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 22코스
여행일 : ‘19. 10. 28(월)
소재지 : 경북 영덕군 축산면과 영해면, 병곡면 일원
산행코스 : 축산항(2.2km)→대소산봉수대(5.9km)→괴시리전통마을(2.4km)→관어대(5.8km)→대진해수욕장→고래불해변(소요시간 : 원래 16.3㎞이나 17.4㎞로 늘어나 5시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블루로드는 영덕대게공원에서 축산항을 거쳐 고래불해수욕장에 이르는 영덕판 올레길로 길이는 대략 64.6km쯤 된다. A~D구간으로 나뉘는 블루로드는 해파랑길 19~22코스와 거의 99% 일치하는데 해파랑길 22코스는 블루로드 C코스에 해당한다. ‘목은 사색의 길’이라 부르는 이 구간은 ‘남씨 발상지’와 ‘목은 기념관’, ‘괴시리 전통마을’, 봉송정(奉松亭)‘ 등을 끼고 있다. 선현들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거기다 이문열이 지은 '젊은 날의 초상'의 무대라는 대진항과 명사이십리라는 고래불해수욕장 등의 아름다운 경관까지 끼고 있어 눈까지 호사를 누리게 한다. 다만 거리가 멀다는 게 다소 흠이라 하겠다. 특히 우리 부부처럼 관어대까지 들러볼 경우에는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다리품을 조금 더 팔아야만 한다.
▼ 들머리는 축산항(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941-3 )
당진영덕고속도로(청주-영덕) 영덕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울진 방면으로 올라오면 축산교차로(축산면 상원리)가 나온다. 국도에서 빠져나와 20번 지방도를 타고 내려오다 염장삼거리(축산면 축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잡으면 곧이어 축산항에 이른다. 해파랑길 22코스의 시점은 ’축산리 군내버스정류장‘이다. 스탬프 보관함은 정류장과 ’축산콜택시‘의 사이에 설치되어 있다.
▼ 정류장 옆은 영덕의 대표적 어항인 ’축산항‘이다. 죽도산을 수문장처럼 어귀에 두고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는 모양새로 와우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대소산이 서풍을, 죽도산이 남풍을 막아주는 피항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래선지 ,대게 위판장이 열리는 전국 5개항 가운데 하나란다. 참고로 이곳 축산항은 ‘물가자미 축제’가 매년 열릴 정도로 가자미가 유명하다. 올해도 4월 25일부터 28일까지 ‘테마가 있는 맛있는 여행! 블루로드 영덕!’이라는 주제로 열렸다고 한다. 이는 대게의 원조항으로 소문난 이곳 축산항의 또 다른 명물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특히 물가자미의 알이 차는 4월은 막회가 유명한데, 뭉툭하게 썬 회를 잘게 썬 채소 위에 놓고 막장과 비벼먹는 축산항 물가자미 막회는 별미로 알려져 있다.
▼ ’와우산(臥牛山)‘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소가 누운 형세라는 축산의 명산이다. 탐방로는 산자락으로 파고드는데, 위로 오르는 계단의 초입에 ’남씨 발상지(南氏 發祥地)‘라고 새겨진 커다란 빗돌이 세워져 있다. 옆에는 ’영양 김씨 시조유허비각(英陽 金氏 始祖 遺墟碑閣)‘이란 빗돌도 보인다. 하단에는 70m쯤 떨어진 곳에 있다는 위치까지 표시해 두었다. 하지만 비각은 남씨의 시조인 ’영의공 남민(英毅公 南敏)‘의 것만 눈에 띄었다. 민(敏)의 당나라 시절 이름이 ’김충(金忠)‘이었으니 영양 김씨도 그를 시조로 삼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러고 보니 김충의 아들 김석중(金錫中)이 본래의 성인 김(金)을 사용하여 영양에 살면서 영양 김씨의 혈통을 계승했다는 기록을 본 것도 같다. 그건 그렇고 들머리에 블루로드 안내판과 함께 이정표(대소산봉수대 1.5㎞/ 축산항 0.7㎞)도 세워져 있다는 것도 참조하자.
