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23코스

 

여행일 : ‘19. 6. 15()

소재지 : 경북 영덕군 병곡면과 후포면 일원

여행코스 : 고래불해변(1.1km)병곡휴게소(3.7km)금곡교(3.9km)백암휴게소(3.2km)후포항등기산공원(소요시간 : 11.914.43로 늘려 3시간12)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해파랑길의 50개 코스 가운데 가장 짧은 코스이다. 그러다보니 특별히 눈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없다. 바닷가 사람들의 삶을 느껴볼 수 있는 숫자도 현저하게 줄어들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남은 시간을 이용해 24코스에 들어있는 등기산공원후포 벽화마을까지 연장해 보았다. 등기산공원은 스릴과 조망에다 선현들의 숨결까지 함께 느껴볼 수 있는 후포항의 새로운 명소이다. 스카이워크와 출렁다리에서 긴장감에 푹 빠져본 다음 망사정(望槎亭)에 올라 안축(安軸)과 서거정(徐居正)의 눈길로 동해바다를 바라본다. 내려오는 길에는 후포등대까지 둘러보면 된다. 그런 다음에는 후포를 세상에 알리는데 앞장섰던 후포의 사위남서방이 노닐던 마을안길을 거닐었다. 그러다보니 본래의 거리보다 2.5를 더 걸었다. 그래봤자 15가 채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들머리는 고래불해수욕장(영덕군 병곡면 병곡리 58-26)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영덕) 영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방면으로 올라오다 병곡리교차로(병곡면 병곡리)’에서 오른쪽으로 빠져나오면 고래불해수욕장의 상징이랄 수 있는 철제 구조물이 나타난다. 위로 솟구쳐 올라가는 고래를 모티브로 한 것인데, 이곳이 해파랑길 22코스의 종점이자 23코스의 시점이다. 참고로 고래불해수욕장은 병곡면의 6개 해안 마을을 배경으로 장장 20리에 달하는 모래사장을 낀 해수욕장으로 고래불이란 지명은 고려 말 목은 이색선생이 상대산에 올랐다가 고래가 뛰어노는 걸 보고 고래불이라며 외친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해파랑길 23코스의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고래불해수욕장의 입구에 있는 음악분수(音樂噴水)의 오른편에 설치되어 있다. ‘병곡의 노래라는 노래비가 버티고 있는 분수대의 건너편에는 금방이라도 바다로 뛰어들 것 같이 역동적인 고래조형물(위에 첨부된 사진)’이 세워져 있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이며 고래불의 바람과 물, 태양 등은 모두 채움비움속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만들어졌단다.



