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43코스

 

여행일 : ‘20. 6. 20()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과 손양면 일원

여행코스 : 하조대 해변(4.3km)여운포교(2.2km)동호해변(3.0km)수산항 입구(소요시간 : 9.4, 실제로는 13.35/ 3시간 1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원래의 거리가 9.4이니 지난 42코스(9.6)보다도 오히려 더 짧은 구간이다. 거리가 짧아서인지 이 구간은 가슴에 담아둘만한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다. 아쉽지만 중광정해변과 동호해변 등 서퍼들에게 인기 있는 해변과 수산항이라는 마리나항이 다였던 것 같다. 그나마 하나 있는 명소마저 탐방로에서 빠져있던 것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한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가을동화의 촬영지인 염개호의 갈대밭이 탐방로 근처에 있었는데도 별다른 표시가 없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우린 44코스의 일부 구간을 앞당겨 걸어보았다. 양양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은 쏠비치 리조트1전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레킹 들머리는 하조대 해변‘(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 618-2)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하조대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다, 광정천(光丁川) 조금 못미처에 있는 교차로(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에서 빠져나온 다음 광정천을 오른편에 끼고 조금만 들어가면 하조대 해수욕장(河趙臺 海水浴場)‘의 널찍한 주차장이 나온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해수욕장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해변에 기대어 내놓은 데크로드를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조대 해수욕장을 오른편에 끼고 걷는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때 놓치지 말아야할 게 하나 있다. 중간 중간에 만들어 놓은 전망데크에 꼭 올라가 보라는 것이다. 전망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방으로 시야가 열리기 때문이다.

 

 

저 멀리 명승(名勝) 68호인 하조대의 바위절벽이 눈에 들어오는가 하면, 발아래로는 흰 밀가루를 뿌려놓은 듯 하얗고 고운 모래밭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손에 쥐면 스르르 빠져나가버릴 것 같은 가는 입자의 모래사장이 반월 모양으로 반듯하게 휘어 있다.

 

 

 

데크로드가 끝나면서 탐방로는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올라선다. 오른편은 계속해서 모래사장이 이어진다. 하지만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들어갈 수는 없다.

 

 

그렇게 잠시 걷자 꼬띠에르(Côtier)‘라는 특이한 외관의 펜션(pension)이 눈에 들어온다. ()1/4로 나눈 후, 그것을 다시 옆으로 쪼개놓은 모양새이다. 전면은 계단처럼 만들어 3층으로 된 모든 객실에서 바다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불어인 꼬띠에르(Côtier)‘'해안()을 따라가는, 연안의, 바다 근처의'라는 뜻을 갖고 있으니 이에 딱 어울리는 설계라 하겠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공사현장이 나온다. 'The Blue Hill'이라는 호텔을 짓고 있는 모양인데 자금이라도 떨어졌는지 공사는 멈추어져 있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8분 만에 중광정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이 해변은 원래 군사보호지역이었다. 민간의 출입이 금지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서피비치'를 통해 개방되었다고 한다. 40년이나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았으니 청정자연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피서객들의 입소문을 가장 많이 타고 있는 것은 단연 조개잡이. 조개가 지천으로 깔려있어 걸어 다니다가 발에 딱딱한 게 느껴지면 영락없이 조개란다. 참고로 이곳 중광정의 원래 이름은 광정진이었다. 지금의 중광정리와 본동 경계지인 잣골 뒷산 능선에 고대에 여진과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광정진을 설치하였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지금도 진을 쌓았던 석축의 흔적이 남아있단다. 아무튼 광성진에 인구가 늘어나면서 상광정과 중광정, 그리고 하광정으로 분할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광정해수욕장2015년에 문을 연 국내 최초의 서피 비치(Surfyy Beach)’이다. 서퍼만을 위한 프라이빗 해변이라는 얘기이다. 덕분에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과 충돌 없이 온전히 서핑에 집중할 수 있는 핫 플레이스(hot place)로 알려져 있다. 그래선지 동해의 파란 바닷물과 하얀 모래, 그리고 이국적인 시설물들로 꾸며진 해변에는 2030 서퍼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탐방로는 중광정해수욕장 앞에서 바닷가를 벗어난다. 그리고는동해안종주 자전거길을 따른다. 이후로도 탐방로는 동해안 자전거길을 대부분 공유한다. 정확히 일치한다는 누군가의 귀띔도 있었지만. 실제로 걸어보니 비록 잠깐이지만 헤어지는 곳도 만날 수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자전거휴게소가 나온다. 자전거 마니아들을 위한 휴게소인데 주요 메뉴로 칼국수와 장칼국수, 잔치국수를 내밀고 있었다. 음료로는 커피와 팥빙수를 판단다. 그런데 메뉴판에 적힌 감자전의 정체가 의문이다. 내 상식으로는 분명 술안주였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음주자전거 금지법을 시행해 온 나라들이 많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도로교통법에 자전거 음주운전자에 대한 처벌규정을 두어 이를 규제하고 있기에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자전거 마니아들을 위한 쉼터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담벼락에 자전거를 매달아 놓았다. 그런데 이 흔하디흔한 자전거 하나가 오묘한 풍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숫제 예술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인 것이다.

 

 

탐방로는 7번 국도를 왼편 옆구리에 끼고 이어진다. 하지만 탐방로의 지대가 낮은 탓에 국도의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른편이라고 해서 별다른 풍경이 있을 리가 없다. 그저 곧게 뚫린 시멘트포장도로를 맥없이 걸을 따름이다.

 

 

그렇게 15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길이 둘로 나뉜다. ‘동해안 자전거길은 곧장 직진하는데 해파랑길은 오른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길이 다시 합쳐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그냥 자전거길을 따르면 되겠다. 해파랑길이 특별한 볼거리도 없는 구간을 에둘러서 내놓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100m 남짓 되는 이 구간은 아무런 볼거리도 없다.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는 양양의 네이버블루 바다도 볼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저 야산을 따라 이어가는 빨강색 지붕들이 다가 아닐까 싶다. 아니, 눈요깃거리가 있기는 했다. ‘원숙한 아름다움이라는 꽃말에 걸맞게 꽃 몽우리를 활짝 연 석류나무가 길손을 맞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자전거길, 이번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지난다. 그리곤 7번 국도의 진출입 램프(ramp)를 지났다싶으면 일현미술관까지 3.8가 남았음을 알리는 입간판이 길손을 맞는다. 자전거길로 되돌아온 지 10분 되는 지점이자,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결코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입간판에 50m정도만 더 걸으면 오른편으로 갈림길이 하나 나뉘는데 그 안쪽에 염개호라는 석호(潟湖)가 있기 때문이다. 들머리에 ‘4(상운) 소초라고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한다.

 

 

도로에서 70~80m쯤 떨어진 곳에서 만난 염개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데크로드 등 방문자를 위한 편의시설도 일절 없다. 그러니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저 세월을 낚고 있는 강태공만이 아늑하고 한적함으로 가득한 풍경화에서 만나는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참고로 이곳에는 옛날 넓은 버덩(좀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에 큰 염전터가 있었다고 한다. 그 옆에 석호가 있다고 해서 염개호라는 이름이 붙여졌단다.

 

 

석호인 염개호의 자랑거리는 갈대밭이다. 석호 맞은편으로 펼쳐지는 널따란 갈대밭에서 한류 붐의 도화선이 된 KBS 드라마 가을동화가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송승헌과 원빈, 송혜교, 문근영 등이 출연한 이 드라마는 친남매처럼 자란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이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해, 방영 당시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송혜교는 이 작품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탐방로로 되돌아와 조금 더 걷자 여운포리(如雲浦里)’의 마을표지석(이정표 : 동호리 1.4/ 하조대 4.3)이 나타난다. 하조대에서 북쪽으로 3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여운포리는 푸른 동해의 파도를 마주하는 곳이다. 누가 뭐래도 이 마을은 조금 전에 둘러봤던 석호와 갈대밭이 자랑거리이다. 그 자랑거리가 가을이면 한층 더 멋을 부린단다.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갈대의 평원이 가을의 냄새가 짙어지면 어제와는 다른 색깔로 물결처럼 일렁인다는 것이다. 거기다 갈대밭 너머로 푸른 바다가 펼쳐지는데, 이게 다른 지역의 갈대밭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단다.

 

 

 

마을 표지석을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버스정류소(여운포리 종점)에서 탐방로는 우측 마을길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여운포리를 꿰뚫고 지나간다. 여운포리는 알록달록한 벽화로 꾸며진 담벼락이 예쁜 마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무 울타리로 둘러쳐진 담벼락에는 넝쿨장미가 활짝 피어났다. 길가도 여러 종류의 꽃과 나무를 심어 구색을 맞추었다.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마을이다.

 

 

여운포리 이후부터는 선사유적로라는 2차선 도로를 따른다. 7번 국도가 아닐까 싶다. 이 구간은 여운포교와 상운천(祥雲川)을 가로지르는 동호교를 건너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탐방로가 따로 나있지 않다는 것이 더 눈에 띄는 특징이라 하겠다. 기존의 도로가 좁은 때문이겠지만 심심찮게 오가는 차량의 속도가 제법 빠르므로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오가는 차량을 피해가며 걷기를 25, ‘동호다리를 지나면서 우린 졸여오던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이후부터는 별도의 탐방로(자전거길)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마운 자전거길을 따라 8분쯤 이어지던 탐방로가 도로와 헤어지잔다. 그리곤 오른편으로 난 샛길로 들어선다. '마이비치 250m', ‘보노 펜션’, ‘중앙대학교 동호리실습장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갈림길이다.

 

 

6~7분쯤 들어갔을까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통과하자 파도소리가 들리고 드넓은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양양을 대표하는 해수욕장 가운데 하나인 동호해변(銅湖海邊)이다. 동호리(손양면)1반에서부터 2, 3반까지 연결되어 있는 이 해수욕장은 백사장의 길이가 500m나 된다고 한다. 강원도에 위치한 해수욕장치고는 꽤 크다고 하겠다. 아래 사진은 동호해변의 상징 조형물이다. 예로부터 이곳에서 많이 잡히는 멸치를 역동적으로 비상하는 형태로 형상화 한 작품으로, 하단 기단부는 파도의 역동성을 의미하며 물결 부위의 구는 청정한 바닷속을 뜻하고, 구조체가 겹겹이 포개져 있는 것은 멸치의 풍족한 수확을 의미한단다.

 

 

한눈에 보기에도 백사장이 넓고 모래가 곱다. 낙산과 하조대 해수욕장 중간쯤에 자리한 동호 해수욕장은 마을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데 물이 얕고 바닥도 완만해 가족단위 피서를 즐기기에 좋다고 한다. 또 하나, 이곳은 조개가 많기로 소문났다. 물놀이를 하면서 조개잡이까지 즐길 수 있다는 얘기이다. 특히 40명 이상이 함께 신청할 경우에는 이 지역에서 조상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멸치 후리기체험까지 할 수 있단다. 참여 인원 모두가 함께 그물을 잡아당기고 그물에 든 고기를 다함께 잡는 전통 어로(漁撈) 기법이다. ! 동해안의 수심은 파도가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때로는 수심이 깊기도 하고 때로는 앝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로 7월 중순경부터 8월 말까지는 대체로 수심이 얕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양양은 요즘 서핑이란 단어로 대변된다. 이곳 동호해변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길고 긴 해안에 더해진 고르고 세찬 파도가 우리나라 서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그 파도를 향해 거침없는 패들링(Paddling)을 멈추지 않는 젊은이들은 이 작은 마을을 서퍼들의 자유로운 세상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돔 형태의 캠핑장이 있는 '트리플 펜션 & 글램핑장'을 지나 해수욕장 입구 쪽으로 가는 도중 특이한 외형의 샤워장(화장실 겸용)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중세 성당의 첨탑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등대를 쏙 빼다 닮았다.

 

 

해수욕장의 입구에는 특수 기법을 사용한 모래조각 작품인 '클라리넷과 플루트를 연주하는 소녀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동호해변을 지나면 탐방로는 또 다시 ‘4차선 도로(선사유적로)’로 올라선다. 함께 공유하고 있는 자전거길이 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나있기 때문이다. 이런 길은 수산항 입구까지 계속된다.

 

 

길가에는 자전거 마니아들을 위한 쉼터도 만들어져 있었다. 대여섯 평쯤 되는 공간에 파고라(pergola의 일본식 발음)를 설치하고 벤치 두어 개를 놓아 쉬어가기 딱 좋게 만들었다. 그 옆에는 공중전화박스 모양의 무인인증센터(스탬프보관함)도 배치했다. 나 같은 해파랑길 종주꾼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시설들이다. 참고로 해파랑길과 공유하는 국토종주 동해안 자전거길은 통일전망대부터 고포마을까지 총 242km의 종주노선이라고 한다. 동해안의 해안 절경과 함께 이어갈 수 있어 해파랑길 여행자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코스이지만, 걸을 때 자전거와 충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고개 하나를 넘자 진행방향 저 멀리에 또 다른 고개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게 상당히 가팔라 보여 조금은 부담스럽다. 그러나 그다지 높지 않은 고개인데다, 자전거길 답게 경사까지 완만해서 큰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었다. 그보다는 고개에 오르기 전 오른편으로 펼쳐지는 파란 동해바다가 더 눈길을 끄는 구간이었다. ! 이 구간에서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적힌 커다란 빗돌을 만나기도 했다. 옛 사람들처럼 선돌을 세워 두 마을(동호리와 도화리)의 경계를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가로움은 강태공만의 것이 아닌 모양이다. 아이들이 백사장에 앉아 무엇인가 하고 있다. 그 뒤로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 그들을 덮칠 기세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번 구간에는 홍합장칼국수라는 간판이 유난히도 많이 보였다. 멸치나 다양한 해산물로 맛을 낸 국물에 비법 장으로 얼큰한 맛을 더한 음식을 장칼국수라고 부르는데, 사실 우리나라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장칼국수는 강원도가 원조. 특히 이곳 양양지역에서는 홍합으로 맛을 내 살짝 짬뽕을 닮은 듯한, 그러나 깊은 장맛이 오래 기억에 남는 홍합장칼국수가 별미로 사랑받는다고 한다.

 

 

도로로 올라선지 30, 도로가에 세워진 수산항표지석이 길손을 맞는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수산항이 있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곤 포구를 통과한 다음 반대편 골목을 통해 옛 국도와 다시 만난다.

 

 

오른편을 방향을 들어 200m쯤 들어갔을까 양양을 대표하는 마리나항(marina)수산항에 닿는다. 마리나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클럽하우스라는 격식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래선지 몰라도 이미 많은 요트 마니아들이 이곳에 자신의 요트를 정박해 놓고 세일링(sailing)을 즐긴다고 한다. 참고로 수산항의 옛 이름은 수무(水舞)’였다. 낙산사에서 수산굴 암자를 바라보면 흡사 파도가 춤추는 것 같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지금은 산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곳이라 해서 수산(水山)이라 불리고 있다.

 

 

수산항은 가자미 배낚시로 많이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단순히 낚시로 유명한 곳이 아니라 긴 방파제와 등대가 매우 아름다운 항구이기도 하다. 특히 양양에서 일출이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니 기억해두자. 또 하나, 출발지인 하조대를 제외하면 해파랑길 43코스에서 유일하게 회를 먹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부부 역시 이곳에서 물회를 안주삼아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수산항의 방파제도 꼭 둘러봐야할 곳 가운데 하나이다. 하얀 등대가 한껏 격조를 높이고 있는 이 방파제의 주인은 낚시꾼들이다. 우럭과 노래미를 잡으려는 낚시꾼들이 전국에서 몰려온단다. 하지만 나는 병 모양의 조형물에 눈길이 더 갔다. 하단에는 언젠가 플라스틱은 바다를 삼킬 거예요라는 문구와 함께 ’Do not use Plastic’라고 적었다. 낚시꾼들부터 플라스틱을 남용하지 말자는 캠페인용으로 설치했나 보다.

 

 

방파제로 나가면 수산항의 또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에, 어떤 것은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듯 고풍스럽기까지 한 수십 척의 요트들이 빼곡하게 정박되어 있는 것이다. 유럽 휴양지, 그것도 유명 휴양지의 항구에서나 마주할 법한 풍경이 양양에서 펼쳐지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고로 수산항 요트마리나에는 현재 35t56척과 55t4척 등 총 60척의 요트를 정박할 수 있는 192m의 폰툰을 비롯해 20여 척의 요트를 계류할 수 있는 육상 부두가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방파제를 가운데에 두고 마리나항의 반대편 바닷가에는 동해를 쳐다보는 두꺼비 형상의 아름다운 바위 하나가 솟아올랐다. 이름 또한 두꺼비 바위인데, 이 바위를 보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주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 이곳 수산항에는 봉수대라는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고 했다. 그런 게 있는 줄조차 몰랐던 나는 나중에야 이를 알고 아쉬워했지만 이를 보려고 찾아간 이들의 말에 의하면 군부대가 출입을 막고 있다고 했다.

 

 

마을안길을 빠져나오면 아까 수산항으로 들어가면서 헤어졌던 ’4차선 도로를 다시 만나는데 이곳에도 역시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수산항이라고 적혀있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수산리라고 적어놓았다. 이곳에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해파랑길 43코스가 종료되는 손양 문화마을입구이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마을입구 버스정류장에 설치되어 있다.

 

 

핸드폰의 앱은 오늘 12.14를 걸었다고 알려준다. 해파랑길의 조성 및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의 길과 문화에서 공시한 거리(9.4)보다 2.5를 더 걸었다. 볼거리를 찾아 그만큼 더 들락거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지 산악회 운영진이 조금 더 걷자고 한다. 500m쯤 더 진행하면 쏠비치 리조트(아래 사진의 건물)‘를 만나게 되는데 마침맞게 볼거리들로 넘친다는 것이다.

 

 

1쯤 더 걸었을까 쏠비치 리조트입구가 나온다. 맞은편에 보이는 너른 공터는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의 주차장이다. 더 이상의 기록은 무의미할 것 같아 핸드폰의 앱은 이쯤에서 끄기로 했다. 그러니 리조트 안을 둘러보면서 누렸던 호사는 덤이라 할 수 있겠다.

 

 

2007년에 문을 연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은 돌톱, 흑요석, 토기류 등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인근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와 석기, 그물추(어망추) 등이 전시되어 있는 실내전시관은 물론이고, 야외전시실에는 움집을 복원해 놓았다. 참고로 오산리선사유적(사적394)‘는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BC. 6000)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 가운데 한 곳이다. ’쌍호라고 불리는 호숫가 모래언덕 위에 위치하는데 1977년 농경지로 사용하기 위해 모래언덕을 파서 이 호수를 매립하던 중 발견되었다고 한다. 1981년 이후 6차례의 발굴 작업을 거쳐 14기의 원형집터와 소활석 및 돌무지 유구, 다량의 석기와 토기를 발굴했다. 특히 흙으로 만든 인면상은 신석기 시대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상징한 예술품으로 희귀한 예로 일컬어진다.

 

 

양양 쏠비치 리조트는 스페인풍의 고급 리조트다. 붉은 지붕을 활용한 화려한 색감을 통해 마치 스페인에 온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콘도 219실과 호텔 224실 등 총 443개의 객실은 크게 동해가 발아래에 펼쳐지는 오션 뷰와 백두대간이 한눈에 들어오는 마운틴 뷰로 나눠진다고 한다. 부대시설로는 온천수를 활용한 스파 테라피와 아쿠아 월드·테마 레스토랑·로비 라운지·맥주 바·휘트니스 센터 등이 있다. 로비에서 무료 음료를 제공받을 수 있는가 하면, 호텔 투숙객만 이용할 수 있는 전용 프라이빗 해변도 보유하고 있단다. 올 봄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머물렀던 후르가다(Hurghada)‘Desert rose’라는 리조트를 떠올리게 만드는 시설이라 하겠다. 홍해의 바닷가에 들어선 5성급의 리조트였는데 고품격의 시설들은 차지하고라도, 10불이 채 되지 않은 추가요금으로 12일 동안 무제한으로 술과 안주를 제공받았던 게 기억에 새롭다.

 

 

바닷가 방향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돛단배를 띄워놓았다. 인생샷을 건져보겠다는 젊은이들로 넘쳐난다는 조형물로 쏠비치 양양의 시그니처(signature)라 할 수 있겠다.

 

 

바닷가 쪽으로 나가니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바닷가를 향해 담장형의 벤치를 만들었는데 깨진 사기그릇의 파편들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것이다. 맞다. 5년 전에 들렀던 바르셀로나(스페인)구엘공원(Park Güell)‘에서도 저와 똑 같은 벤치를 만났었다. 바르셀로나는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와 그의 후원자였던 에우세비 구엘(Eusebi Güell Bacigalupi)이 연상되는 도시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가 구엘의 부탁으로 만든 주택단지가 현재 구엘공원으로 변해있는데 공원의 가장 뛰어난 볼거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광장의 테라스를 둘러싸고 있는 타일과 유리장식의 벤치이다. ‘까탈루나 스타일이기도 한 트랜카디스기법(Trencadis : 타일과 유리, 거울 등을 깨서 모자이크화)으로 분류된다지만 예술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그저 동화적이며 환상적이라는 느낌만 가득했었다.

 

 

바닷가로 나가는데 난데없는 영화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 주, 그러니까 지난 610일에 개봉된 결백이란 영화의 포스터가 곳곳에 걸려 있는 것이다, 치매에 걸린 엄마(배종옥)가 살인범으로 몰리자 변호사인 딸(신혜선)이 사건을 파헤쳐나가는 줄거리로 현재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몇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내 짐작은 허망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조금 더 내려가니 바닷가에 선셋 시네마(Sunset Cinema)`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리조트에서 객실과 선셋 시네마(2), 스낵박스로 구성된 `로맨틱 시네마 패키지`124000원에 판매한다니 한번쯤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파도소리와 함께 수평선 너머로 물드는 붉은 석양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하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리조트 앞의 바닷가는 전용 카바나(cabana, 주 건물에서 분리되어 수영장, 해수욕장, 야영장 따위에 있는 객실)를 이용하는 고객들만 즐길 수 있는 공간인 프라이빗 비치라고 한다. 저곳은 카바나와 선베드, 비치바 등의 시설로 꾸며지는데 해외 휴양지의 비치클럽과 같은 프리미엄 서비스를 제공 받을 수 있단다.

해파랑길 42코스

 

여행일 : ‘20. 6. 6()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과 현북면 일원

여행코스 : 죽도해변(5.4)기사문항(2.8)하조대(1.4)하조대 해수욕장(소요시간 : 9.6, 실제로는 11.8/ 3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죽도해변에서 시작해 동산해변과 잔교해변, 기사문해변을 거친 다음 하조대해변에서 끝을 맺는 양양의 두 번째 구간으로 해파랑길 50개 코스 가운데 비교적 짧은(9.6) 구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구간은 특별히 가슴에 담아 둘만한 풍경은 갖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들르게 되는 하조대가 이 모든 걸 상쇄시켜 버리고도 남는다. 기암괴석과 노송들로 이루어진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국가지정 문화재인 명승(68)‘으로까지 지정되었겠는가. 또 하나, ’국군의 날제정의 근거가 된 역사적 사건을 품고 있는 ’38선 휴게소도 그냥 지나치는 우를 범하지 말자.

 

들머리는 죽도 해변(양양군 현남면 시변리 17-1)

동해고속도로(속초-삼척) 남양양 IC에서 내려와 7번 국도를 타고 양양·속초 방면으로 달리다가 시변리삼거리(양양군 현남면 두리)에서 오른편으로 빠져나오면 트레킹 들머리인 죽도해변이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죽도 오토캠핑장의 담장에 세워놓았다. 참고로 이곳 죽도해변은 서퍼들의 메카로 알려진다. 수심이 얕고 파도가 적당해 서핑 입문자뿐만 아니라 중·상급자들에게도 최상의 물살로 인정받고 있단다. 양양군에서는 이들을 위한 공간인 서핑 스파 라운지도 만들어 놓았다. 돔하우스 78m²와 스파시설 5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퍼들이 서핑을 마친 뒤 휴식을 취하는 휴게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단다.

 

 

 

남북으로 뚫린 해안도로를 북쪽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오른쪽 옆구리에 죽도해변을 끼고 걷는 셈이다. 아니 정확히는 오토캠핑장을 끼고 걷는다. 왼편은 상가이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여행자 숙소와 카페를 겸하고 있는데, 내걸은 간판마다 ‘surf’라는 문구를 넣고 있는 게 눈길을 끈다. 서퍼들의 메카라는 이미지에 걸맞는 풍경이라 하겠다.

 

 

널따란 주차장을 지나자 나지막한 동산이 나오는데, 부부 시인인 김귀녀·김내식의 시 두 편이 새겨진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이 동산의 도로 쪽 면에도 불망선정비 6기가 가지런히 모셔져 있다. 하지만 이 동산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양양지구 전투 초전 충혼비''UN 태국 해군 참전 기념탑'이다. 6.25전쟁 당시 강원도 지역방어에 힘쓴 8사단을 추모하고, 8사단 초전 전투(50. 6.25~6.27)에서 전사한 전몰장병 748명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가 양양지구 전투 초전 충혼비이고, ‘유엔 태국 해군 참전 기념탑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쌀 4t을 지원키로 하는 등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먼저 한국전 지원 의사를 밝힌 태국을 기념하기 위한 빗돌이다. 당시 태국은 보병 1개 대대와 군함 9, 수송기 편대 등 연인원 15천여 명이 참전해 전사 136, 실종 4, 부상 1139명의 피해를 입었다. 태국의 군함 쁘라새함이 한때 양양 해변에서 좌초되었다고 하던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터를 잡지 않았나 싶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동산을 오른편에 끼고 해안가로 나간다. 그리곤 데크 탐방로를 따라 동산항으로 향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다가 동산항 입구의 ‘7번 국도진입로에서 동산해변으로 내려섰다. 이어서 해송 방풍림 사이로 내놓은 데크 탐방로를 따른다.

 

 

해변에 조성해놓은 캠핑장은 가족단위의 캠핑족들이 쳐놓은 텐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모래사장이 텅 비어있어 전체적으로는 한적한 풍경이다. 양양 지역에서 만나게 되는 해변의 일반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캠핑장 한켠에는 조각가 '표찬용'환영(幻影) 바다를 넘다라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파도를 타는 서퍼의 형상인데 이는 서핑 명소인 동산해수욕장의 지역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또한 바다와 푸른 하늘의 경계를 나타내는 파도를 승리를 나타내는 V자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동산해변(洞山海邊)에서 바라본 죽도방향 해안이다. 하나의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걸로 보아 죽도해변과 동산해변을 하나의 해변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동산마을을 지나면 또 다른 동산해변이 나오니 이곳은 죽도해변이라 부르는 게 옳을 것 같다.

 

 

마을 복지회관과 어촌계 펜션을 지났다 싶으면 '동산항(洞山港)'이 나온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 만이다. 동산항은 작은 어선들 십여 척이 정박되어 있는 한적한 포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동산항은 특별한 볼거리를 갖고 있다. 2013년 초에 개봉됐던 박신양, 김정태 주연의 영화 박수 건달중 무당이 굿하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항구의 한가운데 들어앉은 저 바위, 그러니까 둥글면서도 괴이한 저 생김새가 영화 제작진들을 불러들인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탐방로는 명문펜션 앞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향한다. 오른편은 동산항의 방파제로 연결되니 주의한다. 이어서 영락없는 여염집, 그것도 초현대식으로 지어진 동산암(東山庵)'을 지나면 동산마을이다. 아니 동산마을은 조금 전에 지나왔던 동산항에서 잠시 후에 만나게 될 동산해변까지를 아우른다. 참고로 고구려 때 이곳은 혈산현(穴山縣)의 소재지였다고 한다. 신라 때 동산현(洞山縣)으로 고쳐서 내려오다가 조선조 때 동산리(洞山里)가 되었다. 자연부락으로는 해당화, 용수골 등이 있다.

 

 

마을 끝자락에서 바라본 동산해변이다. ’Kakaomap’에서는 포구 옆의 해변과 이곳을 모두 동산해변으로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두 해변은 모래사장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대신 모래사장은 북쪽 복분리해변과 함께 쓰고 있는 모양새이다. ! 동산해변은 일출 명소로 손꼽힌다. 해변의 끝자락에서 바다를 향해 뛰쳐나간 갯바위들에다 바다에서 솟구쳐 오르는 해를 집어넣을 경우 개인전에서나 볼 법한 멋진 사진이 태어나기 때문이란다.

 

 

동산해변에서 바라본 북쪽 복분리 해변(北盆里 海邊)’ 풍경이다. 두 해안의 모래사장은 연결되어 있는 모양새이다. 아니 중간에 작은 개울이 지나가고 있으니 구분된다고 우길 수는 있겠다.

 

 

다시 도로로 돌아와 탐방을 이어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조개굽는 마을' 표지석 앞을 지난다. 동산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겠거니 하고 카메라에 담아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흥수산이라는 수산물 공급업체의 홍보용 빗돌이었다. 각종 조개들을 도매가로 여행객들에게 팔고 있다는 것이다. ‘동해안에서 가장 저렴하게 구이용 조개를 구할 수 있는 곳!’이라는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를 내걸고 말이다.

 

 

​▼ 이어서 탐방로는 동해안자전거길을 따른다. 이는 해파랑길 42코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코스의 대부분이 자전거길을 따르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구간은 왼편에 ‘7번 국도’, 그리고 오른편에는 울창한 솔밭을 끼고 이어진다. 그러다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바닷가로 나가더니 복분리해변(北盆里 海邊)’과 마주한다. 동산항을 나선지 18분 만이다. 백사장 길이가 350m에 이르는 복분리해변은 수심이 얕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자체에서는 다른 곳에다 포커스(focus)를 맞췄다. 이곳의 자랑거리인 소나무 숲속에 솔밭 야영장을 조성해 놓은 것이다. 그래선지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모두가 다 숲속에서 노닐고 있었다.

 

 

해변 끝에서 왼편으로 휘어져 나가 ‘7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이어서 복분리마을표지석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복분리 경로당이 보인다. 이 일대의 길가에는 꽃양귀비가 지천으로 심어져 있었다. 재배가 금지된 양귀비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붉디붉은 색갈이 너무나 예쁘다. 지자체에서 조경용 씨앗을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을안길이 끝나갈 즈음 효원재(曉園齋)’라는 표지석이 세워진 독특한 외모의 건물을 만난다. 담벼락에 건축에 대한 이력이 적혀있었으나 이 역시 건물의 정체는 밝히지 않는다. 다만 맞은편 건물이 원불교의 표식을 하고 있는 걸로 보아 원불교와 관련된 시설이 아닐까 싶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임도처럼 산자락을 누빈다. 덕분에 이 구간에서는 금강소나무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다.

 

 

탐방로는 또 다시 ‘7번 국도와 만난다. 그렇다고 국도로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국도 직전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기 때문이다. 오른편으로 가면 훼밀리 휴게소가 나오니 주의하자. 아무튼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복분교다리를 건너 잔교리 해변으로 연결된다. 자전거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향한다. 하지만 해파랑길은 7번 국도를 건너도록 설계되어 있다. 횡단보도가 나있지만 신호등이 없으니 오가는 차량들을 살펴가며 건너야 하는 주의가 필요한 곳이다. 참고로 복분리해변에서 이곳까지는 20분이 걸렸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해난 어업인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해상 조업 중 불의의 사고로 사망, 실종된 어업인의 넋을 추모하고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1995년에 세운 탑으로, 매년 510일 위령제가 개최되며, 1075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단다.

