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 24코스

 

여행일 : ‘19. 7. 6()

소재지 : 경북 울진군 후포면과 평해읍, 기성면 일원

산행코스 : 후포항(0.5km)등기산공원(2.9km)울진대게유래비(6.0km)월송정(2.3km)대풍헌(6.4km)기성버스터미널(소요시간 : 18.1가운데 16.973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울진군 후포항에서 출발해 기성버스터미널에 이르는 18.1km 길이의 코스로 스카이워크가 있는 등기산공원과 옛날 대게가 많이 잡혔다고 하여 기알이라고 불렀다는 거일리’, 고운 모래가 일품인 구산해변등 경관 좋은 곳들을 연이어 지난다. 해안길을 걸으면서 관동팔경 중의 하나로 달빛과 어울리는 솔숲이라는 의미의 월송정과 울릉도를 향하던 수토사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물렀다는 대풍헌’, 두문동 칠십이현의 한사람인 백암 김제의 충절 시비(詩碑) 등 선현들의 숨결도 함께 느껴볼 수 있다. 보고 듣고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들머리는 후포항 한마음광장(울진군 후포면 후포리 316-26)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영덕) 영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방면으로 올라오다 삼율교차로(울진군 후포면 금음리)에서 빠져나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한마음광장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광장 맞은편에 있는 공중화장실 옆에 설치되어 있다. 다른 방법도 있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풍기IC를 나와 36번 국도를 타고 울진 근남면까지 온 다음, 7번 국도로 갈아타고 내려오면 오래지 않아 후포항이 나온다.




실제 트레킹은 거일해변(울진군 평해읍 거일리 284)에서부터 시작했다. 후포의 등기산공원은 지난번에 이미 둘러보았기 때문이다. 등기산공원에서 거일해변까지의 구간은 눈에 담을만한 풍경이 없다기에 덤으로 지나쳐버렸다. 아니 15가 한계인 집사람의 체력을 배려했음이 가장 주된 원인이었을 게다. 아무튼 백년손님 남서방을 뒤로 떼밀면서 해안도로를 4쯤 달리니 울진의 대게 원조마을이라는 거일2에 닿는다. ‘거일이란 지명은 대게 알을 뜻하는 게알에서 유래했다. 마을 초입에는 울진 대게 원조 마을을 알리는 울진 대게 공원이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다. ‘대게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거일마을은 동해안 최대의 어족자원 보고(寶庫)라고 한다. 앞바다에는 후포항에서 거론했던 왕돌초를 안고 있단다. 대게 원조마을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커다란 대게가 바다에서 막 기어 나오고 있는데, 그 곁에는 대게를 잡는 배도 한 척 띄워져 있다. 참고로 울진은 대게의 고장이다. ‘대게를 놓고 영덕과 한 판을 벌일 정도로 대게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그래선지 울진의 많은 상징물을 장식하는 캐릭터 역시 대게 일색이었다. 저 조형물들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공원 옆에는 해상낚시공원이 들어섰다. 매혹적인 자태로 동해 한가운데를 향해 뻗어 나간 잔교(棧橋)가 볼거리인 이곳은 해상산책로와 포토존, 휴게시설 등을 포함해 총 연장 470m로 구성됐다. 평균 높이 5m 내외로 만들어진 낚시터의 경우 200명까지 동시 입장이 가능한데, 감성돔과 돌돔 등이 많이 잡힌다는 입소문을 타고 이미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어선을 이용한 다양한 바다낚시와 미역 채취 체험(갯바위 체험)도 가능하다니 한번쯤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거일1로 향하는 해안도로의 방파제는 울진의 광고판으로 활용하고 있는 듯. ‘숨 쉬는 땅, 여유의 바다 울진’, ‘marinepia 울진등 울진의 특징을 다향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어촌체험마을이라는 거일1에 들어서자 후포리 백년식당이란 간판이 길손을 맞는다. ‘6시 내고향’, ‘생생정보등 각종 매체에서 대게요리 전문점으로 소개된바 있는 맛집이다. 홍게로 만들 수 있는 거의 모든 요리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메뉴인 백년 한상은 게살비빔밥, 모둠간장게장, 수제 게살 스테이크, 통게 순두부찌개, 게살 초무침, 해물 치즈그라탕 등이 제공된단다. 그러나 직접 맛을 볼 수는 없었다. 아쉽지만 트레킹 초반부터 식당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거일2리에서 1리까지는 10분이 걸렸다.



