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32코스
여행일 : ‘19. 11. 16(토)
소재지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과 (오분·남양·성내·정하·교)동, 동해시 추암동 일원
여행코스 : 한재소공원(버스 이동)→오십천교→죽서루→삼척항→새천년 해안유원지→삼척해변→수로부인공원→추암해변(소요시간 : 13.9㎞/ 3시간50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원래 거리가 22.3㎞이니 해파랑길 50개 코스 가운데 가장 긴 구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오십천대교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지난 31코스 때 이미 답사를 끝낸 한재까지 말고도 볼거리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 4㎞ 정도를 더 생략했다. 또한 삼척항에서 시작되는 산길 대신 ’새천년 해안도로(이사부길)‘를 따랐다. 볼거리가 많은 곳만 추려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덕분에 죽서루와 소망의 탑, 이사부공원, 수로부인공원, 삼척해변, 추암해변 등 아름답기로 소문난 삼척의 해안을 빼놓지 않고 둘러볼 수 있었다. 코스를 단축하면서 생긴 여유 시간은 일행들과 함께 갯바위에 둘러앉아 삼척항에서 뜬 싱싱한 회를 먹는 것으로 소일했다.
▼ 32코스의 시작점은 맹방해수욕장(삼척시 근덕면 하맹방리 산 1-7)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근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이용 ’근덕교차로(근덕면 교가리)‘까지 온 다음, 마읍천 둑방도로를 따라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맹방해수욕장의 입구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 32코스의 시작점이다. 하지만 일행 대부분은 지난번 31코스 때 종점으로 삼았던 한재소공원으로 이동한다. 같은 길을 또 다시 걸을 필요야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 31코스 때 종점으로 삼았던 한재소공원(삼척시 근덕면 상맹방리 산 30-11)
이곳에서 트레킹을 시작하는 게 정상이나 아름답기로 소문난 주변 경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산악회 버스를 이용 실제 출발지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삼척대교까지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지인들과의 술자리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갖고 싶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마침 삼척항의 생선회 값이 저렴하다고 소문까지 나있지 않겠는가.
▼ 실제 출발지는 오십천교(삼척시 남양동 325-3)
죽서루에서부터 출발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경행서원 터를 들러보고 싶어서 오십천대교를 일부러 들머리로 삼았다. 버스에서 내려 ’오십천교‘ 아래로 난 굴다리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탐방로는 왼편에 삼척여고, 그리고 오른편에는 오십천을 끼고 나있다. 참! 들머리 바로 곁에 ’보훈공원‘이 있었으나 들러보지는 않았다. 충혼탑과 ’6·25 및 월남전 참전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지만 다른 지역의 유사(類似) 탑들과 대동소이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 삼척여고의 담장이 끝났다싶은 곳에서 탐방로는 왼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민가 하나가 길을 떡하니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위벼랑 아래의 한 뼘이나 될 법한 비좁은 공간이 개인 사유지라니 어쩌겠는가. 참! 방향을 트는 지점에 세워놓은 푯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이정표(예술회관 방면/ 번개시장 방면) 역할을 하고 있는데 '오랍드리 산소길 3코스 강변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오랍들이'란 이웃 또는 집주변을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다. 삼척시에서 ’오랍들이 산소길‘이란 둘레길을 조성했다고 하더니 이곳에서 해파랑길과 겹치는 모양이다. 참고로 ’오랍들이 산소길‘은 삼척의 외곽 20㎞를 5개 코스로 나누어 각기 봉수대길, 봉황산길, 강변길, 삿갓봉길, 해변길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단다. 그렇다면 이곳은 제3코스인 ‘강변길’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덕분에 길은 더 고와졌다. 울창한 숲속으로 멋진 데크로드가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오른편은 바위절벽, 오십천과 삼척시가지가 조화롭게 어울리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중간쯤에 만들어놓은 전망대로도 모자라 망원경까지 갖춘 것은 보여주는 풍경에 대한 자부심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 전망데크를 지났다싶으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해파랑길은 산허리를 돌아 곧장 가라고 안내하지만 우린 오랍드리길을 따라 산봉우리로 올라간다. 그러자 목책 데크계단 옆에 '경행서원 기적비(景行書院 紀蹟碑)'라고 적힌 비석(碑石) 하나가 서있다. 경행서원은 삼척부사를 지낸 성암 김효원(省庵 金孝元, 1542-159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배향하기 위하여 1631년 창건, 위패를 모시던 곳이다. 그렇다면 그 지긋지긋한 당파싸움의 원조를 모신 셈이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우던 당파가 그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1824년 경행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역시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許穆, 1595-1682)을 추가 배향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손된 뒤 복원되지 못하다가 1980년대 후반 복원추진위원회에서 복원을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기적비를 세워 그 흔적을 남겼단다.