 

 

위령탑의 왼편은 잔교 해변(棧橋海邊)’이다. 38선 휴게소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백사장이 깨끗하다고 알려져 있다. 주변에 숙박업소나 상가가 없어 한적하지만 화장실 등 부대시설은 물론이고 해송 사이로 야영장이 갖춰져 있어 피서를 즐기기에 딱 좋다고 한다. 참고로 이곳은 영화 시라노 : 연애조작단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상용(최다니엘)이 희중(이민정)에게 사랑을 고백한 장소가 바로 여기다.

 

 

잔교해변에 있는 무궁화동산을 들르도록 되어 있는 해파랑길을 버려두고 국도로 되돌아와 자전거길을 따른다. 핸드폰 앱이 길을 벗어났다며 경고를 보내오지만 내 신뢰는 선두대장의 경험을 더 믿었기 때문이다. 까짓 진교해변쯤이야 조금 전 위령탑에서 본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국도를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걷다보면 진교해변에 조성된 무궁화동산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는 '경찰전적비'가 자리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양양·속초 지역은 수많은 격전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 이 지역의 25개 격전지에서 32명의 경찰이 희생되었는데, 이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이자 충혼비라고 한다.

 

 

경찰과의 인연 때문인지 탑의 오른편에다 각종 도로교통 관련 표지판들을 세워놓았다. 도로를 내었는가 하면 횡단보도와 신호등도 배치했다. 어린이들을 위한 교통안전 교육장일지도 모르겠다.

 

 

이후로 탐방로는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다. 대부분이 소나무, 그것도 나이 든 소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가슴속까지 상큼한 기운이 스며드는 기분 좋은 구간이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걷는데, 문득 이곳 잔교리국군의 날제정의 토대가 된 마을이라는 것이 생각난다. 1945년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한반도에는 38선이 그어졌고 뒤이어 5년 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연합군은 한때 낙동강까지 밀렸으나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 등으로 승승장구하며 북진을 거듭하게 된다. 이 무렵 유엔에서 연합군 측에 38선을 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단다. 연합군이 머뭇거렸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에 북진 명령을 하달했고 국군 3사단 23연대가 최초로 잔교리의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한다. 그날이 1950101일이었고 현재 국군의 날은 이날을 기려 1956년 제정한 것이다.

 

 

숲속으로 길이 나있다보니 간식거리도 눈에 띈다. 새콤달콤한 산딸기가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이다. 이런 산딸기 밭은 하조대 인근에서 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걷자 탐방로는 육교를 이용해 7번 국도를 건넌다. 아이디어를 담은 대형 광고판이 눈길을 끌게 만드는 멋진 다리이다. ‘말이 돼? 양양 서핑도 안 해보고!’ 이곳 양양이 대한민국 서핑의 메카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잘 담을 수 있는 문구가 있을까 싶다. 반대편에는 파도를 탄다. 행복을 탄다라는 문구와 함께 서핑을 하러 바닷가로 나가는 어느 가족의 사진까지 넣었다.

 

 

육교를 건넜다싶으면 곧이어 삼팔선휴게소가 나온다. 널따란 광장에는 이곳이 삼팔선임을 알리는 커다란 빗돌(38표지석)과 함께 삼팔선 숲길(38)’디모테오 순례길(18)’이 그려진 ‘38숲길 노선도그리고 ‘38선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미·소 양국이 군사경계선으로 그어놓았다는 38선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 ‘38선 표지석에 적혀있는 내용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1988년 처음으로 세워질 당시만 해도 이 빗돌이 이곳으로부터 북쪽으로 15km 떨어진 3·8휴게소 광장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보수를 겸해서 2001년에 이곳으로 옮겼단다. 그렇다면 이곳이 38선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처음 세울 때 자리를 잘못 잡았던지 말이다. 그건 그렇고 38선이 그어질 당시 잔교리는 마을 중심을 흐르는 잔교천(38선천)을 경계로 북쪽 능선에는 소련군 초소가, 남쪽 능선에는 아군 초소가 설치되어 한마을이 불시에 양단되었다고 한다. 이 결과 혈육이 생이별하였음은 물론이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비극의 현장으로 변했단다.

 

 

휴게소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갯바위들이 널린 남쪽바다에는 푸른 숲을 머리에 인 작은 바위섬이 떠있다. ‘조도라는 섬인데 하늘과 경계를 나누지 못하는 푸른 바다와 조화를 이루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북쪽 방향의 그림 속에는 잠시 후 들르게 될 기사문항들어있다. 양양의 특산물인 송이버섯 모양으로 생긴 등대가 눈길을 끄는 포구이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펼쳐놓은 술상에서 소주 두어 잔 얻어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잠시 후 진교천을 가로지르는 삼팔선교를 건너니 기사문항(基士門港’)의 입구임을 알리는 조형물이 얼굴을 내민다.

 

 

잠시 후 ‘38해변이라고도 불리는 기사문해변에 이른다. 백사장을 걸으면 사박사박 소리가 난다고 해서 새소리 오()’자를 넣여 오사(嗚沙)’라고도 불리는 해수욕장이다. 이곳도 서퍼(surfer)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윈드 파인더 기준 최대 3m까지 라이딩 가능한 파도가 생기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서퍼가 아니라 산소통을 짊어진 스쿠버 다이버(scuba diver)’들이였다. 10여 명이 모터보트에 올라타는 걸 보면 이 근처에 멋진 다이빙 포인트라도 있는가 보다.

 

 

몇 걸음 더 걷자 기사문항에 이른다. 정주 어항이라고 해서 작고 한적한 포구인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훨씬 크다. 먼 바다는 나가지도 못할 크기지만 정박하고 있는 어선의 수도 많다. 거기다 물고기를 닮은 어촌계 활어센터도 버젓이 갖고 있었다. 성수기가 아니어선지 안이 텅 비어 있었지만 말이다. 참고로 이곳 기사문리(基士門里)는 원래 내외부락으로 나뉘어 초진기사진으로 불리어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근래에 와서 기사진을 기사문리로 개칭했단다.

 

 

마을회관 앞을 지나는데 담벼락에 벽화가 가득하다. 한복을 입은 군중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뭔가를 외치고 있는 그림이다. 19193·1운동 때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현북면 주민들이 이곳 기사문리에 있던 주재소를 공격하려고 했다더니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저런 그림을 그려 넣었나 보다.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이제 국도의 오른편 가장자리를 따른다. 잠시 후 만세고개에 오르자 ‘3·1만세운동 유적비(三一萬歲運動遺蹟碑)’가 국도 너머에 세워져 있다.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이 겁나 직접 가보지는 못했으나 태극기가 새겨진 타원형의 저 빗돌 기단에는 만세를 부르는 주민들의 군상이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좌우의 작은 빗돌에는 '만세고개의 유래'와 당시 상황과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단다. 1919년 들불처럼 일어났던 3·1만세운동은 이곳 현북면을 비켜가지 못했다. 박규병(朴奎秉원병(元秉) 형제와 임병익(林秉翼오정현(吳鼎鉉) 등이 주도했는데, 47일의 첫 번째 만세시위에 이어 49일에 다시 모인 1000여 명의 군중이 관고개(關峴지금의 만세고개)를 넘어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때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제 군경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선두에 섰던 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20여 명이 총상을 입었단다.

 

 

국도를 따라 걷다가 하조대 교차로에서 오른편으로 들어선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하조교 앞 사거리에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광정천의 천변도로를 따른다. 다리 앞에 세워놓은 하조대 표지석에 방향표시까지 되어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겠다.

 

 

그렇게 20분 남짓 걸었을까 삼거리가 나온다. 물론 기사문항에서부터 걸린 시간이다. 42코스 종점인 하조대 해변은 이곳에서 왼쪽으로 가야한다. 하지만 양양팔경의 다섯 번째 자리를 꿰차고 있는 명승지 하조대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마침맞게 해파랑길도 하조대를 다녀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조대의 정문이랄 수 있는 아치형 대문으로 들어서는 이유이다.

 

 

5분쯤 걸었을까 나지막한 언덕 위에 벤치 하나가 놓여있다. 뭔가 볼거리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일단 오르고 본다. 그런 내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최고의 뷰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빛깔고운 모래사장이 하늘과의 경계를 못 만드는 푸른 바다와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그 그림의 정점은 물론 백사장의 끄트머리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하조대의 자랑거리 기암괴석들이다.

 

 

몇 걸음 더 걸으니 이번에는 군휴양소의 입구(이정표 : 하조대 둘레길/ 군휴양소)가 나온다. 하조대 스카이워크로 가는 둘레길이 이곳에서 나뉘니 꼭 기억해 두자. 여기까지 와서 하조대의 또 다른 명물로 떠오르고 있는 스카이워크는 올라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조금 더 걷자 하조대 관광안내소가 나온다. 그 옆에는 하조대의 또 다른 명물인 등대카페가 똬리를 틀었다. 너와지붕의 형태를 한 독특한 외관 말고도 차 맛과 조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고 해서 젊은이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곳이란다. KBS `12`에서 방문했을 정도라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 이곳에서는 길이 둘로 나뉜다. 오른편에 보이는 통나무 계단을 오르면 하조대정자가 나오고, 왼편은 무인등대로 이어진다.

 

 

먼저 국가지정 문화재인 명승 68하조대(河趙臺)’부터 찾고 본다. ()사방을 볼 수 있는 높은 곳이라는 뜻이다. 일종의 전망대라고나 할까? 그런 하조대에는 현재 육각의 정자가 지어져 있다. 정자의 이름 또한 하조대이다. 정자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정조 때 재건됐다가 1939년에 육모정자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6.26때 무너진 것을 1955년 다시 지었고, 1998년의 해체·복원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자 안에는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과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쓴 두 편의 시가 걸려 있으며, 정자 입구에 있는 두 개의 하조대각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세근(李世瑾, 1664-1736)이 썼다고 한다.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하조대는 일종의 전망대이다. 육지가 손가락처럼 길게 뻗어 나와 바다와 만나는 지점, 천길 절벽의 위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덕분에 이곳에서의 조망은 가히 압권이다. 눈길 가는 곳마다 기암괴석과 만경창파를 주제로 한 풍경화가 그려지고, 먼 바다에서 밀려온 높은 파도는 절벽을 때리며 산산이 부서진다. 가히 국가 명승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풍경이라 하겠다.

 

 

그런 절경 가운데서도 백미는 단연 애국송(愛國松)’이다. 이 소나무는 바닷속에서 금방 솟아 나온 듯한 기암(奇岩) 위에서 자라고 있다. 크거나 굵지는 않지만 수령은 무려 25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애국송이란 이름은 수년전 애국가 영상 화면에 이 소나무 뒤로 떠오르는 일출이 소개되면서 붙여졌단다. ‘애국가에 나오는 소나무라는 뜻이다.

 

 

관광안내소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하조대 등대로 향한다. 해송과 바위 사이로 내놓은 데크로드를 따라 잠시 걷자 새하얀 무인등대가 나온다. 등대도 역시 바다를 향해 손가락처럼 뻗어나간 끝자락, 바위 절벽의 위에 지어져 있다. 그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좌우의 기암절벽과 함께 망망대해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등대의 입지로 이만한 곳도 없을 것 같다.

 

 

등대 부근의 풍광도 역시 장관이다. 사실 아름답지 않은 동해안 풍경은 없다. 하지만 가지를 늘어뜨린 소나무가 기암절벽을 둘러싸고, 소나무 사이로 동해바다가 아스라이 펼쳐지는 풍경은 결코 흔하지 않다. 그래선지 젊은이들의 감성 사진 포인트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단다. ! 이곳 역시 일출 명소로 꼽힌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군휴양소 입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하조도 둘레길을 따른다. 하조도의 또 다른 명물로 자리 잡은 스카이워크로 연결되는 탐방로인데 지난해(2019) 봄에 개장했다. 군 경계지역이라서 철조망으로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철조망 밖에 새로 놓은 데크는 기껏해야 200m 남짓이다. 하지만 동해안의 융기가 빚어낸 기암괴석을 구경하며 걷는 기분 좋은 길이다. ! 이 둘레길은 시간을 정해놓고 개방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겨울철에는 일출 30분 전부터 오후 5, 여름철에는 일출 전부터 오후 8시까지 개방한단다.

 

 

지난 2012년에 개방한 하조대 스카이워크 전망대는 하조대의 새로운 관광명소이다. 전망 좋은 정자등대로 유명한 하조대’. ()사방을 볼 수 있는 높은 곳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니 이곳 스카이워크를 합해 하조대의 삼대 전망대로 꼽아도 나무랄 일은 아닐 것 같다. 기암절벽이 주를 이루는 주변 경관도 빼어난 편이다. 거기다 등대를 닮은 독특한 외모도 눈요깃거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스카이워크의 재미는 투명유리 위를 걷는 것이다. 행여 유리라도 깨질세라 가슴조리며 발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을 내려다보는 재미가 일품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이곳 하조대 스카이워크는 높이가 썩 높지 않아 긴장감이 많이 떨어진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철썩이는 파도가 만들어 내는 양양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이를 상쇄시켜 준다.

 

 

전망대답게 스카이워크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스릴감을 더하며 끄트머리로 나가보면 먼저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두 팔을 벌리기라도 할라치면 오롯이 저 푸른바다를 품에 담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양 옆으로는 군 전용해변과 하조도해변이 펼쳐진다. 거센 바람에 층층이 포말을 그리며 해변으로 밀려드는 파도는 물론이고 설악 능선까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스카이워크에서 내려오면 곧이어 드넓은 하조대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에메랄드빛 바닷물과 부드럽게 펼쳐진 모래사장, 그리고 군데군데 자리한 등대가 눈길을 사로잡는 곳으로, 동해안 바닷가 중에서도 빼어난 풍광과 고즈넉함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폭이 100m나 되는 백사장의 길이가 1.5나 되는데다 해안에서 바다쪽으로 70m까지 나가도 수심이 1.5m에 불과하기 때문이란다.

 

 

트레킹 날머리는 하조대해수욕장 입구(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 80-2)

스카이워크전망대를 빠져나오면 하류교가 나오고 이어서 하조도해수욕장임을 알리는 커다란 조형물이 길손을 맞는다. 아까 하조대에서 보았던 애국송을 닮았는데 이 조형물의 아래에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다. 오늘은 총 11.85를 걸었다. 지도에 표기된 거리가 9.6이니 경관 좋은 곳을 들락거리느라 2나 더 걸었던 모양이다. 걷는데 소요된 시간은 3시간 20, 하조대라는 명승지를 둘러보았는데 어찌 시간이 지체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에필로그(epilogue), 하조대(河趙臺)의 정확한 위치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돌출 해안 정상부에 건립된 정자 주변을 지칭한다. ()사방을 볼 수 있는 높은 곳을 지칭한다. 그러니 하조대하조라는 지명을 갖고 있는 높다란 대인 것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하조대는 온갖 기암괴석과 바위섬들로 이루어져 있는 암석해안으로, 동해바다의 절경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 지점이자 빼어난 조망처이다. ‘하조대라는 지명도 한번 살펴보자. 하조대는 조선 개국공신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은거하던 곳이라 하여 그 둘의 성을 따서 붙인 지명이라고 한다. 하씨 집안 총각과 조씨 집안 처녀의 사랑 이야기를 근거로 드는 주장도 있다. 집안의 반대로 사랑을 이룰 수 없게 된 두 청춘남녀가 저 세상에서라도 결실을 맺자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기리며 만들어낸 이름이 하조대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전설이다.

 

해파랑길 38코스

 

여행일 : ‘20. 5. 25()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과 장현동·노암동·명주동·성남동·입암동·남항진동 일원

여행코스 : 오독떼기전수관(2.3)구정면사무소(1.2)장현저수지(6.2)모산봉강릉도호부(1.9)강릉 중앙시장월화정(6.7)남대천변솔바람다리(소요시간 : 18.3/ 4시간 40)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학산마을 오독떼기전수관에서 시작해서 남항진해변에서 종료되는 해파랑길 38코스는 강릉바우길 6구간과 대부분 일치한다. 바우길이 강릉시내에서 강릉대도호부 관아라는 유적지를 하나 더 둘러보게 한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 구간은 해파랑길이라는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해안길이 아닌 내륙을 걷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때문에 18.5km나 되는 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가슴에 담을만한 볼거리가 없다. 강릉시가지부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기존 경로와는 조금 다르게 걸어봤다. 강릉 시내에서는 바우길을 따라 대도호부 관아에 들렀고, 강릉시내에서 남항진까지는 남대천을 따라 조성해놓은 탐방로를 따랐다. 덕분에 우린 꽃으로 단장된 고수부지를 걸으며 철새도래지와 체육공원, 갈대밭 등 아름다운 풍광들을 두루두루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들머리는 학산마을 오독떼기 전수관(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628)’

동해고속도로(속초-삼척) 남강릉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우회전하여 백두대간 쪽으로 들어오다 고속도로 바로 앞 사거리(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880-28)에서 우회전하여 어단천(於丹川)’을 따라 내려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학산(鶴山) 마을에 이르게 된다. 트레킹 출발지인 오독떼기 전수관은 강릉 일대의 민초들이 김을 매면서 불러오던 오독떼기라는 농요(農謠)를 전승(傳承)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수관(傳受館)이다.

 

 

 

동해바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트레킹을 시작한다. ‘강릉바우길 6구간을 거꾸로 출발한다고 보면 되겠다. 화장실 옆에 설치된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을 지나면 굴산사지 당간지주 갈림길인 '굴산교'가 나온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다리를 건넌 다음 어단천(於丹川)의 우안을 따라 걷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랐다. 도로변에 있다는 조순선생의 생가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100m남짓 더 걸었을까 '토종벌 마을'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 뒤편으로 조순(趙淳, 1928~) 선생의 생가가 나타난다. 한국 현대경제학의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서는 국회의원(15)과 서울시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서울대 상대와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캠퍼스, 박사)에서 수학한 그는 1968년부터 1988년까지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케인즈 학파의 일원으로 많은 학문적 업적과 제자를 남겨 경제학계에서 조순 학파라고 회자되는 인맥을 구축했다. 그의 저서인 '경제학 원론'은 한때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제학 교과서였다. 나 또한 고시 준비를 하면서 서너 번이나 완독했던 기억이 있다.

 

 

생가 앞에 조성해 놓은 작은 공원에는 커다란 빗돌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빗돌에는 준도행기 봉천수명(遵道行己 奉天受命)’이라는 여덟 글자가 적혀있다. ‘도를 따라서 몸을 행하고, 하늘을 받들어 명을 받노라는 의미이니 나 같은 공직자들에게는 평생의 좌표로 삼을만한 좋은 문구라 하겠다. 그런데 빗돌에 적힌 거짓말 같은 얘기가 실소를 짓게 만든다. 2002년 태풍 루사때 농경지 복구에 필요한 흙을 조순의 임야에서 채취하는 과정에서 이 빗돌이 출토되었는데, 다음 날 바위를 정돈하려고 가보니 긴 바위가 톱으로 자른 듯 반으로 쪼개져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선생이 친필 경구를 새겨 집 앞에 세웠다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가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어단천 건너에 조철현 가옥(曺喆鉉 家屋, 강원도 문화재 제87)’이 보인다. 중부지방의 가옥이 대개 자 형태인데 반해 저 집은 대문간이 없는 자로 되어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단다. 6.25 전쟁 때 폭격을 받아 무너졌던 것을 1953년에 중창했다고 한다.

 

 

가로수로 심어놓은 자두나무를 벗 삼아 걷다보니 학산교다리가 나온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 만이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도로를 벗어나 왼편으로 향한다. 몇 걸음 더 걸으니 오가닉스토어라는 생소한 상호가 눈길을 끈다. 오가닉(organic). 유기농 식품을 판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학산마을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먹거리 장터라고 한다. 마침 배도 출출하기에 막걸리로 목이라도 축여볼까 해서 기웃거려 봤지만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이번에는 학산인풍(鶴山仁風)’이라고 적힌 커다란 빗돌이 발길을 붙잡는다. ‘학산의 어진 풍습’, 조순선생의 친필이란다.

 

 

100m쯤 더 걷다가 왼편으로 난 시멘트포장길로 들어선다. 이어서 진행방향 저만큼에 단아한 모양새의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정의윤 가옥으로도 불리는 만성 고택(晩惺 古宅,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3)’이다. 이 가옥은 영동지방의 전형적인 자형 주택으로, 대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사랑채, 왼쪽에는 부속채 그리고 맞은편에는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지금 소유주의 할아버지가 1894년에 안채를 그리고 1915년에 사랑채를 지었는데, 목재를 다듬은 솜씨가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당시 집을 지은 목수 최매직·장덕소의 이름도 전해지고 있다. ! 대문을 들어서니 안채로 통하는 사랑채의 문이 열려있었으나 들어가 보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그네들의 조용한 삶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서이다.

 

 

정의윤 고택을 나서서 건너편 '강릉 고시원' 방향으로 진행한다. 고시원 앞에서 좌측 입도로 들어서 누렇게 익은 보리밭을 통과하자 야트막한 고개가 나온다. 길이 세 갈래로 나뉘기 때문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해파랑길 38코스는 이런 갈림길이 유난히도 많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때문에 길 찾기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지레 걱정부터 할 필요는 없다. 이정표와 해파랑길 표식, 거기에 강릉바우길의 표식까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길이 헷갈릴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다면 앱을 사용하면 된다. 핸드폰을 꺼내 카카오 앱에서 해파랑길 38코스을 검색한 다음 화면에 뜨는 데로 찾아가면 된다.

 

 

고갯마루에서 우리 부부는 별미를 맛볼 수 있었다. 잘 익은 산딸기가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이다. 이곳뿐만 아니라 강릉 시가지로 들어가기 전까지 곳곳에서 이런 군락지를 만날 수 있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지루해지기 딱 좋은 코스인데 새콤달콤한 간식거리가 그나마 위안거리가 되어 주었다.

 

 

숲길을 빠져나오자 섬석천(剡石川)’이 나온다. 그런데 탐방로가 물막이 보의 위로 나있는 게 아닌가. 마침 건조기라서 다행이지 여름철에는 신발을 벗어들고 건너야 하는 불편이 있을 것 같다. 아니 장마철에는 아예 건너기조차 못할 게 분명하다. 참고로 섬석천은 구정면과 왕산면 경계의 칠성대(953.6m)를 최고봉으로 하는 일련의 산줄기로부터 북사면으로 흐르는 작은 계곡의 물들이 칠성 저수지와 동막 저수지에 저장되고, 이 저수지로부터 흘러나온 물들이 구정면 장현저수지의 물과 합해져 동해로 흘러나가는 지방하천이다.

 

 

개천을 건너면 여찬리(余贊里)’이다. 개오동나무가 많아 봉황이 날아와 놀았다 하여 봉양리(鳳陽里)라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여찬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은 여찬리·학산리·금광리·어단리·덕현리·구정리·제비리 등 7개리(행정리 기준 12개리)로 이루어진 구정면(邱井面)의 소재지이다. 참고로 구정면의 구정은 마을에 거북이가 나온 우물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옛날 이 마을에 효자가 살았는데 아버지가 병환으로 누워 있었다. 병이 깊은 아버지는 고기를 먹고 싶어 했으나, 때가 겨울이라 고기를 구할 수가 없었다. 효자가 집 앞에 있는 우물에 나와서 하늘에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하니 우물에서 거북이가 나오므로 그 거북이를 잡아 아버지께 삶아 드려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하였다. 그래서 거북이가 나온 우물이라 하여 구정(龜井)’이라 했다는 것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이 지났다.

 

 

구정면사무소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KTX 강릉선' 아래를 통과하면 오동교다리가 나온다. 버스가 다니는 도로(범일로)는 이곳에서 좌우로 흐른다. 하지만 탐방로는 직진이니 주의가 필요하다. 아니 다리 앞에 해파랑길 이정표(모산봉4.9/ 구정면사무소0.8)가 세워져 있으니 이를 참조하면 될 일이다. 그건 그렇고 이번 구간의 이정표들은 하나같이 강릉바우길의 몫까지 겸하고 있었다. 해파랑길 38코스와 강릉바우길 6구간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강릉 바우길은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맥과 바다를 함께 걷는 총연장 150km, 10개의 구간으로 이어진 길이다. 바우는 강원도 말로 바위를 뜻한다. 강원도와 강원도 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 감자바우라고 부르듯 강릉 바우길 역시 강원도의 산천답게 자연적이며 인간친화적인 트레킹 구간이다.

 

 

탐방로는 이제 오른편에 섬석천을 끼고 이어진다. 걷는 도중 사랑제일교회여찬교다리를 만나는 것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딱딱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걷는 구간이다.

 

 

그렇게 10분 남짓 걷자 장현저수지(長峴貯水池)‘가 나온다. 인근에서 산불이라도 날라치면 헬리콥터가 방화용 물을 길어갈 정도로 커다란 저수지이나 탐방로 등의 편의시설은 일절 갖추고 있지 않다. 얼마 전 장현지구 그린타워공원 조성사업에 관한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아직은 시작조차 않은 모양이다. 그 기사는 한국농어촌공사의 계획안을 빌어 총 21만여에 어드벤처존과 레저존, 지역분화공간 구역 및 슬리핑존 등을 조성한다고 했다. 또한 이들 시설에는 파크골프와 번지점프, 열기구체험장 조성을 비롯해 오토캠핑, 캐빈하우스, 야영장 등이 들어선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적한 저수지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저 세월을 낚는 강태공 몇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장현저수지를 경계로 탐방로는 이제 장현동(長峴洞)으로 들어선다. 내곡동과 노암동 사이에 있는 고갯마루인 진재등(長峴)에서 넘어오는 긴 재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란다. 장현동에서의 첫 만남은 성불사였다. 절간이라기보다는 잘 사는 여염집을 닮은 외형이 부담스러워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사양했다. 아니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지었는지 내력도 모르고 들어가 봤자 얻어 낼 내용이 뻔해보였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른다. ‘한국 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로 연결되는 길인데 해파랑길 표식도 이 길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산으로 가라며 자꾸만 경고를 보낸다. 아까 장현저수지를 벗어나자마자 만났던 진재골 추어탕에서부터 왼편으로 진행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멈출 내가 아니다. 얼마 후면 두 길이 합쳐진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자 탐방로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정표는 이곳이 모산(母山) 등산로의 입구임을 알려주고 있다. 산길은 초반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통나무계단이 놓여있어서 조금만 속도를 떨어뜨리면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거기다 그 오르막 구간은 짧기까지 하다. 참고로 모산봉(母山峰)은 강릉의 안산으로 불리는 명산이다. 이름 그대로 산의 생김새가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밥그릇을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겨 밥봉이라고도 하고, 볏짚을 쌓아 놓은 것 같다는 뜻의 노적봉으로도 불린다. 또 인재가 많이 배출된다 하여 문필봉으로도 불린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내놓은 모산 등산로는 일단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다 경사도 거의 없다. 그러니 내딛는 걸음이 여유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선지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결에서 짙은 솔향이 느껴진다. 덕분에 심신이 한껏 맑아진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진행했을까 삼거리(이정표 : 장현저수시/ 모산봉/ 진재등)가 나온다. 길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해파랑길은 이곳에서 장현저수지를 다녀오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곧장 모산봉으로 향했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만났던 장현저수지의 풍경이 또 다시 찾아볼만한 매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걷기 딱 좋은 소나무 숲길을 8분 정도 더 걷자 탐방로가 도로로 내려선다. 이어서 버스정류장(모산초등학교) 뒤편으로 몇 걸음 더 걷게 만들더니 또 다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곳에도 모산봉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 같다.

 

 

도심에 가까운 지리적 여건 때문인지 산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갈림길마다 이정표를 세워두었음은 물론이고 곳곳에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두어 곳에는 체력단련용 운동기구도 배치했다. 산책을 나온 시민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도심공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강릉으로 들어오는 재앙을 막아주고 정신적 위안을 주는 강릉의 안산이라는데 이를 말이겠는가.

 

 

모산으로 들어선지 38분 만에 정상에 올라섰다. 정상은 두 개의 전망데크만 설치되어 있을 뿐 정상석은 따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흙을 쌓아올려 옛 높이로 복원했다는 모산봉 복원비를 세웠다. ‘임영지(臨瀛誌)’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중종 때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강릉 지역에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것을 막고자 하여 이 지역 명산인 모산봉의 봉두를 인위적으로 낮추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에 근거해 옛 정기를 되찾고자 지역 주민들이 복원운동을 벌인 것이다. 주민들이 쌓아올린 높이는 석자 세치(1m)’. 그렇게 해서 높아진 해발이 105m라고 한다. 참고로 모산봉(母山峰)은 강릉을 떠받치고 있는 4개의 기둥산인 사주산(四柱山)‘ 가운데 하나이다. 나머지 셋은 월대산(月帶山)와 시루봉, 땅재봉 등이다. 옛 선현들은 이 산봉우리들이 강릉을 중심에 두고 외곽에 마름모꼴로 버티어 강릉의 터를 단단히 다져 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또한 이들 4주산이 있었기 때문에 강릉이 오랜 세월 동안 명맥을 유지해 왔다고 믿었단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별로이다. 사방이 울창한 숲으로 막혀있기 때문이다. 그저 잘 생긴 금강송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남쪽으로 시야가 조금 열릴 따름이다. 그런데도 정상 근처에 세워놓은 안내판에는 매년 11일 모산봉 정상에서 해돋이 행사가 열린다고 적어 넣었다. 또한 이곳 모산봉을 해넘이와 해돋이를 함께 할 수 있는 전국단위의 명소로 소개한 언론도 있었다. 내 눈에는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은데도 말이다.

 

 

이젠 산을 내려갈 차례이다.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정상으로 올라왔던데 반해 하산 길은 많이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무릎이 약한 사람들에겐 지옥의 구간일 수도 있겠다. 거리가 짧은 게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말이다.

 

 

이정표(모산봉 정상 291m)가 세워진 등산로 입구로 내려와 ’7번 국도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그러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잘 이어진 건물 몇 동이 보인다. 작은 마을인데도 양지뜰 요양원좋은 요양원등 요양원이 셋이나 들어서있다. 우리나라도 이젠 노령국가로 들어섰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잠시 후 2차선 도로인 모산로로 올라서자 강릉전축박물관이 나타난다. 가설 건축물 형태인데 간판에는 음악과 추억이 있는 곳... 강릉 전축박물관 정원에서 수다를...이라고 적혀있다. 출입문에 커피 잔이 그려진 걸 보면 카페를 겸하고 있는 모양인데 문은 굳게 닫혀있다. 아니 마당의 잡초가 웃자란 걸 보면 오래 전에 문을 닫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덕분에 안에 전시되어 있다는 옛 전축과 다양한 전자제품은 구경할 수 없었다. 주인장의 비법으로 빚어낸 오감 쉐이크를 마시며 전시된 제품에 맞는 가수들의 노래를 감상하는 재미가 나름대로 쏠쏠하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전축박물관의 조금 위에서 만나게 되는 삼흥사앞 삼거리에서는 오른편으로 향한다. 탐방로는 이제 강릉시내로 들어선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여느 중소 도시와 다름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이어서 경포중·고등학교와 노암초등학교의 사잇길을 지나는가 싶더니 강릉교육지원청앞에 이른다.

