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의길 1코스(강화평화전망대-문수산성 남문)

 

여행일 : ‘24. 12. 7()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송해면·강화읍 및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일원

여행코스 : 강화평화전망대고려천도공원연미정6.25참전용사 기념공원()강화대교문수산성 남문(거리/시간 : 15.6km, 실제는 17.01km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드디어 코리아둘레길 4,500km 전 구간이 완성됐다. 2009년부터 시작된 코리아둘레길 2016년 해파랑길(동해), 2020년 남파랑길(남해), 2022년 서해랑길(서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24 9, 마지막 구간인 DMZ 평화의 길 개통으로 코리아둘레길이 완성됐다. DMZ 일대를 따라 구축한 코스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횡단노선과 민간인 통제지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인 테마노선으로 구성된다.

 

 트레킹 들머리는 강화평화전망대(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88올림픽도로로 김포까지 온 다음, ‘국도 48호선으로 갈아타고 강화대교를 건넌다. 신당교차로(송해면 솔정)에서 빠져나와 전망대로를 타고 8km쯤 올라가면 강화평화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지난 9 28일 개통한 ‘DMZ 평화의 길(이하 평화의길‘)’은 인천 강화군부터 강원도 고성군까지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길이다. 510에 이르는 횡단 노선은 2개 광역 시·도에 10개 기초자치단체를 지난다.

 강화평화전망대에서 강화도의 동쪽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다 )강화대교를 건너 문수산성 남문 앞에서 종료되는 15.6km의 여정이다. 휴전선에 해당하는 한강하구 중립수역과 북녘 땅 조망과 함께 조선시대 한성 방어의 최전선이었던 강화도의 군사 유적을 둘러볼 수 있다. 하나 더. 군사분계선이 인접해 있어 신분증 지참은 필수다.

 평화의길 안내도는 남북1.8평화센터 앞 소형차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16.9km의 거리인데 5시간30분이 걸린단다. ! 서해랑길(103코스) 안내도도 눈에 띈다. 이곳 강화 평화전망대가 서해랑길의 종점이자 평화의길의 시점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9 : 18. 먼저 평화전망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초입, 국제구호개발 NGO ‘World Share’에서 무료급식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한 끼 100원이면 충분한데도 지구 곳곳의 많은 어린이가 굶주리고 있단다. 공감이 가기에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넣어드릴까 해서 모금함을 찾아봤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카드를 내놓으며 서명부터 해달라는 것이 정기적인 참여를 권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월 급여의 101에 가까운 금액을 국제구호단체 두엇에 정기적으로 기부해오고 있기에 정중히 사양하고 자리를 떴다.

 09 : 24.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을 위한 곳으로 평화통일의 기원을 담았다. 1~3층에 전시관과 전망대 통일염원소 등이 만들어져 있다. 지하1층과 지상 4층은 군사시설로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한다. ! 입장료로 2,500원을 받고 있었다. 연중무휴이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단다.

 전시실 풍경. 강화도와 국방, 끝나지 않은 전쟁, 통일로 가는 길 등의 구성으로 남북한의 상황과 통일에 대한 열망, 그리고 통일 후의 비전을 제시한다.

 도전과 저항으로 점철된 강화의 역사도 시대별로 전해준다.

 북한 주민들의 의식주와 생활상도 살짝 엿볼 수 있다.

 3층에 있는 실내전망대. 고성능 망원경으로 북한의 산하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흐린 날씨에도 영상을 통해 북한 전경을 볼 수 있도록 스크린 시설이 되어 있었다.

 야외는 작은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기념비 몇 개를 세우고, 그 옆에 해병대 상륙돌격장갑차를 전시해놓았다.

