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라오스(Laos)

 

여행일 : ‘17. 2. 28() - 3.4()

일 정 :

3.1() : 비엔티엔 사원관광(왓 씨사켓, 왓 팟 깨우), 불상공원(왓 씨엥쿠안). 탕원유원지 선상식. 소금마을 방문, 방비엥(썬셋 모터보트, 유러피안 거리)

3.2() : 방비엥(블루라군, 짚라인, 탐남동굴 튜빙, 쏭강 카약킹)

3.3() : 젓갈마을 방문, 비엔티엔(빠뚜싸이 독립기념탑, 왓 탓 루앙)

 

여행 둘째 날 오전 : 블루라군(Blue Lagoon)

 

특징 : 블루라군(Blue Lagoon)은 블루(Blue)와 라군(Lagoon)의 합성어이다. 그런데 라군이 석호(潟湖), 즉 사주(砂洲)로 바다와 격리된 호소(湖沼)를 나타내는 단어이니 푸른빛을 띠는 호수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투명할 정도로 물이 맑은 호수 말이다. 그런데 블루라군(Blue Lagoon)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카리브해역에 있는 자메이카의 석호(潟湖)를 기억한다. 브룩 쉴즈 주연의 영화 블루라군으로 유명해진 이곳은 지금도 영화감독과 사진작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라오스에도 블루라군이 있다. 자메이카의 블루라군이 바다로 난 좁은 해협인데 반해 이곳 라오스는 내륙에 있는 작은 호수이지만 말이다. 그 덕분에 아름다움은 자메이카보다 한층 더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호숫가 나무 위에서 물로 뛰어내리는 재미까지 더할 수 있어 계절에 관계없이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라오스를 찾아오는 여행객들에게는 필수의 코스로 알려져 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블루라군(Blue Lagoon)으로 향한다. 방비엥 시내에서 교통수단(오늘도 역시 지붕을 씌운 트럭을 이용했다)을 이용해 대략 30분쯤 이동하면 다다르게 된다. 간혹 자전거를 이용해 방문하는 관광객들도 보이지만 비포장도로에 울퉁불퉁한 굴곡이 많은 탓에 고생할 것은 미리부터 각오해야 한다.

 

 

 

불루라군의 첫 번째 매력 포인트는 바로 블루라군을 오가는 길에 만나는 풍경들이다. 카르스트지형이 빚어놓은 기암괴봉들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가 하면 현지인들의 순순한 일상들도 만날 수 있다. 사람이나 자연 할 것 없이 때묻지 않은 순수함들 이다.

 

 

30분쯤 달렸을까 블루라군 주차장에 다다른다. 블루라군은 이곳 말고도 여러 곳에 있다. 위에서 블루라군의 특징을 기술하면서 얘기했던 자메이카 외에 아이슬란드(온천)와 필리핀(보라카이)에도 있다. 터키에서는 욀뤼데니즈(Ölüdeniz) 해안을 블루라군으로 부른단다. 아무래도 푸른색으로 빛나는 석호들 마다 블루라군이라고 부르는 게 유행이 되었나 보다. 하긴 칵테일의 이름으로도 모자라 우리나라에는 펜션의 이름에까지 그런 이름을 붙였으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유원지로 들어가려면 블루라군의 한가운데에다 놓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위에 지붕을 씌운 특이한 외형의 다리이다. 관람객들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이 다리의 위가 블루라군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장소이기 때문이다.

 

 

 

 

블루라군은 동화 속 작은 호수이다. 호숫가에 이르면 먼저 천국과도 같은 절경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감상에만 빠져있을 일은 아니다. 전 세계인들과 함께 어우러져 물놀이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수영을 못해도 좋다. 구명조끼를 빌려 물에 누운 후 하늘과 숲을 감상하면 된다. 만일 물놀이를 좋아한다면 총 2개의 높이에 마련된 천연 다이빙대에서 스릴을 즐길 수도 있다.

 

 

 

물위로 비스듬히 뻗쳐 있는 튼실한 나뭇가지에서 점프를 할 수 있도록 호숫가의 큰 나무에다 대나무로 사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 나뭇가지에 올라 5m쯤 아래에 있는 푸르고 맑은 물로 다이빙을 하면 된다. 겁이 많은 사람들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아래에는 2m쯤 되는 높이의 점프대도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주의해야할 점도 있다. 무엇보다 깊은 수심(水深)에 주의해야하고 다이빙을 할 때에는 항상 주위 사람을 살피고 안전사고에 유의해야 한다. 좋아진 기분에 자칫 방심한다면 바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에메랄드 빛 물웅덩이에 자리 잡은 커다란 고목은 다이빙대 역할만 해주는 게 아니다. 타잔의 놀이터 역할에도 충실하다. 그런데 줄에 매달려 희희낙락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꼬마들이다. 그래! 세속에 물들지 않은 타잔이었으니 꼬마아이들이 지닌 때묻지 않은 동심(童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이빙을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땅에서 밧줄을 잡고 그 반동을 이용하여 다이빙 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나무에 올라가 호수를 향해 다이빙 할 수도 있다.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방법에도 두 가지가 있다. 높이가 다른 두 곳에 점프대를 만들어 놓았으니 각자의 선호에 따라 높이를 선택해서 다이빙하면 된다.

 

 

 

 

 

 

 

 

 

 

비키니 차림의 서양여성이 나무 위로 올라간다. 그래 저런 게 낯익은 풍경이 아니겠는가. 서양의 청춘 남녀들이 반라로 즐기는 광경이 성경책의 에덴동산을 연상시킨다는 그런 풍경 말이다.

 

 

 

 

 

반대편 호수도 물이 맑기는 마찬가지이다. 비록 점프를 할 수 있는 나무는 없지만 대신에 미끄럼틀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경쟁력이 떨어지는 모양으로 개미새끼 하나 얼씬거리지도 않는다.

 

 

 

 

 

 

생각보다 블루라군은 작다, 그렇지만 깨끗하고 어느 곳이나 사진을 찍으면 그림이 된다.

 

 

 

 

 

여행지 : 라오스(Laos)

 

여행일 : ‘17. 2. 28() - 3.4()

일 정 :

3.1() : 비엔티엔 사원관광(왓 씨사켓, 왓 팟 깨우), 불상공원(왓 씨엥쿠안). 탕원유원지 선상식. 소금마을 방문, 방비엥(썬셋 모터보트, 유러피안 거리)

3.2() : 방비엥(블루라군, 짚라인, 탐남동굴 튜빙, 쏭강 카약킹)

3.3() : 젓갈마을 방문, 비엔티엔(빠뚜싸이 독립기념탑, 왓 탓 루앙)

   

여행 첫날 오후 : 선셋(sunset) 모터보트(motorboat)

 

특징 : 방비엥은 비엔티안에서 100Km 떨어진 자연도시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베트남이나 태국, 캄보디아와 함께 한번쯤은 꼭 한번 다녀와야 할 곳으로 알려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방비엥은 비엔티안 근교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하지만 해마다 여행자들이 증가하더니 마을은 어느덧 여행자의 천국처럼 변모 해 있다. 기암괴봉으로 이루어진 수려한 자연 풍광 덕분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중국의 계림이나 베트남의 하롱베이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아니 오히려 한참 뒤떨어진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또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처럼 유명한 문화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까지도 소박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때 묻지 않은 소박한 아름다움 말이다. 그런 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다보니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선지 방비엥에서의 모든 일정은 즐기는 코스로 짜여있다. 짚라인(Zipline)이나 카약킹(Kayaking), 버기카(Buggy Car) 등이 그것인데 롱테일보트(Long Tail Boat)도 그중의 하나이다. 길쭉하게 생긴 모터보트를 타고 쏭강을 오르내리며 강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을 감상하는 코스이다. 이때 방비엥의 자랑거리인 고깔모자를 닮은 바위봉우리들을 실컷 보게 된다.

 

 

   

방비엥에 도착하자마자 트럭으로 갈아타고 쏭강으로 향한다. 일몰(日沒) 때의 경치가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란다. ’롱테일 보트(Long Tail Boat)를 타고 가면서 노을에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풍광을 즐겨보라는 것이다.

 

 

롱테일 보트(Long Tail Boat)‘의 탑승 장소는 여러 곳에 있다. 타고내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일정한 규격을 갖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보트는 3인승으로 관광객 2명과 보트를 운전해주는 현지인이 1명 더 타게 된다. 쏭강의 물살은 일정하지가 않다. 물살이 센 곳이 있는가 하면 약한 곳도 많다. 물 깊이 또한 깊은 곳과 얕은 곳을 번갈아가며 지나게 된다. 그런 곳에 모터보트를 띄우려면 운전의 기술만 갖고는 부족할 것이 분명하다. 물길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는 운전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지인이 운전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방비엥을 가로지르는 쏭강은 물길의 높이가 우기(雨期)와 건기(乾期)에 따라 차이가 많다고 한다. 지금은 수위가 낮아져 있는 건기이다. 그리고 지금이 보트를 타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란다. 우기가 되어 물이라도 불어날라치면 물살이 세어져서 보트를 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보트는 색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스크루(screw)가 배에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고 긴 막대 모양으로 생겨서 물길의 형편에 따라 조정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물이 낮은 곳이라도 나타날라치면 스크루를 비스듬히 누여가면서 운행을 한다. 얼마만큼 누이느냐는 그들만의 노하우(knowhow)일 것이다.

 

 

 

 

 

 

보트는 아래 사진과 같은 현수교(懸垂橋)의 아래를 통과하기도 한다. 내일 블루라곤으로 갈 때 저 다리를 건너게 된다. 물론 차를 탄 채로이다. 하지만 난 차량이 다리를 다 통과할 때까지 내내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바닥이 판자로 깔려있는데 허술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외까지 나와서 목숨을 걸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보트를 타고가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거의 환상적이다.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그 모양새가 어디선가 많이 보던 풍경이다. 그렇다. 중국의 계림에서 보았던 산봉우리들이 이곳에도 널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라오스의 작은 계림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아무튼 수많은 산군들이 쏭강과 어우러지면서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자들 몇이서 뭔가를 채취하고 있다. 이를 본 집사람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다슬기를 잡고 있는 중이라고 우겨댄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저들이 채취하고 있는 건 민물 해초(海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렇게 채취한 해초는 일정한 가공과정을 거친 후에 카이(kai)‘라는 음식으로 다시 태어난다. 우리나라의 부각과 비슷한 밥반찬이 되어 밥상에 올라온다는 얘기이다.

 

 

위의 사진과 같이 민물 해초(海草)를 따는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아래 사진과 같이 다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빨래를 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강에서 채취한 해초는 즉석에서 방망이로 두들겼다가 행구기를 반복한 다음에 잘 펴서 말린다. 그리고 깨와 고춧가루 등의 조미료를 바른 후에 밥상에 올린단다. 이를 라오스에서는 카이(kai)‘라고 부른단다. 아무튼 우리나라의 부각(식물성 식품에 찹쌀 풀을 발라서 말려 두었다가 필요할 때 기름에 튀겨 먹는 음식) 쯤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그러고 보니 젓갈시장에서 보았던 부각비슷한 것이 카이였던 모양이다.

 

 

새까만 물체들이 물속에 반쯤 잠겨있다. 바위들이려니 했는데 그 물체가 조금씩 움직이는 게 아닌가. 가까이 다가가보니 물소들이다. 코뚜레를 끼지 않은 물소 떼들이 자기 집 안마당이라도 되는 양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수많은 열기구들이 하늘을 수놓고 있다.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아 방비엥 여행의 필수코스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중이란다. 하지만 타본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마음 놓고 타기엔 뭔가 찝찝하단다. 신분확인을 거치지 않음은 물론이고, 비행할 때의 주의사항도 거른 채로 태우더라는 것이다. 기본을 지키지 않는 곳에 어찌 안전이 있을 리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기구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은 아름답기만 하다. 오색의 풍선들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암봉들과 잘 어우러지며 한 폭의 수채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배를 타고가다 보면 심심찮게 바위절벽이 나타난다. 그 절벽들은 겹겹이 쌓이기도 한다. 그 사이로 흐르는 쏭강의 물길을 보트가 누비고 다닌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엔도르핀(endorphin) 이 쏙쏙 솟아오르지 않겠는가.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하지만 우리네 눈에 익숙한 낚싯대는 아니다. 기다란 막대 끝에다 낚싯줄을 매달았을 따름이다. 과연 고기가 속아줄지 의문스럽다. 하긴 저런 게 강태공의 진수가 아니겠는가.

 

 

 

 

 

 

 

 

 

 

강변에는 수많은 호텔들이 늘어서 있다. 외관(外觀)도 하나같이 말쑥하다. 그만큼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온다는 증거일 것이다.

 

 

 

 

 

 

 

 

유원지처럼 보이는 마을도 나타난다. 하긴 넘친다 싶을 정도로 많은 여행객들이 몰려드니 유원지라고 안 생겼을 리가 없다.

 

 

 

 

카약킹(Kayaking)을 하고 있는 팀들도 보인다. 우리 팀은 내일 일정에 포함되어 있다.

 

 

 

보트를 타고가다 보면 아래 사진과 같은 다리들을 여러 번 만난다. 대나무를 엮어서 만들었다는데 아무리 봐도 허술해 보일 따름이다. 우기(雨期) 때도 다리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럽다. 언뜻 겨울에만 제 기능을 수행하는 우리나라의 섶다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빼어난 풍광에 도취되어 환호성을 지르다보면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된다. 그러는 사이 배는 우리가 머무는 호텔의 앞의 강변에 정박을 한다. 아무튼 물놀이를 했으니 몸을 씻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호텔의 풀장으로 뛰어들면 그만일 테니까 말이다.

 

 

 

 

 

배에서 내려 호텔로 들어가다가 고개를 돌려본다. 쏭강에서의 여운이 가셔지지 않아서이다. 이곳 쏭강은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파래를 따서 가공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관광객들을 보트나 카약에 실어 나르기도 한다. 거기다 물소들은 한 수 더 떠서 자기네 앞마당이줄 알고 한가롭게 노닐기까지 한다. 이로보아 쏭강은 이곳 방비엥 사람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생명의 젓줄이지 싶다.

 

 

여행지 : 라오스(Laos)

 

여행일 : ‘17. 2. 28() - 3.4()

일 정 :

3.1() : 비엔티엔 사원관광(왓 씨사켓, 왓 팟 깨우), 불상공원(왓 씨엥쿠안). 탕원유원지 선상식. 소금마을 방문, 방비엥(썬셋 모터보트, 유러피안 거리)

3.2() : 방비엥(블루라군, 짚라인, 탐남동굴 튜빙, 쏭강 카약킹)

3.3() : 젓갈마을 방문, 비엔티엔(빠뚜싸이 독립기념탑, 왓 탓 루앙)

 

여행 첫날 오후 : 콕싸앗(Khoksaath) 소금마을과 젓갈마을

    

특징 : 비엔티안에서 방비엥까지는 대략 4시간 정도가 걸린다. 우리나라 같이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린다면야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도로여건이 좋지 않은 라오스에서는 무척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창밖에 비치는 풍경까지 별로인 도로를 꽤나 오래 털털거리며 달려야하기 때문이다. 이때 관광객들의 무료함을 잠시나마 달래주는 곳이 소금마을과 젓갈마을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60~70년대의 옛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쯤이야 하나도 궁금할 게 없지만, 육지에서 만나게 되는 염전(鹽田)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낯설기 때문이다. 바닷가가 아닌 내륙에서 만나게 되는 젓갈마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런 풍경은 우리나라, 아니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만날 수 없다. 털털거리며 달려오면서 쌓여온 피로감과 지루함을 털어버리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방비엥으로 출발하기 전에 탕원유원지로 향한다. 오늘 점심은 배 위에서 먹기로 예약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냥 배가 아니고 모터가 달린 배 위에다 햇빛을 가릴 수 있도록 지붕을 얹었다. 멀리서 보니 영락없는 일반주택이다. 수상가옥인 셈이다. 아니 식사가 제공되는 유람선이라고 보는 게 더 옳겠다

 

 

나무다리를 건너면 홀(hall)이 나온다. 이곳 역시 물 위에 지어졌지만 뭍에서 문을 연 대형 식당에 못지않게 널따랗다. 수십 개의 식탁이 질서정연하게 놓여있는 걸로 보아 유람선을 타지 않는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곳인 모양이다.

