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국 태항산 여행

 

여행일 : ‘18. 10. 8() - 10.12()

일 정 : 석가장 정정현(8)휘현 천계산·만선산(9)임주 태항산대협곡(10)임주 팔천협(11)안양 문자박물관(11)석가장 조운묘(12)

 

여행 첫째 날과 다섯째 날 : 석가장의 조운묘와 정정현(正定縣) 옛 거리

 

특징 : 태항산맥(太行山脈) : 중국 중북부 동쪽의 화북평야와 서쪽의 산서고원(황토고원의 최동단)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400km 길이의 산맥으로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별명이 붙여져 있다. 산맥의 끝자락이라 할 수 있는 태항대협곡에는 팔천협을 비롯해 홍두협·흑룡담·청룡협·자단산 등의 주요 관광지구 5곳을 포함하고 있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이런 점을 강안한 중국정부에서는 이 일대를 장가계와 황산을 잇는 중국의 대표 관광지구로 개발해 놓았다. 그만큼 빼어난 경관을 지녔다는 증거일 것이다. 반면에 이 산맥은 예로부터 산서성(山西省, 산시성)과 하북성(河北省, 허베이성)의 교통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어왔다. '태항을 넘는 길'이란 말은 인생의 좌절을 상징하는 시적 표현이 되었고, ’열자(列子)‘의 탕문편(湯問篇)에 등장하는 '어떤 일이든 꾸준히 노력하면 결국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의 고사 '우공이산(愚公移山)'에 등장하는 산 역시 태항산맥을 두고 한 말이다. 그나저나 세상에 알려진 게 2014년부터라는데 4년이나 지난 지금 찾아온 나로서는 꽤나 늦은 셈이다.

 

석가장(石家庄, 스좌장) : 하북성의 성도(省都)로 태항산맥의 동쪽 기슭의 하북평원에 위치하고 있다. 관내에 있는 신악시(新乐市, 신러시)에 복희대가 남아 있는 말 그대로 복희씨(伏羲氏, 3황의 첫머리에 올라있는 중국 전설상의 제왕) 전설의 옛 땅이다. 전국시대에는 중산국(中山國)이 형성되어 병산현(屏山县. 핑산현)에는 중산국의 도성 유적이 남아있고, 중산왕 무덤에서는 진기한 문물이 출토되었다. 하지만 당나라 이후로는 시장도시에 지나지 않아 교역 중심지였던 북쪽의 정정(正定, 정딩)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05년 베이징-우한 철도가 이 지역을 지나게 되면서 성장하기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하북성 서부의 대도시로서 행정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정정보다 발달한 교역도시이자 공업도시로도 발전했다.

 

조운묘(趙雲廟) : 삼국시대(三國時代)의 명장이었던 조운(趙雲)’을 모시는 문묘(文廟)이다. 유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든 조자룡은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명장중의 명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러한 조자룡을 기리는 조운묘는 중국인들이 많이 찾는 명소 중 한 곳이라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지난 1996년 청나라 도광제 때 건립된 조운묘의 터 위에다 청나라 건축양식을 그대로 재현하여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조운(趙雲)은 상산(常山) 사람으로 자는 자룡(子龍)이다. ’조운이라는 본명보다는 조자룡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유이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무장으로 본래 백마장군 공손찬(白馬將軍 公孫瓚)의 휘하에 있었으나 유비(劉備)를 만나 그를 평생 동안 섬겼다. 유비를 따라 박망파(博望坡), 장판교(長阪坡), 강남평정(江南平定) 등의 전투에 참여했고, 단독으로는 한수(漢水), 기곡(箕穀) 등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런 공로로 관우(關羽), 장비(張飛), 마초(馬超), 황충(黃忠)과 더불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으로 일컬어진다. 벼슬은 편장군(偏將軍), 계양태수(桂陽太守), 익군장군(翊軍將軍), 진군장군(鎮軍將軍) 등을 역임하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해졌다. 사후에 순평후(順平侯)로 추봉되었다


  