 

 

단오공원 앞에서 이정표(단오문화관0.1/ 노암초등학교0.7, 학산마을 9.7)가 가리키고 있는 단오문화관 쪽으로 향한다. 이어서 강릉단오제 전수교육관앞에서 굴다리 아래를 통과하면 남대천의 널따란 고수부지가 나온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강릉바우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향하지만 해파랑길은 반대편인 오른편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도 이정표(중앙시장0.8/ 강릉바우길 6구간)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토록 하자. 참고로 강릉단오제는 단옷날을 전후하여 펼쳐지는 강릉 지방의 향토 제례 의식으로,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200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축제에는 산신령과 남녀 수호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관령 국사성황 모시기를 포함한 강릉 단오굿이 열린다. 그리고 전통 음악과 민요 오독떼기, 관노가면극(官奴假面劇), 시 낭송 및 다양한 민속놀이가 개최된다.

 

 

우리 부부는 이곳부터 바우길을 따르기로 했다. 왼편으로 방향을 트니 남대천에 창포다리가 놓여있다. 명주동의 대도호부 관아와 단오문화회관을 연결시키기 위해 놓은 108m 길이의 보행자 전용 다리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다리는 강릉단오제행사의 주요 이동로로써의 기능도 수행한단다. 그래선지 '강릉 관노가면극' 등장 인물상이 다리 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참고로 강릉 관노가면극(江陵官奴假面劇)은 강릉단오제 때 펼쳐지는 탈놀이로 춤과 동작을 위주로 한 국내 유일의 무언(無言) 가면극이다. 관노(官奴)라는 특수한 신분에 의해 이루어진 놀이로, 등장인물은 양반광대, 소매각시, 장자마리 2, 시시딱딱이 2명이다. 우리나라 다른 가면극에서 볼 수 있는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나 저항의식보다는 단오제라는 제의를 중심으로 서낭제 가면 놀이의 전통을 충실히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창포다리를 건너자 탐방로는 벽화 등으로 예쁘장하게 단장된 골목으로 연결된다. 이 골목에는 작은 카페들도 여럿 들어서 있는데, 초입의 건물이 특히 눈길을 끈다. 옛 가옥에 약간의 인테리어만 더함으로서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현수막에 적힌 상호는 씨앗 책방, 소소 밀밀’. 요즘 뜨고 있다는 책방 카페를 열 계획인 모양이다. 참고로 소소 밀밀은 글작가 소소아줌마와 그림작가 밀밀아저씨가 운영하는 그림책 서점이다. ‘소소밀밀'은 성긴 곳은 더욱 성기게 빽빽한 곳은 더욱 빽빽하게 하라는 뜻이란다. 아람출판사의 그림책과 선별한 단행본 그림책, 단행본 아동문고가 있는 책장으로 구성되며 그림책 만들기 수업과 드로잉 수업도 진행한다.

 

 

적산가옥(敵産家屋)을 활용한 카페들이 눈길을 끄는 골목의 담벼락은 온통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런데 단오 행사의 중심이 되는 곳이어선지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보아오던 벽화들과는 많이 다르다. 옛 풍속화들로 도배를 해놓은 것이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사진으로 바꿔 넣기도 했다. ! 이 골목에는 복합 문화공간인 작은 공연장 단()’도 들어서 있었다. 옛 교회 건물을 개조해 다양한 장르의 공연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참고로 이곳의 지명은 명주동이다. 강릉은 삼국시대에 하슬라, 통일신라 때는 명주라 불렸다. 그러니 명주동은 도시의 옛 지명이 동네 이름이다. 그에 걸맞게 고려에서 조선까지 이어진 강릉대도호부 관아(사적 388)와 강릉부의 행정 읍성인 강릉읍성, 일제강점기 적산 가옥 등이 자리한다. 강릉시청도 2001년까지 명주동에 있었으니 약 1000년 동안 강릉의 중심지 기능을 했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우린 칠사당(七事堂,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을 만났다. 조선 시대 지방 수령의 주요 업무인 칠사(七事 : 호구·농사·병무·교육·세금·재판·비리 단속)를 집무하던 곳이니 동헌(東軒)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보면 되겠다. 칠사당 오른편에는 강릉대도호부 관아(江陵大都護府 官衙)’가 있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객사(客舍) (사적 제388)’이다. 고려 태조 19(936)에 처음 세워진 객사는 원래 83칸의 크기를 자랑했으나 현재는 객사문(客舍門. 국보 제51)’만 남아있을 뿐이고 동헌(東軒)과 아문(衙門)의 운루, 객사 등 나머지 건물들은 2006년 이후에 복원된 것들이다. 이 지역을 아우르는 용어도 이때 임영관에서 '강릉대도호부 관아'로 고쳐졌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다. 그것도 관동지방 제일의 도시다. 그래선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의 규모도 남다른 편이다. 자 이젠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이층 누각형식으로 지어진 큼지막한 관아 정문을 들어서자 조선시대 지방관들이 정무를 집행하던 동헌(東軒)이 복원(2012)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조금 전에 만났던 칠사당과의 관계가 묘해진 것이다. 칠사당 또한 강릉부사가 업무를 보던 시사청(視事廳)으로 동헌의 또 다른 표현이니 말이다. 답은 전문가의 몫으로 남겨놓고 주위를 살펴보니 왼편 언덕에 의운루(倚雲樓)라는 정자가 지어져 있고, 그 아래에는 작은 도서관이 터를 잡았다.

 

 

동헌의 뒤로 나가니 임영관 삼문(臨瀛館三門, 국보 제51)’이 마중 나온다. 고려 말에 지어진 임영관(臨瀛館)이라는 객사의 정문으로 도호부 관아에서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문 위에 걸린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란다. 안으로 들어서면 중대청(中大廳)을 필두로 전대청(殿大廳)과 서헌(西軒), 좌우 익사(翼舍) 등이 줄줄이 나온다. 모두 2006년에 복원된 것들이다. 참고로 객사문의 백미(白眉)'배흘림기둥'으로 알려져 있다. 중간은 불뚝하고 아래위는 좁은 완벽한 배흘림 수법을 자랑하는 객사 기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은 목조 기둥이라고 하다. 강릉의 옛 할머니들이 다리를 훤히 내놓고 다니는 처녀들을 보고 객사 기둥 같은 다리를 다 내놓고 다닌다며 혀를 찼다는 그 기둥이다.

 

 

10분 정도 둘러보다가 동편 출입문으로 빠져나오니 객사문 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남대천 방향으로 진행하다 강릉관광호텔 앞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 영어 간판이 즐비한 번화가가 나온다. 강릉의 새로운 핫 플레이스(hot place)로 떠오른 금성로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참관하기 위해 찾아온 외국인들을 위해 조성한 사후면세점 거리이다

 

 

면세거리의 끝은 중앙성남 전통시장이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강릉지역을 대표하는 상설시장으로 자리를 굳혔으며 영동 지방 어류와 농작물의 집산지로 통한다. 상가는 지하 1층에 지상 2층의 현대식 건물로 이루어져 있지만 강릉 사람들은 이 건물을 중심으로 한 주변 상가 일대를 모두 중앙시장이라고 일컫는다. ! 알아두면 좋을 정보가 하나 있다. 중앙시장을 둘러보고 난 다음 남대천으로 빠져나갈 때 무턱대고 남대천 방향으로 나가지 말고, 동쪽 방향으로 조금 더 진행해서 월화거리로 들어서라는 것이다. 고속철도의 도심구간이 지하화가 되면서 생긴 폐철도 부지에 조성한 거리공원으로 풍물상점 등 볼거리가 제법 많기 때문이다.

 

 

시장은 사람들로 붐빈다. 요즘 방송에서 재난지원금 덕분에 경기가 풀린다는 기사가 계속해서 뜨더니 사실이었던가 보다. 일단은 시장통으로 들어서고 본다. 어깨를 부대끼며 느껴보는 인정이 있으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그런 다음에는 이층 식당가로 올라가 강릉의 도 느껴보기로 했다. 집사람은 삼숙이 탕나는 알탕‘. 공중파 3사의 TV카메라가 모두 훑어갔다는 이 집에서 내놓는 메뉴는 이게 전부이다. 음식은 일단 맛있었다. 하지만 서비스는 제로, 할머니 둘과 할아버지 한 분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웃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친절과는 거리가 먼 투박한 사투리도 귀에 거슬렸다.

 

 

길을 잘못 들어선 우리 부부는 월화거리를 들르지 못하고 곧장 남대천(南大川)으로 빠져나왔다. 천변에 이르러 왼편으로 방향을 트니 다리 하나가 나온다. 위에서 얘기했던 월화거리의 연장선으로 옛 철도교를 개조해 보행자 전용 다리를 만들었다. 8개 구간으로 나누어진 월화거리공원 가운데 철도보도 육교구간이다.

 

 

명색이 공원인데 포토죤 하나쯤은 필수가 아니겠는가. 빈 커피 잔을 든 소녀가 따뜻한 햇살과 신선한 바람에 취한 채로 남대천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 옆으로 냉큼 다가간 집사람, 어쩌면 그녀의 곁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느껴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리는 스릴까지 가미했다. 바닥에 통유리를 대 남대천 물길을 발아래로 내다볼 수 있게 했다. 다리에서의 조망도 뛰어난 편이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해 동해로 흘러드는 길이 51.3의 남대천(南大川) 물길은 물론이고 그 시발점인 백두대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강릉성결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니 기억해 두자. ‘강릉교를 건너온 해파랑길이 저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고, 이어서 한 블럭 더 간 다음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삭막한 시가지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다리를 건너면 월호정(月花亭)’이란 정자가 황금 잉어상과 함께 길손을 맞는다. ‘월화라는 정자의 이름은 강릉 지역의 고유 설화이자 애틋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인 무월랑(無月郞)’연화부인(蓮花夫人)’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왔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악지에 소개된 명주가(溟州歌)’의 배경 설화인데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때 무월랑 김유정(金惟靖)이 화랑도 사관으로 명주(현 강릉)에서 재임할 때 연화봉 아래 별연사지 부근에 있는 연못에서 잉어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지방 토호의 딸인 연화 낭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 무월랑이 임기를 마치고 서라벌로 떠나면서 백년가약을 언약하였으나 그 후 연락이 끊겼고, 낭자의 부모는 딸을 다른 데로 시집을 보내려고 했다. 이에 연화 낭자가 그리움과 현 상황을 비단에 써서 고기에게 먹이를 주며 하소연을 했는데 황금빛 잉어가 편지를 물고 사라졌다. 그 후 무월랑은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장에 들러 잉어 한 마리를 사 오게 되고, 잉어의 배를 가르니 편지가 나오는데 바로 연화의 편지였다. 이러한 사연을 알게 된 임금이 무월랑과 연화부인이 천생연분이라 하여 혼인을 시켰으니 그들이 바로 강릉 김씨의 시조인 명주 군왕 김주원의 부모이다.

 

 

 

시장을 나선지 25분 만에 위에서 얘기하던 강남성결교회에 도착했다.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해파랑길과 헤어지기로 했다. 삭막한 도심을 걷기보다는 남대천에 내놓은 천변산책로를 따르는 게 나아보였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남대천 둔치는 잘 가꾸어져 있었다. 깔끔하게 단장된 산책로는 기본, 생태습지를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유채 꽃밭이나 갈대밭을 조성하는 등 경관 좋은 휴식공간으로 꾸미려는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벤치를 놓아둔 쉼터도 심심찮게 보인다. 길이 4.4의 이 탐방로는 강릉교에서 공항대교까지 이어진다.

 

 

천변도로를 따르기를 35분 여, 둔치에서 게이트볼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니 필드가 널찍한 것이 게이트볼과 골프를 합쳤다는 우드볼(Woodball)’일지도 모르겠다. 이어서 인라인스케이트장을 지나니 축구장, 공놀이 삼매경에 빠진 소녀들이 몇 보인다. 강릉 시민들은 이 일대를 남대천체육공원이라 부른다. 2000년대 초반 야구동호회의 활성화를 위해 남대천 둔치에 만든 간이야구장이 계기가 되었는데 야구장 조성 이후 시민들의 이용이 급증한데다 다른 운동 종목들의 공간 확보까지 필요해지자 유휴 부지에 축구장과 야외 인라인스케이트장 등 다른 종목의 운동장들까지 함께 조성했다.

 

 

동해바다에 가까워지자 남대천의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다. 그러다보니 한강의 밤섬처럼 강의 한가운데에 널찍한 섬도 생겨났다.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게 생김새까지 밤섬과 같다. 밤섬처럼 철새도래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체육공원에서 조금 더 걸으니 조류 관찰대가 나온다. 남대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시설인데 천연기념물 330호인 수달을 비롯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와 매, 물수리, 고니, 노랑부리저어새 등 남대천에서 서식하는 철새들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관찰대에는 망원경까지 설치해 놓았으니 잠깐 짬을 내어 들여다 볼 일이다. 운이라도 좋아 희귀·멸종위기 겨울 철새인 흰꼬리수리라도 눈에 담을지 누가 알겠는가. 아니 그런 운이 없더라도 말똥가리나 물수리, 물닭, 댕기물떼새 등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탐방로는 조류관찰대에서 도로 위로 올라가도록 나있다. 하지만 우린 계속해서 천변을 따라봤다. 그래봤자 공항대교 아래에서 길이 뚝 끊겨있었지만 말이다. 조류관찰대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공항대교를 건넌다. 계속해서 둔치를 따르다가 남항진교를 건너 남항진 해변으로 가고 싶었지만 횡단보도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복 6차선의 도로를 어떻게 무단 횡단할 수 있겠는가.

 

 

공항대교를 건너면 탐방로는 또 다시 남대천의 둑방을 따른다. 우레탄이 깔려있어 걷기가 편한데다 주변 경관도 아름다워 휘파람이 절로 나오는 구간이다.

 

 

 

날머리는 남항진 해변(강릉시 공항길127번길 67)

그렇게 15분 남짓 걷다보면 솔바람다리가 나온다. 해파랑길 38코스의 종점인 남항진 해변은 다리 건너이고,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안목으로 더 널리 알려진 강릉항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항이나 해변보단 거피 거리로 통한다. 그게 다 모방송사 프로그램 덕에 유명세를 탔기 때문인데. 가만히 들여다본다면 여기라고 예외가 있을 리 없다. 사람 많은 곳이라면 어김없이 들어서는 대형 체인 커피전문점이 여기저기 들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개의치 않은 사람들도 많나보다. 산행대장과 그 일행들이 커피를 맛보겠다며 안목으로 가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총 5시간30분이 걸렸다. 점심식사를 하느라 중간에 50분을 쉬었으니 4시간 40분을 걸은 셈이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8.3,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남항진해변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솔바람다리입구에 세워져 있다.

해파랑길 41코스

 

여행일 : ‘20. 5. 16()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과 양양군 현남면 일원

여행코스 : 주문진해변(3.8)지경해변(2.9)남애항(3.9)광진해변(1.6)죽도정입구(소요시간 : 12.2, 실제는 14.5/ 3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강릉의 주문진해변에서 시작해 향호해변과 기경해변, 원포해변, 남애해변, 인구해변을 거친 다음 양양의 죽도해변에서 끝을 맺는 12.2의 구간으로 서핑의 명소로 소문난 여러 해수욕장들과 기암괴석들이 늘어선 아름다운 바닷가 그리고 두 개의 석호(潟湖)를 감상하며 걷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저 바다를 바라보며 단조롭게 걷기만 하는 길이 아니라 푸른 바다와 함께 기기묘묘한 바위, 미항(美港)과 해변, 암자(庵子)와 해송(海松) 등이 함께한다는 얘기이다. 특히 기암괴석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남애항의 스카이전망대휴휴암‘, ’죽도산은 꼭 들러봐야 할 명소이다. 거기다 마침 거리까지 짧으니 느릿느릿 걸으며 사색을 즐길 수 있다는 또 다른 장점도 갖고 있다.

 

들머리는 주문진 해변(강릉시 주문진읍 향호리 8-43)

동해고속도로(속초-삼척) 남양양 IC에서 내려와 강릉방면 7번 국도를 탄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주문진삼거리(강릉시 주문진읍 향호리)에서 빠져나와 바닷가로 향하면 곧이어 주문진해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의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주차장과 해변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해파랑길 40코스와 41코스의 경계지점인 주문진해변은 소돌 마을에서 향호리까지 약 1km의 백사장을 따라 형성된 해수욕장이다. 해변은 경사가 완만한데다 수심도 1m 내외일 정도로 얕다. 거기다 바닷물이 맑아 물속으로 보이는 조개까지 잡을 수 있다니 가족단위의 피서지로는 이만한 곳도 없을 듯 싶다.

 

 

 

해변에는 사진 찍기 딱 좋은 조형물들이 여럿 설치되어 있었다. 하트 모양의 흔들의자는 그 가운데서도 단연 인기다. 쌍쌍의 연인들이 흔들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셀카를 찍는 모습이 여간 사랑스럽지 않은데 이를 놓칠 집사람이 아니다. 냉큼 흔들의자에 앉더니 포즈부터 취하고 본다.

 

 

주문진해수욕장을 오른편에 끼고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2~3분쯤 걸었을까 강릉양양서핑스팟이 나오는데, 건물 전면에 ‘2019 주문진 서핑 페스티벌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다. 이곳 주문진해변도 역시 서핑의 명소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작년 여름엔가 이곳에서 서핑 페스티벌이 열렸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기사는 서핑 동호인들을 위한 대회와 입문자와 아마추어를 위한 롱보드 경연 대회, 초보자 서핑 강습, 보드를 팔로 저어 반환점을 돌아오는 패들 경기등의 경기와 함께, 미니콘서트 형식의 무대공연, 지역 특산물인 오징어와 함께하는 오맥’, ‘치맥등의 참여형 맥주 무료 시음행사도 진행됐다고 전했었다.

 

 

주문진 바다와의 이별은 방탄소년단(BTS)’이 대신 해준다. 주문진해변의 가장 북쪽, 그러니까 향호해변과 맞닿은 2차선 도로에 바다를 등진 버스정류장이 하나 서있다. 버스는 다니지 않는다. BTS2017년 발표한 ‘You never walk alone’ 앨범 재킷을 찍기 위해 세운 시설이라고 한다. 촬영이 끝난 후 철거했다가 BTS의 인기에 편승해 강릉시에서 다시 세웠단다. 방탄소년단의 체취를 찾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음은 물론이다. 강릉시에는 이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인생샷 하나쯤 담아가라고 정류장의 정면에 대를 세웠는가 하면, 핸드폰의 렌즈를 맞출 수 있도록 작은 구멍까지 뚫어 놓았다.

 

 

해변이 끝나갈 즈음 탐방로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향호에서 흘러내려온 물줄기가 동해바다와 만나는 곳에 놓인 향호교를 만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0분 만이다. ‘동해안자전거길은 이곳에서 다리를 건넌다. 하지만 탐방로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향호로 향한다. 다리 앞에 세워놓은 강릉바우길 이정표을 참조하면 되겠다. 13구간인 향호 바람의 길을 따르면 된다는 얘기이다. '강릉바우길의 하나인 '향호 바람의 길'‘12구간(주문진 가는 길)’‘13구간의 경계지점인 이곳에서 향호와 향호저수지를 거쳐 주문진 해변으로 돌아오는 15km 구간이다.

 

 

‘7번 국도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하면 향호(香湖)가 나온다. 향호도 역시 파도가 물길을 막아 생긴 석호(潟湖)이다. 동해의 거친 파도가 모래를 밀어 올려 둑을 막아 자연스레 호수로 변했다. 이곳 향호에는 매향(埋香)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에 향골의 1000년 묵은 향나무 10주를 호수에 묻었는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향나무가 묻힌 곳에서 빛이 비쳐졌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시인 안숭검이 지은 산수비기(山水秘記)’에 전해오는 유래다. 하지만 매향의 풍속은 고을 수령들이 향도 집단과 함께 태백 산지에서 흘러내리는 계류와 동해안의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 향나무를 묻고 미륵보살이 다시 태어날 때 이 침향으로 공양을 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일종의 토속 신앙임을 기억해 두자. 그나저나 향호는 강릉 도심에서 멀리 벗어난 탓에 경포호처럼 관광객들을 끌어들일만한 볼거리는 갖고 있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실망부터 하지는 말자. 호수 주변에 형성된 수만 평의 갈대숲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을이면 황금빛 물결에 빠져보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해파랑길의 탐방로는 호수를 한 바퀴 돌도록 나있다. ‘데크 로드(deck road)’를 놓아 호수의 명물인 갈대숲 사이를 오가게 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물길을 건너기도 한다. 하지만 강릉 바우길은 호수를 벗어나 저수지 안쪽으로 들어간다. 마을사람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이 시골길 또한 일품이라는데 시간이 부족해 실지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평화롭고 아늑한 별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5, 호수를 건너 향호삼거리에 이르자 소나무 숲속에 들어앉은 취적정(取適亭)’이 손짓한다. 옛날에는 강정(江亭)과 향호정(香湖亭) 등의 정자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취적정만 남아있다는데 조선 숙종 때 인물인 이영부(李永敷)가 낙향한 다음 음풍농월(吟風弄月)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취적정이란 이름은 지은이의 호에서 따왔다. 지금의 정자는 2007년 향호를 정비하면서 다시 지은 것이란다. 정자 옆에는 향기체험관이 첨언된 향호리 마을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무슨 향기를 말하는 것일까? 매향(埋香)의 전설이 잠겨 있다는 향호를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후로도 탐방로는 향호의 호숫가를 따른다. 강태공들의 뜰망을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아스팔트도로가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7번 국도가 길손을 맞는다. 향호삼거리에서 10분쯤 되는 지점인데 강릉을 왕복하는 시내버스의 차고지(車庫地)이니 참조한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국도의 갓길을 따른다. 하지만 해파랑길의 표식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래도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국도를 따라야 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스치듯 지나가는 차량들에 몸 사리며 걷다보니 도로변에 돌탑 몇 기와 장승이 세워져 있다. 도로 건너편에는 양양에 오심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빗돌도 보인다. 이제 양양군에 들어섰다는 얘기일 것이다.

 

 

국도 갓길을 따라 200m쯤 걸었을까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가 나온다. 이를 건너면 지경리 노인회관, 이어서 지경해변이 나온다. 하지만 지경해변은 군()의 경계지역이라며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놓았다. 그렇다고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중간에 샛문을 만들어두었는가 하면 시간을 정해 문을 개방하고 있다. 해수욕장 개장시간도 따로 정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 이 울타리가 제거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해안도로 건너편에 길게 가림막을 쳐놓고 지경 관광지를 조성하고 있는데, 157699의 부지에 관광호텔과 프리미엄 아웃렛, 향토음식점, 수변공간 등이 들어설 예정이란다. 휴양과 쇼핑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복합 해양관광지로 조성하려는 모양이다.

 

 

 

지경해변에 이른지 15, ‘화장1를 건너자 왼편에 화상정이라는 정자가 지어져 있다. 정자 앞에는 기묘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우뚝 서있다. 그럴 듯한 옛 이야기 하나를 품은 화상암(和尙岩)'이다. 먼 옛날, 어느 노() 스님이 이곳을 지나가는데 동자 셋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명의 동자는 조그마한 웅덩이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다 잡은 물고기를 넣는데 반해, 나머지 한 동자는 고기를 잡아서는 계속 방생을 하더란다. 동자의 불심(佛心)에 감탄한 스님이 다가가 합장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니 그 동자는 사라지고 그 앞에 화상(和尙)을 쏙 빼다 닮은 큰 바위가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요모조모 뜯어봐도 화상이 그려지지 않으니 문제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말대로 아직도 내 수양은 짧기만 한 모양이다.

 

 

화상암을 지나면 원포해변이 시작된다.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큼직한 갯바위 하나를 빼면 눈에 담을 것이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해변이다. 아니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해수욕장의 입지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다고 봐야겠다. 탁 트인 바다와 깨끗하고 맑은 물도 장점이라 하겠다. 하긴 원포리 앞바다에서 끌어올린 해양심층수를 좋은 물이라는 브랜드로 시판까지 하고 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원포해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Marine resort’였다. 건물 앞에 전시해놓은 해양스포츠 의상을 입힌 마네킹과 물놀이 기구들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간판을 보면 아쿠아 갤러리스쿠버다이빙교습도 함께하고 있는 모양이다. 테이크아웃으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홍보문구 옆에는 ‘harley-davidson station’이라는 글귀도 적혀있다. 오토바이 동호인들을 위한 시설일까?

 

 

원포해변을 지나면 길은 갈고리처럼 호를 그리며 휘어져 남애리로 접어든다. 이어서 두어 개의 포토죤을 기웃거리다보면 탐방로는 어느새 기암괴석들이 널린 갯바위 지대에 이른다. 기기묘묘한 형상에 이끌려 갯바위에 올라보니 북쪽으로는 강원도의 베네치아라고 불릴 만큼 주변 경관이 빼어난 남애항이 펼쳐지고, 남쪽으로는 남애1, 원포리와 지경리의 긴 해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 남애항을 바라보며 걷는다. 오른편 바다는 기암괴석의 전시장이다. 갯바위들이 널리 흩어져 장관을 이루는데 그 하나하나의 형태가 자못 기이하고 웅장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참고로 이곳의 지명인 남애는 원래 낙매였다고 한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매화 꽃잎이 바람에 날려서 마을로 떨어진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현재 지명인 남애남쪽바다라는 뜻이란다.

 

 

남애마을로 들어서 회관을 지나면 해파랑길은 90도로 꺾이며 양양군에서 가장 큰 항구인 남애항(南涯港)’으로 들어선다. 남애항은 삼척의 초곡항, 강릉의 심곡항과 더불어 강원도의 3대 미항으로 손꼽힌다. 남애리 항구를 중심으로 4개 포구 마을이 해안선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고, 방파제로 연결된 두 개의 섬에 각각 빨간색과 하얀색 등대가 쌍둥이처럼 서 있다. 화상암에서 이곳까지는 23,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25분이 지났다.

 

 

일렬로 길게 늘어선 활어회센터를 지나면 남애항 방파제와 마주한다. 방파제 초입의 '남애 스킨스쿠버 교육센터'에는 1980년대 영화 고래사냥의 촬영지였음을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 고래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남애항의 명물인 바다전망대는 카페 뒤편에 있는 바위 언덕에 지어져 있다. 이 전망대는 해파랑길 탐방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한다. 군부대 초소가 있던 자리에 지어 1층은 옛 기능대로 군부대 초소로 사용하고, 2층에 전망대를 만들어 탐방객들에게 주변 경관을 구경할 수 있도록 했다.

 

 

전망대의 하이라이트인 스카이워크는 2층에 배치되었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다.

 

 

3층에 오르면 남애항과 망망대해, 그리고 푸른 하늘이 품속으로 안겨온다. 전망대는 일출의 명소로도 소문나있다. 동해시의 추암(湫岩)과 함께 동해안 최고의 일출명소로 꼽힌다. 특히 그림 같은 해변과 아담한 항구를 붉게 물들이며 타오르는 해돋이는 가히 장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잠시 후 또 작은 바위섬을 만난다.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도록 예쁘장한 다리까지 놓았다. 하지만 금줄을 쳐놓아 섬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방파제 벽면에 양양팔경을 모자이크 사진으로 게시해 놓았다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양양팔경은 양양 남대천과 대청봉, 오색령(한계령), 오색주전골, 하조대, 죽도정, 남애항, ‘낙산사 의상대를 말한다. 해파랑길은 이 가운데 설악산에 있는 세 곳의 경승을 빼놓고는 다 들르게 된다.

 

 

섬에 들어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다 기암 하나를 발견했다. 갯바위를 타고 오르는 거북이의 형상을 쏙 빼다 닮았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이번엔 남애3리 해변이 길손을 맞는다. 길이 1.3km에 폭이 100m인 모래사장을 끼고 있는데, 서핑 삼매경에 빠진 마니아들이 여럿 보인다.

 

 

해수욕장 옆 해안도로를 따라가다가 처녀횟집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 길은 곧이어 대형 아치문을 통해 ‘7번 국도로 연결되지만 탐방로는 국도 조금 못미처에서 오른편으로 경로를 바꾼다.

 

 

잠시 후 남애초등학교가 나온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바닷가를 끼고 있는 것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잡았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광경원(光京院)’이라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름을 가진 펜션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까지 빛난다는 뜻을 지녔다는데, 하단에는 ‘Art pension’이라는 부제까지 달았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독립출판물부터 메이저 출판사의 베스트셀러까지 다양한 서적을 빌려볼 수 있는 도서관(library)을 부대시설로 둔 멋진 숙박시설로 나와 있었다. 와이너리(winery)에서는 유명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맛볼 수 있는 와인도 판매한단다. 카페 모양으로 치장해놓은 노란색 버스도 눈길을 끌었다.

 

 

탐방로는 바닷가로 되돌아간다. 그리곤 갯마을해변을 스치듯이 지나더니 또 다시 국도로 올라선다. 그리고 이번에는 포매교를 건넌다. 이때 국도 너머로 백두대간의 준령과 함께 또 다른 석호인 매호(梅湖)’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이 길은 호수와 바다를 가르는 경계, 즉 물길의 흐름과 풍랑을 만나며 쌓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쌓아올린 모래언덕 위로 내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국도를 따르다가 현남중학교 조금 못미처에서 바닷가로 내려서면 광남해변이다. 수심이 얕고 바닷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다고 알려졌지만 이곳도 철망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시간을 정해 해수욕장을 개방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참고로 이곳은 멍비치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반려견과 함께 자유로운 휴가를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된 애견 전용해수욕장이기 때문이다. 300m의 해안 가운데 150m를 애견 전용구역으로 차단하여 일반 관광객과는 분리된 공간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단다.

 

 

해변이 끝나는 곳에서 굴다리를 통해 국도 쪽으로 빠져나온다. 이어서 국도를 왼편에 끼고 잠시 걸으면 지중해풍의 펜션인 마이 대니(my danny)’가 나오는데 현판에 덧붙인 'VANG·HA·CHAK'이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의미를 몰라 끙끙거리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손을 내려 밑에 둔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방하착(放下着), 불교 선종에서 화두로 삼는 용어라는 것이다. 마음속에 한 생각도 지니지 말고 텅 빈 허공처럼 내려놓으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을 만큼 완전히 내려놓는 경지에 이르면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단다. 이는 인간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탐욕을 버림으로써 무소유를 통한 인간의 자기회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펜션에서 50m쯤 더 걸었을까 해파랑길은 오른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다가 휴휴암의 정문을 통해 암자로 들어갈 수 있지만 아스팔트길의 단조로움에 변화를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어서 야산에 가까운 언덕을 넘자 휴휴암(休休庵)이 나온다. 눈에 들어온 암자는 전국의 여느 유명사찰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다. 하지만 20년 전만해도 이곳은 '휴휴암(休休巖)'이라 불리던 누워있는 형상의 자연석 '해수관음불'을 보면서 잠시 쉬어가던 곳에 불과했단다. 그러다가 1999년에 절을 지었다는데, 일천한 역사에 비하면 절의 규모가 엄청나다 하겠다. 그만큼 영험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휴휴(休休)’는 미워하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 시기와 질투, 증오와 갈등까지 팔만 사천의 번뇌를 내려놓고 오직 그 마음을 쉬고 또 쉬라는 뜻이라 한다. 남애항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이 걸렸다.

