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여행
여행일 : ‘16. 12. 10(토)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일원
트레킹코스 :
① 고석정(孤石亭)
② 두루미평화마을→평화전망대→소이산 전망대
함께한 사람들 : 가보기산악회
특징 : 철원에도 여러 곳의 전망대(展望臺)가 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전망대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의미를 갖는다. 눈에 보이는 산하가 모두 분단의 아픔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오른 평화전망대와 소이산전망대 역시 그런 의미를 갖는다. 눈에 담을 만한 풍경들이 모두 남북분단이 만들어낸 산물들인 것이다. 쏟아지는 포탄으로 인해 높이가 1m나 낮아졌다는 ‘백마고지’나 포격으로 인해 산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는 ‘아이스크림 고지’, 후고구려의 궁예가 나라를 세우며 진산으로 삼은 '고암산 (김일성 고지)' 남방 한계선이자 한반도의 녹색지대인 DMZ 등 어느 것 하나 분단의 아픔을 품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서울면적(605㎢)보다 훨씬 넓은 약 650㎢(2억 평)에 달하는 거대한 철원평야의 풍요로움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분단의 현실을 삶의 현장으로 여기는 것들도 있다. 우리에겐 아픔이지만 철새들에겐 행운이기 때문이다. 분단은 사람의 간섭이 없는 비무장지대와 민간인통제구역을 만들었다. 드넓은 철원 평야 농경지는 먹거리인 낙곡을 제공하였고, 한탄강의 여울과 곳곳에 자리 잡은 대형 저수지는 잠자리로 최적이다. 이런 환경 덕분에 철원은 멸종위기 종(種)인 두루미와 재두루미, 독수리를 비롯해 수많은 철새의 월동지가 되었다. 오늘 여행을 즐기면서 끊임없이 마주치게 되는 풍경들이다.
▼ 고석정을 출발한 버스가 처음으로 들른 곳은 철원읍 대마리에 위치한 ‘두루미평화관’이다. 건물의 외형이 ‘노동당사’를 닮았다고 해서 ‘리틀 노동당사’라고도 불린다는 건물인데, 숙식이 가능하다고 해서 산악회에서 미리 식사를 예약해 놓았기 때문이다. 자율배식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맛과 양이 부족함이 없다고 해서 일부러 들른 것이란다.
▼ 두루미평화관이 위치한 대마리는 두루미평화마을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치열한 한국전쟁 이후 식량증산과 대북선전마을의 목적으로 지뢰밭과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쌀농사가 주민소득의 90% 이상을 차지하는데, 요즘은 환경농업을 확대시켜 무농약재배, 유기재배를 실시하고 있으며 그 면적 또한 점차 확대되고 있단다. 오늘의 식단(食單)은 이 마을 주민들이 직접 수확한 농산물들로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의 화두(話頭)는 무농약, 유기농 등 친환경이 대세이다. 그렇다면 우린 지금 최상의 음식을 먹고 있는 셈이다. 보약(補藥)을 먹고 있다는 얘기이다.
▼ 건물 앞에는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상허 이태준(1904~?)의 문학비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고향에 세웠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의 고향이 이곳이었나 보다. 상허는 남과 북 양쪽 모두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 불운한 문학가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월북했기 때문이다. 중편 ‘해방전후’와 단편 농군, 달밤 등의 소설과 산문집 무서록, 그리고 문장강화 등으로 유명한 이태준은 1904년 11월4일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광수와 김동인을 거치며 싹이 튼 한국 근대 단편소설양식을 완성한 작가로 평가된다. 당시 그의 문학적 위치는 ‘시에는 정지용, 소설에는 이태준’이라는 평판으로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30년대에 박태원, 이상 등과 함께 구인회 활동을 하고 잡지 ‘문장’을 창간하는 등 ‘순수문학’에 전념했던 그는 해방과 함께 문학가동맹 부위원장을 맡는 등 좌익 문인 단체를 이끌다가 월북한다. 그러나 전쟁 이후 숙청된 그는 60년대 말 탄광에서 노역에 시달리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 이외에는 지금까지도 행적과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동송읍 중광리에 있는 평화전망대로 이동한다. 155마일 휴전선의 중앙부위에 위치한 전망대로 2007년에 개관하였다. 전략적 요충지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현재 DMZ에서 북한의 휴전선 감시 초소와 가장 근접한 곳이기도 하다. 즉 북한군의 이동모습은 물론, 남북 분단의 현장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 전망대로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모노레일(monorail)을 타고 오르는 방법이다. 나머지 하나는 물론 걸어서 오르는 방법이다. 부담 없는 요금(성인 기준 2천원) 덕분에 대부분의 탐방객들은 모노레일을 이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는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다. 거리가 얼마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올라가는 길에 또 다른 구경거리가 있을까 해서이다.