 가장 높은 곳은 제적봉(制赤峰)’의 정상석이 차지했다. 당초 애기봉을 제적봉으로 명명하려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애기봉 전설을 듣고 원래의 이름을 유지하라 했다나? 덕분에 이 봉우리가 제적봉이 되었다고 한다.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는 임진왜란 때 연안부사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이 이끄는 황해도 의병이 연안성에서 흑전장정의 3천여 왜적과 싸워 크게 이긴 내용을 담았다. 원래의 비는 횡정리(연백군 용봉면)에 있으나, 미수복지역인 관계로 연백군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망향과 통일의 기원을 담아 1983년에 세웠다고 한다. 양사면 인화리에 있던 것을 1997년 고향 땅이 보이는 이곳 평화전망대로 옮겨왔다. 옆 빗돌의 주인공은 편강열 의사(片康烈 義士)’.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만주에서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의성단을 조직, 장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는 등 항일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얻은 척수염으로 1929 3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평화전망대 건물 뒤, 야외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 북한까지의 직선거리는 2.3km. 얼마나 가까운지 소리치면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 손을 흔들어 줄 것 같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빌며 북한 땅, 동포들의 고된 생활상을 가슴에 담아보자.

 해마다 음력 10월 상달을 전후해 실향민과 가족들이 모여 망향제를 연다고 했다. 6.25 전쟁 종료와 함께 시작된 전통행사로, 1년 중 조상에게 햇곡식을 바치기 가장 좋은 시기인 10월 상달에 열어오고 있단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도 눈에 띈다. 강화도가 고향인 한상억, 최영섭이 만들었다는데, 유명 성악가가 부른 노래를 들어 볼 수도 있다.

 건너편 삼달리(황해북도 개풍군 대성면)까지는 2.3km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데도 망원경까지 비치해 북한 땅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북한의 주택, 마을회관, 학교, 선전용 위장마을 등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특히 다른 지역의 전망대들과는 달리 북한주민들이 농사짓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날씨가 좋아야 하겠지만.

 다른 분의 시선도 빌려보자. <정말 가깝다. 소리치면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 손을 흔들어 줄 것 같다. 해안가를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우측으로 개성공단,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경계로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신시가지까지 확인할 수 있다. 좌측으론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와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다.>

 무궁화동산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던가? 나라꽃인 무궁화의 품종이 이렇게나 많은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긴 몽땅숲협동조합에서는 이원화립·일노환·치구·적일중·하보마 같은 생소한 이름으로도 모자라 꽁트드에몽·토투스알부스·다이어나·블루버드·레드하트·헬렌·도로시크레인·하이리테드 같은 외국어로 된 품종까지 선보이고 있었지만.

 09 : 40. ‘남북1.8평화센터(남한과 북한 사이의 가장 가까운 거리인 1.8km를 모티브로 삼았다)’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때 조강(祖江)과 조강으로 인해 돌출된 철곶(鐵串)이 조망된다. 하나 더. 강화도의 북쪽 해안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던 민통선 지역이었다. 그래선지 우리나라 영토임에도 군인들이 서 있는 검문소를 지날 때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잊을만하면 이정표가 얼굴을 내밀어 걷기여행자들의 길벗이 되어 준다.

 그래도 못 미더웠던지 곳곳에서 평화의길 리본이 팔랑인다.

 평화의길은 자전거길인 평화누리길과 대부분 중복된다. 이곳 강화도에서 동해안의 고성까지 자전거와 인간이 사이좋게 간다고 보면 되겠다.

 09 : 48. 첫 만남은 철곶 마을. 제적봉에 걸터앉은 평화전망대가 마을 뒤에서 고개를 내민다. 참로고 철곶은 법정 동리인 철산리(鐵山里)’를 구성하는 3개의 자연부락(철곶·산이포·진말) 중 하나다. 조선시대 철곶보(鐵串堡)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강화도는 5(), 7(), 8포대(砲臺), 54돈대(墩臺)를 두어 톱니바퀴처럼 섬 전체를 감싸며 섬을 방어했다. 금성탕지(金城湯池)라고나 할까? 그렇게 강화는 한양을 지키는 제일선이자 수도 방어체제를 수행할 수 있는 보장처가 됐다.