▼ 계단을 올라서자 ’통사동(通使洞)‘이란 빗돌이 세워져 있다. 남씨 시조가 살았다는 동네란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축산항을 내려다보고 있는 커다란 비석 두 개를 만난다. 왼편은 남씨의 시조(始祖)인 ’영의공 민(英毅公 敏)‘의 유허비(遺墟碑)다. 그 오른편 비석에는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남씨(南氏)‘ 성을 얻게 된 과정을 적고 있다. 천보(天寶) 14년(신라 경덕왕 14년, 서기755년), 당나라 현종 때 김충(金忠)이란 안렴사(按廉使)가 일본을 다녀오던 도중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이곳 축산에 도착, 신라에 살기로 청원하자 경덕왕이 남쪽(여남)에서 왔다 하여 남(南)씨 성을 하사하고 민(敏)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시호는 영의(英毅)으로 하고 영양(英陽)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그 후 고려 후기에(1,200~1,300년대로 추정) 홍보(洪輔)와 군보(君甫), 광보(匡甫)라는 3형제가 나타나 영양(英陽)과 의령(宜寧), 고성(固城)을 본관으로 삼아 중시조가 되었다.
▼ 유허비의 뒤에는 ‘유허비각(遺墟碑閣)’이 자리하고 있다. 안에는 세 개의 비석이 모셔져 있었으나 내용은 파악할 수 없었다. 비각의 앞에 세워놓은 안내판에도 이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유허비’라는 게 본디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일 지니 그네 가문의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지 싶다. 참! 이왕에 시작했으니 한걸음 더 나가보자. 영의공(英毅公) 이후 중시조(中始祖)까지 500여년이나 되는데 비해 남씨(南氏)의 족보에는 겨우 7代만 기록되어 있단다. 기록이 유실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당(唐)의 천보년대(天寶年代)에는 안렴(按廉)이란 직명도 없었단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신라에 표착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로보아 이곳에 적혀 있는 내용들은 구전(口傳)되어온 집안 얘기를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고증(考證)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하긴 우리나라의 수많은 시조 탄생(誕生) 설화들 가운데 고증이 된 성씨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 조금 더 오르자 일광대(日光臺) 및 월경대(月影臺) 비석이 연이어 나온다. 그런데 오석(烏石)으로 된 새 비석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이왕에 새로 만들었다면 옛 것은 치웠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 남씨 발상지가 있는 와우산을 넘자 또 다시 바닷가 도로변에 내려선다. 삼거리인 이곳은 축산면과 영해면의 경계이다. 이제부터 해파랑길은 영해면으로 들어선다. 도로 아래는 눈앞이 환한 바다다. 눈길이 마주치는 곳이 모두 블루다. 아름답다.
▼ 도로를 따라 50m쯤 걸었을까 잘 다듬어놓은 해안 길을 두고 해파랑길은 또 다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들머리에 이정표(대소산 봉수대 2.0㎞/ 남씨 발상지 0.8㎞, 죽도산전망대 2.2㎞) 외에도 ‘블루로드안내판’ 등 각종 안내판들이 어지럽다싶을 정도로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대소산 정상에 위치한 봉수대까지 30분 정도의 오르막이 계속되는데 남녀노소 누구나 무난히 오를 수 있는 길이다. 길이 너른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산자락은 온통 소나무 군락지다. 겨울의 초입이건만 솔잎이 한창 푸르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걷는다. 소나무숲길이 구불구불, 나무계단이었다가 흙길이기를 반복한다.