▼ 그 아래쪽에 비석이 하나 더 있다. '척주초혼단비(陟州招魂壇碑)'라는데 과거 삼척에 살다 후손을 두지 않고 사망한 57위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란다. 비명 아래 57위의 이름이 새겨져있는데 이들의 재산을 처분하여 공설시장을 세웠다고 한다. 아무튼 전각의 안에다 모셔놓은 건 그만큼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삼척시에 소중한 자산을 남겼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 다시 해파랑길로 돌아갈까 하다가 그냥 봉우리를 넘기로 한다. ‘오랍드리길’이어선지 이곳도 역시 데크로드를 곱게 깔아놓았다. 가을빛이 짙어가는 숲길을 잠시 내려오자 널디너른 광장이 나타난다. 엑스포광장이라는데 그 끄트머리에는 삼척문화예술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아까 갈림길에서 곧장 해파랑길을 탔을 경우에는 저 건물 뒤에 있는 야외공연장으로 내려서게 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참고로 이 일대는 배용준 손예진 주연의 영화 ‘외출’의 촬영지이다. 이곳 말고도 죽서루와 새천년 해안도로, 삼척 의료원, 삼척 경찰서, 소망의 탑 등도 영화의 배경이 되었단다. 그건 그렇고 엑스포광장은 트레킹을 시작한지 25분 만에 도착했다.
▼ 시간이 느긋하니 둘러볼 곳이 많아진다. 그래서 들어선 것이 ‘삼척시 교류도시 홍보관’이다. 지구본을 본떠 만든 저 건물에는 삼척시와 자매 및 우호를 맺고 있는 국내외 16개 도시와의 교류 진행상황 및 교환 기념품을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부족한 시간까지 쪼개가며 일부러 찾아볼 정도의 볼거리는 갖고 있지 못했다.
▼ 홍보관을 나선형으로 돌아 오르면 ‘동굴 신비관’으로 연결된다. 2002년 삼척세계동굴엑스포의 대표적 시설물이라는데 시간이 없어 내부관람 대신 팸플릿을 읽어보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전시관은 1, 2층은 세계유명동굴과 영화 속의 동굴, 동굴의 문화연출, 동굴의 과거/현재/미래 디오라마, 동굴의 파괴/보존 디오라마와 환생교 및 학술관련자료, 동굴내 서식동물인 박쥐의 생태, 기념사진 촬영 코너 및 전망대, 박쥐의 일생을 디오라마로 연출하고, 3,4층의 주제영상관에서는 대형 I-MAX영상으로 환상의 동굴을 체험할 수 있단다.
▼ 다시 돌아온 엑스포광장, 건너편에는 ‘삼척 시립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삼척은 고대 실직국(悉直國)의 영역이었다. 옛 삼척지역(동해, 삼척, 태백)의 다양한 역사유물과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발굴(조사)·보존·연구·전시하기 위해 ‘전문박물관’으로 지어진 시설이다. 지하1층 지상2층의 건물에 4개의 전시실과 수장고, 학예연구실, 시청각실, 유물보존처리실을 갖추고 있단다. 참! 박물관 건물 옆에 밧줄 모양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니 한번쯤 살펴보고 가자. 해안지방인 부내와 산간지방인 말곡이 편을 나누어 승패를 겨루던 정월 대보름의 민속놀이인 ‘삼척 기줄다리기’ 때 사용하던 밧줄이라고 한다. 이 민속놀이가 최근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경사를 맞았다니 축하할 일이다.
▼ 이젠 죽서루로 가야할 차례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다리(죽서교)’를 건널 일은 아니다. 죽서루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다리를 건너기 바로 직전 가람영화관을 바라보며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오십천 둑방에 걸터앉은 정자 하나가 보일 것이다. 이곳에 오르면 한 폭의 산수화로 완성된 죽서루의 풍광을 한눈에 쏙 담을 수 있다.