 철곶마을 들녘 뒤로 조강(祖江)이 흘러간다. 그 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지나가고, 군사분계선 너머는 황해도 개풍군이다. 또한 저곳은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세 강물이 바닷물과 함께 흐른다. 하지만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실향민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물결에 파묻혀 말없이 흘러간다.

 전망대로(옛 이름은 制赤大路’)는 철산고개를 넘는다. 철산리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자연부락 철곶과 산이포의 경계에 놓인 고갯마루쯤으로 보면 되겠다.

 고개를 내려서면 철산리 입구(이정표 : 강화대교 12.94km/ 평화전망대 0.91km).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 철산리(鐵山里)는 대부분 평지로 이뤄져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철곶보가 있던 철곶(鐵串)과 포구마을인 산이포(山伊浦)를 합해 철산리가 됐다.

 뒤돌아본 철산고개. 도로 왼쪽에 산이포(山伊浦)’마을이 꽤 크게 형성되어 있다. 하나 더. 이곳 철산리는 북한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고 했다. 조강(祖江)을 사이에 둔 철산리 산이포와 북녘 땅 해창포(황해도 개풍군)는 직선거리로 1.8km에 불과하단다.

 전망대로를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꽤 너른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09 : 59. 철산삼거리. 양사면사무소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으로, ‘교산리 고인돌군이나 교산교회와도 연결된다. 강화 최초로 설립된 개신교 교회로 선상세례의 일화를 간직한 교회다. 이승환 모자가 선교사의 배까지 찾아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강화 땅에 기독교의 뿌리가 내리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삼거리 근처에 산이포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산이포(山伊浦)는 철산리 동남쪽 바닷가에 있던 포구다. 6.25 이전까지 700여 가구가 모여 살던 강화에서 가장 번화했던 포구로 알려진다. 서울과 북한을 오가던 배들의 정박지였고, 삼남 지방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물자가 한강을 따라 서울로, 예성강을 따라 개성으로 올라갈 때 물때를 기다리며 머물던 포구였다. 오일장이 열리면 황해도 연백 사람들까지 모일 만큼 북적였다고 한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철조망이 쳐졌고 주민들은 강제 이주 당했다. ‘널다리돈대(’석우돈대 판교돈대로도 불린다)’까지 있었다는 마을은 그렇게 사라졌다. 돈대가 있던 자리는 현재 대북 방송용 확성기가 들어서있다고 한다. 문화재 보호보다 안보가 더 우선시되던 시대의 유산이다. 안내판의 <그리움은 늙지 않아요. 뜨거운 눈시울 날이 새어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요. 우리>라는 문구가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10 : 05. 잠시 후 석우교차로(이정표 : 12.2km/ 평화전망대 1.65km)’에 이른다. 강화대교와 강화읍으로 가는 도로가 좌우로 나뉘는 지점으로, ‘평화의길은 바닷가를 따라 난 2차선 도로를 따른다. 접근은 물론이고 사진촬영까지 금지한다는 날선 경고 문구에 살짝 쫄게 되는 구간이다.

 평화의길은 이제 해안을 따라 설치된 철책 앞에서 분단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차선이 둘이나 되는 널찍한 도로도 텅 비어있었다. 농로에까지 주어지는 그 흔한 도로명도 붙어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가끔이었지만 차량들이 오갔기 때문이다. 연미정 부근에 군의 초소가 있는 걸로 보아 지역 주민들에게만 통행이 허용되는지도 모르겠다.

 탐방로는 도로변에 따로 내놓았다. 그 바닥에 평화누리길의 방향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어느 독일 여행자는 자서전에서 곳곳에 그려놓은 방향표시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적고 있었다. 국내의 걷기 길에서도 만나보기를 학수고대 해 왔었는데, 오늘에야 그 원을 풀었나보다.

