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Cambodia) 여행

 

여행지 : 캄보디아 앙코르(Angkor) 지역

여 행 일 : ‘14. 3. 22() - 3. 26()

 

전체 여행 일정

3.22() : 인천공항씨엠립공항

3.23() : 바래이 호수, 실크 팜, 민속촌

3.24() : 따프롬, 앙코르톰, 앙코르와트, 야시장

3.25() : 와트마이 사원, 툰래삽 호수, 쇼핑(상황버섯,목청꿀, 잡화, 보석)

3.26() : 씨엠립공항인천공항

 

작은 킬링필드인 와트마이사원과 밤의 축제장 나이트마켓

 

특징 : ‘킬링필드(Killing Fields)의 축소판이라는 와트마이(Wat thmei)사원은 킬링필드의 대학살 당시 씨엠립과 앙코르유적지 인근에서 학살당한 이들의 유골을 모아놓은 곳이다. 킬링필드란 1975에서 79년까지 4년 동안 폴 포트의 급진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루주가 양민 200만 명을 학살한 20세기 최악의 사건 중 하나이다. 노동자와 농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지식인과 부유층을 학살했는데, 이 부근에서 학살당한 이들의 유골을 한곳에 모아 놓고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사찰이 바로 와트마이사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캄보디아에서의 밤이 무료하다면, 아니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서 한번쯤 찾아가 볼만한 곳이 나이트마켓(Night Market)이다. 2007년에 개장한 나이트마켓의 영업시간은 오후 4시부터 정오까지이고 무수한 상점과 카페, 작은 영화관, 마사지 가게 등이 있다. , 조각품, 향신료, 해먹, 실크 스카프, 지갑, 아로마 오일, , 장신구 등이 주요 쇼핑 품목이다.

 

 

 

앙코르 시내,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내에서 앙코르 매표소방향으로 1Km쯤 가면 새로 지은 듯한 느낌의 사원을 만나게 된다. 크메르 루즈 집권 때 학살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와트마이(Wat thmei)라는 사찰이다. 당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유골을 모아 놓고 있다고 해서 킬링 필드 사원(Killing Fields Temple)’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  킬링필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캄보디아의 역사에 대해 조금 더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 베트남전쟁을 조기에 끝내고 싶어 했던 미국의 닉슨대통령은 끝내 주변국에 까지도 폭격을 시작했다. 캄보디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분노한 캄보디아 국민들은 폴 포트라는 공산주의자를 내세워 크메르 루즈라는 이름으로 단결했다. 이에 친미(親美) 노선을 견지했던 당시의 정부군은 공산주의를 외치는 국민과 크메르 루즈군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이것이 ‘1차 킬링필드로 이때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가 수십만 명에 이른단다. 이후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닉슨대통령이 물러나고 뒤이어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은 중단된다. 뒤이어 크메르 루즈군이 수도인 프놈펜에 입성하자 시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정부 역시 미국에 속았다며 그들을 환영했다. 당시만 해도 모두의 마음속에는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학살의 시작이었다.

 

‘2차 킬링필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미국인에 대한 증오가 컸었던 크메르 루즈는 가장 먼저 외국인들과 관련된 사람들을 죽였다. 다음 차례는 지식인들 이었다. 크레르 루즈 대부분이 못 배우고 가난한 계층이었기에 지식인과 부유층에 대한 분노가 컸던 게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물론이려니와 외국어가 들어간 티셔츠만 입고 있어도 이를 이유로 죽였다고 한다. 의사와 공무원, 교사들도 학살 1순위 이었다. 안경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죽기도 했다. 안경을 쓴 사람을 지식인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학살 그룹인 부르주아(bourgeois)’를 골라내는 방법은 더 기가 찼다. 손에 굳은살이 없거나, 피부가 희고 고울 경우 죽임을 당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시계를 차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학살 대상자는 어른들 뿐만이 아니었다. 임산부와 어린이 심지어는 갓난아이까지 포함되었다니 얼마나 끔찍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웬만큼 학살이 진행되었다 싶으니 이번에는 강제노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산주의자였던 폴 포트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원시적인 농경주의(農耕主義)였다. 그리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그는 모든 국민을 농경지로 강제이주 시킨 뒤 노역(勞役)을 강요했다. 이 강제이주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일을 하는 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또 다시 죽어나갔다. 이렇게 질병과 기아(飢餓), 그리고 과로 등으로 죽은 사람의 숫자가 또 다시 80만 명에 이른다. 이렇게 5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200만 명이 죽어나간 것이다. 이는 캄보이아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한단다.

 

어느 글에선가 캄보디아의 문맹률이 ‘60%'에 이른다고 적혀있는 걸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지식인들을 색출해가며 학살했던 킬링필드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당시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했던 말이 공부하지 마라이었다고 하니 그런 결과가 나올 만 하지 않겠는가. 나라의 장래는 젊은이들에게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그 시기는 캄보디아로 보아서는 잃어버린 세월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사람의 잘못된 지도자가 만든 캄보디아의 가난한 현실과 결코 밝지만은 않은 미래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원 안으로 들면 수많은 납골탑들이 보인다. 누구를 모셨는지는 몰라도 저 정도로 반듯하게 지어졌다면 그런대로 잘사는 후손들을 두었으리라.

 

 

 

 

 

사원 안에는 해골을 모아 놓은 탑()이 있다. ‘킬링필드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골(遺骨)을 모아 놓은 것이란다. 크메르 루즈 정권이 무너진 후 씨엠립 근처에서도 수많은 유골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사원에서 이를 한데로 모아 탑을 짓고 이들을 추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해골만 보아도 소름이 돋는 법인데 수백 개의 유골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을 보니 그 소름이라는 표현이 어쩐지 허술해져버린다. 그렇다. 그 어떤 말로도 이렇게 끔찍한 상황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고로 이곳에다 유골탑을 세운 이유는 사원을 짓기 위해 터파기 공사를 하다가 이곳에서 수많은 유골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란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이유라도 알고 죽은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 대부분은 왜 죽어야 하는 지도 모른 채로 죽어갔을 것이다. 거기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땅속에 제대로 묻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뼈도 제대로 추리지 못했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테고 말이다. 비록 우리나라의 일은 아니지만 그들의 넋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 수 없어 조용히 묵념(黙念)을 드려본다. 넋이라도 평안히 잘 가시라고.

 

 

 

납골탑에는 꽤나 많은 이름들이 적혀있고, 이름 오른편에는 숫자들이 적혀 있다. 이마 이 유골탑과 관련된 일에 기부를 한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이 내 기부금의 단위인 모양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도 보인다. 가슴이 뿌듯해진다. 그가 낸 기부금이 많고 적음은 둘째 치고 좋은 일에 우리나라 사람이 참여했다는 그 사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납골탑 옆의 안내판에는 수많은 사진들을 붙여 놓았다. 크메르 루즈 정권 당시에 촬영된 사진들이란다.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인물사진들을 위시해서, 여러 종류의 사진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학살당하고 있는 장면들도 보인다. 끔찍하다.

 

 

 

 

 

 

 

사원은 작은 규모는 아니지만 특별히 볼만한 것은 없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마음속에 담아둘만한 유물들이 없는 것이 그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동남아 사찰의 특징대로 화려함만은 나름대로 볼만 했다.

 

 

 

 

 

이곳도 역시 망고나무가 정원수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추나무만치나 흔한 것이 망고나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나라의 수세미를 쏙 빼다 닮은 열매가 매달린 넝쿨도 보인다. 야채의 한 종류라는데 먹어보지 않아서 맛을 글쎄다.

 

 

 

 

 

캄보디아에 왔다면 저녁시간을 내어 꼭 들러봐야 할 곳이 하나 있다. 밤에만 오픈한다는 나이트 마겟(Night Market)이다. 오래 전부터 있던 시장이라고 해서 올드마켓(old market)이라고도 불린단다. 앙코르 나이트 마켓은 캄보디아어로 프싸 리어뜨라이 앙코르이다. 2007년에 처음 생겼으며 캄보디아 최초의 야시장이다. 앙코르와트 사원 구경에 바쁜 관광객들에게 밤에 여유롭게 쇼핑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했다고 한다. 나이트 마켓에는 초가지붕과 대나무로 만든 대략 240개의 상점이 있다. 대부분의 상점에서는 주로 캄보디아의 전통 수공예품, , 실크, 보석, 그림과 여러 기념품을 팔고 있다. 야시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주로 시엠립 주변의 외진 시골마을에서 캄보디아인들의 수공업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몇 가지 사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기념품으로 사다줘도 좋을 것이다. 다만 이때에는 꼭 흥정을 해야 한단다. 옛날 옛적의 우리네 시장과 마찬가지로 물건가격이 대부분 부풀려져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말로는 처음 부르는 가격에서 일단 절반으로 깎아보라고 했다. 물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원하는 가격을 부르고 가는 척을 하면 대부분 다시 불러서 싼 가격에 주곤 한다는 것이다.

 

 

 

버스는 우릴 큰길가에다 내려놓는다. 나이트마켓은 차가 들어 올 수 없는 거리란다. 1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을 준 가이드는 모이는 장소만 알려주고 우리 곁을 떠나버린다. 이젠 우리 나름대로 눈 구경을 즐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시장의 범위가 그다지 넓지를 않아 길을 잃을 염려가 없고, 거기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띠기 때문에 언어소통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상인들을 붙잡고 말을 건네 보면 된다. 비록 더듬거리기는 하지만 한국말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번화가까진 잠시 더 걸어야 한다. 어둡던 거리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휘황찬란해졌다. 그리고 나타난 곳이 마치 유럽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펍 스트리트(pub street)이다. 한마디로 외국인이 가득한 유러피안(European)의 거리이다. 거리에는 노천카페와 바와 기념품점으로 가득 차 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고 구경거리가 지천인 문화의 거리이다.

 

 

 

거리는 발 딛을 틈도 없이 사람들로 붐비고 노천카페에서는 술을 마시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술을 좋아하는 나 또한 구석자리라도 잡고 싶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패키지여행의 가장 큰 단점이다. 하긴 개인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다. 가이드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개인적으로 호텔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나 나에겐 그럴만한 자유가 없다. 집사람이 그런 걸 무척 싫어하기 때문이다. 또 그녀의 말을 거슬릴 배짱이 나에게 없음은 물론이다. 그저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까 하고 사람들을 헤집고 거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본다. 얼마쯤 걸었을까 거리가 온통 음악으로 들썩이고 있다. 누군가가 높은 곳에 올라가 춤을 추고 다른 이들은 손뼉을 치며 몸을 흔들어 대고 있다. 이래서 이곳을 유러피안의 거리라고 부르나 보다.

 

 

 

 

 

 

 

기념품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먹거리를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시장을 둘러보면 각종 현지 간식거리들을 파는 곳들이 보인다. 이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길거리 좌판(坐板)이었다. 개구리나 메뚜기 등의 곤충들은 물론이고 뱀과 거미까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종류가 다양했다. 징그러운 것을 싫어하는 나는 바라보는 것만도 힘이 드는데 함께 간 형우군은 맛있게도 잘만 먹는다. 그리고 저녁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먹겠다고 싸달라고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호텔 술자리에서는 그 친구 곁에 앉지 말아야겠다.

 

 

 

숙소로 돌아가는 중에 잠깐 과일가게에 들렀다. 여행의 마지막 밤을 그냥 무의미하게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에는 서울에서부터 가져온 소주가 아직까지 2병이나 더 남아있고, 통조림 등의 안주 또한 넉넉하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과일만 몇 가지 더 산다면 훌륭한 저녁파티가 이루어질 게 분명하다. 그리고 우린 마지막 밤을 화려하게 보낼 수 있었다. 비록 다음날 아침에 쓰라린 속을 부여안고 식당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캄보디아에 와서 가장 부러워했던 것 중의 하나가 참으로 과일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런 과일들을 다 모아 놓은 곳이 과일가게이니 또 다시 부러워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흔하다는 망고와 바나나, 파파야, 코코넛, 파인애플 등은 이미 눈에 익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생산되는 수박과 자몽, 단감 등을 단번에 알아보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림에서만 보았던 짹프르츠와 망고스틴, 두리안, 리치 등은 이름을 물어보고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듣도 보도 못했던 미은이나 마쁘라, 끌렁껑, 뜨넉, 스칸니아, 따읍, 크로잇뽀삿, 스와이짠띠 등은 다시 본다고 해도 기억을 못해낼 것이다. 이 많은 것들을 모두 다 맛보고 싶었지만 우린 눈에 익은 과일들 몇 가지만 주워들 수밖에 없었다. 나이 육십을 넘기면서 모험보다는 안정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걸 보고 보수라고 해야 하나?

 

 

캄보디아(Cambodia) 여행

 

여행지 : 캄보디아 앙코르(Angkor) 지역

여 행 일 : ‘14. 3. 22() - 3. 26()

 

전체 여행 일정

3.22() : 인천공항씨엠립공항

3.23() : 바래이 호수, 실크 팜, 민속촌

3.24() : 따프롬, 앙코르톰, 앙코르와트, 야시장

3.25() : 와트마이 사원, 툰래삽 호수, 쇼핑(상황버섯,목청꿀, 잡화, 보석)

3.26() : 씨엠립공항인천공항

 

바다를 연상시키는 경이로운 호수들, 바래이호수와 톤레삽호수

 

 

특징 : 서 바레이호수(West Baray Lake)는 크메르제국의 앙코르시대인 11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던 저수지 중 유일하게 물이 남아 있는 저수지이다. 크메르 왕국의 통치기간동안 약 1000크기의 인공저수지를 기반으로 한 관계 시스템으로 각종 용수가 제공되었다. 이것들 중 가장 큰 규모였던 서 바래이호수1050년에 건설되었으며, 8km X 2.2km 크기의 저수지는 최대저수량이 40m3에 이른다. 이 저수지는 땅을 파서 만든 것이 아니라 둑을 쌓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저장된 물이 땅의 높이보다 높으며, 물은 논으로 중력차에 의해 보내진다. 이러한 관계 활동은 9세기말경 시작되었고, 이 결과로 매년 건기와 우기를 가리지 않고 다모작(多毛作)의 경작을 할 수 있었다. 또한 톤레삽호수(Tonle Sap Lake)는 길이가 160km에 너비가 36km에 이르는 바다 같은 호수이다. 호수에는 풍부한 민물어류가 있고, 이러한 자원은 물새나 수생동물, 양서류가 살기에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는 물위에 떠있는 마을이라는 깜퐁 플럭(Kampong Phluk)’으로 인해 톤레삽호수가 세상에 알려졌다. 쉽게 말해 수상가옥 마을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유명세를 타게 됐다는 얘기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현지인들이 낚시하고 빨래하고 밥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풍경들을 본다. 그리고 그 풍경이 너무나 생소하기에 이를 보려고 더 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드는 것이다.

