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9코스
여행일 : ‘19. 5. 13(월)
소재지 : 울산광역시 동구와 북구 일원
산행코스 : 일산해변(3.0km)→현대중공업(4.9km)→동부회관(2.5㎞)→주전봉수대(3.4km)→주전해변(3.2km)→강동축구장(4.8km)→정자항(거리·시간 : 19.4㎞ 가운데 14.78㎞를 4시간 10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이번 구간도 역시 주전해안과 당사해안 등과 같은 아름다운 해안길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하지만 다른 구간들보다는 월등히 많은 숲길이 포함되어 있다. 후반부에 만나게 되는 ’강동사랑길‘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이라 하겠다. 강동사랑길이란 북구(울산시)가 이야기와 설화 등을 간직한 지역 내의 관광지들을 믿음·윤회·연인·부부·배움·사색·소망 등 7개의 테마로 구간을 나눠 조성한 둘레길이다. 고리(環) 모양으로 생긴 각각의 구간들은 순서에 따라 서로 연결되는데 숲길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해파랑길 트레커(trekker)같은 걷기 여행자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중반에 만나게 되는 ’남목역사누리길‘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울창한 숲길을 걷는 도중에 ’주전 봉수대(烽燧臺)’와 ‘남곡 마성(馬城)’과 같은 문화재까지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산해변에서 봉대산 입구까지의 초반은 최악이라 할 수 있다. 울산의 대표적인 기업인 현대중공업의 담장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지루할 정도로 오래 걷으면서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이 내품는 매연(煤煙)을 맡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들머리는 ’일산해변‘(울산시 동구 일산동 947-4)
동해고속도로(포항-울산) 남경주 IC에서 내려와 ’산업로(지방도)‘와 ’14번 국도‘를 징검다리 삼아 ’7번 국도‘로 올라선 뒤 울산 시내(명촌교북단교차로 : 울산시 북구 명촌동 930-1)로 들어온다. 이어서 태화강변의 ’아산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일산해수욕장사거리(동구 일산동 597)‘가 나온다. 우회전한 다음 곧이어 나타나는 회전교차로에서 9시 방향으로 들어서면 잠시 후 일산동행정복지센터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 8코스의 종점이자 9코스의 시점임을 알리는 해파랑길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행정복지센터의 맞은편 해안가에 설치되어 있다.
▼ 실제로 트레킹을 시작한 곳은 ’동부 패밀리아파트‘의 부속시설인 동부회관(동구 동부동 218-1) 앞이다. 참가자들의 단축 의견을 수렴한 산악회측이 버스로 이곳까지 이동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건강을 위해 시작한 트레킹이라는 점을 감한하면 최선의 선택이라 하겠다. 현대중공업의 담벼락을 따라 이어지는 대로변(大路邊)을 걸으면서 일부러 매연(煤煙)에 찌들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트레킹 거리도 6㎞가 단축되었음은 물론이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점심 때 반주까지 곁들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 왼편에 패밀리아파트의 담벼락을 끼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오른편 산자락 아래에다 일렬로 주차장을 만들어놓아 걷기가 썩 좋은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산자락에 위치한 ’남목마성‘을 찾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테니 어쩌겠는가. 그렇게 10분쯤 들어가자 ’말(馬)‘ 몇 마리가 길손을 맞는다.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남목생활공원‘이라는데 뒷산이 마성(馬城)이었다는 점을 홍보하기 위해 말의 조형물을 설치했나보다. 참고로 마성(馬城)이란 말이 담을 뛰어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장의 둘레를 돌로 쌓은 담장으로, 마치 성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조 초기에 외교나 군사적으로 말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자 처음에는 각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목장 관리를 겸임케 했다가 뒤에 가서는 전임 감목관(監牧官)을 배치하기에 이른다. 이곳 방어진 목장의 경우에도 초기에는 전임 감목관을 두지 않고 있다가 효종 5년(1654) 이후에 배치하여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 목장이 폐지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하나 더, 조선조 초기에 펴낸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의 울산군 목장 조의 ‘군 동쪽 적진리에 방어진 목장이 있는데 그 둘레는 47리요, 말 360필이 방목되어 있고, 수조가 풍부하다’는 기록도 기억해두자.
▼ 탐방로는 공원의 끄트머리에서 시작된다. 들머리에 이정표(남목마성 0.35㎞, 봉호사 2.18㎞/ 동부회관 0.4㎞)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오르기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거리 또한 짧기 때문이다.