 평화의길은 진록과 연록으로 진행 방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정방향이 진록으로 보이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왼쪽 군의 순찰통로는 방조제를 따라 쳐놓은 모양이다. 도로 오른쪽에 배수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게 또 물억새와 갈대로 뒤덮이면서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다니는 차량이 아무리 적어도 도로는 도로인 모양이다. 과속을 단속중이니 알아서 속도를 줄이란다.

 뒤돌아본 풍경. 석우교차로에서 시작된 길은 고려천도공원까지 일직선으로 뻗어나간다. 하나 더. 저 철책 너머에서는 남과 북, 바다와 강이 하나로 만난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임진강과 한강이 한데 어우러져 다시 서해와 염하(鹽河)로 흘러 들어간다. 옛날엔 자연의 산물과 사람이 사시사철 모여들던 물길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1953년 정전협정을 하면서 땅에도 바다에도 철책이 둘러쳐졌다. 마을에 진동하던 생선 비린내도 지워졌다.

 10 : 25.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고려천도공원(이정표 : 강화대교 10.5km/ 평화전망대 3.35km)’에 이른다. 민통선 안보 관광코스 조성사업의 하나로 송해면 당산리에 만들어놓은 역사 테마공원이다. 강화천도는 고려-몽골 전쟁 때 항전하기 위해 고려 고종이 1232년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일이다. 이후 38년간 고려의 임시수도였던 강화도의 역사를 천도문을 시작으로 고종사적비까지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다.

 고려 만월대의 출입문을 형상화 한 천도문을 들어서면 대몽항쟁을 위해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팔만대장경과 상정고금예문 등에 대한 자료와 강화도에 흩어져 있는 역사문화 유적지들도 소개해준다. 정자 및 전통연못, 폭포 등이 있어 여유롭게 산책과 휴식하기에도 좋다.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새긴 팔만대장경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를 형상화 한 7미터짜리 철제조형물로 만들어놓았다. 승천포(휴전이 되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큰 포구이다)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온 고종은 대몽항쟁을 이어간다. 하지만 항복에 가까운 화해를 하고 개경으로 돌아간다. 이에 불복한 삼별초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항쟁을 이어갔고, 그런 역사도 조형물 뒤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맨 안쪽은 고려고종사적비 차지다. 강화해협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조류가 빨라 기병 중심이던 몽골군에 맞서 저항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몽골군에 쫒긴 고종은 이곳 승천포를 통해 강화에 들어왔고(그래선지 배 모양의 전망대도 만들어놓았다), 임시수도로 삼아 39년을 머물면서 팔만대장경과 같은 국가 유산을 남기는 등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다.

 10 : 32.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가도 가도 똑같은 길을 계속 걸었다. 흙길이 아닌 포장된 길을 오래 걷다보니 발바닥과 발목이 아파온다.

 왼쪽은 철책의 연속이다. 지루해지기 딱 좋은 풍경인데,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들녘 풍경이 그나마 해방감을 준다. 뒤로 보이는 산은 고려산과 혈구산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데다 다양한 생태계를 갖춰 새들이 서식하기에 최적의 환경으로 알려진다. 탐조가들 사이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탐조 여행지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이곳 강화도도 그중 하나라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들녘이 온통 철새들 천지다.

 11 : 02. 송해면을 달려온 평화의길은 어느덧 강화읍(대산리)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송릉천(이정표 : 문수산성 남문 7.9km/ 평화전망대 7.7km)이라는 작은 하천을 스치듯 지나간다. ! 이즈음에서 도로명이 해안북로라는 이름으로 뜨고 있었다. 도로변에는 버스승강장도 만들어놓았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주어진 건가?

 11 : 22. 강화읍으로 들어선 탐방로는 돌모루 고개를 넘어 월곳리로 내려간다. 잠시지만 이때 바닷가를 떠나기도 한다.

