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다리(충북도 유형문화재 28호)
여행일 : ‘15. 5. 28(목)
소재지 :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함께한 사람들 : 산두레
특징 : 땅 위에 물이 생기고 생명이 태어났다. 물은 흘러 내려와 강을 이뤘고 주변에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왕래와 소통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이쪽과 저쪽을 잇는 다리를 놓았다. 통나무를 갈라 가로지르거나 큰 돌을 놓기도 했다. 어느 다리는 자주 큰물이 쓸어갔지만 어느 다리는 긴 세월을 견디며 발자국을 몸에 새겼다. 이 땅에는 1000년을 견뎌 온 다리도 있다. 진천 세금천(洗錦川)의 농다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언뜻 보면 그저 돌무더기처럼 보이는 이 다리는 오랜 역사만큼 수식하는 말도 많다. 동양 최고(最古)의 다리, 자줏빛 지네, 전설의 다리…. 아무튼 이 다리는 고려 무신정권에 이어 권세를 잡았던 임연(林衍)이 놓았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고려 말쯤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엉성해 보이는 돌다리가 홍수와 침식의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참고로 농다리의 길이는 93.6m, 폭 3.6m에 교각 1.2m, 그리고 교각과 교각 사이의 폭은 0.8m이다. 상판은 두께 20㎝ 정도의 장대석을 얹었다. 이 다리는 심오한 동양철학을 근거로 만들었다고 한다. 교각에서부터 상판까지 붉은색을 띤 자석(紫石)을 사용했는데, 이는 음양의 기운을 고루 갖춘 돌이라는 고서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본래는 별자리 28수에 따라 28칸의 수문을 만들었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4칸이 소실되고 24칸만 남아 있던 것을 지난 2008년 4칸을 복원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 찾아오는 방법 : 중부고속도로 진천나들목에서 빠져나와 왼쪽 방향(천안·진천)으로 달리다 청주 오창 쪽으로 좌회전한 뒤, 신정사거리에서 문백 농다리 쪽으로 다시 좌회전하면 농다리가 위치한 구곡리(진천군 문백면) 주차장이 나온다. 버스는 우릴 마을의 입구에다 내려놓는다. 농다리의 앞에 별도의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는 걸로 아는데 말이다. 중부고속도로 아래로 난 굴다리가 낮은 탓에 대형버스의 통과가 불가능한 게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뭔가를 위해 진입을 통제하고 있을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마을에는 ’농다리 전시관‘이 지어져 있다. 농다리의 역사와 전설, 우수성 등을 소개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실물로는 접할 수 없는 정보들을 얻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 마을 입구에 이곳이 ’상산 임씨(常山林氏)‘ 씨족들의 세거지(世居地) 임을 알려주는 빗돌이 세워져 있다. 농다리를 놓은 사람이 임연이라고 하더니, 그렇다면 자기 동네 사람들을 위해 놓은 셈이다. 아무튼 ’상산 임씨‘는 임팔급(林八及)을 도시조로 하고, 임희(林曦)를 중시조로 하는 성씨로 임팔급은 중국의 당(唐)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으나 신라로 망명했다고 전해진다. 중시조인 임희는 고려 제2대 임금인 혜종의 비 의화왕후(義和王后)의 아버지로서, 그가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지면서 그 후손들이 진천군에 입향(入鄕)하였으며, 이후 1000여 년간 진천을 본관으로 하는 유력 성씨로 자리하였다. 상산은 진천의 옛 이름으로 오늘날에도 구명(舊名)을 그대로 이어내리는 후손들이 있어 본관을 진천과 상산으로 함께 일컫는다. 하지만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고종 때 최씨 정권을 무너뜨린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된 임연(林衍)을 1세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 반듯한 비석(碑石)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자기네 조상들의 업적을 새겨놓은 모양인데, 숫제 숲을 이루고 있는 모양새이다. 비림(碑林)이라고 표현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 농다리로 들어가다 보면 왼편 숲속에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이층 건물이 나타난다. ’농다리 천년사랑‘이라는 음식점이다. 강변(江邊)에 위치한 마을이니 메인(mein) 요리가 ’생선요리‘일 것임은 틀림없을 터, 매운탕 한 그릇 먹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반주로 막걸리나 동동주를 곁들이면서 말이다. 비린내가 싫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토끼탕과 궁중오골계, 한방토종닭 등도 준비해 놓았단다.
▼ 잠시 후 굴다리가 나온다. 다리의 위는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지나는 길에 높이를 헤아려 본다. 눈대중으로 보기에는 버스가 지나갈 수도 있겠다 싶다. 그렇다면 굳이 마을 입구에다 내려놓은 이유는 뭘까?