 

 

 

휴휴암의 명물은 지혜관세음보살(智慧觀世音菩薩)’이다. 암자의 동쪽 끝자락에 모셔진 높이 33(좌대까지 포함한 높이 53)의 부처인데, 약병(藥甁)이나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게 보통인 다른 해수관음상과는 달리 이 보살상은 지혜를 상징하는 서책을 들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교화 대상인 중생에 맞게 몸체를 바꾸어가며 나타나는 33관음(三十三應身) 가운데 경전을 들고 있는 지경보살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라는데 이로 인해 많은 불자들이 학업성취를 소원하는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이젠 바닷가로 나가볼 차례이다. 부산의 해동용궁사를 떠오르게 하는 휴휴암의 볼거리는 암자 자체보다는 연화법당으로 사용되는 너럭바위와 부처가 누워 있는 듯한 형상의 와불바위, 거북바위, 발가락바위, 여의주 바위, 주먹바위 등 각양각색 바위들이다. 특히 바닷가에 평상처럼 펼쳐져 있는 너럭바위에 서면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바위 주변의 바다 색깔은 떼를 지어 노니는 물고기로 까맣다. 이곳은 방생하는 장소로 관광객이 먹이를 주기 때문에 황어와 숭어, 광어 등 물고기들이 큰 바다로 나가지 않고 바위 주변에 머문다고 한다.

 

 

불이문(不二門)을 나서며 휴휴함과 이별을 고한다. 불이문은 절에 이르는 3문 중 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으로, ‘진리(眞理)는 본래 하나라는 뜻으로 불이(不二)를 붙인다고 한다. 이 문을 통해야만 불교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에 이르기 때문에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부른단다.

 

 

휴휴암의 표지석이 세워진 입구로 나와 오른편으로 향한다. 이어서 마을안길을 통과하여 바닷가로 나간 다음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해송천(海松川)에 놓인 해송교다리를 건넌다. 곧이어 탐방로는 인구해변으로 들어선다. 인구해변은 모래가 유실되는 동해안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모래가 계속 누적된다고 한다. 그래선지 모래사장이 인근의 다른 해변들에 비해 유난히 넓었다. 수심도 얕아 아직은 바다가 두려운 초보 서퍼들에게 좋은 서핑 장소가 되어준단다. 특히 북동풍이 불어오더라도 앞에 위치한 죽도암이 바람을 막아주어 서핑하기 딱 좋은 파도가 만들어진단다.

 

 

바다에는 서핑(surfing)을 즐기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보드 위에 서지를 못하고 엎드린 사람들 일색이다.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자들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서핑의 명소인 죽도해변으로 나가기 전에 기초훈련이라도 받고 있는 모양이다.

 

 

탐방로는 인구해변에서 죽도해변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바다 쪽으로 불쑥 나온 죽도를 한 바퀴 돈다. 이때 해안가 주차장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탐방로는 이곳에서 바닷가를 따라 내놓은 해안산책로를 따른다. 하지만 죽도전망대로 오르는 지름길이 주차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왼편으로 나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그나저나 우리 일행은 해안산책로를 따르기로 했다. 산책로가 시작되는 주차장의 끄트머리에 이르니 죽도안내도와 함께 양양팔경을 소개하는 관광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해파랑길 41코스는 이 가운데 죽도정과 남애항을 지난다. 휴휴암에서 이곳까지는 30분이 조금 못 걸렸다.

 

 

산책로는 파도를 대비해서인지 철제구조물로 만들어져 있다. 바닥 철망 아래로 바다가 넘실거리는데, 파도라도 세게 몰아치면 물벼락을 맞을 것 같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바닷가에 널린 크고 작은 기암괴석들을 마주한다.

 

 

그 가운데서도 백미(白眉)는 단연 신선바위. 신선들이 놀았다는 널찍한 바위로 주변에는 연사대(煉砂臺), 선녀탕, 부채바위, 거북바위(龜容岩), 장수의 발자국, 장수의 소변자국, 바둑판 모형 등 기묘하게 생긴 많은 바위들이 널려있다. 안내판에는 선녀탕(仙女湯)과 부채바위에 대한 내력도 적어 놓았다. 신선바위 안쪽에 위치한 2개의 오목한 돌이 선녀탕이고, 신선바위를 향해 활짝 펼쳐진 바위가 부채바위란다. 하지만 산책로 정비공사가 한창이어서 선녀탕의 생김새를 눈에 담을 수는 없었다.

 

 

신선바위에서 탐방로는 둘로 나뉜다. 계속해서 해안산책로를 따를 경우 죽도암을 거쳐 죽도해변에 이르게 되고, ’양양팔경의 하나인 죽도정으로 가려면 죽도의 정상까지 올라가야만 한다. 죽도(竹島)는 인구리 해변에 있는 둘레 1km에 높이가 53m인 자그마한 산이다. 과거에는 섬이었으나 현재는 육계사주(육지로부터 돌출 성장하여 가까운 섬에 연결된 사주)에 의해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陸繫島)이다. 그건 그렇고 죽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탐방로 주변에는 장죽이 가득했다. 조선시대에는 조정에 진상했을 정도로 유명한 장죽이란다. 세찬 바닷바람에 시달리며 커온 손가락 굵기의 대나무가 아주 단단해서 싸움터용 화살인 전시(箭矢)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란다.

 

 

정상까지의 거리는 대략 150m, 경사가 있기는 하지만 계단이 놓여있어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다. 바닷바람이 실어오는 솔향기와 서걱거리는 댓잎 소리를 친구삼아 나무계단을 잠시 오르자 쉼터가 마중한다. 탁 트인 푸른 바다와 인구해변, 휴휴암 등 지나온 길을 되돌아볼 수 있는 쉼터다. 쉼터 벤치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을 눈과 마음속에 담아본다.

 

 

정상 조금 못미처에서 양양팔경의 여섯 번째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죽도정(竹島亭)’을 만났다. 19655월에 현남면 내 부호들이 주축이 되어 행정의 지원을 받아 세운 정자로 팔각집우 전면 3, 측면 2, 천정은 정자(井字)형으로 되어 있다. 죽도정의 장점은 시원스런 전망으로 알려져 있다. 양양 팔경에 선정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수목에 가려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양양팔경의 여섯 번째 자리는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게 넘겨주어야 할 것 같다.

 

 

죽도의 정상은 전망대가 차지했다. 4층 규모(높이 19.73m)의 철골구조물이 오르기도 전부터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 죽도를 상징하는 대나무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으로 20174월에 조성했단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가히 일품이다. 북쪽 죽도(시변리) 해변과 남쪽 인구 해변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고, 바다에서 서핑을 즐기는 모습도 있다. 또한 인구항 하얀등대와 빨간등대가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작은 항구의 아늑한 분위기가 여행자의 가슴을 따스하게 감싸준다.

 

 

신선바위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죽도암 방향의 해안산책로를 따른다. 이 구간도 역시 기암괴석들의 놀이터다.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 두부모처럼 잘려나간 바위 등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신기함을 자아낸다. 청허대(淸虛臺)와 동구암(弄鷗巖, 갈매기를 희롱하는 바위) 등 탐방로의 좌우에 새겨져 있다는 글씨들은 확인해보지 못했다. 이리도 경관이 아름다운데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기기묘묘한 바위들에 시선을 빼앗겨가며 잠시 걷자 바위벼랑 속을 파고든 죽도암이 길손을 맞는다. 관음전으로 올라가는 자연석 계단이 눈길을 끌지만 딱 거기까지다.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출입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죽도암 모퉁이를 돌면 죽도해변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어진 동산해면과 함께 서핑 동호인들이 파토타기를 즐기는 곳이다. 그래선지 바다는 서퍼들로 가득하다. 저 해변은 수심이 얕고 백사장의 모래가 고와서 1970~80년대만 해도 여름 피서지로 전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교통과 관광 인프라가 전국적으로 발달하면서 이곳을 찾던 인파는 다른 해안들로 자연스레 흩어졌다. 그러다가 이곳 양양이 서핑명소로 급부상하던 면서 6~7년 전부터 죽도해변에 다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단다. 수심이 얕고 파도가 적당해 서핑 입문자뿐만 아니라 중·상급자 모두 만족할만하기 때문이다. 서퍼뿐만 아니라 카페와 맛집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젊은이들도 늘어났단다. 이들을 위해서 양양군에서는 서퍼들을 위해 서핑 스파 라운지도 운영하고 있었다. 돔하우스 78m²와 스파시설 5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퍼들이 서핑을 마친 뒤 휴식을 취하는 휴게 공간으로 활용된단다.

 

 

 

트레킹 날머리는 죽도해변 입구(양양군 현남면 시변리 17-1)

해변을 따르다가 오토캠핑장에서 도로로 빠져나오자 두창시변리라고 적힌 거대한 마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인구수가 유난히 적었던 세 마을인 두리창리’, ‘시변리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트레킹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표지석 건너편의 코너에 설치되어 있다. 오늘 트레킹은 총 3시간 50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가 14.5이니 더디게 걸은 셈이다. 아니 휴휴암과 죽도 등 발걸음이 지체될만한 경승지가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도 되겠다,

해파랑길 40코스

 

여행일 : ‘20. 5. 2()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과 연곡면, 주문진읍 일원

여행코스 : 사천진해변(3.3km)하평해변솔향기캠핑장영진리 고분군연곡해변(5.7km)주문진항(3.4km)주문진등대소돌항주문진해변(소요시간 : 12.4, 실제는 14.34/ 3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사천면 사천진리에서 시작되는 해파랑길 40코스바위길 12코스와 정확히 일치한다. 코스가 끝나는 곳이 주문진이라 해서 주문진 가는 길이란 별도의 이름이 붙었다. 이 구간은 관광지가 아닌 평범한 동해안 바닷가 마을을 지나며 강릉 사람들의 정겨운 모습을 만나게 된다. 구체적으로 사천해변에서 영진교를 지나 주문진항, 주문진 등대, 소돌항을 지나면 종착지인 주문진 해변 주차장이 나타난다.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한국의 커피 성지라 불리는 영진 보헤미안을 지나 주문진 등대와 동해가 살아 펄떡이는 주문진시장을 지나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기에 딱 좋은 구간으로 꼽힌다.


 

들머리는 사천진 해변(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266-5)

동해고속도로(속초-삼척) 북강릉 IC에서 내려와 강릉방면 7번 국도를 탄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사천육교(강릉시 사천면 석교리 19-9)에서 빠져나온 다음 중앙동로를 따라 바닷가로 들어가면 사천항을 거쳐 사천진(뒷불) 해변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해변 입구 소공원에 세워져 있다. 참고로 사천진항은 겨울철 양미리 잡이로 이름난 포구다. 해마다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잡는데, 잡힌 양미리를 그물째 포구로 가져와 선창에 펼쳐놓고 일일이 손으로 양미리 떼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니 사천진항의 파시(波市)는 겨울철이 된다. 때맞춰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다는 얘기이다.




사천진 해변의 자랑은 푸른 바다와 고운 모래뿐만이 아니다. 바닷가에 놓인 커다란 바위들이 다른 여느 해변보다도 빼어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교문암(蛟門岩)이라는 바위 무리로 옛날 바위 밑에 엎드려 있던 교룡(蛟龍, 이무기)이 떠나면서 바위가 깨져 문처럼 벌어졌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바위는 또 허균바위로도 불린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이 태어난 곳이 바로 사천의 교산(蛟山) 자락이다. 그래선지 자신의 호()교산(蛟山)’이라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교산이란 호는 그의 인생이 되어버렸다. 과거에 급제했으나 늘 꿈꿨던 이상 세계에 도달하지 못한 채 자신의 호처럼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가 되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참고로 허균이 태어난 곳은 강릉 사천진리의 애일당(愛日堂)으로 허균 모친의 친정인 예조판서 김광철의 집이다. 동인의 우두머리이던 아버지 초당 허엽이 조강지처와 사별 후 김광철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으면서 허균은 강릉과 인연을 맺었다. 누이인 허난설헌 역시 김씨 부인이 낳은 딸이다.



해변에는 조형물들이 여럿 설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사천해변을 아라비아 숫자(4000해변)로 표현한 조형물과 초서체로 사랑이라고 쓴 조형물이 가장 눈길을 끈다. 하지만 사랑꾼인 집사람에겐 사랑만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그 앞에 냉큼 앉아버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무튼 이 조형물은 2017 해변 디자인 페스티벌 설치미술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으로 국어사랑에 대한 작가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해안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걷자 또 다른 갯바위가 나온다. 이번에는 갯바위까지 아치형 시멘트 다리가 놓여 있다. 건너가면 바위 자락에 부딪치는 거센 파도와 물보라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뗏장바위(또는 물개바위)’이다. 지금은 비록 갯바위에 불과하지만 옛날엔 지금보다 훨씬 큰 바위섬이었다고 한다. 안에 소나무도 자라고 샘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방파제 건설에 이 섬의 바위를 캐다 썼고, 광복 뒤에도 채석이 이뤄지며 저렇게 규모가 작아졌다고 한다.



뗏장바위 부근에 남자친구의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2018년 말 tvN에서 방영했던 드라마로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여자(송혜교)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평범한 남자(박보검)를 대비시켜, 부와 명예를 버리는 게 어려운지 아니면 평범한 일상을 내놓는 게 어려운 일인지를 그린 드라마이다. 최고 시청률은 10.329%, 케이블 TV에서 방영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기가 엄청나게 높았다고 하겠다.



해변의 갯바위들을 구경했으면 이젠 본격적인 트레킹을 나설 차례이다. 이 구간은 해안도로를 따라 진행하게 되는데 보행자 도로가 따로 없어 오가는 차량에 유의해가며 걸어야만 한다. 탐방로의 오른편은 길이 200m하평해변(荷坪海邊)’이다. 초당 허엽과 김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하곡(荷谷) 허봉(許篈, 허균의 형)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해서 그의 호에서 해변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 남짓, 하평해변을 빠져나오자 우레탄으로 바닥을 깐 보행로가 나온다. 해송 숲 사이로 난 기분 좋은 구간이지만 대신 동해안자전거길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오가는 자전거를 살펴가며 걸어야 한다. 안전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실제로 우리 일행을 피해가던 자전거가 넘어지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 구간을 걷다보면 특수전학교의 '해척조 훈련장(해상척후조의 줄임말)‘과 해양과학 교육원의 강릉 귀어학교', 그리고 수산과학원 동해수산연구소를 연이어 만나게 된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진행하자 소나무 숲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숲에는 백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굵은 소나무들이 햇빛 한 점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그 숲속에는 강릉관광개발공사에서 운영하는 연곡 솔향기 캠핑장'이 들어서 있었다. 송림과 해양자원을 특화한 사계절 캠핑장으로, 깨끗한 백사장을 가진 연곡해수욕장과 시원한 솔숲을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이른 아침 맞게 되는 동해의 멋진 일출은 덤으로 보면 되겠다.




캠핑장 관리사무소 앞으로 빠져나와 '동덕 2리 청년회' 컨테이너 박스 옆 공중전화박스에 붙어있는 '바우길' 표지를 따라 진행한다. 이어서 연곡천(連谷川)을 가로지르는 영진교를 건넌다. ’솔향기 캠핑장으로 들어선지 15분 만이다. 참고로 연곡천은 강릉시 연곡면과 평창군 진부면의 경계가 되는 진고개에서 발원하여 솔내(松川), 긴내(長川)를 지나 퇴곡리 용소골 앞에 이르러, 노인봉에서 발원하여 청학동 소금강에서 본류로 모여드는 물과 만나 동해로 흘러드는 총 길이 20.4km의 지방하천이다.



갈매기 떼들의 놀이터로 변한 모래톱을 구경하며 영진다리를 건너자 길이 둘로 나뉜다. 오른편은 영진항으로 가는 메인도로, 탐방로는 잠시 연곡천의 우안을 거슬러 올라간다. 100m쯤 걸었을까 이정표(마산 정상 833m)가 세워진 마산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하지만 사유지였던지 철망으로 입구를 막아놓았다. 그렇다고 돌아갈 선두대장은 아니다. 딴말 말고 따라오라는 듯 바닥에 방향표시지를 깔아놓았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해파랑길은 아니지만 조금만 더 진행하면 영진리 고분군(領津里 古墳群)’이라는 역사적 유적까지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과 같은 무덤들인데 해파랑길을 따르느라 들러보지 못했기에 다른 문헌을 참조해서 옮겨본다. 고분은 동해안을 바라보고 길게 뻗은 구릉지의 평탄한 능선부에 형성된 소나무 숲속에 분포되어 있다. 대형의 봉토 돌방무덤(封土石室墳) 여러 기()가 일렬로 분포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이미 도굴된 2기는 1981년에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입구로 보이는 남쪽 단벽을 제외한 3면의 벽체는 35×40크기의 납작하게 다듬은 화강암석을 사용하여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안쪽으로 기울게 쌓아 좁은 천장(天障)을 만들었으며, 2매의 큰 판돌(130×170)을 그 상부에 덮은 구조이다. 1990년대 이후 도로확장과 신축건물공사에 따른 구제 발굴조사가 방내리에서 13, 영진리에서 38기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덧널무덤과 돌덧널무덤, 앞트기식 돌방무덤, 독무덤 등 다양한 형식의 무덤이 조사되었을 뿐 아니라, 능선을 따라 곳곳에 돌방무덤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 조사되었다. 또한 긴목 항아리, 굽다리 접시 등 토기와 금동 귀걸이 등 유물 수백여 점이 출토되었다.



철망을 통과한 탐방로는 이내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하나 같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이 영락없는 금강송이다. 하늘 향해 뻗친 금강송 숲에 한 발 들여 놓자 이내 별처럼 힐링이 쏟아 내린다. 솔향과 함께 코끝을 스쳐가는 피톤치드의 영향일 것이다. 참고로 금강소나무는 줄기가 곧고, 마디가 길며, 껍질이 유별나게 붉다. 또한 결이 곧고 단단해 굽지도 않고, 잘 썩지도 않아 예로부터 소나무 중 으뜸으로 사랑받았다.



솔향에 취해 걷길 15분 여, 빗돌 하나가 세워져 있다. 축성 연대와 내력을 알 수 없는 옛 토성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토성은 홍길목 우측 해변 쪽으로 동해를 향해 타원형으로 쌓은 듯하며 지금도 토성의 일부가 남아있단다. 신라시대 이후 바다로 들어오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영진리 일대를 지키기 위한 향토수호성으로 짐작된다는 부언(附言)을 달았다.



마산을 내려와 영진항으로 향한다. 금강송 숲 사이로 난 좁은 아스팔트길을 따라 잠시 걷자 드라마 도깨비촬영지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영진해변과 마주친다. 횟집과 커피집 몇몇이 모여 있던 조용한 바닷가 마을은 드라마 열풍과 함께 강릉의 대표 해안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에는 강릉을 커피의 고장으로 만든 일등공신 박이추 선생의 보헤미안이 자리 잡았다. 그가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아니 꼭 보헤미안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다. 어느 카페에 들어가더라도 강릉+바다+커피를 함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와 나란히 걷다가 마음 가는 곳 어디든 쉬어가면 된다.



영진해변(領津海濱)은 주문진읍에서 남쪽으로 3정도 떨어져 있는 해변이다. 백사장의 길이는 600m, 규모는 크지 않지만 조용하고 깨끗해 동호인이나 가족 단위의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바다 풍경도 빼어난 편이다. (홍합을 일컫는 강원도 지방의 방언)이 많다는 데서 유래한 섭바위와 검정바위 등 작은 갯바위들이 푸른 바다와 잘 어우러지고 있다.



영진해변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진행방향 저 멀리에 있는 주문진항이 걸음을 옮길수록 조금씩 더 가까워진다. 해안선을 따라 드넓고 완만하게 곡선을 그린 백사장이 주는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해변길 따라 다양한 카페가 들어서 있으니 강릉의 명물인 커피 한잔을 마셔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주문진항을 향해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주차된 차량들로 다소 혼잡한 곳이 나타난다. 소규모 방사제(防砂堤) 4개가 줄지어 있는 해안이다. 해변의 모래 유실을 막기 위한 시설로, 제방에서 바다로 길쭉하게 설치한 20~30m 길이의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방사제마다 쌍쌍의 연인들이 걸어 들어가 셀카를 찍고 있다. 특히 오른쪽에서 두 번째 방파제는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사뭇 길다. 저곳은 tvN의 인기 드라마 도깨비(2017년 방영)’가 촬영되었던 곳이다. 드라마 이후 주인공 공유김고은처럼 포즈를 취해보는 연인들의 인증샷장소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고 한다.




신리천(新里川)’을 가로지르는 신리하교를 건너면 번잡하고도 활기 넘치는 대형 포구(浦口) 주문진에 닿는다. 영진항에서 이곳 신리하교까지는 50분이 걸렸다.



주문진항(注文津港)은 강원 해안지역의 해산물들이 대거 몰리는, 동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어항이다. 활어시장·건어물시장·대게센터 등 모든 종류의 해산물 거래가 이뤄지는 곳이다. 참고로 주문진항은 부산-원산 간 항로의 중간 기항지가 되면서 여객선과 화물선이 입항하기 시작하여 1927년 본격적인 개항장이 되었다. 강릉의 외항으로 동해안 유수의 어항이며, 속초항과 함께 한국전쟁 때 수복된 어항이기도 하다.



발걸음이 주문진항에 닿으니 지금껏 걸어온 한적함은 사라지고 북적이는 활기가 거리를 채운다. 거리는 온통 사람들로 넘치고 도로는 숫제 주차장으로 변해버렸다.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코로나 19’,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팬데믹(pandemic)으로까지 선언했건만 우리에겐 어느덧 남의 나라 얘기가 되어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우리 일행이 찾아가야 할 곳은 어시장이다. 횟집에 자리 잡는 대신 생선회를 떠가지고 가다가 갯바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아가며 먹을 요량이기 때문이다. 먼저 만난 곳은 주문진 수산시장이다. 결과적으로 우린 이 시장의 활어회센터에서 회를 샀다. 인기 블로그에서 추천하는 어민 수산시장이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소문만 듣고 그냥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온 셈이다.




주문진 수산시장을 그냥 지나치고 들른 곳은 어민 수산시장이다. 기분 좋은 호객소리와 고무 대야에서 튀어 나와 바닥을 활개치며 신선함을 자랑하는 가자미까지, 보이는 모든 것에 활기가 넘쳐흐르는 곳이다. 하지만 우린 이곳에서 회를 구입하지 않았다. 팔고 있는 어종이 다양하지도 않았고, 가격 또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이다. 거기다 노점 느낌이 강해 위생에 대한 신뢰도 할 수가 없었다.



코로나 19’의 팬데믹은 이제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나보다. 시장을 오가는 사람이나 물건을 파는 사람들의 절반 정도가 이미 마스크를 벗어버린 걸 보면 말이다. 정부는 다음 주에 생활 방역으로 돌아갈지 여부를 발표한다고 했다. 아직은 강력한 거리두기를 유지해야 할 때이기에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회를 떴으면 이젠 또 트레킹을 나서야 한다. 해안로를 따라 걷다가 낙원펜션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꾼 다음, 첫 번째 사거리(할매곰치국 앞)에서 우회전하여 50m쯤 걷다가 여물쇠 식당의 왼편 골목으로 들어선다. 전면에 엄청나게 높은 축대가 보인다면 제대로 들어온 셈이다. 참고로 탐방로는 이 축대를 갈 지()’자를 쓰면서 오르도록 나있다.



축대를 올라 성황당경로당을 지나자 탐방로는 예쁜 그림들이 담벼락에 걸려있는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다. ‘등대골목길 갤러리라는데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가 및 서예가,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돌아가며 전시한단다. 현재 전시되고 있는 작품은 강릉예술고등학교에 재직하는 주재환 화가가 를 주제로 그린 것들이란다. 골목 입구에 걸려있던 허그 스트리트(Hug street)’라는 간판, 즉 우리 마을 변신 프로젝트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허그 스트리트' 프로젝트는 비영리기관인 사단법인 '스파크'가 주관하고 도시주택보증공사가 후원하는 사업으로, 지역을 기반으로 시민사회와의 협업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사업이다.



골목에는 벤치를 갖춘 작은 쉼터도 만들어 놓았다. 쉼터에서의 조망은 물론 빼어나다. 산비탈에 층을 나눠가며 기댄 '새뜰마을' 집들은 하나같이 울긋불긋한 모자를 썼고, 그 너머 푸른 바다는 여행자의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하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골목은 사람 둘이 겨우 비켜지나갈 정도로 좁다. 또한 마을 주민이 아니면 목적지를 찾아가기 힘든 미로(迷路)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막혔는가 싶으면 연결되고, 이어질 것 같은 골목이 갑자기 낭떠러지로 변하는 것이다. 한참이나 앞서가던 친구 형우군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겨우겨우 우리와 만났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수산시장을 나선지 20분 만에 주문진등대(등대문화유산 제12)’에 도착했다. 주문진등대는 19183월 강원도에서 첫 번째로 세워졌다. 1917년 부산항과 원산항간 연락선이 운항되면서 중간 기항지인 주문진항에 등대가 설치됐다. 백원형연와조로 건조된 이 등대의 등탑은 최대 직경 3m, 높이 10m로 외벽엔 백색의 석회 모르타르가 칠해져 있다. 이러한 벽돌식 구조의 등대는 우리나라 등대 건축의 초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건축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는데, 해방 이전 조선총독부가 세운 탓에 일본식 건축양식을 사용했다. 등대 출입구 상부에는 일제 상징인 벚꽃이 조각되어 있고 6.25 때 총탄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등대의 불빛은 15초에 한 번씩 반짝이며 37거리의 바다까지 비춘다. 폭풍우나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공기 압축기 즉 에어 사이렌을 통해 60초마다 한 번씩 5초 동안 긴 고동소리를 울리는데, 이 소리가 선박에게 가 닿는 거리는 3마을(5.5km) 해상이란다.



등대 입구 골목에서 이번엔 우측 골목길을 따라 내려선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잘 생긴 갯바위들이 수없이 널려있는 영진해안에 닿는다. 이어서 탐방로는 바다 쪽에 바짝 붙은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한다.



도로변에 오리 나루간판이 세워져 있다. 옛 나루터 이름인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주문5에 속한다. 이곳은 최루성 영화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미워도 다시 한번의 촬영지가 되면서 유명해진 곳이다. 그런데 안내판이 조금 이상하다. 영화의 주인공으로 김영란윤일봉을 그려 넣은 것이다. 공전의 히트를 쳤던 당시의 영화는 문희신영균이 주연을 맡았었는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1980년에 리메이크한 두 번째 작품의 촬영지였던가 보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루터는 현재 도로에 묻혔고, 바다에 널린 바위 자락에 그 흔적만 약간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인근의 기기묘묘한 갯바위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니까 말이다. 우리 일행이 주문진시장에서 떠온 생선회를 먹을 장소로 이곳을 선택한 이유이다.



오리나루를 지나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소돌항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인근 바다에 소처럼 생긴 바위(牛岩)’가 있다고 해서 소돌이라는 지명을 얻었는데, 투명카누 타기와 오징어빵 만들기 등 체험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끄는 어촌체험마을이다. 어촌체험이 아니더라도, 사철 푸르고 투명한 바닷물과 바닷가 기암괴석 무리가 소돌마을을 찾는 여행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갯바위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지 15분 만에 소돌항에 닿았다. 작은 고깃배들 몇 척, 방파제와 그 끄트머리의 빨간 등대만이 시야에 들어오는 한적한 포구다. 이곳도 역시 어민들이 직접 잡아온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대표 해산물은 문어. 길가에 늘어선 식당마다 간판에 직접 잡은 문어 팝니다라는 글귀를 적어 넣었다. 해물라면도 판단다. 하지만 문어 한 마리를 통째로 넣은 탓에 가격이 생각보다는 훨씬 비싸다. 그 외에 홍게라면과 조개라면도 파는데 이들 또한 가격이 만만치 않다.



소돌항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있다. ‘공중화장실인데도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예술적으로 꾸며놓았다. 소돌해안의 자랑거리인 구멍이 송송 뚫린 기암괴석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덕분에 포구를 찾은 관광객들은 너나없이 항구가 아닌 화장실을 배경으로 삼아 사진을 찍고 있다.



잠시 후 아들바위 공원이 나온다. 옛날 노부부가 이곳의 바위에서 100일 기도를 드린 후 아들을 얻었다는 전설이 스며있는 곳이다. 그런 전설은 옛 얘기로만 그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후로도 아들을 얻기 위해 이곳을 찾아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어졌는데 그들 또한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어쩌면 동해의 푸른 파도를 헤치고 서 있는 바위의 굳센 심지와 강인함이 자식을 얻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투영할 수 있는 상대였을지도 모르겠다.



공원 안에는 배호(裵湖)노래비가 서 있었다. 1960년대 최고의 가수로 인기를 누렸던 배호의 히트곡 가운데 하나인 파도(이인선 작사, 김영종 작곡, 1968년 아세아레코드 제작)’의 노랫말을 적어 넣은 빗돌이다. 부근에 동전(500)을 넣으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장치까지 만들어놓았다는데 사람들이 많아 시험해 보지는 못했다.



노래비를 지나 맞이하는 갯바위의 웅장함은 막힌 속을 확 뚫어주는 것 같은 시원함을 선사한다. 기이하게 생긴 바위들이 사방에 널려있는데,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만들어낸 갯바위의 완만한 곡선들이 마치 외유내강을 보는 듯하다. 각각의 이름도 갖고 있다고 했다. 용바위, 코끼리바위, 거북바위, 고래바위, 해당화바위 등이라는데 일일이 대조해 볼 수는 없었다.



사방에 널린 기암괴석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바위는 단연 아들바위. 15천만 년 전 쥬라기 시대의 지각변동으로 바다 속에서 솟아오른 바위라는데 파도가 깎아낸 자욱따라 기하학적인 자태를 보여준다. 그 기이한 생김새는 영험으로 변해 득남의 전설까지 만들어냈다. 자식이 없는 부부들이 백일기도를 드리면 아들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도 아들 낳기를 바라는 부부의 발길이 이어진다고 한다. 그래선지 해안 공원 이름도 아들바위 공원이다. ! 이 바위는 소원바위로도 불린단다. 어떤 소원이든 한 가지 소원을 정성껏 빌면 꼭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공원에는 해안일주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공원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게끔 전망대도 두 개나 배치했다. 먼저 탑()처럼 생긴 바다 전망대부터 오르고 본다. 하지만 금줄을 쳐놓아 구조물 안으로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대신 구조물 주변에 데크를 깔아 조망을 즐길 수 있도록 했는데 공원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조망의 명소이다.



건너편에는 또 다른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두 전망대는 데크 산책로로 연결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굳이 바다로 들어가지 않고도 아들바위 등 공원의 기암괴석들을 한눈에 모두 담을 수 있다.



가는 길에 해골처럼 생긴 바위를 만나기도 한다. 오랜 세월 침식작용으로 파이고 깎이며 구멍 숭숭 뚫린, 기이하게 생긴 바위다.



두 번째 전망대에서의 조망도 뛰어나다. 해안의 바위들과 짙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조금 전에 올랐던 바다전망대보다 시야가 더 넓어졌다. 하지만 주변 바위들의 생김새는 아까에 조금 못 미친다. 전망대의 천정도 일품이다. 유리를 씌웠는데 한가운데에 별자리 모양의 구멍이 뚫린 철판을 덧댔다. 그런데 이게 푸른 하늘과 어우러지며 상상의 나래를 펴게끔 만들어준다.




전망대 뒤편에는 성황당(城隍堂)이 있었다. 소돌마을의 무사고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는 곳이라는데 최근에 복원했는지 때 하나 끼지 않은 돌들로 만들어져 있다.