 

 

 

어느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입구 도로변은 수많은 상점들이 몰려있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과일이나 의류, 식료품, 그리고 기념품들을 팔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다른 관광지들과는 다른 색다른 풍경이 연출된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어린애들이 달라붙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행자 한 사람 당 두세 명씩 둘러싸는 게 마치 나눗셈이라도 해 놓은 것처럼 얼추 비슷하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실을 엮어서 만든 팔찌를 사줄 때까지 끊임없이 원 달러를 외쳐댄다. 애들까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고단한 삶을 보는 것 같아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그런 마음도 잠시, 호수를 제대로 구경하기 위해서는 애들로부터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결과적으로 말해 그네들이 요구하는 것을 사주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그건 헛수고에 불과했다. 더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더 사주어야한다며 우겨댄다. 이런 귀찮음은 우리가 버스에 다시 오르고 난 뒤에야 해방될 수 있었다. 덕분에 바레이호수의 투어는 주마간산으로 구경할 수밖에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원 달러라는 외침은 호수를 떠나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이런 걸 보고 이명(耳鳴)현상이라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버스에서 내리면 곧바로 호숫가이다. 이 호수는 앙코르시대에 만들어졌던 저수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캄보디아 최대의 인공호수라고 한다. 수리야바르만1세 때 만들어졌다는 이 호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마치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말이다. 바닷가 해수욕장을 닮은 해변도 있음은 물론이다. 물놀이를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은 현지인들의 휴식처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단다.

 

 

 

 

그러다보니 이곳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꽤 많아 보인다. 해변에 늘어선 건물들의 길이가 장난이 아닐 정도로 긴 것을 보면 말이다. 우리나라 관광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점들이 아닐까 싶다. 무허가(?) 건물들을 지어놓고 음식을 사먹는 사람들에게만 시설을 내어주는 그런 곳들 말이다.

 

 

 

그리고 호수면(湖水面) 가까이에 쳐진 천막 아래에는 달아매는 그물침대인 해먹(hammock)들도 보인다. 그 숫자가 많은 것을 보면 이것 또한 대여용인 모양이다. 그것만으로는 수지(收支)가 맞지 않았는지 과일과 음료수까지 팔고 있었다.

 

 

 

한쪽에는 유람선(遊覽船)들도 몇 척 정박(碇泊)해 있다. 유람삼아 배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호수 중앙 작은 섬에 있다는 메본(Mebon)사원의 유적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테고 말이다. 직경 150미터 정도 되는 작은 섬에 지어진 메본사원은 11세기 후반 유다야디타바르만 2(Udayadityavarman II)에 의해 바퓨욘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비슈누신에게 봉헌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비치파라솔 아래에는 고무튜브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이것 또한 대여용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곳 주민들이 바래이호수를 물놀이 장소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닷가 해수욕장쯤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톤레삽호수의 투어는 유람선선착장에서부터 시작된다. 매표소에서 승선권을 사고서 선착장에 내려서면 여러 대의 유람선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중의 하나를 골라 올라타고 본다. 물론 가이드가 지정해주는 배다. 승선인원은 대략 30명에서 많게는 40명 정도, 비록 허름하기는 해도 제법 큰 배이다. 톤레삽호수는 수도인 프놈펜과의 주요 수로로 이용되었으며, 호수 주변의 다섯 지방과도 통한다. 요즘에는 관광산업이 많이 활성화되어 프놈펜과 씨엠립 사이에 보트로 여행하는 코스로도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배에는 구명조끼까지 구비되어 있다. 그러나 사용하는 사람들은 없는 듯 싶다. 착용하려는 사람들도 없고, 그렇다고 입을 것을 권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가 출발하면 열두어 살쯤 먹어 보이는 아이들이 나타난다. 출발할 때만 해도 눈에 띄지 않던 아이들이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승객들의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안마를 해준다는 것이다. 싫다는 거부표시는 애당초 먹히지도 않으니 이럴 경우에는 그냥 못이기는 채 그냥 맡겨 두는 게 좋다. 그리고 푼돈 몇 푼 쥐어주면 될 일이다. 모처럼 나온 여행을 사소한 것 때문에 망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호수는 건기와 우기(雨期)에 따라 그 넓이가 크게 달라진다. 건기에는 3,000의 면적에 수심(水深)1m에 불과하지만, 우기에는 면적이 10,000로 넓어지며 수심 또한 12m로 깊어진다. 지금은 건기(乾期)이다. 당연히 호수는 얕아질 대로 얕아졌다. 강둑에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물길의 흔적이 이를 증명해준다.

 

 

 

 

 

톤레삽호수는 캄보디아인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음은 물론 호수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크리스탈(crystal)처럼 맑거나 옥빛을 띤 호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황토 흙을 실어 나르는 메콩강의 특징 때문에 탁한 황토색을 띠기 때문이다. 건기(乾期)인데도 저런 물빛이라면 톤레삽은 일 년 열두 달 내내 황톳빛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다. 하여간 물빛에 관계없이 우리가 탄 배는 잘도 달려간다.

 

 

 

 

 

 

뱃길은 호수가 아니라 강을 달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 폭()이 좁다. 아마 호수로 흘러들어오는 강줄기인 모양이다. 주변의 볼거리는 그다지 많지 않다. 가끔 외딴 건물들이 보이거나 갑판에서 그물을 수선하고 있는 배들이 보일 따름이다. 하나를 빼먹을 뻔 했다. 고기를 잡고 있는지는 몰라도 물위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작은 나룻배들도 눈에 띄었다.

 

 

 

 

 

 

 

 

 

얼마쯤 달렸을까 저만큼에 제법 큰 건물이 보인다. 버젓이 선착(船着)시설까지 갖춘 게 물위에 떠 있지만 분명 배는 아니다. 지나가는 길에 보니 식당이나 카페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 휴게소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특이한 게 눈에 띈다. 배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는 것이다. 근접해서 지나가는 길에 보니 나눔의 쉼터라는 글이 적혀있다. 한국인 운영하는 쉼터가 아니면 어느 봉사단체에서 운영하는 시설인 모양이다.

 

 

 

 

 

 

 

 

 

 

 

저 멀리 물위에 떠있는 가옥(家屋)들이 보인다. 그것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범위가 넓다. 어쩌면 물위에 떠있는 마을이라는 깜퐁 플럭(Kampong Phluk)’이 아닐까 싶다. ‘톤레삽 호수여행과 동의어로 친다는 그 유명한 캄퐁 플럭말이다. 캄퐁 플럭은 세 개의 수상 가옥 마을을 묶어 부르는 이름으로, 씨엠립에서 남동쪽으로 16km쯤 떨어진 홍수림에 있다. 이 마을에는 베트남 전쟁 후 피난 온 베트남인들이 대부분 밀집되어 있으며 일부 크메르인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수상가옥을 이루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해지는 노을과 함께 어우러지는 톤레삽 호수는 장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경관을 볼 수 있는 행운은 없었나 보다. 우리가 타고 있는 유람선은 깜퐁 플럭(Kampong Phluk)’으로 갈 줄을 모르고 주위만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이드 말로는 갈수기(渴水期)가 그 원인이라지만 글쎄다. 아무래도 가이드가 믿기지 않았나 보다. 하긴 여행사에서 약속한 투어일정을 다 소화하기는 이미 어려워져 버렸다. 가이드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이 어쩌면 더 당연하다 할 것이다. 하여간 우리는 현지인들이 낚시하고 빨래하고 밥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풍경을 볼 기회를 놓쳐버렸다.

 

 

 

끝없는 건 물위에 떠있는 집들만이 아니다. 톤레삽 호수로 흘러드는 강은 대양(大洋)으로 나아가는 듯 드넓어져 수평선마저 보인다. 어느새 강은 사라지고 망망한 바다 같은 호수가 나타난다. 그렇다 이건 호수가 아니라 바다이다. 이곳보다 조금 더 넓다는 바이칼호수를 보고 일부 사람들이 바이칼 바다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말이다.

 

 

 

호수에서 살아가는 것은 동식물뿐만이 아니다. 호수를 젖줄 삼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삶을 만나는 것은 씨엠립 여행의 또 다른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캄퐁 플럭(Kampong Phluk) 뿐만이 아니다. 선착장까지 이어지는 도로변에도 수상가옥을 닮은 집들이 무수히 널려있다. 지금은 비록 나무로 만들어진 받침대를 앙상히 내밀고 있는 흉물스럽다면 흉물스러운 모습이지만, 우기(雨期)에는 물 위에 떠있는 집으로 변하는 것이다.

 

 

 

 

 

앙상한 다리를 드러내고 있는 가옥들 뒤는 널따란 들녘이다. 그 들녘에는 벼가 자라고 있다. 지금이 건기(乾期)이기에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금과 같은 건기 때에는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이지만 우기(雨期) 때에는 똔레삽 호수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지역의 사람들의 생활도 건기와 우기에 따라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물론이다.

 

 

 

캄보디아(Cambodia) 여행

 

여행지 : 캄보디아 앙코르(Angkor) 지역

여 행 일 : ‘14. 3. 22() - 3. 26()

 

전체 여행 일정

3.22() : 인천공항씨엠립공항

3.23() : 바래이 호수, 실크 팜, 민속촌

3.24() : 따프롬, 앙코르톰, 앙코르와트, 야시장

3.25() : 와트마이 사원, 툰래삽 호수, 쇼핑(상황버섯,목청꿀, 잡화, 보석)

3.26() : 씨엠립공항인천공항

 

실크 제조의 전 과정을 볼 수 있는, 실크 팜(Silk Farm)

 

특징 : 씨엠립의 실크 팜(Silk Farm)은 캄보디아 실크의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누에를 기르고,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고, 염색을 하고, 물레를 돌리고, 베틀에서 실크를 짜는 모습을 순서를 따라 볼 수가 있다. 이 실크 팜은 프랑스 정부가 지원하여 직업교육을 하는 기관으로 현재 1,000여명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실크 생산의 전 과정을 배우면서 직접 제품을 생산까지 하고 있다. '아티잔 앙코르(Artisan Angkor)'라는 사회적 기업(社會的企業, social enterprise)’이 운영하고 있는데, 캄보디아에서 자란다는 노란 고치를 만드는 누에와 뽕나무 밭이 펼쳐져 있는 광경이 신선하다. 특히 실을 잣고 다양한 염료로 염색을 하는 전 과정과 천을 짜는 모습을 세세히 볼 수 있다.

 

 

 

실크 팜(Silk Farm)’은 이름 그대로 비단 농장이다. 이곳에서는 아티잔 앙코르의 비단 직조를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아티잔 앙코르는 남아시아의 실크로드 영향 아래 13세기 출현한 전통 실크 직조법 '이캇(Ikat)'을 복원하여 승계했다고 한다. 씨엠립에 23곳의 실크 작업장이 있는데 이곳 푸옥 지역의 앙코르 실크팜(Silk Farm)’만 유일하게 대중에게 개방한단다. 이곳에서는 5헥타르 상당의 뽕나무 숲 경작부터, 누에치기, 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과정, 이캇 염색 및 실크 직조 과정을 참관할 수 있다. 전통 의상과 색깔 별 의미 등을 알려주는 전시관과 실크 제품을 살 수 있는 숍(shop)이 포함되어 있다. 따분할 수 있는 박물관이나 시장 대신 쾌적하면서 교육적인 볼거리를 찾는다면 한번쯤은 찾아볼만한 곳이다. 하긴 패키지를 따라왔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이미 일정에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첫 번째로 들어선 곳은 홍보관, 이곳 실크 팜의 운영주체인 '아티잔 앙코르(Artisan Angkor)'를 홍보하는 곳이다. '아티잔 앙코르'는 캄보디아의 전통 비단과 공예를 활용해 소셜 비즈니스(social business)를 펼친다. 1992년 국가지원으로 크메르 제국의 전통 공예를 계승하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 중반 직업 교육을 통해 일자리를 만드는 반국가민간기구로 확장되었다. 2003년 프랑스의 지원으로 캄보디아 자치 회사로 전환하였으며 이익의 전부를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시엠립 지역의 일자리 창출에 재투자한다. 2013년 통계로 48개 작업장에 13백 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으며, 이들에게는 캄보디아의 부문별 평균 임금보다 높은 급여와 의료보험 및 사회복지를 제공되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캄보디아 사회정책의 표본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보관은 왠지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마치 우리나라의 어느 체험관에 들어온 듯한 느낌인 것이다. 아마 패널(panel)의 설명이 모두 한글로 적혀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어서 실크 제품 전시관이다. 실크로 만든 각종 제품들을 마네킹에다 입혀 놓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왕과 왕비의 혼례복, 화려하기 짝이 없다.

