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544)

DMZ 평화의길 1코스(강화평화전망대-문수산성 남문)

 

여행일 : ‘24. 12. 7()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송해면·강화읍 및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일원

여행코스 : 강화평화전망대고려천도공원연미정6.25참전용사 기념공원()강화대교문수산성 남문(거리/시간 : 15.6km, 실제는 17.01km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 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강화평화전망대(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88올림픽도로로 김포까지 온 다음, ‘국도 48호선으로 갈아타고 강화대교를 건넌다. 신당교차로(송해면 솔정)에서 빠져나와 전망대로를 타고 8km쯤 올라가면 강화평화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지난 9 28일 개통한 ‘DMZ 평화의 길(이하 평화의길‘)’은 인천 강화군부터 강원도 고성군까지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길이다. 510에 이르는 횡단 노선은 2개 광역 시·도에 10개 기초자치단체를 지난다.

 강화평화전망대에서 강화도의 동쪽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다 )강화대교를 건너 문수산성 남문 앞에서 종료되는 15.6km의 여정이다. 휴전선에 해당하는 한강하구 중립수역과 북녘 땅 조망과 함께 조선시대 한성 방어의 최전선이었던 강화도의 군사 유적을 둘러볼 수 있다. 하나 더. 군사분계선이 인접해 있어 신분증 지참은 필수다.

 평화의길 안내도는 남북1.8평화센터 앞 소형차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16.9km의 거리인데 5시간30분이 걸린단다. ! 서해랑길(103코스) 안내도도 눈에 띈다. 이곳 강화 평화전망대가 서해랑길의 종점이자 평화의길의 시점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9 : 18. 먼저 평화전망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초입, 국제구호개발 NGO ‘World Share’에서 무료급식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한 끼 100원이면 충분한데도 지구 곳곳의 많은 어린이가 굶주리고 있단다. 공감이 가기에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넣어드릴까 해서 모금함을 찾아봤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카드를 내놓으며 서명부터 해달라는 것이 정기적인 참여를 권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월 급여의 101에 가까운 금액을 국제구호단체 두엇에 정기적으로 기부해오고 있기에 정중히 사양하고 자리를 떴다.

 09 : 24.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을 위한 곳으로 평화통일의 기원을 담았다. 1~3층에 전시관과 전망대 통일염원소 등이 만들어져 있다. 지하1층과 지상 4층은 군사시설로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한다. ! 입장료로 2,500원을 받고 있었다. 연중무휴이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단다.

 전시실 풍경. 강화도와 국방, 끝나지 않은 전쟁, 통일로 가는 길 등의 구성으로 남북한의 상황과 통일에 대한 열망, 그리고 통일 후의 비전을 제시한다.

 도전과 저항으로 점철된 강화의 역사도 시대별로 전해준다.

 북한 주민들의 의식주와 생활상도 살짝 엿볼 수 있다.

 3층에 있는 실내전망대. 고성능 망원경으로 북한의 산하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흐린 날씨에도 영상을 통해 북한 전경을 볼 수 있도록 스크린 시설이 되어 있었다.

 야외는 작은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기념비 몇 개를 세우고, 그 옆에 해병대 상륙돌격장갑차를 전시해놓았다.

 가장 높은 곳은 제적봉(制赤峰)’의 정상석이 차지했다. 당초 애기봉을 제적봉으로 명명하려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애기봉 전설을 듣고 원래의 이름을 유지하라 했다나? 덕분에 이 봉우리가 제적봉이 되었다고 한다.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는 임진왜란 때 연안부사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이 이끄는 황해도 의병이 연안성에서 흑전장정의 3천여 왜적과 싸워 크게 이긴 내용을 담았다. 원래의 비는 횡정리(연백군 용봉면)에 있으나, 미수복지역인 관계로 연백군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망향과 통일의 기원을 담아 1983년에 세웠다고 한다. 양사면 인화리에 있던 것을 1997년 고향 땅이 보이는 이곳 평화전망대로 옮겨왔다. 옆 빗돌의 주인공은 편강열 의사(片康烈 義士)’.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만주에서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의성단을 조직, 장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는 등 항일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얻은 척수염으로 1929 3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평화전망대 건물 뒤, 야외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 북한까지의 직선거리는 2.3km. 얼마나 가까운지 소리치면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 손을 흔들어 줄 것 같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빌며 북한 땅, 동포들의 고된 생활상을 가슴에 담아보자.

 해마다 음력 10월 상달을 전후해 실향민과 가족들이 모여 망향제를 연다고 했다. 6.25 전쟁 종료와 함께 시작된 전통행사로, 1년 중 조상에게 햇곡식을 바치기 가장 좋은 시기인 10월 상달에 열어오고 있단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도 눈에 띈다. 강화도가 고향인 한상억, 최영섭이 만들었다는데, 유명 성악가가 부른 노래를 들어 볼 수도 있다.

 건너편 삼달리(황해북도 개풍군 대성면)까지는 2.3km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망원경까지 비치해 북한 땅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북한의 주택, 마을회관, 학교, 선전용 위장마을 등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특히 다른 지역의 전망대들과는 달리 북한주민들이 농사짓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날씨가 좋아야 하겠지만.

 다른 분의 시선도 빌려보자. <정말 가깝다. 소리치면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 손을 흔들어 줄 것 같다. 해안가를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우측으로 개성공단,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경계로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신시가지까지 확인할 수 있다. 좌측으론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와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다.>

 무궁화동산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던가? 나라꽃인 무궁화의 품종이 이렇게나 많은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긴 몽땅숲협동조합에서는 이원화립·일노환·치구·적일중·하보마 같은 생소한 이름으로도 모자라 꽁트드에몽·토투스알부스·다이어나·블루버드·레드하트·헬렌·도로시크레인·하이리테드 같은 외국어로 된 품종까지 선보이고 있었지만.

 09 : 40. ‘남북1.8평화센터(남한과 북한 사이의 가장 가까운 거리인 1.8km를 모티브로 삼았다)’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때 조강(祖江)과 조강으로 인해 돌출된 철곶(鐵串)이 조망된다. 하나 더. 강화도의 북쪽 해안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던 민통선 지역이었다. 그래선지 우리나라 영토임에도 군인들이 서 있는 검문소를 지날 때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잊을만하면 이정표가 얼굴을 내밀어 걷기여행자들의 길벗이 되어 준다.

 그래도 못 미더웠던지 곳곳에서 평화의길 리본이 팔랑인다.

 평화의길은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과 대부분 중복된다. 이곳 강화도에서 동해안의 고성까지 자전거와 인간이 사이좋게 간다고 보면 되겠다.

 09 : 48. 첫 만남은 철곶 마을. 제적봉에 걸터앉은 평화전망대가 마을 뒤에서 고개를 내민다. 참로고 철곶은 법정 동리인 철산리(鐵山里)’를 구성하는 3개의 자연부락(철곶·산이포·진말) 중 하나다. 조선시대 철곶보(鐵串堡)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강화도는 5(), 7(), 8포대(砲臺), 54돈대(墩臺)를 두어 톱니바퀴처럼 섬 전체를 감싸며 섬을 방어했다. 금성탕지(金城湯池)라고나 할까? 그렇게 강화는 한양을 지키는 제일선이자 수도 방어체제를 수행할 수 있는 보장처가 됐다.

 철곶마을 들녘 뒤로 조강(祖江)이 흘러간다. 그 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지나가고, 군사분계선 너머는 황해도 개풍군이다. 또한 저곳은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세 강물이 바닷물과 함께 흐른다. 하지만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실향민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물결에 파묻혀 말없이 흘러간다.

 전망대로(옛 이름은 制赤大路’)는 철산고개를 넘는다. 철산리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자연부락 철곶과 산이포의 경계에 놓인 고갯마루쯤으로 보면 되겠다.

 고개를 내려서면 철산리 입구(이정표 : 강화대교 12.94km/ 평화전망대 0.91km).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철산리(鐵山里)는 대부분 평지로 이뤄져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철곶보가 있던 철곶(鐵串)과 포구마을인 산이포(山伊浦)를 합해 철산리가 됐다.

 뒤돌아본 철산고개. 도로 왼쪽에 산이포(山伊浦)’마을이 꽤 크게 형성되어 있다. 하나 더. 이곳 철산리는 북한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고 했다. 조강(祖江)을 사이에 둔 철산리 산이포와 북녘 땅 해창포(황해도 개풍군)는 직선거리로 1.8km에 불과하단다.