전망대의 반대편으로 내려오면 경포해변과 더불어 강릉을 대표하는 해변 중 하나인 주문진해변에 닿는다. 조금 더 걸어 솔향 가득한 해송 숲을 만나자 탁 트인 백사장이 마지막 걸음을 반겨준다. 고운 모래와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저 멀리 소돌항의 풍경이 한데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해변이다. 참고로 주문진해변은 소돌 마을에서 향호리까지 약 1km의 백사장을 따라 형성된 해수욕장이다. 해안의 경사가 완만하며 수심이 1m 정도로 얕은 데다 바닷물이 맑아 물속으로 보이는 조개를 잡을 수도 있고, 바로 옆에 있는 향호 호수에서는 낚시도 할 수 있다.



해변에는 여러 종류의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하트 모양의 흔들의자는 그 가운데서도 단연 인기다. 쌍쌍의 연인들이 흔들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셀카를 찍는 모습이 여간 사랑스럽지 않다.



트레킹 날머리는 주문진 해변(강릉시 주문진읍 향호리 8-43)

해변의 왼편은 온통 푸른빛이다. 푸르른 해송 숲으로도 부족했던지 바닥까지 잔디로 깔았다. 주문진리조트의 부속시설인 골프장일 것이다. ‘나이스 샷’,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골프장을 기웃거리다보면 귤과 입술모양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 쉼터를 만나게 되고, 곧이어 주문진해변의 주차장이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 보관함은 주차장과 해수욕장이 연결되는 부근에 만들어져 있다. 오늘 트레킹은 총 3시간 20분이 걸렸다. 하지만 회를 뜨느라 소요된 시간과 그 회를 먹느라 갯바위에서 놀았던 시간을 제하면 3시간 50분이 걸린 셈이다. 먹거리와 볼거리를 찾아 그만큼 헤맸다는 얘기일 것이다. 원래보다 2를 더 걸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고 말이다.


해파랑길 39코스

 

여행일 : ‘20. 4. 18()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과 구정면 일원

여행코스 : 남항진해변(솔바람다리)안목해변해송숲길강문해변경포해변경포호허난설헌생가터경포대경포해변사근진순긋순포해변사천진항(소요시간 : 16/ 4시간, 실제는 12.6/ 2시간 5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남항진 해변에서 바다를 따라 북쪽으로 안목해변과 강문해변, 경포해변, 경포호수, 허균허난설헌 유적공원을 지나 다시 사천진까지 바다를 따라 걷는 16의 둘레길로, 강릉바우길의 5구간인 바다 호숫길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구간은 트레킹의 재미를 한껏 만끽하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가에서 조개껍질을 주으며 걸을 수도 있고, 모래밭 위에 설치한 데크 위를 걷는가 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울창한 해변 솔밭 길을 따라 걸을 수도 있다. 거기다 경포호반의 정취에 빠져 걷다가 만나게 되는 역사를 품은 누정(樓亭)들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들머리는 남항진 해변(강릉시 공항길127번길 67)

동해고속도로(속초-삼척) 강릉 IC에서 내려와 35번 국도를 타고 강릉시내로 들어온다. 옥천오거리(강릉시 옥천동)에서 우회전, 남대천을 건넌 다음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로터리에서 9시 방향의 입암로를 따른다. 이어서 ‘6주공 오거리(강릉시 입암동)에서 우회전, 반석교회 앞 로터리에서는 9시 방향으로 진행한 다음 강릉골프연습장앞 삼거리에서 오른편 공항길로 들어서면 잠시 후 남항진 해변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남항진해변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솔바람다리의 입구에 세워져 있다.




버스에서 내리니 호랑이반달곰한 쌍이 반긴다. 생김새로 보아 평창 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인 수호랑(Soohorang)‘과 패럴림픽의 마스코트인 반다디(Bandabi)‘로 여겨지는데, 이곳 강릉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올림픽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나 보다. 참로고 수호랑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백호를 모티브로 삼았다. 수호랑이라는 이름은 '수호+'으로 이뤄진 합성어로, '수호'는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 참가자, 관중들을 보호한다는 의미이며, '''호랑이'와 강원도를 대표하는 '정선아리랑'''에서 따온 것이다. 한편 반다비는 한국에 서식하여 대한민국과 강원도를 대표하는 반달가슴곰을 모티브로 삼았으며, 의지와 용기를 상징한다. '반다비''반다'는 반달가슴곰(아시아흑곰)의 반달을 의미하고, '-'는 대회를 기념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강릉 남대천 위에 놓인 솔바람다리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남항진안목을 잇는 인도교로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먼 길을 돌아다녀야만 했던 두 마을 주민들을 위해 2010년 건설됐다. 하지만 요즘은 여름철 피서지로 더 유명하단다. 바다와 강 사이에 놓인 다리 특성상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이다. 또한 조명시설을 갖추고 있어 저녁마다 아름다운 야경을 보여준단다.



솔바람다리를 건너다 뒤돌아본 남항진 해변(南項津 海濱)‘이다. 600m 길이의 모래사장 주변에 횟집과 커피숍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너른 주차장과 화장실, 전망데크 등의 편의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쉬어가기에 딱 좋은 해변이다. 높다란 철 구조물은 짚라인의 일종인 아라나비의 탑승장이다. 여기서 아라는 바다의 순 우리말, 저곳에서 짚라인을 타면 아름다운 바다 위를 나비처럼 훨훨 날아서 강릉항 근처까지 간다.



솔바람 다리를 건넌 해파랑길은 죽도봉(竹島峰)‘으로 오르도록 나있다. 하지만 우린 이를 무시하고 해안도로를 따라 진행했다. 봉우리에 올라가봤자 눈에 담을 만한 풍경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저 봉우리는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죽도봉이란 이름을 얻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견조봉(堅造峰)’ 또는 젠주봉(全州峰)’이라고도 부른단다. 전라북도 도청소재지인 전주에 있던 봉우리가 떠내려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고 해서 생긴 이름으로, 매년 전주 사람이 이곳에 와서 도지를 받아 갔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옛날엔 이곳에 천연염전도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일이 잘 풀릴 때를 젠주 염전되듯이라는 표현을 쓴단다.



잠시 후 강릉항(江陵港, 옛 안목항)‘에 이른다. 남대천의 하류에 위치한 이곳은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견조도라는 섬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육계도로 변했고 지금은 항구가 들어섰다. 이후 2011년에 강릉~울릉도 간 정기 여객선 운항이 이루어지면서 찾는 사람들이 부척 늘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강릉-울릉도 간 항로 가운데 가장 빠르기 때문이란다. 현재 평일 편도 2, 주말 편도 2-4회 운항되고 있단다. ! 강릉항에서 정동진 해안까지 다녀오는 유람선도 이곳에서 출발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안목해변(安木海濱)‘이 나온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5분만이다. 500m 길이의 하얀 모래사장은 생각보다 모래알의 굵어 어린이들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짙푸른 색과 청록색이 번갈아가며 빛을 내는 바닷물은 보기만 해도 청량감이 느껴지는 풍경이다. 거기다 음식점, 카페 등 각종 편의시설들까지 잘 갖추고 있으니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참고로 안목의 옛 이름은 앞목이었다고 한다. 남대천 하구 반대편에 위치한 남항진에서 송정으로 가는 마을 앞에 있는 길목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앞목의 발음이 어렵다고 해서 안목으로 고쳐 부른 것이 현재의 지명으로 굳어졌다.



해변의 입구에는 강릉 커피거리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맞다. 트레킹을 위한 사전 조사를 하던 중에 얻어들은 풍월로는 이곳은 바닷바람에 커피향기가 퍼지는 낭만이 있는 공간이라고 했다. ‘카페거리가 아닌 커피거리라고도 했다. 커피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맛도 뛰어나다는 부연 설명도 있었지만 주어진 시간에 쫒기는 나그네는 들어가 볼만한 여유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테이크아웃이라는 방법도 있었건만 그땐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참고로 강릉은 1,000년 전 신라 화랑들이 차를 달여 마신 유일한 차 유적지 한송정(寒松亭)’이 있는 곳이다. 강릉이 일찍부터 커피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근원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래사장 뒤편 길가를 따라 카페들이 줄지어 있다. 유명 브랜드 커피카페부터 로스팅을 직접 하는 핸드메이드 커피카페까지 종류도 크기도 개성도 다양한 카페들이 30여 곳 들어서 있다. 이 카페들이 자리하기 전 80년대 안목해변에는 수많은 커피자판기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커피거리의 시초가 되었다. 지금은 커피자판기가 많이 줄어들고 그 자리에 대형 카페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 한 잔 하는 낭만은 그대로라고 한다.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굳이 테이크아웃해서 바닷가로 나올 필요도 없다. 카페들이 해변을 마주하고 나란히 줄지어 있어서 대부분의 카페테라스에서 바다가 정면으로 바라보이기 때문이다.



역시 사전조사에서 주워들은 풍월을 따라 벽화골목으로 들어가 봤다. 안목해변의 파스쿠찌 커피숍옆 골목이 들머리인데 버스 타는 그림골목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에 홀렸다고고 할까? 하지만 기대가 크면 그만큼 실망도 크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너무 성의 없게 꾸며져 있었다. 70m에 불과한 골목의 길이는 차지하고라도 그림도 고작해야 물고기가 다라고 보면 된다.



벽화골목을 반대편으로 빠져나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트니 다시 안목해변이다. 아니 이곳에는 안목 해맞이공원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공원이란 이름에 걸맞게 파고라와 벤치는 물론이고 커피 잔과 커피콩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세워 놓았다. 2012년 제4회 강릉 커피축제를 기념하여 제작된 조형물로서 안목 커피거리를 대표하는 조형물이란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해송 숲속으로 나있다. 비릿한 바다 내음을 흡수해 버릴 정도로 짙은 솔향이 코끝을 스쳐가는 기분 좋은 산책로이다. 거기다 송정해변(松亭海邊)’의 금빛 모래밭까지 끼었으니 이만한 산책로가 또 어디 있겠는가. 참고로 송정해안 솔숲의 역사는 고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의 부마 최문한(崔文漢)이 송도에서 강릉으로 올 때, 소나무 여덟 그루를 가져와 이곳에 심고 '팔송정'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 후 마을 이름이 송정으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곳의 소나무로 인해 강릉이 왜군들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진다. 도참설 신봉자인 왜군 총사령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가거든 송()자가 든 곳은 조심하라고 명했다는 것이다.



모랫길이 싫은 사람이라면 도로가에 내놓은 인도를 따르면 된다. 이때 도로변 담벼락에 그려놓은 벽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 어감부터가 고운 골목이 아니라 삭막한 도로라는 것만 다를 뿐 그려진 그림들은 아까 들어가 봤던 버스 타는 벽화골목보다 오히려 한 수 위이다.



담벼락 위에 철조망까지 쳐진 걸 보면 틀림없는 군부대이다. 요즘은 군의 시설도 저렇게 예쁘게 치장하는가 보다.



강릉항을 지난 지 20, 왼쪽으로 찻길을 건넌 탐방로가 울창한 솔숲으로 들어선다. ‘딴봉마을 산책로이다. 입구에는 이 산책로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딴봉이란 지명은 강문 가는 곳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안내판은 또 솔숲을 걸을 때 흡수하게 되는 피톤치드(phytoncide)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피톤치드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들이 각종 병충해(病蟲害)에 저항하기 위해 배출하는 분비물(分泌物)을 말한다. 이 물질은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균작용은 물론이고, 장과 심폐기능을 강화시켜주는 한편, 스트레스 해소에도 뛰어난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한 줌 햇빛조차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울창한 솔숲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비바람 속에서도 한줄기 향긋한 솔내음이 코끝을 스쳐지나간다. 그러자 우중충하던 머릿속이 청량감으로 바뀌어간다. 피톤치드는 찌뿌둥한 날씨까지도 별거 아니게 만들어버리나 보다. 하긴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외지 관광객들까지도 한번쯤은 꼭 들른다는 말이 그냥 나왔겠는가.



솔숲 한가운데 탑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이 층으로 된 대의 위에는 논산의 은진미륵처럼 괴상한 모자를 쓴 석상이 하나 올리어져 있다. 그런데 양복을 입고 팔짱을 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처님은 아니다. 비문(碑文)송림처사 경주 최공 봉조(鳳祚) 유적기념'이라고 적고 있다. 그 아랫단에 적혀있는 '三生餘年 精誠으로 육성하신 송림 유적....'이라는 글귀로 미루어 보아 지금의 솔숲을 만드는데 평생을 바쳤다는 최봉조 선생의 유허비(遺址碑)인 듯하다.



도로를 건너 바닷가로 나와도 솔숲은 계속된다. 아니 주변 풍경은 땅봉마을 산책로보다 한결 더 나아졌다. 솔숲에 갖가지 조형물들을 더해 아예 조각공원으로 꾸며놓았기 때문이다. 송림 좌측 편에 위치한 '세인트존스 경포호텔'에서 조성했다는데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 세인트존스 경포호텔은 1,091개의 객실과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춘 4성급 호텔로 동해바다와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인피니티 풀(infinity pool)'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동해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장군상(將軍像)‘이다. 그 옆을 사자가 지키고 있는 걸로 보아 이사부(異斯夫)‘ 장군이 아닐까 싶다. 그가 우산국(于山國, 현재의 울릉도)를 정벌할 때 사자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맹수로 겁을 줬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는 당시의 영웅담을 그리며 바다건너 울릉도를 아직까지 응시하고 있나보다.



다음은 강문해변(江門海濱)이다. 백사장의 규모는 길이 680m, 경포호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를 경계로 북쪽은 경포해변, 남쪽은 강문해변으로 구분된다. 강문해변은 금빛 모래사장이 곱다. 하지만 오뉴월 햇볕을 가려줄만한 솔숲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단점이 더 큰 해변이다. 참고로 강문'강이 흐르는 문', 혹은 '강이 흐르는 입구'라는 뜻으로 경포호의 물이 바다로 흐르는 곳에 위치한 작은 포구(浦口)이다. 앞내와 뒷내(운정천)가 경포 호수에서 만나 이곳 강문에서 바다로 빠지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강문해변의 조형물들은 젊은 연인들을 위한 포토박스 위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집사람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음만은 청춘이라는데 어쩌겠는가.




강문해변의 북쪽 끄트머리 방파제에는 유럽에서나 볼 법한 예쁜 건축물이 지어져 있다. 군의 해안초소인 모양인데 시대의 흐름에 맞춰 예술적으로 설계되었나보다. 등대처럼 보이기도 하는 저 건축물 뒤, 그러니까 솟대다리 아래에는 솟대를 형상화하여 만든 원형그릇도 만들어 놓았다. 동전 등을 던져 원형 안 그릇에 들어가면 액운을 막아주고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새로운 스토리까지 만들었으니 한번쯤 시도해 볼 일이다.



경포호의 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곳에는 유려한 자태의 '강문 솟대다리'가 놓여있다. ’솟대는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장대 끝에 새 모양으로 나무를 깎아서 달거나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높이 달아매는 민간신앙의 상징물이다. 이 다리는 진또배기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강문 마을의 특징을 다리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진또배기솟대의 강원도 사투리로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대'라는 뜻을 갖으며 보통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솟대는 그 자체가 우리나라 고유 민속신앙의 한 형태를 가리키는데, 예로부터 짐대, 오릿대, 솔대, 갯대, 수살이, 액맥이대, 방아솔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강문에서는 예로부터 솟대 대신에 진또배기라고 불러왔는데, '짐대박이'를 어원으로 진대(솟대)가 박혀 있다는 의미로 진또배기라 불렀다고 추정하고 있다.



솟대다리를 건너면 동해안 최대라는 경포해변(鏡浦海邊)‘이 나온다. 경포호(鏡浦湖)와 바다 사이에 생성되어 있는 사빈(砂濱)으로, 6km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주위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해변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이처럼 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저 정도라면 보통 때는 얼마나 붐빌까? 참고로 딴봉마을 산책로 입구에서 이곳까지는 20,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55분이 지났다.



데크 탐방로를 따라 진행하다, 큰 시계탑이 있는 곳에 세워진 이정표에서 왼편 허난설헌 유적지 방향으로 들어서야 하는데 그냥 지나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독도야' 횟집과 '7-eleven' 편의점 사이로 길이 나있는데도 비바람에 쫒기다가 길을 놓쳐버린 것이다.



길을 제대로 들어섰더라면 만날 수 있었던 경포호(鏡浦湖)’이다. 경호(鏡湖)라고도 하는데 호수 면이 거울처럼 맑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경포천 하구 일대가 사빈의 발달로 폐쇄되면서 형성된 석호(潟湖)로 본래는 주위가 12에 달하는 큰 호수였다고 하나, 지금은 토사의 퇴적으로 4로 작아졌다고 한다. 1966년에 실시된 경포천 및 안현천의 유로 변경과 호안공사로 현재와 같은 호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호수 주위의 오래 된 소나무 숲과 벚나무가 유명하다,(아래 사진 몇 장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경포호는 경포대(鏡浦臺)를 위시해서 해운정(海雲亭)과 경호정(鏡湖亭), 금란정(金蘭亭), 방해정(放海亭), 석란정(石蘭亭), 창랑정(滄浪亭), 취영정(聚瀛亭), 상영정(觴詠亭) 등 역사적인 누정(樓亭)들을 호반에 품고 있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들어선 우린 곁눈질조차 하지 못했다. 그 아쉬움은 경포팔경(鏡浦八景)‘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 대신해본다. 호수 남쪽에 위치한 녹두정(지금의 한송정 터)에서 바라보는 일출이 1경인 '녹두일출(綠荳日出)'이요, 호수 동쪽에 솟아 있는 산죽이 무성한 죽도에서의 달맞이가 2경인 '죽도명월(竹島明月)'이다. 3경인 '강문어화(江門漁火)’는 강문의 고깃배 불빛이 바다와 호수에 비치는 아름다운 밤 풍경이고, 4경인 '초당취연(草堂炊煙)'은 저녁 무렵 초당마을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다. 5경에서 8경까지는 경포호 북안(北岸)에 있는 홍장암에 내리는 밤비 홍장야우(紅粧夜雨)', 호수 서북쪽 시루봉의 낙조인 '증봉낙조(甑峰落照)', 시루봉 신선이 바둑을 두고 피리를 부는 '환선취적(喚仙吹笛)', 호수 남동쪽 한송정에서 해질 무렵 치는 종소리 '한송모종(寒松暮鍾)'이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강릉은 유난히도 많은 문인을 낳은 문학의 고장이다. 그 중에서도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당대의 사상가로 알려진 허균과 27세에 요절할 때까지 수많은 시를 남겨 중국과 일본에까지 이름을 날린 여류시인 허난설헌 남매는 특히 유명하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본명은 초희(楚姬), 호는 난설헌(蘭雪軒)이다. 당대 석학인 아버지 허엽과 오빠,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익혔으며 집안과 교분이 있던 손곡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다. 하지만 그녀의 생애는 순탄하지 못했다. 15세에 결혼한 김성립(金誠立)은 방탕했고 친정집에는 옥사(獄事)까지 있었다. 그녀는 27년의 짧은 생을 아픔과 한으로 가슴앓이 하다가 젊은 나이에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 '여자'로 태어난 것과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김성립'의 아내가 된 한()을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그녀는 한마디로 때를 잘못 만난 천재 여류 시인이었다 하겠다.



잠시 후 '스카이베이 경포'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어딘지 눈에 익다. 맞다. 작년 말에 다녀왔던 싱가포르의 마리나베이 센즈 호텔(Marina Bay Sands Hotel)’을 쏙 빼다 닮았다. 57층 규모의 건물 3개가 범선 모양의 스카이 파크(Sky Park)’를 떠받치고 있는 독특한 외관으로 유명한 호텔 말이다. 북미회담 때는 김정은이 찾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호텔인데 옥상에 만들어놓은 인피니티 풀(infinity pool)’은 그야말로 명성이 자자하다. 인피니스풀이란 시각적으로 경계가 없는 수영장을 말한다. 물과 하늘이 이어지는 풍경으로 설계되는 게 보통인데, 그런 풍경은 호화 리조트나 고급호텔의 품격을 나타내는 광고로 사용되기도 한다. 아무튼 또 다른 세계적 명소를 만들기 위해 마리나베이 센즈 호텔을 벤치마킹하지 않았나 싶다.



경포해변도 역시 여러 가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입체 솔향 포토존이다. 경포해변의 대표적 풍경인 해송 숲과 망망대해의 떠오르는 태양을 상징하는데,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원구는 경포호에 뜨는 다섯 개의 달을 상징하며 가장 큰 달에는 LED 조명을 이용하여 24절기를 나타내는 24개의 별자리를 연출했단다.



2016년에 방영되었던 KBS-2TV의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의 촬영지에 만들어놓은 포토존도 만들 수 있다. 어린 시절 가슴 아픈 악연으로 헤어졌던 두 남녀가 안하무인 '슈퍼갑 톱스타'와 비굴하고 속물적인 '슈퍼을 다큐 PD'로 다시 만나 그려가는 까칠하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김우빈과 수지가 주인공으로 출연했었다.



경포해변을 벗어나면 탐방로는 도로를 따른다. 동해안의 볼거리인 해변을 보고 싶다면 도로변의 이정표를 참고해서 들어서면 된다. 그렇게 해서 만난 첫 번째 해변은 사근진 해변(沙斤津 海濱)’이다. 옛날 어부들만 살던 마을에 삼남 지방에서 온 사기장수가 눌러 앉아, 조그마한 배를 한척 구입하여 날이 좋으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날이 궂으면 사기를 팔았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사근진 앞바다에는 멍개바위라는 커다란 갯바위가 있었다. 옛날 이 마을에 어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용왕님께 빌던 딸이 살았다고 한다. 기도에 마음이 움직인 용왕이 단방약으로 알려준 게 바로 멍게였다. 딸이 따온 멍게를 먹고 어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니 자연스레 전설이 되었다. 전설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도발이 강하다는 속설도 있으니 원하는 게 있다면 한번쯤 빌어볼 일이다.



다음은 순긋 해변이다. 솟대다리를 건넌지 1시간 만이다. 순긋해변은 200m 길이의 백사장으로 이루어진 작은 해수욕장으로 편의시설도 인근의 다른 해변들에 비해 보잘 것이 없었다. 대신 분위기는 아늑하면서도 조용했다. 거기다 수심이 얕다니 가족단위의 피서지로는 괜찮을 것 같다.



순긋해변의 끄트머리쯤에서 탐방로는 안현동을 벗어나 사천면(산대월리)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순포리로 연결된다. ‘순포란 마을 이름은 이곳에 순채(蓴菜)라는 나물이 많이 자생한다는 데서 유래되었단다. 이 마을을 유명하게 만든 순포습지(蓴浦濕地)’는 동해안에 있는 18개 석호 가운데 하나이다.



순포교(蓴浦橋, 순포습지로 연결되는 물길에 놓은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도로 우측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선다. 솔숲은 좁은데다 나무의 키도 작다. 나무 사이의 공간도 좁다. 조성한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얘기일 것이다. 거기다 바닥은 우레탄을 깔았다. 이런 조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도 된다.



순긋해변을 지난 지 25분 여, 탐방로는 사천해변(沙川海邊)’으로 들어선다. 모래사장의 길이가 300m쯤 되는 작은 해변으로 인근의 다른 해변들에 비해 기반시설도 약한 편이다. 그래선지 기업체의 하계 휴양지로 많이 이용되고 있단다.




사천해변이 끝났다싶으면 쌍한정(雙閒亭)’이 나온다. 1520(중종 15) 숙질간인 박수량(朴遂良)과 박공달(朴公達)이 관직에서 물러나 함께 소요하면서 세운 정자이다. 안에는 운곡(雲谷) 송한필(宋翰弼)의 기문(記文)을 비롯하여 12개의 현판이 걸려있다고 한다. 쌍한정의 왼편에 있는 작은 건물은 박수량의 효행비각(孝行碑閣)이다.



쌍한정 바로 옆의 '하평교'를 건넌다. 순긋해변을 지난 지 30분 남짓 지났다.



다리를 건너는 도중 왼편으로 백두대간이 조망되지만 오른편에 펼쳐놓은 사천천의 하구만은 못하다. 물길에 쓸려온 토사가 만들어놓은 삼각주(三角洲)에는 갈대가 한길이다. 지금은 비록 말라비틀어졌지만 여름철에 찾을 경우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겠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사거리에서 사천진 해변푯말을 보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길가에는 사천항 물회마을이란 입간판도 세워져 있다. 맞다. 사천진해변에서 물놀이를 하는 재미도 있고 선착장 2층에 올라 바다를 조망하는 볼거리도 있지만 역시 물회만큼 사천진항을 빛나게 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오죽하면 항구 주변의 마을에 사천진 물회마을이란 이름을 붙여놓았을까. 명성에 걸맞게 사천진의 물회는 풍성한 꾸미와 감칠맛 넘치는 회의 치감, 시원한 육수까지 어우러져 이곳까지 걸어오는 동안 쌓였던 피로를 깨끗이 지워버릴 정도란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조금 더 들어가니 조각공원이 나온다. ‘2017년 해변 디자인페스티벌 설치미술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몇 걸음 더 걷자 사천진항(沙川津港)’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분수계로부터 동으로 흘러나온 사천천과 바다가 만나는 합류 지점에 위치한 국가어향이다. 하지만 항구는 국가라는 등급에 걸맞지 않게 작은 어선들 몇 척만 정박하고 있을 따름이다. 먼 바다까지 나다니는 고깃배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래선지 어판장 앞에 늘어선 횟집의 수족관도 어종이나 씨알이 모두 보잘 것 없었다. 그나마 인심 좋은 주인장을 만나 웃는 얼굴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트레킹 날머리는 사천진 해변

해파랑길 39코스가 종료되는 사천진 해변(沙川津 海邊)’은 사천진 마을을 통과해야 만나게 된다. 해변으로 들어서는 초입의 소공원에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아 세워져 있다. 오늘은 총 2시간 50분을 걸었다. 핸프폰에 깔아놓은 앱은 12.6를 가리킨다. 정규 코스는 경포호를 한 바퀴 돌도록 되어있으나 이를 놓쳐버린 덕분에 원래의 거리보다 4쯤 적게 걸은 셈이다.



뒷불 해수욕장으로도 불리는 사천진 해변은 길이가 800m쯤 되는 제법 큰 규모의 해수욕장이다. 경관도 뛰어난 편이다. 북쪽 끄트머리에 수평선을 가리며 우뚝 솟은 갯바위들이 늘어섰기 때문이다.


해파랑길 37코스

 

여행일 : ‘20. 2. 1()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과 구정면 일원

여행코스 : 학산 오독떼기전수관당간지주학산3리 마을회관금광초교정감이산책로정감이수변공원풍호마을하시동 해안사구염전해변안인진항(소요시간 : 19.14/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염전해안에서 안인항까지의 3에도 못 미치는 구간을 제외하고는 탐방로가 모두 내륙으로 나있다. 바닷가에 위치한 강릉비행장과 군부대를 피하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트래킹 내내 지루함의 연속이다. 거기다 길까지 빙빙 돌려놓았다. 볼거리가 하도 드물다보니 작은 소나무 숲이라도 나올라치면 어김없이 산속으로 파고들게 해놓았기 때문이다. 금방 다다를 수 있는 거리를 에돌아가며 걸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해파랑길 전체 구간 중 가장 무료한 코스라는 불명예를 벗어날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해파랑길 완주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찾아올 필요가 없는 구간이다. 그것도 ‘N-E-V-E-R-!’. ! 요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도 눈에 띄지 않았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그래서 우린 들머리와 날머리를 바꿔서 걸었다. 37코스에서 유일하게 식당이 있는 곳이 안인항이기 때문이다.


 

들머리는 학산마을 오독떼기 전수관(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628)’

동해고속도로(속초-삼척) 남강릉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우회전하여 백두대간 쪽으로 들어오다 고속도로 바로 앞 사거리(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880-28)에서 우회전하여 어단천(於丹川)’을 따라 내려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학산(鶴山) 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 마을에 있는 오독떼기 전수관은 원래 해파랑길 37코스의 종점(終點)이다. 하지만 우린 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서 트레킹을 시작했다. 참고로 오독떼기 전수관은 강릉 일대의 민초들이 김을 매면서 불러오던 오독떼기라는 농요(農謠)를 전승(傳承)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수관(傳受館)이다. 강릉지방에서는 마을 두레패들이 한 조에 두 명 이상씩 조를 나누어 번갈아가며 오독떼기를 부르면서 즐겁게 김을 맨다고 한다. 아이김·두벌김·세벌김을 매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부르는 속도나 가사에 따라서 냇골(內谷수남(水南하평(下坪) 등으로 달리 부른단다. 이곳 학산리는 냇골조 오독떼기(강원도 무형문화재 제5)‘를 가장 잘 전승해오는 것으로 알려진다. 조선왕조실록에 세조가 동해안일대를 돌아보다가 이 오독떼기를 잘하는 사람을 뽑아 소리를 시켜보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단다. ’오독떼기 전수관을 이곳 학산리에 지어놓은 이유일 것이다.




전수관 앞의 소나무 숲속에는 식탁까지 갖춘 캠핑 데크가 여럿 들어서 있었다. 돌탑을 쌓았는가 하면 벤치를 놓아 쉼터의 기능까지 더했다. ‘학마을 가족 야영캠프란다. 돌담을 두른 형태의 서낭당(성황당)도 복원되어 있었다. 매년 4월 보름에 열리는 국사성황행차때는 대관령국사 여성황사(大關嶺國師 女城隍祠)‘로 가는 길에 이곳에 잠시 들러 굿과 제례를 올리기도 한단다,



어단천(於丹川)’에 놓은 굴산교(崛山橋)’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길이 9.63의 어단천(於丹川)은 구정면 구정리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 장현동에서 섬석천과 합쳐진데 이어 남항진에서는 남대천에 합류되는 섬석천의 제1지류이자 남대천의 제2지류이다.



다리를 건너자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벼 그루터기만 남은 논들 사이로 길이 나있는데, 이곳 학산의 명물 굴산사 당간지주가 진행방향 저만큼에 실루엣으로 나타난다.



잠시 후 굴산사지 당간지주(掘山寺址 幢竿支柱)’ 앞에 선다. 당간지주란 절집의 깃발()을 세우는 깃대(竿)의 버팀돌(支柱)이다. 요즘 국기게양대를 연상하면 되는데 세월의 흐름 속에 무쇠로 만들어졌을 당간은 사라지고 이젠 지주만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크기가 자못 놀랍다. 5.4m나 되는 한 쌍의 돌기둥이 지표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이다. 만약 저기에 당간이 있었다면 높이가 족히 20m는 되었을 것 같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라 하겠다. 은퇴 후 유적지 중심으로 각국을 돌아다니길 6, 스케일에서 시작된 콤플렉스를 이젠 떨쳐버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텅 빈 들녘 너머로는 백두대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000m를 넘기는 고봉(高峰)마다 하얀 눈을 한 짐씩 짊어지고서 말이다. 엊그제 내린 눈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나저나 저 들녘 어디쯤에는 굴산사지(掘山寺址)‘가 있을 것이다. 신라 하대에 형성된 9개의 선종산문 가운데 하나인 사굴사문(闍堀山門)의 본거지로, 851(문성왕 13) 범일선사(梵日禪師, 810~889)가 명주도독(溟州都督) 김공(金公)의 요청으로 산문을 열었던 곳이다. 한때는 영동지역 최대 사찰이었으나 여말선초(麗末鮮初) 무렵 폐사되어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옛 영화를 전해주고 있단다.