▼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널따란 광장이 나타난다. 광장에는 몽골텐트가 즐비하게 쳐져있다. 그리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것이 보인다. 뭔가 중요한 행사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광장의 상공에 애드벌룬(ad balloon)까지 띄워져 있었다. 고개를 치켜들고 확인해본다. 내일이 ‘농다리축제’가 열리는 날이란다. 그렇다면 지금이 가장 바쁠 때다. 조용히, 그리고 아니온 듯 다녀가야겠다. 참고로 진천의 농다리는 동양 최고(最古)로 알려진 돌다리이다. 진천군에서는 조상이 물려준 소중한 문화유산인 농다리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해마다 축제를 열고 있다. 2015년에는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농다리, 음악으로 건너다’란 주제로 열린다. 행사는 농다리가 있는 구곡리 마을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시연하는 ‘농사철 다리건너기’와 ‘상여다리 건너기’ 등 다리건너기가 재현된다. 특히 이번에는 김봉곤 훈장이 진행하는 ‘농다리 퀴즈대회’도 진행되었다. 이 퀴즈대회는 전통적인 과거시험을 현대식으로 재(再) 해석한 프로그램이란다. 그 외에도 농다리 씨름대회와 천년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됐다.
▼ 세금천(洗錦川) 건너에 있는 거대한 폭포(瀑布)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맞은편 산자락 암벽(巖壁)에다 인공(人工)으로 만든 것이라는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더위를 식혀준다. 이 폭포는 2009년 ‘명소화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이라는데, 높이 80m(폭 24m)에서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폭포수는 더위에 지친 관광객들을 회복시켜주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포토죤(photo-zone)의 역할까지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이곳을 찾고 있는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셔터를 눌러댄다. 그만큼 배경으로 훌륭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 버드나무 한 그루가 강변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평소에 보아오던 버드나무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굵다. 천 년도 넘었다는 농다리 만큼이나 오래 묵었나 보다. 모진 세파(世波)가 버거웠던지 비스듬히 드러누워 있다.
▼ 이젠 농다리를 건너보기로 한다. 한자로 '농교(籠橋)'라 표기된다는 농다리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라고 한다. 가히 천 년 이상의 세월을 견뎌온 셈인데 그동안 유실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단다.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우리 기술력으로 만든 철근콘크리트 다리들도 홍수에 떠내려가는 판인데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 하나만 갖고도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참고로 농다리에는 과학적 원리가 들어 있다. 우선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안으로 차곡차곡 들여쌓아 교각을 만들고, 크기가 다른 돌을 적절히 배합해 서로 물리게 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폭을 좁혀 빠른 유속을 견딜 수 있도록 한 것도 특징이다. 타원형의 교각은 물살의 압력을 최대한 피하고 소용돌이가 생기는 것을 막는다. 장마 때면 물이 다리 위로 넘쳐흐르도록 수월교(水越橋) 형태로 만든 것도 장수의 비결이다. 지네가 기어가듯 구불거리는 모양 역시 빠른 물살을 고려한 설계다. 물과 돌. 서로의 부딪힘과 저항을 최소화해 상생을 도모한 선조들의 지혜에서 오늘을 살아갈 교훈을 얻는다.
▼ ‘농다리’는 한마디로 돌다리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아한 아치(arch)형의 그런 매끈한 돌다리가 아니라 징검다리에 가까운 투박한 다리이다. 총 길이는 약 95m 정도인데 징검다리 부분을 다른 곳과 같이 큰 바윗돌 하나로 만든 것이 아니라 물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석 여러 개를 쌓아올렸다. 이것이 징검다리의 교각(橋脚)이 되고, 이런 징검다리의 사이를 평평하고 넓은 돌을 사용하여 다리의 천판(天板)으로 삼았다. 참고로 이 농다리에는 네 가지의 전설(傳說)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첫째는 ‘임연(林衍)이 효성이 지극한 여인을 위해 말(馬)로 돌을 날라다가 놓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친 말이 쓰러지면서 떨어뜨린 돌이 용바위(龍岩)란다. 다른 하나는 ‘굴씨마을 임씨네 남매가 목숨을 건 내기를 하는 과정에서 누이가 놓았다.’는 설이다. 이 밖에 이런 전설들도 있다.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면 농다리가 며칠씩 우는데 한일병합 때와 6·25전쟁 때는 동네 사람들이 잠을 못 잘 정도였다고 한다. 또 장마에 농다리 상판이 뜨면 재앙이 일어나거나 훌륭한 인물이 죽는다고 전해진다. 동학혁명과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예고했다고 한다.