북쪽 방향의 해안도로를 따르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방곡항의 마스코트인 거대한 고래조형물은 공사가 한창이다. 아니 포구 전체가 어수선한 풍경이었다. 해수욕장의 개장시기에 맞추어 정비작업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잘 지어진 팔각정이 올라앉은 포구(浦口) 뒤편의 작은 동산은 용머리공원이다. 이곳에 병곡리와 용머리의 유래를 적은 빗돌을 세워놓았다. 마을 뒤 야산(포성터)에서 내려다보면 지형이 자리(자루)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자루실또는 자래실이라 불러오다가 조선 중기 명종 때 영해부사로 있던 장응두가 병곡(柄谷)이라 부르면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자루 병()’골 곡()’을 썼으니 그동안 불러오던 지명을 한자로 고쳤다고 보면 되겠다. 1914년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통폐 때 합륙(柄陸), 병진(柄津)을 병합하여 병곡동이 되면서 영덕군(병곡면)에 편입되었고, 1988년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병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병곡1,2리로 분동되어 있다. ‘고래불에 대한 유래를 적은 빗돌도 보인다. 목은 이색 선생이 상대산 정상에 올라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고래가 허공으로 분수를 뿜으며 튀어 올랐다. 진기한 광경에 선생은 고래불이다!’라고 외쳤고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고래불이란다. ‘의 옛말이라니 고래 떼가 묘기를 부릴 만큼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공원의 바닷가 방향에는 한쪽 귀퉁이가 움푹 파인 커다란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큰 인물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전국의 유명 지역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당시 이곳 자루실도 마을의 정기를 끊으려고 용머리처럼 생긴 영험한 바위의 위에 팔각정을 지어놓았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를 알고 1961년 철거해서 지금의 해안도로에 매립해버렸단다. 지금도 전국의 유명 무속인(巫俗人)들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며, 5년마다 열리는 마을 풍어제도 이곳에서 시작하고 있단다. 동혈처럼 생긴 곳에 제단(祭壇)이 놓여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계속해서 해안도로를 따른다. 바닷가에는 낚시하기 딱 좋은 갯바위들이 널려있다. 아니나 다를까 꽤 많은 강태공들이 이미 낚시에 여념이 없다. 잠시 후 탐방로는 바닷가를 벗어난다. 독특한 외형을 지닌 메르센트 펜션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밋밋한 구간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7분 만에 병곡휴게소에 도착했다. 빛바랜 사진처럼 쇠락해진 휴게소는 화려한 고속도로 휴게소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7번 국도4차선으로 확장되기 전에는 사람들로 북적 거렸다는데 과거의 화려함은 간데없고 적막한 풍경만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이후부터는 옛() 7번 국도를 따른다. 자동차도로와 자전거도로를 겸한 탐방로가 맞물려 있지만 차량통행이 많지 않아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일만도 아니다. 차량통행이 뜸한 탓인지 달리는 차량마다 속도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백석1표시석이 보인다. 이 근처는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높다랗게 방파제를 쌓아올렸다. 그리고 예쁘장한 그림까지 그려 넣었다. 먼 바다에서 밀어닥치는 파도가 그만큼 높다는 증거일 것이다. ! 이곳으로 오다가 KBS-TV의 예능프로그램인 12촬영지라는 블루베이 펜션을 만났었다. 하지만 특별한 점을 눈에 띄지 않았다. 해당 프로그램이 그만큼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마을을 지나는데 烈女 金允岳之碑라고 쓰인 빗돌이 눈에 띈다. ’진실로 윤()‘큰 산 악()‘을 쓰는 여인이라니 이름에서부터 여장부였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하긴 그런 옹골참이 있지 않고서 어찌 열녀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귀가 후 각종 자료를 검색해봤으나 역시 눈에 띄지 않았다. 도로가에 터를 잡고 있을 정도의 열녀비라면 지자체에서 조금 더 관심을 갖고 관리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 같이 효()가 사라져가는 세태에 젊은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 열녀비 근처에서 철암산 화석단지의 진입로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으나 거리가 500m나 떨어져 있다기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1500만 년 전의 굴과 가리비 화석이 자주 발견되는 곳으로 산을 구성하고 있는 암석 대부분이 큰 자갈이 박힌 역암이라고 한다.



백석리 포구 조금 못미처에서 말뚝이 박힌 돌무더기를 만났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아 검색해봤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경북일보의 해파랑길 탐방기사에서 바닷물이 마을로 들이치는 걸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라고 적힌 걸 보고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빗돌까지 세워야 했을만한 기념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무더기의 크기 또한 물막이의 효과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왜소했다. 그나저나 해파랑길 안내에는 이곳 백석리에 물이 맑고 모래가 굵은 간이해수욕장이 있다고 했다. 빗돌근처의 모래사장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근심을 비우는 곳이라는 근사한 이름표를 단 화장실 뒤편을 이르는 것일 테고 말이다.



조금 더 걷자 ‘2에 위치한 백석항을 만난다. 지금은 비록 작은 어선 몇 척이 정박되어 있을 뿐인 한적한 포구이나 그 역사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륙(白陸) 또는 백진(白津)으로 불리던 조선 성종(成宗) 10(1479)에 석주(石珠) 안이현(安履鉉)이 방어진을 구축하고 왜구를 물리쳤다는 얘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참고로 백석리(白石里)’란 지명은 마을 북쪽에 있는 흰빛의 큰 돌에서 유래했다. ‘흰돌또는 힌둘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현재는 행정편의를 위해 백석12리로 나뉘어져 있다.



백석리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다시 옛 국도로 올라선다. 잠시 속도를 내며 지나다니는 차량들에 주의을 기울이며 걷다보니 수석(壽石)’ 가게가 눈에 띈다. 문이 닫혀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으나 밖에 진열되어 있는 돌들은 대부분 조약돌들이다. 울퉁불퉁한 바위로 세상을 나선 조약돌은 부딪치고 깨지는 시련의 시간을 거친다. 힘들고 어려운 세월을 담아 왔기기에 앙증맞은 모습이 되어 사랑을 받는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 백석리는 나전석(螺鈿石)’, 즉 나전칠기에 새겨진 듯 정교한 문양석의 산지로 유명하다. 탐석여건이 좋지 않은 곳이라서 아직은 입소문을 덜 탓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수석가게까지 들어서 있는 걸로 보아 이미 알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옛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걷자 4차선으로 확포장 된 7번 국도가 나오면서 칠보산휴게소가 길손을 맞는다. 근처에 칠보산이 위치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더덕, 황기, 산삼, 돌옷, 멧돼지, , 구리 등 보물이 일곱 가지나 있는 산이라지만 그곳까지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아니 길 건너에 있는 휴게소조차 들어가 보지 않았다. 그보다는 후포항에서 맛 볼 계획인 참가자미회가 더 구미를 당겼기 때문이다.