 전망대로를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꽤 너른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09 : 59. 철산삼거리. 양사면사무소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으로, ‘교산리 고인돌군이나 교산교회와도 연결된다. 강화 최초로 설립된 개신교 교회로 선상세례의 일화를 간직한 교회다. 이승환 모자가 선교사의 배까지 찾아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강화 땅에 기독교의 뿌리가 내리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삼거리 근처에 산이포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산이포(山伊浦)는 철산리 동남쪽 바닷가에 있던 포구다. 6.25 이전까지 700여 가구가 모여 살던 강화에서 가장 번화했던 포구로 알려진다. 서울과 북한을 오가던 배들의 정박지였고, 삼남 지방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물자가 한강을 따라 서울로, 예성강을 따라 개성으로 올라갈 때 물때를 기다리며 머물던 포구였다. 오일장이 열리면 황해도 연백 사람들까지 모일 만큼 북적였다고 한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철조망이 쳐졌고 주민들은 강제 이주 당했다. ‘널다리돈대(’석우돈대 판교돈대로도 불린다)’까지 있었다는 마을은 그렇게 사라졌다. 돈대가 있던 자리는 현재 대북 방송용 확성기가 들어서있다고 한다. 문화재 보호보다 안보가 더 우선시되던 시대의 유산이다. 안내판의 <그리움은 늙지 않아요. 뜨거운 눈시울 날이 새어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요. 우리>라는 문구가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10 : 05. 잠시 후 석우교차로(이정표 : 12.2km/ 평화전망대 1.65km)’에 이른다. 강화대교와 강화읍으로 가는 도로가 좌우로 나뉘는 지점으로, ‘평화의길은 바닷가를 따라 난 2차선 도로를 따른다. 접근은 물론이고 사진촬영까지 금지한다는 날선 경고 문구에 살짝 쫄게 되는 구간이다.

 평화의길은 이제 해안을 따라 설치된 철책 앞에서 분단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차선이 둘이나 되는 널찍한 도로도 텅 비어있었다. 농로에까지 주어지는 그 흔한 도로명도 붙어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가끔이었지만 차량들이 오갔기 때문이다. 연미정 부근에 군의 초소가 있는 걸로 보아 지역 주민들에게만 통행이 허용되는지도 모르겠다.

 탐방로는 도로변에 따로 내놓았다. 그 바닥에 평화누리길의 방향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어느 독일 여행자는 자서전에서 곳곳에 그려놓은 방향표시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적고 있었다. 국내의 걷기 길에서도 만나보기를 학수고대 해 왔었는데, 오늘에야 그 원을 풀었나보다.

 평화의길은 진록과 연록으로 진행 방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정방향이 진록으로 보이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왼쪽 군의 순찰통로는 방조제를 따라 쳐놓은 모양이다. 도로 오른쪽에 배수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게 또 물억새와 갈대로 뒤덮이면서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다니는 차량이 아무리 적어도 도로는 도로인 모양이다. 과속을 단속중이니 알아서 속도를 줄이란다.

 뒤돌아본 풍경. 석우교차로에서 시작된 길은 고려천도공원까지 일직선으로 뻗어나간다. 하나 더. 저 철책 너머에서는 남과 북, 바다와 강이 하나로 만난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임진강과 한강이 한데 어우러져 다시 서해와 염하(鹽河)로 흘러 들어간다. 옛날엔 자연의 산물과 사람이 사시사철 모여들던 물길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1953년 정전협정을 하면서 땅에도 바다에도 철책이 둘러쳐졌다. 마을에 진동하던 생선 비린내도 지워졌다.

 10 : 25.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고려천도공원(이정표 : 강화대교 10.5km/ 평화전망대 3.35km)’에 이른다. 민통선 안보 관광코스 조성사업의 하나로 송해면 당산리에 만들어놓은 역사 테마공원이다. 강화천도는 고려-몽골 전쟁 때 항전하기 위해 고려 고종이 1232년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일이다. 이후 38년간 고려의 임시수도였던 강화도의 역사를 천도문을 시작으로 고종사적비까지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다.

 고려 만월대의 출입문을 형상화 한 천도문을 들어서면 대몽항쟁을 위해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팔만대장경과 상정고금예문 등에 대한 자료와 강화도에 흩어져 있는 역사문화 유적지들도 소개해준다. 정자 및 전통연못, 폭포 등이 있어 여유롭게 산책과 휴식하기에도 좋다.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새긴 팔만대장경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를 형상화 한 7미터짜리 철제조형물로 만들어놓았다. 승천포(휴전이 되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큰 포구이다)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온 고종은 대몽항쟁을 이어간다. 하지만 항복에 가까운 화해를 하고 개경으로 돌아간다. 이에 불복한 삼별초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항쟁을 이어갔고, 그런 역사도 조형물 뒤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맨 안쪽은 고려고종사적비 차지다. 강화해협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조류가 빨라 기병 중심이던 몽골군에 맞서 저항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몽골군에 쫒긴 고종은 이곳 승천포를 통해 강화에 들어왔고(그래선지 배 모양의 전망대도 만들어놓았다), 임시수도로 삼아 39년을 머물면서 팔만대장경과 같은 국가 유산을 남기는 등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다.

 10 : 32.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가도 가도 똑같은 길을 계속 걸었다. 흙길이 아닌 포장된 길을 오래 걷다보니 발바닥과 발목이 아파온다.

 왼쪽은 철책의 연속이다. 지루해지기 딱 좋은 풍경인데,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들녘 풍경이 그나마 해방감을 준다. 뒤로 보이는 산은 고려산과 혈구산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데다 다양한 생태계를 갖춰 새들이 서식하기에 최적의 환경으로 알려진다. 탐조가들 사이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탐조 여행지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이곳 강화도도 그중 하나라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들녘이 온통 철새들 천지다.

 11 : 02. 송해면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어느덧 강화읍(대산리)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송릉천(이정표 : 문수산성 남문 7.9km/ 평화전망대 7.7km)이라는 작은 하천을 스치듯 지나간다. ! 이즈음에서 도로명이 해안북로라는 이름으로 뜨고 있었다. 도로변에는 버스승강장도 만들어놓았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주어진 건가?

 11 : 22. 강화읍으로 들어선 탐방로는 돌모루 고개를 넘어 월곳리로 내려간다. 잠시지만 이때 바닷가를 떠나기도 한다.

 10분 남짓 더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돈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연미정이 얼굴을 내민다. 마을 끝에 왕릉처럼 솟아오른 곳이 월곶돈대(月串墩臺), 그 위에 올라앉은 정자가 연미정(燕尾亭)이다.

 11 : 42. 관광안내소를 지나자 월곶 돈대 앞에 커다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장무공 황형장군 택지비’. 이곳이 조선 중기 무신이었던 황형(黃衡, 1459-1520)의 옛 집터(향토유적 3)라는 것이다. 황형은 삼포왜란(중종 5) 때 왜적을 무찔렀고, 중종 7년에는 함경도 지방에서 야인의 반란을 진압했다. 왕이 그 업적을 찬양하여 연미정을 하사했단다.

 연미정은 임시완, 임윤아, 홍종현 주연의 MBC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의 촬영지라고 한다. 고려 충렬왕으로부터 충선왕 대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아름다우면서 슬픈 우정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인데, 이곳에서 이별 장면이라도 찍었나 보다.

 아치형 암문(暗門)을 들어서자 느티나무(540년 된 보호수란다) 그늘 아래 연미정(燕尾亭)이 앉아있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아름답다. 하긴 강화10경 중 하나로 꼽혔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하지만 저곳은 인조 5(1627) 정묘호란 때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참고로 연미정이란 정자 아래로 한강과 임진강 물이 합쳐졌다가 한 줄기가 서해로 흘러들고 또 한 줄기가 김포와 강화를 가르는 염하(鹽河)로 흘러드는 모습이 마치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하지만 나무는 죽어서 그루터기를 남기나 보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링링 그날의 상처라는 브랜드로 포장까지 해놓았다. 맞다. 누군가의 전환의 발상이 있었기에 저런 볼거리가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연미정이 있는 월곶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이다. 그곳에 김포반도가 한 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작은 섬 유도(留島)’가 있다. 지금은 무인도이지만 한국전쟁 이전에는 농가 2가구가 거주했고, 주막과 선착장까지 있었다고 한다. 홍수가 났을 때 북한에서 소 한 마리가 떠내려 와 우리 군인이 구출했던 인연으로 평화의 소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재밌는 일화도 전해진다.

 북한 땅도 조망된다. 개풍군의 신흥리와 령정리, 해평리라고 한다. 크게 소리치면 손짓이라도 보내올 만큼 지척이지만 우리에겐 너무나도 먼 거리로 인식된다. 하지만 예성강과 임진강, 한강은 연미정 앞에서 하나가 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서해로 흘러간다. 우리 민족의 철조망에 갇힌 역사를 아프게 갈무리하면서.

 11 : 57. 강화팔경의 하나인 연미정의 비경을 맘껏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때 가야할 나들길과 함께 조해루가 발아래로 펼쳐진다. 저 대문을 나서면 월곶진일 게다. 예전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가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리다 물때에 맞춰 한강으로 들어갔다는 곳. 뱃사람들의 사랑방이다.

 조해루(朝海樓)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강화 외성(江華 外城)’의 문루 중 하나로 강화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검문(옛날 이곳은 남으로 염하, 북으로는 조강을 통해 서해로 진출하는 해상로의 요충지였다)하는 초소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참고로 강화외성(사적 452)은 몽골군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고종(고려 23대 왕) 1233년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적북돈대에서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축조한 성이다. 성에는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루·진해루·참경루·공조루·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했단다.

 평화누리길과 함께 사이좋게 달려온 평화의길은 이제 강화나들길이라는 친구를 하나 더 보태서 이어간다.