▼ 갑자기 가팔라진 오르막을 숨 가쁘게 치고 오르면 해발 282m의 대소산 정상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만이다. 뾰쪽하니 솟아오른 꼭대기에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는 ‘봉수대(烽燧臺)’가 자리 잡았다. 이 봉수대는 조선 초기의 것으로 남쪽으로는 영덕 별반산봉수대, 북으로는 평해의 후리산봉수대, 서로는 광산봉수대를 거쳐 진보의 남각산봉수대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었단다.
▼ 봉수대는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네모난 대(臺) 위에 원형의 화구(火口)을 갖췄는데 영덕 인근지역의 여러 봉수대 가운데 가장 뚜렷한 형태를 보유하고 있단다. 그 옆에는 이동통신사의 송신탑이 들어서 있다. 봉수대란 통신기기가 발달되기 전 국경지역의 외적 침입 등 위급한 소식을 횃불과 연기로 중앙으로 전하는 시설이다. 전파로 소식을 전하는 현대에서는 이동통신사의 송신시설이 봉수대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과거와 현재의 시설이 한자리에서 모여 있는 것을 보면 고금을 막론하고 지형의 유리함은 결코 놓치지 않는가 보다.
▼ 봉수대의 특징대로 조망이 뛰어나다. 활기찬 축산항이 그림처럼 펼쳐지는가 하면 그 멀리 남쪽으로는 포항의 바닷가, 북쪽으로 평해를 거쳐 고래불에 이르는 해안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장관을 이룬다. 내륙 쪽으로는 영해평야와 함께 백두대간의 산릉이 첩첩이 쌓여있다. 동쪽은 물론 물 맑기로 소문난 동해바다이다.
▼ 봉수대에서 내려오는 오솔길은 소나무 터널이다. 상큼한 솔향기가 코끝을 맴돌다 지나간다. 저 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듬뿍 묻어있을 것이다.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소나무라니까 말이다. 그러니 걷는 게 힘이 들 리가 있겠는가. 앞서가는 집사람의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이 구간의 또 다른 특징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가끔은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오기도 하지만 통나무계단을 알맞은 높이로 깔아놓아 내려서는데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는다.
▼ 체육시설도 보인다. 정자나 벤치, 평상 등도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다른 지역의 탐방로에 비해 그 빈도가 훨씬 더 높은 걸 보면 블루로드를 그만큼 잘 가꾸어놓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얼마 전 포항구간을 걸을 때 지역 특산품인 ‘참가자미회’를 사주겠다며 마중 나왔던 옛 동료도 자신의 동네보다 영덕군 공무원들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너무너무 열심히 근무한다고 말이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 그렇게 15분 남짓을 진행하자 동해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정자 하나가 지어져 있다. 그런데 이름이 ‘망월정(望月亭)’이란다. 달이 아니라 해가 뜨는 곳에 들어앉은 망월정이라니 조금은 어색하다. 어쩌면 다음에 오를 봉우리가 ‘망일봉(望日峰)’이다 보니 같은 이름을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 솔숲 사이로 난 길은 한마디로 아름답다. 널찍한데다 경사까지 거의 없으니 편하기도 하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갈림길이라도 나타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고, 곳곳에는 해파랑길의 표식으로도 모자랐던지 블루로드의 표식들을 곳곳에 내걸어 두었다.
▼ 망월정에서 내려선지 10분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동해를 옆구리에 낀 철제다리(이정표 : 괴시전통마을 3.4㎞/ 대소산봉수대 2.4㎞)가 길손을 맞는다. 축산면에서 영해면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놓인 보행자 전용의 구름다리이다. 튼튼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이 다리도 금기사항은 있단다. 뛰지도, 흔들지도, 난간 매달리지도 말란다.
▼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해가며 15분쯤 진행했을까 이번에는 아래로 푹 꺼지고 만다. 양 옆으로 또렷하니 길이 나있는 걸 보면 두 지역을 잇는 고갯마루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영덕소방서’의 구조위치표지판(C-5)도 괴시리와 사진리를 잇는 임도라고 적어 놓았다.