이번 태항산 여행의 시작은 석가장(石家庄, 스좌장)이다. 패키지여행에 참가했었기에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여행사로 봐서는 비행기 값이 저렴하다는 등 뭔가 유리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비행기 값이 저렴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태항산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태항산에서 가장 가까운 정주(郑州, 정저우)까지 비행기로 와서 버스를 이용해 목적지로 가는 방법이 가장 선호되고 있다. 다음은 우리와 같이 석가장(石家莊, 스자좡)를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성수기에만 이용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으니 참조한다. 그 외에도 제남(济南, 지난)이나 북경 또는 태원(太原, 타이위엔)을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심지어는 배를 타고 청도까지 와서 태항산으로 장거리 이동을 하는 여행사도 눈에 띈다. 하긴 상하이를 경유해 약 400쯤 떨어진 한단(邯鄲)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그저 일정이나 비용, 체력 등을 감안해서 자신의 처지에 맞는 방법을 선택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석가장에서의 첫 방문지는 석가장(石家庄)의 외곽에 있는 정정현(正定縣, 중국발음으론 정딩)이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거리를 걸어보라는 모양이다. 정정현은 예로부터 바오딩(保定), 베이징과 함께 북방삼웅진(北方三雄镇)으로 불렸으며, 삼국시대 촉한(蜀汉)의 만능명장이자 전략가로서 영웅호걸 중 단 한 번도 주군을 배신한 적이 없다는 의리의 표상조자룡(赵云)의 고향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론 현 국가주석인 시진핑(习近平)이 처음으로 공직에 나온 지역이라고 한다. 군복무를 마친 1982년부터 85년까지 이곳에서 공산당 부서기로 재직했다는 것이다. 이때 인연을 맺었다는 리잔수(栗战书)는 현재 권력서열 3위인 전인대상무위원장자리에 앉아있단다. 그러니 시진핑 주석이 제창했던 初心不忘(초심을 잃지말자)’의 발원지로 각인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차에서 내리면 천령사(天寧寺)이다. 사찰 안에 세워진 9층탑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가이드는 그냥 지나쳐버린다. 나 또한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갑자기 변경된 일정이라서 꼭 보아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든다. 이번 여행 내내 이런 식의 안내를 받게 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참고로 여행사에서 나눠준 일정표에는 민족루 도보거리의 투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석가장시중심가에 위치한 번화가로 차도와 인도가 따로 나뉘어 있지 않은 프리마켓(free market이며 벼룩시장인 flea market와는 구분됨)’ 거리이다. 상가건물들 사이에 음식과 잡화를 파는 노점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고 보면 되겠다. 전통시장을 걸으면서 현지인들의 삶을 관찰·이해해 보라는 배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풍경은 야시장, 즉 저녁에 들러야 제격일 것이다. 사방에 즐비한 먹거리들을 맛보면서 느긋하게 눈요기까지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낮, 우리를 정정현으로 옮겨 놓은 이유일 것이다.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나 같이 후기를 써오는 사람들에게는 횡포나 다름없는 일이다. 꼭 필요한 뭔가를 자세히 살펴보고 사진까지 찍어야만 귀국 후에 글을 써나갈 수 있는데도,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미리 알아두어야 할 사항 등을 챙겨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정에는 많은 보배들이 있다. 고대 중국의 5대 대궐로 인정되는 정정 문묘(文廟)의 대성전(大成殿)은 물론이고 모양과 풍격이 각각인 보탑 4기는 모두가 국보급이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금 지나치고 있는 천령사(天寧寺)9층짜리 능소탑(凌宵塔)이다. 