 이후로도 길은 겹겹의 철책이 드리워진 바닷가를 따라간다. 철책 외에는 볼거리가 없으니 지루할 것은 당연하다. 그게 싫다면 연미정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된다. 나고 드는 게 자유로워 나들길이라는 강화 걷기에 시작과 끝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드넓게 펼쳐지는 들녘과 이를 받쳐주고 있는 고려산과 혈구산을 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12 : 34. 연미정을 출발한지 40. 테니스장이 들어선 작은 고갯마루를 넘는다. ‘제승돈대(制勝墩臺)’가 있었다는 부새산을 절단해가며 도로를 내놓은 모양이다. ! 중간에 강화나들길이 갈려나가기도 했었다. 도로를 벗어나 들녘의 둑길과 야산의 숲길을 걷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안내판은 이 어림을 한강하구 습지보호지역으로 적고 있었다.

 고갯마루를 넘자 국궁장과 대산기계공업이 연이어 나온다. 아까 헤어졌던 강화나들길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도 한다.

 12 : 43. 몇 걸음 더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에는 접경지역의 특성을 살린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있던 자리(강화읍 용정리)에 그들의 뜻을 기린다는 명분으로 조성했단다. 국난극복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호국충절의 고장이자 호국보훈 성지인 강화군의 지리적 여건에 걸맞는 시설이라고나 할까?

 상단은 공원의 주인공인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자리한다. 그밖에도 강화특공대의적불망비와 한반도를 형상화한 조형물 등을 설치해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하단에는 6.25 전쟁 때 자유와 평화를 위해 우리나라에 병력을 지원해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6개국의 참전 규모 등을 상세히 적은 안내판을 설치하여 6.25 전쟁의 실상을 모르는 청소년들에게 안보교육 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경계용 울타리도 버려두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광복과 혼란기, 참담했던 6·25전쟁, 정전협상 등 다사다난했던 역사를 사진 벽화로 만들어 분단의 현실을 담았다.

 공원을 빠져나오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강화대교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12 : 58. 강화대교 아래를 지난다. 한옥의 아름다운 곡선미를 강조한 아치가 눈길을 끄는 강화도의 관문이다.

 옛날 이곳에는 갑곶나루가 있었다. 세종 원년 박신이라는 사람이 사재를 털어 14년간의 공사 끝에 석축로를 완성했고, 이후 500년간 나루의 기능을 수행해왔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인조가 이곳을 통해 강화도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교통수단의 변화로 1920년 기능을 잃었고, 1970년에는 강화대교가 놓이면서 완전히 폐쇄됐다.

 평화의길은 강화대교 아래서 갑곶순교성지로 들어간다.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된 우윤집·최순복·박상손 등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천주교(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에서 그들이 처형된 갑곶 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 매입하고, 지금의 순교성지를 조성했다. 성지는 순교자묘역과 박순집의 묘, 예배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예수님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진해루(鎭海樓)’가 길손을 맞는다. ‘강화외성 6개 문루 중 하나로, 염하를 건너와 갑곶나루에서 내린 사람들이 강화읍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문을 통과해야만 했단다. 강화도의 관문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저 문루는 최근에야 복원되었다. 완전히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세기 말 제작한 지도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성문 밖으로 나가자 김포반도를 향해 두 개의 다리가 뻗어나간다. 왼쪽은 1997년 개통된 신() 강화대교(길이 780m)로 갑곳리(甲串里, 강화읍)와 포내리(浦內里, 김포시 월곶면)를 연결한다. 그리고 오른편은 1970년 개통되어 27년 동안 강화도를 육지와 연결시켜주던 구() 강화대교이다. 그 임무를 새로운 다리에 넘겨주고 지금은 보행교로 남아있다.

 진해루 앞 광장에는 통제영학당(인천시 기념물 49)’이 있었다고 한다. 통제영학당은 조선 고종 30(1893)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사관생도 38명과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한 통제영은 영국 장교들까지 교관으로 부임시켰으나,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교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 1896년 영국군 교관들이 귀국하면서 학교도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당시 사용하던 우물만이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13 : 06.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하나의 너른 광장이 나온다. 공터의 뒤는 갑곶성지’. 성지로 오르는 길목에는 하얀 예수님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계신다. 쇄국정책과 종교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이 품었을 전교에 대한 염원을 내륙에 전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통로는 계단을 없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만들기의 일환일 것이다.

 통로는 갑곶 순교성지로 이어진다. 가장 높은 곳은 갑곶진두(나루터)에서 처형된 순교자 세 분을 기리는 순교자 삼위비 차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해역에 미국 군함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탄 사건의 책임을 물어 통상을 요구했다.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면서 군사 충돌이 빚어졌고, 고종은 이를 빌미로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를 박해했다. 그 결과 제물진두(현재 화수동성당 주변)에서 여섯 분이, 이곳 갑곶진두에서는 세 분이 순교했다.

 광장의 오른쪽 끝은 기도하는 예수상이 자리 잡았다. 그 앞에는 장궤틀(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는 틀)을 놓았다. 예수님을 마주보도록 해놓은 것은, 그만큼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13 : 14. 순교성지를 빠져나오면 )강화대교. 1970년에 개통된 이 다리는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로서는 경남 충무교와 전남 완도교에 이어 국내 3번째라고 한다. 1997년 새로운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폐쇄되었으나 다리가 평화누리자전거길로 활용되면서 낮 시간에 한해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인도교로 변한 강화대교를 이용해 염하(鹽河)를 건넌다. 길이 694m의 다리는 상판을 3등분 한 다음 가운데로만 걸을 수 있도록 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대형 배관이 양옆에서 따라온다.

 13 : 24. 강화대교 동단에는 평화의길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층으로 된 전망대도 눈에 띈다. 경비초소 등 군인들이 사용하던 옛 시설물들이 걷기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설로 탈바꿈했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강화의 동쪽 바다가 그 속살을 드러낸다. ‘염하(鹽河)’라고 흔히 불리는 강화해협은 한양으로 들어서는 중요 물길이었다. 그래서  ’, 그리고 돈대가 촘촘하게 들어서서 바다를 지켰다.

 평화의길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강화대교의 아래를 지난다.

 강화나들길과 헤어진 평화의길은 이곳에서 경기둘레길이라는 새로운 친구를 만난다. 평화누리길 이정표(문수산성 남문 0.5km/ 대명항 13km)가 종점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고 알려준다.

 13 : 30. 다리를 횡단하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문수산성 남문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문수산성(文殊山城)은 강화도 방어를 위해 1694(숙종 20) 삼군문(三軍門)을 동원하여 쌓았다. 내륙으로부터 강화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다. 성에는 서·· 3개의 대문과 아문(亞門) 4개가 있는데, 이곳 희우루(喜雨樓)는 그중 남문이다. 1866(고종 3) 일어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성문에서의 조망도 일품이다. 소금 강 염하가 도도한 자태를 드러내는가 하면, 그 너머 더러미 포구에는 작은 어선들이 한가로이 떠있다. 지극히 평화로운 풍경이라고나 할까?

 13 : 40. 남문에서 내려오면 김포장례협동조합(문수산수목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2코스) 안내도는 장례조합 건물 뒤 산자락에 세워져 있다.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이 17.01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줬다. 나에게 집사람은 연인이자 친구다. 옥스퍼드대학의 '로빈 던바'교수는 한 개인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친구를 150명 남짓으로 봤다. 많을수록 좋겠지만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에게는 친구가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꿈쩍없이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부족함을 보충해주는 집사람이 항상 함께 해주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서해랑길 63코스(천북굴단지 - 궁리항)

 

여 행 일 : ‘24. 11. 9()

소 재 지 : 충남 보령시 천북면 및 홍성군 서부면 일원

여행코스 : 천북굴단지홍성방조제모산도공원남당항남당노을전망대어사항속동해안공원궁리항(거리/시간 : 11.2km, 실제는 13.33km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3코스를 걷는다. 8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마지막 코스이기도 한데, 홍성군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2(전체 5), 수월한 코스로 분류된다.

 

 들머리는 천북굴단지 광장(충남 보령시 천북면 장은리)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IC에서 내려와 갈산면소재지(상촌리)로 들어온다. 갈산교차로에서 와룡로(남당리방면)를 타고 4km, 이호삼거리에서 40번 국도(남당·천북방면)로 옮겨 12km쯤 내려오면 천북굴단지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홍성 63코스) 안내도는 굴단지광장에 설치되어 있다.

 천북굴단지에서 홍성군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궁리항까지 가는 11.2km짜리 여정으로, 남당항, 노을전망대, 홍성타워 등 곳곳에 볼거리가 널려있다. 도중에 들르는 포구에서 맛볼 수 있는 싱싱한 생선회는 여행의 또 다른 재미, 특히 어사항에서 구한 칠게 튀김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광장은 지난주에 끝난 굴 축제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놓고 있었다. 천북면 지역에서 생산되는 굴의 뛰어난 맛을 전국에 알리기 위해 지난 2001년부터 열어온 축제이다. 굴은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수확하는 것을 최고로 치는데, 출하 초기에 맞추어 축제를 연다고 보면 되겠다.

 천북항. 며칠 전, KBS-2TV ‘생생정보통에서 이곳 천북굴단지가 소개됐었다. 어부는 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고, 그물망에 가득 든 튼실한 굴을 건져내며 웃음꽃을 활짝 피웠었다. 하나 더. 새벽이면 굴세척과 선별작업으로 분주한 이색적인 풍경과도 마주할 수 있단다.

 10 : 23. 홍성방조제를 따라 북진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둑 위로 국도 40호선(홍보로)이 지나간다. 도로 양옆으로 인도를 따로 내놓았음은 물론이다.