▼ 고개를 지나서도 길의 상황은 거의 비슷하다. 크고 작은 오르내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쉼터를 겸한 체육시설도 눈에 띈다. 그렇게 20분쯤 진행했을까 이번에는 삼거리(이정표 : 목은기념관↑ 1.8㎞/ 관어대→ 2.7㎞/ 사진구름다리↓ 3.0㎞)가 나온다. 잠시나마 어디로 가야할 지를 놓고 고민했던 지점이다. 선답(先踏) 했던 지인께서 ‘관어대’를 꼭 가보라고 했는데 해파랑길은 왼편 목은기념관을 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해파랑길을 따랐고, 그게 최선의 선택이 되었지만 말이다.
▼ 삼거리에는 시판(詩板)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紹修書院)을 세운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 1495-1554) 선생의 ‘망일봉(望日峰)’이란 시를 적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 ‘망일봉’이었나 보다. 하지만 이곳이 산봉우리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른 하나에는 ‘영해를 그리워하며’라는 제목 아래에 두 편의 시를 실었는데 ‘외가(外家)’라는 문구로 보아 이색선생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 탐방로는 한마디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경사가 완만한 길은 널찍한데다 조그만 갈림길이라도 나타날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웠다. 거기다 블루로드 표식과 해파랑길 표식이 하도 많이 매달려 있어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어도 잃어버리지 못할 지경이다. 지금 걷고 있는 ‘블루로드’가 영덕을 대표하는 ‘체험거리’라는 ‘영덕구체(盈德九體)’ 가운데 하나라고 하더니 그에 걸맞게 꾸며놓았지 않나 싶다. 나머지 체험거리로는 오천옹기 만들기와 동해안달맞이 영덕야간산행, 나라골 보리말 체험, 어촌마을체험(후리그물 당기기,대게잡이 등), 황금은어 잡이 체험, 초경량비행체험, 스킨스쿠버 체험, 수상레저 체험 등이 있다. 이밖에도 영덕군은 볼거리인 9경(景)과 먹거리인 9미(味)도 선정해 놓았다.
▼ 25분쯤 더 걸었을까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괴시리전통마을← 50m/ 목은 이색산책로→ 0.19㎞)가 나온다. 또 다시 헷갈리는 지점이다. 전통마을과 목은기념관을 모두 둘러봐야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왼편으로 50m쯤 가서 ‘전통마을’ 전경을 조망하고 난 뒤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오른편 목은 산책로를 따라야 한다. 이럴 경우 둘 모두를 꼼꼼히 살펴볼 수 있다.
▼ 우리부부는 왼편 ‘괴시리 전통마을’로 향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전통마을이 통째로 눈에 들어온다. 마을은 200년 이상 묵었다는 전통가옥들이 즐비한데 그 앞으로는 영해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지고 있다. 저 마을의 이름은 원래 호지촌(濠池村)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목은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자신의 고향이 중국의 괴시(槐市)와 비슷하다 하여 괴시로 부르면서 명칭이 괴시마을로 굳어졌단다. 아무튼 저곳은 고려 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그의 외가인 ’영양 남씨‘ 집성촌이다. 오래된 마을답게 ’괴시파종택‘ 외 6점의 고택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 조망을 즐기다가 마을로 내려선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본격적인 탐방을 시작하려는데 마을입구에 세워진 이정표에 ’목은 기념관‘의 방향표시가 우리가 내려온 골목길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 주민에게 물어보니 조금 전에 마을로 들어섰던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올라가면 나온단다. 그녀가 일러준 대로 200m쯤 거슬러 올라가니 한옥으로 지어진 ’목은 기념관‘이 나온다. 기념관에는 목은 이색의 영정과 문집판, 목은집 등 선생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안은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오늘은 월요일, 전국의 박물관이 모두 쉬는 날이기 때문이다. 참! 기념관 옆에 세워놓은 ’만서헌(晩棲軒)‘의 안내판을 깜빡 잊을 뻔했다. ’호은 남흥수(1813-1899)‘가 지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집이라는데 생김새로 보아 목은기념관의 오른편에 있는 건물을 말하는가 보다.