▼ 다리를 건너는 도중 오십천의 아름다운 풍광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을 수 있다. 죽서루의 잔영(殘影)을 수놓을 정도로 잔잔한 수면 위에는 카약 두 척이 서로를 희롱하고 있다. 또 다시 길을 나서는데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길이 하나 나있다. 그렇다고 성급히 들어서는 것은 금물, 죽서루의 진입로는 50m쯤 더 가야 나온다. 홍어회 전문이라는 ‘진주집’을 오른편에 낀 골목으로 들어서야만 한다.
▼ 100m쯤 더 들어갔을까 보물 제213호인 죽서루(竹西樓)가 나온다. 정면 7칸에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누각으로 삼척시의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을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데,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그래선지 죽서루라는 간판 말고도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고 적힌 현판 하나를 더 달고 있었다. 죽서루는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가 창건했고, 1403년(태종 3) 삼척부사 김효손(金孝孫)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단다. 엑스포광장에서 죽서루까지 오는 데는 15분이 걸렸다. 두 곳이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도 이곳저곳 둘러보느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 누각은 맨발로만 올라가란다. 신발 벋기가 귀찮아 이이(李珥) 등 여러 명사들의 시를 곁눈질 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하긴 열심히 살펴봐야 한시(漢詩)를 이해할 수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대신 정자 앞 절벽위로 다가가 조망을 즐겨본다. 오십천과 엑스포광장, 삼척시가지가 한눈에 쏙 들어오지만 아까 건너편에서 바라보던 풍경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다.
▼ 오십천으로 되돌아 나오니 해파랑길은 이제 오른편 어깨를 오십천에 기댄 둑방길을 따른다. 차도와 오십천 사이에 데크로드(deck road)가 조성되어 있다. 가끔은 망원경까지 갖춘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 벤치를 놓아둔 걸 보면 쉼터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정성들여 가꾸었다는 느낌이다. 삼척판 올레길인 '오랍드리 산소길‘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지 않았을까 싶다.
▼ 오십천교의 북단을 지나자 장미공원이 나타난다. 죽서루에서 15분 거리이다. 오십천 둔치의 고수부지(高水敷地)에 조성된 공원에는 총 218종 13만 그루의 장미가 식재되어 단일 규모로는 세계 최대 수량을 자랑한단다. 천만 송이의 장미가 피어날 때면 아름다움이 장관을 이루며 특히 야간이면 장미꽃 군락이 조명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단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움을 볼 행운이 나에겐 없었나보다. 늦부지런을 떠는 놈들까지도 꽃망울에 힘이 빠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8만5000㎡에 이른다는 장미공원 구간은 산책로 말고도 오십천의 물길 가까이로 탐방로 하나를 따로 내놓고 있었다. 포토존을 비롯해 장미터널과 이벤트 가든, 바닥분수, 잔디광장, 맨발공원, 인라인 스케이트장 등 각종 휴양 및 편의시설도 만날 수 있었다.
▼ 2.5㎞ 가까이 되는 장미공원 구간이 끝나면 ’삼척교‘가 나온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7번 국도로 올라선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천변(川邊)을 따랐다. 구경거리가 더 많을 것이란 섣부른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아주 잘못된 선택이었다. 눈요깃거리는커녕 곁눈질거리 조차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양시멘트의 거대한 구조물을 구경거리로 친다면 몰라도 말이다. 거기다 길까지 막혀있어 물어물어 겨우 해파랑길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해파랑길, 고생한데 대한 보답이라도 해주려는 듯 멋진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비탈진 산자락에 기댄 계단식 집들이 해외여행에서나 볼 법한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 잠시 후 삼척항(三陟港)에 이른다. 오십천 하구에 발달한 공업항이자 무역항으로 인근에 있는 동해항과 더불어 시멘트 반출의 전진기지이다. 정라항(汀羅港)으로 불리던 조선시대에는 삼척포진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곳 삼척항이 천연의 양항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왕에 들른 삼척항이니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지인들과 함께 포구에 늘어서있는 활어회센터들을 기웃거리며 흥정에 들어간다. 오십천교에서 삼척항까지는 55분이 걸렸다. 길을 잘못 들어선 탓에 꽤나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 다시 길을 나선다. 회센터 입구의 삼척수협 정라동지점은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해파랑길이 이 부근에서 도로를 벗어나 마을안길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난극복유적지'비와 '광진산 봉수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사부길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집사람에게 소망의 탑에 매달린 종을 쳐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참! 항구를 빠져나오는데 ’곰치국‘ 간판을 내건 식당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나처럼 과음이 잦은 사람들에게 인기 좋은 음식이다. 곰치는 기가 찰 정도로 못생긴 생선이다. 어선의 그물에 잡혀도 그냥 버려지던 때도 있었단다. 포구 인근 주민들만이 김치 국물에 쉽게 끓여내는 국의 맛을 알았었는데 그 시원함이 입소문을 타면서 동해를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단다.