▼ 10분 정도를 가파르게 올라서자 능선삼거리에 이른다. 그런데 이정표(삼거리↑ 0.6㎞, 주전봉수 1.24㎞/ 삼목체육소공원← 0.35㎿)/ 현대중공업→ 0.75㎞/ 동부회관↓ 0.7㎞) 옆에 ‘남목마성 (南牧馬城 :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8호)’에 대한 안내판이 두 개나 세워져 있다. 이곳이 남목마성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마성(馬城)이란 말이 담을 뛰어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장의 둘레를 돌로 쌓은 담장이다. 성종(成宗) 2년(1471) 신숙주(申叔舟)가 쓴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에 보면 1474년에 예조좌랑 남제(南悌)가 왕명을 받들어 항거왜인(抗拒倭人)의 실태를 조사하면서 그린 삼포(三浦)의 지도가 추가 삽입되어 있다. 이 가운데 염포(鹽浦) 지도에 염포의 동쪽 산정 일대에 사복시(司僕寺) 소속의 방어진(方魚津) 목장이 있다. 마성은 두 군데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곳, 즉 염포동의 중리와 성내마을의 경계를 따라 방어진행 도로의 남쪽 산록을 지나 현재의 현대공업고등학교 뒤편을 거쳐 동해로 빠지는 곳이다.
▼ 임도를 따라 고개 하나를 넘자 ‘이정표(주전가족휴양지 2.25㎞, 봉호사 0.64㎞/ 남목시장 1.88㎞)’와 ‘남목역사누리길 종합안내도’가 세워진 삼거리가 나온다. 이어서 차량통행이 가능한 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봉호사 갈림길’이다. 남목마성에 15분 거리인데 봉호사의 표지석 옆에다 봉대산의 정상표지석을 하나 더 세워놓았다. 183m라는 산의 높이까지 새겨 놓았지만 하도 밋밋해서 정상의 위치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2016년에 조성된 ‘남목역사누리길’은 동부동과 주전동 일원의 기존 등산로를 지역의 역사·문화적 자원과 접목시킨 총 11km의 누리길이다. 종합 안내판과 이정표는 물론이고 야자매트와 침목계단, 로프펜스 등을 설치해 주민들의 여가활용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 50m쯤 더 걸었을까 봉대사 앞 삼거리(이정표 : 주전봉수대↑ 60m/ 주전가족휴양지← 2.54㎞, 망양대 0.32㎞/ 삼거리↓ 0.6㎞)가 나온다. 다음 행선지인 주전해안은 왼편으로 가야하니 봉수대를 둘러본 다음에는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
▼ 삼거리 오른편에 공터가 보여 다가가보니 세계적인 조선회사인 현대중공업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1973년 현대건설의 조선사업부에서 독립한지 10여 년 만에 선박 수주 및 건조량 세계 1위를 달성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세계 제1의 조선 대국으로 이끈 굴지의 기업으로 조선과 해양·플랜트·엔진기계·건설장비 등의 영역에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세계 경제의 불황으로 한때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현재는 또렷한 회복세로 돌아섰다고 전해진다.
▼ 먼저 봉호사(烽護寺)에 들러보기로 한다. 봉호사는 주전봉수대의 부속 건물인 ‘봉대사(烽臺舍)’가 있던 자리에 지어진 사찰이다. 봉수의 기능이 없어지면서 그 자리에 절이 들어섰단다. 그래선지 절의 이름도 봉수대(烽燧臺)의 '봉(烽)'자에 보호할 '호(護)'자를 쓰고 있다. 절은 대웅전과 요사채가 전부일 정도로 그 규모가 작다. 하지만 '주전봉수대관련고문서(朱田烽燧臺關聯古文書 : 울산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6호)'라는 귀중한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단다. 울산부사가 박춘복·박명대 부자에게 내린 주전봉수대 별장 임명장과 별장과 인근 동수에게 근무를 철저히 하고 군포를 잘 징수하라는 전령문 등 철종 9년(1858)부터 고종 33년(1896)까지의 고문서(古文書)들인데, 이를 통해 주전봉수대가 수령의 관할 아래에 있었고 봉수군은 봉수를 담당하면서 유사시에는 적군을 맞아 싸우는 군사 역할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봉수군역은 봉수대 인근 주민들이 담당하였고 군량 등 운영경비도 이들이 공동으로 부담하였음을 알 수 있단다(문화재청 자료에서 발췌)
▼ 대웅전의 뒤로 가자 ‘해수관음상’이 사바세계에서 온 중생을 맞는다. 관세음보살은 현세에서 33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중에 바다를 향한 관음보살이 해수관음보살인데, 이 부처는 소원을 잘 이루어 주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다. 그래선지 울산시에서 세운 안내판에도 한번쯤 불공을 드려볼 것을 권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 해수관음상 앞에서면 비취빛 동해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가족휴양지로 소문난 주전해안이 발아래에 놓여있음은 물론이다.