 

 

 

 

예약된 배를 타려면 나무로 만든 다리를 통과해야만 한다. 아니 다리라기보다는 나무판자를 엮은 다음 물 위에 걸쳐놓았다고 보는 게 더 옳겠다. 아무튼 이 다리를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계속해서 출렁거리기 때문이다.

 

 

오른편에는 양식장이 만들어져 있다. 그중에 그물이 쳐진 곳은 민물새우 양식장일 것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이 나오기 시작한다. 미리 세팅(setting)을 해놓은 효과일 것이다. 죽통밥에 신선로까지 갖춘 음식상은 나름대로 훌륭했다. 거기다 튀김종류까지 나와서 나 같은 술꾼들에겐 안주의 역할까지 톡톡히 해준다. 다만 내 주량(酒量)을 채우기에는 조금 부족한 양의 안주가 제공된다는 게 흠()이라면 흠일 지도 모르겠다. 술을 조금이라도 덜 마셨으면 하는 집사람으로 보아서는 감사해야할 일일 테고 말이다.

 

 

음식상이 다 차려졌다싶으면 배는 출발한다. 그리고 경쾌한 음악이 시작된다. 음악을 감상하면서 식사를 즐기라는 의미일 것이다. 가이드의 전해준 바에 의하면 직접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러도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건 숫제 신선놀음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일행 중에는 마이크까지 잡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고작 어깻짓으로 장단을 맞추는 사람들이 한 둘 눈에 띌 따름이었다. 나 역시 그만두기로 한다. 마이크를 잡을 만큼 술기운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주어진 식사시간이 적었다고 보면 되겠다.

 

 

 

 

갈수기임에도 불구하고 강물은 풍부하다. 메콩강(Mekong River)의 물줄기가 점점 메말라간다고 들었는데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메콩강에 의지해 살아온 인도차이나 여러 나라 7000만 명의 주민에게 위기가 불어 닥쳤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메콩강 상류 운남성에 발전과 용수 공급을 위해 중국이 여러 개의 댐을 건설한 것이 중요한 원인이란다. 참고로 메콩강(Mekong River)은 중국의 윈난성(雲南省)에서 발원한다. 라오스 전 국토의 90%가 이 강과 연결되어 있으며 라오스인들에게는 '어머니의 강'이라고 불리고 있다. 때문에 라오스를 여행하다보면 민물고기 파는 곳을 쉽게 볼 수 있다.

 

 

다른 배들도 서너 척 보인다. 옆을 스쳐가는 배에선 한국여성들이 노래로 한창 흥을 돋우고 있다. 아니 이미 절정에 달아올랐다고 보는 게 더 옳겠다. 노래와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춤이 빠질 리가 없다. 그녀들이 추어대는 춤사위가 날아갈 듯이 가뿐하다. 역시 외지에 나오면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더 자유로운가 보다.

 

 

 

강 건너편에는 꽤나 많은 별장들이 지어져 있다. 이곳 탕원유원지가 라오스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지역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탕원유원지에서 선상(船上) 식사를 마치고 방비엥으로 향한다. 창밖에 비치는 풍경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들이다. 그저 사찰을 낀 작은 마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할 따름이다. 그런 지루함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려는 양 버스가 멈추어 선다. 바닷가가 아닌 내륙에서 소금을 만들어내는 콕싸앗(Khoksaath)마을이란다. 버스에서 내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소금 판매장, 이곳에서 생산되는 소금 중 쇠솥에서 끓여서 만들어낸 소금을 판매한단다. 이 소금은 요오드 (iodine)가 없어 갑상선 환자에게 좋은 소금이라고 한다. 부지런한 처제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네 봉지를 사서 가족마다 하나씩 돌리고 본다.

 

 

라오스는 동남아시아 유일의 내륙국(內陸國)이다.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중국, 미얀마 등 다섯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전 국토의 70% 이상이 산악지대이다. 때문에 라오스에는 무역선을 띄울 수 있는 바다가 없다. 약소국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바다가 없다는 불편은 이뿐만이 아니다.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바닷물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금이란 게 원래 인간이나 동물들에게는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물질이다 보니 라오스로 봐서는 두통거리였을 게다. 그리고 그 고민이 만들어 낸 결과가 이곳 소금마을이란다. 지하 깊은 곳에 스며있던 바닷물을 찾아냈고, 그 물을 퍼 올려 소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찾아낸 것은 지하에 층을 이루고 있는 소금덩어리 암석인 암염(巖鹽)이다. 아주 오래전 이곳은 바다였었는데 지각변동으로 육지화가 되는 과정에서 지하에 묻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하수를 끌어올리면 짜디짠 소금물이 쏟아져 나온단다.

 

 

 

 

그 짠물을 우리가 먹는 소금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그중 하나는 굽는 방식이다. 짠물을 쇠솥에 가득 담은 후 톱밥을 이용해서 끓여내는 방법이다. 이때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단다. 조금만 불 조절을 소홀히 하면 소금이 탈 수 있기 때문이란다. 하루 16시간에서 18시간을 내내 가마를 지켜야한다니 힘이 들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천일염제조법이다. 아래 사진과 같은 시설을 이용해 지하 200m에서 퍼 올린 소금물을 염전(鹽田)에 가두고 햇볕으로 자연 건조시켜서 소금을 만드는 방법이다. 3일 정도를 건조시켜야 소금으로 거듭난다니 끓여내는 것보다는 세 배나 시간이 더 걸린다.

 

 

휴식시간이어선 지는 몰라도 작업을 하는 광경은 볼 수가 없었다. 어른들 대신 동네 꼬마아이 몇이 관광객들 곁을 맴돌고 있었다. 가이드의 말로는 과자를 주면 받지만 돈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정부에서 금지시키고 있어 자칫 돈을 주는 사람들까지도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며 겁까지 준다. 아무튼 몇 년 전에 들렀던 캄보디아의 꼬마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과자를 나누어주는 집사람의 손길이 바빠진다. 그런 점이 마음에 닿았나 보다. 참고로 이곳 소금마을은 2년 전에 KBS 2TV의 예능프로그램인 용감한 가족에서 방영됨으로써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심혜진, 이문식, 박명수, 박주미 등 6명의 가족이 실제로 작업에 참여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고 한다. 제조과정은 단순하지만 노동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란다. 그 전에도 같은 방송(KBS 2TV)'VJ특공대'에서 '24시간 뜨거운 곳, 라오스 소금 마을'이라는 제목으로 이곳을 소개했다니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곳임은 분명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금은 소금창고로 옮겨진다. 그리고 불순물을 제거한 뒤 포장되어 시중에 판매된다. 아무튼 그렇게 고생해서 얻는 양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금창고의 안에 쌓여있는 소금부대는 제법 많았다.

 

 

방비엥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또 하나의 낯선 곳은 젓갈마을이다. 차에서 내리면 길게 늘어선 어물전(魚物廛)들이 눈에 들어온다. 냉동이나 생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모두 건어물만을 진열해 놓은 것이 특이하다. 그러나 낯설지는 않은 풍경이다. 조금 허술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건어물 시장과 크게 다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곳 젓갈마을은 남릉호 인근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마을이다. 남릉호는 발전용 댐을 건설하면서 생긴 인공호수로서 호수면적이 소양호의 5배에 이르는 큰 호수인데, 댐 건설 당시 수몰(水沒) 지구에 있던 고산족인 타흐아 마을의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고 그들의 생계수단으로 어업권과 상권을 부여하면서 현재의 젓갈시장이 탄생했다고 한다. 참고로 남릉댐의 건설자금은 태국에서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생산된 전력의 50%는 태국으로 수출하고 있단다. 라오스가 전기를 수출하는 나라로 알려지게 된 이유이다.

 

 

진열된 젓갈과 건어물 등은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우리 일행 역시 처삼촌 벌초하듯이 눈요기만 하면서 지나갈 따름이다. 위생적이지 않아 보이는 게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특히 나 같은 경우는 민물고기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비린내 나는 민물생선은 질색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생계가 유지될지 의심스러웠다. 가이드의 안내도 시큰둥할 따름이다. 그저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르는 끼워 넣기 관광지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에 들어있는 건 젓갈이다. 라오스인들에게 젓갈은 우리네 김치와 같다. 외국에 나가서 가장 생각나는 음식이 민물생선으로 만든 젓갈일 정도라니 말이다. 젓갈은 민물생선에 쌀겨와 소금을 섞어 삭힌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가자미식혜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냄새가 고약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입맛에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최고의 음식이라니 나라마다 특성에 맞는 입맛이 따로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래 사진의 멸치같이 생긴 생선도 실은 민물고기이다. 하긴 돌고래나 갈치 같은 생선도 민물에서 사는 것이 있다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아무튼 진열되어 있는 건어물들을 보면 우리가 흔히 접하고 있는 바다생선처럼 가공하여 먹고사는 것 같다. 다만 냉동시설이 부족한 탓에 우리네 같이 신선한 생선은 접할 수는 없을 테고 말이다.

 

 

우리나라의 부각 같은 것도 보인다. 식물성 식품에 찹쌀 풀을 발라서 말려 두었다가 필요할 때 기름에 튀겨 먹는 음식 말이다.

 

 

 

얼마쯤 달렸을까 버스가 멈춘다. 가이드가 옥수수를 맛보여 준다는 것이다. 궁금해서 따라내려 보니 우리나라에서 보아오던 풍경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길가에다 솥단지를 내걸고 직접 쪄서 파는 노점상 말이다. 맛 또한 다르지가 않았다. 강원도 찰옥수수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오가는 중에 들른 휴게소, 널따란 주차장을 갖춘 휴게소는 깔끔한 식당 외에도 꽤나 큰 쇼핑센터를 갖추고 있다. 잠깐의 여유시간이 주어진 탓에 모두들 매장 안으로 들어가 본다. 매장에는 라오스 산삼이라고 알려진 킹담(흑생강)‘과 목청꿀 등 라오스의 특산품들을 팔고 있다. 킹담은 만능통치의 효능이 있다는 입소문을 탄 탓인지 가격이 만만찮다. 그래선지 사람들의 관심은 가격에 부담이 없는 선물용 상품으로 시선이 쏠린다. 그리고 열대과일을 말려 놓은 상품들을 주워들고 본다. 집사람도 한아름 가득이 들고 나선다. 부담 없는 가격이라는 부연설명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킹담 한 봉지를 갖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같이 여행을 하고 있는 동생 내외가 나에게 꼭 필요하다면서 선물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이어트와 피로회복에 좋은 것은 물론 고혈압에도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킹담(KINDAM)이란 라오스말 학명인데 태국말로는 끄라차이담(KRACAIDAM)이다. 기온이 높고 일교차가 큰 라오스와 태국 북부, 미얀마 원시림에서 자생하는 킹담은 생강속과 식물로 모양이 생강의 울금과 흡사하며 진한 보라색을 띄고 있다고 한다.

 

 

 

 

 

 

휴게소의 화장실에 들렀다가 익숙한 그림 하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작년에 스위스(루체른)를 여행하면서 보았던 경고(警告) 그림을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당시 난 동양인에 대한 모독이라면서 노발대발했었다. 쭈그리고 앉아 대변을 보는 건 동양인뿐인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외라는 생각에 살그머니 문을 열어보니 아래와 같은 변기가 놓여있다. 그렇다면 그림이 잘못 게시되었단 얘기가 아니겠는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곳에도 양변기가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걸터앉아 싸는 일이 익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4~5시간을 시달리고 나서야 방비엥에 도착한다. 한국에서 1시간이면 갈 거리이지만 도로사정이 열악하다보니 별 수 없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하지만 가끔은 도로공사 현장이 보이기도 했다. 라오스가 새로운 도약을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 나라의 기초 체력이 되는 도로망을 정비함으로써 도약의 기틀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저녁에는 유러피안거리를 걸어보기로 한다. 관광객들로 항상 넘치는 곳이다. 그중의 대다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그래 유럽관광교역이사회 (ECTT) 선정한 '2013 세계 최고 여행지'이자, New York Times에서도 '세계 53개 여행지 중 최고 1'로 선정(2008)했을 정도이니 극성스런 우리니라 관광객들이 이를 놓쳤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긴 2000년경에 EU본부에 출장을 갔다가 잠깐 짬을 내어 들렀던 북해 인근의 소도시 브뤼헤(Brugge)에서까지 우리나라 관광객들을 만났을 정도이니 두말해서 뭐하겠는가. 승용차를 빌려 타고 물어물어 찾아갔을 정도로 외진 곳에서 고국 사람들을 만났었기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이곳도 역시 아열대기후가 맞나보다. 과일가게에 열대과일들이 지천인 것을 보면 말이다. 과일을 좋아하는 집사람에게는 호재일 수밖에 없다. 두리안과 망고, 망고스틴 등을 챙겨서 호텔로 돌아왔다.

 

 

명색이 밤거리인데 포장마차가 안보일 리가 없다. 닭고기나 쏘시지를 꼬챙이에 꿰어 팔고 있다. 노릇노릇하게 불에 구웠음은 물론이다. 함께 간 친구가 몬도가네(Mondo Cane) 음식이 먹고 싶다며 찾아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정부에서 혐오식품의 판매를 금지시키고 있다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K-Mart’라는 상호가 보인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상점이란다. 그래선지 김밥과 즉석 떡볶이까지도 팔고 있었다.

 

 

 

 

방비엥은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여행자들을 위해 생겨난 곳이 바로 유러피안거리이다. 그런 만큼 이곳에서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맥주 한잔을 즐기며 새로운 만남을 가져보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빵가게도 보인다. 진열되어 있는 바게트가 먹음직스럽다. 라오스와 바게트라는 단어가 연결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라오스가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를 겪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 큰 영향력을 행사 할 때 라오스는 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프랑스 군대가 이를 물리치면서 라오스를 프랑스에 귀속 시킨 것이다. 이런 프랑스의 식민 지배는 라오스인들의 빵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방비엥에서 머물렀던 그랜드 리버사이드호텔(The Grand Riverside Hotel)’, 이름 그대로 쏭강의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3성급 호텔인데 전체적으로 볼 때 어제 비엔티안에서 머물렀던 호텔보다 한 수 위인 것 같다. 우아하게 설계된 각 객실에는 에어컨과 전용 욕실, 위성 TV, 무료 유선 인터넷 등이 완비되어 있다. 호텔 어디에서든지 Wi-Fi가 잘 터짐은 물론이다. 특히 부대시설로 만들어 놓은 수영장이 일품이다.

 

 

 

자고 일어나 창문을 열기라도 할라치면 신선한 아침공기와 함께 방비엥의 아름다운 풍경이 성큼 다가온다.

