·우승유(牛僧孺)와 벌인 ‘우이당쟁(牛李党争)’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당파 싸움에 이력이 붙은 사람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가 한때 상대 당파에 밀려 서천절도사(西川节度使)로 나와 있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때 벌어진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모양이다. 당시 이곳은 촉서(蜀西)의 문으로 공협(邛崃)의 산 입구이며 토번(吐蕃)과 당이 쟁탈전을 벌이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토번의 유주 수장 실달모(悉怛谋)가 당나라에 투항을 요청해왔다. 이덕유는 이에 더하여 토번에 대한 진공(進攻)까지 주장했다. 하지만 정적(政敵)이었던 우승유의 반대로 진공은커녕 토번에 유주성을 돌려주고 실달모 이하 토번의 항장과 항졸들까지 토번으로 돌려보내 죽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나중에 잘잘못이 가려져 재상(宰相)으로 복귀되었지만 당나라에서 볼 때에는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동상은 철저하게 중국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토번의 입장에서는 이덕유가 별로였을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하긴 ‘교묘하고 치밀한 티베트 말살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하던 누군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정도는 애교의 수준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 성안에는 소공원(小公園)을 만들어 놓았다. 전체적인 조경(造景)은 인근에서 출토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자연석을 이용했다. 가장 큰 바위에다 ‘송주(松州)’라는 지명을 적어놓은 것으로 보아 송주의 산하(山河)를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 주변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동상(銅像)들을 배치했다.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말(馬)이다. 이곳 사람들과 떼려야 뗄 수가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민족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반갑게 악수를 나누는가 하면, 앉아서 담소(談笑)를 즐기고 있는 광경도 보인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이민족(異民族)들끼리의 화합과 공생(共生)을 나타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 이곳 송판에는 한족(汉族)과 장족(藏族), 회족(回族), 강족(羌族) 등 크게 네 개의 민족이 모여 살고 있다. 그들은 생김새가 서로 다른 것은 물론, 입는 옷도 다르며, 언어와 종교, 거기다 문화와 풍습까지도 다르다. 하지만 큰 분쟁 없이 잘 살아가고 있단다.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가운데 서로를 존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안에 있는 소공원은 이런 특징을 표현해 놓은 것이 아닐까 싶다.
▼ 성(城) 안의 구시가지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옛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성의 안팎을 오가는 것이 마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듯 시공간을 넘나드는 느낌이다. 제법 번창하던 밖과는 너무 대조적인 풍경으로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 옛 건물들이라고 해서 상점이 없을 리가 없다. 특히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겠는가. 거리에는 여러 종류의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은방(銀房)이다. 이곳 송판이 금은세공(金銀細工)이 발달한 지방인지도 모르겠다.
▼ 간판에 ‘모우육(牦牛肉)’이라는 한자가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야크(yak)고기 등 야크와 연관이 있는 상품들을 판매하는 곳인가 보다. 천정에 걸려있는 것은 훈제(燻製)된 야크고기일 것이고 말이다.
▼ 송판의 구시가지는 높다란 성벽(城壁)으로 둘러싸여 있다. 당나라 때부터 쌓기 시작한 성벽이라고 한다. ’송판현지(松潘县志)’에 따르면 명나라(1397년) 시기 주원장이 이곳에 군사를 파견하여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당시 이곳을 지키던 장군이 성벽을 쌓을 방법을 고민하다가 하나의 묘안(妙案)을 생각해 내었단다.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찹쌀죽과 석회, 그리고 오동나무와 흙을 원료로 해서 벽돌을 구워 만들었는데 잘 부식되지 않고 아주 든든한 것이 특징이란다. 성벽을 둘러보다 보면 지금도 그때 만들었던 벽돌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참고로 이곳 송판의 주변의 원주민들은 지금도 그 방법으로 벽돌을 굽는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그 효능을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가다보면 길옆의 벽돌 움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단다.
▼ 송판으로 오는 길에 들렀던 접계해자(疊溪垓字). 기나긴 여행길에 쉬어가기 딱 좋은 곳에 위치한 탓에, 모든 관광버스들이 꼭 들렀다 가는 곳이다. 잠깐 쉬어갈 수 있도록 휴게소 또한 잘 만들어져 있다.
▼ 휴게소에서 도로를 건너면 호수를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 이르면 하얀색 야크(yak)가 가장 먼저 관광객을 맞이한다. 하얀색인데, 야크 중에서도 하얀색은 희귀종으로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아무튼 야크 주인에게 10위안을 주면 야크와 함께 기념촬영을 할 수 있다. 무턱대고 셔터를 눌렀다간 자칫 봉변을 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 지난 1993년 이곳은 대지진(大地震)이 지나갔다. 해발 2,000m인 이곳도 대지진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당시 다섯 개 마을 전체가 100m 이상 땅속으로 가라앉았는데, 그 위에 물이 고이면서 만들어진 것이 접계해자(疊溪垓字)라는 커다란 호수(湖水)이다. 당시에 많은 피해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세월은 그런 아픔까지도 묻어버리는 모양이다. 고요하고 광활한 호수와 웅장한 산세가 만들어내는 조화가 신비롭기만 한 것을 보면 말이다.
▼ 구체구에서 이틀 밤을 머물렀던 ‘구체구메모리호텔(Jiuzhai Memory Hot Spring Hotel)’, 준 5성급으로 4층 건물에 객실도 88개나 되는 등 규모도 꽤 큰 호텔이다. 객실 등의 시설 또한 깔끔했음은 물론이다. 세면도구에 헤어드라이기까지 갖추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료로 와이파이(WiFi)를 쓸 수 있었음에도 상태가 불안정해서 연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이곳뿐만이 아니라 성도(청두)에서도 와이파이는 터지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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