 천수만은 천북면 어민들의 보물 창고다. ‘바다의 보석이라는 석화(石花)를 무럭무럭 키워내니 말이다. 서해의 갯벌과 만나 찬바람을 맞으며 자란 천북 굴은 탁월한 품질을 자랑한단다. 식감이 쫄깃쫄깃하고 향이 강해 보령 9미 중 하나로 꼽힌다.

 오른쪽은 방조제를 막으면서 생긴 홍성호이다. 풍광이 뛰어난데다 붕어나 잉어의 입질이 좋아 낚시꾼들이 발길이 잦은 곳이다. 반면에 버려진 쓰레기와 불법어구로 인해 환경오염이라는 몸살을 앓고 있지만.

 10 : 34. 홍성에서의 첫 만남은 수룡항이다. 포구에는 해양경찰의 수룡동파출소도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수룡동마을은 홍성호의 안쪽 깊숙이에 있다. 그러니 홍성방조제로 인해 바닷길이 끊긴 어민들을 위해 새로 조성한 항구일 것이다.

 이어서 홍성교를 건넌다. 홍성방조제는 모산도를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다. 배수갑문은 그중 남쪽 방조제의 북단에 위치한다. 그 배수갑문에 놓인 다리가 홍성교이다.

 10 : 40. 서해랑길에서 살짝 비켜나있지만 모산도(茅山島)’의 꼭대기에 올라가보기로 했다. 조망의 명소이니 꼭 들러보라던 지인의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너스로 홍성방조제준공탑도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홍성교에서 150m쯤 북진하다보면, 도로변에 쳐놓은 철책을 1m쯤 띄운 다음 사철나무 숲 사이로 길을 만들어놓았다.

 10 : 43. 지인의 말대로 산마루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그만큼 조망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이곳은 모산도(茅山島), 이름처럼 산으로 이루어졌고 이곳은 그 꼭대기다. 하지만 고도계는 기껏 42m를 찍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주위가 제로 레벨이어서 사방으로 시야가 툭 트이는 것이다.

 방조제 끝에는 최근 핫 플레이스로 뜨고 있다는 천북 굴단지가 놓여있다. 이를 가운데 두고 홍성호와 천수만이 한꺼번에 펼쳐진다.

 홍성호는 금리천(錦里川)의 하구역에 둑을 쌓아 만든 담수호이다. 아름다운 호수로 입소문을 탔지만 아쉽게도 역광이 망쳐버렸다. 참고로 금리천은 은하면(홍성군) 장곡리에서 발원 금국리·학산리·금곡리(결성면)를 지나 성남리에서 서해로 합류하는 길이 7.2km의 지방하천이다.

 방조제준공탑’. 1991-2001, 보령·홍성지구 대단위 농업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보령방조제와 홍성방조제를 쌓았다. 이로 인해 만들어진 인공호수가 보령호와 홍성호이다. 이곳이 홍성인데도 보령·홍성방조제준공탑인 이유다. ! 옆에 풍력발전기도 세워져 있었으나 얘깃거리가 없어 생략했다.

 진입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김자 결성현감 승전지비(金滋 結城縣監 勝戰址碑)’를 만났다. 이곳 모산도(혹은 모산포)는 왜구의 노략질이 잦은 곳이었단다. 빗돌은 조선 태종 8(1408) 결성현감 김자가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빗돌에 적힌 결성현은 지금의 홍성군 결성면이다. ‘홍성이라는 지명은 홍주와 결성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10 : 51. 다시 만난 국도.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간다. 바닷가를 따라 모산도공원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널찍한 주차장 앞 솔숲에 쉼터 겸 정자가 놓여 있고, 나뭇가지 사이로 바다가 아른거린다. 예전 이곳은 모산도(茅山島)’라는 섬이었다. 금리천이 황해와 만나는 지점에 방조제를 쌓으면서 육지가 되었다.

 공원에서의 조망도 빼어난 편이다. 천북굴단지에서 남당항까지 천수만의 너른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천북이 굴 구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졌다면, 반대편에 위치한 남당항(사진)은 대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10 : 54.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홍성호의 북쪽 방조제이다. 홍성방조제는 남·북 방조제를 합칠 경우 1,856m나 된다. 올망졸망한 섬들로 수놓인 천수만이 없었더라면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긴 방조제다.

 천수만은 세계적 철새 도래지이다. 기러기·독수리 등 다양한 철새들이 찾아오는 중요한 생태적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저 고니(?) 무리는 그중 선발대일까?

 11 : 02. 홍성방조제는 북단에 있는 신리교차로에서 끝을 맺는다.

 홍성군은 이정표를 조금 다르게 운용하고 있었다. 종점과 시점을 중심으로 인근의 주요 지점을 끼워 넣던 다른 지자체들과는 달리, ·종점은 하단의 지도에만 표시하고 날개부분에는 주요 지점들을 적어 넣었다.

 이후부터는 남당항을 바라보며 간다. 도로는 홍보로에서 남당관광로로 바뀐다.

 이때 천수만에서 죽도가 떠오른다. 5년도 더 전에 다녀왔지만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한 섬이다. 이름처럼 대나무가 많았던 섬, 두 개의 섬이 육계사주(陸繫砂洲)로 연결되어 있던 섬이다. 당시 기억을 잠시 빌려보자. <전망대에 오르면 하늘이 반, 바다가 반이다. 높이에 비해 전망이 시원하다는 얘기다. 천수만에 동동 떠있는 죽도는 자신보다 작은 11개의 섬을 거느린다. 올망졸망 새끼 섬들이 부러운 듯 그리운 듯 죽도를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이다. 일부 섬은 물이 들고 남에 따라 가느다란 모래 띠로 이어졌다 끊어지기도 한단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한걸음 더 나가보자. 본섬의 서쪽에는 큰달섬과 작은달섬, 충태섬이 내려다보이고, 북쪽 방향으로 띠섬(모도), 멍대기(명덕도), 오가리(큰오가도와 작은오가도), 전재기(전도) 등이 늘어서 있다. , 남쪽 끝섬으로는 지마녀, 움마녀, 제일 북쪽 섬으로 꼬장마녀 등이 있다. 마녀의 뜻은 만조시간이 긴 섬이라는 의미이며, 꼬장은 끝장 , 제일 북쪽의 끝을 의미한단다.>

 시선을 조금 옮기면 육지의 맨 끝을 장식하고 있는 꽃섬이 눈에 들어온다. 지인으로부터 꼭 들러보라던 명소 중 하나이다.

 11 : 14. 작은 동네(‘소섬마을일 것이다)를 횡단하자 또 다시 바다가 나왔다. 왼쪽 끄트머리에 있는 꽃섬부터 일단 둘러보기로 했다.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빌던 당산(堂山)이었던 곳이다.

 당산이란 이름에 걸맞게 굵직한 팽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제단 등 제사를 지낸 흔적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탐방로는 이제 바닷가를 따라 북진한다. 물 빠진 갯가를 따라 걷는 해안길은 정면에 남당항을 놓고 길을 이어간다.

 왼쪽으로는 천수만이 드넓게 펼쳐진다. 천수만(淺水灣)은 안면도와 충청남도 해안선에 둘러싸인 만이다. 서산시·보령시·태안군·홍성군 등 4개 시군에 접하고 있으며 항구도 수십 개에 이른다.

 11 : 27. ‘남당항(南塘港)’에 이른다. 서부면 남당리에 있는 국가어항으로 남당이란 지명은 조선 영조 때 학자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이 낙향하여 이곳에 살게 되면서 그의 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송시열·권상하의 학통을 이어 정통 주자학을 계승·발전시켰으나, 변화하는 시대(당시는 실학자들의 사회개혁론이 제기되던 시기였다)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해양분수공원이다. 남당항의 거대한 광장 한가운데 음악과 분수쇼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바닥 분수와 형형색색 무지갯빛 조명이 설치되어 있다. 여름철이면 저곳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단다. 바닥분수에서 팡팡 뿜어져 나오는 시원한 물줄기를 흠뻑 맞은 아이들이 사방팔방 물총을 쏘아대며 물놀이를 즐긴단다.

 국내 최초의 해양형 네트 어드벤처라고 한다. 팡팡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면 두 눈에 천수만이 가득 담긴다나? 튀어 올라 가까운 죽도도 보고, 한 번 더 높이 튀어 오르면 저 너머의 안면도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안에서는 아이들 두엇이 탄탄한 그물네트를 발판삼아 통통 튀어 오르고 있었다. ‘위아래 위위아래 박자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신기롭기까지 했다.

 길은 방파제에 기대듯 내놓았다. 바닥을 형형색색의 꽃들로 채워 넣어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하지만 분수 주변에 있다는 트릭아트는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니 있는 줄도 몰랐다. 일류의 포토죤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I  NAMDANG’. 이렇게 공들여서 포구를 꾸몄으니 사랑받을 만도 하겠다.

 작은 광장도 눈에 띈다. 방파제에 잇댄 작은 공간을 만들었으나, 힘들게 만들었을 그 공간은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여행자들의 몫이 아닐까 싶다. 비우듯 채워져 있는 공간에서 문득 도()까지 떠올렸다면 나만의 오해일까?