천여 년 동안을 줄곧 한 모양으로 이어오고 있는 게 특징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특히 개원사(開元寺)에 있다는 수미탑(須彌塔)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두고두고 한으로 남을 것 같다. 귀국 후 고구려가 쌓은 탑이라고 적은 누군가의 글을 발견했기에 하는 말이다. 문헌으로는 확인이 되지 않는 주장이지만 직접 눈으로 보았다면 어느 정도나마 감을 잡을 수는 있지 않았겠는가. 나머지 2기는 임제사(臨濟寺)의 징령탑(澄靈塔)과 광혜사(廣惠寺)의 송나라 화탑(華塔)이란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도(古都) 가운데 열한 번째라는 정정(正定)은 세월 속 고건물의 보고(寶庫)로 알려진다. 일찍이 베이징, 보정(保定, Baoding)과 함께 중국 북방 3대 도시였던 탓으로 천여 년 전 당송(唐宋)때의 고건물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참고로 천여 년 전만 해도 석가장은 정정부 산하의 작은 동네였을 따름이고 당시의 정정은 베이징과 어깨를 겨룬 대도시였다고 한다. 하지만 찬란함은 어제에 머물러 있다. 중국 북방지역에서 정정의 위치는 한 때 보정에 대체되고 그 뒤에는 석가장에 빼앗겨 오늘날 정정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 그렇다고 모두가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덕분에 정정의 고건물들이 모던한 빌딩들에 둘러싸이지 않고 자신을 지키면서 세월을 이어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거리는 끝나버린다. 그만큼 걷는 코스를 짧게 잡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곳 정정(正定)에는 천년고찰 융흥사(隆兴寺)와 천령사의 능소탑(凌霄塔) 외에도 임제사(临济寺)와 개원사(开元寺), 화탑(华塔), 고문묘(古文庙) 중점문물보호단위7개소나 소재하고 있다. ‘중국 역사문화 명승고적지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이니 마음만 먹으면 구경거리는 얼마든지 널려있다는 얘기이다. 다만 가이드에게 그럴 의향이 조금도 없다는 게 문제일 따름인 것이다. 그렇다고 예비지식이 전무한 여행객들이 다른 마음을 먹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대체 어디로 가야 무엇을 볼 수 있는지를 모르니 어찌하겠는가. 주어진 자투리 시간을 광장에서 서성이다가 집결장소로 모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융흥사(隆興寺)는 중국 북방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불교사원이라고 한다. 경내에 칠십 척이 넘는 청동으로 만든 대불(大佛)상이 있다고 해서 대불사(大佛寺)라고도 부른다. 사찰은 수()나라 개황(開皇) 6(서기 586)에 처음 지어졌으며, 전체 면적이 64에 달한다. 이 절은 수많은 왕조를 거치면서도 원래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해 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 규모와 화려함을 더해 왔단다. 절 내에는 수()나라부터 시작하여 당(), (), (), (), ()대의 각 시대별 문화적 특색이 살아있는 4개의 전(殿)5개의 누각, 2개의 정자, 1개의 단() 등 건축물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황제들이 직접 돈을 들여 짓는 등의 총애를 받아온 덕분이란다. 황가사찰이라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찰의 안은 둘러보지 못했다. 북쪽을 향해 앉아서 부처가 미처 보지 못한 신도들을 보살핀다는 동방의 여신이라는 보살상과 만들 당시 세 살짜리 아이의 손으로도 돌릴 수 있었다는 10m 높이와 어른 다섯 명이 넘게 팔을 벌려야 겨우 감싸 안을 만한 둘레를 가진 전륜장전’, 어마어마한 크기의 통나무를 조각해 만든 부처상, 21.3m 높이의 천수천안관음상 등 볼거리가 넘친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융흥사 앞 광장에는 한가운데에 용()을 새겨 넣은 거대한 벽체(壁體)를 세워놓았다. 행사가 있을 때 뒤를 막아주는 용도가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벽면이 온통 붉은 색으로 도배를 해놓은 게 눈길을 끈다. 아니 주변의 건물들도 온통 빨강 일색이다. 하긴 갓 시집 온 새댁이 친정 갈 때 옷, 가방 등을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할 정도로 붉은 색을 좋아한다는 중국 사람들이라니 오죽하겠는가.