바닷가 언덕에는 금계국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그 뒤 바다는 투명한 옥빛으로 빛나고 있다. 쪽빛으로 연상되는 동해바다이기게 의외라 하겠다. 그렇다고 무에 문제가 되겠는가. 샛노란 꽃들이 바다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데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림은 금곡리의 아름다운 해안이 얼굴을 내밀면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는다.



길가 공터에는 조그만 쉼터도 만들어져 있다. 적당한 크기의 광장에 버섯모양의 그늘막을 만들고 그 아래에다 벤치 놓았다. 자전거 거치대도 보인다. 하지만 주차장이 없다는 것은 흠()이라 하겠다.



조금 더 진행하자 유금천(有金川)이 길을 가로막는다. ‘금곡(金谷)’이라는 마을 이름을 만들어 냈을 정도이니 사금(砂金)이 제법 많이 채취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탐방로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금곡교를 통해 개울을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서 금곡1가 시작되지만 도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주택가를 통과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금곡이란 지명은 15세기 중기인 세조(世租)가 등극하자 화를 피하기 위해 이곳으로 피신한 김한중(金漢重)의 자손이 번성하였으므로 그의 성씨인 ()’에서 따왔다는 또 다른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금곡교 다리를 건넌지 7분 만에 작은 포구를 거느리고 있는 ‘2지경(地境)’ 마을에 이른다. 영해와 평해의 경계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인데, 지금도 영덕과 울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제대로 이름을 지은 셈이다. 참고로 금곡(金谷)’이라는 마을 이름은 후릿그물로 고기를 잡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그무실 또는 망곡(網谷)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마을은 어선이 어망(漁網)을 실은 형국이라는 망곡(網谷, 그무실 : 1), 영해와 평해의 경계라는데서 유래한 지경(地境 : 2), 6세기 경 금()이 발견된 데서 유래한 유금(有金 : 3) 3개의 행정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지경마을을 지난 탐방로는 이제 울진군 관내로 들어선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금음리(金音里)에 이른다. 작은 포구를 거느린 이곳은 ‘4지경마을이다. 참고로 금음(金音) 지명은 금곡동야음동에 따온 이름이다. 1914년 군·면 통폐합 때 울진군 평해면에 편입되면서 금곡동·만산동·야음동·지경동이 병합되면서 새로 만든 이름이란다. 마을에는 총 347세대 712명이 살고 있단다. 커다란 마을이라서 4개의 마을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는데, 1리는 석골, 2리는 만산과 곧은골, 3리는 여쉼, 4리는 지경 등의 단위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올라선 옛 도로, 바다가 잘 바라보이는 곳에는 쉼터가 자리 잡았다. 정자와 벤치는 물론이고 주차장까지 마련되어 있다. 도로변도 꽃밭처럼 잘 가꾸어 놓았다.



금음 복개터널에 이를 즈음 탐방로는 다시 확장된 7번 국도와 맞붙는다. 그렇다고 씽씽 달리는 차량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둘 사이에 차단용 난간을 치고 자전거도로를 겸한 탐방로용으로 별도의 데크로드(deck road)‘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음 놓고 걸을 수 있으니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 관계자들에게 감사할 일이다.



길가는 온통 금계국(金鷄菊)의 노란빛 물결로 물들었다. 따스한 봄기운을 가득 담고서 피어난 금계국이 꽃말처럼 상쾌한 기분을 한아름 선사하고 있다. 그 속에 든 집사람의 얼굴 또한 상큼하기 짝이 없다. 저런 티 없는 모습에 반해 나는 밤낮없이 그녀에 푹 빠져 산다. 그게 바로 내 행복이고 말이다. 참고로 국화과인 금계국은 '노란 코스모스'로 불리며 여름을 알리는 들꽃으로 꼽힌다. 5월 말부터 8월까지 30~60정도 줄기 끝에 노란 꽃이 하나씩 달리면서 여름만이 가진 특별한 정취와 낭만을 전해준다.




