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국 사천성(四川省)
여행일 : ‘16. 9. 24(토) - 29(목)
일 정 :
○ 9.25(일) : 도강언(都江堰), 접계해자(疊溪垓字), 송판고성(松潘古城), 모니구(牟尼溝)
○ 9.26(월) : 구채구(九寨沟)
○ 9.27(화) : 황룡(黃龍)
○ 9.28(수) : 청성산(靑城山), 무후사(武侯祠), 금리거리(锦里古街), 천부촉운(天付蜀韻)쇼
여행 넷째 날 오후, 무후사(武侯祠)
특징 : 찬란한 역사를 뽐내는 성도(成都, 청두)는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옛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중국에서 유일한 도시이다. 삼국지의 무대 중 하나였던 촉(蜀)나라의 수도로 유비, 관우, 장비 등 삼국지 주인공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적 문화 콘텐츠(content)를 직접 보여주는 청두의 명소가 바로 '무후사(武侯祠)'이다. 공식 명칭은 한소열묘(漢昭烈墓 : 惠陵)이니 참조한다.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祠堂)인 무후사는 삼국지에 매료된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꼭 들러봐야 하는 곳이다. 제갈량을 기리는 무후사는 중국 전역(全域)에 있지만, 유비의 묘(墓)인 혜릉(惠陵)은 청두 무후사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혜릉 주변을 두르고 있는 원형의 담이 인상적인데, 둥글게 설계된 벽에 정확히 들어맞도록 벽돌을 하나하나 측량해 진흙을 구웠다고 한다. 담장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옛 사람들의 지혜와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961년, 무후사는 중국 중점문화재 업체로 선정, 1984년 박물관으로 되었으며 2008년, 중국 1급 박물관으로 선정되었다.
▼ 관광버스는 우릴 무후사(武侯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다 내려놓는다. 무후사의 정문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란다. 하긴 우리가 지금 서있는 곳이 중국일진데, 이 정도는 되어야 유명관광지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튼 무후사의 공식명칭은 한소열묘(漢昭烈墓)이다. 촉나라를 세운 유비의 무덤인 혜릉(惠陵)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곳을 무후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유비와 함께 합장된 다른 한 사람을 기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무후(武侯)라는 호를 가진 제갈공명이다. 무후사는 중국 전역을 통틀어 유일하게 임금과 신하를 함께 합장한 형태의 묘역(墓域)이다. ‘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서기 223년, 유비가 타계한 후 그의 묘지를 성도에 두고 혜릉(惠陵)이라 했다. 당시의 제도에 의하면 무덤이 있는 곳에는 필히 사당(祠堂)이 있어야 했기에 같은 시기 한소열묘가 세워졌다. 그 뒤 명(明)나라 초반에 무후사를 개축할 때 무후사와 유비의 무덤, 한소열묘를 하나로 합쳐 임금과 신하를 함께 공양하는 사당을 만들어 오늘날에 이른다.
▼ 엄숙해 보이는 붉은 기둥의 거대한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중국 역사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집중적으로 모신 사당답게 입구부터 기운이 범상치 않다. 무후사(武侯祠)는 촉한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기리고자 만든 사당이다. 현재 건물은 1672년 청(淸)나라 초기에 재건된 것이다. 중국에는 무후사가 이곳 말고도 여러 곳에 있다. 그럼에도 이곳이 유명한 것은 무후사 내에 유비를 모시는 유비전(劉備殿)을 따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경내로 들어서면 보행로를 가운데에 두고 좌우 양쪽에 두 채의 비각(碑閣)이 지어져 있다. 정면에 보이는 문은 한소열묘의 정문이랄 수 있는 이문(二門)이다. ‘명량천고(明良千古)’란 편액이 걸려 있는 것으로 유명한 문이다. ‘명군량신 유전천고(明君良臣 流传千古)’, 즉 ‘명군과 어진 신하가 만나 오래도록 모범이 됐다’는 말을 줄인 것인데 첫 글자인 ‘명(明)’자가 ‘날 일(日)’ 변에 ‘달 월(月)’이 아닌 ‘눈 목(目)’ 변에 ‘달 월(月)’ 자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유비가 인재를 뽑아 쓰는 눈이 탁월했다는 뜻을 품고 있단다.