웨딩촬영을 나온 예비부부가 보인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리라는 얘기일 것이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오고 있는 이 거리처럼 자기네들의 사랑도 그렇게 변치 않고 싶다는 바램일지도 모르겠다.



맨 마지막 날의 일정은 삼국시대의 명장 조운(趙雲)을 모시는 문묘(文廟)이다. 삼국시대 촉나라의 명장인 조운은 '항상 승리하는 장군'이라는 의미로 상승장군(常勝將軍)이라 불리었다. 그는 유비가 도망간 장판교 전투 때 자기 칼이 못쓰게 되자 조조 군대의 창과 칼을 빼앗아 싸워 유비의 부인 감씨와 아들 유선을 구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조자룡 헌 칼 쓰듯 한다.’는 속담이 생겼다. 원래는 남의 헌 칼을 빼앗아 자기 마음대로 쓴다.’는 뜻이었으나, 요즘은 주어진 권한이나 권력을 함부로 남용할 때 사용되고 있다. 세월 따라 인심(人心)도 변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긴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도 있지 않는가.




조자룡의 이름을 따서 조운묘(趙雲廟)’라 불리는 문묘의 정문이랄 수 있는 산문전(山門殿)의 앞은 널따란 광장이다. 그 한가운데에 삼국지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을 재현한 조운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조운이 유비의 아들인 유선을 왼쪽 팔로 안고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조조의 대군으로부터 구해오는 장면이다. 서늘한 눈빛과 앙다문 입술, 주군의 아들을 구하러 가기 위해 창 하나 들고 홀로 말을 타고 적진으로 뛰어 든 조자룡의 비장한 각오와 깊은 충심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동상의 앞에는 삼국명장 상승장군 순평후 조운고리(三國名將 常勝將軍 順平侯 趙雲故里)라고 적힌 빗돌을 세워놓았다. ’항상 이겼던 삼국의 명장 순평후 조운이 태어난 동네라는 뜻일 게다. 조운(趙雲)은 항상 승리한다고 해서 상승장군(常勝將軍)이라고도 불리었다. 고향이 이곳 인근의 상산군(常山郡)이라고 해서 상산장군이라 불리기도 했다니 참조한다.



광장에는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놀이기구도 보인다. 우리나라의 투호(投壺)와 비슷한 개념인데 화살과 항아리 대신에 동전이 대체하고 있으니 투전(投錢)이라고 하면 딱 맞은 표현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전각들은 지난 1996년 정딩현 정부에서 총 400만 위안을 투자해 청 도광제(道光帝, 1782-1850) 때 세운 조운묘 터에 다시 재건한 것이다. 8000의 넓은 대지에 세워진 이 사당은 모두 청나라 때 건축양식을 그대로 본떠 재건했다고 한다. 주요 건축물로 묘문(庙门)과 사우전(四义殿) 오호전(五虎殿), 군신전(君臣殿), 순평후전(顺平侯殿) 등이 있다



조운묘의 관광지 등급 표시판이 보인다. 국가급인 ‘A’가 둘이니 겨우 국가급에 들 정도의 관광지라는 의미일 것이다. 참고로 중국의 관광지는 일반에서 성급, 국가급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관광지로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 이 가운데 국가급 관광지가 가장 차원이 높음은 물론이다. 또한 이 국가급관광지는 A에서 AAAAA까지 다섯 등급으로 나뉜다. A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뛰어난 관광지라고 보면 된다. 5A는 현재 66개가 운영되고 있을 따름이다.



묘문(庙门)을 들어서니 전면에 군신전(君臣殿)이 나타난다. 전각을 정면 가운데에 두고 앞마당 왼편에는 순평후 비정(順平侯 碑亭)’, 그리고 오른편에는 육각비정(六角碑亭)’이 자리 잡았다.



군신전(君臣殿)은 군신이 함께 모여 있는 모양새이다. 황제인 유비를 가운데에 놓고 왼쪽부터 조운과 장비, 관우 제갈공명의 상()을 배치했다. 촉한의 초대 황제인 유비의 재위(221-223) 때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지 싶다. 벽면에는 비문을 탁본(拓本)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들이 여럿 걸려있었으나 기초 수준에 그치는 내 한자 실력으로는 출처나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순평후전으로 들어가는 길에 방생지(放生池)를 만났다. 잡다한 신들을 많이 모시는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군신전 뒤는 조운의 사당인 순평후전(順平侯殿)’이다. 전각으로 연결되는 중앙 통로에 향나무로 여겨지는 나무들이 줄지어 심어져 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이 모두 사람의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손에는 십팔반병기(十八般兵器) 하나씩을 들고 있다. 나무와 병기를 조합해서 삼국시대의 상황을 재현해 놓은 모양이다. 멋진 발상이라 하겠다.



순평후전(順平候殿)은 조자룡 부자(父子)를 모셔놓은 전각이다. 순평후는 조자룡이 대장군으로 봉해질 당시 받았던 시호라고 한다. 62세의 나이로 사망한 조운의 조각상 좌우로 각종 무기를 든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구조이다. 조운의 앞쪽 좌우에는 커다란 징과 북을 배치했다. 전쟁에서 승리할 때 치는 북인 승득격고(勝得擊鼓)’와 재물을 얻었을 때 울리는 징인 발재명나(發財鳴锣)’라고 한다. 참고로 이 전각 안에는 조자룡의 생가에서 발견되었다는 한순평후조운고리비가 모셔져 있다. 청나라 광서황제때 조자룡의 용맹함을 기리며 세운 기념비라는데 아쉽게도 사진촬영에는 실패했다.