▼ 해수관음상의 뒤로 오르면 ‘주전봉수대(朱田烽燧臺)’가 나온다. 봉수는 과거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의 군사통신제도이다. 조망이 양호한 산정에서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국경과 해안의 안위를 중앙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봉수는 성격에 따라 중앙봉수라고도 불린 서울 목멱산의 경봉수(京烽燧)와 해륙과 변경의 최전선에 위치한 연변봉수(沿邊烽燧), 그리고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로 분류된다. 그 중에서 연변봉수는 바다정찰과 신호전달, 해안경비뿐만 아니라 적의 침략 시 자체적으로 응전·방어하는 임무까지 맡고 있었다. 주전봉수(남목봉수)는 이 가운데 연변봉수로 분류되는데 이웃인 천내(川內)에서 봉수를 받아 유포(柳浦)로 소식을 전했다. 18세기 유포봉수가 폐지된 후에는 북쪽으로 경주의 하서지봉수로 보냈단다. 1981년 정비사업을 완료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주전가족휴양지 방향이다. 잠시 후 ‘야생화단지 갈림길’과 체육공원삼거리가 연이어 나타나나 개의치 않고 직진한다. 단 200m쯤 더 걸으면 또 다른 삼거리가 나온다는 것만 잊지 말자. 그곳에서 오른편으로 들어서야 8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망양대(望洋臺)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망양대는 울산의 고지도(古地圖)에 나오는 지명이다. 옛날 봉대산 지역을 망양대라 불렀다는 자료에 착안해서 옛 지명을 계승하고, 큰 바다를 바라보는 좋은 명소라는 뜻에서 정자를 짓고 이름을 망양대라 했단다.
▼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까지도 완만해서 걷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니다. 길가에는 운동기구는 물론이고 벤치와 원형의 식탁까지도 배치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건 울창한 소나무숲이 아닐까 싶다. 굵거나 오래묵지는 않았지만 숲이 짙기 때문에 짙은 솔향을 친구삼아 걸을 수가 있다. 그래서 길가에다 ‘봉대산 산림욕장길’이란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나 보다.
▼ 그렇게 15분 정도를 걷자 왕복 4차선인 ‘미포산업로’가 앞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탐방로는 이 도로의 아래에 뚫어놓은 굴다리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 조금 더 진행하자 ‘보밀길’이라는 이름의 도로에 내려선다. 도로의 앞 바닷가가 모래와 잔자갈이 골고루 섞인 자그만 해수욕장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할 게 없는 풍경이다. 아니 꽤 많은 캠핑카들이 도로변 공터에 늘어서 있는 풍경은 특별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참! 주전천을 건너면 ‘주전 가족휴양지 캠핑장’이 나온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들어앉았을 뿐만 아니라 해수욕장에다 담수(淡水)가 흐르는 개울까지 옆구리에 차고 있으니 가족휴양지로 이만한 곳도 없을 듯 싶다. 거기다 바닷가에는 낚시하기 딱 좋은 갯바위까지 널려있으니 개개인이 입맛에 맞춰가며 놀 수도 있지 않겠는가.