방파제 너머 해변은 결이 고운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버려져 있는 모양새이다. 해수욕장은 아닐지라도 간이해수욕장 정도의 대접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먼 바다에서 들이닥치는 파도가 높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이 부근에서 방파제가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높아졌다. 바다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단조롭기 딱 좋은 구간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방파제에 그려놓은 알록달록하고 예쁜 벽화들이 오히려 더 재미있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길과, 바다의 수평선, 하늘의 단조로운 수평의 구도를 더 재미난 사진으로 만들어 준다.



그렇게 10분쯤 진행하자 포항공대 평해연수원이 나온다. 건물의 모양새로 보아 폐교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사용하고 있나보다.



연수원을 지났다싶으면 직산2리가 시작된다. 1916년 행정개편 때 저장리(猪場里)와 직고리, 상남산리, 하남산리가 통합되면서 직고리(直古里)와 남산리(南山里)에서 ()’자와 ()’자를 따 직산(直山)’이 된 마을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직산항으로 연결된다. ‘2종 어항이어선지 바닷가 마을의 포구치고는 상당히 큰 항구이다. 어업 전진기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선지 좌우로 나누어진 방파제에도 각각의 등대가 들어서있고, 물양장과 선양장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찾고 있는 활어 공동판매장은 눈에 띄지 않았다. 공동어판장에서 회를 뜬 다음 갯바위로 자리를 옮겨 앉으면 저렴하게 먹을 수 있으므로 들르는 항구마다 기웃거리고 있으나 아직은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오늘은 그런 행운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직산1리로 가는 해변도 역시 고운 모래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개발이 되지 않은 채로이다. 파도가 높은 탓일 것이다. 모래사장 끝에서 바닷물에 반쯤 잠겨있는 테트라포드(tetrapod)가 그 증거일 것이고 말이다.



직산1리에는 항구가 없다. 대신 물양장(物揚場)으로 여겨지는 간이시설을 만들어놓았다.



직산리를 지나자 너른 모래사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월송리와 구산리의 앞바다인데 평민의병장 신돌석(1878~1908)이 나라 잃은 설움의 시를 읊조리기도 한 곳이다. 1896년 명성왕후 시해사건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무렵, 경기도 광주의 의병부대가 영덕으로 이동해오자 18세의 어린 나이에 참전하였던 신돌석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영덕·영양·울진·삼척·강릉·양양 등의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여 일본군에게 태백산 호랑이로 불리며 독립 의병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울진의 장흥포에서는 일본군선 아홉 척을 침몰시키기도 했다. 190812월 엄동설한 추위를 앞두고 다음 해에 다시 기병하기로 하고 의병들을 해산시킨 후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에 있는 부하 김상열의 집에 칩거하였는데, 현상금에 눈이 먼 이들 형제들이 건네준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신돌석은 30년의 짧은 세월 속에 12년을 의병항쟁에 몸 바쳐 오직 민족을 위해 살다 간 의병장이었다.



월송정다리를 건너는데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단체로 지나간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오는 도중에 심심찮게 눈에 띄었던 풍경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걷고 있는 해파랑길못지않게 국토종주 동해안자전거길역시 명품으로 자리 잡았나 보다.



다리를 건너다 만나는 바닷가 풍경도 일품이다.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만들어진 세모꼴 섬도 보인다. 저런걸 보도 삼각주(三角洲)라고 하는가 보다.