▼ 잠시 후 바다를 향해 달려 나간 멋진 전망대를 만난다. 조금이라도 파도가 높을라치면 물속에 잠겨버릴 갯바위에 예쁘장한 정자를 지어놓았다. 육지와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정자에 오르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바닷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아름답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 이렇게 아름다운 바닷가를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삼척항에서 4만원을 주고 썰어온 히라스(부시리)와 무늬오징어를 꿰차고는 갯바위로 내려선다. 소주와 맥주에 막걸리까지 넉넉하게 챙겼음은 물론이다. 바닷바람을 가슴에 들이켜 소주 한 잔에 회를 오물거리는 시간이 즐겁다. 그리곤 일행 넷이서 잔을 주고받다보니 1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이래서 여행을 자유라고 하나보다. 아래 사진은 갯바위에서 바라본 새천년해안도로의 풍경이다. 갯바위가 널린 바닷가 절벽 위에는 ‘펠리스호텔’이 걸터앉았다. 해돋이의 명소로 입소문을 탄 곳인데 아침햇살이 갯바위를 비출 때는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갯바위들이 그려놓는 그림 같은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단다.
▼ 불콰하니 달아오른 얼굴로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아름답다고 소문난 비경에 빠져든다. 삼척해변에서 삼척항까지 4.6㎞ 해안을 벗한 새천년해안도로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명품도로이다. 냉전의 산물인 철조망을 걷어내고 산뜻한 모습의 경관용 펜스가 설치된 해변에는 유난히 갯바위가 많고 바닷바람이 강하다고 소문났다. 오늘은 예외이지만 바람이 거센 날에는 밀려오는 파도가 갯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대포 소리를 내며 하얗게 부서진단다. 굽이굽이 S자를 그리는 새천년해안도로가 물보라로 장식되기도 한다니 주의할 일이다.
▼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새 ‘소망의 탑’에 이른다. 2000년 새천년의 소망을 담아 건립한 탑으로, 건립 후원자 33,000명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으며 3단 타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1단은 신혼부부의 소망석이며, 2단은 청소년, 3단은 어린이의 소망석으로 되어 있으며, 탑신은 소원을 비는 두 손의 모양을 형상화 했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기념하는 타임캡슐을 탑 아래에 묻어 두었단다.
▼ 탑에는 종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소망의 탑’에 매달려있으니 ‘소망의 종’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집사람에게 3번을 치며 소원을 빌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빌었는지는 그녀만이 알 일이다. 동그란 조형물 안으로 해가 쏙 들어올 때 종을 울려야 효력이 있다지만 뭐 어쩌겠는가. 효력은 조금 떨어질는지 모르겠지만 빌지 않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 소망의 탑을 지나면 ‘광진항’이다. 말만 항구일 뿐 실제로는 어선 한 척 보이지 않는다. 맞다. 이 항구는 물질 나가는 해녀들이나 아담한 풍경에 홀린 관광객들만 간간이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닥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바다가 맑고 푸른데다 작고 아담한 해안선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 다음에 등장하는 곳은 ‘비치조각공원’이다. 새천년해안도로변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로 바이올린을 켜는 소녀상 등 10여 점의 조각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노변공원(路邊公園)으로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지친 다리를 쉬어가기에 딱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지하공간에 있는 ‘카페 마린데크’는 바다와 가장 가까이에서 차나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인기가 높단다.