 

 

 

 

 

 

 

 

 

이색적인 디자인이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누에고치를 옷에다 덧대어 놓은 것 같은 독특한 모양새이다. 하긴 이렇게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있기에 유네스코(UNESCO)상을 수차례나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아티잔들의 생산품은 빼어난 질과 디자인, 그리고 혁신성을 자랑한다고 알려져 있다.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나무판들도 보인다. 실크 제조과정에 필요한 도구인지, 아니면 다른 용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양한 색상의 실크 원단들도 진열되어 있다.

 

 

 

다음은 실크가 만들어지는 실제의 과정을 보여준다. 쉽게 말해 체험코스라고 볼 수 있겠다. 뽕잎을 주어가며 누에를 기르면, 그 누에가 자라서 고치를 만든다. 또 고치에서 원사(原絲, 명주실)를 뽑고, 그 원사를 가지고 실크를 짜는 전 과정을 바로 곁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코스이다.

 

 

 

 

 

 

 

 

 

 

 

누에로부터 실은 뽑는 과정은 여느 공장과 마찬가지다. 최신식은 아니지만 기계를 이용해서 실을 뽑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사람이 직접 실을 뽑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관광객들에게 옛날에는 어떻게 실을 뽑았었는지를 알려주려는 의도일 것이다.

 

 

 

 

 

다양한 색상의 원사(原絲, 명주실), 식물성 천연염료로 염색한 것이란다. 그리고 그 염료는 원사와 같이 놓여있는 식물들로부터 추출된단다. 아무튼 피부가 약한 사람들이 입으면 안성맞춤이겠다.

 

 

 

 

 

 

 

맨 마지막은 실크의 제조과정이다. 쾌적한 실내로 들어서면 작업에 열중하는 젊은 여성 직공들을 만난다. 가닥 가닥의 실을 틀림없이 짜 넣는 섬세한 손놀림을 통해 오색찬란한 비단이 직조(織造)된다. 정교한 무늬까지 넣어가면서 짜야하기 때문에 숙련된 손길이 필요한 과정이다. 때문에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꽤 오랫동안 훈련을 받은 선별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캄보디아의 실크는 얼마정도의 역사를 가졌을까? 1396년부터 11개월 동안 크메르에 머물다간 중국 사신(使臣) 주달관(周達觀)이 쓴 진랍풍토기에는 당시 이곳에서는 누에를 치거나 뽕나무를 키우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이로보아 캄보디아에 잠업(蠶業)이 들어온 것은 1300년대 이후 태국인들을 통해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맨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제품 판매장, 다양한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으나 사진은 찍을 수가 없었다.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디자인 보호차원일 것이다.

캄보디아(Cambodia) 여행

 

여행지 : 캄보디아 앙코르(Angkor) 지역

여 행 일 : ‘14. 3. 22() - 3. 26()

 

전체 여행 일정

3.22() : 인천공항씨엠립공항

3.23() : 바래이 호수, 실크 팜, 민속촌

3.24() : 따프롬, 앙코르톰, 앙코르와트, 야시장

3.25() : 와트마이 사원, 툰래삽 호수, 쇼핑(상황버섯,목청꿀, 잡화, 보석)

3.26() : 씨엠립공항인천공항

 

다양한 부족들의 문화와 전통을 엿볼 수 있는, 캄보디아 국립민속촌

 

특징 : 캄보디아 국립민속촌(Cambodian Cultural Village)은 캄보디아어로 품 왓보토아라고 부르는데 한국의 문화시설처럼 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는 편은 아니지만 캄보디아에서는 가장 잘 꾸며진 민속촌이라고 할 수 있다. 민속촌은 총 21의 면적에 수상부락 등 11개의 문화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마을에서는 소수민족의 춤이나 전통혼례, 놀이문화 등 다채로운 전통행사를 재현하고 있다. 그들의 풍습과 관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 밖에도 앙코르와트 전시관을 비롯해 유물과 주요 인물의 밀랍인형을 갖추어 놓은 박물관이 있다. 영어표지판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 있다.

 

 

 

표를 사서 들어가면 민속촌의 지도가 그려진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한번쯤 살펴보고 길을 나선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거기다 매표소에서 나누어준 지도와 공연시간표를 참조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말이다. 이곳 11개의 문화 마을에서는 각 마을마다 소수민족의 전통 춤, 혼례 문화 등의 다양한 공연과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그 중에는 관객들이 함께 참여하여 즐길 수 있는 행사들도 있어 보는 사람에게 더 큰 재미를 선사한다. 욕심껏 다 둘러보고 싶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빠듯할 것이다. 이럴 때는 꼭 보고 싶은 곳 위주로 몇 곳을 골라 둘러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맨 처음 들른 곳은 밀랍인형관’, 고대부터 현대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캄보디아의 히스토리(history)가 있는 곳이다. 앙코르시대 크메르인들의 생활상과 함께 고대부터 현재까지 내려오는 동안 캄보디아에서 살다 간 군상(群像)들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캄보디아의 역사와 풍속 등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앙코르와트의 건설 장면과 이웃 나라와의 전투장면이 아닐까 싶다. 하긴 앙코르와트를 짓던 시기의 이 나라는 베트남에서부터 인도의 접경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는 대제국이었다.

 

 

 

 

 

 

 

밀랍인형관에는 캄보디아의 역사적 인물들과 캄보디아인들의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밀랍인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인형으로 표현을 못한 부분은 뒤편에다 그림을 그려 이를 보완했음은 물론이다. 캄보디아인 생활 모습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볼 수 있는 좋은 곳이다.

 

 

 

 

 

 

 

 

 

 

 

민속촌은 막무가내로 걸어 다녀서는 안 된다. 생각보다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매표소에서 구할 수 있는 지도와 곳곳에 세워진 이정표를 참조하면 어렵지 않게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얘기는 다른 것이 아니다. 전체를 다 헤집고 다니는 것 보다는 꼭 들러보고 싶은 장소만 골라서 지도를 참조하며 둘러보라는 얘기이다.

 

 

 

 

 

어디를 가나 흔하게 보이는 망고, ‘한국의 대추나무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라는 가이드의 말마따나 망고나무가 주위에 널려있다.

 

 

 

 

 

민속박물관을 둘러봤다면 이번에는 공연을 봐야할 차례이다. 가는 길은 수상가옥을 지나게 된다. 길이 수상가옥을 연결해가며 나있기 때문에 가까이서 물 위에 지어진 집들을 접해볼 수 있는 기회이다.

 

 

 

 

 

뽀드득 뽀드득물위로 놓인 나무다리가 만들어 내는 소리가 여간 마음에 드는 게 아니다. 걷고 또 걷고, 무작정 걸어보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은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상가옥의 아래는 녹색으로 물들어 있다. 혹시 주변의 숲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살펴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어쩌면 녹조(綠潮)현상이지 싶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겠는가. 그런 물에 비치는 사물 하나하나 까지도 모두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말이다.

 

 

 

▼ 아기자기한 모습의 수상가옥, 짙은 초록과 황토 빛의 지붕이 만들어내는 조합이 인상적이다. 어쩜 아름다운 하늘빛이 주위의 모든 걸 안아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수상가옥을 지나면 잠시 후 고급목재로 잘 지어진 주택 앞에 이르게 된다. 크메르 우동시대의 저택인데, 캄보디아의 전통 건축양식 중 하나란다. 이곳에서 캄보디아의 전통 혼례가 공연된다.

 

 

 

공연의 내용은 캄보디아의 전통 혼례이다. 화려한 의상과 배우들의 연기가 볼만 하지만 하나 아쉬운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캄보디아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극의 내용은 대충 눈치로 감을 잡을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극을 보다가 스케일이나 내용 등이 좀 작거나, 부실하다고 생각된다면 이때는 대극장으로 가면 된다. 출연자가 100명도 넘는다는 자야바르만 7세 대제전이라는 특별공연이 열리니까 말이다. 그러나 매일 열리는 것은 아니니 미리 알아보고 가야할 일이다. , , 일 야간에만 열린다니까 말이다. 물론 우리도 그런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다. 일정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곳 민속촌의 특징 중 하나는 공연이 끝난 후 공연단들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캄보디아 전통의상을 입은 공연단들이 들어간 사진은 오래오래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화교(華僑)마을, 이들은 아크로바트(acrobat) 위주의 전통공연을 펼친다. 혹시라도 중국에 여행 가서 그들이 펼치는 서커스를 구경했을지 모르겠다. 만일 보았다면 그때와 비교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허접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곳은 캄보디아, 이들만의 색깔을 지닌 공연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지역적 특성을 감안하고 관람하라는 얘기이다.

 

 

 

 

 

 

 

 

 

 

 

 

 

캄보디아의 화교들은 송나라 이전부터 캄보디아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주민 대부분은 상업과 농업에 종사하였단다. 종교는 물론 불교이다.

 

 

 

 

 

맨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크롱 마을 (Kroeung Village), ‘신랑 고르기라는 공연(公演)이 열리는 곳이다. 이 공연은 시집갈 나이가 된 처녀가 짝꿍을 고르는 내용으로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공연이자, 민속촌을 찾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가장 돋보였던 세 명의 남자들, 익살스런 말투와 표정으로 관객들을 시종일관 웃게 만드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그들의 제스처(gesture)나 표정 하나하나가 극에 몰입하고 있었고, 극의 중심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을 때에도 공연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관람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을 골라 공연에 합류시키는 것이다. 참여하고 싶은 이들이 손을 들게 하는 방식이었는데, 희망자가 없을 때에는 임의로 대상자를 고르는 방법이다. 오늘은 뒤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 수혜자는 파란 눈의 서양인, 진행자가 그를 지명하자마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극에 참여한다.

 

 

 

 

 

역시 서양인들의 사고(思考)는 적극적인 게 맞나보다. 어떻게 보면 민망스럽다고 느껴질 정도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더니 여자 주인공과의 혼인(婚姻) 장면을 넉살 좋게 연출했기 때문이다. 조금도 창피해하지 않고 배우들의 안내에 따라 잘 움직여 주었다.

 

 

 

 

캄보디아(Cambodia) 여행

 

여행지 : 캄보디아 앙코르(Angkor) 지역

여 행 일 : ‘14. 3. 22() - 3. 26()

 

전체 여행 일정

3.22() : 인천공항씨엠립공항

3.23() : 바래이 호수, 실크 팜, 민속촌

3.24() : 따프롬, 앙코르톰, 앙코르와트, 야시장

3.25() : 와트마이 사원, 툰래삽 호수, 쇼핑(상황버섯,목청꿀, 잡화, 보석)

3.26() : 씨엠립공항인천공항

 

돌 조각의 진수를 보여주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앙코르 와트(Angkor Wat)

 

특징 : 서기 802년부터 1430년경까지 크메르 왕국의 중심이었던 거대한 사원으로 앙코르(Angko)’는 크메르어로 도시 또는 수도’, 그리고 와트(Wat)’는 태국어로 사원'을 뜻한다. 이는 15세기 태국 아윳디야(Ayudhya)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태국의 소승불교와 함께 태국어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붙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앙코르와트는 거대한 인공저수지 위에 뜬 섬으로 좌우대칭형 직사각형 형태를 취하며 총면적이 210ha에 이른다. 현재의 건축물은 서기 1113~1150년경 사이에 수리야바르만 2(1113-1150)가 세웠는데, 거대한 힌두교의 비슈누 신을 봉안해 두고 자신이 곧 신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후에는 자신의 분묘(墳墓)로 삼았다. 앙코르와트는 세계 최대의 석조(石造) 사원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pyramid)나 중국의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건축물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힐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1980년 프랑스 탐험가 앙리 모어가 오치를 탐험하다가 밀림 속에서 이 유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꼭꼭 숨어있었던 것이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유적지 중 가장 큰 사원이며 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크메르 건축 예술의 극치를 이루는 역사적인 예술품이다. 이 사원의 구성, 균형, 설계 기술, 조각과 부조 등의 완벽함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앙코르와트는 우주의 축소판이란다. 사원의 정 중앙에 세워진 중앙 탑은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Sumeru, 須彌山,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을 상징하며 5개의 탑은 메루산의 5개의 큰 봉우리를 나타낸다. 성벽은 세상 끝을 둘러 싼 산맥을 뜻하며 둘러싼 호수는 우주의 바다를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앙코르와트가 지니는 건축적 의미는 3층 중앙 탑들이 있는 곳은 천상계(天上界), 2층은 인간계(人間界), 그리고 1층은 축생계(畜生界)를 의미한다고 한다.

 

 

 

앙코르 와트는 중앙에 있는 신전(神殿)을 세 겹의 회랑(回廊)이 감싸고 있으며 바깥쪽에는 주벽(周壁)을 만들고 그 외부에 저수지(해자,垓字)를 배치했다. 또 사원 안에 40m의 작은 연못을 남쪽과 북쪽에 한 개씩 만들고, 주벽을 4.5m의 높이로 쌓아올려 사원을 속세와 구분 짓는 공간 개념을 반영했다. 중앙사원과 4개의 망루(望樓), 그리고 첨탑들은 지상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성스러운 산인 메루(Meru)를 나타내고, 성벽 밖의 해자는 대양, 그리고 중앙의 신전은 신왕(神王)의 권위를 상징한다.

 

 

 

 

 

 

앙코르와트는 인공호수(人工湖水)가 사원을 둘러싸고 있다. 깊이가 대략 3m정도 된다니까 해자(垓字)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해자의 폭은 약 260, 길이는 약 5.5에 이른다고 한다. 해자 위의 다리를 건너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해자의 안쪽 주벽(周壁)을 경계로 신의 세계와 인간세계로 나뉜다니 지금 난 신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는 셈이다.