 감각적인 멋이 뚝뚝 떨어지는 새조개 형상의 의자. 평생을 꽃띠로 살고자 하는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정박되어 있는 배는 별로 없지만, 남당항은 현제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지 어선이 70척 이상이어야 지정받을 수 있다니, 천수만에서 가장 큰 어항으로 보면 되겠다.

 홍성군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홍성 서해랑길 63코스 걷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남당항 분수공원에서 출발 5km를 왕복하는 행사인데, 반려견과 함께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참가자에게는 기념품까지 준다고 한다.

 길은 자연스레 남당항 수산시장으로 이어진다.

 상가는 횟집 일색이다. 활어회에 해물탕, 칼국수 등 메뉴도 다양하지만 새조개를 팔지 않는 집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하긴 새조개 축제까지 열리는 곳이니 어련하겠는가. 축제 때는 살이 통통하고 맛이 좋기로 이름난 천수만 새조개를 맛보러 전국 각지에서 미식가들이 몰려온단다.

 상가 앞 조형물.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상인 두엇이 담소를 나누다가 뭐처럼 생겼냐며 물어온다. ‘꽃게 발?’ ! 하며 도리질을 하는 그녀. 그리고는 남당항을 유명하게 만든 게 새조개 축제였다고 알려준다. 맞다. ‘남당항은 겨울 새조개 고장의 대명사로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10분 거리에 있는 죽도로 들어가는 여객선 선착장. 남당항에서 죽도까지는 40인승 홍주호가 하루 5회 왕복한다. ·일요일과 공휴일엔 오전 10시 한 차례 추가 운항하고, 죽도에서 나오는 마지막 배는 오후 5시다.

 11 : 43. 수산시장 뒤(이정표 : 종점까지 6.7km)에 이르면 남당항 구경은 끝난다. 활처럼 바다로 휘어나간 방파제 입구이기도 한데, 서해랑길은 또 다시 바닷가를 따라 북진한다. 고운 모래가 깔려있는 해안은 웬만한 해수욕장은 저리가라다.

 홍성에는 해수욕장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4년 전쯤 거친 돌부리만 가득했던 저곳에 많은 모래를 쏟아 부어 인공해변을 만들었단다. 모험이라 할 수 있는데 저렇게 모래가 유실되지 않고 남아있으니 성공한 셈이다. 오히려 바닷물이 드나든 자국까지 부드럽게 나있는 게 천연의 모래사장이 전혀 부럽지 않게 됐다.

 11 : 53. ’남당 노을전망대이다. 바다로 휘어진 길모퉁이에서 딱 그 모양대로 곡선을 그리며 돌출된 해상 전망대다. 금빛 모래사장 위로 붉은색 다리를 놓고 그 끄트머리에 전망대를 들어앉혔는데, 해질 무렵이면 천수만 바다와 물기 촉촉한 갯벌까지 한꺼번에 붉은 기운에 휩싸인다고 했다.

 옆에서 본 노을전망대. 길이 102m에 높이가 13m나 되는 다리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한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 있어 걸을라치면 마치 하늘과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바다 품은 작은 섬 그러나 천지가 선경인 섬, 죽도.  죽도 죽도록 사랑하란다. 맞다. 내가 기억하는 죽도는 사랑받기에 충분한 섬이었다. 참고로 죽도는 홍성군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일한 섬이다. 천수만(淺水灣)의 고요한 물결 위에 떠있 듯 자리한 본섬을 11개의 꼬맹이 섬들이 호위하는 모양새인데 그 자태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덕분에 낭만과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또 다른 기억을 소환해보자. 죽도는 눈을 들이대는 곳마다 세외선경이 펼쳐졌었다. 꾸며놓은 솜씨도 최고였다. 그중에서도 옹팡섬·동바지·담깨비 등의 조망대에서 만난 캐릭터들은 백미였다. 최영·한용운·김좌진 등 홍성이 낳은 인물들을 모셨다. 그중에서도 담깨비조망대에서 만난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일본군을 대파했던 청산리대첩의 주역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군이 아닌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했다. 나라보다 이념을 더 중요시하는 공산주의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확실한 이유일 것이다.

 전망대를 빠져나와 다시 북진한다. 어느 기자는 이 구간을 임해관광도로로 적고 있었다. 그래선지 뷰가 좋은 카페나 음식점이 유난히도 많이 눈에 띈다. 이 구간 어디서나 천수만 바다와 그 너머 안면도가 눈에 쏙 들어오기에 가능할 것이다.

 12 : 06. 눈의 호사를 누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어사항(於沙港)’에 이른다. 천수만에 기대어 살아가는 전형적인 어촌이다. 앞에는 물고기가 많은 천수만이 있고, 주변 모래밭이 넓어 어사라는 명칭이 생겼단다.

 어사항 초입에서 만난 카페, 젊은이들로 붐비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화려하게 치장된 여느 카페들과는 달리 단순하면서도 넓은 창으로 노을을 즐길 수 있도록 꾸몄다. 더 특이한 것은 최고의 로큰롤 앨범으로 꼽히는 비틀스의 8집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상호로 내건 것이다.

 밖에는 비틀즈의 11번째이자 마지막 음반인 ‘Abbey road’를 사진으로 제작 게시해 놓았다. 비틀즈의 음악 세계로 들어서는 가장 탁월한 시작점이 되어준 마지막 앨범으로 평가받는 앨범이다.

 12 : 09  12 : 18. ‘어사항은 인근 남당항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다. 하지만 이곳 또한 대하집산지다. 새조개도 흔하게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온통 칠게만 들어왔고, 그걸 튀김으로 부탁해서 챙겨왔다. 도반 한 분이 연태 고량주를 병째로 주겠다는데, 이만한 안주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후부터는 홍성스카이타워를 전면에 두고 간다.

 12 : 22 - 12 : 51. ‘어사리 노을공원’. 어사항 근처의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공원으로 산책로와 정자, 전망대, 광장 및 운동시설을 갖추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까 어사항에서 구입한 칠게 튀김에 반주를 곁들일 수 있는 좋은 쉼터가 되어주었다.

 노을공원의 하이라이트는 두 남녀가 행복한 모습으로 소중한 약속을 하는 모습을 담은 조형물(행복한 시간)이다. ’투조기법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낮에는 푸른 하늘빛을 담고 저녁에는 노을로 붉게 물드는 남녀의 얼굴을 보여준단다. 연인들이 바다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하늘빛을 담은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포토존도 만들어놓았다.

 남당항의 노을전망대보다 낮기는 하지만 이곳에도 노을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게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전망대 끝에 또 하나의 대를 세워 시야를 넓혔다. 천혜의 자원인 천수만 노을을 조금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전망대답게 멋진 조망이 펼쳐진다. 천수만과 그 건너 안면도가 은밀한 속살까지 내보여준다.

 진행방향에는 홍성스카이타워가 놓여있다. 그 뒤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궁리항일 것이다.

 홍성군의 관광안내판은 ‘12을 꼽는다. 거기에 5(한우··새우젓·친환경농산물·한돈) 3(한우구이·대하구이·새조개 샤브샤브)를 추가하고 있었다.

 12 : 55. 다시 길을 나선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하나의 횟집타운이 조성되어 있었다. 생선을 공급해줄 포구도 없는데 말이다. 유난히도 해안선이 짧은 홍성의 특징이지 싶다. 실제 홍성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남당항을 얘기하면 금방 거기가 홍성이었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정도로 바다를 접한 면이 짧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홍성의 해변은 북쪽 궁리항에서 남쪽 홍성방조제까지 약 10km에 불과하다.

 이곳은 저녁노을의 명소. 먹거리에 눈요기를 보태라는 듯, 바닷가에 테라스 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식탁까지 배치했다.

 13 : 00. ’어사교(이정표 : 종점까지 4.1km)‘를 건넌다. 어사지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하천을 건너는 다리이다. 어사리를 달려온 서해랑길은 이 다리를 기점으로 거차리에 바톤을 넘겨준다.

 저것은 현대식 독살? ‘독살은 해변에 돌담을 쌓아 들물 때 들어온 물고기를 썰물 때 잡는 원시어로 방법이다. 일종의 돌 그물인 셈이다. 그런데 요즘은 부표를 매단 그물이 독담을 대신하는 모양이다.

 서해랑길은 이제 남당항로를 따라간다. 2차선의 도로변을 따라 자전거길이 잘 나있다.

 ! ‘화살나무도 열매를 맺는가 보다. 난생 처음 마주한 상황이니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연새골 선착장이 있는 이곳은 400m쯤 되는 해안선을 따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상점이나 펜션이 일절 없는 조용한 해변공원이다. 그러니 삭막한 도로변을 떠나 잠시지만 숲길을 걸어보자.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면 멋진 풍차가 반긴다. 근처 숲에는 원두막도 들어서 있다. 가족단위의 피크닉을 즐기기에 딱 좋은 장소로 하겠다.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조금 전 지나온 어사리노을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오른편에는 천수만 놓여있다.

 ‘13 : 13. 연새골선착장 진입로를 이용해 남당항로로 다시 올라왔다. 150m쯤 더 걸으면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이 나타나나,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조금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 펼쳐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어민들에게 갯벌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그러니 그 일터로 가는 길은 잘 닦여 있어야만 한다.