▼ 우리의 예상은 적중했다. 올라가는 길에 우린 신·구 기독교 교인들이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예배당과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을 둘러볼 수 있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방문을 기념해서 세운 소박한 기념비(記念碑)도 눈에 띄었다.
▼ 잠시 후 전망대에 이른다. 안보관광(安保觀光)을 목적으로 지어진 철근콘크리트로 2층 건물이다. 평화전망대는 비무장지대(DMZ : Demilitarized Zone) 부근에 위치한 여러 전망대들 가운데 북한의 모습을 관찰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전망대가 산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 북한지역에 대한 관측이 용이해서, 농번기에는 북한 군인들이 자급자족하는 농사 장면까지 엿볼 수 있다고 한다.
▼ 전망대는 2층에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태봉국의 옛성터와 철원 평야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쌍안경을 통해 북한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 전망대에는 ‘안보전시관’도 마련되어 있다. 제2 땅굴과 군막사, 검문소를 재현한 전시물과 비무장 지대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 다음으로 들른 곳은 소이산 전망대이다. 봉의산(鳳儀山)이란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소이산(所伊山)은 철원평야 논바닥에 떠 있는 작은 섬 같은 산으로 철원평야와 비무장 지대를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점이다. 해발고도가 362.3m로서 주변 지역과의 표고(標高) 차이가 200여m에 불과한 탓에 나지막한 산으로 보이지만 산정에 오르면 넓은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 그리고 그 건너편으로 북한지역의 평강고원이 한 눈에 잘 들어오는 것이다. 아무튼 버스는 우릴 소이산 입구의 삼거리에다 내려놓는다. 왼편은 ‘수도국지(水道局址)’로 가는 길이고, 소이산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이정표를 겸한 안내판에는 ‘새우젓 고개’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옛날 임진강과 한탄강의 뱃길을 따라 용담까지 실려 온 새우젓을 철원 장날에 맞춰 내가 팔기 위해 장사치들이 넘나들며 쉬어가던 고갯마루라는 것이다.
▼ ‘소이산 생태숲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철원군은 지난 2011년 ‘행정안전부 친환경 생활공간 조성공사사업’의 일환으로 이곳 소이산을 확 바꿔놓았다. 국비 등 50억 원을 들여 북부지방 산림청과 ‘공동산림사업구역’으로 협약을 체결하여 소이산 2,382㎡의 면적에 ‘지뢰꽃길 1.3km’과 ‘생태숲길 2.7km’, ‘봉수대오름길0.8km’의 ‘생태숲 녹색길’을 조성했다. 60여 년 동안이나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던 이곳을 전면 개방한 것이다.
▼ 길가에 ‘수도국지(水道局址)’에 대한 안내판이 보인다. ‘수도국(水道局)’이란 일제 강점기에 옛(舊) 철원 시가지 주민들의 상수도 공급을 위해 설치한 저수탱크 및 관리소 건물을 말하는 것이란다. 1937년에 발행된 철원읍지에 의하면 당시의 급수 인구는 500가구에 2,500명이었고, 1일 급수 가능량은 1,500㎥로 강원도에서 유일한 상수도 시설이었다고 한다. 아니 서울이나 부산보다도 더 빨리 수돗물을 먹었던 지역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픔도 있다. 국군이 북진하자 북한 공산당이 친일, 반공인사 300여명을 이곳에서 총살하거나 지하 6미터의 저수탱크에 생매장하고 도주했기 때문이다.
▼ 잠시 후 또 다시 길이 나뉜다. 정비가 한창인 왼편 길을 무시하고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들머리에 이정표(정상 0.8K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생태 숲길’을 따라 오른다.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지만 삭막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주변의 숲이 이 모든 것을 가려버릴 정도로 울창하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인 ‘생명의 숲’은 2006년에 이 소이산을 ‘천년의 숲’ 수상지(受賞地)로 선정한바 있다. 또한 2008년에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평화의 숲' 상을 받았다. 통일을 대비한 선제적 대응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통일이 되고나면 이를 기념할만한 ‘평화 도시’를 만들자는 의견이 대두될 것이고, 그 대상지는 아마 철원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럴 경우 이곳 소이산은 서울의 남산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겠는가.