 

 

 

 

 

 

 

해자(垓字)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서 바라본 앙코르와트, 비록 사진에는 전체 모습이 모두 잡히지 않지만 사원(寺院) 전체가 물에 포위되어 있는 모양새이다. 물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진입로를 걷다보면 바닥 중앙선을 경계로 양쪽이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이곳을 보수했던 나라와 방법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란다.

 

 

 

해자를 건너면 탑문이 기다린다. 서쪽으로 난 문으로써 정문이라고 보면 된다. 앙코르와트는 사면(四面)에 출입문이 있다고 한다. 출입문은 주벽의 동, , 북에 각각 하나씩 있으며 정문인 서쪽에는 다섯 개나 된다. 서쪽 정문의 출입구 가운데 두 개는 코끼리 부대와 기마 부대인 주력군이 출입할 수 있도록 군사용으로 활용되었으며, 나머지 세 개는 바라문을 비롯한 출입자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탑문에 부조(浮彫)되어 있는 압사라, 압사라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 옆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도 빼어나다.

 

 

 

 

 

탑문(塔門)을 지나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앙코르와트의 본 건물이 나타난다. 우리가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그 건물이다. 뾰쪽한 세 개의 거대한 탑()이 솟아있다. 탑의 모양은 줄기가 점점 가늘어지는 연꽃 모양 또는 원뿔형으로 생겼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두 개가 더 있다. 이는 잠시 후에 알게 된다. 옆에서 볼 때는 3 기단(基壇)’의 모서리에 1개씩, 그리고 가운데에 가장 높은 탑 1개가 서 있는 것이다. 참고로 앙코르와트는 남북(南北)의 길이 1.3km에 동서(東西)1.5km에 이를 만큼 광대한 피라미드형 사원이다. 건물은 개방형으로 건축되었으며 좌우 대칭미(對稱美)와 뛰어난 시각성(視覺性)을 자랑한다. 출입구가 서쪽을 향해 있고 건축의 중심축이 서-동으로 전개되어 있는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신전으로 가는 길에 뒤돌아본 탑문(搭文)

 

 

 

탑문에서 신전까지는 다리모양으로 생긴 진입로가 놓여있지만 어느 정도에서 왼편으로 내려선다. 앙코르와트의 장관이 제대로 나타난다는 사진촬영 포인트를 찾아서이다. 앙코르와트가 연못의 수면 위로 투영(投影)되는데, 다섯 개의 첨탑까지 온전하게 나타나는 것이 어디에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장관이라는 것이다.

 

 

 

왼편으로 내려서면 화려하게 지어진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도서관 역할을 하던 장서각(藏書閣)이란다. 신전(神殿)으로 들어오는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각각 하나씩 대칭(對稱)으로 세웠다니 우리는 지금 왼편의 장서각 앞에 서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장서각은 좀 특이하다. 보통 앙코르와트의 장서각(예로 들면 반띠아이 쓰리, Banteay Srei)들은 실제로 책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실내의 벽면에 부조(浮彫)를 새겨 건물 자체를 아예 경전(經典)으로 만들어 놓았다. 글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을 위해서이다. 티베트불교의 마니챠(이것을 한 번 돌리면 경전 한 권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함)나 우리 사찰의 외벽을 장식하는 탱화불화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벽면엔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다. 물론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건물의 배치로 보아 장서각으로 분류했을 뿐이란다.

 

 

 

장서각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연못이 나온다. 이 또한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각각 하나씩 대칭으로 배치했단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뿐이 보이지 않는다. 건기(乾期)라서 물이 마른 것이 원인인데, 다행히 왼편은 인공적(人工的)으로나마 물을 채워 넣었단다. 그러나 상태는 썩 좋지 않다. 연못의 물 위로 나타나는 앙코르와트의 건물이 또렷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는 것이다. 연못의 물 상태가 좋지 않아 수면이 잔잔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사진촬영 포인트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셈이다. 비록 찾아온 시기가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앙코르와트를 옆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다섯 개의 탑()이 보인다.

 

 

 

측면에서 앙코르와트의 전모(全貌)를 보았다면 이젠 신전(神殿)으로 들 차례이다. 신전으로 들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긴 회랑(回廊)이다. 앙코르 와트는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중앙 탑을 안에 두고 세 겹의 회랑(回廊)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중에서 가장 바깥에 있는 회랑이 가장 뛰어난 시각성(視覺性)과 회화성(繪畫性)을 자랑한다. 회랑의 벽면에는 크메르인의 신화, 왕의 행군도, 천국과 지옥 이야기 등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두루마리 그림을 펼쳐놓았다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이층의 회랑을 감고 도는 430미터의 벽에는, 1500명의 무희가 압사라(Apsaras) 춤을 추고 있다.

 

 

 

 

 

회랑(回廊) 부조(浮彫)의 주요 장면은 대략 열 종류로 나뉜다고 한다. 서쪽 정면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쿠루평원의 전투, 시바신(남서쪽 모서리), 수리야바르만왕의 행진(남쪽벽 서측면), 천국과 지옥(남쪽벽 동측면), 유유바다 젓기(乳海攪拌, 동쪽벽 남측면), 비슈누신과 아수라(동쪽벽 북측면), 크리슈나와 아수라인 바나의 전투(북쪽벽 동측면), 21명의 신과 21명읭 아수라(북쪽벽 남측면), 비슈누신(동서쪽 모서리), 랑카의 전투(서쪽벽 북측면) 등이 새겨져 있단다.

 

 

 

 

 

인간세상을 의미하는 2층의 회랑(回廊)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 십 개의 기둥이 서 있는 다주실(多柱室) 건물을 통과해야 한다. 이 곳이 십자회랑(十字回廊)이다. 두 회랑 사이에 황금으로 덧칠한 기둥이 십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십자회랑이라 부른다. 앙코르와트에서 유일하게 넓은 공간이다. 2층의 회랑에는 천상의 무희 압사라(Apsaras)가 끝없이 새겨져 있다. 그 숫자가 무려 1500명에 이르고 길이도 430미터나 된단다. 머리카락부터 보석 장신구까지 섬세하면서도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데, 더 특이한 것은 같은 모양의 압사라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곳에 있는 장서각, 이곳 앙코르와트에는 장서각이 6개가 있단다. 그중 아까 신전으로 들어오면서 뜰에서 보았던 두 곳은 일반 국민들을 위한 시설이고, 이곳은 승려용, 그리고 이층에 있는 것은 왕족들이 사용했단다.

 

 

 

 

 

 

 

회랑을 돌다보면 다양한 불상(佛像)들을 만날 수 있다. 비록 처음에는 힌두교식으로 지어졌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일 것이다. 실제로 불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신자들도 많이 보인다.

 

 

 

 

 

2층의 회랑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건축으로 표현한 곳이기 때문에 회랑 내부가 어둡다. 우선 서쪽에는 하나의 창문만 있고 남쪽 75m 길이에는 9개의 창문이 나있다. 반면 동쪽에는 26(북측 14, 남측 12), 북쪽은 32개의 창문이 나있다. 이들 창문은 달의 주기를 의미한다.

 

 

 

 

 

밀림 사이로 군데군데 위치한 앙코르 사원들을 내려다보인다.아침이면 이 부근은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고 한다. 중앙탑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日出)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여행자들이 주인공이란다. 하여간 이곳에서는 앙코르와트의 전모(全貌)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경이롭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훼손된 부분까지도 말이다. 완벽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안에 든 난 갑자기 신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위에서 본 앙코르와트는 마치 정글의 한가운데에 있는 요새(要塞)와 같은 느낌이다. 아니 정글에 포위된 느낌이라고 볼 수 있다. 하긴 그래서 20세기, 그것도 말()에 가까워져서야 세상에 알려졌을 것이다.

 

 

 

 

 

이층의 인간계에서 바라본 삼층은 신의 영역이다. 네 곳 귀퉁이에 각각 탑이 세워져 있고, 중앙에 또 다른 탑이 하나 더 있다.

 

 

 

 

앙코르와트는 미물계인 1층과 인간계인 2, 그리고 3, 즉 신들의 영역인 천상계로 이루어졌다. 그중 중앙탑이 있는 3층은 왕과 승려들만 출입이 가능했다고 한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그 경사(傾斜)가 엄청나게 가파르다. 70도 정도로 가파른 것만 해도 아찔한데 계단의 폭 또한 장난이 아니다. 어른들이 디딜 경우 발의 앞꿈치 정도만 겨우 걸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것이다. 신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인간들이 두발로 꼿꼿이 서서 올라가지 못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이 계단을 오르려면 허리를 구부리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사용해야 겨우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위태로운 것이다. 또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3층에 오를 때에는 반바지 차림이나 모자를 쓰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계단의 입구에서 제지를 당하니 미리 조심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참 모자는 벗어서 손에 들고 가면 된다.

 

 

 

 

삼층으로 오르는 기존의 계단 옆에다 여행객들을 위해 새로운 계단을 하나 더 만들었다. 이는 유적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여행객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불교신자가 아니라는 점도 감안되었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오르지는 말자. 3층의 중앙신전은 당시에 왕과 최고의 사제들만이 출입하도록 제한했을 만큼 성스러운 곳이었다. 신들이 거주하는 우주의 중심 메루산이며, 비슈누신이 강림하여 왕과 신이 일체화하는 장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들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올라가보자는 얘기이다.

 

 

 

 

 

중앙신전은 새로운 왕이 등극할 때마다 엄숙한 의식을 거행하여 국민들에게 신왕사상(神王思想)을 주입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만다라(Mandala : , (), 차륜 등 완전무결과 무수한 원심을 가진 원을 상징) 세계를 이루어 나가려 했다. 만다라는 중앙에서 시작하여 바깥으로 세계를 구성해 간다. 최고의 신이 사방과 주변의 신을 창조하여 만다라를 채워간다. 즉 앙코르와트는 바로 우주의 중심 메루(Meru 또는 Sumeru, 須彌山)산을 중심으로 우주적인 만다라를 이루고 바깥을 향해 시간과 공간을 채워가는 형식의 비슈누 사원이다.

 

 

 

 

삼층의 회랑에도 다양한 불상들이 모셔져 있다.

 

 

 

삼층의 중앙탑까지 다 둘러봤다면 이젠 되돌아 나갈 차례이다. 그렇다고 발걸음을 재촉할 필요는 없다. 다시 이곳을 찾아오기가 쉽지만은 않을 터이니 대충 지나쳤던 곳이 있다면 다시 한 번 둘러볼 일이다. 그만큼 이곳 앙코르와트는 대충 보아 넘길 만큼 허술한 곳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신전을 빠져나오는 길에 고개를 돌려보면 다시 한 번 앙코르 와트가 나타난다, 앙코르와트는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사원(寺院)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기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앙코르 와트가 신()들을 위한 사원인지, ()의 장제전(葬祭殿, mortuary temple)인지 건축용도를 둘러싸고 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다. 프랑스의 고고학자 조르쥬 세데스(Geore Cœdès1886 1969)’는 비뉴수신에게 바쳐진 신전이었으나 수리야바르만왕의 사후에는 왕의 묘가()가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캄보디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과도 는 같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앙코르 유적 사원의 대부분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반해, 앙코르 와트만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묘지였을 거라고 주장한다.

 

 

 

되돌아 나올 때는 아까 들어갔던 북쪽이 아닌 남쪽을 따른다. 숲속으로 난 길이다. 숲속을 걷다가 문든 떠오르는 생각, 아마 호젓한 숲길이 여유로웠던 모양이다. 우리는 흔히 캄보디아에 간다.’는 말보다는 앙코르와트에 간다.’라고 하는 게 더 익숙하다. 무슨 이유일까? 캄보디아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어감이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던 게 그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킬링 필드(Killing Fields)’에서의 그 끔찍했던 장면들이 쉽게 지워질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가 앙코르와트라는 건축물 하나로 부정적인 인상을 완전히 지워버린 셈이다. 앙코르와트가 그만큼 뛰어난 건축물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해자를 건너면 우린 또 다시 인간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인간들이 내품는 열기 속으로 빠져든다. 기념품이나 과일, 음료수 등을 팔고 있는 허접한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곳, 우리네 이웃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인 것이다.

 

 

캄보디아(Cambodia) 여행

 

여행지 : 캄보디아 앙코르(Angkor) 지역

여 행 일 : ‘14. 3. 22() - 3. 26()

 

전체 여행 일정

3.22() : 인천공항씨엠립공항

3.23() : 바래이 호수, 실크 팜, 민속촌

3.24() : 따프롬, 앙코르톰, 앙코르와트, 야시장

3.25() : 와트마이 사원, 툰래삽 호수, 쇼핑(상황버섯,목청꿀, 잡화, 보석)

3.26() : 씨엠립공항인천공항

 

나무 요정들이 살고 있는 비밀의 사원, 따프롬(Ta Prohm)

 

특징 : 따 프롬(Ta Prohm)’이란 브라마의 조상이라는 뜻으로 자야바르만 7가 그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원이다. 앙코르왕국의 가장 위대한 왕이라 칭송받는 이가 지었으니 그 규모나 컸었음은 물론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비문(碑文)에 의하면 3.140개의 마을을 관리하고 79.365명이 사원을 관리하였으며 고승(高僧) 18명과 관리(官吏) 2.740명 그리고 인부 2.202명과 무희(舞姬) 615명이 있었다고 한다.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세계 방방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자연이 만들어 낸 파괴와 융합의 이중성(二重性) 때문이다. 정글처럼 나무뿌리가 사원의 기둥과 지붕을 감싸 안거나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나무를 죽일 수도 없단다. 그럴 경우에는 그나마 남아 있는 사원 자체조차 무너져 버린다는 것이다. 나무가 건물에 해를 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오늘은 앙코르(Angkor)지역 유적들을 둘러보는 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유적지 매표소(Main Entrance)까지 와야 한다. 그리고 일단 표부터 사야한다. 1인당 20(USD), 꼼꼼히 다 둘러보고 싶다면 3일짜리(40USD)는 사야 할 것이다. 그 정도로 유적군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물론 1일 이용권이다. 역사 공부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니 대충 둘러보기만 할 요량이다.