월송정교를 건너 100m쯤 더 걷자 탐방로는 오른편 숲속으로 향한다. 이어서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이 만들어놓은 터널을 지난다. 흙과 모래가 반반인 소나무 오솔길이다. 원래 이곳은 만 그루의 소나무가 십 리가 넘는 흰 모래와 어울려 절경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울창했던 송림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베어내어 황폐해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6년 월송리 마을의 손치후라는 사람이 시방관리소의 도움을 받아 해송 15천 그루를 다시 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단다.



월송정 솔숲은 평해사구습지 생태공원으로 이어진다. 평해사구(平海沙丘)는 경북 유일의 사구습지(沙丘濕地)라고 한다. 울진군에서 자연유산인 해안사구와 습지를 활용한 체험형 힐링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생태공원은 습지관찰대와 생태전망대, 수변데크, 야외무대, 휴식공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구(沙丘)를 돌아서자 울창한 숲속에 들어선 정자 한 채가 나온다.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한 월송정(越松亭)’이란다. 안내판은 원래의 정자는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45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면서, 사선(四仙)이 유람하다가 이곳을 들르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는데서 월송정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찾고 있다. 중국 월나라에서 소나무를 가져와 심었다 하여 월나라 월()’자를 쓴다는 내용도 보인다. 신라의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이라는 네 화랑이 이곳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달빛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해서 달 월()’자를 쓰기도 한단다. 그러나 정자가 처음 세워진 고려 때는 경치를 감상하는 정자가 아니라 왜구의 침입을 살피는 망루로서의 역할이 컸단다. 왜구의 침입이 잠잠해진 조선 중종 때 반정공신이었던 박원종이 강원도 관찰사로 내려와 정자(亭子)로 중건했고, 월송정은 그 뒤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누대에 올라서면 멀리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풍경이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거기다 그 풍경화를 에워싸고 있는 솔숲은 금상첨화라 하겠다. 안내판은 다른 일화도 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성종이 조선 팔도의 정자 중에서 풍광이 가장 뛰어난 곳을 그려보라는 어명을 내렸단다. 이때 올라온 두 점의 그림(영흥의 용흥각, 평해의 월송정) 가운데 임금이 최고라며 꼽은 게 월송정이라는 것이다.



시멘트길을 잠시 걷자 황보천(黃堡川)이 발길을 붙잡는다. 기성면과 평해읍을 사이에 두고 동해로 흐르며 주변에 너른 농경지를 끼고 있는 하천이다. 이곳에는 보행자 전용을 다리를 새로 놓았다. 덕분에 군무교까지 한참을 돌아가야만 하는 불편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다리에서 보는 풍경도 일품이다. 솔숲 사이로 열리는 모래사장 너머로 만경창파(萬頃蒼波)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다리를 건너자 탐방로는 다시 울창한 소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구산해수욕장에 들어선 것이다. 그래선지 솔숲의 곳곳에는 캠핑객들이 들어앉았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햇볕을 가려주니 이만한 피서지도 없겠다. 숲속을 걷는데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해수욕을 하지 않아도 무더위를 식혀줄 만큼 시원하다.



잠시 후 구산해수욕장(邱山海水浴場)에 들어선다. 깨끗한 바닷물은 수심이 1.5~2m 밖에 되지 않고, 경사도 1520도로 얕고 완만한데다, 모래사장에서는 백합까지 채취할 수 있다고 해서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찾기에 딱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송림 속 야영이 가능해서 캠핑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단다.



500m 길이의 백사장은 모래가 곱기로 유명하다. 규사성분이라서 모래의 입자가 섬세하다 싶을 정도로 가늘기 때문이다.



구산항으로 향한다. 바닷가 모래사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난 길을 따르면 된다. 그런데 모래사장에서 뭔지 모를 시설공사가 한창이다. 구산방파제 준공 후, 해안류의 이상변동이 생기면서 구산리 일대의 모래가 유실된다더니 해안침식 방지시설을 시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해수욕장을 출발한지 15분 만에 구산마을(邱山里)에 들어선다. 굴미봉(掘尾峰) 아래 동쪽으로 바다와 인접하고 있어 구산포(邱山浦)라고 알려져 있으며, 마을 지형(地形)이 거북의 꼬리와 같다 하여 구미(龜尾)라고도 불린다. 마을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마음이 편해지는 조그만 어촌이다. 투명카누와 그물치기, 갯바위낚시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는 마을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울릉도와 독도를 축소시켜 놓은 조형물이 더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 울릉도·독도를 지킨 수토사의 국토 수호 의지를 후세에 전하고자 만들었단다. 울릉도와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가 분명하다는 천명(闡明)의 뜻은 덤이라 하겠다.