▼ 잠시 후 왼편으로 길이 나뉜다. 이번의 이정표(생태숲 녹색길←/ 소이산 전망대↑)에는 ‘일일 영농출입’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에는 행정권이 민정으로 이양이 되었지만 민간인들의 전방 출입은 극히 제한되었단다. 이후 출입영농(出入營農)이 가능해졌지만 아침에 들어갔다가 해지기 전에 나와야만 했다. 이곳 소이산도 역시 민통선 북방으로 출입이 통제된 곳이었다. 참고로 철원군에는 1959년부터 1979년까지 철원평야에 총 14개의 민북마을 (민통선 북쪽 마을)을 조성하여 975세대를 입주시켰다고 한다.
▼ 그렇게 조금 더 오르면 대문(大門)이 하나 나타난다. 그 너머에는 군부대(軍部隊)로 여겨지는 시설이 보인다. 옛날 이곳에 미군(美軍)들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당시의 시설인 모양이다.
▼ 대문의 앞에 군인들이 사용했음직한 시설물이 보인다. 생김새로 보아 벙커(bunker)로 보이는데 반대편으로 난 틈으로 철원평야와 북녘의 산하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곳 소이산을 방어하는데 이만한 방패막이가 없겠다.
▼ 일단 오른편의 나무계단을 오른다. 소이산 전망대로 가기 위해서이다. 소이산의 정상은 물론 왼편이다.
▼ 잠시 후 소이산의 전위봉이라 할 수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이곳은 고려시대 때부터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회령을 출발한 봉화(烽火)가 길주와 함흥, 영흥, 안변, 철원을 거쳐서 서울 남산으로 연결되던 제1선인 ‘경흥선 봉수로((慶興線 烽燧路)’에 속해있었다는 것이다. 철원평야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가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봉수대가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2층의 정자가 지어져 있다. 탐방객들의 전망을 돕기 위해서일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 전망대에는 조망판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게 좀 특이하다. 투명한 아크릴판에다 남북한의 역사적 장소들을 표기해 놓은 것이다. 실제의 풍경에 맞추어 가며 옛날을 회상해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 같다.
▼ 정자에서는 오대쌀로 유명한 철원평야가 눈앞에 넓게 펼쳐진다. 철원평야는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과 그의 아들 세종, 손자 문종이 자주 찾던 사냥터였다. 사냥이 끝나면 신하들과 인근지방 관료들을 임진강가의 정자 고석정(孤石亭)에 초대하여 잡은 동물과 술을 베풀며 위무했다고 전한다. 저 멀리로는 평강고원도 조망된다. 그리고 비무장지대 내의 삼자매봉과 그 뒤로 백마고지가 보인다. 산명호(山明湖) 뒤로는 피의능선이 나타나고 더 멀리로는 김일성고지(고암산)와 낙타고지 등이 희미하게 조망되고 있다.
▼ ‘철원용암대지(鐵原熔岩臺地)’라고 적힌 안내판도 보인다. 글씨가 지워져 내용을 알 수가 없지만 이곳이 용암대지(熔岩臺地, plateau of lava) 임을 설명해 놓지 않았을까 싶다. 공식 명칭이 철원평강용암대지(鐵原平康熔岩臺地)인 이 일대는 넓이가 590㎢이고 평균높이는 340m이다. 신생대 제4기 충적세에 현무암이 분출하면서 이루어진 화산지형으로서 현무암 분출의 중심은 평강읍 남서쪽 약 4㎞ 지점에 있는 오리산[鴨山:454m]과 검불랑(劒拂浪) 북동쪽 약 5㎞ 지점에 있는 높이 680m의 화산인 것으로 지질조사에서 밝혀졌다. 화산쇄설물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용암이 조용히 분출한 것으로 보인다.
▼ 경계용 난간에 산악회의 리본들이 흡사 무당집 처마처럼 어수선하게 매달려 있다 그만큼 많은 산악회에서 이곳을 다녀갔다는 증거일 것이다.
▼ 나무계단을 되돌아 내려와 이번에는 아까 보았던 대문으로 들어선다. 해발 362.3m의 소이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이다. 대문의 왼편에 ‘소이산 평화마루공원’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옛날 군부대가 있던 자리를 공원으로 리빌딩(rebuilding) 해놓은 모양이다.
▼ 안으로 들어서니 괴상하게 생긴 사각(四角)의 조형물들이 줄줄이 서있다. 철망으로 둘러싸인 틀 속에는 군화와 수통, 코펠(kocher), 탄통 등 군용장비들이 들어있다. 당시 미군들이 사용하던 것들을 전시해 놓은 모양이다.