조금 더 걷자 삼거리(이정표 : 학산3리 마을회관1.2, 안인해변 17.2/ 당간지주0.15)가 나온다. 버스정류장(미륵금)이 설치되어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100m쯤 들어가자 자그마한 전각(殿閣)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안에는 신라 사굴산문(闍崛山門 : 九山禪門 중 하나)의 본산이었던 굴산사(掘山寺) 옛터에서 찾아냈다는 네 개의 불상 가운데 하나인 굴산사지 석불좌상(掘山寺址 石佛坐像 :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8)‘이 모셔져 있었다. 불상은 투박하기 짝이 없다. 특히 얼굴은 윤곽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안내판은 그 이유를 마모(磨耗)에서 찾고 있었으나 내 눈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게 혹시 크고 투박하며 서민적이라는 고려 불상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그리고 첫 번째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곧장 직진하면 엉뚱하게 옥봉마을로 가버리니 이정표(학산3리 마을회관0.9/ 학산마을0.8)를 꼭 살펴볼 일이다. 이어서 15분쯤 더 걷자 4차선 도로가에 위치한 학산3마을회관이 나온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쯤 되는 지점이다. 마을회관은 학산마루라는 카페를 끼고 있었다. 안인항에서 트레킹을 시작했을 경우 잠시 쉬어가기 딱 좋겠다.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50m쯤 가다가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곳에서는 이정표 대신 어단리의 송이버섯과 마늘 광고판을 참조하면 되겠다. 이 구간의 특징은 좌우로 과수원을 끼고 걷게 된다는 점이다. 가지만 앙상해서 품종은 알 수 없었으나 꽤나 너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또 다른 특징은 자투리땅만 보였다싶으면 어김없이 엄나무가 심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 역사까지 깊은지 눈에 띄는 하나하나가 모두 엄청나게 굵은 고목들 일색이었다.



탐방로는 들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너르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니 산이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선지 들녘 곳곳에 소나무 숲이 들어서있다. 덕분에 삭막하기만 했을 풍경이 많이 누그러졌다.



해파랑길 37코스도 역시 수많은 갈림길을 만난다. 이 구간은 특히 방향 삼을만한 지형지물이 마땅찮은 들녘에서 자주 길이 나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길 찾기가 애매할 수도 있는데, 이때는 해파랑길 이정표나 아래 사진의 강릉바우길이정표를 참고하면 된다. 강릉바우길의 7코스인 풍호연가길이 해파랑길 37코스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강원도 사투리인 '바우'에서 따온 바우길은 자연친화적인 트레킹 코스이다.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을 잇는 바다까지 총 연장이 350에 달하는 이 둘레길은 강릉 바우길’ 14개 코스와 대관령 바우길’ 2개 코스를 비롯해 울트라 바우길’, ‘계곡 바우길등 다양한 코스로 구성돼 있다. 오늘은 강릉 바우길’, 그중에서도 7코스인 풍호연가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너른 들녘을 15분쯤 더 걷자 금광초등학교가 나온다. 학교는 깔끔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다. 삼원색(三原色)을 기본으로 녹색과 하양을 더한 색상이 눈길을 끈다. 요즘은 학생이 줄어들면서 폐교되는 초등학교가 날로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그런데 면소재지도 아닌 곳에 이렇게 멀쩡한 학교가 존재하고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저렇게 고운 시설에다 뛰어난 교육프로그램을 더해 학생들을 유치했을 지도 모르겠다. 골프나 승마, 컴퓨터. 바이올린 등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시골학교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지 않았던가. 최근에는 부모의 일자리까지 주선해준다는 학교가 화재가 되기도 했었다.



학교 앞에서 탐방로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함께 걷던 형우군이 마실 나온 할머니들에게 옛날 이 부근에 금을 캐던 광산(鑛山)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광업권(鑛業權) 인허가 업무를 하면서 전국을 누비고 다니던 경험이 만들어낸 질문이라 하겠다. 그의 추론은 정확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 부근에 제법 큰 금광이 들어서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아보니 이곳의 지명은 금광(金鑛)이 아니라 금광(金光)’을 쓰고 있었다. 어느 효자가 금덩이를 건져 올린 용금정(湧金井)’이 마을에 있다고 해서 용금정의 자를 따와 금빛이 나는 고을이란 뜻의 금광(金光)’이 되었다는 것이다.



잠시 후 우린 해파랑길을 벗어나 버렸다. 철도공사의 강릉차량사업소 조금 못 미치는 곳인데 원래의 코스를 놓아두고 차량사업소의 오른편 모퉁이에 있는 사거리로 그냥 직진해버린 것이다. ‘와천로라는 2차선 도로가 새로 뚫린 것을 안 선두대장이 이 지름길을 택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우린 이곳에서 꽤 헤매야만 했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을 보고 진행하고 있는데 산길샘의 지도(Google)에는 아직까지도 이 도로가 업데이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도에도 없는 길로 들어선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도로 왼편에는 강릉차량사업소(江陵車輛事業所)’가 들어서 있다. 한국철도공사의 경강선(京江線, 시흥시 월곶역에서 강릉시 강릉역을 잇는 간선철도)을 운영하는 KTX의 주박(駐泊) 및 정비를 위한 고속철도 차량사업소다. 20182단계 공사가 완공되면서부터는 영동선과 태백선 등에서 운행되는 무궁화호 등에 쓰일 객차 및 발전차, 기관차의 정비시설로도 사용되고 있다.



새로 난 길로 7분쯤 걸었을까 다리(이정표 : 상시동리/ 안인항/ 금광리/ 학산마을)가 나오면서 해파랑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금광리와 상시동리의 방향표시가 이해되지 않지만 일단 해파랑길 진행표시에 따르기로 한다. 일차선의 시멘트길인데 이 길은 잠시 후 정감이등산로로 연결된다. !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곧장 안인항 방향으로 직진할 수도 있다. 거리도 한참이나 단축된다. 하지만 이때는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은 정감이 등산로는 포기해야만 한다.



걷는 도중 기이한 풍경이 보여서 카메라에 담아봤다. 오와 열을 맞추어 소나무를 심었는데 아랫도리에 봉분(封墳)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울창한 솔숲(이정표 : 정감이 수변공원3.2/ 금광초등학교2.5)으로 파고든다. 강릉차량사업소를 통과한지 35분 만에 정감이마을 등산로에 이른 것이다. ‘등산로라는 이름과는 달리 탐방로는 널찍했다. 경사까지도 거의 없다. 거기다 수북하게 쌓인 솔가리 덕분에 폭신폭신하기까지 하다.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 이 들머리에 등산로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오래 전 정감이마을 김부자집의 머슴인 유총각과 김부자의 예쁜 딸이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어느 봄날 낭자는 봄나물을 캐러, 그리고 유총각은 나무를 하러 뒷산에 올랐다. 소나무 아래서 소낙비를 피하던 둘은 결심했고, 칠성산 깊은 계곡으로 숨어들어갔단다. 그들이 사랑을 확인하며 걸었던 길이 바로 정감이 마을 등산로라는 것이다.



정감이마을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인 태양광발전소의 울타리를 지나 자그마한 봉우리에 올라서자 ·의 정상표지판(그곳에 오르고 싶은 산, 137.6m)이 반긴다. 국제신문 근교산행 팀의 산행대장을 역임했던 최남준씨도 이곳을 다녀갔던 모양이다. ! 근처에는 삼각점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사둔지봉의 정상일지도 모르겠다. ‘사둔지봉은 이 산과 접해있는 세 마을인 상시동의 자연부락 시동마을과 모전리의 둔지마을, 언벌리의 가둔리마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걷는다. 기분만 좋아지는 게 아니라 심신까지 맑아져 온다. 하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풍경이 나타난 것이다. 운동기구 몇 점이 잡초에 묻혀있는 것이다. 겨울철에 이 정도라면 여름철에는 웃자란 풀에 가려 아예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는 저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증거일 게고 말이다. 하긴 이런 산중에까지 찾아와 운동기구를 이용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혈세를 낭비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등산로가 끝나갈 즈음 오른편 산자락에 잘 지어진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정과 감이 많은 동네로 알려진 정감이마을일 것이다. ‘정감이마을이란 강동면에 위치한 모전1리와 상시동2, 언별1·2리 등 4개의 마을을 말한다. 감이 맛있기로 소문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 마을은 능이백숙으로도 유명하다. 버섯 중에 으뜸이라는 능이버섯과 쫄깃한 닭이 조화를 이루면서 맛은 물론이고 지난여름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까지 완벽하게 회복시켜 준단다. 책에서나 보아오던 손모내기와 전통 벼 베기, 탈곡 등의 논농사체험과 바다김치 담그기 체험, 천연염색 체험, 등산로 체험 등도 가능하단다.



마을 앞에서 시멘트포장길로 내려선 다음 400m쯤 더 걸으면 정감이 수변공원이 나온다. ‘상시동2에 있던 기존의 쟁골저수지를 정자와 운동기구 등의 편의시설을 갖춘 휴식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말은 그럴 듯하게 늘어놨지만 사실은 어느 시골에나 있는 조그만 저수지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 특별히 눈에 담을만한 풍경이 있을 리가 없다. 해파랑길은 이 저수지를 한 바퀴 돌게끔 나있지만 그냥 지나쳐버리는 이유이다. 그나저나 정감이등산로로 들어선지 45분 만에 수변공원에 이를 수 있었다. 등산로라는 이름과는 달리 걷기가 수월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수변공원을 빠져나오면 상시동2. ‘시동이란 마을 이름은 원래 사동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박수량의 현손 박진해(호 완하당)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절을 연상시키는 지명(사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단다. 그래서 절()에 말씀()을 붙여 시동으로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서 장관 2명에 지사와 장군까지 배출되었다니 말씀 언()’이 보태진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해파랑길은 마을 앞 농수로(農水路)에서 오른편으로 향한다. 이곳에서는 곧장 마을을 통과해 버림으로써 거리를 단축시킬 수도 있다는 점 또한 기억해 두자.



첫 번째 다리를 만나면 일단은 건너고 본다. 이어서 망설이지 않고 도로(이정표 : 안인항8.3/ 강동면사무소/ 학산마을9.4)를 횡단해 버린다. 그리고는 마을을 지나 산속으로 파고든다.



산속으로 들어섰지만 길은 아직도 시멘트포장이다. 아니 버스가 다니는 시동서당길을 만날 때까지 시멘트포장길은 계속되었다. 이 구간의 또 다른 특징은 구불구불한데다 갈림길까지 많아 길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해파랑길 이정표가 세워져 있기는 하지만 완벽한 도움은 주지 못했다. 아무래도 앱의 도움이 필요한 구간이지 싶다.



이 구간에서는 육교(陸橋)도 두 번이나 지난다. ‘7번 국도와 지방도인 율곡로를 연이어 지나는데 국도가 2차선인데 비해 지방도는 그 배인 4차선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걷는 도중 보존이 잘 되어 있는 한옥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허물어져가고 있는 한옥도 눈에 띄었다.



동양석재 앞의 도로를 건넌 탐방로는 또 다시 산속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시멘트포장길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때문에 공중으로 지나가는 수로(水路)와 바닥에 쌓인 솔가리들이 그려놓은 문양 외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이곳도 역시 밋밋한 구간이라 하겠다. 하긴 37코스 대부분이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렇게 걷길 40분 드디어 하시동3리인 풍호마을에 이른다. 마을 앞에는 영동선(嶺東線) 철도가 지나간다. 이곳 풍호마을의 축제 이름이 기찻길 옆 풍호마을 연꽃축제'가 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영동선은 영주역(경상북도)과 강릉역(강원도) 사이에 부설된 총연장 193.6의 철도이다. 본래 동해북부선·철암선(鐵巖線영암선(榮巖線삼척선(三陟線) 등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1963년 하나로 통합되면서 영동선이 되었다.



마을회관을 지나자 곧이어 풍호(楓湖)’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강릉의 남쪽에 있어 앞개 또는 남호(南湖)로도 불리었으며, 풍호(楓湖)는 호수 주변에 단풍나무가 많았던 데서 연유된 지명이다. 신라시대에는 경치가 아름다워 심신수련에 나선 화랑들이 호수를 찾아 시를 읊기도 했단다. 요즘은 너른 연꽃단지로 입소문을 탔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제각각의 색을 뽐낸다는 아름다운 꽃들이 없어서일까? 아니 그보다는 규모가 너무 작아서였을 것이다. 참고로 이곳 풍호마을에서는 매년 여름 연꽃 축제를 연다고 한다. 그네체험과 갯배 체험, 민속놀이 체험 등 다양한 체험은 물론 다채로운 음식도 맛볼 수 있단다.



호수 주변은 이름에 걸맞게 잘 꾸며져 있었다. 예쁜 물레방아와 함께 부용정(芙蓉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는가 하면 연꽃 방죽에는 데크 산책로를 만들어 가까이 다가가 연꽃을 구경할 수 있도록 했다. 벤치와 수도,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도 갖췄다.



이 호수는 원래 경포호수와 똑같은 석호(潟湖)였다고 한다. 파도가 바닷모래로 둑을 쌓아 냇물이 호수로 변했는데, 크기도 경포호수의 2/3나 되었단다. 하지만 주변이 개발되면서 지금은 아주 작은 호수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호수를 빠져나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풍호길을 따라 동해바다 쪽으로 가다가 풍호마을표지석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꾼다. 물론 곧장 도로를 따를 수도 있다. 그리고 두 길은 얼마 후 다시 만나게 된다. 우린 해파랑길을 따르기로 했다. 상당한 거리를 돌아가기는 하지만 숲길을 버리고 일부러 삭막한 도로를 따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구간에서 우린 오솔길을 걸을 수 있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데다 거리까지 짧았지만 삭막하기 짝이 없는 해파랑길 37코스를 걷다보니 나름대로 풍취가 있어 보였다.



숲속을 빠져나오자 또 다시 풍호길을 만난다. 아니 이번에는 염전길이란다. 이 길은 메이플비치 골프장의 앞을 지나 염전해변으로 연결된다. 오늘은 37코스, 해파랑길을 걸어온지도 1년 하고도 7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오늘처럼 포장도로를 많이 걸어본 것은 처음이지 싶다. 일부러 에둘러놓은 숲길을 빼놓고는 탐방로가 대부분 아스팔트 아니면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골프장 정문에서 조금 더 진행하자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하시동·안인 해안사구관찰로의 진입로란다. 서해안에 신두리 사구가 있다면 동해안엔 하시동·안인 해안사구가 있다고 했는데, 이곳을 두고 하던 말인가 보다. 풍호에서 이곳까지는 40분이 걸렸다.



해안사구(海岸砂丘, costal sand dune))’란 사빈(沙濱, 모래해안)의 모래가 바람에 날려 육지 쪽으로 이동하면서 바람의 힘이 약해지는 지점에 집중적으로 쌓이면서 만들어진 언덕을 말한다. 그런데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사구와는 사뭇 다르다. 모래 언덕이 아니라 온통 소나무 숲인 것이다. 표토(表土)를 걷어내지 않은 채로 보존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이 구간에는 해파랑길 이정표가 없었다. 그렇다고 미리 걱정부터 할 필요는 없다. 지자체에서 세운 이정표에 해파랑길 표식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아니 바닥에 깔아놓은 야자매트를 따라 걸어도 별 어려움 없이 해안가에 이를 수 있었다.



깊게 파인 웅덩이가 보인다. 뒤에는 둥그런 돌들을 모아놓았다. 들머리의 안내판에 나와 있던 하사동 고분군(강원도 기념물 18)’의 발굴현장이 아닐까 싶다. 삼국시대 유적으로 추정된다는 고분군(古墳群) 말이다. 고고학에 문외한인 내 의견보다는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할 것 같아 다른 이의 글을 옮겨본다. ‘하시동 고분군은 이곳 사구를 따라 100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무덤의 구조는 구덩식 돌덧널무덤이다. 평면은 긴 네모 모양이며, 돌덧널 안은 주검을 안치한 으뜸 덧널과 껴묻거리만 넣은 딸린널로 구분되어 있다. 무덤은 구조와 유물을 종합해 볼 때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들어선지 10분 만에 사구를 빠져나오면 가없이 너른 푸른 바다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염전해변으로 길이가 500m인데 옛날 이곳에서 소금이 많이 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지금은 염전 대신에 결이 고운 모래사장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게 탐스러웠지만 가까이 다가가는 것까지는 사양하기로 했다. 그러기에는 파도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의 안인사구 관리소까지는 해안도로를 따랐다. 왼편에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바다를 끼고 걷는 멋진 구간이다. ! 관리소 뒤편의 도로는 아까 사구로 들어서기 전에 헤어졌던 도로이다. 그 도로 가에 하늘다람쥐와 멧토끼 등 생태·보전지역에서 서식하는 동물들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한번쯤 살펴보면서 하시동·안인 사구에서 받았던 감흥을 가슴속에 저장해 볼 일이다.



탐방로는 관리소 앞에서 바닷가로 나간다. 그리곤 염전해변의 모래사장을 따라 걷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도로로 올라설 수밖에 없었다. 이 일대가 안인화력발전소의 건설현장으로 변해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도 시설공사가 한창이다. ‘안인석탄화력발전소의 가동에 필요한 냉각수(冷却水)를 끌어들이기 위한 취수(取水) 시설이란다.



염전해변이 끝나면 해파랑길을 군선천(群仙川)을 거슬러 올라간다. 강폭이 좁아지는 곳에 다리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때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아름다운 풍경화가 눈앞에 그려진다. 군선천이 바다와 합쳐지는 저곳은 안인진항일 것이다.



군선천(群仙川)은 강릉시 강동면 언별리에서 발원해 임곡천과 합쳐진 후 안인지항을 거쳐 동해로 흘러드는 길이 11의 지방하천이다. 군선천을 유명하게 한 것은 상류에 있는 단경골이다. 단경골(壇京谷)박달나무()와 서울(), 골짜기()의 합성어이다. 고려왕조가 무너진 이후 최문한과 김중한, 이장밀, 김경 등 수십 명의 고려 충신들이 이곳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이들이 종묘를 봉안하기 위해 제단을 만든 곳이라 하여 단경골로 불리게 되었는데, 현재는 매년 1만 명 이상이 찾는 유명 관광지로 변해있다.



안인진항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오르다보면 안인화력발전소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6조원이 투입된 민자 발전소(民資 發電所)’1,040MW급 발전기 2기가 들어설 예정이란다. 그런데 석탄 하역부두와 발전소를 이어주는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는 눈에 띄지 않았다. 석탄발전소의 필수시설인데도 말이다. 아직 공사가 마감되지 않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날머리는 안인진항(安仁津港,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314-1)'

고개를 넘자 곧이어 안인진항에 이른다. 염전해변에 내려선지 35분 만이다. 물양장에 들어서자 뱃머리를 닮은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꼭대기에는 은빛 구() 올려놓았는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안인진항은 노란 참가자미의 집결지로 유명한 포구이다. ‘노란 참가자미는 배 쪽 지느러미 부분이 노란색을 띄는 가자미로 횟감과 조림 등으로 쓰인다. 그런데 그 맛이 뛰어나서 가자미류 중에서도 유독 노란 참가자미만 찾는 소비자들이 많단다. 매년 여름 안인 노란참가자미 축제까지 열릴 정도라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참고로 안인(安仁)'은 조선시대 관청의 일을 하던 강릉시내 칠사당(七事堂)을 중심으로 해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은 편안함을 '()'은 방위상 동쪽을 의미하여 '안인(安仁)''강릉 동쪽의 편안한 곳'이란 뜻이 된다.



안인해변은 바닷물이 맑고 수심이 얕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바닷가에 널린 갯바위도 눈길을 끈다. 바다는 파도가 무척 높았다. 하지만 형우군은 이를 개의치 않고 갯바위로 올라간다. 횟집에 들르지 못하는 서운함을 저 파도에 띄워 보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금주령 중인 내가 최상의 안주거리를 상에 올릴 수야 없지 않겠는가. 친구야 미안하다.


해파랑길 35코스

 

여행일 : ‘20. 1. 4()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과 강동면 일원

여행코스 : 옥계시장옥계해변금진항심곡항바다부채길정동진역(소요시간 : 15.21/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이 구간의 가장 큰 특징은 해안이 품을 수 있는 갖가지 아름다움을 빠짐없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옥계해변과 금진해변, 정동진해변에서는 금빛 모래사장을 거닐어 볼 수 있고, 금진항과 심곡항의 담장너머로는 바닷가 사람들의 삶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뛰어난 것은 아름답기 짝이 없는 경관이라 하겠다. 금진항에서 심곡항까지의 해안도로가 동해안 제일의 드라이브코스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더욱 심화시키는 방법도 있다. 심곡항에서 정동진까지의 구간을 산길인 해파랑길 대신 바닷가를 따르면 되는데 이 구간은 해안경비를 위한 철조망 너머로만 존재했던 곳이다. 그러다가 2017년 그 비밀의 문이 열린 덕분에 우린 2300만 년 전 동해의 탄생 비밀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은 온통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우리 부부의 선택도 뻔할 수밖에 없었다. 3년 전, ‘바다부채길과의 첫 만남 때 느꼈던 감동이 새록새록 떠오르는데 어찌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겠는가.


 

트레킹 들머리는 옥계시장(강릉시 옥계면 현내리)

동해고속도로(삼척-속초) 옥계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우회전하여 첫 번째 사거리(동화아파트 앞)에서 좌회전하면 옥계시장이 나온다. 마을 이름을 따 현내시장이라고도 부르는데 해파랑길 35코스의 시작점이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도로 건너 승규반점의 간판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해파랑길 35코스는 강릉 바우길9구간인 헌화로산책길과 겹친다. ‘바우길 9구간도 함께 알아가면서 트레킹을 하면 한층 더 재미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하나로 마트를 오른편에 낀 골목으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어서 탐방로는 옥계초등학교의 담벼락을 따라 이어진다. ! 오늘이 옥계 장날이었다는 걸 빼먹을 뻔했다. ‘찾는 날이 장날이라고 모처럼 만난 ‘5일장이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마침 배도 출출해오는지라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있을까 해서 들러봤다. 하지만 시간이 일러선지 끼니를 때울만한 먹거리는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난장(亂場)이 차려져 있었다. 설 대목장이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옥계초등학교 정문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10m쯤 가다가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꾼다. 코너에 세워놓은 교동마을표지석을 염두에 두면 되겠다. 이 길은 앞으로도 여러 곳에서 방향을 튼다. 그런데 들녘에서 길이 나뉘기 때문에 상황 설명도 어렵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곳에는 로고나 리본 등 해파랑길 표식들이 어김없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 남짓 지나자 낙풍천(樂豊川)이 나타난다. 넓다고 할 수는 없으나 수량(水量)은 제법 많다. 하긴 옛날에는 창촌(현내리)에 있는 창고의 곡식을 실어내가기 위해 배까지 다녔을 정도라니 이를 말이겠는가. 탐방로는 낙풍교(樂豊橋)’로 하천을 건넌 다음 낙풍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바닷가로 향한다. 참고로 낙풍천은 만덕봉(옥계면 북동리)의 검정밭골 용소와 덕우리재 아래 덕우리골에서 발원하여 낙풍리 앞을 지나고 현내·금진의 넓은 들을 끼고 흘러 광포에서 동해바다로 흘러든 하천이다.



15분쯤 더 걷자 옥계해수욕장(玉溪海水浴場)’이 나온다. 하지만 해파랑길은 해수욕장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옥계해변 안내도에서 울창한 소나무 숲을 헤집으며 내놓은 탐방로를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해수욕장을 거쳐 가기로 했다. 이왕에 바닷가에 왔으니 모래사장을 밟아보는 게 정상이지 않겠는가. 옥계해수욕장은 강릉시 옥계면 금진리에서 주수리까지 약 2.5에 이르는 비교적 넓은 사빈(沙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철 지난 백사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하긴 여름철에도 이곳은 비교적 조용하단다. 그래서 가족단위의 피서객들이 이용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백사장을 따라 5분쯤 걸었을까 한국여성수련원이 보인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수련원의 경내를 통과하자 아까 해수욕장 입구에서 헤어졌던 해파랑길과 다시 만났다. 주변이 산림욕장으로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참고로 이곳 여성수련원은 여성의 경쟁력 향상과 사회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자기개발을 도모하는 전문 교육·문화 공간이다.



여성수련원의 정문 앞에서는 오른편의 포장도로를 따른다. 그러다가 3분쯤 후에는 오른편에 보이는 숲속으로 들어선다. 이후부터는 수령 40~50년은 너끈히 넘어 보이는 울창한 송림(松林)이 탐방객들과 함께한다.



길을 걷다가 예쁘장하게 생긴 강릉 바우길표지석을 만났다. 강원도 사투리인 '바우'에서 따온 바우길은 자연친화적인 트레킹 코스이다.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을 잇는 바다까지 총 연장이 350에 달하는 이 둘레길은 강릉 바우길’ 14개 코스와 대관령 바우길’ 2개 코스를 비롯해 울트라 바우길’, ‘계곡 바우길등 다양한 코스로 구성돼 있다. 오늘은 그 가운데 강릉 바우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 길의 또 다른 특징은 70% 이상이 금강송(金剛松)과 해송(海松)으로 이루어져 있어 걸으면서 산림욕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트레일로 꼽히는 이유이다.



솔향에 취해 걷다보면 저만큼에 2차선 도로(이정표 : 금진항2.4Km, 정동진 9.7Km/ 옥계시장4.3Km)가 나타난다. 헌화로(獻花路)이다. 헌화로는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의 낙풍사거리에서 강동면 정동진리 정동진역 앞 삼거리에 이르는 도로로서, 헌화로라는 이름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때 지어진 헌화가(獻花歌)’에서 유래되었다.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가 되어 부임하던 길에 그의 부인 수로(水路)부인이 바닷가 절벽 위에 핀 철쭉을 탐냈으나 위험한 일이므로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소를 끌고 가던 한 노인이 나서서 꽃을 꺾어 바치면서 부른 노래가 바로 헌화가이다. ‘자줏빛 바위 가에(紫布岩乎邊希),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執音乎手母牛放敎遣),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吾肸不喩慚肸伊賜等),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



도로에 올라섰다 싶은데 벌써 금진해수욕장이란다. 옥계면 금진1,2리에 걸쳐 있는 길이 900m63,000의 백사장을 가진 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의 초입에는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옥빛으로 물든 끝없이 너른 동해바다를 실컷 구경해보라는 모양이다. 길은 해수욕장과 마을을 양 옆에 끼고 나있다. 금진해수욕장은 어느 해변보다 조용하고 아늑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한번이라도 와본 사람들은 해마다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따가운 햇볕을 피할 만한 나무 한 그루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박집이나 상점들이 도로를 끼고 늘어서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다. 그늘 대신으로 이용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영하의 날씨, 아니 이곳은 영상이라고 했다. 아무튼 겨울철인데도 불구하고 바다에는 서핑(surfing)을 즐기는 마니아들이 여럿 보였다. 동해안에 서핑보드의 명소가 생겼다고 하더니 어쩌면 이곳일지도 모르겠다. 드물지만 윈드서핑(wind surfing)까지 눈에 띄는 걸 보면 말이다.



해수욕장은 예쁘게 꾸미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그 가운데 백미는 풍차 모양으로 만든 매점이 아닐까 싶다. 건물의 뒷면에 화장실을 배치해 공공의 기능까지 겸하도록 했다. ! 배가 출출할 경우에는 이곳 금진해변에서 끼니를 때울 수도 있다. 금진항이나 심곡항에서 해결할 수도 있다. 싱싱한 회를 파는 음식점들이 상당 수 보였기 때문이다. 중국음식 등 다른 식단을 차리는 음식점도 문을 열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신경을 조금 더 쓸 경우에는 탐방로 주변에서도 허기를 때울 수가 있겠다. 간간이 푸드 트럭(food truck)’들이 보였으니 말이다.



백사장이 끝나면 길은 벼랑의 아랫자락을 지난다. 오른편은 물론 바닷가를 끼고 나있다. 이곳에서 금진항까지의 1는 가히 마()의 구간이라 하겠다. 두 개 뿐인 도로면의 하나를 자동차와 자전거, 그리고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도록 설계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가끔은 위험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자칫 한눈이라도 팔다가는 사고를 당할 수도 있으니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가며 걸어야 할 일이다.



그렇게 15쯤 걷자 작은 고깃배가 드나드는 한적한 바닷가 마을인 금진항(金津港)에 이른다. 1971년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고, 1989년에 제반 시설이 완공된 금진항은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하지만 세상에 알린 것은 드라마 '시그널'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시그널이 인기를 타면서 촬영지였던 이곳 또한 자연스레 세간의 이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 마을에는 아치형의 문()도 세워져 있었다. 문 위에는 몇 마리의 새()가 올라 앉아 있다. ‘강원도의 새라는 두루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고니(백조)라고 보는 게 더 옳겠다. 이곳 강릉시를 상징하는 새는 천연기념물 제 201호인 고니이니까 말이다. 겨울철에 이 지역에서 머물다가 봄이 오기 전에 떠나는 이 새는 길조(吉鳥)로 알려져 있다. 풍년을 상징하며, 또한 청순하고 깨끗한 순백색의 자태는 학문과 지조(志操)를 나타내기도 한다.



금진항의 선착장 근처에는 제법 너른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갖가지 조형물과 벤치 등의 시설물들 외에도 돌로 만든 책도 보인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수로부인의 설화가 적혀 있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두 수의 노래가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헌화로(獻花路)와 연결시켜 관광객들을 유치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그래야만 현재 운행하고 있는 유람선 사업도 더 번창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금진항에서 출발해 심곡항과 정동진, 안인진 앞바다를 항해하는 골드코스트 유람선은 여행의 낭만을 더해준다고 알려져 있다.



헌화로의 백미(白眉)는 금진항과 심곡항 사이의 2.4구간이다. 이 구간의 지형은 높이 60m 안팎의 해안단구(海岸段丘)로 이루어져 있고, 이 단구의 절벽을 따라 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주변 경관이 가히 절경(絶景)이다. 도로는 바위 절벽과 바다 사이의 좁은 지역을 지난다. 바다에 바싹 붙어 있는 길이라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이 구간은 보행로(자전거길 겸용)를 따로 만들어 안전을 도모했다. 벼랑의 아래에 차를 세울 수 있는 소규모 주차 공간을 만들고 벤치를 놓기도 했다. 강릉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찾는 드라이브 코스에 상응하는 대접이라 하겠다.



노면(路面)이 젖어있는 곳도 보인다. 파도가 조금이라도 높으면 바닷물이 도로에까지 들이친다는 증거일 것이다. 누군가 한반도 땅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도로라고 했는데, 그 말이 실감이 난다. 그러다보니 헌화로는 무척 아름답다. 한쪽은 무너져 내릴 듯 아슬아슬한 기암절벽이고, 다른 한쪽은 금방이라도 파도가 밀려들 듯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바다이다. 한 폭의 산수화라 할 수 있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구불구불한 해안가를 걷다보면 바다에 흩어져 있는 독특한 바위들이 눈에 들어온다. 바닷물에 침식되면서 계단 형태로 만들어진 해안단구(海岸段丘, marine terrace)라는데 우리나라에서 해안단구의 형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이라고 한다.