▼ 이후부터는 해안도로를 따른다. 명품 드라이브코스로 소문난 ‘주전동’ 해안길이다. 주전동은 바닷가를 따라 길게 들어선 동네다. 남북으로 얼추 3㎞가 넘고 하리항과 큰불항, 주전항 등 항구가 3개나 된다. 바다에 면해 있어도 8할 이상이 임야라 옛날에는 농사짓는 이가 많았다 한다. 조선 정조 때는 해안 마을을 주전해리(朱田海里), 언덕 위의 마을을 주전리라 했다. 고종 때 주전동으로 통합되었고 1911년에는 주전동(酒田洞)이 되었다. ‘붉은 주(朱)’를 뺀 자리에 ‘술 주(酒)’를 넣은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지만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일이니 어쩌겠는가. 본래의 이름으로 다시 돌아왔다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 그렇게 잠시 걷자 특이한 조형물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다가가보니 ‘주전마을 제당이야기’가 적혀있다. 주전동은 마을 속에 작은 마을이 7개나 있었단다. 상마을, 중마을, 아랫마을, 봉수대 아래에 있는 보밑마을, 큰불마을, 언덕 위의 번덕마을, 새마을 등인데. 마을마다 제당이 있었고 모두 합하면 10곳이나 된단다. 이런 세분화는 다른 어촌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현상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던 제당들은 이제 없다고 적혀있다. 2005년 경로당을 신축하면서 모든 위패를 모아 2층에 모셨고, 주전동 남쪽 어귀에 사라진 제당들을 기억하는 조형물과 표지석을 세워놓았단다.
▼ ‘김순연 시인’의 집도 보인다. ‘국제신문’의 시조 부문과 ‘한울문학’의 시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시인으로 ‘몽돌여인’과 달그림자 머무는 그곳‘, ’누가 주전동 좀 사가소‘ 등의 저서를 발표했다. ‘꽃을 꺾어 시를 얻기보다는 시를 접어 꽃을 간직하는 향기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시인의 마음에 공감하며 잠시지만 시선을 고정시키다 자리를 뜬다.
▼ 잠시 후 주전항에 이른다. 179m나 된다는 방파제의 끄트머리에는 빨간 옷을 입은 등대가 우두커니 서 있다. 선박의 안전 운항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다보탑(多寶塔) 모양을 형상화했다는데 잔잔한 물결 사이로 푸르름과 빨강 등대가 어우러지며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방파제도 알록달록 색동옷을 입었다. 바닷속 풍경에 더해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특히 높이가 5m나 된다는 해녀반신상이 돋보인다. 주전마을을 대표하는 게 해녀들이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 주전항을 지나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큰 해안이 나타난다. ‘울산 12경’ 중 하나인 ‘주전 몽돌해안’이다. 주전은 땅이 붉다는 뜻으로 실제 땅 색깔이 붉은 색을 띠고 있다. 동해안을 따라 15km의 해안에 직경 3~6cm의 새알 같이 둥글고 작은, 까만 몽돌이 길게 늘어져 절경을 이루는가 하면 주변에는 노랑바위, 샛돌바위 등 많은 기암괴석이 산재하고 있다. 그나저나 작은 몽돌사이로 드나드는 파도소리에는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강인함이 들어 있다. 참고로 ‘울산 12경’에는 태화강대공원과 십리대숲, 대왕암공원, 가지산 사계, 신불산 억새평원, 간절곶 일출,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각석, 강동·주전 몽돌해변, 울산대공원, 울산대교, 장생포 고래문화마을, 외고산 옹기마을, 대운산 내원암 계곡 등이 포함되어 있다.
▼ 해안에는 오랜 시간 파도에 깎여 만들어진 몽돌이 널려있다. 바닷가에 내려서니 잡으면 미끄러질 듯 윤기 나는 몽돌 사이로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파도소리가 천상의 소리인 듯 더없이 감미롭고 몽환적이다. 하긴 동구(울산)에 ‘소리9경’을 선정하면서 이곳 주전해변의 몽돌소리를 8번째로 꼽았으니 이를 말이겠는가. 참고로 ‘울산 동구 소리9경’에는 동축사 새벽종소리, 마골산 숲 사이로 흐르는 바람소리, 옥류천 계곡 물소리, 현대중공업 엔진소리, 신조선출항 뱃고동소리, 울기등대 무산(霧散)소리, 대왕암 몽돌 물 흐르는 소리, 주전해변 몽돌 파도소리, 슬도명파 등이 포함되어 있다.
▼ 주전해안의 끝은 운곡천(성골천)이다. 주전 새마을과 아래성골 사람들의 천연 목욕탕 역할을 했다는 개울이다. 물길이 끊어놓았던 길을 다시 잇는 다리(운곡교)를 건너자 이젠 구암마을이다. 아니 북구(어물동, 於勿洞)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마을 표지석을 확인하고 2027번 지방도를 따라 조금 더 걷다가 ‘솔마레 펜션’앞에서 다시 바닷가로 내려선다.