 

 

여행지 : 라오스(Laos)

 

여행일 : ‘17. 2. 28() - 3.4()

일 정 :

3.1() : 비엔티엔 사원관광(왓 씨사켓, 왓 팟 깨우), 불상공원(왓 씨엥쿠안). 탕원유원지 선상식. 소금마을 방문, 방비엥(썬셋 모터보트, 유러피안 거리)

3.2() : 방비엥(블루라군, 짚라인, 탐남동굴 튜빙, 쏭강 카약킹)

3.3() : 젓갈마을 방문, 비엔티엔(빠뚜싸이 독립기념탑, 왓 탓 루앙)

   

여행 첫날 오전 : 불상공원(佛像公園) ‘왓 씨엥쿠안(wat xieng khouane)’

   

특징 : 라오스 국민의 대부분은 불교를 믿는다. 때문에 라오스에 온 사람들이라면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불교사원을 찾는다. 나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내가 꼽아놓고 있던 핫 플레이스(hot place)왓 씨엥 쿠안(wat xieng khouane)불상공원(佛像公園, buddha park)이었다. 불상과 힌두신이 섞인 다양한 불상 200여 개가 조성되어 있다는 정보가 내 호기심을 자극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50m 둘레에 높이가 12m나 되는 와불(臥佛)이 조성되어 있는가 하면, 천국과 지옥을 묘사한 동그란 사리탑 그리고 얼굴과 팔이 여러 개 달린 조각상 등 지금껏 듣도 보도 못했던 특이한 조형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왓 시사켓에서 20분 남짓 달린 버스는 우리를 태국과 라우스의 국경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왓 씨엥 쿠안(wat xieng khouane)‘, 우리말로는 불상공원(佛像公園, buddha park)이라는 곳에다 내려놓는다. 불상과 힌두신이 섞인 다양한 불상 200여 개가 조성되어 있는 공원 형태의 사원(寺院)이다. 이 때문에 '(사원)'이란 명칭이 붙어있지만 부속건물은 없고 불상들만 있는 일종의 공원이다. 참고로 씨엥쿠완은 현지인들에게는 ()의 도시를 의미한단다.

 

 

 

이곳은 힌두와 불교의 원리를 형상화한 곳으로 괴기스럽고 우스꽝스럽게 조각된 석상들이 모여 있다. 1958루앙 푸 분레우아 술리앗이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감동한 추종자들 10여명이 함께 뜻을 모았다고 한다. ’루앙 푸는 전문적으로 조소(彫塑)를 공부한 사람이 아닌데도 평생을 불상공원의 불상 조성에 바쳤다. 하지만 그는 1975년 라오스가 공산화되면서 종교탄압이 시작되자 라오스를 떠나 고향인 메콩강 건너편에 있는 태국의 농카이로 가서 이곳보다 몇 배나 더 큰 불상공원(왓 살라캐우쿠)을 다시 조성했다고 한다.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입구 중앙에 있는 조형물이 눈에 확 들어온다. 지옥과 천국을 형상화한 것이라는데, 둥그렇게 생긴 것이 영락없이 호박을 빼다 닮았다.

 

 

 

 

출입구는 괴수(怪獸)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으로 나있다. 그리고 서서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천정의 높이가 낮다. 그래서 사람들은 엉금엉금 기어서 안으로 들어간다. 천국으로 들어서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안으로 들면 천국과 지옥, 그리고 이승을 묘사한 조형물들을 만들어 놓은 공간이 나온다. 이 바깥쪽을 빙빙 돌아 3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통로와 계단이 나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조형물이 배치되어 있는 안쪽 공간을 통해서도 위로 오를 수 있으니 참조한다. 그리고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늘 붐비는 바깥쪽 통로를 피할 수 있는 이 통로를 조심스럽게 추천해본다.

 

 

내부 중앙은 둥근 기둥을 중심으로 같은 소재로 만든 조형물들이 빙 둘러서 배치되어 있다. 1층은 지옥을 나타내고 있으며, 2층은 이승(현생), 그리고 3층은 천국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부가 컴컴한 탓에 조형물이 담고 있는 표정들을 알아차리는 것은 쉽지가 않다.

 

 

 

 

 

 

 

 

 

 

꼭대기에는 나뭇가지를 형상화한 조형물을 세워 놓았다. ’다음 생을 결정짓는 열매가 열리는 생명의 나무라고 한다.

 

 

 

꼭대기에서는 공원전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가 있다. 왼쪽에 보이는 게 불상공원에서 가장 큰 와불(臥佛, 길이 50m)이고, 그 앞쪽으로 다양한 불상 200여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동남아의 신화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익살스럽게 생긴 것도 심심찮게 보이고, 개중에는 그리스 로마신화를 연상시키는 것도 눈에 띈다. 공원 끝에는 도인으로 보이는 상()도 있다.

 

 

 

위로 올라와보니 자그만 구멍 하나가 눈에 띈다. 뭔가 볼거리가 있을 것 같아 무작정 들어가고 본다. 그런 모험은 우리에게 행운을 안겨 주었다. 아까 올라오면서 보았던 조형물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 그리고 이승을 표현했다는 그 조형물들 말이다. 아무튼 정교한 맛은 조금 떨어지지만 작가의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만들어 놓은 듯한 조형물들을 가까이서 보는 맛은 누가 뭐래도 쏠쏠했다. 다만 통로가 좁은 탓에 덩치가 큰 사람들은 통과할 수가 없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불상공원에서 가장 큰 와불은 길이가 50m나 된다. 그 크기가 하도 크다보니 쉽게 눈에 띄는데 발바닥이 특이하게 다가온다. 우리나라 불상에서 부처의 발을 본 기억이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불상공원에 있는 200여 개의 불상(佛像)들은 전체적인 스토리텔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한 개, 또는 한 단위가 특정 상황이나 장면을 묘사하고 있을 따름이다. 또한 불상이라고는 하나 날개 달린 인물이 묘사되어 있는가 하면, ’활을 겨누는 상()‘이나 도인풍의 상등이 다수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와 힌두교 외에도 다양한 신화가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조형물들 대부분이 검은 색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주재료가 시멘트라서 부식이 된 탓이란다.

 

 

 

 

 

 

 

 

 

일산(日傘)을 쓰고 있는 부처님의 뒤에는 뾰쪽하게 생긴 탑을 배치했다. 계단이 가파른데다가 비좁기까지 해서 오르기가 사납지만 일단은 오르고 볼 일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불상공원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이곳에는 괴기스럽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부처님들이 널려있다시피 하다. 얼굴과 팔이 여러 개 달린 조각상 등 지금껏 보지 못했던 특이한 조형물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불상공원을 조성한 루앙 푸 분레우아 술리앗은 불상(佛像) 외에도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힌두교의 다양한 신들을 묘사하는 조각들을 세웠다. 불교와 힌두교가 재통합된 자신만의 종교를 실행하기 위해서란다.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니 가이드가 뭔가를 내민다. 바나나를 구운 것이란다. 고맙다는 표현까지 거른 채로 일단 입에 넣고 본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눈으로만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인내력이 나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바나나는 그런 내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달짝지근한 것이 내 입에 딱 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매콤한 파파야 샐러드나 구운 닭요리 등의 먹을거리를 판매하는 음식점도 있다고 한다. 다음 여행지로 떠나야하는 일정 때문에 맛볼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여행지 : 라오스(Laos)

 

여행일 : ‘17. 2. 28() - 3.4()

일 정 :

3.1() : 비엔티엔 사원관광(왓 씨사켓, 왓 팟 깨우), 불상공원(왓 씨앙 쿠앙). 탕원유원지 선상식. 소금마을 방문, 방비엥(썬셋 모터보트, 유러피안 거리)

3.2() : 방비엥(블루라군, 짚라인, 탐남동굴 튜빙, 쏭강 카약킹)

3.3() : 젓갈마을 방문, 비엔티엔(빠뚜싸이 독립기념탑, 왓 탓 루앙)

   

여행 첫날 오전 : 비엔티안의 사원(Temple)

   

특징 : 라오스 국민의 대부분은 소승불교(小乘佛敎, Hinayana) 신자들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도 일부 있지만 소수일 따름이고 국민의 90%는 부처님을 믿는다. 그래선지 시내(市內), 아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불교 사원(寺院)들이 들어서있다. 그들의 생활자체가 곧 불교라는 증거일 것이다. 라오스 여행에서 불교를 떼고 싶어도 뗄 수가 없는 이유이다. 오늘 들른 사원들도 그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이 사원들은 라오스가 한창 전성기(全盛期)를 누릴 때 지어진 사원들이다. 그러니 라오스 불교를 대표할만한 사원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들러보고 나면 실망부터 하게 된다. 어디에 내세울 만큼 거대하거나 화려하지도 않을뿐더러 보관하고 있는 문화재들 또한 빈약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약소국가의 설움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태국이나 미얀마 등 주변 국가들로부터 숱하게 침략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수많은 문화재들이 불타 없어지고 약탈당했음은 물론이다.

 

 

   

버스는 우리를 왓 호파깨우(Wat Hophrakeo)‘사원의 정문 앞에다 내려놓는다. 길 건너에도 왓 시사켓이라는 또 다른 사원이 있으니 혼동하지 않도록 한다. ’왓 호빠깨우, 라오스 말로 ''''은 사원을 뜻한다. ''는 스님이 없는 사원을 말하고 ''은 스님이 거주하는 곳이란다. 또한 '파깨우'에머럴드 불상을 의미한다.

 

 

 

 

이 사원은 탓 루앙을 세운 쎗타티랏(King Setthathirath)‘ 왕이 1565년 루앙프라방에 있던 왕도를 이곳 비엔티안으로 천도하면서 란쌍왕국의 상징이랄 수 있는 에메랄드 불상(Phar Keo, 파 깨우)‘을 모시기 위해 건축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1779년 태국에 있던 시암왕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건물은 소실(燒失)되었고 에메랄드 불상 또한 약탈당했다. 참고로 에메랄드 불상은 아직까지도 방콕의 왕궁사원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라오스 국민들로 봐서는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태국의 국보 제1로서 말이다.  

 

 

 

현재의 건물은 1936년에 새로 지어졌다. 라오스의 마지막 왕이었던 아누봉, 태국에 본거지를 둔 시암왕국딱씬왕과 치른 전쟁(1779)에서 패하면서 불탔던 것을 당시 이곳을 통치하고 있던 프랑스가 재건한 것이란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국내 각지로부터 모아진 불상 등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 참고로 당시 태국에서 빼앗아간 보물은 에메랄드불상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루앙프라방에 있는 파방이란다. 현대에 와서 파방은 태국에서 반납을 하였지만 에메랄드 불상은 아직까지도 태국에 남아 있다. 덕분에 본래는 왕실의 전용 사원이었으나 그 역할을 할 수가 없다고 해서 사원이란 뜻의 을 뺀 호빠깨우로만 불리기도 한단다.

 

 

본당 처마부분에는 세 마리의 코끼리가 새겨져 있다. 라오스가 번성했던 3왕조 시대와 '화합'을 상징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본당의 지붕은 끄트머리를 뾰쪽하게 틀어 올리면서 뭔가를 형상화 시켰다. 메콩강의 수호신으로 라오스인들이 추앙하는 '산갈치' 상이란다. 라오스의 사원이라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조형물인데, 일반 건축물에도 마치 부적처럼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저 산갈치가 실제로도 잡힌 적이 있다는 것이다. 1978년에 미군들이 메콩강에서 8m가 넘는 산갈치를 잡은 바 있단다. 원래 명칭은 '나가퓌쉬'란다.

 

 

 

본당으로 오르는 계단의 양 옆은 용()을 조각해 놓았다. 불교에서 나오는 설화(說話)를 형상화한 게 아닐까 싶다. 설화는 불교를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하는 효과적인 매개체(媒介體)이다. 불교도들은 기존의 인도 설화를 바탕으로 불교적인 색채를 입힌 이야기들을 많이 만들어냈는데, 부처님 일대기에 등장하는 나가(naga) 역시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부처님의 일생과 관련해 나가가 등장하는 이야기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하나만 살펴보기로 하자. 부처님은 네란자라 강가의 우루벨라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정각도량(正覺道場) 일곱 군데의 나무 아래에서 7일씩을 보냈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에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무짤린다 용왕이 비바람으로부터 부처님을 보호한 에피소드(episode)이다. 부처님께서 무짤린다나무 아래에서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을 때였다. 때 아닌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자, 나무에 의지해 살던 무짤린다 용왕이 나타났다. 무짤린다는 자신의 몸으로 부처님의 온몸을 감싸고 머리를 부채처럼 펼쳤다. 7일 동안의 폭풍우가 그치자 그는 감쌌던 부처님의 몸을 풀고, 한 젊은이로 변신하여 부처님을 찬탄했다고 한다.

 

 

위로 올라서면 사원의 벽면과 기둥의 아름다운 문양이 눈에 확 들어온다. 무엇보다 조각의 정교함이 놀랍기 짝이 없다. ()의 비닐 하나까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벽면과 기둥의 장식 또한 무척 아름다웠다.

 

 

 

 

위로 오르면 커다란 불상(佛像) 둘이 손님을 맞는다.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형상이다. 그렇다고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로 받아들이면 안 될 일이다. 거부가 아니라 양보의 의미를 담고 있는 불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잠시 라오스 불상들이 갖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라오스 불상들은 세 가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 차렷 자세의 불상은 라오스가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비가 오기를 바라는 '기우(祈雨)'의 의미이고, 앞으로 손을 내미는 자세는 양보하며 살아가라는 의미와 함께 악()을 물리치는 '항마(降魔)'의 뜻도 포함하고 있단다. 또한 앞으로 손을 모으고 있는 자세는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의미로 먼저 자기를 다스리는 자기관리의 의미란다.

 

 

이 절의 이름은 왓 파깨우(Wat Hophrakeo)’이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태국(방콕)에 있는 왓 프라깨우(Wat Phra Kaew)’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이미 왔을 것이다. 그렇다. 두 사원(寺院)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래 이곳에 안치되어 있던 그 유명한 에메랄드불상을 현재는 태국의 왓 프라깨우에서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1779년 씨암왕국이 이곳을 정복하면서 약탈해갔다고 한다. 부처님은 가장 큰 가르침이 평화와 자비일진데, 그의 사상(思想)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할 짓은 아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돕지는 못할망정 죽고 죽이는 살상을 일삼아서야 되겠는가.

 

 

가운데 문()은 굳게 닫혀있다. 문에 새겨진 그 무엇인가가 대단히 중요한 예술품이라도 되는가 보다. 유리로 차단벽까지 만들어 둔 것을 보면 말이다.

 

 

안으로 들어보려다 이내 마음을 돌려버린다.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고 해서이다. 거기다 볼 것도 별로 없다니 일부러 들어가 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까짓 불상(佛像)쯤이야 잠시 후 들르게 될 왓 시사켓에서 실컷 보면 될 일이다. 대신 본당(本堂)의 외면에 만들어진 회랑(回廊)을 둘러보기로 한다. 빙 둘러서 꽤나 많은 불상들을 모셔 놓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벽면에 조각해 놓은 장식들도 잠깐의 볼거리로는 충분하다. 정교하게 새겨놓은 불화들이 우리네 눈에는 이국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긴 부처님의 생김새들도 우리나라의 부처님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청동불상(靑銅佛像)들은 하도 많이 만져서 반질반질 하다. 그런데 그 불상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다 슬픈 표정이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문화재들은 그 나라의 역사를 반영한다. 그러니 이 불상들은 라오스인들의 정서가 담겨있다고 보면 된다. 주변의 강대국들로부터 수없이 침략을 당한 라오스인들의 저변에는 약소국의 설움이 짙게 묻어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라오스의 장인 손에서 태어난 불상의 얼굴 표정이 저리될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원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통령궁(Laos Presidential Palace)과 이웃해 있다. 1893년 프랑스가 총독의 관저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인데, ‘대통령궁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주석(대통령)이 거주하지 않아 비어있는 상태란다. 너무 호화롭다는 게 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사원의 앞마당은 정원(庭園)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조형물도 만들어 두었다. 두 남녀가 각기 뭔가를 들어 올리고 있는데, 뭔지는 모르겠다.