▼ 왼편에 보이는 비각 안에 들어있는 것은 ‘명비(明碑)’라고 한다. 명(明)나라 때인 1547년에 건립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장시철(張時撤)이 문장을 짓고, 고등(高登)이 비석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 그 반대편에는 당(唐)나라 때인 809년에 건립되었다는 ‘당비(唐碑)’가 있다. 공명의 업적을 기리는 ‘촉한 재상 제갈량 무후사당비(蜀漢 宰相 諸葛亮 武侯祠堂碑)‘인데 글과 서예, 그리고 조각 등, 세 가지가 절묘함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삼절비(三绝碑)‘라고도 불린다. 당나라의 대문장가(大文章家)였던 승상(丞相) 배도(裵度)가 글을 짓고, 명필(名筆) 유공탁(柳公琸)이 글을 썼으며, 최고의 석각대가(石刻大家) 노건(魯建)이 각문(刻文)을 했다.
▼ 비(碑)에는 제갈공명의 생애가 적혀 있다고 한다. 내용은 제갈량이 마속의 목을 벨 때 마속이 죽어도 한이 없다고 목을 내놓은 일과 제갈량에 의해 유배된 요립이 제갈량의 부고를 듣고 통곡했다는 일을 적었다. 또한 양각(陽刻)과 음각으로 된 비석의 옆면에는 당나라와 송(宋)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의 글이 새겨져 있다.
▼ 정문이랄 수 있는 이문(二門)을 지나면 한소열묘(漢昭烈墓), 즉 유비전(劉備殿)이다. 유비(劉備)를 모시는 본전(本殿)을 가운데에다 두고 양 옆과 앞으로 긴 회랑(回廊)을 배치한 형태이다. 우리가 잘 아는 사자성어 도원결의(桃園結義)와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주인공인 유비의 사당 앞에선 사람들이 향을 들고 합장한 채 절하고 있다. 마치 종교의식의 한 장면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동행한 가이드의 말로는 ’중국인들에게 제갈공명과 유비는 신적 존재‘라고 한다.
▼ 본전은 ’업소고광(業紹高光)‘이라고 적힌 편액을 달고 있다. 한(漢)의 고조 유방(劉邦)과 광무제 유수(劉秀)의 제업(帝業)을 이어 발전시킨다는 뜻이란다. 촉나라를 촉한(蜀漢)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 본전(本殿)의 중앙, 즉 유비전(昭烈殿)의 전각 안에는 황제의 면류관을 쓰고 황금색 곤룡포를 입은 유비 상이 안치되어 있다. 오늘날 현존하는 무후사 내 모든 인물상은 청나라 때 찰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인물상이 그러하듯 유비 상은 긴 귀와 수염을 강조하고 후덕한 얼굴 표정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 유비상 왼쪽에는 유비의 손자인 유심(劉諶)의 상이 있다. 제갈량이 죽고 위나라의 대군이 침범하자, 유선은 목숨이 아까워 옥새를 들고 나가 항복하려 했다. 유심은 이를 극렬히 반대하고 청두의 군사를 모두 모아 결사항전하려 했다. 유선과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심은 유비묘를 찾아와 대성통곡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처자식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자결함으로써 촉한 남아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특이한 점은 유비의 오른쪽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원래 유비전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유선의 좌상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헌데 한 해가 채 넘어가기 전에 누군가 유선상을 훼손해 버렸다. 지방관청은 바로 유선상을 복원했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다시 파괴되었다. 한동안 새로 만들고 없애지기를 반복하다가, 청나라에 들어와 중건할 때 유선 상을 아예 만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천신만고 끝에 이룬 왕업을 손쉽게 내다버린 유선에 대한 성도(청두) 사람들의 반감이 어떠한지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지금도 유선 상 자리에는 커다란 나무뿌리 하나만 쓸쓸히 놓여 있다. 유약하고 무능했던 유선을 꾸짖는 듯한 후대인의 회초리처럼 냉엄하다.
▼ 유비상이 있는 대청의 양 옆 방에는 관우와 장비의 상이 배치되어 있다.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에 모여 같은 장소, 같은 날에 죽을 것을 결의했다. 비록 삼형제는 한시에 죽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무후사 유비전 아래 모여 대업 성취를 위해 분투하는 듯하다. 관우와 장비 상 바로 앞에는 그들의 아들과 손자 상도 안치되어 있다. 생동감이 느껴지는 토우(土偶)들에서 서로 판이했던 관우와 장비의 성격, 그들의 용맹한 성격 등이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황제의 복장을 하고 있는 관우의 상이 눈길을 끈다. 무신(武神)으로 추앙을 받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한 나라에 황제가 두 명이라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 싶다.