 13 : 25. 그렇게 잠시 걸으면 속동해양공원(이정표 : 종점까지 2.5km)’이 얼굴을 내민다. ! 오다가 만난 두리팜이란 건물이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두리+농장?, 부부가 두 자녀와 함께 농산물을 길러, 중간 유통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농장이라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속동마을에서 만났으니 응당 속동 선착장이겠지?

 서해랑길은 이제 속동해안공원의 산책로를 따라간다. 500m쯤 되는 바닷가를 따라 좁고 길게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이즈음 모섬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바닷물이 빠지면서 육지와 연결되어있다.

 13 : 39. 길은 상황교 아래 나무다리를 지나 홍성스카이타워로 향한다. 옛 속동전망대가 있던 자리에 새로 지어진 65m 높이의 타워는 기세도 당당하다. 올해 5월에 문을 열었는데도 이미 홍성의 랜드 마크로 자리를 잡았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면 죽도부터 멀리 안면도까지 천수만의 풍경이 두 눈에 와락 안겨 온다. 하지만 아래층에 있다는 실내전망대는 들러보지 못했다. 투명 강화유리가 깔린 스카이워크가 있어, 아드레날린이 확 솟구치는 아찔한 스릴을 즐길 수도 있다는데 말이다. 어쩌겠는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도가 발아래 놓여있는가 하면, 호수를 닮은 천수만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일렬로 늘어선 것처럼 보였던 죽도와 이에 딸린 섬들이 앞뒤로 입체감을 드러낸다. 천수만 너머로는 남북으로 길쭉하게 태안반도가 뻗어 있다. 높이만 살짝 바뀌었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풍광이다.

 시선을 조금 비틀자 이번에는 궁리항 쪽의 해안선이 눈에 들어온다. 홍성의 해안은 궁리항에서 홍성방조제까지 이어진다. 관광지로 제법 알려진 남당항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소박한 갯마을들이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바다와 육지가 조화를 이루는 해넘이를 보여준다나?

 타워에서 내려오니 서해랑길 쉼터가 눈에 띈다. 홍성군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코리아둘레길 쉼터운영 및 지역관광자원 연계 프로그램 지원사업에 선정됐다더니 그 일환으로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어반스케치 트래킹 체험인 나만의 노을 남기기’, ‘남당플로깅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한다고 했다.

 13 : 48. 서해랑길은 이제 남당항로를 따라간다. 하지만 우린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데크로드를 따르기로 했다. , 아니 가슴에 담을만한 구경거리라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13 : 50. 꼬맹이 무인도인 모섬은 데크 로드로 연결되고 있었다. 간월암이 바라보이는 섬의 꼭대기까지 산책이 가능하단다. 하지만 간식을 먹느라 여유시간을 다 써버린 탓에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13 : 55. ‘모도 앞에서 방향을 튼 길은 남당항로까지 다시 데려다준다.

 이 구간에도 해안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캠크닉(캠핑과 피크닉의 합성어) 성지로 알려지는 곳이다. 그래선지 텐트는 물론이고 캠핑카도 여럿 눈에 띄었다. 간이 캠핑 테이블과 의자를 펴고 노을을 감상하려는 이들일 것이다.

 잠시 후, 서해랑길은 해안도로를 벗어나 바닷가로 간다. 해안선을 따라 축대를 쌓고 산책로를 내놓았다.

 궁리항의 끄트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저 산봉우리는 풍섬이라고 했다. 개발 바람을 맞아 이미 육지가 되어버렸지만.

 14 : 17. ‘궁리항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한적한 어촌 마을인 궁리포구는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이 평화롭다. 기다란 방파제로 연결된 선착장에는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싣고 온 고깃배가 수시로 들어온다. 하나 더. 궁리포구에도 새로운 명소가 생겼다. 바다 위에 놀궁리(’궁리항에서 놀자?) 해상파크를 만들어 색다른 낙조를 만날 수 있도록 했다.

 궁리어판장은 낚시질하는 사람들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머리에 얹고 있었다. 이곳 궁리포구가 가족단위 낚시터로 그만이라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서해랑길(서산 64코스) 안내도는 보령해양경찰서 궁리파출소의 뒤쪽에 세워져 있었다.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3.33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안동선비순례길 8코스(마의태자길)

 

여행일 : ‘24. 11. 16()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도산온천 입구퇴계태실(왕복)용수사용두산소정마을 경로당수운정(거리/시간 : 10.6km, 실제는 12.05km 3시간 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트레킹 들머리는 도산온천 입구(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안동방면)를 타고 27km쯤 내려온다. 지곡교차로에서 928번 지방도(녹전방면)로 옮겨 14km쯤 들어오면 도산온천 입구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신라 비운의 왕자 마의태자를 코스 브랜드로 삼았다. 신라가 망하자 태자였던 김일이 추종자들과 함께 부흥운동을 일으킨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의태자를 떠올릴 수 있는 유적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함께 걸었던 도반(道伴) 마의태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그나마 이곳은 종점인 수운정 근처에서 태자리 태자사라는 지명을 찾아볼 수 있다나?

 8코스(마의태자길) 안내판은 이정표(수운정 7.8km/ 국학진흥원 10.6km)와 함께 온천교 옆 삼거리(도산온천 입구)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이곳은 7코스(산림문학길)의 시점이기도 하다. 영지산(433.3m)을 거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간다. 반면에 8코스는 용두산(664.6m)을 거처 수운정으로 간다.

 11 : 12. 탐방로는 용수길을 따라 북진한다. 하지만 난 온천로(928번 지방도)’를 따라 동진한다. 길을 나서기 전 퇴계태실부터 먼저 들러보기 위해서다. 퇴계 이황이 태어난 곳인데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11 : 14. 잠시 후 만난 웅부중학교는 기숙형 공립학교이다.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스러져가는 인근 지역의 초미니 중학교들을 통·폐합했다고 한다.

 11 : 16. 웅부중학교 앞(이정표 : 노송정 종택 300m)에서 왼쪽으로 난 샛길로 들어선다. 그러자 양지바른 산자락 아래 웅크리고 있는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眞城李氏 溫惠派 宗宅, 국가문화재 제295)’이 거대한 등치를 드러낸다. ‘노송정 종택(老松亭 宗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노송정은 이 집을 지은 퇴계 이황의 조부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의 호라고 한다.

 종택의 대문인 성림문(聖臨門)‘. 퇴계 선생의 어머니인 춘천 박씨가 임신 중에 꿈을 꾸었는데, 공자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대문으로 들어서더란다. 이 사연을 들은 퇴계의 수제자 학봉 김성일이 성림문이라 명명했단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노송정(老松亭)‘이 있다. 퇴계의 조부 이계양이 지었는데, 계유정난 때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 온혜에 터를 잡았단다. 당시 집 주위에 오래된 소나무가 많아 노송정을 당호와 아호로 삼았다나? 하나 더. 편액은 석봉 한호가 썼단다.

 노송정 왼쪽,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있는 본채에는 온천정사(溫泉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이곳은 퇴계 이황뿐만 아니라 퇴계의 숙부이자 엄한 스승이었던 송재 이우(松齋 李堣)’, 퇴계의 형님 온계 이해(溫溪 李瀣)‘ 등이 태어나 분가할 때까지 살며 가학을 이루던 생가다. 1454(단종2)에 지어진 550년이 넘는 고택으로 퇴계 선생과 관련된 수많은 사연을 지니고 있다.

 1501 11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1571)‘이 저 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자라 조선 성리학의 거두가 되면서 퇴계 태실(退溪 胎室)‘이라는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종택 마당에는 이계양이 아들인 식(, 퇴계의 부친)과 우()에게 보낸 권학시(勸學詩)와 퇴계가 손자인 안도(安道)에 보낸 권학시가 적힌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이런 가풍이 있었기에 후대에 현달한 인물과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을 것이다.

 그밖에도 종택을 건립한 이계양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사당 등 대여섯 채의 부속 건물이 더 있었다. ! 종택에서 하룻밤 머무는 숙박체험도 가능하다고 했다.

 11 : 24. 온혜초등학교 쪽으로 200m 남짓 더 들어가면 온계종택(溫溪宗宅)‘을 만날 수 있다.

 온계종택은 퇴계의 형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가 노송정에서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이해의 12대손 이인화(李仁和, 1858-1929가 의병 활동을 주도했고, 이곳이 그 거점이었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사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태웠다. 지금의 종택은 후손들이 뜻을 모아 불타기 전 선조들이 그린 설계도를 바탕으로 2011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안채는 후손들의 안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기웃거리는 것조차 삼가기로 했다. 대신 별채로 여겨지는 삼백당(三栢堂)‘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온계선생의 손자 이유도의 호이기도 한데, 잣나무 세 그루처럼 선비의 의리를 지키라는 가르침을 담았단다.

 온계종택 뒤에는 요산정(樂山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지었는지는 몰라도 이름처럼 소나무를 배경삼아 들어선 아름다운 정자다.

 집은 비록 옛것이 아니지만, 수령 500년 된 밤나무가 묵묵히 자리를 지켜왔다. 나무 둘레가 5.5m나 된다니 성인 3명이 양팔을 벌려 맞잡아야 하는 거목이다. 하나 더. 저 밤나무는 아직도 밤이 열린다고 했다. 매년 300~500개의 밤알이 수확되는데, 단단해서 벌레가 먹지 않는 토종이라나?