 

 

마당 한쪽에 커다란 항아리가 보인다.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유물인데 이 돌 항아리 속에서 사람 뼈가 발견됐다고 해서 용사의 무덤용 '석관(石棺)'일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다수의 고고학자들은 저장고나 장례용 관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술동이라고 믿는단다. 항아리의 안에는 지폐(紙幣) 외에도 꽤 많은 동전(銅錢)이 들어있다. 항아리 안에다 무엇인가를 넣으면 넣는 물건의 100배가 되어 나온 다는 속설(俗說)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관광객들이 던져 넣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라오스의 화폐 단위에는 동전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항아리들은 미국과 베트남이 싸우던 월남전 때 라오스 북동부에 있는 '호치민루트'에서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미군의 폭격으로 땅이 파이면서 들어난 것이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호치민 루트'는 라오스 땅이 분명하다. 그러나 베트남군이 이를 사용하고 있음을 미군이 알아차리고 폭탄을 퍼부었던 곳이다. 베트남 땅에 투하한 폭탄보다 더 많은 양의 폭탄을 쏟아 부었다니 능히 그 양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땅이 깊게 파이면서 유물들이 들어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마당 한쪽 귀퉁이에는 몇 개의 나무 밑동을 모아 놓았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예술에 가깝다. 아직 손질이 덜 된 상태인데도 말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이런 정도 굵기의 나무들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단다. 그만큼 오래 묵은 나무들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왓 호파깨우(Wat Hophrakeo)‘ 사원을 나와 왓 씨사켓(Wat Sisaket)‘ 사원으로 향한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있는 사원이다. 이 사원은 호파깨우(Wat Hophrakeo)‘와는 달리 스님이 거주하고 있는 사원이다.

 

 

 

 

안으로 들면 또 다른 문()이 나온다. 이 문은 입장료를 내야만이 들어설 수 있는 문이다. 문은 오전 8시부터 12, 그리고 오후 1시부터 4시까지만 열린다니 참고해 방문하도록 하자. ’왓 씨사켓사원의 특징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수많은 불상(佛像)들을 들 수 있다. 내부에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진 엄청난 양의 불상이 있는데, 조그만 것까지 합칠 경우에는 그 수는 무려 10,036개나 된단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가이드가 또 다시 복장검사를 한다. 너무 노출된 옷을 입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반바지 차림을 해서는 안 된다.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해서란다. 오죽하랴. 이성을 보면 끌리는 것이 사람의 본성일진데, 그걸 참아 가며 수행을 하고 있는 스님들에게 여성의 맨다리가 보이면 흔들리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관광객들이 너무 우려할 일은 아니다. 사원에서 치마 같은 천을 빌려주기 때문이다. 몇몇이 빌려 입었는데 어떤 사람은 스타일이 멋지게 나타나기도 한다. 몸매가 받쳐주는 모양이다.

 

 

 

왓 씨사켓(Wat Sisaket)‘ 사원은 비엔티안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1818년에 '짜오 아누웡 왕(King Chao Anouvong)’에 의해 건축되었다. 원래의 이름은 싸타싸핫사람(Satasahatsaram)‘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옛 왕궁의 앞뜰에 위치하고 있었다는데, 지금의 대통령궁의 바로 앞이다. 시대에 관계없이 권력자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선지 몰라도 왓 씨사켓(Wat Sisaket)‘은 사암(태국의 옛 이름)이 비엔티안을 약탈했을 때도 살아남아 비엔티안에서 현재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참고로 라오스를 이끌던 3왕조 중 이곳 비엔티안 왕국의 마지막 왕이 '아누웡(안우봉)'이었다. 이 왕은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태국과 싸우다 붙잡혀 태국으로 압송 된지 1년 만에 옥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라오스인들에겐 지금까지도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단다. 알아 두어야할 것이 하나 더 있다. 태국의 북쪽지역은 과거 라오스 땅이었고 현재 태국의 '이산족'은 라오스인들이다.

 

 

 

 

이곳도 역시 본당(本堂)의 안은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이 본당에는 커다란 불상 외에도 천장과 벽면에 석가모니의 일생에 관한 불교 설화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400년 전의 벽화(壁畫)라니 귀한 문화재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는 소릴 듣고 나서 흥미를 잃어버렸다. 거기다 더해 그 그림은 현재 보수작업 중이란다. 그렇다면 더더욱 안으로 들어가 볼 이유는 없어진다.

 

 

사원은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본당(本堂)과 본당을 에워싸고 있는 회랑(回廊)으로 구분되어 있다. 회랑으로 들어서면 수많은 불상들이 반갑게 맞는다. 숫자는 세어 보지 않았지만 불상의 수가 120개이고 불상 뒤 담에 벽감을 만들어 넣은 불상까지 더했을 때는 6,800여개나 된다고 한다.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 사원은 전쟁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고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사원이란다. 19세기 초 시암왕국과의 전쟁으로 수도인 비엔티안이 함락되었을 때 점령군의 지휘관이 이곳을 보존하기 위해 머리를 써서 원정군의 본부로 사용했기 때문이란다. 가장 오래된 사원인 이곳에는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만들어진 다양한 불상들이 보존되어있다고 해서 불상 박물관이라고도 불린다. 그 숫자가 1만 개가 넘는다니 가히 그런 이름이 붙을 만도 하겠다.

 

 

불상(佛像)의 대부분은 남자부처님이지만 개중에는 여자부처님도 있다. 유두에 세 개의 선이 드러나 있는 게 여자부처님이란다. 그리고 머리가 없는 불상이 보이는가 하면 눈에 박힌 보석을 빼 가는 바람에 눈이 사라진 불상도 있다. 그만큼 훼손된 불상들이 많다는 얘기이다. 누군가 이 사원에 있는 불상가운데 세 번째 만나는 여자부처님에게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 말을 따라볼까 하다가 불상의 숫자가 하도 많아 그만두기로 했다. 패키지여행이라는 게 그럴만한 여유시간을 주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하나 있다. 어느 글에선가 이 사원이 비엔티안을 불태운 1829년의 대화재로 다 타고 단지 하나의 탑만 남았다고 했다. 몇 개의 불상과 큰 불상을 포함한 공예품, 그리고 두개의 청동불상과 19세기 초의 공예가 잘 나타나 있는 120개의 석회석으로 만든 불상만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널려있는 이 많은 불상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까 회랑 한 쪽 편에 파손된 불상들이 따로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를 설명한 게 아닐까 싶다. 불상의 대부분이 머리가 손상되어 있었고, 관광객조차 관심에서 멀어져 쓸쓸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회랑 벽의 윗부분을 반 돔형으로 파서 벽감(壁龕)을 만들고 그 안에다 다양한 모습의 불상들을 안치했다. 이런 작은 불상들까지 합칠 경우 왓 싸사켓사원의 불상은 1만개가 넘는단다. 아무튼 이곳엔 목 없는 부처님들도 많다 보인다. 외적이 침략해 머리를 쳐내서 부처님 감옥이라 부르는 곳에 가두었다고 한다. 유리 안에 갇혀 있는 머리 없는 부처님들이 섬뜩하기까지 하다. 참고로 라오스는 미얀마와 태국의 침공으로 패망을 거듭한 나라로서 약소국의 서러움을 무던히도 겪었던 눈물의 나라이다. 하지만 번성하던 때(17세기)도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란쌍왕국시절인데 이란 ‘100이라는 의미고 코끼리라는 말이다. 당시에는 태국의 치앙마이까지 라오스 땅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라오스가 시간이 흐르면서 미얀마와 태국의 숱한 침공과 프랑스의 식민시대와 지배, 공산화 등을 거쳐서, 대학진학률이 3%인 최빈국이 된 것이다. 의무교육인 초등학교 진학률도 83%에 그치고 6년제인 중학교 진학률은 60%에 불과하고 한다.

 

 

본당의 외벽은 곳곳이 흠투성이다. 아까 보수작업을 하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한다고 서운해 했었는데, 이런 상태라면 그런 불평을 해서는 안 되겠다. 그만큼 낡아있다는 얘기이다.

 

 

 

 

문에 새겨진 압살라상이 보인다.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천상의 무희(舞姬)이다. 불교 사원에서 웬 힌두교 무희이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두 종교를 연결시키는 것은 크게 어렵지가 않다. 힌두교 경전(經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성경이나 불교의 불경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힌두교 경전이 그만큼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라는 의미이며, 종교학자들은 지구상 종교의 아버지가 힌두교라 말하기도 한다.

 

 

회랑을 빠져나오면 몇 채의 건물들이 지어져 있다. 그러니까 본당을 회랑이 둘러싸고 있고, 그 밖에는 이런 부속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왓 씨사켓이 승려들이 상주하는 절이라고 했으니 그들이 거주하는 요사채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본당 맞은편에 '탓빠톰'이라는 불탑이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부처님의 유골 일부가 모셔져 있다고도 했다. 콘크리트 색깔의 반구형 건축물이라고 했는데 외모로 보아 이 탑일지도 모르겠다.

 

 

마당에는 수많은 탑()이 세워져 있다. 가이드는 우리나라의 절에서도 볼 수 있는 부도(浮屠)라고 생각하란다. 다만 승려들의 유골을 모시고 있는 우리나라의 부도와는 달리 이곳의 탑들은 이 지방 유력인사의 유골을 보관하고 있단다. 그래선지 모두가 하나같이 화려하기 짝이 없다. 그들이 가진 재력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야외 불전(佛殿)도 보인다. 정자(亭子)처럼 꾸민 건물 안에 금빛 찬란한 부처님을 모셨는데 화려하기 짝이 없다.

 

 

여행지 : 라오스(Laos)

 

여행일 : ‘17. 2. 28() - 3.4()

일 정 :

3.1() : 비엔티엔 사원관광(왓 씨사켓, 왓 팟 깨우, 왓 씨앙 쿠앙). 탕원유원지 선상식. 소금마을 방문, 방비엥(썬셋 모터보트, 유러피안 거리)

3.2() : 방비엥(블루라군, 짚라인, 탐남동굴 튜빙, 쏭강 카약킹)

3.3() : 젓갈마을 방문, 비엔티엔(빠뚜싸이 독립기념탑, 왓 탓 루앙)

 

개관 :

라오스(Laos) : 공식명칭은 라오인민민주공화국(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이다. 한반도의 1.1(236,800.0) 크기로 중국, 베트남,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등 5개국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내륙 국가이다. 반면 인구는 2016년 기준으로 7,019,073명뿐이 되지 않는다. 국토의 약 80%가 산악 지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이 지역에는 오늘날 카족으로 알려진 여러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8세기 이후에 중국 남부에서 살던 타이족에 속하는 라오족이 라오스로 옮겨와 카족들을 차츰 몰아냈고, 1213세기에는 무옹스와(지금의 루앙프라방)공국을 세웠다. 14세기 파눔이 크메르 앙코르 왕의 도움으로 최초의 라오족 국가인 란상을 세웠고, 미얀마의 통치기간(15741637)을 빼고는 란상 왕국이 1713년까지 라오스를 다스렸다. 뒤에 란상은 3개 왕국(비엔티안·참파사크·루앙프라방)으로 나누어졌고, 18세기 시암(태국의 옛 이름)의 제후국으로 떨어졌다. 20세기 초부터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떨어졌다가 1946년에야 루앙프라방 왕의 통치 아래 프랑스연방의 자치국이 되었다. 1950년대 초, 좌파인 파테트라오는 라오스의 통치권을 놓고 우파 및 중도파와 투쟁했고, 한 때 중립연립정부가 생겨났지만 1975년에 파테트라오가 정권을 잡게 되었고, 이때 지하에 숨어 있던 라오스 공산당이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라오스인민민주공화국이 세워졌다. 이후 1980년대에는 베트남이 이끄는 인도차이나 동맹(라오스·베트남·캄보디아)의 일원이 되었으나, 1990년대 초반부터 베트남의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1989년에 최초로 총선을 치렀고, 1991년에는 새 헌법이 공포되었다. 참고로 라오스는 우리나라와 1974년에 수교(修交)했다. 하지만 라오스가 공산화됨으로써 채 1년이 안되어 단교했다가 1992년에 다시 재수교 했다. 우리와 라오스가 본격적으로 교류하던 시기는 노무현 대통령 때라고 한다. 비자 없이 15일간 머무를 수 있도록 한 것도 이 때이다.

 

 

비엔티안(라오어: ວຽງຈັນ 위양짠, 영어: Vientiane) : 비엔티안은 세계에서 가장 소박하고 목가적인 수도(首都)가 아닐까 싶다. 9세기에 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해 1560년 북쪽 루앙프라방에 수도를 두었던 라오 왕국('란상'이라고도 함)‘이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온 뒤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다가 외세 침략과 내분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사이 1799년 시암에게 함락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1828년엔 아누봉(Anouvong) 왕이 시암에 저항했다가 실패한 뒤 완전히 파괴된다. 1899년 프랑스 보호령의 수도가 되면서 부활하지만 1928년까지만 해도 인구는 90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아무튼 현재의 비엔티안은 정부 관청, 외국 대사관, 학교, 라디오 방송국 등의 주요 건물들이 들어서 있지만 구식 목조건물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근대적인 공업으로 양조업·목재가공업을 비롯해서 벽돌, 타일, 직물, 담배, 성냥, 합성세제, 플라스틱 가방, 고무 샌들, , 강철제조업 등을 하고 있다. 라오스에서 가장 비옥한 저지대에 속하는 주변지역에 사는 라오족 농부들은 쌀·옥수수를 재배하며 가축을 기르고 있다. 참고로 비엔티안(Vientiane)은 현지어로는 위양짠이다. ‘백단향의 도시라는 뜻이지만, 프랑스인이 발음을 쉽게 하려고 자기들 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여행 첫 날 : 비엔티안(Vientiane) 투어(라오스의 재래시장들)

 

라오스 여행은 왓따이 국제공항(라오어 : ສະໜາມບິນສາກົນວັດໄຕ, 영어 : Wattay International Airport)’에 내리면서 시작된다.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안으로부터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국제공항인데 우리 국적기로는 대한항공과 진에어, 그리고 티웨이항공이 운항하고 있다. 공항 건물은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최근에 새로 지었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하지만 편의시설은 아직도 구색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특히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마다 트랩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다른 국제공항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이 공항은 국제선 외에도 국내선 비행기가 같이 운행되고 있으며, 공항 한편에 라오스 인민군 공군의 기지도 함께 있다. 청사 앞에 있는 택시 승차장에서 일반택시나 툭툭(tuk-tuk)이 등을 타면 금방 비엔티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첫날 머물렀던 두앙찬 프라자호텔(Douangchan Plaza Hotel)‘ :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 중심가에 위치한 호텔로 관광객들이 필수코스로 여기는 빠뚜싸이 등 주요 관광지들과 인접해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또한 이 호텔은 3성급임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객실에는 성능이 괜찮은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다. 소파와 냉장고, 그리고 한국방송이 나오는 위성 TV도 갖추어져 있다. 욕실에는 간단한 세면도구(치솔과 치약 제외)가 비치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아니다. 클렌징용품을 준비하는 김에 샴푸 등도 챙겨가는 게 좋겠다. 아무래도 우리 것이 좋을 테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아침식사는 뷔페식이 제공된다. 빵과 찹쌀밥, 쌀국수, 죽 등의 본식과 주스와 과일이 후식으로 준비되어 있는데, 음식이 깔끔할 뿐만 아니라 가짓수도 적당한 편이다. 거기다 외국 관광객들을 배려해서인지 동남아 특유의 향도 배제되어 있었다.

 

 

커튼을 제키면 비엔티엔 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시내 중심가 임에도 불구하고 고층건물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나라 읍()의 풍경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한적하게 느껴진다는 얘기이다.

 

 

유럽풍으로 지어진 반듯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나무덧문을 대어 놓은 창문이 눈에 익다. 지중해 연안을 여행하면서 흔하게 보았던 풍경이기 때문이다. 따가운 햇볕을 피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이곳에까지 옮겨 놓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 라오스는 프랑스의 식민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라오스는 우리나라 60년대~70년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원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로 삼았던 것은 중국을 넘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이 강이 사나와 지고 산맥으로 막혀 있다. 그런 이유로 프랑스는 라오스를 버려두다시피 했다. , 정복은 했으나 이용가치가 없으니 방치했다는 얘기이다.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재래시장을 둘러보기로 한다. 현지인의 삶을 가까이서 느껴보기에는 시장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마침맞게도 호텔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아침시장이 열린단다. 그러니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장은 걸어서 10분이면 된다. 가까운 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른 아침부터 후덥지근해져 있는 라오스의 날씨를 감안한다면 결코 짧다고만은 할 수 없는 거리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버스 등의 대중교통이 일절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하철이나 열차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곳 라오스에는 그런 유형의 교통수단은 애초부터 없단다.

