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대마도주의 보금자리 금석성(金石城 : 가네이시조)

여행일 : ‘14. 3. 1()

 

특징 : 이즈하라에는 청수산성이라 불리는 외성이 있고, 금석성이라 불리는 내성이 있었다. 1669소 요시자네가 건축했다는 금석성의 성벽은 현재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고려문에서 체육관으로 이어지는 길가의 성벽은 비교적 잘 보존된 편이다. 금석성 안에 있는 지키바라(棧原)가 역대 대마도주들의 거처였으니 이곳이 대마도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문 옆에는 조선국통신사비(朝鮮國通信使之碑)’가 세워져 있다. 대마도 곳곳에서 조선통신사들의 흔적이 묻어나는 것을 보면 당시 조선과 대마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돈독한 관계였나 보다. 임진왜란 후 대마도를 앞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정권은 사절단의 파견을 조선에 요청하였다. 이후 조선은 우호적 정책을 이어받은 에도(江戶)막부에 대해 1811년까지 약 200년 동안 12차례의 통신사를 보내왔다. 도쿄에 발을 들여놓은 조선의 유일한 사절이 바로 조선통신사이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정부의 최고 관료와 학자, 문화인을 비롯하여 화려한 악대, 소동(小童), 무인(武人), 통역관 등 300~500명에 달하는 대사절단이었다. 당시의 화려한 조선통신사 행차는 대마 역사민속자료관에 소장된 행차도에 잘 묘사되어있다.

 

 

 

고려문 안으로 들어가면 대마도의 중요 문화재와 민속자료를 전시한 대마도 민속자료관이 있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면 볼거리는 그다지 많지 않아서 웬만한 개인 소유 박물관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전시된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과 조선 간행본인 훈몽자회’ ‘첩해신어라는 책자를 보면 당시 조선으로부터 문물이 전해졌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이 밖에 고려판 대장경과 대반야경, 고려청자 등도 관람할 수 있다.

 

 

 

 

 

 

 

 

 

 

 

두루마리로 된 통신사 행렬도, 얼굴 표정이 다른 162명의 사절단이 에도성을 향하는 광경이다. 당시 대마도의 수행자는 432명이라는 기록도 첨부되어 있다.

 

 

 

고려문 역시 금석성의 일부이다. 원래는 대마도주의 거처인 사지키바라(樓原)의 정문으로 영은문이었지만, 조선통신사들이 드나들면서 고려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금석성에서는 조선통신사들이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노문을 지나면 조선통신사접우로지(朝鮮 通信使 幕府接遇)’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의 문물(文物)을 일본에 전하는 사절단이었다. ()보다 무()가 앞섰던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통해 정신적 영양을 섭취하였다. 조선과 일본의 우호관계는 임진왜란 이후 한때 깨지게 되었다. 임란 후 조선은 한동안 조선통신사를 보내지 않았지만 대마도주 소오()씨의 노력에 의해 1607년 부활하였다.

 

 

 

금석성의 외문(外門)이자 망루(望樓) 역할을 했던 노문(櫓門 : 야쿠라몬)으로 대마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문으로 꼽힌다. 1919년에 해체되었다가 1990년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대마도를 찾는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금석성을 빼놓지 않고 꼭 들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는 대마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 강제결혼을 했다. 자기 딸 하나 지키지 못한 허울 좋은 왕이 곧 고종이었다. 그가 과연 단 한번이라도 진정한 왕 노릇을 해봤는지 의심스럽다. 집권 초기에는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휘둘렸고, 그 다음에는 왕비인 민비, 그리고 말년에는 일제에 휘둘리다가 끝내는 아들에게 왕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은 차라리 일개 민초(民草)만도 못한 삶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못난 아빠를 둔 덕혜옹주(1912-1989)가 어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비록 왕의 딸로 태어났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순탄치 못한 삶을 살다가 비극적인 여인이 곧 덕혜옹주였다. 그녀의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늘 살해위험에 시달리던 그녀는 급기야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고,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가 끝내는 이혼을 당하고 만다. 고국에 돌아온 후에도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76세를 일기로 낙선재에서 그 생을 마감했다. 참고로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는 대마도 거주 재일동포들이 세운 비이다. 덕혜옹주가 19315소 다케유키(宗武志)’백작과 결혼 한 뒤에 백작의 본가인 대마도로 신혼여행을 오자 당시 대마도 인구 63000여명 가운데 3분의 1일을 차지했던 재일동포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십시일반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관광객이 늘자 지난 2001년 대마도에서 이를 복원했다고 한다.

 

 

 

 

 

 

 

금석성은 이즈하라 시민들이 가볍게 산책하는 코스로 이용되고 있는 듯 싶다. 산책로 주변에 보이는 벚꽃, 홍매화가 활짝 피어있는 것이 보인다. 이곳은 벌써 화창한 봄날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