▼ 후진항에 가까워질 무렵 두꺼비를 닮은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바다에서 해변으로 막 뛰어 오를 것 같은 모습이다. 이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집안이 번성하고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전해진단다. 그래선지 길가에다 두꺼비 조형물을 세워두었는가 하면 유리난간에는 이에 대한 설명문까지 적어놓았다.
▼ 길은 여전히 곱다. 이 길은 ‘이사부길’로도 불린다.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과 함께 바다가 바로 접해 있어서 사람 접근이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도로가 개설되면서 푸른 해송과 기암괴석, 동해의 푸른 바다가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경치로 말미암아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 작은 어선 두어 척이 정박되어 있는 후진항(後津港)을 지났다싶으면 이름만큼이나 작은 '작은후진해수욕장'이다. 수상안전요원이 없어 물놀이를 금지한다는 푯말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각양각색의 갯바위들이 널린 데다 물빛까지 좋으니 사람들이 안내문을 따를지는 모르겠다. 삼척항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10분 정도가 걸렸다.
▼ 후진마을에서는 해신당(海神堂)도 볼 수 있었다. 후진의 옛 이름은 뒷나루였다고 한다. 동헌이 있던 시내에서 볼 때 뒤쪽에 자리한 포구였기 때문이다. 후진마을은 ‘작은후진’과 ‘큰후진’으로 나뉘는데, 해신당은 원래 ‘작은후진’ 마을 동쪽의 바닷가 언덕에 있었다고 한다. 1999년 새천년해안도로가 개설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었던 것을 201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새로 지었단다.
▼ 조금 더 걷자 널따란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진다. 길이가 1.2㎞에 이르는 삼척해수욕장(三陟海水浴場)으로 모래사장 뒤편의 송림이 장점이다. 식당과 숙박업소의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것 또한 장점이라 하겠다. 그밖에 미디어글래스와 백사장 데크로드, 포토존, 파고라, 다목적광장 등 다양한 편의시설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 덕분인지 올 여름에는 해양수산부의 ‘전국 우수·으뜸해수욕장’에 선정되기도 했단다.
▼ 삼척해변을 벗어난 해파랑길은 내륙으로 파고든다. ‘쏠비치 삼척’이 바닷가를 독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솔비치의 앞 고갯마루를 넘자 '수로부인공원'이 나온다. 공원에는 임해정(臨海亭)이란 정자를 세워 조망대를 겸한 쉼터의 역할을 수행토록 하고 있다. ‘해가사의 터’라고 적힌 비석도 보인다. ‘삼국유사 수로부인전’에 전하는 ‘해가(海歌)’라는 설화의 주 무대라는 얘기일 것이다. 해가는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노래(향가)이다. 이 노래의 시원은 신라 성덕왕 때 수로부인이 동해의 해룡(海龍)에게 잡혀 가자 남편인 순정공(純貞公)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서 불렀다고 하는데서 유래됐다. 그래선지 공원에는 해가의 가사를 적은 빗돌 말고도 ‘드래곤 볼(Dragon Ball)’을 전시해 놓았다. 여의주를 표현한 이 조형물은 높이 1.6미터에 지름 1.3미터인 오석으로 만들어 졌으며 회전이 가능하도록 제작됐다. 여의주에는 암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철쭉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치며 불렀다는 4구체의 향가 '헌화가(獻花歌)‘도 새겨져 삼국유사를 펼쳐놓은 듯하다.
참고로 해가(海歌)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龜乎龜乎出水路(구호구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약인부녀죄하극) 남의 아내 앗은 죄 그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여약패역불출현) 네 만약 어기고 바치지 않으면,
入網捕掠燔之喫(입망포략번지끽)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 수로부인공원의 아래는 증산해변(해수욕장)이다. 수심이 낮고 물빛이 곱다고 소문난 해안이나, 그보다는 추암해변과 촛대바위를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이곳을 한 번 다녀간 사람은 꼭 다시 찾아온다는 속설까지 전해진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후진해변에서 이곳 증산해변까지는 2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 증산해변의 끄트머리에서 시작되는 데크로드를 타고 오르니 ’해파랑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이 32코스의 종점이자 33코스의 출발지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해파랑길의 스탬프보관함은 추암역의 앞에 설치되어 있다. 코스 트랙도 마찬가지다. 두 지점 간의 조정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아니 내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곳 ’이사부사자공원‘ 입구를 교차지점으로 정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이곳을 지나면서 동해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33코스가 짧은 반면 32코스는 많이 길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고 말이다.