순평후전을 앞에 두고 왼편에는 오호전(五虎殿)’이 자리 잡았다. 촉한(蜀漢)의 오호장군(五虎將軍)을 모시는 사당이다. 좌로부터 황충(黃忠), 조운(趙雲), 관우(關羽), 장비(張飛), 마초(馬超)의 순으로, 삼국지에서 용맹을 떨치던 무시무시한 장수들이 소설이 아닌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오호대장군을 모시는 옆쪽 벽면에 그려진 그림은 황충과 조운이 참전했던 정군산 전투의 장면이라고 한다. 박근혜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주석이 선물했던 그림과 같은 것이라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오호전의 맞은편에 있는 전각은 사의전(四義殿)이다. 이곳은 삼국지의 명장면 도원결의의 세 주인공인 유비, 관우, 장비에다 조자룡까지 포함해 모두 네 영웅을 모신 곳이다. 실제로 서진(西晉)의 역사가인 진수(陳壽, 233-297)는 삼국지에서 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서술했다. 조자룡이 유비로부터 관우, 장비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긴 자신의 아들을 두 번이나 구해주고 항상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친 충직한 신하를 어찌 피붙이 같이 여기지 않았겠는가.




아래 사진은 조자룡 음마조(趙子龙饮马槽)’로 조자룡이 말에 물을 먹이던 구유라고 한다. 우측에 보이는 우물에서 물을 길러 구유에 부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조자룡의 생가에서 발견되었으나 이곳으로 옮겨와 보관 중이란다. 그렇다면 그 옆에 있는 우물은 가짜인 셈이다.




청동(靑銅)으로 만든 조자룡의 말() 조형물도 눈에 띄었다. 그 옆에는 그의 장남이 탔다는 말의 조형물도 만들어져 있다. 고삐를 잡고 있는 이의 정체를 묻는 누군가의 질문에 마부(馬夫)라는 가이드의 조크가 금방 뒤따른다. 하지만 차림새로 보아 말의 임자가 분명할 것이다. 일반병사는 저런 차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평후전의 뒤편은 정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비림(碑林)과 쉼터 등을 갖추었으나 어딘가 엉성한 풍경이다. 아까 입구에서 보았던 ‘AA’라는 등급표시에 어울리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을 머문 석가장의 태화상무주점(泰华商务酒店)’이다. 주점(酒店)이란 우리가 중국 무술영화에서 흔하게 보아오던 장소로 술과 음식, 그리고 잠자리가 제공되는 곳이다. 그게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뀌면서 ‘Taihua Business Hotel’이란 영문 이름까지 덤으로 얻었다고 보면 되겠다. 우리나라로 치면 주막(酒幕), 오늘날의 호텔이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아무튼 객실은 깨끗했고 제공되는 일회용품도 넉넉했다. 아침 식사도 우리 입맛에 딱 맞았다. 중국의 관광지에 소재한 호텔들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그런 가운데도 다른 호텔에 비해 객실이 넓은 것은 장점이라 하겠다.



에필로그(epilogue), 이번 여행도 조선족(朝鮮族) 가이드가 안내를 맡았다. 그런데 자기 소개를 하는 도중에 모국(母國)대한민국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그의 말이 가슴에 닿았다. 그런 말은 이곳에서만 들었던 것이 아니다. 직장에서 물러난 지 어느덧 4, 퇴직한 후에는 집사람과 함께 세계 일주를 해보겠다는 목표대로 매년 4번 이상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만났던 많은 현지 가이드들도 저와 같은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가이드가 살고 있는 중국이란 나라는 다민족 국가다. 다수족인 한족(漢族)92%을 중심으로 장족·회족·만주족·묘족·이족·토카족 등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조선족은 약 200만 명으로 15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단다. 중국의 인구가 14억이 넘는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아주 적은 숫자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모국의 경제가 발달해 있는 덕분에 중국내 소수민족은 물론이고 한족들까지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긴다니 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이겠는가. 반면에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도 발생하고 있단다. 한국으로 돈 벌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덕분에 동북 3(흑룡강성, 랴오닝성, 길림성)’의 조선족들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