▼ 주전해안에 비해 폭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이곳도 역시 몽돌해안이다. 울산의 몽돌해안은 7~8월이 피크라니 그때는 이곳까지도 피서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나저나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백사장은 여름철 피서의 백미(白眉)가 분명하다. 하지만 모래 대신 동글동글한 몽돌이 덮인 몽돌해변도 나름 매력적이다. 파도가 닿을 때마다 잘그락거리는 몽돌 소리가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니다.
▼ 해안길은 오래지 않아 끝나버린다. 그리곤 2027번 지방도로 또 다시 올라서는데, 해파랑길 9코스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이 아닐까 싶다. 차량통행이 제법 많은데도 인도와 차도가 구분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인도가 아예 없다고 보는 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가장자리에 그어놓은 하얀 선의 밖으로는 보행이 불가능했으니까 말이다.
▼ 조심조심 10분쯤 걷자 금천교가 나온다. 물론 운곡교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다리를 건너자 ‘강동사랑길’의 안내도가 눈에 띈다. ‘강동사랑길’이란 울산 북구에서 개설한 ‘둘레길’로 정자항에서 출발해 당사항과 어물동 등 정자바닷가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 총 길이 14km로 신(信)·생(生)·애(愛)·정(情)·학(學)·상(想)·망(望) 등 7가지 주제로 나뉘는데 각각의 구간이 고리(環)처럼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구간의 종주는 한 바퀴를 빙 돌아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끝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해파랑길은 7개 구간 모두를 조금씩이나마 걷게 된다고 보면 되겠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각 구간의 특징을 조금 더 알아보자. 정자항과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의 발자국 흔적과 조선시대 설치된 유포석보 등을 도는 코스는 '믿음의 강동 사랑길(信)'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윤회의 강동 사랑길(生)'은 곽암과 거북바위, 수로낭 등에 얽힌 설화를 엮어 만들었으며, '연모의 강동 사랑길(愛)'은 사랑 이야기로 옥녀로, 강쇠로, 옥녀봉, 일신 전망대 등을 잇는다. 까치봉과 해녀의 집, 금실정은 '인정의 강동 사랑길(情)'을 탄생시켰으며, 자연학습장과 봉수대, 축구장은 '배움의 강동 사랑길(學)'을 만들었다. '사색의 강동 사랑길(想)'은 당사항과 용바위, 추억의 학교, 몽돌밭으로 펼쳐지며, '소망의 강동 사랑길(望)'은 어물동 마애여래좌상과 소망의 등산로 등을 아우른다.
▼ 강동사랑길 안내도를 살펴보다가 구암마을 방향에 바닷물고기를 닮은 조형물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방파제 위에 세워진 걸로 보아 등대가 아닐까 싶다.
▼ 금천교를 지난 탐방로는 또 다시 바닷가를 따른다. 담장에 그려놓은 예쁜 벽화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참! 그러고 보니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강동사랑길’의 6구간인 '사색의 강동 사랑길(想)'이다. 이 구간은 당사항과 용바위, 추억의 학교, 몽돌밭 등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진다. 담벼락의 벽화는 둘레길을 조성하면서 함께 그려 넣은 모양이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용바위’가 나온다. 하늘나라에 살던 뱀이 옥황상제로부터 오해를 받고 지상으로 쫓겨나 살다가 이후 진실이 밝혀져 용으로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바위이다. 바위가 둘로 갈라지면서 하늘로 올랐는데, 이때부터 물길이 다시 트였다는 것이다. 목제계단을 이용해 바위의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했는데 입구에 용바위에 얽힌 옛 이야기를 적은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그런데 얘기의 스토리가 조금 거북스러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무래도 뱀과 거북이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쁜 역할 단골이던 뱀이 이곳에서는 선량한 배역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거북이가 악역을 대신함은 물론이다.
▼ 계단을 오르자 '승천하는 용(龍)'을 배경으로 한 ‘포토존’이 만들어져 있다. 전설이 깃든 용바위를 모티브(motive)로 삼아 승천하는 용으로 재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아무튼 용의 발등에라도 앉을라치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 용바위 옆에는 길이 156m의 잔교(棧橋)가 설치되어 있다. 낚시 전용인데 소정의 요금을 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단다. 우리와 같은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셈이다. 참! 저 다리의 끄트머리가 ‘넘섬’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방파제 앞에 앞뒤 생각 없이 설쳐대는 파도를 넘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바위라는 안내판까지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사실일 것이다.