울릉도와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라는 증거는 마을에 위치한 대풍헌(경상북도 기념물 제165)’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풍헌은 구산항에서 울릉도로 가는 수토사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물던 관청이다. 3년마다 파견되던 수토사들은 울릉도로 도망한 죄인들을 수색하고 토벌하며, 일본인들이 울릉도와 독도에서 불법 어로를 못하도록 순찰하는 관리다. 수토사들은 울릉도와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이곳 구산포에서 며칠 동안 순풍을 기다려 파도가 잠잠할 때 출발하였는데, 순풍을 만날 경우 2~3일이면 울릉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구산항은 아까 지나왔던 직산항 보다도 훨씬 더 크다. 국가어항답게 정박되어 있는 배의 숫자나 크기도 더 커졌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공동어판장은 만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회를 떠주는 식당까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식당에서 먹는 가격이라서 부담이 가더라는 얘기이다.



또 다시 길을 나선다. 바다는 어느새 역동적인 모습으로 변해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거품을 내며 부서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몰려드는 파도는 펑퍼짐한 바위 위에다 물결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물이 맑을수록 그림자의 무늬도 맑아진다. 바다는 언제나 그렇듯 일렁이며 생동하고 있다.



길을 가다가 기이하게 생긴 바위를 만났다. ()이 승천하는 형상을 닮았는데, 반대편에서 보면 또 다른 모양새로 나타난다. 그나저나 주변 풍경과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다. 그래선지 해파랑길 여행자들의 사진첩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풍경이 되었다.



구산항에서 15분쯤 더 걸었을까 널찍한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광장의 한복판에는 백암(白岩) 김제(金濟)의 충절시(忠節詩)를 적은 시비(詩碑)를 세워놓았다. 백암은 고려 말 평해군수 재직시 고려의 망국을 통분히 생각하고 시 한수를 써서 벽에 걸어둔 채 동해로 행방을 감추었다는 고려의 충신으로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분이다.




도로 건너편 바위에도 같은 내용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충절로 몸을 던진 노련의 나루터는 어디메뇨? 뒤 따르려니 오백년 조정의 초개같은 이 신하, 바라건데 외로운 넋이라도 있어주어 붉은 저 해되어 임 계신 곳 비추리.’라는 내용인데 그의 후손들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면서 남긴 그의 시를 새겼단다. 길가는 길손께서 읽어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시라면 일부러라도 찾아와서 읽어볼 텐데도 말이다.



시비의 뒤편 바닷가 갯바위에 올라선 낚시꾼의 뒷모습이 그림처럼 곱다. 이 근처의 갯바위가 낚시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바다낚시 명당이라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갯바위를 후리는 파도에 맞서 손끝으로 왈칵 달려드는 짜릿한 손맛은 직접 느껴본 사람만이 그 참맛을 알 수 있다니 한번쯤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 不如一見)’이요 백견이 불여일행(百見而 不如一行)’이란 말도 있지 않겠는가.



제법 큰 마을인 봉산2바닷가에 이르니 붉은대게 조형물이 방파제를 따라 끝이 없다. 앙증맞게 줄을 서서 해안가를 장식하고 있는데, 그걸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대게를 얹고 있는 막대가 울진의 특산물을 담은 사진까지 매달고 있기 때문이다. 속살이 쫄깃하고 담백하여 궁중에 진상되어 왔다는 울진대게와 다양한 영양분을 함유한 붉은대게, 울진 송림이 키워낸 송이버섯, 청정해역에서 자란 울진고포미역 등 종류도 다양하다.