▼ 묘역에 들어오는 문의 옆으로 난 회랑(回廊)의 벽면을 따라 길게 붙여져 있는 석판(石板)이 눈에 들어온다.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가 새겨져 있는데 글씨는 악비(岳飛)가 직접 썼다고 한다. 출사표는 제갈공명이 촉의 2대 황제 유선에게 위나라 징벌을 위해 진군할 것임을 나타내는 글이다.
▼ 출사표의 양 옆 회랑(回廊)에는 청나라 때 만들어진 실물크기의 토우(土偶)들이 문신(文臣)과 무신으로 나뉘어 서열 순으로 공봉(供奉)되어 있다. 오른편은 방통(龐統)을 대표로 하는 촉한 문신들의 조각상이고, 왼편에는 조운(趙雲)을 대표로 하는 무신들 조각상이 있다. 마치 촉한을 대표하는 28명의 문·무신(文·武臣)들이 나란히 서서 안쪽 중앙에 있는 유비의 사당을 지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참고로 조각상들 옆에는 그 인물의 생애를 적어놓았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을 듯 싶다.
▼ 유비의 사당 뒤쪽에 제갈공명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왕인 유비의 사당에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후대의 사람들 눈에는 촉의 왕인 유비보다도 인덕과 지혜를 갖춘 전설의 전략가가 더 위대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촉한(蜀漢)의 재상(宰相)이었던 제갈량(諸葛亮)은 서기 234년에 오늘날의 섬서(陝西) 보계(寶鷄)에서 54살을 일기로 타계했다. ‘무향후(武鄕侯)’란 생전의 작위(爵位)는 그의 사후 ‘충무후(忠武侯)’로 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사당의 이름도 자연스레 ‘무후사(武侯寺)’가 되었다. 최초의 무후사는 제갈량이 타계한 장소인 섬서에 세워졌다. 하지만 오늘날 가장 영향력이 큰 무후사는 서진(西晉) 초반인 260년대에 신축한 이곳 성도의 무후사이다. 이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양된 사당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보여주는 삼국유적박물관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현판에 새겨진 명수우주(名垂宇宙)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이름이 온 우주에 널리 빛난다.’라는 뜻으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가 무후사에 들러 제갈공명을 기리기 위해 쓴 시의 한 대목이라고 한다. 눈길을 끄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지붕 위에 올라앉은 미륵불(彌勒佛)과 신선상(神仙像)이다.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이 공존하는 것으로 중국에서 유일하단다.
▼ 무후사 본전에는 제갈량(諸葛亮) 조손(祖孫) 3대의 조각상이 공양되어 있는데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손에 부채를 잡은 제갈량의 조각상에는 금박칠을 했다. 조각상 앞에 있는 북(鼓)은 제갈량이 싸움터로 갈 때 가지고 다녔다고 해서 ‘제갈고(諸葛鼓)’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귀중한 역사문화재로 취급되고 있다니 한번쯤 더 바라봐도 되겠다.
▼ 무후사의 뒤쪽에는 ‘삼의묘(三義廟)’가 있다. 맨 뒤쪽에 배치되어 있는 셈이다. ‘의중도원(義重桃園)’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전각(殿閣)의 안에는 유비와 관우, 장비를 새긴 거대한 상(像)이 모셔져 있다. 유비는 인자한 모습으로, 장비와 관우는 힘센 기운이 있는 장군으로 묘사됐다. 특히 얼굴을 검게 하고 눈을 부릅뜨게 만든 장비의 상이 눈길을 끈다. 세 사람에 대한 소개의 글도 적혀 있으나 읽어보지는 않기로 한다. 삼국지를 서너 번이나 읽었으니 더 이상 알아낼 게 없을 것 같아서이다. 참고로 삼의묘는 청나라 초반에 신축하였으나, 1784년에 화재로 불탔던 것을 1787년에 다시 지었고, 1842년의 보수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건물은 청나라 도광(道光)년간인 1843년의 것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제독가(堤督街)에 위치해 있었다는 점이다. 1998년 도시 건설의 수요에 따라 무후사의 경내로 옮겨왔단다.