 

 

길가에 늘어선 식당들은 벌써부터 문을 열고 있다. 노점(露店)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꽤나 많은 음식들을 진열해 놓고 있다. 하지만 식사를 하고 있는 손님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 손님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나같이 주문한 음식들을 싸가지고 갈 따름이다. 혹시 점심 도시락 대용으로 사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기(國旗)가 매달려 있는 걸로 보아 관공서(官公署)이지 싶다. 이렇게 반듯하게 지어진 건물들은 대부분이 공공건물이다. 아니면 호텔이나 쇼핑센터 등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건물들로 보면 되겠다. 아무튼 저 건물도 LPRP(라오 인민혁명당)의 요원들이 근무하고 있을 것이다. 공산국가인 라오스에서는 LPRP가 후보자들을 선택해 공직을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라오스는 유일한 합법 정당인 라오스 인민혁명당이 통치하는 공화국이다. LPRP(라오 인민혁명당)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의 영향 아래 경제개혁을 단행하고 있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도로변에 새로 짓는 건물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오랜 잠을 깬 라오스에 개발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사원(寺院)이 나온다. 규모는 자그맣지만 금빛으로 채색되어 화려하기 그지없다. 라오스의 사원들이 갖고 있는 특징이 아닐까 싶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원들은 모두가 화려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라오스의 종교는 불교이다. 다수 종족인 라오족의 약 95%가 불교를 신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오족을 제외한 60여개 소수 종족은 정령 신앙을 신봉한다고 한다.

 

 

사원에는 수많은 탑()들이 들어서 있다. 이 또한 라오스 사원들의 특징이지 싶다. 모든 사원들이 하나같이 수많은 탑들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탑들은 우리나라의 절에 세워져 있는 부도(浮圖)와는 다르다고 봐야 한단다. 우리나라의 부도들이 수도승의 유골을 보관하고 있는데 반해, 이곳은 일반인의 유골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 유력인사들의 유골이라는데, 상당한 재력가(財力家)가 아닐 경우 유골을 안치할 수도 없다는 얘기도 되겠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을 알아차리고 발길을 돌린다. 호텔에서 왼편으로 진행했어야 하는데 반대방향으로 나왔던 것이다. 도로에는 중앙선이 그려져 있지 않다. 신호등도 이곳 비엔티안에서나 볼 수 있단다. ‘교통질서는 애초부터 기대하지 말라는 가이드의 경고가 생각난다.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진행하는 여타의 나라와는 달리 이곳의 자동차나 오토바이들은 행인을 의식하지 않고 일단 들이밀고 본다는 것이다. 하긴 이런 도로 여건에서 어찌 제대로 된 교통질서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아침이라서 그런지 도로는 한적하다. 한 국가의 수도라고 하기 에는 너무 한가한 풍경이다. 고층빌딩 또한 별로 없다.

 

 

 

도로 위를 달리는 것들의 대부분은 자전거와 오토바이들이다. 가끔은 툭툭이도 보인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것들인데 일종의 영업용 택시인 셈이다. 그렇다고 승용차가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들 눈에 익숙한 현대자동차의 로고(logo)를 달고 있는 승용차들도 자주 눈에 띈다. 하지만 교통체증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적당한 양의 승용차들이 돌아다닌다고 보면 되겠다. 우리나라보다 더 비싸다는 승용차의 가격이 그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국민소득 수준이 낮은 탓에 승용차를 사치품으로 보았던 모양이다. 그 결과로 옛날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특별소비세(特別消費稅)‘를 붙였을 테고 말이다. 참고로 라오스에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차가 가장 많다고 한다. 스타렉스가 가장 인기이고 우리나라 중고차가 많이 들어왔는데 한글이 써진 채로 운행하는 것은 이 차는 한국 차다라는 것을 자랑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그래야 가격을 인정을 받기에 심지어 장례식장 차까지 그대로 운행한다는 것이다. 하긴 한글이라는 자체가 중요하지 의미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영문 글씨가 적힌 티셔츠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영문해석도 하지 않고 마구 입고 다니었던 시절이 회자된다. 그들을 흉볼 입장이 못 된다는 얘기이다.

 

 

10분여를 걸어서 시장에 도착했다. 비엔티안 시내에서 달랏사오시장이 가장 크고 번화하다고 했는데 이곳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시장풍경은 낯설지가 않다.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는가 하면, 하나라도 더 팔려는 상인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한 것이 우리네 시골장터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시장이라선지 야채류가 대부분이다. 배추와 무는 물론이고 양배추와 고추, 마늘 등 하나 같이 우리네 시장에서 보아온 것들이다. 다만 향신료(香辛料)가 가끔 눈에 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 아닐까 싶다.

 

 

명색이 아침시장인데 과일이 없을 리가 없다. 바나나와 망고는 물론이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열대과일들이 진열되어 있다.

 

 

 

 

 

생선가게도 눈에 띈다. 하지만 바닷고기 일색인 우리네 재래시장과는 달리 좌판(坐板)에 올라와 있는 생선들은 대부분 민물에서 사는 것들이다. 바다를 끼고 있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개구리와 도마뱀이 아닐까 싶다. 약간 징그럽기는 하지만 그들이 즐겨 먹는 음식의 재료라니 어쩌겠는가.

 

 

 

 

 

이곳도 역시 은 존재하나 보다. 리어카 위에서 야채를 팔고 있는 아낙네들이 눈에 띄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녀들이 쓰고 있는 차양이 넓은 모자가 눈길을 끈다. 그늘막이 없는 노천(露天)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그녀들에게는 필수 장비랄 수도 있겠다.

 

 

오는 길에 초등학교를 만났다. ’환영한다.‘는 글귀가 보이기에 잠깐 들어가 보았지만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없다. ! 학교에 온 학생들이 곧장 교실로 들어가지 않고 질서 정연하게 운동장에 모여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할 수도 있겠다. 선생님으로 보이는 어른들도 함께 서있는데, 그렇다고 조회 등의 행사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날에 머물렀던 방비엥에서 야시장(夜市場)을 둘러보기로 한다. 물론 비엔티안 시내투어가 계획되어 있는 마지막 날 저녁에도 기회는 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다보니 그 결과를 어찌 보장할 수 있겠는가. 패키지여행이라는 게 원래 여행자의 마음에 따라 진행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이드의 손바닥 안에 들어있다는 얘기이다. 그런 내 판단은 옳았다. 가이드가 안내하는 일정으로는 야시장에 들러볼 짬이 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야시장으로 향한다. 물론 가이드를 동반하지 않는 채로이다. 아직까지 공산국가로 남아있는 라오스의 치안이 생각보다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여덟 명이나 되는 일행의 힘을 믿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야시장 역시 우리나라 재래시장의 오래전 분위기이다. 그러니 다양한 물품들을 만나볼 수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수공(手工)으로 직접 만든 실크와 의류 등에 눈길이 많이 간다. 그 밖에도 기념품과 잡화류 등의 품목들도 수두룩하다. 아무튼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상설(常設)로 서는 시장은 아닌가 보다. 무슨 행사라도 하려는 양 무대까지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선지 몇 가지 종류의 게임장이 보이는가 하면, 꼬지 등을 파는 간이식당도 들어서 있다. 순박한 라오스 사람들과 흥정이라도 해보면서, 라오스의 현지인들의 먹거리로 배를 채워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월) : 스위스(루체른)

3.15(화)-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베니스, 볼로냐)

 

여행 첫날 : 두바이(Dubai)

 

두바이(Dubai) 신시가지의 특징 : ‘메뚜기라는 뜻의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에 속해 있는 7개 토후국 중 하나이다. 19세기만 해도 두바이는 영국의 보호 속에서 진주 조개잡이를 하고 대추야자를 키우며 근근이 살아가던 중동의 가난한 나라였다. 두바이가 경천동지할 발전을 이룬 것은 석유가 발견된 1964년부터이다. ‘셰이크 라시드전 국왕의 아들인 세이크 모하메드국왕은 사막의 불모지를 메워 공항을 만들고 828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세웠다. 바다를 매립해 인공섬을 만들고 새로운 개념의 인공도시 팜 아일랜드(Palm Islands)’를 건설했다. 불과 60년 만에 두바이는 중동의 뉴욕으로 불리며 메뚜기처럼 높이 뛰어올랐다. 사막 안에 세계 최고의 스키장을 짓고, 최대 규모의 쇼핑몰인 두바이몰을 만들었다. ‘신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두바이를 건설했다는 말을 그냥 우스갯소리로 흘려버릴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두바이는 또 다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2020년 세계엑스포대회를 유치했고 세계적인 테마공원들을 차례로 건설할 예정이란다.

 

 

 

점심을 마친 후 두바이 최고의 휴양지라는 주메이라 비치’(Jumeirah Beach)’로 이동한다. ‘런닝 맨 인 두바이편에서 송지효와 게리가 마치 신혼여행을 오기라도 한 것처럼 핑크빛 무드를 잡았던 곳이다. 방송에 나와도 될 만큼 이곳의 경관이 빼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주메이라 비치는 버즈 알 아랍 호텔(Burj Al Arab Hotel)’을 볼 수 있는 두바이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이다. ‘버즈 알 아랍의 왼편에는 주메이라 비치 호텔’(Jumeirah Beach Hotel)이 있다. 두 호텔을 배경삼은 사진을 보았다면, 모두가 이 백사장에 서서 찍었다고 보면 된다. 그만큼 사진촬영에 좋은 장소라는 얘기이다. 참고로 5성급 호텔인 주메이라 비치 호텔은 두바이에서 부르즈 알 아랍다음으로 사치스런 호텔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결치는 모양을 하고 있는 건물의 외형이 독특하며, 여기에 머문 유명인으로는 벤 스틸러, 제시카 알바 등이 있다. 리버풀 FC 팀도 여기에 묵은 적이 있다고 한다.

 

 

두바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는 버즈 알 아랍(Burj Al Arab)’이다. 세계에서 유일한 7성급 호텔인 버즈 알 아랍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두바이의 상징과 같은 건축물이다. 1박당 숙박료가 최소 200만원, 가장 비싼 방은 3000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참고로 버즈 알 아랍은 독특한 외형만큼 내부도 독특하다. 200상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알 문타하 레스토랑과 바닷속에 있는 알 마하라 레스토랑은 버즈 알 아랍의 명물이다. 28층 헬기 착륙장에서는 타이거 우즈가 골프공을 날리고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안드레 애거시가 비공식 경기를 해 세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이슬람의 3차원 별을 형상화한 분수와 아라비아의 전통목선인 다우(dhow)의 돛 모양을 형상화한 외형은 이 건축물의 자랑거리다.

 

 

태평양의 산호섬처럼 에메랄드 빛 깨끗한 바다에는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의 한가로움이 묻어난다. 평일이라선지 사람들의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다들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있다. 감싸기로 유명한 이슬람권에서 이만한 눈요기 장소를 찾기는 쉽지 않을 듯 싶다. 참고로 해변이 있는 주메이라 지역은 영국의 식민지였기에 아직도 영국인들이 많이 생활하고 있으며, 부자들이 많이 거주한단다.

 

 

 

 

주메이라 비치에서 잠깐의 여유를 즐기고 난 후, 가이드가 안내한 곳은 두바이 마리나(Dubai Marina) 지역이다. ‘팜 메이라부근에 있는 신개발지역으로서 초고층아파트와 상가, 고급호텔들이 들어선 지역이다. 어딘지도 모르고 따라나섰는데, 수상택시 승강장((Dubai Marina Marine Transport Station))을 보고서야 이곳이 두바이 마리나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지역도 역시 운하(運河)로 연결된다. 수상택시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는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운하가 하도 깔끔하게 가꾸어져 있어 흡사 도심의 호수공원이라도 보는 것 같다. 오전에 돌아다녔던 두바이 크릭(Dubai Creek)’과는 비교가 안 된다. ‘두바이 크릭이 우리가 흔하게 만나는 보통의 강()을 닮았다면, 이곳은 호수, 아니 네모반듯한 수영장이라도 보는 것 같다.

 

 

 

 

정박되어 있는 배도 역시 다르다. 우리가 오전에 탔던 수상택시라던 아브라(Abra)’가 안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극소수에 불과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고급보트들이다. 부자들은 배를 타더라도 귀티가 나는 것만 골라서 타는 모양이다.

 

 

두바이 마리나는 아름다운 뷰(view)를 자랑하는 곳이다. 큰 호수를 끼고 조성된 자동차 없는 길도 볼만하고, 호수 반대편으로 나타나는 스카이라인은 마리나 지역, 아니 두바이의 백미(白眉)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파트들은 모두 초고층이다. 우리나라의 주상복합아파트를 닮았다. 아래 몇 개의 층은 상가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핫한 음식과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고 해서 두바이의 강남이라고도 불린단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그냥 돌아갈 수 있겠는가. 커피 한 잔씩을 주문해 본다. 맛이야 특별한 게 없다. 그러나 커피를 맛보고 마시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분위기 보고 마시지 말입니다.’ 집사람의 티 없이 해맑은 미소가 그 증거일 것이다.

 

 

이어서 두바이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명물 두바이 몰(Dubai Mall)’로 이동한다. 전체 면적이 축구장 약 157배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쇼핑몰이다. 쇼핑뿐만 아니라 아쿠아리움, 아이스링크, 놀이기구 등의 즐길 거리도 가득하다. 특히, 매년 1월부터 약 한 달간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 두바이 쇼핑 페스티벌은 이 몰의 자랑거리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연중 내내 다양한 할인행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명품가게들이 늘어선 지역을 지나니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 나타난다. 거대한 수족관, 아쿠아리움(Dubai Aquarium and underwater Zoo)’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사진 배경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는 표정들이다.

 

 

 

 

아쿠아리움(Dubai Aquarium and underwater Zoo)은 가로 32.8미터, 세로 8.3미터, 두께 600밀리미터의 거대한 규모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수족관 판넬2010년 기네스북에 등재된 바 있다. 수족관 안에는 최소 85개 종, 3,3000개체가 있으며, 400마리의 상어가 살고 있다. 체험코스로는 아쿠아리움 터널(Aquarium Tunnel)과 언더워터 주(Underwater Zoo), 그리고 바닥이 유리로 된 보트를 타고 아쿠아리움 물고기 관찰하는 보트 라이드(Glass bottom Boat Ride) 등이 있다.

 

 

 

 

면적이 축구장 약 157배에 달하는 두바이 몰은 내부 엘리베이터가 95, 에스컬레이터가 150개에 이른다.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간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 사고를 당하고 싶지 않으려면 눈짐작으로라도 방향을 파악해 놓은 다음에 이동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자칫 동선이라도 꼬여서 두 바퀴만 돈다고 해도 체력이 모두 고갈되어 버릴 테니까 말이다. 그만큼 몰의 크기가 거대하다는 얘기이다. 다행이 난 메인(main)으로 여겨지는 홀(hall)을 기준으로 해서 방향을 기억해 둘 수 있었다.

 

 

두바이 몰에는 세계적 명품 브랜드와 외식브랜드가 다 집결해 있다. 때문에 연중 내방객으로 넘쳐난다. 히잡을 두른 두바이 시민은 물론 다양한 컬러의 지구촌 식구들이 모여 트렌드를 맛보고 느끼며 즐긴다. 특히 요즘은 중국인 여행객들이 두둑한 지갑을 들고 두바이를 찾고 있어 연초에는 큼지막한 '춘절' 관련 이벤트 포스터가 쇼핑몰에 나붙을 정도라고 한다.