 선비순례길 안내판도 눈에 띈다. 하지만 안동시에서 배포한 지도나 각종 안내문 등 그 어디서도 선비순례길이 이곳을 지나간다는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11 : 37.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용수길을 따라 북진한다. 도로표지판이 운곡리 방향임을 알려준다.

 도 안동의 특산물 중 하나인 모양이다. 광활한 무밭 풍경으로 점철되던 5코스나 6코스만큼은 아니어도 길가 농경지가 온통 무밭이다. 맞다. 이곳 도산면은 무청 시래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단무지용 무라고는 하지만 시래기를 주로 하고, 무 뿌리는 거의 거둬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밭에서는 무는 무대로 무청은 무청대로 구분해서 거둬들이고 있었다.

 수확은 파종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저 농부는 대체 무엇을 심고 있을까. 그게 궁금해 물어보니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만 되돌아올 따름이다. 기초 대화만 가능한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문득 외국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없으면 농사도 지을 수 없다던 어느 농부의 넋두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11 : 53. 풍천임씨(豊川任氏) 문중의 빗돌이 눈길을 끈다. 부근에 용담(龍潭) 임흘(任屹, 1557~1620) 취규정(翠虬亭)’이 있다는 게 아닌가. 임흘은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활약했다. 전쟁이 끝나고 공을 인정받아 동몽교관에 제수되기도 했지만 향리로 돌아와 자연을 벗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정자는 5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부담스러워 일부러 다녀오지는 않았다. 그저 퇴계 집안과 인연이 있어 그리도 청백하게 살았으려니 하며 지나치기로 했다. 그의 부인이 퇴계의 숙부이자 스승인 이우(李堣)의 증손녀 진성이씨(眞城李氏)였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용두산을 바라보며 간다. 용두산에서 발원해 도산면소재지인 온혜리에서 토계천에 합류되는 온혜천의 골짜기를 따라 도로(용수길)가 나있다.

 12 : 04. ‘용문정(龍門亭)’이란다. 옆에는 하마비(下馬碑)까지 세워놓았다.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할 정도로 존귀한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이와 관련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개울에 놓인 용문교(龍門橋)’는 옛 멋까지 폴폴 풍긴다. 꽤 오래된 다리를 복원해 놓은 것 같은데, 이 역시 내력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뭔가를 조성(또는 복원)하려면, 안내판 하나쯤은 예의가 아닐까?

 잠시 후 모퉁이를 돌아서자 용두산이 그 전모를 드러낸다. 무척 높다. 저걸 어떻게 올라가지?

 12 : 08. 용수사 버스정류장(이정표 : 수운정 8.3km/ 도산온천 2.3km). 삼거리인데 왼쪽은 이름(구레실황정길)대로 구레실 황정마을로 연결된다. 탐방로는 계속해서 용수길을 따른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운곡리 경로당이다. 운곡리(雲谷里)는 지대가 높아(고도계는 244m를 찍고 있었다), 용두산과 국망봉 사이 골짜기에 항상 구름이 서려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우리말로는 구름실·구래실·구레실로 불린다.

 경로당은 미소쉼터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다. 행복에 겨운 미소가 넘치는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도 지루하다 싶으면 밖으로 나와 쉬라는 듯, 개울가에 야외 쉼터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 개울도 예산을 들여 물고기가 헤엄치는 도랑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나? 혼자 사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농·어촌에 대한 정부의 배려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따뜻해졌다.

 12 : 14. 용수사 일주문(이정표 : 수운정 7.8km/ 도산온천 2.8km). 정자와 화장실까지 갖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용수사의 부도전도 이곳에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선비순례길과 용수사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기 때문이다.

 퇴계예던길 안내도도 보인다. 아까 온계종택에서 봤던 안동선비순례길 안내도와 품은 내용이 얼추 비슷한데도 다른 제목을 달았다. 이왕에 안동선비순례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알렸으니 탐방로에 설치된 시설물들도 이름을 통일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옛 이름이 더 마음에 든다면 새로운 이름은 이쯤에서 없애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선비순례길 8코스는 일부 구간이 퇴계 귀향길과 겹친다. 안동 출신인 퇴계는 선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1568년 조정이 거듭해서 부르자 고향에서 상경했다. 그는 대제학으로 어린 임금을 보좌했으나, 낙향해 학문을 수양하며 만년을 보내고자 했다. 이에 퇴계는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한 끝에 1569 3 4일 일시적 귀향 허락을 받아냈다. 다음날 바로 길을 나선 퇴계는 임금의 배려로 충주까지 관선(官船)을 이용했고, 이후는 말을 타고 죽령을 넘어 도산서원에 이른다. 그 길이 지금의 퇴계 귀향길이다.

 탐방로에서 약간 벗어나 있지만 용수사(龍壽寺)’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대한불교조계종에 속한 용수사는 고려 의종 원년(1146) 봉화의 각화사(覺華寺) 주지 성원(誠源)이 암자를 지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1164년 왕명으로 용수사란 사액(賜額)을 받아 화엄종단의 독립사찰이 되었다. 그러다 1895년 을미의병 와중에 전소된 것을 원행스님과 불자들이 힘을 합쳐 1994년 대웅전과 요사를 건립했단다.

 수월루(水月樓)’로 올라가기 전 광장부터 살펴보는 게 어떨까 싶다. ‘육바라밀길을 꾸며놓았으니 말이다. 팻말에 적혀있는 여섯 가지 덕목(보시·인욕·지계·정진·선정·지혜)을 의미하는 코스를 걷다가 열반에라도 들지 누가 알겠는가.

 절간의 구조는 무척 단출했다. 산신각과 용왕전 등 꼬맹이 전각 두엇과 대웅전과 두 채의 요사에 공양간이 전부다. 하지만 대웅전이나 요사, 공양간은 총림에 있는 전각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인심도 절간만큼이나 컸다. 주지스님이 점심 공양을 하고 가라며 한사코 붙잡는 것이다. 차량 출발시간이 정해져 있다며 사양했지만 절간, 아니 안동에 대한 이미지까지 좋아지게 만든 기분 좋은 상황이었다.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다. ! 이곳은 어린 퇴계가 학문을 연마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은 퇴계는 7세부터 용수사에서 공부했다. 조선시대는 유학을 숭상하는 분위기였으나 퇴계는 유교와 불교에 칸막이를 친 시대적 제약을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절간이 너무 커진 탓인지 당시의 면학 분위기는 느낄 수가 없었다.

 12 : 32. 일주문으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들머리는 일주문에서 용수사 쪽으로 50m쯤 떨어진 지점에서 열린다. 초입에 용두산 등산로 이정표(정상 1.9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하나 더. 이 코스는 선비순례길이 아닌 일반 등산로라는 것도 알아두자.

 붉은색 선이 우리가 오른 코스다. 그 왼쪽에 있는 코스가 선비순례길이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이정표(용두산 정상 1.8km/ 용수사 02km/ 등산로 입구 0.2km). 산길은 이렇듯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가파른 곳에는 계단이 놓여있고, 갈림길이라도 나올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두었다.

 산길을 울창한 솔숲을 헤집으며 나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지만 산길은 산길이다. 거기다 오랜만의 산행, 그것도 전보다 몸이 불은 탓인지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숨이 턱에 차오른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가 심신을 맑게 해준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소나무가 많으니 송이버섯이 날 것은 어쩌면 당연, 그래선지 곳곳에 입산금지 현수막과 표지판이 붙어있다.

 12 : 46. 지자체는 나처럼 힘들어하는 걷기 여행자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중간 중간에 벤치를 놓아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쉼터를 지나면서 산길이 가팔라졌다. 아니 버거울 정도로 가파르다는 것이 더 옳겠다. 나처럼 배가 나온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구간이 될 수도 있겠다.

 13 : 02. 이번 쉼터에는 등산로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등산로 입구에서 이곳까지는 1.2km, 정상까지는 아직도 0.8km를 더 올라가야한단다.

 임산금지 경고판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금줄까지 쳐놓은 곳도 수시로 나타난다. 하긴 송이 채취꾼들은 가을 한 철을 벌어서 일 년을 먹고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산길은 전형적인 육산의 특징을 보여준다. 울창한 숲 때문에 조망이 트이지 않는데다 눈요깃거리도 없다. 이런 길은 한시라도 빨리 정상에 오르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오르고 또 올라도 정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기에 찾아갔더니, 행복은 그 다음 산 너머에 있다더라고 했던가? 정상이려니 하고 올라서면 또 다른 봉우리가 어서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13 : 16.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임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정표(용두산 정상 360m/ 녹전,매정리/ 용수사 1.54km)가 정상이 코앞이라고 알려준다.

 13 : 20. 또 한 번의 오름짓 끝에 능선에 올라선다. ‘굴티고개라는 지명이 적힌 이정표(용두산 240m/ 굴티고개 3.8km)가 우리가 지금 문수지맥과 만났음을 알려준다. ‘만리산(萬里山)’에서 뻗어온 문수지맥은 용두산을 거쳐 굴티고개로 간다.

 13 : 28  13 : 41.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만에 정상에 올라선다.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칡넝쿨과 억새 등이 주변에 쌓여있는 걸 보면 한두 달 전에 정비를 했던 모양이다.