▼ 기념관의 앞에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작은 연못과 정자를 지어놓았는가 하면 선생의 작품으로 보이는 시들을 적은 빗돌들을 여러 개 세워놓았다. 이왕에 들렀으니 선생의 사상까지 느껴보라는 모양이다.
▼ 이젠 괴시리(槐市里)’ 전통마을을 둘러볼 차례이다. 마을에는 ‘영양 남씨(英陽 南氏)’의 ‘괴시파 종택(槐市派 宗宅)‘을 비롯하여 괴정(槐亭), 구계댁(邱溪宅)’, ‘해촌 고택(海村 古宅) 등 15개소의 전통한옥(지정문화재)이 잘 보존되어 있다. 꼼꼼히 살펴보면 조선 후기 영남지역 사대부들의 주택양식을 직접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의 한적한 생활에 지장을 주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마을에서는 한마당잔치와 고택음악회, 목은문화제 등 다채로운 행사가 시시로 열리기도 한단다. 또한 주말에는 ’괴정‘에서 마을 부녀회원들이 무료 차봉사도 하고 있단다.
▼ 마을 앞 도로변으로 나오니 ’유허비각‘이 세워져 있었다. 안에는 목은 선생과 그의 아버지 ’가정 이곡(稼亭 李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비석을 세워놓았다.
▼ 이젠 목은 선생의 또 다른 추억이 어린 ’관어정‘으로 갈 차례이다. 조형물과 벤치 등 대체로 잘 가꾸어진 도로를 따르게 되지만 거리가 꽤나 멀기 때문에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구간이라 하겠다.
▼ 관어대가 위치한 ’상대산‘을 바라보며 15분 정도를 걸으니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편으로 가면 대진항, 왼편은 ’대진해수욕장‘이나 고래불국민야영장으로 연결된다. 관어대의 방향표시는 양쪽으로 다 되어있다. 하지만 관어대를 거쳐 대진해수욕장으로 가려면 오른편으로 진행하는 게 바람직하다. 해파랑길 표식도 물론 오른편으로 진행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두 다 그러라는 얘기는 아니다. 만일 대진항을 구경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왼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대진해수욕장 입구에서 ’고래불대교‘를 건너면 고래불국민야영장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한 시간 조금 못되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 우리 부부에게 오른편 방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관어대를 꼭 들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길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길이다. 거리도 먼데다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아 오가는 차량에 주의까지 기울여야만 한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크고 잘 생긴 소나무 몇 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나무 아래에 ’당집‘까지 지어져 있는 걸 보면 마을의 신목(神木)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참! 혹자는 이곳에서 바닷가 민속신앙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천장군(千將軍)과 해불신, 우물신을 모시고 있다면서 우물신은 원활한 식수(食水) 공급을 위해서이고, 천장군은 마을의 질병과 잡귀를 없애기 위해서, 그리고 해불신은 마을에서 동신(洞神)으로 모시는 부처님이라고 했다.
▼ 삼거리에서 또 다시 15분 정도를 걸으니 ’대진항‘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이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니 오른편 언덕에 자리 잡은 ’대진교회‘를 꼭 기억해 두자. 관어대로 올라가는 탐방로의 들머리가 교회 건너편 산죽 숲속으로 나있기 때문이다. 숲이 하도 짙어서 길이 나있지 않을 것 같지만 주의만 조금 기울인다면 시멘트 축대 위해 세워진 이정표(관어대 0.8㎞/ 목은기념관 3.8㎞)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산죽이 하도 울창해서 길의 상황은 썩 좋지 않다. 몸을 틀어가면서 진행해야할 정도로 폭이 좁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죽군락지를 지나면서 상황이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중간쯤에는 아예 임도처럼 넓어져 버린다. 정비도 잘 되어 있었다. 산비탈 쪽에 밧줄 난간을 쳐놓았는가 하면 경사가 가파른 곳에는 나무계단까지 설치했다.