▼ 참! 해파랑길 안내판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왼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들머리에 세워놓은 이정표가 30m만 들어가면 ‘이사부 사자공원’을 만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신라 장군 이사부의 개척정신과 얼을 담은 가족형 테마공원이니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실직주(삼척) 군주였던 이사부 장군은 신라 지증왕 13년에 우산국 정벌을 단행하고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역사에 최초로 편입시킨 인물이다. 그는 배에 싣고 간 사자상을 이용해 우산국을 복속시켰다고 전해진다. 공원에 유난히도 많은 사자상이 전시되어 있는 이유일 것이다.
▼ 동해시 관내로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150m 길이의 해수욕장과 그 뒤를 받치는 섬처럼 생긴 돌출부가 한데 어우러지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말이다. 그 오른편은 칼바위와 촛대바위 등 크고 작은 바위섬들이 장관을 이룬다.
▼ 해수욕장을 지나 섬처럼 보이던 돌출부로 향한다. 이곳은 원래 섬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육지에 가까운 부분에 모래, 자갈 등이 퇴적되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섬을 육계도(陸繫島)라 부른다. 아무튼 이곳은 해금강이라 불려왔을 정도로 유명한 경승지이다. 조선 세조때 한명회가 강원도 제찰사로 있으면서 그 경승에 취한 나머지 능파대(미인의 걸음걸이)라 부르기도 했단다.
▼ 육계도의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해안초소로 쓰이던 건물을 전망대로 개방했다는데 출입구를 막아놓아 위로 오를 수는 없었다. 많이 넓어진 조망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남한산성의 정동방(正東方)이 ‘추암해수욕장’이라고 적힌 빗돌이 전망대 아래에 세워져 있어서 이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는 있었다.
▼ 육계도 주변은 소문난 경승지이다. 그 가운데서도 ‘촛대바위’가 단연 돋보인다. 애국가의 첫 소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 들려오면서 그 배경화면으로 등장하는 촛대바위는 바다에 일부러 꽂아놓은 듯 뾰족하게 솟아 있다. 참고로 촛대바위는 원래 두 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숙종 7년(1681)의 지진 때 중간 부분 10척 가량이 부서져 나갔단다.
▼ 형제바위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서있는 바위들이 너무 기기묘묘해, 흡사 조각 작품 전시장에라도 와 있는 것 같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해안절벽과 함께 기암괴석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외국, 그것도 기경으로 평가받는 곳에서나 볼 법안 석림(石林)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 바위 숲에 동해의 거세고 맑은 물이 바위에 밀려와 흰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 ‘삼척 심씨(三陟 沈氏)’의 시조인 심동로(沈東老)가 1361년에 세웠다는 '해암정(海岩亭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3호)'이다. 심동로는 고려 말 높은 벼슬을 지내던 중,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삼척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해암정'을 짓고 후학양성과 풍월을 읊으며 말년을 보냈단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1530년에 다시 짓고, 두 차례의 수리 및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안에는 우암 송시열 등, 이곳을 다녀간 묵객들이 경치를 읊은 판각이 걸려있단다.
▼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안을 지나자 출렁다리가 놓여있다. 해변 돌출부 두 곳을 잇는 길이 72m의 다리이지만, 다리를 건너지 않고도 반대편에 이를 수 있으니 다리라기보다는 관광용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아무튼 이 다리는 주변의 석림과 드넓은 동해바다의 비경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 트레킹 날머리는 추암조각공원 주차장(동해시 추암동 474-3)
출렁다리의 끝은 ‘추암 조각공원’으로 관광객을 위한 조각전시장과 야외무대 및 휴게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애국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설치했다는 6.25 한국전쟁 형제의 벽을 정상에 배치한 다음, 그 아래로 30여 점의 조각품들이 사방에 전시되어 있다. 공원을 둘러본 다음 굴다리를 빠져나오니 또 다른 주차장이 나오면서 32코스가 종료된다. 오늘은 총 5시간 20분이 걸렸다. 회를 뜨는데 걸린 시간과 이를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3시간 50분이 걸린 셈이다. 핸드폰에 찍힌 거리는 13.9㎞.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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