길은 동해의 수평선을 내내 눈에 담고 간다. 시야에 들어오는 바닷가 건물은 모두 펜션이나 모텔 아니면 횟집이다.



4리를 출발한지 25분 만에 3리에 소재하고 있는 금음항(金音港’)에 이른다. 이곳도 역시 작은 어선 몇 척이 정박되어 있을 뿐인 한적하기 짝이 없는 포구이다. 등대도 눈에 띄지 않는다. 금음항에 이르자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이 이미 8,3나 걸었음을 알려준다. 후포항은 이제 십리도 채 남아있지 않다는 얘기이다. 시간도 1시간 40분 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된다.



금음항을 지나면 두 개의 개울을 건너게 된다. 물이랄 수도 없을 정도로 수량이 적지만 개울은 개울이라 하겠다. 데크로드를 놓아 물길을 건네주는 이유일 것이고 말이다. 이 근처는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진다. 하지만 그 폭은 좁디좁다. 3년쯤 전인가 이곳 금음리의 해변이 연안침식관리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이곳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 근처에 있다는 백암회센터휴게소는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휴게소라고 생각되는 곳을 만났다는 기억조차 없었다.



국도변에 세워진 광고판이 눈길을 끈다. 백년손님에 나오는 후포리 남서방과 장인 장모가 대게를 앞에 두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림으로 채워졌다. 후포마을을 세상에 알리는데 앞장섰던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남서방이다. SBS-TV의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백년손님에 출현했던 내과 전문의 남재현을 말하는데 가까우면서도 어려운 사이인 사위와 장모·장인의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는 기획의도에 딱 맞는 재미있는 소소한 일상들을 가감 없이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집안에 사람을 잘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옛말이 있다. 사위 하나 잘 들인 집 덕분에 동네가 유명해지고, 동네 사람들이 TV에도 나왔고, 주변은 관광지가 됐으니 사람하나는 제대로 들인 셈이다.



삼율천(三栗川)금음해안교를 이용해 건넌다. 다리의 이름은 금음이지만 마을은 이미 삼율리에 들어서있다. 이 근처를 통칭해서 금음리해안으로 부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모래사장이 끝나는 곳에서 만난 다리는 삼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삼율리(三栗里)7번 국도와 후포항으로 연결되는 6번 군도가 교차하는 교통중심지로 후포면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마을로 들어서면 고층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일 것이다. 이곳에서 후포항까지는 취락이 밀집되어 있으며 상가와 숙박시설, 음식점 및 연립주택,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잠시 후 후포해수욕장(厚浦海水浴場)’에 이른다. ‘후포라는 이름과는 달리 해수욕장은 삼율리에 똬리를 틀고 있다. 모래사장의 길이는 비록 250m에 불과하지만 깨끗하고 고운 모래톱이 인상적인 해수욕장이다. 특히 백사장과 쪽빛 파도가 함께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풍광은 휴가철만 되면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해수욕장에 지어진 야외공연장이 눈길을 끈다. 본 건물이야 흔한 외관이지만 그 앞에 세워놓은 요트 모양의 조형물이 색다른 것이다. ! 후포항 일대를 후포요트경기장이라고 부른다더니 이를 형상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경기 시설을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경상북도 요트협회가 해변을 관리하고 있으며, 2006년에는 제1회 전국해양스포츠제전 때는 요트의 예선경기가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했단다.



해수욕장이 끝나면 후포항(厚浦港)’이 등장한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시설은 공판장으로 싱싱한 수산물로 항상 활력이 넘친다. 이왕에 왔으니 대게를 늘어놓고 경매를 하는 장면을 보고 싶었는데 한산하기 짝이 없다. 오후라서 입항하는 배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린 이곳에서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회센터를 기대했었다. 센터에서 회를 떠다가 갯바위에 걸터앉아 먹으면 싼 가격에 신선한 회를 실컷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포는 우리가 기대했던 종류의 회센터는 갖고 있지 않았다.



후포항은 꽁치·오징어·붉은대게 등 동해에서 나는 모든 어족의 집산지이다. 그래선지 꽤 많은 어선들이 정박되어 있다. 배의 크기도 물론 많이 커졌다. 이른 아침에는 고깃배에서 부리는 각종 어패류와 어시장 풍경을 구경할 수 있고, 싼 값에 싱싱한 회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후포항은 후포면뿐만 아니라 울진군 개발의 선도 역할을 담당하고 있단다.