 

 

두바이 몰(Dubai Mall)’은 세계 최고층 빌딩인 부르즈 칼리파옆에 위치하고 있다. ‘두바이 몰을 가로지르며 통과하면 부르즈 칼리파 앞에 마련된 인공 호수 '부르즈 레이크'가 나온다. 사막도시의 열기를 잠재우는 명물이다. 또한 두바이 분수 쇼가 펼쳐지는 곳으로 이 또한 세계 최대 규모다. 폭이 275m에 최대 150m까지 물줄기를 쏘아 올린다니 그 얼마나 장관이겠는가. 다양한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추는 게 라스베이거스 분슈쇼를 꼭 빼닮았다고 한다. 특히 야간 분수 쇼에는 부르즈 칼리파 외벽을 화려하게 수놓는 조명과 함께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단다.

 

 

몰의 반대편에 있는 수크 알 바하르(Souk Al Bahar)’와는 다리로 연결된다. 이 다리의 위가 부르즈 칼리파가 가장 잘 바라보이는 최고의 조망처이다. 다리 위에 서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부르즈 칼리파가 불쑥 나타난다. 얼마나 높은지 구름을 뚫고 솟아 오른 꼭대기 층을 바라보자면 목이 다 뻐근해질 정도다.

 

 

162층에 828m.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부르즈 칼리파(Burj Khalifa)'는 두바이의 상징과도 같은 걸작품이다.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는 두바이의 'can-do spirit' 신념을 보여주는 곳으로, 이 나라의 랜드 마크(land mark)격이다. 부르즈 칼리파는 전 세계 120여 개국에서 온 전문가와 기술자들이 모여 만든 글로벌 합작품으로, 국내 기업 삼성물산이 건설사로 참여해서 한 번 더 관심이 가는 곳이다. 건축에 사용한 철근의 길이만도 25000, 무려 지구 반 바퀴 길이의 철근이 들어간 초대형 피조물이다. 이를 더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머지않아 국내 최고층 건물이 될 123층 잠실 제2롯데월드(555)보다 273가 더 높다, 또 여의도 63빌딩(249) 보다는 3배 높이, 거기에 70m를 더해야 한다.

 

 

 

 

부르즈 할리파(아랍어: برج خليفة, 영어: Burj Khalifa, 할리파의 탑)200912월에 완공하고 201014(현지시간)에 개장한 두바이의 마천루이다. 완공 이전 이름은 부르즈 두바이(Burj Dubai)’, 아랍에미리트의 대통령인 할리파 빈 자이드 알나하얀의 이름을 본따 부르즈 두바이에서 부르즈 할리파로 개명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세계 최고의 지점은 큰 이름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발표되었지만,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 상태에까지 이르렀던 당시의 두바이 상황과 엇물려 여러 억측들이 나도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까지 완성된 마천루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2위는 상하이 타워) 인공 구조물이며, 사무실, 주거, 호텔용으로 건설했고, 내부에 상업 시설, 거주 시설, 오락 시설 등을 포함한 대규모 복합 시설을 갖추고 있다. 부대시설로 부르즈 할리파 호수를 포함한다.

 

 

 

 

반대편에는 ‘The Address Downtown Dubai’가 보인다. 오성급 호텔로 한때는 두바이의 랜드 마크(land mark)로 인정받기도 했다지만 요즘은 저만큼에서 숨어 지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두바이몰에서 다리를 이용해 호수를 건너면 수크 알 바하르(Souk Al Bahar)’란 이름을 갖고 있는 건물이 나온다. 수크(Souk)란 시장을 말한다. 생김새는 호텔로 보였는데 상가였던 모양이다. 아랍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전통시장을 코스프레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수크 알 바하르(Souk Al Bahar)’의 저층들에는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이 건물은 부르즈 칼리파와의 사이에 호수를 둠으로 해서 빛을 발한다. 건물에는 들어선 음식점들, 특히 야외 테라스는 예약이 필수라고 한다. 이곳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호수에서 벌어지는 분수쇼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넘치기 때문이다. ‘꽃보다 할배의 그 할배들이 분수쇼를 보면서 웃고 떠들었던 음식점이 어쩌면 이곳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수크 알 바하르(Souk Al Bahar)’의 왼편은 호텔이다. 하지만 초현대식으로 지어진 다른 호텔들과는 달리 고전적(古典的)이다. 옛 이슬람 건축의 냄새가 묻어난다는 얘기이다. 호텔신라에서 남산골에 지으려고 하는 한옥호텔과 같은 개념이 아닐까 싶다.

 

 

 

 

 

 

호텔 건물의 옆에서 다시 한 번 부르즈 칼리파가 나타난다. 저런 건축물을 우리나라의 삼성물산이 건설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부르즈 칼리파가 준공되기 전까지는 2004년에 준공된 타이페이의 '타이페이 금융센터'가 가장 높았다(508m)고 한다. 이 건물 역시 삼성물산이 건설했다고 하니 본인들의 기록을 스스로 갈아치운(508m828m) 셈이다. 건설에는 601.7m 높이까지 한 번에 콘크리트를 운반하는 초고층 펌핑 기술과 초고층 양중 장비 기술 등 고도의 건축 기술이 적용됐다. 이외에도 부르즈 칼리파는 갖가지 최고·최초 기록을 남겼다. 이 건물은 최다 층인 163층을 보유한 빌딩으로 기록됐으며, 분당 600m를 이동하는 최고속 엘리베이터도 보유하고 있다. 또 인공위성을 이용한 위성항법장치(GPS) 건물 수직도 측량기법을 최초로 적용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이런 위대한 건축물이 우리나라의 기술진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보트를 타고 분수를 둘러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마 저녁에 있을 분수쇼를 준비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매일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30분 간격으로 꽃보다 할배들도 반하게 만들었던 분수쇼가 공연된다니까 말이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맞춰 분수쇼가 진행되는데, 배경 음악은 안드레아 보첼리의 ‘Time To Say Goodbye,’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등 세계적인 명곡과 더불어 중동지역의 베스트 셀러 음반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된단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두바이 몰. 이것 역시 세계 최고라니 두바이는 세계최고가 많기도 하다. 하여튼 부르즈 레이크를 가운데에 두고 부르즈 칼리파수크 알 바하르그리고 두바이 몰이 트라이앵글을 만들고 있는 형상이다. 조금 일그러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시 두바이 몰로 돌아와 위층으로 올라가본다. ‘두바이몰 폭포를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위로 오르면 'Falling Man'이라는 조형물과 함께 거대한 폭포가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이곳도 역시 사람들로 붐빈다. 두바이 몰에서 꼭 들러봐야 하는 포토 존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폭포는 몰의 벽면(壁面)을 겸하고 있다. 벽면을 따라 물이 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와 다이빙하는 조형물이 흡사 뛰어난 예술작품을 보는 것 같다.

 

 

 

 

주어진 시간에 맞춰 몰을 빠져나온다. 뒷꼭지가 허전하다. 무슨 이유일까? 그렇다. ‘부르즈 칼리파의 야경이라는 뛰어난 볼거리를 남겨두고 떠나는 중인 것이다. 'tv N'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꽃보다 할배의 할배들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던 장면이 떠오른다. 당시 할배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분수와 부르즈 칼리파의 화려한 조명 쇼를 보면서 넋을 반쯤 놓고 있었다. 평범했던 건물 외관에 색색의 조명이 입혀지면 부르즈 칼리파는 마치 예술작품처럼 아름답게 빛을 발했고, 건물 앞 호수는 정해진 시간마다 분수쇼가 펼쳐진다. 그런 좋은 구경거리를 놓아두고 떠나려니 어찌 뒷꼭지가 허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에필로그(epilogue).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자꾸만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그렇다. 시간에 쫓겨 놓쳐버린 볼거리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것은 바다를 메워 만들었다는 인공섬 팜 아일랜드가 아닐까 싶다. 워낙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사막투어이나 스키장(Ski Dubai)은 그렇다 치고라도 달에서도 그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다는 팜 아일랜드는 꼭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팜 아일랜드는 팜 아일랜드는 팜 주메이라와 팜제벨 알리, 팜데이로 구성되어 있고, 100개의 럭셔리 호텔과 프라이비트 비치 그리고 워터파크 등으로 이루어진 인공 휴양도시다. 그리고 또 하나 오늘 일정에는 금융시설에 대한 투어도 빠져 있다. 이곳 두바이가 중동지역의 금융허브로 자리 잡았음을 감안할 경우 뭔가 이야깃거리가 있을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하긴 자투리시간을 이용한 여행상품(참좋은 여행사)이다 보니 이 모든 것을 다 넣기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신경을 더 썼었더라면 원경(遠景)사진 정도는 찍을 수는 있었지 않았나 싶다.         

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월) : 스위스(루체른)

3.15(화)-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베니스, 볼로냐)

 

여행 첫날 : 두바이(Dubai)

 

두바이(Dubai)의 특징, 두바이(아랍어: دبي)는 페르시아 만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아랍에미리트(이하 UAE)의 최대 도시이자 아랍에미리트를 구성하는 7개의 토후국 가운데 하나인 두바이 토후국의 수도이다. 아부다비와 함께 UAE 연방평의회에서 결정한 잘못된 법을 거부할 수 있는 거부권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두 개의 토후국으로 UAE에서 가장 많은 인구(2,106,177)를 갖고 있으며 면적은 아부다비에 이어 두 번째(4,114)이다. 두바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075년이며 1799년 최초로 도시로 언급되었다. 1833셰이크 막툼 빈 버티 알 막툼이 바니야스 부족에서 800명을 이끌고 두바이를 공식적으로 세웠고,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토인 세컨드 사우디 스테이트에서 살기 시작했다. 바니야스 부족의 알 파사씨족 역시 두바이 크리크에서 막툼을 따라 떠났다. 1892년에는 영국이 두바이를 지켜준다는 명분하에 독점 조약을 체결했고 1971UAE에 가입할 때까지 영국의 통제 하에 있었다. 두바이는 지리학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하면서 20세기가 시작된 이후로 중요한 무역 허브 중심지로 성장했고, 이미 중동에서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오늘날 두바이는 중동과 페르시아 만 지역의 문화 중심지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대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화물과 여객 교통의 중심지이다. 두바이의 경제는 석유 산업으로부터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현재는 관광, 항공, 부동산, 금융 서비스 등이 경제를 이끌고 있다. 최근에는 혁신적인 대형 건설 프로젝트와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를 개최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도시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더 월드, 팜 아일랜드, 워터프런트와 같은 사람이 만든 인공섬, 초고층 호텔, 세계에서 가장 큰 쇼핑몰,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부르즈 할리파가 있다.

 

 

 

두바이 국제공항(Dubai International Airport)에 내린다. 스위스로 가는 다른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서이다. 스위스까지 가는 직항노선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대한으로 가격을 낮추어 출시되는 패키지상품으로서는 이 방법(환승)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사는 그런 악조건을 뛰어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환승에 소요되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두바이 투어를 생각해 낸 것이다. 이런 게 바로 발상의 전환일 것이다. 참고로 두바이국제공항은 1960년 개항했으며 2008년 에미레이트항공 전용인 제3터미널을 개관함으로써 연간 여객 처리 능력이 7,500만 명으로 늘어났다. 편의시설로 비즈니스 센터와 헬스클럽, 라운지, 의료 센터, 종교관, 어린이 공간 및 육아 휴게실 등이 있다. 활주로는 1개로 4,000×46m 크기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밖으로 빠져나오니 현지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다. 수인사를 건넨 후 첫 번째 방문지인 왕궁으로 향한다. 참 하나 빼먹을 뻔 했다. 우리가 타고 온 에미리트항공에서는 환승시간에 먹을 수 있는 식사쿠폰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비록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한정(샌드위치와 커피 수준)되어 있긴 하지만 다른 비행사에 비해 한결 돋보이는 서비스가 아닐까 싶다.

 

 

셰이크 팔래스,’ 일명 왕들의 궁전이다. 안내판에는 통치자의 궁(Za'abeel palace)’이라고 적혀있으니 참조한다. 이곳은 초대 두바이 국왕인 라시드(1958-1990)와 현재 왕인 모하메드, 왕세자인 차남 함단왕자의 궁전 등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이중 현재의 통치자가 살고 있는 셰이크 모하메드 궁전만이 유일하게 입구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그것도 궁전 앞의 정원과 숲을 거닐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안뜰까지는 개방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아직까지 날이 밝지 않은 탓에 불빛만 아스라이 보일뿐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주어진 시간이 덜 되었는데도 발길을 돌리는 이유이다.

 

 

 

 

아무튼 두바이 국왕은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듬뿍 받고 있다고 한다. 그의 현명함이 오늘날의 두바이를 만들었다는 믿음에서 생겨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아랍에미리트연방(이하 UAE)은 산유량이 세계 5위권에 드는 산유부국(産油富國)이다. 하지만 석유 매장량의 95%는 아부다비(أبو ظبي)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1966년 유전이 발견되었을 당시부터 두바이는 석유의 부존량이 바닥을 드러내게 될 머지않은 미래에 대비해야만 했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게 지도자의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다행이도 두바이 국왕은 현명한 분이었단다. 그는 석유로 벌어들인 막대한 국부(國富)를 당장의 복지보다는 장래의 먹거리를 창출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두바이를 중동무역의 허브(hub)로 재편한 것이다. 그 결과 지금은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고 있지만 관광, 항공, 부동산, 금융 서비스 등이 든든하게 경제를 이끌고 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직후 부동산 개발 위주의 개발과 성장은 잠시 주춤했으나, 이후 전열을 가다듬어 현재는 다시 성장세로 돌아서고 있단다.

 

 

 

 

왕궁투어를 마치고 바스타키야(Bastakiya)’로 이동한다. ‘알 바스타키아(아랍어: حي الفهيدي التاريخي)’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부르두바이 지역의 전통 건물 유적지이다. 지역의 넓이는 약 31,000m², 19세기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사용되고 있던 60여개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부는 문화 시설과 호텔, 카페와 미술관 등으로 사용 공개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의 민속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두바이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 중의 하나인 바스타키야는 아랍 문명의 상징인 모스크부터,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다양한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기원 전 부터 사람이 살았다하나 오늘날의 모습이 만들어 진 것은 1900년대 초부터라고 한다. 바로 강가에 인접된 지역으로 교통도 좋아 페르시아 상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이란 남부의 바스탁(bastak)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이곳을 바스타키아(bastakia)라 부르게 됐단다.

 

 

 

 

두바이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화려한 스카이라인(sky line)이라 할 수 있다. 곳곳에 지어진 마천루들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버릴 수 없을 만큼 각자의 독특한 개성들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스타키야 지역의 전통가옥들도 빠뜨려서는 결코 안 되는 볼거리가 아닐까 싶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을 피하고자 골목에 촘촘히 모여서 지어진 집들과 단정한 골목, 그리고 전혀 외부에 장식을 하지 않은 두바이 전통가옥의 모습들에서 사막과 어우러져 살던 사람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부유층이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거칠거칠한 벽을 두른 세련된 주택은 바스타키야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바스타키야 지역을 걸어 다니다 보면 어렵지 않게 두바이의 과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골목길을 걷다보면 특이하게 생긴 대문이 눈에 띈다. 짝으로 된 대문의 왼쪽 편에 아치(arch)형의 작은 문이 따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이는 안에서 살고 있는 여주인을 위한 아이디어라고 한다. 이슬람 여성들은 외출할 때 히잡(hijab)이나 부르카(burka) 등으로 신체를 가린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도 집안에서만큼은 자유스러운 복장으로 돌아간단다. 그런데 행여 외간남자라도 불쑥 들어온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저런 쪽문을 만들어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서둘러야 하기는 매한가지이겠지만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는 그 짧은 순간만이라도 마련하려는 그 아이디어가 얼마나 가상한 일인가.