 10분 남짓 더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돈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연미정이 얼굴을 내민다. 마을 끝에 왕릉처럼 솟아오른 곳이 월곶돈대(月串墩臺), 그 위에 올라앉은 정자가 연미정(燕尾亭)이다.

 11 : 42. 관광안내소를 지나자 월곶 돈대 앞에 커다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장무공 황형장군 택지비’. 이곳이 조선 중기 무신이었던 황형(黃衡, 1459-1520)의 옛 집터(향토유적 3)라는 것이다. 황형은 삼포왜란(중종 5) 때 왜적을 무찔렀고, 중종 7년에는 함경도 지방에서 야인의 반란을 진압했다. 왕이 그 업적을 찬양하여 연미정을 하사했단다.

 연미정은 임시완, 임윤아, 홍종현 주연의 MBC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의 촬영지라고 한다. 고려 충렬왕으로부터 충선왕 대에 이르는 시기를 배경으로 아름다우면서 슬픈 우정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인데, 이곳에서 이별 장면이라도 찍었나 보다.

 아치형 암문(暗門)을 들어서자 느티나무(540년 된 보호수란다) 그늘 아래 연미정(燕尾亭)이 앉아있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아름답다. 하긴 강화10경 중 하나로 꼽혔을 정도니 어련하겠는가. 하지만 저곳은 인조 5(1627) 정묘호란 때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참고로 연미정이란 정자 아래로 한강과 임진강 물이 합쳐졌다가 한 줄기가 서해로 흘러들고 또 한 줄기가 김포와 강화를 가르는 염하(鹽河)로 흘러드는 모습이 마치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하지만 나무는 죽어서 그루터기를 남기나 보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링링 그날의 상처라는 브랜드로 포장까지 해놓았다. 맞다. 누군가의 전환의 발상이 있었기에 저런 볼거리가 생겨나지 않았겠는가.

 연미정이 있는 월곶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이다. 그곳에 김포반도가 한 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작은 섬 유도(留島)’가 있다. 지금은 무인도이지만 한국전쟁 이전에는 농가 2가구가 거주했고, 주막과 선착장까지 있었다고 한다. 홍수가 났을 때 북한에서 소 한 마리가 떠내려 와 우리 군인이 구출했던 인연으로 평화의 소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재밌는 일화도 전해진다.

 북한 땅도 조망된다. 개풍군의 신흥리와 령정리, 해평리라고 한다. 크게 소리치면 손짓이라도 보내올 만큼 지척이지만 우리에겐 너무나도 먼 거리로 인식된다. 하지만 예성강과 임진강, 한강은 연미정 앞에서 하나가 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서해로 흘러간다. 우리 민족의 철조망에 갇힌 역사를 아프게 갈무리하면서.

 11 : 57. 강화팔경의 하나인 연미정의 비경을 맘껏 즐기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때 가야할 나들길과 함께 조해루가 발아래로 펼쳐진다. 저 대문을 나서면 월곶진일 게다. 예전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가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리다 물때에 맞춰 한강으로 들어갔다는 곳. 뱃사람들의 사랑방이다.

 조해루(朝海樓)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강화 외성(江華 外城)’의 문루 중 하나로 강화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검문(옛날 이곳은 남으로 염하, 북으로는 조강을 통해 서해로 진출하는 해상로의 요충지였다)하는 초소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참고로 강화외성(사적 452)은 몽골군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고종(고려 23대 왕) 1233년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적북돈대에서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축조한 성이다. 성에는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루·진해루·참경루·공조루·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했단다.

 평화누리길과 함께 사이좋게 달려온 평화의길은 이제 강화나들길이라는 친구를 하나 더 보태서 이어간다.