▼ 산길로 들어선지 20분이 조금 못되어 상대산(上臺山) 정상(이정표 : 대진해수욕장 0.7㎞)에 올라선다. 해발이 183m인 정상은 구릉처럼 밋밋한데 그 중앙에 관어대(觀魚臺)가 터를 잡았다. 관어대는 목은 이색(李穡) 선생이 '상대산 너머 바닷가의 고기를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명명한 지명이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이 이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관어대(觀魚臺)란 현판까지 걸어놓았다. 지명(地名)이 정자의 이름으로 바뀌어버린 셈이다. 그나저나 안내판에는 선생을 비롯하여 조선 초의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과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인인 원천석(元天錫) 등이 동명(同名)의 시를 남겼음을 알려주고 있다. 주변 경관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 관어대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병곡면 일대의 해안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 중심에는 ’고래불해수욕장‘이 들어앉았다. ’영해‘에서 태어난 이색 선생은 유년시절 이곳 상대산에 자주 올랐다고 한다. 그때 하얀 물줄기를 내뿜으며 노닐고 있는 고래가 그의 눈에 들어오더란다. 그래서 붙여진 지명이 ’고래불‘, 즉 '고래들이 노니는 뻘'이다. 어린 소년이 지은 이름이 설마 지명이 되었을까도 싶지만 그게 무든 대수겠는가. 그저 끝도 없이 펼쳐지는 해안선을 눈에 담아볼 따름이다. 또 하나, 고래불해수욕장은 대진해수욕장 위로 나있는 덕천해수욕장과 영리해수욕장을 모두 포함하는 지명이라는 것쯤은 기억해두자.
▼ 이젠 마지막 여정만 남았다. 대진해수욕장으로 내려가 도로를 따라 고래불해수욕장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대진해안으로 내려가는 길은 많이 가파르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가파르다싶으면 어김없이 통나무계단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내려서니 대진해수욕장(大津海水浴場)이 나온다. 영해면과 병곡면(柄谷面)의 경계를 따라 바다로 흘러드는 송천강(松川江)의 하구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울창한 송림을 끼고 있는 등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2012년 인기리에 방영됐던 KBS-2TV의 미니시리즈 ‘사랑비’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가을동화·겨울연가의 윤석호 PD가 연출하고 소녀시대의 ‘윤아’와 ‘장근석’이 출연한 작품으로 70년대 순수했던 사랑의 정서와 현시대의 트렌디한 사랑법을 동시에 펼쳐낸 청춘 로맨스물인데 이곳 대진리 일대와 이따가 들르게 될 고래불해수욕장의 아름다운 바다와 자연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 모래사장은 모래알이 굵은 편이다. 영덕의 해안들이 대체적인 특징인데 몸에 잘 붙지 않는다는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단다. 그래선지 예로부터 모래찜질의 최적지로 입소문을 타왔다고 한다. 거짓말 좀 보태서 자갈처럼 굵은 모래 덕분에 맨발로 걸을 경우 그 촉감을 다음날까지도 느낄 수 있단다.