 

 

골목길을 걷다보면 건물의 벽들에 커다란 나무 막대기가 꽂혀있는 것이 보인다. 저 나무에 긴 천을 걸어두어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고, 지나가는 바람을 모아주는 기능도 했다고 들었는데, 내 기억이 맞는지는 장담을 못하겠다. 하여간 그런 막대들에 관심이 있다면 바람의 탑으로 가볼 일이다.

 

 

현재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건물들은 그늘이 진 시원한 까페, 아트 갤러리 그리고 소형 상점 등으로 개조되어 있다. 덕분에 집안으로 들어가 전시된 그림과 함께 두바이 사람들의 가옥구조까지 덤으로 보게 된다. 이것저것 둘러보다 보면 한두 시간 정도는 마파람에 게눈 감추 듯지나가 버린다.

 

 

 

 

 

 

마을 안 광장에 무대가 차려지고 있는 걸로 보아 가끔은 문화공연도 열리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사진발이 잘 받는 곳이다. 영화배우 최강희도 이곳에서 화보를 찍었었단다. 집사람이라고 해서 포즈를 못 잡을 이유가 없다. 내 눈에는 최강희보다 몇 배나 더 예쁘니까 말이다.

 

 

 

 

살구빛 담장이 이어진 집들 사이에 삐죽하게 생긴 사각형의 탑()이 보인다. ‘윈드 타워(wind tower), 바람 탑(malqaf)’이라고 불리는 천연 에어컨(air conditioner)’이다. 이곳의 건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무더운 날씨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다양한 기법들이 동원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축물이 바로 바람의 탑이다. 석유가 나오기 전까지 두바이 사람들은 지혜를 발휘해 뜨거운 태양과 싸웠다. 사막을 가로질러 온 섭씨 50도가 넘는 뜨거운 열기는 바람의 탑 윗부분에 걸려 탑 아래로 꺾어져 내려오고 그 아래 도랑에서 차가운 땅과 물을 만난다. 그렇게 식은 공기는 다시 위로 올라가 두꺼운 세라믹으로 뒤덮인 건물 내부로 들어가 시원한 바람을 집안 곳곳에 전해준다. 이런 게 바로 두바이가 갖고 있는 진정한 볼거리일 것이다.

 

 

이슬람 특유의 이국적인 느낌에 젖어 골목골목을 기웃거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된다. 이런 분위기를 쫓아 여행자들이 집을 나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바퀴 둘러보고 밖으로 빠져나온다. 아까 내리면서 보지 못했던 건물이 하나 보인다. 아랍풍의 커피라도 한 잔 마셔볼까 해서 다가가 본다. 하지만 이른 아침이어선지 문을 열기 전이었다.

 

 

민속촌을 둘러본 후에는 두바이 크릭(Dubai Creek)으로 이동한다. 호수처럼 보이는 크릭을 따라 이동하는 아브라(Abra : 모터가 달린 수상택시)를 타보기 위해서이다. 물론 다리를 이용해 재래시장으로 갈 수도 있다. 크릭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4개나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찾아온 두바이(Dubai)인데 아브라를 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고로 두바이는 걸프만으로 향하는 작은 강(운하라고도 함)인 크릭(Creek)을 사이에 두고 구시가지인 데이라(Deira)와 신시가지인 두바이(Dubai)로 나뉜다.

 

 

두바이 크릭(Dubai Creek)’은 두바이 중심을 흐르는 운하(運河)이다. 두바이가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두바이 크릭이기 때문에 혹자는 이 운하를 일러 신의 선물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크릭의 물은 담수(潭水)가 아니라 바닷물이다. 주변에 소금기가 말라붙어 하얗게 된 돌들을 자주 눈에 띄는 이유이다. 그리고 배를 따라 날아다니는 갈매기들도 눈에 띈다.

 

 

 

 

두바이 전통 목선인 아브라(Abra)를 타고 가면서 두바이를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전통적인 두바이 건물과 현대의 고층빌딩들이 공존하며 조화롭게 늘어서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현대와 과거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크릭의 주요 운송수단은 수상택시인 아브라이다. 하지만 커다란 목선(木船)들도 운행된다고 한다. 그런 배들은 대부분 에어컨시설까지 갖추고 있단다. 배가 두바이의 대중교통을 담당하는 중심축이 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착장에서 내리면 이 도시의 오랜 역사가 집약되어 있다는 데이라(Deira)’ 지역이다. 이 지역은 꼬불꼬불한 시장들이 밀집돼 아랍의 옛 이야기를 전해준다. 아라비아인들은 무엇이든 가져다 놓고 파는 시장(Market)수크(souq)’라고 부른다. 바닷길을 따라 실크로드에서 건너온 온갖 물건이 이 지역에 모이면서 수크는 발전을 거듭해왔다. 황금은 물론 포목, 향료 등이 거래되고 번성했다. 사람들은 이를 올드 수크(Old souk)’라고 부른다. ‘올드 수크에는 금시장(Dubai Gold Souk)’향신료시장(Spice Souk)’ , 여러 수크들이 모여 있다.

 

 

이른 시간인지라 향신료시장으로 향한다. 금시장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금시장이라기에 과연 어느 정도인지가 못내 궁금했지만 어쩌겠는가. 구매를 원할 경우에는 개인적으로라고 다시 안내해 주겠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지만 아이쇼핑이 주목적인 나에게는 하나 마나한 얘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골드 수크이다. 이탈리아나 아랍은 물론 인디언들이 세공한 것까지 다양한 금이 모여서 거대한 황금시장이 됐는데, 전 세계 금시장에서 미국 다음으로 크단다.

 

 

상가에 들어서자마자 가이드의 안내가 시작된다. ‘런닝 맨 인 두바이편을 이곳에서 찍었단다. 그렇다면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해진다. 내가 보기에는 특별한 게 별로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내 예상은 적중했다. 그들이 찾았던 곳은 이곳이 아니라 수크 메디낫 주메이라(Souk Madinat Jumeirah)’였던 것이다. 같은 전통시장이지만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곳과는 달리 수크 메디낫 주메이라는 옛날의 전통시장을 현대식 건물에 재현해 놓은 곳이다. 당연히 수크 메디낫 주메이라는 화려한 느낌이 강할 수밖에 없다. 금자판기 등 두바이만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가 물씬 풍기도록 꾸며 놓은 것이다. 그렇다. 그래야만 얘기가 된다. 하다못해 그 정도는 되어야 화면발이 받지 않겠는가.

 

 

 

 

향신료시장은 우리나라의 시장을 닮았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추억 속에 남아 있는 재래시장이다. 현대인들에게는 흑백사진으로 변해버린 낯선 풍경이지만, 이런 옛날 느낌을 찾아 여행자들은 모여든다.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문득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던 판소리 명창 김동원선생의 소리가 떠오른다. 그리고 거기다 한 마디를 덧붙여본다. ‘옛 것도 좋은 것이여

 

 

향신료 외에도 그릇 등 여러 가지 품목들이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금은세공품이 아닐까 싶다. 근처에 있다는 금시장의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상점들의 대부분은 향신료를 판매하고 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향신료의 강한 냄새가 코끝을 알싸하게 할 정도이다. 하긴 그래서 향신료시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인도의 커리, 말린 레몬, 비스커스, 계피, 칠리, 생강, 후추, 커민에 무게당 가격이 금값과 동일하다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인 샤프란까지 없는 것이 없다고 한다.

 

 

상점 옆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이층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졌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물류창고일지도 모르겠다.

 

 

올드 수크옆은 주택가이다. 잠깐 둘러볼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접는다. 다음 행선지로 떠나야할 시간이 가까워진 것이다.

 

 

 

 

재래시장을 둘러보고 나오니 아침나절인데도 불구하고 무더위가 괴롭힌다. 마침 길가에 버스정류장이 보인다. 그늘막이라도 되어줄까 해서 들어서고 본다. 그리고 깜짝 놀라버린다. 에어컨 시설이 되어 있어 시원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두바이의 기후는 더운 사막 기후이다. 평균 최고 온도가 42°C(108 °F)나 될 정도이니 길가에 서서 대중교통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에어컨시설을 갖춘 정류장이 아닐까 싶다.

 

캄보디아(Cambodia) 여행

 

여행지 : 캄보디아 앙코르(Angkor) 지역

여 행 일 : ‘14. 3. 22() - 3. 26()

 

전체 여행 일정

3.22() : 인천공항씨엠립공항

3.23() : 바래이 호수, 실크 팜, 민속촌

3.24() : 따프롬, 앙코르톰, 앙코르와트, 야시장

3.25() : 와트마이 사원, 툰래삽 호수, 쇼핑(상황버섯,목청꿀, 잡화, 보석)

3.26() : 씨엠립공항인천공항

 

작은 킬링필드인 와트마이사원과 밤의 축제장 나이트마켓

 

특징 : ‘킬링필드(Killing Fields)의 축소판이라는 와트마이(Wat thmei)사원은 킬링필드의 대학살 당시 씨엠립과 앙코르유적지 인근에서 학살당한 이들의 유골을 모아놓은 곳이다. 킬링필드란 1975에서 79년까지 4년 동안 폴 포트의 급진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루주가 양민 200만 명을 학살한 20세기 최악의 사건 중 하나이다. 노동자와 농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지식인과 부유층을 학살했는데, 이 부근에서 학살당한 이들의 유골을 한곳에 모아 놓고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사찰이 바로 와트마이사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캄보디아에서의 밤이 무료하다면, 아니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서 한번쯤 찾아가 볼만한 곳이 나이트마켓(Night Market)이다. 2007년에 개장한 나이트마켓의 영업시간은 오후 4시부터 정오까지이고 무수한 상점과 카페, 작은 영화관, 마사지 가게 등이 있다. , 조각품, 향신료, 해먹, 실크 스카프, 지갑, 아로마 오일, , 장신구 등이 주요 쇼핑 품목이다.

 

 

 

앙코르 시내,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내에서 앙코르 매표소방향으로 1Km쯤 가면 새로 지은 듯한 느낌의 사원을 만나게 된다. 크메르 루즈 집권 때 학살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와트마이(Wat thmei)라는 사찰이다. 당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유골을 모아 놓고 있다고 해서 킬링 필드 사원(Killing Fields Temple)’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  킬링필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캄보디아의 역사에 대해 조금 더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 베트남전쟁을 조기에 끝내고 싶어 했던 미국의 닉슨대통령은 끝내 주변국에 까지도 폭격을 시작했다. 캄보디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분노한 캄보디아 국민들은 폴 포트라는 공산주의자를 내세워 크메르 루즈라는 이름으로 단결했다. 이에 친미(親美) 노선을 견지했던 당시의 정부군은 공산주의를 외치는 국민과 크메르 루즈군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이것이 ‘1차 킬링필드로 이때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가 수십만 명에 이른단다. 이후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닉슨대통령이 물러나고 뒤이어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은 중단된다. 뒤이어 크메르 루즈군이 수도인 프놈펜에 입성하자 시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정부 역시 미국에 속았다며 그들을 환영했다. 당시만 해도 모두의 마음속에는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학살의 시작이었다.

 

‘2차 킬링필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미국인에 대한 증오가 컸었던 크메르 루즈는 가장 먼저 외국인들과 관련된 사람들을 죽였다. 다음 차례는 지식인들 이었다. 크레르 루즈 대부분이 못 배우고 가난한 계층이었기에 지식인과 부유층에 대한 분노가 컸던 게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물론이려니와 외국어가 들어간 티셔츠만 입고 있어도 이를 이유로 죽였다고 한다. 의사와 공무원, 교사들도 학살 1순위 이었다. 안경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죽기도 했다. 안경을 쓴 사람을 지식인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학살 그룹인 부르주아(bourgeois)’를 골라내는 방법은 더 기가 찼다. 손에 굳은살이 없거나, 피부가 희고 고울 경우 죽임을 당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시계를 차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학살 대상자는 어른들 뿐만이 아니었다. 임산부와 어린이 심지어는 갓난아이까지 포함되었다니 얼마나 끔찍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웬만큼 학살이 진행되었다 싶으니 이번에는 강제노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산주의자였던 폴 포트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원시적인 농경주의(農耕主義)였다. 그리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그는 모든 국민을 농경지로 강제이주 시킨 뒤 노역(勞役)을 강요했다. 이 강제이주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일을 하는 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또 다시 죽어나갔다. 이렇게 질병과 기아(飢餓), 그리고 과로 등으로 죽은 사람의 숫자가 또 다시 80만 명에 이른다. 이렇게 5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200만 명이 죽어나간 것이다. 이는 캄보이아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한단다.

 

어느 글에선가 캄보디아의 문맹률이 ‘60%'에 이른다고 적혀있는 걸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지식인들을 색출해가며 학살했던 킬링필드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당시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했던 말이 공부하지 마라이었다고 하니 그런 결과가 나올 만 하지 않겠는가. 나라의 장래는 젊은이들에게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젊은이들에게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그 시기는 캄보디아로 보아서는 잃어버린 세월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사람의 잘못된 지도자가 만든 캄보디아의 가난한 현실과 결코 밝지만은 않은 미래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원 안으로 들면 수많은 납골탑들이 보인다. 누구를 모셨는지는 몰라도 저 정도로 반듯하게 지어졌다면 그런대로 잘사는 후손들을 두었으리라.

 

 

 

 

 

사원 안에는 해골을 모아 놓은 탑()이 있다. ‘킬링필드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골(遺骨)을 모아 놓은 것이란다. 크메르 루즈 정권이 무너진 후 씨엠립 근처에서도 수많은 유골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사원에서 이를 한데로 모아 탑을 짓고 이들을 추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해골만 보아도 소름이 돋는 법인데 수백 개의 유골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을 보니 그 소름이라는 표현이 어쩐지 허술해져버린다. 그렇다. 그 어떤 말로도 이렇게 끔찍한 상황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고로 이곳에다 유골탑을 세운 이유는 사원을 짓기 위해 터파기 공사를 하다가 이곳에서 수많은 유골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란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이유라도 알고 죽은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 대부분은 왜 죽어야 하는 지도 모른 채로 죽어갔을 것이다. 거기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땅속에 제대로 묻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뼈도 제대로 추리지 못했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테고 말이다. 비록 우리나라의 일은 아니지만 그들의 넋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 수 없어 조용히 묵념(黙念)을 드려본다. 넋이라도 평안히 잘 가시라고.

 

 

 

납골탑에는 꽤나 많은 이름들이 적혀있고, 이름 오른편에는 숫자들이 적혀 있다. 이마 이 유골탑과 관련된 일에 기부를 한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이 내 기부금의 단위인 모양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도 보인다. 가슴이 뿌듯해진다. 그가 낸 기부금이 많고 적음은 둘째 치고 좋은 일에 우리나라 사람이 참여했다는 그 사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납골탑 옆의 안내판에는 수많은 사진들을 붙여 놓았다. 크메르 루즈 정권 당시에 촬영된 사진들이란다.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인물사진들을 위시해서, 여러 종류의 사진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학살당하고 있는 장면들도 보인다. 끔찍하다.

 

 

 

 

 

 

 

사원은 작은 규모는 아니지만 특별히 볼만한 것은 없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마음속에 담아둘만한 유물들이 없는 것이 그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동남아 사찰의 특징대로 화려함만은 나름대로 볼만 했다.

 

 

 

 

 

이곳도 역시 망고나무가 정원수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추나무만치나 흔한 것이 망고나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나라의 수세미를 쏙 빼다 닮은 열매가 매달린 넝쿨도 보인다. 야채의 한 종류라는데 먹어보지 않아서 맛을 글쎄다.