 

 

 

 

 

 

 

 

 

 

매표소 앞에서 돈을 내면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즉석에서 아래와 같이 사진이 콕 박힌 입장권을 건네준다. 혹시라도 생길지 모르는 공짜 손님을 막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아니면 자기 돈이 아니라고 해서 건성건성 할지도 모르는 캄보디아 직원들을 못 믿어서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사실 이 입장료는 전액 다 이웃나라인 베트남에서 가져간단다. 이유는 캄보디아를 침공했던 베트남군()이 철군하는 조건으로 앙코르유적의 관리권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적의 구경은 툭툭이를 타면서 시작된다. 오늘의 첫 방문지는 따 프롬’, 이어서 앙코르 톰앙코르 와트를 계속해서 둘러볼 계획이다. 그런데 그 유적지들 간의 거리가 만만치 않다. 걷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라는 얘기이다. 그렇다고 전세버스를 이용할 수도 없단다. 아예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유적들의 보호를 위해서일 것이다. 이때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바로 툭툭이이다. 툭툭이는 이곳 캄보디아 등 동남아의 대중적인 운송수단 중 하나이다. 바퀴 2개로 된 좁은 공간에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놓았다. 물론 동력(動力)은 오토바이다. 오토바이가 뒤편의 차체(車體)를 끈다는 얘기이다. 차창이 없이 사방으로 뻥 뚫렸기 때문에 차가 달릴 경우 시원한 바람이 맘 놓고 들어온다. 눅눅하고 더운 캄보디아 기후에서는 선풍기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툭툭이를 달리면서 주변 경관에 푹 빠져본다. 툭툭이가 달림에 따라 주위 풍경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풍경은 거침이 없다. 차창이 없는 툭툭이의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툭툭이는 널따란 강변을 달리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성벽(城壁)을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가 어딘지는 알 수가 없다. 설마 앞에서 오토바이를 몰고 있는 이 캄보디아 총각이 가이드 역할까지 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저 수시로 변하는 볼거리들을 바라보며 눈의 호사(豪奢)만 즐기면 된다.

 

 

 

 

 

 

 

 

얼마쯤 달리니까 그만 내리라고 한다. ‘따 프롬에 다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이 따 프롬의 어디쯤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허물어져가는 성문으로 들어설 따름이다. 혹시 동쪽 탑문이 아닐까 싶다.

 

 

 

성문을 통과하고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만 따 프롬의 본 건물을 만날 수 있다. 따프롬은 동서 1km에 남북 600m의 주벽(周壁)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사원이다. 한참을 걸어야만 본전(本殿)에 이를 수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본전으로 가는 숲길은 갈수록 점점 깊어진다. 그리고 나무들 또한 거침없이 굵어진다.

 

 

 

 

 

얼마쯤 걸었을까 다 쓰러져가는 낡은 사원(寺院)이 나타난다. 쇠파이프에 의지해 겨우 서있는 건물이 위태롭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 옆에는 죽어있는 나무가 한 그루 보인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좀 부풀려서 표현을 한다면 나무 그루터기 안에다 살림집을 차려도 될 정도로 말이다.

 

 

 

 

 

 

 

 

 

사원의 내부로 들어가면 그 나무의 크기는 더욱 굵어진다. 그리고 그 나무들은 하나같이 사원을 감싸고 있다. 이는 폐허(廢墟)가 된 사원(寺院)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과 하나가 되어버린 인상적인 풍경이다. 처음 사원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나무의 역할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져가는 건물의 지지대 역할을 해주는 공생(共生)관계로 변하게 된 것이다.

 

 

 

 

 

건물을 뚫고 나온 나무들이 기둥과 벽을 감싸고 있다. 어떻게 보면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모양새가 하도 특이하다보니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은 모양이다. 이런 곳에는 어김없이 포토죤(photo zone)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나무들은 어느 것 하나 똑같은 모습이 없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기괴하지 않은 생김새가 없다. 신비스러움을 넘어 괴기스러움으로 진화해버린 것이다. 하긴 그렇기에 영화의 배경까지 되었지 않았겠는가. 따프롬은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액션과 판타지에 모험까지 곁들인 영화 툼 레이더(Tomb Raider)’에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유적이다. 여러 개의 팔이 달린 불상(佛像)이 덤벼드는 유명한 액션 장면의 배경지로 나왔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나무로 인한 붕괴(崩壞)로 통행이 불가능해진 곳이 많다. 그리고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상상을 초월하는 굵기의 나무들이 보인다. 무너져가는 건물은 어찌 보면 흉한 모습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기괴하게 보이기도 하다. 거의 다 무너진 폐허와 이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이 어우러지며 상상을 초월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지어질 당시만 해도 3천명에 가까운 승려들이 살던 큰 사원이었으나 언제부턴가 내버려졌고, 이제는 돌기둥과 천장이 무너져 내린 채로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다. 다 무너져 내린 폐허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나무들, 그리고 그 폐허의 속살까지 파고 든 나무뿌리들은 신비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앙코르에 갈 경우 꼭 들러봐야 하는 곳으로 주저 없이 추천하는 모양이다.

 

 

 

 

 

▼ 따 프롬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사원(寺院)이다. 무너진 돌 더미가 통로를 막고 있고, 거대한 쉬펑나무 뿌리는 허물어져 가는 담벼락을 완강히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1860년 발견 당시부터 사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나무들인데, 새가 먹이로 먹은 씨앗이 배설물을 통해서 다시 싹을 틔웠고, 그것이 현재의 모습으로 자란 것이란다. 헌데 이 나무는 생명력이 무척 강한 모양이다. 번개를 맞아 다른 나무는 다 죽어도 이 나무는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렇게 생명력이 강한 나무가 못 뚫을 게 뭐겠는가. 오랜 세월을 이어오면서 사원을 완전하게 포박(捕縛)해 버렸다. 나무는 지금도 자란다. 나무가 자랄수록 사원을 더 파괴시키지만 베어내거나 죽일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럴 경우 빈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한꺼번에 그나마 남아있던 것마저도 무너져버린 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대로 살려두면서 성장을 더디게만 만든단다. 사원의 무너져가는 속도를 조금 더디게 만드는 셈이다.

 

 

 

 

 

앙크루 왓의 모든 건축물을 겉으로 보기에는 다 사암으로 쌓아 놓은 것 같지만 실상은 라테라이트(Laterite) 벽돌로 지어진 것이란다. 이 벽돌은 적토인 라테라이트 진흙에 개미집과 꿀, 이앵나무(학명은 Dipterocarpus alatus)에서 나오는 수액들을 배합하여 말려서 만든 벽돌이라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벽돌은 제주도의 현무암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다. 벽돌에 습기가 찰 것은 당연하다. 나무들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벽돌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습기와 양분을 먹으며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가 굵어지면서 사원들을 파괴하게 되고 말이다.

 

 

 

 

 

 

 

 

 

 

 

따프롬은 캄보디아 앙코르 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 자야 바르만7(1181~1220)가 어머니를 위해 건축한 사원이다. 그래서인지 사원의 중앙부에 중앙 성소(中央 聖所)’를 배치해 두었다. ‘어머니의 방이라고도 불리는 공간으로 채광(採光)이 잘되고 구멍들이 일정하게 뚫려 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이 안에다 진귀한 보석들을 가득 채웠단다. 첩으로 살아야했던 모친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500kg이 넘는 황금접시가 한 쌍, 35개의 다이아몬드와 40,062개의 진주, 4,540의 루비 그리고 싸파이어 512개로 채워졌었다는 이 공간은 지금은 텅 비어있다. 그리고 담겨있던 구멍만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세월의 무상함이라고나 할까.

 

 

 

 

 

15세기 크메르 제국이 앙코르에서 남으로 쫓겨난 뒤 앙코르를 덮친 것은 시암족(태국)이 아니라 더디지만 놀라운 자연의 힘이었다. 앙코르 유적(遺跡), 아니 어느 유적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적의 복원(復原)이 진행되면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이 만들어 놓은 흔적들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이곳 따프롬만큼은 그 흔적들을 지울 수가 없었단다. 그 흔적들을 지울 경우 유적 자체의 존립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란다. 유적과 나무들이 공존해가고 있는 이유이다. 어떻게 보면 볼상사나울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밀림에 묻혀있던 당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정점도 있다.

 

 

 

 

 

자연 앞에 인간 왜소(矮小)할 뿐이다. 그 인간이 만들어 낸 업적 또한 미미할 수밖에 없다. 열대의 밀림은 수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에 이토록 완벽히 사원을 자연의 일부로 만들어버렸다. 밀림은 담을 허물고 탑문을 부쉈다. 그리고 회랑(回廊) 안까지 침범하여 도저히 사람이 들어 다닐 수 없도록 만들어버렸다. 위대한 자연의 섭리에 경외(敬畏)를 드려야 하는 이유이다.

 

 

 

 

 

마치 거대한 문어를 닮았다. 그 육중한 다리들이 사원의 벽을 집어삼킬 듯 움켜쥐고 있다. 자연의 힘이 인간의 힘을 이기는 모양새이다. 그게 사람들의 눈에는 경외로 비쳐졌던 모양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카메라에 주워 담기 바쁜 것을 보면 말이다.

 

 

 

 

 

사원의 거의 대부분은 사람의 통행마저도 어려울 정도이다. 곳곳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이리 저리 미로 속을 헤매고 나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밖에서 본 따프롬사원은 그저 숲 속의 작은 폐허에 불과했다. 그리나 나에겐 또 하나의 교훈을 얻게 해준 고마운 곳으로 남았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얼마 전 막을 내린 연속극 주인공들 이름이 아니라 인생의 허무함을 이르는 말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되돌아가는 게 인생일진데 뭘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살아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최고로 화려하게 사원을 짓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수많은 보석으로 치장까지 했었다는 사원도 끝내는 저렇게 폐허로 변할 수밖에 없는 게 순리인데도 말이다. 인생 또한 저와 같지 않겠는가.

 

 

캄보디아(Cambodia) 여행

 

여행지 : 캄보디아 앙코르(Angkor) 지역

여 행 일 : ‘14. 3. 22() - 3. 26()

 

전체 여행 일정

3.22() : 인천공항씨엠립공항

3.23() : 바래이 호수, 실크 팜, 민속촌

3.24() : 따프롬, 앙코르톰, 앙코르와트, 야시장

3.25() : 와트마이 사원, 툰래삽 호수, 쇼핑(상황버섯,목청꿀, 잡화, 보석)

3.26() : 씨엠립공항인천공항

 

천년의 미소를 간직한 돌의 축제장, 앙코르 톰

 

특징 : 앙코르(angkor)는 산스크리트어로 왕궁도시를 뜻하는 나가라(nagara)에서 파생된 단어로 도시국가를 지칭하는 말이며, (thom)은 형용사 커다란이란 뜻이다. 고로 앙코르 톰(Angkor Thom)이란 곧 대도시 국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자야바르만 7(1181-1219)에 의해 지어졌는데, 높은 성벽을 세우고 다섯 개의 성문을 만들어 출입을 통제하는 한편 도성 밖에 환호(環濠, 해자)를 만들어 이중의 견고한 방어막을 만들었다. 이는 1177년 참파군의 침략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왕도를 요새화하기 위해서란다. 그 덕분에 앙코르 톰은 1431년 태국의 세력이 침입하여 도성을 함락시킬 대까지 2세기 동안 영광의 빛을 간직하였다. 이름 그대로 앙코르 톰한 변이 3km, 높이가 8m에 이를 정도로 크다. 한 가운데에 국가사원인 바이욘이 위치해 있고 바푸온 사원을 비롯하여 왕궁, 코끼리 테라스, 나왕의 테라스, 텝 프라남, 프레아 파릴라이, 프레아 피투, 크레앙과 같은 수많은 유적이 모여 있다.

 

 

 

 

앙코르 톰에는 다섯 개의 성문이 있다. ‘바이욘 사원을 축으로 남문(정문), 동문(死者의 문), 서문, 북문이 있으며 왕궁 앞 광장에서 동쪽을 향해 승리의 문이 하나 더 있다. 승리의 문은 700km 떨어진 참파로 향하는 출발점인데 자야바르만 7세의 영토 확장과 과거 앙코르의 함락에 대한 복수의 의미가 깔려 있는 곳이란다. 투어는 승리의 문으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안으로 들면 허물어져가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크레앙(끌리앙, Kleang)이란다. 크레앙은 저장고를 의미한다고 하니 아마 창고용으로 지어졌나 보다. 이 유적은 승리의 문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하나씩 서 있는데, 12개의 탑인 수오르 프랏뒤에 위치해 있다. 북 크레앙(North Kleang)은 라젠드라바르만 2세 때 목조로 건축된 후, 자야바르만 5세와 수리야바르만 1세 때 사암을 이용하여 다시 지은 것이다. 외국의 사신(使臣)들을 접견하던 장소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하니 참고할 일이다. 아래 사진은 프라삿 수오르 프랏(Prasat Sour Prat)이다. 크메르인들은 정월이 되면 탑과 탑 꼭대기에 밧줄을 연결하여 그 위에서 줄타기를 했는데, 국왕은 왕궁 앞의 테라스에 앉아 이 광경을 구경했다고 한다. 사원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하여 밧줄 타는 탑’(Tower of Cord Dancer)으로도 불린다. 참고로 프라삿(Prasat)이란 남인도 사원에서 테라스가 있는 피라미드형 사원을 지칭하며 원어는 프라사다(prasada)이다.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이 탑에 올라서 일종의 신판(神判)으로 죄를 가렸다고 기록도 있으니 알아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크레앙을 지나면 성벽을 연상시키는 긴 석조물이 나타난다. 코끼리 테라스(Elephant Terrace)이다. 왕궁 광장 앞에 위치하는데 자야바르만 7세 때 건축되었단다. 바푸온 사원에서부터 나왕의 테라스까지 약 300m 길이에 실물 크기의 코끼리, 가루다(인도 신화에서 나오는 상상의 새), , 폴로게임과 유사한 추각 게임장면 등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각 계단의 입구는 머리가 셋 달린 코끼리 아이라바타(Airavata)들이 지키고 있다. 코끼리가 코로 연꽃을 모으고 있는 형상이란다.