 용두산(龍頭山, 664.6m)’은 산의 모양이 용의 머리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머리 두()’ 대신 머리 수()’자를 쓰기도 하며, 용수사(龍壽寺)에서 이름을 따와 용수산(龍壽山)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 정상석 뒷면에는 안동의 정기 용두산에서 발원하다고 적혀 있었다.

 정상에는 퇴계예던길(8코스) 안내도 말고도 문수지맥트레킹길(6구간) 안내도와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제단이 놓여있는 걸 보면 기우제도 지내는 모양이다. 참고로 문수지맥(文殊枝脈)’은 백두대간 옥돌봉(1,244m) 서남쪽 280m 지점에서 분기, 서남진하며 문수산·용두산·학가산·보문산 등을 일구고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낙동강 본류에 합수되는 삼강나루터 앞에서 그 맥을 대하는 도상거리 114.5 km의 산줄기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청량산 말고는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학가산과 일월산, 국망봉 등도 조망된다고 했다.

 13 : 41.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하산길은 시작부터 거칠었다. 칡넝쿨이 허리춤까지 차올라 여름철에는 진행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길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곳곳에 매달려있는 가이드리본이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오늘은 청마산악회 허총무님 것도 눈에 띈다. 퇴계태실에 다녀오느라 20분 정도 늦게 출발했더니 나보다 한참이나 먼저 이곳을 지나간 모양이다.

 산길은 엄청나게 가팔랐다. 이런 곳에서는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집사람은 끝가지 스틱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 결과 손목 인대를 상한 그녀는 병원진료를 한참이나 받아야만 했다.

 13 : 51. 그렇게 길 아닌 듯 길이었던 곳에서 한참이나 고생한 뒤에야 제대로 된 등산로를 만날 수 있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아까 정상에서 문수지맥을 잠시 따라가다 어느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갈려나왔더라면 수월했지 않나 싶다.

 이후로는 별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아까 산을 올라올 때처럼 등산로 정비가 잘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정표를 세우는 등 기초적인 정비는 해 놓았다.

 그렇다고 가파른 경사까지 없앨 수야 있겠는가. 거기다 낙엽까지 수북하게 쌓여 미끄럽기까지 하다. 무릎 관절이 약한 집사람은 죽을 맛인 모양이다.

 길이 조금 수월해진 뒤에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주변 활엽수들이 이미 헐벗어버렸다. 제대로 된 단풍을 보지도 못했는데 잎은 이미 져버린 것이다. 올 가을을 단풍 없는 단풍철이라며 넋두리하던 어느 등산객의 인터뷰가 문득 떠오른다.

 하산길이라고 해서 계속 내려가는 것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이렇게 올라가는 구간도 나타난다. 짧고 완만한 오르막에 길고 가파른 내리막의 연속이라고나 할까?

 14 : 12. 그렇게 얼마를 내려갔을까 산자락이 앙상한 고사목들로 가득하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귀가해 확인해보니 2020 3 25일 이곳(도산면 운곡리 일대)에서 산불이 발생했다는 기사가 떠 있었다.

 산불은 백해무익하다고 했다. 아니 좋은 점도 있기는 하다. 그 여파로 숲이 헐거워지면서 조망이 트이기도 하니 말이다.

 경각심이라도 불러일으키려는 것일까? 화마로 쓰러진 나무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를 피해 에도는 것은 기본, 아래를 지나거나 심할 때는 나무를 타고 넘기도 한다.

 산불 구간만 지나면 길은 수월해진다. 경사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납던 기세를 확 떨어뜨린다.

 14 : 26. 길이 편해지니 심신도 편해진 모양이다.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으니 말이다. 그렇게 잠시 내려서자 이정표(수운정 2.9km/ 용두산 1.1km)가 이제 그만 능선에서 탈출하란다.

 길이 더 완만해졌다. 널찍한 게 영락없는 임도다. 지자체에서 신경을 써가며 정비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조금 전 탈출지점에는 벤치까지 놓여있었다.

 14 : 30. 잠시 후, 길이 잡초와 잡목으로 뒤덮이는가 싶더니 이내 임도로 내려선다. 아니 용수골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물이 흔한 골짜기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날머리(임도와 접한)에는 이정표(수운정 2.2km/ 용두산 1.8km)가 세워져 있었다. 역방향으로 트레킹을 하는 경우 꼭 필요한 시설이라 하겠다. 어디로 들어서야 할지를 모를 정도로 웃자란 잡초가 길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라간다. 아니 주위가 온통 사과밭이니 농로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사방이 온통 사과밭이다. 맞다. 안동사과는 전국 최대의 생산면적과 생산량을 자랑한다고 했다. 거기다 청정지역에서 비옥한 토질과 밤낮의 일교차가 큰 지리적 여건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자연 그대로의 맛과 신선한 향이 그윽하고 당도도 무척 높단다.

 열매를 대롱대롱 매달고 있는 사과밭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유럽의 농촌지역을 여행하면서 고급 와인을 얻기 위해 서리가 내릴 때까지 포도 수확을 늦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안동사과도 뭔가를 위해 일부러 수확을 늦추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안동사과에는 애이플이란 브랜드가 있다. 안동사과 생산량의 1%에만 붙여주는 최고급 사과브랜드이다.

 빨갛게 영근 사과가 군침을 흘리게 만든다. 하긴 한국소비자만족지수 ·특산물 공동브랜드(사과)’ 1위를 8년간이나 지킨바 있는 귀하신 몸이니 어련하겠는가.

 14 : 48. 작은 마을을 지나가기도 한다. 길의 이름이 소정리길인 걸로 보아 소정마을이 아닐까 싶다. 법정 동리인 태자리(太子里)’에 속한 자연부락 중 하나다. 사과재배를 생업으로 살아가는.

 15 : 00. 차도인 태자로와 만나는 곳에는 소정마을 경로당이 들어서 있었다.

 이후부터는 태자로를 따라간다. 35번 국도상의 (태자리)버스정류장에서 다랫재까지 이어지는 군도(郡道), 행정구역인 태자리(太子里)’에서 이름을 따왔지 않나 싶다. 태자리라는 지명은 또 신라의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갈 때 잠시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됐을 거고 말이다. 민초(民草)들은 자기 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구전(口傳)으로 1000년 뒤 후손에게 전한다. 지명과 전설로 말이다. 덕분에 역사책에 없는 마의태자 발자국은 이곳 안동에도 찍혀있다. ‘국망봉에서 경주를 돌아봤는가 하면, ‘태자리에서는 잠시 머물기도 했다.

 15 : 08. ‘수운정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3시간 50분을 걸었다. 앱이 12.05km를 찍고 있으니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아니 높이가 664.6m나 되는 용두산을 오롯이 넘은 점을 감안하면 무척 빠르게 걸은 셈이다.

 수운정(水雲亭)’은 퇴계 이황의 제자 매헌(梅軒) 금보(琴輔, 1521-1586) 60세 때 지은 건물이다. 물과 구름을 벗하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한다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참고로 금보는 1546(명종 1)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낙향하여 성리학에 뜻을 두고 퇴계에게 수학했다. 글씨에 뛰어나 이숙량(李叔樑), 오수영(吳守盈)과 더불어 삼절이라 불렸으며, 퇴계묘비(退溪墓碑도산신판(陶山神版) 등을 썼다.

 정자는 정면 4, 측면 1.5칸 규모의 일자형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는데다 담장까지 높아 자세한 내부구조는 확인할 수 없었다.

 수운정은 8코스(마의태자길)의 종점이자 9코스(서도길)의 시점이다. 이와 관련된 시설(안내판 및 이정표)들은 수운정 앞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다.

 수운정에서 시작되는 9코스(서도길)는 가송마을의 고산정 입구까지 7.4km를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간다. 그러다보니 특별한 얘깃거리나 가슴에 담을만한 풍광을 만나지 못한다. 그저 브랜드처럼 글씨를 공부하러 가는 선비의 마음으로 걸어야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걷는 걸 포기하고 산악회 황사장님께 부탁해 버스를 이용해 종점으로 곧장 갔다.

 점심상은 가송리 마을회관 앞 공터에 마련되어 있었다. 4코스 때도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고, 5코스는 이 근처에서 걷기 시작했다. 둘레길 도반들이 종점인 고산정 입구까지 다녀오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마을회관 건너편에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고산정(孤山亭)과 가송협(佳松峽)을 가장 확실히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진다.

 전망대에 서자 눈앞에 세외도원이 펼쳐진다. 어느 유명화가가 저리도 예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창조주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내 느낌은 지난번 5코스 때 적었으니 이번에는 다른 분의 느낌을 잠시 빌려보자 <날아갈 듯 멋들어진 바위 절벽을 양옆에 끼고 맑게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고, 물 건너 바위 절벽 옆 물가에 멋들어진 소나무를 벗하여 앉아 있는 것이 고산정이다. 흐르는 물은 맑고, 물가 바위 절벽은 날아가는 듯하고, 정자가 자리한 곳은 아늑하다.>

 퇴계는 고산정의 수려한 풍경을 보고 그림 속(畵圖中)’으로 들어간다고 읊었다. 그런가하면 나귀를 타고 미천을 건너며 맑고 맑은 여울(淸淸灘)과 높고 높은 산(高高山)’이 끊임없이 사라졌다 다시 보이네(隱復見)’라며 지형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풍경을 표현했다. 산이 굽이치는 형세에 따라 물이 S자로 굽이치는 저런 아름다운 풍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표현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