왼편 산자락에 기괴하게 생긴 선 바위(立石)’ 하나가 보였다. 바위의 뒤는 움푹하게 파인 골짜기이다. ‘합궁(合宮)이라 불리는데 탄생의 신비를 보여주는 곳이란다. 남근(男根)과 여근(女根)이 마주하는 신성한 장소로서 동해의 떠오르는 서기(瑞氣)를 받아 우주의 기()를 생성하며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루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오면 금슬이 좋아지고 기다리는 아기가 생기게 된단다. 그렇다면 우리 부부는 제대로 찾아온 셈이다. 그건 그렇고 곡의 입구에 서있는 저 바위를 일러 헌화가(獻花歌)의 첫 소절에 나오는 자포암(紫布岩)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자포암은 발기했을 때의 검붉은 색을 띠는 남성의 성기(性器)’를 표현한 것이며 헌화가는 이 남근석(男根石)을 숭배하는 노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바위는 결코 무너질 일이 없겠다. 여성의 음문(陰門) 앞에 버티고 서있는 남근(男根)이 어찌 죽을 수가 있겠는가. 이에 대한 설명은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께서 해 주시겠단다. 여근곡(女根谷)에 숨어든 백제군이 죽는 이유를 남성(男性)이 여성(女性)의 몸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신 말씀으로 말이다. 참고로 합궁골은 해가 뜨면서 남근의 그림자가 여근과 마주할 때가 가장 강한 기()를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아들 낳기를 원해서 이곳을 찾으려는 사람들이라면 알아두어야 할 일이다.



10Km 길이의 이 아름다운 헌화로는 관광도로이다. 한적하던 이 도로는 금진리와 심곡리를 잇는 해안구간이 개통되면서 활성화되었다. 199811월 이전만 해도 이 구간은 통행이 불가능했었다. 해안단구(海岸段丘)의 바다 쪽이 절벽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이곳에 해안도로를 내고 나머지 구간과 연결하면서 헌화로(獻花路)가 되었다. 참고로 이 구간은 해수욕 철과 봄가을 관광 철만 되면 차량이 몰려 주차장으로 변하곤 한다.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도 보인다. 다른 지역에서는 해골바위라 부르며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데 이곳은 안내판 하나도 세워놓지 않았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고 했다. 하찮은 바위조차도 자리를 잘 잡아야 유명세를 띠나 보다.



금진항을 출발한지 35분 만에 심곡항(深谷港 : 강동면 심곡리)에 도착했다. 이곳의 본래 이름은 지필(紙筆)’이었다고 한다. 마을의 생김새가 종이를 바닥에 깔아 놓은 듯이 평평한데, 그 옆에 붓이 놓여 있는 형국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던 것이 1916년에 행정구역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깊은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심곡(深谷)’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곳은 양쪽에 산줄기를 끼고 있는 오지(奧地)이다. 거기다 나머지 한 면은 바다로 막혀있다. 마을 주민들이 한국전쟁 때도 난리가 난 줄도 모르고 지냈다고 알려졌을 정도이다. 얼마나 깊 길래 전쟁까지도 몰랐다는 말이 전해져 오겠는가. 하긴 이런 오지였으니 수로부인에 얽힌 전설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고 있을 것이다.



심곡항에서 바다 부채길이 시작된다. 초입의 데크계단은 방파제 부근에 있다. 그런데 3년 전과는 달리 입장료(3000)를 받고 있었다.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둘레길의 시설들을 유지·관리하려면 꽤나 많은 예산이 들어갈 것이고 또 누군가는 그 돈을 물어야만 한다. 이럴 경우에는 수익자 부담의 원칙이 적용되는 게 옳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두고두고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 입구에는 바다부채길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2.86Km 길이의 둘레길에 대한 설명과 함께 둘레길에서 주의하거나, 해서는 안 될 행위들을 나열해 놓았다. 무단출입 또는 무단촬영을 할 경우 군형법에 의해 처벌하겠다는 군() 부대장의 서슬 시퍼런 경고판도 보인다.



계단을 오르면 4~5층 높이의 전망대로 연결된다. 철제 구조물로 만들어진 이 전망대는 갈매기를 형상화한 것이란다. 그러나 위에서 볼 때에만 나타난다고 하니 꼭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헬리콥터라도 타고 볼 일이다.



전망대에 서면 주변 풍광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끝없이 펼쳐지는 동해의 푸른 물결은 물론이려니와 제법 번화하다고 할 수 있는 심곡항도 숨김없이 그 속살을 드러낸다. 그뿐만이 아니다. 진행방향에서는 이제부터 걷게 될 바다부채길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건너편 바위절벽에서는 거센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3년 전에는 보지 못했으니 인공폭포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절벽 위의 등대(燈臺)와 조화를 이루며 예쁜 풍경화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말이다.



전망대를 내려와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은 탐방객들이 오가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넓다. 하지만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두 사람이 겨우 비켜 지나가야 할 만큼 좁다란 구간도 만들어져 있다. 이런 곳에서는 어김없이 병목현상이 일어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곳의 아름다움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바다 부채길은 심곡항과 정동진 사이의 해안단구(海岸段丘 : 천연기념물 제437)에 내놓은 둘레길이다. 이곳은 민간의 통행이 불가능했던 지역이다. 애초부터 길이 없었음은 물론이려니와 길이 나있다고 해봐야 해안경비를 위한 군()의 경계근무 정찰로로만 사용돼 왔을 따름이다. 단 한 번도 민간인에게 개방된 적이 없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그 비밀의 문이 3년 전에 열렸다. 길이 2.86km의 해안선 모양이 동해(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 놓은 것과 비슷하다 해서 부채길이란 근사한 이름까지 얻었다. 민간인 개방을 위해 국방부와 문화재청의 협의와 허가에만 2년간의 세월이 소요됐다니 얼마나 어렵게 세상에 공개됐는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 ‘바다부채길이란 이름은 공모를 통해 정해졌다는 것도 기억해 두다. 강릉이 고향인 소설가 이순원의 작품이란다. 강릉의 대표 걷기길인 바우길도 그가 지은 이름이란다.



탐방로는 시작부터 아름다움의 연속이다. 왼편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그리고 오른편에는 푸른 바다가 계속해서 동행한다. 옥빛 바닷물에 기암괴석, 주상절리, 비탈에 아슬아슬하게 선 소나무와 향나무 등 수많은 볼거리에 눈이 호사를 누린다. 곳곳에 벤치도 만들어 놓았다. 잠시나마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세상사 시름을 날려버리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먼저 선점한 사람들이 있어 실행에 옮겨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험상궂은 절벽이 나타난다. 바닷가로 내려서지 못한 길은 절벽의 경사면(傾斜面)을 따라 나있다. 아까 헌화로 구간에서 거론했던 수로부인(水路夫人)이 용()에게 납치되었다는 장소로 거론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바윗길은 험하다. 아무튼 수로부인은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사나운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물고 물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일행들이 어쩔 줄 몰라 할 때 역시 한 노인이 나타나 여러 입으로 떠들자고 선동했단다. 백성들을 불러 모아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면서 항의의 노래를 부르면 부인을 다시 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 내 놓아라라고 협박하였고 마침내 용이 수로부인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때 불렀다는 노래가 해가(海歌)’이다. ‘龜乎龜乎出水路(구호구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약인부녀죄하극) 남의 아내 앗은 죄 그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여약패역불출현) 네 만약 어기고 바치지 않으면, 入網捕掠燔之喫(입망포략번지끽)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탐방로의 핵심은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기암괴석들을 감상하며 걷는 것이다. 해안가 바위들은 2300만 년 전 일어났던 한반도 지반 융기의 비밀을 곳곳에 새겨 놓고 있다. 이를 통칭해 정동진 해안단구(海岸段丘)’라 부른다. 해안단구는 계단 형태의 평탄한 지형을 말한다. 오랜 세월 침식(浸蝕) 또는 퇴적(堆積) 작용으로 만들어진 파식대(波蝕台, wave-cut platform)가 지반 융기나 해수면 하강으로 육지화되면서 형성된다. 동해 어달동, 부산 태종대 등에도 비슷한 형태의 해안단구가 있지만 정동진 해안단구는 길이가 압도적으로 길다. 2004년 천연기념물(437)로 지정된 것도 이 때문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는 정동진 해안단구는 학술적으로 우리나라의 지질구조 발달 과정과 퇴적 환경, 지각운동, 해수의 침식작용, 해수면 변동 연구에 대단히 중요하고 자연과학 학습장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고 적고 있다.



바위의 모양이 거북이의 머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한편 거북이의 머리는 남성의 성기(性器)로 상징되기도 한다. 성기를 닮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몸통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모양새가 발기된 음경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수로부인의 설화를 떠올리다 문맥까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버렸다.



얼마쯤 걸었을까 부채바위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부채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바라보는 방향에 관계없이 어디서 봐도 부채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하지만 45도 각도(角度)로 기울어져 마치 좌초(坐礁)하는 배()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니 참조한다. 다른 한편으론 시루떡을 닮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아무튼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암석이 세월의 깊이를 대변해준다. 중생대 쥐라기부터 백악기 초까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지각변동의 영향을 받아 솟아오르거나 기울어진 암석들이란다.



허리띠(belt)처럼 둘러놓은 데크길을 걸어본다. 부채바위의 뒤에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부채바위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200여 년 전 심곡마을에 살고 있던 한 노인의 꿈에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왔다는 여인이 나타났다. 이 여인은 내가 심곡과 정동진 사이에 있는 부채바위 근방에서 떠내려가고 있으니 구해 달라고 했다. 노인은 배를 타고 부채바위 인근으로 갔고 그곳에서 나무 궤짝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여인의 화상(畵像)이 있었는데 노인은 서낭당을 지어 이 화상을 정중히 모셨고, 이후 이 마을엔 풍어(豊漁)가 이어졌다고 한다. 심곡마을에 가면 그 서낭당을 만날 수 있다.



옥색바다가 일렁인다. 그 파도에 실려 온 해풍(海風)이 귓불을 건드린다. 수로부인의 치명적인 유혹이 나풀대는 해풍처럼 내 가슴 속에서 물결친다. 두근거림은 끝내 멈출 줄을 모른다. 집사람도 감정에 겨운 나와 다르지 않았던가 보다. 더 이상 걷지를 못하고 벤치에 걸터앉아버린다. 해풍을 맞아 움푹 파인 양 볼을 보여주는 부채바위가 천년도 지난 옛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전해준다. 어느새 바다는 수로부인의 매혹적인 미소로 바뀌어 있다.



탐방로에는 해안 경계철조망이 그대로 남아 있고 절벽 곳곳에는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한 시설 등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해안철책은 탐방로 안쪽으로 설치돼 있어 조망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발아래로 파도가 들이친다. 상큼한 바다냄새가 듬뿍 실려 있는 파도이다. 넘실대는 파도를 따라 춤을 추고 있는 것들이 보인다. 정동진과 심곡이 자랑하는 특산물 미역일 것이다. 여름철이면 이 일대는 또 다른 구경거리로 넘친다고 한다. 붉게 핀 해당화가 탐방로 주변을 지키고 갯메꽃과 하얀 찔레꽃도 곳곳에서 탐방로를 빛낸단다. 내년 여름에 다시 한 번 찾아봐야할 이유이다.



바다부채길의 최고 절경은 투구바위 부근이다. 바위의 모양이 투구를 쓴 장수가 양손을 올리고 전투 자세를 취하는 형상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투구바위 주위에는 다양한 모양의 크고 작은 바위가 조각공원을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이 발가락이 여섯인 육발호랑이를 백두산으로 쫓아냈다는 전설도 깃든 곳이다. 사선(斜線), 혹은 수직으로 세밀하게 갈라진 바위 군상은 거센 파도에 닳고 닳아 그대로 작품이다. 간간이 제주에서나 볼 수 있는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玄武岩, basalt)도 보인다. 가끔은 거센 파도가 밀려오기도 한다. 파도가 몰려올 때마다 물줄기가 바위 사이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장관이 펼쳐진다.



굴곡진 해안을 따라 굽이굽이 절경이 펼쳐진다. 기암괴석과 쪽빛 바다가 빚어내는 풍광은 아무리 감성이 무딘 사람의 마음도 촉촉하게 만들어버린다. 중간 중간 가던 길을 멈추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진행방향 저만큼에 자갈밭으로 이루어진 해변이 나타난다. 사람의 손길이 만들어낸 바닷가탐방로는 여기까지다. 꿈길을 거닐던 환상여행은 이쯤에서 끝났다고 보면 된다. 주변 풍광이 언제 그렇게 아름다웠냐는 듯이 평범하게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굵직한 돌맹이로 이루어진 자갈밭은 동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갖가지 소망을 담은 수많은 돌탑들이 늘어선 해변에 앉아본다. 자갈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심신(心身)을 맑게 해주고, 하얀 포말은 속세에 찌든 마음마저 씻어주는 듯하다.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길이 끝나면 이젠 올라갈 일만 남았다. ‘썬크루즈 리조트로 연결되는 이 계단은 한마디로 길다. 거기다 가파르기까지 하다. 리조트가 산 위에 지어졌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서서히 걷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끝이 나올 테니까 말이다.



길고 긴 계단을 오르면 썬크루즈 리조트주차장이 나온다. 그 뒤에는 선박의 외형을 닮은 썬크루즈 리조트건물이 위풍당당한 전모(全貌)를 드러내고 있다. 3만 톤급 호화 유람선이란다. ‘정동진역모래시계 소나무’, ‘밀레니엄 모래시계는 정동진을 대표적인 상징(象徵)들이다. 정동진을 내려다보는 산 위에 자리 잡은 배 썬크루즈 리조트도 그중의 하나이다. ‘썬크루즈 리조트CNN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CNNGO’에서 20122월 발표한 한국에서 가장 특이한 호텔 501위를 차지한 곳으로, ‘크루즈를 타고 있지만 실제로 바다에서 운항하지 않는 리조트라고 평가했다. 121개의 호텔형 객실과 82개의 콘도형 객실, 8개의 스위트룸으로 구성되어 있단다.



리조트 진입로를 따라 내려가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해돋이 명소로 널리 알려진 정동진에 다다르게 된다. 드라마 모래시계를 촬영한 곳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으면서 내방객을 위한 숙박업소, 음식점, 노점상, 노래방, 유흥점 등 관광 시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한때 어촌 마을 속 도시를 방불케 했다. 지금은 예전만 못하지만 평일에도 여전히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단다.



해변에 이르니 정동진항에 정박되어 있는 범선(帆船) 한 척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저건 진짜 배가 아니다. ‘어국이란 이름의 '범선횟집'인데 싱싱한 대게와 회가 준비돼 있으며 연회장과 웨딩 시설까지 준비돼 있단다.



정동진은 두말이 필요 없는 우리나라 최고의 일출(日出) 명소이다. 명성이 자자한 해돋이를 감상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일 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요즘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최근에 새로 연 바다 부채길을 탐방하려는 사람들이 주중이나 주말을 가리지 않고 몰려드는 탓이다. 모처럼 이곳까지 찾아온 그들이 어찌 모래시계 공원을 들러보지 않고 그냥 돌아갈 수 있겠는가.




모래시계공원에는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 철로를 깔고 그 위에 1985년에 제작된 기차 7량을 세워 정동진 박물관을 꾸며놓은 것이다. 실제 기차가 오가는 정동진역과는 1정도 떨어져 있다. 정동진역의 기차와 이 공원의 모래시계를 모티브로 삼은 박물관 안에는 동서양의 시계 관련 유물 13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1912년 타이타닉호에서 침몰 당시 멈춰버린 타이타닉 금장 회중시계도 전시되어 있다.



정동진은 다리 하나까지도 예쁘게 만들어 놓았다. 그 아름다움에 반한 우리 부부는 길까지 잘못 들어서 버렸다. 해변을 따라 정동진역까지 걸어가야 하는데도 마을로 빠져나와 버린 것이다. 덕분에 우린 차량통행이 제법 많은 도로를 따라 돌고 돌아서야 정동진역에 다다를 수 있었다.




트레킹 날머리는 정동진역(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303)

특별한 의미도, 그렇다고 눈에 담을만한 풍경도 없는 도로를 15분쯤 걷고 나서야 정동진역에 이를 수 있었다. 정동진역은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기차역으로 알려져 있다. 모래사장을 따라 역으로 왔으면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을 텐데도 빙 에둘러서 온 것이다. 아무튼 오늘 트레킹은 총 4시간이 걸렸다. 핸드폰 앱에 찍힌 거리는 15.21, 예고된 14보다 1이상을 더 걸었다. 보다 더 예쁜 풍경을 만나려고 이곳저곳을 들락 거렸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해파랑길 35코스의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괘방산 등산로의 입구에 세워져 있다.


해파랑길 14코스

 

여행일 : ‘19. 12. 22()

소재지 :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과 호미곶면 일원

산행코스 : 구룡포항구룡포해수욕장관풍대석병항다무포동쪽 땅끝 조형물강사2호미곶(거리/ 소요시간 : 15.82/ 3시간 30)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50개 코스(770km)로 이루어진 해파랑길 중 포항은 ‘6개 코스(13~18)’가 지나가는데 그중에서 백미는 14구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구간은 대게와 과메기의 본고장 구룡포항에서 시작해 호랑이 꼬리를 따라 호미곶까지 올라가는 한적한 바닷가길이다. 그러다보니 걷는 내내 바다 냄새에 흠뻑 빠져볼 수 있다. 푸른 바다와 바닷가 갯바위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 또한 빼어나다. 그렇게 만들어진 풍경화에 해라도 떠오른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 매년 초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이 구간을 1월에 가장 걷기 좋은 길이라고 말한다. 새해가 1주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으니 나 역시 제 때에 찾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들머리는 구룡포항 아라광장주차장(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새만금포항고속도로(대구-포항)의 포항 IC에서 내려와 우측 구룡포감포 방면으로 방향을 잡는다. 31번 국도를 타고 계속 직진하다가 병포교차로(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병포리 359-2)에서 왼편 929번 지방도로 옮겨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구룡포항에 이르게 된다. 해파랑길의 스탬프보관함은 안내도와 함께 북방파제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는 아라광장의 주차장 코너에 만들어져 있다. 참고로 구룡포(九龍浦)’라는 지명은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령이 늦봄에 각 마을을 순시하다가 지금의 용주리를 지날 때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바다에서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그중 1마리가 떨어져 죽자 바닷물이 붉게 물들면서 폭풍우가 그쳤다는 전설이다. 용두산 아래의 깊은 소()에서 살던 용 아홉 마리가 동해바다로 빠져나가면서 승천했다는 데서 연유되었다는 또 다른 전설도 있다.




트레킹을 나서기 전에 일본인 가옥거리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아니 언덕배기에 조성되어 있는 구룡포 공원부터 오르는 게 순서이다. 꽤나 긴 돌계단으로 연결되는데 양 옆에 세워놓은 120(왼쪽 61, 오른쪽 59)의 돌기둥이 눈길을 끈다. 1944년에 일본인들이 세운 것으로 원래는 구룡포항을 조성하는데 기여한 일본인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떠난 뒤 주민들이 시멘트로 발라 기록을 덮어버렸다가 1960년에 충혼각을 조성하면서 그 과정에 도움을 준 후원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맨 꼭대기에는 포항지역 출신 전몰군경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충혼탑충혼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아래 단에는 구룡포를 형상화한 아홉 마리의 용()이 커다란 조형물로 다시 태어났다. 일제 때 공원을 만들면서 신사와 함께 세웠다는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十河彌三郞 頌德碑)’도 보인다. 구룡포 방파제 축조와 도로개설에 관여한 사람이라는데 주민들이 시멘트로 덧칠을 해버려 비문의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공원에서 내려와 이번에는 일본인 가옥거리로 향한다. 구룡포 공원을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으로 길이 나 있는데 난 오른쪽 골목만 둘러보기로 했다. 구룡포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조용한 어촌마을이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일본인들이 구룡포 앞바다에 항구를 열었다. 큰 배가 정박할 곳이 생기자 일본인 어부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항구 주변에는 일본인들의 집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본인 거리의 시작이다. 거리에는 쭉 늘어선 일본식 목조건물과 함께 과거의 사진이 붙어 있어 현재와 과거의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거리가 끝나갈 즈음에는 구룡포 근대역사관도 만날 수 있었다. 일본인 유지였던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2층짜리 목조건물을 개조한 것이라는데 시간이 없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아니 부부와 딸들이 기거하던 침실과 녹슨 재봉틀, 부엌 등 당시 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다는 정보가 흥미를 잃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리를 빠져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리곤 해파랑길의 시그널을 따라 트레킹을 이어간다. 이 길은 얼마 전 KBS-2TV에서 방영했던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라고 한다. ‘사랑하면 다 돼!’로 대변되는 이 드라마는 공효진과 강하늘의 생활밀착형 치정 로맨스를 그렸는데 23.8%의 최고시청률을 기록했을 정도로 인기를 탔었다. 그래선지 이곳 구룡포가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임을 알리는 현수막을 곳곳에 설치해 놓았다. ! 그러고 보니 아까 구룡포공원의 계단에서 보았던 인생 샷을 찍던 커플들도 이 드라마의 영향을 받았던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탐방로는 해안(이정표 : 구룡표 주상절리 1.85, 관풍대 2.65/ 근대 문화역사 거리 0.35)에 이른다. 바다와의 첫 만남인데 탐방로 오른쪽으로 파란 동해바다가 넘실거린다. 왼쪽으로는 그 바다를 마당삼은 소박한 집들이 일 나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탐방로는 이후부터 해안도로를 따른다. 전체 구간의 90% 정도를 바다를 끼고 걷는데 해파랑길 표식(이정표 및 고유의 리본)과 함께 호미반도 해안둘레길표식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길 찾기가 수월하다.



탐방로는 포항과기고맞은편 구룡포리 어촌계 공동작업장 오른쪽 길을 따라 내려간다. 이어서 대현수산(KBS-2TV의 생생정보에 소개된 대게 맛집이란다)을 옆구리에 끼고 모퉁이를 돌아서자 왼편 언덕에 걸터앉은 하얀 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사라말 항로표지관리소이다. 이곳 사라말 주변은 구룡포항으로 입출항하는 선박의 위치를 바꾸는 중요한 지점이다. 그런데 위의 사진에서 보았듯이 노출 및 간출암, 천소(淺小 : 얕은 곳) 등이 산재하고 있어 크고 작은 해난사고가 잦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외형일지라도 등대가 들어서야만 했던 이유일 것이다. ! 맞은편 바다의 수중암초 위에도 똑 같은 목적의 등표(燈標) 하가가 들어서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조금 더 걷자 자그마한 모래사장(이정표 : 주상절리 1.15/ 근대역사문화거리 1.05)이 나온다. 고운 모래사장이 깔려있는가 하면 공중화장실 말고도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조망대까지 지어진 걸로 보아 해수욕장이 분명한 것 같은데 이름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만났던 등대의 이름이 사라말(沙羅末)’이었던 걸로 보아 사라끝이라는 마을일지도 모르겠다. 모래사장이 있다는데서 유래된 마을이 곧 사라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마을은 용주리로도 불릴 것이다. 마을 지형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모래해변이 끝나갈 즈음 다소 헷갈리는 상황과 맞닥뜨린다. 도로는 왼편으로 나있는데 해파랑길 표식은 바닷가로 내려서라는 것이다. 길은 물론 흔적도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갈밭으로 내려서서 잠시 걸으니 여느 바닷가와는 확실히 다른 특이한 지형이 눈앞에 펼쳐진다. 온통 울퉁불퉁한 바위 밭인 것이다. 용암이 흘러내리고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이 깎고 다진 때문이라는데 태고의 모습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한 모양새이다. ! 이곳 바위지대를 걸을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바위가 평평해서 파도가 거칠어도 사람이 걸어 다니는 데 문제가 없지만 간혹 미끄러운 바위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너른 바위지대에는 흡사 밭의 고랑이라도 되는 양 군데군데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 어떤 것은 폭까지 제법 넓다. 이곳 구룡포는 용()의 전설이 곳곳에 배어있는 곳이다.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두어 개쯤은 너끈히 찾아낼 수도 있을 것도 같다.



바위 밭을 지나면 400m 길이의 백사장을 갖고 있다는 구룡포해수욕장(이정표 : 관풍대 1.1/ 근대문화역사거리 1.90)이다. 여름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는 반달 모양의 해수욕장이지만 겨울철이어선지 텅 비어있다. 아니 사람 대신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놀고 있다. ! 아까 지나왔던 사라말해변의 끄트머리에서 바닷가 대신 도로를 따랐을 경우 새골이라고 적힌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구룡포해수욕장이 위치한 마을의 이름일 것이다. 200년 전 이 마을이 생겨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놓은 이름이 새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신리(大新里)’이다. 1942년 읍으로 승격되면서 마을을 크게 번창시킨다는 의미로 고쳐 부르게 되었단다.



구룡포해수욕장을 지나자 바닷가 언덕 위에 만들어진 작은 공원이 길손을 기다린다. 방금 지나온 구룡포해수욕장은 물론이고 북쪽으로 삼정리 주상절리까지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멋진 전망대다. 공원에는 그늘막(겨울철이어선지 막은 걷혀있었다)과 벤치도 놓아두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관을 여유롭게 살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단애(斷崖) 아래로 주상절리(柱狀節理, columnar joint)’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하지만 내 눈에는 주상절리의 모양새가 그려지지 않는다. 그동안 보아오던 주상절리들과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느낌을 옮겨본다. <이곳에서는 방사형, 부채꼴 등 다양한 방향의 절리가 관찰되지만 가장 우세한 것은 역동적인 사선의 주상절리다. 그것은 화산이 폭발해 용암이 분출되던 바로 그 순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주상절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말고도 바닷가로 연결되는 데크계단도 설치했다. 제주도나 경주의 양남리에 있는 주상절리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규모이지만 직접 내려가 주상절리를 만져볼 수 있다는 게 무척 매력적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제 흘러내린 용암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면서 굳었다는 사각형의 바위를 만나볼 일만 남았다.



주상절리를 지났다싶으면 곧이어 삼정리(三政里)’가 나온다. 1리에 해당하는 범진과 2·3리에 해당하는 삼정 등 2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범진(凡津) 마을을 먼저 만나게 된다. 원래 지대가 낮았던 이곳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바닷물이 자주 범람했다고 한다. 그런 곳에 위치한 나루터라고 해서 범진또는 범늘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나루터가 넓다는데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으니 참고해 두자.



마을에는 포구가 들어서 있다. 삼정리에는 이곳 말고도 두 개의 항구가 더 있다. 삼정리가 세 개의 행정마을로 나뉘어 있으니 마을마다 독자적인 포구를 거느리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나 지도에 표기된 삼정항2리에 있는 항구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포구를 지나자 너른 백사장이 펼쳐진다. 삼정해수욕장으로 트레킹을 시작한지 50분이 지난 지점이다. 이 해수욕장은 깨끗한 바닷물과 완만한 경사가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마을의 고깃배들이 잡아오는 싱싱한 수산물의 맛이 일품이란다. 이어서 탐방로는 삼정2에 있는 삼정항을 지난다. 삼정리에 위치한 세 개의 항구 가운데 가장 크다고는 하지만 자그만 어선 몇 척이 정박해있는 한적한 항구이기는 매한가지다.



삼정항을 지나자마자 동쪽 바다에 들어선 바위섬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관풍대(觀風臺)라고 하는데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삼정섬으로도 불리는 이 섬은 소나무가 울창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바람 맑고 달 밝은 밤이면 신선(神仙)이 놀았다는 옛 얘기를 품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섬 입구에 들어선 카페(’Point‘라는 이름으로 포항의 hot place로 자리 잡았단다)’를 찾은 손님들과 갯바위에 터를 잡은 강태공들이 옛날의 신선들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밖의 경관은 보잘 것이 없으니 일부러 들어가 볼 필요는 없겠다는 얘기이다.



잠시 후 탐방로는 삼정(三政)’ 마을을 지난다. 옛날에 3정승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혹은 삼정승을 지낸 분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하나의 자연부락인 이 마을은 2리와 3리로 나뉘어져 있다. 그만큼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선지 2리에 이어 3리에도 항구가 만들어져 있었다.



전망 좋은 바닷가에 자리한 지중해풍의 건물(포스코 패밀리수련원)을 지나면 석병리 땅이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두일포라는 마을 표지석의 뒤를 받쳐주고 있는 작은 바위봉우리가 시선을 붙잡는다.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드러낸 채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기 때문이다. 굵거나 가는 뿌리가 서로의 몸을 휘감은 채 흙 밖으로 코를 내민 채, 안간힘을 다해 수액을 빨고 있는 게 하도 집요해서 처연함마저 들게 만든다.



석병리(石屛里)는 두일포(斗日浦)와 석병(石屛)이라는 두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탐방로는 그 가운데 1리인 두일포(이정표 : 다무포 고래마을 4.95/ 관풍대 1.1)부터 지난다.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인 송시열이 장기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이곳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는데 이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마치 말()을 엎어놓은 것 같고, 마을 앞의 나루터가 일()자형을 이루고 있다 해서 두일포(斗日浦)라 부르게 했단다. 흔히 들포라고도 하는데 이는 두일포를 빨리 부를 때 나오는 음()이라니 참고해 두자.



두일포 포구를 지난 탐방로는 들포회가든을 왼쪽에 낀 오르막길로 변한다. 이어서 개설된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비포장길을 따른다. 오른편에 들어서 있는 양식장을 피해 길을 새로 내놓은 모양이다.



길가에 세워진 이정표(한반도 동쪽 땅끝마을 0.30/ 관풍대 1.65)를 발견하고 앞서가던 일행까지 불러들여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한반도의 동쪽 땅 끝에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는 기사(記事)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양식장뿐이다. 그 뒤의 갯바위에도 조형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언덕배기를 넘은 탐방로는 다시 포장도로로 내려선다. 그리고 200m 남짓 더 걷자 또 다른 양식장을 만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양식장을 통과해야 한반도 동쪽 땅 끝표지석을 만날 수 있는데 금()줄이 쳐져있는 게 아닌가. 사유지라는 것이다. 앞에서 거론했던 기사에서 주인장의 양해를 얻어 안으로 들어가 봤다고 했기에 찾아봤지만 주인장은커녕 종업원도 눈에 띄지 않는다. 궁리 끝에 일단 금줄을 넘고 본다. 나중에라도 만나면 양해를 구할 요량으로 말이다. 낚시꾼들 몇과 가족으로 보이는 관광객들 몇이 안에 보이는 것을 보면 나 말고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양식장의 둑을 통과하자 갯바위 지대가 나온다. 한반도의 동쪽 땅 끝이다. 끝이라는 단어가 가진 묘한 울림 때문인지 바라보이는 하늘이 더없이 푸르고 바다는 한없이 고요하다. 동해가 열려 내가 마치 망망대해로 나온 것 같다. 그리고 그곳에 지구본 모양으로 생긴 한반도 동쪽 땅 끝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석병리에 위치하며 동경(경도)129.35.10에 북위(위도)36.02.51이란다. 호랑이 꼬리 가운데서도 가장 동쪽에 있다고 보면 되겠다.




땅끝을 지나면 이번에는 2리인 석병(石屛)’ 마을이다. 마을을 끼고 있는 긴 해안선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으로 되어 있는 곳이 많아 마치 병풍을 세워 놓은 것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그래선지 바다에는 크고 작은 갯바위들이 널려있다시피 했다. 두일포에서 이곳 석병마을까지는 30분이 걸렸다.