▼ 삼의묘는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추모하고자 지은 사당이다. 유비와 관우, 장비는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형제지의(兄弟之誼)를 맺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장소를 골랐다고 하기 보다는 어쩌다보니 복숭아나무 아래에 자리 잡았지 않나 싶다. 이곳 사천성에는 원래부터 복숭아나무가 많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열매가 나는데 매년 봄이 되면 복숭아꽃으로 장관을 이룬단다. 이 고장의 복숭아는 중국의 한무제(漢武帝)가 특히 즐겼다고 한다. 또한 도교(道敎)에서 최고의 여신으로 받들어지는 서왕모(西王母)가 잘 익은 복숭아 30개를 가져왔는데 동박삭(東方朔)이 몰래 3개를 훔쳐 먹어 천 년을 더 살 수 있었다는 얘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묘당의 밖은 도원결의부터 유비의 죽음까지 삼형제와 관련된 다양한 고사를 벽화로 전시하여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 공명원(孔明苑)으로 향한다. 제갈량의 일생을 전시한 곳이다. 하지만 안은 구경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문이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 공명원 옆으로 난 원형의 문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별천지를 만난다. 기기묘묘한 수석(壽石)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가 하면, 그 사이사이에는 오만가지의 형태로 만들어진 분재(盆栽)들이 널려있다. 하나는 조물주가 빚어낸 천연의 작품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의 손길에 의해 가공된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그 둘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극한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눈의 호사(豪奢)가 이루어진다는 얘기이다.
▼ 분재와 수석의 기묘함에 푹 빠져 있다가 혜릉으로 향한다. 붉은 담벼락을 뚫어 만든 예쁘장한 원형의 문(門)이다. 문을 통과하면 붉은 담벼락 사이로 난 좁은 길이 나타난다. 포토존(photo zone)이라며 가이드가 적극 추천하는 곳이다. 그의 말마따나 대칭을 이루는 구도가 사진 찍기에 안성맞춤이다. 아무튼 이 길은 무후사의 숨은 진주라 할 수 있다. 수백 년 된 대나무 숲 사이에 닦여진 길은 1980년대 초반에 닦여졌다. 그리 길지 않은 연륜을 지녔지만 회색 돌바닥, 붉은 벽, 푸른 대나무 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걷는 이의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이 길은 청두를 소개하는 선전 광고에도 자주 등장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 담벼락을 따라가면 혜릉(惠陵)이라 부르는 유비의 묘(墓)가 나온다. 이 능묘는 제갈량이 유비를 위해 선택한 자리라고 한다. 강희제가 직접 묘비를 썼다는 ‘한소열황제지릉(漢昭烈皇帝之陵)’의 무덤에는 유비와 두 부인이 합장되어 있다. 능묘는 조벽과 문, 신도, 침전 등 건물로 구성되어 있고 동쪽의 무후사와 붉은 담벽의 좁은 길로 연결되어 있다. 능의 입구에는 ‘천추늠연(千秋凜然)’이란 편액이 달려있다. ‘영웅의 기세는 천년이 지나도 늠름하다’는 뜻으로 유비의 기품을 나타내는 문구가 아닐까 싶다.
▼ 촉한의 1대 황제 유비는 223년 4월, 63세로 백제성(白帝城)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도읍(都邑)이었던 이곳 성도로 옮겨 이장(移葬)됐다. 시호는 ‘소열황제(昭烈皇帝)’, 능묘는 혜능(惠陵)이다. 무덤의 둘레는 180m, 무덤의 위는 나무를 심어 도굴을 방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에 기세를 떨친 황제의 능묘 치고는 그 규모가 비교적 작은 편이다. 그것이 죽기 전 유비의 유지였다니, 후대의 존경과 사랑을 길이길이 받을 만하다.
▼ 혜능(惠陵)의 안으로 들면 묘(墓)를 두르고 있는 원형의 담이 인상적이다. 작은 벽돌을 촘촘하게 원형으로 두른 담은 지난 ‘사천대지진’ 때도 무사했다고 한다. 선대의 기술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둥글게 설계된 벽에 정확히 들어맞도록 측량해 진흙을 굽고, 벽돌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올렸단다. 벽돌을 유심히 살펴보면 각기 다른 이름이 드문드문 새겨져 있는 게 보인다. 벽공(甓工)의 이름이란다. 각자 작업한 부분에 이름을 새긴 것은 벽이 허물어졌을 때 벽공은 물론 그의 가족들의 목숨을 담보로 잡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가만히 이름을 쓰다듬어본다. 1700여 년 전에 이 벽돌에 이름을 새기던 벽공이 느꼈을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장인의 정신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진다.
▼ 유비의 묘는 한 번도 도굴되지 않은 황제의 능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로 재미있는 두 설화(說話)가 전해 내려온다. 첫째는 서민적이었던 유비의 평소 생활에 비추어 무덤에 금은보화를 묻었을 리가 없다는 추측 때문이다. 실제 위나라나 오나라에 비해 국력이 뒤처졌던 촉한은 유비 사후에 화려한 능원 건설을 엄두도 못 냈다. 또 다른 이유는 묘를 도굴하려다 비명횡사한 도굴꾼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도굴을 꺼려했다는 것이다. 청두 민중들 사이에는 유비묘 위에 자란 나무를 꺾었다고 해서 후손이 팔 병신이 됐거나 무덤 풀을 뜯어먹은 양이 돌연 죽었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유비묘를 둘러싼 무서운 전설이 도굴꾼들의 의욕을 상실케 함으로써 17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전되어 왔다는 것이다.