▼ 마을 앞 포구를 지나는데 ‘자연산직판장’ 건물이 2층으로 지어져 있다. 안주감이라도 좀 챙길까 해서 기웃거려봤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다. 관광객들이 찾는 주말에나 문을 여는 모양이다. 참고로 이곳 ‘당사(堂舍)’는 동네 입구에 당산제(堂山祭)를 지내던 당집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방파제 앞에 세워놓은 안내판에는 그런 내용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청정해변의 일출과 바위, 자갈마당 등에 대한 찬사만 잔뜩 늘어놓았을 따름이다. 멀리 태평양에 살던 파도가 경치에 이끌려 이 마을까지 왔다는 자랑을 곁들이면서 말이다. ‘강동사랑길’을 조성했고, 기왕에 스토리텔링까지 시도했으니 마을에 대한 구전(口傳)까지 곁들였더라면 금상첨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 해안도로를 따라 잠시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며 바다와 이별을 고한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으나 해파랑길 표식이 또렷하니 주의만 조금 기울인다면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부부는 비록 들머리를 놓쳐버리는 우(愚)를 범했지만 말이다.
▼ 잠시 후에 올라서는 1027번 지방도에서는 오른편 방향이다. 이어서 몇 걸음 걷지 않아 만나는 또 다른 삼거리에서는 왼편 도로를 따른다. ‘2002 FIFA 월드컵, 훈련캠프장’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고하면 되겠다. 당시 터키대표팀이 훈련을 하던 ‘강동축구장’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인데 가로수용으로 심어놓은 굵고 오래 묵은 벚꽃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봄에 찾아올 경우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실컷 구경할 수도 있겠다.
▼ 바닷가를 떠난 지 12분 만에 현대중공업에서 건설했다는 ‘강동축구장’에 이른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 축구팀의 기술훈련을 위해 지은 운동장으로 총 3만여 평에 이르는 면적에 사계절 잔디축구장 2면과 잔디광장, 산책로, 원두막 등의 공원시설과 함께 동해바다의 절경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쾌적하고 아늑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첫 훈련장소로 택한 곳도 이곳 강동 축구장이었다고 한다. 또한, 월드컵 기간에는 ‘형제의 나라’로 유명한 터키의 국가대표 축구팀이 훈련캠프장으로 사용했었단다.
▼ 축구장을 지나자마자 길이 둘(이정표 : 까치봉↑ 1.6㎞, 옥녀봉 1.9㎞/ 우가항→ 0.7㎞/ 당사항↓ 0.7㎞)로 나뉜다. 해파랑길은 우가항을 버리고 까치봉으로 향한다. 들머리에 ‘강동사랑길 5구간’의 방향표시가 되어있다. 그런데 방향표시가 거꾸로 되어있지 않나싶다. 이곳은 5구간이 끝나고 4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중간에 능선을 치고 오르는 오솔길이 나뉘기도 하나 신경쓸 필요는 없다. 반대편에서 길은 다시 합쳐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자 ‘까치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왼편 산자락에 세워져 있다. 해파랑길 표식도 같은 방향을 지시하고 있으니 망설이지 않고 들어서고 본다. 숲길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무가 뱉어내는 산소를 깊이 마시니 머리가 맑아지는 듯하다. 삼림욕하기 좋은 곳이라 하겠다.