종착지인 기성면이 가까워진다는 의식 때문인지 걸음이 빨라진다. 하지만 무작정 속도를 낼 수는 없다. 다양한 모양새의 기암들이 바닷가를 수놓고 있기 때문이다. 새하얀 모래 해변이 기암괴석들을 품으면서 시시각각 다른 풍광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데 어찌 걸음을 재촉할 수 있겠는가.



봉산1로 향하는데 표산봉수대에 대한 안내판이 길가에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에 설치된 평해군 소속의 봉수대 셋 가운데 하나로 남쪽의 후리산봉수와 북쪽의 사동산봉수에 연결되어 소식을 전했다고 적혀있다. 안내판은 또 해발 78.3m의 산정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적고 있지만 이방인인 나로서는 그게 어디쯤인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저 언덕 위에 보이는 저 안테나시설이 있는 자리가 아닐까 추측해볼 따름이다. 그렇다면 같은 자리에 같은 목적의 시설물이 시대를 초월해서 들어선 셈이 된다.



봉산리의 바닷가 역시 결이 고운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생겼던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그렇게 20분 넘게 걸으면 추난개교에 이른다. 이름이 조금 묘하지만 이에 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심코 건널 일은 아니다.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자칫 엉뚱한 길로 진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추난개교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널찍한 도로를 따라 곧장 진행하는 게 옳은데도, 해파랑길이니 해안을 따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해안도로로 빠져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봉산1’, 그중에서도 항곡마을에 이르면 높다란 해안 절벽이 더 이상의 진행을 막아버린다. 그런데도 우린 해안길을 따랐던 것이다. 동네 아주머니가 길이 끊긴다는 걸 알려주어 도중에 돌아설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다시 올라선 구도(舊道)는 오르막의 연속이다. 이어서 고갯마루를 넘어서서 만나게 되는 기성교차로에서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 고갯마루에 있는 울진비행장 앞에서 옛 해파랑길이 오른편 숲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지도에 억매이지 말고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면 된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비행장에서나 볼 법한 시설물이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울진공항이 있다고 했다. 2003년 개항을 목표로 건설되었으나 수요가 없어 운용을 포기해버렸으니 애물단지 시설이라 하겠다. 현재는 비행교육 훈련센터 용도로 활용하고 있단다. 도로 왼편 높다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지역이 비행장일 것이다.



날머리로 가는 길에 효자비각(孝子碑閣)을 만났다. 황응청이라는 효자의 행실을 기리기 위해 세웠단다. 손바닥만 한 지붕을 이고 있는 비각 앞에 세워진 표지석에는 그의 행실이 자세히 나열되어 있다. 언제 봐도 반가운 내용들이다.



조금 더 걷자 기성교가 나온다. ‘척산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인데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조금만 더 걸으면 해파랑길 24코스의 종점인 기성버스터미널이 나오는데도 해파랑길이 곧 바닷길이라는 선입감을 고집하다가 엉뚱한 길로 진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해파랑길의 지도도 길을 잘 못 표기하고 있다. 아까 울산공항의 앞에서 오른편으로 갈려나갔던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만 만날 수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해파랑길 24코스의 날머리는 기성 공용정류장(기성면 척산리 260).

우리 역시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산악회에서 깔아놓은 방향표시지가 오른편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린 기성리(箕城里) 포구까지 거의 다 갔다가 공용버스정류장로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1가까이를 더 걷고서야 말이다. ! 해파랑길의 안내판과 스탬프보관함은 정류장 앞의 오른편에 설치되어 있다.



산악회의 버스는 기성항(箕城港)에 주차되어 있었다. 너른 들녘 사이로 난 농로를 따라 잠시 걷자 마을회관이 나오고 이어서 마을안길을 지나면 작은 포구에 이른다. 면소재지치고는 엄청나게 작은 항구이다. 그러니 횟집이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는 상점까지도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정류장 근처에 행정타운이 건설되면서 이곳은 한적한 어촌마을로 변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3시간 50분이 걸렸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에 16.97를 걸었다고 찍혀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