 

 

 

 

 

코끼리 테라스는 문둥이 왕 테라스(Leper King Terrace)’까지 뻗어있다. 이 테라스의 백미(白眉)는 실물크기의 코끼리 옆모습 조각이다. 코끼리 행진(Parade of Elephants)을 테라스의 양쪽 끝에 입체적으로 새겨 놓았다.

 

 

 

 

 

코끼리테라스의 사자상(獅子像)은 엉덩이를 들고 있다. 이는 10세기 이후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적이 언제 쳐들어오더라도 분연히 대항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10세기 이전, 그러니까 크메르제국이 안정적이었을 때는 엉덩이를 낮은 자세로 하고 앉아있는 형상이란다. 사자의 형상만 보고도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테라스 앞의 너른 광장은 평소에는 왕의 정원(庭園)으로 사용되었다. 국가의 공식행사는 물론 군대의 사열이나 외국 사신의 영접도 여기서 했다. 이 때에는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각종 대규모 행사가 열렸던 장소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코끼리테라스에서 작은 석문(石門)을 통과하면 피메아나카스(피미아나카스, Phimieanakas)이다. 황금의 탑에서 국왕이 머리가 아홉 달린 뱀왕의 딸(nagi)과 밤마다 잠을 잤다는 설화를 간직한 이 사원은 자야바르만 4(?) 때부터 건축이 시작되어 라젠드라바르만 2, 수리야바르만 1세에 의해 성문과 성벽이 완성되는 등 후대의 왕들에 의해서 설계 변경이 이루어졌다. 사원의 이름은 천상의 궁전, 공중누각(산스크리트어로는 vimanaakasa)’이란 뜻을 가졌지만 왕궁이 아니라 사원이다.

 

 

 

 

 

 

 

 

 

라테라이트로 지었으며 1층은 35x28m, 최상층은 30x25m에 이르나 회랑의 폭은 1m에 지나지 않는다. 사원 북쪽에는 125x45m의 남자의 연못이 있고 동쪽에는 40x20m의 여자의 연못(srah srei)이 있다. 1944년까지 네 차례나 복원되었다.

 

 

 

 

 

 

 

피메아나카스를 둘러봤으면 이번에는 힌두교사원인 바푸온(Baphuon)사원이다. ‘아들을 숨긴 사원이란 뜻이란다. 두 형제가 태국과 캄보디아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는데 태국 왕의 아들을 크메르 왕이 길렀다. 그러나 조카가 자라면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신하들의 충고를 듣고 왕이 그를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국 왕이 쳐들어오자 크메르의 왕비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이 사원에 숨겼다는 일화가 있다.

 

 

 

 

 

우아야디티야바르만 2(1050-1066)때인 1060년에 지은 이 사원은 바욘 사원과 피미아나카스 사원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입구는 코끼리 테라스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변경이 있었다. 규모는 1층이 120x100m이고 2층은 70x65m, 그리고 3층은 50x45m이다. 2층은 크리슈나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부조가 있고,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의 부조가 있다.

 

 

 

 

 

 

 

 

 

 

 

중국 사신(使臣) 주달관의 진랍풍토기에 바푸온 사원을 동탑(銅塔)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아 청동으로 만든 중앙탑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중앙탑은 허물어져 있는데, 학자들은 인근 사원을 건축할 때 바푸온은 석재를 가져다 활용한 때문으로 보고 있다.

 

 

 

동쪽 탑문에서 사원 입구까지 200m에 달하는 참배길은 육교형식으로 설계되어 공중 참배길로 불린다.

 

 

 

 

 

 

 

건축사적으로 바푸온은 하나의 양식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첫째는 코끼리나 나가 상()이 장식의 모티브로 등장하지 않으며, 둘째는 회랑(回廊)은 있으나 부조되어 있지 않고 탑문과 파풍(破風)에 부조를 해 넣은 방식이 주로 이용되었다. 셋째 주벽에 처음으로 부조가 새겨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소재는 (*)라마야나(Ramayana)(**)마하바라타(Mahabharata)였다. 넷째 인간을 소재로 한 조각은 가슴 윗부분이 누드로 표현되었으며 여신들의 스커트 길이는 발목까지 내려온다. 스커트는 완전한 주름을 이루고 물고기 꼬리모양(fish-tail type)으로 드레이핑(draping)하여 우아한 곡선미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 라마야나(Ramayana) : 인도의 시인 발미키(Valmiki)가 쓴 대 서사시로 아요드야 왕국의 라마왕자와 그를 돕는 원숭이 왕국의 하누만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악마의 왕 라바나의 전쟁을 그렸다. 주 내용은 라마왕자를 통하여 제왕이 따라야 할 정의, 도덕률, 규범을 제시한다.

(**) 마하바라타(Mahabharata) : 인도의 비야사(Vyasa)라는 성인이 기원전 5세기경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대서사시(大敍事詩). 인도 델리 북방의 쿠루평원에서 카우라바군과 판다바군 18사단이 18일간 벌이는 전쟁이 주제인데, 고대 인도의 종교, 신화, 도덕, 역사, 철학, 법률 등 수많은 자료가 들어있다.

 

 

 

 

 

 

 

 

 

바푸온사원에서 바이욘사원은 금방이다. 앙코르와트보다 약 100년쯤 후에 세워진 바이욘사원은 앙코르 톰의 정 중앙에 위치하며 신들이 거주하는 우주의 중심 메루산을 상징한다. 2개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사원의 중앙에 높이 42의 본전이 있고, 거대한 관음보살의 얼굴이 동서남북으로 새겨져 있어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관음보살의 따뜻한 미소를 볼 수 있다.

 

 

 

54개의 탑에 새겨진 아바로키테스바라의 얼굴 조각상은 이 사원을 지은 자야바르반 7를 상징하기도 한단다. ‘크메르의 미소로 불리는 석불(石佛)의 웃는 모습은 수많은 예술가들을 감동시켜 왔단다. 그렇다면 경주 석굴암에 있는 부처님의 미소와는 어떤 게 더 감동적일까? 비록 애국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난 석굴암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하여간 이 석불의 미소는 앙코르 유적지의 백미(白眉)로 알려져 있다.

 

 

 

 

 

 

 

 

 

상부 테라스에는 사면불인 관음보살상이 부조되어 있으며 회랑은 둥근 형태로 만들어졌다. 흔히 크메르의 미소로 평가되는 관음보살상 조각은 휴먼 모티브를 특징으로 한다. 얼굴은 보통 2m 내외이며 머리에는 연꽃 모양으로 장식을 둘렀다. 크메르의 미소, 넓은 이마, 내려감은 눈, 넓은 콧등, 끝에서 약간 위로 올라가 미소를 짓는 두꺼운 입술의 형상이다.

 

 

 

 

 

거대하고, 놀라운 조각품인 사원을 보자마자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훅! 하고 올라왔다. 내가 조금만 더 감성적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이유 없는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글에서 옮긴 글이다. 그만큼 바이온 사원이 아름다웠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 난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눈물 대신에 어떻게 하면 집사람을 그 풍경에 동화시켜볼까 궁리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바이욘사원을 둘러보다보면 놀라게 되는 게 있다. 우선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놀라게 되고, 이와 더불어 수많은 인파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사원을 둘러보다 보면 캄보디아의 전통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모델이 되어 관광객들과 함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해주는 사람들이다. 한번 포즈를 취해주는데 1불씩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낯선 나라에서 그들의 옛 모습을 담고 싶은 마음은 너나할 것 없이 같은 모양이다.

 

 

 

바이욘사원을 빠져나오는데 코끼리가 보인다. 약간의 돈을 받고 등에 태워주는 관광용 운수사업의 일종이다. 한번 타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만두고 만다. 다음 행선지로 출발할 시간이 다 되어가기 때문이다. 서운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패키지 상품의 특징인 것을 말이다.

 

 

 

바이욘사원을 둘러봤다면 사실상의 투어는 끝을 맺는다. 그리고 다음 방문지인 앙코르와트까지는 또 다시 툭툭이를 이용한다. 참 잊은 게 있다 앙코르와트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남문이다. 앙코르 톰의 정문 노릇을 하고 있으니 다섯 개의 문() 중에서 맏형인 셈이다. 성문은 높이가 20m로 사암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문 꼭대기에는 약 3m에 달하는 사면불(四面佛)로 조각된 관음보살상이 있다.

 

 

 

 

 

남문 밖에는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신의 세계와 인간세상의 경계를 나타낸단다. 그렇다면 우린 신의 세계에서 노닐다가 다시 인간세상으로 돌아왔나 보다. 다리의 양쪽 난간은 사람의 얼굴을 형상화한 석상(石像)들이 일렬로 서있. 색깔이 다른 것들이 여러 개 섞여있는 것을 보면 최근에 보수를 새로 한 모양이다. 이 조각은 앙코르왓(Angkor Wat) 회랑(回廊)에 부조(浮彫)된 것처럼 힌두신화에서 신과 악마들이 장생불사의 영약을 만들기 위해 바수키(Vasuki) 뱀의 꼬리를 축으로 천년동안 우유바다를 휘젓는 장면을 상징한다고 한다. 다리의 한쪽에는 데바, 그리고 반대편에는 아수라이 늘어서 있는데, 원래는 나가(naga, )의 왕인 바수키의 몸통을 들고 있었으나 현재는 나가의 몸통이 떨어져 나간 상태란다. 참고로 캄보디아는 뱀의 정령이 이끄는 땅이라는 얘기가 있다. 따라서 어딜 가나 뱀의 형상인 나가()상을 만날 수 있다. 어떤 것은 그 머리가 일곱 개나 된다.

 

 

캄보디아(Cambodia) 여행

 

여행지 : 캄보디아 앙코르(Angkor) 지역

여 행 일 : ‘14. 3. 22() - 3. 26()

 

전체 여행 일정

3.22() : 인천공항씨엠립공항

3.23() : 바래이 호수, 실크 팜, 민속촌

3.24() : 따프롬, 앙코르톰, 앙코르와트, 야시장

3.25() : 와트마이 사원, 툰래삽 호수, 쇼핑(상황버섯,목청꿀, 잡화, 보석)

3.26() : 씨엠립공항인천공항

 

낯선 곳으로 떠난 여행, 종합

 

씨엠립의 특징 : 캄보디아의 수도(首都)는 프놈펜인데, 캄보디아 여행의 상징과 같은 앙코르 유적(遺蹟)을 보는 일정 때문에 씨엠립 지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많다. 나 또한 캄보디아에서의 모든 일정을 씨엠립 지역에서 보냈다. 씨엠립 지역의 여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첫 번째가 앙코르유적 관광이다. 앙코르와트, 따프롬, 반띠아이스레이 등 사원과 왕궁, 무덤 등으로 이뤄진 앙코르 유적은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만들어졌다. 나머지 하나는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접해보는 코스이다. 툰래삽호수의 수상가옥과 재래시장, 민속촌, 실크 팜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굳이 하나 더 꼽으라고 한다면 쇼핑이다. 상황버섯, 목청꿀, 보석, 잡화 등 골고루 들르는 쇼핑은 두 번 다시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매출이 없을 경우에 보이는 가이드의 노골적인 적대감은 거의 절망수준, 그러나 어쩌랴 패키지(package)여행을 따라 왔으니 참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앙코르지역 여행을 위해서는 우선 씨엠립으로 와야 한다. 앙코르 유적지로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의 북서부에 위치한 씨엠립은 캄보디아 제2의 도시로서 화려한 호텔과 아름다운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식민지 시대 건축물, 그리고 시끌벅적한 펍 거리, 실크 농장, 재래시장 등 다양한 구경거리를 지니고 있다. 씨엠립공항에서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여권과 입국에 필요한 서류들인 입국카드, 비자(visa)신청서(사진 1매와 비자수수료 20달러 포함), 세관신고서 등이다. 서식들은 이미 이곳으로 오는 기내에서 나누어 주었을 것이고, 한두 번 여행 해본 것도 아니니 빈칸 없이 잘 적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제 제출만 하면 된다. 가장 먼저 들러야할 곳은 비자발급 창구, 그런데 늘어선 줄이 장난이 아니다. 엄청나게 긴 것이다.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로 기다리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이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 줄을 서있는 곳을 왔다 갔다 하는 공항직원이 눈에 띌 것이다. 이 사람을 불러 1불만 쥐어주면 된다. 이럴 경우 비자를 받는데 걸리는 시간은 거의 제로(zero), 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이름이 호명(呼名)될 정도이니까 말이다. 비자를 먼저 발급해 주고 심사는 나중에 한다고 해도 과히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비자(visa)를 받았다면 이번에는 입국심사대로 가면 된다. ‘원 달러!’ 창구너머의 아저씨가 스스럼없이 돈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구태여 돈을 줄 필요는 없다. 안 준다고 해서 입국을 거부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다만 이럴 경우에는 입국카드를 빈칸이나 오기가 없이 잘 적었어야 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다. 만일 1불을 건네주었다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一瀉千里)이다. 잘못 적은 곳은 일일이 고쳐주는 친절함까지 보여주니까 말이다. 다음은 세관의 검색대를 지나게 되지만 여기까지 오는 중간에 구입한 물건이 없다면 걱정할 것 없이 그냥 통과하기만 하면 된다.