▼ 가파르게 5분쯤 올라서자 우가산(까치봉) 정상이다. 양 옆에 전망데크를 끼고 있는 정상은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삼각점(울산 306) 외에는 이곳이 우가산의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줄만한 공식적인 표식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그 흔한 이정표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가 매달아놓은 정상표지판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대신 벤치와 피크닉용 식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망원경도 설치했다. 툭 트이는 조망을 실컷 구경하다 가라는 모양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우편엽서 모양의 ‘포토죤’이 아닐까 싶다. 엽서 속에 아름다운 강동 풍경과 인물을 함께 담아 소중한 사람들에게 보내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참! 스탬프보관함도 보인다. 우가산을 올랐다는 것을 기념해보라는 모양이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뛰어나다. 쪽빛 동해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가 하면 우편엽서 안으로 들어온 바닷가 풍경이 한 폭의 풍경화로 되살아난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 말이다. 반대편 망원경도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들여다보기라도 할라치면 당사항은 물론이고 저 멀러 주전해안까지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 이젠 하산을 서두를 차례이다. 가파른 침목(枕木) 계단을 잠시 내려서면 아까 헤어졌던 임도를 다시 만나고, 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걸으면 강동사랑길 3구간과 4구간이 겹치는 강쇠길·옹녀길의 들머리(이정표 #1 : 강쇠길·옹녀길→ 0.1㎞/ 옥녀봉↑ 1.2㎞/ 강동축구장↓ 1.6㎞, 이정표 #2 : 제전항 1.5㎞, 정자항 3.4㎞/ 우가산(까치봉) 0.2㎞, 당사항 2.6㎞)가 나온다. 옥녀봉으로 연결되는 옥녀봉을 버리고 오른편 오솔길로 내려서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옹녀나무’라는 안내판이 길손을 맞는다. 그런데 어떤 나무가 ‘옹녀’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탐방로가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나있는데 혹시라도 용녀의 품속으로 들어가듯이 지나가보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만나게 되는 ‘강쇠나무’도 고민스럽기는 매한가지다. 한 그루의 나무가 두 줄기로 자랐는데 그 사이에 짧고 뭉텅한 삭정이가 조금 남아있을 따름이다. 저걸 보고 남근(男根)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 길은 무척 곱다. 평평하면서도 보드라운 흙길인데 조금이라도 경사가 가파르다싶으면 야자매트를 깔아놓아 걷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니다. 울창한 오리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난 탐방로의 곳곳에는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느긋하게 쉬어가면서 ‘사랑길’의 묘미를 되새겨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이 길은 옹기를 타고 물 밖으로 나온 바다의 공주 옹녀와 옹녀를 사랑한 강쇠의 이야기가 서린 길이다. 이런 이야기를 그냥 흘려버릴 수 없었던지 1027번 지방도가 내려다보일 즈음에 이런 내용을 적은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정신적 운우의 정을 나누던 그네들이 주고받은 노래와 함께이다.
▼ 1027번 지방도를 건너면 제전포구(이정표 : 정자항← 1.3㎞/ 우가항→ 2.4㎞/ 옥녀봉↓ 2.6㎞)로 들어선다. 옹녀·강쇠길로 들어선지 20분 만이다. 옛 장어마을의 영광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 마을로 ‘강동사랑길’의 3구간과 4구간의 출발과 도착 지점이기도 하다. 제전마을은 한때 전복과 장어, 복어 등 각종 수산물로 번성했던 곳이다. 1980년대에는 ‘제전 숯불장어’가 미식가들의 입소문을 타고 영남권 최고의 ‘맛’으로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주민들 사이의 갈등 등으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끝내는 이름만 남고 모든 게 사라져버렸단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2011년 제전장어의 옛 맛을 재현한 ‘사랑길 제전장어(북구 마을기업 1호)’가 문을 열면서 관광객들이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단다. 그런 얘기를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지 마을회관 2층에는 ‘박물관’까지 만들어놓았다. 제전마을 이야기와 미역·전복·돌김 등을 채취해온 해녀문화를 재연, 주민들이 살아온 삶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1층은 물론 마을기업에서 운영하는 식당이다. 숯불에 구워낸 장어구이는 물론이고 전복과 함께 후려낸 장어 매운탕, 붕장어구이 요리까지 팔고 있다니 한번쯤은 들어가 볼 일이다.
▼ 마을 앞 방파제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제 기능을 다한 어구(漁具)들을 예술품으로 환생(幻生)시켜 문화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마을 박물관’ 만들기 사업의 일환일지도 모르겠다. 참! 방파제에는 ‘제전마을’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적은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아주 먼 옛날 장어란 놈이 공주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던 모양이다. 사랑의 열병을 앓던 장어가 공주와 혼인시켜줄 것을 용왕께 애원했는데, 너무 화가 난 용왕님이 장어의 눈알을 빼버리는 형벌을 내린 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로 태평양 바다까지 헤엄쳐서 다녀오면 공주와 혼인을 시켜주겠다고 했단다. 이를 믿은 장어는 지금까지도 죽어라 헤엄쳐가고 있는데, 많은 장어들이 그 눈먼 장어를 위로하기 위해 이곳 제전항으로 모여든다는 것이다.