▼ 당시 미군들이 쓰던 막사(幕舍, barracks)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출입은 사양한단다. 아무튼 이 시설들은 미군의 레이더기지가 주둔할 당시 군인들이 머물던 숙소였다. 전쟁 종료 후 한국군이 사용해오다가 지금은 폐쇄된 상태이다. 이왕에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면 그냥 놀리기 보다는 관광객들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만들었어도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 소이산의 꼭대기는 널따란 광장(廣場)을 만들어 놓았다. 군부대가 떠난 뒤 새로 조성한 모양인데, 뛰어난 전망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시야(視野)를 막는 것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소이산이 없었다면 6.25전쟁 때 철원평야를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는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軍部隊) 공보참모의 말을 인용했었다. 그렇다. 이런 곳이라면 적의 동태를 속속들이 살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이 꼭 아니더라도 이런 곳을 선점한 쪽이 우세했을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 전망대에서는 일망무제(一望無題)의 조망이 펼쳐진다. 넓은 철원평야는 물론이고 비무장지대의 백마고지(백마산), 김일성고지(고암산), 북한의 평강고원 등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노동당사도 보인다. 아니 아까 전위봉에서 볼 때보다도 훨씬 더 또렷해졌다. 노동당사를 기점으로 해서 북쪽방향으로 철원경찰서, 도립병원, 철원군청, 철원공립보통학교, 철원역에 이르는 3km의 거리는 일제강점기 철원의 중심가였다. 경원선 기찻길이 생기고 금강산 전기철도가 건설되면서 철원군은 교통의 중심지로 부각되었고 각종 농수산물의 집산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6.25전쟁은 인구 2만의 철원읍 시가지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조차 모두 떠나게 만들어 버렸다.
▼ 노동당사는 1946년 공산치하에서 지역주민들의 강제 동원과 모금에 의하여 완공된 지상 3층의 철근이 들어가지 않은 콘크리트건축물이다. 1946년 연건평 580평으로 건축되었는데, 성금이란 명목으로 하나의 리(里)마다 백미 200가마씩의 자금과 인력 또는 장비를 동원시켰다고 한다. 당시 이곳은 러시아의 영향을 받는 북한정권의 관할 아래 있어서 많은 건축물들이 러시아의 기술적 지원과 러시아가 추구하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realism) 건축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노동당사 또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건축적 특징과 시대성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언덕을 이용한 기단의 설정과 대칭적 평면, 비례가 정돈된 입면의사용으로 공산당사로서의 권위를 표현하고 있다. 전쟁 중 내부 벽체가 대부분 파괴 되었으나 외부의 형태가 남아 있어 원래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 일부 구조체에서 철근 콘크리트의 사용과 벽식 구조의 혼용, 화강석과 콘크리트, 벽돌 및 목재의 혼용은 당시 건축의 일면을 엿보게 하고 있다. 현재 이 건물은 근대건축문화재 제22호로 등록되어 있다. 분단의 비극과 전쟁의 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 요 아래 ‘사요리’는 옛 철원읍의 중심지였다. 농축산물이 모이고 경원선을 통하여 금강산 관광객이 북적대던 곳이다. ‘철원군지(鐵原郡誌)’에 실려 있는 1930년에 찍은 사진을 보면 그 당시 소이산 주변으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을 볼 수 있다. 해방 때만 해도 철원읍의 인구는 8만 명이나 되었고, 은행 2개소와 도립병원까지 있었단다. 농산물 검역소 등 과거의 추억들은 근대문화유적으로 남았다. 하지만 농가와 논밭의 상당수는 습지와 숲으로 바뀌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고려 삼은(三隱) 중의 한 사람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의 싯귀(詩句)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 전위봉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조망판이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이번 것은 투명판이 아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과 겹쳐보는 재미는 덜하지만 특히 보고 싶은 지명을 찾아보기에는 더 유리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추수가 끝난 텅 빈 철원평야의 전경은 물론이고 비무장지대와 그 너머 북한의 산하가 펼쳐진다. 포탄을 얼마나 퍼부었는지 산등성이 높이가 1m정도 낮아졌다고 하는 산 '백마고지'는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말 산등성이가 평평하게 보인다. 극심한 포격에 산이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내렸다는 '아이스크림 고지'(원래 이름은 삽슬봉), 남방 한계선이자 한반도의 녹색지대 DMZ, 후고구려의 궁예가 나라를 세우며 진산으로 삼은 '고암산 (김일성 고지)'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에 있다. 서울 면적(605㎢)보다 훨씬 넓은 약 650㎢(2억 평)에 달하는 거대한 철원평야는 풍요로움에 이어 민족분단의 아픔까지도 그대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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