 

 

 

 

공항을 빠져나오면 여행사 이름을 적은 가이드들이 줄지어 늘어서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안내에 따라 호텔로 가면 된다. 한숨 붙이고 난 뒤에 투어의 일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3일 동안 묵게 될 ‘Goldiana Hotel’‘4성급 호텔임에도 불구하고 호텔은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외형뿐만이 아니다. 안으로 들어서서도 괜찮은 수준이라는 내 생각이 변함없었으니까 말이다. 트윈 룸(Twin Room)은 두 사람이 쓰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넓었고, 화장실과 욕실도 흠잡을 데 없이 청결했다. 내가 보기에 특급호텔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인 것이다.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해오면서 수없이 많은 세계 각국의 호텔들을 접해온 내 마음에 들었을 정도라면 이 정도의 칭찬은 구태여 아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록 ‘4성급 호텔이지만 수영장(水泳場)까지 갖추고 있을 정도로 호텔의 시설은 뛰어났다. 그리고 정원(庭園)과 수영장 등에는 갖가지 열대성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널려있다, 혹시 내가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닐까? 설마 무릉도원이 이렇게 더울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특히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망고열매가 눈길을 끈다. ‘한국의 대추나무라 생각하면 됩니다.’ 가이드의 말이다. 그만큼 망고나무가 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 곳에서나 따먹어도 될까? 아쉽게도 그런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망고가 익으려면 얼마간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문이라도 열라치면 캄보디아의 전통적인 견축양식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봐야 예쁘게 생긴 것들은 대부분 사원의 지붕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침에 창문을 열자마자 떠오르는 해를 본다고 생각해보라. 야자수의 잎새 사이에서 떠올라 지붕 위를 스리슬쩍 건너가는 붉은 태양은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다만 하나 아쉽다면 아침 식사가 특급호텔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악하다는 얘기는 아니니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저 그동안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들렀던 특급호텔들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얘기일 따름이니 말이다.

 

 

 

 

 

 

 

씨엠립의 도로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고 보면 된다. 시내나 유적지는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가 반듯반듯하게 나있지만 외곽으로 나가기라도 할 경우에는 덜컹거리는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아직도 포장이 되지 않은 구간을 가끔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투어는 대부분 전세버스를 이용한다. 그러나 가까운 거리의 이동이나, 일부 관광지에서는 툭툭이라는 이곳 특유의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게 더 편할 수도 있다. 이곳 캄보디아 등 동남아에서 툭툭이는 대중적인 관광용 운송수단이다. 바퀴 2개로 된 좁은 공간에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놓았다. 물론 동력(動力)은 오토바이다. 오토바이가 뒤편의 차체(車體)를 끈다는 얘기이다. 차창이 없이 사방으로 뻥 뚫렸기 때문에 차가 달릴 경우 시원한 바람이 맘 놓고 들어온다. 눅눅하고 더운 캄보디아 기후에서는 선풍기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한번쯤은 꼭 타봐야 할 교통수단이다.

 

 

 

 

 

 

음식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우선 만국공통인 호텔의 아침식사는 빼놓고 시작해보자. 그렇다면 나머지는 점심과 저녁이 남는다. 이때 먹어야할 현지 음식이 입에 안 맞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시내 곳곳에 한국식당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제공되는 요리도 다양하니 그저 골라먹기만 하면 된다.

 

 

 

 

 

 

  

 

 

 

 

 

 

 

 

 

 

 

이곳 캄보디아는 어느 식당을 가나 하나같이 손을 씻는 곳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에서는 식사 전에 손을 씻고 싶을 경우 화장실에서나 가능한데 이곳 캄보디아에는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사용할 수 있는 너른 공간을 별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북한식당도 한번쯤은 찾아가 볼만하다. 제공되는 음식이야 거기서 거기겠지만 아리따운 처자들이 펼치는 노래와 춤을 관람(觀覽)하면서 식사를 해보는 것도 하나의 낭만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유념해야할 것이 하나 있다. 북경이나 상하이에서 보았던 옥류관으로 생각하고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중국에 있는 북한식당보다는 한참이나 격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지음식이 입에 맞지 않더라도 꼭 찾아봐야할 곳이 하나 있다. ‘압살라(Apsala) 뷔페식당이다. 캄보디아의 전통무용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낯선 이방인(異邦人)들이 추는 춤이다보니 당연히 춤은 이국적(異國的)일 수밖에 없다. 화려한 춤사위를 보면서 하는 식사 또한 이국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곳도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음식에 대한 기대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저 입에 맞는 음식 두어 가지 가져다 놓고 화려하게 꾸민 무희들의 춤사위나 즐기면 될 일이다.

 

 

 

 

 

앙코르 사원에만 3000여 개가 묘사되어 있는 압살라는 천상의 무희로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압살라는 신과 악마가 불노(不老)의 명약인 암리타를 얻기 위해 젖의 바다를 1천 년 동안 휘저을 때(유해교반 신화), 그 젖의 바다에서 탄생한 천상의 요정이며 춤을 추는 무용수이자 시녀란다. ‘압살라 춤은 캄보디아 왕을 위해 추던 전통무용인데, 느린 동작으로 표현되고 곡선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태국전통무용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씨엠립은 한국 사람들이 여행하기에 좋은 편이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길을 잃었을 경우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웬만한 사람들, 특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한두 마디쯤의 한국어는 할 줄 알기 때문이다. 잠깐의 짬을 이용해 밖으로 나가본다. 가이드야 무더위 때문에 잠깐 쉰다지만 우리야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차가운 맥주라도 한잔 마셔보려는 것도 한 요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거리에는 과일가게나 잡화점들이 많은 편이다. 물론 노천카페도 심심찮게 보인다.

 

 

 

20여분을 배회하다 한적한 골목길에 위치한 식당으로 들어선다. 잘 가꾸어진 정원(庭園)을 끼고 있는 풍경이 마음에 쏙 들어서이다. 그러나 너무 외진 곳을 잡았던 모양이다. 그렇게나 잘들 하던 한국어를 이곳 종업원들은 한마디도 할 줄을 모른다. 그렇다고 영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다. 별 수 없이 손짓발짓을 포함한 바디랭귀지(body language)를 사용하고 나서야 겨우 생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주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숲속 벤치에 앉아 마시는 시원한 생맥주는 일품이었다.

 

 

 

 

 

 

 

캄보디아라고 해서 꼭 허름한 상점만 떠올릴 필요는 없다. 이런 카페들도 흔하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어를 하다가 지친 사람들이 잠깐 쉬어가기에 딱 좋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에 가면 물론 관광지부터 먼저 들러보는 게 순서이다. 그러나 꼭 들러 봐야할 또 다른 곳도 있다. 바로 발마사지 샵(shop)‘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베트남이나 태국보다 훨씬 더 정성스럽게 해준다고 한다. 꼭 가이드의 추천이 아니더라도 여행의 피로도 풀어줄 겸해서 한번쯤은 들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긴 패키지를 따라왔다면 기본 패키지 안에 들어있겠지만 말이다. 사진은 경복궁이란 한국식당이다. 같은 건물이지 아닌지는 몰라도 이 부근에서 마사지를 받았다. 샵의 내부 사진은 없다. 혹시라도 종업원들이 불편하게 여길까봐 사진촬영을 안했기 때문이다.

 

 

 

저녁이라고 해서 무료하게 호텔방만 지킬 필요는 없다. 씨엠립의 야경(夜景) 또한 볼만하기 때문이다.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몰려다니는 인파도 볼만하고, 길거리 좌판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곤충요리들을 먹어보는 것도 하나의 낭만일 테니까 말이다.

 

 

 

 

 

 

이번 캄보디아 여행은 누가 뭐래도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현지인들은 친절했고 구경거리 또한 넘쳐났다. 그러나 단 하나가 그 좋았던 여행을 망쳐버렸다. 이번 여행은 하나투어란 여행사에서 주관하는 패키지(package)상품을 이용했다. 패키지의 특징대로 가격이 저렴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다보니 현지에서의 쇼핑이 포함되어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가 들렀던 곳은 캄보디아의 특산품이라는 상황버섯과 목청꿀, 보석, 잡화 등 4, 그러나 문제는 살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다. 이번 여행의 팀 구성이 우리 가족들로만 이루어지다 보니 팀 전체의 구매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나 보다. 상황버섯 상점에서 구매실적이 없자 가이드가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남은 일정을 쇼핑으로만 채워버릴 것 같은 기세의 겁박(劫迫)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기색은 어느 정도 매출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해소될 수 있었다. 그러나 투어 일정은 이미 계획에서 어긋나 버렸다. 4곳이나 빼먹어버린 것이다. 나에게 하나투어는 하나의 자부심이었다. 현직에 있을 때 해외 출장이 잦았던 난 하나투어를 접할 기회가 꽤나 많았었다. 현지 관료들의 안내를 받으며 돌아다니다 하나투어라는 글씨가 새겨진 버스가 보일 때면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었는지 모른다. 그만큼 우리의 국력(國力)이 높아졌다는 증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좋은 이미지가 이번 여행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다. 여행을 다녀온 지 1년 남짓, 그동안 난 동유럽을 위시해 두어 곳을 더 다녀왔다. 하나투어를 이용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 기조는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다.

 

 

 

 

 

 

 

 

 

 

여행지 : 대마도주의 보금자리 금석성(金石城 : 가네이시조)

여행일 : ‘14. 3. 1()

 

특징 : 이즈하라에는 청수산성이라 불리는 외성이 있고, 금석성이라 불리는 내성이 있었다. 1669소 요시자네가 건축했다는 금석성의 성벽은 현재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고려문에서 체육관으로 이어지는 길가의 성벽은 비교적 잘 보존된 편이다. 금석성 안에 있는 지키바라(棧原)가 역대 대마도주들의 거처였으니 이곳이 대마도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문 옆에는 조선국통신사비(朝鮮國通信使之碑)’가 세워져 있다. 대마도 곳곳에서 조선통신사들의 흔적이 묻어나는 것을 보면 당시 조선과 대마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돈독한 관계였나 보다. 임진왜란 후 대마도를 앞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정권은 사절단의 파견을 조선에 요청하였다. 이후 조선은 우호적 정책을 이어받은 에도(江戶)막부에 대해 1811년까지 약 200년 동안 12차례의 통신사를 보내왔다. 도쿄에 발을 들여놓은 조선의 유일한 사절이 바로 조선통신사이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정부의 최고 관료와 학자, 문화인을 비롯하여 화려한 악대, 소동(小童), 무인(武人), 통역관 등 300~500명에 달하는 대사절단이었다. 당시의 화려한 조선통신사 행차는 대마 역사민속자료관에 소장된 행차도에 잘 묘사되어있다.

 

 

 

고려문 안으로 들어가면 대마도의 중요 문화재와 민속자료를 전시한 대마도 민속자료관이 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면 볼거리는 그다지 많지 않아서 웬만한 개인 소유 박물관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전시된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과 조선 간행본인 훈몽자회’ ‘첩해신어라는 책자를 보면 당시 조선으로부터 문물이 전해졌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이 밖에 고려판 대장경과 대반야경, 고려청자 등도 관람할 수 있다.

 

 

 

 

 

 

 

 

 

 

 

두루마리로 된 통신사 행렬도, 얼굴 표정이 다른 162명의 사절단이 에도성을 향하는 광경이다. 당시 대마도의 수행자는 432명이라는 기록도 첨부되어 있다.

 

 

 

고려문 역시 금석성의 일부이다. 원래는 대마도주의 거처인 사지키바라(樓原)의 정문으로 영은문이었지만, 조선통신사들이 드나들면서 고려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금석성에서는 조선통신사들이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노문을 지나면 조선통신사접우로지(朝鮮 通信使 幕府接遇)’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의 문물(文物)을 일본에 전하는 사절단이었다. ()보다 무()가 앞섰던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통해 정신적 영양을 섭취하였다. 조선과 일본의 우호관계는 임진왜란 이후 한때 깨지게 되었다. 임란 후 조선은 한동안 조선통신사를 보내지 않았지만 대마도주 소오()씨의 노력에 의해 1607년 부활하였다.

 

 

 

금석성의 외문(外門)이자 망루(望樓) 역할을 했던 노문(櫓門 : 야쿠라몬)으로 대마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문으로 꼽힌다. 1919년에 해체되었다가 1990년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대마도를 찾는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금석성을 빼놓지 않고 꼭 들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는 대마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 강제결혼을 했다. 자기 딸 하나 지키지 못한 허울 좋은 왕이 곧 고종이었다. 그가 과연 단 한번이라도 진정한 왕 노릇을 해봤는지 의심스럽다. 집권 초기에는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휘둘렸고, 그 다음에는 왕비인 민비, 그리고 말년에는 일제에 휘둘리다가 끝내는 아들에게 왕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은 차라리 일개 민초(民草)만도 못한 삶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못난 아빠를 둔 덕혜옹주(1912-1989)가 어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비록 왕의 딸로 태어났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순탄치 못한 삶을 살다가 비극적인 여인이 곧 덕혜옹주였다. 그녀의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늘 살해위험에 시달리던 그녀는 급기야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고,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가 끝내는 이혼을 당하고 만다. 고국에 돌아온 후에도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76세를 일기로 낙선재에서 그 생을 마감했다. 참고로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는 대마도 거주 재일동포들이 세운 비이다. 덕혜옹주가 19315소 다케유키(宗武志)’백작과 결혼 한 뒤에 백작의 본가인 대마도로 신혼여행을 오자 당시 대마도 인구 63000여명 가운데 3분의 1일을 차지했던 재일동포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십시일반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관광객이 늘자 지난 2001년 대마도에서 이를 복원했다고 한다.