▼ 혜릉을 빠져나오면 삼국문화진열실(三國文化陳烈室)이다. 무후사 경내에 있는 삼국문화의 전시실 겸 박물관으로 이곳 성도를 도읍(都邑)으로 삼았던 촉(蜀)나라 외에도 위(魏)나라와 오(吳)나라의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당연히 중국 전역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또한 후한의 멸망부터 삼국의 주요 전투, 당시의 문화풍속 등을 다양한 사진과 그래픽으로 정리하여 보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다. 북벌을 위해 절벽에 찍어 만든 나무로 된 삭도 모형은 제갈량이 얼마나 힘들게 위나라를 치러 갔는지 잘 보여준다. 참고로 박물관 내 유물 중 으뜸은 '설창용'(說唱俑)이다. 설창용은 청두 근교 톈후이산(天回山)의 한 후한시대 묘소에서 발굴됐는데, 중국 국보 문화재 중 하나다. 높이 55㎝에 채색된 토용이었지만, 발견 당시에는 이미 탈색된 상태였다. 오른 발을 치켜들고 왼손에 든 북을 치며 파안대소 하는 설창용의 모습은 너무나 생생하고 유쾌하다. 고대 중국인의 해학과 유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오직 쓰촨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 무후사의 경내에는 계하루(桂荷樓)라는 성도 등 사천성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을 판매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식당과 찻집도 있다. 유서 깊은 곳이라 엄숙한 분위기만 가득할 것이라는 편견은 버리자. 그리고 마실 나왔다 생각하고 찻집에라도 앉아보자. 예스러움이 저절로 묻어나는 곳에 자리를 잡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2000년 전의 세계로 들어설지 누가 알겠는가.
▼ 대자연오목(大自然烏木)이란 팻말이 생소해서 안을 기웃거려본다. 오목(烏木)이란 흑단(黑檀)의 중심부에 있는 단단한 부분으로 빛깔은 순흑색 또는 담흑색으로 몹시 단단하며, 젓가락, 담배설대, 문갑 따위를 만드는 재료로 쓰인다. 내 추측이 맞았나 보다. 안에는 검은 색의 나무를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수많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 AD 233년에 혜릉이 조성되었으니 1700년이 넘은 셈이다. 그래선지 구도가 엄밀하고 건물이 첩첩하며 나무들도 울창하다.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수려한 경치로 장엄하면서도 숙연한 느낌을 준다. 산책하듯 여유롭게 걸어볼 일이다. 아무튼 이러한 경관이 마음에 들었던지 무후사는 역대 문인들이 즐겨 찾던 명소였다. 특히 760년 안사의 난을 피해 청두에 정착했던 시성(詩聖) 두보(杜甫는 유별나게 자주 찾았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그가 지었다는 '촉상(蜀相)’이란 시를 옮겨본다. 제갈량을 기리는 내용인데 지면 관계상 그중 일부분만 옮긴다. < 세 번 다시 찾은 번거로운 일도 천하 위한 계책이요, (三顧頻煩天下計), 두 임금을 섬겨 나라를 구하려는 노신의 마음을 보여주셨네. (兩朝開濟老臣心), 전쟁에 나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出師未捷身先死), 후세의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을 옷깃에 적시게 하는구나. (長使英雄淚滿襟) >
▼ 군현당(群賢堂)이란 이층 건물도 보인다. 하지만 무슨 목적으로 지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외관(外觀)으로 보아 지은 지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 서둘러가며 한 바퀴를 돈 다음 정문을 빠져나오니 인파(人波)로 둘러싸인 빗돌이 반긴다. 빗돌(碑石)에는 ‘삼국성지(三國聖地)’라고 적혀 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위(魏), 촉(蜀), 오(吳)의 세 나라 중에서 가장 국력(國力)이 약했지만, 나관중(羅貫中)이 쓴 장회소설(章回小說)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중심축은 뭐니 뭐니 해도 ‘촉(蜀)’ 나라이다. 그 촉나라의 탄생설화나 마찬가지인 ‘도원결의(桃園結義)’는 물론이려니와, 유비(劉備)가 묻혀있는 혜능(惠陵)‘에다 촉나라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제갈공명(諸葛孔明)까지 모신 곳이니 어찌 성지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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