 이후로도 길은 겹겹의 철책이 드리워진 바닷가를 따라간다. 철책 외에는 볼거리가 없으니 지루할 것은 당연하다. 그게 싫다면 연미정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된다. 나고 드는 게 자유로워 나들길이라는 강화 걷기에 시작과 끝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드넓게 펼쳐지는 들녘과 이를 받쳐주고 있는 고려산과 혈구산을 볼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12 : 34. 연미정을 출발한지 40. 테니스장이 들어선 작은 고갯마루를 넘는다. ‘제승돈대(制勝墩臺)’가 있었다는 부새산을 절단해가며 도로를 내놓은 모양이다. ! 중간에 강화나들길이 갈려나가기도 했었다. 도로를 벗어나 들녘의 둑길과 야산의 숲길을 걷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안내판은 이 어림을 한강하구 습지보호지역으로 적고 있었다.

 고갯마루를 넘자 국궁장과 대산기계공업이 연이어 나온다. 아까 헤어졌던 강화나들길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도 한다.

 12 : 43. 몇 걸음 더 걸어 올라선 고갯마루에는 접경지역의 특성을 살린 ‘6·25 참전용사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있던 자리(강화읍 용정리)에 그들의 뜻을 기린다는 명분으로 조성했단다. 국난극복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호국충절의 고장이자 호국보훈 성지인 강화군의 지리적 여건에 걸맞는 시설이라고나 할까?

 상단은 공원의 주인공인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자리한다. 그밖에도 강화특공대의적불망비와 한반도를 형상화한 조형물 등을 설치해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하단에는 6.25 전쟁 때 자유와 평화를 위해 우리나라에 병력을 지원해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16개국의 참전 규모 등을 상세히 적은 안내판을 설치하여 6.25 전쟁의 실상을 모르는 청소년들에게 안보교육 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경계용 울타리도 버려두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광복과 혼란기, 참담했던 6·25전쟁, 정전협상 등 다사다난했던 역사를 사진 벽화로 만들어 분단의 현실을 담았다.

 공원을 빠져나오면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강화대교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12 : 58. 강화대교 아래를 지난다. 한옥의 아름다운 곡선미를 강조한 아치가 눈길을 끄는 강화도의 관문이다.

 옛날 이곳에는 갑곶나루가 있었다. 세종 원년 박신이라는 사람이 사재를 털어 14년간의 공사 끝에 석축로를 완성했고, 이후 500년간 나루의 기능을 수행해왔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인조가 이곳을 통해 강화도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교통수단의 변화로 1920년 기능을 잃었고, 1970년에는 강화대교가 놓이면서 완전히 폐쇄됐다.

 평화의길은 강화대교 아래서 갑곶순교성지로 들어간다.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된 우윤집·최순복·박상손 등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천주교(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에서 그들이 처형된 갑곶 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 매입하고, 지금의 순교성지를 조성했다. 성지는 순교자묘역과 박순집의 묘, 예배당, 야외제대, 십자가의 길, 예수님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진해루(鎭海樓)’가 길손을 맞는다. ‘강화외성 6개 문루 중 하나로, 염하를 건너와 갑곶나루에서 내린 사람들이 강화읍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 문을 통과해야만 했단다. 강화도의 관문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저 문루는 최근에야 복원되었다. 완전히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세기 말 제작한 지도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공사가 이루어졌다.

 성문 밖으로 나가자 김포반도를 향해 두 개의 다리가 뻗어나간다. 왼쪽은 1997년 개통된 신() 강화대교(길이 780m)로 갑곳리(甲串里, 강화읍)와 포내리(浦內里, 김포시 월곶면)를 연결한다. 그리고 오른편은 1970년 개통되어 27년 동안 강화도를 육지와 연결시켜주던 구() 강화대교이다. 그 임무를 새로운 다리에 넘겨주고 지금은 보행교로 남아있다.