▼ 대진해수욕장이 끝나는 곳에는 ‘고래불대교’가 놓여있다. 영해면과 병곡면의 경계선을 겸하는데, 문설주 역할을 하고 있는 조형물이 특이한 다리이다. 영해면 쪽은 ‘대게’를 새겼는데 병곡면은 쪽은 ‘고래’가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지방의 특징을 한꺼번에 담아보려는 고심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 냇물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은 항아리의 주둥이처럼 좁아들었다. 송천강(松川江)과 각리천(角里川)이 합쳐진 물줄기인데도 저리도 좁아진 걸 보면 가뭄이 제법 심했던가 보다. 덕분에 좋아진 점도 있다. 휘어진 해안선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면 멋진 그림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 다리를 건너면 ‘고래불국민야영장’으로 들어서게 된다. 2017년 5월에 개장한 이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는데 주차는 물론이고 조리실과 샤워실, 화장실이 유료예약자 전용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게 눈길을 끈다. 야영장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다양한 캠핑사이트(카라반, 텐트사이트, 오토캠핑 사이트, 펜션형 숙소)를 보유하고 있어 인원과 취향에 따라 선택이 가능한데, 야영장 148동과 조형 전망대, 해안산책로, 편의시설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중에 텐트사이트가 110동으로 가장 많고 카라반은 25동이 마련되어 있단다. 이 가운데 생활가전이 잘 갖춰진 카라반이 가장 경쟁이 치열하고 텐트장과 오토캠핑사이트도 항상 손님들로 붐빈단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2018년에는 ‘국제청소년캠페스트’가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단다.
▼ 고래불해수욕장(국민야영장)은 영덕을 대표하는 해수욕장이다. 병곡면 일대 해안마을 6곳을 아우르는 탓에 그 어느 곳보다 시원스레 펼쳐진 해안이 놀랍도록 광활하다. 누군가는 이곳에 오면 4가지만이 시야에 들어온다고 했다. 바다, 모래. 송림, 그리고 하늘이라며 그저 입이 턱 벌어질 따름이라는 표현도 덧붙였었다. 그래서일까? 내 가슴도 한없이 넓어지는 것 같다. 그런 그렇고 텅 비어있는 널따란 백사장 탓인지 배가 고파온다. 아니 아까 괴시리마을에 내려설 때부터 이미 고팠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마침 영덕군청에서 아홉 가지의 먹을거리인 ‘영덕구미(盈德九味)’를 선정해 놓았다지 않겠는가. 영덕물회와 황금은어, 영덕해물탕, 대게정식, 영덕모듬회, 송이버섯전골, 미주구리회, 성게알 비빔정식, 전통메밀묵밥 등의 이름이 들어간 식당 간판을 열심히 찾아보는 이유이다. 하지만 고래불해수욕장에 이를 때까지 식당은 하나도 없었다. 아까 대진해수욕장 근처에서 대게와 회를 파는 식당이 눈에 띄기는 했으나 월요일이라선지 이 또한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난데없는 ‘김치찌개’로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소주를 반주로 올릴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다. 산책로와 캠핑장, 샤워장, 화장실 등 기초시설은 물론이고 ‘포토죤’도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바닥에 그려놓은 ‘트릭아트(trick art)‘가 특히 눈길을 끈다. 착시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사진 찍기에 그만이겠는데 이런 그림을 여러 곳에 그려놓았다. 사진을 첨부하지 않았지만 귀여운 동물모양의 카라반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토끼, 코끼리, 코뿔소, 강아지 등 다양한 동물모양 카라반이 일반 카라반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어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겠다.
▼ 모래사장과 솔숲의 사이로 나있는 시멘트길이 거북스러운 사람들이라면 솔숲을 헤집으며 내놓은 산책로를 따르면 된다. 이 산책로 역시 국민야영장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이니 말이다.
▼ 야영장의 상징 조형물도 눈길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큰 배 모양으로 생긴 조형물이 닻과 밧줄로 연결되어 있다. 배 부분은 전망대의 기능까지 겸하는데, 그보다는 야간에 펼쳐지는 빛 잔치가 더 볼만하단다.