 

 

 

 

 

캄보디아에 왔다면 저녁시간을 내어 꼭 들러봐야 할 곳이 하나 있다. 밤에만 오픈한다는 나이트 마겟(Night Market)이다. 오래 전부터 있던 시장이라고 해서 올드마켓(old market)이라고도 불린단다. 앙코르 나이트 마켓은 캄보디아어로 프싸 리어뜨라이 앙코르이다. 2007년에 처음 생겼으며 캄보디아 최초의 야시장이다. 앙코르와트 사원 구경에 바쁜 관광객들에게 밤에 여유롭게 쇼핑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했다고 한다. 나이트 마켓에는 초가지붕과 대나무로 만든 대략 240개의 상점이 있다. 대부분의 상점에서는 주로 캄보디아의 전통 수공예품, , 실크, 보석, 그림과 여러 기념품을 팔고 있다. 야시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주로 시엠립 주변의 외진 시골마을에서 캄보디아인들의 수공업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몇 가지 사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기념품으로 사다줘도 좋을 것이다. 다만 이때에는 꼭 흥정을 해야 한단다. 옛날 옛적의 우리네 시장과 마찬가지로 물건가격이 대부분 부풀려져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말로는 처음 부르는 가격에서 일단 절반으로 깎아보라고 했다. 물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원하는 가격을 부르고 가는 척을 하면 대부분 다시 불러서 싼 가격에 주곤 한다는 것이다.

 

 

 

버스는 우릴 큰길가에다 내려놓는다. 나이트마켓은 차가 들어 올 수 없는 거리란다. 1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을 준 가이드는 모이는 장소만 알려주고 우리 곁을 떠나버린다. 이젠 우리 나름대로 눈 구경을 즐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시장의 범위가 그다지 넓지를 않아 길을 잃을 염려가 없고, 거기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띠기 때문에 언어소통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상인들을 붙잡고 말을 건네 보면 된다. 비록 더듬거리기는 하지만 한국말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번화가까진 잠시 더 걸어야 한다. 어둡던 거리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휘황찬란해졌다. 그리고 나타난 곳이 마치 유럽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펍 스트리트(pub street)이다. 한마디로 외국인이 가득한 유러피안(European)의 거리이다. 거리에는 노천카페와 바와 기념품점으로 가득 차 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고 구경거리가 지천인 문화의 거리이다.

 

 

 

거리는 발 딛을 틈도 없이 사람들로 붐비고 노천카페에서는 술을 마시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술을 좋아하는 나 또한 구석자리라도 잡고 싶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패키지여행의 가장 큰 단점이다. 하긴 개인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다. 가이드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개인적으로 호텔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나 나에겐 그럴만한 자유가 없다. 집사람이 그런 걸 무척 싫어하기 때문이다. 또 그녀의 말을 거슬릴 배짱이 나에게 없음은 물론이다. 그저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까 하고 사람들을 헤집고 거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본다. 얼마쯤 걸었을까 거리가 온통 음악으로 들썩이고 있다. 누군가가 높은 곳에 올라가 춤을 추고 다른 이들은 손뼉을 치며 몸을 흔들어 대고 있다. 이래서 이곳을 유러피안의 거리라고 부르나 보다.

 

 

 

 

 

 

 

기념품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먹거리를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시장을 둘러보면 각종 현지 간식거리들을 파는 곳들이 보인다. 이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길거리 좌판(坐板)이었다. 개구리나 메뚜기 등의 곤충들은 물론이고 뱀과 거미까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종류가 다양했다. 징그러운 것을 싫어하는 나는 바라보는 것만도 힘이 드는데 함께 간 형우군은 맛있게도 잘만 먹는다. 그리고 저녁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먹겠다고 싸달라고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호텔 술자리에서는 그 친구 곁에 앉지 말아야겠다.

 

 

 

숙소로 돌아가는 중에 잠깐 과일가게에 들렀다. 여행의 마지막 밤을 그냥 무의미하게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에는 서울에서부터 가져온 소주가 아직까지 2병이나 더 남아있고, 통조림 등의 안주 또한 넉넉하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과일만 몇 가지 더 산다면 훌륭한 저녁파티가 이루어질 게 분명하다. 그리고 우린 마지막 밤을 화려하게 보낼 수 있었다. 비록 다음날 아침에 쓰라린 속을 부여안고 식당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캄보디아에 와서 가장 부러워했던 것 중의 하나가 참으로 과일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런 과일들을 다 모아 놓은 곳이 과일가게이니 또 다시 부러워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흔하다는 망고와 바나나, 파파야, 코코넛, 파인애플 등은 이미 눈에 익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생산되는 수박과 자몽, 단감 등을 단번에 알아보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림에서만 보았던 짹프르츠와 망고스틴, 두리안, 리치 등은 이름을 물어보고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듣도 보도 못했던 미은이나 마쁘라, 끌렁껑, 뜨넉, 스칸니아, 따읍, 크로잇뽀삿, 스와이짠띠 등은 다시 본다고 해도 기억을 못해낼 것이다. 이 많은 것들을 모두 다 맛보고 싶었지만 우린 눈에 익은 과일들 몇 가지만 주워들 수밖에 없었다. 나이 육십을 넘기면서 모험보다는 안정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걸 보고 보수라고 해야 하나?

 

 

캄보디아(Cambodia) 여행

 

여행지 : 캄보디아 앙코르(Angkor) 지역

여 행 일 : ‘14. 3. 22() - 3. 26()

 

전체 여행 일정

3.22() : 인천공항씨엠립공항

3.23() : 바래이 호수, 실크 팜, 민속촌

3.24() : 따프롬, 앙코르톰, 앙코르와트, 야시장

3.25() : 와트마이 사원, 툰래삽 호수, 쇼핑(상황버섯,목청꿀, 잡화, 보석)

3.26() : 씨엠립공항인천공항

 

바다를 연상시키는 경이로운 호수들, 바래이호수와 톤레삽호수

 

 

특징 : 서 바레이호수(West Baray Lake)는 크메르제국의 앙코르시대인 11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던 저수지 중 유일하게 물이 남아 있는 저수지이다. 크메르 왕국의 통치기간동안 약 1000크기의 인공저수지를 기반으로 한 관계 시스템으로 각종 용수가 제공되었다. 이것들 중 가장 큰 규모였던 서 바래이호수1050년에 건설되었으며, 8km X 2.2km 크기의 저수지는 최대저수량이 40m3에 이른다. 이 저수지는 땅을 파서 만든 것이 아니라 둑을 쌓아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저장된 물이 땅의 높이보다 높으며, 물은 논으로 중력차에 의해 보내진다. 이러한 관계 활동은 9세기말경 시작되었고, 이 결과로 매년 건기와 우기를 가리지 않고 다모작(多毛作)의 경작을 할 수 있었다. 또한 톤레삽호수(Tonle Sap Lake)는 길이가 160km에 너비가 36km에 이르는 바다 같은 호수이다. 호수에는 풍부한 민물어류가 있고, 이러한 자원은 물새나 수생동물, 양서류가 살기에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는 물위에 떠있는 마을이라는 깜퐁 플럭(Kampong Phluk)’으로 인해 톤레삽호수가 세상에 알려졌다. 쉽게 말해 수상가옥 마을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유명세를 타게 됐다는 얘기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현지인들이 낚시하고 빨래하고 밥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풍경들을 본다. 그리고 그 풍경이 너무나 생소하기에 이를 보려고 더 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드는 것이다.

 

 

 

어느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입구 도로변은 수많은 상점들이 몰려있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과일이나 의류, 식료품, 그리고 기념품들을 팔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다른 관광지들과는 다른 색다른 풍경이 연출된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어린애들이 달라붙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행자 한 사람 당 두세 명씩 둘러싸는 게 마치 나눗셈이라도 해 놓은 것처럼 얼추 비슷하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실을 엮어서 만든 팔찌를 사줄 때까지 끊임없이 원 달러를 외쳐댄다. 애들까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고단한 삶을 보는 것 같아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그런 마음도 잠시, 호수를 제대로 구경하기 위해서는 애들로부터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결과적으로 말해 그네들이 요구하는 것을 사주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그건 헛수고에 불과했다. 더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더 사주어야한다며 우겨댄다. 이런 귀찮음은 우리가 버스에 다시 오르고 난 뒤에야 해방될 수 있었다. 덕분에 바레이호수의 투어는 주마간산으로 구경할 수밖에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원 달러라는 외침은 호수를 떠나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이런 걸 보고 이명(耳鳴)현상이라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버스에서 내리면 곧바로 호숫가이다. 이 호수는 앙코르시대에 만들어졌던 저수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으로, 캄보디아 최대의 인공호수라고 한다. 수리야바르만1세 때 만들어졌다는 이 호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마치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말이다. 바닷가 해수욕장을 닮은 해변도 있음은 물론이다. 물놀이를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은 현지인들의 휴식처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단다.

 

 

 

 

그러다보니 이곳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꽤 많아 보인다. 해변에 늘어선 건물들의 길이가 장난이 아닐 정도로 긴 것을 보면 말이다. 우리나라 관광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점들이 아닐까 싶다. 무허가(?) 건물들을 지어놓고 음식을 사먹는 사람들에게만 시설을 내어주는 그런 곳들 말이다.

 

 

 

그리고 호수면(湖水面) 가까이에 쳐진 천막 아래에는 달아매는 그물침대인 해먹(hammock)들도 보인다. 그 숫자가 많은 것을 보면 이것 또한 대여용인 모양이다. 그것만으로는 수지(收支)가 맞지 않았는지 과일과 음료수까지 팔고 있었다.

 

 

 

한쪽에는 유람선(遊覽船)들도 몇 척 정박(碇泊)해 있다. 유람삼아 배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호수 중앙 작은 섬에 있다는 메본(Mebon)사원의 유적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테고 말이다. 직경 150미터 정도 되는 작은 섬에 지어진 메본사원은 11세기 후반 유다야디타바르만 2(Udayadityavarman II)에 의해 바퓨욘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비슈누신에게 봉헌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비치파라솔 아래에는 고무튜브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이것 또한 대여용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곳 주민들이 바래이호수를 물놀이 장소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닷가 해수욕장쯤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톤레삽호수의 투어는 유람선선착장에서부터 시작된다. 매표소에서 승선권을 사고서 선착장에 내려서면 여러 대의 유람선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중의 하나를 골라 올라타고 본다. 물론 가이드가 지정해주는 배다. 승선인원은 대략 30명에서 많게는 40명 정도, 비록 허름하기는 해도 제법 큰 배이다. 톤레삽호수는 수도인 프놈펜과의 주요 수로로 이용되었으며, 호수 주변의 다섯 지방과도 통한다. 요즘에는 관광산업이 많이 활성화되어 프놈펜과 씨엠립 사이에 보트로 여행하는 코스로도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배에는 구명조끼까지 구비되어 있다. 그러나 사용하는 사람들은 없는 듯 싶다. 착용하려는 사람들도 없고, 그렇다고 입을 것을 권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가 출발하면 열두어 살쯤 먹어 보이는 아이들이 나타난다. 출발할 때만 해도 눈에 띄지 않던 아이들이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승객들의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안마를 해준다는 것이다. 싫다는 거부표시는 애당초 먹히지도 않으니 이럴 경우에는 그냥 못이기는 채 그냥 맡겨 두는 게 좋다. 그리고 푼돈 몇 푼 쥐어주면 될 일이다. 모처럼 나온 여행을 사소한 것 때문에 망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호수는 건기와 우기(雨期)에 따라 그 넓이가 크게 달라진다. 건기에는 3,000의 면적에 수심(水深)1m에 불과하지만, 우기에는 면적이 10,000로 넓어지며 수심 또한 12m로 깊어진다. 지금은 건기(乾期)이다. 당연히 호수는 얕아질 대로 얕아졌다. 강둑에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물길의 흔적이 이를 증명해준다.

 

 

 

 

 

톤레삽호수는 캄보디아인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음은 물론 호수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크리스탈(crystal)처럼 맑거나 옥빛을 띤 호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황토 흙을 실어 나르는 메콩강의 특징 때문에 탁한 황토색을 띠기 때문이다. 건기(乾期)인데도 저런 물빛이라면 톤레삽은 일 년 열두 달 내내 황톳빛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다. 하여간 물빛에 관계없이 우리가 탄 배는 잘도 달려간다.

 

 

 

 

 

 

뱃길은 호수가 아니라 강을 달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 폭()이 좁다. 아마 호수로 흘러들어오는 강줄기인 모양이다. 주변의 볼거리는 그다지 많지 않다. 가끔 외딴 건물들이 보이거나 갑판에서 그물을 수선하고 있는 배들이 보일 따름이다. 하나를 빼먹을 뻔 했다. 고기를 잡고 있는지는 몰라도 물위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작은 나룻배들도 눈에 띄었다.

 

 

 

 

 

 

 

 

 

얼마쯤 달렸을까 저만큼에 제법 큰 건물이 보인다. 버젓이 선착(船着)시설까지 갖춘 게 물위에 떠 있지만 분명 배는 아니다. 지나가는 길에 보니 식당이나 카페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 휴게소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특이한 게 눈에 띈다. 배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는 것이다. 근접해서 지나가는 길에 보니 나눔의 쉼터라는 글이 적혀있다. 한국인 운영하는 쉼터가 아니면 어느 봉사단체에서 운영하는 시설인 모양이다.

 

 

 

 

 

 

 

 

 

 

 

저 멀리 물위에 떠있는 가옥(家屋)들이 보인다. 그것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범위가 넓다. 어쩌면 물위에 떠있는 마을이라는 깜퐁 플럭(Kampong Phluk)’이 아닐까 싶다. ‘톤레삽 호수여행과 동의어로 친다는 그 유명한 캄퐁 플럭말이다. 캄퐁 플럭은 세 개의 수상 가옥 마을을 묶어 부르는 이름으로, 씨엠립에서 남동쪽으로 16km쯤 떨어진 홍수림에 있다. 이 마을에는 베트남 전쟁 후 피난 온 베트남인들이 대부분 밀집되어 있으며 일부 크메르인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수상가옥을 이루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해지는 노을과 함께 어우러지는 톤레삽 호수는 장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경관을 볼 수 있는 행운은 없었나 보다. 우리가 타고 있는 유람선은 깜퐁 플럭(Kampong Phluk)’으로 갈 줄을 모르고 주위만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이드 말로는 갈수기(渴水期)가 그 원인이라지만 글쎄다. 아무래도 가이드가 믿기지 않았나 보다. 하긴 여행사에서 약속한 투어일정을 다 소화하기는 이미 어려워져 버렸다. 가이드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이 어쩌면 더 당연하다 할 것이다. 하여간 우리는 현지인들이 낚시하고 빨래하고 밥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풍경을 볼 기회를 놓쳐버렸다.

 

 

 

끝없는 건 물위에 떠있는 집들만이 아니다. 톤레삽 호수로 흘러드는 강은 대양(大洋)으로 나아가는 듯 드넓어져 수평선마저 보인다. 어느새 강은 사라지고 망망한 바다 같은 호수가 나타난다. 그렇다 이건 호수가 아니라 바다이다. 이곳보다 조금 더 넓다는 바이칼호수를 보고 일부 사람들이 바이칼 바다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말이다.

 

 

 

호수에서 살아가는 것은 동식물뿐만이 아니다. 호수를 젖줄 삼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삶을 만나는 것은 씨엠립 여행의 또 다른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캄퐁 플럭(Kampong Phluk) 뿐만이 아니다. 선착장까지 이어지는 도로변에도 수상가옥을 닮은 집들이 무수히 널려있다. 지금은 비록 나무로 만들어진 받침대를 앙상히 내밀고 있는 흉물스럽다면 흉물스러운 모습이지만, 우기(雨期)에는 물 위에 떠있는 집으로 변하는 것이다.

 

 

 

 

 

앙상한 다리를 드러내고 있는 가옥들 뒤는 널따란 들녘이다. 그 들녘에는 벼가 자라고 있다. 지금이 건기(乾期)이기에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금과 같은 건기 때에는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이지만 우기(雨期) 때에는 똔레삽 호수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지역의 사람들의 생활도 건기와 우기에 따라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