▼ 농다리는 다른 곳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독특한 생김새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징검다리는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온전한 돌다리로 볼 수도 없다. 구조는 분명 징검다리인데, 징검다리 사이를 상판으로 연결해 놓은 특수한 구조인 것이다. 얼핏 보면 다리라기보다는 보(洑)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무튼 다리는 투박하기 짝이 없다. 번듯하게 솟아오른 교각(橋脚)은 아예 없다. 돌을 멀끔하게 깎아서 얹은 것도 아니다. 자연 그대로의 돌이 쌓여 교각이 되고 상판(上板)이 됐다. 큰 돌 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워 넣었다. 그러다 보니 듬성듬성 틈도 있고 밟으면 밟는 대로 삐걱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대충 만든 다리는 결코 아니다. 그랬다면 그 긴 세월을 견뎠을 리가 없다.
▼ 농다리를 건너가면 우측으로 ‘천년정’이라는 정자(亭子)가 보인다. 바로 앞 짧은 목책계단을 올라가는 게 빠른 길이나, 천년정 쪽으로 돌아 오른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잠시 후에는 두 길이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 목책계단으로 오른다. 그다지 길지도, 그렇다고 높지도 않지만 중간에 쉼터까지 만들어 놓았다. ‘생거진천(生居鎭川)’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도 보인다. 쉬엄쉬엄 읽어보다 가라는 모양이다. 진천은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는 관계로 인심이 후덕하고, 반면에 용인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묘소가 유난히 많다고 한다. 그리고 ‘추천석’이라는 진천사람에 대한 전설(傳說)도 적어 놓았다. 저승사자의 실수로 잘 못 죽은 추천석의 영혼을 용인에 사는 추천석의 육신(肉身)에다 넣어 환생(還生)시킨다는 얘기, 즉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란 말까지 만들어낸 그 전설 말이다. 사람들은 이 문구를 ‘살아서 진천, 죽어서 용인’이라고 풀이한다. 진천의 산수(山水)가 그만큼 아름답고 살기에도 좋다는 뜻일 것이다.
▼ ‘장수 및 말 발자국’이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임장군이 이곳 세금천에 다리를 놓기 위해 큰 바위를 메고 말을 탄 채로 용고개(살고개)를 내려오고 있었단다. 그런데 메고 있던 돌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탓에 말의 발이 바위에 푹 빠지면서 발자국을 남겼다는 것이다. 말이 움직이지 못하자 임장군이 말에서 뛰어 내렸는데, 이로 인해 발자국이 하나 더 생겼단다. 이번에는 임장군의 발자국이다. 여기서 임장군은 임연장군을 말하는 것일 게다. 농다리에 얽힌 전설 중의 하나가 ‘임연장군 축조설(築造說)’이니까 말이다.
▼ 쉼터의 바로 위에서 임도(이정표 : 초평저수지← 200m, 하늘다리 1.1Km/ 천년정→ 100m/ 농다리↓ 100m)를 만난다. 오른편은 천년정에서 올라오는 길, 농암정이나 초평저수지로 가려면 왼편으로 난 임도를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 잠시 후 또 다른 갈림길(이정표 : 농암정← 230m/ 초평저수지↑ 150m, 하늘다리 1Km/ 밤나무 숲↓ 2Km)을 만난다. 어디로 가야할 지를 놓고 고민이 시작된다. 농다리 인근의 또 다른 명물인 하늘다리로 가려면 직진을 해야 하는데, 주어진 시간 안에 다녀오기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억지로 다녀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달리다시피 걸어야 하는 건 불가피하다. 평소에 달리기로 단련된 몸이니 그것도 괜찮다고 치자. 하지만 오늘 같은 뙤약볕 아래에서 달린 다는 것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는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느긋이 걸어서 다녀온 다른 일행들을 기다리느라 30분 가까이나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을 지키느라 보고 싶은 곳을 포기한 내가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주위의 눈치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들이 현명한 것이지 도대체 모르겠다.
▼ 농암정으로 향한다. 숲은 깊지 않으나 제철 만났다고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요란스럽다.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여름철이 무르익었나 보다. 아무튼 농암정으로 오르는 길은 조금 가파르다. 하지만 나무 사이로 보이는 세금천의 풍경을 기웃거리다보면 힘든 것쯤은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 주변 풍광을 즐기며 오르다보면 어느새 꼭대기에 올라서게 된다. 시야가 확 트이니 가슴까지 후련해진다. 거기다 시원한 바람까지 살랑거린다. 여간 상큼한 게 아니다. 이런 재미가 있어 사람들은 부득부득 위를 향해 오르나 보다. 오래 닫혔던 문을 열어젖히듯 가슴을 활짝 연다. 그리고 쌓였던 근심과 잡념을 훌훌 털어버린다. 맨 꼭대기에는 ‘농암정(蘢岩亭)’이란 정자를 지어 놓았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주변 풍광을 즐기라는 배려일 것이다. ‘높이 오르는 새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 정상에는 정자 외에도 벤치와 식탁까지 마련해 두었다. 탐방객들을 배려하는 진천군청의 마음 씀씀이가 돋보이는 순간이다.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정비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햇빛을 가려줄 변변한 나무 한 그루 없다는 것이다.