▼ 이젠 판지항으로 갈 차례이다. 지금부터는 해안길을 따라 걷는다. 바다를 바로 옆에 끼고 걷는 즐거움, 밀려드는 파도소리와 몽돌이 구르는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쳐가고, 맑은 하늘에 새겨진 한 조각의 구름이 사색에 들게 한다.
▼ 15분 후 판지마을에 이른다. 청정 바다와 함께 조용한 휴양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푸른 바다와 멋진 갯바위, 아늑한 펜션과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데 ‘꿈꾸는 바다 펜션’도 그중의 하나라 하겠다. 이국풍(異國風)의 목조건물로도 모자라 제 기능을 다한 버스까지 배치해 주변 풍경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풍차로 장식된 별관의 앞에 배치한 다른 버스는 아예 카페로 만들어버렸다, 참! 이곳 판지항의 방파제에도 마을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먼 옛날 어느 여신(女神)이 ‘우’하고 입김을 세게 불었다고 한다. 그러자 입김에 몰린 바위들이 바닷가로 몰렸고 그중 한 곳에 둥그런 구멍이 뚫렸던 모양이다. 이를 본 여신이 ‘해지’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지금의 ‘판지항’이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총각이 여신의 신발을 훔쳐가게 되었는데, 관리를 잘못 한 탓에 기능까지 사라져버렸던 모양이다. 덕분에 해국(海國)으로 돌아가지 못한 여신이 총각과 결혼하게 되었고, 이후 판지항에서는 신발을 건져주는 총각은 신발의 주인인 처녀와 결혼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단다.
▼ 판지마을 앞 바다, 파도의 일렁거림 사이로 살짝 드러나는 거무스름한 바위 봉우리는 곽암(미역바위)의 ‘머리’다. 곽암의 대부분은 물속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난 2001년, 울산광역시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됐을 만큼 곽암은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흥려승람’에 의하면 곽암은 태조 왕건이 서기 918년 고려를 건국할 당시 이 지역의 토호였던 ‘울산 박씨’의 시조 박윤웅(朴允雄)에게 하사한 바위다. 곽암으로부터 나는 미역이 예로부터 그 품질을 인정받아 이 지역 최고의 특산품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을사람들로부터 ‘양반돌’ ‘박윤웅돌’이라고 불린 이 바위에서 해녀들이 따는 미역은 현재까지도 국내 최고의 미역 중 하나로 각광을 받고 있단다.
▼ 이젠 정자항까지 가는 일만 남았다. 정자항의 마스코트인 빨갛고 하얀 귀신고래를 바라보며 바닷가를 걷다보면 ‘섭다리(통나무로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잎나무와 잔가지 등을 얹어 만든 다리)’의 안내판을 만난다. 2015년에 만들었다는데 눈에 띄지 않는 걸로 봐서 이미 옛 얘기로나 만나볼 수 있나보다. 근처에는 ‘강동 신생대화석’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곁에 조개류 등이 박힌 돌들이 수북이 쌓여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 트레킹 날머리는 정자항 입구 조형물(울산시 북구 정자동 621-8)
바닷가가 끝나면서 만나게 되는 장자천을 건너면 정자항의 대문을 겸하고 있는 아치형 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이 조형물의 바로 뒤에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다. 몇 걸음 더 들어가니 정자항의 마스코트인 귀신고래 형상을 한 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암수 귀신고래 형상의 두 개 등대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서로 지킴이가 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의 명소가 됐단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4시간 10분이 걸렸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이 14.78㎞를 찍고 있으니 느긋하게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에필로그(epilogue), 정자항의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버드나무 아래 정자가 있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위에서 보면 항의 모양이 자궁과 흡사하고, 배가 항구로 들어오는 모습이 자궁 속으로 정자가 헤엄쳐 들어가는 것과 닮아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 정자항에는 대게를 파는 음식점 일색이다. 하지만 ‘참가자미’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라고 한다. 이곳에서 잡히는 참가자미가 전국 유통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란다. 그 덕분에 그물망 위에서 하얀 배를 드러낸 채 해풍에 말라가는 가자미들을 항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단다. 참! 활어직판장에 가면 갓 잡은 신선한 참가자미를 즉석에서 회로 맛볼 수 있다는데 들러보지는 못했다. 트레킹 도중에 점심을 먹느라 주어진 여유시간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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