공판장을 지나자 한마음광장이 나타난다. 주차장으로 보이는 이 광장을 오른편에 끼고 들어가면 후포의 사위남서방의 처갓집 동네가 나온다. 그가 출연했던 프로그램이이 인기를 탄데다 마을 담벼락까지 벽화로 채운 뒤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는 곳이다. 마을 안길을 둘러본 뒤 곧바로 등기산공원으로 오를 수 있지만 우리 부부는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스카이워크의 스릴을 먼저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걷자 왕돌초광장이 길손을 맞는다. 너른 광장의 뒤편에는 울진 붉은 대게 홍보전시관이 들어앉았다. 1층은 울릉도로 들어가는 쾌속선이 출항하는 후포여객선터미널에 내주고, 2층에다 6개의 공간으로 구성된 울진대게·붉은대게의 전시관을 만들었다. 천년의 맛을 고이 간직해온다는 울진대게의 유래와 역사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니 시간이 날 경우 한번쯤 들어가 볼 일이다. 참고로 광장의 이름인 왕돌초(王乭礁)’란 후포 앞바다에 있는 해저벌판을 말한다. 동해는 불과 100m만 나가도 심해인데 후포 앞바다는 23떨어진 곳에 수심 3~25m의 해저 벌판이 있다는 것이다.



그 왼편에는 여객선을 닮은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다. ‘후포수협 수산물유통센터라고 하는데 어선이 아니라 여객선을 닮은 게 특이하다. 건물은 회식당으로 운영하며, 2층은 개별 방으로 만들어 영업하고 있단다. 3층은 2011년 현재 선박협회 사무실로 사용중이다.



여객선 터미널을 지나면 예쁜 벽화가 그려진 높다란 방파제를 만난다. 이어서 출렁다리를 바라보며 조금 더 걷다보면 왼편에 등기산 공원(燈基山 公園)’으로 올라가는 목제계단이 나타난다. 이곳이 제대로 된 입구인데도 우리 부부는 그냥 지나쳐버린다. 해파랑길 23코스의 종점인 후포항 입구로 돌아가려면 아무래도 스카이워크에서부터 탐방을 시작하는 게 옳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거 걸으니 아스라한 허공에 걸쳐져있는 스카이워크가 나타난다. 철제 구조물로 된 다리가 까마득히 높기만 한데 상부까지는 나무계단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통로는 출구 전용이라는 것이다. 조금 전에 살펴봤던 입구로 되돌아갈까 하는데 관리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바람이 세서 스카이워크 탐방은 불가능하단다.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기에 그냥 올라가기로 했다. 마침 관리인도 괜찮다는 눈치를 보내온다. 참고로 첨부된 아래 사진에서 스카이워크의 왼편 바위절벽 위에 올라앉은 시설은 갓바위전망대이다.



바람 때문에 진입이 불가능한 스카이워크의 반대방향으로 나오면 갓바위전망대가 나온다. 동해 해돋이(日出)의 명소로 알려진 이곳에 오르면 끝 간 데 없는 펼쳐지는 동해바다는 물론이고 바다를 향해 나아간 스카이워크와 그 아래에 놓인 작은 바위섬 갓바위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갓바위는 바위의 생김새가 영락없이 갓을 쓴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등기산 스카이워크는 총연장 135m 길이의 다리가 해수면에서 50m 높이에 서 있다. 긴장감을 돋우기 위해 바닥은 강화유리로 깔아 놓았단다. 하지만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중간지점을 넘어가면 부는 바람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오늘처럼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는 스카이워크의 통행을 금지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건 그렇고 스카이워크의 끝에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애틋한 사랑을 표현한 조형물이 용의 모양으로 설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의상대사는 몸이 불편하여 한 불자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그 집에서 선묘라는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선묘는 첫눈에 반하여 의상을 유혹하지만 의상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자 스스로 평생 스승으로 삼기로 작정한다. 그 후,의상이 당나라에 머무는 동안 마음껏 공양을 하다가 의상이 귀국하자 용이 되어 따른다는 설화를 표현한 조형물이라는데 말이다.



오른편에는 '후포6'의 포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음 번, 해파랑길 24코스를 답사할 때 지나가게 될 곳이다.