▼ 정자에 오르면 일망무제로 시야가 열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축제행사장’에 늘어선 몽골텐트들이다. 꿈틀거리며 세심천을 건너고 있는 지네 한 마리도 보인다. 농다리이다. 멀리 떨어진 탓인지 다리를 건너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점으로 나타난다. 흡사 돌 위에 새겨진 흔적처럼 또렷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다리를 건너며 크고 작은 흔적들을 남겼을까.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늘 무언가 남기며 살아간다.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하며 살아가야할 일이다.
▼ 반대편에는 초평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저수지를 만들기 전에는 농다리를 건너 대처로 오가던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었을 것이다. 호수 한가운데 황소처럼 길게 누운 ‘반도(半島)’에 오래 눈길이 간다. 멀지 않은 두타산에서 바라보면 국내에서 가장 완벽한 모습의 한반도 지형이라고 한다. 만주벌과 제주도 형상까지 있다니 한번쯤 보고 싶기도 하다.
▼ 정자에서 귀한 손님을 만났다. 참새로 보이는 새가 날지를 못하고 난간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생거진천(生居鎭川)'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 진천은 토지가 비옥하고 물이 좋은 곳이다. 그러니 땅에서 나는 쌀도 기름질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 새는 몸이 허약해 날지를 못하는 것은 아닐 게다. 덜 여물었음이 분명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집사람이 고이 모셔 숲속에다 놓아드린다. 튼튼하게 잘 자라나라면서...
▼ 초평저수지로 향한다. 광복 이후 축조했고, 1985년에 증설했다는 초평호는 국내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담수량을 자랑한다. 상공에서 보면 용(龍)이 한반도를 등에 업고 두타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여의주를 찾아 승천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곳곳에 명소가 숨어 있는 이곳은 얼음낚시와 붕어낚시터로도 유명하다. 내려가는 길은 침목(枕木(으로 계단을 놓았다. 계단이 만들어내는 곡선이 무척 아름답게 보이는 길이다.
▼ 계단을 내려서면 호숫가에서 야외음악당을 만난다. ‘현대모비스 야외음악당’이라는데, 호수가 시야 가득 들어오는 곳에 지어져 있다. 외관이 산뜻한 것을 보니 최근에 현대모비스로부터 기증을 받은 모양이다. 이번(2015년) 축제기간 동안에 이곳에서는 다양한 어쿠스틱(acoustic : 전자장치를 쓰지 않는) 음악들이 ‘그린뮤직’을 테마로 진행한다고 한다. 아름다운 초평호를 바라보며 차분히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나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과연 그 느낌은 어떨지가 궁금해진다. 그렇다고 내일 다시 와볼 수는 없는 일,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참고로 이번 축제 기간에는 일본인 피아니스트 유이치 와타나베, 가수 유익종, 재즈피아니스트 임인건 콰르텟(quartet : 사중주단), 가수 장필순 등이 출연한다고 한다.
▼ 음악당의 위는 갈림길(이정표 : 하늘다리→ 1Km/ 농다리← 350m/ 임도↑)이다. ‘하늘다리’라는 지명이 나타나 있는 이정표를 보며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셔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농다리를 향해 걸음을 옮길 수밖에...
▼ 잠시 후 성황당이 나온다. 떡갈나무에 감아 놓은 오색천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용고개 또는 살고개라고 부르는 이곳에는 시주를 거절한 마을 사람들과 그를 보복한 스님의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가난한 시절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에 가슴에 돌 하나가 얹힌다. 비극으로 끝나는 전설에서, 나무 아래에 쌓아 놓은 수많은 돌에서 이름 없는 백성들의 간절한 염원을 본다.
▼ 되돌아 나오는 길에 바라보이는 농다리의 모양새가 자못 괴이하다. 숱한 발이 달린 지네가 꿈틀거리며 내를 건너는 형국인 것이다. 이 다리를 ‘자줏빛 지네’라 부른다더니, 언뜻 봐도 실감 나는 표현이다. 누군가는 농다리가 물을 건너는 거대한 지네처럼 보이는 원인을 양쪽으로 튀어나온 교각으로 들었다. 자연석을 축대 쌓듯 안으로 물려가며 쌓아올린 교각이 그 위에 올린 상판보다 넓어 지네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아무튼 지네는 여전히 꿈틀거리며 물을 건너고, 그 위로 저만치 고속도로가 보인다. 쌩쌩 소리를 내며 달리는 자동차들과 긴 세월을 삼키고서도 조용한 다리가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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