 

 

 

 

 

 

 

금석성은 이즈하라 시민들이 가볍게 산책하는 코스로 이용되고 있는 듯 싶다. 산책로 주변에 보이는 벚꽃, 홍매화가 활짝 피어있는 것이 보인다. 이곳은 벌써 화창한 봄날인 모양이다.

 

 

 

 

 

 

 

 

 

 

 

 

 

 

 

시라다케산(白嶽山, 519m) 등반

 

산행일 : ‘14. 2. 29()

산행코스 : 스모(洲藻) 버스주차장등산로입구안부 갈림길(神社門)정상 왕복코모다(小茂田)갈림길카미자카(上見坂) 등산로입구(산행시간 : 4시간10)

 

특징 : 대마도의 남부 중앙에 우뚝 솟아있는 산으로 마주하고 있는 정상의 두 암봉이 백옥처럼 하얗다 하여 백악(白嶽) 즉, 시라다케로 불린다. 대륙계 식물과 일본계 식물이 섞인 독자적인 식생(植生)을 보여주며, 또한 고도(高度)에 따라 사계절의 다양한 식물들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천연기념물 및 국립공원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등산로의 대부분은 완만(緩慢)한 경사(傾斜)이지만 시라다케신사(神社)의 문()을 지나면서부터 경사도 가팔라지고, 특히 마지막 정상부분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짜릿한 손맛까지 느끼게 해준다.

 

 

 

산행은 미쓰시마마치(美津島町)의 스모(洲藻)에 있는 버스주차장에서 포장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등산로입구까지 임도가 이어지나 도로 폭이 좁아 대형버스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3.2Km의 도로를 꼼짝없이 걸어야한다. 지겨울 정도로 긴 진입여건이지만 그나마 참을 수 있는 것은 도로 주변에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숲들이 보내오는 신선한 공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폭포 앞 광장까지는 포장된 임도가 이어지는데 몇 곳에서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다. 갈림길마다 빠짐없이 이정표가 세워져있기 때문이다. 단지 시라다케라 대신에 백악(白嶽)이라고 한자로 표기되어있다는 점에만 유의하면 된다.

 

 

 

 

 

등산로에 들기도 전부터 하늘을 찌를 듯이 위로 치솟은 나무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나무가 편백나무가 아니고 삼나무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얻은 얄팍한 상식으로는 사라다께 산은 온통 편백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들었는데 의외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마치 녹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은 숲에서 청량(淸凉)한 기운들이 끊임없이 내품어져 나오고 있는데 말이다. 임도를 따라 30분쯤 걸으면 등산로입구에 다다르게 된다. ‘시라다케산을 왔었다는 인증(認證)이 필요하다면 이곳에서 사진을 찍어두는 게 좋다. 이곳 외에는 시라다케산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간판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정상에도 정상표지석이 없음은 물론이다.

 

 

 

 

 

 

 

 

 

 

 

 

 

등산로입구를 지나서도 임도는 계속된다. 그리고 15분쯤 후에는 폭포(瀑布)가 있는 광장에 이르게 된다. 만일 승용차를 가져올 경우에는 이곳에다 주차를 시켜도 될 것 같다. 폭포의 생김새가 그럴 듯해서 아래로 내려가 보니 꽃으로 장식된 제단(祭壇)이 하나 보인다. 아마 현지인들은 이런 폭포에도 신령(神靈)이 있다고 본 모양이다. 제단 앞의 유리로 만들어진 상자에 제법 많은 동전들이 들어있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광장의 산자락 쪽에 세워진 산행안내도 뒤로 난 산길로 올라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주차장을 출발한지 45, 임도가 끝나면서 처음으로 산길다운 산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안내판에는 이곳에서 백악산 정상까지 2Km, 1시간30분이 걸린다고 표기되어 있다.

 

 

 

 

 

 

 

 

 

산길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울창한 원시림(原始林), 그리고 그 아래에는 청정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두어 번의 지점에는 통나무로 만든 다리가 놓여 자연스러운 멋을 한결 더한다. 산길은 비록 넓지만 있는 그대로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난간이나 계단 등 우리나라 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시설물들이 일절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대마도를 여행하는 동안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대마도 전체를 국립공원(國立公園)’으로 지정, 개발보다는 보존에 역점을 두고 모든 개발행위를 제한하고 있는 모습 말이다.

 

 

 

 

 

폭포에서 잠깐 올라서면 처음으로 거리표시가 된 안내판을 만나게 되는데 고민을 많이 해서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맨 위에는 이정표의 순번이 적혀있고, 그 아래 중간에는 정상과 등산로입구까지의 거리, 그리고 맨 아래에는 현재지점의 표고(標高)를 표시해 놓았다. 산을 찾는 사람들이 꼭 필요한 정보를 빠짐없이 안내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안내판은 정상에 이를 때까지 매 300m마다 어김없이 나타난다.

 

 

 

세 번째 안내판, 그러니까 출발지점에서 600m정도 지나면 하늘을 완전히 차단해버릴 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진 삼나무 숲 아래로 커다란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바위들마다 녹조(祿租 : water-bloom)처럼 파란 이끼들로 뒤덮여있다. 그리고 주변은 온통 고사리류의 양치식물들, 잔뜩 습기를 머금은 주위 풍경은 원시(原始)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산길은 마치 전혀 급할 것이 없다는 말이라도 하려는 듯이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당연히 발걸음도 늦어진다. 새로운 풍경에 눈 맞추느라 속도를 낼 겨를이 없는 것이다.

 

 

 

 

 

네 번째 안내판, 출발점에서 900m지점을 지나면 너덜길로 연결되고, 이어서 거대한 바위군락이 나타난다. 바위 아래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비박(bivouac)하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다. ()바위를 지나 지그재그로 난 길을 따라 10분 정도 더 오르면 시라다케 주봉과 마에다케(前嶽)의 능선이 만나는 안부에 이르게 된다. 근처에 세워진 6번째 안내판(산행출발지에서 1,500m지점, 해발 290m)를 지나면 곧이어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곳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가면 카미자카(上見坂), 당연히 정상으로 올라가려면 오른편에 보이는 이시노신사(石神社) 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20,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 후 38분이 지났다.

 

 

 

 

 

길가는 온통 빽빽한 나무숲이다. 어른 2~3명이 껴안아도 부족한 거목도 많이 보인다. 험준한 산들이 수호(守護)해온 고대 원시림(原始林)이 아직도 여전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또 어떤 나무들은 굵고 구불구불한 뿌리들을 지상으로 드러내놓고 있는데, 그 모습은 차라리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세 개의 이시노신사(石神社) 도리이()을 지나면서 산길은 거칠면서도 가팔라진다. 그리고 그 가파름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사나워진다. 산을 있는 그대로 두려던 일본인들로 이곳의 가파른 경사(傾斜)만큼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처음으로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길가의 나무들도 언제부턴가 변해있다. 울창한 삼나무 숲이 사라진 빈자리를 메밀잣밤나무와 줄참나무 등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끝도 없이 길게 매어진 로프에 의지해서 오르다보면 8번째 안내판(산행출발지에서 2,100m, 해발 480m)이 세워진 작은 광장(廣場)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에도 역시 한쪽 귀퉁이에 자그마한 제단(祭壇)이 세워져 있다. 소문대로 일본은 역시 신사(神社)의 나라답다. 조금만 특이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제단이 세워져 있을 정도인 것이다. 이곳까지 올라오는 동안만 해도 손가락으로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제단을 만날 수 있었다.

 

 

 

 

 

 

 

 

 

광장(廣場)을 지나면서 바윗길이 시작된다. ()자가 그냥 들어간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바윗길은 매섭다. 그러나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굵직한 안전로프를 붙잡고 오르면 어렵지 않게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로프에 의지해서 바윗길을 올라서면 잘록이 안부이다. 오른편에 보이는 암봉은 시라다케의 제2봉인 메다케(雌岳 : 일명 東岩逢)이다. 올라가는 길이 보이지 않아 그냥 정상인 오다케(雄岳 :일명 西岩峰)으로 향한다. 하긴 길이 보인다하더라도 오늘 같이 비가 내리는 날에는 무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잘록이 안부에서 정상으로 가려면 안부의 왼편에 보이는 조그만 신사(神社)를 지난 후 왼편 바위벼랑으로 붙어야 한다. 바위벼랑을 통해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오늘 산행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이다. 이 구간에는 안전로프도 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바위의 돌출부에 의지해서 기다시피 올라야만 한다. 신사에서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날카롭게 선 바윗길에 놀랐음이리라. 하긴 그들의 결정이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윗길 아래는 천 길의 벼랑, 추적거리며 내리는 비로 인해 물기를 머금은 바위들이 미끄럽기까지 하니 구태여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이시노신사(石神社) 문에서는 40분 조금 못되게 걸렸다.

 

 

 

 

 

 

 

 

 

 

위험까지 감수하며 어렵게 올라선 정상은 의외로 실망스럽다. 한치 앞도 안보일 정도로 안개가 짙은 것이다. 거기에다 가는 빗방울을 머금은 바람까지 세차서 오래 머무를 수도 없을 지경이다. 잘하면 눈에 들어올 수도 있다는 한국의 남해안의 조망은 생각지도 못하고, 리아스식 해안(rias coast)으로 유명한 대마도의 절경까지도 다음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진 탓에 비좁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 오늘은 비까지 내리는 탓에 바위의 가장자리 가까이는 애당초 다가갈 엄두도 낼 수가 없다. 당연히 정상은 더욱 비좁아지고, 덕분에 뒷사람이 올라오면 빨리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증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막상 인증사진을 찍으려니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인증(認證)을 해주어야 할 정상표지석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날씨라도 맑다면 리아스식 해안이라도 배경으로 나오겠지만, 오늘은 이마저도 허락해주지 않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원망하며 하산을 서두른다. 내려가는 바윗길은 올라올 때보다 더욱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하산은 왔던 길을 그대로 되밟아 내려와야 한다. 정상에서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30분 정도, 신사(神社)의 문()을 빠져나와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아리아케(有明山, 558m)산의 들머리가 있는 카미자카(上見坂)로 가기 위해서이다. 갈림길 이정표에 카미자카까지는 120분이 소요된다고 적혀있다. 제시간에 도시락을 전달받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걸어야만 하겠다. 지금이 10시이니 약속시간까지는 정확히 120분이 남았고, 당연히 여유를 부릴만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아마 도시락 전달시간에 맞춘답시고 너무 늦장을 부린 모양이다. 아니 오늘 산행시간을 제대로 파악 못한 이유도 있다. 난 오늘 산행시간이 3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미자카로 가는 산길은 등산로라기보다는 산책로(散策路)라고 하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길이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흙길은 푹신푹신한 것이 걷기에 여간 편한 게 아니다. 거기다가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우거진 편백나무 숲은 신선하면서도 향긋한 피톤치드(phytoncide)를 끊임없이 보내준다. 그야말로 힐링(healing)산행이 따로 없다. 이런 길은 구태여 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다. 서서히 느긋하게 걸으며, 그 걸음걸이에 맞추어 큰 심호흡을 반복해본다. 청량한 기운이 신체(身體) 곳곳으로 퍼지며 온몸의 세포(細胞 : cell)들이 용틀임을 하며 하나둘 깨어난다.

 

 

 

 

 

대마도의 특징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울창한 숲이다. 시라다케의 숲은 정령(精靈)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깊고 울창하다. 땅 아래는 아기 손처럼 보송보송한 이파리를 드러낸 양치식물군이 점령하고 있고, 고개를 들면 하늘 위로는 편백나무가 견고하게 뻗어 하늘을 찌른다. 보는 이마다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곳곳에 간벌(間伐)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수십 년 동안 자란 편백나무들로 인해 숲이 너무 우거진 탓이란다. 나무들이 굵어짐에 따라 그 간격이 점점 빽빽해진 탓에 충분한 햇빛과 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게까지 된 모양이다. 더 이상의 성장이 멈춰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간벌(間伐)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피톤치드(phytoncide)와 음이온이 많이 나오는 시라다케 산의 숲길을 삼림욕(森林浴)을 하는 기분으로 즐기면서 1시간 조금 넘게 걷다보면 오른편 숲 사이로 주차장이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코모다(小茂田)갈림길이 나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평소에 아무 말 없이 내가 진행하는 대로 따라다니는 집사람까지도 당연히 주차장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할 정도로 산행 종료지점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코모다로 내려가는 길을 무시하고 능선을 따라 곧장 나아가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산행을 같이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이곳에서 코모다로 내려가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제대로 길을 찾아간 사람이 겨우 10명이 못 될 정도였으니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국도 44호선 시라다케산 등산로입구(카미자카)

코모다갈림길을 지나서 얼마간 더 진행하면 널따란 임도(林道)가 마중 나온다. 임도를 따르다보면 임도가 자꾸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곳에서는 그냥 곧바로 나아간다고 생각하고 진행하면 된다. 여전히 계속되는 편백나무 숲속을 즐기는 마음으로 걷다보면 드디어 국도 44호선에 이르게 된다. ‘코모다 갈림길’에서 30분 정도 걸렸다. 하산지점에서 아리아케산(有明山, 558m) 등산로 입구로 가려면 국도를 따라 왼편으로 2~3분만 걸으면 된다. 그러나 오늘 산행은 이것으로 마치기로 한다. 비록 2시간30분 정도만 더 걸으면 되겠지만, 산행을 계속해서 이어가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빗방울이 굵어졌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해서 마칠 때까지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웬만한 산들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우리나라 산들에 익숙해진 내 눈에는 이색적으로 다가오는 풍경이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일본인들은 온갖 사물(事物)에 영()이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영산(靈山)으로 알려진 시라다케산은 일본인들이 함부로 밟기 어려운 산일 것이다. 그래서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단 한명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