석병 마을을 지나면 솔숲 사이로 난 오솔길(이정표 : 다무포 고래마을 1.85/ 땅끝마을 2.25)을 걷기도 한다. 솔가리가 수북이 쌓여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거기다 주변에 널린 기기묘묘한 갯바위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석병리에 있다는 성혈바위는 구경하지 못했다. 탐방로에서 비켜나 있었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성혈(性穴)이란 선사시대 신앙의식의 하나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을 말한다. 원형은 태양, 여성의 성기, , 구멍 등으로 상징되며, 당시 인구 증가에 따른 생산량 증대의 필요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갯바위에선 강태공들이 낚시에 한창이다. 지금은 학꽁치가 많이 잡히는 철이라고 한다. 물결이 잔잔해선지 그 숫자가 꽤 많다. 하긴 거센 파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게 강태공들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용기에 비해 수확은 별로인 모양이다. 입질이 좋으냐는 내 질문에 손사래를 치는 걸 보면 말이다. 챔질을 해대는 알찬 풍경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솔길이 끝나면 또 다시 아스팔트도로를 만나게 되고, 곧이어 나타나는 구룡포읍과 호미곶면의 경계인 강사1를 건너면 탐방로는 다시 해안가로 향한다. 호미곶면 관내인 강사리(江沙里)로 들어선 것이다. 다무포와 강금리, 새기, 송림촌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탐방로는 그중 다무포(多無浦)’를 먼저 만나게 된다. 석병마을을 지난 지 20분 만이다.



마을 앞을 지난 탐방로는 몽돌이 깔린 바닷가로 내려선다. 이어서 해안선을 따라 내놓은 데크로드(이정표 : 다무포 고래마을 0,80/ 땅끝마을 3.30)를 따른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을 따라 나있어 눈이 호사를 누리는 구간이다.



중간에 만들어놓은 전망데크는 그런 아름다운 경관을 가슴속 깊이 담아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데크로드가 끝나면 지중해풍으로 지어진 라메르(La Mer) 팬션의 예쁘장한 건물들이 나타나고 곧이어 탐방로는 시골 마을치고는 규모가 큰 다무포(多無浦)로 들어선다. 조선 말엽, 회산 감() 씨가 정착하면서 외진 곳에 숲만 무성하고 없는 것이 너무 많다고 해서 다무포라는 이름으로 풍자했다는 마을이다. 계곡어귀에 나무가 많다고 해서 다목포’(多木浦), ‘다목계’(多木溪)라 부르기고 했단다.



포구에 지어진 2층짜리 회관에는 다무포 고래마을이라는 이름표와 함께 고래의 로고(logo)를 붙여놓았다. 이곳 다무포앞바다가 고래의 서식지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나저나 없는 것이 너무 많다는 마을 이름(多無)과는 달리 고래잡이가 성행할 때는 다 들고 오지 못할 만큼 고래가 많이 잡혔다니 아이러니라 하겠다.




길을 걷다보면 과메기를 손질하고 말리는 공장이 심심찮게 보인다. 과메기의 본고장인 포항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과메기의 배를 따고 내장을 정리하고 씻는 것까지 기계가 다 알아서 한단다. 사람들은 그저 과메기를 다듬는 기계 입구에서 칸마다 과메기를 정돈해 놓아두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손질된 과메기를 바람과 햇볕이 잘 드는 바닷가에서 3일 동안 말린다. 온도가 올라가거나 바람이 없으면 과메기의 제 맛이 나지 않으므로 한겨울에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말려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요즘은 보통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과메기를 만드는데 1년 중 가장 추운 12월 말부터 2월초 사이에 먹는 맛이 최고란다. 제철에 찾은 덕분에 비록 양은 적었지만 과메기 맛을 볼 수 있었다. 트레킹 도중 사갖고 온 일행들이 안주삼아 먹으라며 몇 점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완만한 곡선의 해안도로다. 화산 폭발의 여파가 여기까지 미친 것일까. 바닷가에는 주상절리의 흔적처럼 보이는 바위들이 심심찮게 나타난다.



고래마을 회관을 출발한지 20분 만에 ‘2 새기(沙基)’ 마을에 도착했다. 1590년 경, 충주 지()씨와 달성 서()씨가 처음 만들었을 때만해도 마을 이름은 사지리’(沙只里)였다고 한다. 마을 앞에 큰 모래더미가 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러다가 사지(沙只)가 와전되면서 새기라 부르게 되었단다. 참고로 이 마을에서는 1981년부터 3년 주기로 호환(虎患)을 없애는 범굿을 행해오고 있으며 약 370여년 수령의 곰솔(보호수 11-18-14)이 있는 제당은 포항시 민속신앙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에는 이 지역 출신인 박광훈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었다. ’내 고향(故鄕) 강산(江山)라는 시인데 고향을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도 있듯이 인간에게 고향은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의 대상일 것이다.



새기마을을 벗어나자 또 다른 데크로드(이정표 : 호미곶관광지 3.1/ 고래마을 2.15)가 길손을 맞는다. 도로가 끊긴 절벽을 이은 데크길은 바다와 거의 맞닿아 있다. 발아래로 파도가 세차게 와서 부딪히는 모습이 가히 달력 그림이다. 숲을 이루고 있는 주변 기암괴석들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쏠쏠한 구간이다.




데크길이 끝나는 곳에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관을 쓴 선비 같은 관암, 매 같은 매바위, 까만 흑암, 노란 황암으로 수놓인 이 근처의 바다를 소개하고 있었는데 어떤 바위를 이르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데크길을 내려서자 해국(海菊) 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철, 사위는 온통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풀들 일색이다. 길가에 세워놓은 해국 자생지안내판을 보고 나서야 그중에 해국의 시체가 섞여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탐방로는 또 다시 해안도로를 따른다. 호미곶이 가까워지고 도로 이름도 해맞이로로 바뀐다. 그리고 해맞이로가 호미곶길로 바뀌면 걷기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해맞이로를 따른 지 30분 만에 대보1(大甫一里)에 도착했다. 호미곶면의 소재지인 대보리로 들어선 것이다.




트레킹날머리는 호미곶광장(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대보1리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더 걷자 하얀색 등대와 바다에 솟은 상생의 손이 보이기 시작한다. 새해가 되면 어느 곳보다 분주한 곳으로 해파랑길 14코스는 이곳에서 끝을 맺는다. 호미곶(虎尾串)은 소위 말하는 호랑이의 꼬리. 조선 명종 때의 풍수지리학자 격암 남사고는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칭송했고, 육당 최남선은 일출이 가장 멋진 조선10경으로 꼽았다. 호미곶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상생의 손이다. 인생 샷을 남기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다. 이밖에도 해맞이광장에는 영일만 호미곶 일출 불 씨와 또 다른 상생의 손’,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연오랑 세오녀상등이 있다. 또한 새천년기념관에서는 포항의 역사를 비롯해 포항바다의 화석들을 둘러볼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총 3시간 3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5.82, 구룡포공원을 둘러보느라 0.5정도를 더 걸었던 모양이다.


해파랑길 33코스

 

여행일 : ‘19. 12. 7()

소재지 :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북평동·송정동·전곡동·부곡동·발한동 일원

여행코스 : 추암해변전천동해역감추사한섬해변하평해변묵호역묵호항(소요시간 : 16.11/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추암해변에서부터 묵호역까지 동해 시내를 지난 후 해안을 따라 걷는 코스로, 거리는 총 13.3km 정도가 된다. 하지만 우린 묵호항까지 연장해서 걸었다. 거기다 마음에 드는 해안까지 오르내리다보니 총 거리는 16.11로 늘어나 버렸다. 그건 그렇고 해파랑길 33코스는 동해 시가지를 통과해야 하는 등 삭막한 풍경이 펼쳐지는 구간도 있으나 대부분은 바닷가를 따른다. 덕분에 크고 작은 해안절벽과 갯바위들이 푸른 동해바다와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경관을 눈에 담으며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한마디로 보는 재미가 쏠쏠한 코스라 하겠다. 그래선지 조망이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벤치나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툭 트인 바닷가 오픈스페이스에서 바다를 조망하는 여유를 가져보라는 배려였을 것이다. ! 해파랑길 스탬프보관함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묵호항의 번화가로 들어서기 전, 그러니까 묵호역에 이르기 바로 전에 만들어져 있다는데 이게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똑 같은 전철을 밟았다. 33코스의 종점으로 지정되어 있는 묵호역이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길이 나있으니 미리 알아두지 않은 이상 어떻게 찾아낼 수 있겠는가.

 

33코스의 시작점은 추암조각공원 주차장(동해시 추암동 474-4)

동해(속초-삼척)고속도로 삼척 IC에서 내려와 38번 국도를 타고 강릉방면으로 올라오다 단봉삼거리(동해시 단봉동 265-2)에서 우회전한 후 7번 국로를 따라 삼척방면으로 내려온다. 이어서 공단삼거리(동해시 대구동)에서 빠져나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추암조각공원이 나온다. 공원에 마련된 주차장은 해파랑길 33코스의 시작점이자 동해시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해파랑길 안내도와 스탬프보관함은 주차장에서 추암역으로 올라가는 육교의 하단 근처에 설치되어 있다.




삼척선 철로의 아래를 통과하는 굴다리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굴다리 위로 지나가는 삼척선(동해역삼척역)은 시멘트 수송을 목적으로 1944년에 개통된 철도이다. 1991년 여객열차 운행이 중단되었으나 2007년부터 관광열차인 강릉-삼척간 바다열차가 하루 3~4번씩 왕복 운행 중이다. ! ‘추암 철도 가도교라고도 불리는 이 굴다리가 단차선이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그런데도 오가는 차량이 많으니 안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굴다리를 빠져나온 해파랑길은 이제 공단1라는 왕복 6차선의 대로를 따른다. 지금 걷고 있는 33코스는 동해시의 둘레길인 해물금길이기도 하다. 동해시 북단 망상동 기곡마을에서 시작해 최남단 추암동을 잇는 길이 24.4km의 둘레길인데 해물금길이란 해 뜨는 수평선을 의미한단다. 탐방로를 걷는 내내 수평선을 바라볼 수 있다는 자신감일 것이다.



그렇게 잠시 걷자 동해자유무역지역관리원(東海自由貿易地域管理院)‘ 건물이 나온다. 자유무역지역이란 관세법과 대외무역법 등 관계 법률에 대한 특례와 지원을 통해 자유로운 제조와 물류유통 및 무역활동 등을 보장하기 위하여 지정한 지역을 말한다. 이 자유무역지역에 입주해 있는 기업의 발전에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고, 관세유보와 조세감면, 물류비 제공 등의 인센티브를 통해 맞춤형 One-Stop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설립된 기관이 곧 자유무역지역관리원이다. 그리고 저곳에서는 현재 나의 옛 동료들이 근무하고 있다. 90년대 초반 이리수출자유지역관리원에서 근무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은 수출입국(輸出立國)에 일조했다는 자부심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



▼ 석탄 수송을 위한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가 도로를 가로지르는가 싶더니 이내 동해화력발전소(東海火力發電所)가 웅장한 그 자태를 드러낸다. 하지만 굴뚝에는 응당 피어올라야 할 연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가동을 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대로(공단1)를 따르던 해파랑길은 동해화력발전소 앞에 이르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3분이 지난 지점인데 들머리에 이정표(동해역/ 추암해변)는 물론이고 해파랑길 표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산행대장 얘기로는 도로를 따라 곧장 진행해도 된다고 했다. ‘동해팔경가운데 하나인 할미바위를 보여주기 위해서 길을 에둘러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이상 해파랑길을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름다운 풍광을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이제 탐방로는 하수·폐수종말처리장을 오른편에 끼고 걷게 된다. 코끝을 움켜쥐고 걸어야 할 만큼 악취가 심하니 해파랑길 33코스 가운데 가장 힘든 구간이라 하겠다. 자신도 모르게 빨라지는 발걸음으로 5분쯤 더 걸으니 탐방로가 조양산자락으로 파고든다. 그리곤 오른편에 해안경계용 철조망을 낀 오솔길을 따른다.



철조망을 따라 13분쯤 진행하자 동해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동해팔경(東海八景)’ 가운데 하나라는 할미바위. 이 바위는 어떤 심술궂은 사람이 힘자랑을 하느라 건들건들 노는 바위를 떠밀어 바다 속에 떨어뜨리자 마귀할미가 앞치마에다 바위를 싸가지고 다시 그 자리에 얹어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할미바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바위의 생김새가 우리네 할머니의 질박하고 자애로운 얼굴 모양으로 생긴 것 같기도 하다. 참고로 동해팔경은 저 할미바위 외에도 능파대(촛대바위)와 용추폭포, 무릉반석, 망상 명사십리, 천곡천연동굴, 만경대, 호해정. 초록봉 등이 있다.



할미바위 앞에는 포토죤으로 안성맞춤인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벤치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비스듬하게 놓인 나무계단을 100m쯤 내려서자 호해정(湖海亭)’이란 정자가 나온다. 이 또한 동해팔경 가운데 하나이다. 이 정자는 해방의 기쁨과 조국광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1947년 봄에 지역 주민들이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호해정을 동해팔경의 제 일경으로 꼽고 있는 옛 문헌이 있는 걸로 보아 옛날에도 호해정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채로 말이다.



전천 강변으로 내려서서 조금 더 걷자 만경대(萬景臺)’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왕복 1나 되는 거리여서 선뜻 들어설 수가 없다. 함께 걷고 있는 지우(知友) 형우군과 묵호항에서 반주 삼아 회를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1시간 정도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술자리를 가져야 하는데 그 소중한 시간에서 어찌 30분이나 떼어낼 수 있겠는가. 아쉬운 마음에 관광공사에서 사진을 찾아 올려본다. 만경대는 1613(광해군 5)에 첨정(僉正)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김훈(金勳)이라는 이가 건립한 정자로, 김훈은 이 정자에서 소요하며 말년을 보냈다 한다. 정자 서쪽으로는 두타산, 동쪽으로는 동해항, 아래로는 동해시의 젖줄인 전천(箭川)이 굽이쳐 흘러 삼척의 죽서루와 쌍벽을 이루는 경관을 자랑해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한다. 1660(현종 원년) 문신이자 학자인 미수 허목(許穆)이 주변 경관에 감탄하여 만경(萬景)’이라 하였는데 그 후부터 만경대라 불렀단다.



이제 해파랑길은 오른편에 전천(箭川)을 끼고 걷게 된다. 신흥골짜기에서부터 내려오는 신흥천과 두타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삼화동에서 합류하여 동해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강으로 산업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취병산 앞으로 흐르는 냇가에서 천렵도 가능했다고 한다. 수량이 점차 줄어들면서 흉물스럽게 변해있던 것을 시()에서 환경 개선사업을 펼친 덕분에 이젠 시민들의 안락한 휴식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단다. 참고로 전천은 임진왜란 당시 피아가 쏜 화살이 강물을 타고 흘러내렸다고 하여 화살 전()자를 붙였다고 전해진다.



전천 강물과 동해의 바닷물이 만나는 갯목으로 고개를 돌리자 쌍용시멘트 공장이 그 장대한 시설을 눈앞에 펼쳐놓는다. 저 공장은 변변한 일자리가 없던 60~70년대 동해시민에겐 최고의 일자리였고 지금도 변함없이 좋은 직장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일생을 한곳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자식들을 가르치고 행복을 추구했던 사람들이라면 끊임없이 돌아가는 저 공장설비가 마냥 미더울 것이다.



강변길을 따라 30분쯤 걷자 전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아니 상판을 나무로 연결시켰으니 목교(木橋)라고 부르는 게 더 옳겠다. 징검다리 근처 강기슭엔 갈대가 무성하다. 저런 곳이 있으니 물고기가 돌아왔을 게고 그 물고기를 쫓아 철새들이 찾아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오리 몇 마리가 고개를 내민다. 전천강 생태계 복원사업이 성과를 거두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반대편 강변에 이르니 예쁜 나무담장이 눈길을 끈다. 아니 그 위에 꽂혀있는 바람개비가 더 눈길을 끈다. 아까 반대편 강변에서는 공공기관이 만들어 놓은 바람개비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화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더니 이곳에서는 개인의 노력으로 그 아름다움에 정점을 찍고 있다. 주인장의 고상한 취미는 그것으로도 모자랐나보다. 담장 위에 동글납작한 조약돌들을 올려놓아 바람개비와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반대편 강변을 따라 두타산을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던 탐방로가 3분쯤 되는 지점에서 교각(橋脚) 아래로 파고든다. 그리곤 몇 번을 구불대더니 이내 왼편 옆구리에다 철로(鐵路)를 끼고 동해역으로 달려 나간다. 길이 넓고 또렷한데다 이정표와 리본 등 해파랑길 표식들이 곳곳에서 손짓하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행여 다리라도 아플라치면 길가에 만들어놓은 쉼터에서 쉬어가면 될 일이다. 느긋하게 걸어도 좋겠다는 얘기이다. 다만 눈에 담을만한 멋진 풍광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흠이라 하겠다.



그렇게 20분 남짓 걷자 시가지가 나오는가 싶더니 발길은 이내 동해역(옛 이름은 북평역)에 이른다. 영동선이라는 간선에 묵호항선과 삼척선, 북평선 등 지선이 세 개나 뻗어나가는 철도교통의 중심이 되는 역이다. 하지만 이층으로 지어진 붉은 색 벽돌집은 한 시()의 이름이 붙은 역이라기엔 참 작고 소박하다. 쉼터가 만들어져 있는 역사 앞도 한적하기는 매한가지다. 한적한 역과 역 앞의 거리는 세월이 그렇게 천천히 쌓이고 있었다.



해파랑길은 이제 왕복 4차선 도로를 왼편에 끼고 이어진다. 이 부근은 러시아어로 적힌 간판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러시아 음식을 파는 식당도 보인다. 인근에 있는 동해항에 러시아 선박들이 자주 들어온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8년쯤 전 톰스크공대의 신기술 관련 세미나에 참석하러 갔다가 맛있게 먹었던 양고기 구이 생각이 나 한번 들러볼까도 생각했지만 이것 역시 그만두기로 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묵호항에서 갖게 될 회 잔치가 더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동해시 구간의 해파랑길도 정비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탐방로 대부분이 도로와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걷는 이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어도 될 만큼 널찍하기까지 하다. 길을 만들기 여의치 않은 곳은 데크로드나 계단을 놓아 보행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했다. 특히 다른 지역들과는 다르게 제작된 이정표가 돋보였다. 지금 걷고 있는 지점이 해파랑길 50개 코스 가운데 몇 번째인지를 알 수 있도록 그 숫자를 적어 놓았는가 하면, 동해시 자체에서 조성한 둘레길의 이름까지 함께 적어 넣는 등 탐방객들을 위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넌다. 오가는 차량이 제법 되기에 눈치를 보지만 멈추어주는 차량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는 사람이 먼저인데..’ 유럽 쪽 여행에 이력이 붙어가는 집사람의 입에서 한숨 섞인 넋두리가 튀어나온다. 나도 공감이다. 잠시 후 동해체력장이란 표지석이 세워져있는 작은 공원이 진행방향을 가로막고 있다. 용정 해안마을 사람들의 이주(移住) 역사를 담은 유허비(遺墟碑) 외에도 ‘88올림픽 기념비등 의미가 없어 보이는 빗돌들이 여럿 세워져 있다. 이곳에 들어선 해군체력장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내준 용정마을을 잊지 않기 위해 마련된 소공원이라고 보면 되겠다.



공원 앞에서 방향을 틀면 명사십리 망상오토갬핑장으로 가는 길임을 알리는 굴다리가 나오고 이어서 탐방로는 도로변을 떠나 오솔길로 들어선다. 도로와 철로 사이의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선 탐방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길가에 벤치는 물론이고 정자까지 지어놓아 나그네들의 쉼터로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자작나무나 수양벚나무 등 관상용의 나무들을 식재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지금은 한겨울로 들어가는 길목, 붉게 물든 산수유와 피라칸타(firethorn)의 열매가 보는 즐거움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에 취해 걷는데 나이스 샷!’이라는 골프장에서나 쓸 법한 환호성이 들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려보니 골프장 하나가 아름다운 동해 바닷가를 독차지하고 있다. 해군의 동해 체력단련장이란다. 이제야 고개가 끄덕여 진다. 아까 굴다리를 지나기 직전에 만났던 유허비의 체력단련장이란 골프장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골프장을 체력단련장이란 용어로 고쳐 부름으로써 곱지 않게 볼지도 모르는 시선을 잠시 피해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걷자 감추사(甘湫寺)’라는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절이라는 귀띔이 있었기에 주저 없이 가보기로 한다. 특히 해수관세음보살 봉불용왕각 개축이라는 현수막까지 내걸려 있는데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운이라도 좋으면 맛있는 음식이라도 대접 받을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튼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인 감추사는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창건했다는 석실암(石室庵)’에서 유래한다. 현재의 사찰은 폐허로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60년대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화공주는 신라 진성여왕의 셋째 딸로 서동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와는 다른 인물이라니 참조해 두자. 이왕에 시작했으니 옛 설화로 들어가 보자. 당시 선화공주는 큰 병을 앓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스님이 동주 감추에서 치성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고 한다. 동주는 지금의 동해 지역. 감추의 석굴에서 3년을 간절히 기도한 선화공주는 병이 깨끗하게 나았고 공주가 그 자리에 만든 절이 감추사라는 것이다.



오른편 언덕을 내려가 철로를 건넌 다음 솔숲 길을 잠시 걷자 감추사(甘湫寺)’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감추사는 관음전과 삼성각, 용왕각, 요사채가 전부인데 저마다 바위 틈새에 교묘하게 들어앉았다. 바람 센 날, 사찰 벽에 파도가 부딪힐 정도로 바다와 가깝다는 특징도 있다. 참고로 바닷가에 들어선 절들은 관음도량이 대부분이다. 바닷가에 관음보살이 상주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이곳도 역시 관음전(觀音殿)이 본당 노릇을 하고 있다. 봉불(奉佛) 의식을 행하고 있는 해수관세음보살도 여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 이 경내 전각들 가운데 용왕각기도 발이 엄청 좋다니 간직하고 있는 바람이라도 있다면 한번쯤 빌어볼 일이다.



관음전 앞에서는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앞에서 얘기했던 용왕각 낙성식을 기념하기 위해서란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보살님들이 차라도 한 잔 들고 가라며 소맷자락을 붙잡는다. 비빔밥도 맛있다며 요사채로 들어가길 권한다. 시간이 없다고 사양했더니 가시는 길에 드시라며 떡을 한 봉지 싸 주시는 게 아닌가. 진정한 보시(布施)’를 보는 것 같아 즐거웠다. 이렇게 따뜻한 일상을 매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해안가로 내려가니 100m 남짓 되는 작은 규모의 해변이 나온다. ‘감추사아래에 있다고 해서 감추해변이라 불리는데 바위가 많아 물놀이보단 풍경 감상에 더 적합한 곳이다. 하지만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파 탓인지 바닷가에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들이 전부였다.



15분 만에 해파랑길로 되돌아와 탐방을 이어간다. 탐방로는 이제 완전한 솔숲으로 변한다. 그것도 20~3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송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다. 코끝으로 파고드는 솔향에 반해 발걸음을 잠시 멈춘다. 그리곤 복식호흡(腹式呼吸)을 해본다. 이내 피로가 가시면서 심신은 한없이 맑아져 온다. 피톤치드(phytoncide)의 영향일 것이다.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소나무가 아니겠는가.



10분쯤 더 걷자 탐방로가 도로와 해어지잔다. 그리곤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오른편으로 한섬해변이 길게 펼쳐진다. 하지만 공사 가림막으로 가려져있어 화장실을 찾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그렇게 들어간 한섬해변은 규모는 작지만 고운 모래사장이 길게 뻗어 있어 물놀이를 즐기기에 딱 좋은 해안이었다. 그렇다고 정식으로 개장한 해수욕장이 아니라는 점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해양구조대 등 관리자가 상주하지 않으니 안전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얘기이다. 또한 일몰 이후에는 해변으로 들어가는 문을 걸어 잠근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망상해수욕장이나 추암해수욕장 등 큰 규모의 해수욕장이 인근에 있어 비교적 눈길을 덜 받는 한섬해변은 이른바 아는 사람만 아는동해의 숨은 명소라고 한다. 해변은 오른편으로는 감추산이, 왼편으로는 한섬방파제가 감싸고 있는 모양새다. 해변 양끝에 추암해변에서 보았던 촛대바위와 비슷한 원통 모양의 바위가 하나씩 서 있어 신비한 느낌도 든다.



해파랑길로 되돌아오니 탐방로는 이제 해안가 솔숲 사이를 헤집으며 나있다. 오른편에 끼고 있는 동해바다는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것도 개미 한 마리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튼튼하다. 남한혁명기지 구축을 목적으로 울진과 삼척지구에 침투했던 1968년의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아픈 상처이지만 해송이 우거진 솔숲은 쾌적하기만 하다. 함께 걷는 이와 담소를 나무며 걷기에 딱 좋다는 얘기이다.



철조망으로 닫아놓은 해안선을 아쉬워해 보지만 손대지 않은 바다 경관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에 오히려 감사해본다. 그러다가 왼편 산자락에 들어앉은 정자 하나를 찾아낸다. ‘관해정(觀海亭)’이라는데 울창한 솔숲에 둘아싸인 탓에 바다는 보이지도 않는다. 본디 시내 송정동에 있던 정자(옛 이름은 호정 또는 영호정)1975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는데 이왕이면 이름에 걸맞은 곳에 터를 잡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군부대 초소 입구를 지나 동해기도원표지판을 따라 내려가면 고불개 해안에 이른다. 곁에 세워진 이정표(하평해변/ 한섬해변)에는 하평해변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참조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가야만 만나게 되는 고불개해안은 해안에 널린 기암괴석들이 일품인 곳이다. 갯바위에 해초와 이끼류가 자라면서 더욱 환상적인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그 바위들을 파도가 때리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풍경이 가히 장관이다. 산 밑에 홀로 우뚝 선 바위 옆으로 펼쳐진 널찍한 바위자락은 낚시꾼들 사이에선 명소로 소문나 있다. ‘평바위로 불리는데 감성돔 포인트란다. 그래선지 강태공 몇 명이 이미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 오는 도중에 천곡항의 위를 지나기도 했으나 포구까지 내려가 보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었다. 솔숲 사이로 내다보이는 풍경이 보잘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섬해안에서 고불개해안까지는 15분이 조금 못 걸렸다.




고개 하나를 더 넘자 이번에는 가세해변이 나온다. 고불개해안에서 5분쯤 되는 지점인데, 묵호방향의 갯바위 지대가 특히 아름다운 이곳은 높다랗게 쌓아올린 시멘트 축대가 고운 모래사장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탐방로는 물론 축대의 왼편으로 나있다. 백사장에서 낚시 삼매경에 빠져있는 낚시꾼들의 숫자가 꽤 되는 것을 보면 이곳도 역시 바다낚시의 명소인가 보다.



가세해변을 지나자 탐방로는 서슬 시퍼런 절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나있다. 왼편 바로 옆으로 철로가 지나다보니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한 잔도(棧道)를 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데크로 길을 만들어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 그저 바닷가에 널린 절경들을 눈에 담으며 걸으면 될 일이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달리 나타나는 기암절벽들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해파랑길 33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라 하겠다.





서두르지 말라는 듯 전망대로 만들어 놓았다. 이 아름다운 경관을 가슴 속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두라는 모양이다. 저런 배려를 그냥 무시해서는 아니 될 일, 일단은 오르고 본다. 저 멀리 묵호항을 낀 해안선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묵호항으로 향하는 탐방로가 바닷가를 떠나기 싫었던 모양이다. 가는 도중에 모래사장이 고운 하평해변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곳도 역시 묵호항 방향의 끄트머리에 기괴한 생김새의 갯바위들이 널려있어 충분한 눈요깃거리로 작용한다. 또한 물빛이 맑은데다 수심까지 얕아 가족단위의 피서객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단다. 가세해안에서 하평해안까지는 10분이 걸렸다.



해파랑길 33코스는 전체적으로 영동선 철도를 따라간다. 그래서 운이 좋을 경우 테마열차인 바다열차가 철로 위를 달리는 풍경을 볼 수도 있다고 한다. 바다열차란 정동진역에서 삼척역까지 왕복 운행하는 관광열차이다. 중간에 묵호와 동해, 추암, 삼척해변역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원하는 역에서 내려 관광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른 특징도 있다. 바다열차라는 이름답게 바다의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일반 열차에 비해 창이 넓고 크게 나 있고 좌석은 창가를 향해 앉도록 2열로 만들어져 있다. 앞열과 뒷열에 단차가 있기 때문에 뒷열에 앉더라도 창에 가득 차는 동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바다열차를 보는 행운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길을 걷다보면 부곡동 돌담마을 해안숲 공원도 만날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진행된 항만과 철도 등의 개발로 인해 사라졌던 숲을 복권기금으로 조성된 녹색자금을 지원 받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공원에는 두 기의 돌탑 외에도 노천공연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매년 초여름에 열리는 묵호등대 논골담길 축제때 이곳에서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더니 저런 무대가 있었기에 가능했었을 것이다.



하평해안을 떠난 지 15분 만에 묵호항역(墨湖港驛)에 도착했다. 원래 이름은 묵호역이었으나 영동선이 강릉역까지 연장되면서 묵호역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기존의 역은 묵호항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기능도 화물전용 역으로 전환되었단다. 묵호항은 이곳보다 묵호역에서 훨씬 더 가깝다는 점도 기억해두자.



길은 이제 묵호(墨湖)’로 들어선다. 지금은 동 이름이 된 묵호는 유독 물새들이 많이 몰려들어 새도 검고, 바다도 검다고 해서 먹 묵()’ 자를 써서 만든 지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탐방로는 새와 바다 대신 쇠락하고 누추한 마을 풍경만 보여준다. 어느 곳에서는 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은 평수의 집들이 월세방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 예전엔 선원들과 항만에서 일을 하는 인부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런 골목에 술 마실 장소가 없을 리 없다. 이제는 과거의 영화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술집 몇이 골목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잠시 후 탐방로는 시내 중심가로 들어선다. 해파랑길 33코스는 동해시 관내를 걷도록 나있다. 동해시는 1980년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합해지며 만들어진 항구도시다. 옛 북평항은 동해항으로 이름을 바꾸며, 한때 금강산 유람선 출항지로 명성을 떨친 항구다. 묵호항은 삼척 지역의 무연탄을 수송하는 무역항으로 번성했던 항구다. 무연탄 생산도 멈추고 금강산 유람선도 끊긴 항구엔 이제 싱싱한 해산물을 찾아 모여드는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다.



망상해변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삼거리에서는 묵호항 방향이다. 이어서 묵호여객선터미널을 지났다싶으면 묵호항 회센터가 탐방객들의 식욕을 북돋운다. 모처럼 만나는 포구인데 그냥 지나칠 수야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값싸고 싱싱한 횟감이 즐비하다니 말이다. 이곳은 횟감을 사는 곳과 회를 뜨는 곳, 그리고 먹는 곳이 각기 다르다는 특징이 갖고 있다. 그런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 가자미와 오징어회를 챙긴 다음 소주까지도 넉넉하게 준비했다. 그리곤 마땅한 곳에 주저앉아 형우군과 술잔을 나누었다. 미주가효(美酒佳肴)에 오래 묵은 벗까지 더하니 술은 술술 잘도 넘어간다.



트레킹 날머리는 묵호수변공원 주차장

날머리인 묵호수변공원이 바로 옆이다 보니 마음까지도 여유로워졌나 보다. 만취 해버렸으니 말이다. 아무튼 불콰해진 얼굴로 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곤 몇 걸음 걷지 않아 묵호수변공원 주차장에 이르면서 오늘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기존의 33코스 보다 2정도를 더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걷는 데는 4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6.11, 더딘 속도로 걸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만큼 구경거리가 많았다는 얘기도 되겠다.