▼ ‘고래불 야영장’이 끝났다싶으면 ‘봉송정(奉松亭)’이 나타난다. 영덕 고래불해양복합타운(국민야영장)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인근 관어대와 연계하여 해안 경치가 빼어난 솔밭에 봉송정이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건립된 정자란다. 정자 앞에 세워놓은 안내판은 고려 중엽에 봉씨(奉氏) 성을 가진 영해부사가 송천(松川)과 덕천 사이의 능원에 세웠던 정자라고 적고 있다. 또한 그는 주변에 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해풍을 막아 농사피해를 없애게도 했단다. 아울러 과거에 있었던 봉송정은 정자 주위에 울창한 수목과 학이 서식하고 푸른 동해 파도와 갈매기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치가 장관이었다는 내용도 적고 있었다. 하지만 1800년대의 대홍수로 정자는 사라졌고 하천제방이 정리되고 농지가 조성되면서 송림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복원은 되었다고 하나 아직까지 허허벌판의 모래바닥에 이층짜리 정자만이 외로운 이유이다.
▼ ‘봉송정’을 지나면 ‘고래불1교’가 나오고 곧이어 ‘거무역리(居無役里)’ 땅에 들어선다. ‘역옹패설(櫟翁稗說)’에 나오는 ‘박세통 거북설화’의 발상지이다. 하지만 눈요깃거리가 전무한 차도가 계속되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구간이다. 그렇다고 걷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거북을 구해주고 보은을 받았다는 구전설화나 되짚어보자. 고려 중기 원종(元宗)시대에 안렴사(按廉使) 박세통(朴世通)이 지방을 순행하다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마을 사람들이 등에 ‘왕(王)’자가 새겨진 바다 거북이에게 온간 짓궂은 장난을 하고 있더란다. 이를 본 세통이 후한 재물을 주고 거북을 사서 바다로 보내주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꿈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자신이 용왕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아들을 구해준 보답으로 집안 대대로 영광을 베풀겠다고 했단다. 이후 모든 일이 잘 풀린 세통이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 平章事)란 최고 벼슬에 올랐고, 아들 홍무(洪茂) 또한 시중(侍中), 손자 함도 복야(僕射)를 거쳐 시중이 되어 한 집안에 3대 정승이 나오자 이 마을을 부역을 면제하면서 이름 또한 ‘거무역(居無役)’이라 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영조(英祖) 연간에 묵산 남기만(南基萬)이 이 마을에 거주하면서 한 때 거묵리라 부르기도 했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 날머리는 고래불해수욕장
지루하기 짝이 없는 탐방로는 마을의 지형이 연꽃이 물에 떠있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는 영리(榮里)를 지나 자리(자루) 모양으로 생겼다는 병곡리(柄谷里)로 접어든다. 이어서 해파랑길은 고래불해수욕장의 널따란 주차장으로 들어서면서 ’22코스‘는 끝을 맺는다. 참! ‘경북수산자원연구원’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는 바닷가를 따라 진행하는 방법도 있다. 중간에 있는 ‘고래불1교‘에서 바닷가를 빠져나왔다 되돌아가야만 하는 불편만 감수할 수 있다면 말이다. 고운 모래와 푸른 바다가 어우러지는 바닷가를 따라 걷는 재미가 쏠쏠한 코스이나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랐다. 너무 먼 거리를 걸어온 탓에 눈요기를 즐길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은 5시간이 걸렸다. 관어대를 둘러보느라 원래 16.3㎞이던 거리도 1㎞ 이상 늘었다. 대신 멋진 경관을 가슴에 담을 수 있었으니 고진감래(苦盡甘來)에 딱 어울리는 일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이곳 고래불은 ‘영덕구경(盈德九景)’ 가운데 하나이다. 거기다 체험거리인 ‘영덕구체(盈德九體)’의 초경량비행체험이 이뤄지는 곳이다. 영덕의 대표적인 관광지라는 증거일 것이다. '고래불'이란 지명에 얽힌 이색의 일화부터, 동해안에서 가장 길다는 ‘명사 이십 리’의 백사장 등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왕에 시작했으니 나머지 9경도 알아보자. 영덕해맞이공원(풍력), 삼사해상공원, 도천숲(천연기념물), 팔각산, 사월의 복사꽃, 죽도산, 괴시리전통마을, 나옹왕사 사적비 등이라니 시간나면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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