이젠 등기산을 오를 차례이다. 스카이워크와 등기산은 출렁다리로 연결된다. 길지도 그렇다고 높지도 않지만 또 다른 짜릿함을 선사하기엔 부족함이 없는 시설이다. 무서움보다는 기분이 왠지 좋아지는 긴장감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출렁다리 건너편의 언덕 위에 세워진 '망사정(望槎亭)'은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문헌(울진군지)은 이 정자를 조선 연산군 때의 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퇴락하여 없어졌던 것을 2010년에 새로 지었다. 고려시대 안축(安軸)과 원천석(元天錫)이 지은 망사정이란 시()로도 유명하다.



조금 더 오르자 등기산(燈基山)의 바다 쪽 산정에 후포등대(厚浦燈臺)’가 버티고 있다. 해발 64m의 등기산은 옛날부터 낮에는 흰 깃발을 꽂고 야간에는 봉화를 피워 후포항을 출입하는 선박들의 지표 역할을 해왔는데, 등기(燈基)라는 지명도 그런 연유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지금의 등대가 그 일을 이어받았다고 보면 되겠다. 등대는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높이 11m의 팔각형 흰색 건물로, 19681월에 최초로 점등했다. 지리적으로 울릉도와 가장 가까운 등대로 10초에 한 번씩 불빛이 반짝이며, 35거리까지 도달한단다.



등대 근처의 전망대에 오르자 후포항과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배 모양으로 생긴 '후포수협 수산물 유통센터''울진대게홍보전시관' 등이 보이는가 하면, 그 앞의 바다에는 후포항으로 입출항 하는 선박들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하얀등대''빨간등대'가 마치 수문장(守門將)이라도 되는 양 늠름하게 서있다



몇 개의 전망대를 오르내리며 반 바퀴쯤 돌자 이번에는 남호정(南湖亭)이 탐방객을 맞는다. 등기산의 정상에 올라앉은 정자이다. ! 등기산공원의 또 다른 명소로 꼽히는 나이가 이백년이나 된다는 팽나무는 가보지 못했다. 덩치 큰 나무의 아래에는 장의자가 놓여있고, 앉기라도 할라치면 주변 풍광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는데 아쉬운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신석기유적관과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촬영지도 둘러보지 못했다. 산악회 버스가 주차되어 있은 곳으로 가려고 서두르다보니 산 아래까지 내려와 버렸고, 다시 되돌아 올라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빠듯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반대편으로 난 샛길을 통해 등기산을 내려오자 골목이 온통 벽화로 채워져 있다. 2015년엔가 이곳에 벽화마을을 조성한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이곳을 말했던가 보다. 당시 기사는 후포리 마을의 골목과 갓바위주변의 해안도로 등 5개 구역(ZONE)에 행복만선을 주제로 벽화를 그려넣는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3구역(동화만선)인 모양이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그림이 주를 이루는 걸 보면 말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후포마을 홍보의 일등공신은 남서방이다. 그래선지 벽화도 백년손님을 테마((thema)로 꾸며진 게 많이 보인다. 그네들이 놀았을 마을 정자에는 백년손님 촬영지라는 간판까지 매달아 놓았다. 백년손님 속에 등장해 깊은 인상을 남긴 할머니들도 벽화의 주인공이 되어있음은 물론이다.



백년손님에서 소개된 동네 이발관도 빼놓을 수 없다. 이곳 사장님인 김진성씨는 마라톤 풀코스를 세 번이나 완주했단다. 하프코스와 단축코스를 완주한 횟수는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마라톤을 좋아하다보니 이봉주 선수의 팬 사인회까지 따라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선지 백년손님 촬영지라는 안내판과 함께 이봉주선수와 함께 찍은 사진도 벽면에 그려 넣었다.



트레킹 날머리는 스카이워크 근처의 주차장(울진군 후포면 후포리 564-83)

이발소를 지날 즈음 산악회장님과 전화연결이 되었다. 버스가 스카이워크 아래에 주차되어있으니 그리로 오라는 것이다. 휴대폰에 깔아놓은 앱을 이용해 방향을 잡는다. 일단은 후포6리 방향으로 잠시 걷다가 앱이 지시하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스카이워크가 나타난다. 트레킹이 종료된 것이다. 오늘은 총 3시간 12분을 걸었다. 핸드폰 앱은 14.43를 찍고 있다. 해파랑길 23코스의 본래 길이가 11.9였으니 등기산 공원을 둘러보느라 꽤 많이 걸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