 진해루 앞 광장에는 통제영학당(인천시 기념물 49)’이 있었다고 한다. 통제영학당은 조선 고종 30(1893)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이다. 사관생도 38명과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한 통제영은 영국 장교들까지 교관으로 부임시켰으나,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교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 1896년 영국군 교관들이 귀국하면서 학교도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당시 사용하던 우물만이 남아 옛 영화를 전해준다.

 13 : 06. 모퉁이를 돌아서자 또 하나의 너른 광장이 나온다. 공터의 뒤는 갑곶성지’. 성지로 오르는 길목에는 하얀 예수님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계신다. 쇄국정책과 종교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이 품었을 전교에 대한 염원을 내륙에 전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통로는 계단을 없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만들기의 일환일 것이다.

 통로는 갑곶 순교성지로 이어진다. 가장 높은 곳은 갑곶진두(나루터)에서 처형된 순교자 세 분을 기리는 순교자 삼위비 차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해역에 미국 군함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탄 사건의 책임을 물어 통상을 요구했다.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면서 군사 충돌이 빚어졌고, 고종은 이를 빌미로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를 박해했다. 그 결과 제물진두(현재 화수동성당 주변)에서 여섯 분이, 이곳 갑곶진두에서는 세 분이 순교했다.

 광장의 오른쪽 끝은 기도하는 예수상이 자리 잡았다. 그 앞에는 장궤틀(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는 틀)을 놓았다. 예수님을 마주보도록 해놓은 것은, 그만큼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13 : 14. 순교성지를 빠져나오면 )강화대교. 1970년에 개통된 이 다리는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로서는 경남 충무교와 전남 완도교에 이어 국내 3번째라고 한다. 1997년 새로운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폐쇄되었으나 다리가 평화누리자전거길로 활용되면서 낮 시간에 한해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인도교로 변한 강화대교를 이용해 염하(鹽河)를 건넌다. 길이 694m의 다리는 상판을 3등분 한 다음 가운데로만 걸을 수 있도록 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대형 배관이 양옆에서 따라온다.

 13 : 24. 강화대교 동단에는 평화의길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층으로 된 전망대도 눈에 띈다. 경비초소 등 군인들이 사용하던 옛 시설물들이 걷기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설로 탈바꿈했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일품이다. 강화의 동쪽 바다가 그 속살을 드러낸다. ‘염하(鹽河)’라고 흔히 불리는 강화해협은 한양으로 들어서는 중요 물길이었다. 그래서  ’, 그리고 돈대가 촘촘하게 들어서서 바다를 지켰다.

 평화의길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강화대교의 아래를 지난다.

 강화나들길과 헤어진 평화의길은 이곳에서 경기둘레길이라는 새로운 친구를 만난다. 평화누리길 이정표(문수산성 남문 0.5km/ 대명항 13km)가 종점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고 알려준다.

 13 : 30. 다리를 횡단하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문수산성 남문이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문수산성(文殊山城)은 강화도 방어를 위해 1694(숙종 20) 삼군문(三軍門)을 동원하여 쌓았다. 내륙으로부터 강화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다. 성에는 서·· 3개의 대문과 아문(亞門) 4개가 있는데, 이곳 희우루(喜雨樓)는 그중 남문이다. 1866(고종 3) 일어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성문에서의 조망도 일품이다. 소금 강 염하가 도도한 자태를 드러내는가 하면, 그 너머 더러미 포구에는 작은 어선들이 한가로이 떠있다. 지극히 평화로운 풍경이라고나 할까?

 13 : 40. 남문에서 내려오면 김포장례협동조합(문수산수목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평화의길(2코스) 안내도는 장례조합 건물 뒤 산자락에 세워져 있다.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이 17.01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해줬다. 나에게 집사람은 연인이자 친구다. 옥스퍼드대학의 '로빈 던바'교수는 한 개인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친구를 150명 남짓으로 봤다. 많을수록 좋겠지만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에게는 친구가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꿈쩍없이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부족함을 보충해주는 집사람이 항상 함께 해주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